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華嚴)과 선(禪)
未網怒一 일본수학자 이기영 역 화엄경의 세계 -한불불교연구원- 1985
阿賴耶識으로서의 一心
以上은 如來藏說家의 見解이나 또 一方에 阿賴耶識說家의 見解가 있다. 阿賴耶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內的世界를 視하여 구하면 그 구하는 終局에 나타나는 것이다. 內觀的 方面으로든지 倫理的 方面으로든지 최후에 남아있는 것이 있으니 소위 極限槪念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永遠的 主觀이라고 하여도 可한 것이니 이 阿賴耶識은 즉 永遠的 主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든지 그 槪念的인 阿賴耶識은 捕捉키 불능한 것이다. 흐르고 흘러 그치지 않고 흘러서 최후까지 不盡하는 생명력, 그것이 곧 阿賴耶識이다. 그런데 이미 識이라고 한 이상은 了別의 작용으로서 그 본질에 있어서 認識의 작용이 없으면 아니된다. 了別은 대립을 예상하는 것인데 了別이라는 활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了別시켜질 對象物이 없으면 아니된다. 그곳에서 阿賴耶識이 그 自體를 分하여 對象 즉 相分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 것이니 여기에서 了別 즉 認識의 활동이 성립한다. 阿賴耶識의 認識은 任運自然의 작용이요, 分別作用이 아니다. 즉 意識上의 認識이 아니다. 그래서 阿賴耶識의 敎義는 受熏과 變現에 歸結된다. 受勳이라 하는 것은 印象을 받는 것이요, 變現이라 하는 것은 그 印象에 應한 開展으로서 이 受勳과 變現이 唯識說을 성립시키는 二大조건이 되는 것이다. 阿賴耶識이 受取하여 保持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印象을 種子라 하고, 이 種子로부터 流出하는 결과를 現行이라 하며, 이 種子와 現行과의 관계에 의하여 그곳에 各自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變現이라는 것에 因緣變과 分別變과의 二種이 있다. 因緣變의 세계는 任運自然으로서의 流出하는 세계이니 즉 自然法爾의 세계이다. 이와 반면에 分別變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個人的 主觀을 加하여 나타난 세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不正한 세계 즉 妄境界가 되고 만다. 이 分別變이라는 것은 먼저 術한 「我」와「法」이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唯識說에 의하여 말하면 內的世界의 「我」와 外的世界의 「法」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分別을 加하여 만들어진 것, 즉 개인적 주관에 의하여 창조된 세계이다. 즉 因緣變의 세계는 如實의 法界이지만 分別變의 世界는 如實의 相 그대로는 아니다. 이리하여 唯識에서 떠드는 문제는 分別變의 세계를 轉回하여 因緣變을 「我」즉相分으로 客觀化하여 고정시킨 까닭이다. 見分은 主觀이요 相分은 客觀이라, 主觀이라는 것과 客觀이라는 것은 전혀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지 아니 하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主觀을 客觀化한 것이 이것이 근복적 誤謬이니 즉 分別變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생의 어느 것이나 다 이 근본적 誤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先天的인 誤謬로서 잇는 것인데 一般世人에게는 이것이 실로 보편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根本的 誤謬가 있는 이상에는 이 誤謬로부터 나타난 세계는 다 如實치 못한 세계이다. 分別變의 我라는 것을 파괴하여 자기 앞에 橫在한 「法」의 세계를 如實의 세계로 轉回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혹은 因緣變의 세계 그대로 나타난 相分을 性境이라고 부르고 分別變의 세계로서 나타난 相分을 帶質境 또는 獨影境이라고 命名한다. 性境은 전혀 個人主觀의 創造이다. 혹은 이 獨影境을 자기가 지어서 그것에 의하여 향상하고 奮進하고 있으나 또 는 그것 때문에 苦惱하고 있는 자도 적지 않다. 唯識說로서의 歸着處는 分別變의 世界觀을 개조하여 因緣變의 그대로 나타난 세계로 만들려 하는 데 있는 것이다.
般若經說에 의하면 이然에 의하여 生滅變化하는 세계는 無自性이라고 稱하여 한 개로 결합된 완전한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流轉不息하는 것이요, 또는 그것이 因緣이기 때문에 그 세계는 空한 것이 되고만다. 그러나 만약 唯識說에 의하여 보면 因緣變의 세계는 種子의 흐름―流―으로서 그 本質이 있으며 또는 그것이 因緣이기 때문에 空이요, 他는 因緣이기 때문에 流인 것이다. (上述한 移審으로서의 諸問題는 華嚴哲學의 一心法界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적인 諸問題로서이다.)
화엄과 선(禪)과의 사이에 특히 밀접한 관계가 생긴 것은 화엄의 4조 징관(澄觀) 때 부터이다. 선(禪)의 6조 혜능(慧能)은 713년에 시적(示寂)했는데, 그후에 선종(禪宗)은 비상한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738년에 태어난 징관은 처음에 우두(牛頭)의 선을 받았고, 나중에는 하택종(荷澤宗)의 무명선사(無名禪師)의 인가(印可)를 얻었다고 한다. 선(禪)의 4조 도신(道信) 밑에 5조 홍인(弘忍)과 우두법융(牛頭法融)이 있었는데, 후자에 의해서 우두종(牛頭宗)이라는 선종의 최초의 분파가 생겼다. 하택종(荷澤宗)이라고 하는 것은 6조 혜능(慧能)[南宗]의 문하인 하택신회(荷澤神會)의 계통을 말한다. 징관(澄觀)은 또 북종선(北宗禪)도 배웟다고 전해지고 있다. 징관 때에 와서 오교(五敎) 중의 돈교(頓敎)라고 하는 것은 선종(禪宗)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해지게 되었다. 징관을 이은 종밀(宗密)은 징관을 만나 보기 전에, 하택종에 속하는 수주도원(遂州道圓) 밑에서 남종선(南宗禪)을 배운 사람으로, 오늘날 하택신회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것은 주로 이 종밀(宗密)에 의한 것이다. 종밀은 징관의 교(敎)와 하택의 선(禪)을 하나로 뭉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했다. 그의 저(著),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都序만이 현존할 따름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진성(眞性)은 오직 선문(禪門)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또 만법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법성(法性)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중생미오(衆生迷悟)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장식(如來藏藏識)이라고 부른다. 또 이것은 제불만덕(諸佛萬德)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이라고 부른다. 또 이것은 보살만행(菩薩萬行)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심지(心地)라고 부른다.
