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십이문론(十二門論)

수선님 2022. 4. 24. 12:11

십이문론(十二門論)


一. 관인연문(觀因緣門)

 

: 만법이 생기는 인연이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없다고 관찰함.

 

말하겠다. 이제 마하연(摩訶衍)의 이치를 간략히 해석하리라.

[문] 마하연을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와 이익이 있는가.

[답] 마하연은 十방 三세에 계신 부처님들의 심히 깊은 법장(法藏)이다.

큰 공덕이 있고 근기가 날카로운 이를 위하여 말하였으므로 말세의 중생으로서

박목하고 둔 한 이는 아무리 경문(經文)을 더듬어도 통달하지 못한다.

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어 일깨워 주고 싶다.

또 부처님의 위 없는 큰 법을 더욱 빛나게 하고 싶다. 그러므로 마하연의 이치를 간략히 해
석한다.

 

[문] 마하연은 한량없고 끝없고 셀 수 없다. 바로 부처님의 말재주라도 다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대가)해석해서 그 이치를 잘 퍼뜨리는 일이겠는가.

[답] 그런 까닭에 내가 처음 말하기를 “간략히 해석한다. “하였다.

 

[문] 어찌하여 마하연이라 하는가.

[답] 마하연이라 함은 二승에 견주건대 위가 되므로 대승(大乘)이라 하며,

부처들의 가장 크신 경지에 이 수레라야 이르르기 때문에 대승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과 위대한 분들이 이 수레를 타는 까닭에 대승이라 한다.

또 중생들의 큰 괴롬을 제하고 큰 이익을 주기 때문에 대승이라 한다.

또 관음, 세지, 문수, 미륵 등 보살들이 타는 것이므로 대승이라 한다.

또 이 수레라야 능히 온갖 법의 끝과 밑바닥에 이르르기 때문에 대승이라 하며,

또 반야경에서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를

“마하연의 이치는 한량없고 끝없다. “하시니, 이 까닭에 대승이라 한다.

대승의 깊은 이치는 <공>이라 할 수 있나니, 이 이치를 통달하면 대승을 통달하여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구족하고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공>만을 해석하려 한다.

<공>을 해석하는 데는 열 두 부문으로 나누어 차츰<공>의 이치에 들게 하려 하노니,

처음이 관 인연문이다. 이른바

 

뭇 인연에서 난 법은

제 성품이 없는 것이니

제 성품이 없다면

어찌 이 법이 있으랴

 

뭇 인연에서 난 법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의 것이요, 둘째는 밖의 것이다.

뭇 인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의 것이요, 둘째는 밖의 것이다.

밖의 인연이라 함은 진흙, 도드래, 노끈, 옹기장이 따위가 화합해서 병이 나는 것 같고,

또 실, 베틀, 북, 베짜는 이 따위가 화합해서 비단이 나는 것 같고,

또 터를 다듬고 기초를 쌓고 대들보, 서까래, 진흙, 이엉,

사람의 공력 따위가 화합하여 집이 나는 것 같고,

또 우유, 그릇, 체, 사람의 공력 따위가 화합해서 소락이 나는 것 같고,

또 종자, 땅, 물, 불바람, 허공, 시절, 사람의 공력 따위가 화합해서

싹이 나는 것 같은 종류이니, 밖의 인연의 법이란 모두가 이런 것임을 알라.

안의 인연이라 함은 무명(無明), 지어감[行], 의식[識], 이름과 물질[名色],

여섯 감관[六入], 닿임[觸], 느낌[受], 욕망[愛], 잡음[取], 존재[有], 남[生],

늙음[老], 죽음[死]들이 제각기 먼저 것이 원인이 되어 뒤의 것이 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안팎의 모든 법이 모두가 뭇 인연에서 나나니,

뭇 인연에서 났으므로 그것이 곧 성품없음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법이 제 성품[自性]이 없으면 남의 성품[他性]도 없고,

자기와 남이 합한 성품도 없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남의 성품을 인하기 때문에 제 성품이 없다.

만일에 말하기를 “남의 성품으로써 있다면 소가 말의 성품으로써 있으며,

말이 소의 성품으로써 있으며, 배가 사과의 성품으로써 있으며,

사과가 배의 성품으로써 있으며, 나머지도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에 말하기를 “남의 성품으로써 있지 않고 다만 남을 인하여 있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부들 때문에 자리가 있다고 하면 부들과 자리는 동체어서 남이 아니다.

만일 부들이 자리에 대하여 남이라 한다면 부들 때문에 자리가 있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또 부들도 제 성품이 없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부들도 뭇 인연에서 생겼기 때문에 제 성품이 없다.

제 성품이 없으므로 부들의 성품으로써 자리가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리는 부들로써 본체를 삼지 못한다.

나머지 병, 소락, 따위, 밖의 인연으로 생기는 법도 모두가 이와 같아서 얻을 수 없고,

안의 인연으로 생기는 법들도 모두가 이와 같아서 얻을 수 없다.

칠십론(七十論)에 이런 말이 있다.

 

인연의 법은 진실로 남이 없거늘

만일에 남이 있다고 한다면

한 마음 속에 있다고 여기는가

여러 마음속에 있다고 여기는가

 

이 십이인연의 법이 실제로는 스스로 남이 없건만 남이 있다고 한다면 한마음 속에 있는가.

여러 마음속에 있는가 만일 한 마음 속에 있다고 하면 인과가 동시에 함께 나는 것이리니,

인과 과(果)가 동시에 있다고 하면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모든 물건이 먼저 원인이 있고 뒤에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 마음에 있다고 하면 십이인연의 법이 제각기 달라서

앞의 부분이 마음과 함께 사라진 뒤에 뒷 부분에겐 누가 인연이 되어 주랴.

사라진 법은 있지 않는 것이어늘 어찌 인연이 되어 주리요.

十二인연이 먼저부터 있다면 한마음이거나 여러 마음일 것이나, 두 가지 모두가 옳지 못하
다.

그러므로 뭇 인연이 모두가 공하다. 인연이 공하므로 인연에서 생긴 법도 공하다.

그러므로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공함을 알 수 있다.

유위의 법도 오히려 공하거늘 하물며<나>이겠는가. 五음, 十二처 十八계 따위,

유위법으로 인하여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마치 땔감을 인하여 불길이 있다 하는 것 같고 五음 十二계가 공하면

다시는 어떤 법도 <나>라고 말할 수 없음이 마치 땔감이 없으면 불길도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고하시되

<나>를 인하여 내 것[我所]이 있거니와 <내>가 없으면 내 것도 없다.

“하신 것 같이,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와 열반의 법도 공한 줄 알겠다. 무슨 까닭이겠
는가.

이 오음이 멸한 뒤에 다시 다른 오음이 본래부터 공하거늘 무엇이 멸하겠기에 열반이라 하
리요,

도 나라는 것도 공하거늘 누가 열반을 얻으리요.

또 다시 남없는 법[無生法]을 열반이라 하는데

나는 법[生法]이 이루어진다면 남없는 법도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법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이미 먼저 인연에 말했거니와 뒤에 다시 말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법을 인하여 남 없음이라 하거니와

나는 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 없는 법이 어찌 이루어지리요.

그러므로 유위와 무위와 <내>가 모두 공하다.

 

 

二. 관유과무과문(觀有果無果門)

: 원인 가운데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함.

 

 

 

 

또 다시 모든 법은 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먼저부터 있다면 나지 않고

먼저부터 없어도 나지 않고

있기도 없기도 하여도 나지 않나니

무엇이 날 수 있으리요

 

만일 결과가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있다면 나지 않을 것이요, 먼저부터 없어도 나지 않으며,

먼저부터 있기도 없기도 하여도 또한 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결과가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있으면서 난다면 이는 무궁(無窮)한 허물이다.

만일 결과가 먼저는 나지 않았다가 났다면 이제 난 뒤에도 다시 나게 될 것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원인 가운데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있음 쪽에서 다시 나리니, 이것이 무궁한 허물이다.

만일 난 뒤엔 나지 않고, 나지 않은 것은 나지 않는다 하면 여기에는 난다는 이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부터 있으면서 난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

또 다시 말하기를 “원인가운데 먼저부터 결과가 있으나 나지 않은 것이 나고,

난 뒤에는 나지 않는다하면 이것 또한 두 가지 모두가 있음이어서

하나는 나고 하나는 나지 않으리니, 그럴 이치가 있을 수 없다.

또 다시 아직 나지 않은 것으로서 결정적으로 있음이라면 난 뒤에는 의당 없음[無]이 되어
야 한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남과 나지 않음은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남과 나지 않음이 서로 어기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작용하는 형상도 서로 어기리라.

또 다시 있음은 없음과 서로 어기고, 없음은 있음과 어기는데 만일 난 뒤에도 있고,

나지 않았을 때에도 있다면 남과 나지 않음과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난 뒤에도 있고, 나기 전에도 있다면 남과 나지 않음에 차별이 있겠는
가.

남과 나지 않음에 차별이 없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있음으로서는 나지 않는다.

