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남종선의 돈오사상 전개

수선님 2022. 6. 5. 12:45

南宗禪の頓悟思想の展開(남종선の돈오사상の전개)   -荷澤神會から洪州宗へ-
石井修道   一指 譯   번역·384/논평·427/답변·431

 

목     차          | (1/3) | (2/3) | (3/3) |     - 荷澤 神會에서 洪州宗(홍주종)으로 -
   1. 머리말-南宗禪(남종선)의 성립과 荷澤 神會(하택신회)     2. 荷澤 神會의 頓悟思想(돈오사상)
       2-(A)[壇語(단어)]   (B)定是比論(정시비론)   (c)新會語錄(신회어록) ◀ 첫 페이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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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洪州宗(홍주종)의 頓悟思想-宗密(종밀)은 왜 荷澤宗을 주장했는가? ◁ (2/3) 
   4. 맺음말-宗密의 頓悟漸修(점수) 頓悟頓修(돈수) 분류의 문제점 ◁ 다음 페이지 (3/3) 
   ○ 南宗禪(남종선)の頓悟思想(돈오사상)の展開(전개)에 대한 논평     ○ 논평에 대한 답변

 

 

1. 머리말-南宗禪의 성립과 荷澤 神會

 

禪宗(선종)의 開祖(개조)라 하면 누구나 菩提達摩(보리달마)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선종교단이 계승하고 있는 菩提達磨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편의상 구별하여 歷史上의 인물을 '達摩'라 쓰고, 선종교단의 요청에 의해 성립된 개조를 '達磨'라 칭하고 있다.
 
'達磨'의 등장은 荷澤 神會(하택신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南宗禪(남종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禪宗開祖(선종개조)인 '達摩'와 '達磨'의 관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南山 道宣(남산도선; 569~667)이 貞觀19년(정관; 645)에 續高僧傳(속고승전)의 [菩提達摩(보리달마장)]을 쓸 때, 두 가지 자료에 근거하였다.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과 曇林(담림)이 쓴 그 서문, 그리고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이다.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는 楊衒之(양현지)가 武定5년(무정; 547)에 편집했으므로 더 오래 전에 성립된 것이고, 거기에 菩提達摩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菩提達摩가 '二入四行'을 설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전혀 명확치 않아서, 어쩌면 洛陽伽藍記(낙양가람기)의 菩提達摩와 禪宗의 開祖라고 전해지는 菩提達磨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 둘을 同一人이라고 본 사람은 道宣(도선)이다. 그는 '二入四行'을 설한 菩提達摩와 그의 제자 慧可(혜가), 僧粲(승찬)을 楞伽經(능가경) 연구자라 하고,
새롭게 대두되었던 ○州 雙峰山(쌍봉산) 道信(도신; 580~651)과 그의 제자 弘忍(홍인) 계통의 동향이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道信傳(도신전)]을 補筆(보필)하였지만, 그 두 계통을 연속되는 하나의 법계로 결부시키지는 않았다.
 
北宗系의 燈史(등사)에서 713년 경에 성립된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가 續高僧傳(속고승전)의 法沖傳(법충전)을 기초로 하여 菩提達摩-慧可-僧粲(보리달마-혜가-승찬)계통과 道信-弘忍-神會로 이어지는 北宗禪 계통을 결부시키게 된 것은, 자료 자체가 서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續高僧傳(속고승전)에는 없는 새로운 전개이다.
 
또다른 北宗禪 계통에 속하는 傳法寶記(전법보기)도 계통의 문제에 관하여는, 續高僧傳에 없는 僧粲(승찬)과 道信(도신)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다. 그 주장은 洛陽(낙양)이나 長安(장안)에서 활약한 神秀(신수)와 그 문하가 인정되므로써
 
한층 達摩의 法系(법계)가 정착되어, 楞伽師資記(능가사자기)에서는 '二入四行'을 達摩의 설로서 인정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神秀(신수)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선은 荷澤 神會의 공격으로 결국 멸망하였고, 達摩의 '二入四行說'도 무시되었는지, 중요시되는 일이 없었다.
 
南宗禪의 達磨는 北宗禪을 비판하는 가운데 등장하고, 선종교단은 이것을 계승하고 있다. 開元 20년(732)에 저술된 神會의 북종선 공격 기록인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서 獨孤沛(독고패)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卽我襄陽神會和上 悟無生法忍 得無碍智 說上乘法 誘諸衆生 敎道衆生 敎道廻向者 若百川赴海 於開元二十年 正月十悟日 在滑台大雲寺 設無遮大會廣資嚴飾 昇師子坐 爲天下學道者說 梁朝婆羅門僧(字)菩提達摩是南天竺國國王第三子 少小出家 智惠甚深 於諸三昧 獲如來禪 遂乘斯法 遠涉波湖至於梁武帝 武帝問法師曰 "朕造寺度人 造像寫經 有何功德不" 達摩答 "無功德" 武帝凡情不了 達摩此言 遂被遺出[達摩]行至魏朝 便遇惠可 [惠可]時年四十 俗姓姬 武牢人也 遂與菩提達摩相隨至嵩山少林寺 達摩說不思[議]法惠可在堂前立 其夜雪下至惠可腰 惠可立不移處 達摩語惠可日 "汝爲何此間立" 惠可涕淚悲泣曰 "和上從西方遠來至此 意[欲]
즉아양양신회화상 오무생법인 득무애지 설상승법 유제중생 교도중생 교도회향자 약백천부해 어개원이십년 정월십오일 재골태대운사 설무차대회광자엄식 승사자좌 위천하학도자설 양조파라문승(자)보리달마시남천축국국왕제삼자 소소출가 지혜심심 어제삼매 획여래선 수승사법 원섭파호지어양무제 무제문법사왈 "짐조사도인 조상사경 유하공덕불" 달마답 "무공덕" 무제범정불료 달마차언 수피유출[달마]행지위조 편우혜가 [혜가]시년사십 속성희 무뢰인야 수여보리달마상수지숭산소림사 달마설불사[의]법혜가재당전립 기야설하지혜가요 혜가립불이처 달마어혜가일 "여위하차간립" 혜가체루비읍왈 "화상종서방원래지차 의[욕]
 
說法度人 惠可今不憚損軀志九勝法 唯願和上大慈大悲" 達摩語惠可曰 "我見求法之人 咸不如此" 惠可遂取刀自斷左臂 置達摩前 達摩見之[日]"汝可在" 先字神光 因此立名 遂稱惠可 [惠可]深信堅固 棄命損身 志求勝法 喩若雪山童子捨身命以求半偈 達摩遂開佛知見 以爲密契 便傳一領袈裟 以爲法信 授與惠可 惠可傳僧璨 璨傳道信 道信傳弘忍 弘忍傳惠能 六代相承 連線不絶[胡適校訂 [神會和尙遺集] 261~262頁, 胡適記念館. 以下, 胡適本と略稱す]
설법도인 혜가금불탄손구지구승법 유원화상대자대비" 달마어혜가왈 "아견구법지인 함불여차" 혜가수취도자단좌비 치달마전 달마견지[일]"여가재" 선자신광 인차립명 수칭혜가 [혜가]심신견고 기명손신 지구승법 유약설산동자사신명이구반게 달마수개불지견 이위밀계 편전일령가사 이위법신 수여혜가 혜가전승찬 찬전도신 도신전홍인 홍인전혜능 육대상승 연선불절[호적교정 신회화상유집 261~262혈, 호적기념관. 이하, 호적본と약칭す]
 
여기서 말해지는 선종개조 達磨(달마)와 慧可(혜가)의 이야기는 현대 선종교단이 전승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神會(신회)가 주장하는 이 8세기 達磨는, 실은 北宗禪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禪宗史上 [達磨傳(달마전)]에 梁武帝(양무제)가 등장한 것은 이 신회의 설이 처음이므로 선종교단에서 창작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왜 武帝가 새로 등장했는가? 그의 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작자 신회로서는 歷史上의 梁武帝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神會가 등장시킨 武帝라는 인물은 則天武后(칙천무후), 中宗(중종), 叡宗(예종) 등의 권위를 암시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신회의 목적은 이들의 권위에 의해서 지탱되던 북종선을 부정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 목적은 결과적으로 훌륭하게 성취되었고, 선종개조에 대한 이야기로서 후대에 길이 전승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이야기는 南宗禪에 내려오는 대표적 저술 돈황본(敦煌本) 六祖壇經(육조단경)에 다음과 같이 영향을 주고 있다.
 
使君禮拜自言 "和尙說法 實不思議 弟子當有少疑 欲問和尙 望和尙 大慈大悲 爲弟子說" 大師言 "有疑卽問 何須再三 使君問 (和尙所說)法 可不是西國第一祖達磨祖師宗旨" 大師言 "是" (使君問) "弟子見說 達磨大師化梁武帝(帝)問達磨 '朕一生已來 造寺布施供養 有功德否' 達磨答言 '병無功德' 武帝추장 遂遣達磨出境 未審此言 請和尙說" 六祖言 "實無功德 使君 勿疑達磨大師言 武帝著邪道 不識正法 (拙稿 惠昕本 [六祖壇經]の硏究(續) 83~84頁, [駒澤大學佛敎學部論集] 第12號, 1981年)"
사군예배자언 "화상설법 실불사의 제자당유소의 욕문화상 망화상 대자대비 위제자설" 대사언 "유의즉문 하수재삼 사군문 (화상소설)법 가불시서국제일조달마조사종지" 대사언 "시" (사군문) "제자견설 달마대사화양무제(제)문달마 '짐일생이래 조사포시공양 유공덕부' 달마답언 '병무공덕' 무제추장 수견달마출경 미심차언 청화상설" 육조언 "실무공덕 사군 물의달마대사언 무제저사도 불식정법 [졸고 혜흔본 육조단경の연구(속) 83~84혈, 구택대학불교학부논집 第12號, 1981年]"
 
이 이야기는 다시 碧岩錄(벽암록) 第一則의 本則(본칙)으로서 특히 유명해지지만 達摩가 대답한 '無功德(무공덕)'의 문답보다 '廓然無聖(곽연무상)'이나 '不識(불식)'의 문답으로 전승되어 가고 있다.
 
擧 梁武帝問達磨大師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帝日 "對朕者誰" 磨云 "不識" 帝不契 達磨遂渡江至魏(岩波文庫, [碧岩錄(上)]36項, 1992年)
거 양무제문달마대사 "여하시성체제일의" 마운 "곽연무성" 제일 "대짐자수" 마운 "불식" 제불계 달마수도강지위[암파문고, 벽암록(上)36項, 1992年]
 
이러한 변화는, 南宗禪(남종선)이 확립되고 나서는 神會에 의해 창작된 北宗禪 공격의도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런 의도 역시 사라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禪宗史에서 그러한 변화의 예가 있어 왔다 해도 達磨傳(달마전)에 梁武帝(양무제)를 등장시킨 것은 神會이므로, 요즘 연구에서는 처음 말했던 바와 같이, 편의상 '達摩'와 '達磨'를 구별해서 쓰고 있다.
 
다시 말해, 楞伽經(능가경) 연구자와 北宗系에 전하는 선종개조를 達摩라 칭하는 데 비해 南宗禪의 개조를 達磨라고 구별하는 것은 新역의 영향에 의해 다르마(dharma)라는 말의 번역이 '達磨'라는 글자로 통일된 데도 있지만 개조(開祖) 그 자체가 시사하는 내용도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神會가 지은 菩提達摩남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이라는 저술의 題目으로 살펴보면, 普寂(보적)이 칭한 '南宗'은 잘못된 명칭아고, 神會가 칭한 것만이 菩提達摩가 전한 남宗의 정통이라고 못 박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荷澤 神會(하택신회)는 결과적으로 開祖 達磨의 새로운 등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된다. 돈황에서 발견된 선적(禪積) 중, 神會에 관한 자료는 중국선이 北宗에서 남宗으로 어떻게 변해갔는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오랫동안 신회에 관해 연구해 온 胡適(호적; 1891~1962)氏는 연구성과를 되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中國佛敎史上最成功的革命者 印度禪的毁滅者 中國禪的建立者 袈裟傳法的僞史的製造者 西天二十八祖僞史的最早製造者 六祖壇經的最早原料的作者 用가造歷史來做革命武器而有最大成功者 這是我們的神會(胡適本, 425頁)
중국불교사상최성공적혁명자 인도선적훼멸자 중국선적건립자 가사전법적위사적제조자 서천이십팔조위사적최조제조자 육조단경적최조원료적작자 용가조력사래주혁명무기이유최대성공자 저시아문적신회(호적본, 425頁)
 
裴休拾遺問(배휴습유문)은, 신회가 북종선을 비판하면서 썼던 두 마디 '師承是傍(사승시방), 法門是漸(법문시점)'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神會가 성취한 역할을 이처럼 잘 드러낸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신회사상의 성립과정에 관한 우수한 연구가 나왔다. 특히 伊吹敦(이취돈)씨와 松本史朗(송본사랑)씨 두 사람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伊吹敦(이취돈)씨의 頓悟眞宗金剛般若修行達彼岸法門要決과 荷澤神會(돈오진종금강반야수행달피안법문요결과 하택신회)라는 논문이다. 그의 설에 의하면, 후에 智達(지달)이라는 법호를 가진 북종계 侯莫陳居士(후막진거사; 속명은 琰之(염지), 또는 琰이라고도 함)의 돈오설이 신회의 돈오설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돈황본 侯莫陳琰之居士撰(후막진염지거사찬) 頓悟眞宗金剛般若修行達彼岸法門要決(돈오진종금강반야수행달피안법문요결)과 돈황본 李慧光居士撰(이혜광거사찬) 大乘開心顯性頓悟眞宗論(대승개심현성돈오진종론)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저술이다.
 
이 두 저술의 관계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은 柳田聖山(유전성산)씨다. 그 후 유전(柳田)씨는 [北宗禪의 思想]을 발표하고, 전자의 [要決(요결)]이 후자 [眞宗論(진종론)]의 영향을 받아서 성립되었다고 추측한 것이다.
 
이 설은 田中良昭씨도 계승하고 있다. 이취(伊吹)씨는 기본 자료인 [侯莫陳大師壽塔銘(후막진대사수탑명)]에서 후막진염찌거사의 전기를 확정하고 顯慶 5년(현경;660)부터 開元 2년(714)까지를 생몰년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요결]에 있는 체州刺史 劉無得(체주자사 유무득)이 선천(先天) 원년(712) 11월 5일에 쓴 서문의 기록을 인정하여 그 년월에 의문을 가졌던 종래의 설과는 달리, 그 해야말로 [요결]이 성립된 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해는 6조 慧能이 입적하기 전 해이자 당시 神會의 나이 30세였던 때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신회가 開元 18년(730) 滑台 大雲寺(골태 대운사)에서 北宗禪을 공격하기 전의 일이다. 神會가 頓悟(돈오)를 강조한 것은 北宗禪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伊吹(이취)씨의 설에 의하면 侯莫陳琰之 居士(후막진염지 거사)가 이미 頓悟를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신회의 돈오사상은 북종선의 영향 아래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神會說의 많은 근거가 이미 北宗禪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히 신회의 설이 북종선의 주장을 이용하면서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伊吹(이취)씨의 설은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단 侯莫陳琰之(후막진염지) 거사의 북종선을 북종선 중 어떠한 위치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要決(요결)의 지은이를 일단 후막진염지 거사라고 하였지만 이 사람에게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요결]은 侯莫陳琰之居士가 智達禪師(지달선사)에게 질문하여 그 답을 기록한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다. 같은 관계에 있는 眞宗論(진종론)이 李慧光(이혜광)과 大照禪師(대조선사)의 문답을 취하는 형식과 동일하다.
 
