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이야기

화엄의 세계(이사무애법계ㆍ사사무애법계를 중심으로)

수선님 2022. 9. 11. 12:44

<논단>

화엄의 세계

-이사무애법계ㆍ사사무애법계를 중심으로-

 

 

 

  화엄경(華嚴經)의 정식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이를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불타발타라 지엄(智儼)화상이 한역한 것은 모두 60권 34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칭 60화엄이라고 부르며, 예로부터 화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구역(舊譯)이라 부른다. 두 번째는 실차난타가 한역한 것으로 모두 80권 39품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80화엄이라고 하며,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 번째는 계빈국 출신의 반야가 한역한 것으로, 40권 1품으로 되어 있어 보통 40화엄이라고 부른다.

   이 방대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화엄사상을 신라(新羅) 제30대 문무왕(文武王661) 6년에 의상(義湘)스님이 당(唐)나라 종남산 지상사 지엄(智儼608-668)화상 문하에서 10년간을 방대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60권을 전문으로 공부해서 마침내 지엄(智儼608-668)화상의 기라성 같은 수많은 제자들을 제치고 지엄 화상의 대를 이어 화엄학(華嚴學)을 가르치는 강백이 되어 수많은 제자들에게 화엄학(華嚴學)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 때 의상(義湘)스님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의 핵심 요지를 210자 7언(言) 39(句)로 축약(縮約)하여 54각의 4각인에 새겨 넣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법성게(法性偈)라 한다.

  이글에서는 <화엄경>과 <법성계>, 속에 있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礙界)에 관한 내용 몇 구절을 알기쉽게 풀이해 보고자 한다.

 

   1.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이는 화엄경에 나오는 말인데,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전체 속에 부분이 있지만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제법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중도연기(中道緣起)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님은 오늘날 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구성원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분리 할 수 없다. 분리 할래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그게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하나 빠져 가면 결국 전체가 없어진다. 전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잘돼야 전체가 잘되고, 전체가 잘돼야 나도 잘 되는 것이다. 화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기법이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고,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적 인간관은 일즉다 다즉일이다. 단순하게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사회(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나 이외의 100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100명 속에 내가 있는 것이며, 나에게 있어서 그 100 사람이 모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 곧 나 자신이 100명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즉다 다즉일은 ​ 비단 인간사회의 삶의 모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으로까지 확산되기도 한다. 이 우주와 나, 이 주변환경 삼라만상과 내가 둘이 아니란 말이다.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깊이 연결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과학의 소립자 세계에서도 이 사실이 그대로 성립되고 있다. 물리학의 발달로 인해 미세한 물질을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신비스러운 성질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소립자는 끊임없이 변하며 유동적이라는 성질과, 한 개의 소립자에는 다른 모든 소립자의 영향이 투사돼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소립자는 다른 소립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된다는 성질이 밝혀지고 있다.

   근대과학은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세포를 생각했다. 그러니 한 세포 속에 그것을 형성하는 보다 작은 단위가 있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한 개의 소립자가 다수의 소립자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일즉다 다즉일로서 일심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람의 세포 하나하나를 떼어내서 검사를 하면, 그 사람의 DNA 전체를 다 읽어 낼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떤 생활습관을 갖고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다 읽어낼 수을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의 조상까지도 해석해 낼 수 있다. 세포 하나를 떼어내서 봤는데 일즉다라, 하나 속에 모든 것을 다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니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요, 내 현제자매인 것을. 이게 화엄의 세계이다.

   20세기 최고 역사학자의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는 <화엄경>을 일고 탄복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가올 21세기는 ‘화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한국 수학계의 거장이자 오랫동안 카오스(chaos) 이론과 불교사상을 연구해온 김용운(1927~ )교수는 그의 저서 <카오스와 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교사상은 모든 현상에는 본질이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그리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해 가므로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학입니다. 이는 20세기 이후의 과학의 절대성, 완전성, 확정성, 명백성을 부정하면서 상대성, 변화,무아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가령 카오스 이론의 특징 중 하나인 프랙탈(fractal)은 전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곧 전체임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기계론적인 과학이 아니라 성장하고 사멸해 가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다.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이 다음날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기상학자 로랜츠의 ‘나바효과’는 카오스 이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것을 ‘인연’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 하자면, 우리 인간사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이고, 우주는 카오스이며,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관점에서, 우리네 개개 인간사 자체가 곧 카오스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진즉부터 불교가 말해온 진리이다.

