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6. 퍼지는 가르침 ② 바이샬리 코삼비

수선님 2022. 12. 18. 13:40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6. 퍼지는 가르침 ② 바이샬리 코삼비

불교는 ‘과거’…유적지엔 ‘바람’만 가득



 

부처님 당시 쉬라바스티와 함께 불교가 확산된 대표적 도시가 라자가하(현재의 라즈기르)였다. 〈마하박가〉에 의하면 사라풋타·목갈라나가 귀의한 후, 라자가하의 여러 가문의 자제들이 차례로 출가, 부처님을 모시고 청정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쉬라바스티의 경우처럼 라자가하의 이교도들도 보고 있지만 않았다.


이교도들 조직적으로 비구 비방

 

그래서 그런지 이상한 말들이 라자가하 거리에 돌았다. 부처님도 소식을 듣고, 말했다. “비구들아, 그 소리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오직 7일간 떠돌다, 7일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비구들아,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답하거라. ‘위대한 영웅이신 여래께서는/ 오직 정법으로 인도하시니/ 법으로 인도된 지자(智者)를/ 어찌 비난하는가.’”

 


사람들이 게송을 읊으며 비구들을 비난하자, 비구들은 부처님이 가르쳐 준 게송으로 응답했다. 과연 비난의 소리는 7일간 떠돌다, 7일이 지나자 사라졌다. 출가 사문시절부터 인연 있던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라자가하에서도 부처님은 이처럼 전도에 곤란을 겪었다.

 

<원숭이 연못과 중각강당>사진설명: 바이샬리에 있는 승원유적. 부처님은 전도를 위해 바이샤리를 자주 찾았다. 우뚝 솟은 기둥은 아쇼타 석주. 앞의 연못은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원숭이들이 팠다고 전해지는 선후지.

쉬라바스티를 거쳐 2002년 3월28일 더위를 뚫고 라즈기르 부근에 있는 죽림정사에 도착했다. 다음날 영취산에 올라가다 옛 왕사성 시가지 지역을 지나갔다. 큰 도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 시내를 관통하던 ‘그 길’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지만, 도로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던 비구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 주변엔 오직 잡목만 가득했고, 왕사성을 감쌌던 성벽이 그나마 흔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교유적지 주변엔 안타깝게도 자이나교 사원과 힌두교 사원이 ‘불교’를 밀어내고 자리잡고 있었다. 2002년 3월29일 제1결집이 이뤄졌던 칠엽굴에 올랐는데, 굴 바로 앞에 자이나교 사원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이나교 수행자가 우리를 따라오며, 이런 저런 말들을 했다.


“칠엽굴이 어쩌구 저쩌구 ….” 결국엔 자이나교 사원에 들어와 박시시(헌금)를 내라고 종용했다. 속으로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었다. 칠엽굴 주변에 조용히 앉아 있고 싶은 사람에게 자기들이 다가와, 묻지도 않았는데 시끄럽게 떠들지 않나, 그리곤 내려가는 우리를 잡고 돈을 달라고 하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외국인들을 ‘봉’으로만 보나.


라즈기르엔 현재 불교 ‘無’

 

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불교가 사라진 그 자리에, 한때 불교와 교세를 다투던 자이나교와 힌두교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점.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자이나교는 살아있고, 불교는 사라졌을까.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답을 쉽사리 찾을 수는 없었지만, 집히는 것이 한 두 가지 있었다. 불교가 인도 전체에 넘실거릴 때, 유명한 불교학자 리스 데이비스 교수의 저서 제목처럼 ‘불교 인도’가 되자, 불교도들은 왕족과 귀족의 후원을 믿고, 포교를 게을리 한 것이 ‘불교 쇠망’의 원인 중 한 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코삼비의 고시타 아라마 >사진설명: 코삼비의 고시타 장자가 부처님께 기증한 승원. 부처님은 코삼비에 갈 경우 주로 이 곳에 머물렀다.

생각을 끊고 칠엽굴에서 라즈기르 주변을 내려다보니, 힌두교 사원의 첨탑이 곳곳에 즐비했다. 청정한 비구들이 모여 수행하는 비하라(정사)는 없었다. “인도불교의 현실이 이렇구나”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라자가하는 불교 흥기(興起)의 토대가 된 도시지만, 부처님은 이곳에서 위해(危害)를 당하기도 했다. 사촌동생 데바닷타와 데바닷타의 꾐에 빠져 아버지 빔비사라를 감금하고 왕위에 오른 아자타삿투 왕으로부터 ‘심대한 공격’을 받았다. 〈출라박가〉·〈잡아함경〉·〈증일아함경〉 등에 의하면 아자타삿투의 지원을 받은 데바닷타는 자객을 보내거나, 돌을 - 돌은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이 왕사성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있었다 - 굴리는 등 부처님을 죽이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자, 데바닷타는 ‘날라기리’라는 사나운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위해하도록 보냈다. 술 취한 코끼리는 부처님을 보자, 코를 늘어뜨리고 조용히 섰다. 부처님이 오른손으로 날라기리의 이마를 만지며 게송을 읊자, 온순한 코끼리로 변했다.