그러나 [후막진대사수탑명]이나 [요결]의 서문에서 알려진 侯莫陳居士는 俗名이 琰之(염지), 또는 琰(염)이며 法名은 智達(지달)일 전하고 있어 묻는 자와 답하는 자가 같은 인물로 되어 있다.
 
眞宗論에서 李慧光의 法名이 大照(대조)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伊吹(이취)씨는 [후막진대사수탑명]의 原刻(원각) 탁본이 존재하므로 내용에 신뢰성이 있다고 하지만 초기 선종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탑명의 기사내용은 흔히 의뢰자의 형편에 맞게 서술된 것이어서 이 점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과 같이 남는 과제도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松本史朗(송본사랑)씨의 [金剛經解義와 神會]라는 논문이다. 松本씨는 이 논문에서 [금강경해의]가 六祖 慧能의 眞撰(진찬)이라는 획기적인 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제까지 [금강경해의]가 혜능의 眞撰이라는 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많은 연구자들의 찬동을 얻지는 못했었다.
 
松本씨의 설은 그런 의미에서 참신한 문제제기다. 우선 神會의 저술 중에 확실한 금강경해의에 영향을 받아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금강경해의가 신회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금강경해의와 敦煌本(돈황본) 六祖壇經(육조단경)과의 관계도 자세히 검토하고, 돈황본 [육조단경]의 사상이 [금강경해의]를 알고서 창작했다고 한다.
 
단 松本씨의 설에서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다. 앞서 말했듯, 神會가 저작하기 이전에 금강경해의가 존재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松本(송본)씨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설이라고 필자도 생각하지만 그것을 慧能(혜능)의 眞撰(진찬)으로 직접 연관시켜도 좋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신회 이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신회가 혜능에게 師事(사사)한 이래 혜능이 직접 지은 [금강경해의]를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지 어떨지는 의문이다.
 
요컨대 신회 자신에게 사상의 변화가 있었고, 애초부터 신회는 금강경해의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신회가 [금강경]을 선양한 것이 그의 말년이나 사후라고 생각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혜능에게 [금강경해의]라는 저술이 있다는 것을 신회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의 북종선 공격은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神會가 王維(왕유)에게 의뢰하여 만든 六祖能禪師碑銘(육조눙선사비명)에 그 일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혜능의 전기에 관해서는 石井本(석정본) [神會語錄(신회어록)]을 비롯하여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 曹溪大師傳(조계대사전) 돈황본 [六祖壇經] 등에 [금강경해의]라는 저술이 있었다고 표현한 데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알려진 혜능의 전기도 후세의 요청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유독 [금강경해의]만을 혜능 당사자와 직접 결부시킨다는 것은 앞으로 검토할 과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금강경해의가 神會 이전에 성립되었다는 松本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높히 평가하지만 그것이 혜능의 眞撰(진찬)인지 아닌지는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神會思想의 성립과정은 크게 재검토를 필요로 하지만 胡適(호적)이 지적한대로 禪思想史(선사상사)의 흐름에 神會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다 알려진대로 荷澤 神會의 法系는 裴休拾遺問(배휴습유문)을 설한 圭峰 宗密(규봉종밀: 780-841)의 시대에서 최후를 맞고 후에 발전하는 선종을 짊어질 수 없게 된다. 南宗禪은 北宗禪에 비해 우월을 주정하고 北宗禪은 傍系(방계)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편치않은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후는 오히려 南宗禪 가운데서 어느 것이 정통인가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되는 것이다. 남종선이 성립된 후에는 神會의 思想이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神會가 北宗禪을 어떻게 공격했는가에 대해서는 禪宗敎壇(선종교단)에서는 문제삼지 않게 되었다. 발전 전개된 남종선은 북종선 멸망의 결과로부터 재출발했지만 그 경과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2. 荷澤 神會의 頓悟思想(하택 신회의 돈오사상)
 
荷澤 神會의 저술은 돈황에서 발견된 많은 禪續(선속)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관심을 끌고 연구되어 온 분야일 것이다. 神會의 傳記에 대한 연구도,
 
그의 塔銘(탑명)이 새로 발견 소개되면서 宗密 圓覺經大疏抄(원각경대소초)의 기술과 일치되는 嗣聖(사성) 원년(684)부터 乾元(건원) 원년(758)을 생몰년으로 보고, 그 타당성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최근 小川隆(소천륭)씨는 荷澤 神會의 傳記와 思想을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종래의 성과를 넘어서 南宗禪에 있어서 頓悟思想의 전개를 검토하는 데 필요한 神會의 頓悟思想을 정리해 두기로 한다.
 
신회는 開元 20년(732) 정월 15일에 滑臺(河南省 滑臺;하남성 골대) 大雲寺에서 열린 無遮大會(무차대회)에서 北宗禪을 공격했다.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 獨孤沛(독고패)의 序(서)에 의하면,
 
그 공격은 2년 전인 開元 18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 본문이 남긴 것만으로 본다면 개원 20년이라는 기록만 전해진다. 개원 20년 神會는 49세였고, 최대의 공격상대였던 普寂(보적)은 82세였다.
 
普寂의 당시 세력으로 보아 이 공격은 타격이 되지 못했고 보적 측 또한 그것을 무시한 듯하다. 개원 27년 보적은 89세로 興唐寺(흥당사)에서 입적하였다. 그후 神會가 兵部 侍郞 宋鼎(병부시랑송정)의 부름에 응해서 洛陽(낙양)의 荷澤寺(하택사)에 주지하게 된 것은 天寶 4년(천보;745) 62세 때의 일이다.
 
신회는 북종선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남종선은 慧能이 顯彰(현창)했으며 그 七祖는 자신이라고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가 70세 되던 天寶 12년 御史 廬奕(어사 여혁)의 讒言(참언)으로 河南省 陽郡(하남성 양군)에 유배된 것은 북종선 공격이 과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배지는 湖南省 均縣(호남성 균현)에서 天寶 13년 襄州(양주)로 옮겨지고, 같은 해 7월에는 荊州 開元寺(형주 개원사)로 옮겨진다. 이처럼 유배지가 4번씩이나 옮겨진 데에는, 圓覺經略疏抄(원각경략소초) 권4와 圓覺經大疏抄(원각경대소초)에 의하면, 모두 북종문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신회가 아무리 북종선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하더라도 당시까지 아직 그의 주장이 완전히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유배라는 조치를 받았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玄宗(현종) 황제 天寶 14년에는 친지를 발칵 뒤집을 만한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그 유명한 安史(안사)의 亂(난)으로서 이 사건으로 현종의 총애를 받던 楊貴妃(양귀비)가 살해되고 현종은 蜀(촉)으로, 황태자는 朔方(삭방)으로 蒙塵(몽진)을 하게 된다.
 
신회는 安史의 亂을 평정하기 위한 비용으로 香水錢(향수전: 出家를 허가해주고 받는 돈)을 모아다가 바친다. 얼마 안 있어 난이 끝나자 그 공이 인정되어 궁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한편 전란에 의해 북종선의 근거지가 파괴되고 비호하던 사람들도 많이 죽어 북종선은 급속히 무너졌다. 神會는 7祖의 지위를 얻고 乾元(건원) 元年(758) 5월 13일 荊州(형주) 開元寺(개원사)에서 입적하여 洛陽(낙양) 寶應寺(보응사)에 장사지내졌다.
 
神會의 頓悟思想은 북종선 비판을 통해 완성되어 갔지만, 우선 신회의 저술 중에 돈오사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南陽和尙頓敎解脫宗禪門直了性壇語(남양화상돈교해탈종선문직료성단어)와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의 전후관계는, 전자의 [壇語(단어)]가 먼저 성립되고 후자의 定是非論(정시비론)이 뒤에 성립되었다는 설에 연구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후자는 앞서 말했듯이 開元 20년에 행해진 북종선 공격에 대한 기록이다.
 
전자는 제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회가 그 이전인 개원 8년(720) 南陽 龍興寺(용흥사)에 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神會語錄은 계통적으로 늘려지고 발전되어 왔다.
 
南陽和尙問答雜微義(남양화상문답잡미의) (s.6557), 胡適訂本 神會語錄 (p.3047)이나 石井光雄舊藏頓煌出土神會錄(석정광웅구장돈황출토신회록)의 성립과정은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점도 있어서,
 
石井本 [신회어록]에는 신회 사후에 내용이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신회어록의 초기작이 원래 南陽和尙問答雜徵義라고 말해지는 것은 신회의 남양시대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신회의 돈오사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를 (A){壇語(단어)}와 (B)定是比論(정시비론)과 (c)石井本(석정본) 新會語錄(신회어록)에서 하나씩 뽑아보기로 한다.
 
(A) 壇語(단어)
知識 自身中有佛性 未能了了見 何以故 喩如此處各各思量家中住宅 衣服臥具 及一切等物 具知有 更不生疑 此名爲知 不名爲見 若行到宅中 見如上所說之物 卽名爲見 不名爲知 今所覺者 具依他說知身中ㅇ有佛性 未能了了見但不作意 心無有起 是眞無念 畢竟見不離知 知不離見 一切衆生本來無相 今言相者 병是妄心 心若無相 卽是佛心 若作心不起 是識定 亦名法見 心自性定 馬鳴云 "若有衆生觀無念者 卽爲佛智故" 今所說般若波羅蜜 從生滅門 頓入眞如門 更無前照後照遠看近看 都無此心 乃至七地以前菩薩 都總慕過 唯指佛心 卽心是佛 經云 "當如法說" 口說菩薩 心無住處 口說涅槃 心說寂滅口說解脫 心無繫縛 "向來指知識無住心知不知" 答 "知"(胡適本 246~247頁, 鈴木本29~31, 313~314頁)
지식 자신중유불성 미능료료견 하이고 유여차처각각사량가중주택 의복와구 급일체등물 구지유 갱불생의 차명위지 불명위견 약행도택중 견여상소설지물 즉명위견 불명위지 금소각자 구의타설지신중ㅇ유불성 미능료료견단불작의 심무유기 시진무념 필경견불리지 지불이견 일체중생본래무상 금언상자 병시망심 심약무상 즉시불심 약작심불기 시식정 역명법견 심자성정 마명운 "약유중생관무념자 즉위불지고" 금소설반야파라밀 종생멸문 돈입진여문 갱무전조후조원간근간 도무차심 내지칠지이전보살 도총모과 유지불심 즉심시불 경운 "당여법설" 구설보살 심무주처 구설열반 심설적멸구설해탈 심무계박 "향래지지식무주심지불지" 답 "지"(호적본 246~247頁, 영목본29~31, 313~314頁)
 
(B) 定是非論(정시비론)
遠法師問 "如此敎門(引用者注, 北宗禪をさす) 豈非是佛法 何故不許" 和上答 "皆爲頓漸不同 所以不許 我六代大師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 夫學道者須頓見佛性 漸修因緣 不離是生 而得解脫 臂如母頓生子 與乳 漸漸養育 其子知惠自然增長 頓悟見佛性者 亦復如是 知惠自然漸漸增長所以不許"(胡適本 286頁)
원법사문 "여차교문(인용자주, 북종선をさす) 기비시불법 하고불허" 화상답 "개위돈점불동 소이불허 아육대대사일일개언 단도직입 직료견성 불언계점 부학도자수돈견불성 점수인연 불리시생 이득해탈 비여모돈생자 여유 점점양육 기자지혜자연증장 돈오견불성자 역복여시 지혜자연점점증장소이불허"(호적본 286頁)
 
(C) 神會語錄(신회어록)
志德法師問 "禪師今敎衆生 唯令頓悟 何故不從小乘而引漸修 未有昇九層之台 何由階漸而登者也" 答日 "只恐畏所登者 不是九層之台 恐畏漫登著土胡塚 若是實力層之台此卽頓悟義也 今於頓中而立其漸者 卽如登九層之台也要籍階漸 終不向頓中而立漸義 事須理智兼釋 謂之頓悟 병不由階漸 自然是頓悟義 自心從本己來空寂者 是頓悟 卽心無所得者爲頓悟 卽心是道爲頓悟卽心無所住爲頓悟 存法悟心 心無所得 是頓悟 知一切法是一切法 爲頓悟 聞說空不著空我 卽不取不空 是頓悟 聞說我不著 卽不取無我 是頓悟 不捨生死而入涅槃 是頓悟 又有經云 '言自然智 無師智' 於理發者向道疾 外修者向道遲 出世而有不思議事 聞說者卽生驚疑 今見在世不思議事有頓者 信否" 問日 "其義云何 願示其要"
지덕법사문 "선사금교중생 유령돈오 하고불종소승이인점수 미유승구층지태 하유계점이등자야" 답일 "지공외소등자 불시구층지태 공외만등저토호총 약시실력층지태차즉돈오의야 금어돈중이입기점자 즉여등구층지태야요적계점 종불향돈중이립점의 사수리지겸석 위지돈오 병불유계점 자연시돈오의 자심종본기래공적자 시돈오 즉심무소득자위돈오 즉심시도위돈오즉심무소주위돈오 존법오심 심무소득 시돈오 지일체법시일체법 위돈오 문설공불저공아 즉불취불공 시돈오 문설아불저 즉불취무아 시돈오 불사생사이입열반 시돈오 우유경운 '언자연지 무사지' 어리발자향도질 외수자향도지 출세이유불사의사 문설자즉생경의 금견재세불사의사유돈자 신부" 문일 "기의운하 원시기요"
 
答曰 "如周太公·殷傳說 皆竿釣板築 而簡在帝心起自匹夫 爲頓登台輔 豈不是世間不思議事 出世不思議者衆生心中 具足貪愛無明宛然者 但遇眞正善知識 一念相應 便成正覺 豈不是出世不可思議事又經云 '衆生見性成佛道' '龍安須臾頓發菩提心, 便成正覺' 又 '令衆生入佛知見' 若不許頓悟者 如來卽合편說五乘 今旣不說五乘 唯言衆生入佛知見 約斯經義 只顯頓門 唯在一念相應 實更不由階漸 相應義者 謂見無念 見無念者謂了自性 了自性者謂無所得 以其無所得 卽如來禪 維摩詰言 '如自觀身實相者 觀佛亦然' 我觀如來 前際不來 後際不去 今則無住 以無住故 卽如來禪又經云
답왈 "여주태공·은전설 개간조판축 이간재제심기자필부 위돈등태보 기불시세간불사의사 출세불사의자중생심중 구족탐애무명완연자 단우진정선지식 일념상응 편성정각 기불시출세불가사의사우경운 '중생견성성불도' '용안수유돈발보제심, 편성정각' 우 '영중생입불지견' 약불허돈오자 여래즉합편설오승 금기불설오승 유언중생입불지견 약사경의 지현돈문 유재일념상응 실갱불유계점 상응의자 위견무념 견무념자위료자성 요자성자위무소득 이기무소득 즉여래선 유마힐언 '여자관신실상자 관불역연' 아관여래 전제불래 후제불거 금칙무주 이무주고 즉여래선우경운
 
'一切衆生本來涅槃 無漏性智 本自具足' 欲擬善分別自心現與理相應者 離五法三自性 離八識二無我 離內見外見 離有無二法 畢竟平等 湛然常寂廣大無邊 常恒不變 何以故 本自性淸淨 體不可得故 如是見者 卽見本性 若人見本性 卽坐如來地 如是[見]者 離一切諸相 是名諸佛 如是見者恒沙妄念一時俱寂 如是見者恒沙淸淨功德一時等備 如是見者 名爲無漏智 如是見者名一字法門 如是見字六度圓滿 如是見者名法眼淨 如是見者 謂無所得 無所得者卽是眞解脫 眞解脫者卽同如來 知見廣大深遠 一無差別故 如是知者 卽是如來應供正遍智 如是見者 放大智慧光 照無余世界 所以者何 世界卽心也言心應[洪]正遍知 此者正言心空寂坑無余念 故言照無余世界
'일체중생본래열반 무루성지 본자구족' 욕의선분별자심현여리상응자 이오법삼자성 이팔식이무아 이내견외견 이유무이법 필경평등 담연상적광대무변 상항불변 하이고 본자성청정 체불가득고 여시견자 즉견본성 약인견본성 즉좌여래지 여시[견]자 이일체제상 시명제불 여시견자항사망념일시구적 여시견자항사청정공덕일시등비 여시견자 명위무루지 여시견자명일자법문 여시견자육도원만 여시견자명법안정 여시견자 위무소득 무소득자즉시진해탈 진해탈자즉동여래 지견광대심원 일무차별고 여시지자 즉시여래응공정편지 여시견자 방대지혜광 조무여세계 소이자하 세계즉심야언심응[홍]정편지 차자정언심공적갱무여념 고언조무여세계
 
