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녹취(문수경전)

법화경 대강좌 3강 - 2 (방편품63~79)

수선님 2022. 10. 23. 11:24

법화경 대강좌 3강 - 2

 

 

  여기서 一佛乘. 一切種智를 말하는 것은 “現實”그래요.

실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방편을 이야기할 때는 “開權(개권)”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개권은 앞에 61번에 석가모니불이 우리 중생들의 “이러이러한 입장 때문에 그래서 설법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방편을 말하는 것이 되고 그렇습니다.

 

63. 舍利弗 十方世界中 尙無二乘 何況有三

      사리불 시방세계중 상무이승 하황유삼

사리불아, 十方世界中에 尙無二乘이어늘, 시방세계가운데이승도 없거늘 어찌 하물며 삼승이 있으리요. 삼승은 더욱 더 말할 것도 없다.

“唯有一佛乘” 그래요. 오직 일불승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 사람을 알고 보면 전부 부처지 그 외에 수다원도 아니고, 사다함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니고, 아나함도 아니고, 성문도 아니고, 연각도 아니고, 보살도 아닙니다.

그저 부처일 뿐입니다. 우리가 방편으로, 가설로 이렇게, 이렇게 매겨놔 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비구다. 비구니다. 사미다. 사미니다. 선남. 선녀.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매겨 보는 것이지요. 불자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우리가 현상차별에 맞춰서 별별 명칭을 열거하지만, 결국 뭡니까? 통일된 하나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아프리카 사람도 사람이요. 미국사람도 사람이요.

한국 사람도 사람이요. 어린 사람도 사람이요. 늙은 사람도 사람이요.

남자도 사람이요. 여자도 사람이요. 유식한 사람도 사람이요.

무식한 사람도 사람이요. 사람이라고 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도 거기에 이유를 달수가 없습니다. 법화경은 그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큰 스님도 사람이요. 작은 스님도 사람입니다.

구참도 사람이요. 신참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수행이 많이 되었다. 세월이 많이 갔다. 이것 가지고 따지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성문을 가르치는 가르침 밖에 안 됩니다. 제법의 실상을 가르치는 법화경이 안 된다고요.

불교를 이해하는데 정말 좀 더 다른 눈을 뜨고, 高着眼이라고나 할까?

안목을 좀 높여서 새롭게 봐야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4. 舍利弗 諸佛 出於五濁惡世 所謂劫濁 煩惱濁 衆生濁

      사리불 제불 출어오탁악세 소위겁탁 번뇌탁 중생탁

      見濁 命濁 如是 舍利弗 劫濁亂時 衆生 垢重 慳貪嫉妬

      견탁 명탁 여시 사리불 겁탁난시 중생 구중 간탐질투

      成就諸不善根 故 諸佛 以方便力 於 一佛乘 分別說三

      성취제불선근 고 제불 이방편력 어 일불승 분별설삼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이 五濁惡世에서 나왔나니, 오탁악세에 출현했다는 말입니다. 劫濁과 煩惱濁과 衆生濁과 見濁과 命濁이니라.

이와 같아서 사리불아, 겁탁이 어지러울 때 중생이 垢重하여 번뇌의 때가 무거워서 慳貪嫉妬하며, 또 여러 가지 不善根을 선하지 못한 것들을 成就하는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이 方便力으로서 一佛乘에서 分別.

나누고, 나누어서 셋을 설했느니라. 3을 설했느니라.

一佛乘에서 分別說三이다. 그저 하나인 사람인데 비구라 하고 비구니라하고, 청신사라하고 청신녀라 하고, 동양인이라 하고 서양인이라 하고 온갖 다른 모습. 차별상을 나누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야기가 통할 때가 있고 필요할 때가 있긴 있어요.

있지만, 인간의 실상을 보는 눈이 우선적으로 있은 뒤에, 그것이 있고나서 그 다음에 차별된 현상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것이 중요하지요.

차별을, 서로서로 다른 점을 우리가 무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법화경도 그것을 무시 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 차별된 것을 보기 전에 평등한 것. 공히 누구에게나 지고한 가치가 있는 그 가치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차별된 것을 차별은 차별대로 수용하고 용납해 줘야지요.

 

  그것이 中道正見이라는 것이지요. 차별과 평등을 공히 수용하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평등을 볼 때는 평등으로 보고, 차별을 볼 때는 차별을 보고, 계속 차별로만 몰고 가면 그것은 큰 잘못이지요. 그것은 치우친 것입니다. 중도적인 소견이 못 되지요. 또 그렇다고 평등만가지고 평등으로만 봐 가지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평등으로만 몰고 가면 이것도 치우친 것입니다. 안 되지요. 그러면 두루 뭉치가 되는 것이지요.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차별로만 치우쳐도 안 되고, 평등으로만 치우쳐도 안 되고, 차별과 평등을 공히 수용하고, 차별이 필요할 때는 차별로 쓰고, 평등이 필요할 때는 평등으로 쓰는 것이 존재를 바로 본 것. 사람을 바로 본 것이고, 사람의 실상을 바로 본 것이고, 그것을 중도정견이라고 합니다. 중도적으로 바로 보는 것이다.

