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의 화엄사상과 통일기 신라사회
정 병 삼 *
Ⅰ. 머리말
사상은 시대적 토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사상은 그가 살던 시대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동시에 그 시대를 통찰하며 형성된 사상은 시대의식을 이끌어 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사상 속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생각을 그려보는 것은 역사적 사상 탐구 작업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화엄사상을 정립한 義相은 신라 통일기의 변환기를 살았다. 7세기 중반에 등장한 무열왕계는 새로운 신라 中代 왕실 체계를 확립하고 삼국통일로 이룬 확장된 영토와 증대된 민들을 새롭게 편제하는 중앙과 지방의 제도적 개편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사회 변환기에 의상은 원효와 더불어 새로운 신라 불교사상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이루기 위해 사상 탐구에 진력하면서 보다 널리 불교를 펴 나가는 대중화 운동에도 노력하였다. 국내에서의 교학 연마와 당에의 유학 그리고 귀국 후의 활동에서 의상은 수준 높은 화엄사상가의 면모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엄정한 수행자의 면모를 시종 유지하였다. 특히 귀국 후에 화엄종단을 이끌면서 의상은 통일 후의 안정된 사회를 지향하는 분위기에 상응하도록 교단을 운영하였다.
의상은 동시대인으로서는 드물게 사회적 견해를 보여주는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중국으로부터의 귀국 동기나 부석사의 창건 그리고 국왕의 정책 시행에의 자문 등 중요한 사회적 태도를 보인 행적을 남긴 것이다.
사회변동기를 주도하던 인물이 가졌던 총체적 삶의 구현인 사상의 탐구는 사고 체계에 대한 분석과 사상과 실천행의 연관성 그리고 사회적 상황과의 연계 등 다방면에서 사상적 고찰 대상이 된다. 통일기를 살면서 사회적 연관성을 갖는 행적을 남긴 의상의 화엄사상에 대해서는 따라서 그 의의에 대한 논란도 많다. 이 글은 신라통일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 사람인 의상의 행적을 그가 살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살펴보고, 그 속에서 이룩한 사상과 신앙이 당대 사회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는가를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Ⅱ. 통일기 신라사회와 의상의 활동
의상은 삼국간의 쟁패전이 열기를 더해 가던 진평왕 47년(625)에 태어났다. 진골 귀족의 후예로 생각되는 의상은 스물 남짓한 나이에 출가하여 당시 신라에 소개되었던 攝論 地論 등의 교학 탐구에 열중하였다. 출가 사찰로 여겨지는 皇福寺는 왕실과 관계 깊은 중심 사찰이었다. 출가 초반 교학 수련에 몰두하던 의상은 玄 이 인도에서 들여온 新唯識을 배우고자 그 동안 교유를 가졌던 원효와 함께 26세인 650년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육로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고자 하던 이들의 행로는 고구려 국경에서 좌절되었다. 그 대신 의상과 원효는 고구려 열반의 대가 普德에게서 열반과 방등 등의 대승교학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갖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불교를 배우기 위한 중국에의 열망을 접어버리지 않고 37세 때인 661년에 다시 중국 유학길에 나서 해로를 통해 당나라에 건너갔다.
의상이 중국에 유학을 뜻하고 있던 시기에 신라 사회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中古 말기 善德王(632∼647년 재위)대에는 閼川으로 대표되는 구귀족세력과 龍春 舒玄으로 대표되는 신귀족세력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慈藏은 신라 교학의 기반을 다졌다. 섭론 등의 유식을 비롯하여 如來藏 및 佛性 사상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고 화엄의 단초도 열었다. 자장은 또한 승단의 생활규범을 확립하고, 문수 성지 五臺山을 설정하여 眞身常住 신앙을 선도하였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며 세력을 확보한 신귀족은 眞德王(647∼654년 재위)대에 金春秋를 중심으로 執事部의 설치 등 관제를 개편하여 행정력의 기반을 형성하고 律令體制를 개정하여 유교정치 이념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김춘추가 武烈王(654∼661)으로 즉위하여 金庾信의 무력과 연계하여 안정적인 왕권을 지향하며 삼국간의 항쟁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660년에 신라는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패망시켰다.
의상이 당에 건너갈 때 신라의 상황은 이러한 것이었다. 661년에 당나라에 들어간 의상은 그 동안 신라에서 익혔던 지론에 대한 관심의 연장에서 지론을 더욱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나서 662년에 長安 남방의 終南山에서 당대의 교학을 집대성하여 새로이 화엄을 정립해가던 智儼의 문하에 나아가 화엄을 배웠다. 의상은 지엄 화엄의 정수를 체득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44세 때인 668년에 {一乘法界圖}를 저술하여 화엄학의 진수를 일승의 법계연기로 엮어 내 지엄의 인가를 받았다. 지엄이 입적하기 석달 전의 일이었고, 당시 지엄 문하에서 동문 수학하던 18년 후배 法藏은 아직 출가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문무왕 10년(670)에 의상은 당에서 귀국하였다.
의상의 귀국과 관련하여 당군의 침공 정보를 알리기 위해 의상이 귀국을 서둘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듬해(669년)에 당나라 고종이 김인문 등을 불러들여 꾸짖었다.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우리를 해치다니 어찌된 일인가?"
이에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명을 훈련하여 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의상 법사가 유학하러 당나라에 건너가 있었는데 인문을 찾아가니 인문이 그 사실을 알렸다. 의상은 곧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 방어책을 물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唐軍의 힘을 빌어 멸망시키고 이제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양국의 유민들을 포용하여 唐軍과의 전쟁에 돌입해 있었다. 신라는 백제 故地를 차지하고자 했으나 신라마저 통치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당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文武王(661∼681년 재위) 8년(668)에 고구려를 패망시킨 이후 羅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포용하여 대당전쟁에 돌입하였다.
