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론(肇論)에서의 반야(般若)와 공(空)개념 성격 고찰
허인섭 (덕성여대 교수)
▒ 목 차 ▒
Ⅰ. 서 론
Ⅱ. 승조 시대의 사상적 배경
1. 위진현학(魏晋玄學)적 사유의 특성
1) 선진도가(先秦道家)의 세계 이해방식
2) 왕필(王弼) 현학의 사상적 특성
2. 도가와 불교의 개념 혼용 문제
1) 도․불(道․佛)의 개념적 사유 한계 이해와 그 극복방식의 차이
2) 연기론의 도가적 이해 양상
Ⅲ. 조론의 중국불교적 특성
1. 공(空) 개념 이해의 일반적 문제점
2. 조론에서의 반야와 공 개념 이해방식 사례 분석
1)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서의 반야 개념
2) 물불천론(物不遷論)에서의 존재 개념
3)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의 공(空) 개념
Ⅳ. 결론
Ⅰ. 서 론
승조(僧肇)는 대규모 역경의 위업을 이룬 서역(西域) 승려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수제자로써 그의 불교를 계승 중국화 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중국불교사는 또한 승조를 구마라집으로부터 직접 나가르주나, 제바의 새로운 교학을 사사받아 반야(般若)․공(空) 개념을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그 이전의 잘못된 이단사설을 극복한 이로 기록한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지위에 있는 승조가 진정으로 공 개념에 대한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극복하고 있는지를 그의 조론(肇論)을 통해 분석 확인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기존의 몇몇 논문에서 중국불교의 특성을 노장적 사유의 침투 맥락에서 분석해 본 바 있다. 이 글에서도 역시 필자는 동일한 맥락에서 조론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행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기존의 분석관점을 요약 소개하고 이를 후반부 분석의 틀로써 활용하고자 한다. 필자가 중국불교 특성 이해에 있어 그 분석 관점의 명료한 제시를 강조하는 이유는 중국 승려들의 불교 이해를 분석하는 중국불교이론발전사 서술에 있어 당연히 주어져야만 할 다음과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과문한 탓인지 쉽게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왜 중국인들은 불교이해에 노장적 개념을 원용 하였을까? 둘째, 노장적 관점에 의해 불교를 해석할 경우 불교의 온전한 해석이 가능한가? 셋째, 격의불교의 문제점을 발견한 도안 등 이후 중국승려들의 격의불교 극복노력은 성공적이었는가? 넷째, 같은 맥락에서 승조의 반야 혹은 공 개념 이해는 나가르주나의 공사상 혹은 근본불교의 무아 또는 연기사상에 부합되는가?
대부분의 중국불교사에서 위와 같은 맥락의 의문과 답변은 매우 피상적으로 주어지고 싱겁게 마쳐진다. 예를 들면 노장적 사유가 없었더라면 중국의 불교 수용은 어려웠을 것이라든지, 노장과 불교가 추구하는 일상적 세계의 극복 또는 초월적 세계에의 추구의 공통점이 이 두 사조를 만나게 했다든지 등의 단순한 진단으로 첫째 질문을 처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답변은 진정한 의미의 답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수준의 이해로는 두 번째 질문 - 노장에 의한 불교의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가 - 에 대해 긍정 부정을 떠나 결코 깊이 있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중국불교사 서술에서 노장사상의 중국불교 형성에 끼친 역할에 대해서는 대부분 모호한 입장이 취해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는 격의불교의 극복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결국엔 노장과 불교가 만나 보다 발전된 형태로써의 중국불교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논지가 중국불교사 서술의 대종을 이룬다. 필자도 중국불교가 나름의 이론적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면에서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 둘이 어떻게 만날 수 있었으며, 어떤 발전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충분치 않은 가운데 그러한 주장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쉽게 풀어 상세히 논리적으로 답하기 힘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동서비교철학에 비견할 만한 거대 담론과 대면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사상사에서의 노장적 사유의 기원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인도철학사에서의 불교의 지위 및 그 사상적 기원, 나아가 이 둘의 기원에 대한 인간사유 일반의 관점에서 본 공통점과 이에 따른 상호 습합의 가능성 등등의 논의가 수반되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요구한다.
더구나 이러한 이질적 사상 비교와 같은 거대 담론은 그 자체로 많은 취약점을 보이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담론은 사상사의 내용을 미시적으로 검토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즉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각 사상가들의 고유하고 섬세한 지적 고민을 담아낼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단순 추상화된 서울 지하철 노선도가 서울 지하철 구축의 역사를 상세히 서술하는 설명 책자보다 서울 지하철망의 기본 구조를 알고자 할 때 훨씬 유용하게 활용됨과 같이 그렇게 거대 담론이 지닌 거대 그물망으로 잡아낸 승조의 글에서 중국불교의 중요한 특징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성성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 이 글이 목표로 하고 있는 승조 조론이 지니고 있는 중국불교적 특성을 잡아내기 위한 그물망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짜여질 것이다.
첫째, 승조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위진시대 현학의 특성을 요약할 것이다. 이 특성을 살피기 위해 필자는 선진도가와 위진현학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설명은 승조의 조론에 보이는 선진도가적 사유방식 및 현학적 사유방식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둘째, 역사적으로 일어난 노장과 불교의 습합 방식을 분석하여 유사해 보이는 양자의 철학적 개념이 어떻게 혼용되며 그러한 혼용의 타당성에 대한 평가를 요약 한다. 이 분석은 조론에서 사용되는 노장적 불교용어의 진정한 함의가 무엇인지를 가늠하고자 할 때 도움을 줄 것이다.
셋째, 조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반야 혹은 공 개념의 분석을 위해 필자의 공 개념 이해를 소개 할 것이다. 이 작업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공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불교사적으로 볼 때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공 개념은 아주 단순한 종교적 신비 초월주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에서부터 극단적 허무주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로 규정짓기 어렵게 논의가 분분하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형태를 모두 소개하고 필자의 견해와 비교하는 것은 이 소논문의 목적에 맞지도 않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므로 단순한 형태의 논의를 통해 필자의 이해를 요약하고 이에 기반하여 승조가 어떻게 공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 규명해보고자 한다.
