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나는누구인가? / 마음 공부의 시작 / 마하라지

수선님 2022. 11. 27. 11:21

방문자: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지금은 나 자신을 성공한 사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성공에 매우 만족하며, 내가 성취한 것에 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마하라지: 옳고 그른지 따지기에 앞서 누가 이 질문을 하는지 말해보십시오.

 

방문자: (약간 당황하며) 뭐라고요? 물론 나입니다.

 

마하라지: 그게 누구입니까?

 

방문자: 나입니다. 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바로 나입니다.

 

마하라지: 내 앞에 있는 그 몸뚱이를 말합니까?

 

 

 

 

 방문자: 며칠 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저는 아들의 죽음을 철학적으로 담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아들을 잃는 것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압니다. 저는 이러한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과 타인을 위로하는 그런 통상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잔인한 운명이 한창때인 제 아들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갔다는 참혹한 현실에 다시 직면하게 됩니다.

왜? 왜냐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 슬픔을 저는 견딜수가 없습니다.

 

마하라지:(잠시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내'(개체로서의 나)가 없으면 '타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나타난 슬픔은 당신이 그려낸 것이므로 "나는 슬프다"라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고 헛된 일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일인가? 그런데 꼭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슬프고 원통한 것은 죽은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죽었으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슬픈 것을 알겠는가? 

그러면 지금 산 사람의 마음이 슬픈 것이다. 왜 슬플까? 죽은 사람이 더 오래 살지 못해서, 살았으면 행복했을 것인데 죽으니까 불행할까봐? 결국 지금 산 사람의 생각이 자아낸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은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생각속에서 만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념속에서 고통을 받는다, 누가 믿으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몸이 자신이라고 느끼는 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이 몸은 생사고락을 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 공부는 육체를 어떻게 해서 즐겁게 하는 인위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병을 고치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부처님은 위대한 정신과의사??) 부처님이 알고보니까 원래 없는 병을 만들어서 슬퍼하고 고통을 받으니 얼마나 자비심이 들겠는가? 꿈속에서 죽었다고 펑펑우는 사람에게 깨우기만 하면, 깨기만 하면 꿈이였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을, 그러면 정신병이 고쳐지는 것이다.

 

자신의 실체를 알면, 이것은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영생도 없다, 하나님도 없다, 부처님도 없다, 왜냐고?

무슨 말을 정하고, 붙이고, 개념을 세우더라도 '나'가 없기때문에 붙을 자리가 없기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래서 "말에 속지마라"는 말이 있다.

 

마하라지:

절대와 의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절대자각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선행하는, 이유도 지지도 필요 없는 근본적인 본래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상태에서 의식이 나타나는 순간,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상대성의 조건을 야기합니다. 의식은 형체와 같이 그 표면에서 반사되는 절대자각입니다. 태양 없이 태양의 반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어도 절대는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깊은 잠 속에서는 의식이 없지만 절대자각은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에서 깨어나면 잠을 잤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깨어났을 때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과 물결의 비유를 많이 들어서 얘기합니다. 물과 물결, 물은 절대자각이고 물결은 의식을 의미하겠지요. 또, 대혜스님은 '전단나무를 몇 조각을 내더라도 전단나무다'라고 어느 편지글에서 말씀하셨지요. 여러 비유가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실체, 실재 여기에 있는 이것, 이것을 모르면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고 자신의 살을 꼬집어보세요. 아프죠?, 아픈 게 이것입니다. 이것! 이것을 체험하는 게 깨어나는 겁니다. 어떤 없었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것, 이것을 알아차리는 게 깨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한번 깨어나면 다시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모든 꿈들이 꿈임을, 이것뿐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현혹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문자: 제 몸과 주변의 다른 것들을 보게 될 때 비로소 개체로서의 내가 존재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하라지: 당신이 사물을 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당신의 감각들이 외부, 즉 당신의 육체 바깥에서 온 자극에 대해 반응한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감각들이 받아들이고 마음이 해석해낸 것은 의식 속에 투영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의식 속의 나타남은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되어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방문자: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가 끼어드는 곳은 어디입니까?

 

마하라지: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대상화 과정에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전체에서 분리된 한 개체로 생각하는 한, 개체일 수 없는 실체의 전체적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분리된 개체로 보는 것은, 나타남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매개물에 불과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상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저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이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은 동시에 한치의 생각없이 그냥 여기 나타납니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사라지고,,,아무 생각하지 마세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 생각도 안하는데 흘러가는 듯한 이것!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있고 생각을 하는데도 있고,,,이것이 뭡니까? 모든 것이 이 하나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단 한 개라도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같습니다. 꼭 있을 것 같은데 잡으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도 그렇습니다.

 

방문자: 지난 며칠 동안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가버린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아무런 사전 준비도 안 되어 있던 제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저는 줄곧 선생님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눈에 보이는 대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했습니다.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꼭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하라지:  대체 왜 내가 당신을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내가 사물을 볼 때, 당신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상태로 본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질문은,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깨달은 사람들에게 사물들은 어떻게 인지될까 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의 인식작용에 의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러므로 뒤집어 말하면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 대상입니다. 어떠한 대상이 대상으로 보이려면 대상이 아닌 주체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인지할 때에는 보는 주체도 없고 보여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이것이 다름과 같이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뜻입니다. "나는 보되 보지않는다." 이것이 어리석은 당신의 질문에 대한 어리석은 대답입니다.

 

 

 나의 공부경험으로는 한번도 깨달은 사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무엇인가?" 답답하고 갑갑하게 매달렸는데,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깨닫고 나니 사람들은 나에게 그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어떤 경지가 있어서 인간사에 완전히 통달한 도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내가 너무도 평범하고 정말 별 차이를 못 느껴서 '뭐, 깨달아도 별 차이가 없네', 깨달은 사람이 화내고 먹는 것 좋아하고, 아이들땜에 고민하고 등등,,실망만 하고 간 사람도 있었다. 나도 사실은 좀 멋져보이고 지혜가 생겨서 세상사 고민을 다 해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평범해진다. 특별한 것은 전혀 없다. 특별하다는 것도 하나의 개념이다,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깨달은 사람이 특별나고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일반사람들과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 깨달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앞 일을 예견하고, 정말 축지법을 써서 뛰어다니고 특별하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깨달음과 거리가 먼 다른 것을 잡고 있는 사람일뿐이다. 지혜란 세상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마치 봄에 꽃이 피듯이, 저절로 인연이 되어 일어난다. 만약 봄에 피는 꽃이 "오늘은 춥고 비가 와서 안 피고 싶어요, 날씨가 따뜻할 때 내일 오전10시쯤 꽃을 활짝 피울테니 그 때 구경하러 오세요." 하면 얼마나 웃긴일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한다. 예전에 모 스님을 본다고 3000배를 하고 올라가니 "너는 직장생활만 열심히 해라."고 했다고, 그 때 직장생활 열심히 안 했으면 아직도 산천을 돌며 답답해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스님이 자기 스승이라나,,이런 헛소리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다만 '이것'이 뭔지 그것에만 궁금해하십시오. 이런 세상일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모두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일뿐, 그렇다면 이 마음이 뭔지 알아야지, 이것이 그려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뭐합니까? 예전에 톨스토이 단편집에 있었던 글이었던가? 가난한 사람이 비옥한 땅을 찾으러 다니다가, 힘들게 어느 마음에 도착했는데 그 마을의 촌장이 비옥한 땅을 보여주면서 "아침에 나가서 해질때까지 당신이 줄 그은 땅은 모두 다 주겠소." 했죠. 도시락을 들고 처음에는 땅이 너무 좋아서 줄을 긋다가 옆에 땅이 더 좋아보이고 또 옆에 땅이 더 좋아서, 더 많이 하고 싶은 마음에 도시락 먹을 시간도 없이 줄을 긋다가 욕심을 버리고 반환점을 돌아왔는데,출발점을 다 못오고 쓰러져 죽었지요. 죽으면 묻힐 땅 한 평이면 충분한데,, 죽으면 소용이 없지요. 목숨이 있을 때 열심히 공부해서 세상사람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몇 천 가지 보물보다 더 가치있는 '이것'을 아십시오. 절대로 머리로,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마하라지:

 어떤 지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재의 느낌인  '나는 존재한다'가 모든 지각력있는            존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임을 인정해야한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떠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상태에서 어떤 증거가 필요했나요? 상대적 존재 안에서만 증거에 대한 의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상대적 존재라는 테두리 안에서 얻어지는 모든 증거는 오직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글쎄,, 사람들은 왜 깨달아야 된다고 생각할까? 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일까? 정말 '깨달음'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요? 여러 깨달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생각으로는,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자신이'증거'입니다. 당신은 태어나고자 맘을 먹어서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눈을 떴을 때 엄마를 알고자 해서 안 것도 아니며, 당신의 육체는 저절로 자랐고,당신이 아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배우든 배우지 않든, 모든 것들이 자라면서 알게 된 것이지요. 단순히 생겨난 이 육체를 빼고 이 생각을 빼면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확하게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한번도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여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그 환상도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도 없고 생각도 없이 당신은 언제나 '나'입니다. 이 육체와 생각을 가지고 당신과 나는 구분할 수 없이, 전체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증거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체험을 하면 당신이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방문자: 명상에 들어 있으면, 사랑스러운 '라마 신'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고 지고의 기쁨을 누립니다.

마하라지: 명상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떤가요?

방문자: 라마에 대해 생각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서 라마를 봅니다.

마하라지: '라마'가 뭘 의미합니까?

방문자: 무슨 말입니까? 라마는 라마일 뿐입니다.

마하라지: 나에게서 라마를 보고 개나 꽃에서도 라마를 본다면, 그 라마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겁니까? 정확히 어떻게 라마를 봅니까? 전통적인 형상으로 활을 어깨에 걸치고 화살 통에 화살을 넣어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까?

방문자: (약간 당황하며) 예, 그래요.

마하라지: 당신이 명상 속에서 라마를 보며 느낀다는 평화와 기쁨이란 게, 보통 사람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오랫동안 걷다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얼음냉수를 마시는 그런 기분과 같지 않나요?

방문자: 그 둘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하라지: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수행이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까?

방문자: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따져야 합니까? 라마는 신이고, 나는 그 신에게 순종하는 연약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보면 하나님을 '신'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물론 불교에서도 선공부를 하는 분들을 빼면 부처님을 '신'처럼 생각해서 기복신앙처럼 종교를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또 명상단체에서도 명상중에 많은 신비한 현상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이 신비하고 기이한 체험도, 기적도, 지금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분명히 기적적인 신적인 현상이 일어나기전에, 무엇이 먼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다고요? 그러면 누가 그런 현상을, 신이다는 것을 아는 놈은 누구입니까? 먼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본래성품이고, 본래면목이고, 이름을 갖다붙이면, 신이고, 부처고, 하나님이지요. 이것은 절대 내가 하나, 둘, 셋하고 헤아리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항상 전체입니다.

 

 얼마전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신과 나눈 이야기', '기적수업'을 읽고  저는 어떤 내적인 스승과 항상 대화를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형상을 가지지도 않고 늘 같이 있었기에, 겉으로 보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거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스승에 의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누군가 같이 있다는 느낌도 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다시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자유롭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하는데, 이 말도 이것을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무엇을 생각해도 이것뿐, 어떤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한번 더 생각하고,,,이런 과정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무엇에 의지할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구속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자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니까 어디에 변하지 않는 기댈 곳을 찾게 되잖아요. 이 '나'를 지켜줄 누구는 없습니다. 왜? 본래 자신은 절대 완전하니까요. 마치 머리를 두고 머리를 찾는다는 말처럼 '누구'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모르면 기적적인 현상에 놀라워하고 신적인 어떤 형상에 두려워하지만, 자신을 알면 이 신도, 기적인 현상도, 정말 쓸데없는 똥입니다. 당신이 부처이면서 하나님이고, 금이면서 똥이고, 컵이면서 커피입니다. 절대 다른 것은 없는 겁니다.

마하라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유명한 정치가에 대하여 서로 언쟁이 붙었다가,

마하라지가 들어와서 상반된 의견을 듣고 얘기한다.

 

마하라지: 어째서 이러한 상반된 견해가 생길까요? 총체적 인식에 서 있지 않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상반된견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에 대한 두 가지의 이미지는 단지 보는 사람의 상상에 의해 일어나며, 둘 다 그들의 정신적 산물로서 기본적으로 논쟁 대상이 된 그 사람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은 나와 남을 둘로 보는 분별심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원죄라고 불리는 것이며, 나와 너라고 둘로 나누는 분별이 속박입니다. 해방이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바로 이러한 나와너라는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본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대상으로서의 사물에 대해 개념적으로 판단하는 일을 그치고, 의식을 절대 근원 쪽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고, 더 나아가서 이 육체가 태어나기 이전의 자신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야 하며, 개념화를 멈추고 정신적 이미지에 불과한 것에 말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 첫 구절,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이 법은, 이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것'을 깨닫는 것에 가시밭길을 가는 것 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과맛이 궁금하면 사과를 바로 먹으면 되는데 사과를 먹어봤으니 이런 맛일거야, 보기에 신선해 보이지가 않아, 부사인가, 홍로인가,부사면 사과 맛이 시원하고, 홍로면 새콤할 거야 등등 그 사람은 사과를 먹더라도 머리속으로 비교하면서 먹기 때문에 지금 그 사과의 맛을 모르는 거죠. 세속에서는 일부러 분별을 안하려고 온갖 일들을 하나로 하면 이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분별을 해야죠. 그러나 이 법은 하나 하나 분별을 하면서도 분별을 하지 않는 겁니다. 어떤 법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에 걸려 법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겁니다. 이 법은 항상 지금 이것이고, 또한 전체입니다. 분리 될 수가 없고 구분될 수도 없고 절대 이것, 저것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다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것, 저것으로 나누는 겁니다. 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다만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고집해서 스스로 골방에 갇혀있지 않으면 햇빛은 늘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유명한 유럽 배우가 방문하여 함께 자리했다.

마하라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던 중이었다. 

 

젖만 빨며 다른 것은 일체 바라지 않던 영아기,

건강과 미에 넘쳐 세계를 정복하고자 야망을 꿈꾸는 십대,

사랑에 고민하는 외로운 청춘,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에 빵을 구하느라 지친 중년,

늙고 병들어 입도 움직이지 못하고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노년,

마하라지는 이렇게 전 생에 걸쳐 갖게 되는 자기 이미지에 대해 묘사하며,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긴 인생여정을 언급했다.

 

마하라지:

" 각기 다른 이미지 중에 어느 것이 진정한 그대입니까?"

 

우리는 그 적절한 몸짖과 음향효과로 감동하여 넋을 잃은 채 그의 말을 들었고,

그 유럽배우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멋진 연기는 내 생애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마하라지:

"이만하면 나도 훌륭한 배우라고 할 만하지 않소? 이 우주 전체가 내 연극무대라오. 나는 수백만의 역할을 하는 일인 배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모순되게도 일단 당신이 확실하게 되면 개체로서 당신의 연극은 끝이 납니다. 이 세싱에 있는 그토록 수많은 배역의 모든 역할을 행하는 것이 오직 당신뿐이라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당신이 당신에게 맡긴 제한된 하나의 배역에 자신을 한정시켜 그저 그런 사소한 역할이나 하면서 살다 죽으렵니까?"

 

  

 대혜스님의 세 번째 깨달음을 가지게 된 이야기를 보면,  앙굴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앙굴마라가 발우를 들고 임산부를 구원한 인연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

불교경전에서 앙굴라마는1000개의 손가락을 잘라 화관을 만들면 왕위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999개의 손가락을 모운 다음에 엄마의 손가락 대신 부처님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하다가, 부처님 말씀에 깨달아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앙굴마라가 탁발을 하러 갔는데 마침 그 집이 임산부가 산고를 겪고 있었다. 남편이 물었다. " 산고를 면할 법을 말씀해주십시오." 앙굴라마는 저는 아직 법을 모르니 부처님께 물어보고 오겠다고 했다. 부처님께 가니 " 나는 성인의 법을 따른 이후로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빨리 가서 얘기하라고 해서, 그렇게 말했더니 산고의 고통을 벗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대혜스님은

그 당시 스승스님에게 물었다.

그 스승스님이 말하기를

"나에게게 한 개 방편이 있지만 네가 도리어 알지 못할 뿐이다.

앙굴라마가 부처님께 물어보러 갔는데  그 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어쩔거냐? 또 그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이를 낳았다면 어쩔거냐?"

대혜스님은 그 때는 알지 못해서 오리무중하시다가 뒤에 화엄경에 나오는 '무생법인' 얘기를 보고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하라지가 재미있게 얘기하듯이, 불교경전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방편이지만 그 방편에서 꼭 일러주는 보여주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직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며, 깨달음도 없으며 부처가 없으면 중생도 없습니다.  부처가 없다는데 허깨비 중생의 부처 이야기는 끝이 없군요.  보입니까? 들립니까?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들어도 이것, 보아도 이것, 이 하나뿐이면 당신이 앙굴라마고 부처이며, 임산부이며, 임산부의 남편이며, 대혜이며, 대혜스승이며 바로 지금의 자신입니다.

방문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절대는 의식이 작용해서 '내가 존재한다'라는 첫 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체가 이원성으로 나뉘어져서 우주의 현시가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제 의문은 이겁니다. 왜 첫 생각이 일어났고, 왜 현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마하라지: 지금 들은 것을 정말로 이해하지는 못했군요. 당신은 들었지만 머리로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이런 질문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통해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이 누구에게 일어났습니까? 어디에서 일어났나요?

의식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요? 의식이 없다면 당신이 실체라고 믿고 있는 자아도 없습니다. 그리고 의식은 단지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나타남(현시)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의식은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가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을 했을 때,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의식은, 생각은 곧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했으면 이럴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데, 어떡하다보니 저런 일이 벌어졌어." 우리의 의식은 항상 이 육체인 '몸'을 중심으로 털끝 하나도 모르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모두 괴롭습니다. 왜 좋은 것도 괴로우냐고요? 계속 지속되지 않고 보란 듯이 또 나쁜 일이 일어나니까요.