 

   2. 일중일체 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이는 의상대사의 <법성계>에 나오는 말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다. 즉,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일즉다 다즉일’과 맥을 같이하는 말이다.

   연기법의 근본원리는 낱낱의 이것과 저것은 그 자체로 존립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낱낱이 모두 온 우주만큼이나 큰 생명의 장(場)으로 살고 있으며, 우주는 모든 생명체의 수만큼 겹쳐진 생명의 우주인 것이다. 이를 화엄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한다.

   화엄의 실상인 연기법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인드라(indra) 그물망의 비유가 있다. 인드라신(帝釋天)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망을 인드라망이라 한다. 그 인드라망의 그물코마다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다. 그 그물코에 박힌 보석들에는 저마다 다른 모든 보석들이 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보석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두 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낱낱의 무한 보석들이 서로 반사하고 있는 것을 비유해서 화엄에서는 중중무진 세계의 연기법이라 한다.

   연기법의 근본원리는 존재 낱낱은 그 자체로 존립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계의 그물망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로서 서로를 존립하게 한다는 말이다. 곧 원인이 나에 의해서 결과인 네가 있게 되지만, 나의 원인도 너에 의해서 있게 된다. 결과인 나에게 원인은 네가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들여다 보면 어느 것 하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상대와 더불어 상호 의존관계를 맺으면서 전체의 존재를 들어내고 있다. 개별은 전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전체는 개별을 떠나서는 전체로서의 존재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 우주 만유의 존재 원리이다.

   모든 사물도 그러하고 중생의 삶도 이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러한 우주 만물의 상호 의존관계의 이치를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설명하고 있다. 개개의 중생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치를 일중일체(一中一切 )라고 한다면, 반대로 그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나’가 존재하는 것은 ‘다중일(多中一)’이 된다. 그래서 서로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서로 원융화합하며 현상계를 존재케 하는 이러한 원리를 화엄에서 연기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상입상즉(相入相卽)의 원리라고도 한다. 모든 현상의 본질과 작용은 서로 융합해 있다는 뜻이다. 즉,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자연, 개체와 전체가 일체라는 말이다.

 

   3.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

   이 말도 <법성계>에 나오는 말로서, 하나가 곧 전체요, 여럿이 곧 하나란 말이다. 이것은 전체 속에 부분이 있지만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역시 <화엄경>의 ‘일즉다 다즉일’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과 저것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장(場)에 함께 있다. 우주법계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의 관계도 이와 같다. 낱낱이 우주법계(宇宙法界)를 이루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우주법계의 모든 것이 원인이 돼 또한 낱낱이 존재한다. 일체만물이 연기실상(緣起實相)의 장에서 완전히 동일한 생명을 이루는 전체이며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즉, ‘하나가 일체이고 여럿이 하나’라는 말은 여럿과 하나의 관계성을, 상호융섭 됨을 말한다. 어찌 보면 하나와 일체는 각각의 형태와 모습을 지니고 있어 개별성을 띠고 있지만, 그 개별성의 존재는 상호 다른 존재와 거리를 두고 대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의 일관성으로 융섭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호 관계의 상즉(相卽)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 그 자체가 바로 상즉의 법계라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개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 하나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차별의 세계가 아니라 차별의 세계를 법안(法眼)으로 바라보면 무차별의 세계이고 절대평등의 실상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무명에 가려진 육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즉해 있는 융화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미움이 싹트고, 다툼이 일어나고 편견이 생깁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좌절이 찾아옵니다. 부처가 그토록 강조한 무아란 바로 자신을 기준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고,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사회의 개별자는 아상에 사로잡혀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집착으로 말미암아 투쟁과 갈등, 경쟁이 일어나게 된다. 인간과 사물, 자연과의 관계에는 환경파괴와 훼손으로 결국 서로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서로 융섭해야 한다.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진리의 세계이므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것이며, 어느 것 하나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한 순간의 마음속에 일체가 있고, 하나의 먼지 속에도 일체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큰 생명에서 나온 존재들이며, 남이란 또 다른 나이다.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 삶이야말로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의 진수다. 남이란 크게 보면 또 다른 나이다. 때문에 위 글에서 ‘즉(卽)’은 긍정의 시(是)이자, 양변을 여읜 중도이다.