넷째, 앞의 세 그물망에 의거 조론 가운데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물불천론(物不遷論), 부진공론(不眞空論) 세 장을 선택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이 분석은 물론 승조 조론이 지닌 여러 특성 가운데서 극히 제한된 면모만이 걸러질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렇게 건져 올린 특성이 중국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Ⅱ. 승조 시대의 사상적 배경
승조의 생몰연대에 대해서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는 고승전의 승조전에는 AD 385-415로 되어 있으나 그와 관련된 한 여러 고문헌 기록과 연구를 종합해 볼 때 대략 AD 378-414 (304쪽)의 시기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대는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위진남북조 시기 가운데 동진 시기로 분류된다. 이 시기는 특히 강남으로 이주한 귀족들에 의해 발전된 현학이 사상계의 주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사상계의 조류에 따라 동진시대의 불교는 강남 귀족 명사들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청담신선적 불교, 노장현학적 불교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승조의 불교사상을 분석하는데 있어 이 시기의 주류사상 즉 위진현학(魏晋玄學)적 사유의 특성 파악은 필수적인 일이 될 것이다.
1. 위진현학(魏晋玄學)적 사유의 특성
앞서 지적한대로 도가철학은 중국인들의 불교 이해의 기본 틀로 작용하였음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대목은 중국불교가 중국불교적 이론을 구축하는데 있어서는 선진도가(先秦道家)보다는 바로 이 위진현학이 보다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불교 경전의 본격적인 역경작업이 위진 시대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현학이 신도가라 불릴 만큼 선진도가와는 다른 철학적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학적 사유가 선진철학에서 도가를 도가로 규정하게끔 한 도가적 세계이해방식 혹은 도가적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의심할 바 없다. 따라서 중국승려들이 그들의 논소에서 현학적 표현과 아울러 선진도가와 유사한 언어쓰임 방식을 활용하고 있음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이 양자의 차이점 가운데 필자가 주목하는 대목은 선진도가의 핵심적인 철학적 통찰들이 현학에서 적극적으로 재현되고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진한 통일제국시대 이후 중국철학이 섬세하지 못한 이론 통합의 경향 속에서 일종의 지적인 퇴보가 나타난다는 그래함의 통찰이 위진현학의 경우에도 적용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현학의 이러한 특성이 조론에서는 어떻게 반영되는 가를 주목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행하기 위해서는 이 글의 전개상 무엇보다도 선진도가와 현학의 차이점에 대한 보다 섬세한 구분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기존의 논문들에서 비교적 상세히 논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논의의 중복을 피하고 이 글의 목적인 조론의 반야와 공 개념 이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필자의 선진도가와 현학 이해방식을 축약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 선진도가(先秦道家)의 세계 이해방식
앞서 언급한 기존의 논문에서 필자는 선진도가 문헌에서 발견되는 세계 또는 인간에 대한 이해방식을 그들의 인간사유의 이분적 특성 이해에서 이분(二分)적 대립의 필연성 이해, 이 대립을 미분(未分)적 도체(道體)에 의해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이러한 노력 가운데 드러나는 자신의 언어쓰임의 한계 인식 등의 4 단계를 설정하여 적절하게 대응시켜 나누어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이분적으로 드러나는 혹은 인지(認知)되는 개물들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언명(言明)들 이다. 이러한 언명들은 종종 도가를 자연주의자로 규정하는데 활용된다. 그러나 도가를 단순한 자연주의자로만 규정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이른바 이분적 혹은 분별적 사고가 지닌 부정적인 면의 발로로써 일어나는 대립적 모순적 상황이 어떻게 초래되고 있는지를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분류될 수 있는 언명은 우선 이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분적 범주가 고립적이지 않다는 혹은 상호의존(相互依存)적이라는 자각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이와 같은 언명은 종종 노장을 동양에도 변증법적 사유가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가를 변증법적 세계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이러한 상호의존성의 근원을 미분적이고 역동적인 “도(道)”개념을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로 분류될 수 있는 선지도가의 언명은 이분적 대립의 이전 상태 전제와 그것의 묘사로 나타나는데, 이는 곡신(谷神), 현빈(玄牝)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신비적 존재 묘사와 수 없이 반복되어 나옴으로써 노장적 문장의 특이성을 규정을 수 있는 모순긍정(矛盾肯定)적 명제들 이다. 도가의 이 모순긍정 형태의 문장들은 동양이 서양과 다른 방식의 세계이해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언어쓰임 방식이다. 이것은 구체적 현상세계의 설명조차도 이분적 대립 범주 어느 한쪽만으로는 세계의 온전한 설명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함과 아울러 그 까닭이 이분적 세계가 이분화 이전의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개입됨으로써 도출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색으로부터 선진도가는 언어와 그들이 이해했던 근본세계와의 괴리(乖離)를 인식론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단계는 모든 언어적 표현은 그것이 단순한 이분적 사유에 근거한 표현이든 또는 모순긍정을 포함한 어떤 형태로의 표현이든 이분적 언어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성찰을 보여주는 문장들 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할 점은 이러한 반성적 통찰이 기능하는 한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단순 환원주의적 사유방식 - 예를 들면 단순한 도, 도체를 근원으로 보고 이로부터 현상의 불완전을 논하는 등등의 - 은 중국사상 전통에서는 자리 잡기 힘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중국철학사에 있어서 현학은 이러한 예단(豫斷)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현학 즉 신도가가 앞서 지적한대로 진한(秦漢) 시대부터의 사상통일운동으로부터 비롯된 섬세하지 못한 통합적 사유의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불교의 이론적 수용의 첫 틀로 기능했던 이러한 현학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2) 왕필(王弼) 현학의 사상적 특성
사실 일의적인 현학 규정으로 자유롭고 개성이 강했던 모든 현학자들을 설명해 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규정을 시도하는 이유는 위진시대 철학자들의 상호 상충되는 주장 가운데서도 공히 발견되는 일관된 사고방식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왕필이 귀무(貴無)론을 주장하고 배위(裴頠)가 그와 정반대의 숭유(崇有)론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양인 모두에게서 일단의 환원주의적 사유방식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필자가 기존 발표 논문에서도 설명했듯이 추상적 개념적 사유가 구체적 사태를 압도하는, 이른바 중국사상사에서 서구적 의미의 철학적 사유가 도드라지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위진 시대를 보며 나아가 왕필의 세계관을 현학적 사유의 중요한 전형으로 간주한다. 더불어 왕필 하안(何晏) 시대 전후에 본격적인 경전 번역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현학적 사유가 불교이해에 자연스럽게 침투되었으리라 예측해 본다.