또 다시 있음이 이미 먼저 이루어졌다면 어찌 다시 날 필요가 있겠는가.

마치 지은 뒤에는 지을 필요가 없고, 이룬 뒤엔 이룰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있음의 법은 나지 않는다.

또 다시 있음이 이미 먼저 이루어졌다면 어찌 다시 날 필요가 있겠는가.

마치 지은 뒤에는 지을 필요가 없고, 이룬 뒤엔 이룰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있음의 법은 나지 않는다.

또 다시 있음으로서 난다면 원인가운데서 아직 나기 전에 결과가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진흙 속의 병과 부들 속의 자리 같이 보여야 하겠지만 실제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있음으로서는 나지 않는다.

[문] 결과가 먼저부터 있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까닭에 보이지 않는다.

[답] 병이 아직 나기 전에 병의 자체가 아직 변하지 않았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하면

어떤 형상으로써 알 수 있겠기에 진흙속에 먼저 병이 잇다 하겠는가.

병의 형상으로써 병이 있다 하겠는가. 만일 진흙 속에 병의 형상이 없다면 소나 말의 형상
도 없다.

이 어찌 없음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원인 속에 먼저부터 결과가 있어서 난다”함은 옳지 못하다.

또 다시 변하는 법칙이 곧 결과라 하면 이는 곧 원인 가운데 먼저 변함이 있으리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그대의 법은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병 따위가 먼저 있다면 변함도 먼저 있어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아직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함은 옳지 못하다.

만일 아직 변하지 않았으면 결과라 할 수 없다면 결과는 끝내 없을 것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변함이 먼저도 없고, 뒤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 따위의 결과는 끝내 얻을 수 없다. 만일 변한뒤엔 결과이다 하면,

원인 가운데는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정치 않으니 혹은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다고 하고,

혹은 먼저 결과가 있지 않다 한다.

[문] 먼저 변함이 있으나 다만 볼 수 없을 뿐이다.

비유하건대 무릇 물건이 자체가 있는데 있지만 얻을 수 없는 까닭은

그 물건이 너무 가까워서 알지 못하는 것과 너무 멀어서 알 수 없는 것과

감관이 무너져서 알 수 없는 것과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알 수 없는 것과

막혔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과

수승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과 미세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 같다.

너무 가까워서 알 수 없다 함은 눈속의 약과 같고,

너무 멀어서 알 수 없다 함은 새가 허공에 높이 날아가는 것 같고,

감관이 무너져서 알 수 없다 함은 소경이 빛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지 못하
고,

코가 막히면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입병이 나면 맛을 모르고 몸이 굳으면 촉감을 모르고,

마음이 미치면 진실을 모르는 것 같다.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써 알 수 없다함은 마음을 빛 따위에 두면 소리 따위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막혔으므로 알 수 없다 함은 땅이 큰 물을 막고, 벽이 밖의 물건을 막는 것 같다.

같음으로써 알 수 없다 함은 검은 종이 위에 검은 점과 같다.

수승하므로 알 수 없다 함은 종 소리가 나면 불자[拂子]흔드는 소리를 득지 못하는 것 같다.

미세하므로 알 수 없다 함은 미진 따위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있기는 하지만 여덟 가지 인연으로 인하여 알 수 없다.

그대가 말하기를 “원인 가운데 변함을 얻을 수 없고,

진흙 속에서 병따위를 얻을 수 없다 함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와 같이 있지만 여덟 가지 인연으로 얻을 수 없을 뿐이다.

[답] 변하는 법칙과 병 따위의 결과와는 여덟 가지 인연으로 얻을 수 없다 함과 동일하지
않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변하는 법칙과 병 따위의 결과가 너무 가까워서 얻을 수 없다면

조금 멀어지면 얻을 수 있으리라. 너무 멀어서 얻을 수 없다면 조금 멀어지면 얻을 수 있으
리라.

너무 멀어서 얻을수 없다면 조금 가까워지면 얻을 수 있으리라.

감관이 무너져서 얻을 수 없다면 감관이 깨끗하면 얻을 수 있으리라.

마음을 두지 않아서 얻을 수 없다면 마음을 두면 얻을 수 있으리라.

막힘이 있어서 얻을 수 없다면 변하는 법칙과 병 따위의 결과는 막힘이 없으므로 얻을 수
있으리라.

같으므로 얻을 수 없다면 달라질 때엔 얻을 수 있으리라.

같으므로 얻을 수 없다면 달라질 때엔 얻을 수 있으리라.

수승하므로 얻을 수 없다면 수승한 쪽이 멈추면 얻을 수 있으리라.

미세하므로 얻을 수 없다면 병 따위의 결과는 거칠기 때문에 얻을 수 있으리라.

만일 병이 미세하므로 얻을 수 없다면 난 뒤에도 얻을 수 없으리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난 뒤에나 나기 전에나 미세함은 동일하기 때문이며,

난 뒤에나 나기 전에나 일정한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문] 나기 전에는 미세하다가 난 뒤에는 거칠어진다.

그러므로 난 뒤에는 얻을 수 있고 나기 전에는 얻을 수 없다.

[답] 만일 그렇다면 원인 가운데는 결과가 없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원인에는 거칠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 원인 가운데 먼저 거칠음이 없다.

만일 원인 가운데 먼저 거칠음이 있다면 미세하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고는 하지 못하리
라.

지금 결과는 거칠은데 그대는 미세하므로 얻을 수 없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지금 결과는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결과는 실제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세하므로 얻을 수 없음은 아니다.

이와 같이 어떤 법이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다 함은 여덟 가지 인연으로 얻을 수 없
다.

그러므로 먼저 원인 가운데 결과가 있다 함은 옳지 못하다.

또 다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서 난다면 이는 원인은 원인의 형상이 무너지고

결과는 결과의 형상이 무너진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비단이 실에 있고, 과일이 그릇에 있는 것 같아서

다만 머무는 곳일뿐, 원인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또 무슨 까닭이겠는가. 실과 그릇은 비단과 과일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너진다면 결과도 무너진다. 그러므로 실 따위는 비단 따위의 원인이 아니다.

원인이 없으므로 결과도 없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이루어지지만 원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과가 어찌 이루어지랴.

또 다시 작용치 않으면 결과라 한 수 없나니, 실 따위의 원인이 비단 따위 결과가 될 수 없
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실 따위는 비단 따위가 머무는 까닭에 비단 따위 결과가 되지 못한다.

이와 같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만일 인과가 모두 없다면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원인이 있는가, 없는가를 찾을 수 없으리라.

또 다시 원인 가운데 결과가 있으나 얻을 수 없을 뿐이라 하면 의당 어떤 형상이 나타나야
하나니,

마치 향기를 맡고 꽃이 있음을 알며, 소리를 듣고 새가 있음을 알며,

웃음 소리를 듣고 사람이 있음을 알며, 연기를 보고 불이 있음을 알며,

따오기를 보고 못이 있음을 아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결과가 있다면 의당 어떤 형상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결과의 본체도 얻을 수 없고, 형상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으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서 나는 것이라면 실에 의하여 비단이 있고,

부들에 의하여 방석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만일 원인이 작용치 않는다면 다른 부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된다.

만일 실이 작용치 않는다면 부들도 작용치 못하리니,

지어진 것, 원인이 없다면 결과라 할 수 없다 만일 결과가 없다면 원인도 없나니,

먼저 말한바와 같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서 난다 함이 옳지 못하다.

또 다시 결과가 지어진 원인이 없다면 항상함이어서 열반과 같다.

만일 결과가 항상하다면 모든 유위의 법도 항상할 것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법이 모두가 항상하다면 덧 없음은 없을 것이다.

덧없음이 없다면 항상함은 없을 것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항상함에 의하여 덧없음이 있고, 덧없음에 의하여 항상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함과 덧없음, 두 가지가 없다면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서 난다 할 수 없다.

또 다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 난다면 결과는 다시 다른 결과에 대하여 원인이 되
리니,

방석이 않음의 원인이 되고, 거적이 가리움의 원인이 되고, 수레가 실음의 원인이 되는 것
같으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 나다 할 수 없다.

만일 말하기를 “마치 땅에 먼저부터 향기가 있으나 물을 뿌리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나
니,

결과도 이와 같아서 인연이 모이지 않으면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하면 이는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알 수 있을 때[可了時]를 결과라 해야 하고,

병 따위 물건은 결과가 아니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알 수 있음은 곧 작용인데 병 따위에 먼저부터 있다면 작용이 아니다.

이는 곧 작용으로써 결과를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결과가 있어서 난다 함은 옳지 못하다.

또 다시 요인(了因 : 결과를 확인하게 하는 원인, 생인(生因)의 반대.)

은 다만 드러내기만 할지언정 물건를 내지는 못하나니,

마치 어두움 속의 병을 비치기 위하여 등불을 켜면 따라서 침구 따위도 비치나

병을 만들기 위하여 뭇 인연을 화합하여도 다른 침구 따위 물건을 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가가 있어서 난다 함이 옳지 못하다.

