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무경
1. 서론
부산대/김태완
불교의 唯識說은 彌勒(Maitreya)과 無著(Asa ga)을 거쳐서 世親(Vasubandhu)이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식설에 관한 세친의 대표작은 『唯識三十訟』·『唯識二十論』·『三性論偈』 등이다. 唯識說이란 곧 唯識無境說로서 간략히 말하면, 識만 있고 그 識 속에 나타나는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즉 識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對象非實在論이다. 唯識의 싼쓰끄리뜨어는 Vij apti-m tra인데, 여기서 識으로 번역되는 것은 Vij apti이다. 똑같이 識으로 번역되는 Vij na에 인식주체(인식주관과 인식기관)·인식작용(요별작용)·
인식내용(인식표상)이라는 의미가 주어져 있는 반면에, Vij apti는 인식작용·인식내용의 의미만 주어지고 인식주체라는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1)
한편 唯識無境에서의 境에 해당하는 싼쓰끄리뜨어는 Artha 또는 Vi aya인데, 식의 대상 또는 인식주관에 대한 인식객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唯識(Vij apti-m tra)은 唯心(Citta-m tra)과 흔히 동의어로 사용되며, 이런 면에서 唯識說은 唯心論이라고도 할 수 있다.2)
이와 같이 유식설의 철학적 입장은 마음 즉 識만이 존재하고, 그 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식 바깥에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식이 식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 바깥에 있는 인식대상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칸트와는 달리, 우리의 인식능력의 한계 바깥에따로 대상이 없다는 단정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상비실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경험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외부의 대상이 본질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야한다. 사실 여러 유식의 사상가들이 유식무경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다. 『』·『攝大乘論本』·『成唯識論』·『大乘阿毘達磨雜集論』 등에 보이는 四智說
또는 四種因이 이것들이지만, 유식무경의 입증을 목적으로 하여 성립한 경은 『유식이십론』하나이다.따라서 『유식이십론』이 유식무경의 입증을 가장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3)
『유식이십론』은 싼쓰끄리뜨어本 및 般若流支·眞諦·玄 등에 의한 漢譯과 티벹역이 현존하고 있다.4) 『유식이십론』은 게송들과 그 풀이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한역본은 그 게송의 수가 약간씩 다른데 1구에 5자씩 4구를 하나의 게송으로 보아, 반야류지역본은 23송, 진제역본은 24송, 현장역본은 21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게송의 수에 있어서는 이와같이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唯識無境의 천명이나 부처의 덕을 찬양하는 게송을 제외하고 유식무경의 입증을 위한 게송의 수는 20송씩으로 모두 같다. 게송과 풀이를 합하여 전체적으로는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음은 유식무경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답은 그 문제에 대하여 유식무경의 입장에서 풀어주는 형식이다. 제기된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체가 20송이므로 제기된 문제도 20개이지만 같은 문제가 두 세 번에 걸쳐서 물어지기도 하고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도 있으므로,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의 13가지가 된다.5)
(1). 문제 1 : 만약 세계가 識일 뿐이고 식 바깥에 실재하는 대상이 없다면, ①경험되는 사물들은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만 경험되고 모든 곳에서와 언제든지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②여러 사람들이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③꿈에서 경험하는 여러 사건들은 모두 실제적인 효과가 없는데 깨어나서 경험하는 것들은 실제로 효과를 가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2). 문제 2 : 꿈은 깨고나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꿈 속의 경험과 깨어있을 때의 경험은 같지 않다.
(3). 문제 3 : 만약 꿈과 깨어 있음이 같다면 왜 善惡의 業과 愛憎의 果報가 다른가?
(4). 문제 4 : 十二處(六境: 色·聲·香·味·觸·法, 六根: 眼·耳·鼻·舌·身·意)의 경계는 실재한다. 왜냐하면 六識(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그로 인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5). 문제 5 : 現量(대상과의 대응에 의한 직접지각)은 바깥 대상이 없는데도 가능한가?
(6). 문제 6 : 눈의 지각(현량)이 바깥 경계를 보고 다음에 의식이 기억하고 분별하여 인식이 이루어 진다고 하더라도 그 인식이 생겨나는 원인으로서의 바깥 경계가 없다면 識도 있을 수 없다.