일반적으로 동양 혹은 중국적 사유를 서구와 비교할 때 추상적 논리적 사유보다는 시적 직관에 의해 진행되는 사유방식이라고 쉽게 규정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관점을 중국철학사 일반에 무차별적으로 특히 현학 시대 이후에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서구적인 초월적 독립적 실체는 아닐지라도 중국적 방식의 추상화 개념화된 세계의 설정이 현학 시대로부터 본격화되고 있음은 왕필의 도덕경 주에 나타나는 도와 나무의 비유적 비교 표현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왕필은 나무의 뿌리를 근본(根本)으로 가지를 지말(枝末)로 대립시키는 이분적인 환원주의적 시각을 보여준다. 더구나 여기에서 왕필의 근본적 세계에 대한 이해가 선진도가에 비해 매우 소극적이고 정적(靜的)인 관점으로 일관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는 적음의 극치이다. 식은 규범 노릇을 한다는 의미와 같다.”와 같은 그의 일(一) 개념의 이해에서 그의 시각은 매우 극적으로 나타난다. 즉 그의 하나라는 개념 이해에는 선진도가에서 모순긍정적으로 표현되던 미분(未分)적 도체(道體)의 역동성은 현저히 약화된다. 비록 근본으로써의 신비성은 유지되지만 도체의 규정이 적음의 극치라는 매우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존재규정방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선진도가와는 구분된다고 하겠다. 하나(一)라는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철학의 중심개념이라 할 수 있는 본무(本無)는 ‘적음의 극치’라는 생각의 또 다른 지시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그의 귀무론(貴無論)이 인도불교에서 전통에서 파생된 반야(般若) 혹은 공(空) 개념을 중국적인 개념으로 변환시키는데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전제 하에서 승조의 글을 다룰 것이다.
2. 도가와 불교의 개념 혼용 문제
필자는 기존의 논문에서 불교와 도가가 지향하는 세계의 유사성을 그들이 각기 계승한 인도와 중국의 신화적 사유전통 속에서 찾아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특히 근본불교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베딕 이전 인도 원주민들의 신화적 사유에서 보이는 세계 이해와 연결될 수 있음을 설명하였는데, 도가적 세계관의 뿌리가 되는 고대 중국인의 신화적 사유가 보여주는 신화적 감수성이 베딕 이전 원주민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에 근거 불교와 도가의 세계관이 유사성을 지닐 수 있는 역사적 토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유사성은 곧 불교와 도가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세계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두 사유체계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삼범주 구조의 내적 원인을 추론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로 기능한다. 그러나 불교와 도가는 그 형성의 역사적 조건이 매우 다른 까닭에 그들이 추구한 철학적 목표와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한 세계의 그림은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1) 도․불(道․佛)의 개념적 사유 한계 이해와 그 극복방식의 차이
인도사상사에서 불교가 지니는 철학사적 의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어쩌면 근래에 새롭게 대두된 철학적 주제로도 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인도문화의 근원을 베딕 전통이 아닌 베딕 이전에서 찾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관점이 차츰 확대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불교를 베딕 우파니사드 전통이 아닌 베딕 이전의 전통과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는 아직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근본불교(根本佛敎)가 베딕 우파니사드 전통의 브라흐만 또는 아트만 개념의 철저한 부정인 아나트마 즉 무아(無我)이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이해하기만 하여도 불교를 베딕 우파니사드 전통의 한 변형으로 그렇게 간단히 분류할 일은 아님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불교가 아트만 사상과 같은 실체론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연기론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반추해보면 반 베딕 전통의 불교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물론 불교의 이러한 특성이 부각되지 못한 원인(遠因)은 불교이론 자체의 베딕화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지만, 근인(近因)으로써는 인도사상사에서 불교의 부활이 서구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들의 형이상학적 실체론적 세계관에 의해 불교해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러한 해석 전통을 경계하면서 반야(般若) 공(空)사상의 근본이 되는 무아 이론이 바로 반 베딕의 비실체론적 사유방식을 견지하고 있음을 줄곧 주목하고자 한다. 즉 불교는 아트만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사상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반야부(般若部) 경전에 수없이 반복되는 불교의 부정논리는 바로 이러한 생각을 표현해 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불교의 이와 같은 철학적 입장과 선진도가들이 이분적 범주의 하나로만 세계를 설명하는 사상가들을 비판하고 이의 극복을 위해 비이분적 사유를 추구하는 면을 비교해 본다면 양자에서 공통되는 세계관을 발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중국인들이 불교를 쉽게 자기화 할 수 있는 계기로 기능했던 반야경전류의 이중부정언명과 도가의 부정언명의 표현 형식 유사성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선진도가가 불교와는 다른 이질적인 철학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도가가 이분화된 세계를 부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상으로 설정한 세계가 고대 중국인이 지닌 신화적 미분의 세계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앞서 요약한 선진도가의 네 번째 단계의 철학적 통찰력은 불교전통에서 강하게 유지되는 인식론적 반성이 도가 전통에도 잠재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중국적 실재론이 강하게 작용했던 역사상의 도가 사상 전개에서는 모순긍적적 도체에 대한 전제와 이의 추구가 중심 주제가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왕필 현학에서 보이는 부정적 소극적 도체 규정인 본무(本無) 개념도 중국적 실재론의 한 변형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실재론적 전통은 중국불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점은 조론 분석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연기론의 도가적 이해 양상
도가적 실재론은 불교의 연기론 이해에도 적극적으로 개입된다. 이러한 중국인의 연기론 이해의 특수성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본불교 연기론의 이론적 특성이 먼저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연기론이 불교의 적극적인 현상설명 방식이긴 하지만 베딕 우파니사드 전통이 전제하는 비 경험적인 초월적 존재에 대해 인식론적 반성이 매우 치열하게 이루어지면서 성립된 이론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불교의 연기론은 개념적 세계를 구체적 현실세계와 혼동하는 베딕 전통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제시된 철저한 경험주의적 현실세계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주의적 전통은 불교이론의 정점으로 볼 수 있는 인도 유식학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인식론적 혹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기론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근본불교의 정신에 따라 철저히 경험주의적 관점에 의해 인간심층의식을 묘사해내고 있다. 