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제따와나 선원장 일묵스님을 만나다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기자: 스님! 인터뷰 매우 고맙습니다. 깨달음이 뭡니까?
일묵스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번뇌 소멸입니다.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 그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진리를 깨닫는 것.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라 말 할 수도 있는데 번뇌가 소멸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아마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때는 진리를 완전히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 중점이 맞춰진 것이고 그걸 통해서 번뇌가 버려지고 괴로움이 소멸된다 이런 쪽으로 할 때는 좀 다른 쪽으로 이야기하는데 보통 깨달음이라고 할 때는 진리를 깨달아서 그 깨달음 자체가 번뇌가 사라져버린 것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기자: 괴로움이 사라지는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것의 바른 견해가 필요하다면 무엇일까요?
스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 형태를 말합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고 하는 그 네 가지 형태의 것을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의 기준은 적어도 수다원은 되어야...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수다원부터를 일컫는데, 예를 들어 사견이라든가 악처에 태어나게 만드는 조건의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게 하는 사견, 의심, 질투, 인색등이 사라진 상태가 되었을 때에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기자: 깨달음을 체득하려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수행적 관점에서 어떤 견해를 가져야 좋을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가르치는 것은 한 마디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괴로움과 행복에 대한 견해의 정립이 제일 중요할 것 입니다. 무엇이 괴로움이고 어떻게 괴로움의 소멸이 되는가? 그리고 어떠한 것이 완전한 행복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할 것 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가지고 정리를 하신 것이 사성제인데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괴로움은 왜 일어나는가?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가 어떤 상태이고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사성제이기 때문에 불교 수행에서 처음 수행의 출발점을 바른 견해로 둡니다. 사성제에 대한 지혜,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사성제에 대한 지혜는 또 다른 말로 하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 무엇인가, 무엇이 괴로움이고 어떤 상태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명확히 알았다면 괴로움은 왜 일어나고 어떤 수행을 해야 괴로움이 소멸되는가 하는 그 부분을 명확히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성제 속에는 수행의 방향성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 수행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팔정도까지 가르침으로 말씀 해 주셨기에 불교 수행의 시작은 바른 견해고,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자: 스님! 고맙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서 명상을 하기도 합니다. 명상을 통한 삶에서의 좋은 변화를 원해서 한다고 할 때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바른 정진에 해당이
될까요.
스님: 바른 정진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수행의 기준은 바른 견해에 있습니다. 바른 견해를 보면, 즉 사성제를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고성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하게 마련이니까 무상하고 그것이 괴로움이고 무아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게 고성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진리를 몰랐을 때는 어리석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게 어리석음이고 그래서 탐욕이나 성냄이 일어난다는, 이것이 괴로움을 계속 일어나게 하는 게 집성제고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을 버리는 방법론으로써 도성제를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히 알면 바른 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해로운 법을 버리고 유익한 법, 팔정도라든가 칠각지,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하는 요소들을 개발하는 것이 바른 정진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수행을 해서 바르게 정진한다고 할 때는 사성제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으면 바른 정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 스님께서 사성제를 기본으로 해서 설명을 해주시는 것에서 사성제의 고, “고는 변화하는 것에서 고를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 “왜냐면 변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고다” 그런데 변화하기 때문에 새롭고, 기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님: 그것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보통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과 고성제에서 말하는 ‘둑카’가 같은 용어로 쓰고 있지만 보통 우리가 괴롭다고 할 때는 ‘두카왜다나’입니다.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고성제에서 말하는 것은 ‘왜다나’ 라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괴로움의 특성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행복에 대해서 말씀 하시기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현재 상태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이 행복한 상태가 영원한 게 아니라 변하기 마련이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변한다는 자체, 이 상태가 나중에는 괴로움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성된 법이라고 하는, 조건에서 만들어진 법은 무상할 뿐만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 불확실성, 이런 것을 괴로움이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괴롭다는 느낌하고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기자: 고맙습니다. 초기 불교를 말씀하시는데요, 인도의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 한국적 불교, 불교 수행이 있는데, 스님께서 보시기에는 테라바다, 아니면 큰 틀에서 초기불교의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면은 있으셨는지? 아니면 초기불교에 만족하시는지요?
스님: 저도 시작은 대승불교로 시작을 했으니까요. 한 10년 정도는 주로 대승 공부만 했으니까. 그런데 저도 이 초기 불교쪽으로 공부한 것이 15년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초기 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처님과 부처님 직계 제자들의 가르침으로 봐야 할 것 같고. 그리고 뒤에 가서 아비담마나 청전도 론 같은 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후대 부파 불교 시대하고 초기불교를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지금 남방에 있는 상좌부 불교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부파적인 성격이 조금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대승 불교도 공부하고, 초기불교도 공부 한 것으로 이 두 가지의 공통분모로써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로 초점을 맞춰서 생각했습니다.