 

  八正道의 처음이 正見 아닙니까? 8정도도 해석이 참 구구한데 성에 썩 차는 해석을 별로 못 봤습니다.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간단한 것 한 가지만, 여기는 그런 기술 배우는 곳도 아닌데,

이런 소리가 좀 안 맞지만, 正命이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어떤 행위가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데 바른 행위가 되겠는가?

그거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正이 아닙니다. 백정 노릇을 해서라도 살아야 하면 그것이 정명입니다.

 

  방생을 해서 우리가 사는 수단이라면 방생하는 것도 하나의 정명이라고요. 방생만 정명이고 백정은 정명이 아니라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正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꼭 “바른 직업을 가져야 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초교리 보면 전부 그렇게 해놨어요. 어디에도치우치지 않는 職業.

그것을 正이라고 합니다. 다른데 다 그렇습니다. 正語도 마찬가지고,

正業도 마찬가지고, 正命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바르게 해야 한다는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참 중요하지요. 正見만 제대로 알면 나머지는 다 같이 풀리는데, 정견은 설명을 그럴 듯하게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그만 치우친 소견을 이야기하는 그런 교리서들을 많이 봅니다.

 

  分別해서 說三이니라. 어디 說三. 셋만 설했습니까?

30가지도 되고, 300가지도 되고, 3000가지도 되고, 30000가지도 됩니다.

얼마나 많고 많은 방편을 우리가 만듭니까? 또 시대에 따라서 만들 수밖에 없어요. 한 가지 예로서 기도불교라고 하는 것. 이것은 본래 옛날 불교에는 없습니다. 옛날 불교에는 없던 것인데 요즘에 우리가 필요해서 만든 불교가 기도불교입니다. 그것이 나쁜 불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꼭 좋은 불교도 아닙니다. 옛날에 있었던 불교라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지금 있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불교. 그런 것 많잖아요.

호국불교라는 것이 있었나요? 부처님은 민족주의자 아니거든요.

호국불교는 그때 상황에 따라서 만든 불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만들면 큰일 나지요. 그런데 불교는 너무나도 융통성이 많아서 필요에 의해서 불교를 그때, 그때  잘 만들어요. 그래서 그것이 공통성이 있으면 같이 수용하는 겁니다. 그래 같이 해가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 이것이 언제 있던 불교냐?

그렇게 크게 따지고 나서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說三이라고 했지만 3만도 되고, 30만도 되고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화경 안에서 그 당시 3승의 길이 너무나도 번다했는데, 그것을 일불승으로 귀결시키는 입장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지요.

 

65. 舍利弗 若我第子 自謂阿羅漢 辟支佛者 不聞不知

      사리불 약아제자 자위아라한 벽지불자 불문부지

      諸佛如來 但 敎化菩薩事 此非佛第子 非 阿羅漢 非辟支佛

      제불여래 단 교화보살사 차비불제자 비 아라한 비벽지불

 

  사리불아, 만약에 나의 제자가 스스로 이르기를,

阿羅漢 辟支佛者가 不聞不知 諸佛如來. 스스로 아라한. 벽지불이라고 하면서”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부처님 여래가 다만 보살을 교화한다고 하는 일을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 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非佛第子며 非 阿羅漢이며 非辟支佛이니라.

그 당시로서는 이것이 무서운 소리입니다.

현재 우리 입장으로서야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소리지요.

그 당시로서는 이것은 큰 혁명을 일으키는 소리입니다.

  

  阿羅漢이나 辟支佛로서 여래가 다만. 보살만 교화한다.

입니다. 但. 다만. 보살만 교화한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알지도 못 하고 들은 바도 없다면, 이것은 불자도 아니다.”

“내 제자도 아니다.” “아라한은 무슨 아라한.” 그것은

“벽지불도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인간도 아니다.” ←이런 표현이거든요.

이런 표현은 보살을 교화한다고 하는, 이 보살이라고 하는 낱말이 일반화되기 전이거든요. 일반화되기 전입니다. 그래서 남방불교나 저 상좌부불교에서는 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신에만 국한된 낱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보살이라는 낱말은 “석가모니 전신에만 국한된 낱말이다.”

 

  석가모니가 저런 위대한 인격자가 되기까지는 과거에 보살로서 수많은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날 저렇게 위대한 인격자가 되었다. ←이렇게 설명할 때만 가능하지 그 외에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니 그런 교리 가지고 이 글을 우리가 볼 때,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것은 별 이야기도 아니지요.

그러나 참고로 그렇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第子의, 진짜 제자와 가짜 제자를 가려내는 내용이 되겠지요.

