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朴 癸 姬] ■ 연기법에 의한 공사상과 중도론 연구 - 아함과 중론을 중심으로

수선님 2023. 1. 15. 13:45

緣起法에 의한 空思想과 中道論 硏究

-阿含과 中論을 中心으로-

 

朴  癸  姬 (惠 照)



 目 次 

 

緖 言
  1. 硏究의 動機와 目的
  2. 硏究의 범위


Ⅰ. 阿含 緣起(無我)의 특질
  1. 三科說에 나타난 無我 思想
      ⑴ 五蘊說에 나타난 無我說
      ⑵ 十二處說에 나타난 無我說
      ⑶ 十八界說에 나타난 無我說
  2. 四聖諦의 실천적 無我 思想


Ⅱ. 阿含의 中道說
  1. 無記의 中道義
  2. 十二緣起의 中道說 展開
     ⑴ 正覺 成道의 연기
     ⑵ 戱論 寂滅의 연기


Ⅲ. 俱舍論에 나타난 小乘有部의 緣起說
  1. 十二緣起의 개요
  2. 三世兩重因果說과 胎生學的緣起說


Ⅳ. 中論의 緣起說과 空思想 관계
  1. 相依性의 緣起와 空性
  2. 相依性에 대한 오해와 空의 바른 인식
  3. 空의 대승� 전개


Ⅴ. 中論에 나타난 緣起의 중도 체계
  1. 八不中道의 연기 실상
     ⑴ <觀因緣品>의 전개
     ⑵ <觀去來品>의 전개
  2. 二諦中道의 연기 원리
     ⑴ 世俗諦와 第一義諦
     ⑵ 二諦相卽의 중도 체계


結 語

參考文獻
ABSTRACT



緖 言


1. 硏究의 動機와 目的


釋尊이 깨달으신 내용을 소위 '緣起法'이라 한다. 이것을 밝히는 經典은 수없이 많다. 이는 석존의 깨달음이 바로 연기법에 의한 것이고, 연기법이야 말로 迷 悟 구분의 기준이 됨을 시사하고 있다. 즉 연기의 이치에 어두우면 중생이고, 연기를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緣起法에 대한 이해는 자칫 피상적으로 흐르기가 쉽다. 실재로 '緣起法이 곧 佛法'이라는 명제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緣起의 정의를, 단순한 인과론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緣起法을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고 멸한다는 자연 과학적인 현상적 법칙으로 보는 까닭에, 緣起 자체만의 이해로 석존이 어떻게 宇宙의 본질 곧 生命의 實相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은 의혹은 緣起法의 내용이 中道의 理致에 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바르게 해결될 수 있다.


'인연에 緣해서 生滅한다'는 緣起法은 원시 경전상의 無常, 無我의 敎說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로서, 이는 '객관적인 원인을 떠나서 독립 자존하지 않음'을 일컫는다. 즉 일체 제법이 그들 자체로서 생기고 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사물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無自性의 '空'임을 敎示하는 것이 緣起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존재의 참 모습은 연기의 원리에 의한 空性에 있으며, 이는 동시에 空性을 바탕으로 한 中道 思想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연기에 의해 사물의 실체성이 부정되며(無自性), 또한 연기에 의해 사물의 생멸현상이 긍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無我說(空性)을 근본으로 한 中道思想의 고찰 없이 緣起法의 진정한 의미는 파악할 수 없으며, 연기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거론되는 十二緣起說의 내용 역시 原始 無我 思想을 기초로 한 '中道說'의 체계 아래 설하여진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며 결정론적 인과 관계로 그릇 해석되기도 하였지만, 곧 龍樹에 의해 佛陀가 설한 진정한 緣起의 본질을 회복하게 되었다. 용수는 有部의 실재론적 사고에서 비롯된 당시의 십이연기 해석이, 佛陀의 眞意에서 벗어나 있음을 묵과할 수 없었다. 곧 십이연기의 본질적인 뜻이 有爲諸法의 現象論에 있는 것이 아니라, [阿含經]의 無我說을 바탕으로 한 空思想의 토대에서 형성되었음을 논증하였다.


그의 대표 저작인 [中論]의 '歸敬偈'에는 八不의 논리로써, 生 滅 등의 모든 희론을 초월한 연기의 실상(空性)을 중도 이치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연기의 空性이란 [中論]의 <觀四諦品>에서 설하는 第一義諦이며, 제일의제는 世俗諦를 떠나 따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眞俗二諦의 中道 思想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中論]에서는 有 無, 眞 俗, 物 心 등의 단순한 二元的 思考를 넘어서, 서로 相卽相入한 大乘 不二의 중도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대승 불교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기틀로써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法界 緣起의 근본이 된다.


이와 같이 연기법의 空性에 대한 中道思想은 바로 佛陀의 근본 정신으로 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본 논문은 緣起法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는 空思想의 전개와 함께 그 中道思想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阿含經에서 설하는 緣起敎說을 기반으로 해서, 용수는 어떻게 空思想과 中道論을 대승적으로 논리 전개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硏究의 범위


나가르주나(N g rjuna : 150-250년경)가 활동하였던 당시 2-3C 印度 思想界의 경향을 살펴보면, 아비달마의 有部 思想이 극히 융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非佛敎的인 신흥 외도라 할 수 있는 상키야, 바이쉐쉬카, 니야야 등의 哲學的 傾向까지 興行하였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邪見을 척파하기 위하여 龍樹는 般若經의 '空思想'으로 佛敎 內 外의 思想과 대결하며, 佛陀의 中道說을 논리적으로 時代的 與件에 맞추어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佛陀 敎說의 핵심이며, 근본 불교의 本旨라 할 수 있는 三法印의 '諸行無常 諸法無我' 思想을 대승적으로 재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八宗의 宗祖'로 추대되는 龍樹菩薩의 [中論頌]은 종래의 모든 佛敎 學說 및 外道說을 종합 비판하여 원시불교의 근본 정신을 계승하며, 大乘思想 興起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論書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中論]을 중심으로 형성된 中觀 哲學은 '불교의 중심 철학'으로 불리고 있으며, 대승 불교의 철학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論書이다. [中論]의 산스크리트 原名은 Mulamadhyamaka-Karika(根本中頌), Madhyamak-Sutra(中經), Madhyamak-Sastra(中論)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를 漢譯하여 [中論] 또는 [中觀論] 이라고 한다.


본 論文은 먼저 원시경전인 [阿含經]을 중심으로 해서 緣起敎說의 진의가 無我說의 토대 위에서 中道 思想을 내용으로 성립함을 밝히고, 용수의 [中論]에서 보다 확정적인 변증의 논리로 空思想과 中道論의 체계가 구현되고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래서 단원 Ⅰ '阿含 緣起敎說(無我)의 특질'에서 空의 사상적 연원으로 '緣起法'에 논리적 근거가 있음을 밝히고, 동시에 緣起法 또한 '空'에서 비롯됨을 전개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 성립의 바탕인 無我 空性의 이론적 실천적 전개에 대하여 '三科說'과 '四聖諦'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Ⅱ '阿含의 中道說'에서는 [阿含經]에 설해진 中道說을 '無記'와 '十二緣起'에서 찾아보겠다. 단원 Ⅲ에서는 '俱舍論에 나타난 小乘有部의 緣起說'에 대해 살펴보고, Ⅳ '中論의 緣起說과 空思想 관계'와 Ⅴ '中論에 나타난 緣起의 중도 체계'에서는 緣起卽空의 의미와 그 中道 體系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텍스트에 있어서 [阿含經]은 북방 불교권에 전해지고 있는 長阿含, 中阿含, 雜阿含, 增一阿含 등의 四部 阿含經을 위주로 하고, [中論]의 텍스트는 龍樹菩薩이 직접 읊은 게송들은 現存하지 않지만 [中論]을 해석한 주석서에 실려져 남아 있다. 月稱(Candrak rti, 7C)에 의해 이루어진 [Prasannapad (淨明句論)]가 유일하게 梵語로 現存하며, 그 밖에 漢譯으로 남아있는 註釋書 가운데 瑜伽行派인 安慧(Sthiramati, 510-570년경)가 註釋한 [大乘中觀釋論]이 있고, 淸辨(Bh vaviveka, 470-540년경)에 의한 [般若燈論釋]이 있다. 또한 現在 學界에서 龍樹의 自註로 인정되고 있는 [無畏疏]가 티벳어로 남아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읽어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靑目(Pi gala, 4C 전반)이 註釋하고 鳩摩羅什(Kum rajiva, 344-414)이 漢譯한 [中論]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羅什이 漢譯한 [中論]을 기초로 비교해서 살펴보고, [俱舍論]은 玄奬이 번역한 것으로 참고하였다.

