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2주년 특별소개 2
숭산 선사의 선문답 분류법,
사여(四如)에 관한 고찰:
선 수행자 깨달음의 깊이는 측정이 가능한가?
이글은 2014년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 Culture 에서 출판된 (B. Hyun Choo) 논문, “숭산선사의 ‘사여 (四如)’는 선 수행자의 깨달음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을까?”를 최범산 불자가 미주현대불교 독자를 위하여 저자와 수정 보완하여 번역한 글이다. 각주와 참고 문헌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니 필요한 분은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제목과 저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Author: Choo, B. Hyun, Ph. D. bhyun.choo@stonybrook.edu
Translator: Jay J. Choi, MD., doctorjaychoi@yahoo.com
‘Can Seon Master Ven. Seungsahn’s Four Suchness (四如) Measure the Buddhist Enlightenment?’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 Culture 22: 87–114, 2014.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9415486
글 / 최종일(범산) 박사
초록
간화선은 한국 불교 조계종에서 가장 정통한 수행방법으로 인정되어왔다. 그것은 불교적 깨달음에 이르는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자성에 대한 성찰을 이루어 낸다고 주장한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스승은 얼핏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질문을 통해 정통적인 인가를 제자에게 부여한다. 1970년대 초, 고 숭산 선사는 체계적으로 선 대화를 분석하고 논리적인 체계 범위 내에서 수행자의 수행 경지를 평가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사여(四如)”를 소개했다. 이 글은 숭산 선사의 독특한 공식이 어떻게 간화선의 이해하기 어려운 특성에 관한 의미와 중요성을 밝혀내는지 분석적 검토를 시도한다. 또한 선에서의 깨달음이 과연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그 타당성을 살펴본다. 저자는 간화선이 삼법인에 관한 붓다의 궁극적인 성찰을 직접 유도하지는 않을지라도, 숭산 선사의 사여는 큰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선의 신비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키워드: 숭산, 사띠 빠따나경, 간화선, 회광반조(廻光返照), 사여(四如), 안수정등(岸 樹井藤).
I. 들어가는 말
중국 선의 전통은 대각을 성취하는데 사용되는 다양한 실천 방법 중에 독특하다. 그것은 특히 기술적 측면에서 ‘비논리적’ 의문을 제기하고, 의표를 찌르는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을 하거나, 소리 지르고, 스승을 때리는 등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물리적 기술을 쓰는 이유는 스승이 제자들로 하여금 합리주의 지적 능력의 마지막 장벽을 깨뜨려서, 궁극적인 위대한 깨달음이 몰록 일어나게 할 목적으로 행사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음을 확인 받으려면, 수행인은 섬광 같은 자발적인 통찰력으로 ‘절대’를 깨치어, 합리적인 생각이나 판에 박힌 표현에 의존하지 않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알려져있다. 바로 그때, 스승은 공식적으로 제자의 깨침의 상태를 승인하고 적법한 정통 확인의 방법인 인가 (認可)를 부여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승은 일련의 후속 질문을 행하고 제자는 스승이 완전히 만족할 만한 ‘재치’ 있는 즉답을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선은 현대 지식인, 특히 이원론적 서양 전통 지향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성적, 담론적인 논리를 초월하는 애매하고 불가해한 것으로 비추어진다. 따라서 ‘선 수행자 깨달음의 깊이는 측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원천적으로 모순어법 (oxymoron)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잘못’을 무릅쓰고 간화선에서 사용하는 활구참선법에 신비주의를 벗어난 합리적 접근이 가능한 ‘논리적인 명확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필자는 다양한 선문답을 분류하는 최초의 방법으로 알려진 숭산 선사의 사여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불합리하게 보이는 선의 특성과 또한 선은 왜 일반적인 이성적 이해를 초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통찰력 있는 암시를 통하여 최소한 이론적으로 살펴보는 계기를 준다. 아울러 붓다의 사념처 (四念處, Satipatthāna)에 비추어 3장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II. 선문답의 성격
