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최고 강백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 스님
취재 / 전현자 (미주 현대불교 한국 주재기자)
자현 스님은 동국대학교 철학과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율장)와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건축) 그리고 고려대학교 철학과(선불교)와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한국 고대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한국 연구재단 등재지에 150여 편의 논문을 수록했다. 매년 국내 인문학자 중 가장 많은 학진 등재 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에 재직 중이며 월정사 교무국장, 사단법인 한국불교학회 법인이사,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아사리,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유튜브의 ‘붓다 로드’ , ‘자현 스님의 쑈 댕기기’ 등을 통해서 전문적이면서 해박한 지식을 쉽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강연자로 유명하다.『불교미술 사상사론』(학술원 우수 학술도서), 『사찰의 상징세계』(문광부 우수 교양도서), 『붓다 순례』(세종 도서 교양 부문), 『스님의 비밀』(세종 도서 교양 부문), 『불화의 비밀』(세종 도서 교양 부문) 등 4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기자: 자현 스님!, 저는 미주 현대불교 한국 주재 기자 전현자입니다.
먼저, 우리 스님의 머리를 좀 재겠습니다. 스님의 머리는 가로가 14.5센티쯤 되고...
세로가 24.5센티쯤 됩니다. 보통사람의 뇌는 몸무게의 2퍼센트 정도 해당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스님의 뇌가 어떠하기에, 그렇게 많이 아시는지 너무 궁금해서 자를 가져와 스님의 머리를 일단 쟀습니다. 몸무게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스님: 글쎄, 제가 머리가 좋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기자: 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신다고요?
스님: 제 공부법 책은 제가 머리가 나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새로운 기억법이나 공부방법 등이 나오게 된 것이 설명된 책입니다. I.Q는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떨어지는데요.
기자: 지나친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만 들립니다.
스님: 글쎄요. (웃음)
기자: 스님의 머리가 보통이시라면, 어떤 공부법을 개발하셨기에 그렇게나 공부를 잘하셨는지요?
스님: 기억하는 것에는 두 가지로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는 단어나 세부적인 것들을 잘 기억하는 분들, 그런 분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이 잘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석, 박사 들어가면, 흐름을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거시적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기억력을 필요한 것인데 즉 흐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단어, 인명, 연도나 이런 단편적인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사건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기자: 흐름을 말씀하시니 월정사의 역사적 흐름도 있을 테고, 또 스님의 삶의 흐름도 있겠습니다.
먼저 월정사의 흐름인, 역사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스님: 월정사야 자장 스님께서 진덕 여왕 때. 나중에 선덕여왕 하고 이렇게 협업을 하셔서, 어떻게 보면 국가의 기틀을 세우시다가 선덕 여왕이 약간 비극적으로 돌아가시게 되거든요, 맨 마지막에 비담의, 염종의 난에 의해서 그 난의 과정에서 약간 애매하게 돌아가셨죠. 살해당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냥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있고요.
그 과정에서 정권을 잡게 되는 게 비담이라는 분이 그 당시 상대등이었었고, 그러니까 요즘으로 하면 국무총리였었고 그다음 왕위 계승자였어요.
그런데 그것을 김유신, 김춘 추계가 이기면서 결국은 김춘추의 흐름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그게 신라 중대의 왕조고 그 과도기에 속하는 게 진덕 여왕입니다.
그리고 선덕 여왕과 협조했던 세력들은 전부 물러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자장율사가 신라에서 이쪽(명주)으로 오시게 되었는데 그 당시는 ‘하슬라’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 동네에 불교를 개척하셨고, 또 그 당시에 고구려가 남하하려고 하는 문제들도 있었어요. 그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통해서 이 동네를 좀 안정시켜야 했는데 이유는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사람들의 불안 심리 때문에 정신적 안정이 필요해서 명주 불교를 개척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 동네에 상원사를 창건하고, 정암사라든지, 수다사라든지 많은 절들이 만들어집니다. 실제로 보궁을 보면 대부분의 보궁이 강원도 쪽에 있죠.