(7). 문제 7 : 오직 식 뿐이고 바깥 境界가 없다면 붓다는 무슨 까닭으로 十二處(눈·귀·코·혀·몸·마음·색·소리·향기·맛·촉감·法)의 境界를 말했는가?
(8). 문제 8 : 諸法皆空이라면 識조차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9). 문제 9 : 오직 識 뿐이라고 할 경우, 그 識이야말로 실체가 아닌가?
(10). 문제 10 : 만약 바깥 경계가 없다면 타인이나 他心도 있을 수 없지 않는가?
(11). 문제 11 : 유식무경이라면 殺生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12). 문제 12 : 유식무경이라면 身口業은 없고 오직 意業만 있는가?
(13). 문제 13 : 외부세계는 중생의 業에 의하여 四大(地水火風)가 轉變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들을 보면 문제를 제기하는 측에서는 유식무경을 반증하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한 세친의 대답은 제기된 문제들이 유식무경에 대하여 반증사례들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식이십론』은 유식무경의 세계관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논증한다기 보다도 제기된 반증사례들을 물리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유식무경의 세계관을 옹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세친은 유식무경의 입장에 서서, 제기된 반증사례들이 유식무경의 세계관에서도 모순없이 성립함을 입증하거나, 제기된 문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음을 입증하거나, 유식무경이 아니고 식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고 할 경우에는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와 같은 세친의 논증의 논리적 타당성을 조사해보고 나아가서 하나의 세계관이 정당함을 논리적으로 논증하거나 반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여기서는 논리적 타당성만을 조사하고 주장된 진술의 사실적 진리성은 살펴보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주장된 진술 가운데는 불교의 이론체계에 속해 있으나 초경험적 사실에 관한 주장들이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식무경의 세계관 자체가 일정한 조건하에서 누구나 검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성립한 것이 아니라 몇몇 뛰어난 명상가가 고도로 수련된 명상 상태에서 직관한 것을 토대로 하여 성립한 주관적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관적 직관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체계의 정당성은 그 직관의 확실함과 그 직관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체계의 논리적 일관성에 의하여 보증된다고 할 것인데, 본 논문은 그 논리적 일관성의 검증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6)
2.분석의 틀을 명확히 하기
부산대/김태완
⑴ 용어의 규정
먼저 애매모호한 용어로 인한 논의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주요한 몇 용어를 정확히 규정해 두어야 한다.
① 識 : 유식설에서의 識은 前六識(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제7末那識(自我意識), 제8阿賴耶識(根本識)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정신작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식은 知覺·認識·기억·의지·의식·무의식 등 모든 정신작용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할 것이다.
② 境 : 유식설에서의 境은 十二處 즉 6개의 지각기관(眼·耳·鼻·舌·身·意)과 그 각각에 대응하는 6개의 지각대상(色·聲·香·味·觸·法)을 의미한다. 이것은 식의 외부에 있으면서 식작용을 야기하는 식의 모든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식 자신을 제외하고 식의 내용을 형성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식이 식의 대상으로서 식의 외부에 실재하느냐 하는 것은 『유식이십론』에서 제기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아직 이것은 미정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지만 대상으로서 식의 외부에 실재하는 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識과 境의 인식론적인 문제와 존재론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前六識과 十二處의 관계로 본다면 인식론적인 경향이 강하지만, 제7식과 제8식을 고려하면 오히려 존재론적인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과 경을 인식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느냐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느냐 하는 것을 분명하게 결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문제삼고 있는 唯識無境이냐 有識有境이냐 할 경우의 識과 境이라는 용어는 분명히 존재론적인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唯識無境이란 식만이 실재하고 식의 외부에 따로 실재해서 식의 대상이 되는 경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과 경을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용어로 규정해 두자.7)
③ 주관 : 유식설에서의 인식주관은 識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識·能緣·能分別·能取·行相·見分·自 分· 自 分 등으로 불려지지만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식설에서 인정되는 것은 識作用뿐이므로 인식주관인 견분 등도 모두 식작용의 한 모습일뿐이다. 여기에서도 인식주관은 하나의 식작용으로 규정해 둔다.