 


Ⅰ. 阿含 緣起敎說(無我)의 특질


佛敎 敎理는 크게 두 가지로 가를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현실 세계(有爲界)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밝혀주는 部分과, 다른 하나는 眞如 法界(無爲界)에 돌아가 올바른 삶을 찾도록 길을 提示해 주는 부분이다. 이 두 가지 法門에서 無爲의 眞理는 有爲法에 의해서 나타내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조직을 가진 敎說에 대한 체계성의 탐구도 역시 有爲法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有爲法은 우리의 전도된 미혹에서 緣起한 것으로 因緣生滅法을 뜻하며, 그 대표적인 屬性으로 '無常' '苦' '無我' '空' 등을 들고 있다.


經에는 有爲諸法의 無常 苦 無我 空 등의 이유를 '因緣會而生'이라고 하며, '皆由合會諸法因緣' 또는 '皆由因緣合會生'이라고도 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곧 '緣起'라 할 수 있는데, 經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몸(形)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무엇이 지은 바도 아니라네. 因緣이 모여 생겨났다가 因緣이 흩어짐에 곧 스러져 버린다네.


혹 眼이 생길 때에 역시 온 곳을 알지 못하고, 혹 眼이 滅할 때는 곧 滅하여 또한 간 곳을 알지 못한다. 있지 않다가 眼이 생기며 이미 있었다가도 眼이 滅하나니, 다 합해서 모인 諸法의 因緣을 말미암은 것이다. 이른 바 因緣法이란 있는 것(是有)을 반연하기도하고 없는 것(是無)을 반연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는 곧 '無'이다. 있지 않다가 생겨나기도 하고 이미 있었던 것이 滅하기도 하나니, 다시 온 곳을 알지 못하고 또한 간 곳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다 合해 모인 諸法의 因緣을 말미암은 까닭이다.


다만 我가 없고 我所가 없나니, 我가 空하고 我所가 空한 것이다. 法이 生함에 곧 생겼다가 法이 滅함에 곧 없어지나니, 다 因緣이 合해 모여서 생김을 말미암음이라.


以上에서 보는 바와 같이 '緣起'는 여러 가지 條件이 모여서 生起하는 것으로 '相互因待'의 개념이고, 서로 因待하기 때문에 모든 實體性이 否定되는 것이다.


'無我'란 일체 사물이 고정적인 自性을 가지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절대적이고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空'이란 용어는 原始 佛敎에서 說한 '無我'와 '緣起'의 개념을 基盤으로, 大乘 佛敎에 이르러 보다 적극적으로 受容되어 발달된 것인데, 이러한 '空'이 緣起法에 相應하고 緣起法을 수순함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있다.


如來가 說한 修多羅는 空이 緣起法에 相應하고 緣起法을 隨順함을 매우 깊이 밝게 비추고 있다.


空은 본래 '緣而生法(Pa iccasamuppanna-dhamma)의 屬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法은 無我이기 때문이다. 空이라고 말한 것은 常識으로 생각하는 고정적 實體인 '我'와 恒有하는 '法體(我所)'가 不可得인 것, 즉 實體로서의 自性이 없음을 가리킨다. 諸法은 다만 假名施設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大 小乘을 통하여 일관된 佛敎의 가장 특징적인 敎理라 할 수 있는 '諸法無我' 곧 '諸法皆空'의 思想은 바로 '緣起法'에 그 논리적 根據를 두고 있으며, 緣而生法의 緣起 또한 근본적으로 無實體의 '空性'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연기법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는 無我說 곧 '空性'이 마찬가지로 緣起 성립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간략히 언급하여 마치고, [阿含經]을 중심으로 한 원시경전에 있어서 空의 이론적 및 실천적 전개에 대해 '三科說'과 '四聖諦'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三科說에 나타난 無我思想


아함경전에는 우주 일체만유의 분류법으로 有爲와 無爲 곧 有漏와 無漏로 크게 大別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分類法에 있어서는 蘊 處 界 등의 소위 '三科說'을 들고 있다. 이 三科分類說은 대체로 현상계의 일체제법을 總攝 論明하는 것으로, 인생 각자의 主觀界를 中心으로한 분류법이다.


첫째 '五蘊說'은 心所의 실상에 미혹하여 實我를 집착하는 자를 위해 說한 것으로, 心所의 실체가 본래 空함을 밝히고 있다.


둘째 '十二處說'은 色法의 실상에 미혹하여, 恒存하는 實體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를 위해 說한 것이다. 十二處를 說해서 色法이 변하는 無常한 이치를 밝혀, 본래 實體가 없음을 설파하고 있다.


셋째 '十八界說'은 色法과 心法의 실상에 모두 어두워서, 實我의 집착을 일으키는 자를 위해 說한 것이다. 즉 十八界를 說하여 色法과 心法에 모두 實體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三科說의 목적은 一切諸法의 진실한 實相, 다시 말해 諸法無我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으며, 諸法皆空의 實相을 증명하기 위해서 諸法을 총망라하여 이러한 諸法의 分類說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三科說의 各各에 대하여, 無我 思想의 이론적 전개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⑴ 五蘊說에 나타난 無我說


五蘊의 '蘊'은 범어 '塞建陀(skandha)'의 譯語로, 舊譯에서는 '陰' '衆' '聚' 등으로 '쌓임'을 뜻하였다. 하지만 新譯에서는 주로 諸有爲法이 和合積聚되어 있는 것을 '蘊'이라 번역하는데, 그 원말은 '根幹的인 부분'이라는 意味이다.


五蘊은 인간 존재를 물질인 '色法(色, r pa)'과 정신의 의식 작용인 '心法(受 想 行 識)'으로 분석한 것이다. 즉 몸과 마음의 구성 요소로써 色 受 想 行 識을 드는데, [阿含經]에서는 五蘊을 '名色'이라고도 한다.


어떠한 것이 名인가? 네 가지 色이 아닌 陰이니, 곧 受陰 想陰 行陰 識陰이다. 어떠한 것이 色인가? 四大를 이름이니, 四大로 만들어진 바 色陰--이것을 色이라 한다.


그리고 五蘊 構成의 관계에 대하여, 識은 중생이 五蘊을 自我로 計度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觸에서 受 想 思(行)가 발생한다고 한다.


二法이 있으니, 무엇이 二法인가? 眼과 色이 二法이다. …왜냐하면 眼과 色을 緣하여 眼識이 생기고 三事(根 境 識)가 和合한 것이 觸이며, 觸에서 受, 想, 思(行)가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四無色陰이다. 眼과 色 그리고 四無色陰의 法을 사람(人)이라 하며, 이들 法(五蘊)에서 인간이라는 생각(人想)을 하고… 또 이와 같이 말하나니, '나의 눈이 色을 보고 나의 귀가 소리를 들으며, 나의 코가 향기를 맡고, 나의 혀가 맛(味)을 보며, 나의 몸(身)이 촉감을 느끼고, 나의 뜻(意)이 法을 識別한다'고 한다.


따라서 經에 의하면, 五蘊의 受, 想, 行(思)은 '觸'에서 발생한 새로운 의식 상태이다.


그러면 이러한 意識狀態는 왜 나타나게 되는가? 그것은 인식된 내용에 相應하는 존재가 '實在한다'고 느끼는 '觸'의 의식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된 내용에 相應하는 존재가 實在한다는 느낌(觸)이 없다면, 우리는 인식된 對象에 대하여 苦樂의 감정을 느끼거나(受), 그것을 대상으로 思惟하거나(想), 그것과 실천적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思)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중생들이 存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五蘊'은 바로 識이 對象으로 구성한 觀念일 따름이다.


이제 經에서 정의하는 '五蘊'의 槪念을 정리하여 살펴보고, 이에 대응하는 佛陀의 實踐行을 함께 窮究해 보자.


그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의 受陰(이하 '五取蘊'이라 번역)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이는 色取蘊, 受取蘊, 想取蘊, 行取蘊, 識取蘊이다. 어떠한 것이 色取蘊(혹은 色受陰)인가? 모든 色으로써 一切는 四大 要素와 그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色이니, 이를 '色의 取한 根幹(色取蘊)'이라 한다. 다시 그 色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法이다. 만일 그 色取蘊을 영원히 끊어 남음이 없고 끝까지 버리어 떠나고 멸해 다하며 욕심을 떠나 완전히 고요해지면, 나머지 色取蘊은 다시 계속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다. 이것을 '妙'라 하고 '고요함(寂靜)'이라 하며, '버려 떠남(捨離)'이라 한다. 그래서 모든 남아 있는 渴愛가 다하고 욕심이 없어지면 번뇌가 滅하여 열반을 얻느니라. 어떤 것이 受取蘊(혹은 受受陰)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느낌 몸(六受身)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의 부딪침(觸)에서 느낌이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觸)에서 생각이 생기나니, 이것을 '느낌의 取한 根幹(受取蘊)'이라 한다. 다시 그 受取蘊도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法이니…(이와 같이 해서) 내지 번뇌가 다 滅하여 열반을 얻는다. 어떤 것이 想取蘊(혹 想受陰)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생각 몸(六想身)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의 부딪침(觸)에서 생각이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觸)에서 생각(想)이 생기나니 이것을 '생각의 取한 根幹(想取蘊)'이라 한다. 다시 그 想取蘊도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法이니…(이와 같이 하여) 내지 번뇌가 다 滅해 열반을 얻는다. 어떤 것이 行取蘊(혹 行受陰)인가? 이른 바 여섯 가지 의도 몸(六思身)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의 부딪침(觸)에서 의도(行)가 생기고 귀 코 혀 몸 뜻의 부딪침(觸)에서 의도(行)가 생기나니, 이것을 '의도(혹은 의지)의 取한 根幹(行取蘊)'이라 한다. 다시 그 行取蘊도 또한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法으로 …(이와 같이 하여) 내지 번뇌가 다 滅해 열반을 얻는다. 어떤 것이 識取蘊(혹 識受陰)인가? 이른 바 여섯 가지 식별 몸(六識身)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의 식별 몸인 眼識身이요 …내지 意識身이니, 이것을 '식별의 取한 根幹(識取蘊)'이라 한다. 다시 그 識取蘊 역시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法으로 …(이와 같이 하여) 내지 번뇌가 다해 열반을 얻느니라.


