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마지막 게송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여라.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신광(神光)이 불매(不昧)하야 만고휘유(萬古徽猷)니
입차문래(入此門來)에 막존지해(莫存知解)어다.
아주 이런 멋진 문장으로 마무리를 했어요.
주해를 보면,
거룩한 빛, 신광(神光)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첫머리의 ‘밝고 신령하다.’는 것을 맺는 것이고, 또 만고에 빛난다는 것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았다.’는 것을 맺는 것이며, 또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하는 것은 ‘이름에 얽매어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을 맺는 것이다.
선가귀감의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들이죠.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이런 말을 했죠.
그 말과 지금 끝나는 말, 그러니까 맨 첫마디의 말과 지금 맨 마지막 말이 서로 상통한다는 거죠. 수미일관(首尾一貫)이라. 그래서 주해를 이렇게 달아 놓은 거예요.
여기서 ‘문’이라는 것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는데,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이른바 ‘안다’는 한마디 말이 온갖 깊은 이치의 문이라고 했다.
지지일자(知之一字) 중묘지문야(衆妙之門也)라.
‘안다’는 한마디 말이 뭇 묘한 이치의 문이다.
이렇게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가 얘기한 바가 있죠.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는 데서 시작해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맺으니.그렇죠. 선가귀감의 맨 첫 구절이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이렇게 되어 있죠.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하야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며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이라.’ 이렇게 시작했어요.
그래가지고 지금 맨 끝에 ‘신광(神光)이
불매(不昧)하야 만고휘유(萬古徽猷)니 입차문래(入此門來)에 막존지해(莫存知解)어다.’
이렇게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처럼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이로다.’로 시작해서 ‘입차문래(入此門來)에 막존지해(莫存知解)어다.’ 지해(知解)라는 것은 알음알이입니다.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맺으니, 한데 얽힌 넝쿨을 한마디 말로 끊어버렸다.
넝쿨을 탁 수미일관하게 끊어버렸다는 거죠.
한 알음알이로써 시작과 끝을 삼고 중간에는 온갖 행동을 들어보였다. 더구나 알음알이는 불법에 큰 해가 되므로 특별히 들어 마친 것이다. 하택 선사가 조계의 맏아들이 되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렇게 주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택 선사는 ‘지지일자(知之一字) 중묘지문야(衆妙之門也)라.
안다는 한 글자가 뭇 오묘함의 문이다.’
이렇게 해서 조계의 맏아들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보는 거죠.
또 선사들은 이것을 지지일자(知之一字) 중화지문(衆禍之門)이라. 이렇게 거꾸로 이야기 합니다.
‘안다는 한 글자가 뭇 화의 재앙의 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선가의 입장이고,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하택의 입장이다.
알음알이를 놓아야 된다. 그래서 한 마디로 참선을 위해서는 분별심을 쉬어야 된다.
이런 말이 되겠죠. 그러나 분별심을 쉰다는 것은 판단을 유보(留保)한다는 거예요.
‘판사가 되지 말고, 관찰자가 되어라.’ 이런 소리가 되는 거죠.
이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또는 이익이냐 손해냐? 장점이냐 단점이냐? 이렇게 따지다 보면 분별력이 오히려 떨어지게 되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 작은 것을 탐하다 보면 큰 것을 잃어버린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래서 오히려 분별심이 쉬어질수록 분별력은 증장한다. 마치 흙탕물에 흙이 가라앉아야 맑고 투명한 물이 되어서 밑바닥이 전체적으로 다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송(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같이 들어 보여 종지(宗旨)를 밝혔다면 눈 푸른 달마 스님 한바탕 웃었으리.
하하~. 지금까지 이렇게 한 말들 달마 스님이 봤다면 한바탕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경(畢竟)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돌(咄)!
이렇게 해 놓고,
휘영청 달이 밝아 강산은 고요한데, 터지는 웃음소리 천지가 놀라겠네.
고륜독조강산정(孤輪獨照江山靜)하니 자소일성천지경(自笑一聲天地驚)이로다.
고륜(孤輪) 외로운 바퀴가 - 달을 뜻하죠. - 독조(獨照) 홀로 비추어서, 강산정(江山靜)하니 강과 산이 고요하니, 자소(自笑) 스스로 웃는 일성(一聲) 한 소리가 천지경(天地驚)이로다, 천지가 경악(驚愕)한다.
완전히 알음알이를 끊어주는 그 한바탕 멋진 웃음소리죠.
폭소(爆笑), 파안대소(破顔大笑) 이걸 해가지고 ‘휘영청 달이 밝아 강산은 고요한데, 터지는 웃음소리 천지가 놀라겠네.’
이거 뭐 할 말이 없죠. 본래면목 자리에서 보자면 일체가 다 본마음 참나이고, 이미 온전한데, 사실은 분별심으로써 이런 말 저런 말을 붙인다는 게 군더더기에 불과할 뿐이죠. 그저 한 마디 한다면 터지는 웃음소리를 내면 될 뿐이다. 이런 멋진 게송으로 마무리를 지었고요.
맨 마지막에 발문(跋文: 책의 본문 끝에 그 내용의 대강이나 또는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보면, 이 글은 조계 노화상(曹溪 老和尙) 퇴은(退隱) 큰스님께서 지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지은 것이다. 이백 년을 내려오면서 불교가 줄곧 쇠잔하여. 이게 조선시대에 들어서 불교가 쇠잔해지기 시작한 것을 뜻합니다.
선(禪)과 교(敎)의 무리들이 저마다 다른 소견을 내게 되었구나. 교(敎)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찌꺼기에만 맛을 붙여 한갓 바닷가의 모래만 셀 뿐, 다섯 교문 위에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스스로 깨쳐 들어가게 하는 길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선(禪)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천진된 것만 믿어 닦고 깨치는 것을 우습게보고, 단박 깨친 뒤에야 참으로 발심하여 온갖 행을 닦는 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선과 교가 뒤섞여 넘치고 모래와 금을 가리지 못하니, <원각경>에 이르되,
“본래 성불이라는 말을 듣고, 모르는 것이나 깨치는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 하여, 인과도 집어치우는 것은 사특한 소견이고, 오랫동안 닦아서 무명을 끊는다는 말을 들으면 참 성품이 망념을 내는 것이라 하여 떳떳한 성품을 잃어버린 것 또한 사특한 소견이다.”라고 한 말이 이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이나 교에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침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해서 이 글을 지었다.
이렇게 발문(跋文)을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여러분들이 사명대사로 알고 있는 이 분이 바로 서산대사의 제자이죠. 이 분이 발문을 지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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