 

66. 又 舍利弗 是諸比丘 比丘尼 自謂已得 阿羅漢 是 最後身 究竟涅槃

      우 사리불 시제비구 비구니 자위이득 아라한 시 최후신 구경열반 

      便 不復志求 阿縟多羅三藐三菩提 當知 此輩 皆是增上慢人

      변 불부지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당지 차배 개시증상만인

      所以者何 若有比丘 實得阿羅漢 若 不信此法 無有是處

      소이자하 약유비구 실득아라한 약 불신차법 무유시처

    

  또 사리불아, 모든 比丘比丘尼가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阿羅漢을 얻었다. 또 最後身인 究竟涅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더 이상 阿縟多羅三藐三菩提를 마음에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알아라. 이 무리들은, 표현을 이무리라고 했습니다. 이 무리들은 皆是增上慢. 지혼자 그저 소견 꽁 막혀가지고, 그 공부가 다 인냥 잘 난체 하는 사람이다.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에 실로 어떤 비구가 실로 아라한을 얻고 만약에 이 法을, 지금 대승법이지요. 보살을 가르친다는 이법을 믿지 않는 것이 無有是處니라.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겁니다. 진짜 아라한이라면, 진짜 아라한이라면 敎菩薩法.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라고 하는 여기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아주 무서운 말씀이지요.

 

67. 除佛滅度後 現前無佛 所以者何 佛滅度後 如是等經

     제불멸도후 현전무불 소이자하 불멸도후 여시등경

     受持讀誦解義者 是人難得 若遇餘佛 於此法中 便得決了

     수지독송해의자 시인난득 약우여불 어차법중 변득결로

 

  부처님滅度後 現前無佛은 제한다. 그랬어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現前에 부처님이 없을 때는 함이니 까닭이 무엇인가 하니,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 이와 같은 등의 경전을 受 持 讀 誦 解義者는 뜻을 해석하는 사람은 是人은 難得이니라. 이러한 사람은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사람이 만약에 다른 부처님을 만나면 이 법 가운데서 便得決了니라.

곧 완전한 해결. 決了라고 하는 것은, 시원한 해결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부처님. 若遇餘佛. 이것이 아주 묘미가 있는 말인데,

우리가 상식적인 말로 깨달은 사람은 모두 부처님이다. 부처님이후에 마명. 용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부처님 못지 않는 아주 출중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들이 많았었거든요.

그 분들을 여기서 은근히 인정하는 입장이 됩니다. “若遇餘佛” 하면 그래요.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만약에 이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이 법 가운데 시원한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68. 舍利弗 汝等 當 一心信解 受持佛語 諸佛如來言無虛妄    

      사리불 여등 당 일심신해 수지불어 제불여래언무허망

      無有餘乘 唯一佛乘(무유여승 유일불승)

사리불아, 그대들은 마땅히 一心으로 信解해서 佛語를 부처님의 말씀을

受持할지니, 諸佛如來는 言無虛妄이니라. 말에 허망함이 없다.

無有餘乘이요, 唯一佛乘이니라. 나머지 다른 법은 없고 오직 일불승뿐이다. 2승 3승 여러 가지 승이 많은데, 온갖 가르침이 많은데 그 가르침은 사실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일불승뿐이다.

 

69. 爾時 世尊 欲 重宣此義 而說偈言

      이시 세존 욕 중선차의 이설게언

그 때 세존이 이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5000퇴석 이야기가 반복이 됩니다.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살펴봐서 아시겠지만 산문하고 게송하고 중복이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중복이 안 되고 게송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래서 시간이 없어도 놓치기가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시간이 용납하는 데까지 게송도 계속 보겠습니다.

 

70. 比丘比丘尼 有懷增上慢 優婆塞我慢 優婆夷不信 如是四衆等 

     비구비구니 유회증상만 우바새아만 우바이불신 여시사중등

     其數有五千 不自見其過 於戒有缺漏 護惜其瑕疵 是小智已出

     기수유오천 부자견기과 어계유결루 호설기하자 시소지이출

     衆中之糟糠 佛威德故去 斯人尟福德 不堪受是法

     중중지조강 불위덕고거 사인선복덕 불감수시법

    

  比丘比丘尼와 有懷增上慢. 증상만을 품었으며 또

優婆塞我慢과 優婆夷不信. 이와 같은 四衆等이, 사람들의 그 수가 5000명이나 된다.

不自見其過하고, 자신의 허물은 스스로 보지를 못하고, 於戒有缺漏일새.

계에 있어서도, 계행에 있어서도 결함이 있다 이겁니다.

護惜其瑕疵하나니, 자기의 허물을 보호하고 감춘다 이겁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탐 진 치 3독과 온갖 허물들이 많지만, 그중에 제일 범하기 쉽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식은 밥 먹듯이 하는 일이 탐욕도 별로 아니고, 제가 가만히 보니까 진심도 크게 아니고, 치심도 크게 아닙니다.

제일 쉽게 범하는 일이 자기 자랑하는 것 하고, 자기 허물 덮는 일.

그것은 쉽게 잘 하대요. 唯識에 보면 그것이 번뇌로 나와 있거든요.

隨煩惱에 들어있습니다. 딸려오는 번뇌. 그것이 “覆(덮을 부)”라는 것이지요. 자기 허물 덮는 것. 자기 허물 드러내서 이야기하는 사람,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발로참회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높이 사는 겁니다. 發露懺悔. 자기 허물 스스로 드러내서 참회하는 것.

