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대강좌 3강 - 3
법화경은 三周說法이 중요 합니다.
1. 상근기를 위한 法說周. = 법을 그대로 설하는 것.
2. 중근기를 위한 譬說周. = 비유로서 이야기하고,
3. 하근기를 위한 因緣周.
삼주설법의 법설주. 비설주. 인연주에 각각 4가지가 따릅니다.
법설주에 부처님의 설법. 領解 = 제자들의 이해.
述成 = 제자들이 이해한 것을 부처님의 부연설명.
授記 = 성불을 보증하는 네 단계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뒤에 나오면 재차 언급할 겁니다. 빠뜨린 내용들은 각자 복습하시면서 더 많이 세세하게 노트 하시면 공부가 더 깊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바쁜 생활에 여기 와서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귀한 일이고, 어려운 시간인줄 압니다만,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도 정말 귀한 가르침이니까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결코 이 보다 더 가치 있게 시간을 쓸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소리 내어 읽으시든지, 묵독을 하시든지 사경을 하시든지, 아니면 노트처럼 메모를 해보시든지 번역을 해보시든지 이 시대에 적절한 새로운 좋은 해석을 해보시든지 ←이런 노력이 가미가 되면 법화경의 이해가 훨씬 깊어지지 않겠나? 이런 말씀도 드리고 싶네요.
80. 若我遇衆生 盡敎以佛道 無智者錯亂 迷惑不受敎 我知此衆生
약아우중생 진교이불도 무지자착란 미혹불수교 아지차중생
未曾修善本 堅著於五欲 癡愛故生惱 以諸欲因緣 墜墮三惡道
미증수선본 견착어오욕 치애고생뇌 이제욕인연 추타삼악도
輪廻六趣中 備受諸苦毒 受胎之微形 世世常增長 薄德少福人
윤회육취중 비수제고독 수태지미형 세세상증장 박덕소복인
衆苦所逼迫 入邪見稠林 若有若無等 依止此諸見 具足六十二
중고소핍박 입사견조림 약유약무등 의지차제견 구족육십이
深著虛妄法 堅受不可捨 我慢自矜高 諂曲心不實 於千萬億劫
심착허망법 견수불가사 아만자긍고 첨곡심불실 어천만억겁
不聞佛名字 亦不聞正法 如是人難度
불문불명자 역불문정법 여시인난도
若我遇衆生하여 만약에 내가 중생을 만나 가지고서 盡敎以佛道언마는, 모두 다 佛道로서 가르쳐서, 부처의 도로서 가르쳤다 이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부처의 도로서 가르쳤건만, 無智者錯亂해서 迷惑不受敎니라. 무지한 사람들이 錯亂하고, 미혹해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이 중생들이 일찍이 善本을 닦지 아니함을 알고, 善本을 닦지 아니해서 굳게 五欲에 집착 했을새. 오욕은 우리 동양학에서 흔히 말하는 財色身名壽가 아니고, 眼耳鼻舌身. ←이것이 욕심을 부릴 때, 그것을 5근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경전에서는 5근의 욕망을 五欲이라고 하지요.
재색신명수는 중국의 일반 학설에서 하는 소리지요.
癡愛故生惱. 어리석고 애착함으로 해서 괴로움을 내게 되며, 또 諸欲因緣으로 여러 가지 욕망의 인연으로 三惡道에 떨어진다. 그래서 六趣中에서 輪廻해서 備受諸苦毒이라. 온갖 고통을 다 갖추어서 받는 겁니다.
병이 한 번 오기 시작하면 늙어서 병이 오면 404병이 俱時에 일어나는 겁니다. 동시에 일어납니다. 갖추어서 받는 겁니다. 젊은 때는 병을 앓아도 한 가지만 앓지만, 그런 것이 있습니다. 업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 그렇지요.
受胎之微形으로 연꽃에서 태어나지 않고 우리는 태에서 몸을 받게 됩니다.
願力受生도 못되고요. 微形이라고 하는 것은 못난 모양이지요.
태중에서 못난 모양을 받아 가지고서 世世常增長하며, 세세에 항상 增長하며 고통이 增長한다는 말입니다. 薄德少福人이니라. 덕도 얇고 복도 적은 사람이다. 그래서 衆苦所逼迫이라. 온갖 고통이 자꾸 몰려온다는 말이지요.