다소 장황한 引用이 되었으나,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五蘊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指稱하고 있다.
① 色 (所有色) : 四大와 四大로 이루어진 모든 色 (四大所造色)
② 受 (六受身) : 六觸에서 생긴 受
③ 想 (六想身) : 六觸에서 생긴 想
④ 行 (六思身) : 六觸에서 생긴 思
⑤ 識 (六識身) : 眼識身 乃至 意識身


둘째, <五蘊에 대한 입장>을 거론할 수 있는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五蘊은 모두 無常하고 苦이며 變易하는 法으로써 전혀 實답지 못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내용을 經에 있는 例를 통해 좀 더 살펴보면, [雜阿含經] 卷一 첫머리에서부터 五蘊의 無常함을 설한다.


마땅히 色이 無常함을 관할지니, 이와 같이 觀하는 것이 곧 '正觀'이다. 正觀을 하는 이는 厭離하는 마음을 내며, 厭離하는 者는 貪하는 마음(喜貪)이 다한다. 욕망(喜貪)이 다한 것, 이것을 '心解脫'이라 한다. 이와 같이 受 想 行 識이 無常함을 觀할지니, 이와 같이 觀하는 것을 '正觀'이라 한다.


色은 無常하다. 無常한 것은 苦이다. 苦는 곧 非我이다. 我가 없다는 것(非我)은 我所도 없다는 것(非我所)이다. 이와 같이 觀하는 것을 '진실한 正觀'이라 이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受 想 行 識도 역시 無常하다. 無常함이 곧 苦이니, 苦는 我가 없는 것이다. 我가 없음은 또한 我所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觀하는 것을 '진실한 觀'이라 이름한다.


以上에서 보는 바와 같이 五蘊說은 시간적으로 過去, 現在, 未來와, 공간적으로 內 外의   細, 好 醜, 遠 近에 두루한 일체 존재가 모두 無常함을 설하는 가르침으로써 無我說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⑵ 十二處說에 나타난 無我說


諸法의 分類法 가운데 구체적이고 가장 보편 타당성 있는 分類는, 三科說 가운데 '十二處說'이라 할 수 있다. 이는 主觀界와 客觀界를 어느 한쪽에 치중하지 않고 等分한 分類이기 때문이다. 十二處에 관한 阿含經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에 生聞이라는 婆羅門이 와서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른바 一切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一切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婆羅門에게 말씀하셨다.


"一切라는 것은 十二入處를 일컫는 것이니, 眼 色, 耳 聲, 鼻 香, 舌 味, 身 觸, 意 法 등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一切라 한다."


여기에서 바라문이 묻고 있는 '一切'의 意味는 인간과 세계의 根源的인 本質을 의미한다. 즉 人間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本質, 그 궁극적인 실체에 대하여 佛陀의 견해를 묻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佛陀의 世界觀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佛陀는 一切는 '十二處'라고 答辯하고 있는데, 이는 人間과 世界의 근원적 바탕을 '十二處'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雜阿含經]의 323經과 324經에는 이 十二入處를 각기 '六內入處'와 '六外入處'로 나누어 설명하는 內容이 있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內入處)이 있으니, 이른바 눈의 감각 기관(眼內入處),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 기관이다.(有六內入處 謂眼內入處 耳鼻舌身意內入處)"


"여섯 가지 인식 대상(外入處)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여섯 가지인가? 이른바 色이 곧 인식 대상이요,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곧 인식 대상이니, 이를 여섯 가지 인식 대상이라 한다.(有六外入處 云何爲六 謂色是外入處聲香味觸法 是外入處 是名六外入處)"


그러므로 十二處란 우리가 認識할 때 세계와 존재로 인식되는 의식 성립의 바탕으로서, 內入處와 外入處의 關係이다. 즉 인식의 주관인 內入處가 존재함으로써 객관 대상인 外入處도 존재할 수 있고, 內入處가 사라짐과 동시에 外入處도 사라진다. 이는 소박하게나마 緣起性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雜阿含經] 가운데에도 이러한 關係를 뒷받침해 주는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比丘여, 저 十二入處에 마땅히 깨달을 것이니, 만일 눈이 滅하면 色이라는 생각이 곧 떠나고, 귀 코 혀 몸 뜻이 없어지면 곧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라는 생각도 사라진다.


이와 같이 十二處 가운데 內入處가 세계 구성에 주도적인 役割을 하고 있는데, 이는 곧 外入處는 수동적인데 反해 內入處는 능동적임을 示唆하고 있다. 따라서 衆生은 자연에 대해서 의지적인 작용을 가할 수 있지만, 自然에는 그럴 능력이 없다. 자연은 중생의 의지적인 작용에 대하여 다만 반응을 나타낼 뿐이며, 意志가 없기 때문에 그 反應은 항상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十二處인 一切 世間은 고정적으로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展開될 수 있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世界 속에 갇혀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世界를 우리의 마음대로 創造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衆生들은 世界 속의 一部로 살고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世界가 영원히 常住하기를 집착하는 邪見을 일으켜 고뇌에 빠져 있다.


十二處說은 이같은 衆生들에게 '世界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즉 우리의 마음 곧 인식 주관인 內入處가 主體가 되어 성립된 것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마음밖에 世界가 따로 있지 않다'는 佛敎의 고유한 世界觀을 엿보게 된다. 즉 世界의 中心은 인격체로서의 人間(心)이며, 世界는 이 人格體에 의해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根源으로 하는 세계는 자연적 태도에서 관념화되고 존재화된 세계가 아니라, 관념화되기 이전의 구체적인 삶의 세계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같은 세계의 實相을 알지 못하고 妄念을 일으켜, 이를 추상적으로 관념화하여 存在의 世界로 여긴다. 이렇게 허구적으로 인식된 存在의 세계를 有爲世間이라 하는데, 이 有爲의 世間에서는 모든 것이 存在로 인식된다. 결국 世界는 存在들의 總體로, 거기에 속한 人間 또한 生死 流轉하며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自我라고 생각하는 '六內入處'와 객관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六外入處'가 모두 실재 존재로서의 自我와 世界가 아니다. 중생들의 세계는 無明의 상태에서 十二處를 세계 구성의 바탕으로 보지 못하고, 欲貪을 내어 取著하고 計度 分別함으로써 존재로 인식하는 世界일 뿐이다. 그래서 佛陀는 六入處에 대하여, 이것이 '我'와 '我所'가 아님을 바르게 관찰하도록 강조하신다.


이러한 六入處에는 我도 없고(非我) 我所도 없음(非我所)을 관찰할지니, (이와 같이) 모든 世間을 관찰하고 나면 도무지 取할 바가 없게 된다. 取할 바가 없으므로 執著할 것이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자연히 涅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이같은 妄我(我와 我所)가 사라져야만 世界의 主體인 구체적인 삶으로써의 眞我가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六入處의 集, 滅, 味, 患, 離를 如實하게 아는 것이 곧 世間을 아는 것' 이라고 說하고 있다.


곧 佛陀의 世界觀이라 할 수 있는 '世界가 마음에서 緣起한다는 眞理'는 세계의 主體를 人間으로 보고 있다. 다만 妄念으로 取著 分別하는 '假我'와 대상으로서의 '世界'에 대하여 愛樂하여 染著하지 않으면, 모든 矛盾과 分別이 사라진 涅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十二處說은 중생이 탐욕으로 취착 분별하여 存在로 인식하는 世界와 自我가, 실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허구적으로 관념화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十二處 어디에도 본래 我와 我所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⑶ 十八界說에 나타난 無我說


앞에서 살펴본 十二處가 欲貪에 의해 주관과 객관으로 취해지면, 객관에 대한 主觀의 認識이 발생한다. 이것이 六識이다. 이렇게 六識이 발생함으로써 內入處는 주관을 구성하는 것으로 나뉘고, 外入處는 객관을 구성하는 것으로 분별된다. 그리고 그 구성된 意味에 따라 外入處와 內入處는 수많은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새로운 槪念이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界'이다.