영지불매(靈知不昧)를 주장하고, 지지일자중묘지문(知之一字衆妙之門)이라고 하여, 미오양계(迷悟兩界)에 두루 관련된 지(知)를 제일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선(禪)에
식망수심종(息忘修心宗)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의 3종이 있고, 교(敎)에는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
밀의파상현성교(密意破相顯性敎)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
의 세 가지가 있어, 3종과 3교가 각각 이 셋에 대응하고, 그 중에서도 3종 중 제일 훌륭한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이 3교 중에서 제일 훌륭한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 즉 화엄종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는 것이다.
화엄의 학자가 선(禪)을 채택하고 있을 때, 선사 쪽에서도 화엄사상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미 선의 3조 승찬(僧璨)[606년에 입적]에게는 신심명(信心銘)이라는 찬술이 있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요시되고 있는데, 그 중
一卽一切 一切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
但能如是 何慮不畢 이렇게만 하다면 다 되어 버린 것을.
이라고 하는 문구들은 화엄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혜능을 이은 청원행사(靑原行思)의 문하인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에게는 창동계(參同契)라고 하는 찬술이 있는데, 그 중에
門門一切境 回互不回互 문과 문 모든 경계 회호와 불회호와
回而便相涉 不爾依位住 회하고 다시 회해 아니면 위에 주해
라고 하는 문구가 있다. 각각 다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일체의 경계에 있어서 회호(回互)와 불회호(不回互)가 있다. 회호(回互)라는 것은 돌아서 서로 교섭하는 것으로 제법 사이에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불회호(不回互)라는 것은 제법이 각각 자기의 입자에 머무르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물론 화엄의 근본사상이다. 석두(石頭)의 증손제자인 동산양개(洞山良价)[808-869]는 조동종(曹洞宗)의 조(祖)인데, 보경삼매(寶鏡三昧)라는 찬술 속에서 변정회호(偏正回互)라는 것을 주장한다. 정(正)의 평등[一般]과 변(偏)의 차별[個]이 회호(回互)함을 말하는 것이다.
혜능을 이은 남악회양(南嶽懷讓)의 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 대주혜해(大珠慧海)라는 선사가 있어서 9세기 초경에 입적하였는데, 돈오요문(頓悟要門)이라는 책을 썼다. 이 안에는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라한다.
라고 하는 것이 있으며, 또
경에서 말하기를,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한다.
라고 두 군데에서 말하고 있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대경권(大經卷)이 있으니 양(量)이 삼천대천세계와 같고, 또 일미진(一微塵)속에 내재한다'고 한다
라고 하는 이 경도 물론 화엄경이다. 그밖에도
단일사즉일체사(但一捨卽一切捨)임을 알면, 무기즉일체무기(無起卽一切無起)이니라.
라고 하고, 또
범부는 허깨비[幻]를 알지 못하고 곳곳에서 허깨비 장난[幻業]에 미혹되고 성문(聲聞)은 허깨비 경지[幻境]를 두려워하고 마음이 어두워져 적(寂)에 들고, 보살은 허깨비 법[幻法]을 알고 허깨비 체[幻體]에 달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에 걸리지 않는다. 불(佛)은 바로 큰 허깨비 요술사[大幻師]이다. 큰 허깨비 법륜[大幻法輪]을 굴려서 큰 허깨비 열반[大幻涅槃]을 이룩하고, 허깨비 생멸[幻生滅]을 바꾸어 불생불멸을 얻고, 하사(河沙)의 예토(穢土)를 바꾸어 청정법계를 이룬다.
라고 말하는 것은, 화엄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또 마조(馬祖)를 이은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제자 황벽희운(黃檗希運)[850 또는 855년 寂]에게 전심법요(傳心法要)라고 하는 찬술이 있는데, 일즉일체·일체즉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일진법계(一眞法界)라고도 한 대목이 있으며, 또
제불과 일체중생, 오직 이것은 일심(一心)으로서, 다시 다른 별법(別法)이 없다.
라고도 하고 있어서, 혜해(慧海)에 관한 사실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황벽(黃檗)이 화엄의 깊은 뜻에 통해 있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황벽의 제자 임제의현(臨濟義玄)[867년 寂]은 임제종의 조(祖)인데, 그의 사료간(四料簡)이라고 하는 것도 법장의 교학에서 나온 것일 것이라고 스즈끼·다이세쯔(鈴木大拙)가 〈화엄의 연구〉에서 말하고 있다. 임제록(臨濟錄)에
시일(是日) 양당(兩堂)의 수좌(首座) 상견(相見)하여 동시에 할(喝)을 내리다. 승(僧)이 사(師)에게 물었다. 또 빈주(賓主)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師)가 말하기를 빈주역연(賓主歷然)이라 하고, 또 사(師)가 말하기를, 대중(大衆)이 임제(臨濟)의 빈주(賓主)의 구(句)를 회통코자 하면, 당(堂) 중의 두 수좌(首座)에게 물으라 하고 곧 하좌(下座)했다.
라고 하는 문구가 있고, 또 그 밖에도 빈주(賓主)에 관해서 약간 긴 시중(示衆)이 있다. 빈주(賓主)를 나누어 분명히 알고 있음을 설한 것은, 화엄에서 주반(主伴)을 나누고도 항상 구족하고 있음을 말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일 것이다. 임제가 선사(禪師)들 속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信)을 중대시하는 것도 화엄적이다. 임제록(臨濟錄)에
그대의 신(信)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에 오늘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고,
학인(學人)이 신(信)이 미치지 못하므로 밖을 향하여 치구(馳求)한다.
고 설하고, 또
심법(心法)은 형태가 없고, 시방에 통관(通貫)하고, 목전(目前)에 현용(現用)한다. 사람의 신(信)이 미치지 못하므로 곧 명(名)과 구(句)를 인정하고, 문자 속으로 향해 불법(佛法)을 생각으로 짐작하려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사이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고 말하고 있다. 임제의 신(信)을 스즈끼·다이세쯔는 특히 중대시하고 있다.
