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
<화엄경>과 <법화경>, 그리고 거기에 <금강경>을 더해 대승 삼부경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과 <법화경>은 대승불교에서 사상적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는 중요한 경전이다.
AD 1세기를 전후해서 흥기한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기존 소승불교(부파불교)를 뒤엎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운동이었던 대승불교는 주로 인도 북부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리하여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조성되고,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조성됐다.
그렇다면 <화엄경>과 <법화경>, 이 두 경전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화엄경>은 비로자나불을 설한 경전이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의 불(佛)은 부처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말한다.
<법화경>은 ‘묘법(妙法)’이라는 법을 설한다. <묘법연화경>에서 ‘묘법’이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화엄경>을 불(佛)을 말하는 경이고, <법화경>은 법(法)을 말하는 경이라고 구분해 왔다.
그리고 <화엄경>과 <법화경>의 대표적인 품은, <화엄경>은 「보현행원품」과 「입법계품」이고, <법화경>은 「관세음보살보문품」이라 했다. 그리하여 <화엄경>에서는 실천을 우선으로 하는 보현보살을 상수로 하고 있으며, <법화경>은 지혜를 우선으로 두는 문수보살을 상수에 두고 있다.
이 두 경전이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불경으로 쌍벽을 이루어, <화엄경>을 해가 동편으로 떠오를 때 걸린 최고봉에 비유한다면, <법화경>은 해가 서편으로 질 때 걸린 최고봉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이상의 글을 종합하면, 흔히 <법화경>은 법(法)을 설하는 경이고, <화엄경>은 불(佛)을 설하는 경이라고 짝을 지어서 말하며, <법화경>이 지혜 제일의 문수보살을 상수로 하는 경이라면, <화엄경>은 행을 으뜸으로 하는 보현보살을 상수로 하는 경이라 할 수 있다. 곧 <화엄경>의 결론은 결국 보현행원이다. 보현행원을 찬양하면서 <화엄>경이 끝난다는 말이다.
화엄사 대웅전
그러면 두 경의 간단한 내용부터 살펴보자.
<화엄경(skt. Maha vaipulya buddha avatamsaka sutra)>의 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따라서 대방광불(大方廣佛)이라고 하는 부처님(비로자나불)에 대한 것을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화경>의 원명은 <묘법연화경, skt. Saddharma pundarika sutra)>으로서 묘법(妙法)을 설하는 경전임이 경명에 나타나있다.
여기서 <화엄경>이 비로자나부처님을 설하는 경전이라는 말은 전지전능하고 머무르지 않는 곳이 없는[無所不住] 비로자나불의 불가사의한 힘[不思議神力]과 불가사의한 세계[不思議世界]와 불가사의한 작용[不思議作用]과 불가사의한 공덕[不思議功德]을 지닌 부처님임을 설하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화엄경>에서는 자아를 초월한 자기 및 자기본성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아는 것이다. 다시 또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세계의 실상을 실현하는 경전이다. 여기에 <화엄경>의 본뜻이 있고, 한없이 웅대한 세계가 이 경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설법상에서 보면 설주(說主)와 설처(說處)가 다양하다. 부처님은 해인삼매에 들어 광명만을 놓고 있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여러 보살들이 법(法)을 설하고 있다. 설법의 장소를 보면 지상, 천상 그리고 다시 지상의 순서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7곳에서 9회(60화엄은 8회)에 걸쳐 설하는 형식으로 돼있다.
따라서 설법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 경의 이름에서만 보면 부처(佛)만을 설하는 경인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불신(佛身)사상ㆍ보살(菩薩)사상ㆍ유심(唯心)사상ㆍ연기(緣起)사상ㆍ정토(淨土)사상 등이 고루 설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화엄경>을 여러 사상의 보고(寶庫)라고도 한다.
그리고 <반야경>은 공관(空觀)의 시작이고, <화엄경>은 공관의 끝이라고 할 만큼 <화엄경>은 반야계 경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잡화엄(雜華嚴)’이라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모두를 아우르는 사상적 기반을 <화엄경>에서 찾고 있으며, 화엄사상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분이 원효(元曉) 대사와 의상(義湘) 대사이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깨달음과 그 내용을 그대로 표명하고 있는 대승경전 중에서도 교학적 사상적으로 불교의 핵심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본다.
<화엄경>은 불교를 연기론에서 보는 최고의 경전이다. 연기론은 ‘무엇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연기이고 아무것도 없으면 연기를 할 수 없다. 업이 있기에 고통이 있다. 무명이 있기에 생로병사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연기론의 입장이다.