 

    4.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

   이는 <화엄경>의 주요명제인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一卽多 多卽一)'라고 하는 말을 원용해 우주만유를 일대연기(一帶緣起)로 보고 있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즉, 이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나 하나라는 말로서 화엄교학의 근본이념인 법계연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 ‘일미진중함시방’ 은 작은 하나의 티끌(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 포함돼 있고, 또한 어느 특정한 티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티끌(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도 똑 같이 그렇게 돼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주 작다고 해서 무시할 것이 아니다. 그 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다 포함돼 있다. 그리고 낱낱의 티끌, 낱낱의 사상(四象)들이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낱낱 그 하나하나의 속이 다 충만 돼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은 티끌 하나 속에 주의 비밀이 다 숨겨져 있고, 티끌 하나를 세밀히 분석하면 그 속에서 우주의 진실을 다 케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시방에서 ‘시방’은 동ㆍ서ㆍ남ㆍ북 4방에, 북동ㆍ동남ㆍ남서ㆍ북서의 4방을 더하고, 거기에 상ㆍ하를 합하면 시방이 되는데, 곧 세상천지, 우주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작은 티끌 하나에도 시방세계(우주)가 다 펼쳐져 있고,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뜻인데, 이는 시방세계의 티끌 속에도 또 다른 시방세계인 무한한 우주가 펼쳐 있으므로, 이렇게 이어지는 우주는 무한해서 끝이 없다는 말이다.

   ‘일미진중 함시방’은 넓고 좁음(廣狹)이나, 크고 작음(大小), 많고 적음(多少), 길고 짧음(長短) 등이 서로 걸림 없는 경계이다. 작은 티끌과 시방세계를 비교를 해서,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과학의 소립자 세계에서도 이 사실이 그대로 성립되고 있다. 물리학의 발달로 인해 미세한 물질을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신비스러운 성질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소립자는 끊임없이 변하여 유동적이라는 성질과, 한 개의 소립자의 존재는 다른 소립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된다는 성질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근대과학은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세포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세포 속에 그것을 형성하는 보다 작은 단위가 있고, 그들은 나름대로 다른 모두와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세포 분열은 한 개의 모세포가 2개의 딸세포로 나누어지는 현상으로, 먼저 핵이 나누어지는 핵분열을 한 후 세포질이 나누어지는 세포질 분열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세포가 분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갓 태어난 아기는 몸무게가 약 3~3.5kg 정도이지만 성인이 되면 아기 몸무게의 15배에서 20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키도 커지게 된다.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세포의 크기가 커져서일까? 아기는 정자와 난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수정란이라는 한 개의 세포에서 출발해 약 3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모습으로 태어난 후,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성인으로 자라난다. 즉 세포가 분열하여 그 수가 늘어나야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세포는 어느 한계 이상으로 커지면 세포 내부와 외부의 물질 교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핵이 세포를 통제하기 어려워지므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커지면 더 이상 커지지 않고 2개의 세포로 나누어지는 세포 분열 과정이 일어난다.세포 분열은 세포가 분열할 때 나타나는 방추사 의 유무에 따라 무사 분열과 유사 분열로 나누어지며, 유사 분열은 다시 염색체 수의 변화에 따라 체세포 분열과 감수 분열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불교적인 인간관은 ‘일미진중 함시방’인 동시에 ‘일즉다 다즉일’이라고 한다.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마치 한 개의 소립자가 다수의 소립자를 구현하고 있는가 하면, 한 개의 소립자는 그 다수의 소립자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일미진중 함시방’이면서 ‘일즉다 다즉일’로서, 이는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하게 평등해서 서로 주고받는 상융 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제법은 중중무진으로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중도연기의 세계이며, 화엄의 무애법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한 순간의 마음속에 일체가 있고, 하나의 먼지 속에도 일체가 있다고 말한다.

<참고 자료>

아미산(이덕호) 사법계

 

 

 

 

 

 

 

 

 

화엄의 세계(이사무애법계ㆍ사사무애법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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