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불교] 26. 발생이 소멸이고, 삶이 죽음이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② - 비량(比量)을 통한 통찰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 사라지고 나타나
죽음은 없다.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변치 않고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사라질 수 있는데, 모든 것이 매 순간 사라지고 있다면 새삼스럽게 새로이 사라질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고,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이 모든 것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사라짐이 나타남이다. 발생이 소멸이고, 삶이 죽음이다. 따라서 살았달 것도 없고, 죽을 일도 없다.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에서 만나는 ‘불생불멸’의 통찰이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지적(知的)인 번민에서 완전히 해방되려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사실을 위빠사나 수행을 통한 지각인 현량에 의해서 자각함과 아울러, 생각을 통한 추리인 비량을 통해서도 확증해 보아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이와 반대로 내가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십 년 전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고 앞으로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무(無)였고, 죽은 후에도 무(無)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 의존하여 지금 이 순간은 유(有)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생각’일 뿐이지 ‘체험’은 아니다. ‘생각’ 속에서는 ‘뿔 난 토끼’도 떠올릴 수 있고, ‘털 난 거북이’도 떠올릴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 털’을 체험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태어나기 전의 무’와 ‘죽은 후의 무’는 생각 속에 떠올릴 수만 있을 뿐이며,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탄생 전과 죽음 후의 ‘무’를 체험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이 순간이 ‘유(有)’를 체험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를 체험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은 ‘유’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유’랄 것도 없고, ‘존재’랄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살아있달 것도 없다. 살아있달 것도 없기에 죽을 일도 없다.
‘큰 방’과 비교해야 ‘작은 방’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긴 것’과 비교해야 ‘짧다’는 판단이 생기듯이, 탄생 전이나 죽음 후의 ‘무’를 떠올리기에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삶’이라든지 ‘유’라든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다만 생각일 뿐이다. 이 세상에 원래 큰 방이 없다. 아무리 큰 방도 더 큰 방과 비교하면 작아진다. 따라서 그 어떤 방이든 그 원래의 크기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소위 비대비소(非大非小)다. ‘큰 방’과 ‘작은 방’이 이 세상에 실재하지 않지만 연기(緣起)하여 생각 속에만 있듯이, 삶과 죽음 역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무생무사(無生無死)다. 이런 사실을 투철하게 알 때 삶과 죽음에 대한 ‘지적인 고민’이 해소된다. 죽음이 없기에 죽음에 대해 고민할 수도 없다. 눈을 훤히 뜨고 있는 이 순간에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다. 연기의 원리 통해서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한다. 참으로 상서롭지[吉祥]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이는 ‘지적인 통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통찰은 ‘머리’만 시원하게 해 줄 뿐이다. 이와 아울러 ‘생명의 세계’, ‘고기 몸의 세계’를 향한 욕망이나 분노가 모두 사라질 때 ‘가슴’ 역시 시원해진다. ‘인지(認知)의 머리’와 ‘감성의 가슴’이 모두 정화되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다.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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