그중에서도 邪見稠林에 들어간다. 邪見이라고 할 때는 의례히 稠林이 뒤따라오는데, 사람 소견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 한 번 어떤 집착. 자기 住見이라고나 할까? 자기가 믿는 소견이 한 번 설정이 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도저히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토의를 해도 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귀에 잘 안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 말 끝나면 지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한다고요. 회의에 가보면 의례히 우리가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자기 소견이 한 번 이거다 하고 들어가게 되면 그 만의... 빽빽해서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숲이 사람이 들어가도 다닐만 하지만, 인도 같은 짙은 숲에는 사람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 稠林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소견이 좁은 것이 그와 같다고 해서 邪見稠林이라고 늘 따라다니지요.
中道로 이해하지 못하고, 有아니면 無. 善아니면 惡. 내편 아니면 네 편.
黑아니면 白.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가 일쑤다 이겁니다. 상견 아니면 단견. 우리 회색이라는 것이 중도 색 아닙니까?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니잖아요. 이것을 나쁘게 해석하면 흑이면 흑. 백이면 백. 그렇게 하지 회색분자 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그러냐? 그것이 좋은 색 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것을 교묘하게 나쁘게 이용하면 회색분자가 되지만, 사실은 이것은 중도 색입니다. 검을 수도 있고 흴 수도 있고, 검은 것도 받아들이고 흰 것도 받아들입니다.
본래 흰색이었다가 검은 물 들여서 한 번 빨지요. 소금 넣어서 삶으면 검은 색은 싹 빠져버리고 회색만 딱 남는 것 아닙니까? 색중에는 정말 제일 근사한 색이고, 아무리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색이고, 산에 가서 물푸레나무를 베다가 불을 떼서 그 숯을 빻아서 물들이면요. 파르스름한 잿빛. 얼마나 근사한데요. 요즘은 그런 색을 볼 수가 없더라고요. 어쨌든 삿된 견해. 삿된 견해라고 하는 것은 치우친 견해입니다. 결코 무속적인 신앙을 염두에 두고 삿된 견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치우친 견해를 삿된 견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어디에든지 치우친 견해는 제일금물이지요.
선이 됐든 악이 됐든 그렇습니다. 절대 치우치게 볼 일이 아니지요.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인데 딴 데 가면 아주 환영받는 사람 많잖아요.
나는 그렇게 좋은데 딴 데 가면 죽일 놈으로 취급받는 사람도 많고요.
그것이 다 내가 삿돼서 그런 겁니다. 그것이 치우쳐서 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사람의 다양한 인격체를 제대로 봐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사람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고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요.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것을 다 봐주지 못하는 것이 치우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준은 그렇지요.
나한테 잘하면 선한 놈이고 나한테 잘 못하면 악한 놈이지요.
간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잘못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依止此諸見하여 이 여러 가지견해에 의지해서 具足六十二이라. 62見이 나오지요. 인도에 62사견이 이렇게 등장하게 된다.
深著虛妄法하며, 허망한 법에 깊이 집착하며, 그것이 堅受不可捨라.
굳게, 굳게 지키거나 받아들여서 버릴 줄 모른다 이 겁니다.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꼭 그렇게만 알고 있는 겁니다. 흑백 논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참 문제... 동양인은 그래도 불교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대로 괜찮은데, 서양에서 흑백 논리가 들어와서 국민성을 참 이상하게 만들어놨습니다.
堅受不可捨라. 굳게 받아들여 가지고 버릴 줄 모른다. 우리의 치우친 소견을 버리는 훈련이 참 중요하고, 또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치우친 소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생사해탈은 놔두고 치우친 소견으로부터,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해탈이 제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급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집니다만, 부처님께서 왕궁에서 정말 최고의 향락을 누리던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는 또 극과 극으로 치닫지요. 출가해가지고는 최고의 고행.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고행을 했지 않습니까?
아주 극단의 극을 달렸던 사람이지요. 그리고 나서, 깨닫고 나서 첫 마디가
“중도 대 선언”이지요. 초전 법륜경에 “나는 중도를 증득 했노라.”