경전부터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많이 살펴봤는데. 초기불교이던, 대승불교이던 테라와다불교이던 결국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연기와 사성제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성제를 기준으로 해서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 좀 더 초기 불교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초기불교가 아비담마 불교로 넘어가면서부터 부파적인 성격이 너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담마의 구성 자체가 많이 다릅니다. 이것을 다 진리가 설명되어졌다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가르침을 설하셨을때 연기법이나 사성제를 말씀하셨고 어느 부파에도 다 동일하게 연기와 사성제가 설해져 있는 가르침이고 그것이 불교의 근본이고 이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다듬고 했던 것들이 논서로써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는 초기 불교는 연기와 사성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기불교가 남방에 들어가서 남방 문화에 맞게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에서 수행하고 공부하는 대승 불교쪽은 조금은 원래 모습에서 벗어난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불타관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 달라지는 게 있는 것 같고, 특히나 미얀마 불교 중심인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너무 정형화되어 가는 불교로 파악되기도 합니다. 아비담마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불교가 너무 이론화되고 정형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치심인 번뇌 소멸로 해탈에 이르는 과정의 가르침보다는 수행방법에서도 틀에 박힌듯한 면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현실에 대해서 좀 동떨어진 얘기가 많아진 것 입니다. 법을 실체화하는 경향도 있고, 그래서 초기 불교라고 했을 때 남방 불교가 초기불교인줄로 간주해버리면 그 나라 문화에 맞게 발전한 그 불교가 초기 불교다 이렇게 보는 건 좀 안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중요 가르침은 연기와 사성제라고 보는데 그 사성제나 연기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해서 그것을 또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정착시키는 것이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 나라에서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아비담마를 말씀하셨는데요. 스님께서는 한국에서의 아함경이 초기 불교나 남방에서 말하는 아비담마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스님: 예, 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함부 경전과 니까야를 비교해보면 핵심은 똑같아요. 편집이 다르지만 그 속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핵심 개념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서 전승이 좀 다르긴 해도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미국의 비구보디스님도 아함경전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더라구요. 아함부하고 니까야의 공통 분모로 들어있는 것이 제일 변형이 안됐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저도 아함부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결국은 연기나 사성제에 관한 것은 다 동일하다고 봅니다.
기자: 고맙습니다. 스님께서 미얀마에서 파욱 수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수행을 하시거나 가르치십니까?
스님: 지금은 파욱 식으로 하진 않아요.
기자: 안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시다면 무엇입니까?
스님: 선정에 대한 것을 너무 기준을 낮춰버렸다는 것이 저는 문제라고 봅니다. 진짜 선정이 아닌 것을 선정으로 인정을 해주는 것이 너무 많아진 거 같아요. 그런 데서 첫 번째 큰 문제가 있다고 보고.
두 번째는 아비담마를 너무 수행에 갖고 오다보니까 수행이 현실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런 경계 속에서 공부가 되는 게 아니라 너무 정형화된 아비담마의 틀에 맞춰서 수행을 하다보니까 실제로 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면밀하게 잘 보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깊이 있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너무 정형화, 이론화된 것으로 가다보니 순간순간 대하는 대상 속에서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때에 생겨진 지혜로 살게되는 면이 약하다 판단 되었습니다.
기자: 그러시다면 마음 보는 것을 중점으로 수행하는 쉐우민센터 수행법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스님: 쉐우민은 또 방향 자체가 너무 선정을 무시하는 것으로 마음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기자: 스님! 한국에서 스님되셨기에 수행을 하셨을텐데 미얀마를 왜 가셨습니까?
스님: 첫째는 대승불교를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전체적으로 불교의 핵심이 잘 안잡혔습니다. 뭐를 말하고자 하는 지가 분명하지 않은 게 있었고 또 수행 방법론이 구체적이지가 않았습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통해서 처음으로 핵심을 접했습니다. 그 두 가지를 보니까 불교 체계가 눈에 잘 들어오니까 그래서 한 번 가봐야겠다 해서 미얀마에 몇 년 있었는데 또 막상 거기서 몇 년 있고 소위 말하는 내부자가 되어 보니까 그 속에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수행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저도 뭔가 부족한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에 태국 불교를 접하게 되었고 아잔 차 스님이나 아잔 브람 스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좀 더 경전 위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 해야겠다 생각하고 니까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와 사성제를 중심으로 깊이 연구를 했죠.