 

 질문자는 개념(생각)으로 질문합니다. 자기가 당신의 말은 다  이해했는데, 마지막으로 이 하나의 의문만 있는 것처럼, 이런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데, 마치 이런 질문이 자신의 공부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이 하나를 모르면 전체를 다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하나도 다르지 않게, 정말 단순하게 하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는 게 있으면 안 됩니다. 질문자가 말했듯이 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선지식의 말을 생각으로 이해한 양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법은 정말 진실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남을 가르쳐주기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의 공부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을 구원해주고 싶다고요?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해서 해탈시키고 보니 사실은 해탈한 중생이 없다고,,, 자신의 공부입니다.

목에 은 십자가가 달린 멋진 목걸이를 한 23살 청년이 묻는다. 

 

방문자: 명상 중 자주 지극한 행복감과 함께 억제할 수 없는 황홀한 사랑의 느낌이 가슴에 차오릅니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마하라지: 그래 , 알고자 하는 게 뭔지 정확하게 말해보게. 무슨 특별한 질문이라도 있나?

 

방문자: 저는 어떻게 그 서점을 갔는지 모르겠지만 아이 앰 댓을 읽는 동안 무거운 짐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이런 느낌은 마치 제가 신성을 모독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저는 사랑이 곧 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은 확실히 개념이며, 사랑이 개념이라면 신도 역시 개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마하라지: 그래서 뭐가 잘못된 거라도 있나?

방문자:(웃으며)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을 하나의 개념이라고 인식을 바꾸는 것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마하라지: 사랑이 곧 신이라고 말했는데, 자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뭘 의미하는 거지?

방문자: 제가 말하는 사랑이란 미움의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나와 남이라는 차별이 없는 겁니다.

 

방문자: 그러면 제가 기도드리는 신이란 무엇입니까?

마하라지: '나는 존재한다', 그 자체가 신이야. --- 신을 찾는 자가 바로 신이야. 만일 자네에게 의식이 없었다면 세상이 자네에게 존재할까?

 

방문자: 그러면 기도는 무엇이며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하라지: 흔히 말하는 기도란 단지 뭔가를 구하는 것뿐이야, --그러나 참된 기도는 합일과 교감의 요가야.

 

방문자: 이제 모든 게 명백해졌습니다. 제게서 엄청난 쓰레기가 다 빠져나가 소멸된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읽었던, 중요하다고는 여겼지만 그 뜻을 몰랐던 구절들이 수정처럼 투명합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마하라지: 좋군, 이제 실체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속박 속에서 자네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하려나?

방문자: 오! 마하라지 선생님, 지금 저를 놀리시는군요. 아니면 저를 시험해보시는 건가요? 확실히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게 될 '바로 그것'임을 알고 깨달았습니다. 이제 할 일 또는 하지 않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수행을 하나요?

 

마하라지: 훌륭하다! 그냥 존재하여라.

방문자: 진정 그리 하겠습니다.

 

 

 

 이 처럼 도는, 깨닫기는 얼마나 쉬운가? 스승의 말 한마디에, 언하대오를 하신 분들이 전등록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전생에 도를 많이 닦아서 금생에 저렇게 빨리 깨닫게 되었다고 또, 또, 생각으로 말을 하지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직접 나도 한번 할 수 있다, 저 청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알게 되었는데 나와 다른 무슨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당신이 또 전생을 들먹이지 않는다면, 생각은 그 처럼 집요합니다, 끝까지 물고 절대 놓지 않죠, 도는 그 물고 놓지 않는 그 자리에서, 편하고 좋은  다른 자리가 아니고, 깨닫는 겁니다. 그 물고 뜯기는 그 자리에서 갑자기 탁!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청년처럼 쓰레기가 한꺼번에 싹~ 이제까지 정말 궁금했던 것들이 휘리릭~~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게 이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럼 이렇게 쉽게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옵니다. "지금 저를 놀리십니까?" 

 

 조사선에 나오는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맞고, 대우스님에게 가서 이것을 알게 되고, 황벽스님에게 가니, 황벽스님이 " 대우가 무슨 말을 하더냐? 어떻게 해야 이 작자를 불러와서 아프도록 한 방 먹일까?" 그러자 임제스님이 "뭐 오기를 기다리신다고요,  지금 바로 맛보십시오." 하고 황벽의 뺨을 때렸다는 ㅋㅋ 재미있지요. 하지만  모든 전해오는 스님들의 이야기에는 반드시 자신을 깨우기 위한 서슬퍼런 방편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바로 아십시오.

여성 방문자가 <바가바드기타>에 대해서 질문했다. 적절한 단어로 질문을 가다듬는 도중, 갑자기 마하라지가 되물었다. 

 

마하라지: 어떤 관점에서 <기타>를 읽습니까?

방문자: 기타가 구도자에게는 중요한 안내서일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마하라지: 왜 그런 어리석은 대답을 합니까? 내 질문은 '누구의 관점에서' 그 책을 읽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방문객: 저는 신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이 세상에 속한 아르주나의 한 사람으로서 기타를 읽습니다. 

마하라지: 왜 크리슈나의 입장에서 기타를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신성모독의 충격으로 거부의 외침을, 다른 한 사람은 '유레카'와 같은 깨우침의 반응으로 손뼉을 한 번 쳤다.)

 

마하라지: 대부분의 경전은 깨달은 사람의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을 바탕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스승의 말은 그것을 들은 사람의 손에 의하여 쓰이게 됩니다. 후에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더불어 많은 오류가 생겼을 겁니다. ---나는 여러분이 크리슈나로부터 지각을 부여 받은 현상적 대상으로서가 아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의식, 즉 크리슈나의 관점에서 읽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현상이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환상이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성경이나 경전을 이해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휘의 뜻에 걸려서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자꾸 이해가 안되고 말이 안 되니까 무엇을 자꾸 갖다붙이게 됩니다. 자꾸 갖다붙일 수록 점점 더 이것과 멀어집니다. 사실 무심선원의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체험하기 전에는 경전을 덜 보는 쪽을 권유합니다. 경전을 읽는 관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관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의 관점뿐입니다.

 

 마하라지가 크리슈나의 관점에서 읽으라는 것은 어떠한 관점도 없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나와 너가 없는, 오직 하나의 관점, 크리슈나의 관점이든, 부처의 관점이든, 듣는 사람의 관점이든, 읽는 사람의 관점이든, 오직 이 하나의 관점이, 어떤 관점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면서 모든 관점을 총 망라하면서 드러납니다. 어떤 관점이 따로 있다면 반드시 망상입니다.

 

 경전의 말씀이든, 살아있는 선지식의 말씀이든, 죽은 선지식의 말씀이든, 지금 누가 읽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 죽었다 하는 것도 개념이죠, 여기, 지금, 살아있다, 죽었다 하는 이것, 지금, 이것은 늘 밝고 생생합니다. 어두울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것도 생생하죠. 태양보다, 어느 별보다도 밝기로 따지자면 이것보다 더 밝을 수 없고, 깜깜하기로 비교하자면 이것보다 더 깜깜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선가에 있는 이야기인데, 어느 스님이 열심히 공부하다 죽었는데 여우가 되었지요. 백장스님의 설법을 듣고 결국 깨달아 여우의 몸을 벗어난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백장스님이 설법을 하는데 노인이 와서 설법을 듣고 나갔지요. 어느 날 그 노인이 늦은 밤 백장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노인은 전생에 스님이었는데 " 깨달은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하는 학인의 질문에,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여우의 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장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왔지요. 백장스님은 나한테 똑같이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도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백장스님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말로만 보면 "인과에 떨어지지 않습니다."과 "인과에 어둡지 않다." 다른 이야기같고 그 속에 뭐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지요.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은 사람에게는 명백하게 한 사람은 아직 자기 생각속에 있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벗어난, 더 이상 말에 휘둘리지 않고 걸림이 없는 사람입니다. 임제록에 보면 머뭇거리다가, 입도 열기도 전에 맞는 사람도 있고, 절하다가 밟힌 사람도 있고, 똑같이 따라했는데도 얻어 터진 사람도 많습니다. 마조스님도 비슷하죠. 이것은 생각으로 돌아가기 전에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경전을 읽어야 되고 그렇게 선사어록을 읽어야 합니다. 모른다면 경전은 모두 망상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망상속에 이게 무슨 말인가?하고 덜컥!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전이 이끄는 대로 잘 읽어 가는 겁니다.

단 두 번의 강연에 참석하고 나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한 가난한 눈먼 젊은이가 

 마하라지에게 다가와 작별 인사를 올렸다.

 

마하라지: 모든 것을 다 이해했느냐?

젊은이: (확신에 차서) 네!

마하라지: 무엇을 이해했느냐?

젊은이: 선생님, 진리가 무엇인지 이처럼 너무나 명확하고 간단하게, 이렇게도 빨리 보여주신 것에 대해 무어라고 감사의 말슴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선생님께서는 '나는 존재한다'는 인식과 함께 이 몸을 갖기 이전, 즉 '태어나기 이전'에 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둘째, 이 몸-마음은 제가 알지 못한 채 제게 주어졌고, 따라서 '참나'는 '태어난'적이 없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셋째, 이 몸-마음은 시간에 의지하여 '태어난' 것이고, 일시적인 것으로서 할당된 시간이 지나 사라지면, 항상 지금 여기로서 나타남이 없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넷째,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 아니며 또한 의식을 깃들이게 하는 물리적 구조물도 아닙니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오직 여여한 '참나'만이 존재할 뿐이며, 나라든가 내 것, 또한 대상으로서의 '너'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존재 그 자체'로서 근원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합니다.

 

마하라지:(무한한 사랑의 시선을 보내며) 이제 무엇을 하려는가?

젊은이: 선생님 저는 진실로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삶은 계속되겠지요.

 

그러고는 마하라지에게 지극한 자세로 절을 올렸다.

 

 

 마하라지는 죽기전까지 후두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설법을 했지요. 그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사람들의 질문은 항상 이 육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문합니다. 그런 질문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빠지는 일이고 슬픈일인지,, 곧 죽을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한 마디 더 듣고 싶어서 마하라지 앞에 앉습니다. 이 눈 먼 젊은이처럼 그냥 바로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재지 말고, 자기 생각을 넣지 말고, 그냥 바로, 선지식은 소를 몰고 밭고랑을 갈듯이 바로 몰아치는데, 그냥 바로 탁! 나가면 되는데, 꿈쩍도 안하고 버티는 소와 같습니다. 생각이 갈 곳을 잃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또 어느새 버티고 있는 것이지요.

 

 단 한 가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 눈 먼 청년은 마하라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갈 것도 없습니다. 첫 째 하기도 전에 이미 있고, 다섯째 하면  벌써 무한한 숫자까지 간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개의 티끌 속에 수미산이 들어있고, 모든 티끌 속에 부처님이 들어계신다고 하죠.

 

 '첫 째' 하면 첫째라는 게 있는 게 아니라 이것 뿐이죠, 둘째, 이것뿐입니다.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째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말, 어떤 숫자를 하든지 똑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첫 째 하는 거죠?  다섯째, 여섯째, 계속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뭔지 알 수 는 없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자신을 깨쳐도, 체험을 해도 '이것'이 뭔지는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하라지는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합니다. 마하라지도 마지막에는 꼭 점검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말에 속지 마십시오.

때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리한 지성을 지니고, 종교적 스승들이 강연에서 자주 쓰는 모호하고 선명치 않은 말에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 결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의심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마하라지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마하라지는 이 수학교수에게 일체의 가정을 버리고 근본적인 문제부터 바로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마하라지: 당신은 지금 여기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방문자: 나는 독립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야망을 가지고 있는 49세의 남자입니다.

마하라지: 십 년 전 당신의 자화상은 어땠습니까? 지금과 같았나요? 열 살이었을 때는 어땠나요? 갓난아이였을 때는요? 또 그 이전은?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자화상은 항상 변하지 않았나요?

방문자: 예,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항상 변해왔습니다.

마하라지: 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면 무언가 변하지 않는 게 있지 않습니까?

방문자: 예, 있습니다. 꼭 집어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요.

.....

 

방문자: 우리가 그저 의식 속의 현상에 불과하고 이 세상조차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자체는 무엇입니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또 무엇입니까?

 

마하라지:육체는 프라나와 의식을 가진 물리적 구조물에 불과합니다. 생명력이 없다면 육체란 죽은 시체일 뿐입니다. 개인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자신을 몸과 마음의 결합체인 독립된 개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크게 남을 부러워할 일이 없어집니다. 예를 들면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가진 직업, 의사, 교수, 판사, 변호사등등,,예전에 저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 분야에서 잘하는 기술자 정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전에는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하거나 폐지를 줍거나, 너무 가난하게 살면, 불쌍하기보다는 게으르고 한심해보였는데, 이제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그 분야에서 잘하는 기술자와 별반 다름없이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부러워하거나 열등감, 이런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한 적도 없는데, 이 공부에 들어오면 뭐든지 다 수용이 됩니다. 세상일들은 거부할 수록 더 저항감이 들며, 또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 병이 생기게 되겠지만, 이것을 알면 그게 없어져버립니다. 이것은 공부의 효과인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무리 똑똑하고 날카로운 지성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이것은 절대 생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요.

 

 마하라지는 매번 한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딱 한 가지로 들어갑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눈이 먼 사람도, 눈을 뜰 수 있는 사람도,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말을 잘 하든 못하든, 이런 것들과 전혀 상관없는 딱 한 가지, 그것이 이것입니다. 늘 눈앞에  생생한 것, 전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 전혀 볼 수 없는 것, 전혀 느낄 수 없는 것, 그런데도 지금 여기, 꽉! 한치의 틈도 없이 전체로 다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잠깐 읽었는데, 소설가 김애란씨가 올해 이상문학작품집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 '침묵의 미래' 여기에 첫 줄이 이렇게 나옵니다. 나의 이름은 너무 길다, 내가 태어나면서 '앙'하는 게 내 이름이고, 모든 보여지는 것, 이름 붙여진 것들이 나의 이름이다...작가는 언어를 하나의 영혼이라 생각하고 모든 생명과 연관지어 얘기하는데... 단지 소설이지만, 그 글귀 처럼, 이 법도 알면 모든 이름이, 모든 사물이 곧 '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체인 '나'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전혀 그 이름에 요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금방 사라지는 화로에 떨어지는 눈송이와 같은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세상일들이 나를 힘들게 해서 정말 괴로우면 이 공부를 하십시오. 말끔히 해결됩니다. 무언가 마음을 조작하여 그 마음을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고, 돌로 잡초를 눌러놓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공부를 해서 깨닫게 되면, 자신을 알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없어져 버리고 완전한, 더 이상 불만족이 없는 자유자재한 사람이 됩니다. 윈래 우리는 단순하고 순박한 이것입니다. 다른 게 없으니까 갈등이 없죠

 

마하라지: 사람들은 제가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계 도처에서 나를 만나러 오지요.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깨달은 사람 같지 않아, 내가 상상하던 마하라지 같은 성자가 입고 있음직한 근사한 옷도 입고 있지 않잖아......그가 정말 그 사람일까?'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나는 그저 글을 겨우 읽을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나'란 무엇일까요?

즉각적인 대답은 당연히 "나는이 몸이다."입니다. 그러나 몸이란 정신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이 기관에서 지각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틀림없는 의식입니다.

...

 

마음은 마음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눈은 눈을 볼 수 없고, 맛은 맛 자체를 맛볼 수 없으며, 소리는 소리 자체를 들을 수 없습니다. 모든 현사상은 실체 없이 현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자신을 현상적 대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작동하게 됩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나에 대해 생각해보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개념이 거기에는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의식이 없으면 개념화도 없습니다.

 

 

 

 

 실체와 현상이라고 하지만은 사실 실체도 없고 현상도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비유와 방편을 드는 것은 꿈 속에 있기 때문에 꿈을 깨우는 방편일 뿐이지요. 우리는 이게 실체다 라고 말하지만,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현상도 사실은 없는 거지요. 이름붙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예를 들다 보니 자꾸 이름이 갖다 붙는 거지요. 방편이니, 실체니, 현상이니 하고, 또 부처니, 깨달음이니, I am that,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되면 모든 현상을 보되 현상을 보지 않거든요, 그럼 무엇을 볼까요? 이 실재, 이것, 태어나서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의 바탕, 그러고 보니 이웃블로그에서 별사진을 좀 보는데, 우리는 그 별의 아름다움에 취하지만 사실 별은 별이 아닌 공간이 있어야 별이 드러나잖아요. 별만 가득하면 어떻게 그게 별인지, 구분할 수 있겠어요?  별이 있든, 없든, 항상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고, 헷갈리시죠? 이해가 안 될 겁니다. 그러나 말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서 늘 새롭고, 온 우주를 자기 손바닥에 놓을 수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많이 들어보셨지요? 나 혼자 잘났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오로지 이 하나밖에 더 이상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고 한다면 충분히 공감하는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 찾지 마세요. 깨달은 사람 모습을 봐서도 안 됩니다. 그깟 모습 보면 뭐합니까? 매나 밥먹고 잠자고 옷입고 가족과 살고, 겉으로 봐서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찾는 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말을 믿음을 가지고 잘 들어보십시오.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지,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마하라지: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개개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든 '현시의 직용(현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바라본다면, 홍수라든가 지진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파괴적 현상은 우리에게 고통을 줄 만한 아무런 의도가 없습니다. 각각의 개체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 자신의 행위나 경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사실은 어떠한 현상적 대상도 자기 자신만의 독립된 존재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가 삶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이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하루종일 그리고 매일 하는 일이라는 것이 모두 이분법적 대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현시 그 자체는 연속적인 대상화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깊은 잠 속에서 의식이 휴식에 들게 되면 대상화는 필연적으로 멈추게 되기 때문이며, 대상화된 우주도 사라집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어떠한 자아도, 어떠한 세상도, 어떠한 신도 없습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쌀쌀하지요? 5월이 코앞인데도 눈이 오기도 하고, 원래 봄이면 일교차가 커다고 하지만 저녁에는 파카를 입고 다녀야 될 정도이니 바람이 밉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람의 입장에서 보면 바람은 전혀 우리를 춥게하려고, 감기걸리게 하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인데, 글의 배경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아프리카 원주민을 추방하고 땅을 빼앗던 미국의 식민지 시대였던 것 같아요. 땅과 하늘을 나누려는 미국인들에게  인디언 추장이 혼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 이 하늘과 땅을 어떻게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사람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환상입니다. 불교에서는 망상이라고 하죠.

