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백론(百論)

수선님 2022. 5. 8. 13:14

 

백론(百論)
 
백론(百論) 상권
제바보살(提婆菩薩)지음
바수개사(婆藪開士)풀이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박인성 번역
 
 
1. 죄와 복을 버리는 장[捨罪福品]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를 올립니다.
자비로우신 세존께서 무량한 겁 동안 온갖 고를 짊어지셨고
번뇌가 이미 끊어지셨으며 습기 또한 제거되셨기에
범천[梵]ㆍ제석천[釋]ㆍ용(龍)ㆍ천신이 모두 경배드립니다.
 
또 위없이 세상을 비추는 법으로,
흠과 더러움을 청정하게 하고 희론(戱論)을 그치게 하는
부처 세존들의 말씀과 백론 상권
 
공양받을 만한 이들[應眞僧]인 여덟 현성[八輩]1)께 예를 올립니다.
께 예를 올립니다.
 
외도
2) 게송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라고 했는데 어떤 이들이 세존인가?
게송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라고 했는데 어떤 이들이 세존인가?
불자
3) 그대는 왜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가?
그대는 왜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가?
 
 
1) 4과(果)와 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의 4향(向)을 말한다.
2) 원문에는 '외왈(外曰)'이라 하였는데 외도의 주장이다.
3) 원문에는 '내왈(內曰)'이라 하였는데 외도에 대한 불교도의 입장을 밝힌 부분이다.
 
 
 
외도
여러 가지로 세존의 상(相)을 말하기에 의심을 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위뉴천(葦紐天)4)[진(秦)에서는 편승천(徧勝天)이라 한다.]5)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6)[진(秦)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이라 한다]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가비라(迦毘羅)7)ㆍ우루가(優樓迦)8)ㆍ늑사바(勒沙婆)9)를 다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붓다만을 세존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를 다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붓다만을 세존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불자
붓다께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명료하게 장애 없이 아시며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붓다만을 세존이라 하는 것이다.
외도
다른 지도자[導師]들도 모든 법을 명료하게 알고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한다. 가령 가비라의 제자는 『승거경(僧佉經)』10)을 암송해서 선법(善法)들의 보편상[總相]과 특수상[別相]을 말한다. 25제(諦) 중에서 청정한 지각[覺]의 요인들을 선법이라고 한다. 가령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11)을 암송해서 “6제(諦)12) 중에서 구나제(求那諦)13)에 의해서 하루에 세 번 목욕하고 두 번 불을 공양(供養) 하는 등의 화합에 의해서 '나'[神]의 일부분인 선법을 생기게 한다”고 말한다. 가령 늑사바의 제자는 『니건자경(尼乾子經)』14)을 암송해서 “다섯 가지 열로 몸을 굽고 삭발하는 등의 고통을 받는
 
 
4) 비쉬누(vişņu)신을 말한다. 우주의 유지(維持)를 담당하는 힌두교 제2의 신(神)이다.
5) 한역문의 할주(割註)를 각괄호 안에 넣었다.
6) 마헤슈와라(maheśvara)신을 말한다. 또는 쉬바(śiva)신. 우주의 창조와 파괴를 담당하는 힌두교 제3의 신(神)이다.
7) 범어로는 까삘라(kapila)이고 상키야학파[數論] 학파의 초조(初祖)이다.
8) 범어로는 울루까(ulūka)이고 와이쉐쉬까학파[勝論]의 초조(初祖)이다.
9) 범어로는 리샤바(ŗişabha)이고 자이나교의 초조(初祖)이다.
10) 범어로는 samkhyā-sūtra이고 수론(數論)의 경전이다.
11) 범어로는 vaiśeşka-sūtra이고 승론(勝論)의 경전이다.
12) 승론종(勝論宗)에서 일체법을 분별하기 위하여 세운 6구의(句義)을 말한다. ①dravya[實], ②guņa[德], ③karman[業], ④sāmānya[同], ⑤viśeşa[異], ⑥samavāya[合] 등인데 실(實)은 실체, 덕(德)은 속성, 업(業)은 운동이나 행위, 동(同)은 보편, 이(異)는 특수, 합(合)은 결합으로 번역될 수 있다.
13) 6구의(句義) 중에서 덕제(德諦)이다. 구나(求那)는 guņa의 음역이다.
14) 범어로는 nigaņthasūtra이고 자이나교의 경전이다.
 
 
 
데 이것을 선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논사들은 스스로 단식을 행하고 호수에 몸을 던지고 불에 뛰어오르고 스스로 높은 산에서 떨어지고 말을 하지 않고서 항상 서 있고 우계(牛戒)를 지키는 등 이것을 선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심오하고 청정한 법인데 왜 붓다만이 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가?
불자
이것은 다 그릇된 견해[邪見]이어서 바른 견해[正見]을 뒤엎기 때문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외도
부처님은 어떤 선법(善法)을 말하는가?
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선을 행하는 법(法)이네[수투로(修妬路)]15)
 
부처님께서는 대략 두 종류의 선법을 말씀하셨다. '그치게 하는 것'[止相]과 '행하는 것'[行相]이다. 모든 악들을 그치게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고, 모든 선을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악이라 하는가? 몸[身]을 그릇되게 행해하는 것, 입[口]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생각[意]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살생ㆍ도둑질ㆍ음행(淫行)이다.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거짓말[妄語]ㆍ이간질[兩舌]ㆍ욕[惡口]ㆍ꾸미는 말[綺語]이다. 생각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탐욕[貪]ㆍ증오[瞋惱]ㆍ그릇된 견해[邪見]이다. 또 10불선도(不善道)에 포함되지 않는 매질ㆍ몽둥이질ㆍ묶는 일ㆍ가두는 일 따위가 있다. 그리고 십불선도 앞뒤의 여러 가지 죄를 악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는가? 악을 그치게 해서 짓지 않는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기거나 입으로 말하거나 계를 받거나 해서 오늘부터 다시는 결코 짓지 않겠다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선이라 하는가?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맞이하고
 
 
15) 원문의 수투로(修妬路)는 stra[經]의 음역이다.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을 바수 개사(婆藪開士)의 석(釋)과 구별하기 위해 표시된 것이다.
 
 
 
배웅하는 일, 합장하는 일, 절을 드리는 일 등이다.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진실한 말, 적절한 말, 부드러운 말, 이익을 주는 말이다.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자(慈)와 비(悲), 바르게 봄[正見] 등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청정한 법을 선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 선법을 믿고 받아들이며 수습(修習)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외도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서두에 길상[吉]16)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논사들이 경전을 저술하는 법이 서두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이해하기 쉽고 진리의 소리[法音]가 널리 퍼진다. 만약 지혜가 있는 이가 독송하고 기억해서 알아 둔다면 수명이 늘고 위덕(威德)이 있으며 존중을 받게 된다. 가령 『바라하파제(婆羅呵婆帝)』17) [진(秦)에서는 『광주경(廣主經)』이라 한다]라는 경전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경전 등에서는 처음에 모두 길상[吉]을 말한다. 최초가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도 최후도 길상하다. 그대의 경전은 처음에 악을 말하기 때문에 길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하고 말한 것이다.
[진(秦)에서는 『광주경(廣主經)』이라 한다]라는 경전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경전 등에서는 처음에 모두 길상[吉]을 말한다. 최초가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도 최후도 길상하다. 그대의 경전은 처음에 악을 말하기 때문에 길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하고 말한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그릇된 봄[邪見]을 끊기 위해 이 경을 말하는 것이네.[수투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릇된 봄[邪見]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길상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만약 조금이라도 길상이 있다면 경전의 초두에 길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는 실제로는 길상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한 사태를 두고 이 사람은 '길상하다' 하고 저 사람은 '길상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길상한 것도 아니고 길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한다.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상함이
 
 
16) 범어로는 śrī이고 책의 초두에 이 말을 적어 놓는다.
17) 범어로는 브리하스빠띠(bŗihaspati)이다.
 
 
 
없는 것이다. 그대 어리석은 이는 방편 없이 억지로 즐거움을 구하길 바라고 허망하게 기억과 표상을 일으켜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와 타자와 양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이 길상함[吉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법은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자성[自相]이 없으므로 타성[他相] 또한 없다. 또 무한역행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 다시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모두18)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발생[生法]에는 세 종류가 있다.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것,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길상함[吉事]이 없다.
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발생[生法]에는 세 종류가 있다.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것,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길상함[吉事]이 없다.
외도
이 길상함은 자기에게서 발생하니 마치 소금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소금의 자성인 짠 맛이 다른 사물을 짜게 하는 것과 같다. 길상함도 이와 같아서 자성이 길상함이 다른 사물을 길상하게 한다.
불자
앞에서 이미 타파했기 때문이네. 또 소금의 성질[相]은 소금 속에 머물 러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나'는 앞에서 자성(自性)으로서 발생하는 법은 있지 않다고 하며 (이를) 타파했다. 또 그대의 의도는 소금은 인과 연들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은 자성(自性)으로서 짠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그대의 말로 그대의 말을 타파해 보겠다. 소금이 다른 사물과 합한다 하더라도 사물은 소금이 되지 않는다. 소금의 성질은 소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의 성질은 말의 성질이 아닌 것과 같다.
 
 
18) 자기와 타자를.
 
 
 
외도
마치 등불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등불이 이미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추듯이 길상함도 이와 같다. 자기를 길상하게 하고 또한 길상하지 않은 것도 길상하게 한다.
불자
등불 자체에도 다른 것에도 어둠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등불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 왜 그러한가? 빛[明]과 어둠은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등불에는 비추는 작용[能照]이 없다. (어둠이 없기에 어둠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춤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은 자기를 비추지 않는다. 비춤을 받는 장소에도 또한 비춤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비출 수 없다. 어둠을 타파하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을 타파하는 일이 없기에 비춤이 아니다.
외도
처음에 발생할 때 둘 모두를 비추기 때문이네.[수투로]
나는 등불이 먼저 발생하고 나서 이후에 비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발생할 때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춘다.
불자
그렇지 않네. 한 법(法)에서 유와 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처음에 발생하고 있는 것은 반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은 비출 수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하물며 어떻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비추는 일이 있겠는가? 또 한 법이 어떻게 유이고 무이겠는가?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등불이 이미 발생했든 아직 발생하지 않았든 모두 어둠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질[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어둠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외도
마치 주술이나 별과 같기 때문이네.[수투로]
멀리서 먼 데 있는 사람에게 주술을 걸어 괴롭힐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하늘에서 별이 변해서 사람을 길상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등불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어둠에 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
불자
실제를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등불에 힘이 있어서 어둠에 도달하지 않아도 능히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면, 인도[天竺]에서 등불을 켰을 때 어찌 중국[振旦]의 어둠이 타파되지 않겠는가? 주술과 별의 힘이 먼 곳에 미칠 수 있듯이 등불이란 사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처음에 길상하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네.[수투로]
또 만약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을 말한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때도 길상하다면 그대가 처음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 허위의 말[妄語]가 되고 말 것이다.
외도
처음에 길상하기에 다른 때도 길상하네.[수투로]
처음에 길상의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때도 길상하다.
불자
길상하지 않음이 많기에 길상함도 길상하지 않음이 되네.[수투로]
그대가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함을 말한다면 많은 것이 길상하지 않음이 된다. 길상하지 않음이 많기 때문에 길상함도 길상하지 않음이 되고 말 것이다.
외도
마치 코끼리19)의 손과 같네.[수투로]
의 손과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코끼리는 손을 갖고 있기에 '손을 갖고 있는 것[有手]'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눈과 귀와 머리 따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눈과 귀와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부분의 길상함에 힘이 있
 
 
19) 범어로는 hastin이다. 코끼리는 '손(hasta)을 갖는 것(in)'이란 뜻이다.
 
 
 
기 때문에 많은 부분의 길상하지 않음을 길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코끼리의 과실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다면 머리와 발 등과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부분[分] 속에 전체[有分]가 갖추어져 있다면 어찌 머리 속에 발이 있지 않겠는가? 다름[異]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지 않다면 그래도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체가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가 그대로 발일 것이다. 둘20)은 코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함[一]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길상함[吉事]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최초에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과 최후도 길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은 코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함[一]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길상함[吉事]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최초에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과 최후도 길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외도
악을 그치게 한다 할 때 '그치게 한다'는 것은 좋은 일[妙]이다. 어떻게 처음에 두지 않는가?
불자
수행자는 반드시 먼저 악을 알고 난 이후에 그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악을 앞에 두고 그치게 한다는 것을 뒤에 둔 것이다.
외도
선행을 처음에 두어야 하네. 좋은 과보가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모든 선법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수행자는 좋은 과보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앞에 선행을 말하고 뒤에 악을 그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자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거친 번뇌[鹿垢]를 제거하고 다음에 미세한 번뇌를 제거한다. 만약 수행자가 악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면 선을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후에 선법을 배이게 한다. 비유하면 옷을 빨 때 먼저 거친 때[鹿垢]를 제거한 이후에 물을 들일 수 있는 것과 같다.
 
 
20) 머리와 발을 뜻한다.
 
 
 
외도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했으니 다시 선행을 말할 필요가 없다.
불자
보시 등은 선행이기 때문이네.[수투로]
보시는 선행이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또 가령 큰 보살은 먼저 악을 그치게 하고 4무량심(無量心)을 행한다.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다른 이의 목숨을 수호하는 일은 선행이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외도
보시는 인색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는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다. 만약 보시를 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면 보시를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 된다. 또 번뇌[漏]들이 멸진했을 때 사람의 인색함과 탐욕은 이미 멸진한 것이다. 보시할 때에 어떻게 악을 그치게 하겠는가? 혹은 어떤 이는 보시를 행하긴 하지만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하지는 않는다. 설사 (보시를 행하는 것이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선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보시는 선행이다.
외도
이미 선행을 말했으니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곧 선행이기 때문이다.
불자
그치게 하는 것의 특징[相]은 '멈추게 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의 특징은 '짓는 것[作]'이다. 특징[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말하는 것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포함하지 않는다.
외도
이것은 실제로 그러하다. 나는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선법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만약 선행을 말했다면 굳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을 말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계(戒)를 받을 때 악들을 멈추게 하는 것을 이른다. 선행은 선법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단지 선행의 복을 말할 뿐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가 계를 받아서 악을 그치게 할 때 불선(不善)의 심(心)이든 무기(無記)의 심이든 이 때 선(善)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복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악을 그치게 하기 때문에 또한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그치는 일을 말해야 하고 또 선행도 말해야 한다.
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은 중생의 의도[意]를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세 종류로 나누셨네. 하급과 중급과 상급의 사람이 갖고 있는 보시와 지계와 지혜이네.[수투로]
수행자는 세 부류가 있다. 하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시(布施)를 가르치고, 중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계(持戒)를 가르치고, 상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가르친다. 보시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재물을 버리는 일에 상응하는 사업(思業)ㆍ신업(身業)ㆍ구업(口業)을 일으키는 것을 이른다. 지계는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 속에 생기거나 계를 받을 때 오늘부터 다시는 세 가지의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네 가지의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을 짓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지혜는 모든 법상(法相)들에 심(心)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 하급ㆍ중급ㆍ상급을 말하는가? 이익의 차이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보시하는 이는 이익이 작기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계를 지키는 이는 이익이 중간 정도이기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지혜가 있는 이는 이익이 가장 높기에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또 보시의 과보는 가장 낮고 지계의 과보는 중간이고 지혜의 과보는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급ㆍ중급ㆍ상급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외도
보시하는 이는 모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보시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보시를 행하는 이는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이른다.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보시라 하는가?
불자
과보를 위한 보시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기 때문에.[수투로]
과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현세의 과보[現報]와 후세의 과보[後報]이다. 현세의 과보란 명예[稱敬]와 존중[敬愛] 등이고, 후세의 과보란 후세의 부귀 등인데,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과보라 한다. 왜 그러한가? 바꾸어서 얻고자 하기 때무이다. 비유하면 물건을 팔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멀리서 다른 지방에 도착해서 비록 잡다한 물건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지만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있지 않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업(業)은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보시해서 과보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보시라 하는가?
불자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존중하면서 이익되게 하고자 금세와 후세의 과보를 구하지 않고 보살들과 상급의 사람들과 같이 청정한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을 청정한 보시라고 한다.
외도
계를 지키는 이는 모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계를 지키는 일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이를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외도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인가?
불자
계를 지켜서 즐거움의 과보를 구하네.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수투로]
즐거움의 과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계(人界)에서 부귀를 받는 것이다. 계를 지켜서 천계에서 천녀(天女)
 
 
 
와 즐거이 놀기를 바라거나, 인계에서 다섯 욕계의 즐거움[欲樂]을 받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란 안으로는 다른 색(色)을 욕구하면서 바깥으로는 친해서 사이가 좋은 척하며 속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이 난타에게 말했다.
 
