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

열반경의 이해

수선님 2022. 9. 25. 13:07

1. 불교의 이상과 열반

 

열반 = 불교의 이상 세계 

『열반경』의 제목인 '열반'이란 말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이므로 한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니르바나란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는게 중요하다.

범어로 니르바나란 말은 뜻으로 옮기면 '寂滅(적멸)' 이란 뜻이 된다.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태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즐거움이기도 하다.

불교가 요구하고 있는 최대의 즐거움(행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은 '열반의 즐거움' 이라는 말이다. 즉 불교의 이상세계 그것을 열반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理想境(이상경)으로서의 열반은 生滅(생멸)의 법인 제행무상의 세상에서 그것을 초월한 경지를 말한다. 어떻게 해서 생멸을 초월 하느냐, 이것이 불교 수행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런 생멸을 초월한 모범적인 모습으로서 부처님이 제시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부처님으로 하여금 표현된 이상경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 형용사를 붙여서 '般涅槃(반열반. 완전한 열반) 또는 '大般涅槃(대반열반. 위대하고 완전한 열반)'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열반경』도 완전한 이름으로 말하면 『대반열반경』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부처님의 어떤 모습을 '대반열반'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널리 알고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죽음(入滅. 입멸)을 가르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돌아 가셨다. 그때의 일을 '대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 위대한 죽음'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위대한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죽음을 그냥 죽음(死亡. 사망)이라 하지 않고 '반열반에 들다' 라고 표현하며 적멸의 세계로 들어 갔다고 하는 의미로 '입멸(入滅)'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반에 들다 

그러면 부처님이 돌아가신 일을 '열반에 들으셨다' 라고 해석했을 때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처님은 살아 계신 동안은 우리와 똑같이 살아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생한 육신이 있다면 역시 배가 아플 때도 있고, 열로 두통이 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제아무리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존재라 하더라도 통증은 아프게 느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런 부처님에게도 80세에 죽음이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죽음으로서 오히려 부처님의 모습이 완전해 졌다고 생각했다. 육신이 나고 죽는 생사의 세계를 떠나서 생멸이 없는 세계로 돌아 가셨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반열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바로 적멸이며 또한 즐거움(樂)이라는 세계였다. 제자들은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죽음에 대한 견해, 육신의 부처님을 어떻게 해석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열반경]이라는 경이 찬술되고 이후 점점 내용이 발전해 가게 되었다.  

 

2. 열반경의 내용

 

부처님의 죽음의 의미 

『대반열반경』이 무엇을 기술한 경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명한 경(經)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의 기록법이 있을 수 있다. 먼저『열반경』이 씌여진 목적은 분명 부처님이 돌아 가셨을 때의 상황을 전하는 것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승경전의『열반경』이다. 이 경은 죽음의 상황이 아니라 부처님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쓰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반열반'의 의미를 쓰려고 하니 무려 40권이나 되는 긴 서술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 주변에는 몇 종류의『열반경』』또는 유사한 이름의 같은 경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것들을 모아서 나열해 보면『열반경』의 변천이랄까, 여러가지 일들이 부가도 되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되기도 하는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초에는 사실의 기술이었던 것이 열반의 의의를 묻는 쪽으로 점점 중점이 옮겨 오고 있다. 그런 변화의 최종적인 것이 대승의 [열반경]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생각을 몽땅 뒤집어 버릴 정도의 대전환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대전환이란 한마디로 부처님은 그때 80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이란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열반경』에서는 이 점이 수없이 되풀이 해서 강조되고 있다.

 

영원이란 죽음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니까『열반경』은 부처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부처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여래는 常住(상주)하며 쉽게 변하는 일이 없다 "

 

이런 생각은 수없이 반복되어 강조된다. 이것이『열반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주제라고 말해도 좋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여기서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떠 올리게 된다. '제행무상'과 '여래는 상주' 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제행무상은 불교가 말하는 진리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반대로 常(상. 항상 상)이란 어떤 존재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常住(상주) 즉 변하지 않는 것의 반대가 무상 즉 생멸(生滅)이다.