아까 말했듯이 연기와 사성제를 확실히 통찰하는 것이, 자기수행 경험 속에서 통찰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그 중요한 것이 빠져버리고 너무 테크닉 쪽으로 흘러갔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미얀마는 위빠사나 수행을 아주 정형화 시켜 놓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수행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닌데 어떤 것을 경험하면 쉽게 인정해주는 단계가 있는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수행이 퍼져나가는 데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 그런데 깊이가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기자: 부처님의 가르침 즉 경전을 근거로한 수행이 중요하군요.
스님: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에는 불법이 없었잖아요. 이 세상에.
기자: 네. 그러나 고통은 있었겠지요.
스님: 고통은 있었지만 그걸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든지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었잖아요. 부처님께서 나오시면서 설해진 법을 통해서 이해가 되기 시작한 거잖아요.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으로 공부하고 수행 하는 것이 중요한데, 수행하면서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여러 수행을 해도 다 경험은 하거든요. 그런데 그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내용이 만들어질 수도 있어요.
기자: 만약 고통의 소멸이 이뤄졌다면,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님: 소멸이 아니지요.
기자: 완전한 소멸은 아니더라도....
스님: 자기 식으로 소멸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게 진짜 소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왜 아까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냐면 수행이라는 게 아주 주관적이 될 수 있는데 자기 식으로 ‘난 야간의 제따와나 선원 괜찮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괴로움이라고 한 내용이 무엇인가? 이것을 정확히 알고 그 기준에 부합되었을 때 진정한 괴로움의 소멸이 되는 건데 현재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해 라고 해서 그게 괴로움이 소멸된 건 아니잖아요.
기자: 스님 요즘에는 어떤 수행을 하시고, 가르치고 계십니까?
스님: 아나빠나사띠 수타를 기준으로 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호흡 수행과 마음 관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일상에서는 걷기 수행도 들어가는데 기본적으로 큰 틀을 이야기하면 호흡 수행을 하는데 그것과 마음 관찰이 결합된 거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기자: 그것을 분리해서 가르칩니까, 같이 하십니까.
스님: 같이 합니다.
기자: 호흡을 보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과 느낌을 보라고 하시는 거에요, 아니면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스님: 호흡이라는 대상을 잊지 않고 거기에 머물려고 노력을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여기에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닐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능하면... 지켜봐도 돼요. 그런데 가능한 빨리 호흡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지요.
기자: 그럴 때 알아차림 없이 내가 놓쳤구나 하고 바로 호흡으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알아차림과 함께 떠오른 생각과 느낌을...
스님: 그렇게 도망가게 만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고...
기자: 네. 고맙습니다. 혹시 간화선 해보셨겠습니다.
스님: 전 깊이 있게는 안했어요.
기자: 간화선과 테라바다 수행의 같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요?
스님: 어쨌든 번뇌를 버리는 하나의 수단으로 쓰는 것이겠지요. 기본적으로 그 목적은 같겠죠. 그런데 그것을 화두라는 방편을 통해서 하느냐, 호흡이라든가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느냐 그 차이는 있겠습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수행적인 면에서 간화선이든 테라바다의 위빠사나든 특정 구분하지 않고 다 수행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스님: 수행 방법이 어떻게 하나만 있을 수 있겠어요.
기자: 부처님께서도 오랜세월 보살행을 하셨다는데, 보살행에 대한 스님의 관점이 있으시다면.
스님: 보살행이야 당연히 좋은 거죠. 그런데 보살행이 좋다고해서 자기 수행을 팽개치고 보살행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많이 해서 그 수행으로 법문해주고 하는 법보시는 지금도 스님들 세계에서는 그대로 있는 거니까.
그 외에 주로 세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로 보시행이나 봉사를 주로 강조하는데 하는 건데 그것을 하는 거 자체를 나쁘다고 보지는 않지만 모든 스님이 그렇게 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불교가 어려운 시기니까 사람들이 자꾸 외형적인 걸로 가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더 전문성을 갖춰야 불교가 살아난다고 봐요. 자꾸 대중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염려되기도 합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제일 큰 이유가 불교가 힌두화된 게 제일 크다고 알고 있어요. 물론 이슬람 침공이 큰 직접적인 이유기도 하지만요.
불교가 가지고 있는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자꾸 마음챙김 명상이나 여러가지 불교색이 좀 빠져 있는 수행 방법들이 있잖아요. 그런 쪽으로 자꾸 가다 보면 결국 스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거예요. 왜냐면 그런 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전문가들이 더 잘 해요. 전문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가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스님들이 보살행실천도 좋지만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차별화된 장점들을 잘 연구하고 전문적인 소양과 수행을 갖추고 교학적으로도 전문적으로 갖춰서 전문성을 함양해야 장기적으로 봤을 때 훨씬 더 불교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수행 자체가 이미 보살행이 포함된다는 관점이시라고 들립니다.