형연독탈(逈然獨脫)하여 물(物)에 구애되지 않고, 건곤도복(乾坤倒覆)할지라도 내 다시는 의심치 않노라. 시방의 제불이 현전(現前)할지라도 일념심(一念心)의 희(喜)가 없고, 삼도(三塗)의 지옥이 돈현(頓現)할지라도 일념심의 포(怖) 없으리라. 무엇에 의하여 이와 같이 되는가? 아(我)·제법(諸法)의 공상(空相)을 보건대, 변하면 즉 유(有)요, 변하지 않으면 즉 무(無)라.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소이(所以)로 몽환공화(夢幻空花). 어찌 파착(把捉)을 노(勞)하랴?
라고 하는 곳의 유심(唯心)·유식(唯識)은 화엄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에 설봉의존(雪峯義存)[822-908]이 있고, 그 증손제자에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이 있다. 907년에는 당조(唐朝)가 멸망하고, 960년에 송조(宋朝)가 흥기한다. 법안(法眼)의 만년(晩年)은 세종(世宗)이 파불(破佛)할 때였다. 오대난리(五代亂離)의 시기에도 선종(禪宗)만은 쇠퇴하는 기미없이 수많은 거장을 배출하고 있는데, 법안(法眼)은 화엄의 깊은 뜻을 얻어, 그 묘지(妙旨)를 발휘하여 법안종(法眼宗)의 조(祖)로서 알려져 있다. 그 문하 천태덕소(天台德韶)를 잇는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가 종경록(宗鏡錄)이란 대작을 짓고, 화엄등에서 설하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의 일심(一心)에 의해서 선(禪)을 해석하고, 교선일치(敎禪一致)를 부르짖은 것은 실로 그 깊은 연유가 있다 할 것이다. 법안은 처음에 설봉의 문하 장경혜능(長慶慧稜)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얼마 안되어 두 사람의 동학(同學)과 함께 행각(行脚)에 나서, 비를 맞아 호남(湖南)의 지장원(地藏院)에서 쉬게 되었다. 비가 개어 세 사람이 물러가려고 할 때, 지장원의 나한(羅漢)인 계침(桂琛)이 문까지 나와 전송을 하면서
상좌(上座)가 심상(尋常)하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을 설했는데,
라고 말하면서, 뜰 밑에 있는 한 조각의 돌을 가리키며
잠시 말해 보게. 이 돌이 마음 속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라고 묻자, 법안(法眼)이
마음 속에 있다.
라고 대답하니, 계침(桂琛)이 다시
행각(行脚) 나가는 사람이 무슨 이유를 달아 한 조각돌을 심두(心頭)에 두었는가?
라고 물었다. 여기서 법안이 대답할 수가 없었으므로 출발을 보류하고 한 달 동안을 더 머무르면서 결택(決擇)을 얻으려고 매일 자기가 본 견해를 바쳐 보지만, 계침은 "불법(佛法)은 그러는 것이 아니야."라 하고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법안이 "저는 말이 궁하고 이(理)가 끊겼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거기서 계침이
만약 불법(佛法)이 논하면, 일체견(一切見)이 다 이루어진다(成).
고 갈파하자, 법안은 언하(言下)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일체견이 다 이루어진다[見成]라고 하는 것은 현성(現成)이다.
법안은 회하(會下)의 여러 사람들에게 법장의 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이나 화엄경의해백문(華嚴經義海百門) 등을 읽혔던 것 같다. 십규론(十規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범(大凡) 조불(祖佛)의 종(宗)은 이(理)를 갖추고 있고, 사(事)를 갖추고 있다. 사(事)는 이(理)에 의해서 서 있고, 이(理)는 사(事)를 빌어 분명해진다. 이사(理事)가 서로 돕고 도리어 눈과 발과 같다. 만약 사(事)가 있고 이(理)가 없으면, 곧 진흙에 빠지는 꼴이 되어 통하지 못한다. 만약 이(理)가 있고 사(事)가 없으면, 즉 한만(汗漫)해서 귀(歸)하는 바 없다. 그 둘의 둘 아님[不二]을 원하면, 원융(圓融)이 있음을 존귀하게 생각해야 된다. 조동(曹洞)의 가풍과 같은 것은, 즉 편(偏)이 있고, 정(正)이 있고, 명(明)이 있고, 암(暗)이 있다. 임제(臨濟)에는 주(主)가 있고 빈(賓)이 있고, 체(體)가 있고, 용(用)이 있다. ‥‥‥또 법계관(法界觀)과 같은 것은 자세하게 이(理)와 사(事)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색(色)과 공(空)을 단(斷)한다. 바다의 성질이 무변(無邊)하지만, 하나의 털끝 위에 다 포함되어 버리고, 수미산이 지극히 크지만, 다 장(藏)하여 하나의 겨자씨 속에 넣는다.‥‥‥모두 다 마음이 짓는 것에 연유한다. 불(佛)과 중생이 함께 평등한 까닭이다.
법안에게 화엄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을 노래한 것이 있다.
三界唯心 삼계에는 오직 마음이요,
萬法唯識 만법은 오직 식이로다.
唯識唯心 오직 식이요, 오직 마음이니,
眼聲耳色 눈에 소리, 귀에 색?
色不到耳 색은 귀에 와 닿지 앟고,
聲何觸眼 소리는 눈에 와 닿지 않나니
眼色耳聲 눈에 색, 귀에 소리,
萬法成辨 이때 비로서 만법이 이루어진다.
萬法匪緣 만법이 연(緣)이 아니면,
豈觀如幻 어찌 여환(如幻)함을 관(觀)할 수 있으랴?
山河大地 산하대지(山河大地),
誰堅誰變 그 어느 것이 견고하고, 그 어느 것이 변화하는고?
또 화엄의 육상(六相)을 노래한 것도 있다.
華嚴六相義 화엄의 육상의 뜻은
同中還有異 동(同) 속에 도리어 이(理)가 있으니,
異若異於同 이(異)가 만약 동(同)과 다르다면
全非諸佛意 전혀 제불의 뜻이 될 수 없다.
諸佛意總別 제불의 의중의 총(總)과 별(別),
何曾有同異 어찌 일찍이 동(同)과 이(理)가 있었으랴?
男子身中入定時 남자의 몸이 정(定)에 들었을 때는,
女子身中不留意 여자의 몸에 뜻을 두지 않는 것.