 

제행무상은 불교도라면 제일먼저 가슴에 새겨야 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제행무상의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상(無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데 있다. 태어 났으면 언제까지나 살아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그래서 불교는 그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무상이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하고 영원한 것이 없기에 우리의 육신에도 애당초 거기에는 자기 동일을 유지하는 존재, 개인 존재라는 것도 없다는 진리를 불교는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영원히 변치 않는 개인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인 존재 즉 我(아)를 상정하고 더욱이 그것이 죽은 뒤에도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我(아)에 집착하고 내 몸이 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계속해서 여러번씩 我 는 없다, 즉 無我(무아)라고 자꾸만 가르친다.

 

제행무상이라는 진리를 부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으로써 실감 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부처님이 돌아 가시면 큰일이다, 부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셨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부처님은 돌아 가셨다. 이 일로 제자들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느끼고 모두 슬퍼했다.

열반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면 이때의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때 부처님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오른쪽을 밑으로 모로 누웠다. 그 부처님 주변에 제자들을 비롯 여러 사람들과 동물까지 모여서 이 위대한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것은 정녕 제행무상이라는 진리를 부처님 자신이 몸으로서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열반은 제행무상의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함부에 있는 장아함의 유행경을 보면 이점은 더욱 분명하다. 이 경은 부처님 전기의 일부로서도 유명한데 이 경의 기록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며 한시도 머물지 않는다. 때문에 그대들은 이것을 깨닫고 결코 태만해서는 안된다. 게을러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빠알리어 경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부처님은 언젠가 아난다를 데리고 왕사성을 나와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베살리에서 여름 안거를 보내고 다시 북서쪽으로 향하고자 하는데 이미 몸에 통증이 심해졌다. 부처님은 그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부처님은 필경 죽임이 가까워짐을 깨닫고 고향 카필리성을 향해 떠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그 여행 도중 어느 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로부터 공양을 받는다. 이것은 버섯의 일종이라고도 하고 돼지고기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얼마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고 드디어 쿠시나가라 근처의 사라쌍수 밑에서 눕게 된다. 그 와중에서도 수바드라라는 사람을 최후의 제자로 받아 들이고 마지막 설법을 한다.

 

부처님의 열반을 통해서 영원불변의 존재는 없다는 무상(無常)이라는 것이 주요한 가르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등명 법등명

부처님의 입멸과정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아함부(빠알리 경전)의 [열반경]에는 위에서 설명한 무상의 교훈뿐만 아니라 또 한가지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유명한 '自燈明(자등명) 法燈明(법등명)' 즉 '자신을 등불로 하라''진리를 등불로 하라' 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것은 병든 부처님을 보고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통찰하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교훈이다. 여기서 燈明(등명)이라는 것은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불빛에 의지 하라는 것이다.

즉 스스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진리를 밝히고 佛道(불도)의 길을 걸으라는 뜻이다. 법이란 부처님이 지금까지 설해 오신 교훈 즉 진리를 말한다. 부처님이 죽어서 없어져도 내가 설교한 교훈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신의 부처님은 80세의 나이로 이제 몸을 숨겨 버리지만 그 법은 남는다는 사고방식이 나타고 있다. 이것은 뒷날의 대승의『열반경』전개에 열쇠가 된다.  그리고 그 법을 체득해 나가는 '자기(我. 아)' 라는 것이 여기에 인정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런 자기는 수명이 다하면 없어지는 존재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시라도 태만하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다시 말하자면 이론적으로 보면 無我(무아) 라는 가르침과 일견 모순되는 것 - 개인 존재는 없다고 말하면서 그 없는 개인 존재를 몸소 스스로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존재, 무상-무아인 개인 존재 속에서 의지할 곳이 되는 자기(我.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밖에 없는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으로서의『열반경』

