관음법문 강해
이번 선수련은 겨울 방학 정좌수련입니다.
모든 것음 마땅히 선더의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진정으로 정좌한채 입정한 사람은 불러 깨울 수 없습니다.
몸이 솜처럼 유연하므로 그 사람의 몸을 흔들었다가는
상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것은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초보적으로 정좌를 연습하기 위함이지
선종을 배우로 온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앉는 자세를 정확하게 해야 두 다리의 기맥이 쉽게 통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좌하는 사람들은 두 다리를 꼬고 앉자마자
시큰거리고 저리고 가렵고 땅기고 아프고 차고 덥고하는 등의
신체 내면의 느낌이 발생하는 데 모두 다 병통입니다.
금강경에서 그 마음을 항복시킨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 마음을 항복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섯 시간동안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면
다리의 기맥이 통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 다음으로 생리상의 갖가지 병고 장애들은 어떻게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심리상의 제 6의식과는 어떻게 닦기 시작하여 계정혜의 도과를 증득할 것인지가
이 번 정좌수련과장에서 제가 요구하는 공부방향입니다.
정좌를 처음 배울 때 어떻게 고요함에 이를까요?
여러분들은 일부러 하나의 고요함을 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올바른 자세로 앉아 6근을 쓰지 않습니다.
눈은 밖으로 보지 않고 귀는 밖에서 들려오는 온갖소리를 듣더라도
6근의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여러분과는 별개의 세계가 되어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심리적인 생각 망념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데
이것은 문제입니다.
여러분 잊지마십시오.
일체의 학문수련은 모두 고요함 가운데서 오는 것입니다.
人性은 본래 고요함입니다.
움직임은 후천적 오염입니다.
생각이 오고 가더라도 상대하지도 환영하지도 마십시오.
맞이하지도 말고 거절하지도 말고
낙옆이 땅에 떨어져 저절로 재가 되듯 그렇게 자연히 내버려 둡니다.
여러분이 생각에 주의를 기우리고 싶어 할 수록
도리어 내심의 생각을 흔들거리게 하여
외적인 언어 소리로 표출됩니다.
심신을 통해서 이런 이치들을 깊이 체험하고 철저하게 이해하면서
서서히 관세음보살이 도에 들어갔던 문으로 진입할 것입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러분들은 자기의 망상을 상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거리에는 차량 물결 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제 자신은 밤낮으로 이런 경계속에서 그 소리를 무슨 소리로 여길까요?
海潮音으로 여깁니다.
법화경 보문품에서 법음 해조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그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에 이루어진 것이니 따로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소리가 나는 것은 움직이는 현상인 動相이요
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고요한 현상인 靜相입니다.
동상과 정상은 상대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능히 들을 수 있는 작용 그 자체는
움직이는 현상과 고요한 현상 사이에 있지 않습니다.
움직임을 능히 알고 고요함을 능히 아는 그 본체는
곧 공하여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자연히 옳습니다.
대단히 간단합니다.
그러기에 능엄경에 보면 25분 보살들이 각자 자신의 수행 소감을 보고 하고 나자
문수보살은 이렇게 총결론을 지어 말합니다.
이 사바세계에서의 진정한 교화체계는 소리를 듣는 청정한 기능에 있다.
사바세계 중생은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문을 닦는 것이 제일 좋다고 판단합니다.
이른바 원통이란 이근을 이용하여 소리를 들음으로써 수증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남여노소 다 함께 관음염불법문을 닦아가기 바랍니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심불란하게 염해 가십시오.
염염사이에 관세음보살과 根根이 서로 이어져
저절로 관음보살이 말한 소리 있음의 동적인 현상과
소리 없음의 정적인 현상이 둘 다 일어나지 않는 경계를 몸소 증득하여
듣는 주체인 자성의 흐름으로 들어가
들리는 객체인 소리현상을 잃어 버리는(入流亡所) 경게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관음법문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입니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옥황대제를 숭배하고
그 옥황상제는 최후에 그의 어머니 요지성모를 숭배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보편적으로 신앙합니다.