'界'의 원어 'dh tu'는 層(layer) 또는 구성요소(component part), 기본요소(element) 등의 意味가 있는데, 불교 용어의 界는 '層'의 의미이다. 하지만 '界'라는 漢譯語는 인식이나 활동의 범위를 뜻하는 '경계'인 'visaya' 혹은 'gocara'와 비슷한 말로 誤認될 수가 있다. 주의할 것은 阿含經에 나오는 '界'의 근본적인 뜻이 '중생들이 和合하고 함께 하는 세계'의 意味라는 것이다.


중생은 언제나 界와 함께 하고 界와 和合한다. …(이와 같이 널리 말씀하시고)…가령 훌륭한 마음이 생길 때는 훌륭한 界와 함께 하고, 더러운 마음이 생길 때에는 더러운 界와 함께 하며, 살생하지 않을 때는 살생하지 않는 계와 함께 하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으며 妄語하지 않고 술마시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界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은 마땅히 여러 가지 界를 잘 분별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界의 의미는 類類相從의 그러한 '類'의 뜻으로, [俱舍論]에서는 이를 '한 무리의 法' 곧 '種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界의 종류와 그 구성에 대한 經의 내용을 살펴보자. 如來께서 잘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여러 가지 界(種種界)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것을 갖가지 界라 하는가? 이른바 眼界 色界 眼識界, 耳界 聲界 耳識界, 鼻界 香界 鼻識界, 舌界 味界 舌識界, 身界 觸界 身識界, 意界 法界 意識界이다. 이것을 여러 가지 界라고 한다.


經에는 계속해서 그 여러 가지 界(種種界)가 곧 '十八界'임을 說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十二處에 六識이 성립하여 十八界가 이루어지면 이때 '觸'이 발생한다고 한다.


種種의 界 곧 十八界를 반연하여 種種의 觸이 생기고, 種種의 觸을 緣하여 種種의 受가 생기며 種種의 受를 緣하여 種種의 愛가 발생한다.


三事 和合 즉 內入處(六根)와 外入處(六境) 거기에 六識의 화합으로 성립된 '촉(觸)'의 의미는, 十八界를 緣하여 '무엇이 外部에 있다. 존재한다' 라고 알아채는 것이다. 따라서 '觸'은 十二處를 欲貪으로 取著하고 결박하여, '世界'와 '自我'라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존재의 성립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觸'을 연(緣)하여 발생하는 '受'는 촉(觸)에 대한 내부의 知覺, 곧 내부의 경험으로 苦와 樂, 不苦不樂 등의 三受가 있다. 또한 '愛'는 완전한 의미로는 '渴愛(thirst)'의 뜻이며, 위의 예문에서와 같이 '受'에서 비롯된다고도 하고 '觸'에서 함께 발생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러 유형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유형은 六根, 境, 識, 觸, 受(苦 樂 不苦不樂), 想, 思, 愛의 순서이며, 이렇게 볼 때 '受 想 思'가 '觸'에서 함께 생기는 것에 반해, '愛'는 前단계인 '受'에서 생긴다고 하면 이는 十二緣起의 次第와 동일하게 된다.


그러면 六識이 발생함에 따라 소위 三事和合으로 이루어진 '觸'은 곧 十八界를 緣하여 생긴 것으로, 이 때 觸은 十八界를 존재로 인식한다. 이에 새롭게 생긴 受 想 思 (혹은 受 愛… 등)도 역시 존재로 느껴지게 되어,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五蘊이 구성된다. 즉 十二處에서 발생한 識은 五蘊 가운데 識의 바탕이 되고, 觸에서 생긴 受, 想, 思는 五蘊의 구성인 受, 想, 行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三科說의 蘊 處 界 각각은 서로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一切法을 分類 包攝하는데 있어 상호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蘊 處 界 각각의 유기적인 구조 관련 속에서, 十八界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전체적인 三科說에 대한 意味를 재 고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阿含經] 가운데 十八界說에 관계된 例를 살펴보면,


眼(根)은 我가 아니며, 色(境)과 眼識(識), 眼觸, 眼觸의 인연으로 생긴 受인 내부의 느낌(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我가 아님을 觀察하라.


그 이유를 經에서는 '이러한 모든 法은 다 덧없고, 함이 있는 마음을 인연하여 생기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계속해서 十八界의 본질적인 특성을 다음과 같이 說破하고 있다.


세 가지(根 境 識)가 和合하여 생겨난 觸, 그리고 촉(觸)에서 함께 생긴 受 想 思 이러한 모든 법은 無我이며 無常하다. 이에 我도 없고 我所도 없다.


이와 같이 十八界는 본래 因緣生滅法인 까닭에 無我이고, 無常하며, 空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결론적으로 苦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즉 [雜阿含經] 卷十三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이 모든 法은 덧없고 함이 있는 의도(思: '조작'의 뜻)와 願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다. 만일 덧없고 함이 있는 의도(思)와 願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곧 苦이다.


以上에서 보는 바와 같이 蘊 處 界 '三科說'로 알아본 一切 諸法의 實相은, '無我'이며 '苦'이고 '無常'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空'이다. 왜냐하면 연기적 소이(所以)로 형성되어 관념화된 世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緣起의 實相(空)에 미혹하여 實體로써 인식할 뿐만 아니라, 我와 我所 곧 '自我'와 '世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無明으로 인한 苦의 集聖諦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逆으로 환원하면, 緣起의 본원적인 諸法皆空의 實相을 如實하게 알아 取著함이 없으면, 곧 모든 苦의 消滅이 發得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苦의 본질 또한 無明의 집착으로 인해 緣起되었을 뿐, 그 근원은 본래 無自性의 '空'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苦의 滅聖諦가 이루어지며, 이것이 바로 三法印 가운데 諸法皆空의 실상으로 증명되는 '涅槃寂靜印'이다.


이상으로 '三科說'을 통해 無我說에 기초한 緣起法의 空性에 대한 이론적 전개를 마치고, 다음에는 수행 체계인 四聖諦를 통해 無我의 실천적 전개를 알아보겠다.

 


2. 四聖諦의 실천적 無我思想


'三科說'에서 밝히고 있듯이 佛陀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 세계의 一切諸法은 항상성이 없는 '無常한 존재(anicca)'이며,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實體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dukkha)'고 說破하고 있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 곧 상주불변의 영원한 我(atta)가 본래 空한 '無我(anatta)'임을 남김없이 깨닫는 데에 '苦의 소멸'이 있다.


바꾸어 말해 '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욕망의 근원이며, 욕망이 바로 괴로움의 原因이다. 결국 욕망은 '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것이 根源的인 苦의 모습이다. 그래서 佛陀는 苦의 原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중생에게 생기는 모든 괴로움은 다 애욕이 근본이 된다. 그것은 애욕에서 생기고 애욕이 모여 일어나며, 애욕을 원인으로 애욕을 인연하여 생긴다.


우리의 존재가 '無我'임을 여실하게 증득할 때, 어디에도 더 이상 집착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욕망은 사라지게 되고, 慾望이 소멸되면 苦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원시불교의 無我說은 존재의 속성인 苦의 問題를 해결하는데 필연적인 열쇠라 할 수 있다. 佛陀께서 四十九年 동안 중생에게 가르치신 목적은 오로지 이러한 生死苦를 해탈케 하는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佛陀는 苦의 해결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체의 邪見이나 戱論에 대하여 '無記'로써 답하셨다. 그리고 "나는 단지 苦와 苦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 라고 하신 佛陀의 말씀은, 근원적인 人生苦의 해결을 초월적인 '梵'이나 '神'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적극적으로 苦의 실체를 파악하여 苦에서 해탈케 하는 것이 佛敎의 궁극 목적임을 示唆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無我說(空)에 실천적 바탕을 두고 성립된 四聖諦의 이치이다.


불교 수행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교리 체계라 하는 四聖諦는, 苦聖諦를 통하여 人生의 불가피한 苦의 정체를 바로 보고 또한 바로 認知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참다운 苦의 原因을 파악하고 나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실천행(八正道)을 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사십구년 설법의 가르침을 모두 四聖諦로 귀결시킬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中阿含經]에는 이 四聖諦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無量善法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四聖諦'에 포함된다. 그 까닭은 四諦는 일체 善法 가운데 제일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一切 善法을 모두 섭수하는 까닭이다. 마치 모든 짐승의 발자국 중에 코끼리 발자국이 가장 큰 것과 같이, 일체의 無量善法은 다 四聖諦에 포함된다. 이른바 四聖諦는 일체법 중에 가장 으뜸이다.


불타의 傳記를 기록한 諸種의 문헌에 의하면, 불타께서는 成道 후 五比丘에게 中道行인 八正道의 설법을 마치시고, 第二次的인 설법으로 四聖諦를 설하셨다. 그뿐 아니라 이후 入滅하실 때까지 어느 때 어떠한 근기를 대해서도 구체적인 설법으로 항상 四聖諦의 설법을 하셨던 것이다.