빠알리어 경전의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임종 당시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마지막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몇몇 제자들은 아난다 존자와 함께 임종을 지켰지만 부처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장로였던 마하가섭 존자는 끝내 임종을 지켜보질 못했다. 마하가섭과 나머지 제자들은 부처님이 임종을 한지 일주일 뒤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이 전부 모였지만 장례식은 제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가의 신자들에 의해 치러졌다. 출가자들은 장례식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재가신자들의 희망에 따라 부처님의 뼈(사리.舍利)를 여덟 군데로 나누었다. 그리고 사리를 분배 받지 못한 도나 바라문은 세존의 사리를 넣었던 항아리를 얻었고 또 핍팔리바나의 모리야 족도 세존의 유해를 다비한 재를 얻었다. 이리하여 인도 각지에 여덟 개의 사리탑과 아홉째의 항아리 탑, 또 열째의 재탑(灰塔)을 합해 모두 열 개의 탑이 세워진 것이다. 즉 불탑의 시초였던 것이다.

『대반열반경』이나 아함부의 『열반경』은 이 유골 분배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열반경의 증광(增廣)

대승의『열반경』은 앞에서 설명 하였듯이 부처님의 열반의 의의를 180도 바꾸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져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빠알리어 경전이나 아함부의『열반경』이 한권 또는 기껏해야 두권 분량인데 반하여 무려 40권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빠알리어 경전의『대반열반경』이나 아함부의『열반경』에 나오는 얘기는 한꺼번에 기술되지 않고 40권 전체에 분산되어 나온다. 

 

3. 열반경의 불신관(佛身觀)

 

佛(불) 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부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 이것을 학자들은 佛身論(불신론) 또는 佛身觀(불신관) 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이 문제는 대승불교에 오면 매우 다양하게 논의를 하게 된다. 대승불교란 어떤 의미에서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함경(빠알리어 경전)]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이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육신의 부처님 즉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 뿐이다. 그이외에는 부처님이 따로 없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현실적으로 제자들에게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오직 한 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 가셨기 때문에 비로소 부처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열반에 드신 부처님은 무상의 존재다. 그대신 영원한 것으로서 법(진리)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리고 후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서 이론적으로 굳혀지게 된다.

 

아비달마(부파불교) 불교시대에 이르러 법(진리)에 대한 해석은 점점 전문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철학적 사견으로 변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의 해석이 무엇을 위한 교리인지 모를 정도가 되면서 불교는 종교로서의 생명마저 상실되어 가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이란 존재의 의미를 살펴 보는데 있어 전문 수행승들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된다는 새로운 생각과 운동이 재가신도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승들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열반적멸의 세계에 안심하고 들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이것이 대승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운동이다.  

 

부처님의 참뜻으로 돌아오라 

대승은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참다운 뜻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정으로 지향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 여시아문)" 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경전을 만들었다. 이것은 물론 부처님이 직접 설법하신 말씀 그대로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는 상식이다. 대승불교도들은 "부처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 하셨으리라, 여기에 부처님의 진의가 있다" 고 생각한 일을 당시 인도의 상류층이었던 바라문교도들이 사용했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을 했고  대승경전으로 편찬해 나갔다.

 

그러니까 8만4천의 법문이 아니라 무량무수한 경이 완성되어 갔다. 더욱이 그 무대는 자유자재였다. 한번 역사적인 틀을 벗어 버리자 이야기는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었다. 범위만 하더라도 이 작은 지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10만 세계로 펼쳐진다. 거기에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와 같은 무수한 세계가 있고 부처님이 있다. 그곳은 또한 무수한 보살들이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부처님은 과거 무한의 세계에서 미래 영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대승불교의 부처님들이라면 하나의 사바세계인 인도에서 80년을 사셨던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종횡으로 무한하게 펼쳐나가 그중에서 대승의 교훈이 자유자재로 논의됐다.

 

아함 열반경의 불신관(佛身觀) 

앞서말한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法燈明(법등명)' 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겨 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뒤를 이어 역대로 점점 교리가 굳혀지는 단계로 발전한다.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게 되자 번쇄한 학문인 아비달바로 불교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시대의 번쇄한 학문에 치중했던 불교인들은 훗날 대승인들에게 소승이라고 불리어 진다.

