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대강좌 3강 - 4
91. 乃至童子戱 若草木及筆 或以指爪甲 而畫作佛像 如是諸人等
내지동자희 약초목급필 혹이지조갑 이화작불상 여시제인등
漸漸積功德 具足大悲心 皆已成佛道 但化諸菩薩 度脫無量衆
점점적공덕 구족대비심 개이성불도 단화제보살 도탈무량중
童子戱로서 若草木及筆, 나무를 꺾어서 풀을 붓을 삼아서 하든지 아니면 손톱으로서 그것도 저것도 없으면 손톱으로서 땅에든 어디든 佛像을 그리는(얼마든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요.)
如是諸人等, 이와 같은 모든 사람들은
漸漸積功德. ←이것이 법화경을 아주 깊이, 깊이 연구한 일본 사람들의 책을 여러 가지를 보니까 이런 말을 가지고 수용이 안 되는가 봐요.
저처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부처가 되는데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 불을 드러내는 것이 법화경이다.” ←이렇게 아니 하고, 漸漸積功德. 점점 공덕을 쌓아 가지고서 비로소 부처가 된다. ←여기에 마음이 싹 와 닿는가 봐요.
일본의 유수한 학자가 법화경을 해석을 했는데도,
결국은 이것을 和盤托出해서 드러내지를 못하고, 이 말을 부각시켜서 설명한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래서 ‘역시 참 소견이 거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공덕을 쌓아서 딴 사람이 된다면 지금 여러 스님들, 저부터라도 4~50년이 되었는데 벌써 여남은 번은 성불하고도 남았어야할 것 아닙니까? 또 우리 선배들, 동산 · 효봉 할 것 없이 다 제가 보아왔는데 그들도 서너 번씩, 너 댓 번씩, 아니면 하다못해 단 한번이라도 성불 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특별히 그렇게 성불한 기록이 없잖아요. 왜 없느냐?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겁니다.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요. 그냥 그대로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이 경전을 통해서 제가 이렇게 주창을 합니다만, 이것이 여러 스님들의 마음에 확신이 서야 되고, 확신이 섰을 때 이런 올 곧은 一佛乘 사상이 제대로 파급이 되어서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긴다는 실천 행으로 나아가면 효과가 상당히 크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具足大悲心일새. 점점 공덕을 쌓으면 大悲心을 具足했을세.
그래서 皆已成佛道다. 이렇게 이런 말도 간혹 있습니다.
점점 공덕을 쌓고 안 쌓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但化諸菩薩하야, 다만 여러 보살들을 교화해서
度脫無量衆, 한량없는 대중들을 度脫. 해탈케하느니라.
92. 若人於塔廟 寶像及畫像 以華香幡蓋 敬心而供養 若使人作樂
약인어탑묘 보상급화상 이화향번개 경심이공양약사인작약
擊鼓吹角貝 簫笛琴箜𥱌 琵琶鐃銅鈸 如是衆妙音 盡持以供養
경고취각패 소적금공후 비파요동발 여시중묘음 진지이공양
或以歡喜心 歌唄頌佛德 乃至一小音 皆已成佛道
혹이환희심 가패송불덕 내지일소음 개이성불도
若人이 어떤 사람이 塔廟와 寶像. 불상이지요. 畫像.
탱화에 華香幡蓋. 꽃ㆍ향ㆍ번개로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하거나 만약에 사람을 시켜서 노래를 부르게 한다든지 악기를 연주하게 하되
擊鼓吹角貝. 북을 치기도하고 角貝를 불기도하고 퉁소ㆍ저ㆍ금슬ㆍ공후ㆍ비파ㆍ鐃 銅 鈸. 이것이 우리가 치는 꽹과리ㆍ징ㆍ방울 이런 것들이지요. 如是衆妙音,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음성으로서 공양하며 혹은 歡喜心으로 歌唄頌佛德 이니라. 부처님의 덕을 찬불가로서 노래 부르되 乃至一小音이라도, 다 외우지는 못하고 한마디만 한구절만 “둥글고 밝은 빛” 이렇게만 하고 끝내더라도 皆已成佛道입니다.
귀찮게 길게 할 것 없습니다. 一小音만 하더라도 皆已成佛道인데 여러 소리 할 것 뭐 있습니까? 삼귀의 다 못하면 한구절만 하지요.
성불하기가 이렇게 쉽다니까요. 이미 성불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쉬운 것입니다. 만약에 안 되어 있는데 그것을 정말 하기로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정말 寤寐一如를 거쳐야 되겠지요.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해야 되겠지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편이라고요.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방편입니다.
93. 若人散亂心 乃至以一華 供養於畫像 漸見無數佛 或有人禮拜
약인산란심 내지이일화 공양어화상 점경무수불 혹유인예배
或復但合掌 乃至擧一手 或復小低頭 以此供養像 漸見無量佛
혹부단합장 내지거일수 혹부소저두 이차공양상 점견무량불
自成無上道 廣度無數衆 入無餘涅槃 如薪盡火滅
자성무상도 광도무수중 입무여열반 여신진화멸
若人散亂心으로 만약에 어떤 사람이 散亂한.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장난삼아 꽃 한 송이를 갖다가 척 바치는 겁니다.