④ 객관 : 유식설에서의 인식객관은 識 가운데 形相(nimitta)을 띤, 인식되는 부분으로서 境·所緣·所分別·所取·相分 등으로 불려지지만8) 역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唯識無境을 논박하는 有識有境의 세계관을 가진 입장에서는 인식객관이란 식 자신뿐만 아니라 식의 외부에 식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도 식의 인식론적인 문제와 존재론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미 식과 경은 존재론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로 했으므로 용어의 사용에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주관과 객관은 인식론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⑵ 唯識無境과 有識有境의 관계
다음은 세계가 유식무경이라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세계를 唯識이라고 보는 것과 非唯識이라고 보는 것은 서로 모순관계인가? 만약 이 둘 사이가 모순관계가 되려면 유식과 비유식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면에서는 이 둘 사이는 모순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아 非唯識에는 세 가지 가능한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 세계에는 식뿐만 아니라 식과는 독립적으로 그 식을 일으키는 대상도 함께 있다고 하는 경우이고(有識有境), 둘째는 식은 없고 오직 대상만 있다고 하는 경우(無識唯境)이며, 세째는 식도 대상도 실재로는 없다고 하는 경우(無識無境)이다. 이렇게 非唯識에서 가능한 경우가 셋이므로 결국 선택지는 唯識無境·有識有境·無識唯境·無識無境의 넷이 된다.
그런데 이 논의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식은 있다고 전제된 셈이므로,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識의 有無문제가 아니라 境(대상)의 有無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위의 네 가지 가능한 경우에서 唯識無境과 有識有境의 두 경우만이 선택가능한 경우로 남게된다. 唯識無境과 有識有境 사이의 관계를 보면 식이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고 境이 있고 없음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두 세계관은 식의 측면에서는 공통적이고 경의 측면에서만 有無로써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9)
유식무경과 유식유경 사이에서 境의 有無만이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유식무경과 유식유경의 사이에서, 어떠한 논증이 유식유경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증명하였다고 하여 필연적으로 유식무경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논증이 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에 관한 것일 경우에만 유식유경이 성립하지 않을 경우에 필연적으로 유식무경이 성립하게 되기 때문이다.
3. 유식무경의 논증검토
부산대/김태완
유식무경의 논증에 대한 검토는 앞에서 제기한 13개의 문제들에 대한 『유식이십론』에서의 답변들을 정리하여 검토하는 것이다. 그 문제들은 非唯識 즉 有識有境의 세계관에 서서 제기된 것들인데, 답변들은 불교의 사상체계와 유식무경의 입장에서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이제 그 문제들과 답변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는 작업은 우선 문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유식이십론』에서의 세친의 대답을 정리하며, 다음에 그 문제와 대답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제기되고 전개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순서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1). 문제 1 : 만약 세계가 識일 뿐이고 식 바깥에 실재하는 대상이 없다면, ①경험되는 사물들은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만 경험되고 모든 곳에서와 언제든지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②여러 사람들이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③꿈에서 경험하는 여러 사건들은 모두 실제적인 효과가 없는데 깨어나서 경험하는 것들은 실제로 효과를 가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대답 1 : ①깨어 있는 현실에서의 경험과는 관계없이, 꿈속에서나 지옥에서의 경험에도 일정한 장소와 시간이 있다. ②깨어 있는 현실에서의 경험과는 관계없이, 꿈속에서나 지옥에서의 경험에서도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한다. ③꿈속에서도 여인과 관계하여 몽정을 하며, 지옥에서도 갖가지 고통을 겪는다.
검토 1 : 대답 ①②③에 모두 공통된 논리는, 깨어있는 현실에서의 경험과 꿈속이나 지옥에서의 경험과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경험되는 공간·시간·共通感覺·작용 등이 꿈속이나 지옥에서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꿈과 지옥은 유식무경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유식이십론』에는 꿈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지옥은 중생이 罪業에 의해 果報로 받는 유식무경의 세계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 문답을 다시 정리해 보자. 첫째 꿈과 지옥이 유식무경의 세계라는 것에는 질문자나 응답자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현실의 세계에 관해서는 질문자는 유식유경의 입장에서 묻고 있고, 응답자는 유식무경의 입장에서 답변하고 있다. 둘째 질문자는 유식유경인 현실세계만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일정한 공간·시간·공통감각·실제작용 등을 들고 있다. 세째 응답자는 일정한 공간·시간·공통감각·실제작용 등이 유식무경인 꿈과 지옥에서도 현실세계와 다름없이 경험된다는 사실을 들어서 현실세계가 유식무경임을 주장하려 한다.