 

대승의 교리에는 '법신(法身)의 상주(常住)' 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法身(법신)이란 범어의 원뜻에 맞추어 보면 '법의 집합'이란 의미이다. 이 법의 집합이 상주하며 영원 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없어 지지만 법은 영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법이란 영원한 것이란 생각이 불교 안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다. 제행이 무상이지만 제행무상이라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는『유교경』이 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즈음에서 마지막의 설법을 간추린 극히 간결한 경전이다. 즉 부처님의 유언 내용이 중심이 되고 있다. 그 경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래의 법신은 항상 존재하고 또한 변함이 없다"

 

여기에서 '법신'이란 역시 앞에서 말했던 '법의 집합''부처님의 교훈의 집합'이라는 뜻이다.

 

진리와 부처님은 일체 

그런데 이때 법신의 '身(신)'은 한편으로는 신체, 즉 몸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법의 육신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육신의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동시에 깨달음을 펴셨던 분이다. 따라서 그분의 육신은 우리들의 육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은 법이 그대로 신체에 肉化(육화)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법 즉 진리와 일체가 된 것이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법(진리)을 육체로 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법신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는 육신과 법신이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열반에 임해서 그 육신은 멸하지만, 법 즉 그것으로서의 부처님은 멸하지 않으며 그쪽이 진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부처님은 우리들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역사적으로 살아 계셨으니까) 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법신 즉 법의 집합으로서의 부처님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보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부처님이 돌아 가시면 이제 부처님은 그곳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부처님은 영원히 존재한다. 부처님의 법신은 항상 있으며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여 발전시켜 나가면 대승의 [열반경]이 되는 것이다.

 

대승의 열반경의 불신관(佛身觀) 

그러면 이 대승의『열반경』에서는 '법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부처님이란 법신(法身) 바로 그 자체라고 한다. '부처님 즉 법신' 이다.

 

그러면 법신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대승의『열반경』에서는 '圓伊三点(원이삼점)'을 예로 든다. 伊(이)라는 글은 산스크리트(梵. 범)글자로 모양을 원속에 세개의 삼각형의 점으로 나타낸다. 이 점은 세로나 가로나 한줄이 아니고 삼각형으로 배치해야 한다. 그래야 伊(이) 자가 된다. 물론 세개의 점 가운데 하나가 빠져도 글자가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신이란 깨달음 즉 해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해탈을 있게 한 반야의 지혜를 떠나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신'과 '해탈'과 '반야'가 하나다. 이것이 곧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생사 즉 열반 

열반이라는 언어도 부처님의 연대개로 말하면 깨달음 즉 성도와 열반이라는 두가지 사건이 별개로 나타난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말하면 깨다음과 열반은 하나이다. 다만 깨달음이라 할 때는 반야의 지혜의 작용에 따르지만 열반이라면 마음의 응어리 집착이 깨끗이 진정된 상태, 마음의 평화를 말한다. 知的(지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이 되고 情的(정적)으로 말하면 열반이 되지만 그것은 모두 이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동시에 열반의 세계다. 부처님은 죽어서 열반에 들어간게 아니고 열반이 곧 부처님이다. 이 점도 [열반경]에서는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기도 하고 해탈이기도 하며 반야이기도 하고 열반이기도 한 세계 그것이 '법신' 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열반 아닌 세계 生滅(생멸), 無常(무상)의 세계까지도 포함되고 있다.