諸學道者 心無靑黃赤白黑 亦無出入去來遠近前後 亦無作意 亦無不作意 若得如是者 名爲相應也 若有出定入定及一切境界 非論善惡等皆不離妄心 병有所得 以有所得 병是有爲 全不相應 若其決心證者 臨於三軍際 白刀相向下 逢丸解身日見無念 堅如金剛 毫微不動 縱使恒沙衆生一時俱滅 亦不起一念悲心者 此是大丈夫 得空平等心 若有坐者 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澄者 此是障菩提 未與菩提相應 何由可得解脫 解脫菩提若如是 舍利弗宴坐林間 不應被維摩詰訶 訶者云 '不於三界現身意 是爲宴坐也' 但一切時中見無念 不見身相 名爲正定 不見心相 名爲正慧(鈴木本21, 261~265頁, 胡適本30, 130~134頁)"
제학도자 심무청황적백흑 역무출입거래원근전후 역무작의 역무불작의 약득여시자 명위상응야 약유출정입정급일체경계 비론선악등개불리망심 병유소득 이유소득 병시유위 전불상응 약기결심증자 임어삼군제 백도상향하 봉환해신일견무념 견여금강 호미불동 종사항사중생일시구멸 역불기일념비심자 차시대장부 득공평등심 약유좌자 응심입정 주심간정 기심외조 섭심내징자 차시장보제 미여보제상응 하유가득해탈 해탈보제약여시 사리불연좌림간 불응피유마힐가 가자운 '불어삼계현신의 시위연좌야' 단일체시중견무념 불견신상 명위정정 불견심상 명위정혜(영목본21, 261~265頁, 호적본30, 130~134頁)"
 
이상 3가지 예에 나타난 神會의 頓悟思想을 2가지 문제로 좁혀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2가지 문제란,
 
첫째 신회의 돈오사상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둘째 신회의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신회의 돈오사상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자.
 
이 경우 주목할 만한 용례는 (A) 壇語(단어)에 인용된 문장일 것이다.
여기서의 馬鳴(마명)의 말이란 起信論(기신론)을 가리킨다. 이 起信論과 頓悟說이 결부되고 있는 것이다. 기신론은 다 알려진대로 중국 · 한국 · 일본의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논서이다. 기신론은 大乘起信論이라고도 하는 바와 같이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킬 것을 설하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大乘(摩訶衍)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한다. 즉 대승의 신심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一心(衆生心:중생심)과 이 一心을 어째서 大乘이라고 하는가 하는 意義(의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一心은 迷惑(미혹)한 세계로서의 世間法과 生死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인 出世間法을 다 포함한다. 이 一心에 의해 일심의 體(체)인 心眞如門(심진여문)과 일심의 用(용)인 心生滅門(심생멸문)의 뜻을 보여준다.
 
또 이 일심이 범부에 있다해서 줄어드는 일이 없고 부처에 있다해서 늘어나는 일이 없다는 體大(체대)와 일심이 여래의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相大(상대)와 일심이 세간 출세간의 모든 善因果(선인과)를 생한다는 用大(용대)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一心二門三大를 골격으로 설하고 있는데, 二門이란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이고, 三大란 體大 相大 用大를 말한다.
 
이 사상은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일심을 근원에 두고 그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이 갈라져 나오며, 다시 모든 것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사고에 중점이 두어져 왔다. 起信論은 修證論(수증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本覺(본각)과 不覺(불각)과 始覺(시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은 동일한 衆生心(중생심)의 양면이다.
不覺이란 자기의 현실적인 迷惑(미혹)을 말한다. 그러나 불각 중에는 미혹해 있는 자신을 부정하는 자각이 있고, 수행해 나아가면서 깨달아[悟]가는 지혜, 즉 깨달음[覺]으로의 단계적인 진전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수행의 모든 단계를 始覺(시각)이라고 한다.
 
수행이 완성되므로해서 始覺은 本覺에 합치[合體(합체)]된다.
(A) 壇語에서는 生滅門으로부터 眞如門으로 들어가는 方便(방편)을 頓(돈)이라 하나 여기서는 十地(십지)의 第七 遠行地(원행지)로부터 第八不動地(부동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頓悟(돈오)가 卽心卽佛(즉심즉불)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반드시 보살의 단계적 수행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고 오랜 기간의 수행이 요구되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A)의 첫부분에 인용된 [기신론]의 다음과 같은 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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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계속:
 
又以覺心源故 名究竟覺 不覺心源故 非究竟覺 此義云何 如凡夫人 覺知前念起惡故 能止後念 令其不起 雖復名覺 卽是不覺故 如二乘觀智 初發意菩薩住 念無住相 以離分別추念相 名隨分覺 如菩薩地盡 滿足方便 一念相應 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是故修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是故一切衆生 不名爲覺 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 說無始無明 若得無念者 則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故 而實無有始覺之異 以四相俱時而有 皆無自立 本來平等同一覺故([大正藏]卷32, 576b·c)
우이각심원고 명구경각 불각심원고 비구경각 차의운하 여범부인 각지전념기악고 능지후념 영기불기 수복명각 즉시불각고 여이승관지 초발의보살주 염무주상 이리분별추념상 명수분각 여보살지진 滿足方便 일념상응 각심초기 심무초상 이원리미세념고 득견심성 심즉상주 명구경각 시고수다라설 약유중생능관무념자 칙위향불지고 우심기자 무유초상가지 이언지초상자 즉위무념 시고일체중생 불명위각 이종본래념염상속미증리념고 설무시무명 약득무념자 칙지심상생주이멸 이무념등고 이실무유시각지이 이사상구시이유 개무자립 본래평등동일각고(대정장 卷32, 576b·c)
 
壇語(단어)의 인용부분은 楞伽經(능가경)에서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신론] 전후의 문장에서는 始覺(시각)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心相의 生住異滅(생주이멸)을 아는 단계에 따라 始覺(시각)에도 不覺(불각) 相似覺(상사각) 隨分覺(수분각) 究竟覺(구경각)의 차이가 있다는 설이다.
 
어디까지나 衆生은 不覺(불각)이지 究竟覺(구경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始覺도 本覺(본각)에 合體(합체)되면 본래 4단계로 설해진 始覺도 동일한 覺(각)이라 한다. 神會는 기신론을 인용하면서 向(향)자 하나를 생략하였다. 이 경우 이 向이라는 한 글자를 생략하므로써 원 뜻과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했다고 생각된다.
 
佛地(불지)가 究竟(구경)이라고 하면 그것은 도달점이 되어야 하고, 그 도달점으로 향하는 始覺(시각)에는 당연히 단계가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회는 無念(무념)을 觀(관)하는 것 그대로가 佛地라 하였고 始覺과 本覺이 合體한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이 기신론의 의미가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신회의 돈오에 대한 주장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신회어록](c)의 용례를 보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c)에서는 우선, 自心從本以來空寂(자심종본이래공적)이 바로 頓悟(돈오)라고 한다.
 
自心이란 바로 중생의 迷惑心(미혹심)이며, 그 心이 본래 깨달은 마음과 等置(등치)된다고 하는 것이다. 壇語(단어)의 중심사상을 서술하는 문장을 보면, 分別 그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집착심을 동반한 分別心이 부정되고 있다.
 
더욱이 壇語에 계속해서 설해지는 煩惱卽菩提(번뇌즉보리)의 비유에 의한 신회의 해석으로 살펴보면, 보리는 허공과 같이 不變(불변)하는 것이고, 미혹과 깨달음은 허공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本來心이 불변하는 것을 頓悟라고 한 것이다. (c)의 이 돈오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卽心是道(즉심시도)가 頓悟(돈오)라든가, 不捨生死而入涅槃(불사생사이입열반)이 頓悟라고 한 데서 그런 점이 명확해진다. 그것은 앞서 [단어](A)의 즉심즉불에 대한 설명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과 같다.
 
(c)에서는 다시 自然頓悟義(자연돈오의)라고 하였다. 이는 자연 그대로가 돈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뒤에 보이는 神會의 自然主義와 동일한 사고라고 할 수 있겠다. 신회의 돈오가 기신론에 바탕을 두면서 지극히 본래를 중시한 주장임을 보아왔지만,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회어록의 定慧等(정혜등)이라는 주장에서도 볼 수 있다.
 
門人劉相천云 於南陽郡見侍御史王維在(臨)湍驛中 屈神會和尙及同寺僧惠澄禪師 語經數日 于時王侍御問和上言 "若爲修道得解脫" 答曰 "衆生本自心淨 若更欲起心有修 卽是妄心 不可得解脫" 王侍御驚愕云 "大奇 曾聞大德皆未有作如此說" 乃爲寇太守 張別駕 袁司馬等日 "此南陽郡有好大德 有佛法甚不可思議" 寇太守云 "此二大德見解병不同" 王侍御問和上 "何故得不同"(和上)
문인유상천운 어남양군견시어사왕유재(임)단역중 굴신회화상급동사승혜징선사 어경수일 우시왕시어문화상언 "약위수도득해탈" 답왈 "중생본자심정 약갱욕기심유수 즉시망심 불가득해탈" 왕시어경악운 "대기 증문대덕개미유작여차설" 내위구태수 장별가 원사마등일 "차남양군유호대덕 유불법심불가사의" 구태수운 "차이대덕견해병불동" 왕시어문화상 "하고득불동"(和上)
 
答曰 "今言不同者 爲澄禪師 要先修定 得定以後發慧 卽知不然 今正共侍御語時 卽定慧俱等 涅槃經云 '定多慧少 增長無明 慧多定少 增長邪見 若定慧等者 名爲見佛性' 故言不同" 王侍御問 "作沒時是定慧等" 和上答 "言定者 體不可得 所言慧者 能見不可得體 湛然常寂 有긍沙巧用 卽是定慧等學" 衆起立廳前 澄禪師諸王侍御云 "惠澄與會도梨 剛證不同" 王侍御口笑謂和上言 "何故不同"
답왈 "금언불동자 위징선사 요선수정 득정이후발혜 즉지불연 금정공시어어시 즉정혜구등 열반경운 '정다혜소 증장무명 혜다정소 증장사견 약정혜등자 명위견불성' 고언불동" 왕시어문 "작몰시시정혜등" 화상답 "언정자 체불가득 소언혜자 능견불가득체 담연상적 유긍사교용 즉시정혜등학" 중기립청전 징선사제왕시어운 "혜징여회도리 강증불동" 왕시어구소위화상언 "하고불동"
 
答 "言不同者 爲澄禪師先修定 得定已後發慧 會卽不然正共侍御語時 卽定慧俱等 是以不同" 侍御言 "도梨只沒道不同" 答 "一纖毫不得容" 又問 "何故不得容" 答 "今實不可同 若許道同 卽是容語(鈴本本29, 267~268頁, 胡適本38, 137~138頁)"
답 "언불동자 위징선사선수정 득정이후발혜 회즉불연정공시어어시 즉정혜구등 시이불동" 시어언 "도리지몰도불동" 답 "일섬호불득용" 우문 "하고불득용" 답 "금실불가동 약허도동 즉시용어(영본본29, 267~268頁, 호적본38, 137~138頁)"
 
위의 문장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王維(왕유)와 神會(신회)의 만남이 신회가 南陽(남양)에 있을 때였다는 말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답은 신회의 초기사상이며 [단어]의 설과 동시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왕유가 놀라서 찬탄했다는 신회의 주장은 그가 수행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북종선의 주장을 대변하는 慧澄(혜징)의 설은, 우선 禪定을 닦고 그 다음에 智慧(지혜)를 얻는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修證論(수증론)인데, 신회는 이 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定이 心을 일이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妄心(망심)이자 作意(작의)가 된다는 것이다. 胡適(호적)은 王維(왕유)가 놀랐던 神會(신회)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자연주의다. 확실히 신회가 자주 강조하는 不作意(불작의)라는 설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으로는 [단어] (A)에서 본대로다. 결국 (A)와 頓悟思想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신회의 無念(무념)이나 無常(무상)은 修行(수행)을 부정하는 데서 성립되었고, 동시에 그것이 신회 돈오사상의 특색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예를 든 문답의 중심과제인 定慧等(정혜등)에도 관련이 된다.
 
신회는 定慧等을 두 번에 걸쳐서 임금을 모시고 서서 함께 이야기할 때처럼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는 선정수행의 의미가 되는 定이나 그 정에 의해 획득되는 慧에 대하여 표현하는 일이 없다.
 
또 定이란 體不可得(체불가득)한 것이고, 慧란 體不可得한 定의 상태가 湛然常寂(담연상적)하며 恒沙妙用(항사묘용)을 갖는다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할 뿐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말에 해당할 것이다.
 
이렇게 신회의 돈오사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鈴木大拙(영목대졸)씨의 단언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頓(돈)이란 시간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비연속성의 의미로 말해질 때 그것은 그대로 깨달음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頓は時間的意味を持ったものではない,時間の連續性を絶對否定する非連續性の義であると云うとき,それはもたそのままで悟りを서するものであると云えるのである.(同著 754~755頁)
돈は시간적의미を지ったものではない,시간の연속성を절대부정する비연속성の의であると云うとき,それはもたそのままで오りを서するものであると云えるのである.(동저 754~755頁)
 
이것이 신회 돈오사상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두 번째로 신회의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두 번째 문제를 고찰할 때 검토할 수 있는 용례는, [정시비론](B)에 보이는 돈오점수설이다.
 
그런데 알려진 바와 같이 돈오점수설은 荷澤宗(하택종)의 법계임을 주장하는 圭峯宗密(규봉종밀)이 체계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宗密의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종밀의 설과 신회의 설은 전혀 무관한 것인가? 실은 그렇지 않다.
 
裵休拾遺問(배휴습유문)에서 종밀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問 "其所修者 爲頓爲漸 漸則忘前失後 何故集合而成 頓則萬行多方 豈得一時圓滿" 答 "眞理卽悟而頓圓 妄情息之而漸盡 頓圓如初生孩子 一日而肢體已全 漸修如長養成人 多年而志氣方立(前揭論文 54頁, 中公本 81頁 參照)"
문 "기소수자 위돈위점 점칙망전실후 하고집합이성 돈칙만행다방 기득일시원만" 답 "진리즉오이돈원 망정식지이점진 돈원여초생해자 일일이지체이전 점수여장양성인 다년이지기방립(전게론문 54頁, 중공본 81頁 참조)"
 
또 禪源諸全集都序(선원제전집도서)에서도 돈오점수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有云先須頓悟 方可漸修者 此約解悟也 約斷障說 如日頓出 霜露漸消 約成德說 如孩子生 卽頓具四肢六根 長卽漸成志氣功用也 故華嚴說 '初發心時卽成正覺' 然後三現十聖 次第修證 若未悟而修 非眞修也 良以非眞流之行 無以稱眞 何有修眞之行不從眞起 故彼經說 '若未聞此法 多劫修六度萬行 竟不證眞也(鎌田本 191頁, 筑摩書房)'
유운선수돈오 방가점수자 차약해오야 약단장설 여일돈출 상로점소 약성덕설 여해자생 즉돈구사지육근 장즉점성지기공용야 고화엄설 '초발심시즉성정각' 연후삼현십성 차제수증 약미오이수 비진수야 양이비진류지행 무이칭진 하유수진지행불종진기 고피경설 '약미문차법 다겁수육도만행 경불증진야(겸전본 191頁, 축마서방)'
 
이것으로써 신회의 설이 종밀의 돈오점수설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B)에 보이는 신회의 돈오점수설이 북종선 비판 기록인 定是非論(정시비론)에서만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검토한대로, 돈오설은 신회의 南陽(남양)시대에 볼 수 있었고, 그 특색은 수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북종선과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돈오점수설이란, 그러한 특색을 전제로 하면서, 그 후의 수행을 인정하는 데 있다.
 