마치 숫양들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네.
앞의 것을 갖고서 다시 버리네.
그대가 계를 지키고자 하나
그 일이 또한 이와 같네.
 
몸은 비록 계를 지키나
마음은 탐욕에 이끌리네.
이 업(業)이 청정하지 않거늘
이 계(戒)를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계라고 하는가?
불자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선법은 계(戒)가 근본이다. 계를 지키는 이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으니 환희한다. 환희하니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즐거우니 한 마음[一心]을 얻는다. 한 마음을 얻으니 진실한 지혜가 생긴다. 진실한 지혜가 생기니 싫어함을 얻는다. 싫어함을 얻으니 탐욕을 벗어난다. 탐욕을 벗어나니 해탈을 얻는다. 해탈하니 열반을 얻는다. 이것이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외도
만약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면 울타라가(鬱陀羅伽)ㆍ아라라(阿羅邏)21) 등이 최상이네.[수투로]
등이 최상이네.[수투로]
 
 
21) 범어로는 웃라까(udraka)와 아라라(aļāra)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이 두 선인(仙人)한테서 배웠다.
 
 
 
만약 지혜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말한다. 이제 울타라가와 아라라 외도(外道) 등이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가 된다.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지혜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지혜라고 하는가?
불자
세간[世界]에 계박되기에 청정하지 않네. 마치 원수가 와서 친구가 되는 것과 같네.[수투로]
세간의 지혜는 생사(生死)를 증대[增長]하게 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지혜는 되돌아가서 계박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원수가 처음에는 친구인 척 속이다가 오래되면 해를 끼치는 것과 같다. 세간의 지혜도 또한 이러하다.
외도
단지 이 지혜만이 생사를 증대하는가? 보시와 지계도 그러한가?
불자
복(福)을 취하고 악을 버리네. 이것들은 유행(流行)하게 하는 법이네.[수투로]
복은 복의 과보를 말한다.
외도
만약 복이 복의 과보를 말한다면 왜 수투로(修妬路)에서 단지 복만을 말하는가?
불자
복은 원인이고 복의 과보는 결과이다. 어떤 때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하고 어떤 때는 결과로서 원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천량의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금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금으로 인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 그림을 보고 손재주가 좋다[好手]고 말하는 것과 같다. '취한다'란 집착한다는 것이니, 복의 과보에 집착하는 것이다. 악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유행[行]이란, 사람을 항상 생사에 유행하게 하는 것이다.
 
 
 
외도
어떤 것들이 유행(流行)하지 않는 법인가?
불자
둘 모두를 버리는 것이다.[수투로]
'둘'이란, 복의 과보와 죄의 과보를 말한다. '버린다'란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복에 집착하지 않으면 다시 5도(道)22)에 왕래23)하지 않는다. 이것을 유행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하지 않는다. 이것을 유행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외도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하네. 과보가 좋기 때문이네. 또 인연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복의 과보는 좋아서 모든 중생들은 항상 좋은 과보를 구한다. 그러니 왜 버려야 하겠는가? 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대는 지금 이유[因緣]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복을 버릴 필요가 없다.
불자
복이 소멸했을 때 괴로움이 있네.[수투로]
'복'이란, 복의 과보를 말한다. 소멸은 상실하고 괴멸하는 것을 말한다. 복의 과보가 소멸할 때 즐거운 일이 없어지게 되어 큰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즐거운 느낌[樂受]이 생길 때 즐겁고 머물고 있을 때 즐겁지만 소멸할 때는 괴롭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복을 버려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 복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도(助道)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복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하물며 어찌 죄를 버리지 않겠는가?
외도
죄와 복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대가 복이 소멸할 때 괴롭다고 말한다면 죄가 생기고 머물 때는 즐거울 것이다.
불자
죄가 머물 때는 괴롭네.[수투로]
 
'죄'란 죄의 과보를 말한다. 죄의 과보가 생길 때 괴롭거늘 하물며 어찌 머
 
 
22) 여기서는 5취(趣)를 뜻한다.
23) 윤회를 뜻한다.
 
 
 
물 때 괴롭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괴롭고 머물 때 괴롭고 소멸할 때 즐겁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대가 “죄와 복은 상반되기에 죄가 생길 때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대답하겠다.
“그대는 어찌 죄와 복이 상반되기에 죄가 소멸할 때 즐겁고 생길 때와 머물 때는 괴롭다고 말하지 않는가?”
외도
상주함의 복에는 버려야 할 이유가 없기에 버리지 않아야 하네.[수투로]
그대가 복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소멸할 때 괴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상주함의 복의 과보에는 소멸할 때의 괴로움이 없으니 버리지 않아야 한다. 경전에서는 “마사(馬祀)24)를 행하면 이 사람은 노쇠함과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복의 과보가 상주하기에 태어나는 곳도 상주한다. 이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를 행하면 이 사람은 노쇠함과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복의 과보가 상주하기에 태어나는 곳도 상주한다. 이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불자
복은 버려야 하네. 두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이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독이 섞인 밥은 먹을 때는 즐겁고 소화하고자 할 때는 괴롭다. 복도 이와 같다. 또 복의 과보가 있는 것은 즐거움의 원인이지만 많이 받아들이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불을 가까이 하면 한기를 막아주기에 즐겁지만 더 가까이에 다가서면 몸을 태우니 괴롭다. 그러므로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두 가지 특징이 있기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그대가 마사(馬祀)의 복보(福報)는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언설이 있을 뿐이네. 인연이 없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마사(馬祀)의 과보는 실제로는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마사의 업의 인연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의 인연이 한계가 있다면 과보도 한계가 있다. 마치 진흙덩어리가 작다면 물단지도 작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사(馬祀)의 업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그대의 천신[天]은 증오가 있어서 함께 다투고 서로 괴롭힌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또
 
 
24) 말을 희생으로 바치는 제사이다.
 
 
 
그대의 마사 따위의 행위[業]는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모두 무상하다.
유루의 청정한 복은 무상하기에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죄가 섞인 복을 버리지 않겠는가? [수투로]
또 마사(馬祀)와 같은 행위[業]에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승거경』에서는 “제사[祀法]는 청정하지 않고 무상하다. 이루고 이루지 못함의 특징(相)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외도
만약 복을 버린다면 짓지 않아야 할 것이네.[수투로]
만약 복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면 처음에 짓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왜 지혜가 있는 사람이 헛되이 괴로운 일을 짓는가? 비유하면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고 나서 다시 깨뜨리는 것과 같다.
불자
도(道)를 생기게 하는 순서이네. 마치 때묻은 옷을 빨아서 물을 들이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때묻은 옷을 먼저 빨고 후에 깨끗해졌을 때 물을 들인다면 빨래해서 깨끗이 한 것이 헛되지 않은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물들임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때묻는 옷은 물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먼저 죄의 때를 제거하고 다음에 복덕(福德)으로써 마음에 배이게 하고 이후에 열반도(涅槃道)의 물[染]을 받는 것이다.
외도
복을 버리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수투로]
복에 의지해서 악을 버린다. 무엇에 의지해서 복을 버리는가?
불자
무상(無相)이 가장 위이네.[수투로]
복을 취하면 인간계와 천계에 태어나고 죄를 취하면 3악도(惡道)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무상의 지혜가 가장 으뜸이다. 무상이란 모든 상(相)을 억념하지 않고 모든 수(受)를 여의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에 의지하는 곳[所依]이 없다. 이것
 
 
 
을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이 방편에 의지해서 복을 버릴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세 종류의 해탈문25) 없이 제1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에 의지하지 않고서 앎과 봄을 얻고자 하는데, 증상만(增上慢)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공(空)이란 말이 실질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없이 제1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에 의지하지 않고서 앎과 봄을 얻고자 하는데, 증상만(增上慢)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공(空)이란 말이 실질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2. '나'26)를 타파하는 장[破神品]
를 타파하는 장[破神品]
외도
“모든 법은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네. '나'[神] 등의 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비라(迦毗羅)ㆍ우루가(優樓迦) 등은 “'나[神]'와 법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비라는 “원질[冥初]27)에서 지각[覺]이 생기고, 지각에서 아만(我慢)[我心]이 생기고, 아만에서 5유(唯:五微塵)28)가 생기고, 5유에서 5대(大)29)가 생기고, 5대에서 11근(十一根)30)이 생긴다. '나'는 주재하고 상주하고 지각의 특성을 가지며 모든 법 속에 거처한다.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고 후패[敗]하지 않으며 모든 법을 포섭한다. 이 25제(二十五諦)를 알면 해탈을 얻고 이것을 알지 못하면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루가는 “나가 실제로 존재하며 상주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ㆍ봄ㆍ눈깜박임ㆍ수명
 
 
25) 삼해탈문이란 해탈을 얻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일체 만유가 공하다고 관하는 공(空)해탈문, 상대적 차별의 모양이 없다고 관하는 무상(無相)해탈문, 일체의 것을 구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무작(無作) 또는 무원(無願)해탈문이 있다.
26) 수론의 'puruşa'와 승론의 'ātman'에 해당하는 말이다. '나'로 번역될 수 있는데, 특정한 술어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따옴표 안에 넣었다.
27) 범어로는 prakŗti이고, 보통 '자성(自性)'으로 한역된다. 세계를 생성하게 하는 질료인이다.
28)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5경(境)이다.
29)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이다.
30) 5지근(知根)과 5작근(作根)과 의근(意根)을 합하여 11근이라 한다. 5지근은 안(眼)근ㆍ가(耳)근ㆍ비(鼻)근ㆍ설(舌)근ㆍ신(身)근 등이고, 5작근은 설(舌)근ㆍ수(手)근ㆍ족(足)근ㆍ남녀(男女)근ㆍ대유(大遺)근 등이다.
 
 
 
등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또 탐욕ㆍ증오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지혜 등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악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해탈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고 무상(無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자
만약 '나'가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악하고 바르지 못한 일이겠지만, 만약 존재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에 무슨 과실이 있겠는가? 이를 찬찬히 관찰해 보건대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승거경』에서는 “지각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나'이다”고 말한다.
불자
'나'[我]와 지각[覺]은 동일한 것인가, 상이한 것인가?
외도
'나'와 지각은 동일한 것이다.
불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나'는 무상할 것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는 무상할 것이다. 비유하면 뜨거움은 불의 속성이니 뜨거움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도 무상한 것과 같다. 이제 지각은 실제로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특성[相]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고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고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기 때문이고 존재하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
발생하지 않으니 상주하는 것이네.[수투로]
발생의 상(相)이 있는 법은 무상하다. '나'는 발생의 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닐 것이네.[수투로]
 
 
 
그대가 지각은 무상하고 '나'는 상주한다고 말하니, '나'는 지각과 상이할 것이다. 만약 '나'와 지각이 상이하지 않다면 지각이 무상하기 때문에 '나'도 무상할 것이다. 또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옳은 점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이 '나'의 속성이라면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모든 곳에 편재하니 지각도 5취[道]에 동시에 편재해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은 한 곳에서 작용하기에 편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각은 '나'의 속성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와 지각은 동일할 것이네.[수투로]
그대가 지각을 '나'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각과 동일할 것이니, '나'는 편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하면 불에 뜨거움의 속성과 뜨거움 아님의 속성이 없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아서 편재함과 편재하지 않음의 속성이 없을 것이다.
만약 편재한다고 한다면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 있을 것이네.[수투로]
또 그대가 '나'가 편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두 속성이 있을 것이다. 지각인 속성과 지각 아님인 속성이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편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지각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이고, 만약 지각 아님의 처소에 떨어진다면 지각 아님이다.
외도
능력이 편재하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지각이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실은 없다.
불자
그러나 능력과 능력을 갖는 것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지각의 능력이 있다면 이 곳에 처할 때 지각은 작용이 있으면서 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지각의
 
 
 
작용이 없는 곳에서도 지각의 능력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이 언설[語]이 있을 뿐이다.
외도
인과 연들이 화합해서야 지각의 능력에 작용이 있네.[수투로]
'나'는 비록 지각의 능력이 있지만 반드시 인과 연들이 화합하는 것을 기다려서야 작용이 있는 것이다.
불자
발생의 상(相)에 떨어지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할 때 지각에 작용이 있다면 이 지각은 인과 연들에 속하기 때문에 발생의 상에 떨어진다. 만약 지각과 '나'가 상이하지 않다면 '나'도 또한 발생의 상을 갖는다.
외도
마치 등불과 같네.[수투로]
마치 등불이 사물을 비추긴 하지만 사물을 만들 수는 없듯이 인과 연들도 이와 같아서 지각으로 하여금 작용이 있게 하지만 지각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불자
그렇지 않다. 비록 등불이 물단지 등을 비추지는 않지만 물단지 등을 얻을 수 있고 또 작용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인과 연들이 화합하지 않을 때면 지각을 얻을 수 없어서 '나'도 또한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마치 색과 같네.[수투로]
색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해도 등불이 비추지 않으면 인지할 수 없듯이, 그렇듯이 지각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해도 인과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인지할 수 없다.
불자
그렇지 않네. 자기의 상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아직 비춤이 있지 않다면 사람이 비록 색의 상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색의 상은 스스로 인지한다. 그대의 지각의 상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상이 없기 때문이다. 색의 상은 사람이 인지하기 때문에 색의 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사 보지 않을 때라도 항상 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의 인식은 '나'의 속성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식이 없는 곳에서 인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인식[知]과 지각[覺]은 동일한 의미이다.
외도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을 암송해서 “인식과 '나'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나'는 무상(無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와 인식은 합하기 때문이네. 마치 소를 갖는 것[有牛]과 같네.[수투로]
사람과 소가 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소를 갖는 것[有牛]'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神]'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塵]가 합하기 때문에 '나'를 '인식을 갖는 것[有知]'이라 하는 것이다.
불자
소의 성질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소의 성질[相]은 소에 있는 것이지 '소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소가 합한다 하더라도 '소를 갖는 것'이 소인 것은 아니다. 소만이 소인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나'와 인식이 합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특성[知相]은 인식[知]에 있지, '나'가 인식인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와 근[情]과 의(意)와 경계가 합하기에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하지만, 이 인식이 색경[色塵] 등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불이 태우지 불을 갖는 사람이 태우지 않는 것과 같다.
외도
법(法)31)을 사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을 사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31) 인식[知]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비록 봄[見相]이 있지만 등불을 사용하면 보고 등불을 사용하지 않으면 보지 못한다. '나'에게 비록 인식이 있지만 인식을 사용하면 인식하고 인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인식이 인식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근[情]이 의(意)와 경계가 합해서 인식이 발생할 때 이 인식이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식이 인식하는 것이지 ('나'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 인식하는데 '나'가 다시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등불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등불은 색 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등불이 비록 먼저 존재한다 하더라도 색 등을 인식할 수 없다. 법(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식만이 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식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32)이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이 무엇을 사용하겠는가?
외도
말의 몸[馬身]과 합하기에 '나'를 말[馬]이라고 하는 것이네.[수투로]
가령 '나'가 말의 몸과 합하기에 '나'를 말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나'가 비록 (말의) 몸과 상이하더라도 또한 '나'를 말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말의) 몸 속의 '나'는 말이 아니네.[수투로]
말의 몸은 말이다. 그대가 “몸이 '나'와 상이하다”고 말한다면 '나'가 말의 몸과 상이한 것인데, 어떻게 '나'를 말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나'로 '나'를 비유한다면 부처(負處)33)에 떨어진다.
에 떨어진다.
외도
마치 검은 명주와 같네.[수투로]
 
 
32) '나[神]'를 가리킨다.
33) 논증이 성립하지 않아 지는 것이다.
 
