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불교] 25.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① 현량(現量)에 의한 통찰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
무상 무아 진리를 현량으로 통찰하는 수행이 ‘위빠사나’
불교인식논리학에서는 우리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요새말로 바꾸면 현량은 ‘직관’이고 비량은 ‘추리’다. 예를 들어 내 앞에서 불이 타오를 때 눈으로 이를 보거나 몸으로 온기를 느끼는 것은 현량을 통한 것이고, 먼 산에서 연기가 날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불이 있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비량을 통한 것이다. 현량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고 비량은 ‘생각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후 외치신 첫 마디가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였다. 불사의 범어 원어는 ‘아므리따(amr.ta)’인데 ‘아(a)’는 영어의 낫(not)이나 노(no), 넌(non)과 같이 부정(negation)을 의미하는 접두사고, ‘므리따’는 죽음을 뜻하는 단어다. 한자나 우리말의 경우 부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다. ‘없다(無)’와 ‘아니다(非)’와 ‘않다(不)’가 그것이다. 그러나 범어나 영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의 경우 부정표현이 단순하다.
한자로는 불생불멸, 비생비멸, 무생무멸이라고 다르게 쓰더라도 범어 원문은 ‘안웃뜨빠담 아니로드함(anutpa-dam. anirodham.)’으로 한 가지다. 영어에서도 “여기에 학생이 없다(There is not a boy)”거나 “그는 소년이 아니다(He is not a boy)”거나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She is not happy)”에서 ‘없다’와 ‘아니다’와 ‘않다’를 모두 똑같이 ‘is not’으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외치신 ‘아므리따’는 ‘불사(不死)’이기도 하지만 ‘무사(無死)’나 ‘비사(非死)’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외치신 ‘불사’의 선언은 “죽음이 없다(無死)”거나 “죽음이, 죽음이 아니더라(非死)”고 번역할 때 보다 쉽게 이해된다. 부처님만 그러셨던 것이 아니라 후대의 선승들 역시 깨달음의 궁극에서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토로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현량과 비량의 두 가지가 있기에 “죽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현량에 의한 통찰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죽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 확고하게 살아있는 존재만이 죽을 수 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지 않고, 1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아야 “나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모든 것은 무상하다.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있지 않다. 우리 몸의 경우 1년 정도 지나면 거의 전부 새로운 물질로 바뀐다고 한다. 손톱이나 머리칼의 경우 외형은 같아도 작년의 것이 지금 없듯이 근육이나 피부는 1개월, 뼈는 6개월, 뇌는 1년 정도 지나면 100%가 새로 섭취한 물질로 대체된다고 한다. 마음의 경우는 더하다. 느낌이든, 생각이든, 의지든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연기(緣起)한 모든 것은 무상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따라서 ‘변치 않는 나’는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모든 것은 매 순간 흘러갈 뿐이다. 이런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현량을 통해서 통찰하는 수행이 바로 ‘위빠사나’다. 호흡이든 걸음이든 매 찰나 일어나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직관한다.
그 결과 “우리가 살아있달 것도 없다”는 사실을 통찰한다. 무언가 ‘변치 않는 것’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 “살아있다”고 규정할 수 있고,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는데, 변치 않는 것이 없기에 살아 있달 것도 없고, 살아 있달 것도 없기에 죽을 것도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무상을 현량함으로써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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