어느 종교든 모성애를 인간의 인자함과 박애의 구체적 표현으로 여겨
여성 도덕의 전형을 대단히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白衣관음이 대단히 유행했는데
때로는 천주교의 성모마리아와 거의 나눌 수 없었습니다.
불교의 육자대명주인 옴마니반메훔은 바라문에서 전해진 것인데
밀교 수행법에서는 법문을 수행할 때 대부분 열십자를 그립니다.
그리고 밀교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관정을 거쳐야 하는데
마치 서양에서 말한느 세례와 크게 유사합니다.
오늘날 더욱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인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인디언들에게서도
육자대명주가 전해져 오고 있음이 이미 발견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대부터 시작되었는지 고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머리가 아프거나 감기에 들었을 때는
옴음만 외면 땀이 나면서 두통이 치유됩니다.
아음은 흉부의 병을 치료하고 훔음은 위장병을 치료합니다.
이 주문이 전세계에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대비주를 지니면서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해 주는데 대단히 영험합니다.
또한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이라는 두 가지 명호가 나탄내는 의미는
하나일까요? 둘일까요?
하나라 할 수 도 있고 둘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이근원통을 이용하는 수행법이고
관자재보살은 눈을 이용하여 색계의 대광명정을 닦는 것입니다.
인체내부에는 본래 빛이 있습니다.
우주는 원래 빛입니다.
빛과 소리가 이 우주에 충만해 있으며 심지어는 우주 공간에 까지 도달합니다.
우주공간에는 블랙홀이 있는데 검은 색도 빛입니다.
검은 빛 흰 빛, 붉은 빛등은 모두 빛으로서 光波임은 마찬가지지만
그 분자배열이 다를 뿐입니다.
관자재보살은 빛을 닦는 것으로 눈을 이용하여 닦으면서 의식과 결합시킵니다.
관세음보살은 귀를 이용하여 닦으면서 소리와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두 가지 법문을 조금만 닦아 본다면 큰 효과를 보리라 생각합니다.
자연히 마음 속으로 깨닫고 이해하게 되고 신체도 병이 줄고 수명이 늘어나게 되니
그 이로움이 무궁합니다.
이 두가지 법문은 신통비슷한 것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쪽으로 집착하다보면 마도로 걸어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리대도를 일 백층의 빌딩에 비유하면
신통부리기는 2층이상 오르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정중히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은 남녀노소 누구나 漸修의 길을 걸어가야 성취하게 됩니다.
특히 나이 드신 도반은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한 가지 법문을 선정해서 깊이 들어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아야 합니다.
염불삼매를 닦든 대비주를 외우든 육자대명주를 외우든
육묘법문이나 백골관등 어느법문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리 저리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어떤 법문으로도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하는 분이 있다면
관세음법문을 활용하십시오.
지금 폭죽 터지는 소리도 들었는데 폭죽소리가 지나가고 나자 청정해졌습니다.
본래에 청정합니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관음법문이지만 즉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염불을 하든 어떤 수행법문을 닦든 간에 천천히 조용히 돌이켜서
자기 신체 내부의 소리를 들으면 되지 어떤 공부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체 내부에서는 원래 소리가 나는데도 여러분은 왜 듣지 못할까요?
과학적으로 연구해보면
인체혈액의 유동이나 심장의 박동등 신체 내부 소리의 진동은
원자탄 한 개의 폭발 소리 보다도 큽니다.
노자는 말했습니다.
큰 소리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주 운행의 소리는 대단히 크지만
사람들은 습관이 되어버려 도리어 듣지 못합니다.
은하계의 소리가 가장 크지만 우리 인류는 역시 듣지 못합니다.
우리 신체 내부의 소리 조차도 마찬가지로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야 들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잠자기 위해서 베개를 베고 아직 잠들지 않았을 때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마치 만두를 싸듯이 감싸면
심장의 혈액이 유동하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은
고요한 상태에 있을 때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설사 아주 씨끄러운 곳에 있더라도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수행이 이 정도에 이르면 신체상의 전환변화는 상당한 상황까지 도달합니다.