그리고 佛畵에다가, 부처님그림에다가 공양한다면 漸見無數佛하여 점점 무수한 부처님을 보며, 或有人이 禮拜하거나 合掌만 하거나 乃至 한 손만 번쩍 들어도, 절은 무릎 아프고 귀찮은데 한 손만 척 든다 이겁니다. 아니면 조금 고개만 低頭. 低頭拜 라고 있지요?
고개만 살짝 숙여서 以此供養像하면, 부처님도 아닙니다.
像에만 공양 한다 이겁니다. 불상에만 공양해도 漸見無量佛해서 自成無上道하고 스스로 無上道를 이루고 廣度無數衆한다.
무수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해서 入無餘涅槃하되 如薪盡火滅이니라.
나중에는 無餘涅槃에 들어서 나무가 다 타고 불이 소멸한 것과 같이 그렇게 원만회향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광대한 자비심. 관용과 아량과 수용 심을 이런 데서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원리가 그렇고 또 이것을 생각할 때 야~ 참! 부처님의 관용과 아량이 대단하구나.
어찌 이렇게까지, 어떤 무당 짓 까지도 다 감싸고 다독거려서 안아준단 말인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한편으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넓은 자비심입니까?
이것이 광대무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 원리가 그렇고요.
그럴 수밖에 없도록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이렇게 이럴 수밖에 말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값싼 존재가 아니라고요.
94. 若人散亂心 入於塔廟中 一稱南無佛 皆已成佛道
약인산란심 입어탑묘중 일칭나무불 개이성불도
若人이 散亂心으로 塔廟中에 들어가고, 탑전에 들어가서一稱南無佛!
한 번만 해도 皆已成佛道니라.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본래 불에 눈뜨지 아니하면 이것이 용납이 안 됩니다.
수용이 안 되어요. 제가 법화경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표현을 통해서... 그 당시 경전으로서는 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최상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임제스님 같으면,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라고 제가 그랬지요? 선불교에오면 직설로 바로 말하잖아요.“말하는 너. 말 듣는 너 가 그대로부처다.”
뭐가 부족 하느냐는 것이지요.
마조스님한테 대주혜해 선사가 찾아갔잖아요.
“그대, 뭐 하러 왔는가?”
“난 부처가 되려고 왔습니다.”
“자기 보물은 버려두고 이렇게 쓸데없이 돌아다녀서 어떻게 성불이니 뭐니 그것이 가능 하겠느냐?”
“내 보물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한테 묻는 바로 그 사실 아니냐? 네가 나한테 물을 줄 아는 그 능력, 그 사실보다 위대한 것이 어디 있느냐?”이 겁니다.
석굴암 부처님이 물을 줄 아느냐? 아니다 이 겁니다.
네가 갑갑해서 나한테 물을 줄 아는 그 사실이 너의 보물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일찍이 다 설파 했잖아요.
그래서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 이라고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이렇게 우회적으로 설명 아니 했지요.
그런데 경전에서는 그 당시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때는 바로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요. 그래서 예를 들어서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는 줄 아느냐?
천만의 말씀. 문수보살 친견하러 가는 너야말로 살아있는 진짜 부처라고 아주 확실하게 짚어주었거든요. 누구하나 임제스님의 그 말이 틀렸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이 좋다고 그냥 우리나라스님들은 전부 임제스님 밑에 다 줄서는 겁니다. 비석에다 임제 몇 대손이라고 아니하면 중 취급도 못 받아요. 가보시라고요. 옛날 큰스님들 비문에 보면 임제 몇 대손입니다.
석가모니 몇 대손도 아니고, 달마 몇 대손도 아니고, 육조 몇 대손도 아닙니다. 임제 몇 대손입니다. 그래 임제 후손이라야 명함을 내놓는 겁니다. “나는 임제 몇 대손입니다.” ←이렇게 해야 명함이 가치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없다. 문수보살 친견하러 일보일배 하면서 가는 너야말로 내가보니 진짜 살아있는 문수인 것을...” 이렇게 했지 않습니까? 그 말이 좋다고 우리나라선사들은 그냥 야단법석 아닙니까?
그래서 스님이 열반하시면, “速還沙婆 하시어 臨濟門中에서 永作人天之眼目하소서. 이렇게 축원하잖아요.“임제 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주소서”라는 이 말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드러냈습니다.
여기는 표현이 참 점잖지요. 그 임제스님의 표현. 조사스님들의 표현과 법화경에서의 표현을 비교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재미가 있고, 하나 딴 길로 벗어나는 것이 없어요. 사실은 똑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내용은 똑 같습니다.“南無佛”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무슨 부처될 조건이 됩니까? 조건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미 우리들 자신 속에 완전무결하게 갖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 흔히 알고 있듯이 人人이 本具하고 個個가 圓成이라. 이런 표현을 거침없이 쓰지 않습니까? 若人이 散亂心으로 塔廟中에 들어, 부처님탑에 들어가서 一稱南無佛하면 皆已成佛道했고,
95. 於諸過去佛 在世或滅後 若有聞是法 皆已成佛道
어제과거불 재세혹멸후 약유문시법 개이성불도
이 모든 과거부처님이 在世, 혹은 滅後. 세상에 계실 때나 열반하신 뒤에도 若有聞是法하면 이런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皆已成佛道입니다. (우리는 이미 들었으니까 불도를 이뤄 마친 겁니다.)