不留意絶名字 뜻을 두지 않고 명자(名子)를 절(絶)하니
萬象明明無理事 만상(萬象)이 명명하여 이(理)·사(事)가 없도다.
화엄종은 종밀(宗密) 이후 점차 그 세력을 잃어 갔지만, 화엄사상은 선(禪) 속에서 골수(骨髓)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과정형이상학과 화엄불교
상입(相入)과 즉각적 깨달음(頓悟) : 화엄이론과 선수행(禪修行)의 조화
이 장은 담론의 또 다른 특수화된 도리(order) 즉 명상수행의 도리 안에서 화엄의 동시상입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사실상, 화엄불교의 주요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있다. 단순한 철학체계와는 달리, 종교적 구제의 포괄적 매개인 화엄불교는, 현상들이 어떻게 연기(緣起, 조건화된 共生)에 의해 현상하는가를 설명하는 인과관계 이론을 정식화하기보다는 최상의 깨달음의 성취를 위한 구원적 틀을 형성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 찰나(一念卽時)로 걸림 없이 상입하거나 또는 수백 수천의 무한한 오랜 영겁이 한 순간으로 내재한다는 화엄이론을, 인과관계 이론으로 이해하려 할 때는 문제가 상당히 크다. 오히려 화엄이론은 선(禪)명상불교에서 제시된 바의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성취하는 적절한 방편(up ya)으로 작용하는 적절한 구원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3시간대(三世) 사이를 동시상호 진입한다는 학설은 실재의 구조를 최종적이고 결론적인 해석적 구조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고통(즉 여러 가지 양태의 집착과 매달림)을 구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시간적 순간들 사이의 동시상호융섭에 관한 화엄교의는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신현하는 적절한 방편으로서 논쟁의 여지가 없고 확실히 옳다. 그러나 인과과정에 대한 설명이론으로서는, 화이트헤드의 누적적 진입의 형이상학이 시간적 상호융섭과 동시상호진입의 화엄이론보다 더 명확한 것 같다.
현재의 담론은 고려국사 보조(普照)로 알려진 지눌(1158-1210)이 가정한 화엄/선(華嚴/禪)의사변적 구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의 일차적 노력은 불교의 교(敎), 즉 경전연구와 선(禪)불교 즉 명상적 경험 불교를 하나의 포괄적인 "원돈승"(圓頓乘)의 이론과 실천으로 융회(融會)시키려는 것이다. 원돈승(圓頓乘)에서는 화엄형이상학의 무애법계가 자신의 진심(眞心)의 부동지(不動智) 혹은 보광(普光)과 동일시되며, 화엄의 상입은 바로 선종(禪宗)이 설명하는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통일신라의 원효(元曉)가 통불교(通佛敎, '총체적 상입의 불교'), 원융회통 그리고 화쟁(和諍, '모든 논쟁들의 조화')등을 제창했던 데서도 드러나는 한국불교의 특징적 패턴은 지눌이 정시화한 창조적 형이상학적 종합에서 그 최고의 표현양태를 보인다. 지눌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비록 그가 법장의 사상과 정통화엄의 모든 전통을 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중국화엄불교 가운데 상당히 비정통 노선, 특히 이통현과 종밀의 사상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이론과 실천체계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통현과 종밀 두 사람은 모두 법장의 이론적인 관심과는 달리, 화엄불교의 실천적이며 구제(구원)적이고 경험적인 차원들을 강조했다.
지눌은 그의「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깨달음의 원만하고 즉각적인 성취")에서, 화엄이론과 선수행(禪修行)의 융섭을 가장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통현의「화엄경론」에 관한 상세한 주석서인 그의「화엄절요」("화엄논서 개요")의 서문에서, 이제 지눌은 교(敎)는 부처의 말을 나타내고 선(禪)은 부처의 마음을 나타낸다는 유명한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화엄의 상입의 무애법계에 관한 경(經)의 가르침은 선명상(禪暝想)을 통해 즉시 실현된 부동지(不動智)와 보광명(보(普)광명(光明))의 빛나는 진심(眞心)과 완전히 일치한다. 믿음(信)을 일으킴(起心)과 보리심을 발함에 대한 이통현의 기본적인 관념을 깊이 숙고하면서, 지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여전히 오늘날 속인들이 어떻게 초신문(初信門)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李)장자의 화엄론석(釋)에 의지했고 … 드디어 그 논서를 안심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부처(佛)가 입으로 말한 것은 그의 가르침(敎)이고 조사들이 마음으로 직접 전한 것은 선(禪)이다. 부처의 말과 조사의 마음은 모순될 리 없다. 그러므로 선과 교 모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공통 근원처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그런 연유로 나는 신심(信心)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수행했다."
지눌 이전에, 고려왕조의 승려 의천(1055-1101)-사후 대각(大覺)으로 봉함-은 이미 선(禪)수행과 화엄 및 천태 교학 불교를 종합했다. 그러나 의천이 교학적 입장을 우선적으로 택한데 비해, 지눌은 선 명상수행(禪修行)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지눌이 교(敎)는 부처님의 말이고,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선을 우선시했다. 이 점에서 지눌의 선-교의 종합은, 화엄불교의 명상적이며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측면들을 엄격히 우선시한 원효의 통불교 또는 총체적 상입 불교의 연장이다.