예상되는 것은 신회의 돈오설을 인정하지 않는 북종선 사람들이 당연히 그의 설에 수행이 빠져 있다고 비판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 신회 자신도 극단적인 돈오론은 그저 북종선 비판만을 위한 입장에 빠진다는 것을 틀림없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설을 인정받기 위해서 신회는 돈오 후 수행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漸修說(점수설)을 덧붙인 데는 적어도 신회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사상적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돈오설이 생긴 배경에는 북종선광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 주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회의 돈오점수설이 후에 성립된 점에 대해서는 이상과 같이 추측해 두겠다.
돈오점수설에 대해서는 뒤에 종밀의 주장을 자세히 검토하는 데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신회의 돈오사상에서 두 번째 문제를 간단히 지적하는 것으로 우선 논의를 진행해 보기로 한다.
 
                  3. 洪州宗의 頓悟思想-宗密은 왜 荷澤宗(하택종)을 주장했는가?
 
북종선은 결국 없어져 현재 선종교단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북종선을 비판하는 가운데 남종선이 생겨나고, 그 남종선의 성립에 신회가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온대로다.
 
그러므로 앞 단원에서 검토한 신회의 돈오사상은 그 후 남종선에서 전개되는 돈오사상을 고찰할 겨우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회를 七祖라고 인정한다 해도,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선종교단을 지탱해온 것은 신회의 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뒤 禪宗敎團史(선종교단사)로 말하자면 六祖 慧能의 제자인 靑原行思(청원행사)와 南嶽懷讓(남악회양) 두 법계만이 발전한다. 裵休(배휴: 791~864)의 질문에 圭峯 宗密(규봉 종밀: 780~841)이 답한 편지로 裵休拾遺問(배휴습유문)이 있다.
 
이 책은 신회의 법계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종밀이, 남종선 가운데 신회의 하택종과 남악회양의 법사인 馬祖 道一이 이끄는 교단(이것을 洪州宗이라 함)과의 우열을 판정하기 위해 찬술한 것이고, 겸하여 北宗禪(북종선)과 牛頭禪(우두선)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그 찬술의 최종적인 의도는 하택종이 홍주종보다 우수하고 정통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있었지만, 당시 선종 교단을 분류하고 각각의 집단에서 주장하는 특색을 잘 모아놓은 매우 편리한 책이다.
 
종밀의 분류에 나타나는 문제점은 뒤에 검토하기로 하고, 이 [배휴습유문]을 중심으로 해서 荷澤 神會의 頓悟思想으로부터 洪州宗(홍주종)의 頓悟思想으로 전개된 점을 정리해 보겠다.
 
胡適(호적)씨의 跋裵休的唐故圭峯定慧禪師傳法碑(발배휴적당고규봉정혜선사전법비)라는 논문에 의하면, 종밀이 하택종에 속한다고 자체한 것은 僞稱(위칭)이라 한다. 宗密은 四川省 果州 西充顯(서충현) 출신이다. 元和 2년(807)에 遂州 大雲寺 道圓(수주대운사 도원)에게 출가하여 그 제자가 되었다.
 
道圓은 弘忍-資州智詵-資州處寂-淨衆寺無相(홍인-자주지선-자주처적-정중사무상)으로 이어지는, 四川省(사천성)에서 발전한 淨衆宗(정중종) 계통에 속하는 사람으로, 無相(무상)의 제자인 淨衆寺神會-聖壽寺南印-遂州道圓(정중사신회-성수사남인-수주도원)으로 이어지는 法系(법계)였다.
 
그러나 종밀은 [배휴습유문]에서도 荷澤 神會-磁州法(智)如-益州(聖壽寺)惟忠-遂州道圓[하택 신회-자주법(지)여-익주(성수사)유충-수주도원]으로 이어졌다고 날조하였다. 왜 종밀은 법계를 날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규봉 종밀이 가장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敎(교)와 禪(선)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敎禪一致(교선일치)를 주장한 원점은 圓覺經(원각경)[정식으로는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이라 한다]과의 만남이었고, 이 일이 종밀의 생애를 결정하게 된다.
 
裵休(배휴)의 大方廣圓覺經疏序(대방광원각경소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圭峰禪師 得法於荷澤嫡孫南印上足道圓和尙 一日隨僧齋于州民任灌家居下位以次受經 遇圓覺了義 卷未終軸 感悟流涕 歸以所悟告其師 師撫之日 "汝當大弘圓頓之敎 此經諸佛授汝耳([續藏] 卷14-108b)"
규봉선사 득법어하택적손남인상족도원화상 일일수승재우주민임관가거하위이차수경 우원각료의 권미종축 감오류체 귀이소오고기사 사무지일 "여당대홍원돈지교 차경제불수여이(속장 卷14-108b)"
 
종밀은 원각경의 어디에 감격했으며 어디에서 매력을 보았던 것일까? 실은 돈오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都序(도서)에서는 頓(돈) 사상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逐機頓(축기돈)이며, 또 하나는 化儀頓(화의돈)이다.
 
問 "前云佛說頓敎漸敎 禪開頓門漸門 未審三種敎中 何頓何漸" 答 "法義深淺 已備盡於三種 但以世尊說敎儀式不同 有稱理頓說 有隨機漸說 故復名頓敎漸敎 非三敎外別有頓漸 漸者爲中下根 卽時未能信悟圓覺妙理者 且說前人天小乘 乃至法相 上皆第一敎也(引用者注 密意依性說相敎をさす) 破相 第二敎也(引用者注 密意破相顯性敎をさす) 待其根器成熟 方爲說於了義 卽法華·涅槃經等也 此及下逐機頓敎 合爲第三敎也(引用者注 顯示眞心卽性敎をさす) 其化儀頓 卽總攝三般 西域此方 古今諸德所判敎 爲三時五時者 但是漸敎一類 不攝華嚴等經
문 "전운불설돈교점교 선개돈문점문 미심삼종교중 하돈하점" 답 "법의심천 이비진어삼종 단이세존설교의식불동 유칭리돈설 유수기점설 고복명돈교점교 비삼교외별유돈점 점자위중하근 즉시미능신오원각묘이자 차설전인천소승 내지법상 상개제일교야(인용자주 밀의의성설상교をさす) 파상 제이교야(인용자주 밀의파상현성교をさす) 대기근기성숙 방위설어료의 즉법화·열반경등야 차급하축기돈교 합위제삼교야(인용자주 현시진심즉성교をさす) 기화의돈 즉총섭삼반 서역차방 고금제덕소판교 위삼시오시자 단시점교일류 불섭화엄등경
 
頓者復二 一逐機頓 二化儀頓
돈자복이 일축기돈 이화의돈
一逐機頓者 遇凡夫上根利智 直示眞法 聞卽頓悟 全同佛果 如華嚴中 '初發心時 卽得阿누菩提' 圓覺中 '觀行 卽成佛道' 然始 同前二敎中(引用者注 密意依性說相敎と密意破相顯性敎をさす) 行門 漸除凡習 漸顯聖德 如風激動大海 不能現像 風若頓息 則波浪漸停 影像顯也 風喩迷情 海喩心性 波喩煩惱 影喩功用 起信論中一一配合 卽華嚴一分 及圓覺 佛頂 密嚴 勝만 如來藏之類 二十余部經是也 遇機卽說 不定初後 與禪門第三直顯心性宗全相同也
일축기돈자 우범부상근리지 직시진법 문즉돈오 전동불과 여화엄중 '초발심시 즉득아누보리' 원각중 '관행 즉성불도' 연시 동전이교중(인용자주 밀의의성설상교と밀의파상현성교をさす) 행문 점제범습 점현성덕 여풍격동대해 불능현상 풍약돈식 칙파랑점정 영상현야 풍유미정 해유심성 파유번뇌 영유공용 기신론중일일배합 즉화엄일분 급원각 불정 밀엄 승만 여래장지류 이십여부경시야 우기즉설 불정초후 여선문제삼직현심성종전상동야
 
二化儀頓者 謂佛初成道 爲宿世緣熟上根之流 一時頓說性相事理 衆生萬感 菩薩萬行 賢聖地位 諸佛萬德 因該果海 初心卽得菩提 果徹因源 位滿猶稱菩薩 此唯華嚴一經及十地論 名爲圓頓敎 余皆不備 前서外難云 頓悟成佛是違經者 余今於此通了也 其中所說諸法 是全一心之諸法 一心是全諸法之一心 性相圓融 一多自在 故諸佛與衆生交徹 淨土與穢土融通 法法皆彼此互收塵塵悉包含世界 相入相卽 無애鎔融 具玄門 重重無盡 名爲無障애法界(鎌全本 184~185頁)
이화의돈자 위불초성도 위숙세연숙상근지류 일시돈설성상사리 중생만감 보살만행 현성지위 제불만덕 인해과해 초심즉득보제 과철인원 위만유칭보살 차유화엄일경급십지론 명위원돈교 여개불비 전서외난운 돈오성불시위경자 여금어차통료야 기중소설제법 시전일심지제법 일심시전제법지일심 성상원융 일다자재 고제불여중생교철 정토여예토융통 법법개피차호수진진실포함세계 상입상즉 무애용융 구현문 중중무진 명위무장애법계(겸전본 184~185頁)
 
여기서는 頓을 逐機(축기)의 頓과 化儀(화의)의 頓 두가지로 나눈다.
 
逐機(축기)란 무엇인가? 機를 따른다는 뜻으로, 機란 상대방의 능력이고 거기에 맞게 가르쳐주는 쪽에서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化儀(화의)란 무엇인가? 化란 佛의 敎化指導(교화지도)를 말하고 儀란 儀式(의식), 形式(형식), 方法(방법)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化儀頓(화의돈)이란 무엇인가? 佛이 성도한 뒤에 機緣(기연)이 성숙된 上根機(상근기)를 위해 일시에 설한 가르침으로 화엄경과 十地論(십지론)만 이에 해당한다. 이것을 圓頓敎(원돈교)라고도 이름하며, 화엄종의 究極(구극)인 圓融無碍(원융무애)의 無障碍法界(무장애법계)를 말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밀이 체계화했던 것은 頓悟漸修論(돈오점수론)이다.
 
화엄경은 유명한 初發心時便成正覺(초발심시편성정각: 대정장 권9-449c)을 설한다. 처음 발심한 때가 그대로 궁극의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화엄경의 돈오설이다. 이것이 원각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설해지고 있다고 종밀은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해지고 있는가? 종밀은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도서]에서 觀行卽成佛道(관행즉성불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각경에서는 그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大疏(대소)]의 科文(과문)에 의하면,
 
頓信解(돈신해)를 文殊章(문수장)에서 밝히고, 계속해서 漸修證(점수증)에 대해서는 修證의 用心(용심)을 처음으로 普賢章(보현장)에서 밝히고 修證(수증)의 行相(행상)을 뒤의 普眼章(보안장)에서 밝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行相을 밝힌 9가지 문답에서 그 첫 문답은 상근기의 수증을 밝히고 있지만, 普眼章에서는 觀門(관문)은 佛과 동일하다는 것을 열어 보인다(續藏:속장 권14-141a)고 설한다. 원각경 普眼章(보안장)은, 그 중심적 주장인 本來成佛說(본래성불설)이 설해진 부분이다.
 
善男子 此菩薩及末世衆生 修習此心 得成就者 於此無修亦無成就 圓覺普照寂滅無二 於中百千萬億不可說阿僧祗恒河沙諸佛世界 猶如空花亂起亂滅不卽不離無縛無脫 始知衆生本來成佛 生死涅槃猶如昨夢([大正藏] 卷17, 915a)
선남자 차보살급말세중생 수습차심 득성취자 어차무수역무성취 원각보조적멸무이 어중백천만억불가설아승지항하사제불세계 유여공화난기난멸불즉불리무박무탈 시지중생본래성불 생사열반유여작몽(대정장 卷17, 915a)
 
종밀은 이 [원각경]의 본 뜻에서 벗어나 本來(본래)를 중시한다. 종밀이 淨圓覺心(정원각심)을 修習(수습)하여 성취를 얻는다면 이라는 조건을 배제하고 [기신론] [열반경] [화엄경] [여래출현품]이라든가 澄觀(징관)의 華嚴疏(화엄소)를 해석하게 된 경과에 대해서는, 吉津宜英(길진의영)씨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성불하지 못한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는 주장은, 말하자면 結果先取論的(결과선취론적)인 本來性(본래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종밀은 돈오에 관해서 원각경과 화엄경이 같은 주장을 한다고 설하지만, 逐機頓(축기돈)은 원각경 쪽이 더 완전하다 하고, 화엄경은 그 일부분일 뿐이라고 한정을 가한다.[배휴습유문]에서는 그 근거를 원각경에서 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故經云 '(A) 若諸菩薩 悟淨圓覺悟也 (B) 以淨覺心 取精爲行 由澄諸念覺識煩動等修也(前揭의 掘揭의 拙稿52項)'
고경운 '(A) 약제보살 오정원각오야 (B) 이정각심 취정위행 유징제념각식번동등수야(전게의 굴게의 졸고52項)'
 
經文(경문)은 威德自在菩薩章(위덕자재보살장)의 말이지만 여기서도 원 뜻과는 다른 해석이 있다. 경문은 원래 奢摩他(사마타), 즉 止(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善男子 (C) 若諸菩薩悟淨圓覺 以淨覺心 取靜爲行 由澄諸念 覺識煩動 靜慧發生 身心客塵從此永滅 (D) 便能內發寂靜輕安 由寂靜故 十方世界諸如來心 於中顯現 如鏡中像 此方便者 名奢摩他([大正藏] 卷14~917c)
선남자 (C) 약제보살오정원각 이정각심 취정위행 유징제념 각식번동 정혜발생 신심객진종차영멸 (D) 편능내발적정경안 유적정고 십방세계제여래심 어중현현 여경중상 차방편자 명사마타(대정장 卷14~917c)
 
(C)에서는 모두 조건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종밀은 (A)에만 한정하였다. 大疏(대소) 권1 하에서는 (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解日 謂發心修行 欲趣佛果 先須了悟身中淨圓覺性以爲行本 本卽解也'卽是通明觀行' 依解而修 方爲妙行(前揭書 175b)
해일 위발심수행 욕취불과 선수료오신중정원각성이위행본 본즉해야'즉시통명관행' 의해이수 방위묘행(전게서 175b)
 
이것으로써 圓覺經(원각경)의 문장이 頓悟漸修論(돈오점수론)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 판명된다. 敎(교)에서는 圓覺經이 逐機頓(축기돈)을 설하는 최고의 경이라는 종밀의 생각이 판명되었지만,
그것을 禪(선)에서 말하자면 [都序(도서)]에서는 인용문에 줄을 그은 것과 같이 제3 直顯心性宗(적현심성종)과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直顯心性宗(직현심성종)이란 무엇인가? [도서]에서는 두 개의 집단을 가지고 각각의 주장을 상세하게 설하고 있다. 그것이 洪州宗(홍주종)과 荷澤宗(하택종)을 가리키는 것임은 都序와 裵休拾遺問(배휴습유문)을 비교하면 일목요연하다. 그것을 좌우로 대조해서 밝히고자 한다.