5비구를 만나가지고 처음에 설법한 것이 바로 中道. 내가 향락생활을 해봐도 그것도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 고행을 해봤지만 고행도 인생의 최고 가치가 아니야.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고행에 있는 것도 아니고, 향락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도 치우칠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有도 無도. 선도 악도. 단견도 상견도. 그 무엇에도 우리가 치우친다고 하는 것은 이미 바른 견해가 아니고, 바람직한 삶의 길이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그 깨달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중도 대 선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의 근거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중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중도로 봐야 하는 것이지, 내가 뭐 짐짓 중도가 좋아서 중도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중도의 원리로 존재한다. 존재의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이름 지으면 “중도 원리”라고 한다. ←이런 뜻입니다. 중도가 불성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의 존재 방식도 중도의 공식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꽃 한 송이도 중도의 공식으로 존재하는 것이고요.
우리 지금 말하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전부 하나의 존재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우리는 “중도의 원리”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겁니다. 我慢自矜高하야, 아만으로서 스스로 높이 받들고 해서 諂曲心不實하며, 굽으러진 마음이, 아주 비틀리고 뒤틀린 마음이 실답지 못해서 千萬億劫에 不聞佛名字라. 진리를 깨달은 사람. 중도의 원리를 깨달은 사람에 대한 이름을, 부처님의 名字를 듣지 못했다 이 말이지요. 여기는 지금 그런 소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亦不聞正法이라. 또한 바른 진리의 가르침도 듣지 못했다.
如是人難度니라. 그런 사람은 제도하기 참 어렵다 이 겁니다.
81. 是故舍利弗 我爲設方便 說諸盡苦道 示之以涅槃 我雖說涅槃
시고사리불 아위설방편 설제진고도 시지이열반 아수설열반
是亦非眞滅(시역비진멸)
是故로 사리불아, 내가 방편을 베풀어서 모든 고를 다 하는, 盡苦. 고를 다하는 道. 고를 다 없애는 길을 설해서 示之以涅槃이니, 그들에게 열반을 보였다.
我雖說涅槃이나, 내가 비록 열반을 설하기는 하나,
是亦非眞滅이니라. 이것은 참으로 진짜 멸은 아니다.
인위적인 열반이다 이 겁니다. 인위적인 열반이지 진짜 열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열반에 대한 어떤 견해를 그 당시. 그러니까 500년 동안 상좌부 불교에서는 그렇게 편안하게 모든 번뇌가 소멸한 상태가 인생의 최고의 길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그래서
82.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諸法從本來로 常自寂滅相이니 제법은 본래부터 열반입니다.
본래부터 적멸입니다. 적멸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렇게 부단히 말 쫓아가고 말 쫓아가면서 눈 쫓아가고 눈 쫓아가면서 또 혼자 다른 생각 실컷 하고, 다른 것도 눈으로 왔다 갔다 하고,
얼마나 많은 작용이 지금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작용합니까?
그렇지만 작용하는 그 근본 자리를 우리가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찾아보면 없어요. 텅 비었습니다. 텅 빈 데서 그렇게 부단히 말소리 다 듣고, 걸으면서 온갖 생각 다 하고, 또 머리로는 무슨 그림도 그리고, 자기 친구 자기 할 일, 만날 사람 다 머리에 그냥 영화 필름 한 20여개 장치해 놓고 돌아갑니다. 그런 활발발한 작용이 현재 동시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근본은 적멸한 것입니다. 그래
常自寂滅相. 항상 스스로 본래 그렇게 적멸한 것입니다.
적멸을 일부러 만들어서 적멸한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만들어서 적멸해 봤자 그것이 얼마나 적멸하겠습니까? 잠깐은 조용하지요.
이 몸이 적멸하려고 목숨 따 보세요. 그냥 죽었는가? 싶지만 금방 거기서부터 썩어지고 변화가 오는데 끊임없이 또 변화하는 겁니다.
그것은 적멸이 아니지요. 그렇게 만들어서 적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적멸한 자리. 근본 자리는 적멸하다. 그렇게 작용하지만 근본을 찾아보면 찾을 길이 없는 텅 빈 그 자리. 그것이 寂과 조이지요.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작용하고요. 항상 작용하되 항상 고요한 것.