또 다시 원인 가운데에 먼저 결과가 있어 난다면

지금( 지금의 작용[今作] : 현재에 이루어지는 과정.)의 작용[今作]과

장차의 작용[當作]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의 작용과 장차( 장차의 작용[當作] : 장차 이루어지는 과정.)의 작용을
맏아들인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말하기를 “원인 가운데 결과가 없지만 결과가 난다. “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없는데서 난다면 둘째 머리와 셋째의 손이 있어야 한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없지만 나기 때문이다.

[문] 병 따위 물건은 인연이 있고, 둘 때 머리와 셋째 순따위는 인연이 없거늘 어찌 날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대의 말이 옳지 못하다.

[답] 둘째 머리와 셋째 손과 병따위 결과는 모두 원인안에 없다.

마치 진흙 속에 병이 없고, 돌 속에도 병이 없는 것같다.

무슨 까닭에 진흙은 병의 원인이라 하나 돌은 병의 원인이라 하지 않으며

무슨 까닭에 우유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지 않으며

무슨 까닭에 우유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고

실은 비단의 원인이라 하나 부들로써 원인이라 하지 않는가.

또 다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없으나 결과가 난다면 낱낱 물건이 온갖 물건을 내리니,

마치 손가락에서 수레, 말, 음식, 따위가 나오는 것 같이,

실에서는 비단만이 나오지 않고, 수레, 말 음식 따위도 나와야 한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없으나 능히 낸다면 무슨 까닭에 실은 비단만을 내고

수레, 말, 음식 따위를 나지 못하랴. 모두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없으나 결과가 난다면

모든 원인이 제각기 힘이 있어서 결과를 내지 못하리라.

그러나 기름을 요구하는 이는 깨에서 잘지언정 모래를 짜지 않는데 만일 모두 없다면

어찌 깨에서만 구하고 모래에서 짜지 않는가. 만일 말하기를

“깨에서 기름이 나는 것은 이미 보았으나 모래에서 기름이 나는 본 일이 없으므로

깨에서 구할지언정 모래에서 구하지 않는다. “면 이는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나는 형상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때에 깨에서 기름이 나는 것을 보
았으나

모래에서 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깨에서 구할지언정 모래에서 구하지 않는다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온갖 법이 나는 형상 난다는 원리 이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다른 때엔 개에서 기름이 나는 것을 보았으므로 깨에서 구하고 모래에서 짜지 않는다 하지
못한다.

또 다시 나는 지금 한 가지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요, 온갖 인과를 모두 부정하노니,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 나는 것이나 먼저 결과가 없이 나는 것이나,

먼저 결과가 있기도 없기도 하여 나는 것이나, 이 세가지 모두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다른 때에 깨에서 기름이 나는 것을 보았다.

“하면 이는 곧 동의인(同疑因=원인에 대한 의심)에 빠진다.

또 다시 먼저 원인 안에 결과가 없으나 결과가 난다면 모든 원인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모든 원인이 만일 없다면 어찌 작용하며,

법이 어찌 이루겠으며 만일 작용도 없고 이룸도 없다면 어찌 원인이라 하겠는가.

이와 같다면 짓는 이는 지은 바가 없을 것이며, 짓는 이로 하여금 지은 바를 갖게 하지 못
한다.

만일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다고 하면 지금과 짓는 이와 지은 법의 차별이 없을 것이
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먼저 결과가 있다면 어찌 작용 변함을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지음과 짓는 이와 지은법의 모든 원인을 말하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없다 하여도 옳지 못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지음과 짓는 이를 수긍하여 인과가 있다고 분별한다면 의당 그런 비난을
하리라.

그러나 나는 지음과 짓는 이와 인과가 모두 공하다고 하였다.

만일 그대가 지음과 짓는 이와 인과가 모두 공하다고 하였다.

만일 그대가 지음과 짓는 이와 인과를 부정한다면

그는 도리어 나의 법, 주장을 이룰지언정 비난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결과가 없지만 결과가 난다고 함은 옳지 못하다.

또 다시 어떤 사람이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음을 수긍하면 그런 비난을 하리라.

그러나 나는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다고 하지 않은 까닭에 그런 비난을 받지 않고,

또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없다는 것도 수긍하지 않는다.

만일 말하기를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기도 하고 결과가 없기도 하면서 결과가 난다.
“고 하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있음과 없음과의 성품이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성품이 서로 어긴다면 어찌 한 곳에 있을 수 있으랴. 마치 밝음과 어두움, 괴롬과 즐거움,

움직임과 머무름, 속박과 해탈이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거나 없거나 두 가지 모두가 나지 않는다.

또 다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함은 위의 있음과 없음에서 이
미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 먼저 결과가 있어도 나지 않고,

결과가 없어도 나지 않고 있기도 없기도 하여도 나지 않나니,

이치가 여기에 이르러 지극하여 온갖 곳에 따지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결과가 끝내 나지 않나니, 결과가 끝내 나지 않으므로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원인이며 모두가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법은 모두가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원인이며 모두가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도 역시 공하다. 유위와 무위도 공하거늘 하물며 <나>이겠는가.

 

 

三. 관연문(觀緣門] : 인연에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함.

 

 

또 다시 모든 법의 인연[緣]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넓거나 간략한 못 인연에

결과가 있지 않나니

인연에 결과가 없다면

어찌 인연에서 나리요

 

병 따위의 결과는 낱낱 인연 가운데 없고, 화합한 가운데에도 없다.

만일 두 부문에 없다면 어찌 인연에서 났다하겠는가.

[문] 어떤 것을 모든 인연이라 하는가. <![endif]>

[답] 네 가지 인연에서 모든 법이 날뿐

다섯째 인연이 더 있지 않나니

인연[因緣]과 차제연(次第緣]과

연연(緣緣)과 증상연(增上緣)이다.

 

네 가지 인연이라 함은 인연과 차제연과 연연과 증상연이다.

인연이라 함은 의지해 나는 법에 따라, 이미 의지해 났거나,

이제 의지해 나거나, 장차 의지해 날 것들이요.

차제연(次第緣)이라 함은 앞의 법이 멸한 뒤에 다음 법이 차례차례 나는 것이요,

연연(緣緣)이라 함은 생각을 일으키는대로 몸의 없을 일으키거나

입의 업을 일으키거나 마음과 마음 부치의 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증상연이라 함은 이 법이 있으므로 저 법이 날 수 있을 때에 이 법은 저접에 대하여 증상연
이 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인연이 모두가 원인 가운데 결과가 없다면

모든 인연을 떠나서 따로이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는 인연을 떠나서는 결과가
없다.

또 인연 가운데 결과가 있다 하여도 원인을 떠나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는 원일을 떠나서는 결과가 없다.

만일 인연과 원인에 결과가 있다면 얻을수 있어야 하겠지만 이치로써 따지고 구하건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두 곳에 모두 없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에 없으면 화합한 가운데도 없거늘

어떻게 결과가 인연에 났다고 말하겠는가. 또 다시,

 

만일 결과가 인연 가운데 없지만

인연 가운데 난다고 하면

이 결과는 어찌하여

인연 아닌 가운데서 나지 않으랴

 

만일 결과가 인연 가운데 없지만 인연에서 난다고 하면

무슨 까닭에 인연 아닌 가운데서는 나지 않으랴.

두 가지에 모두 없으므로써 이다. 그러므로 어떤 원인과 인연에서도 결과가 나지 않는다.

결과가 나지 않으므로 인연도 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먼저 인연이 있고 뒤에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연에 결과가 없으므로 온갖 유위의 법이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면 무위의 법도 공하다. 유위와 무위가 공하거늘 어찌<내>가 있으랴.

 

 

四. 관상문(觀相門]

: 생[生], 주(住), 멸(滅)따위의 세 가지 형상이 본래 없음을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이 공하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유위와 무위의

두 법이 모두 형상없음이니

형상이 있지 않으므로

두 법이 모두가 공하다.

 

유위의 법은 형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 어떤 것을 유위의 형상이라 하는가.

[답] 만물은 제각기 유위의 형상이 있나니, 마치 소는 뿔, 등마루, 턱, 꼬리 끝의 털 따위가
있으니,

이것이 소의 형상이요, 병은 밑이 평평하고 배가 크고 목이 가늘고 주둥이가 퍼졌으니

이것이 병의 형상이요, 수레는 바퀴와 살과 축이 있으니, 이것이 수레의 형상이요,

사람은 머리, 눈, 배, 등, 어깨, 팔, 손, 발이 있으니, 이것이 사람의 형상이다.

이같이 나고 머무르고 멸하는 것이 유위의 법의 형상이라면 그것이 유위이겠는가. 무위이겠
는가.

[문] 유위라 하면 어떤 허물이 있겠는가.

[답] 남[生]이 유위이라면

다시 세 형상이 있어야 하고

남이 무위이라면

어찌 유위라 하겠는가.

 

만일 남이 유위라면 세 형상이 있어야 하고, 이 세상에 다시 세 형상이 있으리니,

그렇다면 차츰차츰 무궁함을 이룰 것이며, 머무름과 멸함도 그렇다.