자기 내부의 소리가 공요해지는 것을 천천히 듣노라면
혈액의 유동이나 심장박동 소리도 고요해져 가는데
어느 정도까지 고요해질까요?
신체 내부의 소리 조차도 고요해지면
그 때는 일종의 대단히 기묘한 소리가 출현합니다.
제가 아미산 정상에서 폐관하고 있을 때의 경험입니다.
깊은 밤 조용할 때마다 일어나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아미산 정상에서 정좌했습니다.
천지는 온통 적막하고 난느 새조차도 없는데
그 청정한 경계는 마치 내몸이 넓은 하늘을 노니는 듯 하면서
마음은 편안하고 자재하였습니다.
신선의 경계인양 아주 쾌적할 뿐만아니라
늘 허공 중의 천상의 음악 소리를 들었는데 대단히 미묘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말한 천뢰의 소리가 생각났습니다.
장자가 형용한
시원스럽고 청아하면서도 은은하고 아름다우며 소박한 소리는
정말 들어본 적이 없는 천상의 소리 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관음법문을 닦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틀림없이 성취가 있을 겁니다.
이제 능엄경의 관음원통법문 단락 경문을 인용하면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爾時 觀世音菩薩 卽從座起頂禮佛足 而白佛言
25분의 보살이 한 분 한 분씩 일어나 수행에서 터득한 바를 보고 하는데
이제는 관세음보살 차례가 되어 일어나 스스로 말합니다.
먼저 부처님께 정례하고 난 다음 이렇개 보고 합니다,
世尊 憶念
我昔無數恒河沙劫에 於時有佛出現於世
名觀世音 我於彼佛 發菩提心
제가 이제 회상해보니
과거 무량수겁 이전에 관세음불이 세간에 출현하였습니다.
저는 그 부처님앞에서 자성정각을 증득하겠다는 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彼佛敎我 從聞思修 入三摩地
관세음불은 저에게 문사수라는 세 단계를 통해 수행하여
여래의 正定삼매에 깨달아 들어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初於聞中
저는 문사수로 부터 삼마지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자리에 앉자 이근이 청정하여 자연히 외부의 일체 소리를
심지어 호흡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이런 소리들에 대해 싫어하지도 않았고 일부러 마음을 써서 듣지도 않았습니다.
제6의식에서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니 서서히 고요해지면서
자연히 자기 내부의 생리적인 혈액순환 유동 소리가 들렸습니다.
入流亡所
더 고요해져 가자 들리는 소리를 잊어버리고
능히 듣는 자성의 흐름으로 들어가 들리는 소리 현상을 잊게 되었습니다.
들리는 소리를 잊어버리고 염불소리까지도 사라져 버립니다.
내면의 소리도 사라져 버리고 외부의 소리도 사라져
온통 청정함이 지극한 정도에 이릅니다.
所入旣寂 動靜二相 了然不生
전혀 들리는 것이 없는 적멸 속에서 더 닦아 나아가면
소리 있는 현상인 움직임과 소리가 사라진 현상인 고요함
이 두 가지 현상에 모두 전혀 걸림이 없어면서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一念不生)
우리가 어떤 소리가 나는 것을 귀로 들음은 움직이는 현상인 動相입니다.
들리는 것이 없음을 주의를 기울려 들음은 고요한 현상인 靜相입니다.
정상과 동상은 둘 자 生滅相對法입니다.
도는 동상에도 정상에도 있지 않습니다.
이른바 動靜二相了然不生입니다.
소리가 오면 동상을 듣고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정상을 듣습니다.
우리가 아주 고요한 상태에 있을 때 홀연히 또 소리가 오면
즉시 동상을 들을 경우가 있는데
움직임과 고요함은 現象이 다를 뿐입니다.
동상과 정상을 능히 듣는 것 그 자체는 소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중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리는 도리어 분명히 알면서 움직인적이 없습니다.