스님: 네, 그렇죠.
실제로 보살행 중에서 제일 큰 보시가 법보시잖아요. 그것이 사실은 적어도 출가한 스님들한테 제일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운 사람들이 부처님 법문을 듣고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에 모든 인생을 바치셨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인데 너무 세속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은, 스님들이 너무 그런 쪽으로 가는 것은 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자: ‘요즘 젊은 이들은 종교는 벗어나되 영적 삶은 추구한다’는데 스님께서는 그런 젊은이들은 어떻게 받아 들이시나요?
스님: 재가자 중에 전문가들이 하면 되죠. 그런 재가자들 중에서 또 그런 걸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스님들이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사실 불교 자체에서 사성제라고 하는 이 가르침은 말 그대로 진리잖아요. 네 가지 진리잖아요.
이것은 사실 종교색을 띄는 내용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장 보편적인 진리이지요. 이 내용만 말하면 불교란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사실은 그것이 진짜 불교적인 것인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접근하기 좋도록 하는 이런 방식의 노력은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이 가르침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으로 말씀 하셨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여기 와보니 한국 전통절이 아닙니다 명상실도 매우 특별하고 경건합니다.
스님: 절의 개념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절이 보통보면 탱화 걸려 있고.. 그래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있는데 저는 이게 가장 절 같은 절이라고 봐요.
기자: 여기서는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스님: 절이라고 하는 것이 해야 할 제일 큰 목적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거잖아요. 그게 진짜 절이라고 저는 생각하기에 그렇게 삽니다.
기자: 절에서 흔히 하는 제사를 지낸다든가 그런 건 안하시는가 봅니다.
스님: 예, 아예 안합니다.
기자: 예. 여기에 수행하러들 많이 오십니까?
스님: 예, 사람들이 꾸준히 옵니다.
기자: 여기서 오래 머물 수도 있습니까?
스님: 원하는 만큼 지낼 수 있어요.
기자: 아, 그렇군요.
스님: 보통 3개월 기준으로 해서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한 방에 너무 있으면 애착이 생길까봐 방을 약간씩 바꿔주고 합니다.
기자: 아, 네. 그러면 스님께서 1년 내내 여기서 주로 가르침을 하십니까?
스님: 예. 여기와서부터는 특별히 밖에 잘 안나갑니다.
기자: 이것에 머물때에 특별한 일정이 있습니까?
스님: 형식적으로 우리가 한국 사찰이니까요. 결재, 안거, 결재, 안거 이런 리듬은 따라가요. 며칠 전에 하안거가 끝났고.
산철 삼개월 동안 있고. 안거 때는 여기 사는 대중 스님들도 조금 더 열심히 수행하는 그런 분위기로 바뀌고. 산철에는 아침 저녁만 같이 한시간씩 같이 수행하고...나머지는 자율적으로 하게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거하고 해제 이런 분위기로 같이 가고 있죠.
기자: 네, 고맙습니다. 제가 스님 뵈러 여기 오는 중에 행자님이 안내를 해주셨는데 “이곳에 출가하고 살고 계신 것이 축복이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도 다 그렇겠습니다.
스님: 그러시기를 바라고 노력합니다.
기자: 이곳 행자 생활은 그야말로 수행자 삶의 시작이겠네요.
스님께서 행자 생활 하실 때 생각하시면...
스님: 저는 백련암에서 행자 생활 했거든요. 큰 절에서 한 게 아니라. 거기는 주로 절을 많이 시켜요. 하루에 천 배. 매일 천배를 하게 하고 일도 많이 하고 하는데 여기는 행자든 상관없이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 정진하고요. 행자는 오전에는 일도 같이 돕고. 오후에는 법문 들으라 하거든요. 공부하게 하고.
그래서 일반 행자보다는 수행을 하게 합니다.
기자: 그런 면이 아주 행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 그런 것도 있고 아무래도 행자 생활이 보통 일만 시키는데 여기서는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고 매주 한 번 법문이 있고, 한 달에 다섯 번은 정기 법회가 있는데 수요일 날 있고 한 달에 한 번은 일요일 날도 있고 계속 법문도 듣고 그리고 스님들끼리 모여서 법담하는 시간이 있거든요. 그럴 때 질문도 하는 구조가 되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냥 일만 하는 것과는 좀 많
이 다르죠.
기자: 훌륭하십니다.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일묵입니다.
인터뷰 일시: 2019년 8월 16일
장소: 춘천 제따와나 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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