신라는 일면 백제지역을 직접 공략하여 당군과 싸우고 일면 金欽純 등을 당에 보내어 사죄하는 등 양면 정책으로 나갔다. 사죄 사신을 보내면서도 문무왕 10년(670)에 백제를 쳐서 80여성을 공취하고 671년에도 연이어 백제를 쳐서 당군을 공격하였으며 특히 7월에는 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 고지를 본격적으로 신라 영역에 편입시켰다.
의상이 귀국하던 시기는 이처럼 신라와 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점이었다. 의상의 귀국이 당군의 침공 사실을 미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의상의 귀국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우선 스승 지엄의 입적이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당의 대외국 승려 정책이 9년을 수학기간으로 정했는데, 의상의 수학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상의 귀국을 당군의 침공 정보와 관련짓는 기록은 당시 승려들의 대국가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원효는 신라가 한창 고구려와 싸우던 때인 662년 2월에 비밀문서의 뜻을 알아내지 못한 김유신의 군대를 위해 문서를 해독해 준 일이 있었다. 중고기 이후 이 방면에서 활동하던 승려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실력자 南建이 승려 信誠에게 군사를 맡겼다. 당의 장군 설인귀가 신라를 힐책하는 서신을 왕에게 보낼 때 승려 琳潤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승려들이 국가적 상황에 초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일면을 보여준다. 당대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사상을 확립해 가고자 했던 의상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국가가 관련된 중대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당시 신라 불교계는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원효는 무열왕과 연계되어 새로운 불교를 주도하였다. 한편으로 통일 직후의 국가불교는 成典寺院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明朗이 활동하여 창건되는 四天王寺(679년)나 신문왕대에 惠通과 관련하여 창건되는 奉聖寺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밀교 계통이 국가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密本은 약사경의 독송을 이용하여 병을 치유하였고 惠通은 의례와 모방주술에 통달한 行法을 전개하였다. 당군 침공에 대한 대비를 맡은 明朗은 文豆婁 비법을 써서 당군을 격퇴하였다. 이는 {灌頂經}의 내용을 위주로 하고 {金光明經}의 내용을 첨가하여 호국적인 주술의례를 조직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교단의 통제를 맡는 승관들도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信惠는 문무왕 9년(669)에 政官大書省에 임명되었고, 義安은 문무왕 14년(674)에 大書省에 임명되었다. 智義법사는 護國大龍이 되겠다는 문무왕 생전시의 유언을 받았고, 憬興은 신문왕대에 國老의 대우를 받았다.
국내 사정이 이처럼 당과의 마지막 격돌에 임하고 있던 임전 상황에 귀국한 의상은 신라에서 자신이 체득해 온 화엄사상을 펴 나갈 전법도량을 물색하면서 그가 풀어 나가야 할 시대적 과제를 깊이 통찰하였을 것이다. 원효는 유식과 중관을 화해하여 새로운 철학체계를 구축하면서 일면으로 대중 교화를 통해 이 전란 시기의 민중을 정토신앙으로 포용하고 있었다.
귀국 이후 가장 이른 시기의 사실로 전승된 설화가 洛山 觀音이다. 의상은 동해변 낙산 굴 안에 觀音 眞身이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관음을 친견하고자 했다. 그래서 7일 동안 정진하여 천룡의 인도로 굴 안에 들어가서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받고 다시 7일간의 정진 끝에 관음 진신을 친견하고 물러나와 낙산사 금당을 짓고 흙으로 빚은 관음과 두 보주를 안치하였다는 설화를 남겼다. 이때 의상이 지었다고 전해오는 발원문인 [白花道場發願文]은 의상이 직접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의상의 관음신앙을 충실히 계승하던 門孫에 의해 의상의 신앙 내용을 반영하여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낙산 관음은 보타락가산에서 常住 설법하고 있다는 {화엄경}의 관음이 신라 국토 동해변에 실제로 머무르고 있다는 진신상주의 믿음을 신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眞身常住 신앙의 정착이었다.
674년에 皇福寺에서 화엄을 강의하기도 하였던 의상은 문무왕 16년(676)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 근본도량을 이루었다. 그사이 신라와 당과의 격돌은 끊임없이 이어져서 문무왕 14년에는 고구려 유민을 포용해 들이고 백제 고지를 장악하고 있는 신라의 태도에 격분한 당 고종이 신라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군대를 일으키는 사태까지 벌어져 있었다. 이에 신라는 의연히 일면 사죄 사신을 보내 관작을 회복시키면서 한편으로는 安勝을 報德王에 봉해 유민들을 더욱 일체의식으로 끌어 들여 고구려 고지의 경계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그래서 문무왕 15년(675) 9월에 20만 당군과 買肖城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이듬해 11月에 伎伐浦에서 당군을 격파하여 통일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이런 통일사업의 완수라는 기념비적인 시점에 부석사가 창건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 새로운 사원의 창업을 반대하는 오백의 權宗異部僧을 浮石의 神變으로 물리치고 건립했다는 설화는 국가의 지원과 승인 아래 가능했던 부석사 창건의 여건을 말해 준다.
삼국 항쟁에서의 승리가 지배층의 노력 못지 않게 신라의 일반민과 백제 고구려민의 막대한 참여와 부담으로 가능한 것이었고, 문무왕은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경제 기반을 마련해 주는 사회경제적 시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戰功으로 얻은 民의 지위 향상과 고초에 대한 집권층의 배려와 확장된 영토와 증가된 주민에 대한 집권층의 체제 정비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패망시킨 이듬해인 669년에 죄수들을 특사하고 채무를 면제해 주는 下敎를 내려 새로운 통일사회 건설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문무왕은 또한 遺詔에서 민간의 안정과 역내의 우환이 없음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면서 동시에 州縣의 과세가 요긴하지 않은 것은 모두 폐지하고 律令과 格式도 불편함이 있거든 곧 고쳐 시행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시기에 재상을 맡았던 車得公 역시 그와 같은 문무왕의 시책을 잘 따르고 있다. 문무왕은 이처럼 제반 官僚體制의 정비를 통해 왕권의 기반으로서 관료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의상에게서도 나타난다. 의상은 민의 경제적 안정이 국가의 기본적인 힘이 되며 그들의 정신적 안정이 사회 안정의 토대가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의상은 통일 이후 국가체제를 재편해 가면서 강화된 왕권을 과시하려던 작업의 일환으로 시행하려는 과도한 토목사업을 반대하였다. 문무왕은 12년 이래 한산주 晝長城을 비롯하여 西兄山城 國原城과 首若州의 諸城, 良州의 城 등을 정비하고 鐵關城을 쌓았으며 王 19년에 궁궐을 중수하고 南山城을 증축하였다. 그리고 다시 문무왕 21년에 京城을 새롭게 수축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상은 글을 보내어 강력히 축성 중지를 건의하였다.