문제와 대답을 논증으로 구성해 보자.
<문제>
만약 현실세계가 꿈처럼 유식무경이라면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은 경험될 수가 없다.
현실세계에서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은 경험된다.
따라서 현실세계는 꿈과 같은 유식무경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은 유식무경에 대한 반증사례이다.
<대답>
만약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이 유식유경에서만 경험된다면 유식무경인 꿈에서는 경험될 수 없을 것이다.
유식무경인 꿈에서도 이들이 경험된다.
따라서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이 유식유경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은 유식무경에 대한 반증사례가 될 수 없다.
<문제>와 <대답>의 두 논증식은 후건부정의 타당한 논증식이다. 따라서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이다. 그런데도 양자가 결론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전제를 서로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자는 유식무경에서는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이 경험될 수 없다고 보는 반면에 응답자는 유식무경에서도 이들이 경험될 수 있음을 꿈을 들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꿈이 유식무경이라는 것은 서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꿈에서도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이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참이라면 세친의 대답은 정당하다.10)
어떻든 문제와 대답이 형식적으로는 모두 타당하다. 논점은 공간·시간·공통감각·작용이 유식유경의 세계에서만 경험되는 것이냐 아니냐하는 것이다.11)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가야할 문제는 모든 경험사실들을 유식무경의 체계 속에서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유식유경의 체계 속에서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경험사실들을 비교함으로써 유식무경이나 유식유경의 세계관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한편 위 논점은 현실과 꿈에서의 경험이 같으냐 다르냐의 문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문제 2에서 다루고 있다.
(2). 문제 2 : 꿈은 깨고나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꿈 속의 경험과 깨어있을 때의 경험은 같지 않다.
대답 2 : ①꿈을 깨기 전에는 꿈 속의 경험이 모두가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다가 꿈을 깨고 나서야 비로소 꿈 속의 경험이 허망하다고 깨닫는 것과 같이, 현실세계의 경험도 현실세계에서는 모두가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깨달음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세계가 단지 식일 뿐임을 알게 된다. ②즉 현실의 경험은 모두 無明으로 인한 허망분별의 산물로서 식일 뿐이지 실재하는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출세간의 청정한 지혜에 의하여 현실의 세간이 유식무경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검토 2 : 대답 ①②는 불교의 사상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의 경험을 초월한 출세간이라는 개념을 등장시켜서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 ①은 우리의 이성에 의한 추론으로도 그 논리적인 타당성이 인정된다고 하겠다. 즉 꿈 속의 경험이 유식무경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 꿈을 깨고 나서라면, 현실세계의 경험이 유식무경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현실세계를 초월하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므로, 현실세계 속에서 현실세계를 유식무경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꿈 속에서의 경험을 꿈 속에서는 유식무경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꿈은 초월하고 현실세계는 초월하지 않은 질문자의 입장에서 꿈과 현실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3). 문제 3 : 만약 꿈과 깨어 있음이 같다면 왜 善惡의 業과 愛憎의 果報가 다른가?
대답 3 : 꿈 속과 깨어난 후의 현실세계가 다 같이 유식무경이라고 하더라도, 심식의 활동이 다양하게 변하므로 그 업과 과보가 반드시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업과 과보가 다르다는 것이 현실세계가 유식무경이 아니라고 할 근거는 될 수 없다.
