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노자 도덕경 해설 11-20

수선님 2023. 1. 22. 14:19

노자가 세계를 보는 기본적인 두 개의 범주인 무無와 유有의 역할을 설명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무의 역할을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는 장이다.

즉 무는 자신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다른 것들을 그것이 지향하는 어떤 방향으로 기능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노자가 보기에 세계는 이런 유와 무라는 두 축의 꼬임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주로 유의 범위만을 대상으로 思考한다.

노자가 당시의 여러 철학자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 무라는 영역을 포착했다는 점이다.

‘有’ 즉 구체적으로 있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무’는 바로 그런 편리함이 발휘되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2300년 뒤에 서양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은 선험적 표상으로서 순수한 직관이지 개념이 아니며, 현상의 잡다한 것이 일정한 관계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형식으로 분석하고 초월적 논리학을 펼쳐가는 데, 이 공간이라는 형식과 잡다라는 경험대상이 노자의 무와, 유에 맞닿아 있는 것 아닐까?

이장의 왕필의 주석에서는 아래의 해설과 같이 노자의 사상과 약간 다른 점을 보인다.

 

 

 

[道德經 第11章]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데,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 수레가 수레로 기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큇살, 곡 등의 유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 사이사이와 그 외부가 텅 비어(無) 있기 때문이다. 바퀴의 안과 밖 바큇살의 사이사이, 곡의 내부 등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바퀴가 바퀴로 되어 굴러가는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왕필주석>: 穀所以能統三十輻者, 無也. 以其無能受物之故, 故能以寡統衆也: “곡穀이 30개의 바윗살을 통괄할 수 있는 것은 무無 때문이다. 무는 사물들의 온갖 현상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음으로써 많음을 통괄할 수 있는 것이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텅 빈공간이 있어서,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된다.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텅 빈공간이 있어서,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 그릇의 안이 뚫려 있지 않고 찰흙으로 꽉 채워져 있거나, 방의 실내가 콘크리트로 꽉 채워져 있거나 문과 창이 뚫려있지 않다면, 그릇이 그릇으로 기능을 하거나 방이 방으로 기능을 할 수 없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그러므로 유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는 기능을 하게 한다.

-‘유’ 즉 구체적으로 있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무’는 바로 그런 편리함이 발휘되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왕필주석>: 木, 埴, 壁所以成三者, 而皆以無爲用也. 言無者, 有之所以爲利, 皆賴無以爲用也.

[왕필과 노자의 차이점] 왕필의 체계는 적음寡의 극점인 무無 곧 도道가 많음衆의 집합인 유有의 근거가 되는 구도로서, 피라미드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

분의 해석도 많은 바큇살이 하나의 곡穀 즉 살통의 빈 공간無으로 통일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왕필이 중점을 두는 의미는 많고 다양한 현상의 존재들이 하나의 무를 근거로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자는 무와 유는 본체와 현상이라든지 근거와 구체 그리고 일一과 다多 둥과 같은 질적 차등 속에 있지 않다. 즉 무는 용用이라는 역할을 하고, 유는 이利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자에게서 무는 유와 대둥한 차원에 있는 대립면이지만, 왕필에게서

무는 유의 통일성 및 합리성의 근거가 된다.

 

 

배腹는 나에게 있는 것을 느끼지만, 눈目은 밖을 향해 뚫려 있으면서 내가 아닌 저 멀리 있는 것을 본다. 배는 바로 내 폼에 있는 ‘이것’此 이고, 눈은 항상 밖에 있는 ‘저것’彼을 향해 열려 있다. 어떤 가치 체계나 이상 등은 모두 이 세계를 벗어나 저 멀리 있는 것들이다.

유가의 전통인, 성인이 만들고 성인이 전하는 성인의 말씀은, 바로 저 멀리 있는 어떤 이상으로, 우리가 내달려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고 아무도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어떤 이상을 위하여 우리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인내한다. 엄격한 금욕주의, 배타적 근본주의 등이 깃들이는 곳이 바로 그 이상이 굳건히 자리 잡힌 체계 안이다.