 

『都 序』 『裵休拾遺問』
三直心性宗者 直顯心性宗者 說一切諸法 若有若空 皆唯眞性 眞性無爲待非一切 謂非凡非聖 非因非果 非善非惡等 然卽體之用 而能造作種種 謂能凡能能聖 現色現相等 於中指示心性復有二類  
一云 卽今能語言動作 貪瞋慈忍 造善惡 受苦樂等 卽如佛性 卽此本來是佛 除此無別佛也 了此天眞自然 故不可起心修道 道卽是心 不可將心 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 還斷於心 不斷不修 任運自在 方名解脫 性如虛空不增不滅 何가添補 但隨時隨處 息業襄神 聖胎增長顯發 自然神妙 此卽是爲眞 悟眞修眞證也 洪州宗意者 起心動念 彈指動目 所作所爲 皆是佛性全體之用 更無別用全體貪瞋癡 造善造惡 受苦受樂 皆是佛性 如麵作種種飮食 一一皆麵 意以推求此身 四大骨肉 喉舌牙齒 眼耳手足 병不能自語言見聞動作 가如一念命終 全身都未變化壞 卽便口不能語 眼不能見 耳不能聞 脚不能行 手不能作故知能語言動作者 必是佛性 且四大骨肉 一一細推 都不解貪瞋癡 故知貪瞋(癡) 煩惱 병是佛性 佛性體非一切差別種種 而能造作一切差別種種 體非種種者 謂此性非聖非凡 非因非果 非善非惡 無色無相 無根無住 乃至無佛無衆生也 能作種種者 謂此性卽體之用 故能因能果 能善能惡 現色現相 能佛能衆生 乃至能貪瞋等 若핵其體性 則筆耕不可見 不可證 如眼不自見眼等若就其應用 卽拳動運爲 一切皆是佛性更無別法而爲能證所證 彼意准楞伽經云 '如來藏是善不善因 能遍興造一切趣生 受苦樂與因俱' 又云 '佛語心爲宗無門爲法門'又云 '或有佛刹 揚眉動目笑吹聲해 或動搖等 皆是佛事' 旣解悟之理 一切天眞自然 故所修行 理宜順此 而乃起心 斷惡修善 亦不起心修道道卽是心 不可將心 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 還斷於心 不斷不修 任運自在 名爲解脫人 無法可拘 無佛可作猶如虛空 不增不滅 何가添補 何以故 心性之外 無一法可得故 故但任心卽爲修也(前揭拙稿 33~34頁)
二云 諸法如夢 諸聖同說 故妄念本寂塵境本空 空寂之心 靈知不昧 卽此空寂之知 是汝眞性 任迷任悟 心本自知 不籍緣生 不因境起 知之一字 衆妙之門 由無始迷之故 妄執身心爲我 起貪瞋等念 若得善友開示 頓悟空寂之知 知且無念無形 誰爲我相人相 覺諸相空 心自無念 念起卽覺 覺之卽無 修行妙門 唯在此也 故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但得無念知見 則愛惡自然淡薄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旣了諸相非相 自然修而無修 煩惱盡時 生死卽絶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名之爲佛 荷澤宗者 尤難言述 是釋迦降出 達磨遠來之本意也 將前望此 此乃廻異於前將此攝前 前卽全同此 故難言也 然言之甚易 所以難者 知者稀也 今强言之謂 諸法如夢 諸聖同說 故妄念本寂 塵境本空 空寂之心 靈知不昧 卽此空寂之知 是前達磨所傳 淸淨心也 任迷任悟 心本自知 不籍緣生 不因境起 迷時煩惱 知非煩惱 悟時神變 知非神變 然知之一字 衆妙之源 由迷之知 卽起我相 計我我所 愛惡自生 隨愛惡情 卽爲善惡 善惡之報 受六道形 世世生生 循環不絶 若得善友開示 頓悟空寂之知 寂知且無念無形 誰爲我相人相 覺諸相空 心自無念 念起卽覺 覺之卽無 修行妙門 唯在此也 故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但得無念 則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精進 於解卽見諸相非相 於行則名無修之修 煩惱盡時 生死卽絶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名之爲佛(同 36~37頁)
然此兩家 皆會相歸性 故同一宗 然上三宗中 復有遵敎慢敎 隨相毁相 拒外難之門戶 接外衆之善巧 敎弟子之儀軌種種不同 皆是二利行門 各隨其便 亦無所失 但所宗之理 卽不會有二 故須約佛和會也(鎌田本 95頁)  

배휴습유문에서 洪州宗의 주장이라고 파악한 것은 어떤 문헌인가? 그것은 분명히 馬祖語錄(마조어록)을 가리키는 것임을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祖云衆云 '汝等諸人 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 達磨大師從南天竺國來至中華 傳上乘一心之法 令汝等開悟 又引楞伽經以印衆生心地 恐汝顚倒不信此一心之法各有之 故楞伽經以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 夫求法者應無所求 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 不取善 不取惡 淨穢兩邊 俱不依호 達罪性空 念念不可得 無自性故 故 三界唯心 森羅萬象 一法之所印(入矢義高編 [馬祖語錄] 17~19項, 禪文化硏究所, 1984年)'
조운중운 '여등제인 각신자심시불 차심즉불 달마대사종남천축국래지중화 전상승일심지법 영여등개오 우인릉가경이인중생심지 공여전도불신차일심지법각유지 고릉가경이불어심위종 무문위법문 부구법자응무소구 심외무별불 불외무별심 불취선 불취악 정예양변 구불의호 달죄성공 염념불가득 무자성고 고 삼계유심 삼라만상 일법지소인(입시의고편 마조어록 17~19項, 선문화연구소, 1984年)'
 
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對迷說悟 本旣無迷 悟亦不立 一切衆生 從無量劫來 不出法性三昧 長在法性三昧中 著衣喫飯 言談祗對 六根運用 一切施爲 盡是法性(同, 24頁)
대미설오 본기무미 오역불립 일체중생 종무량겁래 불출법성삼매 장재법성삼매중 저의끽반 언담지대 육근운용 일체시위 진시법성(동, 24頁)
 
배휴습유문의 찬술의도가 荷澤宗과 洪州宗 양자를 구별하는데 있었다는 점은 이미 말하였다. 여기서 逐機頓(축기돈)과 化儀頓(화의돈)의 우열을 서술한 예로 본다면 전자에 하택종을, 후자에 홍주종을 배대해 볼 수 있다.
 
배휴습유문은 앞서 인용한 원각경 [威德自在菩薩章(위덕자재보살장)] 앞부분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洪州常云 '貪瞋慈等皆佛性' 有何別者 如不但觀濕性始終無異 不知濟舟覆舟 功過懸殊 故彼宗於頓悟門雖近而未的 於漸修門有誤而全乖 牛頭已達空故 於頓悟門而半了 以忘情故 於漸修門而無虧 北宗但是漸修 全無頓悟 無頓悟故 修亦非眞 荷澤則必先頓悟 依悟而修(前揭 拙稿 51~52頁)
홍주상운 '탐진자등개불성' 유하별자 여불단관습성시종무이 불지제주복주 공과현수 고피종어돈오문수근이미적 어점수문유오이전괴 우두이달공고 어돈오문이반료 이망정고 어점수문이무휴 북종단시점수 전무돈오 무돈오고 수역비진 하택칙필선돈오 의오이수(전게 졸고 51~52頁)
 
頓悟漸修論(돈오점수론)은 荷澤宗(하택종)뿐이며, 이에 대하여 洪州宗(홍수종)의 주장은, 頓悟門(돈오문)으로 치자면 가깝기는 하지만 완전히 적중한 것은 아니고 漸修門(점수문)으로 치자면 전적으로 틀릴 만큼 오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단 修證論(수증론)의 문제에 관해서는, 宗密(종밀)은 洪州宗(홍수종)을 頓悟頓修(돈오돈수)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
 
吉眞宜英(길진의영)씨는 [華嚴禪(화엄선)의 思想史的硏究(사상사적연구)]에서 澄觀(징관)의 行願品疏(행원품소) 중 修證深淺(수증심천)에 근거하여 圓覺經大疏의 修證階差(수증계차)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 성과를 이어서 頓悟漸修(점수)와 頓悟頓修(돈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원각경대소] 권上2에서는 修證階差(수증계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八修證階差者 謂若但約敎文 唯生義解 望?修證 復有其門 故以心傳心 歷代不絶 自佛囑迦葉展轉于今 燈燈相承 明明無盡  然初五師兼之三藏 ?多之後 律敎別行 ?賓已來 唯傳心地 黃梅門下 南北又分 雖繼之一人 而?有傍出 致令一味隨計多宗 今略서之 '但서隨機可用者 不서邪벽之流也' 會通圓覺 '由此經首末 偏明修證 故서諸禪宗以會之' 有拂塵看淨 方便通經 有三句用心 謂戒定慧 有敎行不拘而滅識 有觸類是道而任心 有本無事而忘情
팔수증계차자 위약단약교문 유생의해 망?수증 복유기문 고이심전심 역대불절 자불촉가섭전전우금 등등상승 명명무진  연초오사겸지삼장 ?다지후 율교별행 ?빈이래 유전심지 황매문하 남북우분 수계지일인 이?유방출 치령일미수계다종 금략서지 '단서수기가용자 불서사벽지류야' 회통원각 '유차경수말 편명수증 고서제선종이회지' 유불진간정 방편통경 유삼구용심 위계정혜 유교행불구이멸식 유촉류시도이임심 유본무사이망정
 
有籍傳香而存佛 有寂知指體 無念爲宗 편離類非 統收俱是象體 上之諸宗 不出定慧悟修頓漸 無定無慧 是狂是愚 偏修一門 無明邪見 此二雙運 成兩足尊 故天台修行 宗於止觀 其頓漸頓修者 頓悟 '日出 孩生'漸修 '霜消 孩長' 爲解悟 漸修頓悟 '伐木 入都' 頓修頓悟 '磨鏡 學射' 漸修漸悟 '如登九層之台 足履漸高 所鑑漸遠' 병爲證悟 若云頓悟頓修 '斬染려사' 則通三義 謂先悟 '廓然頓了'
유적전향이존불 유적지지체 무념위종 편리류비 통수구시상체 상지제종 불출정혜오수돈점 무정무혜 시광시우 편수일문 무명사견 차이쌍운 성양족존 고천태수행 종어지관 기돈점돈수자 돈오 '일출 해생'점수 '상소 해장' 위해오 점수돈오 '벌목 입도' 돈수돈오 '마경 학사' 점수점오 '여등구층지태 족이점고 소감점원' 병위증오 약운돈오돈수 '참염려사' 칙통삼의 위선오 '곽연돈료'
 
後修 '不著不證 曠然合道' 爲解悟 先修 '服藥' 後悟 '病除' 爲證悟修 '無心忘照' 悟 '任運寂知' 一時 卽通解證 若云具一切佛德爲悟 '如飮大海' 一念萬行爲修 '得百川味' 亦通解證 若約楞伽 地前 '信·住·行·向' 四漸 '菴羅熟 陶器成 大地生 習藝就' 聖位 '初地 八地 報身 法身' 四頓 '明鏡現物 日月照色 藏識知境 佛光然曜' 則修行爲漸 證理名頓
후수 '불저불증 광연합도' 위해오 선수 '복약' 후오 '병제' 위증오수 '무심망조' 오 '임운적지' 일시 즉통해증 약운구일체불덕위오 '여음대해' 일념만행위수 '득백천미' 역통해증 약약릉가 지전 '신·주·행·향' 사점 '암라숙 도기성 대지생 습예취' 성위 '초지 팔지 보신 법신' 사돈 '명경현물 일월조색 장식지경 불광연요' 칙수행위점 증리명돈
 
此圓覺經 備前諸說 謂 文殊一章 是頓解悟 普眼觀成 是頓證悟 三觀本 '威德章' 末 '弁音章' 是漸證悟 又普眼觀 通於解證 又三觀一一首標悟淨圓覺次明行相 後顯成功 初中爲對 是漸修頓悟 '又普眼觀示漸修頓悟' 三期道場 是漸修漸悟 普賢後段 是頓悟頓修 '又淸淨慧章 有忘心頓證' 更有余文 不能繁述 此等頓漸 皆語用心 不同前門 但是判敎 苟得其意 皆成定慧 如其失旨 不成妄想 卽墮無記 冀諸學者 審而修之(前揭書 119c·d)
차원각경 비전제설 謂 문수일장 시돈해오 보안관성 시돈증오 삼관본 '위덕장' 말 '변음장' 시점증오 우보안관 통어해증 우삼관일일수표오정원각차명행상 후현성공 초중위대 시점수돈오 '우보안관시점수돈오' 삼기도장 시점수점오 보현후단 시돈오돈수 '우청정혜장 유망심돈증' 갱유여문 불능번술 차등돈점 개어용심 불동전문 단시판교 구득기의 개성정혜 여기실지 불성망상 즉타무기 기제학자 심이수지(전게서 119c·d)
 
여기서는 원각경이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 뿐만 아니라 漸修頓悟 漸修漸悟 頓悟頓修說(점수돈오 점수점오 돈오돈수설)을 모두 겸비했음을 밝히고 있다.
 
원래 澄觀(징관)은 解悟(해오)와 證悟(증오)를 겸비한 悟相(오상)을 주장한 것이므로 頓悟漸修說(점수설)이 解悟(해오)에만 한정된다면 宗密(종밀)의 입장은 치우친 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 점은 宗密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澄觀을 이어서 頓悟漸修說(점수설)을 解悟(해오)라고 분류하는 한편, [원각경대소] 권7 下에서는 다음과 같이 頓悟漸修說을 서술하면서 頓悟(돈오)를 解悟(해오)로, 漸修(점수)를 證悟(증오)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頓悟漸修說에 解悟와 證悟가 함께 있다고 설하는 것으로서, 宗密이 澄觀과는 다른 頓悟漸修(돈오점수)설을 주장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若以圓頓宗說 得出世智 有二意 一解悟 謂 初發心時 頓悟實法 了達生死煩惱本空 元是菩提涅槃 卽名夢寤 二證悟 謂 雖頓解當體全眞 然多生妄執習已性成 故心行難符智解 須以頓悟之力 習氣漸息 聖力漸通 登地證悟 八地已去 無相無功 念念不間 方名出夢(同, 349b)
약이원돈종설 득출세지 유이의 일해오 위 초발심시 돈오실법 요달생사번뇌본공 원시보제열반 즉명몽오 이증오 위 수돈해당체전진 연다생망집습이성성 고심행난부지해 수이돈오지력 습기점식 성력점통 등지증오 팔지이거 무상무공 염념불간 방명출몽(同, 349b)
 
宗密의 頓悟漸修說의 특색은, 圓覺經이 頓悟漸修說 뿐만 아니라 漸修頓悟 漸修漸悟 頓悟頓修(점수돈오 점수점오 돈오돈수)를 모두 겸비하고 있다는 것과 그 頓悟漸修說에 解悟와 證悟가 함께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떠한 修證論(수증론)도 全揀(전간)과 全收(전수)를 동시에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全揀과 全收의 문제는 뒤에 거론하겠다. 宗密은 洪州宗이 頓悟는 인정하면서도 漸修(점수)에 있어서는 불충분하다고 한다. 洪州宗(홍수종)이 頓悟가 되었든 漸修가 되었든,
 
[배휴습유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漸修(점수)가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洪州宗을 분류하고 있는 것이지 홍주종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頓悟頓修說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頓悟頓修의 先悟後修(선오후수)와 頓悟漸修(돈오점수)와의 차이는 애매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고, 종밀이 [배휴습유문]에서 말한 荷澤則必先頓悟(하택칙필선돈오), 依悟而修(의오이수)의 頓悟漸修(돈오점수)란 頓悟頓修(돈오돈수)의 先悟後修(선오후수)와 같다고 이해된다.
 