검토 3 : 여기서는 질문자는, 응답자의 입장을 참이라고 가정할 때에 생기는 부조리를 지적함으로써 응답자의 입장이 성립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응답자는 그 질문에서 지적한 부조리가 부조리가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즉 업과 과보는 심식의 다양한 변화에 따라서 꿈 속에서도 서로 달라지고 현실세계에서도 서로 달라지는데 꿈 속과 현실세계 사이에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업과 과보가 꿈 속과 현실세계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것이 꿈은 유식무경이지만 현실은 유식무경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제와 대답 1, 2, 3은 꿈과 현실을 두고, 꿈은 유식무경의 세계이지만 현실은 유식유경이라는 입장에 있는 질문자가 꿈도 현실도 모두 유식무경의 세계라는 입장에 있는 응답자에게 꿈과 현실의 다른 점을 들어서 현실이 유식무경이라는 입장에 대한 반증 사례로 삼고 있는데 대하여, 응답자는 그러한 것들이 꿈과 현실 사이에 다르지 않다고 하여 현실이 유식무경이라는 입장에 대한 반증 사례가 될 수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 응답자의 논증은 형식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응답자는 현실세계가 유식무경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질문자와 응답자가 서로 다른 세계관에 근거하여 각자의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에 질문과 대답 모두가 각각 자신의 사유체계 속에서는 참인 진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질문자가 꿈은 유식무경이지만 현실은 유식유경이라는 입장에서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참이고, 응답자가 꿈도 현실도 모두 유식무경이라는 입장에서 꿈과 현실이 다름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참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세계관에 근거하여 해석함으로써 그 사실을 서로 달리 본다는 것은, 각자의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음에 불과할 뿐 상대방 세계관의 모순점을 드러내어 상대방을 논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문답은 자기체계의 입증이나 상대체계의 반증이 아니라, 질문자가 근거하고 있는 사유체계와 응답자가 근거하는 사유체계가 서로 다름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4). 문제 4 : 十二處(六境: 色·聲·香·味·觸·法, 六根: 眼·耳·鼻·舌·身·意)의 경계는 실재한다. 왜냐하면 六識(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그로 인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대답 4 : 만약 識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①부분으로 구성된 복합물이거나 ②부분이 없이 전체가 하나인 단일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되거나, 하나의 단일물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①만약 크기를 갖는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물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물이 아닌 최소단위의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요소가 만약 크기를 갖는다면 그 요소는 더 잘게 쪼개질 수 있으므로 최소단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최소단위인 요소는 크기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크기가 없는 최소단위의 요소가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그 집합이 크기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크기를 가진 하나의 대상은 부분으로 구성될 수가 없다. ②만약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은 하나의 단일물이라면, 나누거나 구분하거나 차별되거나 변화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경험되는 대상에는 이러한 일들이 있다. 따라서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은 하나의 단일물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식 밖의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
검토 4 : 우선 이 대답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은 아니다. 질문은 六識이 생겨나므로 그 육식이 생겨나는 조건인 6개의 지각기관과 그 각각의 지각대상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답은 만약 식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 대상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복합물이거나 부분없는 단일물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인데 두 경우 모두 성립되지 않으므로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답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은 아니나 전체로 보아 질문자는 식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주장인데 반하여 응답자는 그러한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질문과 동떨어진 대답을 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대답의 논증을 분석해 보자. 이 논증은 복합논증인데 우선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논증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전제 1> 만약 식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부분으로 구성 된 복합물이거나 부분 없이 전체가 하나인 단일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제 2>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되거나 단일물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결론> 따라서 식 밖에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기호화해보자.
<전제 1> A면 B이든가 C이든가다.
<전제 2> B도 될 수 없고 C도 될 수 없다.
<결론> 따라서 A가 아니다.
이것은 곧 다음과 같다.
<전제 1> A⊃(B∨C)
<전제 2> ∼B·∼C
<결론> ∴∼A
그런데 De Morgan의 법칙에서, ∼B·∼C ≡ ∼(B∨C)이므로 위 식은,
<전제 1> A⊃(B∨C)
<전제 2> ∼(B∨C)
<결론> ∴∼A
이 되고, (B∨C)를 F라고 하면,
<전제 1> A⊃F
<전제 2> ∼F
<결론> ∴∼A
가 되어서 반가언적 삼단논법의 후건부정식이 되어 타당한 논증식이며, 하나의 귀류법을 이루고 있다.12)
한편, <전제 2>의 이유가 되는 즉 <전제 2>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두 개의 부속된 논증이 있는데, 그 각각은 다음과 같다.