그러니까 고요함과 작용함. 움직임. ←이것이 동시에 구족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다 용납하고 다 수용하고, 때에 따라서 조용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작용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도적인 삶이지요. 우리 마음. 우리 삶을 제대로 보고, 거기에 맞게, 그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다.
佛子行道已하면 불자가 그 도리를 행할 줄 안다면,
來世得作佛이라. 바로 그 다음 순간. 來世 = 다음 순간입니다.
그 다음 순간 바로 부처입니다. 그 이치알고, 모든 존재는 본래로 적멸한 자리를 이렇게 부단히 작용 하면서 한편 적멸하다고 하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맞게 살면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래서 應無所住 以生其心입니다.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쓰는데, 6조 혜능대사는 忠孝가 지상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한걸음이라도 비뚤어지면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잖아요. 꼭 효도의 길이 붙들고 먹이고 살리고 해야 효도인가요? 그것도 아니잖아요. 어디에도 住着하지 않고, 마음이 작용하게끔 되어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뜬 것입니다.
‘아~, 이 마음은,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도록 되어있는 거구나! 본래 그런 거구나!’ 그런데 유교의 윤리적인 도덕으로 억지로 사람을 묶어놔서 그렇지, 거기에다 묶여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거기 한 눈 환히 떠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홀어머니를 두고도 결연히 출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83. 我有方便力 開示三乘法 一切諸世尊 皆說一乘道 今此諸大衆
아유방편력 개시삼승법 일체제세존 개설일승도 금차제대중
皆應除疑惑 諸佛語無異 唯一無二乘
개응제의혹 제불어무이 유일무이승
我有方便力하여, 나에게는 방편의 힘이 있어서 三乘法을 開示. 열어서 보이니 一切諸世尊이 皆說一乘道니라. 다 一乘道를 설 하니라.
今此諸大衆은 여기 모인 대중들은, 皆應除疑惑이니, 다 응당히 疑惑을 除할지니 諸佛語無異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다 둘이 없음이라.
唯一無二乘이니라. 오직 하나요. 二乘은 없느니라. ←이것이 게송으로서는 諸佛章 이야기이고, 다음부터는 過去佛章 이야기가 되겠네요.
84. 過去無數劫 無量滅度佛 百千萬億種 其數不可量 如是諸世尊
과거무수겁 무량멸도불 백천만억종 기수불가량 여시제세존
種種緣譬喩 無數方便力 演說諸法相 是諸世尊等 皆說一乘法
종종연비유 무수방편력 연설제법상 시제세존등 개설일승법
化無量衆生 令入於佛道(화무량중생 영입어불도 )
過去無數劫에 無量滅度佛이 한량없는 멸도에 드신 佛이, 열반에 드신 佛입니다. 百千億種이라. 그 수가 不可量커든 이와 같은 모든 世尊이 種種 인연과 譬喩와 無數方便力으로서 모든 법의 실상을 연설하시니 是諸世尊等이 다一乘法을 설 하사 한량없는 衆生을 제도하여 佛道에 들게 하였느니라. 부처로 살라는 뜻이지요. “부처로 살게 했다.”
85. 又諸大聖主 知一切世間 天人群生類 深心之所欲 更以異方便
우제대성주 지일체세간 천인군생류 심심지소욕 갱이이방편
助顯第一義(조현제일의)
又諸大聖主가 一切世間 天人群生類의 深心之所欲. 깊은 마음의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아시어 다시 다른 방편으로서 第一義를 助顯했다.
바로가 아니고 보조로, 옆으로 은근히 표현했다는 말입니다.
86. 若有衆生類 値諸過去佛 若聞法布施 或持戒忍辱 精進禪智等
약유중생류 치제과거불 약문법보시 혹지계인욕 정진선지등
種種修福慧 如是諸人等 皆已成佛道 諸佛滅度已 若人善軟心
종종수복혜 여시제인등 개이성불도 제불멸도이 약인선연심
如是諸衆生 皆已成佛道(여시제중생 개이성불도)
若有衆生類가 値諸過去佛하여, 모든 과거 부처님을 만나서,
助顯第一義라고 하는 말이 밑으로 쭉 이어집니다.