앞서 종밀의 분류에서 有觸類是道而任心(유촉류시도이임심)이라 한 것은 洪州宗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다음에서와 같이 解悟(해오)와 證悟(증오)를 겸비했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 집단을 말하는가?
 
若云本具一切佛德爲悟'如飮大海' 一念萬行爲修'得百川味' 亦通解證
야운본구일체불덕위오'여음대해' 일념만행위수'득백천미' 역통해증
 
이와 유사한 예로, 馬祖語錄(마조어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又問 "作何見解 卽得達道" 祖曰 "自性本來具足 但於善惡事中不]滯 喚作修道人 取善捨惡 觀空入定 卽屬造作 更若向外馳求 轉疎轉遠 但盡三界心量 一念妄心 卽是三界生死根本 但無一念 卽除生死根本 卽得法王無上珍寶 無量劫來 凡夫妄想 諂曲邪僞 我慢貢高 合爲一切 故經云 '但以衆法 合成此身 起時唯法起 滅時唯法滅 此法起時 不言我起 滅時 不言我滅'
우문 "작하견해 즉득달도" 조왈 "자성본래구족 단어선악사중불]체 환작수도인 취선사악 관공입정 즉속조작 갱약향외치구 전소전원 단진삼계심량 일념망심 즉시삼계생사근본 단무일념 즉제생사근본 즉득법왕무상진보 무량겁래 범부망상 첨곡사위 아만공고 합위일체 고경운 '단이중법 합성차신 기시유법기 멸시유법멸 차법기시 불언아기 멸시 불언아멸'
 
前念後念中念 念念不相待 念念寂滅 喚作海印三昧 攝一切法 如百千異流同歸大海 都名海水 住尾一味 卽攝衆味 住於大海 卽混諸流 如人在大海中浴 卽用一切水 所以聲聞悟迷 凡夫迷悟 聲聞不知聖心本無地位因果階級心量妄想 修因證果 住於空定 八萬劫二萬劫 雖卽已悟 悟已却迷 諸菩薩觀如地獄苦 沈空滯寂 不見佛性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 故經云 '凡夫有反覆心 而聲聞無也(前揭書 24頁)'"
전념후념중념 염념불상대 염념적멸 환작해인삼매 섭일체법 여백천이류동귀대해 도명해수 주미일미 즉섭중미 주어대해 즉혼제류 여인재대해중욕 즉용일체수 소이성문오미 범부미오 성문불지성심본무지위인과계급심량망상 수인증과 주어공정 팔만겁이만겁 수즉이오 오이각미 제보살관여지옥고 심공체적 불견불성 약시상근중생 홀이우선지식지시 언하령회 갱불력어계급지위 돈오본성 고경운 '범부유반복심 이성문무야(전게서 24頁)'"
 
위 글은 洪州宗의 주장이라고 미루어 볼 수 있고, 분류로 치면 頓悟頓修라 할 수 있다.
 
이 頓悟頓修(돈오돈수)에는 解悟(해오)와 證悟(증오) 두 가지 悟相(오상)이 완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宗密은 이것을 洪州宗의 주장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또한 洪州宗의 분류는 이미 澄觀의 行願品疏(행원품소) 중 修證深淺(수증심천)의 悟入方法(오입방법)을 설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澄觀은 洪州宗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으나 宗密은 이 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있다.

若云揚眉징目皆稱爲道 卽此名修 此通二意 一令知其融目爲道 卽慧門也二令心無所當 卽定門也([續藏經]卷7, 252a)
약운양미징목개칭위도 즉차명수 차통이의 일령지기융목위도 즉혜문야이령심무소당 즉정문야(속장경 卷7, 252a)
 
종밀이 인용한 悟入(오입)의 方法에도 있는 것과 같이, 澄觀은 無定無慧(무정무혜)를 是狂是愚(시광시우)라고 주장하는데 主眼(주안)을 두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澄觀은 洪州宗을 나타내는 이 문장을 定慧(정혜)를 겸비한 것으로 분명히 인정하고 있으나 宗密은 洪州宗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宗密은 결국, 洪州宗이 頓悟(돈오)에는 철저하지만 漸修(점수)는 없다고 단정한다.
 
[배휴습유문]에서는 다시 遮遣門(차견문)과 表顯門(표현문), 眞空(진공)과 妙有(묘유), 隨緣用(수연용)과 自性用(자성용)이나 比量顯(비량현)과 現量顯(현량현)을 거론하면서, 荷澤宗에는 兩說(양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洪州宗에는 후자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상으로써 여기서 비로소 이해되는 점이 있다. 頓悟漸修論(돈오점수론)에 의해
禪敎一致(선교일치)를 주장하려 했던 종밀로서는, 敎(교)로서는 圓覺經(원각경)이, 禪(선)으로서는 荷澤宗(하택종)이 필요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宗密(종밀)은 荷澤宗(하택종)이 禪(선)의 傳承者(전승자)라는 것을 구하였던 것이다.

   다음>>>4. 맺음말-宗密의 頓悟漸修(점수) 頓悟頓修(돈수) 분류의 문제점

 

4. 맺음말-宗密의 頓悟漸修 頓悟頓修 분류의 문제점
 
宗密의 주장은 한면으로 매우 합리적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첫 번째는, 이미 검토한 바와 같이, 宗密(종밀)이 이해한 圓覺經(원각경)의 내용이 원 뜻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荷澤 神會(하택신회)의 주장과 宗密이 말하는 荷澤宗과 전적으로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澄觀(징관)의 [演義妙(연의묘)] 권 34의 설을 이어받아 宗密이 神會의 사상을 知之一字衆妙之門(지지일자중묘지문)으로 총괄한 것이 [都序(도서)]에 보인다. 知(지)를 源(원)으로 이해한 것은,
 
앞서 인용했던 [裵休拾遺問(배휴습유문)]에 나오는 荷澤宗의 교설과 [도서] 중에서 直顯心性宗(직현심성종)인 하택종을 逐機頓悟(축기돈오)의 설에 상당한다고 주장한 곳과도 통한다.
 
여기서는 知(지)가 根源(근원)으로 이해되고, 그것은 眞性(진성)과 동의어가 된다. 종밀은 [도서]에서 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今時有但目眞性爲禪者 是不達理行之旨 又不弁華竺之意也 然非離眞性別有禪體 但衆生迷進合塵 卽名散亂 背塵合眞 名爲禪定 若直論本性 卽非眞非妄 無背無合 無定無亂 誰言禪乎 況此眞性非唯是禪門之源 故名法性 亦是衆生迷悟之源 故名如來藏藏識 出楞伽經 亦是諸佛萬德之源 故名佛性 涅槃等經 亦是菩薩萬行之源 故名心地 梵網經心地法門品云 '是諸佛之本源 行菩薩道之根本 是大衆諸佛子之根本也'萬行不出六波羅蜜 禪門但是六中之一 當其第五 豈可都目眞性爲一禪行哉(以下略)(同16~17頁)
금시유단목진성위선자 시불달리행지지 우불변화축지의야 연비리진성별유선체 단중생미진합진 즉명산난 배진합진 명위선정 약직론본성 즉비진비망 무배무합 무정무난 수언선호 황차진성비유시선문지원 고명법성 역시중생미오지원 고명여래장장식 출릉가경 역시제불만덕지원 고명불성 열반등경 역시보살만행지원 고명심지 범망경심지법문품운 '시제불지본원 행보살도지근본 시대중제불자之根本也'만행불출육파라밀 선문단시육중지일 당기제오 기가도목진성위일선행재(이하약)(同16~17頁)
 
莊子(장자) 郭象注(곽상주)에 자취[迹(적)]가 있는 까닭은 眞性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자취가 있는 까닭이란 眞性으로부터 자취가 생긴다는 뜻이고, 자취와 자취가 있는 까닭이란, 吉川忠夫(길천충부)씨가 말한대로, 六朝 이래 三敎一致 思想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宗密의 敎禪一致(교선일치) 思想에 眞性이 근거가 된 것도 중국 전통사상의 계승이다. 또 다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都序의 眞性(一眞心性: 일진심성)은 全揀(전간)과 全收(전수)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然此敎中 以一眞心性對染淨諸法 全揀全收 全揀者 如上所說 但剋體直指靈知卽是心性 余皆虛妄 故云非識所識 非心境等 乃至非性非相 非佛非衆生離四句絶百非也 全收者 染淨諸法 無不是心 心迷故妄起惑業 乃至四生六道雜穢國界 心悟故從體起用 四等六度 乃至四弁十力 妙身淨刹 無所不現 旣是此心現起諸法 故法法全卽眞心 (中略) 將前望此 此則逈異於前 將此攝前 前則全同於此 深心該淺 淺不至深 深者直顯出眞心之體 方於中揀一切收一切也如是收揀自在 性相無애 方於一切法 悉無所住 唯此名爲了義(鎌田本 148頁)
연차교중 이일진심성대염정제법 전간전수 전간자 여상소설 단극체직지령지즉시심성 여개허망 고운비식소식 비심경등 내지비성비상 비불비중생리사구절백비야 전수자 염정제법 무불시심 심미고망기혹업 내지사생육도잡예국계 심오고종체기용 사등육도 내지사변십력 묘신정찰 무소불현 기시차심현기제법 고법법전즉진심 (중략) 장전망차 차칙형이어전 장차섭전 전칙전동어차 심심해천 천불지심 심자직현출진심지체 방어중간일체수일체야여시수간자재 성상무애 방어일체법 실무소주 유차명위료의(겸전본 148頁)
 
이렇듯 宗密은 眞性을 설하는 것으로 敎와 禪에 심천의 차이를 가려냈지만(揀:간) 실은 根源(근원)부터 거두어(收:수) 각각을 인정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全揀門(전간문)과 全收門(전수문)을 통한 宗密의 설에는 심원한 것만을 인정하지는 않는 독자적인 一致說(일치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써 만물을 성립시킨 근거가 필요하였다. 知 또한 그 근거로 이해되었지만, 원래 神會의 주장에서는 다르게 되어 있다. 胡適本(호적본) 神會語錄(신회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自性空寂 空寂體上 自有本智能智 以爲照用 故般若經云 '應無所住而生其心' 應無所住 本的之體 而生其心 本智之用 但莫作意 自當悟入 努力努力(鈴木本 240頁)([裵休拾遺問] 46頁 參照)
자성공적 공적체상 자유본지능지 이위조용 고반야경운 '응무소주이생기심' 응무소주 본적지체 이생기심 본지지용 단막작의 자당오입 노력노력(영목본 240頁) (배휴습유문 46頁 參照)
 
이 글에 국한해서 본다면, 宗密이 말하는 神會의 知(지)란, 차라리 신회에게 있어서는 體(체)로서의 智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종밀은 [裵休拾遺問(배휴습유문)]에서 다음과 같이 洪州宗에 없는 現量顯(현량현)을 荷澤宗에서는 주장한다고 적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且統論敎 有遺顯二門 推其實義 有眞空妙有 究其本心 具體具用 今洪州·牛頭 以拂迹爲至極 但得遺敎之意 眞空之義 雖成其體 失於顯敎之意 妙有之義 闕其用也(前揭 拙稿 46頁)
차통론교 유유현이문 추기실의 유진공묘유 구기본심 구체구용 금홍주·우두 이불적위지극 단득유교지의 진공지의 수성기체 失於顯敎之意 묘유지의 궐기용야(전게 졸고 46頁)
 
이에 대해서는 神會의 [定是非論(정시비론)]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遠法師問禪師 "見佛性不" 和上答言 "見" 遠法師問 "爲是比量見 爲是現量見" 和上答 "比量見" 又責[問]"何者是比 何者是量" 和上答 "所言比者 比於純陀 所言量者 等純陀(胡適本 277頁)"
원법사문선사 "견불성불" 화상답언 "견" 원법사문 "위시비량견 위시현량견" 화상답 "비량견" 우책[문]"하자시비 하자시량" 화상답 "소언비자 비어순타 소언량자 등순타(호적본 277頁)"
 
神會는 佛性(불성)을 보는 것은 比量見(비량견)이라고 답하고 있다.
여기서도 전의 知(지)와 관련해서 신회의 주장과 종밀이 받아들인 그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 문제를 다룬 것으로는 竹內弘道씨의 논문이 있다.
 
두 번째로는 宗密이 파악한 洪州宗에는 문제가 없었는가, 또 그 후 홍주종의 전개에 대해서도 종밀처럼 이해해도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종밀의 비판 상대는 馬祖 道一(709∼788)이었다.
 
馬祖(마조)는 四川省(사천성) 출신으로 淨衆寺 無相(정중사 무상:684∼762)에게 배운 일이 있었고, 본래는 종밀도 같은 법계에 속한다.
 
淨衆寺 無相과 그 계통이라고 말해지는 保唐寺 無住(보당사 무주: 714∼774) 법계를 주장하는 燈史(등사)로는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가 있는데 大曆(대력) 9년(774) 이후에 성립되었다. 宗密이 이 派(파)에서 빠져 나와 神會의 계통을 날조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柳田聖山(유전성산)씨는 그의 논문에서, 宗密은 역대법보기를 적으로 하는 것으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종밀에 관한 문제로서 빼놓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하였다.
 
宗密이 神會와 맞설 사상으로서 歷代法寶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놓쳐버린다면 법계를 날조했던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종밀은 역대법보기의 사상을 어떻게 파악했는가? [大疏抄(대소초)] 권 3하 無住(무주) 집단의 保唐宗(보당종)에 관한 해설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疏有敎行不拘而滅識者 第三家也 其先亦悟祖下分出 卽老安和上也 六十歲出家授戒六十夏 方滅度時年一百二十 故時號老安 安卽名也 爲則天聖后之所師敬 道德深厚志節孤高 諸名德皆難比類 有四弟子 皆道高名著 中有一俗弟子陳楚章 '余三卽騰騰 自在 破龜墮' 時號陳七哥 有一僧名無住 遇陳開示領悟 亦志行孤勁 後遊蜀中 遇金和上開禪 亦預其會 但更諮問 見非改前悟將欲傳之於未聞 意以稟承俗人
소유교행불구이멸식자 제삼가야 기선역오조하분출 즉노안화상야 육십세출가수계육십하 방멸도시년일백이십 고시호노안 안즉명야 위칙천성후지소사경 도덕심후지절고고 제명덕개난비류 유사제자 개도고명저 중유일속제자진초장 '여삼즉등등 자재 파귀타' 시호진칠가 유일승명무주 우진개시령오 역지행고경 후유촉중 우김화상개선 역예기회 단갱자문 견비개전오장욕전지어미문 의이품승속인
 
恐非宜便 遂認金和上爲師 指示法意大同 其傳授儀式與金門下全異 異者謂釋門事相一切不行 剃髮了更掛七條 不受禁戒至於禮懺轉讀畵佛寫經 一切毁之 皆爲妄想 所住之院不置佛事 故云敎行不拘也 言滅識者 卽所修之道也 意謂生死輪轉都爲起心 起心卽妄 不論善惡 不起卽眞 亦不似事相之行 以分別爲怨家 無分別爲妙道 亦傳金和上三句言敎 但改忘字爲妄字 云諸同學錯預先師言旨 意謂無憶無念卽眞 憶念卽妄 不許憶念故云莫妄 毁諸敎相者
공비의편 수인김화상위사 지시법의대동 기전수의식여김문하전이 이자위석문사상일체불행 체발료갱괘칠조 불수금계지어례참전독화불사경 일체훼지 개위망상 소주지원불치불사 고운교행불구야 언멸식자 즉소수지도야 의위생사륜전도위기심 기심즉망 불론선악 불기즉진 역불사사상지행 이분별위원가 무분별위묘도 역전김화상삼구언교 단개망자위망자 운제동학착예선사언지 의위무억무념즉진 억념즉망 불허억념고운막망 훼제교상자
 
且意在息滅分別而全眞也 故所住持 不議衣食 任人供送 送卽暖衣飽食 不送卽任범任寒 亦不求化 亦不乞飯 有人人院 不論貴賤都不逢迎 亦不起動 讚嘆供養 材責損害一切任他 良由宗旨說無分別 是以行門無非無是 但責無心而爲妙極 故云滅識也 上來三家(引用者注 北宗 淨衆宗保唐宗のこと) 根本皆是六祖同學 但傍正之異耳([續藏]卷14, 278cd, 鎌田本 306~307頁 參照)
차의재식멸분별이전진야 고소주지 불의의식 임인공송 송즉난의포식 불송즉임범임한 역불구화 역불걸반 유인인원 불론귀천도불봉영 역불기동 찬탄공양 재책손해일체임타 양유종지설무분별 시이행문무비무시 단책무심이위묘극 고운멸식야 상래삼가(인용자주 북종 정중종보당종のこと) 근본개시육조동학 단방정지이이(속장 卷14, 278cd, 겸전본 306~307頁 參照)
 
그렇다면 이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가 荷澤 神會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신회의 주장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胡適(호적)씨가 다음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神會의 사상에는 확실히 自然主義(자연주의) 경향이 있었다.
 