만일 남이 무위라면 어찌 무위가 유위에 대하여 형상이 되어 주리요,

그리고 남과 머무름과 멸함을 여의었거늘 누가 그것이 나는 것인 줄 알리요.

또 다시 남과 머무름과 멸함을 분별할함으로써 남이 있으나

무위는 분별할 수 없으므로 나지 않는다. 머무름과 멸함도 그렇다.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공하므로 유위의 법이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의 법도 공하나니, 유위를 인하여 무위가 있기 때문이다.

유위와 무위의 법이 공하므로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다.

[문] 그대가 말하기를 “세 형상에 다시 세 형상이 있으므로 무궁함이 이루어지고,

또 남이 유위가 아니리라. “ 하니, 이제 설명하겠다.

 

남의 남[生生]에서 난 것이

다시 본래의 남[本生]을 내고

본래의 남에서 난 것이

도리어 남의 남을 낸다

 

어떤 법이 날 때엔 자체를 포함한 일곱 가지 법이 함께 나나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남[生]이요, 셋째는 머무름[住]이요, 넷째는 사라짐[滅]이요,

다섯째는 남의 남[生生]이요, 여섯째는 머무름의 머무름[住住]이요,

일곱째는 사라짐의 사라짐[滅滅]이다.

이 일곱 가지 법 가운데서 본래의 남은 자체를 제외한 여섯 가지 법을 내고

남의 남은 본래의 남을 내고 본래의 남은 도리어 남의 남을 낸다.

그러므로 세 형상이 비록 유위이지만 무궁하지는 않으리라. 머무름과 사라짐도 그러하리라.

 

[답] 만일 남의 남이

도리어 본래의 남을 낸다면

남의 남이 본래의 남에서 났거늘

어찌 본래의 남을 낼 수 있으랴

 

만일에 말하기를 남의 “남이 능히 본래의 남을 낸다. “면

본래의 남이 남의 남을 내지 않거늘 남의 남이 어찌 본래의 남을 내리요.

 

만일에 본래의 남이

남의 남을 낸다고 하면

본래의 남이 거기서 나왔거늘

어떻게 남의 남을 내겠는가.

 

만일에 말하기를 “본래의 남이 능히 남의 남을 낸다. “고 하면 남의 남이 난 뒤에는

도리어 본래의 남을 내야 하나니, 이 일이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남의 남이 으레히 본래의 남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의 남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에는 본래의 남이 스스로 나지 않거늘 어찌 능히 나의 남을 내리요,

만일에 남의 남이 날 때에 본래의 남을 낸다고 하면 이것도 옳지 않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남의 남이 날 때엔

본래의 남이 날 수도 있지만

남의 남이 나지도 않거늘

어떻게 본래의 남을 내리요

 

이 남의 남이 날 때엔 혹 본래의 남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남의 남 자체로 나지 않으므로 본래의 남을 내지 못한다.

만일 말하기를 “이 남의 남이 날 때에 스스로도 나고, 남도 내는 것이

마치 등불을 켰을 때에 스스로도 비치고 남도 비치는 것 같다. “하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등불 자체에는 어두움이 없고

머무는 곳에도 어두움이 없다

어두움을 부수면 비친다 하나니

등불이 무엇을 비친다 하랴

 

등불 자체에는 어두움이 없고, 광명이 머무는- 있는- 곳에도 어두움이 없다.

만일 등불 자체에 어두움이 없고, 광명이 있는 곳에도 어두움이 없다면

어찌 등불이 스스로를 비치고 남도 비친다 하리요, 어두움을 깨뜨리는 것을 비친다 하는데,

등불이 스스로의 어두움도 깨뜨리지 못하고, 남의 어두움도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등불이 스스로도 비치지 못하고, 남도 비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먼저 말하기를 “마치 등불이 스스로를 비치고 남도 비치는 것 같이

남도 그러하여서 스스로도 나고 다른 이도 낸다 함은 옳지 못하다.

[문]만일 등불을 켰을 때엔 능히 어두움을 깨뜨린다.

그러므로 등에는 어두움이 없고, 머무는 곳에도 어두움이 없다. 하였다.

 

[답] 어찌하여 등불을 처음 켤 때에

어두움을 무찌른다 하랴

등불을 처음 켤 때엔

어두움에 미치지 못한다.

 

등불을 켜는 즉시에 어두움에 미치지 못한다.

만일 어두움에 미치지 못하면 어두움을 깨뜨린다 하지 못하리라. 또 다시,

 

등불이 어두움에 미치지 못해도

어두움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하면

등불이 여기에 있으면서도

온 세계의 어두움을 깨뜨려야 한다.

 

만일에 말하기를 “등불이 어두움에 이르르지 않아도 어두움을 깨뜨릴 능력이 있다. “고하
면,

여기에다 등불을 켰을 때에 온갖 세간의 어두움을 깨뜨려야 하리니, 모두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기에다 등불을 켜도 온 세간의 어두움을 두루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등불이 어두움에 미치지는 못하나

능히 어두움을 깨뜨린다. “함은 옳지 못하다. 또 다시,

 

등불이 능히 스스로를 비치고

딴 것도 능히 비칠 수 있다면

어두움도 그와 같아 스스로를 어둡히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해야 하리라

 

만일에 말하기를 “등불이 능히 스스로를 비치고 남도 비친다. “하면,

어두움은 등불과 서로 어기는 것이므로 그것 역시 스스로를 어둡히고, 남도 어둡혀야 한다.

만일 어두움은 등불과 서로 어기지만 스스로를 어둡히지 않고 남도 어둡히지 않으나,

등불은 스스로를 비치고 남도 비친다 하면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그르다.

마치 남[生]이 스스로를 내고, 다른 것도 낸다한 것 같으니, 이제 다시 설명하리라.

 

남이 아직 나지 않았을 때엔

어떻게 스스로 날 수 있으며

남이 이미 나온 뒤라면

났는데 무엇하러 다시 나리요

 

이 남[生]이 아직 나기 전이면 이는 의당 뒤에 다시 나거나, 날 것이 나지 않았거나,

나지 않은 것이 났거나 하리라. 나지 않은 것은 없다는 뜻이니,

어찌 스스로가 날 수 있으며, 난 뒤에 다시 난다면 난 뒤라는 말이 곧 난 것이어늘

어찌 다시 날 필요가 있으랴. 난 뒤에는 다시 날 것이 없고 작용한 뒤에는 다시 작용할 것
이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나지 않는다. 남 스스로가 나지 않으면 어떻게 저 것을 내겠는가.

그대가 말하기를 “스스로도 나고 저것도 낸다. “함은 옳지 못하다. 머무름과 사라짐도 그
러하다.

그러므로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유위의 형상이라함이 옳지 못하다.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유의라는 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유위의 법이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의 법도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유위가 사라진 것을 무위의 열반이라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열반도 공하다.

또 다시,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없는 것을 무위의 형상이라 하나니,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없으면 없음의 법이니 없음의 법은 형상을 이룰 수 없다.

만일 말하기를 “형상 없음이 열반이라 하면 옳지 못하나니, 만일 형상 없음이 열반이라.
“하면

어떤 형상으로써 형상 없음임을 알겠는가. 만일 형사 있음으로써 형상 없음임을 안다고 하

그것을 어찌 형상 없음이라 하리요, 만일 형상 없음임을 알면 형상 없음은 곧 없음이요,

없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일에 말하기를

“뭇 옷이 모두가 형상이 없으나 오직 옷 하나만이 형상이 없어서

바야흐로 형상없음이 그의 형상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형상 없는 옷도 입을 수 있음을 안
다.

이와 같아서 나고 머무르고 멸함은 유위의 형상이요,

나고 머무르고 멸함이 없는 곳은 무위의 형상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나고 머무르고 멸함의 갖가지 인연은 모두가 공하여서

유위의 형상도 있을 수 없거늘 어찌 그것을 인하여 무위를 알겠는가.

그대는 어떤 유위의 결정된 형상을 얻었기에 형상 없는 곳이 곧 무위임을 안다 하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 뭇 형상의 가운데 형상 없는 옷을 열반의 형상 없음에 비유한 것은
옳지 못하다.

또 옷의 비유는 뒤의 다섯째 부분에서 널리 설명한다.

그러므로 유위의 법은 유위의 법은 모두가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의 법도 공하
고,

유위와 무위가 공하므로 <나>도 공하고, 세 가지 일이 공하므로 온갖 법이 모두가 공(空)하
다.

 

 

 

 

五. 관유상무상문(觀有相無相門) : 생, 주, 멸이 현상이 있는지 없는지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이 공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형상있다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요

형상없다는 것 또한 형상이 아니며

그 형상과 형상이 아님을 떠나서

형상은 무슨 형상이겠느냐

 

형상 있다는 일에서 형상도 형상이 아니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어떤 법이 먼저부터 형상이 있다면 다시 무슨 형상이라 하리요.

또 다시 형상있는 일을 형상으로 형상할 수 있다면 두 형상이 되는 허물이 있나니,

하나는 먼저부터 있는 형상이요, 둘은 형상에서 나온 형상이다.