부처님 재세시나 열반에든 뒤에라도 이 법문을 듣기만 하면 皆已成佛道라 그랬습니다. 이미 끝난 겁니다. 못 들어도 이미 끝난 겁니다.
이런 법문 듣지 못해도, 여기는 “들으면”했지만, 저는 아닙니다.
못 들은 사람도 성불도입니다. 皆已成佛道라.
다음에는 제3 미래불이지요.
96. 未來諸世尊 其數無有量 是諸如來等 亦方便說法
미래제세존 기수무유량 시제여래등 역방편설법
未來諸世尊도 其數無有量이라. 모든 여래등이 또한 方便으로서 法을 설함이니
97. 一切諸如來 以無量方便 度脫諸衆生 入佛無漏智 若有聞法者
일체제여래 이무량방편 도탈제중생 입불무루지 약유문법자
無一不成佛(무일불성불)
一切諸如來가 無量方便으로서 모든 중생들을 度脫해서 入佛無漏智.
부처의 無漏智에 들어가게 하나니 若有聞法者. 만약에 어떤 이가 법을 들으면 無一不成佛이라. 한 사람이라도 성불하지 못할 이가 없다.
이런 도리 들으면 성불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다 성불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若有聞法者면 無一不成佛이라. 한 사람도 성불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네가 부처다.”했으니까 그럼 끝난 것이지요.
그래서 수기품이 여기에 많은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너도 부처다.” “너도 부처다.” “너도 부처다.” ←이렇게 나중에 상불견보살 입을 통해 가지고서 모든 사람을 전부 부처님으로 예배하고, 일체중생을 전부 부처로 수기하는 그런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 법화경이지요.
98. 諸佛本誓願 我所行佛道 普欲令衆生 亦同得此道
제불본서원 아소행불도 보욕령중생 역동득차도
諸佛本誓願은 我所行佛道를 내가 행한바 불도를 널리 衆生으로 하여금 또한 이 道와 같이 되고자 한다.
99. 未來世諸佛 雖說百千億 無數諸法門 其實爲一乘
미래세제불 수설백천억 무수제법문 기실위일승
未來世諸佛이 雖說百千億이나 비록 백천억 無數諸法門을 설하기는 하나 其實은 爲一乘이니라. 98번의 此道와 같은 것입니다.
此道라고 하는 것도 일승이요, 여기 一乘은 역시 불승이지요.
모든 이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설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었다.
수많은 백천억 無數諸法門은 실은 일불승을 위한 것이다.
모두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 중요한 것이지요.
100. 諸佛兩足尊 知法常無性 佛種從緣起 是故說一乘 是法住法位
제불양족존 지법상무성 불종종연기 시고설일승 시법주법위
世間相常住 於道場知已 導師方便說
세간상상주 어도량지이 도사방편설
諸佛兩足尊은 知法常無性이언만, 법의 모든 존재가 항상 無性. 공하다는 말입니다. 성품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건만, 佛種從緣起일새.
부처의 종자는 緣起로 쫓아서 생길새. 이것이 존재의 원리이기도 하지요. 부처도 그래요. 부처도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므로 해서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부처지만, 알므로 해서 자기가 부처가 된 것이니까요. 굳이 억지 방편을 쓰자면 그런 것이지요.
是故說一乘이니라. 그래서 “일불승” “일불승” “너도 부처다.” “너도 부처다.”라고 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요.
佛種從緣起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갖고, 법화경을 보고 하는 것이 緣起거든요. 이것이 인연이거든요.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서 비로소 우리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是故說一乘. 그런 까닭에 一乘. 일불승을 설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는 결국 일불승뿐인데 그래서 우리가 얼른 실천은 안 되더라도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또 받들어 섬기고 그렇게 할 때 정말 세계의 평화.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서 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열쇠는 딱 하나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의 열쇠는 이 일불승이라고 하는 이 열쇠 하나뿐입니다. ‘나도 물론 부처지만 모든 사람 다 부처다.’
설사 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했다 한들 부처님인데, 궁극적으로 그것이 용납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요. 사실은 어렵지요. 어렵지만 이것이 확신이 안서서 어렵지, 확신만 서면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지요.
부처의 경지하고는 다르지만,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이 아무리 나쁜 짓 했다 해도, 세상에서는 다 죽일 놈이라고 하지만 자기어머니는 용납하거든요. 어머니는 용납한다고요. 세상이 다 죽일 놈이라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용납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가 정말 부처의 경지가 됐다면 어떤 경우도 용납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량 분별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순간 거기에 가슴이 정말 확 뜨거워져서 내 자신이 홀랑 다 타 버리면 그 때는 그것이 가능할 겁니다.
그것이 안 되어서 용맹정진도 하고, 별의별 수단도 강구하고, 방법도 써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구절인데 이치는 하나다. 사람도 하나고 행도 하나고 교리도 하나고 이치도 하나다 하는 것을, 사실 이야기가 있었지요?