노자는 저 멀리 어떤 이상이나 체계를 상정하지 말자고 한다. 그 대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세계의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여 소박하게 살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거피취차去彼取此”의 의미이다. 저 멀리 정해져 있는 이상이나 체계(彼)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있는 이곳(此)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이 “유무상생有無相生’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유무상생”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자연을 대상으로 놓고, “거피취차去彼取此”의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건립하고, 그것을 “정언약반正言若反”의 방식으로 기술해 내었다. 그런데 노자는 그의 철학 체계를 이렇게 완성해 놓고 자신의 철학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나라의 형태를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규모가 작고 백성은 적은 나라로 파악하였다.

공자는 이와는 다르다. 공자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고 인간의 본질을 인仁으로 파악하였다. 노자가 “거피취차”의 방식으로 철학을 건립하였다면, 공자는 “거차취피去此取彼”의 건립을 내용으로 한다. 공자의 용어로 말하면 “극기복례克己復禮”인 것이다. 여기서 극복되어야 할 자아(己)는 자연적 자아이다. 즉 인위적 문화 체계의 세례를 받기 이전의 자아, 전통을 학습하기 이전의 자아인 것이다. 공자에게서 자연적 자아는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학습의 과정을 거쳐 다듬어져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이상적 문화 체계로 설정된 예禮로 나아가고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자아己는 여기에 있는 자아이고, 예禮는 저기 있는 체계이다.

 

 

[道德經 第12章]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다섯 가지로 구분된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구분된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다섯 가지 구분된 맛은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한다.

- 오색, 오음, 오미는 갖가지 색, 소리, 맛이 아니라 구분 확정된 다섯 가지의 색, 소리, 맛이다. 노자가 보기에 이 세계는 무한한 소리로 가득 차 있고, 그 소리들은 주위의 다른 소리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리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궁宮 • 상商 • 각角 • 치徵 • 우羽라는 다섯 가지 소리로 구분하여 한정하고 그 다섯 가지 소리에 특정 음가를 매긴 후에, 그 것들만을 통해서 이 세계의 소리들을 듣는다면 이 다섯 가지에 포함되지 않은 더 많은 무수한 소리들로부터는 배제된다. 즉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소리 외에는 들을 줄 모르게 된다. 이것이 귀머거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색이나 맛도 모두 같은 이치이다. 이 세계는 무한한 종류의 색의 스펙트럼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흑黑, 백白, 적赤, 청靑, 황黃의 다섯 가지만으로 색을 정하고, 그것들을 통해서만 색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나머지 무한한 색들은 배제되어 알지 못하니, 그것이 봉사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 노자의 뜻이다.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말을 달리며 즐기는 사냥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

- 사냥꾼들이 내달리도록 정해진 목표는 바로 그 사회가 공통으로 인정한 어떤 가치이자 이상이다. 유가의 인간이 도달해야 할 도덕적 사회 건설 같은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배제하고 또 억압한다. 그런 합의된 가치로부터 일탈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광포할 정도의 억압과 폭력을 가하는 것마저도 허락된다. 우리는 근대 역사 속에서 이런 경험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 ‘얻기 어려운 재화’라는 것도 어떤 특정한 가치 체계 안에서 그 가치나 이상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그 가치를 실현했음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얻기 어려운 재화’도 일정한 가치 체계 안에서의 일이며, 가치 집중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구조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사람들의 행위를 정당한 궤도로부터 이탈시킨다는 것이다.

是以聖人爲腹 不爲目 故去彼取此: 이러하기 때문에 성인은 배를 위할망정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배와 뼈대는 타고난 자연 상태 그대로의 것이며, 인위적 가치 체계가 스며들지 못하는 부분으로 자연성을 상징하고 있다. 배가 고프다거나 부르다는 판단은 어떤 체계를 근거로 한 판단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다.

- 노자는 이 세계를 구분해서 보지 않는다. 즉 이 세계는 배타적 본질을 영속적으로 가진 것들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로 꼬여서 움직이고 있고, 반대편 것으로 향해 열려있다. 그런데, ‘본다’는 행위는 어떤 것을 다른 것들과 구분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노자는 자기의 철학 체계와 어울리기 어려운 ‘본다’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총애나 치욕이 모두 인위적 가치 기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거기에는 아무런 본질적 가치가 없고, 총애를 받는 일도 욕됨을 당하는 일도 모두 일정한 가치 체계 안에서 생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 정반대의 것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한 것들이므로,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인위적인 가치 기준이나 이념 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총애나 욕됨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자연성으로 존재하는 생명력을 소중히 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위적인 목적에 의해 저 멀리 높은 곳에 있으면서 우리를 억압하고 인도하는 일정한 가치 기준이나 이념 체계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우리가 나면서부터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연성 즉 자연의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해서 통치하라는 뜻이다.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위적으로 조작된 가치 체계에 의한 유한한 평가에 불과한 총애는 하등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의미로 노자의 집안에서는 공자, 묵자, 법가 등의 이론이 모두 하등의 것으로 치부된다.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소중히 여기고 아낄 줄 아는 사람, 가치나 이념 체계보다는 직접적 생명력 내지는 자연성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제한된 이념 체계나 이상을 실현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통치자들이 일반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가혹하게 했는지 우리도 알고 노자도 알고 있다.