지눌은 선과 교의 통합을 위한 그의 기본 도식을 중국 화엄불교인 5조인 동시에 선불교의 신회(神會) 가풍의 조사인 종밀(宗密)에게서 끌어왔다. 더욱이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즉각적 깨달음과 점진적 수행의 이론도 종밀에서부터 전유화(專有化)하였다. 이 이론은 지눌이 돈오(頓悟) 대 점수(漸修) 또는 깨달음의 본유적 개념 대 획득된 개념에 대한 선 종파에 따라다니는 주요한 교학적 논쟁을 화해시키고, 돈오가 모든 유형의 점진적 수행에 선행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지눌의 급진적이고 비정통적인 돈오점수(頓悟漸修) 이론은 크게는 "최초의 깨달음"과 "궁극적 반조" 사이의 구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기서 돈오는 자신이 원초적(원래)으로 부처와 동일하다는 믿음(信)을 일으키는 것과 더불어 자기 진심(眞心)의 보광명(普光明)에 대한 직관적인 깨달음의 즉각적 섬광이다. 돈오는 반드시 점수가 뒤따라야 하고, 곧이어 궁극적 반조 또는 최종적 지혜의 성취를 완성하는 것이다. 지눌의 화엄/선의 이론과 수행체계에 의하면, 초신(初信)의 깨달음은 사마타-위빠사나( amatha-vipa yan , 止觀) 또는 염불(淨土) 염송과 같은 여러 가지 양태의 점진적 수행을 통해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눌은 지관(止觀, 안정과 통찰)과 삼매-반야(sam dhi-praj , 寂靜과 智慧)의 전통적 선수행을 진심의 체용(體用)의 선 가풍에서 전유화했다. 의식의 체용 분석에 의하면, 진심의 본질(體)은 적정(寂靜)이고 그 역동적 작용(用)은 '내적 반조(返照))의 근원적 작용'을 의미하는 활기 있는(惺惺한) 앎(지(智))이다. 따라서 지관(止觀) 혹은 안정과 통찰, 그리고 삼매-반야 혹은 적정과 지혜 등의 점진적 수행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진심 자체의 본질(體)과 작용(用)이다. 이것은 평온과 본유적인 빛의 생래적 통합으로서 그 근원적 각성(覺醒)과 일치하여 작용한다. 그러므로 즉각적 깨달음(頓悟)은 점진적 수행(漸修)에 선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 도겐(道元, D gen)의 소또(曹洞, S t ) 선과 유사하게, 깨달음과 수행의 완전한 통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휴식하며 기뻐하는 참 법문(法門)으로서의 삼매(三昧, sam dhi) 가운데 정좌(正坐)하고 있는 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영원한 현재 또는 절대적 현재 속에서 본유적 깨달음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수행한다.
점진적 수행에 관한 학설에서, 지눌은 선명상 수행에서의 "자력"(自力)과 염불 혹은 정토(淨土) 수행에서의 "타력"(他力)을 조화시키고자 더욱 애쓰면서 아미타불(Ami bha Buddha)의 명호를 효과적으로 암송하고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를 염원함과 아울러 아미타의 무조건적 자비의 본원(本願)에 의지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의지는 오직 선명상 수행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아미타불을 부르며, 그의 이름이 염송되고 있을 때, 아미타의 무조건적 자비의 본원이 단지 본유적 깨달음이나 또는 내적 반조의 근원적 작용이라는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게 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정토 자체는 진심의 본래적인 맑음과 빛나는 광휘와 일치한다. 실로 대승불교의 동아시아 전통에는 "교의적(敎義的)으로는 화엄이고, 수행으로는 정토와 선이다"라는 유명한 슬로건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아미타의 보편적인 자비의 본원력(本願力)인 가피를 계속 믿으(信)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namo Amit bha Buddha, nomo Amit bha Buddha) …" (즉 "나는 無量光 부처님에 귀의한다")는 형식으로 불(佛) 명호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과 아울러 서방극락의 지복(至福)의 정토 한 점을 향한 명상은,「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화엄경에 원래 설해진 명상수행의 기본적 방편(up ya)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정토 염송의 타력적(他力的) 기법으로 해탈과(mok a) 삼매(무아경)를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수행해야 함과 동시에, 사사무애(事事無碍) 즉 개별현상과 개별현상의 무애한 상호융섭, 그리고 이사무애(理事無碍) 즉 보편원리와 개별현상의 걸림 없는 상호융섭에 관한 화엄, 선 그리고 정토는 자력과 타력 이론과 수행을 결합시킨 불가분의 3중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의 맥락에서 볼, 정토수행은 변형되어 "나무아미타불"의 염송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정토 명상은 자신의 맑고 빛나는 진심을 관(觀)하는 것으로 변형된다. 한편 아미타의 보편적 자비 본원(慈悲 本願)에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근원적 깨달음" 혹은 "불성의 원초적 성취"의 실현이다.그러나 화엄의 맥락에서, 정토 염송은 아미타불 즉 이(理) 혹은 보편원리가 일체중생 즉 사(事) 또는 개별현상과 완전히 상호융섭하며 똑같다는 지혜(解悟)를 가지고 수행해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토 수행자는 "내가 아미타불이다"라는 내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 이사무애의 화엄교의적 정식에 의하면, 우주 도처에 있는 일체중생들은 아미타불과 같으므로 그들은 즉각적 깨달음(頓悟)의 성취와 함께 극락정토에 즉시 다시 태어날(往生) 자격이 충분히 있다. 더구나 사사무애의 화엄정식의 재진술인 중중무진(重重無盡) 즉 경계와 경계의 무한한 포용의 화엄교의에 의하면, 아미타의 정토는 수백, 수천만의 무한히 넓은 다른 불국토들과 함께 모두 중생계에 완전히 상호융섭하고 서로 포함되어 있다. 어떠한 방해나 막힘도 전혀 없이 쉽게 접근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눌은 염불 수행이나 정토 염송을, 비록 선의 진심명상, 중중무진 및 이사무애의 화엄교의적 지혜의 맥락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정신적 어두움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실천할 것을 다시 한번 권고한다.