經에는 '四聖諦란 과거 현재 미래 三世를 통하여 불변하는 진리로써, 이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生死流轉의 윤회가 따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四聖諦를 알게 되면 生死의 苦를 길이 해탈함을 여러 偈頌으로 밝히고 있다.


이제 이 네 가지 진리의 법을 여실히 알지 못하면, 나고 죽는 속에서 바퀴 돌면서 끝내 해탈 못하리라. 그러나 만일 이제 이 네 가지 진리를 밝게 깨달아 환히 알면, 다시는 후생의 몸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人生苦를 해결할 수 있는 四聖諦의 진실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苦'를 말할 때 '業'을 떠올린다. '業'은 또 '報'의 개념과 상호 연관되어 함께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輪廻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다. 우파니샤드 시대부터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업과 윤회사상이 불교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동일하다고 볼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설하는 윤회와 업보사상은 철저한 '無我說'의 체계 위에서, 즉 空 思想을 바탕으로 성립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空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와 관련된 것인데, 바꾸어 말해서 空이란 현상제법과 인과의 법칙마저 부정하는 맹목적인 無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阿含經]에서도 자주 경계하고 있는 사항으로, 실제 그러한 오해에서 비롯된 例도 經에 있다.

無我 空이라고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實存으로 집착하는 ('三科說'에서 밝힌 바와 같이 주관과 객관이 따로 실재한다고 取著하는) 자아와 세계, 곧 我와 我所가 근본적으로 실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이는 因緣生起의 諸現象을 긍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정된 실체로서의 自性이 없음을 了達하면, 인연 따라 生하고 滅하는 緣起의 理致가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 제법이 본래 無我 無我所인 皆空한 實相에서 보게 되면, 제법의 연기한 현상에 '있다'고 집착하지도 않지만(非有) 동시에 '없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다(非無). 佛陀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


세간의 集을 여실하게 正觀하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無見)는 생기지 않고, 세간의 滅을 여실하게 正觀하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有見)도 생기지 않는다. 迦 延이여, 이에 如來는 양변을 떠나 '中道'를 설한다.


다시 한번 空의 근거가 바로 緣起法에 있으며 緣起의 법칙 또한 空性을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언급했던 점을 주목해 보면, 空 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적으로 因果 業報와 輪廻 및 苦가 있고 너와 나의 차별이 있게 됨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어 숙명론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요약컨데 불교에서는 苦의 본질, 즉 人生苦의 윤회와 업보 문제도 연기법적인 中道 思想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無我說은 大 小乘을 통하여 가장 불교를 불교답게 성립시켜 주는 基盤이며, 다른 외도설과 구분할 수 있는 독자적이고 독특한 敎說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苦聖諦'에서 의미하는 人生苦의 원인은, 이미 서술한 대로 諸法無我의 如如한 眞實相을 바로 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空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 欲(顚倒妄心)이 근원이 되어 苦가 생성된 것(集聖諦)이다. 그러므로 苦는 본래 청정한 無我의 실상에 迷惑하여, 전도된 無明觸을 緣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유전의 괴로움(苦)도 '緣起한 것'이라 정의할 수 있고, 그 해결 방법 역시 '緣起'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滅聖諦'와 '道聖諦'이다. 부연하여 말하면, 苦는 근원적으로 自性이 없이 '緣起'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능히 梵行의 실천 수행을 緣하여, 극복하고 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로써 苦의 集起와 消滅이 모두 緣起의 '無我說'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四聖諦 가운데 '苦聖諦'가 첫 번째로 위치하고, 以下에서 모두 苦의 '集聖諦' 苦의 '滅聖諦' 苦를 멸하는 '道聖諦' 등으로 命名되어진 것도 苦聖諦의 중요성과 함께 그 思想的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苦聖諦를 중심으로 한 人生苦의 근원적 해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로 苦의 現實을 인식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根本因을 밝히고(苦聖諦), 이어서 苦의 生成과 消滅에 따르는 緣起法을 無明에 의한 苦의 集聖諦와 滅聖諦로써 밝히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無我의 중도적 실천 수행으로 '八正道'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道聖諦)


그러므로 四聖諦란 괴로운 인생의 근원은 無明이고, 그 세계를 集起하는 원동력은 貪慾이라는 사실을 如實하게 알아서, 무명과 욕탐이 滅盡하여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眞我의 세계 곧 苦의 滅聖諦인 '涅槃'에 이르도록 하는 궁극적인 실천 수행의 가르침이다.


以上 앞 章에서 '三科說'의 이론 체계가 緣起法의 無我 空思想에 기초한 것임을 밝혔고, 이 章에서는 실천 수행 체계로써 四聖諦 역시 緣起의 無我思想에서 비롯된 敎說임을 확인하였다. 本 章의 목적이 원시 불교에서 緣起法의 無我 空性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므로, 各各의 聖諦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삼가 하겠다. 그리고 [阿含經]에 나타난 실제 空觀의 行法에 대해 [增壹阿含經]에 空三昧로 대표되는 三三昧가 있으며, [中阿含經]의 '大空經'에는 內空과 外空 그리고 內外空의 三空說이 있다. 또한 四禪, 四無色定 그리고 滅盡定의 九次第定이 있고, 뿐만 아니라 空을 성취하는 次第를 밝힌 '小空經'도 있지만, 이러한 空의 근본 수행 체계에 대한 상세한 내용도 역시 다루지 않겠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阿含의 緣起敎說이 無我說(空性)에 기초한 가르침임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다음 장에서 緣起의 中道 思想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 충분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章에서는 [阿含經]에 나타난 中道說의 유형을 '無記'와 '十二緣起'를 중심으로 해서, 無我 空性을 바탕으로 한 緣起法의 中道思想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Ⅱ. 阿含의 中道說


三法印 가운데 諸行無常과 諸法無我의 논리적 근거가 바로 '緣起의 原理'에 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원시 불교의 無常 苦 無我 및 空의 사상적 연원이 '緣而生法의 屬性'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시에 緣起法 또한 無我 空性에서 성립된 개념이라는 뜻은, 다시 말해 緣起法의 실질적인 내용이 '中道'임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본 章은 이러한 관점에 주안점을 두고, '無記'와 '十二緣起'에서 中道의 내용을 찾아 전개해 나가겠다.


緣起란 본래 청정한 제법의 眞如相을 깨닫지 못한 無明에서, 세계와 자아가 어떻게 허구적으로 인식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것이 生死 流轉門이고, 四聖諦의 '集聖諦'이다. 즉 四聖諦의 큰 원리는 無我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欲으로 취착함을 因하여 苦가 발생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곧 四聖諦도 '緣起法'이라는 불교의 대원칙에서 설명되는 것으로, 宇宙의 生成과 世界의 原理, 그리고 人間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답변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緣起法이란 '世界의 展開 原理'로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닌 객관적인 진리이다. 즉 人生이 어떻게 되어 발생하고 존재하는지 여실히 제시해 주고 있다.


緣起를 보는 자는 法을 보고, 法을 보는 자는 緣起를 본다.


이와 같은 불타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緣起法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는 佛敎 思想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불타의 모든 설법이 緣起法을 원리로 한 응용이라 보는 견해는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緣起의 理法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불교의 근본 입장을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緣起說에 관한 교리만큼 많이 논란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佛陀에 의해 제시된 緣起說은 시대와 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었으며, 근래에도 緣起說에 대한 시비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우선 緣起法의 완성된 교설이라 할 수 있는 十二緣起를 살펴 볼 때 그 支數의 여부에 있어서도 여러 유형이 있지만, 대체로 緣起의 전형적인 표준형으로 '十二緣起'를 논하는데는 異說이 없는 듯 하다. 따라서 본 章에서 [阿含經]에 나타난 中道說을 궁구하는데 있어, '無記'와 함께 緣起에 관해서는 '十二緣起'를 전형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먼저 [阿含經]에 나타난 無記의 진정한 의미가 '中道 思想'에 입각한 것이며, 또한 無記說에 그치지 않고 형이상학적 諸難問에 十二緣起의 이치를 설하여 '中道'를 밝힌 緣起法의 궁극적인 내용을 살펴보겠다. 이는 곧 無記와 十二緣起를 통해 불타의 中道說을 고찰하는 것으로, 緣起法의 실질적인 가르침이 '中道說'에 있음을 논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無記의 中道義


불타의 無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人生苦의 궁극적인 해탈과 무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戱論으로 배척했다고 하는 것이다. 無記와 관련된 경전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中阿含經]의 '箭喩經'에 보면, '나와 세계는 常住하는가 아니면 無常한가, 有邊인가 혹은 無邊인가?' 그리고 '신체와 영혼이 같은가 다른가, 여래가 死後에 존속하는가 존속하지 않는가?' 등의 이런 문제에 대하여 佛陀는 침묵으로 답하였다고 한다. 佛陀는 이어서 이런 것을 분별하고자 애쓰는 이는 마치 독화살을 맞고도 그것을 먼저 뽑지 않고 독화살의 재료나 출처를 알려고 하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다고 하였다. 그리고 無記의 태도를 취하시는 이유로 첫째 義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고 法에 상응하지 않고, 梵行의 근본이 아니며, 智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覺으로 나아가지 않고, 涅槃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반해 四聖諦는 義에 상응하고, 法에 상응하며, 梵行의 근본이고, 智로 나아가며, 覺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이를 說하신다고 하셨다. 즉 세상이 영원한가, 여래는 死後에 존재하는가 등등의 객관적 문제에 빠지지 말고, 살아가고 있는 現實苦의 상태를 자각하고 어떻게 해탈할 수 있는가에 몰두하라는 것이 無記의 一次的인 意味이다.