① ⓐ만약 크기를 갖는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물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물이 아닌 최소단위의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요소가 만약 크기를 갖는다면 그 요소는 더 잘게 쪼개질 수 있으므로 최소단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최소단위인 요소는 크기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크기가 없는 최소단위의 요소가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그 집합이 크기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크기를 가진 하나의 대상은 부분으로 구성될 수가 없다.
② ⓐ만약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은 하나의 단일물이라면, 나누거나 구분하거나 차별되거나 변화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경험되는 대상에는 이러한 일들이 있다.
ⓒ따라서 대상이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은 하나의 단일물일 수가 없다.
논증 ①은 ⓐⓑⓒ와 ⓒⓓⓔ의 두 논증이 결합되어 ⓔ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는 귀류법 논증식이며, 논증 ②는 후건부정의 가언논증식이다. 둘 다 각각 형식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①과 ②의 결론이 연언으로 연결되어(∼B·∼C) <전제 2>를 구성하는데, ①의 결론과 모순되는 명제를 ②의 전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①과 ②의 논증은 연언으로 연결되어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논증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논증이 형식적인 오류가 없는 타당한 논증이라면 반증사례를 논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식유경이 성립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유식무경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대답 4가 형식적 오류없는 타당한 논증이라고 하더라도 이 논리가 대상에만 적용되고 식에는 적용되지 말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근거가 입증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논증도 결코 유식유경만을 부정하므로써 유식무경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주는 구실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5). 문제 5 : 現量(대상과의 대응에 의한 직접지각)은 바깥 대상이 없는데도 가능한가?
대답 5 : 대상(六境)과 지각기관(六根)의 대응에 의한 직접지각(六識)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상과 지각기관이 대응하는 그 순간에는 아직 대상에 대한 인식은 성립하지 않으며, 다음 순간 意識이 작용을 해야 비로소 인식이 이루어지는데, 이 때에는 이미 대상과 지각기관의 대응이라는 사실은 없고 識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과 識의 직접대응은 없으며, 모든 인식과 지각은 의식의 작용일 뿐이다.
검토 5 : 이것은 불교의 시간론인 刹那滅論에 근거한 논증이다. 찰라멸론에 따르면, 시간은 한 찰라 한 찰라 단절된 상태로 흘러간다. 전찰라와 후찰라는 겹치지 않는다. 전찰라와 후찰라를 연결시키는 것은 의식의 기억작용에 의해서이다.13)
여기서 질문자의 주장은, 眼識과 같은 직접지각(六識)은 色과 같은 대상(六境)과 눈과 같은 지각기관(六根)이 접촉하는 찰라에 발생하므로 직접지각이 생기려면 반드시 외부대상(境)이 실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응답자의 주장은, 지각이나 인식은 의식의 분별작용에 의하여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외부의 대상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과 지각기관이 접촉하는 그 순간에는 아직 인식이 생기지는 않았으므로 인식과 대상이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인식과 외부대상이 한 찰라에 연결되어 발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안식 등이 직접지각이라고 하더라도 대상과 지각기관이 접촉하는 찰라에 같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찰라에 의식의 분별작용이 있은 다음에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안식 등의 직접지각이 외부대상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식 등의 지각이 있다고 해서 외부대상이 반드시 실재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자와 응답자는 眼識 등과 같은 지각을 서로 달리 규정함으로써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유식유경의 입장에 있는 질문자는 안식 등은 발생하는 순간에 외부대상과 지각기관과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유식무경의 입장에 있는 응답자는 안식 등은 의식의 분별작용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므로 설사 외부대상과 지각기관의 접촉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안식 등이 그들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현량이 유식무경의 반증사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응답자의 주장처럼 대상과 지각기관의 접촉과 안식 등이 생기는 것이 전찰라 후찰라로서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쨋든 안식 등의 발생원인으로서 대상과 지각기관의 접촉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질문자가 이러한 입장에서 제기한 것이 다음의 문제 6이다.
(6). 문제 6 : 눈의 지각(현량)이 바깥 경계를 보고 다음에 의식이 기억하고 분별하여 인식이 이루어 진다고 하더라도 그 인식이 생겨나는 원인으로서의 바깥 경계가 없다면 識도 있을 수 없다.