끝으로 사마타-위빠사나(止·觀)에 의한 "적정(寂靜)과 성성(惺惺, 깨어있음)을 함께 병행하거나" 또는 염불 암송에 의한 아미타불의 무조건적 자비 본원에 의지하는 등의 방편을 통한 점진적 수행을 강조하는 지눌의 체계는 철저한 화두선(話頭禪) 또는 간화선(看話禪, 즉 公案 暝想)에 의해 그 절정에 이른다. 대혜(大慧, Tabui)는 화두선 또는 간화선을 "직접 타파" 또는 "내적 의단"(즉 "마음이 무엇이냐?"와 같은 내적 질문을 끊임없이 반조하는데, 이것은 깨어 있거나 꿈꾸거나 깊이 잠들 때도 내내 지속해야 한다)의 길이라 생각하여 격찬하고, 지눌은 이것을 진심의 성취에 있어 모든 이원론적 지적 구조를 깨부수는 최상의 명상수행이라 간주한다. 참으로, 지눌은 화두수행 또는 "내적의단"의 수행은 수행자로 하여금 진심의 궁극적 실현을 즉시 깨닫게 하는 그 반조(返照)의 힘이 너무나 철저하고 강렬하며 심원하기에 그것은 결코 "점진적" 수행의 형식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집착을 "직접 타파하고" 중생의 "분별"세계에서 부처의 "분별 없는" 세계로 즉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눌의 즉각적 깨달음과 점진적 수행(頓悟·漸修)에 대한 화엄/선 체계
도표에서 지적한 것처럼, 믿음(信)의 개념은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즉각적 깨달음과 점진적 수행에 대한 화엄/선 체계의 핵심이다. 즉각적 깨달음 또는 최초의 통찰은(최초의) 믿음(信)의 일으킴을 말하며, 사마타-위빠사나(止觀)의 염불 같은 점진적 기법에 의해 효험을 보는 점진적 수행은 믿음(信)의 배양을 뜻한다. 이 둘은 결국 화두를 직접 타파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믿음(信)의 완성을 의미하는 궁극적 지혜에 이른다. 그러나 지눌은 믿음(信)의 개념을 그의 체계의 중심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교화적 신"(敎信)이라 일컫는 인습적이고 정통적인 그 용어의 개념과는 반대로 "조사신"(祖師信)이라 이름 붙인 급진적이고 비정통적인 믿음(信)의 개념도 채택한다.「직심직설」(直心直說) 즉 "진심을 직접 설함"이라 칭한 그의 논서에서, 지눌은 "조사파(祖師派)의 믿음과 교학파의 믿음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교학파는 인과(因果)를 믿게(信)한다…. 불과(佛果)를 즐겨하는 자는 삼겁(三劫)의 육도(六度, 공덕과 지혜)로 대인(大因)을 삼고, 한편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으로 정과(正果)삼음을 믿게(信)한다. 조사파의 정신(正信)은 이와는 아주 달라서 이 학파에선 인과(因果)를 믿(信)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본래 불(佛)이며 모든 사람이 천진(天眞)한 자성(自性)을 갖추고 열반(涅槃)의 묘체(妙體)가 모든 사람에게 원성(圓成)함을 믿을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교학신은 인/과법(因/果法) 및 그와 관련된 믿음,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를 의미하지만, 지눌이 택한 조사신(祖師信)은 인/과의 동일성 및 동시성과 더불어 그와 관련된 믿음, "나는 이미 부처다"를 나타낸다. 더구나 교학신은 믿음의 "대상" 즉 "삼보"(佛, 法, 僧)에의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에 구조에 있어 이원론적인 데 반해, 조사신은 외적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신 삼보(三寶)와 똑같은 자신의 진심(眞心) 혹은 일심(一心)을 향해 안으로 향하기 때문에 구조에 있어 완전히 비이원론적이다. 결과적으로 교학신을 특징짓는 능소(能所) 또는 "주체·대상"의 구조와는 달리, 조사신은 중국어 체용(體用) 즉 본질-작용 구성에 의해 분석된다. 여기서는 자신의 진심이 체(體) 즉 본질을 나타내고, 믿음(信)은 진심의 역동적인 용(用) 즉 작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정토염송 수행에 대한 "원돈"(圓頓) 또는 화엄·선(禪)적 이해에 있어서, 아미타의 보편적 자비 본원(本願) 안에서 배양하는 믿음은 "나는 언젠가는 아미타의 정토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 교학신이 되지 말고, 오히려 "나는 이미 아미타 정토에 다시 태어났다"고 믿는 조사신의 불퇴전의 형식을 길어야 한다.
지눌은 화엄 및 선불교에서 믿음(信)을 우위에 두고 그리고 조사신과 교학신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있다는 이 이론을, 상당히 비정통적인 중국 화엄선사 이통현으로부터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지눌은 이통현의「화엄경론」을, 화엄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심오한 설(說)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믿음의 중심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이통현과 지눌의 저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불교학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불교의 구원학적 체계에서 보면, 믿음(信)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진행하여 깨달음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체적 구제과정을 활기 있게 하는 일차적인 내적 역동으로 기능한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란 종합적 불교논서의 기본주제는, "신심을 일으키는"(起 信心) 방법과 명상 및 수행을 통해 이 믿음을 완성시켜 부정취(不定聚, aniyata r i 즉 determined class, 역자: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람의 종교적 소지를 다음과 같이 세 부류[三定聚]로 나눈다. ① 정[正]정취samyaktkva-niyata r i 항상 정진하여 결단코 성불할 부류, ② 사[邪]정취mithy tva-niyata-r i: 성불할 소질이 없어 더욱 타락하여 가는 부류, ③ 부정취: 연을 만나면 성불하고, 연이 없으면 미혹할 부류,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정정취를 부정취로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영어표기에서 그 잘못이 드러나고 있다. 무량수경下에서는 "저 佛國土 中에는 諸邪聚가 없다"라고 표명하고 있다)의 "불퇴전의 믿음(信)"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불교의 이론과 수행 및 깨달음에서 이처럼 믿음을 우위에 두는 것은 "믿음은 도(道, way)의 근원이고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다"라고 주장하는 화엄경 자체의 중요한 모습이다. 화엄경에 의하여, 보살은 부처의 묘각(妙覺)을 성취하기 전에 52단계를 정진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보살수행 경로의 첫 10단계를 "십신"(十信)이라 한다. 그러나 초신(初信) 단계인 바로 첫 단계의 실현에서조차도, 52번째 단계인 묘각이 이미 성취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 길(道)의 52단계 모두가 걸림 없이 완전하게 상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전(原典)의 마지막 장 "입법계품"(入法界品, Gadndavyaha경)에 나오는 선재(善財)의 순례에 예시되어 있다. 여기서 구도자 선재(善財)는 52스승들을 순례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승은 그에게 각기 다른 수준의 삼마디(sam dhi, 三昧)를 드러내 보이나, 마지막 스승은 역시 그의 첫 스승인 지고한 지혜의 불(佛)인 문수(文殊)였다.
화엄경의 이러한 내적 구조는 아래의 그림 형식으로 언급될 수 있다.