왕의 政敎가 밝으면 풀언덕으로 경계를 정해 놓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아서 재앙을 면하여 복이 되지만, 정교가 밝지 못하면 여러 사람을 수고스럽게 하여 장성을 쌓더라도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 후의 당시 사회상을 고려하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였겠지만 이와 같은 명확한 언급은 의상 외에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의상이 민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전쟁으로 얼룩진 민들의 마음을 끌어안고자 하던 자세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후 의상이 중앙과 연결된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의상은 태백산의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종단을 형성하고 문도들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런데 의상의 문도 중에는 기층민 출신이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眞定은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연명하던 가난한 기층민 출신이고, 智通은 귀족 집의 노비 출신이었다. 지통은 의상의 강의를 정리하여 {錐洞記}를 남긴 제자로서 {道身章}을 남긴 道身과 함께 손꼽히는 제자이다. 진정이나 지통과 같은 이들이 의상이 영도하는 화엄교단의 중심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의상이 교단 내에서 신분의 평등을 견지하였기 때문이었다. 통일 후의 신라 사회는 완강한 골품제 신분 사회로부터 벗어나려는 민들의 욕구를 수용하고 삼국민의 하나됨을 지향해야 하였다. 비록 교단 내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평등한 신분의식을 관철한 데에 의상이 지향했던 당대의 적극적인 사회의식이 살아 있다.
Ⅲ. 의상의 화엄사상과 신앙
1. {一乘法界圖}의 화엄사상
의상의 화엄사상은 {一乘法界圖}에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화엄의 정수를 체계화한 것이 {一乘法界圖}이다. 근년에 의상의 강의를 정리한 것으로 간주된 {華嚴經問答}은 {화엄경}의 차례에 따라 164개의 문답을 통해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의상의 화엄사상 중에서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상을 살펴보자.
의상은 화엄일승의 法界緣起를 한데 응축시켜 中道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해 {법계도}를 저술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敎判論과 理理相卽說, 三性說, 中道와 二邊의 종합, 華嚴觀法 등의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의상 화엄의 중심사상은 일승의 제창과 법계연기설의 전개 및 中道의 강조 등을 꼽을 수 있다. 법계연기설에서도 의상은 특히 법계도의 실천적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어 법계연기의 구극인 性起思想을 강조하였다.
의상은 일승 법계연기의 본뜻을 자성을 가진 독자적 존재가 아니라 緣에 따라 이루어진 연기로 보고 이 연기다라니법의 작용을 一多의 相入相卽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연기다라니법의 대의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數十錢法을 깨달아야 한다.
數十錢法이란 1錢 2전 내지 10전을 헤아리는 것을 말하는데 10을 든 것은 무량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滿數인 10은 {화엄경}에 누차 강조된 원융무량함을 나타낸다. 數十錢法은 中門과 卽門의 두 가지로 설명된다.
中門은 一中十 이요 十中一 이다. 一中十에서 一은 緣에 의해 이루어진 本數이다. 一안에 十이 있다는 것은 一이 緣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만약 一이 없으면 十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十은 一이 아니다.(向上來) 十中一도 마찬가지이다. 十도 緣成된 것이므로 十안에 一이 있다는 것은 十이 없으면 一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역시 一은 十이 아니다.(向下去) 이렇게 하여 하나하나의 錢마다 十門씩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卽門의 설명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向上去와 向下來로 표현이 다를 뿐이다.
一 중에 十이 있다는 것은 연기법에서 보면 一이 없으면 일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가능하다. 一은 自性의 一이 아니라 연으로 이루어진 一이며, 이것은 二 三 내지 十도 마찬가지이다.
이 中門과 卽門의 數十法은 法界圖詩의 '一中一切 多中一 一卽一切 多卽一'과 상응한다. 이러한 數十法의 연원은 {화엄경}에서 찾을 수 있다. '譬如數法十 增一至無量'에서 數十法의 原義를 볼 수 있으며, '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과 '一能爲無量 無量能爲一'에서 중문을, 의 偈頌에서 그 원형에 근접되며, 卽門은 十住品에 나오는 '一卽是多 多卽是一'과 '若一卽多多卽一'에서 즉문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일체의 緣生法은 一法도 정해진 自性이 없는 無自性이기에 머무름이 없고 따라서 中道이다. 中道의 뜻은 무분별이라는 뜻이고, 無分別法은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에 따라 무진하게 전개되는 不住이다. 이런 이유로 一中十과 十中一이 서로 포용하여 장애됨이 없다고 설명된다.
이 중도는 일체법의 緣成을 말한다. 일체의 緣生法은 六相을 이루지 않는 것이 없는데, 육상이 不卽不離하고 不一不異하여 항상 중도에 있다. 또 일승과 삼승의 관계도 육상과 같아서 불즉불리하고 불일불이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 오직 중도에 있다. 이 일체 연생법의 本義가 中道義이다. 緣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제법은 연을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어느 하나도 일정한 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자재롭지 못하고 生하되 生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니 이것이 중도인 것이다. 中道義란 生과 不生에 두루 통하는 바이다. 因緣所生法의 도리인 空은 곧 中道義이며, 이 중도의는 無分別을 의미한다. 그런데 法性은 무분별을 相으로 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평범하여 중도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 제법은 본래 중도에 있는 것이다.