기자: 네 그런 역사가 있군요
스님: 오대 보궁 중에서 통도사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가 강원도에 있는데 자장 스님하고 관련된 유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장 스님을 조금 넘어가서 중요한 인물로는 나옹 스님입니다. 나옹 혜근 스님이 여기서 주석을 하셨고, 오대산의 북대 쪽이 조계종의 시작점입니다. 홍수 스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에, 지금 현재 조계종의 법맥 즉 조선 후기에 만들어지는 법맥에 보면 나옹 스님이 시작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또 조선 전기까지는 나옹 스님이 시조였었고 조선 후기가 되면, 태고 보우 스님이 시조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둘 다 하남 홍수 스님은 필수적인 인물이에요. 그런데 하남 스님의 비문에 의하면 북대에서 나옹 스님 법을 받은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 북대가 지금 현재 조계종의 시작점이라고 보면 되고, 그런 것과 관련돼서 지금 조계종이라는 종단 명칭도 만들고 현재 조계종의 기틀과 동국대도 만들고 동국대를 지금 필동에 현재 모양으로 만드신 분이시며, 조계사를 총본산으로 건립하신 분이 한암 큰스님이십니다.
기자: 한암 큰스님에 대한 말씀을 더 듣고 싶습니다.
스님: 한암 스님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서 총 네 번의 종정을 하셨는데, 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구조로는 종정은 매우 상징적 존재이고 총무원장이 거의 모든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데 일제 때와 해방 뒤에도 즉 한암 스님께서 종정을 하셨을 때는 ‘종정 중심제’였습니다. 종정이 총무원장 역할까지 같이 겸직을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막강한 위치의 자리였지요. 종정이 되어서도 한암 스님께서는 오대산 상원사로 오셔서 26년 동안 절 밖을 안 나가고 수행을 하셨습니다.
기자: 한암 스님과 일본인과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스님: 일제 강점기에서 종정이 되시어 종정에 취임하면 원래는 산을 나가서 총본산인 조계사에 가시어 임명장을 받고 조계사에서 업무처리도 하셔야 했는데 한암 스님께서는 계시는 절 밖을 안 나가시겠다 하시니 총독부에서도 한암 스님께는 절 밖을 안 나오시고 종정을 하시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총독부에도 철저히 수행하시는 스님이라고 소문이 다 나 있던 것이었습니다. 일본 승려들도 상원사에 와서 수행을 했다는 얘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불교학자들도 여기 와서 한암 스님께 문답을 했다는 얘기들도 있어요.
그중에 아주 특이한 일화는 1942년에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그때의 일본은 망해갈 때였는데, 일본의 미나미 총독이 “한암 스님을 뵙고 싶다, 오시라”라고 절에 연락이 왔고 그러면 당연히 경성으로 스님께서 가셔서 총독을 만나야 하는데 한암 스님께서 “나는 상원사에서 수행을 해야 되기 때문에 못 나가겠다.”라고 말씀을 하시니 그러니까 총독 입장에서는 좀 창피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께서 산문을 못 나오신다니 총독 입장에 오대산까지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암 스님을 총독의 힘을 이용해 잡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 부총독 격인 오노 고로치라는 정무총감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정무총감이 부총독 급이었데요. 특사 비슷하게 보낸 것이지요.
오대산에 온 정무총감이 한암 스님께 여쭈기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태평양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스님께서 “덕자 승”! 즉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긴다! 어느 나라가 이긴다가 아니고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자: 부총독이 꼼짝 못 했겠네요.
스님: 사실 부총독의 질문을 들었을 때 다른 스님들께서는 사색이 되었는데 큰스님께서 혹여 말씀 한 마디 잘못하시면, 한암 스님 께만이 아니고 절 전체가 도륙당하는 시절이었으니까요.
한암 스님의 답을 들은 부총독이 감복을 받고 절에 왔을 때는 못마땅해했는데 좋아라 했다네요.
마음이 좋아진 그 부총독이 한암 스님께 “글을 하나 써 주십시오” 했는데..
기자: 뭐라고 써주셨답니까?
스님: ‘정심’이라고. ‘正 바를 정’ 자에 ‘心 마음 심’ 자. 마음을 똑바로 써라!
기자: 역시 훌륭하신 큰 스님이셨습니다!