즉 그들은 인도의 명상전통을 이어받아 개념적 사유를 통한 세계 이해 이전의 심층의식 작동기제를 기술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세계가 연기적 구성이라는 것을 밝히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세친의 유식삼십송이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의 세계이해 방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강한 실재론적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실재론적 경향은 선진도가의 세계이해방식이 그 주된 형식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안세고 번역 35부 41권 경전 대부분이 소승상좌부 계열에 속하는 경전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진 시대에는 아직 상좌부, 설일체유부의 존재분석이론이 중국인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불교연기론의 인식론적 성격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리라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 당시 중국불교에서의 연기론 이해는 초보적인 단계의 수준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그 해석이 매우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연기론적 관점에서 개물적 존재의 무상성을 강조하는 불교의 무아 이론은 위진 시대에는 선진도가의 이분적 고립적 존재의 부정 관점에 의해 수용되고 아울러 현학의 무형(無形), 무상(無象)으로써의 본무(本無) 개념과 어우러져 더욱 중국적으로 해석된다. 비록 중국의 도가가 세계의 본래 모습을 미분적 연속체의 역동성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두 관점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겠으나, 이러한 중국적 연기론 이해는 사실 근본불교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상호인과, 상호의존(dependent arising)으로써의 연기론과는 거리가 있다. 엄격히 이야기하면 도가적 근본세계로써의 미분적 세계는 불교연기론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특수한 경지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것을 어떤 근본으로 상정하는 것은 불교 본래 취지에 비추어 보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전제가 된다. 그러나 위진 시대의 불교 나아가 그 이후의 중국불교는 근본불교 및 그 전통을 계승한 불교학파가 연기적 세계 이해의 난해성 강조와 이의 극복으로 드러난 세계 이해의 신비성 토로를 마치 미분적 도체의 신비성 묘사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단순 대치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조론의 분석에서 이런 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Ⅲ. 조론의 중국불교적 특성
우리가 승조의 불교 개념 이해방식을 문제 삼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려야 할 인물은 아마도 그의 스승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일 것이다. 깔루빠하나(David J. Kalupahana)는 구마라집 한역 중론의 영문 번역본을 산스크리트 본과 비교하면서 구마라집이 근본불교의 경험주의적 입장을 따르는 나가르주나의 중론 저술의도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평가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마라집 이해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볼만한 진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록 깔루빠하나가 불교가 중국에서 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을 유가의 실용주의적 전통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에는 필자가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불교의 비초월주의 비실체론적 철학 경향이 중국에서 불교가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요인이라는 그의 진단은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깔루빠하나의 주장처럼 구마라집이 중관전통에 충실하고, 찬드라키르티(Candrakīrti, 月稱)가 베단틱 전통에서 보이는 초월주의에 가깝다면,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의 논지는 아직도 찬드라키르티의 영향권 안에 있는 현대의 많은 중관학자와는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승조는 나가르주나, 구마라집으로 이어지는 정통을 계승하고 있을까? 필자는 물론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승조가 불교의 제 개념 이해에 있어 서역(西域) 구자국(龜玆國) 출신의 구마라집 보다 더 중국화 되어있을 가능성이 있으리라 예단하고 있다. 물론 구마라집이 나가르주나를 적절히 이해했는지 여부에서부터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고 이에 따라 구마라집과 승조의 관계 설정도 다르게 표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승조가 중국의 나가르주나라고 일컬을 만큼 반야, 공 개념 등의 중관철학의 제 개념 설명에 천착(穿鑿)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보았듯이 위진 시대에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도가적 혹은 현학적 불교 이해의 조류가 조론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를 묻는 질문은 구마라집 혹은 승조에 대한 이해방식의 다양함에 크게 상관없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 공(空) 개념 이해의 일반적 문제점
위와 같은 위치에 있는 승조가 중관철학의 중심개념인 공(空) 개념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살피는 일은 중국불교의 특성을 밝히는 데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분석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 객관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분석의 주체자인 본 필자가 공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교학자들이 베딕 우파니사드 전통의 아트만 개념을 비판하는 근본불교의 무아 개념과 관련하여 공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자신들이 그 설명에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본격적으로 드러냄 없이 자연스러운 설명을 행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듯 무아 개념의 설명에서는 그렇게 심하게 노정되지 않던 학자들의 일종의 반 언어적 태도가 공 개념 설명과정에서는 빈번히 노정되는 것을 본다. 물론 서구의 불교 이해 초기 Nothing 혹은 Nothingness 로 공을 번역하면서 보여준 단멸(斷滅)론적인 공의 단순이해는 이제는 더 이상 보기 힘들 정도로 공에 대한 이해가 근본불교의 본래 취지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공 개념 이해에 있어 반(反) 언어적(言語的)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끈질기게 반복되고 있다.
위에 쓴 필자의 의문을 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부다의 언어에 대한 태도가 반 언어적이었는가? 공에 대한 이해는 언어를 넘어선 혹은 인간의 일상적 인식을 초월해야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필자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 이다. 이제 필자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공에 대한 이해의 몇 가지 예문을 들어 그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펼쳐보도록 하자.
“나’라는 존재와 객관적이고 외적인 이 세계의 사물들은 우리에게 마치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처럼 나타나지만, 보다 더 면밀히 살핀다면 이러한 모습들은 그러한 드러남에 깊이 내재한 심원한 상황 결정적 성격을 연동시켜 보는 일을 암암리에 전의식이 태만하게 함으로써 성립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분석이 진행되면서 찬드라키르티는 그 자체가 오직 다른 이러저러한 원인들과 조건들의 산물일 따름인 현재의 원인과 조건들의 모순적 성격을 지적한다. 반사되어 드러난 저 그림자와 같은 존재물로 말하자면, 참 원인과 조건들이 만날 경우도 환영과 같은 비실재적인 결과물이 초래되며, 나아가 이 세계에 드러나는 환영과 같은 현상은 정말로 그 뿌리가 깊고 깊으니, 이런 환영과 같은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모두 내재적 자기 성품이 부재한 가공의 구축물일 뿐이다.”
윗 글은 헌팅톤이 찬드라키르티의 Madhyaymakāvatārakārikā의 한 구절을 해설한 것이다. 여기서 헌팅톤은 찬드라키르티가 현상을 가상의 가상, 또는 거짓의 거짓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결론짓기를 그 거짓됨은 원인과 결과들이 내적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론은 역설적으로 자성을 지닌 존재는 진실이요, 자성이 없는 존재는 거짓이라는 우파니사드적 관점의 재도입을 초래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논리를 따르다 보면 현상의 관찰에 의해 성립된 불교의 중심교설인 부다의 연기설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런 결과를 우회하기 위해 헌팅톤은 중관학파의 철학적 목표가 오직 잘못된 실체론적 관점을 교정하는데 있지 자기 자신의 어떤 주장을 관철하는데 있지 않다는 방향으로 논의를 발전시켜 이렇게 말한다.