是法住法位하야 世間相常住라. 이 법은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양이 항상 있다. 이것이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가지고 반야심경의 不生不滅도 여기에 매칭 시키고,
또 화엄경의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이것도 여기다 맞추고, 그래 가지고 일체존재의 불생불멸을 밝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교리가 마음에 와 닿는 사람은 是法이 住法位하야 世間相常住라. ←이 구절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常住라는 말이 不生不滅이거든요. 반야심경의 不生不滅이나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이야기나 그리고, 그것이 보통 일반물리학에서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에서 볼 때, 어떤 형태만 변하지 사실은 그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질량불멸의 법칙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지고 이것과 연관시켜서 이야기 하지요. 종이 한 장이 아주 간단하지만 사실은 이것을 없애지 못합니다. 태워서 가루로 만들고 어떻게 한다 하더라도 종이 한 장이 가지고 있는 그 질량은 변화가 됐을 뿐이지, 형태만 변했을 뿐이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길게 설명 아니 해도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보통 우리 현대 상식은 다 아는 것 아닙니까? 또 이 종이 한 장.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새롭게 못 만듭니다.
절대 새롭게 못 만듭니다.“신소재”“신소재”하지만 신소재는 없습니다. 전부 어떤 화학적인 작용을 통해서 변화시킨 물질이지 결코 신소재는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그것은 不生이라는 뜻이지요.
그럼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 이것이 기체가 되어서 공중에 흩어져 있을지언정, 없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거든요. 그럼 뭡니까? 不滅이거든요. 종이 한 장도 不生不滅입니다. 그러니까 諸法이 住法位하야 世間相常住. 라고 하는 말이 이것이 아주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不生不滅이라고 하는 말이야말로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본 가르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이치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좋아하고 현대 물리학과 연관시켜서 설명하기 장황하게 하지요.
於道場知已하시고, 도량에서, 부처님이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이미 그 사실, 不生不滅이치를 아시고 導師方便說이니라.
導師가 方便방편으로 설하셨느니라. 그 다음에 현재불 이야기지요.
101. 天人所供養 現在十方佛 其數如恒沙 出現於世間 安穩衆生故
천인소공양 현재시방불 기수여항사 출현어세간 안은중생고
亦說如是法 知第一寂滅 以方便力故 雖示種種道 其實爲佛乘
역설여시법 지제일적멸 이방편력고 수시종종도 기실위불승
天人所供養인 現在十方佛이 其數如恒沙라.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해서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는 고로 또한 이와 같은 법을 설하시니라. 第一寂滅을 알건만 方便을 쓴 까닭으로 비록 가지가지 도를 보이시나, 其實은 佛乘을 위한 것이니라. 그렇지요.
저 앞의 이야기하고 똑 같지요? 其實은 佛乘을 위한 것이다.
種種道를 이야기했어요. 그렇지만 其實은 佛乘이다.
102. 知衆生諸行 深心之所念 過去所習業 欲性精進力 及諸根利鈍
지중생제행 심심지소념 과거소습업 욕성정진력 급제근이둔
以種種因緣 譬喩亦言辭 隨應方便說
이종종인연 비유역언사 수응방편설
衆生諸行의 深心之所念. 깊은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과 과거에 익힌바 業의 欲性精進力. 욕망·성품·정진의 힘이며 그리고 여러 가지 根.
근기의 영리하고 둔한 것을 아시고, 種種因緣과 譬喩와 또한 言辭로서 마땅함을 따라서 방편으로 설하시니, 隨應. 따라서 맞추어 가지고 방편으로 설하시니, 隨應方便. 또 隨宜說法 ←이런 말도 있지요.
그래요. 전부 근기 맞추어서 일단 이끌어야지 덮어놓고 일불승을 이야기해서 통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흔히 화엄경을 이야기할 때, 언필칭 하는 소리가 화엄경을 설하니까 如聾兩盲이라.
벙어리와 같고 귀머거리와 같았다. 그것은 부처님이 성도하고 삼칠일동안 설했는데,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없이 수준을 완전히 낮추어 가지고, 저~ 유치원생들에게서부터 가르치는 수법을 쓰다보니까 별의별 아함경의 방편설이 많이 쏟아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그것이 隨應方便說입니다. 103번부터는 석가불장입니다.
103. 今我亦如是 安穩衆生故 以種種法門 宣示於佛道
금아역여시 안은중생고 이종종법문 선시어불도
今我亦如是하야 지금 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어쨌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좋으니까요. 그래서 불교법문을 간혹 “安心法門”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까닭으로 種種法門으로서 佛道를 宣示하니라.
104. 我以智慧力 知衆生性欲 方便說諸法 皆令得歡喜
아이지혜력 지중생성욕 방편설제법 개령득환희
내가 지혜의 힘으로서 중생의 성품과 욕망을 아사 방편으로 여러 가지 법을 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 환희하게 했다.
105. 舍利弗當知 我以佛眼觀 見六道衆生 貧窮無福慧 入生死險道
사리불당지 아이불안관 견육도중생 빈궁무복혜 입생사험도
相續苦不斷 深著於五欲 如모牛愛尾 以貪愛自蔽 盲瞑無所見
상속고부단 심착어오욕 여모우애미 이탐애자폐 맹명무소견
不求大勢佛 及與斷苦法 深入諸邪見 以苦欲捨苦 爲是衆生故
불구대세불 급여단고법 심입제사견 이고욕사고 위시중생고
而起大悲心(이기대비심 )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내가 부처의 눈으로 살펴보니 六道衆生들이 貧窮하고 福慧가 없어서 生死의 險道에 들어가서 相續해서 고통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또 5근의 욕망에 깊이 집착해서 如모牛愛尾니라.
