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신심명2/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도는 화통해져 명백히 드러난다

수선님 2022. 11. 27. 11:17

02.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다만,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도는 화통해져 명백히 드러난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우리 마음의 일반적인 작용이므로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마음을 얻어 도에 이르는 길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

가려내는 것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적인 마음이고, 택하는 것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적인 마음이다.

이러하니 간택하는 마음의 작용을 꺼려한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가려내거나 택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를 분별심이 없는 마음이라 하여 무분별지라고 하는데, 무분별지에 이르면 지도가 환하게 보인다는 말씀이 단막증애 통연명백이다. 이상의 네 구절이 바로 신심명의 근본 골자이다.

임제 정맥으로서 낭야 각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히 주해를 내려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낭야 각 선사가 답하기를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니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이라 하는 첫 구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는 뒤 구절들을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다.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구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의 주해일 뿐, 같은 뜻이라는 말이다.

낭야 각 선사가 앞 네 구절만 크게 쓰고 뒤의 구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이다.

대주 스님은 돈오입도요문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첫 네 구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뒤 구절들은 더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낭야 각선사의 말씀처럼 뒤 구절들을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성철스님).

 

 

감정을 지니고 있는 중생을 유정이라 했다. 유정은 끊임없이 좋은 감정을 가지려 하고 얻으려고 하는 업으로 말미암아, 싫은 감정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게 된다 하였다. 중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싫고 괴로운 감정을 멀리하려 하고, 좋고 즐거운 감정을 얻으려 찰나 찰나 욕심을 부리게 되나, 좋고 즐거운 감정을 얻으려 하는데 방해 되는 것이 나타나면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성을 내게 된다.

 

참는 것 또한 더 괴로운 감정을 피하려는 작전상 후퇴의 방편이거나, 더 큰 즐거운 감정을 얻기 위한 수법의 일환에 불과하다. 참는다고 감정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고통스러운 감정이 생기기 때문에, 배를 채워서 고통의 감정을 피하는 동시에 즐거운 감정을 갖기 위함이니,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 몸체인 것이다. 어느 하나의 감정을 없애면 나머지 다른 또 하나의 감정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몸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앞이 없으면 뒤 또한 없는 것과 같다.

 

인간과 모든 중생의 움직임은 이러한 좋은 감정을 가지려 하는 동시에, 싫은 감정을 멀리하려는 의지 즉, 숙업(잠재의식)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작은 행동이나 큰 행동이나,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하거나,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문제는 작은 즐거움은 작은 괴로움의 과보를 낳고, 큰 기쁨은 큰 슬픔의 인과를 낳으며, 100그램의 행복은 100그램의 불행을 업보로 낳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각자의 업식에 따라 고락의 인과를 받는 시간이 다르게 된다.

 

어떤 이는 큰 슬픔의 업보를 받는 시간에 어떤 이는 큰 기쁨의 업보를 받고 있고, 어떤 이는 태어나는 즐거움의 업보를 받는데 비해 어떤 이는 죽어가는 업보를 받아 고통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처럼, 각자가 받는 고락의 감정을 받는 업보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의 감정이 모두 말끔히 사라져야 비로소 중도의 동연에 들어서서 완전하고 명백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극치의 그 곳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를 피안이라 하기도 하고, 니르바나 즉 열반이라 하기도 한다.

 

부모 자식이나 가족, 친구 친지, 이웃, 민족, 등의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정이란, 바로 나의 감정을 좋게 하기 위한 대상들에 불과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고락의 업은 스스로 각자가 자업자득한다. 그러므로 만약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부모 자신의 감정을 좋게 하기 위해 자식이라는 대상을 택했을 뿐이다.

