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法無我 // 불교철학의 전개 p.53 // 한자경 //예문 추천
업과 보는 있지만 업을 짓는 자는 없다.
이처럼 업은 있지만,
업을 짓는 자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궁극적 의미이다.
현생의 나는 전생의 업과 별도로 존재하면서
마치 굴러오는 축구공을 받듯이
전생으로부터의 업의 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오온으로서의 나 자신이
전생의 업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그 업을 인연으로 하여 생성된
연기의 산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업보를 받는 자가 따로 없이
전생으로부터 굴러오는 업력이 인연화합하여
비로소 현생의 나인 오온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이처럼 무아이면서
동시에 전생의 오온과 현생의 오온 간에
업과 보의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업보의 연속성으로서의 윤회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동일적 자아 없이 성립하는
오온간의 윤회가
곧 연기에 입각한 '무아윤회(無我輪廻)이다.
그러나 무아의 의미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려면
인무아人無我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불교에서 우리가 자아라고 간주하는 오온뿐 아니라
우리가 객관 실재라고 간주하는 세간에 대해서까지도
그것을 유정有情의 업의 결과로 설명한다.
즉 세간을
그 안에 살고 있는 중생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인간이나 물고기, 천사나 아귀가 보는 물(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논한다.
유정有情의 세계가
유정의 업력을 떠난 객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유정의 업력에 따라
그 정보正報로서의 근根에 상응하는 기세간이
의보依報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세간은
그 안에 사는 유정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간은
그 안의 유정의 관점에서 보면 있는 것이지만,
그 밖에서 보면 객관적 실재가 아니며
이 점에서 마치 홀로그램과 같다.
업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자아도 세계도
모두
홀로그램처럼 허공 중에 떠있는 가상이며, 공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공에 입각한 가상의 꽃인 공화空華에 비유하며,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일체개공一切皆空을 강조하는 것이다 ^^
cf. 유무라는 "실체적 사고"에서 찰라생 찰라멸의 "연기적 사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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