대답 6 : 인식이 성립하는 것은 의식의 분별작용에 의하는 것인데, 그 의식의 분별작용의 원인으로서 외부대상과 지각기관의 접촉을 가정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오히려 외부대상과 지각기관의 접촉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의식의 분별작용에 의하여 생긴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의식의 분별작용 외에 다른 원인을 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검토 6 : 식의 원인을 소급하면 결국에는 대상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유식무경에 대한 반증이 된다는 질문자의 주장에 대하여, 응답자는 식의 원인을 소급한다고 해서 반드시 대상을 그 궁극적 원인으로 가정해야할 필연성은 없다고 하여 식의 존재가 유식무경의 반증사례가 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도 질문자와 응답자는 유식유경과 유식무경이라는 서로 다른 사유체계에 근거하여 논지를 전개시키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의 체계에 정합적인 주장을 펴고 있더라도 그 주장이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하지는 못하고 있다.
(7). 문제 7 : 오직 식 뿐이고 바깥 境界가 없다면 붓다는 무슨 까닭으로 十二處(눈·귀·코·혀·몸·마음·색·소리·향기·맛·촉감·法)의 境界를 말했는가?
대답 7 : 본래 모든 경험세계가 실체가 없는 것(諸法皆空)인데, 중생은 無明으로 인하여 그것이 있다고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여래는 중생교화의 방편으로 모든 경험세계를 六識과 十二處로 세우고, 이 모두가 根本識의 轉變에 의하여 성립하고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중생이 이러한 여래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모든 경험세계가 본래 허망한 것(諸法皆空)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六識(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과 十二處(六境: 色·聲·香·味·觸·法, 六根: 眼·耳·鼻·舌·身·意)는 우리의 경험세계를 분석한 구조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識 즉 우리의 경험은 六識일 뿐이고 十二處는 육식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개념이다. 육식이 根本識의 轉變에 의하여 생겨나고 있으므로, 십이처 역시 근본식의 전변에 의해 분별된 형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세계는 유식무경으로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여래가 육식십이처근본식 등의 명칭을 만든 것은 우리의 경험세계가 유식무경임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다.
검토 7 :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십이처의 대상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으므로 붓다도 대상세계의 존재를 인정했던 것이며, 이러한 붓다의 교설이 바로 유식무경에 대한 반증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질문자의 공격이다. 이에 대하여 응답자는 오히려 붓다가 십이처 등의 대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이렇게 경험되는 대상이 모두 식 밖에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임시 수단으로서 한 것이라고 하여, 붓다의 대상에 대한 교설이 유식무경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사상체계인데, 불교의 모든 사상체계는 부처가 중생을 위해 베푼 方便說일 뿐이라는 맥락에서 답변되고 있다.
(8). 문제 8 : 諸法皆空이라면 識조차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 8 : 제법개공이란 식 밖의 대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 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검토 8 : 제법개공이라고 할 때의 諸法은 우리 경험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空하다는 것은 그것이 유식무경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유식론의 근본취지이다.
(9). 문제 9 : 오직 識 뿐이라고 할 경우, 그 識이야말로 실체가 아닌가?
대답 9 : 식은 허망한 것으로서 空이지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검토 9 : 불교에서 실체라고 하면 고정불변하고 마음 밖에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이 실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체를 정의함에 있어서 질문자와 응답자가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역시 유식유경과 유식무경이라는 각각의 입장이 다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 서로간에 입증이나 반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0). 문제 10 : 만약 바깥 경계가 없다면 타인이나 他心도 있을 수 없지 않는가?
대답 10 : 식 바깥에 타인이란 존재는 없다. 타심 역시 식일뿐 식 밖에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아니다.
검토 10 : 유식무경에서 自我란 허망분별인 제 7 識일 뿐이고 본래 無我이다. 자아가 없으므로 自心이란 것도 허망분별이다. 자아와 자심이 없는데 他我와 他心이 있을 리 없다. 결국 대상이 식일 뿐이듯이 타심도 식일 뿐이므로 타심이 유식무경의 반증사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14)
(11). 문제 11 : 유식무경이라면 殺生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대답 11 : 유식무경에서는 본래 대상이 없는데 대상을 세워서 살생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자아의식(제7末那識)이 허망분별로서 의업을 짓는 것이다.