 
 
비유하면 검은 명주와 같다. 검음이 비록 명주와 상이하긴 하지만 명주와 검음이 합하기에 검은 명주라 하듯이, 그렇듯이 인식이 비록 '나'와 상이하긴 하지만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나'와 인식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나'는 '나'가 아닐 것이다. 왜 그러한가? 나는 앞에서 “인식이 인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인식을 '나'라 하지 않는다면 또한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다른 것에 합하기에 다른 것을 이름으로 삼는다면 인식이 '나'와 합하는데 어떻게 인식을 '나'라 이름하지 않겠는가?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검은 명주를 비유로 든다면 스스로 그대의 경전을 위배하게 된다. 그대의 경전에서 검음은 속성[求那]이고 명주는 실체[陀羅驃]이다. 실체는 속성이 되지 않고 속성은 실체가 되지 않는다.
외도
몽둥이를 가진 자와 같네.[수투로]
마치 사람과 몽둥이가 합하기에 사람을 '몽둥이를 가진 자[有杖]'라 하지 몽둥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몽둥이가 사람과 합하는 것이지만 몽둥이를 '사람을 갖는 것[有人]'이라고 하지도 않고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나'가 인식과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고 하지 인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이 인식이 '나'와 합하기에 인식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몽둥이를 가진 자는 몽둥이가 아니네.[수투로]
비록 몽둥이가 몽둥이를 가진 자와 합하지만 몽둥이를 가진 자가 몽둥이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인식의 특성은 인식 속에 있지 '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식 주체가 아니다.
외도
또 수론학파의 사람들[僧佉人]은 “만약 인식이 '나'와 상이하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전에는 그와 같은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지각은 '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의 특징이 있는 것을 '나'로 삼
 
 
 
는다. 그러므로 항상 지각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말한다.
외도
앞에서 이미 타파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지각의 특징이 있다면 '나'는 하나가 아니네.[수투로]
지각에는 여러 고(苦)와 낙(樂)등의 지각이 있다. 만약 지각이 '나'의 특징[相]이라면 '나'는 여럿일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하나이면서 여러 상(相)이 되네. 마치 파리구슬과 같네.[수투로]
마치 한 개의 파리구슬이 색깔에 따라서 청색이나 황색이나 적색이나 백색으로 변하듯이 그렇듯이 한 지각이 경계[塵]에 따라서 여럿이 되어 고(苦)를 지각하거나 낙(樂)을 지각하거나 등등을 한다. 비록 지각이 여러 상이 있긴 하나 실제로는 하나의 지각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죄와 복은 동일한 상(相)일 것이네.[수투로]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覺]이라면 이것을 복이라고 한다. 만약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각[覺]이라면 이것을 죄라고 한다. 모든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이 법을 믿는다. 만약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과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이 동일하다면 죄와 복이 동일한 상일 것이다. 마치 보시와 도둑질 등이 또한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가령 구슬과 같은 것은 먼저 존재하고 있다가 색을 따라서 변하지만, 지각은 연(緣)과 함께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구슬은 새로 새로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상이 동일하지 않다. 그대가 구슬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결과는 여럿이지만 하나이네.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수투로]
마치 한 명의 도공이 물단지나 동이 등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만드는 이가
 
 
 
하나이기 때문에 결과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하나의 지각이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행위[業]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을 행할 수 있다.
불자
도공은 구별[別異]이 없네.[수투로]
가령 도공의 몸은 하나여서 구별[異相]이 없기에 물단지나 동이 등과 다르다. 그러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지각이나 다른 이를 해롭게 하는 지각은 구별이 실제로 존재한다. 또 해롭게 하는 행위나 이롭게 하는 행위 등은 지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하기 때문에.[수투로]
어떤 사물은 지각되지는 않지만 추리되기 때문에 인식된다. 마치 사람이 이미 가고 나서 이후에 다른 곳에 도달하는 것을 볼 때나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질 때 가는 행위[去]를 보지 못하지만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는 행위를 알 듯이, 그렇듯이 속성들이 실체에 의지하는 것을 본다.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을 보고 추리해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와 인식[知]이 합하기에 '나'를 인식 주체[能知]라 한다.
불자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인식하지 못할 때 '나'가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의하면 '나'는 편재하고 광대한 데 반해 인식[知]은 적다. 만약 '나'가 인식[知]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곳은 몸 바깥을 말한다. 어떤 때는 몸 안을 말한다. 수면이나 기절 등 이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知相]이라면 어떤 곳에서는 어떤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인식의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의 특징이 있기에 '나'가 존재한다”는 그대의 말은 공허해서 실질이 없다.
외도
가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인식이 없네. 마치 연기가 그러하듯.[수투로]
 
 
 
가령 연기가 불의 특징이긴 하지만 석탄일 때는 연기가 없다. 이 때에 연기가 없지만 불은 존재한다. 그렇듯이 인식이 '나'의 특징이긴 하지만 인식이 있든 인식이 있지 않든 '나'는 항상 존재한다.
불자
그렇지 않네. '나'는 인식 주체이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존재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인식 주체[能知]가 아니다. 또 인식의 특징이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대에 따르면 '나'가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연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 불이 존재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불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다. '나'가 인식할 때든 인식하지 않을 때든 봄의 주체[能見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또 그대는 공통 표상[共相]을 보고 추리[比知]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가는 자는 가는 행위로써 다른 곳에 도달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가는 행위를 떠나서 가는 자가 다른 곳에 도달하는 일은 있지 않다. 그러기에 가는 자가 보이는데 다른 곳에 도달한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가는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나'를 떠나서 인식이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거북이를 보고서 토끼의 표상[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되고, 석녀를 보고서 아이의 표상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듯이 인식을 보고서 '나'의 표상[神想]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도
마치 손이 잡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손이 어떤 때는 잡고 어떤 때는 잡지 않는 것과 같다. 잡지 않을 때에는 손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손은 항상 손이다. '나'도 그러해서 어떤 때는 인식하고 어떤 때는 인식하지 않는다. 인식하지 않을 때 '나'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항상 '나'인 것이다.
 
 
 
불자
잡음은 손의 특징이 아니네.[수투로]
잡음은 손의 행위[業]이지 손의 특징[相]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잡는다고 해서 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인식이 '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나'는 실제로 존재하네. 고통[苦]이나 쾌락[樂]을 지각하기 때문에.[수 투로]
만약 지각[覺]이 없다면, 지각이 없는 몸은 홀로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죽은 사람은 몸이 있어도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몸을 갖는 어떤 것이 고통이나 쾌락을 지각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
불자
만약 고통[惱]이 있다면 또한 절단되는 것이네.[수투로]
가령 칼로 몸을 벨 때 고통[苦]이 생긴다. 만약 칼로 '나'를 베서 '나'에도 고통이 있다면 '나'도 절단되는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감각되는 것[觸]이 없는 것이 마치 빈 공간과 같네.[수투로]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는다.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안의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타지 않고 단지 뜨거움만이 있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안의 '나'는 감각되는 것이 없기에 절단되지 않고 단지 고통만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가는 행위가 없네.[수투로]
만약 '나'에 감각되는 것[觸]이 없다면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가는 행위[去法]는 의지[思惟]에서 생기고 몸의 움직임에서 생긴다. 몸에는 의지가 없다. 지각[覺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없다. 몸[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몸은 다른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외도
마치 장님과 절뚝발이와 같네.[수투로]
비유하면 장님과 절뚝발이가 서로 의지해서 가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는 의지[思惟]가 있고 몸에는 움직일 수 있는 힘[動力]이 있어서 결합해서 간다.
불자
상이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장님과 절뚝발이의 경우는 두 감각[觸]과 두 의지[思惟]가 있기에 당연히 갈 수 있는 것이지만, 몸과 '나'는 두 가지34)가 없기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이 ('나'는) 절단된다는 과실이 있다.
가 없기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가는 행위가 있지 않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이 ('나'는) 절단된다는 과실이 있다.
또 그대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빈 공간은 감각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미한 뜨거움이 빈 공간에 편재하기에 몸이 감각해서 뜨거움을 인식하는 것이지 빈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간에 뜨거움이 존재한다고 임의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외도
마치 집주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집이 불에 탈 때 집주인은 고통스러워 하지만 불에 타지 않듯이, 그렇듯이 몸이 절단될 때 '나'는 단지 고통스러워할 뿐 절단되지는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무상(無常)하기에 불에 타네.[수투로]
집이 불에 탈 때 풀과 나무 등은 무상하기에 타기도 하고 열이 나기도 한다. 빈 공간은 상주하기에 타지도 않고 열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듯이 몸은 무상하기에 고통스러워 하기도 하고 절단되기도 하지만 '나'는 상주하기에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고 절단되지도 않는다. 또 집주인은 불에서 멀리 있기에 불에 타지 않는다. 그대의 경전에서 “'나'는 편재한다”고 말하기에 또한 절단된다.
외도
반드시 '나'가 존재하네. 색 등을 파악하기 때문이네.[수투로]
 
 
34) 감촉과 의지를 말한다.
 
 
 
5근[情]은 5경[塵]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知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 인식한다는 것을 안다. '나'가 눈[眼] 등을 사용해서 색 등의 경계를 인식한다. 마치 사람이 낫을 사용해서 5곡을 베서 거두는 것과 같다.
불자
왜 귀를 사용해서 보지 않는가?[수투로]
만약 '나'에 능력[力]이 있다면 왜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보지 않는가? 마치 불이 탈 때 곳곳이 모두 타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어떤 때는 낫 없이 손으로 베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집에 여섯 방향으로 난 창문[六向]이 있어서 사람이 그 안에 거주하면서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나'도 이와 같으니 곳곳을 볼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도공이 그러하듯.[수투로]
비록 '나'에 보는 능력[見力]이 있긴 하지만 눈 등이 감각하는 것[所伺]과 같지 않다. 경계가 각각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귀를 사용해서 색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도공이 비록 물단지를 만들긴 하지만 진흙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나'에 비록 보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눈 아닌 것을 사용해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일 것이네.[수투로]
만약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본다면 '나'와 눈은 상이할 것이다. '나'와 눈이 상이하다면 '나'는 눈이 없을 것이다. '나'에 눈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그대가 도공의 비유를 든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진흙 없이는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흙이 곧 물단지이다. 그러나 눈은 색과 상이하기 때문이다.
외도
'나'가 존재하네. 다른 근[情]이 작동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오는가? 그렇다면 눈을 사용해서 맛[味]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소유하는 자35)가 인식한다. 또 다음과 같다.
가 인식한다. 또 다음과 같다.
한 사물을 눈과 몸이 인식하기 때문에.[수투로]
가령 사람이 눈을 사용해서 이전에 물단지 등을 인식한 일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비록 눈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몸이 감촉해서 (물단지 등을) 또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불자
마치 장님과 같다. 논[修妬路]에서 이미 타파했다. 또 만약 눈을 사용해서 다른 이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볼 때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온다면, 다른 근[감관]은 왜 작동하지 않겠는가? 몸도 또한 이와 같다.
외도
사람이 태우는 것과 같네.[수투로]
사람이 비록 태우긴 하지만 불 없이 태울 수 없듯이 '나' 또한 이와 같아서 눈을 사용해서 보는 것이지 눈 없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불자
불이 태우는 것이네.[수투로]
사람이 태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허위의 말[妄語]이다. 왜 그러한가? 사람에게는 태움의 성질[燒相]이 없다.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다. 가령 바람이 나무를 움직이고 서로 어울려 불을 일게 해서 (불이) 산이나 못을 태울 때 행하는 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이 스스로 태우는 것이지 사람이 태우는 것이 아니다.
외도
의(意)가 그러하듯.[수투로]
가령 죽은 사람은 비록 눈이 있긴 하지만 의(意)가 없기 때문에 '나'가 보지 못한다. 만약 의가 있다면 '나'가 본다. 그렇듯이 '나'가 눈을 사용해서 보지 눈 없이 보는 것이 아니다.
불자
 
만약 의(意)가 있다면 인식할 수 있고 의가 없다면 인식할 수 없다면,
 
 
35) '나[我]'를 가리킨다.
단지 의가 눈 등의 문(門)에 작용하면 인식하는데 '나'를 다시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의(意)는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의와 의가 서로 인식한다면 이것은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나'로써 의를 인식한다. 무한역행이 아니다.
불자
'나'에 또 '나'가 존재하네.[수투로]
만약 '나'가 의(意)를 인식한다면 누가 다시 '나'를 인식하겠는가? 만약 '나'가 '나'를 인식한다면 이것도 무한역행이 된다. 우리의 교법에 따르면 현재의 의(意)가 과거의 의(意)를 인식한다. 의[意法]는 무상하기 때문에 과오가 없다.
외도
왜 '나'를 제거하는가?[수투로]
만약 '나'를 제거한다면 어떻게 단지 의(意)만으로 대상들을 인식하겠는가?
불자
마치 불이 열을 내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불이 열을 낼 때 행위자[作者]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불은 스스로 열을 낸다. 열을 내지 않는 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의(意)가 인식의 특징[知相]을 갖는다. 비록 '나'가 없긴 하지만 (意의) 본성이 인식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 '나'와 인식은 상이하기 때문에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외도
'나'가 존재하네. 습관[宿習]의 기억이 상속(相續)하기에 태어날 때 슬픔과 기쁨이 작용하네.[수투로]
마치 갓난애가 슬픔과 기쁨 등의 일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지만 선세의 습관[宿習]의 기억[念]이 상속하기 때문에 금세에 다시 여러 가지 행위[業]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 존재하고 또 상주의 특징[常相]을 갖고 있다.
불자
편재하는 것이 어떻게 기억하는가?[수투로]
 
 
 
'나'는 상주하고 경계[塵]들에 편재하기에 기억하지 않을 때가 없다면, 기억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또 만약 기억이 모든 곳에서 발생하다면 기억도 모든 곳에 편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곳에서 동시에 기억할 것이다. 만약 기억이 부분 부분의 장소에서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分]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만약 '나'라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고, 만약 인식이라면 '나'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외도
합하기에 기억이 발생하네.[수투로]
만약 '나'와 의(意)가 합한다면 세력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억이 발생한다. 왜 그러한가? 비록 '나'와 의(意)가 합하긴 하지만 세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자
비록 앞에서 이미 타파하긴 했지만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나'가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라면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인식의 특징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기억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네.[수투로]
또 만약 기억이 발생한다면 이 때에 인식한다. 만약 기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억이 인식일 터인데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나'가 존재하네. 왼쪽 것으로 보고 오른쪽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가령 사람이 전에 왼쪽 눈으로 보고 후에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때 왼쪽 눈[彼]이 보고 오른쪽 눈[此]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안에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불자
함께 두 눈으로 답하네.[수투로]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다. 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편재한다면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또 만약 기억이라면 인식이다. 또 어떻게 귀로 보지 않겠는가? 또 만약 그렇다면 장님이다. 또 가령 왼쪽 눈으로 보는 것을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또 '나'도 왼쪽 눈[此分]으로 보고 저 부분[彼分]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왼쪽 눈으로 보고 오른쪽 눈으로 인식하기에 '나'가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도
기억은 '나'에 속하기에 '나'가 인식하는 것이네.[수투로]
기억은 '나'의 법(法)이기에, 이 기억은 '나'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나'가 기억을 사용해서 인식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부분의 인식은 인식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나'의 한 부분에서 인식이 발생한다면 '나'는 부분의 인식이다. 만약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면 '나'는 인식이 아니다.
외도
'나'의 인식은 부분의 인식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하네. 몸의 행위[身業]가 그러하듯.[수투로]
몸의 부분인 손에 행위[所作]가 존재할 때 몸의 행위[身作]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부분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나'를 인식이라 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인식이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나'는 편재하는 데 반해 의(意)는 적다. '나'와 의(意)가 합하기에 '나'의 인식이 발생한다. 이 인식과 의 등은 적다. 만약 적은 부분인 인식으로써 '나'를 인식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찌 많은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니 '나'를 인식 아님[不知]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또 그대가 몸의 행위를 비유로 든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부분[分]과 전체[有分]의 동일함과 상이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외도
옷의 일부가 불에 탄 것과 같네.[수투로]
 
 
 
옷의 일부가 불에 탔는데 불에 탄 옷이라고 하듯이, 그렇듯이 '나'가 일부를 인식하더라도 '나'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
불에 탄 것도 이와 같네.[수투로]
만약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면 '불에 탄 것'이라 하지 말고 '일부가 불에 탄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옷의) 일부가 불에 탔다고 '불에 탄 옷'이라고 한다면 이제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으니 '불에 타지 않은 옷'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 옷은 많은 부분이 불에 타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설[語言]에 집착하지 말라.
 