<아함경>에서 구사론(俱舍論)이 나오고, 그것이 발전해서 <유식론(唯識論)>이 된다. 그것이 또 한 단계 발전한 것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일즉다(一卽多)의 입장이 발전해서 중도(中道)사상으로 발전하고, 그리하여 불교는 유의 입장에서도 중도이고 무의 입장에서도 중도로 결정짓는다. <화엄경>의 이러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표현된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의 성품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모든 근원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느니라.
그리고 <화엄경>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장세계(華藏世界)’라는 것은 평등해 차별이 없으며, 이 세상(利土)의 유(類)가 생각할 수 없이 많지만 그 하나하나가 자재하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편안하게 잘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근본불교(원시불교)의 중심과제가 고(苦)의 원인을 규명해 그 고(苦)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에 비해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비되는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해서,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인 영원불멸의 부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해답으로서 깨달음[覺]과 실천행[行]을 보살의 가장 큰 원행(願行)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다가 보니, <화엄경>은 실천행의 보살인 보현보살을 상수에 두고, <법화경>은 지혜 제일의 문수보살을 상수에 두는 차이가 있다.
불국사
그리고 <법화경(法華經)>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약칭이다. 이 경은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開), 보여(示),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悟) 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게(入) 함을 목적[개시오입(開示悟入)]으로 편찬된 경전이다.
즉, <법화경>은 중생으로 하여금 개시오입(開示悟入) 불지지견(佛之知見)의 길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그리하여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한국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경전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화엄경>을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하고, <법화경>을 대승종교(大乘終敎)라 해서 최고의 가르침으로 꼽았으며, <번화경>은 대승불전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서 <법화경>은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많이 존숭되고 신봉해온 초기대승경전 중의 하나이다. <묘법연화경>에서 ‘묘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가리킨다. 그래서 일체 모든 경전과 모든 부처님을 배출하는 것이 일불승(一佛乘) <법화경>이다.
<법화경>은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의 가르침으로 분류한다. 적문(迹門)이란 적불(迹佛-방편불)의 가르침이란 말이고, 본문(本門)이란 본불(本佛)의 가르침이란 말이다.
천태 대사 지의(智顗)는 <법화경> 28품을 반으로 갈라서, 앞의 절반에 해당하는 제1 서품부터 제14 안락행품까지를 적문(迹門) 곧 ‘적문법화경’이라 했으며, 여기서는 ‘방편품’이 핵심이라 했다.
그리고 <법화경> 제15 종지용출품에서 제28 보현보살권발품까지를 본문(本門) 곧 ‘본문법화경’이라고 구분했는데, 여기서는 ‘여래수량품이 핵심이라 했다.
적문(迹門)이란 적불(迹佛)의 교(敎)란 말이고, 본문(本門)이란 본불(本佛)의 교(敎)란 말이다. 80 평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현생의 부처님을 적불, 영원한 부처님을 본불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적불(迹佛)로 보는 경우와 본불(本佛)로 보는 경우가 있다.
적문에서는 대체적으로 성문성ㆍ연각승ㆍ보살승의 삼승을 전부 모아 가지고 우리의 최종 목적인 하나의 불승으로 나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부처님의 수명이 장구(長久)하게 이어간다는 구원불성(久遠佛性)을 다루고 있어서 법의 영원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경에서는 보살만이 성불하고 다른 자는 구제에서 빠져 있는데, <법화경>에서는 악인이나 여인까지도 성불이 가능하다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화경>은 회삼귀일(會三歸一), 일불승(一佛乘),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말한 경전으로서 불교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에 유포돼 많은 민족들에게 애호됐으며, 가장 깊이 교학적ㆍ사상적으로 조직 정리됨으로써 천태종과 법상종의 소의(所依)경전이기도 한다.
<법화경>은 불교를 실상론(實相論)에서 보는 최고의 경전이다. 실상론은 공(空)을 전제로 한다. 공을 전제로 하는 경은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 가운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시간이 경과하면 색이 변해 공이 되고 공이 변해 색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색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형(有形)이 무형(無形)이고 무형이 유형이란 말이다.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란 말이다. 물체가 비어 있고, 빈 것 그 자체가 물질이라는 뜻으로 <반야심경>의 원리이다. 이것이 한 단계 발전하면 <법화경>이 된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開) 보임(示)으로써 부처님의 지혜에 들게(入) 함을 목적으로 편찬된 경전이다.
<법화경>은, <화엄경>이 일즉다(一卽多)의 입장인데 반해 다즉일(多卽一)의 입장이다. 이 우주의 가득한 모든 중생이 세계의 하나에 귀의한다. 하나란 부처님의 본성이다. 따라서 <법화경>의 요지는 아래의 게송으로 표현된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모든 법은 본래 그대로가 적멸한 부처님의 열반의 모습이다.