검토 11 : 유식설의 체계 속에서 답하고 있다.
(12). 문제 12 : 유식무경이라면 身口業은 없고 오직 意業만 있는가?
대답 12 : 그렇다. 몸과 입은 명칭일 뿐이고 실재는 없으며, 의식만이 있으므로 의업만이 있을 뿐이다.
검토 12 : 유식설의 체계 속에서 답하고 있다.
(13). 문제 13 : 외부세계는 중생의 業에 의하여 四大(地水火風)가 轉變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대답 13 : 만약 중생의 업 때문에 四大가 전변하여 대상세계가 형성된다면, 업 때문에 心識이 전변하여 대상세계를 형성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검토 13 : 중생의 업에 의하여 식 밖의 四大가 전변하여 대상세계가 형석되는데, 중생의 업이 있으므로 대상세계가 식 밖에 따로 존재하며, 따라서 업이 있다는 것이 유식무경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이 질문자의 입론이다. 이에 대하여 응답자는 사대의 자리에 心識을 넣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질문자의 입론이 반증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다.
4. 결론
부산대/김태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유식무경에 대한 13개의 반증사례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적으로 반증사례가 된 것은 없다.
즉 13개의 반증사례 모두는 응답자에 의하여 반증사례가 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한편 응답 4에서는 응답자에 의하여 유식유경이 모순에 처할 수 밖에 없으므로
유식무경이 성립한다는 귀류법에 의한 유식무경의 증명도 오류임이 판명되었다.
즉 유식무경의 세계관은 입증도 반증도 되지 못한 것이다.
또 대개의 문제들에서는 질문자는 유식유경이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정당한 입론을 하고 있고,
응답자는 유식무경이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정당한 입론을 하고 있을 뿐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반박하는 것은 아닌,
즉 논박이라기 보다는 서로 각자 자기의 입장표명을 하고 있을 뿐임을 보았다.
즉 세계관의 차이로 인하여 같은 경험적인 사실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상대의 설이 성립될 수 없음을 반증하거나 자신의 설이 성립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이와같이 경험하는 것은 똑같은데 서로 상반된 세계관으로 그 경험을 일관되게 해석해서 부조리하지 않다면,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신념의 차이일뿐이다. 분석철학자 위즈덤(John Wisdom)에 의하면, 경험세계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없으면서도 서로 상이한 세계관을 가질 때, 각각의 세계관의 옳음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15)
과연 유식무경이나 유식유경이라는 세계관은 입증이나 반증이 불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어떤 이유에서 불가능한가?
입증과 반증의 가불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입증이 가능한 조건을 밝혀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무엇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려고 할 경우 연역적 방식을 사용하거나 귀납적 방식을 사용하거나 이 둘을 혼용하거나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식들의 정당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명제 사이의 형식적 타당성과 각 명제의 사실적 진위를 가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적 타당성과 사실적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기준이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동일율, 모순율 등의 형식논리의 기본원리와 '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 등의 진리설이 먼저 세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기준은 명석판명한 직관의 산물이거나
증명없이 전제되는 제1원리이어서 증명과 정당화에 앞서서
그 증명과 정당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된다.16)
그런데 세계의 본질이 식일 뿐이고 식 밖에 대상이 없다는
세계관(唯識無境)과 세계에는 식과 그 밖의 대상이 함께 있어서
서로 대응한다는 세계관(有識有境)은 이러한 진리의 기준보다도 더욱 앞서서
전제되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은 논증을 통하여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진리의 기준이나 논증의 정당화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세계해석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두 세계관 중 어느 한 쪽이 참임을 증명하려면
이 두 세계관보다 더욱 근원적이면서 이 두 세계관 모두가
공통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유식이십론』에서는
그러한 더욱 근원적인 기준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17)
이와 같이 본다면 애초에 유식무경이나 유식유경과 같은 세계관은 입증과 반증의 대상이 아니었다.18)
따라서 똑같은 경험내용을 서로 다른 세계관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위즈덤의 주장대로 각각의 세계관을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대의 세계관을 반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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