 

  우리는 많은 개념화 된 언어로 우리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죠? 처음 무엇을 발견하면 이름을 붙이잖아요. 좀 다르게 비유를 한다면, 산에 올라가니 참꽃이 활짝 피었어요. '아, 너무 예쁘다!' 하고 그 예쁜 것을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어떻게 예쁜지 말해도, 내가 직접  처음 본 그 느낌을 얘기해줄 수가 없잖아요. 말이고 글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까지는 얘기해줄 수가 있는데 직접 봐야 알 수가 있는 거죠. 이 법 공부도 그렇습니다. 직접 맛을 봐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마하라지가 이렇게 세심하게 논리적으로 얘기를 해도 우리는 바람처럼 흘러 듣습니다.  그렇잖아요? 모르니까 어떻게 잡을 수가 없는 거죠. 우리는 한 방울의 물이면서 전체적인 물입니다. 물 한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처럼 우리는 나눠도 이것이고, 섞어도 이것이며, 오직 이 하나, 지금 나눈다, 섞는다 하면서 말에 휘둘리지 않고 생각에 넘어가지 않으면서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 방문자는 은퇴한 인도 외교관이자 사회.정치적으로 꽤 저명한 인사다. 이날 아침의 주제는 진리 탐구와 세상에서의 실질적 삶이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방문자: 사람이 정말로 나라 안팎의 모든 문제를 제쳐두고 본성에 대한 명상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 지금부터 나와 함게 이 문제를 다루어봅시다. 지난 몇 천 년 동안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위인들과 성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사람들과 성인들이 과연 무엇을 성취했습니까?

그들이 사람이나 자연의 행동 양식에 조그마한 변화라도 이루어낸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무언가 근본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자,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제들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그 요소는 '나'와 수백만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너'그리고 '물리적 세계'입니다. 모든 존재는 대상으로 나와 너를 인식하는 의식 속에서, 서로의 대상으로 존재합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인데 머리가 잘려도 다시 생겨납니다. 히드라의 심장, 즉 문제의 뿌리는 현시된 온 우주가 나타나는 의식이 아닙니까? 사실 의식이 바로 히드라와 같지 않을까요? 의식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요, 나타난 이유며 다른 모든 것과 관련된 핵심요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세계'란 단지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너와 나로 돌아가봅시다. 우리는 지각력이 있는 존재들로서 세계 속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늘 뭔가를 '하고자'합니다. 그런데 개념적인 존재가 개념적인 것 외에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거짓을 거짓으로 볼 때 문제는 스스로 해결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꿈의 내용이며, 살아 있는 연극의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배우들은 그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도 물론 그렇겠지만, 사실 체험한 사람도 처음에는 이런 진리에 대한 공부와 현실적인 문제에서 많이 갈등을 하게 됩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것은 만약 감정을 조정하거나 심리상담처럼 어떤 행동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져야 세상사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차라리 명상단체나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어떤 조작된 심신수련을 하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이 공부는 진리와 현실적 삶의 문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도인처럼 되는 게 이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서 마음이 할 일이 없게 만드는 공부입니다.

 

 탁자 위에 꿀 단지 있는데, 먹지고 말고, 뚜껑을 열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약속 했지만 또한 마음은 열어봐야 하고 먹어야 하고 봐야 하는 게 마음이지요. 마음은 모든 할일을 다 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왜? 둘이 아니니까요. 오늘 우리아이가 공부한 것에 비하면 중간고사 시험을 못 봐서 엄청 화났습니다. 화가 나면 화를 내요. 이것 보세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에게는 별 문제가 안되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이고 이것은 단지 지나가는 한 개의 현상일 뿐, 현상은 왔다가 사라지고 합니다. 현상은 왔다가, 갔다가, 사라지지만 이것은 절대불변, 영원합니다. 마치 이 세상이 하나의 연극무대이지요

 

캘거타에서 온 방문객은 자신이 지난 수년 동안 자아에 관심을 쏟아왔으며, 유명한 성자와 알려지지 않은 성자, 그리고 여러 학자들로부터 우파니샤드, 기타 등의 주요경전을 배웠으며, 그는 산스크리스트에 능통했고 거의 모든 전통 문헌을 원전 그대로 공부했지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스승의 은총뿐인데, 아이 앰 댓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마하라지를 마지막 스승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인도 뭄바이에 머무는 시간은 며칠뿐이었고, 머지않아 캘커타로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라 스승의 은총은 그 사이에 내려져야 했다.

 

 

 

마하라지: 아직 여기서 보낼 날이 며칠 남아 있으니 은총을 받거나 깨달음을 얻을 시간은 충분하군요. 우선 누가 구원을 얻으려 하는지나 알아봅시다.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스스로 알려고 한 적이 있었나요? 잠시 이 세상이나 스승이나 신에 대해서는 잊도록 합시다.

 

방문객: 그것은 매우 까다로운 질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스승의 은총일 뿐입니다. 그것 없이는 제게 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하라지: 그렇다면 과연 당신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닫힌 문이란 것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하겠군요. 자, 다시 묻겠어요. 당신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의 은총을 바라는 바로 그 '당신'말입니다.

 

방문객: 죄송합니다만, 선생님은 저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시는군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나는 모른다'일 뿐입니다.

 

마하라지: 오호! 이제 우리는 무언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사실이지 '나는 모른다'는 말처럼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이것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방문객: 선생님께서는 저를 놀리고 계십니까? 그러나 선생님의 표정으로 봐서는 이보다 더 진지하실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

...

 

방문객: 마하라지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저의 눈을 확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제가 생가해왔던 수행이나 그에 관한 지식과 견해들이 모두 허망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종교인들을 많이 존경하면서 그 옆에 있기를 희망하지요. 그 밑바탕에는 항상 지금 세속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명 종교인 누구라도 우리보다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속적 잘못으로 따지자면 종교지도자들이지요. 일찍부터 세속을 버리고 출가를 했고, 많은 종교인들이 보시한 것을 먹고 자신의 공부만 편하게 했으니 못 깨치면 정말 우리들 보다 못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고 절해야 합니까? 만약 진심으로 자신의 본성을 봤다면 모든 종교지도자는 우리의 잘못된 종교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도록, 그래서 일반 종교인들에게 인식되어진 종교의굴레를 벗겨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모두, 이 한 개로, 이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깨쳐야만 비로소 스승의 은총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는데, 무슨 스승이 있고, 은총이 있겠습니까?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후에도 영원한 것,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했지요. 당신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까? 모든 경전을 읽고 공부하고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말을 한 적도 없는 " 나는 누구입니까?" 모든 알고 있는, 배운 것들은 잠시 밀쳐두십시오. 나는 모릅니다. 그래서 알고 싶습니다.

 

 '이게 뭔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버리십시오. "나는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그런데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는, 누, 구, 입, 니, 까, 모, 릅, 니, 다. 이렇게! 그럼 말 안하면 어떻게 돼요? 가만히 있으세요. 아무것도 없습니까? 생각을 안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죠. 다시 말해보세요. 나는 누구입니까? 나, 는, 누, 구, 입, 니, 까,그리고 조용히,,, 다시 말하세요. 나는 누구입니까? 계속 말하고 말 안하고, 생각하고 생각 안해도 있잖아요. 이것입니다.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스승도 없고 은총도 없습니다. 아무리 옆에 가까이 있다고 한들, 자신의 본성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없다면 당신은 한낱 욕망에 이리저리 휘둘려서 괴로운 인간일 뿐입니다.

 

방문자: 저는 20년 동안이나 <베난타>를 공부해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진리탐구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고, 저는 정말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20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 앰  댓>을 읽고 희망을 발견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이제 저의 탐구는 끝났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줄곧 눈물이 흘렸다, 자신을 억제하기가 힘겨운 듯했다.) 

 

마하라지: 당신은 '자신이 육체가 아니다'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방문자: 제가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아이 앰 댓>에 나온 대로 육체 이외의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느낌으로 계속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이제 저는 언어에는 진저리가 납니다. 저는 수백만의 단어를 공부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실체를 주십시오. 언어가 아닌 것 말입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선생님께 무량한 감사를 올리겠습니다.

 

마하라지: 당신은 이미 그 실체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언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당신이 이 일의 뿌리에 도달해야만 가능합니다. 그 뿌리라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의식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아는 것업니다. 그 존재의 씨앗을 찾아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전 우주의 씨앗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곤충이든 벌레든 아기든 병아리든, 이 모든 경우에 진정으로 무엇이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임신부터 출생에 이르는 동안 잠재되어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탄생하게된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체가 태어날 때 자신이 입고 나오는 몸의 형태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존재한다'가 무엇인지 그 근원을 알겠습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그 처음 생각이 본래 하나인 세계를 쌍대성의 세계로 지어냅니다. 어떤 개체가 자기 스스로 행동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그 특정한 물리적 형상을 입고 세구나를 그 개체에만 고유하게 조합하여 행동하는 것은 실제로 오대 원소의 본질인 프라나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념적 개체가 아니라 이 꿈과 같은 세상에서 수백억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놀라운 능력의 의식인 것입니다.

 

 마야가 벌이는 릴라lila(유희)의 다양함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 단계에서 절대와 상대의 본질적 하나 됨, 발현된 것과 잠재된 것의 하나 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설명이 진행되는 내내 방문객은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완전한 평화 속에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질문자는 너무 간절합니다. 생각해보세요. 20년 동안이나 공부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니.. 많은 사람들이 이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학교 공부는 이렇게 열심히 하면 장학생이 될 수는 있지만, 이 공부는 배우는 것처럼 해서는 정말 공부되기 힘든 것입니다. 이 질문자처럼 그것이 헛수고인 것을 알고 다 버리고 마하라지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온전하게 다 받아들였습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을 지니고 있으면 아무리 법을 보여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만 똑같습니다. 10페이지 내용을 건너뛰면서 옮겼지만 여기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단지, 이 존재한다는 의식도 있기 전에 우리는 벌써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가에서는 "부모님이 너를 낳기전에 너는 누구냐?" "너의 본래면목이 뭐냐?"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태어난 적도 없으면서 지금 말합니다, 나는 태어난 적도 없으면서 밥을 먹습니다, 나는 태어난 적도 없으면서 벌써 아이가 둘입니다. 나는 태어난 적도 없으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입니다.

마하라지: 내가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 내 말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의 본성을 이해하고 인식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이 하나 있어요. 본성을 개닫기 전에 사라져야 할 방해물로써 모든 생각, 개념화, 대상화를 멈춰야 합니다.  

 

질문자: 개념화를 멈추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수고를 해야 합니까?

 

마하라지: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수고도 필요 없습니다. 누가 그 수고를 합니까? 당신은 자궁 안에서 미세한 정자가 아기로 자라나게 하기 위하여 어떤 수고를 했습니까? 그리고 몇 달에 걸쳐 연약한 아기에서 유아로 자라나는 동안,자신의 존재를 지각하기 위해 어떤 수고를 했었나요?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데는 어떠한 현상적 노력도 가당치 않습니다. 깨달음은 억지로 얻어지거나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만한 요건이 되었을 때, 저절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이 집을 차지하려고 한다면  내가 우선 이 집을 비워줘야 합니다. 만약 개념적 '나'가 이미 차지하고 있다면 깨달음이 어디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개념에 불과한 나를 비우고 깨달음이 들어갈 기회를 주세요. 그러나 개념화를 없애는 방법으로 생각을 중지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라면 하지 마십시오. 그밖의 다른 어떤 노력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효과적인 유일한 방법은 진리에 대한 즉각적인 통각입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알아차리고자 하는 유일한 도구가 있다면, 마치 무엇이라도 막을 수 있는 방패와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칼이 있는 것처럼,  제 생각에는 첫째, 선지식에 대한 믿음, 선지식, 그 사람에 대한 정직함, 부지런한, 친절함, 생활력 등 그러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죠,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는 의문입니다. 그것을 목마름, 갈증이라고 하는데, 선지식이 입을 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만 말하는데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저게 뭘까?  저 분의 말이 이해된다면 맞다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나는 직장에 다니고 가정을 돌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왜 이것이 '나'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어째서 태어났고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왜 만족을 못하고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쁜가?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공부는 자신을 위한 공부지, 절대 남을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앙굴라마가 부처님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뒤좇아 갈 때, 아무리 따라가도 못 좇아가서 멈추라고 했는데, 부처님이 말씀하셨죠. "나는 이미 멈추었는데 네 마음은 멈추지 않는구나.", 법화경인가, 어느 여인이 우연한 상황에서 남편과 아이가 죽는 것을 보고, 정신이 나가서 누추한 옷으로 헤매다가 부처님 옆을 지날 때, 부처님이 "멈추고 이리 와서 앉아라." 했을 때 그 여인은 정신을 찾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왜? 원래 그러니까요, 마치 밥 먹는 것처럼 습관화 돼있지요. 어떻게 생각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분별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하고 생각하는 것을 개념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생각이지요. 어쨌든 생각이 한번 딱, 부서지는, 이것을 체험하면 그렇게 많이 생각했던 것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어리둥절하고 이것이 확 드러납니다. 아, 이것!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도 쉬운 것입니다. 아무것도 어떤 수행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아버지를 아는데 무슨 수행이, 무슨 생각이, 어떤 말이 필요합니까? 한번 딱보면 바로 아는 것이지요.

마하라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아이'라는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어느 날, 아마도 그 비유를 처음 듣게 된 한 방문객이  마하라지의 비유에 흥미를 느끼고 거기에 대해서 예를 들어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마하라지: 자, 그러면 시간이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온갖 개념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물은 어떻게 인식될 수 있나요? 사물을 인식하는 까닭은 사물이 공간에 일정 기간 동안 어느 일정의 부피를 갖고 당신이 그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충분히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다면 사물은 인식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사물은 사물일 수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현상이나 사건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의식 안에서 인지된 이미지가 꿈이나 신기루에서의 그것만큼이나 실제와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현상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아이라고 말하는 나의 뜻을 이해하겠습니까?

 

당신이 내가 말한 의미를 정확히 뚫어본다면, 시간이라는 고정된 배경을 바탕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이고, 그 잘난 지성을 붙잡고 진리를 찾는 것을 중단할 것입니다. 실로 찾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방해물입니다.

 

 

 

 

 선가에서는 망상을 토끼의 뿔, 거북이의 털, 석녀가 아이를 낳는다, 또 동산이 물위로 간다,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신다, 벽에 건 물병을 맞췄는데 물병만 깨지고 물은 남았다등, 그 외에도 많은 표현이 있지요. 이 모두는 망상을 가리키는 말임과 동시에 깨달음을 얘기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토끼에게는 뿔이 없지요, 거북이에게 털이 있습니까? 석녀가 무슨 아이를 낳겠어요? 또 산이 무슨 물위로 갈 수 있습니까? 강의 물을 어떻게 한입에 다 마셔요? 벽에 물병을 화살로 쏴 맞췄는데 어떻게 물병이 깨졌는데 물이 걸려 있을 수 있나요? 이것은 늘 당연하게 이 현상을, 눈에 보이는 것, 느끼는 감정,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육체를 실재라고 보기 때문에, 그게 망상이다는 것을 깨치기 위한, 마치 콩 타작하듯이 콩 한알이라도 남아있으면 안 되니까 야무지게 도리깨질 하는 말입니다.

 

항상 깨달음과 망상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동전을 우리는 잘 쓰지만 앞면과 뒷면을 구분해서 쓰지는 않잖아요. 처음에는 법이다, 실상이다, 법에 있고 싶고 망상을 덜하고 싶지만, 자꾸 공부하다보면 법상도 깨어지고, 있다 없다의 분별도 벗어나고, 법이랄 것도 없고 더 이상 법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 이 모든 게 법인데, 법 아닌 것이 없으니까요. 또 바꿔 말하면 이 모든 게 망상인데 법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상 속에, 꿈 속에 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망상 속에 살아도 망상인줄 모르고 실상 속에 살아도 실상인줄 모릅니다. 아는 것이 전혀 없지만, 어디를 다녀도 벗어난 것도 아니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냥 아, 오늘 많이 피곤합니다. 그래서 일찍 자야 겠군요. 지금 잠이 옵니다. 여기에 무슨 입을 댈 것이 뭐가 있습니까? 다만 잠이 오면 바로 자면 됩니다.

한 외국 방문객이 며칠의 강연을 참석하고 돌아가야 할 때, 마하라지에게 어떻게 하면 그가 근본 원리를 정돈된 방법으로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지 그것들을 알려주십사 간절히 청했다.

 

마하라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임신된 후 뼈와 살과 피 등을 가진 아기의 모습으로 자라난 물질적 정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는 결코 상의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미세한 부분에서 구체적인 형상까지가 대부분 우연히 주어진다는 것이 명백할 것입니다. 이런 당신은 '사실'이 아니며,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근본 원리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나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개개인은 하나의 현상으로서, 나를 인지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의 출현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과 형상을 가진 자신과 동일시하여 생긴 환상, 즉 마야의 힘이고 두 번째 근본 원리입니다.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도 없는 한갓 현상에 불과한 것이 '실체'로 간주되고, 실제로는 속박이 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묶였다고 생각하고 자유를 고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세 번째 근본 원리입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당신은 현시된 세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만약 현상들이 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지 않고, 3차원의 부피도 주어지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측정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어떤 것에 대한 인지는 물론 상상조차도 못할 겁니다. 모든 현상들이란 단지 의식 속에서 생각되고 인지되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근본 원리입니다. '존재감'이라는 이 나중의 상태는 육체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사실입니다. 육체가 그 생명을 다하여 의식은 존재함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최초의 상태로 녹아듭니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 , 어느 누구도 죽지 않습니다.  현상으로 속박되어져 있는 실체란 없으며, 그러므로 본체로서 자유롭게 될 필요가 있는 개체는 더욱더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말을 하더라도 이것 하나뿐 입니다. 처음부터 '참나는 누구인가?' 시작해서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고, 또 이 한가지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질문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이 육체다'는 사실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의 그 다음에 쏟아져 나오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 근본의 문제는 변동이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한 마디도 안했다고 하신 것은 모두가 금방 사라지는 방편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초기불교 경전을 보고 초기의 경전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있다던데, 그것 전부 말입니다. 인연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맞다고 부처님 하신 것 따라 수행을 하고, 따라서 먹고, 따라서 생각하면, 진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하나님 예수님, 모든 성자, 성인들을 똑같이 따라하더라도 이것 하나를 모르면 전혀 다른 곳에서 헤매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진리는 부처님에게,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모든 성자, 성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배고프면 밥을 찾게 하고, 위험한 상황에 부딪치면 해결점도 찾고, 무서우면 두려움, 화내면 성냄을, 기쁘면 행복감 모든 것을 느끼게 합니다. 얼마나 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 의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의 주인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발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임제스님 말씀대로 '늘  수처작주 입처개진', 자신의 발밑, 자기 자신인 이것뿐입니다.