수행자들이 이러한 도를 행하면 오는 세상에 부처님이 되리라.
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와 우주가 그대로 열반상이고 부처님의 세상이므로 내가 실천하면 곧 부처요, 실천하지 않으면 곧 지옥 중생일 뿐이란 말이다.
불교에는 연기론(緣起論)으로 보느냐 실상론(實相論)으로 보느냐에 하는 관점이 있는데, <화엄경>은 불교를 연기론에서 보는 최고의 경전이며, <법화경>은 실상론에서 보는 최고의 경전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상체계를 두 가지로 나누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인생의 가지가지 모양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현상의 시간적 연구와 그러한 우주 만물의 바탕이 무엇이냐 하는 본체계의 공간적 연구, 두 가지 부문이 있다.
불교에서는 앞의 현상론(現象論)을 연기론이라 하고, 뒤의 본체론(本體論)을 실상론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 연기론과 실상론을 체계 있게 이해만 하면 불교교리와 사상을 가장 올바르게 아는 것이 된다.
연기론에는 ①업감연기론 ②아뢰야연기론 ③진여연기론 ④법계연기론이 있고,
실상론에는 ①삼세실유론 ②무상개공론 ③유공중도론 ④제법실상론이 있다.
업감연기론은 <구사론>, 아뢰야식연기론은 <유식론>, 진여연기론은 <기신론>, 법계연기론은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고, 실상실유론은 <구사론>, 무상개공론은 <삼론(중론, 백론, 십이문론)>, 유공중도론은 <유식론>, 제법실상론은 <법화경>에서 설하고 있다.」- 황성기
※무상개공론(無相皆空論)---설일체유부의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을 부정하고 나온 설이 무상개공론이다. <성실론(成實論, Satyasiddhi-sastra)>에 의지해 나온 설로 주관적인 나의 존재도 실제로 있지 않고 객관적인 일체 사물도 모두 공하다고 보는 견해이지만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 부정의 차원에서 공을 내세운 편공(偏空)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후대에 평가 받은 설이다.
※유공중도론(有空中道論)---유식학의 세친(世親, 바수반두)이 주장한 이론이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공사상(空思想)은 유소득(有所得)의 그릇된 망집을 타파하는 것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용수가 비었다(空)는 말로 있다(有)는 것을 부정한 의도는 그 있다는 차별적인 그릇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취해진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무한히 부정하는 방법 때문에 그는 마침내 무상개공(無相皆空)을 주장하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현상계의 모든 만물은 비록 우리의 심식(心識)이 전변(轉變)한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또 그러한 현상을 전변시킨 우리의 심식 역시 거짓된 것일망정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므로, 부정만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거짓으로 존재하는(假有) 겉모습만을 상대로 해서 망집을 일으킨 때문이지만, 그것이 모양으로 봐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非空), 동시에 그 바탕(體性)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非有).
우리가 파도나 새끼줄을 그 겉모습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것들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바탕 측면에서 볼 때는 단지 물이나 지푸라기일 뿐, 물이 없는 파도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사물의 실체는 공한 것도 아니고(非空), 있는 것도 아닌 것(非有)이 본래의 올바른 모습이며, 이것이 곧 중도(中道)라는 것이 바수반두(世親)가 주장하는 유공중도설(有空中道說)이다.
<화엄경>은 ‘유(有)’사상의 최고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법화경>은 ‘공(空)’사상의 정화라 할 수 있다.
<화엄경>의 유즉공(有卽空)이라는 중도사상은 결국 <아함경>에서 유독 실유(實有)만을 고집하던 사람들이 <구사론>과 <유식론>을 거쳐 <화엄경>에서 유즉공의 중도사상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아함경>에서 공사상만을 고집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중부가 이러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고 본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의 발생과 함께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중관학파의 공관철학이 등장한다.
이들은 <반야부 경전>을 소의로 해서 체계적이고 매우 논리적인 공의 철학을 완성한다.
‘공(空)’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상을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의 철학을 보살의 실천적 행동철학으로 전재시킨 것이 <법화경>이다.
이런 점에서 <법화경>의 사상적 핵심은 ‘공즉유(空卽有)’이다. 일체의 존재는 자기라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엄연한 현실은 우리들 눈앞에 전개돼있다는 점이다. 곧 실상론이다.
