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당체즉공(當體卽空)>

수선님 2023. 1. 1. 15:48

<당체즉공(當體卽空)>

 

당체즉공(當體卽空)’이 공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인데, 모든 존재 및 현상은 그 자체로 공()이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엔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일체(一切)는 분석 또는 해체과정을 거칠 것 없이 그냥 그대로 공()한 것이라는 말이다.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은 꿈이요, 헛것이어서 실성(實性)이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공이란 것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만법이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는 같을 수 없어 변화무상하고 전변무상이라,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공간에도 사실은 존재할 수가 없다. 

 

부처님 말씀에 제법이 공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뜻을 어리석은 중생은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해서 끝에 가면 공이라, 이렇게 보통은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승법(大乘法)은 그렇지가 않다. 참다운 공을 이해하려면 따져서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색즉공(色卽空)이라 했듯이, 색은 물질인데, 물질 바로 그대로 공이란 말이다. 

 

내 몸도 공, 여러분 몸 역시 공이다. 여기 있는 테이블도 역시 바로 공이다. 그래서 색즉공이다. 심지어 소리도 공이다. 소리도 성즉공(聲卽空)’인 것이다.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공하다는 말이다. 불교의 ()’을 이해할 때 분석할 석()’과 공()자를 합한 석공(析空)을 말할 경우가 있고, ‘곧 즉()’과 공()자를 합한 즉공(卽空)을 말하기도 한다. 

 

석공(析空)은 현대 물리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서 쪼개고 쪼개서 그야말로 아주 궁극적인 데까지 이르러서 모두가 다 소립자(素粒子)가 되고 종당에는 에너지 파동으로 비어버리는 것을 석공이라 한다. 이와 같이 과학적으로 따져 들어가서 이해하게 되는 공이 석공이다. 

 

이에 비해 즉공(卽空)은 현대인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인데, 바로 있는 것 그대로 공이란 말이다. 사람을 보면 사람 그대로 공이고, 금은 금 그대로 공이어서 바로 당체(當體) 그대로 비어있음을 말한다. 

<반야심경>의 색즉공(色卽空)과 같은 말이다. 바람에 의해 일어난 파도가 그대로 물이고, 물 그대로 파도인 것을 직관해서 그대로 보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당체즉공이다. 

분석공(分析空)은 성문(聲聞)들이 이해하는 공이고, 인연공(因緣空)은 연각(緣覺)이 이해하는 공이며, 즉공(卽空)은 보살이 이해하는 공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안목에 따라 보고 듣는 수준을 달리한다고 해서, 인간 존재 자체를 몇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보통 사람들, 즉 범부(凡夫)의 안목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집착해서 있다고 본다. 

둘째, 성문(聲聞)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존해, 보이고 들리는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안다. 

셋째, 연각(緣覺)은 스스로 체험을 통해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결합된 가유(假有)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을 안다. 교리적 용어로는 필경공(畢竟空)의 견해이다.

넷째, 보살들은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공하다는 것, 곧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안다. 

 

<능엄경>에서는, 보고 듣는 일은 모두가 환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공화(空華)]과 같으니, 번뇌가 소멸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고 했다. 이러한 <능엄경>의 가르침은, 보살의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존재가 그대로 공하다는 당체즉공(當體卽空)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 모두가 거품을 가지고 산다. 아무리 금붙이를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일체물질이 사실은 텅 빈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다. 물질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이다. 

과학자같이 물질을 분석해서 아는 석공(析空)이 아니라, 당체즉공(當體卽空)이고,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모든 세계, 즉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란 말이다. 

색즉공(色卽空)은 그렇게 분석한 뒤에 공()이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바로 공, 당체즉공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당체가 바로 공인가. 모든 것이 인연법을 따르기 때문인데, 연기법은 우주대법(宇宙大法)이다.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연기법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중생은 연기법을 모르고 성자는 연기법을 안다는 차이가 있다. 

진여불성이 연() 따라서 잠깐 나타난 것이 세상현상이다. 당체즉공(當體卽空)이란 말이다.” - 청화(淸華) 스님 

 

<반야심경>은 일관되게 공()사상, ()의 사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분명히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고, 모든 것이 있음을 근거로 해서 삶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한결같이 없다, 공이다, 공으로 봐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공으로 봤을 때 인간이 가진 무한한 능력을 한껏 펼쳐 보일 수가 있으며, 본래 갖춘 부처로서의 어떤 삶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일관 되게 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공()을 이야기를 할 때 연기(緣起)를 이야기한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이 모여서 비로소 무엇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그렇고, 우리 육신, , 자동차, 전부가 다… 

이것과 저것이 어우러져서, 그 어우러진 인연의 힘으로 있는 동안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인연의 힘이 다하면 낱낱이 흩어지기 때문에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공이라 하는 것이다. 