中國古來的自然哲學 所謂道家 頗影響禪學的思想 南宗之禪 병禪亦不立知解方面則說頓悟 悉行方面則重自然 宗密所謂無修的修 卽是一種自然主義神會此卷中屢說自然之義 如他答馬擇云 僧立因緣 不立自然者 僧之愚過 道士唯立自然 不立因緣者 道士之遇(愚)過 僧家自然者 衆生本性也
중국고래적자연철학 소위도가 파영향선학적사상 남종지선 병선역불립지해방면칙설돈오 실행방면칙중자연 종밀소위무수적수 즉시일종자연주의신회차권중누설자연지의 여타답마택운 승립인연 불립자연자 승지우과 도사유립자연 불립인연자 도사지우(우)과 승가자연자 중생본성야
 
又經 {法華經} [譬喩品] '衆生(有) 自然智·無師智'謂之自然 道士因緣者 道能生一一能生二 二能生三 從三生萬物 因道而生 若其無道 萬物不生 今言萬物者병屬因緣 這是흔明白的承認道家所謂自然和佛家所謂因緣同是一理 至於承認自然智無師智爲自然 這更是指出頓悟的根據在於自然主義 因爲有自然智 故有無修而頓悟的可能 所以神會對王維說 衆生若有修 卽是妄心 不可得解脫 這是純粹的自然主義了(胡適本 52~53頁)
우경 {법화경} [비유품] '중생(유) 자연지·무사지'위지자연 도사인연자 도능생일일능생이 이능생삼 종삼생만물 인도이생 약기무도 만물불생 금언만물자병속인연 저시흔명백적승인도가소위자연화불가소위인연동시일리 지어승인자연지무사지위자연 저갱시지출돈오적근거재어자연주의 인위유자연지 고유무수이돈오적가능 소이신회대왕유설 중생약유수 즉시망심 불가득해탈 저시순수적자연주의료(호적본 52~53頁)
 
이 결론은 이미 소개하였다. 그러면 神會의 사상에서 나온 하나의 極論(극론)이 앞서 보았던 無住(무주)와 같은 破戒(파계)와 自然主義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어떤 典據(전거)에 기초했겠는가? 歷代法寶記에는 [佛頂經(불정경)]이라고 인용되어 있는 首楞嚴經(수능엄경)의 영향이 현저하다.
 
그러나 신회는 수능엄경을 인용하지 않았다. 수능엄경은 역대법보기에 인용된 이래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宗密이 圓覺經(원각경)을 선택했을 때 無相 無住 일파는 頓敎(돈교)의 근거로 首楞嚴經(수능엄경)을 선택했다. 無住는 그 경에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설하였다고 歷代法寶記에서는 말한다.
 
和上引佛頂經云 '狂心不歇 歇卽菩提 勝淨明心 本周法界' 無念卽시
見佛有念卽是生(以上略)(柳田聖山譯注 [初期の禪史]170頁, 筑摩書房, 1976年)
화상인불정경운 '광심불헐 헐즉보제 승정명심 본주법계' 무념즉시
견불유념즉시생(이상략)(유전성산역주 초기の선사 170頁, 축마서방, 1976年)
 
이것은 [首楞嚴經(수능엄경)] 卷4에 명확하게 나온다.
 
佛言 妙覺明圓 本圓明妙 旣稱爲妄 云何有因 若有所因 云何名妄 自諸妄想 展轉相因 從迷積迷 以歷塵劫 雖佛發明 猶不能返如是迷因 因迷自有 識迷無因 妄無所依 尙無有生 欲何爲滅 得菩提者 如寤時人 說夢中事 心縱精明 欲何因緣 取夢中物 況福無因 本無所有 如彼城中演若達多
불언 묘각명원 본원명묘 기칭위망 운하유인 약유소인 운하명망 자제망상 전전상인 종미적미 이역진겁 수불발명 유불능반여시미인 인미자유 식미무인 망무소의 상무유생 욕하위멸 득보제자 여오시인 설몽중사 심종정명 욕하인연 취몽중물 황복무인 본무소유 여피성중연야달다
 
豈有因緣 自怖頭走 忽然狂歇 頭非外得 縱未歇狂 亦何遺失 富樓那 妄性如是 因何爲在汝但不隨分別世間業果生三種相續 三緣斷故 三因不生 則汝心中演若達多狂性自歇 歇卽菩提 勝淨明心 本周法界 不從人得 何籍구勞 肯계修證(以下略) ([大正藏] 卷19, 121b 荒木見悟 譯注 [楞嚴經] 307頁 參照, 筑摩書房, 1986年)
기유인연 자포두주 홀연광헐 두비외득 종미헐광 역하유실 부루나 망성여시 인하위재여단불수분별세간업과생삼종상속 삼연단고 삼인불생 칙여심중연약달다광성자헐 헐즉보제 승정명심 본주법계 불종인득 하적구노 긍계수증(이하략) (대정장 卷19, 121b 황목견오 역주 능엄경 307頁 參照, 축마서방)
 
[역대법보기]에 수능엄경을 인용했다는 것이 벌써 破戒(파계)와 自然主義(자연주의)가 생겨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宗密은 여기에 逐機頓(축기돈)이 빠져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宗密도 首楞嚴經(수능엄경)을 많이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능엄경과 하나의 획을 긋고 圓覺經(원각경)을 중시한 것이다.
 
그런데 四川 시절의 宗密은 神會의 사상을 곡해해서 받아들인 [역대법보기]로부터 결별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의 선종교단 가운데서도 그와 유사한 사상을 가진 洪州宗이란 최대의 교단이 있었고, 그 派의 시조였던 馬祖 道一 또한 四川 집단의 흐름을 조직하였는데 이 집단도 [수능엄경]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다시 종밀은 洪州宗(홍주종)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六祖 慧能(혜능)의 제자로 南陽 慧忠(혜충:남양 혜충: ?∼776)이 있다. 그는 南方의 禪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景德傳燈錄(경덕전등록) 권 28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南陽慧忠國師問禪客 "從何方來" 對曰 "南方來" 師曰 "南方有何知識" 曰 "知識頗多" 師曰 "如何示人" 曰 "彼方知識直下示學人 '卽心是佛 佛是覺義汝今悉具見聞覺知之性 此性善能揚眉瞬目 去來運用遍於身中 擡脚脚知 故名正遍知離此之外 更無別佛 此身卽有生滅 心性無始以來未曾生滅身生滅者 如龍換骨蛇脫皮 人出故宅 卽身是無常 其性常也' 南方所說大約如此"
남양혜충국사문선객 "종하방래" 대왈 "남방래" 사왈 "남방유하지식" 왈 "지식파다" 사왈 "여하시인" 왈 "피방지식직하시학인 '즉심시불 불시각의여금실구견문각지지성 차성선능양미순목 거래운용편어신중 대각각지 고명정편지리차지외 갱무별불 차신즉유생멸 심성무시이래미증생멸신생멸자 여룡환골사탈피 인출고택 즉신시무상 기성상야' 남방소설대약여차"
 
師曰 "若然者 與彼先尼外道無有差別 彼云 '我此身中有一神性 此性能知痛양 身壞之時神卽出去 如舍被燒舍主出去 舍卽無常 舍住常矣' 審如此者邪正莫弁 孰爲是乎 我比遊方多見此色 近尤盛矣 聚却三五百衆 目視雲漢 云是南方宗旨 把他壇經改換 添유鄙譚 削除聖意惑亂後徒 豈成言敎 苦哉 吾宗喪矣 若以見聞覺知是佛性者 淨名不應云 '法離見聞覺知 若行見聞覺知 是則見[一]聞覺知 非求法也 (禪文化硏究所刊本 571頁)'"
사왈 "약연자 여피선니외도무유차별 피운 '아차신중유일신성 차성능지통양 신괴지시신즉출거 여사피소사주출거 사즉무상 사주상의' 심여차자사정막변 숙위시호 아비유방다견차색 근우성의 취각삼오백중 목시운한 운시남방종지 파타단경개환 첨유비담 삭제성의혹난후도 기성언교 고재 오종상의 약이견문각지시불성자 정명불응운 '법리견문각지 약행견문각지 시칙견[일]문각지 비구법야 (선문화연구소간본 571頁)'"
 
慧忠(혜충)이 남방의 종지를 비판한 내용은 作用卽性說(작용즉성설)과 心常相滅說(심상상멸설) 두 방면으로 전개된다. 作用卽性說이란 見聞覺知(견문각지)의 움직임(煩惱:번뇌) 그대로가 佛性(菩提:보리)이라는 설이고
 
心常相滅說이란 영혼은 멸하지 않고 육체는 멸한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미혹을 깨달음이라 착각하고 후자는 無我說(무아설)에 위배되므로 둘 다 불교의 교설이 아니다.
 
作用卽性說은 이미 보았던 [裵休拾遺問(배휴습유문)]에서 말하는 洪州宗의 교설과 일치한다. 필자는 혜충이 말하는 남방종지를 홍주종의 주장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作用卽性說의 근거로 首楞嚴經(수능엄경) 권 1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阿難言 "見是其眼 心知非眼 爲見非義" 佛言 "若眼能見 汝在室中 門能見不 卽諸已死 尙有眼存 應皆見物 若見物者 云何名死 阿難 又汝覺了能知之心 若必有體 爲復一體 爲有多體 今在汝身 爲復遍體 爲不遍體 若一體者 則汝以手擡一支時 四支應覺 若咸覺者 擡應無在 若擡有所 則汝一切 自不能成若多體者 則成多人 何體爲汝 若遍體者 同前所擡 若不遍者 當汝觸頭 亦觸其足 頭有所覺 是應無知 今汝不然 是故應知 '隨所合處 心則隨有' 無有是處([大正藏] 卷19, 108a 荒木見悟譯注, [楞嚴經] 38~39頁 參照)"
아난언 "견시기안 심지비안 위견비의" 불언 "약안능견 여재실중 문능견불 즉제이사 상유안존 응개견물 약견물자 운하명사 아난 우여각요능지지심 약필유체 위복일체 위유다체 금재여신 위복편체 위불편체 약일체자 칙여이수대일지시 사지응각 약함각자 대응무재 약대유소 칙여일체 자불능성약다체자 칙성다인 하체위여 약편체자 동전소대 약불편자 당여촉두 역촉기족 두유소각 시응무지 금여불연 시고응지 '수소합처 심칙수유' 무유시처(대정장 卷19, 108a 황목견오역주, 능엄경 38~39頁 參照)"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늘 오해가 따른다. 首楞嚴經(수능엄경) 전편에 걸쳐서 틀린 作用卽性說(작용즉성설)을 설하고 있는 곳은 물론 없다.
 
이 경에서는 心은 身 안에도 身 밖에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心이 對境(대경)과 합치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곳도 있다. 作用卽性說은 오히려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권 10 本無因(본무인)과 末無因2無因 가운데 末無因(말무인)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二者 是人見末無因 何以故 是人於生旣其根 知人生人 悟鳥生鳥 鳥從本黑 鵠從來白 人天本수 畜生本橫 白非洗成 黑非染造 從八萬怯無復改移 今盡此形亦復如是 而我本來不見菩提 云何更有成菩提事 當知 今日一切物象 皆本無因由此計度 亡正遍知 墮落外道 惑菩提性 是則名爲第一外道立無因論([大正藏] 卷19, 151c)
이자 시인견말무인 하이고 시인어생기기근 지인생인 오조생조 조종본흑 곡종래백 인천본수 축생본횡 백비세성 흑비염조 종팔만겁무복개이 금진차형역복여시 이아본래불견보제 운하갱유성보제사 당지 금일일체물상 개본무인유차계도 망정편지 타락외도 혹보제성 시칙명위제일외도립무인론(대정장 卷19, 151c)
  
여기서 부정되는 外道說(외도설)만이 本來性品(본래성품)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설이 되고 作用卽性說로 전개된다. [수능엄경]은 作用卽性說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首楞嚴經]은 荒木見悟(황목견오)씨가 그의 저서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頓悟說(돈오설)이라기 보다 오히려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권 10의 다음 구절은 이 경이 그 후 頓悟漸修論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理則頓悟 乘悟倂鎭 事非頓除 因次第盡(同155a)
이칙돈오 승오병진 사비돈제 인차제진(同155a)
  
宗密(종밀)도 圓覺經(원각경) [寶賢菩薩章(보현보살장)]의 漸修證(점수증)의 用心(용심)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首楞嚴經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願爲末世一切衆生作何方便 漸次修習 令諸衆生永離諸幻
원위말세일체중생作何方便 점차수습 영제중생영리제환
解曰 上遮不修之失 已知決定應修 故問對治之門 如何永離諸幻[起信]論云 '若人雖念眞如不以方便 種種熏習終無得淨' 首楞曰 '理則頓悟 乘悟倂消事非頓除 因次第盡' 對於잠離 故言永離 謂初觀一體 雖覺全眞 後遇八風 粉然起妄 行如窮子 解似電光([續藏] 卷141, 37d)
해왈 상차불수지실 이지결정응수 고문대치지문 여하영리제환[기신]논운 '약인수념진여불이방편 종종훈습종무득정' 수릉왈 '이칙돈오 승오병소사비돈제 인차제진' 대어잠리 고언영리 위초관일체 수각전진 후우팔풍 분연기망 행여궁자 해사전광(속장 卷141, 37d)
 
이렇게 본다면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를 편집한 집단이나 洪州宗(홍수종)과 대립한 宗密(종밀)의 주장에 편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상 두 가지 점에서 종밀의 설을 고찰해 보았지만, 종밀의 강렬한 주장에는 억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荷澤宗과 洪州宗을 결부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종밀은 논리적 整合性(정합성)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 宗密이 던진 문제는 그 후의 禪宗史(선종사)에서 늘 두 가지 중요한 과제를 낳았다.
 
1. 禪(선)에 있어서 修(수)와 證(증)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2. 本來成佛(본래성불)과 自然外道(자연외도)와는 어떻게 다른가?