그러므로 형상 있는 일에서의 형상하는 바가 없다.

형상 없는 일에서의 형상도 형상하는 바가 없거늘

어떤 법이 형상 없는데서 형상이라고 할 형상이 있다고 하겠는가.

마치 코끼리는 두 어금니가 있고, 코 하나를 드리웠고,

머리에 세 봉우리가 솟고 귀는 키와 같고, 등은 활동 같고, 배는 크고 처졌으며,

꼬리 끝에 털이 있고, 네 다리는 굵고 동그나니, 이것이 코끼리의 형상이다.

만일 이 형상을 떠나서는 어떤 형상으로도 형상할 수 있는 코끼리가 있지 않다.

또 말은 두 귀가 뾰족하고 갈기를 드리웠고, 네 다리는 통굽이고,

꼬리에는 전부 털 뿐이니, 이런 형상을 여의면 어떤 형상으로도 형상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이와 같이 형상있음 안에 있는 형상으로도 형상할 수 없고,

형상 있음과 형사 없음을 떠나서 다시 다른 형상으로 형상할 수 없고,

형사 있음과 형상 없음을 떠나서 다시 다른 형상으로 형상할 수 있는 셋째 법이 있지도 않
다.

그러므로 형상으로 형상하는 바가 없고,

형상으로 형상하는 바가 없으므로 형상할 법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어떤 형상 때문에 그 일을 아는 것을 형상한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형상과 형상할 것이 모두 공하고, 형상과 형상할 것이 모두 공하므로 만물도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형상과 형상할 것을 떠나서는

다시 어떤 물건도 없고 물건이 없으므로 물건 아닌 것도 없다.

물건이 멸하므로써 물건이 없다 하거니와 물건이 없다면 무엇이 멸하겠는가.

그러므로 물건이 없다 한다. 물건이 없고, 물건이 공하므로 온갖 유위의 법이 모두가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의 법도 공하고, 유위, 무위의 법이 공하므로 <나>도 공하다.

 

 

六. 관일이문(觀一異門)

: 앞에서 밝힌 온갖 형상이 동일성(同一性)에 있는가. 아니면 차이가 있는가를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이 공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형상[相]과 형상할 것[可相]의

동일함[一]과 차이됨[異]을 얻을 수 없나니

동일함과 차이됨을 얻을 수 없다면

이 들 두 가지가 어찌 이루어지랴

 

이 형상과 형상할 것이 동일하다 해도 얻을 수 없고, 차별된다 해도 얻을 수 없고,

동일하면서도 차별된다 해도 얻을 수 없어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상과 형상할 것이 모두가 공하다.

형상과 형상할 것이 공하므로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다.

[문] 형상과 형상할 것은 항상 이루어지거늘 어찌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는가.

그대가 말하기를 “형상과 형상할 것의 동일함과 차이됨을 얻을 수 없다. “하니,

이제 설명하리라. 모든 물건에는 형상이 동일한 형상이 되기도 하고

혹은 형상이 형상 할것도 다르기도 하며 조그만큼은 형상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형상할 것임
이 있다.

예컨대 의식이 형상이 곧 의식이어서 작용하는 의식을 떠나서는 다시 의식이 없는 것과

느낌의 형상이 곧 느낌이어서 작용하는 느낌을 떠나서는

다시 느낌이 없는 따위는 형상이 동일한 형상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애욕이 사라진 열반이라. “하는데 애욕은 유위와 유루의 법이요,

사라짐은 무위와 무루의 법인 것과 같다. 믿는 사람이 세 종류가 있으니,

착한 사람을 즐기어 가까이 하거나 법문을 즐기어 듣고자 하거나 보시를 행하는 따위로서

이러한 세 가지는 몸과 입의 업이므로 색음(色陰)에 포함되고,

신심(信心)은 마음부치의 법이므로 행음(行陰)에 포함되는 것 따위는 형상이 형상할 것과
다른 것이라 한다.

바른 소견이 도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도에 대하여는 조그만큼이고,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유위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유위의 법에 대하여는 조그만큼이다.

이와 같이 형상할 것 가운데서 조그만큼를 형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형상이 곧 동일한 형상이 되기도 하고 형상이 형상할 것과 다르기도 하며

혹은 형상인 것도 있고 조그만큼만 이 형상인 것이 있다.

그대가 말하기를 “동일함과 차이됨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형상과 형상할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 “함은 옳지 못하다.

[답] 그대가 말하기를 “형상이 곧 형상할 것임이 마치 의식 따위와 같다. “고 함은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형상이 있음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을 형상할 것이라 하고

사용되는 것을 형상이라 하는데 모든 물건이 스스로 알지 못함이

마치 손가락이 스스로 건드리지 못하고 눈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의식은 형상 그대로가 형상할 것이라. “함이 옳지 못하다.

또 다시 형상이 곧 형상할 것이라면 형상과 형상할 것을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형상과 형상할 것을 분별하면 형상이 곧 형상할 것이라 하지 못하리라.

또 다시 형상이 곧 형상할 것이라면 인과가 동일하여야 한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형상은 원인이요, 형상할 것은 결과이어서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돼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형상이 곧 형상할 것이라 함은 옳지 못하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형상이 형상할 것과 다르다. 함은 그것 또한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그대가 말하기를 “애욕이 사라진 것이 열반이라 했을지언정

애욕이 그대로가 열반이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애욕이 그대로 열반이라 했다면 의당 형상과 형상할 것이 다르다 하겠지만

애욕이 사라진 것이 열반이라 하면 형상과 형상할 것이 다르다 하지 못하리라.

또 그대가 말하기를 “심신이 있는 이가 세 형상이 있다. “고 하였으나 모두가 다르지 않
다.

믿는 이에게 믿음이 없다면 이 세 가지 일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형상과 형상할 것이 다르다 할 수 없다.

또 형상과 형상할 것이 다르다면 형상에 다시 형상이 있어서 무궁한 허물을 이루리니,

이 일이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형상과 형상할 것이 다를 수 없다.

[문] 마치 등불이 스스로를 비치고 다른 것도 비치는 것 같이

형상이 스스로의 형상이 되기도 하고, 다른 것의 형상이 되기도 하리라.

[답] 그대가 등불의 비유를 말하였으나 세 가지 유위 가운데서 이미 깨뜨렸다.

또 앞의 말을 스스로 어긴다. 그대가 먼저는 형상과 형상할 것이 다르다 하더니

이제는 형상이 스스로의 형상도 되고, 또 다른 것의 형상도 된다 하니, 이 일이 옳지 못하
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형상할 것 가운데 조그만큼이 형상이라. “한 것도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이치는 동일함 가운데 있기도 하고 차이된 가운데 있기도 한데

동일함과 차이된 이치는 앞에서 이미 부정했기 때문에 조그만큼의 형상도 깨뜨려졌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써 형상과 형상할 것의 동일함도 얻을 수 없고, 차이됨도 얻을
수 없으며,

그 밖에 따로이 형상과 형상할 것을 이루 셋째 법도 없다.

그러므로 형상과 형상할 것을 이루 셋째 법도 없다. 그러므로 형상과 형상할 것이 모두가
공하다.

이 두가지는 공하므로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다.

 

 

 

 

七. 관유무문(觀有無門)

: 생, 주, 멸을 유(有)와 무(無)로 분류하고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관찰함. 여기서 무(無)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존재 없음의 존재’을 뜻한다.

 

 

또 다시 온갖 법은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있음과 없음이 동시라 하여도 될 수 없고,

동시가 아니라 하여도 될 수 없다.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 있다.

 

있음과 없음이 동시라도 없고

없음을 여의면 있음도 없고

없음을 여의지 않고 있음이 있다면

있음은 의례히 항상 없으리

 

있음과 없음은 성품이 서로 어기므로 한 법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다.

마치 날때엔 죽음이 없고, 죽을 때엔 남이 없는 것 같으니, 이 일은 중론(中論)에서 이미 말
했다.

만일 말하기를”없음을 떠나서 있음이 있다. “고 하여도 허물이 안 된다. 하면 이는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없음을 여의었거늘 어찌 있음이 있을 수 있으랴.

마치 앞에서 말하기를”법이 날 때에는 자체를 합쳐서 일곱 가지 법이 함께 난다. “한 것
같으며,

또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있음과 덧 없음은 함께 난다.

덧 없음은 멸하는 형상이므로 없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없음을 떠나서는 있음이 날 수 없
다.

만일 덧없음을 여의지 않고 있음이 난다 하면 있음은 항상 없게 된다.

만일 있음이 항상 없다면 애초부터 머무름이 없으리니, 항상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는 머무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항상 없지는 않다.

만일 덧없음을 여의고 있음이 날 수 있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덧없음을 떠나서는 있음은 진실로 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있음이 날 때에 이미 무상이 있으나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요,

사라질 때에나 일어나서 이 있음을 무너뜨린다.

이와 같이 하여 남과 머무름과 사라짐과 늙음 얻음이 모두 때를 기다려서 일어난다.