모우라고 하는 검정소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서 貪愛自蔽라.
탐하고 애착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가려요. 그래서 盲瞑無所見어둡고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는바가 없어 不求大勢佛과 斷苦法.
세력이 있는 부처님과 그리고 고통을 끊어버리는 법을 구하지 아니하고, 깊이 모든 사견에 들어가서 以苦欲捨苦일새. 苦로서 苦를 버리고자 한다 이겁니다. 爲是衆生故로 大悲心을 일으켰느니라.
이러한 중생을 위해서 大悲心을 일으켰다.
그래서 방편을 열어서 별별 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를 여기서 쭉 이야기를 합니다.
106. 我始坐道場 觀樹亦經行 於三七日中 思惟如是事 我所得智慧
아시좌도량 관수역경행 어삼칠일중 사유여시사 아소득지혜
微妙最第一 衆生諸根鈍 著樂癡所盲 如斯之等類 云何而可度
미묘최제일 중생제근둔 착락치소맹 여사지등류 운하이가도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아서 나무를 썩 관찰하면서 경행하며 삼칠일 동안이나 이러한 일을 思惟했다. 그래서 내가 얻은 지혜는 微妙最第一이건만, 중생의 근기가 둔해서 著樂癡所盲이라. 즐거움에 집착하고 어리석고 눈 어두운 바라, 이와 같은 等의 類를 어떻게 내가 제도할까? 라고 했는데,
107. 爾時諸梵王 及諸天帝釋 護世四天王 及大自在天 幷餘諸天衆
이시제범왕 급제천제석 호세사천왕 급대자재천 병여제천중
眷屬百千萬 恭敬合掌禮 請我轉法輪
권속백천만 공경합장례 청아전법륜
그 때에 諸梵王과 그리고 모든 하늘과 帝釋과 護世천. 四天王. 大自在天. 나머지 여러 천중들 眷屬百千萬이 공경하고 합장하고 예배해서 나에게 法輪굴리기를 청하거늘
108. 我卽自思惟 若但讚佛乘 衆生沒在苦 不能信是法 破法不信故
아즉자사유 약단찬불승 중생몰재고 불능신시법 파법불신고
墜於三惡道 我寧不說法 疾入於涅槃 尋念過去佛 所行方便力
추어삼악도 아녕불설법 질입어열반 심념과거불 소행방편력
我今所得道 亦應說三乘(아금소득도 역응설삼승)
我卽自思惟호대. (하도 그렇게 청해서) 내가 깊이 思惟하기를 若但讚佛乘 그런데 佛乘만 찬탄하면 화엄경처럼 그렇게 하면 衆生沒在苦.
중생들이 고통에 빠져서 이것은 도저히 수준에 안 맞아서 못 알아듣는다 이것이지요. 不能信是法이지요. 능히 이법을 못 믿어요.
그래서 破法不信. 법을 깨뜨리고 믿지 아니해서, 오히려 그 믿지 않은 것 때문에 三惡道에 떨어지리니 그래서 내가 차라리 설법 하지 아니하고 그만 빨리 열반에 들어 버릴까? ←이렇게 하다가 곧 생각하기를 과거 부처님의 방편력을 생각해야 되겠다고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我今所得道도 얻은 바 道도 亦應說三乘이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수준을 낮춰서 三乘을 설하게 되었다.
저~ 유치원생들부터 교화하게 되었다.
일불승을 설하면 중생들이 비난을 하고 믿지 아니하고, 법을 파해서 믿지 아니하고 三惡道에 떨어질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해서 그것을 염려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보살계를 받는 길”에 보면
諸法無行經이라는 경을 인용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포교에 열심 하는 어떤 법사하고 두문불출하고 절에서만 정진하는 비구가 있어요.
두 팀이 사는데 법사는 자기 제자들 데리고 늘 교화도하고 여러 가지 설법도 하러 다녀요. 그런데 비구가 못 마땅하게 여겨서 공사를 붙여서는 산문을 못 나가게 한 겁니다. 산문을 아무도 못 나가게 공사를 붙이니까 법사가 있다가 “내가 법문을 해서 저 비구가 법문을 못 알아들어서 비난을 할 것이다. 비난을 해서 빨리 지옥에 갔다가 얼른 나와서 대승법을 비난한 그 인연으로 한시라도 빨리 성불하게 해야 되겠다고 방편을 쓴 이야기가 나옵니다.
諸法無行經에 나오는 이야기가 “보살계를 받는 길”에 소개 되었다고요.
영명 연수선사는 경이란 경은 안본 것이 없고, 못 외우는 경이 없습니다. 그 쯤 되야 되는데... 한 번만 보면 다 외우지요.
‘옛날에 어디서 봤는데?’하고 몇 날 며칠 책 찾아서 인용하고 그러겠습니까? 이런 스님들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보면 그냥 외워버려요.
諸法無行經이라는 경을 이 양반이 인용을 했는데, 너무 엄청난 이야기라서 제기 직접 찾아 봤어요. 찾아보니까 글자는 조금씩 틀려요.
그것은 번역한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글자는 조금씩 틀려도 뜻은 똑 같습니다.
대승법을 설명했는데 여기에 소개한 그 경입니다.