 

어떻든 감정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감정의 프레임에 걸려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반복하여 거듭할 수밖에 없으니, 이러한 육도(천상‧인간‧아수라‧지옥‧아귀‧축생,)의 틀에서 벗어나려면 감정 자체를 없앨 수 있는 중도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그 길이란, 매사에 있어서 감정의 속성을 잊지 말고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연습과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고락의 인과에 대한 철저하고 확고한 믿음, 신심을 가지고 일희일비하는 버릇을 고쳐 여여한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조건 좋고 나쁜, 그리고 옳고 그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바로 단막증애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락과 증애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마냥 중생의 삶에서 윤회고를 탈출하지 못한다. 그러니 반드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의 힘을 빌려야 한다.

 

 

지금 이 신심명은 중도적 시각을 상당히 강조합니다. 중도라는 것은 양변, 양 극단을 여읜 자리가 중도의 자리인데 그것을 설명하고자 해서 이 신심명에서는 대대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증과 애는 서로 대비가 됩니다. 또 뒤의 문장을 보면 천지, 이러한 문장도 대비가 되지요. 바로 이러한 대대를 40개를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40대를 갖추어서 중도를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뒤에 보면 순역, 시비 등 바로 일상생활에서 나타내고 있는 중생의 상대개념이지요. 바로 변견이라고 합니다. 가 변자를 써서 변견이라 하지요.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말은 주로 이 대대를 떠난 중도법을 아주 간명하게 보여주는 글이 신심명이라고 보는 거지요.

 

 

그런데 이 신심명은 두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대단히 교리적이다, 의리적이다 라고 하지요.

두번 째는 대단히 격외적이다 라는 거지요.

의리적인 부분과 격외적인 부분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는 글이 신심명인데,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 중생들의 분별심, 변견을 치료하는 데는 아주 좋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워하고 애착하지만 않으면 된다 했는데, 밉다 곱다 하는 이 마음 때문에 객관에 휘둘리는 것이지요. 자기의 본래 주인공이 있는데 밉다, 곱다 하는 객의 마음이 들어와서 주인공의 자리를 뺏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이 외출 나가있는 상태이지요. 주인공이 없으니까 등신이 되는 거지요. 우리가 밉다 곱다하고 마음의 칸막이를 만드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주체성을 잃어버리는거라고 보면 돼요. 마음 칸막이를 스스로 만들잖아요?

예를 들어 너무 집착을 해도 잠이 오지 않지요. 자기 주인공이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지요. 그리고 또 내가 너무 미워해도 잠이 오지 않지요? 그렇지요? 부부가 한 판 붙고나니 잠이 잘 옵디까? 씩씩거리지요? 남자를 상대로 힘이 달리니까 속으로 끙끙대면서 이 남자를 어떻게 업어치기할까 고민하지요. 업어치기를 할 수도 없잖아요? 다 자기 에고ego 때문에 그렇지요?

 

미워하고 애착하는 이것 때문에 마음에 칸막이가 생겨서 자기 마음이 멀리 툭 트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미워하고 집착하는 것만 아니면 툭 트일 것인데 왜 미워하고 집착하느냐 이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너무 애착하면 자기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게 어떻게 보면 중생으로서 당연하다면서 합리화 할는지 모르겠지만 진리적 입장에서는 생각해 볼 점이 많다는 겁니다. 

 

자식이라 할지라도 눈에 콩깍지가 쓰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자식이 곰보라 하더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복이 소복소복 쌓입니다’그러지요? 설령 난쟁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러지요.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는 다니다 돈을 잘 주울 것입니다.’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미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가족들도 미워지는 때가 있지요? 시어머니 되는 입장에서 며느리가 미우면 쫓아가서 차버리고 싶어요. 그런 마음 없습니까? 자기 며느리가 귀여울 땐 괜찮지만 엇길로 나가면 나가는 뒷꿈치만 봐도 차버리고 싶어요. 누가 그러대요. '내 며느리 저거 뒷꿈치 차버리고 싶다’고. 그게 다 미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손자 손녀들까지 꼴 보기 싫어지는 겁니다. 그게 다 마음이 툭 트이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미워하고 애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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