“이 논서들에 제시된 논증들은 일련의 교정(矯正)의 목표를 지닌 장치들이다. 거기에는 실재와 단어들을 연결시키려 한다든지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라도 스스로의 한계를 너머서는 곳에까지 도달했다고 말하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비 대상지시적 언어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중관론자들은 어떤 특정한 철학적 견해를 주장하거나 변호하고자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가 성취되고 추상관념을 구체화하는 사유방식의 문제가 사라질 때, 명제들의 내용과 형식은 전혀 중요치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중관철학자들을 언어로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표현하기를 꺼리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던 철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부다의 세계관과 철학을 계승한 중관학파가 그러한 입장을 견지했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즉 중관철학자들이 불가지론자가 아닌 이상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견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교정대상이 되는 견해를 지닌 자들의 세계관과는 분명 다른 어떤 세계관을 상정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것은 부다가 베딕 우파니사드 전통을 극복하며 보여준 연기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헌팅톤 또한 현실 부정적이 아니었던 부다의 세계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공’이란, 모든 단어들이 그렇듯이, 말하는 이의 의도에 담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명칭이다. 중관논서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르면 아마도 그것은 존재의 한 방식, 집착과 혐오의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실존하고, 세상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공의 (비추론적인) 직접적 실현을 통해서, 개체 또는 개별자의 요구는 온 세상의 모든 유정 무정 중생의 요구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으로 즉각 경험된다. 내가 공의현실화’라 부르는, 이러한 직접적 공의 실현이 바로 보살의 무량자비심의 원천이다.”
여기서 그는 구체적 세계에 대한 개념적 논리적 접근을 포기하고, 직관 혹은 직입(直入) 방법에 의한 “공(空)”으로서의 구체세계 파악을 주장하고 있다. 진정한 현실 이해는 추론이 아닌 직입에 의한 현실 이해라는 말은 사실은 개념적 세계 이해에는 부정적 가치를 비개념적 세계 이해에는 긍정의 가치를 전제한 언명이다. 이렇듯 비추론적 공의 이해 주장은 결국 공의 이해를 신비한, 비일상적인 경지의 영역으로 넘기게 된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한 공의 현실화는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넘어서는 능력을 지녀야만 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공의 세계를 우파니샤드적인 실체의 세계는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비초월적인 세계라고 주장할 때의 설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의 세계는 차별적인 인식으로는 즉 현상적으로는 비일상적으로 보이나, 비차별적인 또는 직입(直入)의 세계인식과 같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면 일상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렇듯 조금 옹색해 보이기까지 한 논리가 전개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그의 언어에 대한 극단적 이해 때문일 것이다. 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여러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고자 한다면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중도적 견해를 취하지 않는 것인지 필자로써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앞서 필자가 지적했듯이, 베딕 우파니샤드의 실체론과 초월주의를 비판하며 시작된 근본불교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부다가 인간의 일상적인 사유능력에 대해 그렇게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만을 가졌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언어 또는 현상의 비실재성과 공의 세계의 실재성으로의 분화는 예를 든 헌팅톤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일반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학자들에게서 반복된다. 다음의 예에서도 우리는 같은 구조의 문제를 볼 수 있다.
“‘무엇이 공하다‘는 말은 앞에서 논적이 비판했듯이 사성제와 삼보를 파괴하는 훼불의 선언이 아니라, 그런 무엇이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연기]’ 이며 ‘의존적으로 명명된 것[가명]’ 이기에 ‘이분법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극단적 사유가 미치지 못한다는 점[중도]’을 의미하는 말이다.”
앞에서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글에서 공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틀이 있다. 공 개념 자체는 긍정적으로 정위시키되 그것의 진정한 이해는 우리의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가명이라 일컫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의 공(空)한 세계는 결코 아니어야 한다. 진정 그러한가? 다시 묻자. 첫째, 이분법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분별적 사유는 항상 극단적 사유로 귀결되는가? 둘째, 우리가 이 세계가 연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파악하고 무아의 의미를 이해하며 나아가 그것에 의해 삶을 실천하는 이에게도 그것은 여전히 개념적인 파악이기 때문에 논자들이 설정한 진정한 공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서 노닐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의 극단적 이분화에서 오는 난제들은 결국 불교이론 일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차별화를 가져오게 한다.
“전자의 가르침은 ‘분별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 참된 가르침’ 이고, 후자의 가르침은 ‘일반인들의 분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베풀어진 가르침’ 이다. 진제의 가르침은 우리의 모든 분별적 사고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속제의 가르침은 분별적 사고에 입각한 체계적 가르침이다.”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는 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은 속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별적 사고방식의 함의를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분적, 개념적, 언어적 사고에 근거한 사고는 반드시 극복해야할 저열한 사고방식으로 보는 이와 같은 논의 때문에 똑 같은 가치를 지녀야 할 부다의 가르침에 우열이 갈린다. 진정으로 무아이론은 상위의 가르침이고 윤회와 인과응보설은 하위의 가르침인가? 위의 두 번째 인용문 가운데 전자의 자아를 실체론적 자아로 후자의 자아를 비실체론적 경험적 자아 혹은 연기론에 입각한 자아로 이해한다면 두 가르침에 우열이 생길 수 있겠는가? 필자의 의견으로는 만일 우리가 ‘분별을 떠나다’의 의미를 단지 개념적 사고의 잘못된 확대 적용으로 인한 형이상학적 혹은 실체론적 세계관에 함몰되지 않음으로 해석한다면 그러한 가치 분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질문하자. 위 인용문의 논자 주장대로라면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도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한 진정한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분별을 해체토록 한 언어는 개념적 언어가 아니고 신비한 주문인가? 위의 논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비켜가고자 하는 것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에 의해 표현된 이상 논리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런 자각아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심성의 향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가를 발휘한다. 다시 말해 분별적 언어에 의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신봉하며 공부하고 수행하되, 그것이 언어인 이상 내적 모순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점 역시 철저히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자는 속제적 실천이고 후자는 진제적 조망이다. 이렇게 모든 분별을 해체하는 진제와, 분별에 의해 불교적 세계를 구축하는 속제가 함께 하는 것이 올바른 불교신행의 모습이다.”