 
3. 단일성을 타파하는 장[破一品]
외도
'나'가 존재한다. 존재ㆍ단일성ㆍ물단지 등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수 투로]
만약 '나[神]'가 존재한다면 '나'의 소유가 존재한다.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은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나'는 이미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을 사유해 볼 때 동일한 것으로써 존재하는가, 상이한 것으로써 존재하는가? 두 가지 모두 과실이 있다.
외도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 등이 만약 동일한 것으로써 존재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불자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거나 전도되네.[수투로]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가령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석가[憍尸迦]의 경우 그 인다라가 있는 곳에 석가와 석가가 있
 
 
 
듯이, 그렇듯이 존재가 있는 곳마다 단일성과 물단지가 있고 단일성이 있는 곳마다 존재와 물단지가 있고 물단지가 있는 곳마다 존재와 단일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옷 따위의 사물들도 또한 물단지일 것이다.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한 사물이 존재할 것이니 모두 물단지일 것이다. 이제 물단지ㆍ옷 따위의 사물들은 모두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또 존재가 상주하기 때문에 단일성과 물단지도 상주할 것이다. 또 만약 존재를 말한다면 단일성과 물단지를 말하는 것이다. 또 단일성이 수(數)이므로 존재와 물단지도 수일 것이다. 또 만약 물단지가 5신(身)36)이라면 존재와 단일성도 5신일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형태가 있고 질애[對]가 있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형태가 있고 질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무상하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무상할 것이다. 이것을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한다”의 내용이다.
이라면 존재와 단일성도 5신일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형태가 있고 질애[對]가 있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형태가 있고 질애가 있을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무상하다면 존재와 단일성도 무상할 것이다. 이것을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한다”의 내용이다.
만약 곳곳의 존재 이것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곳곳의 물단지 이것에도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사물 사물[事事]의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지금의 물단지는 물단지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존재를 말할 때 단일성과 물단지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이제 단일성과 물단지를 말한다 해도 단일성과 물단지를 포함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물단지도 물단지가 아닐 것이다.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의 내용이다.
만약 물단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존재를 말해야 하고 존재를 말하고자 한다면 물단지를 말해야 한다. 또 그대에 따르면 물단지가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와 단일성도 성립하고, 존재와 단일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물단지도 성립한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일한 그대로 모든 것이 전도된다'의 내용이다. 여기서 네 쪽에 걸쳐서 단어를 풀이하고 있는데 번역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외도
사물은 존재와 단일성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36)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갖는 것.
 
 
 
사물은 존재이고 또한 단일성이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한다.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하는 곳이 모두 물단지인 것은 아니다. 또 만약 물단지를 말할 때 이미 존재와 단일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와 단일성을 말할 때 반드시 물단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자
물단지에는 둘이 존재하는데 왜 둘에는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수투로]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왜 존재와 단일성이 존재하는 곳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또 왜 존재와 단일성에 물단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가?
외도
물단지 속에 물단지의 존재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수투로]
물단지 속의 물단지의 존재는 물단지와 상이하지 않지만 옷 등의 사물들과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이곳 저곳의 물단지 이것에 물단지의 존재가 존재하고 또한 이곳 저곳의 물단지의 존재 이것에 물단지가 존재하지, 이곳 저곳의 존재가 존재하는 곳에 물단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불자
그렇지 않네. 물단지와 존재는 상이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존재는 보편[總相]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존재를 말한다면 물단지 등의 사물들을 믿고 만약 물단지를 말한다면 옷 등의 사물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특수[別相]이고 존재는 보편인데 어떻게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외도
아버지와 아들과 같네.[수투로]
한 사람이 아버지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듯이 그렇듯이 보편은 또한 특수이기도 하고 특수는 또한 보편이기도 하다.
불자
그렇지 않네. 아들이기에 아버지이네.[수투로]
 
 
 
만약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면 아버지라 하지 않는다. 아들이 태어난 이후에 아버지라 한다. 또 이 비유는 나에게 적합한 것이지 그대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외도
물단지가 존재하네. 모두 믿기 때문이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물단지의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 믿는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존재한다.
불자
존재와 상이하지 않기에 모든 것이 없네.[수투로]
만약 물단지와 존재가 상이하지 않다면 물단지는 보편이지 특수가 아닐 것이다. 특수가 없기 때문에 보편도 없다. 특수가 있기 때문에 보편이 있는 것이다. 만약 특수가 없다면 보편이 없다. 이 둘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없다.
외도
마치 부분인 발 등을 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네.[수투로]
마치 부분인 머리나 발 등이 몸과 다르지 않지만 (머리나) 발만을 몸이라고 하지 않듯이 그렇듯이 물단지와 존재가 상이하진 않지만 물단지는 보편이 아니다.
불자
만약 발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왜 발을 머리라 하지 않는가?[수투로]
만약 부분인 머리나 발 등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발은 머리일 것이다. 이 둘은 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드라와 쌰끄라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드라는 쌰끄라이다.
외도
부분들은 다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부분[分]과 전체[有分]는 다르지 않지만 부분과 부분은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발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몸이 없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발이 머리와 다르다면 머리는 부분인 발 등과 다를 것이다. 그와 같이
 
 
 
단지 부분들만이 존재하고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을 몸이라고 한다.
외도
그렇지 않네. 많은 원인에서 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네. 색 등이 물단지이듯이.[수투로]
부분인 색 등의 많은 원인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단지 색만을 물단지라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색이 없을 때 물단지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분인 색 등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분인 발 등과 몸도 이와 같다.
불자
색 등이 그렇듯 물단지도 동일한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물단지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다섯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물단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물단지라고 말한다면 부분인 색 등도 또한 동일한 것이리라. 색 등과 물단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
군대와 숲과 같네.[수투로]
코끼리ㆍ말ㆍ수레ㆍ보병 많은 것들이 합하기 때문에 군대라 한다. 또 소나무ㆍ잣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합하기 때문에 숲이라 한다. 소나무만을 숲이라고 하지도 않지만 소나무가 없어도 숲이라고 하지 않는다. 군대도 그러하다. 그렇듯이 색 하나를 물단지라고 하지도 않지만 색이 없어도 물단지라고 하지 않는다.
불자
무리[衆]도 또한 물단지와 같네.[수투로]
만약 소나무과 잣나무 등이 숲과 다르지 않다면 하나의 숲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의 숲이라고 말한다면 소나무와 잣나무 등도 하나일 것이다. 숲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마디ㆍ꽃ㆍ잎 같은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타파되어야 한다. 또한 군대 등과 같은 모든 사물도 다 이와 같이 타파되어야 한다.
외도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기 때문에.[수투로]
 
 
 
그대가 부분인 색 등이 많다고 말한다면37) 물단지도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단지를 타파하려고 하면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게 된다.
물단지도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단지를 타파하려고 하면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게 된다.
불자
색 등이 많다고 해서 물단지가 많은 것이 아니네.[수투로]
나는 그대의 과실을 말한다.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스스로 부분인 색 등이 많다고 말한다면, 별도의 물단지[甁法]가 색 등의 결과가 되는 일은 없다.
외도
결과가 존재하네. 원인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존재하기에 결과가 성립하네.[수투로]
그대는 물단지라는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지 색 등 물단지의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인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결과가 존재한다. 결과가 없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색 등 물단지의 원인은 극미[微塵]의 결과이다. 그대가 색 등을 인정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모두 성립한다.
불자
결과가 존재하지 않듯이 원인도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물단지는 색 등 많은 부분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물단지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이제 색 등 많은 부분들은 물단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색 등은 수다한 것[多]이 아니다. 또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결과가 없는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결과가 타파되었기 때문에 원인도 저절로 타파된다.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세38)가 동일한 것이 되네.[수투로]
가 동일한 것이 되네.[수투로]
 
또 진흙덩어리[泥團]일 때는 현재이고 물단지일 때는 미래이고 진흙[土]일 때는 과거이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진흙덩어리 속에 물단지와 진흙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세가 동일한 것이 된다. 이미 만든 것[已作],
 
 
37) 원문에는 '수투로'라는 할주(割註)가 있는데 논서의 내용이 아닌 듯해서 번역하지 않았다.
38) 과거ㆍ현재ㆍ미래.
 
 
 
지금 만들고 있는 것[今作], 앞으로 만들 것[當作], 만드는 자[作者] 이와 같은 말들이 없어지게 된다.
외도
그렇지 않네. 원인과 결과는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네. 긴 것과 짧은 것이 그렇듯.[수투로]
긴 것에 의존해서[因] 짧은 것을 보고 짧은 것에 의존해서 긴 것을 보듯이 그렇듯이 진흙덩어리가 물단지를 상대할[觀] 때는 원인이고 진흙을 상대할 때는 결과이다.
불자
다른 것에 의존하기에, 상반되기에, 둘 모두에 과실이 있기에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또한 짦은 것 속에도 둘 속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긺[長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긴 것[長] 속에 존재하거나 잛은 것 속에 존재하거나 둘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짧은 것에 의존하기에 긴 것이라 한다. 짧은 것 속에도 또한 긺[長性]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반되기 때문이다. 만약 짧은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면 짧은 것이라 하지 않는다. 긴 것과 짧은 것 둘 속에도 또한 긺[長]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 모두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긴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는 것, 짧은 것 속에 긺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과실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짧음[短相]도 또한 이와 같다. 긺과 짦음이 존재하지 않은데 어떻게 서로 의존하겠는가?

 

백론 하권
 
제바보살지음
바수개사풀이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박인성 번역
 
 
4. 다름을 타파하는 장[破異品]
 
외도
그대가 앞에서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다르다는 것 이것에도 과실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과실들이 있는가?
불자
만약 존재 등이 다르다면 하나하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다르다면 하나하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단지가 존재와 단일성과 다르다면 이 물단지는 존재가 아니고 단일성이 아닐 것이다. 존재가 단일성과 물단지와 다르다면 물단지가 아니고 단일성이 아닐 것이다. 단일성이 존재와 물단지와 다르다면 물단지가 아니고 존재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가 상실된다. 또 물단지가 상실될 때 존재와 단일성은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존재가 상실될 때 단일성과 물단지는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단일성이 상실될 때 물단지는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 사람이 죽을 때 저 사람은 죽지 않는 것과 같다.
외도
그렇지 않네. 존재와 단일성이 합하기에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는 성립하네.[수투로]
존재와 단일성과 물단지가 비록 다르긴 하지만 물단지가 단일성과 합하기
 
 
 
때문에 물단지를 단일성이라고 한다. 그대가 “물단지가 상실되지만 존재와 단일성은 상실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다름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화합의 다름[合異], 둘째는 분리의 다름[別異], 셋째는 변화의 다름[變異]이다. '화합의 다름'이란 실체[陀羅驃]와 속성[求那]의 다름 같은 것이다. '분리의 다름'이란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다름 같은 것이다. '변화의 다름'이란 소똥덩어리가 잿덩어리로 변화되는 것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합한 것이기 때문에 물단지가 상실될 때 단일성 또한 상실되고 단일성이 상실될 때 물단지 또한 상실된다. (그러나) 존재는 상주하기 때문에 상실되지 않는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물단지가 많을 것이네.[수투로]
물단지가 존재와 합하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한다'이다. 물단지가 단일성과 합하기 때문에 '한 물단지'[一甁]이다. 또 물단지이기에 '물단지'이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많다. 그대가 “실체와 속성은 화합의 다름이기 때문에 물단지가 상실될 때 단일성도 상실되고 단일성이 상실될 때 물단지도 상실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대의 다름을 타파하고자 한다. 어떻게 다름으로써 다름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도
보편이기에, 속성이기에, 존재와 단일성은 물단지가 아니네.[수투로]
존재는 보편[總相]이기 때문에 물단지가 아니다. 단일성은 속성이기 때문에 물단지가 아니다. 물단지는 실체[陀羅驃]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만약 존재는 보편이기에 물단지가 아니고 단일성은 속성이기에 물단지가 아니라면, 물단지는 실체이기에 존재가 아니고 단일성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많은 물단지를 인정하네.[수투로]
그대는 앞에서 많은 물단지를 말했다. 하나의 물단지를 타파하고자 다시 많
 
 
 
은 물단지를 인정한다.
불자
단일성이 존재하지 기에 많음도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는 “물단지가 존재와 합하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한다'이다. 물단지가 단일성과 합하기 때문에 '한 물단지'이다. 또 물단지이기에 '물단지'이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世界]이 '한 물단지'라고 말할 때 그대는 그것을 '많은 물단지'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一] 물단지가 많은 물단지가 된다. 단일한 것[一]이 많은 것[수다한 것]이 되기 때문에 한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많은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에는 단일한 것이고 후에는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또 수[數法]의 최초는 하나이다. 만약 하나[단일]가 물단지와 다르다면 물단지는 단일한 것이 되지 않는다. 단일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물단지가 존재와 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물단지가 존재와 합하기 때문에 물단지를 존재라 하지만, 완전히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물단지가 단일성과 합하기 때문에 물단지를 단일한 것이라고 하지만 완전히 단일한 것은 아니다.
불자
단지 이 언설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만약 존재가 물단지가 아니라면 물단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물단지는 물단지가 아닐 것이네.[수투로]
만약 물단지가 존재와 합하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한다면 이 존재는 물단지 아닌 것이다. 만약 물단지와 물단지 아닌 것이 합한다면 물단지가 왜 물단지 아닌 것이 되지 않겠는가?
 