그것을 그렇게 높이 보아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 자기 잘못 빤하게 드러났는데도 자수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끝까지 발뺌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보니까 자기 허물 감추고 별것 아닌 것을 자기 자랑하는 것. ←이것이 제일 범하기 쉬운 일이고, 흔하게 있는 일들이더라고요. 

여기 보면 護惜其瑕疵 라고 그랬잖아요. 자기 허물을 잘 보호해서 들추어 내지 않는 것이지요.

 

  是小智已出이라. 小智. ←이것은 잔꾀입니다.

잔꾀가진 사람들이 이미 나타났다. 已出.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대중 가운데 糟糠. 찌꺼기로서 佛威德故去니라. 佛威德 때문에 나갔다.

 5000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斯人尟福德하야  사람은 복덕이 적어서 능히 이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니라. 

 

71. 此衆無枝葉 唯有諸貞實 舍利弗善聽 諸佛所得法 無量方便力

     차중무지엽 유유제정실 사리불선청 제불소득법 무량방편력

     而爲衆生說, 衆生心所念 種種所行道 若干諸欲性 先世善惡業

     이위중생설, 중생심소념 종종소행도 약간제욕성 선세선악업

     佛悉知是已 以諸緣譬喩 言辭方便力 令一切歡喜 或說修多羅

     불실지시이 이제연비유 언사방편력 영일체환희 혹설수다라

     伽陀及本事 本生未曾有 亦說於因緣 譬喩幷祗夜 優婆提舍經

     가타급본사 본생미증유 역설어인연 비유병기야 우바제사경

 

  此衆은 無枝葉하고 唯有諸貞實이니 舍利弗은 善聽하라. 잘 들어라.

諸佛所得法은 無量方便力으로 중생들을 위해서 호대, 衆生心이 생각하는 바와 가지가지 所行道와 若干諸欲性과, 여러 가지 욕망과 성품은 先世善惡業이어늘 선세의 선악의 업이거늘 부처님이 그것을 다 이미 알아맞히시고, 諸緣譬喩와 온갖 인연과 비유와 언사와 방편력으로 一切歡喜를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歡喜케 하며, 說修多羅와 이것은 구부 경전입니다.

修多羅 · 伽陀 · 本事 · 本生 · 未曾有 · 因緣 · 譬喩 · 祗夜 · 優婆提舍. ←이런 것들을 優婆提舍經을 설하노라.

 

72. 鈍根樂小法 貪著於生死 於諸無量佛 不行深妙道 衆苦所惱亂     

      둔근락소법 탐착어생사 어제무량불 불행심묘도 중고소뇌란

      爲是說涅槃 我設是方便 令得入佛慧 未曾說汝等 當得成佛道

      위시설열반 아설시방편 영득입불혜 미증설여등 당득성불도

      所以未曾說 說時未至故 今正是其時 決定說大乘 我此九部法

      소이미증설 설시미지고 금정시기시 결정설대승 아차구부법

      隨順衆生說 入大乘爲本 以故說是經

      수순중생설 입대승위본 이고설시경

    

  鈍根樂小法하여 둔근들은 小法을 작은 법을 즐겨. 그렇지요.

큰 법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 전에 어떤 참선하는 법회에 사람들이 한 20여명 왔어요. 주관하는 스님이 “야~ 많이 왔다.”고 그래요. “많이 왔다.”고. 신도들은 또 20명쯤 오니까 미안해서 그런지  “어째서 스님, 많이 왔다고 그럽니까?”

“참선할 수 있는 사람들이 20명이나 왔으면 대단한 것이지, 복 짓고 뭐 하고 하는 푸닥거리 비슷한 것 하는 데는 사람 많이 모이지만, 이런 올 곧은 법을 하는 데 20명 왔으면 많이 온 것 아니냐?”는 그런 이야기가 귀에 남아있습니다. 여기 보면 鈍根樂小法이라. 둔근들은 작은 법을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貪著於生死하여, 생사에 탐착 해, 於諸無量佛. 모든 한량없는 부처님의 不行深妙道하고, 깊고 미묘한 도는 행할 줄 모르고, 衆苦所惱亂일새.

온갖 고통으로서 惱亂하는바가될새. 그래서 그 고통을 없애려고 그들을 위해서 열반을 설했다 이겁니다. 편안하고 안온하고 남을 배려하거나 남을 위하거나 그런 보살행. 남이야 굶어죽든지 말든지 그거 알바 없다하고 그냥 푹 파묻혀서 조용히 사는 그런 식 불교가 500년 동안 거의 그런 식으로 흘러 왔는데,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부처님의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이것이 법화경내지 유마경 같은 대승불교 운동 선언서로서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我設이 是方便하야 내가 방편을 베풀어서 令得入佛慧.