 

생멸을 초월하는 일이 생멸을 품고 있다고 한다면 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소위 '생사 즉 열반' 이라고 하여 그 전체가 열반이고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완전한 하나의 세계 이것을 진리 쪽에서 보면 法 이라고 부르고 인격적으로 말하면 如來(여래. 부처님) 그리고 여래가 달성한 상태라는 점에서 본다면 解脫(해탈)이라고 하고 깨달음(大覺. 대각)이라고 하고 열반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화신설(化身說) 

이렇게 여래(법신)이 정말 부처님이라 한다면 도대체 실제적으로 계셨던 석가모니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분이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왜 사라쌍수 아래에서 돌아 가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80세에 쿠시나가라에서 돌아가신 것은 부처님의 '化身(화신)' 이라는 견해다. 법 바로 그 자체인 부처님이 거짓으로 몸으로 나타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나타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인간의 몸을 빌려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야부인은 보통의 모습으로 임신하고 보통의 모습으로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하는 말이 일찍부터 있었다. 자궁을 통하지 않고 태어났다는 것은 바로 법신의 화신으로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펴나가면 중생을 구제하는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직 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부처님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는 일찍부터 싹터 왔고 마침내 대승의 불신관으로 연결되어 완성되고 있다. 즉 법신도 모습도 형태도 없지만 그것이 시방의 諸佛(제불)로 모습을 여러 淨土(정토)에 나타내고 그리고 석가여래로서 이 사바세계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 그 자체는 常住(상주)하며 無有變易(무유변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이『열반경』에서 가르치는 첫째의 기둥이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으로 완성된 불신관에서는 아미타여래 등 정토의 여러 부처님은 '報身(보신)' 이고 이에 대해서 오탁악세의 부처님인 석가여래는 '化身(화신)' 이라고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4. 열반경의 불성관(佛性觀)

 

일체중생은 모두가 유불성

그런데 이 [열반경]에는 또 한가지의 특색이 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중생 실유불성)'는 말로 이것은『열반경』안에 여러번 나온다. 이것이 이른바『열반경』의 제2의 기둥인데 필경 '自燈明(자등명)' 이라는 말에서 연유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법을 설교하는 쪽의 문제가 아니고 법을 듣는 중생들 쪽의 문제이다. 더욱이 그것이 어래쪽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如來常住 無有變易(여래상주 무유변이)' 라는 것과 자연스럽게 결부되어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의 금강보주(金剛寶珠)

이 불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비유가 동원돼 설명이 가해지고 있다. 이 경의 34권에는 지금까지 설명되었던 것을 추리고 또 거기에 수반되는 의문점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선남자여, 나는 중생에게 불법이란 또한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보배창고와 같고 힘센 사람 (力士. 역사)의 '金剛寶珠(금강보주)'와 같으며 전륜성왕의 甘露(감로)의 샘과 같다고 말하느니라"

 

즉 다시 말하자면, 어떤 힘센 사람(力士. 역사)이 있었다. 그는 이마에 금강보석을 달고 뻐기면서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와 부닥치게 되면서 보석이 이마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되자 그는 그 보석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머리가 아팠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의사에게 갔다. 그 의사는 X레이로 조사한 것도 아니면서 '당신은 금강보석을 가지고 있군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의사는 그 힘센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으니 그는 깜짝 놀라 '어찌 아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요'하면서 이마를 가리켰다.

 

중생은 이처럼 보석이 자기 안에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모를뿐 아니라, 오히려 괴로워 하고 있다. 이것이 중생의 모습인 것이다.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生死(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다. 여래는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불성은 상주불변 

불성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부처의 성품' 이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여래와 같은 성품이다. 여래와 같은 성품이란 여래가 법신이니까, 결국은 여래의 법신과 같다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 전체라 하여도 좋다. 그 진리의 세계 전체가 본래 우리들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여래는 상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본질도 상주이다. 佛性常住(불성상주)' 인 것이다. 중생은 무상이지만 불성은 상주이다. 여래는 80세에 입멸을 시현 했지만 법신은 상주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들쪽으로 적용해 보면 중생은 무상하지만 중생의 본질은 여래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불성도 상주불변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불성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되는 바탕이다.

 

중생은 부처가 아니다. 그러나 불성이 있으므로 깨달을 수 있다. 즉 불성이 있으므로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발심을 한다. 그리고 수행도 하는 것이다. 수행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 그대로가 부처님이 아님은 물론이다.