 

방문자: 마하라지 선생님, 제게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저로서는 아

 

무리 애를 써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에 대한 책을 두 권 읽고 그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몇몇 스승들을 찾아뵈었는데, 한결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참자

 

유를 얻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아와 그 밖의 것들로 나누는 이원론을 가진 사람들은 '얽

 

매여 있다'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또 어떤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분들 말씀이 이

 

미 모든 사람은 항상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구속이란 도대체 있을

 

수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두 가르침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나뉜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제 가슴 속 깊은 곳에 콱 박혀서 저를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진짜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하라지: 내가 당신에게 "어머니 뱃속에 들기 이전의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인지할 수 없을 때의 그 '나'가 당신의 참된 모습입니다. 사실 참나는 현상 이전의 본체이며 시간과 공간 너머에 있으며 지각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개체적인 나는 항상 상대적이며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시적 존재에 불과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허상체입니다.

 

'나'는 절대적 독존입니다. 둘로 나누는 것은 의식의 속성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들러 붙습니다. 공간은 드러냄을 위한, 시간은 공간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머물게 하기 위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러한 개념이 없다면, 즉 공간이 없다면 객체를 어디서 볼 수 있으며 시간이 없으면 그것들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겠습니까? 자, 이제 의문이 풀리나요?

 

 

 

 

 

 이 책을 읽으면 진지한 구도에 대한 열정으로 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겠습니까? 노력 안 한 것도 아니고 온갖 것을 다 공부했는데, 또 성인의 말씀을 따르고 , 스승의 말씀을 따랐는데,,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같이 법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질문입니다.

 

선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 정리하자면 자승자박이라는 말이 있지요. 스스로 만든 끈으로 스스로 묶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모든 망상의 굴레를 가지고 힘들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니까, 오고가지도 못하고 주저 앉은 격입니다. 사실 이 때가 공부하기 제일 좋은 때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이런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밤송이가 목에 걸려서 뱉으려 해도 따가워서 안 나오고 먹으려고 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질문자처럼 말에 한번 넘어져야 합니다. 말에 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이것을 한번 체험을 해야지 알 수 있습니다. 미하라지 선생님은 지극한 비유로 서양인들에게 맞게 논리적으로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주시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명상에 잠기거나 지복을 체험하거나, 오직 봄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모든 말에 걸리게 됩니다.

 

 

분명하게 진리는 딱 하나뿐 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없어서 말에 걸리지도 않으며 모양이 없어서 바람에 걸리지도 않으며, 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하면서도 걸리지 않을 뿐더러,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법이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남기고 법이 걸리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자신이 걸리는 것 입니다.법에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자신, 이렇게 저렇게 법을 찾고 갈구하고 이러저리 헤매는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체험한 모든 스승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당신을 보지 않습니다.

 

왜? 오직 이것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것 하나뿐인데 뭐가 있습니까? 당신자체가 이것이고, 내가 이것이고, 모든 게 이것 입니다. 그렇게 이것은 너와나, 이것과 저것, 중생과 부처, 깨달음과 못 깨달음등등, 절대 나눌 수 없습니다. 오직 이것뿐이면 백 가지 말을 하든 이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고 백 가지 말들이 이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일체동관분 -  중생의 여러 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는 모두 안다. 왜 그런가? 모든 마음은 전부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이렇게 나오지요.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생각하든지, 어디에 가든지, 오직 이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쓰고 있습니다.

 

방문자: 마하라지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종종 "모든 현상은 환상일 뿐이다, 마치 영화나 연극처럼"아라고 하셨는데요......" 

 

마하라지: 그것도 보통의 영화가 아닙니다. 정말로 웃기는 코미디죠. 자, 여기 내가 내 집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캘커타에서 살인과 절도를 했다고 붙잡아가려고 한다 칩시다. 내가 설득력 있게 말하면 경찰이 사과를 하고 가지만,  우스운 것은 경찰관이 무서워서 진실을 밝히지도 못하고  잡혀간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는 구속이 싫다면 자유를 갈망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육체가 억지도 떠맡겨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오로지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어느 날 나는 죽을 것이고 따라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에서 정해진 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여러분은 스스로를 거기에 결부시켜놓고 고통을 자초합니다. 그러고는  '구속'이니 '자유'니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하라지 선생님의 말씀을 부정해보겠습니다. 인생은 연극이 아닙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게 확실한데, 연극이라뇨? 그리고 내 마음대로 다하고 있는데 왜? 정해져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은 선택이죠. 옛날에 어떤 프로그램에 개그맨 이휘재씨가 나와서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재미있게 봤는데, 인간은 무조건 선택이죠. 어느 것 중에 나한테 유리한 것,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그것을 선택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까? 선택된 결과를 보고 아, 내가 그 때 다른 것을 선택했었더라면 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죠. 그 마음, 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가만히 보면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변합니다. 하하,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도 있지요. 갈대, 갈대는 바람에 휘날리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죠. 바람에 이리저리, 완전히 날아가지도 않고 뿌리는 절대 뽑히지 않고 이리저리 거세게, 아니면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무엇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이리저리 왔다갔다, 인생은 연극이 아닙니다. 여기에 무슨 연기를 할 게 있고 정해져 있습니까, 갈대가 그냥 이리저리 바람이 부는대로 왔다갔다, 바람이 안 불면 왔다갔다하는 그 갈대는 없는 것입니까?

 

연기자가 없으면 연극도 없고 인생도 없습니다. 생, 로, 병, 사, 이게 연극입니다. 개념 자체가 연극이지요. 인간의 본성은 원래 그렇습니다. 구더기의 본성과 다르지 않죠. 예전에 음식물 쓰레기통을 깨끗하게 씻지 않고 음식이 조금 남아 있었던지, 여름이었죠, 서울에 2박3일 다녀오니, 하얀 구더기가 꿈틀꿈틀 음식물쓰레기통에 바글바글 했습니다. 어쩌면 이 육체인 인간의 본성은 벌써 프로그래밍화 되었지요. 그 때 그 때의 인연에 따라,,불교에서는 인과법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인간, 육체와 생각을 가진 본질,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고, 이런 말도 필요 없습니다. 개념인간이 아닌 다만 이 법의 본성, 이 하나를 아시면 모든 것을 다 알면서 단 하나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방문자: 진정 구속과 자유의 문제가 육체와의 동일시에서 비롯되었다면, 왜 이런 동일시가 일어납니까? 

만약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앟은 사람이나 모두 죽으면 육체는 다섯 요소로 분해되고 의식은 본성으로 돌아간다면 도대체 사람이 깨달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하라지:우선 근본부터 더듬어 나갑시다. 나타난 우주 전체는 의식에서의 나타남입니다. 의식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으므로 당신에게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몸이라는 심신구조체 또한 본체가 아니라 현상적 나타남이며, 그림자와 같이 본체의 투영일 뿐입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한다는 생각이 없다면, 모든 현상적 작용은 저절로 일어나며, 그 상태에서는 더 이상 구속이니 자유니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하라지 선생님은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십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않은 사람이 똑같다면 누가 깨달으려고 하겠습니까? 맞죠? 왜 깨달으려고 하십니까? 거기에다가 선사들은, 특히 깨달았다고 추측이 되는 조사스님들,, 왜 깨달음이 없다고 하면서, 중생과 부처는 똑같다고 하면서, 더구나 망상만 하지 않으면 어렵지 않다고 하고서는 또 망상이 곧 실상이다고, 못 깨치면 밥이나 축내는 축생이다라고 하시고, 정말 헷갈리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은 왜 깨달음에 관심을 많을까요?  왜?, 왜?, 아, 저는 깨달음이란 말도 생소하고, 그냥 책을 읽고 (선으로 읽는 금강경- 김태완 저) 이 분이 말하는 '이것'이 뭘까? 그냥 궁금했을 뿐이였습니다. 그게 바로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왜 깨치고 싶어합니까?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게 열쇠입니다. 그게 바로 깨달음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까 나도 나서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분명한 이유가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없다는 것은 갈증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목마르지도 않는데 물이 눈앞에 있다한들 물에 눈이 가겠습니까?

정말 목마르면 사막에서도 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블로그에서도 글을 썼는데

팔공산 꼭대기에 올라가면서 너무 목이 말라서

내려오는 어떤 아저씨의 먹다남은 물병을

가로채서 마신 적이 있었지요.

 

목이 마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물을 마시겠습니까?

그 아저씨가 입대고 몇 번이고 나눠마셨을 그 물을,

그 조금 남은 물을,

 

그런데 이 갈증을 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습니까?

그건 절대 아니죠.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것을 깨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법에 대한 환상, 선지식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단지 이 모르는 마음 하나로, 깨달았거나 깨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왜 깨닫고 싶어하는지, 깨닫고 싶어하는 이것에만 관심을 두십시오.

 

마하라지: 여러분은 아마 시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과거에 태어났고, 지금 이 순간에는 현재에 있으며, 다가올 미래를 향해 늙어가고 있다고,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현재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란 본래 없으며 과거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는 희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여기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만이 영원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줄 말은 '현상적 존재는 곧 시간이다'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자신은 지속, 즉 시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자아는 심신구조체로서 항상 변하고 움직입니다.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도 깨어남을 향해 움직입니다. 의식의 본성이 움직임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질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대상으로서 인지되는 시간적 지속이 탄생한 것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빛과 어둠, 음과 양, 선과 악, 상대개념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런 상대적 개념도 전체성에 의해서 하나로 통합됩니다.

 

절대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든지, 그것은 오직 개념적이고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며 참나의 본성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성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영원합니다. 당신은 이 글을 보거나 읽는 사람이고, 영원하다는 뜻을 보면 어떤 현상이나 모양 따위가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한 상태라고 합니다. 말로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쉬운 말이지만 생각으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지요. '당신'할 때 당신은 곧 바로 '나'입니다. '당'할 때 벌써 나 자신이 드러나 있습니다. 물론 당신과 함께, 동시에, 즉각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하다, 영원하다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있어서 변하지 않은 그런 상태를 말할 수 있으니까, 순간적으로 개념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당신'할 때 '당'을 못 알아차리면 이 말은 망상입니다.

 

당신은 영원하다, 이런 말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케하는 말입니다. 아무런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영원하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입니까? '당신'에 속고, '영원'에 속고 대단한 사기꾼의 말입니다. 사기꾼인 것을 알면 바로 당신은 그 말에 속지 말아야 하는데, 눈앞에서 빤히 보면서 속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항상 이 육체,나와 남을 구별하는 이 육체가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있으면 상대방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회사가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지구가 있고, 태양이 있고 우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를 이어주는 수많은 인연들, 다시 바꿔 말하면 '나'가 없으면 그 많던 것들이 싹,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거지요.

 

이 모든 말은 자신이 '자신'이 뭔지를 깨치지 않으면 모두 헛된 말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시간? 과거 현재 미래?, '나'가 없는데 누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합니까? 개념적인 '나'가 있다면 나는 과거에는 아기였고, 현재는 아줌마이고, 미래는 할머니가 될 것입니다.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오로지 개념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개념이 생기기전, 내가 존재하기 전에 당신은 벌써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영원하다라고 하기도 하고, 또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기도 하고, 불생불멸이라고 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아서 '공'하다 하기도 하기도 하고, 존재해서 오직 '식'뿐이다라고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붙이든, 이것 하나가 다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려낸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마치 사진을 찍어서 사진을 보고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사진을 찍고 있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에 벌써 알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의 수많은 기억중에 한 장면일 뿐이라는 것을, 지금 실제 당신이 아닌 것을, 이 사진이 정말 당신입니까? 그러면 그 수많은 사진, 장면속에서 어느 게 진짜 당신의 모습입니까? 지금

여기서 바로 사진을 보는 게 당신이지요?

 

오로지 이것뿐이면 이것이다라고 할 때에도 이것이 아니다 할 때에도 이것이면서 이것이 아니다할 때에도,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도 안 맞을 수도 있고 동그라미 밖으로 나와도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 속에 들어가도 사진 밖에도, 칭찬을 받거나 두들겨 맞아도, 이것은 온갖 인간사에 물들면서도 전혀 물들지 않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한 유럽 여인이 마하라지를 찾아왔다. 그녀는 <아임 앰 댓> 책을 입이 닳도록 칭송하며 직접 친견하여 마하라지에게 존경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커다란 복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구루들이 그녀의 영적 진보의 증거로서 인정했던 몇 가지 명백한 체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체험들을 마하라지에게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하라지는 얼마 동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마하라지:

누가 그런 체험을 했는지 말해보세요. 그 체험들로 하여 누가 즐거워했습니까? 당신은 그 체험들 속에서 정확히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긴 영적 훈련 기간에 나라고 생각했던 실체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은 마치 좋은 옷과 장신구를 뽐내는 다섯 살짜리 아이와 같습니다. 세 살 이전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옷이나 장신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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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나의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나를 방문하고자 한다면 한 가지 경고를 하겠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당신이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얻었던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 자신조차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하세요. 나를 계속 방문하게 되면 깨달음을 구할 '나' 나 '너'가 없고, 참으로 깨달음이라 할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저는 마하라지 선생님을 뵌 적이 없지요.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 옛날 사람, 현재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 어떤 누구든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진리는 똑같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누구랄 것도 없고, 도대체 이름을 붙일 만한,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실제처럼 느껴지지만, 당신이 이 의식이 없다면 자판을 못 치겠지만 기계의 역할로 자판을 치더라도 하나도 모를 것입니다. 의식이 없다면 자신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이 모든 세계는 '나'의 의식에 의해 드러나는 것일뿐, 어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 마하라지 선생님은 이것을, '나는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늘 시간 공간을 떠나 존재하면서, 시간 공간을 떠나지 않고 존재하면서, 오직 이것이면서 동시에 온갖 일들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치 물이 여러 가지로 모양으로 담기고 사용되지만 오직 한 개의 물일뿐인 것처럼, 이 물에 무슨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깨침의 비유를 이야기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물을 먹으면서 살고 있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물을 생각해보니 물이 엄청난 역할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사는데 주,식,의 어디에도 물이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물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해봤는데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조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물을 먹어보니, 여전히 우리가 먹던 맹물임을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것이 맹물이요! 나는 그것을 알았소." 이렇게 고함치고 기뻐하고 소문을 낼 일이 있겠어요? 그러면 이상한 거죠. 다른 사람들도 여전히 맹물을 먹고 있거든요.  아니 물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깨침은 그것과 비슷합니다. 깨치고 보면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랑할 수도 없고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 줄 수도 없고, 하지만 여전히 누구에게나 모두에게 많지도 적지도 않게 완전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를 깨치면 됩니다. 오직 이것뿐입니다. 깨치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아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이것을 체험하면 모든 것 속에 깃든 진리가 한 순간에 딱 드러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이것 하나로 다 들어옵니다.

 

25세쯤 되어 보이는 미국 청년 한 명이 삭발한 모습으로 마하라지를 찾아왔다. 자신을 방랑하는 승려라고 소개하면서 3년 정도 행자 생활을 했노라고 했다. 마하라지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았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방랑하는 것으로 과연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찾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마하라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찾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아나? 신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네가 정말 찾고자 하는 게 뭔가?

 

방문자: 인생이 제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덧없음을 압니다. 그러한 것들이 저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느껴왔습니다. 그러니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진정으로 실재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이것만이 제 바람입니다. 

 

마하라지: 자네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 실재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방문자: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저의 시도가 정말 우습게 보이는 일이든가 혹은 제가 아주 희망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마하라지: 우습거나 절망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듣는 그것은 무엇이지?

 

방문자: 접니다. 여기 앉아서 지금 선생님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말입니다.

 

마하라지: 태어나기 전의 자네는 무엇이었나?  그 상태에서 어떤 필요나 바람이나 욕구가 있었을까? 실재에 대한  것이든 자유나 해탈에 관한 것이든 그런 바람이 있었을까? 자네의 그 이전은 일체요, 절대적 현존이요, 상대적 부재의 상태야. 그것이 자네가 바라는 진실한 모습이요 본성이지. 이것의 나툼이 의식이고, 내가 있음이며,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지. 그러나 태양의 반영이 태양이 아니듯 그것이 절대적 현존일 수는 없는 거야. 이러한 의식의 현존을 자네라고 하는 거야.

 

 

 

 

 

우리는 현존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말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여기에 없었던 적이 있었는가? 늘 지금 여기 있잖아요. 지금 여기 말고 다른 곳을 갈 수가 있어요? 자, 그럼 가봅시다. 저 멀리 미국으로, 저 우주선을 타고 화성을 가더라도, 항상 여기지, 다른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하는 겁니다.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어요. 당연한 거죠. 애써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우리는 벗어났다고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또 항상 여기에 있는데 다른 곳에 가서 번뇌하고 있다고 망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곧 바로 깨치면 이 자리를 아는 것이고, 또  임제스님은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고 하셨죠. 어디를 가든지 자기가 서있는  곳이 진리다, 진리는 숨길 곳이 없습니다. 숨겨서 정말 찾아오는 사람에게 귀중하게 하나씩 주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고 또 줄 수 없습니다. 그냥 모두가 이것뿐이니까, 그래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이런 말도 있지요. 또 하나가 여러 개이고 여러 개가 하나다,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 말에 법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 모든 말은 방편으로 하는 말이지요. 못 알아들으면 그냥 넘어가야 합니다.