술취한 코끼리 부처님 공격

 

<취상조복 >사진설명: 술취한 코끼리 날라기리를 교화하는 부처님. 알라하바드 박물관 소장.

라자가하와 더불어 중인도 바이샬리·코삼비 역시 부처님이 전도를 위해 자주 찾은 곳이다. 두 도시는 다같이 고대 인도 16대국·6대 도시에 포함되며, 바이샬리는 칸다키 강, 코삼비는 야무나 강변에 위치한, 고대 인도의 정치·상업의 중심도시였다. 코삼비의 경우 강을 이용한 무역은 멀리 미얀마까지 미쳤다 한다. 두 도시의 정치형태는 달랐다. 바이샬리가 브릿지족 연합에 속하는 릿차비족의 중심도시로 공화제를 취했다면, 밤사국의 수도 코삼비는 우다야나 왕의 치하에서 번영을 누린 군주제 국가였다.

 


부처님은 두 도시에 명망 높은 귀의자를 가지고, 때때로 교화를 위해 머무르곤 했다. 바이샬리에서는 릿차비 귀족들과 유녀(遊女) 암바팔리의 귀의를 받았으며, 마하바나(큰 숲. 大林)에는 중각강당이라는 큰 정사가 부처님을 위해 세워져 있었다. 〈선견율비바사〉 제10권엔 “큰 숲에 강당을 지었는데 강당 모양은 마치 기러기와 같았으며, 일체가 두루 갖추었나니, 부처님을 위해 이 강당을 지었다”고 나온다. 특히 암바팔리와 릿차비족은 부처님이 바이샬리에 도착했을 때 ‘공양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반면 코삼비의 우다야나 왕은 처음에 불교를 적대시했으나, 왕비의 한 사람인 사마바티의 감화로 부처님께 귀의했다. 아들 보디 역시 열렬한 불교신자가 됐다. 코삼비의 유력한 은행가 고시타·쿡쿠다·파바리카도 부처님께 각각 정사를 기증했다. 고시타 장자가 기증한 고시타 아라마는 코삼비 성 안에 있었는데, 이름을 새긴 석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마하박가〉에 따르면 코삼비 교단은 자주 논쟁 벌였다. “시비를 그만두라”는 부처님의 권유에도 코삼비 비구들은 “다툼과 싸움과 논쟁과 시비는 저희들의 일”이라며, 화친권유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들은 지극히 몽매하여 훈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2002년 4월5일 독립 인도의 초대 수상 네루의 고향 알라하바드에서 코삼비 유적지로 출발했다. 길을 몰라 물으며 갔다. 도착하니 오전 11시30분. 유적지는 옛 모습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코삼비 도시유적도, 도시유적지에 있는 아쇼카석주도, 코삼비 성벽도,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였다.

 


우기와 건기를 그렇게 수 백년간 반복했는데도 성벽과 도시유적이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기둥머리만 없을 뿐, 아쇼카 석주는 늠름하게 서있었다. 불교 유적지마다 있던 것이라, 석주를 보니 반가웠다. 손으로 석주를 쓰다듬으니 2천년 전의 온기가 전해오는 것 같았다.

 

코삼비 유적의 쓸쓸한 아쇼카 석주

 

사진설명: 코삼비 도시유적지에 있는 머리가 부러진 아쇼카석주.

천천히 걸어 고시타 아라마(수행자 휴식처)로 갔다. 그릇 파편들이 즐비했다. 발굴하다만 지층에는 완형의 토기들도 보였다. 나무를 주워 흙을 긁어내니, 토기가 떨어져 내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기 발굴’(?)에 빠져들었다. 다시 성벽에 올라 멀리 주변을 감상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산은 없고, 평원만 보였다. 성벽에 앉아 코삼비에서 설법하는 부처님 모습을 그려보았다. 코삼비에도 다른 불교유적지처럼 불교는 없었다. 있다면 아라마의 잔해만이 있을 뿐. 따가운 햇살을 머리에 받으며 멀리 아쇼카석주를 보았다. 그리곤 ‘불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쓸쓸한 발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석주가 자꾸만 뒤에서 잡는 것 같아 돌아보니, 황량한 유적 위를 바람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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