 
 
외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합함이 없기에 물단지 아닌 것이 되지 않네.[수투로]
물단지 아닌 것은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합함이 없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물단지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이제 존재가 있기 때문에 합함이 있다. 합함이 있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한다.
불자
이제 존재가 물단지와 합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물단지 아닌 것이라면 존재는 없다. 존재가 없다면 합함이 없다. 이제 존재가 물단지와 합하기 때문에 존재는 물단지가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물단지는 아직 존재와 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합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존재[無法]이기 때문에 합함이 없다. 이와 같이 아직 존재와 합하지 않았을 때 물단지는 비존재이고 비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와 합하지 않을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존재는 물단지 등을 인식하기 때문에. 등불이 그러하듯.[수투로]
존재는 물단지 등 사물들의 원인인 것만이 아니다. 또한 물단지 등의 사물들을 인식한다. 등불이 사물들을 비추듯이. 그렇듯이 존재는 물단지를 인식하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불자
만약 존재[有法]가 인식하는 것이 마치 등불과 같다면 물단지는 미리 존재할 것이네.[수투로]
이제 사물들이 미리 존재하고 이후에 등불이 비추는 것이다. 존재가 만약 이와 같다면 존재와 아직 합하지 않았을 때 물단지 등의 사물들은 미리 존재할 것이다. 만약 미리 존재한다면 이후에 존재를 어떻게 쓰겠는가? 만약 존재와 아직 합하지 않았을 때 물단지 등의 사물들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와 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면, 존재는 만듦의 원인[作因]이 아니고 인식함의 원인[了因]일 것이
 
 
 
다. 만약 상[相]에 의해 상을 갖는 것[可相]이 성립한다면 왜 하나는 둘이 되지 않는가?[수투로]
또 만약 그대가 존재는 물단지의 상이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다고 말한다면, 만약 상이 없다면 상을 갖는 사물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도 또한 변해서 다시 상이 있는 것이다. 만약 다시 상이 없어도 사물[法]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고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물단지 등도 그러할 것이다. 등불의 비유는 앞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또 등불이 스스로 비추고 바깥의 비춤에 의지하지[假] 않는 것과 같이 물단지도 스스로 존재하고 바깥의 존재에 의존하지[待] 않는다.
외도
몸의 상[身相]과 같네.[수투로]
부분[分]인 발에 의해서 전체[有分]를 인식하고서 몸이라고 할 때 발에서 다시 상(相)을 구하지 않듯이, 그렇듯이 존재가 물단지의 상이기 때문에 물단지가 존재하는 것을 인식할 때 존재에서 다시 상을 구하지 않는다.
불자
만약 부분 속에 전체가 갖추어져 있다면 왜 머리 속에 발이 있지 않은가?[수투로]
만약 몸[身法]이 있다면 일부인 발 등(等) 속에 전체가 있는가, 부분이 있는가? 만약 전체가 있다면 머리 속에 발이 있을 것이다. 몸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부분이 있다면 또한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전체는 부분과 같네.[수투로]
만약 발 속에 부분이 있다면 부분인 발과 동일할 것이다. 여타의 부분도 또한 그러하다면 전체는 부분과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전체를 몸으로 하는 일은 없다. 그렇듯이 부분인 발 등 자체에 전체가 있다는 것도 동일하게 타파된다. 전체가 없기 때문에 부분들도 또한 없다.
외도
그렇지 않네. 극미가 존재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부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극미에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분 속에 존재하지 않긴 하지만 극미들이 적집해서 물단지 등의 결과를 생기게 한다. 그러므로 전체가 존재한다.
불자
만약 적집해서 물단지가 된다면 모든 것은 물단지가 될 것이네.[수투로]
그대가 “극미에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저 이 언설이 있는 것일 뿐이니 후에 타파할 것이다. 지금은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극미가 적집해서 물단지가 될 때 만약 일체가 적집해서 물단지가 된다면 모든 극미가 남김없이 물단지가 될 것이다. 만약 일체가 적집해서 물단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극미는 물단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외도
실과 물방울의 적집하는 힘과 같이 극미도 그러하네.[수투로]
한 올 한 올의 실이 코끼리를 만들 수 없고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물단지를 채울 수 없지만 많이 적집하면 할 수 있듯이 그렇듯이 극미들이 집적하기 때문에 그 힘이 물단지가 될 수 있다.
불자
그렇지 않네. 확정되는 것[不定]이 아니기 때문에.[수투로]
한 명 한 명의 석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고 한 명 한 명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고 한 알 한 알의 모래가 기름을 낼 수 없으니 많이 적집해도 할 수 없듯이 그렇듯이 극미들 한 개 한 개도 할 수 없고 많이 적집해도 할 수 없다.
외도
부분 부분이 힘이 있기에 확정되지 않은 것이 아니네.[수투로]
실과 물방울 부분 부분이 힘이 있기 때문에 코끼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물단지를 채울 수 있다. 석녀ㆍ장님ㆍ모래 부분 부분은 힘이 없기 때문에 많이 적집해도 힘이 없다. 그러므로 확정되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석녀ㆍ장님ㆍ사막을 비유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불자
부분과 전체는 같음과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부분과 전체가 만약 같거나 다르다고 한다면, 이 과실은 앞에서 이미 타파
 
 
 
한 바 있다. 또 전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부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 부분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만드는 힘이 있겠는가? 만약 전체가 이미 존재한다면 부분의 힘을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그대는 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물단지 등의 사물들을 보는데 그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인과 연들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불자
그렇지 않다. 그대는 “존재가 물단지와 다르다”고 말하고 나는 “만약 존재가 물단지와 다르다면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비존재를 존재로 보고 존재를 비존재로 보는 것 따위이네.[수투로]
그대는 법을 파괴하는 사람과 같다. 이에 또 과실이 깊다. 왜 그러한가? 부분인 머리 등이 화합해서 이 몸이 나타날 때 그대는 몸이 아니라고 말하고 이것을 떠나서 이미 별도로 전체가 있어서 몸이라고 한다. 또 바퀴ㆍ굴대[軸] 등이 화합해서 나타나 수레가 될 때 그대는 이것을 떠나서 이미 별도로 수레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5. 근을 타파하는 장[破情品]
외도
나의 것[我所]이 실제로 존재하고 법이 실제로 존재하네. 눈 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네.[수투로]
근[감관]과 경계[대상]와 의(意)가 합하기 때문에 인식이 발생한다. 이 인식은 직관의 인식[現前知]이다. 이 인식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감관과 대상과 의(意)가 존재한다.
색을 보고 난 이후에 인식이 발생한다면 어디에 쓰겠는가?[수투로]
만약 눈이 전에 색을 보고 난 후에 인식이 발생한다면, 인식을 어디에 쓰겠
 
 
 
는가? 만약 이전에 인식이 발생하고 난 이후에 눈이 색을 본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자
만약 색을 보지 않았다면 인과 연들이 없기에 발생도 없네.[수투로]
만약 눈이 전에 색을 보지 않았다면 인과 연들이 합하지 않은 것이다. 합하지 않았기에 인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대는 “근(根)과 경계[塵]와 의(意)가 합하기에 인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합하지 않았을 때 인식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외도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불자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이미 발생한 것[生],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無生], 둘은 동시에 발생하지 않네. 존재이기 때문에, 비존재이기 때문에, 앞에서 이미 타파했기 때문에.[수투로]
봄[見]과 인식[知]이 이전에 존재해서 서로 의존해서 동시에 발생하거나, 이전에 존재하지 않거나, 이전에 반은 존재하고 반은 존재하지 않거나이다. 셋 중에서, 동시에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전에 봄과 인식이 존재한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어서 또한 발생하는 일도 없다. 만약 반은 존재하고 반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앞의 둘이 논에서 각각 이미 타파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법이 어떻게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겠는가? 또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인식은 봄에 의존하지 않고 봄은 인식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눈이 색이 도달해서 보는가, 색에 도달하지 않고서 보는가? 만약 눈이 간다면 먼 곳에 있는 것은 늦게 볼 것이네.[수투로]
또 만약 눈이 가서 색에 도달해서 본다면 먼 곳의 색은 늦게 볼 것이고 가까운 곳의 색은 빨리 볼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감은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가까운 곳의 물단지와 먼 곳의 달이 동시에 보인다. 그러므로 눈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가지 않는다면 화합함이 없다. 또 만약 눈의 힘이 색에 도달하지 않고서 색을 본다면, 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보이고 먼 곳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가? 먼 곳에 있는 것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동시에 보일 것이다. 또 설사 눈이 간다면 보고 나서 가는가, 보지 않고서 가는가?
불자
만약 보고 나서 간다면 다시 어디에 쓰겠는가? [수투로]
만약 눈이 색을 이미 보았다면 사물이 이미 변별되었는데 감을 다시 어디에 쓰겠는가?
만약 보지 않고서 간다면 의(意)가 파지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눈이 이미 색을 보지 않고서 간다면 의(意)가 파지하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니 파지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려고 할 때 서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
눈이 없는 곳에서는 또한 파지하지 못하네.[수투로]
또 만약 눈이 가서 색에 도달해서 색을 파지한다면, 몸에는 눈이 없을 것이다. 몸에 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파지함이 없게 된다. 만약 눈이 가지 않고서 색을 파지한다면 색은 눈이 없게 될 것이다. 색에 눈이 없기 때문에 그것도 또한 파지함이 없게 된다. 또 만약 눈이 가지 않고서 색을 파지한다면 천계(天界)의 색과 장애물 바깥의 색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외도
눈의 성질은 봄이기 때문에.[수투로]
봄은 눈의 성질이다. 연(緣)에 힘이 있기에 파지할 수 있다. 본성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불자
만약 눈이 봄의 성질을 갖는 것이라면 스스로 눈을 볼 것이네.[수투로]
만약 눈이 봄의 성질을 갖는 것이라면 마치 불이 뜨거움[熱]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 스스로를 뜨겁게 할 수 있고 다른 것을 뜨겁게 할 수 있듯이, 그렇듯이 눈이 만약 봄의 성질을 갖는 것이라면 스스로 눈을 볼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눈은 봄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
외도
손가락과 같네.[수투로]
눈은 비록 봄의 성질을 갖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눈을 보지 못한다. 마치 손가락 끝이 스스로를 감촉할 수 없듯이, 그렇듯이 눈이 비록 봄의 성질을 갖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불자
그렇지 않네. 감촉은 손가락의 행위이기 때문이네.[수투로]
감촉은 손가락의 행위이지 손가락의 성질인 것이 아니다. 그대가 “봄이 눈의 성질이다”고 말한다면 왜 스스로 눈을 보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손가락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빛과 의(意)가 가기에 색을 보네.[수투로]
눈의 빛과 의(意)가 가기 때문에 그것에 도달해서 색을 파지할 수 있다.
불자
만약 의가 가서 색에 도달한다면 이것에는 지각이 없네.[수투로]
의(意)가 만약 색에 도달한다면 의는 그것에 있는 것이다. 의가 만약 그것에 있다면 몸은 의가 없는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의는 실제로는 가지 않는다. 먼 곳에 있는 것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동시에 파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과거와 미래의 일을 생각하긴 하지만 생각[念]은 과거와 미래에 있지 않다. 생각할 때 가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
의(意)는 몸에 있네.[수투로]
의(意)가 비록 몸에 있긴 하지만 먼 것에 있는 것을 인식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화합하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의(意)가 몸에 있고 색이 그 곳에 있다면 색은 그 곳에 있기 때문에 화합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 화합함이 없다면 색을 파지할 수 없을 것이다.
외도
그렇지 않네. 의(意)와 빛과 색이 화합하기에 보네.[수투로]
눈과 의(意)는 몸에 있기에 화합하고, 의의 힘에 의해서 눈과 빛이 색과 화합하게 한다. 이와 같이 색을 본다. 그러므로 화합함을 잃지 않는다.
불자
만약 화합해서 봄이 발생한다면 보는 자가 없네.[수투로]
만약 그대가 “화합하기에 색을 본다”고 말하고 “오직 눈만이 색을 보고, 오직 의(意)만이 색을 파지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외도
화합함을 인정하기에 색을 파지하는 일이 성립하네.[수투로]
그대가 화합함을 인정하면 화합함이 존재한다. 만약 화합함이 존재한다면 색을 파지하는 일이 존재할 것이다.
불자
의(意)는 봄이 아니네. 눈은 인식함이 아니다. 색은 봄과 인식함이 아니네. (그러니) 어떻게 보겠는가?[수투로]
의는 눈과 다르기에 의는 봄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고, 봄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볼 수 없다. 눈은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인식함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인식함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인식할 수 없다. 색은 봄의 성질을 갖는 것도 아니고 인식함의 성질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데 다시 화합한다고 해서 어떻게 색을 파지하겠는가?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6. 경계를 타파하는 장[破塵品]
외도
근[감관]이 존재하네. 물단지 등이 파지되기 때문에.[수투로]
 
 
 
이제 물단지 등의 사물들이 파지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근들이 경계[대상]들을 파지할 수 없다면 어떤 것들이 파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들이 물단지 등의 사물들을 파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불자
색만이 물단지인 것이 아니네. 그러니 물단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물단지의 색은 눈에 보이지만 냄새[香]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색만이 물단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냄새 등이 합해서 물단지를 이룬다. 물단지가 만약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냄새 등도 눈에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외도
부분이 파지되기에 전체[一切]가 파지되네. 믿음[信]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물단지의 부분이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물단지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사람이 물단지를 보고 나서 '나는 이 물단지를 본다'고 믿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불자
만약 부분을 파지한다면 전체를 파지하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물단지의 부분인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다른 부분인 냄새[香]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부분은 전체[有分]가 되지 않는다. 만약 부분이 전체가 된다면 냄새 등 부분들도 눈에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전부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일성을 타파하는 장과 다름을 타파하는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외도
물단지가 눈에 보이는 일이 있네. 색이 눈에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수투로]
그대가 색이 눈에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니 물단지도 또한 눈에 보여야 할 것이다.
 
 
 
불자
만약 이 부분이 눈에 보인다면 저 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네.[수투로]
그대가 색이 눈에 보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색은 형태가 있는 것이기에 저 부분과 가운데 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이 장애하기 때문이네. 저 부분도 또한 이와 같다. 또 앞의 “만약 부분을 파지한다면 전체를 파지하는 것이 아니네”와 같은 것에 그는 대답해야 할 것이다.
외도
극미는 부분이 없기에 절대 타파되지 않네.[수투로]
극미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전체[一切]가 눈에 보인다. (그러니) 무슨 과실이 있겠는가?
불자
극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그대의 경전에서 “극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법(法)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극미도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색과 같이 타파된다.
외도
물단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네. 세상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물단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쓰임새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네.[수투로]
그대가 “만약 물단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 때 물단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물단지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단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외도
눈과 화합하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물단지가 비록 눈에 보이는 것[現見相]이긴 하지만 눈과 아직 만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스스로 보지 못한다. 이 물단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
 
 
 
다.
불자
눈에 보이는 것이 발생하듯이 존재도 실제로는 있지 않네.[수투로]
만약 물단지가 아직 눈과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아직 다름[異相]이 있지 않고 후에 볼 때 적은 다름이 발생한다면 이 물단지에는 눈에 보이는 것[現見相]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실제로는 다름이 발생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발생하지 않듯이 물단지의 존재도 있지 않다.
외도
다섯 경계의 일부분이 타파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존재하네.[수투로]
5신(身)이 물단지이다. 그대가 (그 중의) 하나인 색을 타파했지만 향 등은 타파하지 않았다. 이제 향 등이 타파되지 않았기에 경계[塵]가 존재한다.
불자
전체가 감각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색 등과 화합하겠는가? [수투로]
그대가 “5신(身)이 물단지를 이룬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부분인 색 등이 감각될 때 다른 부분은 감각되지 않는다. 어떻게 감각되는 것[觸]과 감각되지 않는 것[不觸]이 합하겠는가? 그러므로 5신(身)이 물단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외도
물단지와 합하기 때문에.[수투로]
부분인 색 등이 서로서로 합하지는 않지만 부분인 색 등이 물단지와 합한다.
불자
다르거나 제거된다면, 어떻게 물단지와 감각되는 것이 합하겠는가? [수투로]
만약 물단지와 감각되는 것[觸]이 다르다면 물단지는 감각되는 것이 아니다. 감각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감각되는 것과 합하겠는가? 만약 색 등에 제거된다면 다시 법인 물단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인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감각되는 것과 물단지가 합하겠는가?
 