 

태어나기 전의 당신은 무엇입니까? 알 수 있습니까? 알 수가 없지요. 난 이번에는 어떤 아빠의, 어떤 엄마를 택해서 언제 여자아이로 태어나야 겠다 이렇게 하고 태어났습니까? 이렇게 태어나면 좋겠지만, 우리는 한번도 태어나고자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던 빵에서 곰팡이가 생기고 벌레가 생기고 그리고 날아다니고, 더러운 물에서 유충이 생기고 모기가 돼서 사람들을 괴롭히죠. 애~앵, 한 여름에 모기, 덥기도 한데 잠도 잘 안오는데 모기가 귀에서 애앵앵 하면서 돌아다니면 아, 힘들죠.

 

전생, 업, 그런 것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무슨 전생이 있습니까? 죽어서 불생하는, 영원한  어떤 천국, 끝없이 행복한 사랑, 이런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 청년이 방랑하는 것처럼 모두 자신을 놔두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고, 아니 분리 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하게 이것이면서 늘 이것이면서, 늘 이 하나만 하고 있으면서, 우리의 생각이, 늘 구별하고 분별하고 특별하게 의미를 붙이고, 어떻게 보면 똑같은 것을 이름만 서로 다르게 붙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자꾸 하나인 것을  따로 줄을 긋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자기 하나인 것을 줄을 긋고 다르게 표현하면서도 아예, 다르다고 생각해버리는 게 우리죠.

 

육체로 보면 여자 남자, 늙은이 젊은이, 아이, 아기가 있지만, 이것 하나 뿐입니다. 모양을 구분해서 이것, 저것, 그것으로 나누지만 딱 이것 하나 뿐입니다. 구분하지 않으면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젊은이, 아이, 아기도 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것도 없도 다만 이 하나입니다. 구분하지 않으면 여자도 이것이고, 남자도 이것이고, 젊은이도 이것이고, 아이도 이것이고, 아기도 이것이며, 이것도 이것, 저것도 이것, 그것도 이것, 모든 게 모두 다만 이것 하나입니다. 

 

아무리 진리가 원만구족한 어느 선지식도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정말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정말 모르거든요. 여기에서도 상대적 부재라고 하잖아요. 상대적인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정말 알면 모르는 것이고 그러나 모르면 또 어두운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이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오늘도 지금 이것일 뿐입니다.

마하라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여러분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나의 상태를 여러분들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요.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모든 존재가 근원이 절대로서의 '나'입니다. 본래의 나는 이 육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태어났겠습니까? 그 자체가 본래 각성인데 어떻게 다시 각성을 알겠습니까? 나는 독립된 어떤 '것'이 아니며 인식되어야 할 어느 것도 아닙니다. 

 

절대적 근원으로서 나는 인식할 수 없는 실체이지만, 상대적 현상으로서 나는 앎의 대상이 됩니다. 모든 현상이 완벽하게 부정된 뒤에 남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인 '나'입니다.

 

의식이 시비분별하는 개념화가 정지될 때, 당신의 모든 것은 내가 됩니다. 개념화를 멈추면 당신이 곧 나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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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본성을 안다면, 이것을 체험하면 '나'라는 것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껏 믿어왔고 의지해왔던 '나'라고 생각해왔던 육체적인'나'는 없어집니다. 그것은  반야심경에도 나오듯이 절대 온갖 눈코입귀느낌, 직관적인 육감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것이 없기때문에 마하라지선생님은 죽지도 않았고 지금 여기에서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마하라지 선생님뿐만 아니라 '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누가 설법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거사님이 말했습니다. 설법을 감히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법을 체험하고 법이 분명하면 설법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못하는 것은 아직도 완전히 깨치지 못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법은 모든 것에, 어디에도 비추는 햇살처럼 자연스럽고 또 흐르는 물처럼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당연한 것을, 아직 법상을 가지고 있으니 막히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법을 깨치든, 못 깨치든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망상땜에 법의 자유로움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법에는 망상도 없고 상대적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이법', 이원성이 없다고 하지요. 오직 법뿐이기 때문에 법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식이 시비분별하는 개념화가 정지될 때' 이런 말도 분별망상을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겠지요. 몇 번을 말하지만 생각을 어떻게 멈출 수 있습니까? 의식을 멈출 수 있습니까? 오랜 수행으로 의식을 잠깐 멈출 수 있겠지만, 그건 생각을 인위적으로 안하는 것이지요. 금방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법입니다. 법은 늘 금방금방 생생한 것입니다. 활구, 사구가 있죠. 법은 언제든지 활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생각을 안하면 법이 있고 생각을 하면 법이 없다' 이 말을 누가 지금 하고 있습니까? 말에, 뜻에 따라가지 않으면 생, 각, 을, 안, 하, 면, 법, 이, 있, 고, 생각을 하면 법이 없다, 누가 합니까? 지금 하고 있잖아요. 말에, 뜻을 따라가지 않고 누가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중생은 말에, 뜻에 따라가고 부처는 말에 뜻에 따라가지 않는다기 보다는, 마치 개는 무엇을 던지면 일단 무조건 좇아가는데 사자는 그 던지는 사람을 무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거지요. 이게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수백가지로 법을 못보도록 멀어지게 하는거지요. 어떤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모르면 그렇게 끄달려 가는 겁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고 같은 말입니다. 말에 속지 마십시오. 말에 속지 않으려면 역시 체험을, 한번 계합을 해야 합니다. 책상을 한번 쳐보십시오. 법은 어디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마하라지의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이고 그대로 당신의 본성입니다. 

강의 도중 마하라지가 정기적인 방문객 중의 한 사람을 지적하여 자신의 말에 대한 방문객의 개인적 반응을 묻는 것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바로 그날 일어났다. 마하라지는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주 박식한 사람이고, 꽤 오랫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집중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내 말을 들어왔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이 뭔지 한번 말해보세요."

 

상당히 오랫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마하라지는 그 대답에 특별히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대답을 하려고 눈에 띄게 애를 쓰고 있었지만 뭔가 딱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내(발세카)마음속에 하나의 대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무언가를 찾는다는 생각이 계속되는 한 깨달음은 일어날 수 없다.'

 

 

 

 

 

 

공부인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아직까지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또, 역시 이것을 체험한 사람도 다른 더 좋은, 아니면 더 깊은 공부는 없을까? 하고 찾는다면 반드시 자신의 공부가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알아야 됩니다.

 

법은 완전하여, 지금 바로 우리가 쓰고 있는 거죠. 아니 쓰지 않는다고 해도 맞습니다. 법에는 쓴다, 안 쓴다, 이렇다 저렇다 입을 댈 곳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바로 완전하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찾을 게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계속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부족합니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남습니까? 우리집 아이가 아직도 자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여기에 무엇이 문제가 있습니까? 많은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책상을 두드려도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책상에도 손에도 법이 있을 뿐입니다. 단지 이것일 뿐입니다. 단지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서, 머리를 굴리니까 한마디도 못하는 거지요.

 

법이 분명하면 무슨말을 하든지 걸림이 없습니다. 자신이 분명하면 됩니다. 남을 얘기할 것은 없지요. 자신이 분명하지 않으니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듣고 이런 저런 판단을 합니다. 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전합니다. 단지 이러쿵 저러쿵하는 자신이 문제입니다.

 

반드시 법을 공부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단지 이것 하나뿐인데 그것이 뭘까? 모르는 그 마음으로,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러다보면 정말 알고자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그런데도 모르니까 자꾸 법문을 듣게 됩니다. 그래도 모르죠? 답답합니다. 답답해서 또 법문을 듣습니다. 모든 할일을 다하면서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법문을 듣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문득 와 닿을때에는 법문의 말에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초점이 맞으면 전체로 이 하나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엄마처럼 너무도 쉽게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깨친 사람이나 못 깨친 사람에게나 똑같이 명심해야 하는 말입니다. 대혜스님의 말씀처럼 깨친 사람은 법에 점점 익숙해져서 단지 무엇을 하든 이 하나일 뿐이고 아직 계합하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이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찾을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한 방문객이 보통 때처럼 "내가 알고 싶은 것은......"이라고 영어로 질문하자, 마하라지는 통역되기도 전에 'I'라는 단어을 듣고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I 나- Who누구?"라고 농담을 하고는 다시 마라티어로 이렇게 말했다. 

 

마하라지: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말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라는 개념을 빼놓고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어떤 자율적인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한, 참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형태를 가진 대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그저 의식 속에 나타난 것으로 볼 뿐이며,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 이렇듯 객체가 없는 것처럼 주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합니까?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깨어남이란 이 현상세계를 지각하는 개별적인 인식자는 본래 없음을 아는 것이며, 모든 현상의 목적과 본질은 단지 현상을 바라봄, 다시 말하면 이것- 지금- 여기 안에서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랬지만 드디어 나왔군요. 사실 이 책의 소제목 뒤에는 항상 위파사나하시는 무위해공님, 사실 이 분이 감수하고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개의치 않고 글을 쓰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이르면 위파사나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위파사나에 대해 잘 모릅니다. 단지 명상하면서 한 곳을 계속 바라본다 이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해설에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지만 부처님이 6년 고행 후 보리수 밑에 앉아서 위파사나 명상을 통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법에는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명상을 해서 (특히 인도의 선지식인) 이것을 체험하더라도 결국 명상에 걸림없이 법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마하라지 선생님도 처음에는 명상을 하셨지요. 그러나 단연코 나중에는 그것이 하나의 방편임을 설하고 있습니다.

 

객체가 없는데 주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집중해서 볼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봄'이 있다는 말은 본다는 말에 속지 않으면 오직 이것뿐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면서 주체이고 객체이고 이것은 봄이 있으면서도 없으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말은 개념이 담겨있습니다. 법에는 개념이 없습니다. 개념으로 당신을 보지 않습니다. 법으로 당신을 보니까 당신은 나와 똑같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구분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고 떨어질 수없는 오로지 하나입니다. 모습으로 볼까요? 모습으로 본다면 당신의 나의 모습입니다. 왜? 이것만 존재하니까, 이것뿐이니까, 작용이라는 말에도 속지 마십시오. 작용이란 두 개 이상이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작, 용, 이것뿐입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 하나고 어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 하나뿐입니다. 지금 밖에 차소리가 들려 옵니다. 내가 듣고자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들리고 오토바이 소리도 나는군요. 이것입니다. 목이 칼칼합니다. 헛기침이 나옵니다. 억지로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법이 이 하나를 가리켜주려고 당신 눈앞에 있습니다.

 

또 눈앞에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것은 귀에 가면 들린다하고 입에 가면 말한다하고 코로 가면 숨쉰다고 하고 눈으로 가면 본다고 합니다. 하루 24시간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떠날 수가 없습니다. 보는 게 이거고 들리는 게 이거고 말하는 게 이거고, 무슨 말을 하든, 오로지 이것 하나뿐입니다.

 

방문객: 인간의 참된 실체를 늘 의식하기 위해서 붙잡아야 할 무엇이 있습니까?

 

 

마하라지: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붙잡을 그  '무언가'를 원하다! 당신의 일련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까?

실체로서 내가 존재합니다. 비록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잠시라도 나는 실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현상으로서의 나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대상들은 의식 속에서의 나타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거울에 비친 상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의식 속의 투영일 뿐 다른 어떤 실체성을 따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곧 의식입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의식은 객관화의 과정을 밟습니다.

 

상대적 현시, 즉 세상은 절대의 드러남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는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실체가 없는 것은 여러분의 잘못된 인식, 즉 어떠한 특정 현상과 자신을 동일시한 그릇된 인식입니다. 그림자란 실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실체가 아닙니다.

 

 

 

 

비록 많은 말을 하더라도 딱! 이 한 가지, 이 한 개뿐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로봇처럼 마치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것처럼 다 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그것보다 더 정교하게 다 한다 말이죠. 한다는 생각도 없이,이것이, 이게 뭡니까?

 

손을 흔들면, 손 말고, 흔드는 것말고, 흔들었다 안 흔들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놈, 이것이 뭡니까?  손으로 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소리도 듣지요, 아니 보고도 있네요. 그러니까 시간 공간도 없어요. 지금 이게! 마른 똥막대기다,개에게는 본성이 없다, 삼서근, 무슨 말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선생님이 이런 비유를 들었지요. 그 때는 테잎으로 들었는데, 요즘은 CD로 깨끗하게 나오지요.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인형극을 할 때 인형이 움직이는 것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런데 그 쉬운 문제를 아무도 대답을 못하는 겁니다. 누가 움직이고 있습니까? 계속 물으시는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이만큼 사람들은 관념속에 있습니다. 관념을 깨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누군가 만든 개념일뿐인데 말이죠. 엄마, 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듣고 연습하고 경험을 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머릿 속에 저장된 많은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그러나 깨치면 더 이상 허망하지 않습니다. 허망한 것을 찾으려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인형이 춤을 추는데, 말을 하는데, 누군가 있나고 보려고 하면 아무도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말이죠. 뭘까요? 저는 모릅니다. 다만 인형이 움직이기는 한데, 다 하는데 그것이 진실이 아니다라는 것, 동시에 진실이다는 것에, 아니 그런 말도 필요없이 그냥 생각없이 명백해서 속지 않을 뿐입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면 더 이상 그게 뭔지 찾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이것뿐이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한번 이게 분명하게 나의 존재임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방문자: 지난번에 왔을 때 선생님의 말씀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선생님께서는 "되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내가서 있는 길이며 다른 길은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 가슴에 깊이 와닿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 특히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터무니없는 숱한 생각과 개념에 뒤엉킨 채 속수무책인 저 자신을 보고 말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보석을 선물 받았으나 그것을 곧바로 잃어버린 기분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라지: 자, 그러면 이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봅시다. 온 길을 되돌아가려는 그 '자'는 도대체누군가요? 당신이 그림자를 좇아 아무리 멀리 간다 하더라도 좇아가는 한 그림자는 항상 당신 앞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되돌아가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분별 짓는 의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로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똑같은 말씀을 할 수가 있을까요? 이것만 보더라도 진리는 역시 하나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선방에서 좌선을 하든, 교회에서 기도를 하든,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든, 절에서 불상 앞에서 절을 하든, 도대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잘 보십시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유위행을 해서 억지로 해서 자신이 법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여기에 무슨 다른 법이 있습니까? 좌선하는 게, 화두 잡는 게 이것인데 어떤 다른 게 있습니까?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자신이 하느님인 것을 모르고 저 멀리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찾고 갈구하는 게 문제지, 여기에 다른 법이 있습니까? 성당도 그렇죠? 절도 그렇지요? 보시함에 돈을 넣으면서 자신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게 문제지, 절하는데 무슨 다른 법이 있습니까?

 

단지 이 하나에서 모든 일을 다하고 단지 이것뿐인데, 이 자리에 있지 못하니까 자꾸 다른 곳에 가서 망상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지, 사실 이 육체적 자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잖아요. 원래 이 자리에 있었고 원래 이 자리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벗어나지도 못하죠. 어떻게 벗어납니까? 자신의 눈앞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항상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되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왜? 처음부터 그 자리이니까요. 나온 적이 없는데 어디로 돌아갈겁니까?  나왔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더 나은 완전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꾸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 육체가 아니죠. 이 생각도 아닙니다. 왜? 이 육체는 변하고 결국에는 죽지요. 이 생각도 수시로 변하고 수시로 제 자리에 있질 못하지요.

 

법은 절대불변입니다. 불생불멸입니다. 오직 이 법만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법과 따로 떨어진 망상이 아니라, 당신 그대로가 그 자체로 법일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위를 하거나,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하거나 갈고 닦아서 법을 체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한 순간에 바로 탁! 이렇게 알아차리면 그러면 그 뿐입니다.

 

방문자: 선생님께서는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생각을 삼가야 한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각이 다 피해야 될 개념화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의 대답은 아주 적절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시의적절하여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떤 생각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까? 

 

 

마하라지: '나는 존재한다'라는 바로 그 첫 생각은 확실히 하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마음으로부터의 논증이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 뒤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의 바탕으로서, 선 개념의 생각입니다.  분리되고 이원론적인 의식 상태로 모든 것을 시비하고 분별하면 살아가는 삶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모든 행위의 주체로 착각한채 가짜 실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이고 실재적인 생각은 절대가 스스로를 나타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즉각적이고 순수한 생각은 아무런 구속도 없는 순수한 행동을 낳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리의식이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똑같이 깨달은 사람과 밥을 먹으면, 이제껏 자기가 먹어왔던 식으로 밥을 먹습니다. 만약 깨친 사람이 몸에 좋지 않다고 간장을 먹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은 아, 깨치면 간장을 안 먹는 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항상 이제껏 살아왔던 대로  자신과 남이 항상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늘 상대적으로 보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깨친 사람은 절대 따로 보지 않습니다. 상대방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말도 똑같습니다. 깨친 사람의 말은 그냥 나오는 말입니다. 생각으로 내가 이렇게 말해야 되겠다고 그 말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말이죠. 깨친 사람에게는 원고가 없습니다. 그냥 즉설, 바로 말이 나오는 거지요. 아, 저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꼭 해줘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남지도 않고 머리에 남지도 않고 흔적이 없습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는 대로 그냥 이것일 뿐,  그의 손에는 잡거나 아무것도 안 하거나, 빈 것도 아니고, 꽉 찬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이것을 가리켜주는 것이지요. 말을 따라가면 똑같이 말하고 행동을 따라가면 똑같이 행동하지만 그에게는 말과 행동이 전혀 불일치 하더라도 이것이고, 같아도 이것이고, 따로 따로, 각각 수많은 일을 하더라도 단지 이것일 뿐입니다.

 

애써서 근원적 생각과 지엽적 생각이라고 나누지만, 차안과 피안으로도 나누지요.  당연히 모두 개념적인 말입니다. 이것 하나를 드러내보이기 위해 나누지만 깨치면 원래 전체로, 절대 나누어지지 않고 절대 떨어진 적도 없이 늘 항상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당신과 나는, 한 몸이고  한 마리의 벌레이며, 손가락 세우면 이 한 개의 손가락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하라지: '사랑'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일종의 '필요'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상대가 더 이상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랑은 무관심으로 변하게 되고 나중에는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겁니다. 특히 서양에서는 그런 이유로 쉽게 헤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방문자: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명백히 사랑에 대한 협소한 견해입니다. 확실히 비개인적인 우주적 사랑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마하라지: 아!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를 명확히 합시다. 우리는 지금 두 사람 사이의 상대적 관계인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 아닌가요? 그 둘은 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갖는 감정입니다. 그러한 관계는 주관-객관이라는 이원적 현시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전혀 객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 관점에서 사랑을 말하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랑-미움의 관계라는 것은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겁니다. 대체 누구 사이의 관계란 말입니까?