탐욕이 곧 道다. 진심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만약 이 말이 진리의 가르침이 아니고 불교가 아니라고 여겨지거든 경전속의 비구처럼 비방을 하라. 비방을 하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을 것이며 비방을 한 인연으로 반드시 성불하리라. ←이렇게 해놨는데, 법사가 이 게송을 설하니 그 비구가 이 게송을 듣고는 바로 비방을 해버렸어요. 탐욕이도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탐욕은 버려야 할 것이고, 끊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도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사정없이 비방을 하고, 바로 지옥에 가고, 또 그것을 비방할 정도로 귀담아 들었던 그 인연으로 성불이 아주 빨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써 놨어요. 대단한 이야기지요. 여기하고 이야기가 좀 다르지요?
여기는 방편교를 설하게 된 연유를 이야기를 했지만, 영명 연수선사는
諸法無行經의 말씀을 인용해서 비방하는 것이 좋다고 그랬습니다.
“비방하라. 비방해서 얼른 지옥에 가라. 지옥에 가게 하는 것이 좋다.”
영명 연수선사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놨습니다. 대단하지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최상승법을 설해서 못 받아들이고, 그 법을 못 받아들임으로 해서 비방하게 하라. 그래서 지옥 가게 하라. 지옥 가게 한 인연으로 정말 일승법을 빨리 깨닫게 될 것이다. 짐짓 비방하게 해서 지옥으로 보낸다 이것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는 판이한 엄청난 그런 가르침이 있더라고요.
109. 作是思惟時 十方佛皆現 梵音慰喩我 善哉釋迦文 第一之導師
작시사유시 시방불개현 범음위유아 선재석가문 제일지도사
得是無上法 隨諸一切佛 而用方便力
득시무상법 수제일체불 이용방편력
作是思惟時에 이와 같은 思惟를 할 때에 十方佛이 皆現해서,
다 나타나서 梵音으로서 나를 위로하시기를 善哉라 석가모니여, 第一의 導師시여, 得是無上法하고 이와 같은 최상의 법을 얻고 隨諸一切佛하여 여러 일체 부처님을 따라서 方便의 힘을 잘 사용 하는구나.
110. 我等亦皆得 最妙第一法 爲諸衆生類 分別說三乘
아등역개득 최묘제일법 위제중생류 분별설삼승
我等亦皆得. 우리들도 또한 다 最妙第一法을 얻었건만 衆生類를 위해서,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分別해서 三乘을 설했다.
111. 小智樂小法 不自信作佛 是故以方便 分別說諸果 雖復說三乘
소지락소법 불자신작불 시고이방편 분별설제과 수부설삼승
但爲敎菩薩(단위교보살)
小智樂小法하여, 작은 지혜는 小法을 좋아하여 그래서 不自信作佛일새.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믿지 아니 할세.
是故로 方便力으로서 分別해서 여러 결과를, 여러 가지 열매를 설했느니라. 心中所求所望. 모든 것 다 성취한다. ←이렇게 해 놨어요.
뭐든지 성취 다 된다. 사실 성취되고요. 그렇게 분별해서 그런 결과를 이야기했다. 雖復說三乘이라. 그러나 비록 다시 三乘을 설하기는 하지만,
但爲敎菩薩이니라. 궁극에는 보살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요.
112. 舍利弗當知 我聞聖師子 深淨微妙音 稱南無諸佛 復作如是念
사리불당지 아문성사자 심정미묘음 칭나무제불 부작여시념
我出濁惡世 如諸佛所說 我亦隨順行
아출탁악세 여제불소설 아역수순행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내가 들으니 성스러운 사자, 聖師子. 부처님이지요. 부처님의 深淨微妙音하사옵고, 깊고 청정한 微妙한 音을, 부처님이 그런 말을 듣고는 稱南無諸佛. 제불에게 귀의 합니다. ←이렇게 일컬었지요. 그리고는 復作如是念하되 다시 이런 생각 하되,
我出濁惡世하여 내가 오탁악세에 태어나서 如諸佛所說하여,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과 같이 我亦隨順行하리라. 나도 또한 따라서 행하리라.
113. 思惟是事已 卽趣波羅奈 諸法寂滅相 不可以言宣 以方便力故
사유시사이 즉취바라나 제법적멸상 불가이언선 이방편력고
爲五比丘說 是名轉法輪 便有涅槃音 及以阿羅漢 法僧差別名
위오비구설 시명전법륜 변유열반음 급이아라한 법승차별명
思惟是事已하고는 이러한 일을 생각해 마치고는 波羅奈에 나갔지요.
“설법 바라나”녹야원이지요? 베나레스에 가서는 諸法寂滅相을 不可以言宣이어늘, 제법의 적멸한 모습을 可以 말로서 할 수가 없건만,
方便힘 때문에 五比丘를 위해서 설했습니다. 그것을 轉法輪이라고 이름을 했지요. 그래서 便有涅槃音. 열반이라고 하는 소리. 그리고 阿羅漢과 法 僧. 이러한 차별의 이름을 두게 되었다. 불ㆍ법ㆍ승이 거기서 비로소 등장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있고 법이 있고 승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114. 從久遠劫來 讚示涅槃法 生死苦永盡 我常如是說
종구원겁래 찬시열반법 생사고영진 아상여시설
從久遠劫으로 옛날부터 涅槃法을 찬탄해 보이시되,
生死苦永盡이라 하야. 생사고가 다 한다고 해서 我常如是說이니라.