있음이 일어날 때에는 남[生]이 작용이 되어서 남이 있게 하고,

남과 멸함의 중간에는 머무름이 작용이 되어서 이 있음을 멸한다.

늙음은 남이 변하여 머무름에 이르르게 하고,

머무름을 변하여 사라짐에 이르르게 하거니와 덧없음이 무너지면 항상함을 얻어서

네 가지 일이 이뤄지게 한다. 그러므로 법이 비록 무상함과 함께 나지마는 있음은 항상 없
지 않으리라.

[답] 그대가 말하기를”덧없음은 사라지는 형상으로서 있음과 함게 난다. “하거니와

날 때에 있음이 무너지고, 무너질때에 있음이 생겨야 한다.

또 다시 생멸이 모두 없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멸할 때에 있음이 날 수 없고,

날 때에 있음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이어서 생과 멸이 서로 이기기 때문이다.

또 다시 그대의 법 주장이 덧없음과 머무름이 함께난다 하나 있음이 무너질 때에는 머무름
이 없고,

머무른다면 무너짐이 없으리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머무름과 무너짐이 서로 어기기 때문이
다.

늙을 때엔 머무름이 없고 머무를 때엔 늙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남과 머무름과 사라짐과 늙음과 덧없음과 얻음이 본래부터 함께
난다. “함은

어지럽히는 말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있음이 덧없음과 함께 난다면 덧없음은 무너지는
형상이다.

무릇 물건이 날 때엔 무너짐의 형상이 없고, 머무를 때에도 무너짐의 형상이 없다.

그럴 때를 덧없음의 형상이라 하지 않겠는가.

마치 인식하는 힘이 있으므로 의식이라 하거니와 인식하지 못하면 의식의 형상이 없고

느낌으로써 느낌이라 하거니와 느끼지 않으면 느낌의 형상이 없고,

기억함으로써 기억[念]이라 하거니와 기억하지 못하면 기억의 형상이 없으며,

일어나는 것이 남의 형상인데 일어나지 않으면 남의 형상이 아니요,

유지하는 것이 머무름의 형상인데 유지하지 않으면 머무름의 형상이 아니요,

변하는 것이 늙음의 형상인데 변하지 않으면 늙음의 형상이 아니요,

수명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인데 수명이 사라지지 않으면 죽음의 형상이 아닌 것 같이

무너짐이 덧없음의 형상인데 무너짐을 여의면 덧없음의 형상이 아니다.

만일 나거나 머무를 때에 비록 덧없음이 있으나 있음을 무너뜨리지 못하다가

뒤에야 있음을 무너뜨린다 하면 어찌 함께 나야 할 필요가 있으랴.

이와 같이 무너짐이 있을 때마다 덧없음이 있다. 그러므로 덧없음이 비록 함께 났으나

뒤에는 있음을 무너뜨린다 함이 옳지 않다. 이와 같이 있음과 없음이 함께 함도 이뤄지지
않고,

함께 하지 않음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공하다.

있음과 없음이 공하므로 온갖 유위의 법이 공하고,

온갖 유위가 공하므로 무위도 공하고, 유위와 무위가 공하므로 중생도 공하다.

 

 

八. 관성문(觀性門) : 성품은 생멸과 변화를 초월한 것임을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은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모든 법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법하고 달라지는 형상을 보건대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성품 없는 법도 없으니

모든 법이 모두가 공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성품이 있다면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온갖 법이 모두가 변함을 본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성품이 없는 것임을 안다.

또 다시 모든 법이 일정한 성품이 있다면 뭇 인연에서 나지 않으리라.

만일 성품이 뭇 인연에서 났다면 성품은 곧 작용하는 법일 것이다.

작용치 않는 법은 다른 이를 인하여 성품이라 불리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공하다.

[문] 온갖 법이 공하면 생과 멸이 없고, 생과 멸이 없으면 괴롬의 진리[苦諦]가 없고,

괴롬의 진리가 없으면 쌓임의 진리[集諦]도 없고 괴롬과 쌓임의 진리가 없으면

사라짐의 진리[滅諦]도 없고, 사라짐의 진리가 없으면 괴롬이 사라지는 곳에 이르르는 도도
없다.

만일 모든 법이 공하여 성품이 없다면 네 가지 진리가 없고,

네 가지 진리가 없으면 사문의 네 가지 과위도 없고,

사문의 네가지 과위가 없으므로 성현도 없고 이런 일이 없으므로 불, 법, 승도 없으리니,

세간의 법이 모두 없다 함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다 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답] 두 가지 진리가 있으니, 하나는 세속제(世俗諦)요, 또 하나는 제일의제이다.

세속제에 의하여 제일의제를 말할 수 있거니와 세속제에 인하지 않고는

제일의제를 말할 수 없고,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도 얻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두 가지 진리를 알지 못하면

스스로 이로움과 남을 이롭게 함과 함게 이로움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세속제를 알면 제일의제를 알고, 제일의제를 알면 세속제를 알게 된다.

그대는 지금 세속제의 말을 듣고 제일의제라 여기니, 그러기 때문에 실수되는 곳에 빠졌다.

여러 부처님의 인연법을 심히 깊은 제일의제라 하는데 이 인연법은 제 성품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이 공하다 하였다. 만일 모든 법이 뭇 인연에서 나지 않았다면

의당 제각기 결정된 성품의 오음이 있어서 생멸하는 형상이 있지 않아야 한다.

오음이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면 덧없음이 없는 것이니,

덧없음이 없으면 괴롬이 진리가 없고 괴롬의 진리가 없으면

인연으로 생기는 법인 쌓임의 진리가 없으리라.

모든 법이 결정된 성품이 있으면 괴롬이 사라진 진리가 없으리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성품이 변함 없기 때문이다.

만일 괴롬을 소멸하는 진리가 없으면 괴롬이 사라진 곳에 이르르는 도도 없나니,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공>을 수긍하지 않으면 네 가지 진리가 없고,

네 가지 진리가 없으면 네 가지 진리를 얻음도 없고,

네 가지 진리를 얻음이 없으면 괴롬을 알기와

쌓임을 끊기와 사라짐을 증득하기와 도를 닦음이 없으리니,

이런 일이 없으므로 사문의 네 가지 과위가 없고

사문의 네 가지 과위가 없으므로 향함[向]을 얻는 이가 없고, 향함을 얻는 이가 없으면 부처
가 없고,

인연법을 깨뜨린 까닭에 법이 없고, 과위가 없으므로 승가도 없다.

만일 불, 법, 승이 없으면 삼보가 없고, 삼보가 없으면 세곡의 법을 파괴하리니,

이 일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공하다.

또 다시 모든 법이 결정된 성품이 있으면 생과 멸이 없고, 죄와 복이 없고,

죄와 복의 과보가 없어서 세간의 항상한 형상이리라. 그러므로 모든 법은 성품이 없다.

만일 모든 법이 제 성품이 없고, 다른 성품에서 난 것이라하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제 성품이 없거늘 어찌 다른 성품에서 날 수 있으랴.

제 성품을 인하여 다른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성품도 또한 제성품이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다른 성품이 곧 제성품이기 때문이다.

만일 제 성품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른 성품도 이뤄지지 않고,

제 성품과 다른 성품이 이뤄지지 않으면 제 성품과

다른 성품을 떠나서 다시 어떤 법이 이뤄질 것이 있으랴.

만일 있음이 이뤄지지 않으면 없음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따지고 구하건대 제 성품도 없고 다른 성품도 없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으므로 온갖 유위의 법이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법도 공하고 유위와 무위도 오히려 공하거든 하물며 <나>이겠느냐.

 

 

九. 관작자문(觀作者門) : 작자는 짓는 사람이다. 괴로움을 짓고 기쁨을 짓는 그 사람의 정체는 실제에 있어서 자기 성품이 없다고 하는 것을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이 공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모든 법이 스스로에도 성품이 없고,

딴 곳에서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 있다.

 

결과는 뭇 인연 가운데서

끝내 업을 수 없는 것이요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니

어찌 결과가 있겠는가

 

뭇 인연의 낱낱 가운데나 화합한 가운데에 모두 결과가 없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또 그 결과는 딴 곳에서 오지도 않나니, 말한 딴 곳에서 왔다면 인연에서 나지 않았을 것이
며,

뭇 인연이 화합하는 공능도 없을 것도 아니라면 이는 곧 <공>이다.

결과가 공하므로 온갖 유위의 법이 공하고 유위의 법이 공하므로 무위의 법도 공하다.

유위와 무위도 공하거늘 하물며 <나>이겠는가.

 

 

 

 

一○. 관작자문(觀作者門)

 

또 다시 온갖 법은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스스로 지음[自作]과 남이 지음[他作]과 함게 지음[共作]과 까닭없이 지음[無因作]이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 있다.

 

스스로가 지음과 남이 지음과

함께 지음과 까닭없이 지음과

이것들을 얻을 수 없나니

그렇다면 괴롬이 없는 것이다.

 

괴로움을 스스로가 짓는다면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스스로가 짓는다면 스스로가 그 본체를 지을 것이나,

이 일로써 이 일을 짓지 못함이 마치 의식이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고,

손가락이 스스로를 닿을 수 없는 것 같으리라. 그러므로 스스로가 짓는다 하지 못한다.