부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고, 未曾說汝等은 일찍이 그대들에게 말하지 아니한 것은, 當得成佛道. 마땅히 불도를 이룰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했으니” 그 말입니다. 일찍이 불도를 이룬다는 말은 그동안 법화경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 까지는 없었다 이겁니다. 부처가 오직 석가모니 한 분 뿐이지 성불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법화경이 세상에 출현하기 500년 전에는 전혀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그 말입니다. “그대들이 불도를 이룬다. 부처가 된다고 하는 말은 내 일찍이 하지 아니했다. 비로소 법화경을 설하면서 그대들도 부처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입니다.

 

  所以未曾說은 왜 일찍이 그런 말을 아니 했느냐?

說時未至故니라. 말할 때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說時未至. 今正是其時일새. 지금에야 바로 그 이야기를 때 일새.

決定코 說大乘하노라. 이제 됐다 하면서 땅을 치면서 결정코 대승을 설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我此九部法은 앞에서 말한 구부교지요.

隨順衆生說하야 중생을 隨順해 설해서 대승에 들어갈 근본을 삼을새.

以故說是經이니라. 그래서 이 경을 설하노라.

是經 이라는 것은 대승을 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이 된 뒤에 한다는 것이지요. 

 

73. 有佛子心淨 柔軟亦利根 無量諸佛所 而行深妙道 爲此諸佛子

      유불자심정 유연역이근 무량제불소 이행심묘도 위차제불자

      說是大乘經 我記如是人 來世成佛道 以深心念佛 修持淨戒故

      설시대승경 아기여시인 내세성불도 이심심염불 수지정계고

      此等聞得佛 大喜充遍身 佛知彼心行 故爲說大乘

      차등문득불 대희충편신 불지피심행 고위설대승

   

  有佛子心淨하야 불자가 마음이 청정함이 있어서

柔軟亦利根이라. 부드럽기도 하고 아주 잘 순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잘 순화 되어서 그리고 근기도 아주 날카로워져서 無量諸佛所에서 而行深妙道라. 깊고 미묘한 도를 행함이라. 爲此諸佛子하여 이 모든 불자들을 위해서, 앞에서 “有佛子心淨. 마음이 청정해진 그 사람을 위해서” ←이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說是大乘經하니, 대승경을 설하니,

我記如是人은 내가 수기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들은 來世에 成佛道하리라. 내세에 불도를 이룬다고 수기하리라.

 

  來世得作佛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지요. 내세라고 하는 것이 오는 세상이라고 했지만, 바로 이 순간 다음 순간이 내세입니다.

以深心念佛하고, 깊고 깊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修持淨戒故로. 修持를 淨戒하는 까닭으로 此等聞得佛하고, 이러한 이들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듣고, ←이 말입니다. 來世에 成佛道.

내세에 됐든 내년에 됐든 언제 되던 간에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사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일을 듣고 뭐라고요?

大喜充遍身입니다.

 

  큰 기쁨이 온몸에 가득 찬 겁니다. 부처가 된다는 소리에 그냥 기쁨이 온몸에 가득 찬 겁니다. 그 당시까지는 부처가 된다는 말은 도대체 있을 수 없었는데, “그대들도 나 같은 사람이 된다.” “나 같은 부처가 된다.”하는 이 소리 듣고, 수행하는 사람. 온 인생을 다 던져서 뭐드라? ㅎㅎㅎ ‘청춘을 불사르고?’ 어쨌든 그렇게 인생을 불살라 가지고 이한 몸 여기에 바쳤는데, 부처가 된다고 했으니까 우리에게 최대의 희망이 앞에 열려 있잖아요.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大喜充遍身입니다. 온 법희선열이 그냥 온몸에 가득 차는 겁니다.

 

  결국 몸에 가득 차야 기쁨을 느끼는 거니까요. 부처님이 그들의 心行을 아시고, 마음의 움직임. 이럴 때 心行하면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잘 살피시고는, 故爲說大乘이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 大乘을 설함이니라. 대승을 설한다. 이 경을 설한다. 대승경을 설한다. 계속 내려 왔지요?

이것이 諸法實相의 도리를 설하게 된 것을 이렇게 詩로서는 훨씬 더 장황하게, 산문에서 보다 훨씬 장황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74. 聲聞若菩薩 聞我所說法 乃至於一偈 皆成佛無疑

     성문약보살 문아소설법 내지어일게 개성불무의

聲聞若菩薩이 성문이나 또는 보살이 聞我所說法하대, 나에게서 이 설한 바 법을 듣되 乃至. 한 게송이라도 皆成佛無疑리라. 다 부처 이루는데 있어서 의심이 없으리라. 한 게송만 들어도 부처 이루는데 의심이 없으리라.

이제 살살 이렇게 이야기해갑니다. 한 게송만 들어도 부처가 되는데 틀림없다.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아주 쉬운 이야기.

 

  부처님 앞에서 손 한번만 번쩍 들어도 皆已成佛道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곧 나오지요. 그 말을 처음부터 하면 너무 허황하지요. 부처님 앞에서 손 한번 드는 그런 불손한 짓을 하고도 불도를 이뤘다니, 그것이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그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니하고,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한 게송만 들어도 부처를 이루는데 의심할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75. 十方佛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但以假名字

     시방불토중 유유일승법 무이역무삼 제불방편설 단이가명자

     引導於衆生 說佛智慧故 諸佛出於世 唯此一事實 餘二則非眞

     인도어중생 설불지혜고 제불출어세 유차일사실 여이즉비진

     終不以小乘 濟度於衆生(종불이소승 제도어중생) 

    

  十方佛土中중에 唯有一乘法이요. 왜? 우리가 부처가 될 수밖에 없느냐? 시방불토중에 1승법 밖에 없으니까요.