그런데 佛陀는 다만 無記에서 그치지 않고, 철학의 모든 영역을 충족시키는 四聖諦를 시설하셨다. 이는 哲學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진실한 철학의 방향을 제시하신 것이다. 無記의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만으로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무조건 배제하였다고 보는 것은 佛陀의 眞意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無記의 태도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무르띠 박사는 "無記는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한 제 3의 입장이라는 의미에서의 입장이 아니라, 그 양자를 파기한 '無立場의 입장'인 것이다"라고 논술하고 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논쟁을 걸어 왔을 때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의 思想家들은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他說을 배격하여 논쟁을 일삼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기에 대한 집착과 慢心이 있는 것이다. 비록 진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論爭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진리는 집착에 의해 더럽혀진다. 불타는 집착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의 무익함을 알고 논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佛陀의 이성적인 자제력이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佛陀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自說의 절대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實相(또는 實際)이란 인간 이성의 조작을 넘어선 것이기에, 어떤 명제나 주장도 實相에 대한 판단이 되지 못한다. 佛陀는 인간 이성의 이율배반적인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모순성을 파악하여 더 높은 차원의 관점으로 승화시켜 해결하고자 無記答을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常, 無常 또는 영혼과 육체의 一致 및 不一致 문제 등은, 어느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쪽은 허위라고 분별 취착하는 중생의 인식 자체가 邪見임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이다. 곧 중생들은 독화살을 맞아 죽어가는 사람과 같이 邪見에 빠져서 생사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는 生死라는 人生苦가 독화살과 같은 어떤 실체적인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독화살에 맞은 것처럼 邪見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箭喩經'의 비유를 철학적 사색에 대한 배척이나 무관심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잘못된 철학적 태도를 비판하고 '진정한 철학의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는 매우 적절하게 생각된다. 곧 불타의 無記는 有見과 無見의 이율배반성을 지적하고, 나아가서 그것이 대상을 실재화 하는 인식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무의미한 견해임을 비판하고 있다. '有我經'에 보면 無記說의 이러한 趣旨가 보다 분명해진다.


어느 날 어떤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와서 여쭙기를, "내(我)가 잇습니까?" 이렇게 세 차례나 물어도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잠자코 계신다. 이에 존자 아난이 나서서 여쭙는다. "세 번이나 여쭈어도 답해 주지 않으시면, '내가 묻는 것을 대답 못하는구나'라고 잘못 생각하지 않겠읍니까?"


이에 세존께서 답변하시기를,
"내가 만일 '我'가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가진 삿된 소견을 더 하게 할 것이요, 만일 내가 '我'가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가진 의혹을 더하지 않겠느냐. 본래부터 '나'가 있었는데 지금 끊어졌다고 말해보자. 만일에 본래부터 '我'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常見이오, 지금에 끊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斷見이다. 如來는 그 두 가지 극단을 떠나 '中道'에 서서 설법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邪見의 파기에 그치지 않고, 이어서 中道의 철학적 입장인 緣起法의 진리를 설하신다. 다시 말해 無記란 경험적인 상대적 입장을 부정한 不可得의 의미로써, 佛陀는 '無記'에 의하여 不可得인 中道의 진실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無記說에서 발견되는 불교적 특성은 中道에 있으며, 緣起說과 中道를 분리해서는 안된다. 이 둘을 따로 놓고 보면, 緣起說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긴다'는 일반적인 因果論과 하등의 차이가 없게 되며, 中道 역시 한낱 공허한 관념 체계가 되고 말 것이다.


일체의 邪見과 偏見에서 벗어난 철학적 입장, 곧 양변을 여윈 中道의 가르침을 '無言의 說法'인 無記答으로 시설하여 모든 戱論을 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實際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형이상학적 難問에 대해 침묵한 것이 아니라, 難問을 일으키는 사고방식 자체에 常見이나 斷見의 病이 들어 있음을 침묵으로 설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후세에 가장 잘 이해한 論師로서 龍樹菩薩은 그의 [中論] 序頭에서 '세존께서 緣起法을 설하셔서 모든 戱論을 적멸했다'고 찬탄하고 있다. 즉 용수는 佛陀의 無記說을 戱論을 적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 사상적 근거를 緣起法에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T.R.V. Murti는 불타의 無記가 중관학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無記說은 형이상학의 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그릇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시설한 '中道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2. 十二緣起의 中道說 展開


佛陀가 깨달은 것은 상주하는 法界와 이 法界가 유지되는 법칙, 즉 '緣起法' 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法이란 '緣起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緣起하는 有爲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法의 세계 곧 '法界'인 것이다.
緣起法이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저 如來가 세상에 나오시든 나오시지 않든 法界는 常住한다. 如來는 스스로 이 法을 깨달아 等正覺을 이루웠나니, 모든 衆生을 위하여 分別하여 演說하고 開發 顯示하노라. 이는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無明을 緣하여 行이 있고 이에 내지 純大苦聚가 집기하며, 無明이 멸함으로써 行도 멸하고 내지 純大苦聚가 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계가 常住한다는 말은, 일정한 조건 아래서 일정하게 작용하는 법칙의 세계가 상주한다는 의미이다. 故로 그 법을 자각했다는 것은 이같은 法界가 유지되는 법칙인 '緣起法'임을 자각했다는 뜻이다. 불타는 緣起를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며 불변하는 것으로, 조건 아래 작용하는 법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緣起法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을 法이라 부르고, 그 법의 구조를 法界라고 한다. 따라서 一切法은 緣起하고 있으며, 이렇게 緣起하는 구조는 常住한다는 것이 '法界 常住'의 의미이다. 그리고 緣起하는 法界를 중생들에게 개현하기 위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설한 것이 '十二緣起說'이다.


하지만 객관적 필연성으로 불변하는 '緣起의 법칙'이라는 말은 어떤 조건 아래서의 상호 관계일 뿐, 事物에 내재하는 독립적인 법칙은 아니다. 만일 사물이 실재로 존재하고, 그 존재에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내재된 법칙(自性)이 있다면, 그 존재는 어떤 조건에서든지 그 법칙으로만 작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이든 조건이 형성되어지는 바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원래 고정된 自性이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無自性이므로 '空'이고, 이에 空을 바탕으로 하여 緣起法이 성립한다. 이것이 바로 緣起法의 심심난해한 意味이며, 因果律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떤 因果의 決定論에도 떨어지지 않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空과 緣起 및 中道의 용어는 실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空 思想의 근거가 되는 緣起法은, 中道의 철학적 입장에서 존재(法)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十二緣起說은 有爲法의 연기 구조로써, 十二支의 次第로 유전문과 환멸문을 施設하고 있으며 이는 四聖諦의 집성제와 멸성제에 해당한다. 곧 첫 번째 支인 '無明'은 法界의 實相에 무지한 중생들이 어떻게 五取蘊을 '自我'로 여기며, 생사 유전하는가에 대한 근본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苦聖諦에서 苦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無實體한 眞如의 實相을 여실히 바로 보지 못하고, 欲을 일으켜 취착함으로써 苦가 전개되고 발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十二緣起에서 설하는 無明은 상대적으로 '明'의 개념을 示唆해 주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宇宙 萬法은 緣起에 의해 생기고 멸하는, 根本 體性이 空(su a)한 '空'이다. 여기에 미혹하지 아니하고 空을 바르게 了達하는 것이 '밝힘(明)'의 개념 인 것이다. 그래서 佛陀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


모든 비구들이여, 만일 無明에서 욕심을 떠나 밝힘(明)이 생기면, 그 누가 늙고 죽으며 또한 늙고 죽음은 누구에 속하겠는가 무명에서 욕심을 떠나 밝힘이 생기어 그 無明이 멸하면 곧 行이 멸하고 내지 커다란 苦의 무더기가 멸하나니, 이것을 大空法經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十二緣起說'은 無明의 상태에서 欲貪으로 전도된 중생들의 삶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음과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곧 중생들이 유위법의 세계에서 무위법의 세계로 悟入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阿含經]에 나타난 十二緣起說을 '正覺成道의 연기'와 有 無 및 斷 常의 양변을 여읜 '戱論 寂滅의 연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 中道 思想을 고찰하고자 한다.