 

방문자: 하지만 마하라지 선생님, 기독교의 위대한 성인인 성 요한도 "신은 사랑이다." "사랑에 머무는 자는 신 안에 머무는 것이면 신이 그 안에 머문다"는 말을 했으며, 그 또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마하라지: 나는 성 요한이 지혜로운 이였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그가 말한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명확히 이해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this- 여기here- 지금now,  이 생명의식이야 말로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우주도 없고 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얼마나 들뜬 말인지, 첫 사랑이 먼저 생각이 납니다. 남편도 생각이 나고,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네요. 그리고 종교적 사랑까지, 순서대로 한다면 Platonic love - physical-platonic- eros 이렇게 나눌 수 있나요? 참 나누는 것도 애매하군요. 오늘은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에 대한 오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 모든 인류애, 우주에 대한, 신에 대한 사랑,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사랑만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럼 존재한다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서 어떤 것이 꼭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혜처럼, 사랑도 하나의 개념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못보는 겁니다. 같이 붙어다니고 똑같이 행동하니까, 이 개념이 다 한다고 생각하죠. 

 

 그 하나의 개념이 온갖 사랑을 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개념이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이 태어나고 나왔습니다. 맞죠?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비개인적인 우주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묻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나는 존재하면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우주적인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망상하는 겁니다. 이것, 항상 말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에 따라가지 않고 의미도 없고 단순한 이것을 모르고!

 

이 세상 모든 일을 가져와 보십시오. 당신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일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없습니다. 당신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일도 없는 거지요. 텅 빈 공간! 참으로 어리석은, 눈뜬 봉사같은 말입니다. 단지 이것, 눈 하나 깜빡이는 일입니다. 당신도 눈을 깜빡이고 있습니까?

방문객중에 유럽 베단타 협회의 임원이 왔다. 마하라지는 관심을 갖고 오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말해달라고 제안했다. 

 

방문자: 글쎄요. 서양인들은 대체적으로 육체의 건강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먼저 요가에 대해 말해줍니다. 요가는 신체적 인내의 기술을 익혀 고도의 정신집중을 이루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가의 아사나 과정을 거치고나면, 계속해서  '참나'는 육체가 아니며 육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라고 말해줍니다.

 

마하라지: 그 말은 두 가지 의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를 인식하는 출발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육체 안에 자신이나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둘째는 과연 가르치는 사람이 참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가?

참나가 육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자, 말해보세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방문자: 저는 육체가 아니라 의식의 현존감인 듯 싶습니다.

 

마하라지: 간단히 설명하면 육체는 음식물의 정수로 만들어졌고 또한 음식물에 의해 유지됩니다. 단맛이 사탕수수의 성질이듯이, 당신이 언급했던 그 현존의식이야말로 육체, 즉 음식물의 정수입니다.  육체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의 구성재료가 쇠락하여 결국은 육체가 죽을 정도가 되었을 때 생명과 의식 또한 육체로부터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방문자: 정말로 의식이 사라진다는 말인가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마하라지: 육체가 없는데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겠어요? 의식은 육체 없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단지 현상으로 드러난 육체가 있는 동안에는 진정한 당신은  '존재함'입니다. 그런데 의식이 저절로 드러나기 이전에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저절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육체를 받겠느냐고 누가 당신과 사전에 상의한 것도 아니고 당신의 부모 역시 특별히 당신을 아들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몸-마음의 상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당신은 존재했다기 보다는 부재했던 것이 아닐까요?

 

방문자: 제대로 이해가 안  되는군요.

 

 

 

 

 

 

진리는 머리로 헤아려서는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항상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같은 말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밖에는 비가 오지만

당신은 밖에도 안에도 없고

오로지

당, 신, 은, 누, 구, 입, 니, 까?

이것만이

당신의 생명이요, 본성이며, 정말 눈물나게 알고 싶은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은 허공이면서 존재하고 부재하기도 하고

부재하면서도 모든 곳에 다 존재합니다.

 

원래부터 당신이 나였고 내가 당신이였으며,

모든 만물이 하나라도 나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것은 정말 냄새나는 똥같은 말입니다.

지금도 막 똥 밟았습니다.

마하라지: 지식을 구하러 여기에 온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지식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어서, 비록 그들이 진실하다 하여도 내가 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합니다. 심지어는 가르침의 미묘함과 깊이를 헤아린 듯한 사람들도 실제 의미는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내 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만 있다만 나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족합니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몇 사람이나 그 뜻을 이해할까요.

 

1. 나는 현상적으로 부재하므로 항상 존재합니다. 그리고 내가 개체적으로 부재할 때에만 나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보다 명확 하기 위해서, 나는 항상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렇게 형상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곧 명백한 나의 없음입니다.

 

2. 어느 것도 아닌 나는 모든 것입니다. 나는 개체적 자아가 아니지만 우주 전체가 나 자신입니다.

 

 

* 좀  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계속해서 9까지 나오는데 2개씩 나누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현상적으로 부재하므로 항상 존재합니다.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이 육체,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진실하지 못합니까?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며 또 수시로 변하죠. 한 가지 예만 들어도 태어나서 이름을 가지면 그게 '나'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우리가 이 블로그만 해도 이름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면 진짜 자신의 이름과 이 블로그의 이름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나'라고 생각하고 이 블로그의 이름은 수시로 변하는 아무 상관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요. 이렇게 이 이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이름이잖아요. 우리가 태어나서 배우고 익힌 모든 개념들은 짜 맞춰진 퍼즐과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위해 만든 것이지요.

 

법이라는 것을 그 퍼즐 한 조각을 떼어내는 것입니다. 그 한 조각 떼기가 그렇게 힘들까요?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허물어져, 그 퍼즐이, 원래 그 그림은 이 퍼즐 한 개, 이 하나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퍼즐을 맞출때에는 한 조각이라도 없으면 정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힘들게 꼭 버티고 있는데, 막상 굴러떨어지면 뜻밖에 모든 퍼즐이 한 개의 퍼즐로, 자신으로 완전하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힘들게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더 많은 퍼즐로 더 다양한 퍼즐로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고 또 무너지면 다시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대로 둬도 대고, 정말 자유자재합니다. '나'라고 따로 떼어낼 게 없는 게 부재고, 전체인 이 하나가 존재입니다.

 

그래서 2번 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도 아닌 나는 모든 것입니다. 나는 개체적 자아가 아니지만 우주 전체가 나 자신입니다.

말을 따라가면 또 그림을 그리게 되겠지요. 말을 따라가지 않는 방법은 제가 외계인이 하는 말을 하거나, 저 아프리카 깊은 원주민들만 아는 말로 하면, 말뜻을 모르겠지요. 자, 합니다. "오료옹 ㅇ야이 삐~~야!"

 

하지만 말의 뜻을 모르더라도 이 말을 듣는 이것, 보는 이것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는  이 하나입니다. 이것을 바로 아십시오. 지금 11시 20분입니다. 바로 보여드립니다. 지금 눈이 따갑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게 뭐 있습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3. 너 you라든가 나me라든가 하는 것들이 모두 부정된 후에야 나I (진아)만 남게 됩니다. 

 

4. 당신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로 나의 본래면목인데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곧 당신의 본래면목인데 말입니다.

 

5. 나는 태어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구속 받은 적이 없는데 어찌 해방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6. 개체적 존재가 어떻게 절대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상대적으로 만드는 모든 개념화를 포기하고 더이상 상대적이 되기를 그만둔다면 의식은 자기 자신을 개체성으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이 한번 무너져야 됩니다. 퍼즐얘기를 어제 했지요? 한개의 퍼즐이 떨어지면 다른 것도 와르르 무너지잖아요. 비유를 그렇게 들었지만  이것은 한 순간에, 순간이라는 말도 긴 시간입니다. 정말 한꺼번에 모든 것이 싹~ 원래부터 본래부터 늘 전체로 있었던 자신이 드러나는 겁니다.

 

3번 너, 나 하는 것들이 모두 부정된 후에 '나'만 남는다, 이렇게 읽으면 이해를 하게 됩니다. 제가 마하라지 선생님의 글을 올리지만 방편으로 '선'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는 정말 군더기가 너무 많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십니다. 좀 논리적인 서양인들에게 적합한 설법일까요? 선은 '너'할 때 벌써 모든 게 드러나 있습니다. 모든 게 하면 또 어떤 물건들을 찾을 지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자신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너'하는 이것, 이것뿐인데 또 '나'를 찾으니까, 너도 나도 부정하고, 이 말은 분별하지 말고 분별하고 있는 이것을 봐라, 이것이 있잖아요. '너'하는 이것, '나'하는 이것, 무슨 말을 해도 이것이 있지요. 이것뿐입니다.

 

하나씩 풀이하려고 해도, '하나씩 풀이하려고 해도'가 이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육체적인 당신이 아니죠. 이 육체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나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매일 하고 쓰고 생각하고 하는 것, 이것이 '나'와 조금도 구분이 안 되고 전혀 다르지 않으며 평등하고 위아래가 없고 절대 나눌 수가 없는 단지 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당신이 바로 나의 본래면목입니다. 이것은 죽을 수가 없지요, 육체는 죽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안 죽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제일 쉽게 부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죽으셨습니다. 죽었지요. 여기 마하라지 선생님도 죽으셨지요.

 

우리는 그런 죽은 사람의 글을 읽고 배우고 있습니까? 그건 죽은 말이지요. 제발 죽은 말은 하지 맙시다. 왜 살아있는 입으로 죽은 사람들의 말을 따라 합니까? 부처님이 돌아가셨다, 지금 여기에 살아있잖아요. 마하라지 선생님도 죽으셨지요, 여기 살아계시네요. 육체는 죽습니다. 우리도 죽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잖아요.?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로 계속 부처님의 말씀이 한 순간도 끊어짐없이, 지금도 여러 사람들을 죽여서 살리고 있습니다. 꼭 죽어야 살 수 있나요? 죽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다시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죽으면 살고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이 육체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제 블로그에 놀러 오지 마십시오. 아주 위험합니다. 정말 죽으실까봐?

 

단지 이 하나뿐입니다. 이 하나, 이게 있어서 당신은 밥을 먹고 얘기도 하고 비가 오면 우산도 쓰고 버스를 타고, 참 제가 차를 샀는데 (남편이 샀죠^^;;) 어제 온 임시번호를 단 따끈한 차를 끌고 나가서 주차하다가 백미러를 우지직 부러뜨렀어요. 승용차만 운전해 본 나에게 쏘렌토는 생각보다 크더라군요.. 후방카메라만 보다가, 남편에게 얘기하고 4시간 정도 도망갔다가 왔어요. 도망가는 것도 이것입니다. 화났을 때에는 자리를 피하는 게 최고입니다. 하하. 웃는 것도 이것입니다.

 

단지 이것뿐입니다. 당신의 코를 만져 보세요. 코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요. 코가 도망갈 일이 없는 것처럼, 항상 당신에게 있습니다. 절대 머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그럴 것이다, ~ 같습니다. 이런 말 하지마세요. 자기가 명확하면 그런 말을 안 쓰겠지만 모르면 '정말 알 수가 없네'하고 궁금해하는 게 제일입니다. 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하나의 지식으로 머리 속에 기억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을 보는 것을 더 멀리 하게 합니다. 하나도 가지고 있는 게 없어야 합니다. 왜? 모르니까, 모르는 겁니다. 진실하게 몰라야 됩니다. 진심으로, 그렇지만 간절하게...당신이 지금 숨쉬고 생각하는 이것뿐입니다.

7. 태어나기 전에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8. '선택이나 차이'라는 것은 모두 관념적인 헛된 말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상대적으로만 파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인 절대에서 볼 때는 그런 개념들이 아예 나타나지 않으면 따라서 선택이나 차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9. 세속적인 것이든 비세속적인 것이든 당신이 원하는 모든 지식을 모으도록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 모두를 절대에 바치도록 하십시오. 깨달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하십시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것이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 아니겠습니까?

 

 

 

 

 

 

태어나기 전에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말에 어떻게 답변을 할 수 있는가? 모른다, 정말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것을 알고 싶습니다. 정말 알고 싶습니까?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났다는 이 관념이 거짓이라는 것을  체험한다면, 체험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반복해서, 이해해서 정신적으로 주입이 돼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알게 되면 언젠가는 다시 그렇게 행동을 안하면 없어지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한번 딱 알아차리면, 너무도 분명해서 체험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겪어봐야 확신을 하고 속지않으니까요, 그러나 또 무엇을 체험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라고 할 게 없고 체험이라고 굳이 말을 하지만,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이들 낳을 때 태몽을 꾸었는데, 그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확실해서, 첫 마디가 그냥 웃음이 나옵니다. 왜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늘 있었던 것이거든요.

 

알고 있는 지식, 경전의 말씀, 내가 이해한 것, 깨달음은 어떨 것이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보통 사람과 틀려야 한다, 모든 생각을 그저 내려놓으세요. 손에 들고 있거나 머리에 넣어두면 거기에 막혀서 법을 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이해한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조사선에도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향엄스님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모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경전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나중에 기왓장 던지다가 부딪치는 소리에 깨달았다고,

 

마하라지 선생님이 말하는 절대, 이것에는 무엇이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특히 개념은 근처에 갈 수도 없습니다. 절대에는 아무런 개념이 없습니다, 의미도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 이것 하지만 어떤 정신적인 생각이나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바로 당신의 머리를 만져보십시오. 그처럼 항상 붙어있습니다. 붙어있다는 것도 말 뿐입니다.

 

그러니까 공식을 세우거나 이해를 하거나 머리로 제발 알려고 하지마십시오. 단지 모릅니다, 또 모릅니다. 자꾸 모르는데도 이상하게 궁금합니다. 그리고 알고 싶습니다. 제발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바로 당신입니다. '나'를 모르는데, 그러면 머리를 때리십시오. 아야, 이건 뭡니까? 그래서 능엄경에서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정기적인 방문객들은 마하라지가 환생을 전혀 의미 없는 개념으로 여기고 완전히 도외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방문자들은 마하라지의 이 같은 가르침에 반발하곤 한다. 특히 힌두교의 추종자일 경우에는 충격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힌두교에 헌신하고 있는 황색 가사를 입은 젊은이가 환생에 대해 그렇게 말하자 눈에 불을 켜고 대들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마하라지: 환생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한 내말은 그리 놀랄일이 못됩니다. 만약 당신이 계속 여기에 오게 된다면 더욱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의 스승께서 내 의식을 열어주신 후부터, 나는 단지 내가 체험한 바에 의해서만 말해왔습니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가장 기본은 무엇입니까? 육체인가요? 지금은 건강하고 강인한 그 육체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을 대는 단지 한 점의 화학물질에 불과했습니다.

 

자라나면서 육체는 당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가정해왔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바뀌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고 실재한다고 느끼는 감각, 즉 몸-마음에 지각과 에너지를 부여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실제의 당신 자신은 의식입니다.

 

그러면 환생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태어난 것, 즉 물질적 육체는 때가 되면 죽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분해됩니다. 회복할 수 없게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력은 육체를 떠나 외부의 대기와 섞이게 됩니다. 지각하는 존재의 물질적 부분은 파기되고 결코 다시는 같은 육체로서 환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물질적인 의식은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으며 분명히 '환생'할 수도 없습니다.

 

 

 

 

이 공부를 바르게 하려고 한다면 먼저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전생, 업, 어떤 신비로운 현상, 특별한 능력, 마음의 평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등등 무엇을 배우고 익혀서 알고 싶고, 무엇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면 정말 다른 공부를 하는 게 좋습니다. 이것은 전혀 그런 것과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 효과는 있습니다. 세상일이 그다지 자신에게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뭐 북한이 중학생들 때문에 남한으로 못 쳐들어온다는 중학생 남자 둘 키우고 있습니다. 시댁, 친정, 그리고 집안 일, 또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루가 바쁩니다. 그렇게 하루가 바쁜 중에, 이런 저런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고민되는 것도 있죠, 화를 내기도 하고, 모든 것을 하는데 그냥 자연스럽다고 할까? 편한거지요. 비유를 들면 자주 같은 산을 가지만 갈 때마다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잖아요. 그러나 법에 익숙하면 지금 산을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런 저런 느낌에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라도 이게 맞는가 틀리는 가 이런 생각이 안 됩니다. 정말 편하게 산을 오르고 내리고, 즐기는 거죠.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자유도 하나의 개념이겠지만 제일 가까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의 효과가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아니 육조스님이 말씀하신가요? 적멸의 즐거움, 공감가는 말입니다. 요즘 장미꽃이 한창입니다. 한쪽에는 늘어지게 펴서 잎이 떨어지고 한쪽에는 봉우리가 아직 피지도 않고 또 다른 한쪽에는 최고 절정의 향내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냥 장미일 뿐입니다. 모습을 따라가도 장미이지요. 모습을 따라가지 않아도 장미입니다. 오직 장미밖에 없습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장미 한 송이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한번은 방문객이 자신은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며 마하라지의 말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재삼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고, 그의 태도도 솔직해 보이지 않았다.

 

마하라지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그의 진실성이나 질문의 의도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가 중독되어 있는 마약과 같은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참된 지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에 중독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마하라지: 당신은 바로 이러한 지성이라는 이름의  마약에 중독되어왔으며 그 영향 아래 모든 것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궁리하고 생각함으로써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듭니다.--꼭두각시는 그것을 조정하는 사람이 전달하는 자극에 의해서만 반응합니다. 하지만 지각하는 존재는 자극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어떤 자극과도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지녔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하면 이것은 얼마나 거창하게 느껴지는가? 그런데 이것은 숨쉬는 것이다 하면 또 얼마나 쉽게 느껴지는가? 우리는 너무 당연하고 쉬운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아왔지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남들보다 더 똑똑해야 하고 남들 보다 뭐든지 조금이라도 잘 해서 성공을 해야 될 것 같고, 그러면 어른들 말씀대로 걱정 없이 잘 살게 될 것 같고,,, 그런데 이 세상의 어느 직종이든, 자기가 만족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수입이 많으면 돈을 많이 모을까요? 조그만 생각해보면 맞지 않는 말입니다.