부처 되는 길밖에 없고, 부처의 삶 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갈 데는 넘어져도 부처. 일어서도 부처. 부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부처님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은 부처님이 큰 인심 쓴 것이 아니라고요.

당신의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밖에 할 것이 없어요.

밑천도 이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지 무슨 큰 인심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왜냐?

 

  十方佛土中중에 唯有一乘法이니까요. 一乘法뿐이니까, 자기 살림살이가 그것뿐이니까 그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지요.

無二亦無三. 둘도 없고 또한 셋도 없다. 이런 구절들이 유명한 말입니다.

十方佛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이것이 재미있는 말이지요. 부처의 방편설은 제한다. 방편으로 이야기한 것은 여기에 제외된다. 그랬어요.

    

  但以假名字로 다만 거짓 명자로서 중생들을 인도하나니, 그렇지요. 이런저런 있는 이야기도 하고 없는 이야기도 하고 꾸며서도 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해가면서, 우는 아이 달래는데 호랑이만 왔다 하나요? 사자도 왔다 하고 코끼리도 왔다 하고 별별 거짓말도 다해가면서 울음만 그치게 하면 되니까요.

그것은 결코 방편이지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說佛智慧故니라. 불지혜를 설하기 위한 까닭이다. 諸佛出於世에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함에 唯此一事實이요. 오직 이 하나의 사실. 이 一事實.

餘二則非眞이라. 나머지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전부 가짜다 이 겁니다. 아주 못을 박고, 박고 또 박고 그냥 아주 확실하게 박아놓는 그런 표현입니다.

 

  唯此一事實이요. 餘二則非眞이라. 인간의 실상은 부처다.

지금현재 그 모습 그대로, 아무리 탐 진 치 삼독이 많다 하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가 부처다. 보살계 받는 이 책에도 감동한 내용이 “이렇게 큰 보살계를 아무에게나 전하면 됩니까?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어떻게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이런  보살계를 함부로 주면 지키지도 못해서 죄짓고, 또 비난해서 죄짓고, 부담 줘서 죄짓고, 죄짓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이렇게 하면 됩니까?”이런 질문을 했더니 영명연수선사가 “자기 자신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불성종자를 말살하는 것이고, 자기의 불성종자를 말살해 버리는 것이고, 만약에 자기가 본래 부처가 아니라고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시방부처님을 비방하는 일이 된다. 그러면 화엄경에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하지 아니 했을 것 아니냐? 화엄경에서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라고 했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해놨어요.

 

  그래서 스스로 문수보살이다. 보현보살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게 자기 자신의 진실생명을 말살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부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방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보살계 받는 길] ←이 책에 그렇게 해놨어요. 제가 그것을 보고 아주 감동을 해가지고 어떻게 하더라도 이것을 세상에 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처음 듣는 말 아니지요? 우리 대승불교에서는 늘 듣는 소리이고, 언필칭 화엄경이야기 하면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큰 보살계를 우리가 어찌 받겠는가?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복이 무량하다고 하는 것도 이 책에 근거가 있습니다.

 

  영명연수선사가 하신 말씀입니다.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받고 나서 바로 일어나면서 깨뜨리더라도 그 복이 한량이 없다는 말의 근거가 이 책입니다. 우리도 그 말 많이 들어왔습니다. 참 많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진짜 있기나 있는 소리를 저렇게 하는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침, 그야말로 아미타불의 존칭을 받는 훌륭한 도인이 하신 말씀이니까요.

唯此一事實이요. 餘二則非眞이니 終不以小乘으로 마침내 소승으로서 중생을 제도할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결코 소승으로서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 

?? 謗佛.

 

76. 佛自住大乘 如其所得法 定慧力莊嚴 以此度衆生 自證無上道

     불자주대승 여기소득법 정혜력장엄 이차도중생 자증무상도

     大乘平等法 若以小乘化 乃至於一人 我則墮慳貪 此事爲不可

     대승평등법 약이소승화 내지어일인 아즉타간탐 차사위불가

  

  佛自住大乘하시고, 부처님이 스스로는 대승에 머무시고,

如其所得法하여, 그 얻은바 법과 같이 하여 定慧力으로 莊嚴해서 以此度衆生이니 그것으로서 중생들을 제도해. 당신이 대승법에 머물고, 그 법을 얻어 가지고서 그런 법에서 나온 定慧力으로서 자기 자신을 莊嚴해서 중생들을 제도한다. 自證無上道. 스스로 최상의 도를 증득해서, 그 최상의 도는 大乘이요 平等法이라. 그런 것을 증득하고서 만약에 小乘법으로서 교화하는데,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사람만 小乘법으로 교화한다고 하더라도 뭐라고요?

