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하착(放下着)>
‘방하착(放下着)’은 본래의 공(空)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라 하는 뜻이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라.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비워라.
---아집을 놓아버려라.
대체로 이런 뜻이며, 일반적인 선어(禪語)인 동시에 화두(話頭)이다.
중국 당(唐)나라 중기에 ‘무자화두(無字話頭)’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등 많은 화두를 창출한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가르침으로 <조주록(趙州錄)>에 실려 있다.
그 무렵 중국에 엄양(嚴陽) 스님이란 분이 있었다.
인품이 매우 어질어서 ‘엄양 존자’라 불렸다.
그 엄양이 어느 날 조수 선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선사, 한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一物不將來時如何).”
참선에서는 한 물건도 가지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물건보다도 우리 마음에 담고 있는, 시(是)야 비(非)야, 좋다 궂다, 예쁘다 밉다, 나다 너다, 하는 분별을 말하는 것이다.
분별은 번뇌요, 수행에 큰 장애가 되는 것이기에 여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말씀 올리니, 이에 조주 선사가 한 답이,
“놓아버려라(放下着)”라고 했다.
애당초 한 물건도 가지도 온 것이 없다고 했는데 무엇을 놓아버리라고 하는 것인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엄양은 다시 여쭈었다.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까(旣是一物不將來 放下箇甚麽).”
가지고 온 것이 있어야 내려놓을 것인데,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했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내려놓을 것입니까, 하고 항의 비슷한 반문이었다.
그러나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엄양의 의식 속에 온갖 번뇌 망상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려운 길을 마다 않고 조주 선사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조주 선사의 눈에는 그 엄양이 시달리고 있는 천 근 같은 번뇌 망상이 다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주 선사의 답이,
“그렇다면 도로 짊어지고 가거라(擔取去).”였다.
헌데 조주 선사의 이 말끝에 엄양이 크게 깨쳤다고 한다.
‘방하착(放下着)’에서 ‘방하(放下)’는 내려놓다, 또는 놓아버린다, 버려라, 비우다 하는 뜻이고, ‘착(着)’은 명령형인 방하를 강조하기 위한 어조사이다.
그리하여 방하착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我)’, ‘내 것’에 꺼들려 이를 붙잡으려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에서 벗어나라, 아집을 놓아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으라 하는 말이다.
중생은 마음이 흐리다고 한다. 온갖 잡스러운 때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중생에게도 원래 청정심(淸淨心)엔 부처와 같은 마음인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이 흐려있어 그 불성(佛性)이 가려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 있느냐의 차이다.
뭐가 가리냐 하면 바로 번뇌에 휩싸인 내 마음이 가리고 있다.
그러니 이런 마음으로 죽어라고 진리를 찾아봐야 더더욱 가려질 뿐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이 마음이 그 부처의 성품(불성)을 가린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려면 먼저 ‘마음부터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아라’ 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라고 하는 ‘방하착(放下着)’이 선승들에겐 구해야 할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본래 빈손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다가 간다.
우리 중생의 삶의 목표가 그렇게 채우는 데에 있다. 끊임없이 붙잡고 늘리는 일에 매달려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붙잡으려 아등바등하며 한 세상 살다가 간다.
그것이 우리 중생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이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는 ‘잡음’, 그 속에 우리가 바라지도 않는 고(苦), 그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함을 달관한 조주 선사가 어리석은 중생에게 뱉은 말씀이 ‘방하착’이다.
‘방하착(放下着)’에서 ‘하(下)’는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불성(佛性),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 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하착’이란 일체 모든 꺼들림, 걸림, 집착을 내려놓고 내 안의 ‘참 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엄양 존자와 조주 선사 사이에 벌어진 선문답을 보면 꽤 날카롭게 대들듯한 기세이다.
내려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데 도로 짊어지고 가라고 했으니, 엄양 존자는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선문답의 핵심은 ‘방하착’에 있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또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냐 하는 엄양 존자의 불만 섞인 반문,
그리고 “그러면 그 업보(業報)를 도로 짊어지고 가라”는 조주 선사의 악담 같은 답이다.