 

나무의 나뭇잎 모양이 다 다르고, 사람의 지문이 하나도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딱 정해진 마음이 없는 것처럼, 직업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도 드물고 수입이 많으면 지출도 커서 사는 게 매나 월세 사는 사람처럼 걱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인간의 삶이죠. 객관적으로 좀 떨어져서 보면 인간의 삶은 모두 고만고만합니다. 도토리 키재는 것처럼, 뭐가 크게 틀리는 게 있습니까?

 

그런데 이 공부는 도토리 키재기가 아닙니다.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도 나오듯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복덕이 많다고 하지요. 당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을 수 없다면 그만 멈추십시오.

 

여기는 알음알이로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해도 안 된다면 분명 자신이 절벽에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놓아버리세요. 깨침의 대한 망상 말입니다. 어떤 것도 그리지 마세요. 마치 하얀 도화지 앞에서 어떤 것을 그리려고해도 그려지지 않는 아이처럼 용쓰지 마세요. 왜 용을 씁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으니까 용쓰는 거죠. 용쓰면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편하게, 이게 뭘까? 아, 정말 알고싶다. 이제껏 이게 궁금하지 않았는데 정말 이게 나의 본성, 나의 본래면목, 나 자신이라고 하니 알고 싶다, 이게 뭘까?  정말 짝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경험으로 짝사랑하면 그 사람 생각 안하고 싶어도 매순간 생각합니다) 그렇게 공부하십시오. 절대 어떤 것이다, 이런 저런 것이다, 생각으로 헤아리지 마십시오.

방문자: 육체와의 동일시, 단순히 그런한 동일시로 인해 구속이 생긴다는 것입니까? 깨달은 사람들도 살아 있는 동안은 그들의 육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 역시 신체기능에 관한 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데도 과연 깨달은  사람들에게 개인적 육체와 동일시가 없는 것입니까? 

 

마하라지: 몸은 의식이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도구입니다. 생명력이 육체를 떠나고(보통 죽음이라고 한다), 의식의 현상적 작용이 풀어지기 전에 어떻게 몸과 의식이 동일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몸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도구일 뿐입니다. 구속은 그러한 동일시의 결과로 생긴 가공의 행위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건만 자율적 존재라고 지어놓은 상상의 개념이 행위와 그 결과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본성이 현시되는 일반적 과정 위에, 어떻게 해서 외적인 대상물이 겹쳐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당신이 거짓을 거짓으로 보게 되면 더 이상 진리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의 원인은 이러한 가상적 존재의 '존재화'이며 단순한 육체와의 동일시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 번 더 말하자면, 참나, 즉 현상의 총합으로 나타나는 본질적 절대는 개개의 객체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나는 어떠한 태어남이나 죽음도 겪을 수 없으며, 구속이나 해탈 또한 겪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속과 그 결과인 고통은 둘 다 완전히 상상으로 이루어진 거짓 개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근거한 개념일 뿐입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깨치면 인간이 '신'처럼 보입니까?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까? 깨달으면 눈을 감고 봅니까? 밥을 안 먹습니까? 화장실을 안 갑니까?  똑같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뭔가 기대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게도 깨달은 사람은 특별나게 생각하고 말도 조심하고 존중해주고, 뭔가 특별한 것을 찾습니다. 특별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진리라는 게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다면 그게 진리가 될 수 없지요. 평등하고 위아래가 없고 한 물건도 없고, 그런데 똑똑하고 돈 많고 남을 잘 돕고 수행 잘하고 잘 생기고 말 잘하고 이런 사람에게만 있다면 그건 평등한 게 아니지요.

 

법이라는 것은 저 가난한 농촌의 할머니가 먹을 게 없어서 풀을 삶아 먹는 게 이것이고, 박식하고 잘 사는 사람이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게 이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한 치의 틈도 없고 완전하게 똑같습니다. 똑같다고도 할 수 없죠. 구분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 자기가 봐도 똑같은데 뭘 다른 것을 찾습니까? 자신이 찾는 이게 뭔지 궁금해야 합니다. 내 눈에는 사는 게 다 달라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 존재하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온갖 감정이 정신없이 몰아치는데, 모든 게 이것 하나라니! 이게 뭘까?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반드시 자신에게 답이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신이 혼자 이게 뭘까? 하고 있으면 또 잘 안됩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계속 법에 접해야 하죠. 그러다가 딱!  기연이 돼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 때 비로소 내가 만든 망상에 내가 속았구나!  참, 어이가 없어요. 왜? 나 혼자 난리치다가 나 혼자 알아차린 거지요. 남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도반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도반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저런 말을 따라서 이렇게저렇게 생각할 필요없습니다. 이 말은 좀 공부가 된 말이고, 저 말은 아직 공부가 안 된 말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그럴 것이면 안 읽는 것보다 못합니다.

 

단지 진실하게, 진심으로, 간절하게 이게 뭘까?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책도 보고 하던 수행도 하고 직장도 다니면서 집안일 하면서 온갖 일을 다하면서 이게 나의 모습이고 나 자신이고 나의 본성이라는데, 이게 뭘까? 단지 그것만, 그 앞뒤의 것은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자신에게 딱! 드러나면 그 때 비로서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이 진리다' 이 말도 공감합니다.

방문자:  저는 제 성격상, 제 앞에 떨어진 일은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고 집중하여 모든 정열을 다 쏟아붓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일단 명상이 시작되자 거기에서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명상이 끝날 즈음 육체로 부터 제가 분리되는 명백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느낌은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오히려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느낌의 특별한 감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긴 겁니다. 제가 이 꿈 같은 허상의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먹고 살기 위해 어떻게 사업을 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하라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기억은 당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전체 우주를 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실체로써 이 꿈을 보는 '당신'이 남아 있는 한 당신은 고통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 또한 살아 있는 꿈 속의 인물이며, 굼의 핵심적 일부일지언정 그것과 따로 떨어져 있거나 꿈과 분리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깨달아 가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문제없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명상을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명상을 하면 이런 경우가 있지요. 명상을 할 때에는 편하고 좋은데 명상을 끝내고 집에 오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느낌, 다시 이런 저런 감정에 휩싸이고 머리는 복잡해지고 아까전에 그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것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린 느낌, 이런 것은 꼭 명상이 아니더라도, 음악도 그렇지요. 바흐나,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얼마나 평온합니까?

 

명상으로 어떤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붙잡지 마십시오. 마치 기독교에서 이브가 선악과를 잡은 것처럼, 잡는 순간 당신은  그것을 놓질 못합니다.  하나를 잡으면 반드시 그 하나와 상반되는 반대 개념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개념이 또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해서 결국 분별망상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 딱 하나여서 절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 하나도 뭐냐고 하면 '늘 이 시간이 되면  잠이 옵니다.', '오늘은 바빴습니다.', '담배가게 성자 책도 거의 3분의 2를 넘기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문자 메세지가 오군요.' 이것입니다, 이것이다 하는 게 망상이다고요? 망상 맞습니다, 이것이다는 게 뭐가 있다면. 이것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의미도 없으면서 늘 있는 이것, 이것이 뭘까요?  내일 뵙겠습니다, 이 밤도 잘 주무세요. 이것 뿐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죠. 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 뜻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방문자: 선생님 만일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핵무기를 준비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고 정당한 일일까요?

 

마하라지: 당신의 질문은 과거 수백 년 전에는 어떤 문제도 일으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면, 당신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결론은 당신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깨달은 자는 모든 현상, 또 현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일체의 감각체들은 꿈속에 있는 것처럼 허상인, 그런 의식 속의 개념적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진리를 깊게 이해한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핵무기를 준비할 생각이나 하겠어요?

 

그러나 이 대답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피상적인 대답이 될 뿐입니다. 먼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나'와 '너',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이것 혹은 저것을 자유로운 의지와 기분에 따라 하고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는 전체이며 신성하고, 본체이며 절대적입니다. 또한 우리의 실재는 상대적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으며, 오직 현시된 현상으로서 이원성 안에서만 지각되고 인지됩니다. 오직 진정한 '나'만이 있을 뿐이고 상대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란 없습니다.

 

당신이 고집하는 당신이란 선과 악이 서로 의존하는 상대개념일 뿐이고, 이원성 안에서의 필연적 나타남이며 전체적 기능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의식의 외형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실체적 존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속박'이며, 전체성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실체란 없다고 바로 아는 것이 해탈입니다.

마하라지: 나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육체라는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의식에게 부과하고 있는 한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끔찍한 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사실이지 육체가 죽으면 개체의식은 해방되고 근원적 의식과 합쳐집니다.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대양으로 합해지듯 말입니다.

 

방문자: 선생님께서는 "죽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호흡과 생명력이 육체를 떠나 비인격적 의식과 합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육체는 이런저런 식으로 파괴되며 이런 개별적 모습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선생님의 이러한 말씀이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깨달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면 굳이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마하라지: 당신은 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에 대해 얘기하면서 또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은연 중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 즉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의지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상적 우주가 현시의 세계로 드러나는 과정에 과연 그러한 독립적인 실체라는 게 있을까요? 현상계가 현시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적이 내념의 틀은 무엇일까요? 부피를 나타내는 공간 개념이 없다면 사물이 삼차원으로 보이는 게 가능하겠어요? 그리고 또 다른 개념인 시간이 없다면 물체의 모습이 지각될 수 있을까요? 물체가 인식되려면 지각에 필요한 만큼 머룰러 있는 지속 기간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고 부르는 그 토대 자체가 개념일 뿐이라면, 그 개념의 틀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개념적이요 만들어진 허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물일지라도 설혹 그것이 독립된 실체라고 착각되더라도, 그것들은 독립된 존재일 수 없고 인격적 의지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이해하십시오.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죽지 않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단지 개념일 뿐이며, 그래서 해탈되어야 할 자도 없는 겁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지의 속박입니다. 이것을 통각하는 것이 진리의 자유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리는 있는 그대로 볼 때 절대적 현실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참된 본성에 관한 흔들리지 않는 사실입니다.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닷물에 합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한 방울의 물입니다. 한 방울의 물은 너와 나가 없습니다. 이 한 방울의 물은 너와 나의 다른 모습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 방울의 물이, 한 컵의 물이 되어 갈증을 해소하게 하고 땅에 스며들어서 모든 곡식과 나무와 식물, 동물을 자라게 하고, 강으로 흘러 바다로 가게 되지요. 물은 생명력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에 생명력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모든 것은 죽습니다. 당신이 없는데 무엇이 남겠습니까?

 

당신은 이 육체가 아닙니다, 육체는 어떻게 보면 당신의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더라도 또, '이 육체는 도구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분짓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기억을 하게 되고 다시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신은 또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절대 기억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냥 말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말을 하겠지요. 말하는 데 무슨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말따라 가고 뜻을 따라가면 각자의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냥 말하는 이것은 똑같습니다. 말 안해도 똑같지요?

 

나는 유한한 존재이면서 무한한 존재입니다. 나는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부정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왜? '지금 이것에 대한 부정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이거거든요. 송시헌은 무엇입니까?, 송시헌이죠. 송, 시, 헌.. 송시헌은 바로 집나간 '나'입니다. 나는 시헌이를 아는데 시헌이는 나를 보지 못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나를 볼 수 없기때문입니다. 이것 뿐입니다. 벗어나려고 해도 절대 벗어날 수 없고 부정하려고 해도 절대 부정할 수없고, 없다고 도리질쳐도 절대 없거나 있지도 않습니다.

마하라지: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몇 주 동안 계속 이곳에 왔습니다. 오로지 나를 만나기 위해 긴 시간을 여행하고 여기에 머무는 동안 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 많은 비용이 아깝지 않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 한번 얘기해보세요. 지고의 진리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각자에게 궁극적 진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 용감한 외국인이 대답했다.

 

방문자: 자유입니다. 저는 이 삶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저는 그것을 '의식의 속박'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하라지: 이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세요! 그 관념이 유전인자로부터 온 건지 후천적 가르침으로부터 온 건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어찌 되었던 지독하게 단단합니다. 이 '속박'과 '해탈'의 문제는, 직관으로 진리의 참된 본질을 파악할 정도가 못 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방편적 가르침의 일부분입니다.

 

몸이란 여성의 자궁 속에서 자양분을 취하며 자란 수정체가 성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태아는 부모로부터 섭취된 음식의 정수이고, 그 안에 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습으로서의 인간은 단지 음식의 정수라는 것이 이해되었다면, 당신은 음식의 어느 요소를 자유롭게 하려는 겁니까? 또한 음식은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바, 당신은 음식의 어느 요소를 당신이라고 할 것입니까?

 

깨어남, 깨달음, 해탈 등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깨어남, 깨달음, 해탈이라는 것은 진정한 자아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개체로서의 '너' 또는 '나'가 그 근저에 깔리지 않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까? 본다든가 보지 않는다든가, 이해한다든가 이해하지 못한다든가, 행한다든가 행하지 않는다든가등, 모든 경우에 있어서 관심이 있는 것은 개체로서의 '나'일 뿐입니다.

 

완전하고 전체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며, 그 변화는 어떠한 실체에 의해서 의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저절로' 일 뿐입니다. 단지 '보는 자'라고 하는 '당신'을 없애고, 모든 것이 시비분별 할 것 없는 온전한 하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진실을 곧바로 통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개별적인 존재에 의해서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통각은 개별적인 '당신'을 찰나에 사라지게 합니다.

 

 

 

 

이런 말들은 이해를 해서는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알 수가 없지요? '나는 이 육체가 아니다.' 이 한마디를 못 알아들으면 그 뒤에 것은, 수많은 말들은 모두 자기 몸을 화려하게 꾸미는 장식품입니다. 이것은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자기 몸에 수많은 장식품을 달아서 '이게 나다'라고 뽐내는 것과 같습니다. 몸에 치장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몸은 죽으면, 요즘은 화장을 많이 하죠. 그렇게 한 줌의 재로 돌아갈 것인데.. 죽을 때 이제껏 자신의 몸을 치장한, 소중한 장식품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얼마나 허망합니까?

 

 

이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이라고하지만 '생명' 이것 뿐이지, 또, '이것은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이구나!'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는 한 생각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니 한 생각 자체가 이것이니까, 흔적이 없습니다.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렇게 나오죠? 오온이 다 '공'하니 '번뇌'에서 벗어났다, 법에 대해 어떠한 한 가지라도 고정된 관념을 가지지 마십시오. 또, '공'이란 허공처럼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거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자체가 말을 하면 저절로 자기도 모르게 따라갑니다. 이제껏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으니까요. 하지만 이 법을 알면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법을 깨닫고 법에 완전히 익숙해지면 이 말 자체가 법으로, 오로지 다만 이 한 개의 법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말에 꺼둘리지 않습니다. 단지 이것 하나가 명백하여 모든 것을 다 행하고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말하더라도 하나의 티끌도 잡을 수 없습니다.

 

어릴때 동화에 나오는 '미다스의 손'처럼 손이 닿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행동하는 것마다 모두 이것일 뿐입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사람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부드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하라지: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이나 느낌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작용일 뿐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행복이나 불행, 즐거움이나 고통을 경험한다고 생각할 때에 거기에 관련된 요소는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반드시 의식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반드시 어떤 결핍감을 느끼는 경험의 주체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는 시공간상에서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의식이 발현될 때 시공간의 개념이 생겨나며, 시공간이 없으면 현상이 감지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현된 현상이 감각적으로 인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부피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공간의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불행, 그리고 모든 상호 연관된 양극단의 반대 개념들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시공간상의 개념적 대상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분리된 객체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것 하나만은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되돌아가 원래의 온전한 상태,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거기에는 '나는 존재한다'는 인식조차 없으며 따라서 어떤 종류의 필요도 결핍도 없으니, 순간적인 것으로 알아차리면 모든 고통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암이라는 병명을 듣게 되면 환자는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가 아프다는 것인가?" 분명히 태어난 것은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죽어야'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될까요? '나'라는 것은 실제로 있지도 않았고 또 있을 수도 없습니다.

 

진실로 나의 상대적 부재가 곧 나의 절대적 실재가 될 것이며 죽음은 마지막으로 이 기구를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최고의 환희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차마 무엇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해운대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모래축제를 하더군요. 모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아이들은 모래썰매를 타고 연인들은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그 위로 올라가니까 모래로 작품을 만들었더군요. 어린왕자, 채플린, 마릴린 먼로, 유명한 만화영화 캐릭터, 영화배우들이 작품이 되어 모래위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은, 모두 모래위의 작품같습니다. 온갖 작품을 다 만들지만 결국 한 줌의 모래이잖아요. 그 작품은 모래와 떨어져 있습니까? 모래와 붙어있습니까? 그 작품이 바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모래잖아요. 원래 모래였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맨날 와보는 관심없었던 해운대 모래를, 오늘은 작품을 만들어서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으니까 뭔가 굉장한 작품인 것처럼 정신이 팔려서 모래를 못보는 겁니다. 단지 한줌의 모래로 모든 것을 다 만들고 또 없애기도 하지만 모래는 그대로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봅니다. '아, 나는 아무 쓸모없는 모래인데, 저 그림은 아주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 어떻게 저렇게 멋지게 실제처럼 만들었을까? 정말 신기하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당신이 모래라면 나도 모래입니다. 우리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단지 딱 하나입니다. 모래의 작품처럼 많은 그림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게 모래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1981년  9월  8일 마하라지 선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후두암으로 고통이 아주 많이 있었지만 설법을 하실 때에는 항상 또렷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시면서 열강을 하셨습니다. 누가 고통을 받는가? 고통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손가락을 대고 10초 동안 라이터를 댄다면 1초도 안돼서 아, 뜨거워하고 손을 뿌리치겠죠. 어느 사람이 손을 대고 있을 겁니까?

 

이 육체는 분명히 우리가 하는 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태어나기전에 당신의 모습은 절대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태어나기전의 당신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그것을 깨칠 때에는 모든 것이,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개념덩어리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하라지에게 꽤 많이 다녀갔던 한 외국인이 조용히 질문했다.

 

방문자: 아마 저는 몸- 마음의 구조체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한 가지 문제가 너무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와서 이젠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이야기해보았는데 모두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제가 질문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의문은 제 영적수행에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때때로 수행 중에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흘끗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 잠깐 동안이고 또 너무나 드문 일입니다.  만일 제가 진보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마하라지는 그 사람의 성실함과 진지함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면서도그에게 느낀 절망감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을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실망감에 힘이 빠진 것 같았다. 마하라지는 잠시 후 슬픈 듯 말했다.