그것은 總說이고, 전체 전반적으로 밝히는 것이고, 밑에는 낱낱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미있는 대목인데요. 여기서부터 萬善成佛. “어떤 선도 그 선이 원인이 돼서 전부 성불한다.” “어떤 선도 성불하지 아니함이 없다.” 여기를 萬善成佛章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보면 만약 어떤 衆生類가 과거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若聞法布施하면, 법을 듣고 보시를 하면 또 혹 持戒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도 닦아서 種種修福慧하면, 가지가지로 福慧를 닦으면 如是諸人等은 皆已成佛道니라.
다 이미 다 성불해 마쳤느니라. 布施ㆍ持戒ㆍ忍辱ㆍ精進ㆍ禪定ㆍ智慧.
여섯 가지 중에 뭘 하든지 간에 그래도 육바라밀을 가지고 성불의 인연으로 삼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諸佛滅度已에 若人善軟心하니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있으니, 이와 같은 모든 衆生들은 皆已成佛道니라. 뭘 했든 아무 한 것이 없잖아요. 若人善軟心입니다. 그냥 마음이 선할 뿐입니다. 선하고 부드러울 뿐인데 이 중생들은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느니라. ←이것이 무슨 부처님 될 조건이 됩니까? 참선을 한 시간 했어요? 기도를 한 시간 했어요?
경을 봤어요? 전혀 성불의 조건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불교에 있어서의 성불의 조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내려가면 더 합니다.
87. 諸佛滅度已 供養舍利者 起萬億種塔 金銀及頗梨 硨磲與瑪瑙
제불멸도이 공양사리자 기만억종탑 금은급파리 자거여마노
玫瑰琉璃珠 淸淨廣嚴飾 莊校於諸搭 或有起石廟 栴檀及沈水
매괴유리주 청정광엄식 장교어제탑 혹유기석묘 전단급침수
木밀幷餘材 甎瓦泥土等 若於曠野中 積土成佛廟 乃至童子戱
목밀병여재 전와니토등 약어광야중 적토성불묘 내지동자희
聚沙爲佛搭 如是諸人等 皆已成佛道
취사위불탑 여시제인등 개이성불도
諸佛滅度已에 供養舍利者가 사리에 공양하는 사람이 起萬億種塔호대,
만 가지나 되고 억 가지나 되는 탑을 세우는데, 金ㆍ銀ㆍ頗梨ㆍ硨磲ㆍ瑪瑙ㆍ玫瑰ㆍ琉璃ㆍ眞珠로 하는데 淸淨廣嚴飾하야 훌륭하게 잘 장엄합니다.
莊校於諸搭이라. 탑을 잘 꾸며요. 혹은 石廟를 일으키고 부처님사리를 모셨으니까 石廟라고 합니다. 돌로서 사당이나 廟를 짓기도 하고, 栴檀나무ㆍ沈水향ㆍ목밀 · 재목ㆍ벽돌ㆍ기와ㆍ진흙으로도 한다. 若於曠野中에 만약 曠野가운데 흙을 쌓아서 佛廟를 지으며, 미얀마 같은데 가면 흙을 쌓아서 탑 조성한 것 많지요. 일생에 탑 서 너 개. 한 개 세워서는 성불 못하고 탑 세 개 정도는 세워야 성불 한다는 무슨 신앙이 있었는지, 어쨌든 미얀마는 농사지을 땅에다 전부 탑을 세웠더군요.
乃至童子戱로 동자가 장난삼아 모래를 모아서 佛搭을 만드는데, 그것도 모래가 뭉쳐지지 않으니까 오줌을 싸가지고 모래를 뭉쳐요.
우리 어릴 때 그 짓 많이 하잖아요. 모래가 물가에 가면 잘 뭉쳐지지만, 바싹 마른 모래는 오줌이라도 싸야 된다고요. 그래서 모래 뭉쳐가지고 佛搭을 쌓는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如是諸人等이 皆已成佛道니라. ←이것이 무슨 성불의 조건이 됩니까? 그래 결국 성불에는 조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조건을 달아서 성불하는 것은 그 성불은 며칠 못갑니다. 그것은 진짜 성불이아니라고요. 본래 성불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지 뭘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느 정도에 이르렀다는 그것은 전부 가짜이고, 임시방편설이지요.