선사는 ‘대답 할 수 없는’ 선 질문을 통하여 해체의 지혜를 가르친다. 그러나 제자가 해체 자체에 애착심을 갖고 집착할 경우, 스승은 또한 집착 그 자체를 제거한다. 박성배 교수는 “깨침과 깨달음” 에서 그와 같은 질문은 불교 수행자에게 이른바 전의 (轉依 āśraya-parāvṛtti, 의식의 근본적인 변혁)를 경험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을 지적한다 (Sung Bae Park, 1983, p. 126-130). 즉 인간 존재의 근본 (āśraya/alaya)이 변혁될 경우 (parāvṛtti), 우리는 이원적 현상세계를 넘어서, 완전히 다른 불이 (不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선의 질문은 짧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주어지고, 대답은 종종 전의를 경험하지 않은 수행자에게는 얼핏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론은 대승 불교의 전통적인 유가행파의 교리에 설명되어 있듯이, 분별적 관점 (徧計所執性)의 집착을 제거하면 바로 완벽한 세계상 (圓成實性)을 즉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분별적 관점과 완벽한 세계상은 모두 연기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성배 교수는 변계소집성의 분별성으로부터 원성실성의 완전성과 자성의 자각으로의 변화는 연기법에 의거하여 전의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수행자가 어떻게 그것의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유가행파는 삼성설 (三性說, Trisvabhāva)을 도입하여 포괄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삼성설은 하나의 세계를 보는 세 가지 관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즉 의타기성 (依他起性), 변계소집성 (徧計所執性), 그리고 원성실성 (圓成實性)을 가리킨다. 박성배 교수는 어떻게 상호 의존하는 의타기성이 분별적인 변계소집성과 완벽한 원성실성과 서로 엮어지는 가를 설명한다. 의타기성은 서로 의지하여 같이 일어나는 세계이며 깨치지 못한 중생의 분별하는 변계소집성과 깨침을 이룬 부처님의 완벽한 성품인 원성실성의 모두를 위한 기초가 된다. 이와같은 의타기성을 인식하지 못한 평범한 중생은 변계소집의 분별성에 집착한다. 이것은 주체와 객체가 거짓으로 차별되는 깨치지 못한 중생의 이원론적 세계이다 (Sung Bae Park, 1983, p. 129). 중요한 전환의 순간은 평범한 인간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체험 실현인데 이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로 표현되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에 의해, 인간의 의식 구조 전체가 완전한 변화를 이루는 실현의 순간, 수행자는 영원히 빛을 발하는, 그리고 더없이 행복한 마음의 존재: 진여 자성 (眞如Tathatā/自性Svabhāva)을 각성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부처님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는 상태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여 자성에 기초하여 경험되는 전의의 특징은 보통의 의식 상태에 투영될 때 일반적으로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에 대하여, 틱낫한 스님은 명상의 목표는 7식(manas) 과 8식 (ālaya vijñāna)의 근저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hich Nhat Hanh, 2006, p. 197).
III. 붓다의 사념처(四念處, Satipatthāna)
붓다의 가르침은 수행인을 도와주는 자비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성 있는 정신 훈련과 명상의 방법을 제공하며 또 이것을 필요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불교가 다른 지역, 특히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여러 나라의 고유한 성향과 특성에 적응하여, 선의 전통과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르침으로 발전 내지 변형되었다. 붓다는 원래 그 본질을 생생하게 빠알리 경전 두 곳 (마지마/디가 니까야)에 기술되어 있는 사념처경(Satipatthāna Sutta)에서 분할되지 않은 단일 경로인 “하나의 직통로” (ekāyana maggo, direct path)라고 극구 칭찬한다. 아날라요는 그것은 하나의 목표, 즉 열반으로 가는 혼자 스스로 걸어야 하는 나눌 수 없는 직접적인 길이라고 주장한다 (Anālayo, 2013, p. 12). 이것은 또한 거의 모든 번역에서 사념처경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유일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Gethin, 2001, p. 64). 사념처 수행에서 감각은 종교적인 경험으로의 변환을 유도하는 불가결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몸의 여섯 가지 감각 능력 (제 6근은 의지)를 바탕으로 지각 인식의 현미경적 분석을 통한 연속적인 현실의 내성적 관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왜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인간 존재의 순화를 위한, 슬픔과 통탄의 극복을 위한, 고통과 슬픔을 없애기 위한, 진정한 구도의 길을 달성하기 위한, 그리고 열반의 실현을 위한 직접경로인 즉 사념처이다. 네 가지 기초란 무엇인가? 비구는 몸을 단지 몸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 하면서 명상한다. 그는 감정을 감정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하면서 명상한다. 그는 마음을 마음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하면서 명상한다. 그는 마음의 대상을 마음의 대상으로서 열심히, 마음을 챙기어 인식하고, 세상사에 대한 탐욕과 슬픔을 멀리 하면서 명상한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p. 145)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하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표현은 특히 영적 스승으로서 겸손하지 않고 부적절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붓다는 정각 (Sambodhi)을 얻은 후 사념처야말로6 년 동안..5년..2 년, 1년.. 7 달, 2달, 한 달, 단지 7일 이라도 올바로 수행하면 선정 (jhānas)을 얻어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극구 칭찬하면서 선언한다 (Ñāṇamolí and Bodhi, 1995, p.155). 