의상은 法界圖詩의 마지막 구절을 '窮坐實際中道床'으로 표현하고, 이 中道를 양쪽을 융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證分과 敎分(緣起分)의 두 법이 情意로써 말하면 서로 한쪽만을 차지하고 양 극단에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도리로써 말하면 두 법이 본래부터 중도이므로 하나의 분별도 없다고 한다.
의상은 양 극단의 二邊을 융합한 곧 미분화 상태의 중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二邊 곧 모든 상대법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그대로 중도임을 말한다. {법계도}의 중도는 양변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융합으로서의 중도도 인정하는 중층적 구조를 가진 것이다. {법계도}는 二邊과 中道의 구도를 통하여 중생이 각자의 위치에서 성불할 수 있다는 화엄의 세계 곧 본래성불의 세계에 가까이 있음을 보여준다.
의상이 中과 卽의 이론으로 파악한 법계연기론은 다양한 현상세계와 동일한 이치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일과 다가 서로 똑같은 자격으로 서로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할 수 있다는 법계연기의 논리는 개체간의 절대 평등을 의미한다. 상입상즉의 연기설은 전체 구성원의 평등과 조화를 의미하는 이론인 것이다.
2. 의상의 신앙
사상과 신앙의 양자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의미를 지니면서 전체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한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연마 못지 않게 엄정한 실천행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실천행은 {화엄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의상은 사상을 실천행으로 구현하는 태도를 가졌고, 그와 같은 행적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철저한 지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의상의 신앙은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이 중심을 이룬다.
의상의 관음신앙은 현실적 요구를 해결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것과는 지향이 달랐다. 이 시기의 관음신앙은 사회 계층에 차이 없이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의상이 의도하던 사회 의식으로서 이 관음신앙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상이 추진한 관음 신앙은 당시 보편적이었던 현세이익적인 것이 아니라 求道的 신앙이었다. 의상은 {화엄경}의 실천 체계의 핵심인 入法界品을 근거로 하여, 일체 중생이 온갖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誓願을 성취하고 慈悲經을 연설하며 널리 중생을 거두어들인다는 觀音 眞身常住 信仰을 당시의 변화하던 시대상 속에서 신라인들의 기대를 친근하게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신앙으로 받아 들였다. 의상은 화엄경설에 토대를 둔 진신상주 관음을 제창하여 현실 구제적 관음신앙을 보다 확실한 기반 위에 정착시키고자한 것이었다. 이는 신라 사회에 오랫동안 토대를 구축해 온 신라 佛國土 신앙의 한 형태였다.
그가 시종 일관 유지했던 청정한 수행자적 태도와 잘 어울리는 이 구도적 신앙 자세는 일상적인 현실 구제에서 나아가 새로운 신앙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는 통일을 즈음한 신라 사회가 추진해야 했던 새로운 의식과도 상관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 구도적 관음은 교단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을 것이고 일반인들은 이 결과로서의 진신상주를 통해 신앙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의상은 일면 화엄교단의 사상 기반으로 {법계도}를 정통으로 하는 화엄사상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彌陀淨土 신앙을 교단의 중심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그래서 의상은 화엄종찰 부석사의 가람구조를 {觀無量壽經}에서 말하는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중생의 구품 구분을 연상하는 大石壇을 쌓아 마련하였다. 그리고 본당을 아미타불 1구만을 주불로 안치한 無量壽殿으로 구상하였다. 의상은 이러한 본존 배치를 지엄의 의견을 빌어 화엄경설에 토대를 두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도와 중생의 西方 往生을 선도하는 관음보살이 이곳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의상이 확립한 관음의 진신상주적 성격이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시방세계를 그 터전으로 삼아 인도하는 부석사 아미타불과 동질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아미타불의 활동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방세계에 충만해 있는 諸佛의 활동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부석사 미타신앙은 이미 현세 불국토적 성격을 가지고 확고한 터를 잡고 있던 의상의 관음신앙과 마찬가지로 시방세계를 그 터전으로 삼은 데서 동질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의상이 이처럼 화엄경설을 토대로 하면서 미타정토 신앙을 배경으로 부석사를 경영한 것은 당시 신라 사회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통일기에 즈음하여 잦은 승관 임명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통일기 불교계의 내부 정비 및 새로운 기풍 진작과 관련된 교단 정비 작업이었다. 의상이 강조한 수행 자세도 이런 추세와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것이었다. 통일전쟁 이후의 신라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함께 전쟁으로 지친 심적 고통의 위안을 아울러 수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계 유민들도 보다 포용적으로 감싸 안아 새롭게 펴 나갈 수 있는 이념으로서 미타신앙은 크게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무왕이 민간의 안정과 조세의 완화 및 제도의 탄력적 운용을 당부하는 것도 사회 안정에 초점이 있었다. 혜공과 혜숙을 이은 원효의 정열적인 활동으로 미타신앙은 이미 신라 사회에 상당한 지지기반을 구축하였다. 이에 이미 자신의 사상 체계에서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미타신앙을 의상은 종찰의 중심 신앙으로 채택한 것이다.
의상은 미타신앙을 수용하여 화엄 정토를 전개하였다. {화엄경}을 바탕으로 아미타불을 포용한 이러한 신앙 체계는 연화장정토를 비롯한 다양한 화엄 정토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華嚴經說에 토대를 둔 의상의 실천 신앙은 엄정한 수도자의 길을 견지하던 의상의 행적과 잘 부합된다. 의상이 전개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은 통일기 신라 사회가 지향하던 새로운 사회 안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신라 사회에 넓게 기반을 확보해 가던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은 골품제 신분사회의 제한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현실적인 요구 수용과 사후 안락의 기원이라는 신앙의 보편성 때문에 전계층에 수용되고 있었다. 의상이 실천과 전파에 주력한 관음과 미타신앙은 사회 화합적 의미도 지니는 것이었다.