그래서 노자는 세상에 이념 체계를 덧씌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道德經 第13章]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총애를 받거나 수모를 당하거나 모두 깜짝 놀란 듯이 하라.

큰 환난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何謂寵辱若驚

총애를 받거나 수모를 당하거나 모두 깜짝 놀란 듯이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寵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총애는 하등의 것이다. 그것을 얻어도 놀란 듯이 하고, 그것을 잃어도 놀란 듯이 한다.

이것이 총애를 받거나 수모를 당하거나 모두 깜짝 놀란 듯이 하라는 말의 뜻이다.

何謂貴大患若身

큰 환난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나에게 큰 환난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及吾無身 吾有何患

나에게 몸이 없다면 나에게 어떤 환난이 있겠는가?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아낀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도를 마치 하나의 대상처럼 상정해 놓고 그것을 묘사하고 있다. 즉 도는 일부러 보려고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고, 일부러 들어보려 하지만 들리지 않으며 만져 보지만 그 정체가 만져지지 않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는 철학사적 의의도 바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하늘의 뜻(天命)이 지배하던 당시의 천명관天命觀을 극복하고 자연의 존재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을 건립하였다는 데에 있는데, 바로 여기에 그 특징이 담겨 있다. 자연의 존재 형식을 압축해서 하나의 기호로 범주화한 것이 도道이기 때문에, 이 도는 분석과 구분의 칼로 무장한 의지나 욕망이 개입된 지각 활동의 접근을 거부한다. 당연히 ‘시視• 청聽 • 박함’의 지각 활동 앞에서 도는 자신의 진상을 드러내 줄 수가 없다. 그것이 불견弗見(=不見之)이고 불문弗聞(=不聞之)이며 불득弗得(=不得之)이다. 또는 미微이고 희希이며 이夷이다.

도는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하나이기 때문에, 세 가지의 의미는 분별적으로 따져 물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자신의 본질을 가지고 배타적 존재성 속에 구체적으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 것이 세계의 가장 근저에서 세계의 존재 형식으로 기능 한다는 점에

서는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노자가 여기서 승승이라는 용어를 통해 주로 드러내고자 히는 의미는 이 세계가 새끼줄이 꼬이듯이 반대되는 대립 면들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반대편 것들끼리 서로 꼬이며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道德經 第14章]

視之弗見 名曰微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컬어 미라하고,

聽之弗聞 名曰希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일컬어 희라 하며,

搏之弗得 名曰夷

만져 보지만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이라한다.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이세가지는 끝까지 따져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섞여 하나이기 때문이다.

一者其上不曒 其下不昧

이 ‘하나’라는 것은 그 위는 밝지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가 않다.

繩繩兮不可名 復歸於無物

새끼줄처럼 두 가닥으로 꼬여 있어 개념화 할 수가 없으며, 이무 것도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며, 아무 것도 없는 모습이라 한다.

是謂恍惚

이를 일러 황홀이라 한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앞에서 맞이해 보지만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 보지만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옛날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현실을 다스린다.

能知古始 是謂道紀

득도한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는 장.