 
 
외도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네. 경전을 믿기 때문에.[수투로]
그대의 경전에서 “색은 4대(大)와 4대로 이루어진 것[四大造]이다”고 말하고 있다. 4대로 이루어진 것 중에서 색처[色入]1)에 속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왜 눈에 보이는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에 속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왜 눈에 보이는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불자
4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을 생기게 하는가? [수투로]
지(地)는 단단함의 성질[堅相]을 갖는 것이고, 수(水)는 축축함의 성질[濕相]을 갖는 것이고, 화(火)는 뜨거움의 성질[熱相]을 갖는 것이고, 풍(風)은 움직임의 성질[動相]을 갖는 것이다. 이 4대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이 4대로 이루어진 색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외도
신근(身根)이 파지하기에 4대가 존재하네.[수투로]
이제 신근이 4대를 파지하기에 4대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불 등의 사물들과 4대로 이루어진 것 또한 존재한다.
불자
불 속의 모든 것은 뜨겁기 때문이네.[수투로]
4대 중에서 오직 불만이 뜨거움의 성질을 갖는 것이고 그 밖의 것은 뜨거움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제 불 속의 4대는 모두 뜨거움의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불은 4대[身]가 아니다. 지(地)의 단단함의 성질, 수(受)의 축축한 성질, 풍(風)의 움직임의 성질도 또한 이와 같다.
외도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네. 현재시(現在時)에 존재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안근[眼情] 등은 현재시에 경계를 파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현재시라고 한다. 만약 안근 등이 색경[色塵] 등을 파지하지 않는다면 현재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실제로는 현재시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1) 색경(色境)을 가리킨다.
 
 
 
불자
만약 법 이후에 낡은 것[故]이라면 최초에도 낡은 것이네.[수투로]
만약 법 이후에 낡은 상[故相]이 나타난다면 이 상은 지난 때[故時]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최초에 발생할 때 이미 따라서 존재하지만 미미하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낡은 상이 바뀌어 나타나서 이 때에 인식된다. 사람이 나막신[屐]을 신는 것과 같다. 최초에 이미 미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만 지각되지도 않고 인식되지도 않는다. 오래되면 상이 나타난다. 만약 최초에 낡은 것[故]이 존재하지 않다면 후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이것은 항상 새로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낡은 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에는 미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고 후에 상이 나타난다. 이제 법들은 머물지 않기 때문에 머묾의 때가 없다. 만약 머묾의 때가 없다면 경계를 파지하는 곳이 없다.
외도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인정하기에 현재시에 존재하네.[수투로]
그대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인정한다. 발생에 의존해서 새로운 것이라 하고, 다름에 의존해서 낡은 것이라 한다. 이 두 상은 과거시에 파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미래시에 파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자
그렇지 않네. 발생이기에 새로운 것이고 다르기에 낡은 것이네.[수투로]
만약 법이 오래되어서 발생한다면 새로운 것은 이미 이 새로운 것을 지나간다. 새롭게 다른 것을 낡은 것이라고 한다. 만약 낡은 것이 발생한다면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이 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 '이것은 낡은 것이다' 하고 오직 언설이 있을 뿐이다. 제일의(第一義) 중에는 새로운 것이 없고 중간의 것이 없고 낡은 것이 없다.
외도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이익을 얻는가?
불자
영원한 원리(遠離)를 얻네.[수투로]
만약 새로운 것은 중간의 것이 되지 않고 중간의 것은 낡은 것이 되지 않는다면, 씨ㆍ싹ㆍ줄기ㆍ마디가 파괴되어 꽃ㆍ열매 등 각각과 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각각 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법은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원리(遠離)한다. 원리하기 때문에 파지할 수 없다.
 
7.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는 것을 타파하는 장[破因中有果品]
외도
모든 법은 머물지 않는 것이 아니네. 존재는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비존재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수투로]
존재[有相]를 갖는 모든 법은 진흙덩어리와 같이 덩어리에서 밑바닥으로, 밑바닥에서 배로, 배에서 목으로, 목에서 입으로, 전과 후가 원인과 결과가 되어서 여러 결과가 발생할 때 여러 원인이 상실되지 않는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원인이 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존재한다.
불자
만약 결과가 발생하기에 존재[有]가 상실되지 않는다면 원인이 상실되기에 결과도 상실되네.[수투로]
그대가 “결과인 물단지가 발생할 때 진흙덩어리가 상실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물단지가 그대로 진흙덩어리이다. 만약 결과인 물단지가 발생할 때 원인인 진흙덩어리가 상실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만약 진흙덩어리가 상실되지 않는다면 진흙덩어리와 물단지에 다름이 있다고 분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실제로는 형태ㆍ시간ㆍ힘ㆍ인식ㆍ이름 등에 다름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존재가 상실된다.
외도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펴는 것과 같네.[수투로]
손가락은 구부리거나 펼 때 형태가 달라지긴 해도 실제로는 하나의 손가락이다. 그와 같이 진흙덩어리의 형태와 물단지의 형태가 달라지긴 해도 진흙은 달라지지 않는다.
 
 
 
불자
그렇지 않네. 행위와 능력은 달라지기 때문에.[수투로]2
구부리거나 펴는 것은 손가락의 행위이고 손가락은 능력이다. 만약 행위가 능력이라면 구부릴 때는 손가락이 상실될 것이다. 또 구부리는 것과 펴는 것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의 경전에서는 진흙덩어리가 그대로 물단지이기 때문에 손가락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어린 것과 젊은 것과 늙은 것과 같네.[수투로]
한 사람이 몸은 어린 것이기도 하고 젊은 것이기도 하고 늙은 것이기도 하듯이, 원인과 결과도 이와 같다.
불자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수투로]
어린 것은 젊은 것이 아니고 젊은 것은 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만약 존재가 상실되지 않는다면 상실됨이 없네.[수투로]
또 만약 존재가 상실되지 않는다면 진흙덩어리는 변해서 물단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가 상실되지 않는다면, 비존재는 없기 때문에 또한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실됨이 절대로 없다.
외도
상실됨이 없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수투로]
만약 상주하기 때문에 상실됨이 없다면 진흙덩어리는 변해서 물단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상이 없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불자
만약 무상(無常)이 없다면 죄와 복 등이 없네.[수투로]
만약 무상이 없다면 죄와 복 등이 모두 또한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죄인은 항상 죄인이 되고 복인(福人)이 되지 않을 것이다. 복인은 항상 복인이 되고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죄와 복 등'이란, 보시와 절도, 지계(持戒)
 
 
 
와 범계(犯戒) 등이다. 이와 같이 모두 없다.
외도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네. 원인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진흙 속에 미리 물단지가 있지 않다면 진흙은 물단지의 원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불자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기에 결과가 있다면 결과가 있지 않기에 원인은 결과가 없는 것이네.[수투로]
만약 진흙덩어리가 물단지가 될 때 진흙덩어리가 상실되지 않기에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고 한다면, 이 물단지가 만약 파괴된다면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을 것이다.
외도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수투로]
원인인 진흙과 결과인 진흙덩어리, 원인인 진흙덩어리와 결과인 물단지와 같이, 원인이 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지 다시 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
불자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미래가 없을 것이네.[수투로]
가령 진흙덩어리가 현재라면 물단지는 미래가 된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또한 현재가 없다. 현재가 없기 때문에 또한 과거도 없다. 그와 같다면 삼세(三世)가 뒤섞이게 된다.
외도
이름 등이 상실되어 이름 등이 발생하기 때문에.[수투로]
다시 새로운 법이 있지 않고 낡은 법도 상실되지 않는다. 오직 이름이 시간[時]에 따라 다를 뿐이다. 하나의 진흙덩어리가 물단지가 되고 물단지가 파괴되어 동이가 되고 동이가 파괴되어 다시 진흙덩어리가 되듯이, 그렇듯이 절대로 과거와 미래가 없다. 물단지와 동이는 안정되게 있으니 단지 시간에 따라서 이름을 얻을 뿐이다. 그 실체는 다름이 없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원인에는 결과가 없네.[수투로]
만약 이름이 상실해서 이름이 발생한다면 이 이름은 전에는 없다가 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 만약 이름이 미리 있다면 진흙덩어리가 그대로 물단지이다. 그러므로 미리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외도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수투로]
진흙덩어리에서 한 개의 그릇이 확정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흙덩어리에 이름이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자
만약 진흙덩어리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결과도 확정된 것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진흙덩어리 속에서 물단지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그대가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외도
미세한 형태가 있기 때문이네.[수투로]
진흙덩어리 속의 물단지의 형태는 미세하기 때문에 인식하기가 어렵다. 도공의 힘에 의지해서야 이 때에 명확하게 인식한다. 진흙덩어리 속의 물단지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진흙덩어리 속에는 반드시 미세한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종류의 인식되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고 어떤 것은 존재하긴 하지만 원인[因緣]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원인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여덟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멀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먼 나라가 그러하다. 가깝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눈의 속눈썹[眼睫]이 그러하다. 근(根)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귀먹거리나 장님이 그러하다. 마음[心]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意]이 산란되었을 때 그러하다. 미세하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극미가 그러하다. 장애물이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 벽 바깥의 사물들이 그러하다. 월등하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큰 물
 
 
속에 있는 적은 량의 소금이 그러하다.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한 톨의 쌀을 큰 쌀더미 속에 던질 때가 그러하다. 그렇듯이 진흙덩어리 속의 물단지를 눈이 보지 못하긴 하지만 결코 부들[蒲]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미세한 물단지가 진흙덩어리 속에 확정되어 존재한다.
불자
만약 미리 미세한 형태가 있다면 원인에는 결과가 없네.[수투로]
만약 물단지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진흙덩어리 속에 미세한 형태가 있어서 후에 거칠 때 인식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한가? 본래에는 거친 상[相]이 없다가 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
외도
원인 속에 결과가 있네. 각각 원인을 취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 왜 그러한가? 물단지를 만들 때 진흙을 취하지 부들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면 또한 부들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진흙에서 물단지가 생기고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었을 때 불길에 견딘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
불자
만약 앞으로 있을 것이라면 있고 앞으로 있지 않을 것이라면 있지 않네.[수투로]
만약 그대가 “진흙덩어리 속에서 물단지가 나올 것이기 때문에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제 물단지가 파괴되었기에 결과가 있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을 것이다.
외도
발생ㆍ머묾ㆍ괴멸의 순서가 있기에 과실이 없다.[수투로]
물단지 속에 깨짐의 성질[破相]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최초에 발생하고 다음에 머물고 최후에 파괴된다. 왜 그러한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파괴가 없기 때문이다.
 
 
 
불자
만약 최초에 발생하지 최후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과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진흙 속에 물단지의 발생과 머묾과 괴멸이 있다면, 왜 반드시 최초에 발생해서 최후에 괴멸해야 하고 최초에 괴멸해서 최후에 발생해서는 안 되는가? 그대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에 파괴가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물단지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머묾이 있지 않고 괴멸이 있지 않다. 이 둘은 최초에 있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
외도
그대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에 단멸의 과실이 있네.[수투로]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면 단멸(斷滅)에 떨어진다.
불자
상속(相續)하기에 단멸하지 않네.[수투로]
그대는 알지 않는가? 곡식의 씨앗에서 싹 등이 상속하기에 단멸(斷滅)하지 않고 곡식의 씨앗 등의 원인이 파괴되기에 상주(常住)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와 같이 부처님들께서는 열두 분지의 연기[因緣生法]를 말씀해 주시고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벗어나서 단멸과 상주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중도(中道)를 가셔서 열반으로 들어가신다.
 
 
8.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는 것을 타파하는 장[破因中無果品]
외도
발생이 있기에 하나는 당연히 성립할 것이네.[수투로]
그대는 “인과 연들에 의지해서 모든 법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발생은 원인 속에 미리 있는가, 원인 속에 미리 있지 않은가? 이 발생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둘 중의) 하나가 있어야 한다.
 
 
 
불자
발생이 있는 것이나 발생이 없는 것은 발생하지 않네.[수투로]
만약 발생이 있다면 원인 속에 미리 있는 것인가, 원인 속에 미리 있지 않은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해 볼 때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어찌 발생이 없는 것이랴? 그대에게 있어서 만약 물단지의 발생이 있다면 물단지의 최초에 물단지일 때 (발생이) 있는 것인가, 진흙덩어리의 최후에 물단지가 아닐 때 (발생이) 있는 것인가? 만약 물단지의 최초에 물단지일 때 물단지의 발생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물단지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최초와 중간과 최후는 함께 서로 의존[因待]한다. 만약 중간과 최후가 없다면 최초도 없다. 만약 물단지의 최초가 있다면 반드시 중간과 최후가 있다. 그러므로 물단지가 이미 최초에 존재한다면 발생을 어디에 쓰겠는가? 만약 진흙덩어리의 최후에 물단지가 아닐 때 물단지가 발생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물단지에 최초ㆍ중간ㆍ최후가 없다면 이것은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물단지의 발생이 있겠는가? 또 만약 물단지의 발생이 있다면 진흙덩어리의 최후에 물단지일 때 존재하거나, 물단지의 최초에 진흙덩어리일 때 존재할 것이다. 진흙덩어리의 최후에 물단지일 때 물단지의 발생은 없다. 왜 그러한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물단지의 최초에 진흙덩어리일 때 물단지의 발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하는 것이기에 과오가 없네.[수투로]
나는 이미 발생한 것[已生]이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未生]에 발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제3의2) 법인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
법인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
불자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네.[수투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만약 발생한다면 이미 발생했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았거나이다. (그러니) 어떻게 발생이 있겠
 
 
2) '제이(第二)'를 송ㆍ원ㆍ명 3본에 의거해서 '제삼(第三)'으로 바꾸었다.
 