움직임이 오면 움직임을 알고 고요함이 오면 고요함을 압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능히 아는 이것은 움직인 적이 없으며
생기하면 서도 생기하지 않고 작용하면서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如是漸增 聞所聞盡
이렇게 더욱 정진해 가면
능히 듣는 작용기능(能聞)과 들리는 작용기능(所聞)이
둘 다 얼음 녹듯이 시원스럽게 남김없이 풀려버립니다.
소리를 능히 듣는 본체 기능과 소리가 들리는 작용이
움직임과 고요함에 상관없이
모두 얼음 녹듯이 시원스레 풀립니다.
盡聞不住
능과 소 둘 다 사라져(能所雙亡) 들음과 들림이 다해버린(盡聞)
형상이 없는 경계(無相)에도 머물바가 없습니다.(無所住)
심지어 우주 개념의 범위를 초월하여 벗어남을 느낍니다.
이렇게 더욱 한 걸음 나아가면 철저히 명심견성하여
형이상의 도체와 혼연히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覺所覺空
우리가 소리를 듣는 후면에는 자기가 듣고 있다는 것을 감각하고 있습니다.
그 각성과 소각의 소리 즉 능각과 소각을 모두 비워버리면
공의 경계와 자기가 대철대오한 각의 경계가 다 사라집니다.
空覺極圓
공과 각성이 혼연일체가 되어 圓明의 경계에 도달합니다.
空所空滅
능공과 소고의 현상도 사라집니다.
生滅旣滅
자연히 생과 멸의 작용이 둘 다 완잔히 사라집니다다.
寂滅現前
그리하여 절대적 眞空인 寂滅自性이 그 즉시 현전합니다.
능히 생멸하게 하는 것을 비워버리면
혼연일체의 원만광명한 도체에 도달하기 때문에
이때는 호흡도 정지합니다.
호흡법은 기맥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그 자체는 생멸법입니다.
생멸법인 것은 모두 현상이지 도체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도리를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이 먼저 움직일까요?
호흡의 기가 먼저 움직일까요?
염두가 움직이면 기가 곧 움직입니다.
사람이 만약 염두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호흡도 자연히 정지합니다.
호흡이 정지할 때에는 신체의 본능도 전체적으로 완전히 충전되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기공을 연마하거나 九節佛風등 갖가지 호흡 왕래 수련 법을 닦는 것은
다 미련 한 일로서 완전히 충전 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충전은 염두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않은 상태일 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여러 분들이 관음법문을 파악한후 천천히 안으로 소리를 들음으로써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生의 경지에 도달하면
신체기맥에도 자연히 변화가 일어나고 정의 힘도 증가하게 됩니다.
염두가 완전히 靜止하고 호흡이 왕래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다리 기맥도 쉽게 통하게 됩니다.
앉아 있는 상태에서 지극히 편안하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으면서 움직이기조차 싫어지는데
7일 밤낮을 앉아 있는 것도 무슨 어려움 있겠습니까?
忽然超越世出世間 十方圓明
이때에 이르면 형이상의 도체가가 완전하게 드러나면서
돌연히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경게를 초월합니다.
전 허공우주인 시방세계가 즉시에 철저히 환해져 원만히 밝아 지는데
어찌 天人合一에만 그치겠습니까?
완전히 원만청정한 일체가 되어 버립니다.
獲二殊勝
이때에 특별하고 뛰어난 기능을 두 가지를 얻게 됩니다.
一者 上合十方諸佛本妙覺心 與佛如來 同一慈力
위로는 시방의 일체제불의 본원 자성의 묘각진심에 합하고
과거에 성취한 모든 성현부처님들의 마음과 마음이 꼭 들어맞아
대자대비힌 능력을 함께 갖추게 됩니다.
二者 下合十方一切六道衆生 與諸衆生 同一悲仰
아래로는 시방세계의 일체의 6도중생 (천, 인,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과 합하며
중생의 마음 속의 근심과 한 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과 마찬 가지로 어려운 세상을 슬퍼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동정하는
행동을 갖추어 위아래를 나누지 않고 평등하게 구제 합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하심을 찬탄하는 게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의 미묘함은 이루다 말 할 수 없어라.
청정하고 장엄한 상호를 수 많은 겁 닦으셨네.