Ⅳ. 의상 화엄의 지향
의상은 신라 통일기의 변화하는 시대를 살면서 승려로서는 드물게 몇 가지 뚜렷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수준 높은 화엄사상을 정립함으로써 불교사상의 발전에 초석이 됨과 아울러 교단을 형성하여 당대 사회에 의미 있는 실천적 지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상의 불교사상은 그 사회적 성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의상의 화엄사상의 중심은 中道義에 바탕한 법계연기설이다. 그 핵심은 一과 多의 相入相卽을 밝힌 것이다. 一은 자성을 가진 독자적 존재의 一이 아니라 緣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 一切 역시 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緣에 의해 성립하고 있으므로 일이 없으면 일체도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일체가 없으면 일이 있을 수 없다. 中道는 일체법이 자성을 갖지 않고 일정하게 머무름이 없는 無分別의 법이다. 자성을 갖지 않아 연에 따라 무진하게 전개되어 서로를 용납하여 장애됨이 없어 一中十과 十中一의 相入相卽을 이룬다.
이렇게 하여 하나하나의 개체는 각 개체 안에 일체의 요소를 각기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일과 일체는 서로를 포용하여 장애됨이 없다. 이렇게 연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계에서는 독립된 자성을 가지는 고정불변의 개체는 있을 수 없고, 모든 개체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緣起의 세계이다. 의상의 연기설의 특색은 그 구극으로서 제 현상 자체가 곧 깨달은 이치임을 표방하는 성기설을 강조한 데 있다.
一과 多가 서로 똑같은 단계에서 서로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될 수 있다는 연기의 논리에서 개체간의 절대 평등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 일과 다의 관계는 동일한 이치의 세계와 다양한 현상세계를 이어주는 고리가 된다. 제 현상 자체가 곧 깨달은 이치인 성기설에서 개체 각자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논리를 연상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相入相卽의 연기설은 전체 구성원의 평등과 조화를 상징하는 이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입상즉의 연기설을 가지고 一을 절대자인 국왕에 비유하고 多를 국가의 일반민 전체에게 비정하여 국왕의 전제적인 권력을 수식하는 이론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화엄의 원융사상과 유심사상 자체를 전제왕권의 이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의상 외에 원효나 明 表員 그리고 의상의 제자들이 일과 다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종교의 본질적 이념 구현에 충실하고자 했지 화엄사상을 현실적 정치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없다.
불교사상은 사회의 부산물이면서 한편으로 불교사상가의 노력에 의해 사회의 의식구조에 변화를 일으켜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의상은 법계연기설은 평등과 조화의 원리이다. 더구나 의상 불교사상의 특색인 中道義는 二邊 곧 모든 상대법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그대로 중도임을 인정하는 중층적 구조를 가졌다. 의상의 연기와 성기설에서도 같은 이치를 찾을 수 있다. 양변을 모두 인정하는 논리는 각 개체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一인 국왕에게로 통합되는 多인 인민 사이의 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 사회에서 승려들은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화랑의 지도자로서 승려낭도가 있었으며 원광은 出師表를 썼고, 원효는 비밀문서를 해독해 준 적이 있으며 道玉은 전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義寂은 나라의 사신이 되어 군대를 일으켜 싸우게 하거나 군중에 왕래하는 것을 금하는 {범망경}의 계율 조항도 군인이 된 재가인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살생 도구를 지니지 말라는 계율 조항에 대해서도 지배층이 외난을 막기 위해서거나 재가인이 호법을 위해서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당에서 활동했던 勝莊에게서는 볼 수 없다. 이는 의적이 통일전쟁을 경험하며 승려들이 전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던 사회에서 활동했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견해였다. 의적과 太賢은 승통의 설치 등 국가권력의 불교계 통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 국가권력이 불교교단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의상 역시 국가 상황과 무관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의상은 문무왕 16년(676)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 근본도량을 이루었다. 이 시기는 통일사업이 마무리된 기념비적인 시점이었다. 의상은 이 시점에 국가의 지원과 인정 하에 전당을 창건하였다.
태백산과 소백산의 한 중간에 위치한 부석사는 永春 堤川 原州를 이어 고구려 지역에도 이를 수 있고 丹陽 淸州 槐山쪽으로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길목이다. 남쪽으로 榮州 安東 義城으로 이어지는 길은 신라에 고구려 문화가 유입되던 중요한 통로이었다. 이 때문에 이 竹嶺지역은 고구려와의 영토 분쟁에서 요충이 되는 지역이었다. 소백산 줄기를 등에 업고 가파르게 쌓아 올린 寺庭에서 한 눈에 길게 내려보는 시원한 전망은 이곳의 지역적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들어설 수 있었던 화엄종찰의 국가적 연계성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의상은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단을 이루었는데 그 이념은 화엄사상의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의상이 제시하는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는 사회적 평등의 주장으로 당시 신라의 강인한 골품제 사회 속에 쉽게 파고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의상은 자신이 영도하던 화엄종단 내에서 그 안에 들어온 모든 문도들에게 평등한 종단 운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상의 의도는 진정과 지통과 같은 기층민 출신 제자의 두드러진 활동으로 분명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의상은 화엄종단을 관음 진신상주의 불국토 신앙과 현실에 기반을 둔 정토신앙을 두 축으로 이끌었다. 이는 통일기 신라 사회가 지향하던 새로운 사회 안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고기의 불교와는 다르게 정치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념적 방향을 제시한 의상의 사상과 실천 신앙은 중대 초기의 신라불교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통일기 이후의 신라 사회는 불교를 사상적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중고기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부석사는 왕경이 아닌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문화적 소양을 싹트게 한 의상의 활동은 지방문화를 배양해 낸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중대 왕실은 중앙 관료 조직의 확대 정비와 지방세력의 개편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왕권 강화에 상당한 성과를 이루면서 유교적인 왕도정치의 구현으로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신라 중대 사회에서 불교는 사회 안정의 이념의 역할을 맡아 유교 이념을 지향하는 정치 운영과 함께 복합적인 배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의상은 행적은 청정한 수도자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였음을 보여 준다. 보덕에게서 익힌 {涅槃經}과 도선으로부터 영향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청정한 持戒주의는 그로 하여금 三衣一鉢 이외에는 다른 아무런 持物도 갖지 않도록 하였다. 국왕은 토지와 노비를 주고자 하였을 때 보인 의상의 태도는 확고하였다.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위 아래 사람이 함께 나누어 쓰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지켜 나갑니다. {열반경}에 八不淨財를 이야기했는데 어찌 莊田을 가지며 노복을 부리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농사지어 법신의 혜명이 이 몸을 의지해 사는 것입니다.