그리하여 중도사상의 최고봉은 <화엄경>이요, 중도철학의 사회적 실천을 가르치는 경전의 최고봉이 <법화경>이라는 점에서 결국 ‘유즉공’ ‘공즉유’의 중도사상에서 대승불교의 사상이 절정에 달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화엄경>은 우주 삼계가 모두 일심(一心)의 발현이며, 일체중생이 모두 한마음 속에서 한마음을 의지해 한마음[일심(一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법화경>은 모든 수행은 성불이 목적이고, 모든 강이 바다에 모이듯이 결국은 부처 하나로 집결된다[귀일(歸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하고, <법화경>은 일승(一乘)사상을 설했다.
<법화경>에는 아미타불의 명호는 있어도 비로자나불의 명호는 보이지 않는다. 아미타불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영원한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면서 뭇 중생들의 수명과 안락을 보장해주는 대자대비의 부처님이다.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은 시방변만불로서 보편적이며, 무한정적인 불타이다. 이 시방변만불인 비로자나불은 <법화경>에 세워진 구체적인 시방제불을 보편화하고 무한정화한 것으로서, 이 시방변만불은 시방제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이라는 일불(一佛)이며, 그 한 부처가 시방(十方)에 변만(遍滿)한 것이다.
<화엄경>은 한자로 20여만 자, <법화경>은 7만여 자가 된다. 그런 방대한 경전을, <화엄경>은 「보현행원품」에서, <법화경>은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요약 축소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란 일체생명의 에너지, 즉 생명력이고, 교(敎)는 가르침을 말하니, 이는 곧 일체중생의 생활이 바로 불교임을 말한다. 우주는 커다란 학교요, 중생은 부처를 향해 나아가는 학생이다. 학생은 많고 학교도 다양하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 만생이 모두 불교에 속해 있으니, 이러 함을 바로 <화엄경>과 <법화경>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이 각기 있고, 두 경전을 모두 존중하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을 존숭하고, 일본은 <법화경>을 매우 존중한다.
화엄 10찰이라 해서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거대 사찰은 대개 화엄사상을 지향하고, 원효(元曉), 의상(義湘), 지눌(智訥), 휴정(休靜) 등 고승들도 대개 화엄사상을 지향하는데 비해, 일본에서 소위 고승이라 칭하는 신란(新鸞)과 니치렌(日蓮) 등은 모두 철저하게 법화사상을 지향했다.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원융무애(圓融無礙)이고, <법화경>의 핵심사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다. <화엄경>의 이치는 온 우주가 부처님의 깨달음 아래 다 녹아들어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경지이다. 하나 속에 여럿이,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모든 존재가 모두를 서로 비쳐주는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달린 구슬방울과 같다는 것, 그것이 원융무애이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다시 회삼귀일(會三歸一)로, 그 하나로 돌아가게 만드신 것이니, 모든 법이 본래부터 적멸해 모든 존재를 위해 끝없는 원력으로 일대사인연을 이어가시는 여래의 경지에 다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끝이며, <화엄경>의 처음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사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꽃을 피워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통적 귀일불교로 이끌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분이 물었다. 이 스님에게 가면 <금강경>이 최고라 하고, 저 스님에게 가면 <천수경>을 지송하라고 하고, 또 다른 스님에게 가면 <법화경> 사경이 제일이라 하는데, 모두 다 할 수도 없고, 그 중 한 가지만 하려면 도대체 무얼 해야 합니까?”
사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불교는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모든 강물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러므로 자칫 하면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제 깜냥대로 이해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愚)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천수경>이 비타민 A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비타민 C, <법화경>은 비타민 D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하나 되는 가르침, <금강경>은 아상(我相)을 없애는 가르침, <법화경>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장과 상황을 잘 생각해서 그에 맞는 가르침을 선택해 꾸준히 공부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코 <화엄경>을 권한다.
<화엄경>이야말로 종합비타민 같은 경전이다.
<화엄경>의 엑기스라 할 수 있는 「용수 보살 약찬게」만 놓고 보더라도, 삼신불(三身佛)로부터 시작해서 문수, 보현, 관음, 미륵보살은 물론 수많은 보살과 성문, 그리고 39위(位) 신중에 이르기까지 사부대중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또한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들 중에는 비구, 비구니는 물론 심지어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렴족왕(無厭足王) 내지는 사창가 여인인 바수밀다(婆須密多)와 이교도들까지 포함돼 있다. 이 세상에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는 없다.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면 그뿐이다.」 - 월호 스님
춘원 이광수(李光秀)가 “<화엄경>이야말로 세계문학의 최고작품의 하나”라고 찬탄한 바 있으며, <화엄경>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세계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에 본뜻이 있고, 그러한 웅대한 세계가 이 <화엄경>에 펼쳐져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불하시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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