스님: 그뿐만이 아닙니다. 부총독이 온다면 절이 온통 난리가 난대요, 어느 정도 이상 레벨이 되는 분들이 오면, 음식도 다르게 준비해야 되고 의전도 해야 했는데 기록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한암 스님께서는 “우리가 평소 먹던 대로 그냥 주면 된다” 하셔서 그리했는데 그 사람들이 더 감동을 하더래요. 왜냐면 그 사람들은 의전에 익숙한 지라 거꾸로 그래서 뭔가 대우받는 데에 익숙한데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었겠지요. 그러나 한암 스님은 불교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배웅을 나오셨고 배웅을 해주셨답니다. 그 거리가 9km인데 왕복이면 한나절이 다 가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한암 스님께서는 점심 한 끼만 드시는 분이셨기에 체력이 굉장히 소모가 많이 되셨을 겁니다. 왕복 18km이니까요. 그리고, 덧붙이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한암 스님께서 관계하셨다 합니다. ‘조선’이란 국호에서 ‘대한제국’이었다가 해방이 되고 백성이 중심이 돼야 하고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뜻에서 ‘대한민국’으로!
기자: 스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감동 그 자체입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리 많이 알고 계시나요? 박사학위만 몇 개라고요?
스님: 누가 그런 소문을 냈을까?
석사 2개 박사 5개입니다.
기자: 그 많은 학위를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을 하십니까.
스님: 그거 뭐 힘든 일도 아닌데요.
기자: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하면 그럼 스님께서 하신 것처럼 잘할 수 있습니까?
스님: 제가 논문법도 썼어요.
기자: 책으로요?
스님: 네.
기자: 공부 잘하는 것에 한 말씀만 가르침 주신다면?
스님: 흐름을 이해하는 전체의 거시적인 관점이라는 것만 잡으면 됩니다.
기자: ‘월정사’하면 한암 큰스님의 훌륭한 면도 있지만, 탄허 스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영향을 좀 받으셨습니까?
스님: 아니요. 저는 탄허 스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한암 스님은 선을 중심으로 해서 교육을 하셨던 분이고, 그 밑에서 탄허 스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암 스님이 머리 좋은 분, 공부 잘하는 분들을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하여 탄허 스님을 무척 아끼셨답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의 불교 학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 탄허 스님은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으신 분이에요. 천재적인 성향에 예술끼가 있는 분이에요. 그래서 한암 스님 하고는 결이 다릅니다. 한암 스님은 계속 노력하면서 자기 관리를 투철하게 하시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이신 분이에요. 그래서 한암 스님을 성자라고 저는 표현하는 것이고, 탄허 스님은 약간 초탈하고 멋있게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탄허 스님을 저는 좀 아까운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대를 조금만 더 늦게 나왔거나, 조금만 일찍 태어나셨으면, 그 어른이 자기 사상이라는 걸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살아오신 시대상황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된 뒤에, 우리가 한글로 전용을 해요. 그 전에는 한자를 쓰다가, 일제 때는 일본말 쓰고 해방된 뒤에 한글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므로 벌어진 일이 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교 경전을 잘 알고 이해할 사람이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경전 및 교재들을 탄허 스님께서 다 번역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소명을 가지시고 ‘이게 내가 살아야 되는 이유다.’라고 생각하시면서 번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스님의 노력으로 한국불교가 지금만큼이라도 유지되어왔지만, 번역에 힘을 너무 많이,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당신 사상을 정립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요.
기자: 그런 큰 뜻과 가치 그리고 어려우셨을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스님: 탄허 스님 같은 분을 뵈온다는 것은 참 귀한 것인데 번역에만 매진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손실이기도 합니다.
기자: 유튜브에서도 스님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스님: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기자: 특히 강의 내용이 일반 불자들이 몰랐던 내용을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주 특별하십니다.
스님: 탄허 스님께서 그 당시에 번역이 생명이라고 생각을 하셨다면, 저는 유튜브를 만들어내고 그다음에 쉬운 교육체계로 사람들에게 전달을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자: 스님께 공감됩니다
스님: 그리고 그것보다 더 쉬운 콘텐츠를 기획해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기자: 기대됩니다.