통일사업에 투입된 막대한 경제력을 평상 경제로 회복해 가면서 새로이 편입된 경제력을 함께 통괄하여 나가야 했던 통일기 초기이었기에 전국가적인 신진 사회경제체제의 시행이 절실히 요구되었을 것이다. 문무왕 4년(664)에 사람들이 함부로 사원에 재화나 토지를 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제를 시행한 바 있고, 누차 승관을 임명하여 교단의 재정비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교단에서도 계율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국가 체제에 보조를 맞추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상이 실천했던 철저한 수행자의 자세는 당시 교단에서 가장 장려할 만한 것이었다.
또 의상은 기층민의 경제적 안정이 국가의 기본적인 힘이 되며 그들의 정신적 안정이 사회 안정의 토대가 된다는 생각에서 통일 후 시행된 과도한 토목사업을 적극 반대하였다. 궁궐과 지방의 여러 성을 쌓았던 문무왕이 도성을 새롭게 수축하려 하자 이 사업의 적절치 못함을 들어 축성 중지를 건의하였고 이는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런데 {화엄경}에는 보살이 왕이 되어 훌륭한 나라를 얻으면 이를 안온하고 풍요롭게 하며 怨敵을 항복받고 正道로 다스리며 법에 따라 교화하여 무기를 쓰지 않고도 자연히 태평한 세상을 이룬다고 하고 있다. 또한 의상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관음신앙에 대한 경전인 {大悲心陀羅尼經} 곧 {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 大悲心陀羅尼經}에는 이 다라니의 威神이 廣大하여 나라에 재난이 일어났을 때 만약 국왕이 正法으로 다스리며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잘못을 용서하며 7일 주야 동안 이 다라니를 지송하면 나라의 모든 재난이 없어지고 오곡이 풍성하며 백성이 안락할 것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이 다라니를 지송하면 외적이 침입하였다가 저절로 항복하고 왕자와 백관들은 왕에게 충성하고 왕비와 궁녀들은 공경하며 龍神들이 나라를 보호하여 기후가 순조롭고 곡식이 풍요로우며 인민이 안락하리라고 하였다. 다라니의 持誦을 강조하는 경전이지만 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의미를 둘 만하다. 의상의 국가관이나 국왕관은 이러한 경전에서 영향받았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원효의 국왕관은 {화엄경}의 菩薩爲王說로서 민을 正道로 교화하는 국왕의 보살행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국왕은 菩薩戒를 받아 자신이 보살임을 내세워 이타정신을 지니고 선행을 하는 보살로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진골 귀족과의 긴장관계에서 왕권을 지탱해 주는 것은 체계적인 관료제의 운용에 따른 통치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관료제의 운용은 유학을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관료들의 성장과 더불어 신장되었다.
이렇게 기층민의 안정을 기본으로 국가의 안녕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의식을 가졌던 의상은 그 자신의 역할로서 그들 기층민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을 보급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가 제창한 국왕관도 민을 정도로 교화하는 것이었지만, 의상은 기층민의 안정이라는 명제를 구체적인 교단활동으로 구현해 보였고 이러한 의지를 명확한 시책으로 표출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를 선도해 간 의상의 역할이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의상의 화엄사상과 관음 및 미타신앙이 갖는 의의는 당시 신라 사회가 요구하던 사회적 안정에 기여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대에 들어 불교는 사회 안정의 이념의 역할을 맡아 유교 이념을 지향하는 정치운영과 함께 복합적인 배경을 이루었다. 불교가 왕권의 안정적인 유지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치 이념을 수식하던 중고시대의 불교의 역할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Ⅴ. 맺음말
7세기 신라 사회는 삼국간의 항쟁을 마무리짓고 확대된 영토와 인민을 토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통일기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였던 義相은 신라 사회의 새로운 지향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의상은 통일전쟁의 막바지에 중국에 유학하여 새롭게 체계화된 화엄의 사유구조를 계승하고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개체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중층적으로 개체간의 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一乘 法界緣起 사상을 中道的 바탕에서 전개한 특색있는 것이었다.
의상은 {一乘法界圖}에서 수립한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이 영도한 華嚴敎團을 철저한 평등 사회로 이끌어 갔다. 의상은 眞定과 智通과 같은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을 포용하며 그들의 활동을 한껏 보장하였다. 의상 화엄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一과 多의 相入相卽의 법계연기는 평등과 조화를 상징하는 논리로서 의상의 화엄교단에서 당시의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실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화엄의 圓融한 논리 속에 대립되는 현상을 포용해 들이며 화엄교단을 형성한 의상은 교단활동의 중점을 제자들과 실천적인 교화에 매진하는데 두었다. 의상이 화엄교단에서 華嚴經說에 토대를 둔 현세적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전개한 것은 화엄에 바탕한 신앙의 실천을 선도한 것이었다. 이는 통일 전쟁을 종식하고 새로운 사회 의식을 열망하던 신라사회가 바라던 바 사회 안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의상은 도성의 축조와 같은 과도한 토목사업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당시 승려로서는 드물게 표명하였다. 또한 국왕이 기부하겠다고 하는 토지와 노비를 거절하였다. 이는 검소한 사회 분위기를 지향해야 했던 시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기층민의 경제적 안정과 정신적 안정이 사회 안정의 토대가 된다는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의상의 화엄사상과 신앙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신라 화엄교단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불교가 사회 안정의 밑바탕이 됨으로써 왕권의 안정적 운영에 제도적인 유교 정치사상의 토대와 함께 복합적인 배경을 이루었던 데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본고에서 다룬 의상의 화엄사상은 {일승법계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장차 {화엄경문답}이나 {법계도기총수록}과 같은 의상의 사상을 전하는 다른 자료의 분석이 심화될 때, 의상의 화엄사상이 갖는 사회적 의의의 변화상이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키워드 : 의상, 화엄사상, 일승법계도, 중도, 법계연기, 상입상즉, 관음신앙, 미타신앙, 실천신앙, 평등교단
Uisang's Hwaom Thought and the
Period of Unifying Silla
Jung, Byung-Sam
Uisang, the founder of Hwaom School of Silla, spent his life leading the activities of a religious order and strictly pure self- discipline during the changing times in Unified Silla society.