노자가 보는 세계는 무와 유로 대표되는 두 계열의 대립면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반대편에 두면서 꼬여 있다. 즉 무는 무 자신의 존재 근거(본질)에 의존해서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와의 관계 속에서 무가 되며, 유도 무가 있기 때문에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는 세계 안에서 주인의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무를 의식하는 손님으로 있으며, 무도 유를 의식하는 손님인 것이다. 이 세계에 있는 어떤 것도 자신만의 배타적 본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곤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대립면을 의식하는 손님일 뿐이다. 인간도 그렇다. 인간도 이 세계에 손님으로 와 있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모두가 주인으로 군림하려 한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학생이 주인인 학교, 자본가가 주인인 기업, 재단이 주인인 학교 등,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은 손님으로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자신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서로가 주인일 때는 그 가운데 힘 있는 자가 실제적인 주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경쟁이 살아나고 갈등이 심해지며 핏대 선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구나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형태의 중심주의가 깃들여 있다. 사회는 항상 조화를 강조하지만 모두가 주인의 태도를 가지고 이루는 조화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는 경박하고 천박하며 사나워진다. 모두가 손님의 태도를 가지고 이루는 조화는 넓고 환하며 너그럽다. 주인으로서 이루는 사회가 남성적이고 아버지 같다면, 손님으로서 이루는 사회는 여성스럽고 어머니 같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이 세계가 손님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자신을 주인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장자는 이 의미를 [제물론] 첫 구절에서 ‘오상아吾喪我’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즉 진정한 자아는 자신을 풀어헤쳐,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이세계의 존재 형식, 풀어헤쳐진 세계에 가만히 얹어 놓는다.

 

 

[道德經 第15章]

古之善爲道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옛날에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미묘하고 현통하며,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 아주 신비한 초능력을 가졌단 뜻이 아니라, 미微하고 묘妙한 영역까지도 자신의 인식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그 딱딱한 재질이 이루고 있는 가운데의 텅 빈 공간이나 그 딱딱한 재질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공허한 영역과 딱딱한 재질로 된 틀의 관계로 그 그릇을 이해한다.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알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뿐이다.

- 도를 하나의 개념 안에 가둘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도라는 글자를 붙이고 억지로 크다고 개념화하듯이, 똑같은 맥락에서 도를 구현하는 자의 모습도 억지로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其若凌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조심조심 하는구나 마치 살얼음 낀 겨울 내를 건너는 듯이 한다.

신중하구나! 사방을 경계하는 듯이 한다.

진중하구나! 마치 손님과 같다.

풀어져 있구나! 마치 녹아 가는 얼음과 같다.

돈후하구나! 마치 통나무 같다.

텅 비어 있구나! 마치 계곡과 같다.

소탈하구나! 마치 흐린 물과 같다.

- 하나의 체계를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행동은 과감하고 확실하며 재빠르다. 특정 종교의 광신도나 인생 목표가 돈이나 권력 등 특정한 것으로 분명히 확정된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득도한 사람들의 행위는 향상 주저주저한다. 그것은 겁을 내거나 비겁해서 주저주저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전체 국면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경솔하게 선택하지 않기도 하려니와 어떤 상황에서나 그 반대편까지도 고려하는 자의 신중한 모습이다.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動之徐生

누가 혼탁한 물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가만히 있는 것을 움직여서 생기가 살아나게 할 수 있는가?

保此道者 不欲盈

이런 이치를 지키는 자는 꽉 채우려 들지 않는다.

-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특정한 ‘본질’ 안에 갇혀있지 않다. 즉 자신 안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며, 그 반대방향을 향해 열려 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본질을 최대로 발휘시키려 하거나 그 본질로 꽉 채우려 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노자의 철학은 아주 해체적이다. 앞에서 말한 바람직한 태도들도 모두 해체적 태도들이다.

夫唯不盈 故能蔽而不成

오직 채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

- 꽉 채우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해체적 세계관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숭상하거나 드러내야 할 본질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밑으로 가라앉히고 숨기며 맥없이 풀어놓는다. 앞에서 말한 행위 모습들은 모두 자신을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이 세계 안에 너덜너덜할 정도로 해체해놓은 모습이다.

 

도道를 체득한 사람이 하는 기능과 그 결과에 대한 말.

노자는 성인들을 통해 계승되고 보강되는 전통을 통해서도 아니고,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난 후에 얻어진 이성을 통해서도 아니며, 절대자가 부여한 영혼도 아니고[去彼], 오직 구체적인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운행 모습을 보고[取此], 그 안에서 자연계의 운행원칙을 찾아냈다.