스님: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약 한암 스님에 대해 설명을 하면, 한암 스님 관련된 자료들이 옆에서 보이는 것이지요. 설명과 더불어서 이미지들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그런 작업들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자: 그런 유튜브를 언제쯤 만나게 될까요?
스님: 지금 작업을 시작해서 한 편 만들었고, 내년부터는 매주 한 편씩은 올라올 것입니다. 짧게 만들어서 기획 자체가 불교에 대한 다양한 것들을 눈에 보이게 설명을 해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맞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CG를 만들려면 자본이 엄청나게 들어요. 그러다 보니 탄허 스님 생각도 많이 납니다, 스님께서 경전 번역을 하실 당시에 번역도 어려운데 그것을 출판할 돈이 없어 출판 비용을 만들러 여기저기 다니면서 화주를 하러 다니신 것입니다.
참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스님께서도 “출판이라도 종단 차원에서 해주면 좋을 텐데” 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기획은 그런 도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공감됩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핸드폰으로 접하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이므로 여기에 맞추어하려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기자: 어려우시겠지만 잘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스님께서는 간화선 수행을 해오셨는지요?
스님: 저는 원래 명상 주의자고, 제가 선으로도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지금 한국 선불교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중국 당나라의 선불교는 매우 미학적이고 멋있는 선불교인데 반하여, 지금 한국에서 하는 선불교는 송나라식 선불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세상을 리드해갈 수가 없고 4차 산업시대나, 탈종교화 시대에 앞서 나가 인간의 행복추구라는 것을 해결해주는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여 차라리 유튜브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명상 앱 등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고 있지요. 이 흐름을 불교는 주도적으로 앞서 나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많습니다. 사람과,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이기에 수행이 정당하고, 그 방향이 맞으면 우리가 사는 삶과 사회는 스스로 개혁된다고 생각합니다.
선불교가 중국에서 가장 번성하던 당나라 시기는 당나라가 세계적인 위치에 있었지요. 그러니까 명상과 문화가 융성해지면 국가적으로도 융성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수행과 실질적 삶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라는 말씀이시네요.
스님: 당나라 선불교가 그 역할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당나라가 전 세계 최강국이 되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나라는 활발하고, 미학적이고, 창의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고 송나라는 매우 제도적이었습니다. 선원에 주로 앉아 있는 것 말입니다. 당나라가 선의 황금기였기에 유명한 모든 선의 선사들은 다 당나라 때의 사람들입니다.
기자: 한국의 선불교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요?
스님: 당의 선불교가 전해져 왔으며 나옹 스님 같은 분은 선의 실천을 제대로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옹스님께서는 민중적이고, 활발하고, 거침이 없었던 부분 갖추셨습니다.
시대적으로는 훨씬 나중 분이셨지만 나옹스님은 당의 선불교 정신을 실천하셨던 분이셨으니 당 선불교에의 뿌리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스님: 반면에 태고 보우 스님 같은 경우는 송나라 선계열의 제도적인 부분들이 강했습니다.
그러함에는 물론 개인적 성향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수행방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삼성 같은 안정적인 기업이 있고, 테슬라 같은 기업이 있잖아요. 테슬라 같은 기업이 창의적 기업이잖아요. 테슬라 같은 게 당나라 선이라면, 삼성이 송나라 선입니다. 송나라적인 방식은 새로운 걸 만들어내거나 압도하는 게 아니고, 기존에 있는 거를 빨리 안정화시키는 방법이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은 새로운 걸 어떻게 해서 스페이스-엑스나 이런 사업들 보면 저것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들을 저 사람이 하잖아요. 그게 당나라 식이예요.
기자: 당의 선불교가 그러했군요.
스님: 그걸 활발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머스크 같은 사람들이 몇 명만 있으면 국가가 사는 시절이죠. 나라 전체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먹고사는 시절이지요. 하드웨어가 중심이 아니고, 소프트웨어가 중심이 되어 창의적 경영이라고 하는 것이 절실한 시절이죠. 특히 4차 산업 시대에는 그런 것이 아니면 다른 것은 다 대체될 거예요.
기자: 창의성은 수행에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누구?
일 시: 2020년 9월 17일
장 소: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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