또 남이 짓는다 하여도 옳지 못하니, 남이 어찌 괴롬을 지으리요.

[문] 뭇 인연을 다른 이라 하는데, 뭇 인연이 괴롬을 지으므로 남이 짓는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남에 의하여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는가.

[답] 만일 뭇 인연을 남이라 한다면 괴롬은 뭇 인연이 지은 것이다.

이 괴로움이 뭇 인연에서 났으므로 이는 뭇 인연의 성품이니,

만일 뭇 인연의 성품이라면 어찌 남이라 하리요.

마치 질병 속의 진흙을 병에 대하여 남이라 하지 못하는 것 같고,

금가락지의 금을 남이라 하지 못하는 것 같이

괴롬도 그와 같아서 뭇 인연에서 나왔으므로 뭇 인연을 남이라 하지 못한다.

또 다시 이 뭇 인연도 또한 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재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뭇 인연에서 결과가 났다고 말할 수 없다. 중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가 뭇 인연에서 났다면

이 인연은 자재하지 못하리니

인연이 자재하지 못하다면

어찌 인연이 결과를 내리요

 

이와 같이 괴롬이 남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짓고 남이 지은 것이라 하여도 옳지 못하니, 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스스로가 지은 괴롬이라거나 남이 지은 괴롬이라 하면

스스로 짓거나 남이 지었다는 허물이 있나니,

그러므로 함께 괴롬을 지었다 하여도 옳지 못하다.

만일 괴롬이 까닭없이 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한량없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에 말씀하시기를”나형가섭(裸形迦葉 : 인도의 고형자(苦行者)가 운데

이 가섭은 나체로 고행을 하므로 나형가섭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외도(外道)라 부른
다.

이 부처님께 묻되”괴롬은 스스로가 짓는 것입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잠자코 대답치 않으
셨다.

그는 다시 묻되 “괴름을 스스로가 지은 것이 아니라면 남이 지은 것이옵니까. “하였으나

부처님은 역시 잠자코 대답치 않으셨다.

그는 다시 묻되 “세존게서 그렇다면 괴로은 스스로 짓기도 하고 남이 짓기도 한 것입니까.
“하니

부처님은 역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는 또 묻되 “그렇다면 괴롬은 인연없이 지어진 것이
옵니까.

“ 부처님은 역시 대답치 않으셨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두 대답
치 않으셨으니,

괴롬이 곧 <공>임을 알 수 있다.

[문]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것은 괴로움이 공하다고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 따라 그렇게 말씀하였을 뿐이다.

이 나형가섭은 말하기를 “사람은 괴로움의 윈인이라. “하고,

<내>가 있다고 하는 이는 말하기를 “예쁘고 추한 것이 모두가 신이 지은 바이다.

신은 항상 청정하여 괴로움이 없다. 아는 것, 이해하는 것이 모두가 신이다.

신은 예쁘고 추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짓고서 도리어 갖가지 몸을 받는다. “고 한다.

이러한 사뙨 소견 때문에 부처님께 묻되”괴로움을 스스로가 지읍니까. “하였으므로

부처님이 대답치 않으셨다. 괴롬은 진실로 <내>가 지은 바가 아니다.

만일 <내>가 괴롬의 원인이라면 <나>를 인하여 괴롬이 났으므로 <나>는 덧없으리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어떤 법이 원인이거나 원인에서 난 법이거나 하면 모두가 다 덧없기 때
문이다.

만일 <내>가 덧없다면 죄와 복의 과보도 모두가 아주 없이 될 것이며, 수행이 복스러운 과
보도 공할 것이다.

만일 <내>가 괴롬의 원인이라면 해탈이 없으리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내>가 괴롬을 짓는다면 괴롬을 떠나서는 괴롬을 지을 수 있는 <내>가 다시 없으니,

몸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몸이 없어도 능히 괴롬을 짓는다면 해탈을 얻은 이도 괴로우리라.

그런 즉 해탈이 없을 것이나 실제에는 해탈이 있다.

그러므로 괴롬을 스스로가 짓는다 함이 옳지 앟고,

남이 괴롬을 짓는다 함도 옳지 않다 괴롬을 다시 어떤 사람이 괴로움을 지어서 남에게 주겠
는가.

또 다시 만일 남이 괴롬을 짓는다면 이는 곧 자재천이 짓는 다는 것이니,

이런 사뙨 소견으로 물었기 때문에 부처님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실제로 자재천이 지은 것이 아니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성품과 형상이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송아지가 커서 소가 되는 것 같이,

만일 자재천에서 생겼다면 모두가 자재천을 닮았어야 하리니, 그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중생을 지었다면 괴롬을 자식에게 주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므로 자재천이 괴롬을 지었다하지 못한다. 누가 묻기를

“중생이 자재천에서 난 것이라면 괴롬과 즐거움도 자재천에서 나는 것이지만

즐거움의 원인을 알지 못하므로 괴롬을 준다. “하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리라. 만일 중생이 자재천의 아들이라면

오직 즐거움만으로 괴롬을 막아 줄지언정 괴롬을 주지는 않을 것이며,

또 자재천에게만 공양하면 괴롬을 멸하고 즐거움을 얻으련만 실제에는 그렇지 못하다.

다만 스스로가 고락의 인연을 행함에 따라 스스로가 과보를 받을지언정 자재천이 짓는 것이
아니다.

또 다시 그 자재천(自在天)가 참으로 자재(자유)하다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구하는 바가 있어 스스로가 지었다면 자재천이라 하지 못할 것이요,

구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 때문에 아이들의 장난과 같이 변화해서 만물을 만들겠는가.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중생을 지었다면 이 자재천은 누가 지었는가.

만일 자재천이 스스로 지었다면 옳지 않으니 마치 물건이 자기를 지을 수 없는 것 같기 때
문이다.

만일 짓는 이가 따로이 있다고 하면(이를)자재천이라 하지 못하리라.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짓는 이 [作者]라면 짓는 동안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이 생각하면

곧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자재경(自在經 : 자재천(自在天)을 믿는 오도의 경전.)에 말하기를

“자재천이 만물을 만들고자 하여 온갖 고행을 하면 곧 배로 다니는 벌레가 나고

다시 공행을 하면 곧 나는 새들이 나고, 다시 공행을 하면 모든 사람과 하늘이 난다 하였으
니,

고행을 하는데 처음엔 독충이나 나오고, 나중에 인간과 하늘이 난다. “하니,

중생들은 업의 인연에 의하여 난 것이요, 고행 때문에 난 것이 아님을 알겠다.

또 다시 자재천이 만물을 지었다면 어디에 머무러서 만물을 지었는가.

그가 머무는 곳은 자재천이 지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가 지은 것인가.

만일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면 어디에 머무러서 지었는가.

만일 다른 곳에 머루러서 지었다면 그 다른 곳은 또 누가 지었는가.

이와 같으면 무궁한 허물이 있다. 만일 다른 이가 지었다면 두 자재천이 있으리니, 옳지 못
하다.

그러므로 세간의 만물은 자재천이 지은 것이 아니다.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짓는다면 어찌하여 고행하고 다른 이에게 공양하여 그를 기뻐하게
하며

소원을 이루려 하는가. 만리 고행하여 남에게 구한다면 자재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자재천이 만물을 지었다면 처음 지었을 때에 곧 결정되어서 변함이 없어야 하리니,

말은 항상 말이고 사람은 항상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업을 따라 변함이 있으니, 자재천이 짓지 않은 것임을 알겠다.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지었다면 죄와 복이 없으니,

선과 악과 예쁨과 추함이 모두 자재천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는 죄와 복이 있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지은 바가 아니다.

또 다시 중생들이 자재천에서 나왔다면 모두가 공경하고 사랑하기를

자식이 아버지를 아끼는 것 같아야 하련만

실제에는 그렇지 않아서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지은 것이
아니다.

또 다시 자재천이 지었다면 어찌하여 모두를 즐거운 사람으로 만들든지

모두를 괴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가.

그러나 실제에는 괴로운 이도 있고, 즐거운 이도 있으니, 미움과 사라아에서 생겼으므로

자재치 못하므로 자재천이 지은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지었다면 중생은 모두 짓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중생이 방편으로 제각기 짓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지은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만일 자재천이 지었다면 선악과 고락 따위 일을 짓지 않아도 스스로 와야 하리니,

그렇다면 세간의 법은 무너뜨리는 것으로서 계를 지키거나 복을 닦아도 모두 이익이 없으리
라.

그러나 실제에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복스런 업 때문에 중생 가운데서 크다면 다른 중생도 복스런 업을 지으면 클 것이
어늘 어찌하여 자재천만을 귀히 여기는가. 만일 까닭없이 자재하다면 온갖 중생도 자재할 것이어
늘 실제에는 그렇지 않으니, 자재천이 지은 바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자재천이 남에게서 얻어진다면 다른 이는 또 다른 이에게서 얻어지리니,

이렇다면 무궁할 것이오, 무궁하면 원인이 없으리라.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에 의하여 만물은 자재천에서 난 것이 아니며,

자재함도 있지 않은 줄 알겠다.