도의 운행 원리를 지키고 모방해서 실천하면 그 통치는 장구하다는 것이다. 그 통치자의 통치도 오래 간다. 대립면의 양쪽을 모두 포괄하고, 변화의 원리를 장악하지 못하면 대립되는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선택된 면과 선택되지 못한 면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갈등 때문에 통치는 점점 어려워지고 결국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도道를 모델로 하여 대립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 죽을 때까지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된다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구久가 노자 철학의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道德經 第16章]

至虛 恒也 텅 빈 상태를 유지해야 오래 가고,

- 허虛는 노자 철학의 핵심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 허는 충冲과 같은 의미에서 도가 존재하는 모습이고, 도를 모델로 하는 행위자의 모범적 행위 형태이기도 하다. 허虛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위와 인식의 이상적 상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의욕이나 의지 그리고 목적 등에 좌우되지 않은 행위이며, 어떤 특정한 이론이나 가치체계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행위이다.

守中 篤也 중을 지켜야 돈독해진다.

- 중中 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대립되는 양쪽을 모두 거머쥐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한쪽을 선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립되는 두 면의 관계로 되어 있는 세계의 존재 형식을 벌써 알아버려서 혹은 이미 그러한 세계의 진상을 체득해 버려서 어느 한쪽을 흔쾌히 선택하는 것이 잘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어정쩡한 것이다.

萬物竝作 吾以觀復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만물은 무성하지만, 제각각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다.

- 뿌리란 현상계의 다양한 존재를 통일하는 그런 근원으로서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은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는 반返 혹은 복復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의 뿌리이다. 하늘을 향해 성장하고 번창하던 모습과 대립되는 면, 즉 아직 싹도 나오기 전이나 찬란한 성장이 잦아드는 곳으로서의 ‘뿌리’이다.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뿌리로 돌아기는 것을 일러 정이라 하는데, 명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명을 회복하는 것을 늘 그러한 이치라 하고, 늘 그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제멋대로 나쁜 일을 하게 된다.

- 번창함이 극에 이르러 쇠잔한 방향으로 나가면 바로 고요의 단계(靜)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끝이나 단절이 아니고, 이 세계의 운행 원칙(命)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운행 원칙이란 반대편을 향해 부단히 움직이는 과정이며, 언제나 그러한 원칙(常)인 것이다. 노자는 우리에게 이 항상성, 즉 자연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칙을 체득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을 명明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知와는 반대되는 인식 방식이다. 관계와 변화 속에 있는 세계의 진상과 전체적인 국면을 파악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며,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 대립면까지 포착하고 운동하는 과정까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늘 그러한 이치를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할 줄 알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왕 노릇을 하는 일은 곧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며, 하늘에 부합하는 일이 곧 자연의 이치이다.

- 한 나라를 경영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립되는 국면을 공평하게 다루고 조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공평무사해야 이른바 왕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물론 자연의 운행 모습이 바로 이러하다. 왕 노릇을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조직에서나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지식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포용력을 갖고, 또 그 포용력 때문에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공평한 태도로 왕 노릇을 하는 것이 천도이며, 이것이 바로 도道 인 것이다.

道乃久 沒身不殆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오래 갈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이 장은 노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통치의 수준이나 통치자의 태도 그리고 그런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들의 태도 등을 기술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가장 수준 높은 정치는 백성들이 통치자의 존재만 알 뿐 그가 위에서 무슨 방향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려고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정치이다. 백성들이 통치자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정치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치라 하면 통치자가 어떤 이념을 설정하고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그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도덕적 방향으로, 묵자는 공리적 방향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려 한다. 노자는 이런 식의 통치를 아주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각장 원문의 해석은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기본으로 하고 일부 다른 참조할만한 해석이 있을 경우 추가한다.

[道德經 第17章]

太上, 下知有之

최고의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

其次, 親而譽之

그 다음은 친밀함을 느끼고 그를 찬미한다.

- 백성들을 어떤 특정한 이념으로 몰고 나가되 통치가 부드럽고 정의로워서 백성들이 그 통치자를 기리고 떠받드는 통치이다. 사실 이 정도만 되어도 속세의 통치로는 최고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인간을 특정한 이념으로 묶고,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자연의 운행 방식과 일치하는, 인간의 자연성이 보장되는 통치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통치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이념과 맞지 않는 부류와 그 이념에 잘 맞아 환영받는 부류로 나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배제되는 부분을 남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이상적 정치 형태를 실현할 수가 없게 된다.

其次, 畏之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 통치자가 백성들을 억지로 인도하는 단계로서 공포와 억압의 수단으로 백성들을 강제하는 통치를 자행 한다

其次, 侮之

그 다음은 그를 비웃는다.