화엄학자들은 흔히 화엄경을 구성하는 위계적으로 등급화된 이러한 52단계들의 도식을 믿음(信), 이론, 수행, 깨달음으로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화엄의 "원돈"(圓頓)전망에 의하면, 신심(信心)을 일으키자 마자 바로 그 순간에, 깨달음은 성취한다. 따라서 보살수행 경로에서 52단계는 모두 초신(初信) 한 순간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정신(正信)을 일으켜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성취한 후 보살의 의식은 점진적으로 진전된다. 비록 삼매(三昧)의 무아경은 52단계를 거치면서 깊어지고, 드디어 완전한 불성에 다다르지만, 최초의 삼매상태는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52단계들은 모두 걸림 없이 상호융섭하지만, 여전히 각 단계는 그 자체의 경험의 강도와 증명에 필요한 그 자체의 규준을 수반한 뚜렷한 수준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52단계의 화엄도식에서는 연속적인 등급의 완전한 무애함과 완전한 상입이 있다.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즉각적 깨달음과 점진적 수행"의 체계의 화엄경의 전반적인 내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독특한 시도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첫 단계가 마지막 단계인 묘각(妙覺)과 완전히 상호융섭되어 있지만, 여전히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51단계들이 뒤따른다. 그렇지만 이통현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지눌은 믿음(信)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화엄도식의 핵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52단계의 처음이 초신(初信)의 수준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눌의 요점은 초신 단계가 돈오와 똑같아지려면, 그것은 자신이 부처와 이미 똑같다는 확고한 신념, 즉 그가 명명한 이른바 조사신(祖師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하나의 서약(commitment)에 불과한 교학신(信)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지눌의 입장을 보다 정통적인 법장의 노선과 대조시켜 봄으로써 알 수 있다.
「한국 선불교의 철학적 기초 : 지눌에 의한 선교(禪敎)의 통합」이란 연구에서, 심재룡은 화엄불교의 선불교에서 믿음(信)을 우위에 두는 이통현의 이론과, 지눌에 의한 그 전유화를 상세하게 전개시키고 있다. 그는 원전의 풍부한 인용을 통해, 이통현 장자처럼 법장도 믿음(信)이 보살수행 경로의 출발점이며, 52단계의 진행 전체를 거쳐 드디어 믿음(信)의 불퇴전의 수준인 그 길의 마지막 단계에서 실현되어, 깨달음 자체가 믿음(信)이 완성될 때까지, 보살수행과 서원(誓願)을 지속시키는 데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는 "장기간의 실천수행에 의해 불성(佛性)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信)에 대한 이통현의 개념 사이를 신중하게 구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통현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쓴다.
믿음(信), 이해(解悟), 수행, 확증의 절차를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나가면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으로 믿음(信)을 보는 일반적 해석은, 믿음이란 자기가 이미 불성(佛性)과 똑같다는 확고한 신념의 새로운 관념으로 바뀌었다. 개개인의 불성이 원래 성취되어 있다는 이러한 신념은 즉각적 깨달음(頓悟)인 선(禪) 학설의 기초가 된다.
여기서 일차적 관심이 되는 것은 위에서 방금 언급한, "개개인의 불성이 원래 성취되어 있다는 이러한 신념은 돈오(頓悟)에 대한 선(禪)학설의 기초이다"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눌이 원래 갖추어져 있는 불성에 대한 갑작스런 섬광과도 같은 통찰로 이해되는 돈오의 경험이라고 확인하게 된 것은 정확히 이 초신(初信)의 성취, 즉 내가 이미 부처와 똑같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이리하여 불성이 원래 갖춰진 사람은 진심(眞心)의 본질(體)과 작용(用)인 내적 반조(返照)의 근원적 행위를 즉시 실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즉각적 깨달음(頓悟) 혹은 초신이 반드시 점진적 수행과정보다 앞서야 한다는 지눌의 철저하고 비정통적인 주장의 근거가 되는 더 깊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자기가 이미 부처(佛)과 똑같다는 확고한 신념을 세우지 못하면, 모든 수행(修行)은 첫출발부터 근본적으로 왜곡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적 반조의 근원적 행위 혹은 적정(寂靜)과 부동지(不動智)의 내적 결합체(union)로서의 진심의 체용(體用)구조에 고유한 원래 성취되어 있는 불성을 즉각 실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시간이 계속 흐른 후에 부처가 될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종분석에서, 지눌은 화엄불교에서 믿음(信)을 우위에 둔다는 이통현 장자의 학설에 관심을 갖는데, 그 이유는 명상수행을 하는 선(禪)학파가 설한 것처럼, 믿음(信)은 돈오 또는 즉각적 반조의 성취를 위한 구원적(救援的)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지눌의 교선(敎禪)융회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심재룡은 법장의 "장기간의 실천수행(修行)을 통해 불성을 성취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서 믿음의 개념을 "세 수준의 재생(三生 成佛)을 통해 불성을 성취한다"는 그의 이론과 관련을 짓고 있다. 법장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들이 일념즉시(一念卽時)로 걸림없이 상호융섭한다는 학설을 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공덕과 지혜를 축적하면서 수많은 겁(劫) 동안 점진적 수행을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수행(修行)의 수준에서는 인습적인 연대적 시간의 구조에 묶여 있다. 이통현은 이것이 법장의 저작에 끼여든 중요한 모순이라 간주했다. 심재룡은 이장자 자신의 믿음(信)의 개념 즉 "자기가 이미 부처와 같다는 확고한 신념"을, "한 순간에 불성을 성취(찰나 成佛)한다"는 그의 학설과 관련을 짓고 있다. 따라서 자기가 원래 불성을 성취하고 있다는 확인으로서의 믿음에 대한 이장자의 개념은 근원적 깨달음과 즉각적 깨달음의 학설과 동등하며, 그것으로써 또한 모든 시간적 순간들이 일념즉시(一念卽時)로 상입한다는 화엄의 기본이론과 훨씬 더 일치한다. 법장의 체계에서 불성을 성취하는 데 요구되었던 무한히 오랜 겁(kalpas)은 이제 초신(初信)의 한 순간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심재룡은 법장을 비롯한 여타의 정통적인 화엄불교 노선과 대비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통현은 불성(佛性)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통시적인 시간의 요소를 근절했다. 시간적 구분에서 벗어나 수행자는 그 자신이 있는 그대로 부처라는 즉각적인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信)에 대한 이(李)장자의 관념과… 인습적인 시간구분의 비실재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통현과 지눌이 설한 비정통적 화엄 노선에서, 점진적 수행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깨달음을 획득해 가는 일상적인 과정은 돈오(頓悟)의 즉각적 과정으로 철저하게 변형된다. 이장자와 지눌은 둘 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 찰나로 무애 상입한다"는 화엄학설의 의미가, 불교의 선(禪)학파가 제안한 돈오의 실현과 다르지 않다고 증명한다. 이러한 돈오의 경험자체가 자신의 불성이 원래 성취해 있다는 초신을 일으킴과 다르지 않는 바, 불성의 원래 성취해 있음은 바로 진심(眞心)의 본질(體-작용(用) 모두를 구성하는 내적 반조(返照)의 근원적 작용이다.