이와 같은 사뙨 소견으로 남이 지었는가를 물으므로 부처님께서도 대답치 않으셨다.

함게 짓는다 하여도 욿지 않으니, 두 허물이 있기 때문이며, 뭇 인연이 화합해서 났기 때문
이며,

원인없음에서 남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또한 대답치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 경은 다만 네 가지 사뙨 소견을 깨뜨렸을 뿐이요, 괴로움이 공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답] 부처님께서 비록 이와 같이 뭇 인연에서 괴롬이 난다고 말씀하셨으나

네 가지 사뙨 소견을 깨뜨리는 것이 곧<공>을 말한 것이며,

괴롬이 뭇 인연에서 났다고 함이 곧 <공>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뭇 인연에서 났다면 제 성품이 없고, 제 성품이 없다면 이는 곧 <공>이
다.

괴롬이 공한 것 같이 유위와 무위와 중생 따위,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다.

 

 

 

 

ㅡㅡ. 관삼시문(觀三時門)

: 과거, 현재, 미래의 세가지 시간을 통하여 짓고 행동하는 자가 있는가에 대해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이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원인과 원인 있음의 법[有因法=결과]의 앞과 뒤와 동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있다.

 

법의 앞과 뒤와 동시는

모두 이뤄지지 않는 것이니

이 법이 원인에서 났거늘

어찌 이뤄짐이 있으랴

 

원인이 먼저이고 원인 있음[有因=결과]이 뒤라면 이는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먼저 원인이고 다음에 원인을 쫓아서 났다면 먼저의 원인일 때엔 원인 있음- 결과-이 없거
늘 무엇이 원인이 되었겠는가. 만일 원인있음이 이뤄졌거늘 어찌 원인을 쓰겠는가.

만일 원인과 원인 있음이 이뤄졌거늘 어찌 원인을 쓰겠는가.

만일 원인과 원인 있음이 동시라 하여도 원인 없음이 되나니,

마치 쇠뿔이 동시에 나되 좌우의 것이 동시에 나되 좌우의 것이 서로 인하지 않는 것 같으
리라.

이와 같이 원인은 결과의 원인이 아니요, 결과는 원인의 결과가 아니리니,

동시에 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때의 인과를 모두 얻을 수 없다.

[문]그대가 인과의 법을 부정하니, 세 때가 이뤄지지 않는다. 만일 먼저 부정함[破=깨뜨림]이
있고,

뒤에 부정할 것[可破=깨뜨릴 것]이 있다면 아직 부정할 것이 있지 않으니,

그 부정함이란 무엇을 부정하겠는가. 만일 먼저 부정할 것이 있고 뒤에 부정함이 있다면

부정할 것이 이미 이루어졌거늘 다시 무엇을 부정하겠는가.

만일 부정함과 부정할 것이 동시에 있다 하면 이것도 원인 없음이 된다.

마치 쇠뿔이 동시에 나는데 좌우의 것이 서로 인하지 않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부정함은 부정할 것을 인하지 않고, 부정할 것은 부정함을 인하지 않는다.

[답] 그대의 부정함과 부정할 것 가운데에도 허물이 있나니,

만일 모든 법이 공하다면 부정함과 부정할 것이 없다. 나는 지금<공>을 말하니,

나의 말이 이루어진다. 만리 내가 말하기를”부정함과 부정할 것이 결정돼 있다. “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부정함과 부정할 것이 결정돼 있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문] 눈앞에 보기에 먼저의 원인이 있으니 마치 옹기장이가 병을 만드는 것 같다.

또 뒤의 원인이 있으니, 제자를 인하여 스승이 있으나 제자를 가르친 뒤에야

그가 제자이었음을 아는 것 같다. 또 동시의 원인이 있으니, 등불과 광면 같다.

그렇거늘 그대가 앞의 원인과 동시의 원인을 모두 얻을 수 없다 함은 옳지 못하다.

[답] 옹기장이가 병을 만드는 비유는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만일 명이 있지 않다면 옹기장이는 누구에게 원인이 되어 주는가.

옹기장이의 경우와 같아서 온갖 앞의 원인을 얻을 수 없다.

뒤의 원인도 그러하여서 얻을 수 없나니, 만일 제자가 있지 않다면 누가 스승이겠는가.

그러므로 뒤의 원인도 얻을 수 없다. 만일 동시의 원인이 등불과 광명 같다면

이것은 또한 동의인(同疑因 : 동일한 원인이 될 수 있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되나니,

등불과 광명이 동시에 났거늘 어떻게 서로 원인이 되리요,

이와 같이 인연이 공하므로 온갖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과 중생이 모두 공하다.

 

 

一二. 관생문(觀生門) : 생(生)의 현상으로 이미 생한 것과 아직 생하지 않은 것과 지금 생하고 있는 것으로 분류하여 관찰함.

 

 

또 다시 온갖 법이 공하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미 난 것, 아직 나지 않은 것 나는 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난 것도 나지 않고, 나지 않은 것도 나지 않고, 나는 때도 나지 않는다.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 있다.

 

난 결과는 나지 않는다

나지 않은 것도 나지 않는다

남[生]을 떠나서도 나지 않는다

날 때도 나지 않는다

 

낳다 함은 결과가 일어났고, 나온 것이요, 나지 않았다 함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지 않는 것이요, 날 때라 함은 비로소 일어나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난 결과는 나지 않는다 함은 이 남(生)이 난뒤에는 다시 나지 않는다. 함은

남[生]이 난뒤에는 다시 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무궁한 허물이 있기 때문이며, 지은 것을 다시 짓기 때문이다.

만일에 이 남이 난 뒤에 제 二의 남을 내고, 제 二의 남이 난 뒤에 제 三의 남을 내고,

제 三의 남이 난 뒤에 제 四의 남을 내되 처음의 남이 난 뒤에 제 二의 남이 있는 것 같이
하면

이는 남이 무궁하리니, 이 일이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남은 다시, 나지 않는다.

그대의 말이 먼저는 일정하였으나 지금은 일정치 못하니, 마치 지은 것은 짓지 않아야 하고,

탄 것은 타지 않아야 하고, 증득한 것은 증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 같이 난 뒤에는 다시 나
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난 법도 나지 않고, 나지 않은 법도 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남과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온갖 나지 않은 것이 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나지 않는 법이 난다면 남을 떠나서 남이 있는 것이니, 이는 곧 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남을 떠나서 남이 있다면 이는 곧 작용을 떠나서 작용이 있고, 감[去]을 떠나서 감이
있고,

음식을 떠나서 음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이는 옳지 못
하다.

그러므로 아직 나지 않은 법은 나지 않는다.

또 다시 나지 않은 법이 난다면 온갖 나지 않은 법이 모두 나야 한다.

온갖 법부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지 않았으나 모두 내야하고,

무너지지 않는 법인 아라한에게 번뇌가 나지 않지만 나야 하고,

토끼와 말은 뿔이 나지 않지만 나야 하리니, 이는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나지 않은 것이 난다고 말할 수 없다.

[문] 나지 않은 것이 난다 함은 인연이 화합하여 때, 방위, 짓는 이,

방편이 구족하면 그것이 나지 않은 것이 난다 하였을지언정

온갖 것이 나지 않은 것이 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이 나지 않은 것이 난다는 것으로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답] 만일 법이 나는데 때, 방위, 짓는 이, 방편 따위 뭇 인연이 화합해서 난다면

여기에는 먼저 결정돼 있어도 나지 않고,

먼저 없어도 나지 않고 있기도 없기도 하여도 나지 않으리니,

이렇게 세 가지로 남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은 앞서 말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나지 않은 법이 나지 않고, 나는 때도 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나고 또 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며, 나지 않은 것이 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날때의 법이 나는 부분이 나지 않는 것은 앞서 말한 것 같고

나지 않은 부분이 나지 않는 것도 앞서 말한 것 같다.

또 다시 만일 남을 떠나서 날 때가 있다면 날 때에 남이 있겠지만

실제에는 남을 떠나서는 나는 때가 없다. 그러므로 날 때도 나지 않는다.

또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날 때에 난다. “고 하면 두 가지 남이 있으리니,

하나는 날 때를 난다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날 때에 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법이 있지 않거늘 어찌 두 가지 남이 있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날 때에도 나지
않는다.

또 다시 아직 나지 않아서 남이 없을 때엔 어디에 나서 행하리요.

나서도 행하는 곳이 없다면 날 때에 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날 때에도 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남과 나지 않음과 날 때가 모두 이뤄지지 않나니,

나는 법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남이 없고, 머무름과 사라짐도 그렇다.

남과 머무름과 사라짐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유위의 법이 이뤄지지 않고,

유위의 법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무위의 법도 이뤄지지 않고,

유위와 무위의 법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중생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남이 없나니, 끝내 공적하기 때문이다.

 

 

 

 

 

 

[출처] 십이문론(十二門論) |작성자 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