조주 선사의 일갈에 놀란 것일까. 그 순간 엄양 존자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방하착’이란 손 안에 물건을 쥐고 있다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상념 없이, 소유욕 없이, 떨어뜨려 손 안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방하착을 할 수 없다면 네가 가지고 온 그 업보를 도로 짊어지고 가라는 말이다.
죽은 공(空)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세상의 어떤 행위에도 뛰어들 수 있는 자세를 말하고 있다.
결국,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며, 그들 사이에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다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의미는 허무주의적이거나 죽은 공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정적이고 초월적인 양상 속에서의 역동적인 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공에 대한 얕은 깨달음을 얻은 자는 공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을 자유로이 공에 내맡길 수가 없어 당혹하게 된다.
깨달은 조주 선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네가 이른바 공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죽은 공에 깊이 침잠해 있던 엄양 존자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견(無見)에 빠진 마음에 분별이 일어났다.
그래서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반문한 것이다.
조주 선사가 다시 일러주었다. “그렇다면 그 업보를 짊어지고 가거라.”
무(無)만 보고 유(有)를 보지 못한 것을 조주 선사가 꼬집어 주었다.
이는 완전히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그 순간 엄양 존자는 죽은 공에서 깨어났다.
내려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데 조주 선사는 무엇을 짊어지고 가라고 한 것일까?
이 선문답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엄양 존자는 자신은 이미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다는 생각 아래 조주 선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정도면 수행이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전제 하에 다짜고짜로 한 물건도 가지도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여기서 여하(如何)는 어느 정도냐 하는 의미로서 자신의 수행이 이만하면 된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다.
한 사람이 있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은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모른다.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헌데 엄양 존자는 어떠한가.
백전노장 조주 선사가 보기에 그에겐 아직 집착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이 하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 물건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하는 그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놓아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조주 선사가 그를 향해 ‘방하착하라’고 한 것은 바로 한 물건도 가지도 오지 않았다고 하는 그 의식마저 놓아버려라 하는 것이다.
그런 의식까지 버린 상태가 돼야 비로소 무집착이고 무념 ․ 무일물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한 물건(一物)이란 물질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과 고정관념을 가리킨다.
‘한 물건(一物)’이란 마음, 즉 번뇌 망상을 가리킨다.
번뇌 망상 속에는 집착심. 근심. 걱정. 불안 등 모든 중생적인 분별이 다 포함돼있다.
무엇이든 내려놓지 못한 채 지니고 있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짐은 어떤 짐이든 마음을 억누른다.
방하착은 무소유, 무집착을 상정한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고정관념이나 집착심, 욕심, 그리고 선입견도 갖지 말라, 마침내 ‘나[아상(我相)]’도 놓아버려라 하는 말이다.
우리 마음은 무엇이든 ‘잡는’ 마음이고,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가 텅 빈 잡음 이전의 자리이다.
그러니 중생이 잡음(집착)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그 집착심을 모두 텅 비우고 놓아버려 잡음 이전의 본래 텅 빈 마음자리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자리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방하착’이라 이른다.
놓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쉴 수가 있다.
잡아서 버겁고 무거운 마음을 놓음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다.
진정 놓았을 때 우리 마음은 본래로 가는 것이다.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 되는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의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되고 안 되고도 없고, 잘나고 못나고, 잡고 놓음도 없는 자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나툰 것이다.
우리 모두의 본래 고향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 추구하며 살아가는 궁극의 본향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자리를 바로 깨쳐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본래 있던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자리를 깨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본래자리와 하나 됐을 때 일체 모든 삶의 의문이 ‘참’의 가르침으로 풀린다.
도저히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던 의문들이 풀리게 된다.
금방 죽을 것 같이 느껴지던 병의 고통이며, 돈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경제력에 대한 집착이며, 사람에 대한 집착, 명예, 지위, 권력, 학력, 배경, 대학, 이성… 이 모든 집착들을 놓아버림으로써 본래 자리에서 나오는 확연한 해답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놓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 됨이며, ‘나’를 잡고 사는 아상의 굴레를 벗고 부처님 생명으로 산다는 말이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성 부처님’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주는 사람도 분별 이전에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도 분별 이전에 있어서 이를 받아들일 능력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도 저도 아닌 우리네 범부중생이 ‘방하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힘든 경계이기도 하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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