Uisang's Hwaom thought that appears in il-seung-bob-gye-do(一乘法界圖) succeeded the new thought structure that Zhiyan had syste- mized. Uisang arranged the heart of Hwaom thought into symbolic diagrams in half-poem formats. Among Uisang's il-seung-bob-gye-do thought, the core is the text of dependent origination of dharmad- hatu(法界緣起) of One Vehicle Round Doctrine(一乘圓敎), which is classified into 4 categories which are composed of the mutual pene- tration and the mutual identity(相入相卽) between the One and the All etc. Each individual holds an element of the All. It is because they exist upon the foundations of conditioned origination, and therefore the One and the All embrace each other with no obstacles in between. In a world that is formed upon conditioned origination, there cannot be a fixed individual with an independent identity. All individual objects exist according to a mutual organic relationship.
There were many active disciples who were of commoner origin among Uisang's pupils like Jinjong and Jitong, It is meaningful to see that pupils of commoner origin could play a central role in a central religious order of a time when strict social classes were emphasized.
Uisang succeeded in settling Avalokitesvara living in this world belief as the appropriate religion capable of accommodating the needs of the Silla people. And Uisang opened Busok-sa(浮石寺), the main temple of Hwaom School, with Amita belief. Uisang established Amita belief as the central religion of Hwaom School. The propa- gation of the Buddhist land religion of the belief of Avalokitesvara living in this world and reality-based Suhkavati belief that Uisang had propelled, contributed to the new social stability that the Silla society had been yearning for.
The role of Buddhism in the 'jungdae' period Silla was to form a composite background with politics, which were heading for Con- fucian ideas. And Uisang formed an important axis of the sovereign powers along with the institutional role of Confucianism, through establishing a high degree of philosophy and uniting the consciousness of the people.
[의상의 화엄사상과 통일기 신라사회]에 대한 논평
해 주 *
정병삼 교수의 논문 [의상의 화엄사상과 통일기 신라사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신라통일기 전후를 살다가 간 의상의 화엄사상과 신앙이 당대 신라사회에서 갖는 의의를 면밀히 고찰하고 있다.
논자는 일승법계도에 보이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개체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중층적으로 개체간의 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성기를 강조하는 일승법계연기사상을 중도적 바탕에서 전개한 특색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화엄경 설을 토대로 한 의상의 미타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은 통일기 신라사회가 지향하던 새로운 사회안정에 부응한 요구를 수용한 사회 화합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의상은 자신의 교단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평등'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신라사회의 건설에 크나큰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통일기 사회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의상의 행적,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되고 그 사회에 영향을 주었던 의상의 사상을 매끄럽게 잘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상의 화엄사상과 신앙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고 논자의 주장을 더욱 부각시키는 기회를 주기 위해 몇 가지만 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 논문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평등'과 '조화'라는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의 저술인 일승법계도가 법계연기의 구극인 성기사상을 강조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논자는 성기를 법계연기에 포함시켜 전체적으로 법계연기를 중심으로 의상의 화엄사상을 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의상의 화엄사상에 있어서 성기사상의 중요성에 비해 논문에서는 성기사상에 대한 설명의 비중이 너무나 작다고 하겠으며, 연기와 성기의 관계설정과 그러한 의상화엄사상과 평등·조화의 연결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한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의 저술에 붙인 제목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법계와 법성이다. 일승법계도는 일승화엄의 세계를 법계라 하고 그것을 법성게와 법계도인을 합한 그림으로 그려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엄법계는 중생세간(검은 글자로 된 법성게)과 지정각세간(붉은 줄의 법계도인)과 그리고 기세간(흰종이)의 삼종세간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 삼종세간이 각기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융삼세간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화엄설법을 210자의 시로 엮어 낸 법성게는 법성이라는 첫 단어가 게송의 제목으로 불리고 있듯이 법성에 비중이 주어지고 있다. 법성은 法性性起로서 如來出現의 다른 표현이다. 의상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법성게가 자리행·이타행·수행의 세단으로 구분되고 자리행은 다시 성기 證分과 緣起分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연기분은 증분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편이다. 그래서 연기의 구극이 성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연기는 법을 상호관련 속에서 본다면 성기는 법을 각 법의 자체상에서 본다. 따라서 개체의 평등은 성기의 측면, 상호 조화와 화합은 연기의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논자는 법계연기 속에 성기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의상은 평등한 법계도인을 연기세계의 모습인 육상으로 설명하고도 있다. 