 

불교의 근원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누군가가 깨달았을 터이고 미래에도 누군가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의 가능성을 중생 누구나에게 확대한 것이 바로 [열반경]의 가르침이고 그 이유는 불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여인의 집안의 보배창고 

『열반경』에 나오는 또하나의 유명한 비유는 '가난한 여인의 집에 보배창고'라는 것이다.

이것은 '땅속의 보배창고' 라고도 불리는데 지하에 매장돼 있는 보물금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 7권에 있는데 佛性(불성)의 비유로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그곳을 보면 어느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집안에 금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면 큰 부자가 되었겠지만 모르기 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지혜 있는 남자가 찾아와서 당신을 고용할테니 풀더미와 쓰레기를 치워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런 일은 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자식들을 위해서 金藏(금장)을 보여 준다면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지혜 있는 남자는 현실의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순금을 파내서 보이니 그 여인은 그 남자를 무조건 존경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여래는 광부이다. 광부라 해도 자기 멋대로 하는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 소유자에게 가르쳐 줄 뿐이다. 그래서 여래는 '훌륭한 방편을 쓰는 사람' 이고 그로 인해서 가난한 여인의 경우처럼 일체중생을 '환희하고 귀의'하게 하는 것이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방편에 의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법한다. 그것으로써 중생은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자각한다. 그러하여 중생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으로'고 하는 것은 초기 불교도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은 가르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째서 자기가 소중한가. 중생은 그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직 부처님뿐이라는 것을 『열반경』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진지하게 더 검토해 볼 문제는 자각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자각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또 문제도 있다. 앞에서 말한 '일체중생 실유불성'은 대승불교의 모든 종파에서 통하는 기본 개념이고 가르침이다. 이 생각이 발전한 것이 '중생은 본래 부처님이다' 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잘못되면 '우리가 본래 부처님이라면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엉뚱한 길로 불도를 가거나 타락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성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道元(도원) 스님은 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왜 수행을 하였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부처님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불성은 불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모습이 그대로 부처님의 모습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열반경』을 보면 '불성이란 大信心(대신심)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원점에 서서 신심에서 불성의 현상을 똑바로 지적한 것이다.

 

불성의 성격의 정의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열반경』에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佛性有(불성유)' 입장이다. '有(유)'라는 의미는 불성에 대한 성격적 정의이다. 둘째는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경우 '일체'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즉 중생들 가운데 '無佛性(무불성)' 인 존재가 있느냐 없으냐 문제이다.

 

앞에서 말한 '가난한 여인의 집에 있는 보배창고' 이야기에 앞서『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견해가 표명되고 있다.

 

"선남자여, 자기(我) 곧 如來藏(여래장)이란 뜻이니라.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나니 즉 이것이 자기(我)의 뜻이니라"

 

여기에서 '여래장'이란 '불성'과 같다는 말이다. 여래장이란 중생이 여래를 숨겨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중생 속에 숨겨져 있는 여래란 곧 '불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여래장' 또는 '불성'이란 여기서 자기(我)를 말한다. 불교가 터부시 하고 있는 '나'란 말을 여기에서 대담하게도 '불성'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 이해를 하면 오해를 하기 쉬운 귀절이다.

 

불교에서는 애초부터 여래장이나 불성에 관한 교설은 외도의 자아(아트만) 주장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상존해 왔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그릇된 견해라는 설명도 있어왔다.

 

그런데『열반경』34권의 여러 군데에서 '불성은 항상한다(상주한다). 사실이며 진실이다. 좋은 것이며 깨끗한 것이다. 그리고 볼수도 있다'고 하는 여섯가지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설법을 듣고 나의 뜻을 이해 못하고 불성이 중생을 떠나서 즉 중생과는 별도로 실재한다고 하는 제자들도 있다'고 비난 섞인 발언도 하고 있다.