이것은 실제로는 친구나, 가족, 교사, 또는 심지어 신 (神)까지도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혼자 스스로 꾸준히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스스로의 큰 깨침에서 이것을 확인한 붓다의 ‘자신 있는’ 선포라고 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의 본질을 이와 같이 명시적으로 선언한 것은 단지 겸양의 미덕을 넘어서는 확신에 찬 주장으로, 데칼트-뉴톤적인 후대의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천여 년 후, 사념처의 본질은 진화하여 독특한 중국 선수행의 형태인 간화선으로 부분적으로 활성화되었으나 붓다가 제시한 지각은 강조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대한 순수한 집중만이 결국 자성의 근원에 도달하게 되는 내면적 성찰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내면의 마음에서 출현하는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불리는 과정으로 이와 같은 전통은 임제 의현이 창시한 임제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말이 입 밖에 나오자마자, 내면의 마음에서 나오는 광채로 자신을 돌이켜 역으로 추적하되, 다른 아무 곳에서도 찾지 말아야한다. 만약 몸과 마음이 불조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즉시 자신을 무위로 이르게 하면 깨쳤다고 이름할 수 있다. (T 1985.47.0502a12,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録)
그러나, 간화선에서는 여섯 감각 능력을 사용하는 인식작용은 궁극적인 종교 경험으로 이끄는 변환과정에 있어서 항상 사용되지는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간화선에서, 선사들의 소위 인가 일화들이 공안으로서 수집되었고, 이처럼 모은 공안을 선 스승들은 제자들이 명상하는 동안 집중하여 궁극적 실재의 본질에 관한 의미를 철견(徹見)하도록 사용하였다.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편찬한 “간화선, 조계종 수행의 길” (2005, pp. 32-44)에서 밝혀진 대로, 이와 같은 간화선법은 한국 불교 조계종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주된 확실한 수행법으로 확고하게 알려져있다. “간화선”에서는 대혜 종고 선사가 체계화한 간화선이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어서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들이 마음의 본래면목(本来面目)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언행을 잘 정형화한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불교 수행자들은 간화선이야말로 한국 불교의 최고 이상이며 목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 이었던 성철 선사에 의해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인 선문정로 (禪門正路)에서 재확인된다. “선문은 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을 철견함이다” (퇴옹 성철, 1981, p.2).
IV. 숭산 선사의 분석적 방법: 사여
1970 년대 초에 미국에 한국 선을 전한 초기 선사중의 하나이면서 서구에 선을 전파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사중의 하나로 한국의 달마라는 칭호를 받았고 제자들 사이에서 자비심 많은 가르침과 통찰력 있는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던 숭산 선사 (1927~2004)는 논리적 구조 범위 내에서 체계적으로 선문답의 특성을 평가하는 분석 도구를 소개했다. 이것은 ‘분석적’ 또는 ‘체계적’ 등의 용어들이 선 전통의 본질과는 일반적으로 양립하지 않는 미증유의 독특한 방법이다. 사실, 이러한 분석 도구는 진지한 현대 지식인에게는 처음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선의 독특한 특성을 관찰하는 것은 은유적으로 “밤하늘에 멀리 있는 별을 보는 것”으로 설명 될 수 있다. 망막의 명암과 색갈을 구분하는 세포의 배열 차이 때문에 별에 직접 초점을 맞출수록 별은 흐리게 보이고, 초점을 약간 비끼면 별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것과 같다. 혹은 그것은 비유적으로 ‘자신의 눈은 직접 볼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직접 느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선의 분석적 접근은 정확도에 관한 한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자체 내에 만들어진 붙박이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천불교] 25. 삶도 죽음도 ①현량(現量)에 의한통찰(무상이니 무아) / 김성철 교수 (0) | 2022.08.14 |
---|---|
[2019년 10월호] 제따와나 선원장 일묵스님을 만나다 / 전현자 (0) | 2022.08.14 |
[2021년 1월호] 한국불교의 최고 강백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 / 전현자 (0) | 2022.07.17 |
생과 사 그 비밀을 말한다 3판 발행 (0) | 2022.07.17 |
'진제와 속제(이제설) - 김성철 (0) | 2022.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