 
 
는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반은 이미 발생한 것[生]이고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未生]이다. 두 가지 모두3) 과실이 있다. 또 앞에서 타파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발생이 있지 않다.
과실이 있다. 또 앞에서 타파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발생이 있지 않다.
외도
발생과 성립은 동일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네.[수투로]
나는 물단지가 이미 발생했을 때 발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발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물단지가 현재에 성립할 때 이것이 물단지의 발생이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발생은 최후이네.[수투로]
성립은 이미 발생한 것이다. 만약 발생이 없다면 최초가 없고 중간이 없다. 만약 최초가 없고 중간이 없다면 성립이 없다. 그러므로 성립을 발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발생이 최후에 있기 때문이다.
외도
최초와 중간과 최후는 순서대로 발생하기에 과오가 없네.[수투로]
진흙덩어리에서 순서대로 물단지의 밑바닥, 배ㆍ목ㆍ입 등이 발생한다. 최초와 중간과 최후는 순서대로 발생하지 진흙덩어리 다음에 물단지가 성립하는 일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흙덩어리일 때 물단지가 발생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단지일 때 물단지가 발생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단지가 발생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불자
최초와 중간과 최후는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네.[수투로]
최초란 전이 없고 후가 있는 것을 말하고, 중간이란 전이 있고 후가 있는 것을 말하고, 최후란 전이 있고 후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이 최초와 중간과 최후는 함께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만약 분리된다면 어떻게 (최초와 중간과 최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최초와 중간과 최후는 순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3) 원문의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도 옳지 않네.[수투로]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이것은 최초이다', '이것은 중간이다', '이것은 최후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서로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옳지 않다.
외도
발생과 머묾과 괴멸과 같네.[수투로]
유위의 상(相)인 발생과 머묾과 괴멸이 순서대로 있는 것과 같이 최초와 중간과 최후도 그러하다.
불자
발생과 머묾과 괴멸도 이와 같네.[수투로]
순서대로 있든, 동시에 있든 이 둘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머묾이 없다면 발생이 없다. 만약 머묾이 없는데 발생이 있다면 또한 발생이 없이 머묾이 있을 것이다. 괴멸도 이와 같다. 만약 동시라면 '이것은 발생이다', '이것은 머묾이다', '이것은 괴멸이다' 하고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곳에 모든 것이 있을 것이네.[수투로]
또 '모든 곳'이란 세 가지 유위의 상(相)을 말한다. 만약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또한 유위의 상이라면 이제 발생 속에 세 가지 상(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위법이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속에 다시 세 가지 상(相)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역행이 된다. 머묾과 괴멸도 또한 이와 같다. 이제 발생과 머묾과 괴멸 속에 다시 세 가지 상(相)이 있지 않다면 이제 발생과 머묾과 괴멸을 유위의 상이라고 하지 못한다. 만약 그대가 “발생과 발생이 함께 발생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발생과 발생은 원인 속에 미리 있으면서 서로 의존하든가, 원인 속에 미리 있지 않으면서 서로 의존하든가, 원인 속에 미리 조금 있기도 하고 조금 있지 않기도 하면서 서로 의존하든가일 것이다. 이 세 가지는「근(根)을 타파하는 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또 아버지가 이미 있고 난 이후에 아들을 낳는 것과 같다. 아버지에게는 다시 아버지가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외도
발생이 실제로 존재한다. 발생되어야 할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발생이 존재한다면 발생되어야 할 것[可生]이 존재한다. 만약 발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발생되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물단지 등 발생되어야 할 법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반드시 발생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발생이 존재한다면 발생되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만약 물단지에 발생이 존재한다면 물단지는 이미 발생한 것이니 발생되어야 할 것이라 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물단지의 발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발생이 존재한다면 발생되어야 할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발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겠는가?
자기에게서, 타자에게서, 양자에게서도 또한 이와 같네.[수투로]
또 만약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 이 둘이라면 자기에게서 발생하든가, 타자에게서 발생하든가, 양자에게서 발생하든가 일 것이다.「길상을 타파하는 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외도
확정되어 존재하네.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은 함께 성립하기 때문이네.[수투로]
전에 발생이 있고 후에 발생되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함께 성립한다.
불자
발생은 발생되어야 할 것을 발생하게 하지 않네.[수투로]
만약 발생되어야 할 것이 발생을 성립시킨다면 발생은 발생되어야 할 것이므로 발생하게 하는 것이라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발생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발생되어야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둘은 모두 있지 않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수투로]
 
 
 
또 이제 발생되어야 할 것은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없음[無]이다. 발생은 있음[有]이다. 있음과 없음이 어떻게 서로 의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두 있지 않다.
외도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은 서로 의존하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네.[수투로]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만이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물단지 등의 사물들이 성립한다.
불자
만약 둘로부터 발생한다면 어떻게 셋이 존재하지 않는가? [수투로]
그대는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이 서로 의존하기에 모든 법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만약 둘로부터 결과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제3의 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을 낳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이제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을 떠나서 다시 물단지 등 제3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옳지 않다.
외도
생이 존재하네. 원인이 괴멸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물단지의 원인이 괴멸하는 것이 보이니 발생이 존재한다.
불자
원인이 괴멸하기에 발생도 괴멸하네.[수투로]
만약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 결과는 원인이 괴멸할 때 존재하는가, 괴멸한 이후에 존재하는가? 만약 원인이 괴멸할 때 존재한다면 괴멸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도 또한 괴멸한다. 만약 괴멸한 이후에 존재한다면 원인이 이미 괴멸했기 때문에 원인이 존재하지 않고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원인 속에 결과가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수투로]
또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든, 미리 결과가 있지 않든, 둘 모두 발생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면 왜 진흙덩어리에만 물단지가 있고 실에만 천이 있는가? 만약 그 둘에 있지 않다면 진흙덩어리에는 천이 있을 것이고 실에는 물단지가 있을 것이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있다면, 이 원인 속에서 이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원인이 그대로 이 결과이다.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있든, 미리 결과가 있지 않든, 이것은 모두 발생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많기 때문에.[수투로]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면 우유 속에 타락[酪]과 연유 등이 있을 것이다. 또 연유 속에 타락과 우유 등이 있을 것이다. 만약 우유 속에 타락과 연유 등이 있다면 한 원인 속에 많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만약 연유 속에 우유와 타락 등이 있다면 한 결과 속에 많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전후의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모두 과실이 있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면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든 결과가 있지 않든 이것에는 모두 발생이 있지 않다.
외도
인과 결과는 타파되지 않기에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이 성립하네.[수투로]
그대는 “원인 속에 결과가 많다는 것과 결과 속에 원인이 많다는 것이 과실이 된다”고 말했지, “원인과 결과가 있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발생과 발생되어야 할 것이 성립한다.
불자
존재와 존재, 비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발생하게 하지 않네.[수투로]
존재[物]에서 존재가 발생하지 않고, 비존재[非物]에서 비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 존재에서 비존재가 발생하지 않고, 비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는 것이 마치 어머니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어머니는 실제로는 아들을 낳지 않는다. 아들이 이미 있고 나서 어머니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의 난자에서 태어나기에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난자 등을 떠나서 어머니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가령 변해서 태어나는 것을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젊은 것은 변해서 늙은 것이 되지만 젊은 것이 늙은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가령 거울 속의 상(像)을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거울 속의 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거울 속의 상이 얼굴과 유사한 것과 같이 다른 결과도 또한 원인과 유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 '비존재에서 비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란, 가령 토끼의 뿔에서 토끼의 뿔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존재에서 비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란, 가령 석녀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비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란, 가령 거북이의 털에서 부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생[生法]이 있지 않다. 또 만약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한다면 그렇다면 두 종류의 법으로 발생할 것이다. 원인 속에 결과가 있든가,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든가 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면 원인은 결과를 발생시키지 못할 것이다. 원인의 가장자리에서 다른 결과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면 어떻게 발생하고 소멸하겠는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물단지와 진흙덩어리가 다르지 않다면 물단지가 발생할 때 진흙덩어리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진흙덩어리가 물단지의 원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진흙덩어리와 물단지가 다르지 않다면 물단지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물단지가 진흙덩어리의 결과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든,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든, 존재에서 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
 
 
 
 
9. 상주함을 타파하는 장[破常品]
외도
모든 법들이 존재하네. 원인이 없는 상주하는 법이 타파되지 않았기 때문에.[수투로]
그대가 원인이 있는 법을 타파하긴 했지만 원인이 없는 상주하는 법은 타파하지 않았다. 가령 공간[虛空]ㆍ시간[時]ㆍ방향[方]ㆍ극미[微塵]ㆍ열반과 같은 이 원인이 없는 법은 타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이유 없이[强] 상주한다고 한다면
그대는 원인이 있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원인이 없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상주하는 법이 원인이 있다면 원인이 있기에 무상한 것이 된다. 만약 원인이 없기에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무상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외도
인식함의 원인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두 종류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만듦의 원인[作因]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함의 원인[了因]이다. 만약 만듦의 원인으로 본다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우리의 공간[虛空] 등의 상주하는 법은 인식함의 원인이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원인이 없기에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원인이 있기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强] 상주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자
이 원인은 타당하지 않네.[수투로]
그대가 비록 상주하는 법이 원인이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이 원인은 타당하지 않다. '나[神]'는 이미 타파되었다. 다른 상주하는 법은 후에 타파될 것이다.
외도
상주하는 법은 존재하네. 만들어진 법[作法]은 무상하기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無作法]이 상주하네.[수투로]
물단지 등의 사물들이 무상하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만약 이 법과 다르다면 상주할 것이다.
불자
존재하네. 또한 함께 존재하지 않네.[수투로]
그대는 만들어진 법[作法]과 상반되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不作法]이라고 한다. 이제 만들어진 법 속에 존재성[有相]이 보이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대는 “만들어진 법과 상반되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을 상주한다”고 한다면, 이제 만들어진 법과 상반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무상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들어지지 않은 법과 만들어진 법은 동일하게 감각되는 것[觸]이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법은 무상할 것이다. 이와 같이 편재하는 상주법(常住法)과 편재하지 않는 상주법을 모두 이미 합쳐서 타파했다. 이제 하나하나 타파할 것이다.
외도
공간[虛空法]이 실제로 존재하네. 상주하고 편재하며 부분이 없네. 모든 곳에, 모든 때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모든 곳에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편재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때에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상주한다.
불자
부분 속에서 부분과 합하기에 부분과 다르지 않네.[수투로]
물단지에 내부[向中] 공간이 있을 때 이 내부 공간에 전체[都]가 존재하는가, 부분이 존재하는가? 만약 전체가 존재한다면 편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편재한다고 한다면 물단지도 편재할 것이다. 만약 부분이 존재한다면 공간은 단지 부분일 뿐이므로 전체[有分]를 공간이라고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편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외도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편재하고 또 상주하네. 행동[作]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드는 일[擧]이 없고 내리는 일[下]이 없으며 가거나 오는 일 등이 없다. 왜 그러한가? 수용하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실제로 행동[所作]이 있다. 그러므로 공간이 존재한다. 편재하고 상주한다.
불자
그렇지 않네. 공간이 공간에 거처하게 되네.[수투로]
만약 공간이 존재한다면 거주하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만약 거주하는 장소가 없다면 비존재[無法]이다. 만약 공간이 빈 곳[孔穴] 속에 거주한다면 그렇다면 공간은 공간 속에 거주하는 것이다. 수용하는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공간은 빈 곳 속에 거주하지 않는다. 또 충실한 곳[實]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충실하다면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수투로]
충실하다면 공간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주하는 장소가 없다. 수용하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행동의 장소[作處]를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충실한 곳에는 행동의 장소가 없기 때문에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간은 편재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또 성질[相]이 없기 때문에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법은 각각의 성질이 있다. 성질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지(地)의 단단한 성질, 수(水)의 축축한 성질, 불(火)의 뜨거운 성질, 풍(風)의 움직이는 성질, 식(識)의 인식하는 성질이 그러하다. 그러나 공간은 성질[相]이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공간은 성질[相]이 있다. 그대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을 뿐이다. 색 없음[無色]이 공간의 성질이다.
불자
그렇지 않다. 색 없음은 색이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무를 절단했을 때 다시 법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공간의 성질은 없다. 또 공간은 성질이 없다. 왜 그러한가? 그대가 “색 없음이
 
 
 
공간의 성질이다”고 말한다면, 만약 색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때는 공간의 성질이 없다. 또 색은 무상한 법이고 공간은 상주하는[有常] 법이다. 색이 아직 있지 않을 때에도 이미 공간은 존재할 것이다. 만약 아직 색이 있지 않다면 소멸하는 바가 없으니 공간은 성질이 없는 것이다. 만약 성질이 없다면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 없음이 공간의 성질인 것이 아니다. 오직 이름이 있을 뿐 실질이 없다. 모든 편재하고 상주하는 것도 합쳐서 이와 같이 타파할 수 있다.
외도
시간[時法]이 존재하네. 상주함의 상(相)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어떤 법은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 표상[共相]에 의지해서 추리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시간은 미세해서 비록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절기ㆍ꽃ㆍ열매 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서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 동시, 동시 아님, 멀고 가까움 등의 성질[相]에 의해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상주한다.
불자
과거는 미래 속에 없네. 그러니 미래는 없네.[수투로]
가령 진흙덩어리일 때는 현재, 진흙일 때는 과거, 물단지일 때는 미래인데, 이것이 시간의 상(相)이다. 상주하기 때문에 과거 시간[過去時]은 미래 시간[未來時]이 되지 않는다. 그대의 경전에 “시간은 단일한 법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 시간은 결코 미래 시간이 되지 않는다. 또한 현재 시간[現在時]도 되지 않는다. 만약 과거가 미래가 된다면 뒤섞이는 과실이 있다. 또 과거 속에 미래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미래가 있지 않다. 현재도 이와 같이 타파된다.
외도
과거를 인정하기에 시간이 존재하네.[수투로]
그대가 과거 시간을 인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미래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불자
미래의 상(相)은 과거가 아니네.[수투로]
그대는 내가 앞에서 과거의 진흙은 미래의 물단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듣지 않았는가? 만약 미래의 상 속에 떨어졌다면 이것을 미래의 상(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과거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시간이 존재하네. 자상(自相)이 구별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현재라면 현재의 상이 있고, 만약 과거라면 과거의 상이 있고, 만약 미래라면 미래의 상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존재한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은 현재이네.[수투로]
만약 3시(時)에 자상이 있다면 이제 모두 현재일 것이다. 만약 미래라면 이것은 무(無)이다. 만약 유(有)라면 미래(未來)4)라고 해서는 안 되고 이래(已來)5)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외도
과거와 미래는 자기의 상을 행하기에 과오가 없네.[수투로]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은 현재의 상을 행하지 않는다. 과거 시간은 과거의 상을 행하고 미래 시간은 미래상을 행한다. 이것들이 각각 자기의 상을 행하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불자
지나갔다면 과거가 아니네.[수투로]
만약 과거가 지나갔다면[過去] 과거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기의 상(相)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불이 뜨거움을 버렸다면 불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자기의 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제 과거 시간이 과거의 상을 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래도 또한 이와 같이 타파한다. 그러므로 시간[時法]은 실질이 없고 다만 언설이 있을 뿐이다.
 
 
4)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뜻한다.
5) 이미 온 것을 뜻한다.
 
 
 
외도
방향[方]이 실제로 존재하네. 상주함의 상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태양과 합하는 장소'가 방향의 상이다. 우리의 경전에서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태양과 최초로 합하는 장소를 동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다른 방향도 태양을 좇아서 이름을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불자
그렇지 않네. 동쪽은 최초일 때가 없기 때문에.[수투로]
태양은 네 천하6)를 지나가고 수미산을 돈다. 울단월(鬱單越)7)의 한낮은 불우체(弗于逮)8)의 해뜰 때이어서 불우체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불우체의 한낮은 염부제(閻浮提)9)의 해뜰 때이어서 염부제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염부제의 한낮은 구야니(拘耶尼)10)의 해뜰 때이서 구야니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구야니의 한낮은 울단월의 해뜰 때이어서 울단월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동쪽이고 남쪽이고 서쪽이고 북쪽이다.
의 해뜰 때이서 구야니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구야니의 한낮은 울단월의 해뜰 때이어서 울단월의 사람들은 동쪽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동쪽이고 남쪽이고 서쪽이고 북쪽이다.
또 태양과 합하지 않는 장소 이것에는 방향이 없다.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또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을 동쪽이라고 하고 저쪽을 서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그렇지 않네. 이 방향의 상(相)은 한 천하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수투로]
이 방향의 상은 한 천하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기에 전체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쪽은 최초일 때가 없다는 과실이 없다.
불자
만약 그렇다면 한계가 있는 것이네.[수투로]
 
 
6) 4주(洲)를 말한다. 한 가운데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둘레에 4대주(大洲)가 있다.
7) 4대주의 하나이며 북구로주(北俱盧洲)라고도 한다.
8) 4대주의 하나이며 동승신주(東勝身洲)라고도 한다.
9) 4대주의 하나이며 인도국을 말한다.
10) 4대주의 하나이며 서우화주(西牛貨洲)라고도 한다.
 