 

나아가서 불성과는 중생과 색(色).수(受).상(想) .행(行).식(識) 오온이 별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이 곧 불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불성이 아닐수도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불성리라는 것을 실체시하고 실체시 했다면 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불성을 自我(자아)라고 불렀는가 하면 하나는 제행무상이지만 여래는 상주하는 것과 같은 이론으로 제법무아이지만 여래는 그 제법무아인 진리, 그 자체로서 我(아)이며 大我(대아)라고 하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 대아인 여래는 중생의 투영이므로 常住(상주)인 불성 또한 자아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앞에서 말한 '自燈明(자등명)'과 관련해서 무아인 중생이 '스스로 의지한다'고 할때의 그 의지할 수 있는 자아란 다름아닌 불성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무불성의 중생 

두번째 문제는 無佛性(무불성)인 중생의 문제다. 먼저 이 경의 제 34권에 나오는 구절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네가지 중요한 계(四重계)를 범한 자, 一闡提(일천제), 方等經(방등경)을 비방하는 자, 五逆罪(오역죄)를 일삼는 자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善法(선법)을 닦지 않는다 해도 불성은 어디까지나 좋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성이란 그런 중생들에게 따로 있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 다 불성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 가운데는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 다만 일천제는 제외한다'라는 구절이 가끔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천제'란 범어를 소리대로 옮긴 것으로써 그 뜻은 ' 이 세사에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세속일에 욕망을 가지고 있고 불교 따위는 돌아 보지도 않는 자, 좀더 나아가면 불교의 교리를 비방하는 자를 이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그런 중생은 불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체' 중생이라는 것과는 모순된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는 이런 설명도 나온다.

 

"일천제는 불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무량한 죄악으로 얽혀서 빠져나갈 수 없다. 마치 누에가 누에고치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자승자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설명이지만 실은 [열반경] 안에서도 일천제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대체로 10권까지의 전반부에서는 무불성으로 기울고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점차로 불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해 왔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서 다른 번역본에서는 불성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 그런데 제9권에서는 이런 해석에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어쨌거나 이 일천제의 성불에 관한 문제는 <열반경>교리 가운데 특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을 세번째의 기둥이라고 한다.

 

5. 여래비밀의 장 

 

난해한 여래의 밀어 

위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如來常住 無有變易(여래상주 무유변이)' 와 '一切衆生 悉有佛性(일체중생 실유불성)' 이라는 두개의 기본 가르침에 의해서『열반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열반경』은 한편으로는 常住(상주)라든가 불성이 있다든가 또는 다시 불성은 자아(我)의 뜻이라든가 하여 이 경의 교리에는 왕왕 오해를 초래할 소지가 많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경은 함부로 어리석은 자에게는 들려 줄수 없는 '비밀의 경' 이라는 점이 경문 가운데서 가끔 강조되고 있다.

 

이를테면 제 9권에 보면 여래의 密語 (밀어)는 대단히 난해하다고 말하면서 이런 비유로써 설명한다. 즉 어떤 임금이 있어 무엇이든지 '先陀婆(선타파)' 라는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고 한다.

 

첫째는 소금, 둘째는 그릇, 셋째는 물, 넷째는 말(馬)인데 이것을 모두 '선타파' 가져오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있는 신하는 그말을 알아듣고 틀리지 않게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지혜가 없는 신하는 언제나 틀리게 가져온다.

 

마찬가지로『열반경』의 심오하고 비밀한 뜻은 지혜 있는 보살들만이 볼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다.

 

"여래의 정법이 곧 소멸하려고 할 때 악행의 비구들은 여래비밀의 창고를 알지 못하고 여래비밀의 창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경을 읽고 소홀히 하거나 노력하지 않으려 한다. 그때 보살들만은 '능히 이 경의 참된 뜻을 알아 차리고 문자로 저술하지 않아도 순리에 따르고 거역하지 않고 중생을 위해 설명해 준다."

 

동시에 이 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정법이 절멸하려고 하는 위기의 상황에서만 이 세상에 유포하여야 한다고 하는 암시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은 '여래의 비밀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열반경』이 갖는 또 다른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출처] 열반경의 이해 |작성자 실론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