논리적 오류 또는 모순은 단지 개념일 따름인 언어를 불변의 체계로 고정시켜 추론할 때 생기는 부정적인 결과이지 개념적 사유 또는 언어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다의 이른바 진제의 가르침이라도 부정적으로 이해되면 그 참뜻이 전도될 수 있는 것이며, 논자가 하위법으로 보고자 했던 속제의 가르침이라도 비실체론적인 언어관에 의해 이해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진제의 상위법가 다름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부다의 가르침은 어느 것이라도 모두 다 진제의 말씀으로 그 상황에서 그 대상들에게 절대적으로 완전할 순 없지만 적절하게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관계를 고려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주어진 것이므로, 어느 것도 함부로 올리고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부다의 가르침은 듣는 이의 능력에 따라 지적된 문제가 더욱 꼬일 수도 있고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므로 가르침은 그 맥락에 따라 살펴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신행관이라고 필자는 본다.
깔루빠하나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를 학자들이 연기론에 기반한 불교의 언어 쓰임방식에 따라 불교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실체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언어쓰임 방식에 따라 불교이론을 해석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언어 쓰임에 있어서의 두 가지 방식을 소개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 두 가지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존재의 언어(Language of Existence)와 생성의 언어(Language of Becoming)이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불교의 이 독특한 언어 쓰임 방식으로써의 생성의 언어는 부다가 인간의 개념(Conception) 작용을 적절히 이해함으로써 구축된 것이라고 한다. 즉 부다는 인간이 지닌 개념화 작용의 부정적인 면-개념이 경화되어 추상적 실체화하는 것을 철저히 회피하려고 했을 뿐 개념작용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에 대한 매우 유연한 부다의 입장은 개념이라는 것이 감각경험과 이론을 잇는 매개물일 따름이라는 바른 이해에 기초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 이해는 부다의 연기적 세계관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깔루파하나가 강조하는 주목할 만한 부다의 독특한 언어 이해 중의 하나는 비개념적 지식(non-conceptual knowledge)의 부인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극단적 경험론으로써의 불교라는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식이란 이미 사고 작용의 산물로 비개념적 지식이란 우리의 경험 내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부다는 유연한 경험과 고정화 경향을 지니는 지식의 분리 파악을 통해 자신의 연기론적 경험주의 철학과 기존의 형이상학적 철학(개념적 존재를 경험의 차원에 정위 시키려는)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비개념적 지식’이란 개념은 실체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산물이 되고 만다.
앞서 필자도 불교가 인간의 모든 경험을 포괄적으로 균형있게 감싸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듯이 개념의 사용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임의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기능이며 경험이라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비개념적 세계를 경험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비개념적으로만 계속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경험이 현재 우리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방식과 의미를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것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한 상태를 본질적인 사태로 규정하고 그러한 상태 만으로의 온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것은 불교가 거부하고자 했던 본질주의로의 회귀가 된다. 따라서 그러한 본질주의적 관점을 초래할 수도 있는 공의 상태의 비개념적 수단에 의한 파악 주장, 공에의 직입과 같은 신비적 공 개념 파악, 그리고 진제와 속제의 날카로운 이분법 등은 부다 혹은 나가르주나가 진정으로 용납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실 초월적 실체론적 세계 이해를 거부했던 부다가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에서만 비인지적인 세계를 설정했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간의 언어현상에 대해서도 극단을 피한 중도적인 입장의 견지가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조론에서의 반야와 공 개념 이해방식 사례 분석
필자는 이제 앞의 예비 작업에 근거하여 몇 가지 불교 중심 개념에 대한 승조의 이해 여부에서부터 복합적 언명들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관심에 따라 그 작업을 수행해보고자 한다.
첫째, 그의 불교 개념 설명에 개입된 도가적 언명이 앞서 분석한 선진도가의 4단계 세계이해방식의 틀 중 어떤 단계와 유사한지를 비교해 볼 것이다.
둘째, 환원주의적 언명이 나올 경우 이것이 선진 도가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인지 혹은 위진현학적 단순 환원인지를 살필 것이다.
셋째, 불교 개념 설명에 있어 그 개념설명이 본래적 의미와 일치하고 있는지 여부를 살필 것이다.
넷째, 변형이 일어날 경우 본래 또는 잘못 전달된 의미에 도가적 혹은 현학적 사유방식이 덧붙여 질 경우 어떤 형태의 습합이 일어나는지를 살필 것이다.
1)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에서의 반야 개념
승조가 묘사하고 있는 성인의 지혜, 반야는 신비한 그 무엇으로 도가적 표현방식과 비교해 본다면 앞서 제시한 3 단계의 도의 현묘성 강조와 유사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성인의 지혜는 그윽하고 미묘하여, 그 깊고 은미함을 실로 헤아리기 어렵다. 성인의 지혜는 모습도 없고 명칭도 없으니 언어나 형상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용문에 보이는 유미(幽微). 심은(深隱)과 같은 도가풍의 단어들과 이른바 분별적 현상과 언어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단순히 실체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인지 혹은 도가적 근본세계 즉 신화적 미분의 세계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한 언명인지는 이 부분만으로 확정하기는 미진하므로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확인을 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을 주석하는 형태로 반야의 공능과 존재형태를 모순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 두 경전의 말씀은 반야지혜의 관조작용을 말하는 것이나, 일러 그것이 모습도 앎도 없다고 한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모습이 없는 반야의 앎이 분별하는 앎 없이 비춤이 진정으로 분명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째서 반야의 지혜가 아는 바는 곧 모르는 바라고 하는가. 그것은 성인의 마음은 앎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를 바가 없는 이치이다. 이것은 앎이 없는 앎이니 곧 일러 일체지라고 한다. 그러한즉 이른바 경전에서 성인의 마음은 아는 바가 없고 모르는 바도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이르는 것이라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위 인용문에서 반야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반복되어 나오는 모순긍정 언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선진도가의 도 개념 설명방식 가운데 세 번째 단계의 모순긍정 언명과 똑같은 형태의 표현이다. 물론 반야경전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모순긍정표현이 나오고 있음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도가와 같은 어떤 신비한 경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보다는 이분적 개념의 실체화를 경계하는 또는 두 개념의 대상이 모두 무아성 혹은 공성의 관점으로 볼 때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바른 이해일 것이다. 따라서 승조가 다음과 같이 중국적 체용 논리를 활용하면서 동시에 반야를 매우 소극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를 보면서, 앞선 모순긍정적 표현들이 온전히 반야 중관의 논리에만 의지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즉 반야의 지(智)는 궁극의 저 아득한 곳까지 모두 비출 수 있는 거울을 지니고 있으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신묘하게 만물과 감응하여 회합하는 작용은 있으나 그것을 사려하지는 않는다. 신묘한 작용에도 불구하고 사려함이 없는 까닭에 능히 세간 밖에서 초연히 홀로 서있도다. 반야의 지는 앎이 없는 까닭에 능히 사물의 밖에서 현묘하게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에서 우리는 중국적 체용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개입됨을 본다. 즉 반야에 현상의 중심이 되는 체(體)의 성격과 현상으로 드러남의 용(用)의 이중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체용불이(體用不二)를 일반논리에 의해 본다면 그것은 모순긍정에 바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세계 이해는 노장적 세계관 나아가 그것에 기초한 중국적 실재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주목해야 점은 저 반야가 매우 수동적(부동의 의미에서)으로, 부정적(무지의 의미에서)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신묘한 회합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간밖에 있어야 하는 반야개념 설명에서 승조의 세계관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구체적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반야를 정위시키는 이분적 사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 세계의 근거로 삼는 단순 환원은 승조가 위진 시대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수동적, 부정적 단순 환원 경향 밖에 있지 않다는 점을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에게 내재된 이러한 세계관은 반야무지론의 결론을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도가적 논의 형태로 마치게 한다.