이 역시 구불구불한 선이 하나로 이어져 법계도인이 되듯이 육상원융의 연기를 통해 성기로 취입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의상의 화엄법계사상은 오히려 연기보다 성기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법계연기가 연기일 수 있는 것은 성기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중도 교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논자는 의상의 화엄사상의 중심은 중도의에 바탕한 법계연기설이라 하였는데, 법성게에서는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이라 하여 중도 역시 성기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논자는 법계연기와 성기의 관계 및 의상화엄사상의 핵심과 특징을 일관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 의상 당시 이미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이 신라사회에 넓게 기반을 확보해 갔고 그것을 의상이 수용한 것이라면, 기존의 관음 미타신앙과 의상의 화엄적 관음 미타신앙이 당시 사회에 미쳤던 영향과 차이를 비교 고찰한다면 의상의 영향을 부각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셋째, 논문에서는 의상의 일승발원문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일승발원문 또한 의상의 신앙과 사상에 있어서 주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華嚴十山이라 불리는 사찰에는 아미타불도 모시지만 비로자나불도 모시고 있다. 그러므로 미타신앙만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의 화엄정토신앙과 화엄불국토사상에 대해서도 간과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일승법계도는 60권 화엄경의 핵심내용이며 비로자나불은 80권 화엄경에 출현하므로 일승발원문에 대한 재평가는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백화도량발원문 역시 후대의 가필 또는 가탁을 전제한 것이라면 일승발원문도 의상의 신앙과 사상에 있어서 제외될 수 없는 주요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넷째,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의상의 理理相卽說에 대한 논자의 견해는 어떠한지, 의상의 화엄사상을 논하는 자리이므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섯째, 의상이 중국에 유학을 뜻하고 있던 시기의 신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분이 자장이며, 자장이 신라 교학의 기반을 다져 유식·여래장·불성사상 뿐 아니라 화엄의 단초를 열었다면 자장 화엄이 원효나 의상에게 전해지지 않고 교단적 발전을 이루어 가지 못하고 단절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자장화엄 원효화엄과 의상화엄의 차이는 무엇이며 각자 맡은 역할은 무엇인지 그 관계성도 명확히 밝혀 주는 것이 의상의 화엄사상이 신라사회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의상의 화엄사상과 통일기 신라사회]에 대한 논평
정 순 일 *
본 논문은 의상의 사상체계에 대한 분석, 의상의 사상과 실천행의 연관성, 그리고 이것들의 사회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고찰하여, 의상이 정립한 화엄사상과 실천적인 신앙활동의 사회적 성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요약된다.
그 결과 의상의 사상과 활동의 사회적 의의로서, 평등과 조화를 이념으로 하는 의상의 화엄사상과 그에 바탕한 신앙의 실천은 통일신라의 사회안정에 기여하고 있음을 명쾌하게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논문은 의상의 사상과 활동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논평자의 입장에서 생각나는 의문 몇 가지를 묻고자 한다.
첫째, 종래의 연구와 본 논문의 중요한 차별점에 대하여 알고 싶다. 논평자가 이해하는 한에 있어 이 논문의 요지는 주로 발표자가 98년 출간한 뛰어난 저작({의상 화엄사상의 연구})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종래의 논지에서 새로이 전개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요약할 수 있는가?
둘째, {法界圖}의 저자 문제에 대한 발표자의 입장은 무엇인가 알려주기 바란다.
{法界圖}의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법계도의 의상 저작설에 대한 姚長壽 등의 반론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全海住의 재반론이 제기된 바 있었다. 즉 姚長壽는 房山石經 華嚴典籍의 遼金刻經이 수록된 [儼法師造], {一乘法界圖合詩一印}을 근거로, "{華嚴一乘法界圖}는 의상이 지엄의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을 주석한 것이다. … 法界圖印은 지엄의 저작이며, 의상이 이것에 주석한 것이 현존의 {華嚴一乘法界圖}이다. 法界圖印이 의상의 저작이라는 종래의 정설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해 주는 房山石經의 자료적 가치의 신빙성, 房山石經에 각인되기 이전에 중국에서 {法界圖}가 유통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法界圖}가 의상의 저술이라는 기존의 정설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法界圖}는 의상의 사상을 확인함에 있어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고, 발표내용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 만큼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표자의 의견을 묻고 싶다.
셋째, 의상 사상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는 무엇인가?
본 논문은 의상 사상의 실천적 성격, 그에 바탕한 실천적 신앙활동을 부각시키고, 여기에서 의상의 사상과 활동의 사회적 의의를 확인하고 있다. 발표자의 논지를 수용한다면, 의상의 화엄사상은 사상사적으로 또는 그것의 현실적용에 있어 중국화엄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인도 화엄의 실천성을 회복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과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특정 사상체계는 양면성을 지니며, 그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은 널리 열려 있다. 이것은 의상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최근, 현재 한국 불교사 연구에는 민족주의적 혹은 애국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으며, 이러한 경향이 한국불교학의 세계화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과 관련해, 발표자의 의상 이해는 실천적 성격의 강조, 정치적 통치이념으로서의 역할 부정 등을 거론하는 등, 우호적인 것으로 판단되나 의상의 사상과 활동의 부정적 측면 내지 한계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理理相卽說 등 의상의 사상에서 관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는 없을까 하는 점을 묻고 싶다.
넷째, 의상의 대사회적 인식과 활동이 화엄사상 특유의 것이었던가를 묻고 싶다.
논의의 전개방식과 관련해, 발표자는 의상의 신앙과 대사회적 활동의 의의를, 그것이 지향하는 바의 평등과 조화 이념의 구현에서 확인하고, 동시에 평등과 조화 이념의 근거로서 '중도의에 바탕한 법계연기설(상즉상입의 연기설)'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발표자는 의상의 실천적 활동의 근거로서 중도의에 바탕한 법계연기설에 주목하여 그의 사상에서 활동을 연역해 내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화엄의 사상이 없었더라도, 더 나아가 의상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대 사회적 대응은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정이 가능할 수 있다. '평등과 조화의 이념을 가진 중도의'는 불교 일반의 기본 이념이다. 물론 화엄의 상즉상입, 법계연기설은 불교 일반의 교설보다 한 차원 높은 조화와 중도의 이념을 지닌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화엄 교학이기 때문에 그러한 대사회적 대응이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또한 화엄의 테두리 안으로 논의의 범위를 좁혀 본다고 해도, 다른 화엄사상가들의 활동이 실천적이지 못하고, 이에 비해 의상의 사상과 활동만이 실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상 화엄 사상의 성격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좀 더 소박하게 그의 현실 인식과 대응 방식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출처] 의상의 화엄사상과 통일기 신라사회|작성자 각원사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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