내가 항상 생사의 고통을 다 없앤다고 하는 이것만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다 이 겁니다. 我常如是說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늘 이야기했노라.
115. 舍利弗當知 我見佛子等 志求佛道者 無量千萬億 咸以恭敬心
사리불당지 아견불자등 지구불도자 무량천만억 함이공경심
皆來至佛所 曾從諸佛聞 方便所說法 我卽作是念 如來所以出
개래지불소 증종제불문 방편소설법 아즉작시념 여래소이출
爲說佛慧故 今正是其時(위설불혜고 금정시기시)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我見佛子等이 내가 보니 불자들이 志求佛道者 無量千萬億이다. 불도를 구하는 사람이 無量千萬億이다.
그래서 咸以恭敬心으로 모두들 공경하는 마음으로 皆來至佛所. 다 와서 부처님처소에 이르니, 曾從諸佛聞하고 일찍이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方便所說法을 들었음이라. 방편으로 설한 법을 들었음이라.
내가 곧 이 생각을 하되 如來所以出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신 것은 爲說佛慧. 불지혜를 설하기 위한 것이다. 佛慧를. 佛之知見이 佛慧지요.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기 위한 것이다. 今正是其時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것을 설할 때다. 법화경을 설할 때이지요. 법화경을 설할 때가 바로 그것을 설할 때이다.
116. 舍利弗當知 鈍根小智人 著相橋慢者 不能信是法 今我喜無畏
사리불당지 둔근소지인 착상교만자 불능신시법 금아희무외
於諸菩薩中 正直捨方便 但說無上道
어제보살중 정직사방편 단설무상도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鈍根小智人은 著相橋慢者. 상에 집착한 橋慢者는 不能信是法일새. 능히 이 법을 믿지 못 할 새. 상에 집착해 있는 사람. 그래서 금강경을 설한 다음에 법화. 열반을 설하게 된 것이 교리 상으로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금강경은 상을 없애는 것이니까요.
著相橋慢者. 이것부터 뚜두려 부수고 그 다음에 법화경을 설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今我喜無畏하야, 지금 내가 기뻐 두려움이 없어서 於諸菩薩 가운데서 正直捨方便하고, 이제는 방편을 다 버려 버리고
但說無上道. 최상의 도를 설하노라.
117. 菩薩聞是法 疑網皆已除 千二百羅漢 悉亦當作佛
보살문시법 의망개이제 천이백나한 실역당작불
菩薩聞是法하고 疑網皆已除라. 보살들이 이 법을 들으면 의심의 그물이 다 이미 제해져서 千二百羅漢도 悉亦當作佛 또한 다 마땅히 부처를 지을 것이다.
118. 如三世諸佛 說法之儀式 我今亦如是 說無分別法
여삼세제불 설법지의식 아금역여시 설무분별법
如三世諸佛의 說法儀式하야 3세의 제불의 설법의식과 같아서
我今亦如是 說無分別法호라. 나도 그와 같이 無分別法을 설한다.
119. 諸佛興出世 懸遠値遇難 正使出于世 說是法復難 無量無數劫
제불흥출세 현원치우난 정사출우세 설시법부난 무량무수겁
聞是法亦難 能聽是法者 斯人亦復難
문시법역난 능청시법자 사인역부난
諸佛興出世는 제불이 출세한 것은 懸遠値遇難이다.
이것을 제가 四難章이라고 했어요. 부처님 세상에 나와 만나기가 어렵고, 멀고 먼 세월에서도 만나기 어렵고, 正使出于世라도. 설사 세상에 나온다 하더라도 이 법을 설하기가 어려워요. 법화경 설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無量無數劫에 聞是法亦難이다. 법화경을 설사 설 하더라도 이 법을 듣는 것이 또한 어려워요. 能聽是法者도 斯人이언만 亦復難이라. 설사 이 법을 듣는 사람도, 법을 갖기가 또한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四難章이라고 그래요. 부처님오시기 어렵고, 이 법 설하기 어렵고, 이 법 듣기 어렵고, 듣는다 하더라도 가지기 어렵다.
斯人이라고 하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受持하고 行하는 사람.” ←이런 뜻이 됩니다. 법화행자가 또한 어렵다.
四難章이라고 제가 이름을 지었는데 참 필요한 말이지요.
부처님만나기 어렵고, 이 법 설하기 어렵고, 이 법 듣기 어렵고, 들어도 내 마음에 가지기 어렵다. 보통 “그 사람”“그 사람”그러거든요. 법화경에서 그 사람”또는 “이 사람”하면 법화행자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120. 譬如優曇華 一切皆愛樂 天人所希有 時時乃一出 聞法歡喜讚
비여우담화 일체개애락 천인소희유 시시내일출 문법환희찬
乃至發一言 卽爲已供養 一切三世佛 是人甚希有 過於優曇華
내지발일언 즉위이공양 일체삼세불 시인심희유 과어우담화
譬如優曇華가 一切사람들이 다 愛樂하는 것은 天人所希有라.
천인이 다 희유하게 여기는 바라. 時時乃一出이라. 때에 한 번 나오는 것이다. 聞法歡喜讚일새. 법을 들으면 환희하며 찬탄함 일세.
乃至發一言. 한 마디만 발 하면 卽爲已供養 一切三世佛이라.