我則墮慳貪이라. 그것은 간탐죄에 떨어진다. 이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것이 간탐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此事爲不可니라.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처님제자는 고급 인력입니다.

부처님도 고급인생입니다. 최고급 인생입니다. 당신은 최고의 법을 얻었기 때문에 내가 소승법으로서 결국 교화한다면 이것은 내가  만약에 아주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에게만 내가 소승법을 이야기하겠다. 그것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 봐요. 그래 놨잖아요. 한 사람에게만 하는 것도 용납 못한다. 그는 간탐죄에 떨어진다 이겁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법을 아끼는 것은 엄청난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경전에 그랬거든요. 사실이고요.

돈이야 아낀들 뭣하고 안 아낀들 별 가치 있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아끼면 큰 잘못이지요.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 또 아는 사람이 제대로 안다면 법을 간탐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此事爲不可니라. 이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부처님하고 이렇게 인연 된 것이 보통 인연이 아닌데 그로 통해서 우리가 “佛戒를 받으면 佛位에 오른다.” 보살계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부처님의 戒를 받으면 바로 부처의 지위에 올라 버려서 그럼 우리 모두가 요즘 표현으로 아주 고급 인력입니다. 고급 인력은 고급보시를 해야 됩니다. 아주 부처님의 제자답게, 부처님의 제자답게 최상급으로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 만약에 하급을 가지고 하면 그것은 방편으로선 좋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우리불자는 부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지신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77. 若人信歸佛 如來不欺誑 亦無貪嫉意 斷諸法中惡

     약인신귀불 여래불기광 역무탐질의 단제법중악

     故佛於十方 而獨無所畏(고불어시방 이독무소외)

若人信歸佛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믿고 귀의하면 如來不欺誑하며, 여래는 그 사람을 속이지 아니하며. 亦無貪嫉意라. 또한 탐하거나 질투하는 그런 뜻이 그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법 가운데서 악을 끊을새. 고로 부처님은 시방에서 홀로 두려움이 없는 분이다.

無所畏다. 홀로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78. 我以相嚴身 光明照世間 無量衆所尊 爲說實相印

    아이상엄신 광명조세간, 무량중소존 위설실상인

我以相嚴身하며, 나는 상으로서 몸을 장엄했으며, (32상도 이 속에 해당되겠지요.)

光明照世間이라. 모양만 잘 갖췄나요? 내가 광명으로서. 지혜의 광명으로 세상을 환히 비춘다 이겁니다. 無量衆所尊일새. 그래서 한량없는 대중들이 나를 존경하는 바일새. 爲說實相印이니라. 제법실상의 도장을 설한다. 제법실상을 설한다.

 

79. 舍利弗當知 我本立誓願 欲令一切衆 如我等無異

     사리불당지 아본립서원 욕령일체중 여아등무이

     如我昔所願 今者已滿足 化一切衆生 皆令入佛道

     여아석소원 금자이만족 화일체중생 개영입불도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我本立誓願은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이 있어요. 중요 합니다. 뭐냐? 欲令一切衆으로 如我等無異라. 나하고 똑같이 중생들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본래의 서원이다. 부처님의 서원은 그것입니다.

如我昔所願은 내가 옛날에 세운 소원은 지금 이미 만족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미 만족했다.” 化一切衆生하여 皆令入佛道다. 일체중생을 교화해서 모두 다 佛道에 들어가게 한다. 이것이 결국은 부처님소원은 나하고 똑같이 되는 것. 부처가 는 것. 그런데 “내 소원이 지금 이미 만족했다.”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미 만족했다.

 

   “一切衆生이  佛道에 들어가게 했다.” 이것이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현재 탐 진 치 삼독이 다 있는 그대로 부처다. 하나도 변함없는, 조금도 손색없는 부처다. 석가모니부처님하고 지금 부처님을 비방하는 아주 극악무도한 사람이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하고 무게를 달면 무게가 똑 같다 이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지요? 이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뭐 어떻게 시간 걸리고 어떤 조건을 붙이고, 수행에 필요한 조건 붙여서

“그때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거 아닙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今者已滿足이라고 했잖아요. “내 소원이 지금 이미 만족했다.”

일체중생들을 교화해서 다 佛道에 들어가게 했다.”그랬잖아요?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여기 보면 “皆已成佛道니라.” 과거부처님 이야기할 때 보면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고 계속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여기 보살계 책에도 보면 “탐욕도 곧 도다. 진심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 불법을 모두 갖추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도 그 안에 법문으로 다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이유 설명까지 자세하게 다 해놨는데, 이것이 우리 마음에 얼른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도 차원 높은 이야기이고, 그 동안의 보통불교. 일반불교의 이야기하고는 전혀 다르지요?