 


⑴ 正覺 成道의 연기


十二緣起의 첫 번째 支分인 無明의 정의에 대하여, 經에는 '괴로움을 모르고, 그 괴로움의 集起와 滅 그리고 멸하는 길(道)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곧 십이연기설의 목적이 四聖諦의 수행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으로, 따라서 十二緣起를 모르면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모든 중생들은 十二因緣法을 알지 못하여, 生死에 헤매이고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모두 다 迷惑하여 결합(行)의 근본을 알지 못한 채,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며 길이 다섯 가지 번뇌 속에 있으므로, 벗어나기를 구하지마는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經에는 계속해서 釋尊도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셨을 때, 緣起法을 觀함으로써 모든 마군을 항복 받고 正覺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처음 佛道를 이룰 때에 十二因緣을 깊이 생각하였기 때문에, 악마의 권속들을 항복 받고 無明을 없애 지혜의 밝음을 얻어 온갖 어두움이 아주 없어지고 티끌과 때가 없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釋尊만이 아니고 과거 부처님들께서 불도를 이루실 때도, 모두 十二緣起法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셨다고 한다.


옛날 비파시 부처님께서 아직 정각을 이루시기 전에, 보리수 밑에 계시다가 오래지 않아 부처님이 되셨다. 보리수 밑에 나아가 풀을 깔고 가부좌를 맺으시고 단정히 앉아, 바른 생각으로 한번 앉음에 이렛동안을 十二緣起에 대하여 逆으로 順으로 관찰하셨다.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라고. 곧 '무명을 연하여 行이 있으며 내지 태어남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고, 커다란 苦의 무더기가 集起하며, 또 그 커다란 苦의 무더기가 멸한다'라고. 비파시 부처님과 같이 시키 부처님, 그리고 벳사부 부처님, 카쿠산다 부처님, 코나가마나 부처님, 카샤파 부처님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緣起法은 깨달음의 실질적인 내용으로써, '成道의 如實知見'으로 說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모든 법은 법의 머무름(住), 법의 공(空), 법의 여(如), 법의 그러함(爾)이니라. 법은 '如'를 떠나지 않고 법은 '如'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아서 연기를 그대로 따르나니 이것을 緣生法이라 한다. 이른바 無明 行 識 名色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 부딪침(觸) 느낌(受) 갈애(愛) 취함(取) 존재(有) 生 老 病 死 憂悲苦惱이니, 이것을 緣生法이라 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十二緣起法은 진여의 '如'와 다르지 않으며, 또한 '菩提(bodhi)'로 지칭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에 있어서 '自利利他'의 교설과 조금도 다름없는, 正覺 成道의 근본 사상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⑵ 戱論 寂滅의 연기


眞理란 누구에게나 일치할 수 있고, 모순이 없는 객관적인 것이다. 즉 언제 어디서나 보편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주관적인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또 전통적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고 있는 관념이나 사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순 없이 추론된 어떤 논리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나 사변적인 형이상학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와 상반된 견해를 허용할 수 있는 것들이므로 眞理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여기에 佛陀가 제시한 眞理는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써, 진리란 인식의 대상이라기보다 실천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실현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 대상으로의 眞理는 어떠한 논리적 思惟를 통해 인식되어지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있어, 緣起法의 본질적인 내용이 다름 아닌 戱論 寂滅의 '中道'에 있음을 고찰하고자 한다. 곧 眞理의 실천적인 수행이 十二緣起說의 '中道思想'에서 형성된 것을 논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阿含經]에 나타난 中道說에는 苦樂中道, 有無中道, 斷常中道, 一異中道 그리고 自作他作中道의 다섯 종류를 들고 있다. 이 가운데 苦樂中道를 '실천적' 中道說로 분류하고, 그 밖의 것은 '이론적 혹은 철학적' 中道說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 中道說이 어떻게 十二緣起와 상관 관계에 놓여 있고, 어떻게 하여 中道의 理致가 성립되는지 經典을 통해 살펴보겠다.


가) 苦樂中道說


불타 당시의 바라문들은 현실적인 경험이나 인간적인 思惟는 전적으로 무시한 채, 우주의 一原理로서 '梵'의 展開로 세계를 인식하였다. 따라서 認識의 중심은 오로지 '梵'에 있으며, 이러한 轉變說的인 思考는 후에 梵我一如의 사상으로 발달되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고유한 개체로서의 自我( tman)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禪定을 위주로 한 修定主義를 내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정통 바라문교의 사상은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문화의 발달로 말미암아 점차 약화되면서, 이를 비판하고 시정하기 위하여 沙門( rama a)이라 불리는 自由 思想家들이 새롭게 출현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四大 要素를 기본으로 해서 諸要素가 집합하면 一物體가 구성되고, 그것이 흩어지면 물체도 없어진다고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즉 現象界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다만 이런 여러 要素가 積集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바라문 사상을 '轉變說'이라 부르는데 비해, 이들 沙門들의 思想을 통칭하여 '積聚說'이라고 하며 또는 '因中無果說'이라고 한다. 대개 이들은 원칙적으로 감각적 지각을 떠난 인식은 모두 무의미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長阿含經]의 沙門果經에는 이들을 보통 '六師外道'라고 부르고, 이들의 思想을 소개하며 그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道德 否定論者나 唯物論者 또는 機械論的 不滅論者 등은 地 水火 風의 四大와 더불어 苦 樂 命我 등의 七要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감각적 지각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要素原理觀은 드디어 無因果說을 낳게 되고, 이에 따라 도덕과 종교의 이론까지 否認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의 沙門들은 偶然論에 빠지게 되며, 이에 反하여 邪命派의 숙명론과 회의론 및 자이나교가 등장하게 된다.


이 가운데 자이나교의 교조인 니간타(Niga ha N taputta)는 본래 무한한 知, 見, 力을 갖고 있는 '命我'를 설정하고, 非命我의 '業'이 침투하여 '命我'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인식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은 '命我'와 '非命我'를 분리시켜서, 원래의 순수한 命我를 회복하는데 있다고 하며, 이 상태를 '獨存知'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는 現生이란 단지 전생의 業을 받는 괴로운 윤회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가장 價値있는 일이란, 어차피 받아야 할 報의 괴로움을 한꺼번에 받아 輪廻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연히 그들은 맹목적인 苦行을 일삼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와 같은 梵我一如論, 唯物論, 道德否定論, 不滅論, 宿命論, 懷疑論 등은 결국 윤리를 부정하고 세속적인 쾌락에 빠지게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자이나교에서만은 苦行主義로 치닫게 되었다.


西紀前 五百年頃까지 당시 印度에 유행하였던 思想의 종류를 耆那敎所傳에 의하면 三百六十三見이었다고 하고, 불교 문헌에 의하면 六十二見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思想界가 얼마나 복잡하였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적 基調가 되는 학설은 위에서 살핀 대로 轉變說 중심의 '單純唯心論'과 六師外道의 積聚說인 '唯物論'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으며, 그 실천방법에 있어서도 '快樂'과 '苦行'의 양극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혼란한 사회상에 대하여, 佛陀는 크게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경계하신다.


어떤 사문과 범지는 一切는 모두 '宿命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문과 범지는 '尊祐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문과 범지는 '因도 없고 緣도 없다'고 주장한다. …… 만약 그와 같다면 그들은 宿命이나 尊祐(神)의 조작에 의해서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살생 같은 악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宿作因이나 尊祐作因 등에 의지하면, 거기에는 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을 수 없고, 노력도 있을 수 없으며, 이 행위는 해야 하고 이 행위는 해서는 안된다는 당위성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소위 三種外道說로 불리는 이같은 佛陀의 비판 속에서, 우리는 당시 思想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佛陀는 그들 사문들이 취하고 있던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버리고 '八正道'의 수행을 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범부들이 행하는 극히 하찮은 業인 '欲樂'을 추구하지 말고, 성자의 行이 아니어서 아무런 의미 없이 스스로 괴로움에 이르기만 하는 '苦行'도 추구하지 말라. 이 양변을 떠나면, 안목과 지혜를 이루고 자재하게 선정에 들어 智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中道'가 있으니 …… 正見에서 正定에 이르는 '聖道八支'가 그것이다.


佛陀가 새로운 수행의 가치 체계로 제시한 '八正道'는 언뜻 보기에 거문고 줄의 비유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자칫 中道가 지니는 본연의 의미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선 첫 支分인 '正見'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팔정도의 中道行은 단순한 中庸, 혹은 중간적 입장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올바른 正'의 의미를 지닌다.


[雜阿含經]에 보면 산타가전연이 부처님께 '正見'의 정의에 대해 묻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正見이란 有 無의 양변을 여읜 中道로써, 이는 곧 '緣起의 이치를 아는 것'이라고 답변하신다.