一切三世佛을 이미 다 공양한 것이 된다. 是人甚希有는 過於優曇華니라. 이것이 참으로 희유한 것은 우담바라화가 피는 것 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121. 汝等勿有疑 我爲諸法王 普告諸大衆 但以一乘道 敎化諸菩薩
여등물유의 아위제법왕 보고제대중 단이일승도 교화제보살
無聲聞弟子(무성문제자)
汝等勿有疑어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지어다.
모든 法王이 되어서 널리 大衆에게 告하노니 다만 一乘道로서 모든 菩薩들을 敎化하고, 聲聞弟子들은 없다.
122. 汝等舍利弗 聲聞及菩薩 當知是妙法 諸佛之秘要
여등사리불 성문급보살 당지시묘법 제불지비요
汝等舍利弗과 聲聞及菩薩이여, 마땅히 알라.
이 妙法은 諸佛의 秘要다. 아주 비밀하고 요긴한 것이다.
123. 以五濁惡世 但樂著諸欲 如是等衆生 終不求佛道 當來世惡人
이오탁악세 단락착제욕 여시등중생 종불구불도 당내세악인
聞佛說一乘 迷惑不信受 破法墮惡道 有慙愧淸淨 志求佛道者
문불설일승 미혹불신수 파법타악도 유참괴청정 지구불도자
當爲如是等 廣讚一乘道(당위여시등 광찬일승도)
五濁惡世 가운데 사람들이 다만 모든 욕망에 낙착했을새.
如是等衆生들은 終不求佛道라. 그런 사람들은 마침내 佛道를 구하지 못한다. 세속적인 가치에 집착해 있으면 이런 법화경이 눈에 안 들어오지요. 귀에도 안 들어오고요. 當來世惡人이 聞佛說一乘하고, 당래세 악인이 부처님이 一乘도리 설하는 것을 듣고, 迷惑不信受하야 미혹해 가지고 받아들이지를 아니해. 그래서 破法墮惡道다. 법을 깨뜨리고, 그런 법 없다고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해서 惡道에 떨어지리니 有慙愧淸淨하야,
그러나 慙愧하고, 깨끗하게 돼서 志求佛道者하야 마음에 불도를 구하는 자가 있어서 當爲如是等하야 마땅히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一乘道를 널리 찬탄호라.
그러니까 법을 부정하고 악도에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有慙愧.
어떤 이는 慙愧하고 淸淨해요. 그래서 정말 불도가 뭔가 하고 불도를 구한다. 마음속으로 진짜 불교가 뭔가 하고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一乘道를 찬탄한다는 말이지요.
124. 舍利弗當知 諸佛法如是 以萬億方便 隨宜而說法 其不習學者
사리불당지 제불법여시 이만억방편 수의이설법 기불습학자
不能曉了此(불능효료차)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諸佛法如是하야 모든 부처님이 이와 같은 법을 萬億方便으로 隨宜而說法하나니. 萬이나 되고 億이나 되는 방편으로 편의를 따라서 說法했다. 그러니까 방편을 안 쓸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其不習學者는 제대로 익히지 못한 사람은 능히 이 도리를 曉了하지 못한다. 깨달아 알지를 못하느니라.
125. 汝等旣已知 諸佛世之師 隨宜方便事 無復諸疑惑 心生大歡喜
여등기이지 제불세지사 수의방편사 무부제의혹 심생대환희
自知當作佛(자지당작불)
그대들은 모든 부처님. 또 세상의 스승이 隨宜方便事. 편의를 따라서 방편으로 하는 그 일을 이미 알고, 無復諸疑惑이라. 더 이상은 疑惑이 없으며, 生大歡喜하야 마음에 큰 환희심을 내어서 마땅히 부처의 지음을 알게 될 것이다. 自知當作佛. 스스로 부처 지음을 알게 될 것이다.
妙法蓮華經 方便品 弟二終
妙法蓮華經 弟一卷 終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보면, 법화경 입장에서 보면 우리 마음은 이미 그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또 우리 생활은 진시황이상 더 잘 살잖아요. 사실은 진시황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진시황이 어디 큰 버스 같은 것. K T X 같은 것을 어떻게 탔습니까?
꿈도 못 꾼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몸은 진시황이요 마음은 부처다.”
더 이상 더 보탤 것이 없어요. 전혀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이 또 등장하는데 “欠少什麽오?” 네 지금 부족한 것이 뭐냐? 몸은 진시황이고 마음은 부처인데 더 이상 부족한 것이 뭐냐?
“흠소십마” 좋지요? 부족한 것이 도대체 뭐냐?
보고 듣고 느끼고 화내고 웃고 울고 할 줄 아는 그 능력. 그것을 곰곰이 한번 살펴봐라. 대단한 능력이고, 그 능력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부처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경은 좀 장황하게 설득력 있게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선불교의 가르침은 아주 직선으로 촌철살인 형식으로 그렇게 아주 우리 마음을 꿰뚫어 주는 가르침입니다.
看經功德殊勝行 無邊勝福皆廻向 普願沈溺諸有情 速往無量光佛刹
간경공덕수승행 무변승복개회향 보원심익제유정 속왕무량광불찰
十方三世一切佛 諸尊菩薩摩訶薩 摩訶般若波羅蜜
시방삼세일체불 제존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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