“답하여 말하면, 작용이 곧 고요함이요 고요함이 곧 작용이니 작용과 고요함은 한 몸이다.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명칭이 다르다. 작용없는 고요함이 따로 작용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반야의 지가 어두울수록 그 비춤은 더욱 밝아지는 것이니, 어찌 밝음과 어두움, 움직임과 고요함이 다르다고 말하겠는가.”
2) 물불천론(物不遷論)에서의 존재 개념
승조가 물불천론에서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 설일체유부의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학자들의 지적은 그가 대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고정시켜 대상(물)을 원자적으로 고립시키는 논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타당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대상의 원자화의 예를 보자.
“왜냐하면 과거의 사물을 과거에서 구해보았으나 과거에 일찍이 없지를 않았었고, 과거의 사물을 현재에서 찾고자하니 현재에는 아직까지 있지 않다.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있지 아니하니 과거의 사물이 현재로 오지 않았음이 명백하고, 과거의 사물은 일찍이 과거에 없었던 적이 없으므로 사물이 가지 않음을 알겠다. 다시 이렇게 현재를 보면 현재의 사물도 가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과거의 사물은 본래부터 과거에 있으니 현재로부터 과거에 이른 것이 아니요 현재의 사물은 현재에 있으니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찰라 찰라 생하여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각각의 시간 속에 고립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인(因)과 과(果)도 고립적으로 분리되고 만다.
“왜냐하면 결과는 원인과 함께 존재할 수 없으니,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기는 것이므로 원인은 과거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며, 결과는 원인과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과거의)원인이 현재로 온 것도 아니다. 없어지지도 오지도 않으니 사물이 불변하는 이치가 분명하다. 어찌 다시 가고 머무르는 것에 미혹되고, 동정의 사이에서 주저 하겠는가”
시간과 공간을 고립적으로 분할하고 거기에 인(因)과 과(果)를 배치하면, 인․과는 독립된 사건이 되어 상호간에 어떤 연결고리도 지니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승조는 동적으로 보이는 현상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이러한 즉 천지가 뒤집어진다 해도 고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홍수가 하늘까지 차 넘쳐도 그것을 움직인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물들에 즉하여 신묘한 반야의 지혜를 능히 계합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물불천의 이치를 멀지 않은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승조는 도가의 모순긍정적 언명이 이러한 부동의 궁극적 세계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흘러 움직인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흘러 움직인다는 것을 나는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즉 움직임과 머물음이 비록 다르지만 궁극에는 이 둘이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이르길, 올바른 말은 그 반대인 듯 하다. 이를 누가 마땅히 믿으려 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불천론의 서두에 동과 정을 하나로 보는 언명들은 당시의 현학적 세계관에서 보이는 부정적 수동적 환원주의에 영향 받은 승조가 부동의 세계를 궁극의 세계로 이해하고 이를 선진도가적인 모순긍정의 표현방식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3) 부진공론(不眞空論)에서의 공(空) 개념
승조의 조론에서 불교적 세계이해에 어떻게 중국적 사유방식이 개입했는지를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장은 바로 이 부진공론일 것이다. 그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공(空) 혹은 무(無)는 진실로 자신이 실(實)로 삼고자 했던 공은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부진(不眞)의 개념을 사용한다. 사실 공 개념의 의미 전달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그가 공 개념에 대한 다양한 부연 설명을 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근본불교의 전통을 이은 중관학파가 비실체론적 연기적 세계 설명을 위해 설정한 공 개념을 승조가 세계 존재의 신비적 근원으로써 도가적인 도체(道體)의 개념과 유사하게 실재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진공론의 첫째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극히 텅 비어 생멸이 없는 이것은 곧 반야가 현묘한 거울처럼 모든 것을 오묘하게 비추어 취향하는 자리이며, 모든 사물의 궁극적 근본이 되는 자리이니, 성인의 총명으로 특별히 통달함이 없다면 어찌 능히 유무(有無)의 사이에서 신묘하게 계합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고방식이 꼭 승조에게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지만, 반야의 지혜 개념이 본래 지향하는 ‘어떻게 보느냐’의 면보다는 반야로 본 세계 혹은 반야 자체의 양상을 그려내려고 하는 ‘무엇이냐’에의 관심, 반야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와 같은 존재론적 관심이 승조의 글에서 더 압도적인 이유가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관심과는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중국적 실재론의 개입은 그 형식면으로만 보아도 반야경전 혹은 중관논소에서 보이는 이중부정논리보다는 주객 합일을 표현하는 도가적 논리가 조론의 전반을 압도하도록 만든다. 다음과 같은 승조의 성인(聖人) 경지 묘사는 그러한 경향을 극명히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인은 진실한 마음을 타고 만물의 이치를 고르게 순종하니 막혀서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 혼일한 하나의 기운을 통찰하여 만물의 변화를 관조하니 그 때문에 만나는 것마다 순리에 따라 어울려 조우한다. 막혀서 통하지 못함이 없으니 능히 다른 사물들과 혼융하여 순일함을 이루며, 만나는 것마다 순리에 따라 어울려 조우하니 만나는 사물 마다 차별 없는 하나를 이룬다.”