- 통치자가 유약하여 백성들이 통치자룰 능멸한다기보다는 통치자의 억압의 단계가 도를 지나쳐서, 백성들은 통치자를 자기와는 관계가 전혀 없는 영역의 인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비록 그가 공포 정치를 자행하여도 백성들은 그를 가지고 유머를 만들고 말 반찬 삼아 가지고 논다.

信不足焉 有不信焉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도 통치자를 믿지 못한다.

-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못하여 많은 규정을 만들고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해 주고 심지어는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까지도 경전에 담아 전파한다면, 그것은 곧 백성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통치 형태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도 통치지를 믿지 않는다.

悠兮, 其貴言

조심스럽구나! 그 말을 아낌이여.

- 말을 귀하게 여긴다거나 아낀다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이념이나 기준을 함부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백성들을 신뢰하는 통치자만이 할 수 있다. 백성들을 신뢰하지 않으면 주저주저하거나 말을 아끼지 못하고, 바로 명령을 하게 되거나 강제 수단을 동원하게 될 것이다.

- [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박완식 훈장 강의 발췌]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부터 스스로 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밑에 있는 사람들이 불신하게 되어, 말로써 다스리려하니, 법령을 밝히고, 백성이 하지 말아야할 것을 금지하고, 백성들에게만 도덕인의를 하라고 중책을 마낀다.(由在上者 自信此道不足 故在下者 不信之耳 言: 多彰法令 禁民爲非 而責之以道德仁義爲重)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마무리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는 원래부터 이랬어!”라고 하는구나.

- 백성들은 공을 세우고 일이 잘 되어도 통치자가 통치를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으로 혹은 원래부터 이러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노자는 다른 학파에서 지고한 가치로 간주되는 인의仁義나 효자孝慈 같은 덕목, 그리고 충신과 훌륭한 인간형이 부정적이고 제한적인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인과 의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런데 노자가 보기에 그것은 대도大道라는 우주의 존재 형식으로부터 이탈된 인위적 가치들이다. 이런 덕목은 특정한 목적(도덕적 개인의 완성이나 도덕적 국가의 실현)을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런 덕목을 인위적 고안품으로서 대도 이후의 일로 치부해 버리거나, 자연의 대도를 모델로 하는 방식보다 한 단계 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인위적인 지적 활동(知나 智)은 모두 대상을 정지시키거나 구분시켜놓고 진행된다. 일정한 체계를 근거로 어떤 특정 대상을 다른 것들로부터 고립시켜서 부각시키는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지혜라는 지적 활동을 통해 허위나 인위가 생겨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지적 활동과 반대되는 노자 식의 인식은 명明이라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효성과 인자함은 가정에 질서가 없기 때문에 제창되는 덕목이라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만일 인간의 자연적인 심사가 자연적으로 발휘되고 있다면 효성이나 인자함에 대한 강조는 아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충신忠臣을 강조하는 것도 국가가 혼란스러워 충신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우리가 본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 왔던 덕목들을 매우 제한적인 기반 위에 서 있는 인위적 가치들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道德經 第18章]

大道廢 有仁義 대도가 망가져서 인의를 제창하게 되고,

慧智出 有大僞지혜가출현하여 큰 거짓이 있게 되며,

六親不和 有孝慈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니 효성이나 자애의 관념이 생겨냐고,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가 혼란하여 충신이 있게 된다.

- 이 장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인의란 본래 대도 속에 있기 때문에 대도가 파괴된 시대적 상황에서라면 인의도 있을 수 없고, 육친 간에 불화하는 환경 속에서는 효자孝慈와 같은 행위는 눈밭에 있는 사람에게 숯을 보내 주는 것처럼 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즉 사회 규범이 흐트러져 있을 때는 인의의 행위도 제대로 설 수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가 이론이 성聖과 지智를 통하여 국민을 통합하고(덕치 또는 왕도정치) 국가의 전체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았다면, 노자는 절성絶聖과 기지棄智를 통하여야 국가의 진정한 이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인仁, 의義, 교巧, 이利를 끊어버리면 효孝자慈를 회복하고 도적이 없어진다.

노자는 우리의 자연성이 보장되는 진정한 삶의 세계로 인도하는 요령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한다. 소박한 태도를 유지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줄이라! 소박함은 문화적 칼이 닿기 이전의

자연적인 모습이다. 특정한 모습으로 갈리기 이전이며, 특정한 내용으로 판단되기 이전의 것이다. 법정스님이나, 김수환추기경 같은 분의 삶이 이 같은 삶일까?