 

마하라지: 이제 이렇게 모임을 통해서 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까 봅니다. 이 뜻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어요. 여러분은 순수한 마음으로 들으려 하질 않아요. 여러분이 정신 차려서 내 말을 들었다면 설사 그런 의문이 생겼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의문들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다는건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듣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하라지는 앞에 있던 성냥갑을 들고 물었다.

 

마하라지: 이것이 당신입니까? 물론 아니죠? 그러면 이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까? 이 사실은 금방 알겠지요. 그런데 왜 당신이 몸-마음이라고 불리는 현상체가 아님을 아는 데에는 그렇게 시간이 걸립니까? 당신은 현상적 물체에 지각력을 불어넣어주는 의식임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근원적 통각"은  지각력의 근간이 되는 의식보다 앞선다." 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세요.

 

통각은 단계적으로 행해지는 성질이 아닌 전체적이고 즉각적인 지혜입니다. 그건 정말 순간적이고 전체적이며 즉각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러저러한 일련의 과정이 전혀 붙지를 못합니다. 거기에는 진보를 이루는 '자'가 없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결혼 이주민 여성 6명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학생이 어찌나 저에게 잘해주는지, 나는 많이 가르쳐 주고 싶어서 하나라도 더 신경써서 더 많이 묻고 답하도록 유도했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이해를 못하고  순서가 되면 "모르겠어요. 선생님" 하는 겁니다. 분명히 누구보다 집중해서 듣고 누구보다 고개를 많이 끄덕였는데! 막상 물어보면 모르니까 정말 슬펐습니다. 그러나 슬픈 것도 잠시 이겠지요. 그들에게 한국어는 외국어니까 얼마나 어려울까 다시 한번 잘 이해하도록 해야지 마음을 다 잡습니다.

 

 

계속 똑같은 말을 부처님도, 조사스님도, 마하라지 선생님도 계속 하셨지만 말을 하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뿐이죠, 여기에는 말을 해도 말에 있지 않으니까 말 한 적도 없고, 또 말하지 않은 적도 없다고 합니다. 항상 이것뿐이니까. 계속 같은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듣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20명에게 '트럭'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세상에! 한 개의 트럭도 똑같은 게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가 생각한 트럭을 그렸겠지요. 그렇게 말씀을 들으면  안 듣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노보살이 저에게  "아, 선생님은 예전에는 이렇게 말해놓고 지금은 왜 다른 소리를 하시지?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이렇게 또 하지 마라고 하시네, 내 정말 미치겠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안 듣는 것이지요.

 

성냥갑이 당신이 아닌 것처럼 당신의 이 육체도 당신이 아닙니다. 그런다고 이 육체가 당신이 아니니까 그러면 나는 다른 데 있나? 이 육체아닌 다른 것? 잘 보세요. 이 육체가 아닌 다른 것, 이 육체, 지금 어디에 있어요? 지금 여기 있잖아요? 지금 이 자리, 이것 뿐입니다. 육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분명히 명백합니다.

 

한번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는 공부가 좀 진전이 있고 누구는 공부가 그 자리이고, 누구는 어떻고 저떻고, 모두 자기 자신이 망상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하나가 명백하면 더 이상 다른 것이 없습니다. 누가 있습니까? 자신도 없는데 무슨 영적인 진보가 있습니까?

 

단지 이 하나에 익숙해지는 것이지, 익숙하고 또 익숙해져서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이 하나를 벗어나지 않으면, 분명하면 무엇을 하든 모두 이것뿐이지, 절대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하라지 선생님만 보더라도 '아이 엠 댓' 보다는 '의식을 넘어서'가 더 법이 철저합니다.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이란 그저 태어나고 죽습니다. 이것이 분명하면 태어나기 전에 있었고 죽은 후에도 있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그저 일어나고 사라지고 몸도 그렇죠? 태어나고 죽고, 무엇을 하든지 모두, 어제 얘기한 모래작품과 같습니다. 절대 두 개가 아닙니다. 모래작품이 바로 모래이고 모래가 모래작품이지요. 여기에 무슨 영적진보가 있습니까? '영적진보가 있습니까?' 하는 게 바로 이거죠?  단순하지만 절대 나눠질 수 없는 이것, 말을 하든 하지 않든 단지 이것 하나뿐입니다.

어느 날 아침, 마하라지는 아주 불편해 보였다. 목이 심하게 아픈 모양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의 통증은 심각할 정도였지만, 그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처럼 길게 말할 수는 없었다. 목구멍의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선택된 약간의 단어만을 가지고 핵심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을 보고 한 여성 방문객이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고통이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라 마하라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방문자: 선생님 저는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심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을까요?

 

마하라지는 웃고 나서 말했다.

 

마하라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도울 수 없어 유감이군요. 육체적 고통을 피하거나 줄이는 방법을 아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통이란 무엇이고 또 누가 고통을 받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항상 문제의 뿌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고통의 경험이 언제  처음 있었나요? 한 백 년 전의 고통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이 궁금해 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또는 무엇이 경험을 겪습니까?" 진정한 '나'는 어떠한 경험도 겪을 수 없습니다. 경험을 하는 것은 상대적 객체로서의 당신이나 나일뿐입니다. 내 말을 이해하겠어요?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절대적 실재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을 감각기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 그릇된 자기 동일시가 당신의 고통과 속박의 이유입니다.

마하라지: 여러분들이 나를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면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나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습니다.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가 개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듣는 것들로부터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객체의 입장을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을 위한 나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밖에는 되지못할 것입니다. 

 

통각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세상의 모든 것을 허상이라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 허상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자, 이제 문제를 알겠습니까? 즉 뭔가를 들음으로 인해서 좀 더 나은 개체자 되기를 원하는 그런 종류의 관심을  모두 포기했을 때,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습니까? 바로 그때, 듣는 자가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직관으로 듣는 상태에서, 언어가 그 자신의 깊고 미묘한 속뜻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려 있는 마음속에 즉각적으로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는 제한된 영역일지라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들음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런 것입니다. 따라서 왜곡 없이 직접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오래전에 최인호씨의 '길 없는 길'이라는 책을 읽었지요, 세로로 씌여진 글이였는데, 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읽어서 경허스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대충 읽었는데, 지금 기억하기로는 경허스님이 거지처럼 돌아다니다가 어느 마을 어귀에서 쉬고 있었는데, 놀고 있는 그 동네 아이들에게 "나를 때릴 수 있으면 돈을 줄게" 했던가, 그래서 어떤 아이가 용기를 내서 때렸는데 "너는 나를 못 때렸다" 해서 돈을 안주고, 남은 아이들은 거짓말쟁이 라고 스님을 놀렸던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나도 읽으면서 " 돈을 왜 안 주시는거지? 참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었지요. 또, 경허스님이 깨닫고 백일법문을 시작할 때 친어머님을 모셨는데, 경허스님이 실오라기 한 올 없이 옷을 벗는 장면이 있지요. 그리고는 어머님 앞에 앉았는데 어머님은 황당하고 부끄러워서 밖으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그때는 뭐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이 육체가 '나' 아닙니다. 아니, 맞다, 아니다가 아니고, 이 육체 하는 이게 나죠, 이, 육, 체, 가, 나, 아, 닙, 니, 다. 이것이 분명하면 이 육체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모든 게 '나'입니다. '나'라고 할 게 없으니까 모든 게 '나'지. 어느 것 하나라도 '이게 나다' 하면 마치 유리병속의 사탕을 주먹쥐고 꺼집어내는 것처럼 사탕을 먹을 수 없습니다. 손을 펼치면 무엇이든지 다 만질 수 있고 잡을 수 있는데, 주먹을 꽉 쥐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라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알면 얼마나 우리가 허상에 좇겨서 힘들게 살고 있는지 정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공수래공수거'란 말이 있잖아요.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 허무를 나타낸다고 배웠지만 절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지만 이것은 절대 빈 손 아닙니다. 표현하자면 무엇이든지 이 손안에 다 들어옵니다. 절대 허무하지도 않고 꽉차있으면서 영원불변합니다. 원래 '나'자신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무한합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말로 들으면 전혀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존재이다' 이렇게 생각으로 또 이해하면 말이죠.

 

말에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지식이 없다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른 선지식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으면서 새기고 지키고 적고 기억해둘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희한하게도, 만약 순수한 마음으로 법문을 듣다가 알게 되면, 그 모든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한 순간에 알게 됩니다. 또, 알게 되는 어떤 것이 있구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 됩니다. 남의 아이를 백날 키워도 자기 아이가 아닌 것처럼,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아봐야  산고를 공감할 수 있듯이, 목이 말라서 갈증이 최고일 때 물을 먹어봐야, 비로소 맹물의 진가를 알듯이, 바닷물을 먹어봐야 온 세계의 바닷물을 알듯이, 자신이 꼭 한번 체험해봐야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말이 아니라 법입니다, 나 자신입니다, 말이 어디서 나오고 있습니까? 온갖 말을 하더라도 이 하나에서 나옵니다. 온갖 분수쇼를 구경하면서 한 치의 틈도 없이 물임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속을 수도 없습니다. 왜? 속을 수, 속일 수 없는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체입니다. 나는 무한한합니다. 무한해서가 아니라 유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 단지 말이죠. 모든 게 개념뿐이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붙잡지 말고 그냥 들으십시오. 경허스님은 옷을 벗었지만 저는 옷을 입어도 적나라하게 벌거벗고 있습니다. 이 앞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습니다.

마하라지가 후두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마하라지: 만약 여러분이 실상을 바로 안다면 여러분들도 나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 양자 사이에는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어나기 전은 죽음 아니었나요? 빛이 없을 때 어둠은 무엇입니까? 삶 없는 죽음, 보다 의미심장하게 말한다면 죽음이 부재한 상태가 삶이 아닙니까?

 

삶이라는 것은 의식의 투영으로 시작하고, 이 투영된 존재의식이 사라졌을 때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는 단지 계속 살고자 하는 욕구, '독립된 나'라는 환상의 실체를 계속 유지시키고자 하는 욕구의 산물일 뿐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TV의 스크린이나 꿈속의 많은 상들처럼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의 실상은 태어나거나 살아가거나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이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 어떤 초월적인, 신비적인 것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죽습니다. 누구든지 원하지 않아도 태어납니다. 태어나면 죽습니다. 예외적인 사람이 있습니까? 죽음은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자신이 태어나서 이렇게  저렇게 살았고 앞으로 이런 일을 하고 싶은데 못한다, 이런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아니 자신의 실상을 바로 알아차렸다면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해보라는 얘기입니다. 죽음이 두렵다면, 사는 게 고통스럽다면, 이 공부를 해보십시오. 더 이상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면  이렇게 고통받을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이 육체가 사라지는가?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이 육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눈만 보더라도 한 눈에 다 들어오고 손가락도 자유자재로 쓰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 걷는 것까지 적절하게 얼마나 잘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육체는 단지 태어나서 자란 몸일 뿐입니다. 분명히 죽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영원합니다. 시간이 있어서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대로 영원합니다. 하나, 둘 나눌 수 있다면 수천 가지로 나눠지고 나눌 수 없다면 단 하나, 우리 자신, 이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마하라지는 암으로 인해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곧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마하라지: 인간은 단지 꿈속의 사물과 다를 바 없는 개념적인 형상일 뿐입니다.  탄생과 죽음에 굴하는 것은 오로지 개체적 허상일 뿐 참나는 탄생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1981년 6월 , 그가 세상을 떠난 9월8일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육신은 수척해 갔지만 의식은 마지막까지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침내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하라지: 나는 병든 육체 때문에 전하고자 하는 말을 상세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축복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내 말이 줄어들수록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전처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에 보다 더 집중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한 그럼으로써 어느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방문객 한 명이  마하라지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보려고 사소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하라지: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나'와 '진정한 나'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고통을 겪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객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통증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통증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통증 그 자체입니다. 무엇이 현시되든 나는 작용 그 자체입니다. 나는 행해지는 모든 것의 행위자입니다. 그리고 나는 또한, 행위 그 자체입니다. 진실로 나는 이  모든 것을 작용하는 주체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모든 것은 이 육체가 '나'라고 생각한 것에서 부터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육체가 아닌 자신을 보는데, 육체의 오감, 육감에 가로 막혀서, 머리로는 배운 지식들에 의해 가로 막혀서, 못 보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에 가로 막혔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 자신을 이렇게 드러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운동하고, 일하고, 말하고, 걷고, 생각하고, 숨쉬고 다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세계의 현상들이 마치 어두운 컴컴한 곳에서 불빛을 밝히면 하나하나 드러나듯이, 그저 당신이 있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임을 모릅니다. 당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그는 세상의 존재를 알았습니까? 아니면 처음 수정이 되어서 배란이 되었을 때 알았습니까?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몸을 '나'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객체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모든 것은 고통입니다. 행복도 계속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행도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지요. 사랑이 영원하다면 고통이 없겠지만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일단 먼저 이 육체, 자신이 죽으니까 무엇이 영원하겠습니까?

 

당신은 절대 객체가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처럼 무엇을 하든 오직 이것 하나만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절대 떨어진 이분법의 '나'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여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냥 무엇인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저절로 입니다. 절대 자신을 객관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지 마십시오. 이 진리는 누구에게나 훤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죠. 이 진리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죠.

 

지금 팔을 한번 접어 보십시오, 그리고 펴 보십시오. 여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기에 어떤 개념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또 무엇이 필요합니까?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냥 머리를 세게 쥐어박고 모르겠다고 넘어가십시오. 당신은 여기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는다고 하잖아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일 물 속에 있으면서 그게 물 속인줄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번 딱! 깨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바로, 한 순간에 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곧 마하라지입니다. 

일요일이었다. 특별히 먼 곳에서 찾아온 소수의 그룹이 마하라지가 매우 쇠약해져 있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마하라지와의 친견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마하라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무슨 질문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건강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질문이 적정한 수준이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 그룹의 리더가 딱 한 가지만 질문하겠다고 말했다.

 

방문자: 정말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마하라지: 그 문제에 대해서 거듭 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하나의 개체로서 깨달음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난센스란느 사실을 받아드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만 있을 뿐이지, 깨달음을 얻어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서 '나 또는 당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일어날 때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정상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전체성 안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병처럼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얼마나 크고, 위대하고, 오랫동안 수행해서 어떤 경지? 를 생각하겠지만, 깨달음, 깨친다는 것도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신이 한번 딱! 하고 순간적으로 깨쳐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은 마치 꿀단지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아직 보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상상만 한다 말입니다. 어떤 아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키가 작은 아이한테는 아버지의 관이 너무 높아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요, 관을 참배한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그 모습을 상상하는 아이처럼, 그것처럼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거죠. 항상 남의 말만 듣고서는 자기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거짓은 거짓일 뿐 참이 될 수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자신이 꿀단지를 열어보거나, 깨뜨려보거나, 의자를 가져와서 직접 아버지의 모습을 한번 보면 됩니다. 그러면,모든 사람들의 말이 그전에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고 헷갈렸지만 지금은 당장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왜? 말에 끌려가지 않으니까요, 말귀를 알아들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듣더라도 자신이 분명하면 모든 게 분명합니다. 깨달음이 있다, 없다, 그런 것은 망상이다, 개념이다, 무슨 말을  다 듣더라도 자신이 모르면 모르는 겁니다.

 

깨달음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예전에는 직장도 다니고 일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꼭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무엇을 하든 집에서 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집과 '나'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원래 내가 집이였고 집이 바로 '나'였습니다. 당신은 절대 무엇으로 나눠질 수 없습니다. 열 조각으로 나누더라도 마치 물을 칼로 자르듯이, 소나무를 열 조각으로 쪼개더라도 소나무인 것처럼,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고 해도 오직 이 한 개가 하는 것처럼, 나눠도 한 개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없고 나누지 않더라도 원래 전체로서 단지 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은 단지 순간적으로 자신을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전체로, 자신이 이때껏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없습니다. 깨달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침을 드셨습니까? 날씨가 흐립니다, 바람이 붑니다, 어제 저녁에는 한숨도 못 잤습니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판을 탁, 탁, 치죠. 이겁니다. 따로 깨달음이라는 게 없는데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1981년 8월 18일 화요일. 아침에 마하라지는 너무 쇠약해져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하라지는 녹음된 그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자는 제안을 허락했다. 20분즘 지난 후에 그는 녹음기를 끄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힘들게 일어나 앉아서 속삭이듯이 하나의 메세지를 던졌다. 

 

마하라지: 여러분들이 방금 들었던 것,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인  그것을 들은 주제에 대해 명상하십시오.

 

마하라지는 길지 않은 메세지를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었다. 호흡은 막혀왔으며, 눈은 감겼다. 그의 쇠약해진 육체는 매우 참기 어려운 통증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우리 제자들은 곁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81년 9월 8일  화요일,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는 저녁 7시 32분에 그의 자택 다락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하라지 선생님은 아니, 육체는 화장터로 가서 그의 스승과 같이 한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이 한 줌의 재 안에 그는 어떤 말을 담고 있습니까,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는 어디로 갔을가요? 그는 지금 당신 눈앞에, 발밑에, 손끝에 있습니다.

 

육체는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그 처럼 '나'라고 아끼고 사랑하고 탐내던 육체는 늙고 병들어 이렇게 죽게 됩니다. 부처님도 음식을 잘 못 드셔서 돌아가셨지요. 한 때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도 바위에서 떨어져 돌아가셨지요.  

 

그래도 당신은 이 육체를 당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고 있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 육체다 하는 이것은 육체가 아니지요? 이것은 뭡니까? 이것을  알면 마하라지는 절대 죽지 않았습니다. 아니 살아서 이렇게 말하지요. "살아있는 꿈으로부터 깨어나십시오, 여러분이 기억하든 못하든 항상 내면의 스승은 존재합니다."

 

이 육체가 당신이 아니고 수시로 바뀌는 이 생각이 당신이 아니라면, 이 몸을 받기 전

당신은 누구입니까?

 

I'm You,

You and me,

That's one, only one! 

 

 

 

 

 

 

 

나는누구인가? / 마음 공부의 시작 / 마하라지

방문자: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지금은 나 자신을 성공한 사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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