종밀은 종밀 나름대로 頓悟漸修論(돈오점수론)에서 그 답을 찾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法系(법계)를 僞稱(위칭)하면서까지 주장한 시조 荷澤 神會는, 法眼文益(법안문익)에 의해 [關燈會要(관등회요)] 권 2 六祖 慧能章(혜능장)에서 다음과 같이 부정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示衆云 "吾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無背無面 諸人還職마" 時荷澤神會出云 "是諸法之本源 乃神會之佛性" 師打一棒云 "這饒舌沙彌 我喚作一物尙不中豈本源佛性 此子向後 設有把묘蓋頭 也只成得箇知解宗徒"
시중운 "오유일물 무두무미 무명무자 무배무면 제인환직마" 시하택신회출운 "시제법지본원 내신회지불성" 사타일봉운 "저요설사미 아환작일물상불중기본원불성 차자향후 설유파묘개두 야지성득개지해종도"
法眼云 "古人受記人 終是不錯 如今立知解爲宗 卽荷澤也([續藏] 卷136, 231c)"
법안운 "고인수기인 종시불착 여금립지해위종 즉하택야(속장 卷136, 231c)"
 
法眼의 이 말은 고문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하택 신회에 대한 비판이 南宗禪(남종선) 안에서 생겨났다는 점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비판의 내용이, 신회를 知解宗徒(지해종도)라고 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華嚴宗(화엄종)에도 속했던 宗密이 荷澤宗을 높히 평가하여 위치지우고 나서부터는 더했을 것이다. 그 비판의 일단이 景德傳燈錄(경덕전등록) 권 5 [靑原行思章(청원행사장)]에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荷澤神會來參 師問曰 "什마處來" 會曰 "曹鷄" 師曰 "曹鷄意旨如何" 會振身而已 師曰 "猶滯瓦礫在" 曰 "和尙此間莫有眞金與人否" 師曰 "設有與汝向什마處著"
하택신회래참 사문왈 "십마처래" 회왈 "조계" 사왈 "조계의지여하" 회진신이이 사왈 "유체와력재" 왈 "화상차간막유진김여인부" 사왈 "설유여여향십마처저"
玄沙云 "果然(禪文化硏究所本 76頁)"
현사운 "과연(선문화연구소본 76頁)"
 
이것은 분명히 荷澤宗(하택종)에 대한 靑原系(청원계)의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주장이 있다. 小川隆씨(소천륭)에 의하면 敦煌本(돈황본) 六祖壇經(육조단경)에 이미 神會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어서 흥미롭고,
 
또 신회가 죽은 뒤 그의 계통을 이어받을 사람들이 남북 융합의 입장을 내걸었다고도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교단으로서의 荷澤宗이 소멸해 갔다는 점은 몇번이나 언급해 온 것이다.
 
여기까지 검토해 온 것은 한정된 시대와 그 사이에 존재했던 문헌에 나타난 頓悟思想이다.
頓悟漸修는 종밀의 주장으로 해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그 하나의 결론이다. 동시에 頓悟頓修(돈오돈수)는 종밀의 분류로는 洪州宗(홍수종)에 속하고, 馬祖語錄(마조어록)의 한 면 밖에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頓悟頓修는 頓悟漸修의 입장에 섰던 宗密의 비판적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당시의 頓悟漸修(점수)이고 頓悟頓修(돈수)였다. 그러면 洪州宗의 주장은 무엇이며, 그 후 홍주종의 주장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잘라 말해서, 臨濟錄(임제록)에 그 결론이 보인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師 云衆云 "道流 佛法無用空處祗是平床無事 아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愚人笑我 智乃知焉 古人云 '向外作工夫 總是癡頑漢' 이且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回換不得 縱有從習氣 五無間業 自爲解脫大海(入矢義高譯 [臨濟錄]50~51頁, 岩波文庫)"
사 운중운 "도류 불법무용공처지시평상무사 아시송뇨 저의끽반 곤래즉와 우인소아 지내지언 고인운 '향외작공부 총시치완한' 이차수처작주 입처개진 경래회환불득 종유종습기 오무간업 자위해탈대해(입시의고역 임제록 50~51頁, 암파문고)"
 
이것이 唐代(당대) 禪(선)의 특색인 無事禪(무사선)이다. 이것을 과연 頓悟頓修(돈수)로 분류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 종밀이 분류한 돈오돈수의 범주에는 이미 들어가지 않는다. 종밀이 이 설법을 들었다면, 앞서
 
活潑潑(활발발), 一切時中總是禪(일절시중총시선 : 柳田本;유전본, 304항, 291항 참조)이라 한 歷代法寶記의 설을 圓覺經疏(원각경소)에서 故所住持(고소주지), 不議衣食(불의의식), 任人供送(임인공송),
 
送卽曖衣飽食(송즉애의포식), 不送卽飢任寒(불송즉기임한), 亦不求化(역불구화), 亦不乞食(역불걸식) [前出(전의), 鎌田本(겸전본) 307항])과 여결시켰던 데서와 같이 반드시 되풀이 해서 비판할 것이 틀림없다.
 
宗密은 그것을 破戒(파계)라고 보았지만 禪宗은 慧能의 전통을 따라서 無相戒(무상계)라고 주장한다.
 
주체적인 本來自己(본래자기)는 부처의 그것과 아무틈없이 동등하게 위치한다. 이것이 洪州宗의 주장으로부터 발단해서 禪宗(선종:南宗禪) 卽心卽佛[즉심즉불:마음 그대로가 부처다]의 핵심으로 전개된 것이다.
 
부처도 수행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佛向上人(불향상인)의 자유자재한 作業이었다.
臨濟(임제)가 말하는 無事禪(무사선)은, 黃檗(황벽)의 佛法無多子(불법무다자: 黃檗의 불법이 평상과 딱히 다를 것이 없다)라고 하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필자는 일찍이 이것을 계錯承當禪(계착승당선: ···禪)이라고 명명한 바 있지만, 그때 말한 대로, 禪 그 자체는 分類(분류)라는 것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나 한다. 분류를 거부하는 그런 선을 필자는 계錯承當禪(계착승당선)이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현대에 전승된 선은 宋代(송대)에 와서 다시 크게 변한다.
그것은 大慧 宗고(대혜 종고: 1089∼1163)에 의해 집대성된 看話禪(간화선)의 성립이다. 만일 機關禪(기관선)의 예리함을 두고 頓悟頓修(돈오돈수)라 부르는 것이라면 필자는 그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이 논문의 과제에서 벗어나므로 여기서는 다음 [寶慶記(보경기)]의 설로 필자의 의견을 대신 보여주므로써 끝을 맺고자 한다.
 
道元排問 "今諸方古今長老等云 '聞不聞見不見 直下無一點計較 乃佛祖道也' 是以竪拂 放喝行棒 敎學者無一卜度 遂則不問佛化之始終 無期二生之感果 之等如是等類 可爲佛祖之道耶"
도원배문 "금제방고금장로등운 '문불문견불견 직하무일점계교 내불조도야' 시이수불 방갈행봉 교학자무일복도 수칙불문불화지시종 무기이생지감과 지등여시등류 가위불조지도야"
 
和尙示云 "若無二生者 實是斷見外道也 佛佛祖祖 爲人設敎 都無外道之言說 若無二生 乃不可有今生也 此世旣存 何無二生 我당久是佛子 何等外道又如敎學人直下無第二點者 佛祖一方之善巧方便也 非爲學人而無所得也 若爲無所得 不可參問善知識也 諸佛不出世也 唯要直下見聞便了 更無信及 更無修證者 北州豈佛化耶 北州豈無見聞覺知耶(大久保道舟編 [道元禪師全集]卷下, 372, 筑摩書房, 1970年)"
화상시운 "약무이생자 실시단견외도야 불불조조 위인설교 도무외도지언설 약무이생 내불가유금생야 차세기존 하무이생 아당구시불자 하등외도우여교학인직하무제이점자 불조일방지선교방편야 비위학인이무소득야 약위무소득 불가참문선지식야 제불불출세야 유요직하견문편료 갱무신급 갱무수증자 북주기불화야 북주기무견문각지야(대구보도주편 도원선사전집 卷下, 372, 축마서방, 1970年)"
 
南宗禪の頓悟思想の展開에 대한 논평(남종선の돈오사상の전개에 대한 논평)   길희성(서강대 교수)
 
선 불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도오사상에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돈오사상의 핵심은 부처가 되는 것이 인간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오랜 수행 끝에 비로소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부처이며 우리는 다만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돈오사상의 기초는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 별도의 세계로 간주하던 소승불교로부터 生死卽涅槃(생사즉열반)을 말하는 대승으로 넘어갈 때 이미 확고하게 놓여졌지만, 그래도 인도 불교의 요가적 修定主義(수정주의)가 과감하게 극복된 것은 가장 중국적 불교로 간주되는 禪 불교에서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선'이란 이름은 바로 禪定(선정: dnyana)을 뜻하는 말이지만 중국의 선 불교는 바로 이 선정을 닦는 불교의 오랜 전통에 반기를 들면서 그 가장 특징적인 혁명적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胡適(호적)의 말대로 중국선은 선이 아닌 것이다.
 
인도적 수정주의에 대한 중국선의 이와 같은 반란, 다시 말해 修(수)로부터 悟(오)로의 급격한 전환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荷澤 神會(하택신회)라는 인물이었다는 데에 오늘날 학자들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石井修道(석정수도) 교수의 논문은 바로 이 신회의 돈오사상, 그 성격과 수행과의 관계를 그의 壇語(단어), [南宗定是非論(남종정시비론)] 神會語錄(신회어록)의 핵심적 부분들을 인용하여 고찰하는 가운데 신회의 사상이 북종의 이른바 점수주의 내지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형성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신회 사상을 둘러싼 일본 학자들의 최근 연구들도 친절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石井(석정) 교수의 주장 가운데 우리에게 주목을 끄는 것은 돈오점수 사상은 신회의 본래적 입장이라기 보다는 수행을 무시한다는 북종선의 비판에 따라 수정된 입장이며 신회 자신으로서는 그다지 중요한 이론이 못된다는 견해이다.
 
일종의 추측임을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으나, 신회가 아무리 깨달음을 강조했다 하더라도 과연 수행의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의 강한 '자연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수행이란 깨달음과 실천 본래성과 현실성, 본질과 실존의 괴리가 존재하는 한 인간 존재에 있어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을까?
 
종밀은 [都序(도서)]에서 曹溪(조계)와 荷澤(하택)이 住心調伏(주심조복)의 병만 제거한 것이니 坐禪(좌법)의 법 자체를 제거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錢田茂雄(전전무웅) 본, [禪의 語錄(어록)] 9. 116쪽).
 
물론 자신의 돈오점수론적 입장을 반영한 말이라 여겨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신회 이후 南宗禪(남종선)이 과연 좌선 수행을 완전히 거부했는지 의심스럽다.
 
石井 교수는 신회에 이어서 洪州宗, 馬祖 道一의 돈오사상을 고찰하면서 어째서 규봉 종밀이 실제로 하택종의 계보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법맥을 날조해 가면서까지 하택종을 선택했을까 하는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그것은 종밀이 돈오점수론에 의한 선교일치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종밀은 禪에서는 하택종, 그리고 敎에서는 圓覺經(원각경)을 가장 높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여 양자의 일치를 선교일치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논증하기 위하여 종밀은 원각경을 돈오점수본을 중심으로 하여 일방적으로 해석했으며, 홍주종에 대하여도 공정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음을 石井 교수는 치밀한 분석을 통하여 지적하고 있다.
 
종밀은 저자가 지적하듯이 홍주종을 명시적으로 돈오돈수의 범주에 넣고 있지마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홍주종이 점수를 결하고 있다는 비판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함의 근본 원인은 종밀에 의하여 결국 홍주종이 불성의 體(체)와 用(용), 특히 自性用(자성용)과 受用(수용)을 명확하게 식별하는 통찰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見聞覺知(견문각지)의 일상적인 행위 모두를 무조건적으로 불성의 작용으로 보아 근본적으로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종밀이 본래 淨衆寺(정중사), 無相(무상) 계통에 속하면서도 하택종을 선택하고, 나아가서 무상 밑에서 수학한 바 있는 馬祖 道一의 선을 비판한 것은 石井 교수 자신의 분석대로 모두 그가 수행을 무시한 지나친 자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밀이 홍주종보다 하택종을 선택한 것은 선교일치를 논증하기 위한 필요에서라기보다는 수행의 절실한 필요성에 대한 종밀 자신의 실존적 체험과 선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종밀은 병든 자가 병의 아픔이 空(공)함을 알아도 약으로 대치하여야 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말하기를
 
'모름지기 알지니, 貪(탐)과 瞋(진)이 언제나 空하나 능히 業(업)을 일으키며, 업 또한 공하나 능히 苦를 초래하며, 고 또한 공해도 그토록 참기 어려운 것이다({도서} 鏡田茂雄(경전무웅) 본, 248쪽)' 실로 암시하는 바가 큰 말이라 생각된다.
 
사실, 선교일치를 논하는 [都序(도서)]에서는 종밀은 하택종과 홍주종을 같은 直顯心性宗(직현심성종)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선의 올바른 실천을 논하는 法集別行錄(법집별행록) 혹은 禪門師資承襲圖(선문사자승습도)에서 그가 단호하게 양자의 우열을 구별해야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에 대한 절실한 요청, 그리고 수행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石井(석정) 교수는 종밀의 '知(지)'개념이 신회의 사상-신회는 '智'라고 부르는-과 다르다고 말하나, 신회가 말하는 智는 경험적 智나 證悟(증오)의 智가 아니라 自性(자성)상의 本智(본지)로서 종밀의 '知'와 마찬가지로 體 상의 用, 즉 自性用(자성용)이다.
 
이것은 결코 신회나 종밀의 독창적 사상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眞如(진여)가 광명 혹은 照性(조성)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화엄경이나 기신론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종밀 스스로가 [도서]에서 '知'개념과 관련하여 이 두 경전을 언급하고 있다 132쪽). 起信論(기신론)의 本覺에 해당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하택 신회와 규봉 종밀에 대한 후대 선가의 평가가 어떠하든 논평자의 생각으로는 종밀은 신회의 사상에 진심으로 감복했으며 그것을 비교적 충실히 전수했다고 여겨지며, 또 종밀의 홍주종에 대한 평가도 지나치게 단순화 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는 크게 왜곡되지 않았다고 본다.
 
신회나 종밀 모두 돈오적 자연주의의 해방적 힘을 분명히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의 문제로 다가오는 현실적 괴로움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수행의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수행은 반드시 悟後修(오후수)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것이 돈오점수이든 돈오돈수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깨달음 후에는 아니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수행이 뒤따라야만 한다고 그들은 믿었으며,
 
아마도 이 믿음은 선불교 내에서든 혹은 인간 존재에 관한 일반적 진리의 관점에서 보든 지금까지도 그 타당성은 인정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石井 교수의 논문은 풍부한 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선종사의 전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신회와 종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논평에 대한 답변                 石井修道
 
돈오돈수가 이 모임의 주제인데 저는 당나라 시대의 자료들을 분석하는 문헌적인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문헌적인 것을 분석하는 데에서 어떤 것은 상당히 생략한 부분이 있다고 본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선도 남종선에 속하고 주로 하택, 종밀을 잘못 이해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택, 종밀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사정으로 보아 종밀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보면 신회와 종밀을 현대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놓고 이야기할 때 현실 문제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으로는 돈오돈수 또는 돈오점수를 분류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하는 것보다는 지금 길희성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실존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분류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종밀에게도 [도서]라는 책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선종의 독특한 선법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회 등의 말에 인도 요가의 전통에서 벗어나 중국선으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종밀에게서도 선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형식에 얽매인 좌선은 안했을 지 모르지만 잘 아시는 것처럼 회양과 마조도일의 기왓장 가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걸로 봐서는 형식을 벗어난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참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선이 아니라 일반생활에 뿌리를 내린 그런 생활선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것은 선을 전문으로 하는 선수행자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생활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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