 

 

[道德經 第19章]

絶聖棄智 民利百倍

성인이라는 이상을 끊고, 지혜로운 자의 형상을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훨씬 커진다.

絶仁棄義 民復孝慈

인의의 관념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은 효성과 인자함을 회복하게 된다.

絶巧棄利 盜賊無有

기교와 이로움을 끊어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此三者 以爲文不足

이세가지는 모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충분치가않다.

故令有所屬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방침을 지키게 한다.

見素抱樸 少私寡欲소박함을 견지하고, 사욕을줄여라!

도를 체득한 사람 즉 성인이 속세에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장이다.

장자에서 지인至人이 득도한 상태를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오상아吾喪我,심재心齋,좌망坐과도 같은 상태를 말함인 것 같다.

성인의 태도는 일반인과 다르다. 그것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식모食母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라 할 수 있는데, 모母는 바로 도道를 상징하고, 식食은 모든 만물을 살게 해 주는 자양분 내지는 근거를 상정한다. 식모는 천지의 어머니 즉 천도이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태도들은 모두 도를 근거로, 즉 도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천도에서 인도를 연역해 내는 노자 철학의 체계가 일관성 있게 운용되고 있다.

 

 

[道德經 第20章]

絶學無憂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 “배움”이란 어떤 확정된 방향이나 전통으로 확립된 내용을 모방하고 견지하는 형태의 앎이다. 이런 형태의 배움(學)은 성인의 말씀으로 전해지는 학습 내용을 계속 모방하고 반복해서, 전통과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경지(從心所慾不踰矩)에까지 도달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그런데 이런 형태의 배움에는 항상 도달해야 할 목표가 정해지고, 그 목표에 가까이 간 순서대로 우열이 가려지고, 이것이 경쟁과 갈등을 만들고 사회에 차별적 계층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배움의 방식이 적극적으로 운영되는 사회나 개인은 항상 우열의 구분 속에 있게 되고, 인간은 항상 그 우열을 가리는 기준에 따라서 평가받기 때문에 더 나은 곳으로 올라서려고 하는데 그것이 곧 모든 근심의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노자는 전통이나 기준을 모방하여 답습하고 추종하는 형태의 배움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야 갈등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唯之與阿 相去幾何

‘예’와 ‘응’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美之與惡 相去若何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거리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人之所畏 不可不畏人

백성물이 두려워하는 군주는 또 그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荒兮 其未央哉!

넓기도 하구나, 그 끝이 드러나지 않는다.

- 성인은 세계를 어떤 특정한 가치 체계를 통해 관계하지 않고, 모든 가치들 속에서 아주 너른 모습으로 어느 것이나 다 포용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사람들은 다 희희낙락하구나,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봄날 누각에 오른 것처럼 떠들썩하다.

我獨泊兮 其未兆

나 혼자 조용하구나,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沌沌兮 如嬰兒之未孩

혼돈스러운 모습이구나, 마치 웃음도 아직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 같다.

- 어떤 특정한 가치 기준 속에 있지 않은 성인은 특별히 즐겁거나 슬픈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아주 담박한 태도이다. 웃음을 아직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의 담박한 표정과 같다.

儽儽兮 若無所歸

축 처져 있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 분명한 기준은 우리에게 차별과 배제를 인정하라고 하면서 근심 속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어떤 귀결점도 정해져 있지 않아 축 처져 있는 모습이 바로 성인의 모습이다.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 나만 홀로 부족한 듯하다.

我愚人之心也哉

나는 어리숙한 마음을 가졌구나!

沌沌兮

우매하고도 우매하다!

俗人昭昭 我獨昏昏

세상 사람들은 다 분명한데, 나만 홀로 어둑하구나.

俗人察察 我獨悶悶

세상 사람들은 다 자세히도 살피는데, 나만 홀로 어눌하구나.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고요하고도 깊구나, 마치 바다와 같다. 바람결 같구나, 어디에도 메임이 없다.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사람들은 다 무엇인기를 위하지만, 나만 홀로 쓸모가 없다.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나만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구나. 식모食母를 귀하게 여긴다.

 

 

 

 

 

 

 

 

 

노자 도덕경 해설 11-20

노자가 세계를 보는 기본적인 두 개의 범주인 무無와 유有의 역할을 설명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무의 ...

blo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