지눌은 정통적 화엄의 기초가 되는 권위 있는 교의적 정식 즉 "조건적 출현" 또는 "의존적 상호출현"(緣起)과는 대조적으로, 이통현의 급진적이고 비정통적인 본성의 출현(性起, nature-origi-nation)설에서 중생과 부처가 원래 같다는 믿음(信)의 우월성과, 그리고 돈오(즉각적 깨달음) 등의 관련된 학설을 위한 철학적 기초를 발견했다. "본성의 출현" 즉 성기(性起)란 용어는 화엄경의 중요한 장(품, 品)의 명칭인 바, 거의 확실하게 산스크리트 용어 여래성 출현(tath gata-gotra-sambh va) 즉 '절대 진리의 현현'에서 유래했다. 심재룡은 성기 대 연기에 관한 지눌의 이해를 학문적으로 뛰어나게 개관하고 있는데, 여기에 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지눌은 연기설(緣起說)을 강조하는 정통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성기설(性起說)은 이(理, 공)와 환영같은 현상(dharma, 법)을 동일시하기 위해 어떠한 중간단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연기"설은 중생의 망상과 부처의 깨달음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 동일시와 상입이란 매개적인 개념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 "연기"의 이론은 인드라망의 수많은 보석처럼 상이한 실체들이 있다는 무언(無言)의 가정을 기초로 하지만, "성기"(性起)는 겉으로 보기에 다른 수많은 현상적 사건들이란 자기동일실체(體) 즉 마음의 근원(心地)에서 일어나는 작용(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수많은 사건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거부한다. 자신의 본성 또는 원래의 순수한 마음(淨心)에서 깨달음이 자발적으로 일어남을 확인하기 위해, 화엄의 성기설이, 불성의 성취를 자기의 본질적 성품(性品) 밖의 무엇인 것으로 생각하는 연기설보다 우위에 두어졌음에 틀림없다. 지눌이 명시하려는 것은 성기설의 실천적 잠재력(practical potency)이 연기설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론의 수준에서만 보면, 그 둘은 거의 동등하다고 해석될 수 있으나, 실천(역자: 修行)의 의미에서는 엄격히 다르다. 성기의 개념은 연기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천과 이론을 융섭시킬 수 있다.
따라서 성기의 개념은 연기를 훨씬 더 철저하게 변형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눌은, 연기가 많은 현상들(事) 혹은 역동적 작용(用)의 전망에서 실재를 명시하는 데 반해, 성기는 원리(理) 또는 보편적 본질(體)으 전망에서 실재를 명시한다고 강조한다. 여기는 현상(事)과 원리(理)를 동일시하기 위해 상입과 상호융섭이라는 매개적인 지적(知的) 구조를 필요로 하지만, 보다 철저한 성기설은 현상의 비생성 혹은 무생(비발생)을 강조하고 매개적인 개념적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통현을 따라서 지눌은 성기가 연기보다 교리적으로 우수함을 논증한다. 그 이유는 성기의 입장은 실천(수행)의 수준에서 즉각적 깨달음(頓悟)의 이론을 의미하고, 반면 연기는 점진적 수행의 학설을 의미하는 바, 통일성과 다양성 그리고 이(理)과 사(事, 현상) 사이의 변증법적 대립들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 극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장과 권위 있는 조사들이 주장한 화엄의 보다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노선과 지눌의 비정통적 노선과의 구분은 아래와 같이 개략적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이통현과 지눌이 격찬한 성기설(性起說)은 상입 대 누적적 진입의 문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기는 연기의 보다 엄격한 파생물이기 때문에, 만약 인과관계설 또는 상호 인과관계설로서만 간주된다면,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비판의 입장에서 분석될 때는 분명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선행자 이통현과 종밀처럼, 지눌의 일차적 관심은 본질적으로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엄불교의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 강조를 두는 구원론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기의 개념은 비본유적 현상들이 어떻게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작용하는 체계적인 상호 인과관계 학설로 나아가지 않고, 근원적 깨달음과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실천적 학설을 지향한다. 심재룡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눌에 의하면, 성기의 이론은 현상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기설의 추진력은 영적(靈的) 해방을 위한 구원론적 관심에 그 실천적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적 순간들을 상입시키는 화엄의 전체 구조와 보살수행경로의 52단계를 성기의 구조 내에 초신(初信) 한 순간으로 환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즉시 실현하려는 적절한 방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화엄불교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과정 비판은, 특히 현상의 발생을 상호의존과 상호 인과관계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연기(pratityasa-mutp da)의 학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통현과 지눌이 강조한 성기의 학설은 원칙적으로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불붙이는 적절한 방편(up ya)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결코 화이트헤드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눌의 "비정통적인" 화엄/선의 노선
1. 자신이 이미 부처(佛)와 같다는 확고한 신념으로서의 "믿음(信)"
2. 중생이 부처(佛)와 동일함을 강조
3. 초신(初信)의 한순간에 불성(佛性)이 성취됨(頓悟 혹은 즉각적 깨달음)
4. 본성의 출현(性起)
5. 구원의 실천적 수준에서 근원적 깨달음과 즉각적 깨달음(頓悟)을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방편으로서
시간적 순간들을 상입하는 학설
정통적인 화엄의 입장
1. 점진적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될 것이라는 "믿음(信)"
2. 상입과 무애(無碍)의 이론적 구조를 강조
3. 3겁을 다시 태어남으로써 불성을 성취함(점진적 깨달음)
4. 실재의 궁극적 구조에 관한 절대화된 설명으로서 시간적 순간들을 상입하는 학설
스티브 오딘저 -안형관 역- 이문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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