 
 
만약 태양과 최초에 합하는 곳을 동쪽이라고 한다면 모든 방향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부분이 있다.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언어로 표현할 때 방향이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방향이 있지 않은 것이 된다.
외도
편재하는 상주하는 것은 없지만 편재하지 않는 상주하는 극미는 존재하네.[수투로]
세상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원인을 보고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싹 등을 보고서 씨 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세계의 법인, 모든 발생하는 사물들을 볼 때 전에는 미세하고 후에는 조대하다. 그러므로 두 극미를 최초의 결과로 하고 한 극미를 원인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극미가 존재한다. 둥글며 상주한다. 원인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
두 극미가 몸 전체와 합하는 것이 아니네. 결과는 둥글지 않기 때문에.[수투로]
극미들의 결과가 발생할 때 몸 전체와 합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두 극미 등의 결과는 눈에 보일 때 둥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극미가 몸 전체와 합한다면 두 극미 등의 결과도 둥글 것이다.
만약 몸 전체와 합한다면 둘도 동일하게 괴멸하네.[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거듭 합한다면 결과는 높고, 만약 많이 합한다면 결과는 크다. 부분으로써 합하기 때문에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有分]'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극미는 무상하네. 공간에 의해 나누어지기 때문에.[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존재한다면 허공과 함께 나누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색과 미(味) 등에 의해 나누어지기 때문에.[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존재한다면 색과 미(味) 등의 부분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형태가 있는 법은 상(相)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또 만약 극미가 형태가 있다면 장형ㆍ단형ㆍ사각형ㆍ원형 등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극미는 부분을 갖는 것이다. 부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극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열반[涅槃法]이 존재하네. 번뇌 없음과 열반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수투로]
애(愛) 등의 번뇌들을 영원히 멸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번뇌가 있다면 태어남과 죽음[生死]이 있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다시 태어나고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이 상주한다고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열반은 지어진 법[作法]이기 때문에.[수투로]
수도(修道)에 의지하기 때문에 번뇌들이 없다. 만약 번뇌 없음이 열반이라면 열반은 지어진 법이다. 지어진 법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만약 번뇌 없음이라면 이것을 '존재하지 않음[無所有]'이라 한다. 만약 열반이 번뇌 없음과 다르지 않다면 열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능작인[作因]이기 때문에.[수투로]
열반은 번뇌 없음의 능작인이 된다.
불자
그렇지 않네. 타파하는 것[能破]은 타파되는 것[破]이 아니네.[수투로]
만약 열반이 해탈을 위한 것이라면 해탈이 아니다. 또 아직 번뇌를 멸진하지 않았을 때 열반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없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
 
 
 
외도
번뇌 없음의 결과이네.[수투로]
이 열반은 번뇌 없음이 아니다. 또한 번뇌 없음의 원인도 아니다. 이것은 번뇌 없음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열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불자
계박하는 것과 계박되는 것과 방편이 다르다면 이것은 쓸모가 없네.[수투로]
계박하는 것이란 번뇌와 업(業)을 말하고, 계박되는 것이란 중생을 말하고, 방편이란 8성도(聖道)를 말한다. 도(道)에 의해서 계박을 해탈하기 때문에 중생은 해탈을 얻는다. 만약 열반이 존재하는데 이 세 법이 다르다면 쓸모가 없다. 또 번뇌가 없다면 이것을 '존재하지 않음[無所有]'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음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
외도
열반이 존재하네. 이것은 없음[無]과 같네.[수투로]
만약 계박하는 것과 계박되는 것과 방편의 셋에 처소가 없다면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불자
무상의 과환(過患)이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자는 유위법을 버려서 탐욕을 벗어난다. 만약 열반에 근(根)들과 탐욕하는 것이 없다면 열반은 유위법보다 심대히 두려운 곳[畏處]이다. 그대는 왜 마음이 물들지 않는가? 열반이란 모든 집착을 버리고 모든 그릇된 기억과 표상을 소멸시키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존재[物]도 아니고 비존재[非物]도 아닌 것을 말한다. 등불이 소멸하는 것과 같기에 논설(論說)할 수가 없다.
외도
누가 열반을 얻는가? [수투로]
불자
열반을 얻는 일이 없네.[수투로]
나는 앞에서 “등불이 소멸한다면 동쪽으로 가는 것도 동ㆍ서ㆍ남ㆍ북ㆍ4유(維)ㆍ상하(上下)로 가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열반도 이와 같다”고 말했다. 모든 언설이 소멸해서 논설할 수가 없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음'이
 
 
 
다. 누가 얻는 자이겠는가? 설사 열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얻는 자가 없다. 만약 '나[神]'가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상주하고 편재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할 것이다. 5온(蘊)도 열반을 얻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5온은 무상하기 때문이고 5온은 생멸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데 열반이 누구에게 속하겠는가? 만약 열반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세간의 언설일 뿐이다.
10. 공을 타파하는 장[破空品]
외도
모든 법이 존재하네. 부정[破]이 있기 때문에. 만약 부정이 없다면 다른 법들이 존재하기 때문에.[수투로]
그대는 모든 법상(法相)을 부정한다. 만약 이 부정이 있다면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정이 있기에 모든 법이 부정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부정이 없다면 모든 법이 존재한다.
불자
부정은 부정되어야 할 것과 같네.[수투로]
그대는 부정에 집착하기 때문에 유와 무의 법으로써 이 부정을 부정하고자 한다. 그대는 알지 않는가? 부정이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부정[破]이 만약 존재한다면 이미 부정되어야 할 것[可破]에 떨어지니, 공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대는 무엇을 부정하겠는가? 제2의 머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부정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없다”고 말할 때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정과 부정되어야 할 것도 이와 같다.
외도
모든 법이 존재하네. 이것과 저것을 주장하기 때문에.[수투로]
그대는 다른 법을 주장하면서 한 법의 과실을 말하고 한 법을 주장하면서 다른 법의 과실을 말한다. 이 두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존재한다.
 
 
 
불자
한 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법도 그러하네.[수투로]
한 법[一]과 다른 법[異]을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부정했다. 앞에서 이미 부정했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 없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는 주장하는 것이 없지만 나는 한 법과 다른 법을 주장한다”고 말한다면, 만약 이 물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부정할 것이다.
외도
다른 법을 부정하기에 그대는 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네.[수투로]
그대는 다른 법을 부정하길 좋아하고 이유 없이[强] 과실을 범하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파괴하는 사람[破人]이다.
불자
공함[空]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주장하는 것이 없다. 주장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자기의 법을 주장하고 타인의 주장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대야말로 파괴하는 사람이다.
외도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에 자기의 법이 성립하네.[수투로]
그대가 타인의 법을 부정할 때 자기의 법이 성립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타인의 법이 진다면 자기의 법이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자
그렇지 않네. 긍정함[成]과 부정함[破]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수투로]
'긍정함'이란 좋은 점[功德]을 칭찬하는 것이다. '부정함'이란 그 나쁜 점[過罪]을 배척하는 것이다. 좋은 점을 칭찬하는 것과 나쁜 점을 배척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함에는 삼감[畏]이 있네.[수투로]
또 '삼감'이란 힘이 없는 것[無力]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기의 법은 삼가기 때문에 긍정할 수 없지만 타인의 법은 삼가지 않기 때문에 부정하길 좋아한다. 그러므로 긍정함과 부정함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만약 타인의 법을 부정
 
 
하는 것이 곧 자기의 법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왜 앞에서 “공함[空]을 말하는 사람은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만 할 뿐 자기가 주장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가?
외도
타인의 주장의 과실을 말한다면 자기의 주장이 긍정되네.[수투로]
그대는 왜 자기의 법을 긍정하지 않고서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만 하는가?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의 법을 긍정하는 것이다.
불자
타인의 법을 부정할 때 자기의 법을 긍정하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네.[수투로]
타인의 법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의 법을 긍정한다. 자기의 법을 긍정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긍정하는 것이 없다.
외도
그렇지 않네. 세간과 상반되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모든 법이 공하고 무상(無相)한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世間人]은 모두 믿고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불자
이 법을 세상 사람들은 믿네.[수투로]
이 연기의 법[因緣法]을 세상 사람들은 믿고서 받아들인다. 왜 그러한가? 연기의 법[因緣生法]은 상이 없는 것이다. 그대는 “우유 속에 타락과 연유 등이 있고, 여자애[童女]가 이미 아이들을 회임(懷妊)하고 있고 밥 속에 똥이 있다. 또 대들보와 서까래 등 바깥에 별도로 다시 집이 있고, 실 바깥에 별도로 천이 있다”고 말한다. 혹은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고 말하고 혹은 “원인 속에 결과가 있지 않다”고 말하고 혹은 “인과 연들 없이 법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제로는 공허해서 세상의 일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을 누가 믿고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나의 법은 그렇지 않다. 세상 사람들의 것과 같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믿고서 받아들인다.
 
 
 
외도
그대에게 주장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이 법이 성립하네.[수투로]
그대가 주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주장이다. 또 나의 법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자기의 주장이다.
불자
주장이 없는 것을 주장이라고 하지 않네. 무(無)와 같네.[수투로]
나는 앞에서 연기[因緣生]의 법들은 상이 없는 것[無相]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주장하는 바가 없다. 주장이 없는 것을 주장이라고 하지 않는다. 무(無)를 말하는 경우와 같다. 이것은 실제로는 무이다. 무를 말한다고 해서 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장이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외도
그대는 상이 없는 것[無相法]을 말하기에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네.[수투로]
만약 모든 법이 공해서 상이 없는 것이라면 이 주장도 무(無)이다. 그렇다면 모든 법이 없다. 모든 법이 없기 때문에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라고 한다.
불자
법을 소멸시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네.[수투로]
나 자신에게는 법이 존재하지 않기에 부정하는 것이 없다. 그대가 내가 법을 소멸시킨다고 말하면서 부정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법을 소멸시키는 사람이다.
외도
법이 존재하네.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긴 것이 있다면 반드시 짧은 것이 있다. 만약 올라가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려가는 것이 있다. 공허[空]가 있다면 반드시 충실[實]이 있다.
불자
어떻게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나를 부정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만약 하나가 없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공하지 않
 
 
 
은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만약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면 공한 것이 없다. 어떻게 서로 의존하겠는가?
외도
그대가 무(無)를 긍정한다면 이것이 긍정함[成]이네.[수투로]
건물이 공해서 말[馬]이 없다고 말한다면 말의 없음[無]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그대가 “모든 법이 공해서 상이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 해도 여러 마음[心]이 일어나기 때문에 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를 긍정하는 것이니, 이것이 긍정함[成]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유와 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네.[수투로]
나의 실상[實相]에는 유와 무가 모두 공하다는 것을 여러 법문에서 말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유가 없다면 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와 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도
부정은 그렇지 않네.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네.[수투로]
모든 법은 자성이 공해서 지음[作]이 있는 일이 없다면 지음이 없기 때문에 부정이 없다. 가령 어리석은 사람들은 허공을 부정하고자 해서 부질없이 스스로 고달프게 한다.
불자
자성이 공한데 상(相)을 취해서 계박되네.[수투로]
모든 법이 자성이 공한데 그릇된 상(想)을 분별해서 계박된다. 이 전도(顚倒)됨을 부정하기 위해 말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부정되는 것이 없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뜨겁게 타오를 때의 불을 보고서 허망되게 물의 상(想)을 내고 그것을 좇아서 고달파지는 것과 같다. 지혜가 있는 자가 “이것은 물이 아니다”고 올바르게 말해 주는 것은 그의 상(想)을 끊기 위해서이지 물을 부정하고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자성이 공한데 중생은 상(相)을 취해서 집착한다. 이 전도됨을 부정하기 위해 부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정되는 것이 없다.
 
 
 
외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큰 경전에는 없기 때문에.[수투로]
그대는 유를 부정하고 무를 부정하고 유이면서 무인 것을 부정하기에 이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에 떨어진다. 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유와 무의 상(相)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라고 한다. 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은 『위세사경[衛世師經]』ㆍ『승거경[僧佉經]』ㆍ『니건법(尼乾法)』 등의 경전에서는 모두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불자
제4구가 있네.[수투로]
그대의 큰 경전에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있다. 가령 『위세사경』의 “말[聲]은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다” 하는 것, 『승거경』의 “진흙덩어리는 물단지도 아니고 물단지 아닌 것도 아니다” 하는 것, 『니건법』의 “빛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고 하는 것이 그렇다. 그와 같이 모든 경전에는 제4구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있다. 그대는 어찌 없다고 말하는가?
외도
만약 공하다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네.[수투로]
만약 완전히 공해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법이 이렇다11)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선법과 악법을 언어로 표현해서 교화할 수 있겠는가?
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선법과 악법을 언어로 표현해서 교화할 수 있겠는가?
불자
세속의 언설을 따르기에 과실이 없네.[수투로]
부처님들의 설법은 항상 속제와 제일의제에 의지한다. 이 둘은 모두 진실(眞實)이기에 허위의 말이 아니다. 가령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이 상이 없다[無相]는 것을 아시지만 아난에게 “사위성에 들어가서 걸식하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만약 흙과 나무 등을 제외하면 성(城)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세속의 언설에 따르기에 허위의 말에 떨어지지 않는다. 나도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11) 완전히 공하다는 뜻이다.
 
 
 
외도
속제는 없네.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수투로]
만약 속제(俗諦)가 진실이라면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제(諦)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자
그렇지 않네.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큰 것과 작은 것이 그러하듯이.[수투로]
속제는 세상 사람들[世人]에 있어서 진실이고 성인에 있어서는 진실이 아니다. 한 개의 능금은 대추보다는 크지만 오이보다는 작은 것과 같다. 이 둘은 모두 진실이다. 만약 대추보다 작다고 말하고 오이보다 크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허위의 말이다. 그와 같이 세속의 언어 따르기 때문에 과실이 없다.
외도
이 과실을 안다면 무슨 이익을 얻는가? [수투로]
최초의 죄와 복을 버리는 것에서 공함[空]을 부정하는 것에 이르듯이 그렇듯이 법들은 모두 과실이 있다고 본다면 어떤 이익들을 얻는가?
불자
그와 같이 나[我]를 버리는 것을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네.[수투로]
그와 같이 세 가지로 법들을 부정한다. 최초에 죄와 복을 버리고, 중간에 나를 부정하고, 최후로 모든 법을 부정한다. 이것을 '나 없음[無我]', '나의 것 없음[無我所]'이라고 한다. 또 법들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있다고 들어도 기뻐하지 않으며 없다고 들어도 근심하지 않으니,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외도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고 말하면서 왜 실제로는 해탈을 얻지 못하는가?
불자
영원히 청정하기 때문에.[수투로]
'나[神]'를 부정하기에 사람[人]이 없고 열반을 부정하기에 해탈이 없다. 어떻게 “사람이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겠는가? 속제에 있어서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말한다.









 

 

 

백론(百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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