32가지 응신으로 무수한 국토에 나투시며
백천만겁토록 사바세게 중생을 교화하시네
병속의 감로를 언제나 중생들에게 뿌리시고
손에 드신 버들가지는 지난 세월을 알수 없네
고통 구해주길 비는 곳은 어디나 응하시며
고해에서 항상 사람들 건네주는 배가 되시네.
제가 항상 여성 도반들에게 바랍니다.
특히 수행공부를 해도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지혜가 열리지 않고 복보가 갖추어지지 못했다면
여성에게 가장 동정적인 관세음보살에게 간청하십시오.
남성도 마찬 가지 입니다.
고대에 선종에서는 많은 조사들이 오로지 일심으로
南無 大慈大悲 救苦救難 廣大靈感 觀世音菩薩을 외어서
대철대오 했습니다.
이런 선배들을 거울 삼아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이근 원통수행법을 더욱 본받고 학습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당시에 제자들을 교화지도 할 때에 일반 성문중도
모두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서 도에 들고 과위를 증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바세계중생들은 이근이 가장 예민하기 때문에
일체의 수행법은 다 이근에 의지해서 傳導했습니다.
선종이든 밀종이든 정토종이든
어떠한 법문도 관음법문을 떠나지 않습니다.
특히 정좌 초학자들은 반드시 이로부터 입문해야 합니다.
불경에서는 예류향이라고 하여 과위를 증득하기 위하여
이 방법으로 수행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닦아서 성공하면 예류과라고 합니다.
이로부터 닦지 않으면서 도과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특히 고급과정의 학생들은 석사 박사 학위를 대단한 것으로 보는데
죽은 자가 관을 지키고 있다는 말은 그런 것을 일컫습니다.
모든 학문은 죽은 자의 골등품이며 생사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만일 참으로 놓아버리고 이 방향으로 수행해가면 悟道 성취는 아주 빠릅니다.
그때에는 세간의 학문을 훤히 꿰뚫게 되고
심지어 널리 배우고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두를 들자마자 척척 알게 됩니다.
물론 견지 수증 행원이 삼위일체입니다.
좋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면 이런 잇속을 차리지 말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므로 선사들의 교육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대단하게 여기고 교만한 자는 눌러주고
자기를 비ㅣ히하고 천히 여기는 자는붙들어 주었습니다.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 눌러줌과 붙들어 줌 사이에서
상대의 근기에 응해 가르침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때로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 주기도 하고
배고픈 이의 밥을 빼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률적으로 논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겨울방학 수련 동안 여러분은
평소 가고 멈추고 앉고 눕는 등의 활동 사이에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즉 어떻게 망념을 끊고 지혜를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자기 심리행위를 수증하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이런 쪽으로 진정 마음을 쓴다면
제가 자연히 지도해 드릴 것입니다.
(선생께서 여기까지 설법했을 때
명광법사의 신체가 갑자기 진동하면서 의자에서 펄떡 펄떡 띄었다.
선생이 향판으로 강의 탁자를 한 번 크게 치고 말했다.
명광 몸을 따라 움직이지 말아요 그러자 즉시 조용해졌다)
명광 감각인 수음에 부림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수음경계예요.
색신의 생사는 의식 현행 습기가 색음을 쫓아서 각수를 낳기 때문인데
이때에 이르러서 의식이 그를 따라 굴러가지 않으면
수음도 공해져 굴러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색신의 각수에 의식이 가서 도와주는 짝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이 굴러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량(心量)은 허공과 같음을 마땅히 스스로 알고
색신의 안팎에 머물지 않고 행하면 곧 수음입니다.
신체적인 근심 슬픔 기쁨 괴로움 등 갖가지 감수를 포함한
고통과 쾌감이 모두 그 수음 범위에 들어갑니다.
이런 도리를 이해하고
이때에는 마땅히 곧 바로 깊이 깨달아 들어갑니다.
능엄경에 말하기를
허공이 너의 마음 가운데서 생겨남이
마치 조각 구름이 하늘에 점을 하나 찍어 놓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시방세계가 허공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 두 마디 말을 틀어지고 닦아 나간다면
어디 7일 동안이나 필요하겠습니까?