승조가 세계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이해한 공(空)의 세계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보다 도드라지게 도가적 어법의 존재론에 의해 그 면모를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이와 같은 즉 삼라만상이 다르다 해도 본질적으로 각기 다를 수는 없는 것이니, 본질적으로 각기 다르지 않으므로 드러난 만상이 진정한 모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상이 진정한 모습이 아닌 즉 비록 그것이 상이라 해도 상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즉 만물과 나는 동일한 근원이며, 긍정과 부정도 하나의 기운일 따름이다. 이러한 경지는 그윽하고 은밀하여 일반 중생들의 망정으로는 끝까지 다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설명에서 우리는 반야경전이나 중관 논서에서 강조되는 실체론적 현상 이해의 거부보다는 인간의 분별(分別)적 현상(만상) 파악 이전의 미분(未分)적 하나의 본원(진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보다 더 압도적으로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현재의 분별적 개념적 사유로는 그 은밀한 진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관점을 낳게 한다.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이러한 관점은 초월적 세계나 존재의 개념을 쉽게 요청토록 한다. 다음과 같은 부진공론의 결론 부분 문장은 이러한 경향이 승조에게서 나타남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인은 현상의 모든 변화를 타면서도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며, 중생의 미혹의 세계를 거닐면서도 항상 반야의 지혜로 통달하는 분이시니, 만물의 비어있음에 곧바로 즉입하나 비어있음을 빌어 사물을 비우지도 않는다.”
승조가 이렇듯 성인을 현상적 변화에 응하면서도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 파악하고 사물의 공성을 소극적(虛)으로 파악함으로써 역동적인 연기적 세계를 드러내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대상 세계를 긍정하는 수준에서 그 설명이 멈추는 까닭은 아마도 승조 당시 현학적 세계관이 지닌 형이상학적 혹은 초월적인 경향이 조론 곳곳에서 보이는 선진도가적 철학적 통찰력마저도 압도함으로써 분출되지 못하도록 한 데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Ⅳ. 결론
일반적으로 중국불교사에서는 승조가 나가르주나의 공관불교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한 이로 규정하고 심지어는 중국의 나가르주나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이미 그의 당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스승 구마라집은 ‘중국인으로서 공을 이해하고 있는 제일인자는 승조다’ (『名僧傳』)라고 말했다 전해진다. 그러나 필자의 앞 절의 분석에 비추어 보면 승조에 대한 고금의 평가들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불천론에서 보여준 설일체유부에 가까운 존재이해 방식도 그의 중관철학 이해의 정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지만, 부진공론에서의 그의 공의 이해에 담긴 모순긍정적 표현, 실재론적 묘사 등은 어떻게 구마라집이 그의 공 개념 이해가 중국에서 제일이라고 했는지 의문이 나게끔 만든다.
중국불교의 특징을 말할 때 위와 같은 현상을 두고 노장과 불교의 교묘한 결합이라고 평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의 필자의 분석으로는 이 두 사상을 함부로 합하여서는 곤란하다. 그 까닭은 특히 그들이 이상화하여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도가는 무엇보다도 미분적인 도체(道體)를 궁극적 이상으로 삼고 모든 존재가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될 때 삶의 난제들이 최종적으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신비한 도체로의 회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는 아트만과 같은 극미의 실체이든 브라흐만과 같은 거대 실체이든, 같은 논리를 적용하자면 신비한 도체이건 그것이 구체적 경험 안에서 작동되지 않거나 무의미한 추상적 존재로 판단되면 그것은 미망의 산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와 같은 부정적 승조 평가를 통해 나아가 중국불교의 가치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불교와 도가는 그 기원으로 볼 때 이 세계를 역동적 연속체로 보려는 철학적 통찰력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 공통의 철학적 통찰력이 마침내 중국불교의 역사속에서 만나 어떤 형태로든 조율되어 나온 경험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아직은 증명하여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가 완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그러한 만남이 중국 선불교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까닭에 중국불교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불교와 노장의 습합을 근거로 그 습함만으로도 불교이론의 발전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무엇을 발전의 기준으로 놓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불교이론의 내적 정합성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발전이라는 용어는 조심스럽게 운용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의 현학적 사유침투는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인도에서 일어났던 불교의 베딕화 만큼이나 불교 본래의 비실체론적 비초월적 세계 이해에 결정적인 변형을 가져다 준 요소가 되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론 분석을 위해 밝힌 필자의 공 개념 이해방식에 대해 다방면에서 문제제기가 많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노장과 현학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비판적 문제제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넓은 바다와 같이 펼쳐진 중국불교의 전개 속에서 눈에 띄는 특징들을 찾고자 시도한 이 글은 앞서 서론에서 밝힌 바대로 이미 많은 약점과 문제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기존의 논문들에서 밝혔던 중국불교의 제 문제가 거의 같은 형태로 조론에서 발견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필자가 제시한 중국불교 분석의 제 기준들을 이후의 중국 불교의제반 자료에 다시 정치(精緻)하게 개선하여 운용하고자 한다.
주제어
중국불교 Chinese Buddhism, 조론 Zhao-lun, 반야 Prajnā, 공 Śūnya, 용수Nāgārjuna, 승조 Seng-zhao.
The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rajnā and Śūnya in Zhao-lun
Heo, In-Sub
This paper aims at disclosing the influence of Neo-Taoist idea on Zhao-lun. In oredr to get th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s of Zhao-lun, this paper introduces the differences between the classical Taoism and Neo-Taoism. The most important difference between them is that Neo-Taoism shows a simple reductionism and a Chinese mode of metaphysical thinking, which are similar to western ones. This differences is important to analyze some delicate statements having two fold aspects formed to be influenced by both classical and Neo-Taoist idea.
In analyzing the above treatise, it must be firstly notified that the Chinese people in Wei-Chin period could not acknowledge clearly the similar and the different aspects of Buddhism and Taoism. It resulted in a serious misunderstanding among Chinese Buddhists regarding the original Indian Buddhist concepts, prajñā or śūnya, etc. Zhao-lun was also written in this period and could not be an exceptional one to overcome completely the limitation of the spirit of the times. Secondly, it needs to clarify the original meaning of śūnya and how Chinese Buddhist scholars transformed its meaning according to the Taoist or Neo-Taoist way of thinking. In this period, the concept of śūnya was understood as an fundamental nothingness which frequently mentioned in Wang-pi's work. This way of understanding has maintained in the history of Chinese Buddhism.
However,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concept of śūnya should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In spite of that the concept of śūnya cannot be an ontological one, it has been interpreted ontologically or metaphysically not only by Chinese Buddhist monks but also by modern western philosophers. This paper points out that śūnya is a synonym of anātma and should be understood in the light of the theory of 'dependent arising'(緣起). By comparing the original meaning of śūnya and prajñā as the above with those seen in Zhao-lun, it discloses that Seng-zhao understood those concepts ontologically under the influence of Neo-Taoism.
[불교학연구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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