또 그렇게 해야만 성에 차는 근기가 많으니까요.
어떻게, 어떻게 아주 힘든 조건. 예를 들어서 夢中一如. 動靜一如. 寤寐一如라고 하는 조건이 붙어야 그래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주 대다수입니다. 그런 희생도 아니 하고 무슨 성불하느냐고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런 조건이 맞아요. 그런데 꼭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모래를 모아서 불탑이라고 했는데, 그것으로서 성불. 불도를 이뤘다 이겁니다.
성불을 다 마쳤다 이것이지요.
88. 若人爲佛故 建立諸形像 刻彫成衆相 皆已成佛道
약인위불고 건립제형상 각조성중상 개이성불도
若人爲佛故로 어떤 사람이 부처를 위한고로 建立諸形像이 여러 형상을 建立해. 조각으로 하기도 하는데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불상을 조각하는 것만으로도 불도를 다 마쳤어요. 皆已成佛道라. “皆已”가 과거 표현 아닙니까? 여기는 과거불장이니까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이것이 현재불도 마찬가지 미래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가 되는 데는 조건이 필요치 않다. 조건으로서 부처된 그 부처는 가짜 부처다. 진짜 부처는 조건 없는 본래 부처를 뜻하는 것이다. ←一佛乘. 이것이 그래서 어렵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또 그 당시로서는 많은 배척을 당했지요. 지금이야 화엄경도 나와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다. 이것이 그저 식은 죽 먹듯이 우리가 읊조리는 소리니까요.
89. 或以七寶成 鍮鉐赤白銅 白鑞及鉛錫 鐵木及與泥 或以膠漆布
혹이칠보성 유석적백동 백랍급연석 철목급여니 혹이교칠포
嚴飾作佛像 如是諸人等 皆已成佛道
엄식작불상 여시제인등 개이성불도
불상을 조성하는데 七寶로서합니다. 그리고 鍮=구리ㆍ석연ㆍ붉은 구리ㆍ흰 구리ㆍ白鑞=스덴ㆍ鉛錫ㆍ鐵ㆍ木ㆍ진흙ㆍ아교ㆍ옻으로 불상을 꾸미지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어디 부처님 당시 때 이런 글이 만들어졌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잖아요.
아니잖아요. ←이런 신앙이 아주 일반화 됐을 때 성립된. 결집된 경전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대로 경전이 스스로 답을 다 하고 있습니다.
如是諸人等은 皆已成佛道니라. 이런 사람은 다 이미 성불해 마쳤느니라. 불상 조성하는데 조금이라도 거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우리 한국불자치고 불상에 인연 안 맺은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성불의 조건이 됩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성불은 안 되잖아요.
어림도 없지요. 거기에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0. 彩畫作佛像 百福莊嚴相 自作若使人 皆已成佛道
채화작불상 백복장엄상 자작약사인 개이성불도
彩畫作佛像하야 그림이나 색칠로서 불상을 만드는 것이지요.
百福莊嚴相이라. 부처님 상을 근사하게 아주 거룩하게 만들지요.
自作若使人. 자기가 만들거나 아니면 누구 돈 줘서 시켜서 만들거나 그렇게만 해도 皆已成佛道입니다. 기도. 이름만 올려놓고 전화로 입금시켜도 되고, 카드로 긁어도 되고요. 나는 바쁘니까 남 가는데 부쳐도 되고요.
좋아요. 그것 다 좋은 것이라고요. 그것만 해도 成佛道입니다.
불도 이미 다 이루어 마친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편하고 쉽고 간단명료하고 그냥 아무데 갖다 붙여도 됩니다. 본래 성불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어떤 방편도 다 용납이 되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고 “나는 이 법이어야 된다.”고 하나 딱 세워놓으면 그것이 처처에 걸립니다. 곳곳에 걸리게 되고 안 맞는 데가 너무 많아요. 일본에 가도 안 맞고, 인도에 가도 안 맞고, 딴 나라 가면 더 안 맞고요. 다른 절에 가도 안 맞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세우면 안 되는 겁니다. 그저 좋은 수단. 바른 수단으로만 사용할 뿐이지 꼭 고집하고 세울 일은 아니다.
- 3강-4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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