즉시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서방극락세계 두 분의 대보살은
한 분은 관세음보살이요, 또 한 분은 대세지보살인데
두 분 다 아미타불을 이근염불원통 법문으로 도와 주십니다.
관세음의 범어 음은 아발로키데스바라인데
인식의 대상을 관조하는 지혜(能所境智)로써 이름을 지었습니다.
만상은 흘러 움직이면서 저마다 서로 다릅니다.
다른 언어로 달리 불러도 모두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 크나큰 자비 위신은 불가사의 합니다.
과거 무량겁 중에 이미 성불하셨는데 대비원력으로
중생의 안락을 위하기 때문에 보살의 모습으로 시현합니다.
대세지보살의 중국어 번역의 의미는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두루 비춤으로써
지옥 아귀 축생의 3악도를 떠나 무상의 힘을 얻게 하는 까닭에 대세지라고 이름 합니다.
대세지염불원통법문과 관음법문은 서로 비슷하면서 한 가지 중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6근을 모두 거두어 들여서 淨念이 서로 이어지는 것인데 반드시 주의 해야 합니다.
자기의 내심에서 내는 염불소리를 돌이켜 듣고
안으로 듣는 염불소리를 돌이켜 관찰하면서
나무대세지보살이나 혹은 나무관세음보살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욉니다.
외우고 외움이 서로 이어지게 하되 눈은 밖으로 보지 않고 귀는 염불을 듣습니다.
이렇게 一心不亂하게 외워갑니다.
어떤 분은 수십년을 외우거나 몇 생을 외워도 정념을 얻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짧은 시간에 염불이 정념이 서로 이어지는 경지에 이르러
곧 바로 삼제탁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앞 생각은 이미 지나가고 뒷 생각은 아직 오지 않은 그 당체의 일념은 여여부동합니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하지않습니다.
염하면서도 염함이 없고 염함이 없으면서도 염합니다.
이렇게 정의 상태가 지속 되어가는 것이 바로 정념입니다.
6근을 다 거두어 들이고 정념이 서로 이어져 감이 일념만년이요,
만년일념이라야 비로소 진정한 유심불토입니다.
가령 그 사이에 가끔 망념이 일어난다면 곧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잡념망상이 없어질 때까지 염합니다.
뭇 흐름을 잘라 끊어버리고 삼제탁공하면 정념이 현전합나다.
이렇게 정의 상태가 지속되어 가면 서서히 자기 심신의 기질을 전환변화시키고
신경세포마다 변화하여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수행이 원만 청정한 과보를 받는 정도에 이름면 자연히 번뇌가 없고
편안히 해탈하여 4선 8정의 정의 경계에 도달합니다.
그리하여 한 줄기 성스러운 광명이 왕생하러 가고자 하면 곧 극락세계에 이릅니다.
심지어 염두만 굴리면 시방세게 어디든 자기 뜻데로 머무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토를 수행하는 것이 선정쌍수로서 대단히 온당한 법문입니다.
영명연수선사의 사료간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게시판 47 영명연수대사의 사료간 참조)
有禪有淨土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도 있으면
猶如戴角虎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現世爲人師
현세에 뭇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將來作佛祖
장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無禪有淨土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공덕이 있으면
萬修萬人去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 모두 가나니,
但得見彌陀
단지 아미타불을 가서 뵙기만 한다면
何愁不開悟?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걱정 하리요?
有禪無淨土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으면
十人九蹉路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陰境若現前
저승(中陰)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瞥爾隨他去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無禪無淨土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鐵牀倂銅柱
쇠 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萬劫與千生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沒個人依怙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
이게 바로 이른바 선정쌍수의 도리입니다.
즉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묶어두기 위해(繫心一緣)
모든 것을 한 마디 부처님 명호에 두고
밤낮으로 한 눈 팔지 않고 곧장 닦아 가면
자심정토와 극락세게 아미타불 정토에 도달합니다.
(남 회근 선생 저 송찬문 번역 선정과 지혜 수행입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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