 

  왜냐하면 탐 진 치 3독을 다 제거해야 되고, 번뇌를 없애야 되고, 이런 조건. 또는 6바라밀을 철저히 닦아야 하는 그런 조건. 아니면 무슨 動靜一如. 寤寐一如. 이런 일여의 어떤 경지를 터득해야 한다는 그런 조건. 사실은 이런 조건 투성이 입니다. 조건 투성이를 나열해놓고, 그 조건을 투과해야만 비로소 부처가 된다는 설이 많이 있잖아요. 지금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 그런 학설입니다. 그런 불교에요. 그런 조건을 마스터해야 부처가 된다는 그런 불교를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는데 이 법화경은 그것이 아니거든요. 법화경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살계를 받는 길도 그것이 아니고,

임제록도 그것이 아닙니다. 선불교도 그것이 아니고요.

 

  법화경 강좌 제3강 유인물 법화경 노트 1.

2. 방편품에 보면(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인데) 법화경은 경전의 완성이며 부처님교설의 완성이다. 그리고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다. 그랬어요.

이 법화경은 경전의 완성이고 부처님교설의 완성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다고요. 그리고 선불교도 불교의 완성입니다. 어떤 불교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선불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 교설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다. 이런 표현을 곁들여서 썼는데,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불교에서 어떤 조건을 나열하고,

그 조건을 마스터한 뒤에 비로소 부처가 된다는 그런 것만 우리가 알고 있고, 끊임없이 그렇게만 우리가 교육 받아왔고 계속 거기에 쇄뇌가 되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그렇게 그런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됐다는 소식은 아직 못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계종에서 나온 간화선 입문서도 그렇게만 되어있습니다.

그리되면 그것은 전부 방편설이지 완성된 불교는 아닙니다. 방편불교입니다. 그리되면 법화경만도 못한 불교입니다. 그것은 근기 하열한 사람들에게 그런 방편으로 필요하기는 하지요. 그렇지만 완성된 불교는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법화경에 분명히 그렇게 해놨잖아요.

  “내 소원이 만족됐다.”

  “내 소원이 뭐냐?

  “나 하고 똑 같이 되는 것이다.” 나 하고 똑 같이 되는 것이 뭐라고요?

 

   부처님도 섭섭합니다.

   화도 납니다.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해야 됩니다.

   졸리면 자야 됩니다.

   세월이 다가면 죽어야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어느 날, 탁발하러 갔다가 그날 동네 축제가 있어서 밥한 톨 못 얻고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입니다.

 

  소승불교에서 너무 신비화 해놓은 부처님만 상상하다가는 세세생생 부처님 못 만납니다. 그런 부처님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냥 그려놨을 뿐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나 와 똑 같고자 하는 것이 내 소원이고, 그것은 이미 만족이 됐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불도에 들어가게 했다.”

그래서 결국은 受記. 너도 부처다. 너도 부처다. 너도 부처다. 전부 부처라고 일체중생을 다 수기해 버리는 것이 바로 이 법화경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두고 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 이야기가 통하는 것이지요. 이 이치를 알면 가능한 것이고요.

 

  그래 업장은 어떻게 되느냐? 이런 이치를 알면 업장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이들도 그런 것을 누가 자꾸 옆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기존의 상식 가지고 자꾸 업장문제를 이야기 하니까 隨緣消舊業이라고 그랬습니다. 인연 따라서 옛 업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봄이 오면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풀려간다. 또 안 풀린다 한들, 안 풀린다 한들 그냥 그대로 업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완전한 부처다.

 때문에 부처다. 아니다. 이것은 그것을 따지는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부처가 진짜 부처라면, 석가모니 같은 이는 천년만년 살아야 옳잖아요. 아니잖아요. 우리 육신 가진 사람하고 똑 같잖아요.

 

  자기의 석가족을 침범한 코살라국의 유리왕이 쳐들어갈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것이 금강경에서 節節支解라. 낱낱이 가슴을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는 절절지해라는 것이 그 말 아닙니까? 가슴을 도려내는 듯이 내가 아픔을 겪었다. 살아생전에. 자기 제자들도 그렇게 수천만, 수십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종족. 가비라성을 쳐들어가고 가비라성이 무너지고, 자기 석가족이 멸망하는 그런 사실을 두 눈 번히 뜨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안 아프면 그것은 인간도 아니지요. 부처는 고사하고 인간도 아닙니다. 당연히 가슴이 아파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금강경에서 칼로 마디마디 도려내는 듯이 아팠다는 표현이 그 표현이거든요. 거기에 선인을 이야기하고, 과거 선인의 이야기하고 두 가지 예를 들었는데, 한 가지 예는 부처님 살아생전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역사적으로 안 밝히고 대충 그냥 뜻만 밝혀놔서 그렇지, 사실을 들추어서 이야기하면 바로 부처님 살아생전의 이야기를 금강경에서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지요. 이 대목이 앞으로 계속 이 宗旨 79번. ←이것이 하나의 근본취지가 되어서 쭉 시종일관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 3강-3으로 이어집니다. -

 

 

 

 

 

 

 

 

법화경 대강좌 3강 - 2 (방편품63~79)

법화경 대강좌 3강 - 2 여기서 一佛乘. 一切種智를 말하는 것은 “現實”그래요. 실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방편을 이야기할 때는 “開權(개권)”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개권은 앞에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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