 

<반야심경>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또한 그와 같다.”라고 한 그 가르침은 즉공을 말한다. 

<유마경>에서나 <반야심경>에서나 중요한 점은, 색수상행식이 소멸한 뒤에 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곧 있는 그대로 공하다는 즉공을 말하고 있다. 

즉공이란, 지금 현상 이대로 공이라는 말이다. , 모든 사물 그대로가 공()이라 관()하는 것이다.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색()이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공()이며,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범부(凡夫),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성인(聖人)이라, ()이란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이 없어져서 공()함이 아니다.

만약 공()한 마음으로 색()을 볼 때에는 색()을 볼 때에도 또한 공()이며, 만약 색()을 보지 아니하고 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을 때도 또한 공()이며, 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알 때에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중생이란 모양()이 있음이니 모양이 있음이란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음이요, 

불성(佛性)이란 모양이 없음이니 모양이 없는 것은 곧 공()한 성품이라, 그러므로 진공(眞空)의 성품은 무너짐이 없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부처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인가? 

있음()도 보지 않고 없음()도 보지 않는 것이 부처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을 보는 것인가? 

마음에 일어남이 없고 사라짐이 없고 경계(境堺)를 대해서는 고요함이 부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니라...」이는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의 말씀이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육신 역시 잘 살아야 백년이면 다 죽게 돼 있다. 

어떤 견고한 자리도, 부귀영화도, 세월이 오래 가면 끝내 무상해서 흩어지고 망가져서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듯이 끝내 공()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경공(畢竟空)이다. 

그런데 <반야심경> 입장은,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분석공(分析空)도 아니고 무상하니까 공이라고 하는 필경공(畢竟空)도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 그대로 공이라고 한다.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공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그것을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고 한다.

물은 물 그대로, 물거품은 물거품 그대로, 돌은 돌 그대로, 사람은 사람 몸 그대로 공이다. 

분석공(分析空)이니, 필경공(畢竟空)이니 하는 것은 공을 이해해 보려고 억지를 쓴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다음도 <능엄경>의 말이다. 

견문여환예(見聞如幻翳) 삼계약공화(三界若空花) 

문복예근제(聞復翳根除) 진소각원정(塵銷覺圓淨)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 적조함허공(寂照含虛空)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

보고 듣는 것은 환영이나 눈병의 현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나니, 

들음을 회복해 눈병이 없어지면, 

번뇌는 소멸하고 깨달음만 원만하고 깨끗하다. 

깨끗함이 지극하면 광명이 사무쳐 통하고, 

고요하게 비추어 허공을 모두 머금을 제, 

다시 돌아와서 세간을 살펴보니 마치 꿈속의 일과 같아라.

<능엄경>의 제 1게라 할 만큼 뜻이 깊고 유명한 게송이나. 

깨달은 사람들의 삶이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든 삶이란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감각을 느끼고 사실들을 알고 또 거기에 따라 필요한 반응과 작용을 하는 일 그 자체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공의 철학을 역설한다. 

어떤 공을 설하든지 들은 대로 짐작해서 사량분별로 설하면 성문의 설공(說空)이고, 필경공이나 분석공을 설하면 연각의 설공이며, 당체 그대로가 공임을 설하면 보살의 설공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들도 근기에 맞춰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을 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깨달음의 극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때에는 앞에서 열거한 어떤 공도 설하지 않는다. 불조(佛祖)의 삶은 공()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세존의 살림살이며 세존의 삶이다. 

오대산에서 무착 문희(無着文喜) 선사가 죽을 끓이고 있을 때 문수보살이 죽 끓이는 솥 위에 나타나자 주걱으로 문수보살을 후려친 것이 무착 선사의 삶이다. 

임제(臨濟) 스님이 황벽(黃蘗) 스님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황벽 스님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팬 것은 황벽 선사의 설법이다. 

()이나 방()이나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수지(竪指)] 등의 법을 거량해 보이는 일이 곧 그들의 삶이며 설법이다. 이것이 선사의 법문이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의 설법과는 다르다.

보고 듣는 일은 모두가 환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으니, 번뇌가 소멸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고 하는 <능엄경>의 가르침은 보살의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존재가 그대로 공하다는 당체즉공을 말하는 것이다. - 무비스님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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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체즉공(當體卽空)>|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