따라서 八正道의 '正見'은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 곧 緣起法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有 無 양극단을 떠난 中道에서 세간의 緣起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비로소 현실 세계의 실상을 여실히 正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관찰은 禪定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마지막 支分에 '正定'을 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禪定은 修定主義를 내세웠던 우파니샤드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 한다. 그 까닭은 바로 緣起法의 '正見'에 기반한 禪定이기 때문이다. 즉 自我가 실체적으로 存在하고 이를 체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세운 우파니샤드의 禪定은, 緣起法의 철저한 無我 思想의 체득을 위한 佛敎의 禪定과는 본질적으로 그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비록 禪定의 명칭과 형식은 유사하지만, 근본 진리의 내용은 결코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苦樂中道의 실천행으로 시설한 '八正道'는 당시 인도 사상계의 큰 흐름이었던 積聚說이나 轉變說의 형태에서 벗어난, 불교의 독자적인 十二緣起法에서 비롯된 無我의 正見을 근본으로 하는 中道行임을 살펴보았다.


나) 有無中道說


앞에서 언급한 대로 苦樂中道說은 연기법의 실천적 측면에서 설하여 졌으며, 그 내용은 '八正道'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有 無 兩邊을 떠난 '正見'의 思想은, 실천적 中道와 이론적 中道 가운데 철학적 측면의 中道義를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佛陀는 극단적인 모든 사상을 有無 二見으로 판별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有無中道說은 그 밖의 斷常中道, 一異中道, 自作他作中道를 총괄하는 中道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斷常, 一異, 自作他作의 모순 대립은 본질적으로 有 無의 모순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斷 常의 모순 대립은 불멸하는 自我의 존재에 대한 有 無 二見의 대립이며, 一 異의 모순 대립은 영혼이라는 존재에 대한 有 無 二見의 대립이다. 또한 自作 他作의 모순 대립은 常住하는 苦의 作者에 대한 有 無 二見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경전에서 설하는 有無中道說의 내용을 직접 살펴보겠다.


세간에는 두 가지 의지함이 있으니, 혹은 有요 혹은 無다. 취함(取)으로 부딪히는(觸) 바가 되어서, 取로 觸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有'에 의지하거나 '無'에 의지하는 것이다. 만일 이 취함이 없으면 마음이 경계에 매이게 되더라도, 取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게 된다. 내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두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하는 대로 두어,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나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고 이것이 바로 如來가 施設한 '正見'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集起를 바르게 알고 보면 세간이 없다고 하는 견해는 있을 수 없고, 세간의 滅을 참다이 알고 보면 세간이 있다고 하는 견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 두 극단을 떠나 '中道'를 말하는 것이라 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무명을 연하여 行이 있고 내지 아주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集起하며, 無明이 滅하기 때문에 行이 滅하고 내지 아주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有無中道說은 수행자가 실천해야 할 길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苦樂中道說과 비교해 볼 때, 그러한 실천적 수행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타당한 '正見' 곧 이론적인 中道의 思想에 비중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苦樂中道說이 '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有無中道說은 '觀' 또는 '解'에 비중을 두고 있다. 따라서 苦樂中道說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한 八正道의 第一支分이 '正見'인데, 여기 有無中道說에서는 그 正見의 내용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佛陀가 모든 邪見이 有 無의 二見에 의지해 생겨난다고 한 二見이란 다름 아닌 '모순'이다. 有와 無는 가장 근본적인 모순 관계의 개념으로써, 이는 곧 우리들 마음으로 구성한 허구적 관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外部에 實存한다고 생각하는 '存在'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 주어진 내용(境界) 가운데서 마음으로 취사 선택하여 관념적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즉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存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世界 뿐만 아니라 自我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自我라는 명칭은 동일하지만, 외도들이 取著하여 計度하는 내용은 각기 다르다. 常見을 주장하는 사람은 自我를 불멸하는 존재로 計度하며, 斷見을 주장하는 사람은 斷滅하는 존재로 計度한다. 그러나 緣起法의 實相에서 보면, 不滅하는 自我나 斷滅하는 自我나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으로 計度하여 분별하는 有 無의 관념은 단지 허구일 뿐, 眞도 僞도 아닌 무의미한 논쟁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같은 무의미한 명제에 대한 論議 대신에, 우리가 있다고 할 때는 어떤 경우에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할 때는 어떤 경우에 없다고 하는지 如實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 佛陀의 가르침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의식에 어떤 인식된 내용이 集起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있다(有)고 하며, 그 내용이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지면 없다(無)고 한다. 하지만 이를 어떤 관념에 取著하거나 計度하지 않고 중도의 실상에서 正觀한다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非有非無)이다. 왜냐하면 緣起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中道에 섰을 때 모든 邪見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중도의 입장에서 보는 윤회의 세간은 無明에서 연기한 妄念이라는 것이 '有無中道說'의 내용이다. 곧 十二緣起의 集 滅을 통하여, 中道의 이치를 바르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 斷常中道說


앞 장 有無中道說에서 一切의 邪見이 有 無의 兩邊에서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邪見의 밑바닥에는 세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어떤 '實存하는 主體'를 상정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다시 말해 外道들은 저마다 마음으로 計度하는 의식에 따라 自我를 규정하고 분별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만과 동일한 불멸의 정신적 실체로서 환희에 충만한 '아트만'이 自我라고 주장하며, 유물론자들은 물질적 요소들이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상태가 自我라고 생각한다. 또 자이나교에서는 무한한 知, 見, 力을 지닌 '命我(J va)'가 진정한 自我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自我가 일시적으로든 영원하게든,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존재인 自我가 사후에도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常見'이고, 죽으면 존속하지 않고 그대로 斷滅한다는 것이 '斷見'이다. 불타의 斷常中道說은 이러한 외도들의 自我觀에 대한 비판이며, 自我의 有 無에 관한 불타의 논증이다.


원래 自我가 있는데 지금 끊어졌다고 말해 보자. 만일 본래로부터 自我가 있다고 하면 이는 常見이요, 지금 끊어져 없어졌다고 하면 이는 斷見이다. 여래는 두 극단을 떠나 中道에서 설법하나니, 이는 곧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즉 무명을 연하여 行이 있으며 내지 (무명을 滅하여) 생 노 병 사 우 비 뇌 고가 滅하는 것이다.


또 아난아, 만약 有我라고 말하면 곧 常見에 떨어지고 만약 無我라고 말하면 곧 斷見에 떨어지므로, 여래의 설법은 二邊을 떠나 中道를 아는 것이다.


自我에 대한 불타의 입장은 이와 같이 常이라고도 斷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소멸하므로 不常이요, 지속되므로 不斷이니 곧 '不常不斷'인 것이다. 이것은 '無我說'을 바탕으로한 十二緣起의 이치로 설명된다. 즉 無明이 있는 한 生死는 있는 것이고, 무명이 滅하면 生死도 滅한다. 불교의 無我說은 단순한 自我의 否定(斷滅論)이 아니라, 이와 같은 緣起法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無明을 연하여 生死의 괴로움이 있고, 無明의 滅과 함께 生死의 苦도 사라진다. 곧 생사 윤회와 인과응보의 諸現象은 인정하나, 생사 윤회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有業報而無作者'라는 經의 내용이 잘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생사 윤회하는 모습을 經에는 다시 '此陰滅已하면 異陰相續'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즉 此陰이 멸하므로 常일 수 없으나, 異陰이 상속하므로 동시에 斷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斷 常 二見을 초월하는 중도의 이치는, '無我說'에 근본한 十二緣起說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바꿔 말하면 自我의 존재를 문제삼고 있는 常見과 斷見은, 모두 無我의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허구적으로 自我를 인정하고 計度하여 논의한 邪見일 따름이다. 결국 自我라는 생각부터 무명에서 연기한 妄念임을 지적하여 비판하고, 십이연기의 理法으로써 無明을 滅하면 자연히 '無我의 진리'를 깨닫게 됨을 밝히고 있는 것이 '斷常中道說'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라) 一異中道說


이미 거론했던 바와 같이 佛陀 당시의 印度 思想界에서, 중요한 문제로 外道들이 추구했던 論議 중의 하나가 '육체와 영혼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雜阿含經]의 '身命經'에 보면, 이에 관하여 어떤 바차 종족이 부처님께 여쭙는 대목이 나온다.


"어떠하나이까, 고오타마시여. 영혼(命)이 곧 몸이 옵니까?"
"영혼이 곧 몸이라 한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고오타마시여, 영혼과 몸은 다르나이까?"
"영혼과 몸이 다르다고 하는 것도 말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타는 '無記'로 답하신다. 無記는 획일적인 답변을 부정하는 답변이다. 또한 戱論(prapa ca)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써, 중생들의 妄執으로 인한 공허한 二邊의 논의를 止滅시킨다.


불타는 無記에만 그치지 않고, 중생이 목숨을 마치고 다른 곳에 날 때에는 '愛慾으로 말미암아 取하고 머무른다'고 설명하신다. 이는 곧 본래 청정한 眞如相에 무엇인가 '있다' '존재한다'라는 어리석음(無明)으로, 愛欲을 인연하여 제법의 유위현상이 緣起됨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혼과 육체의 一 異에 대한 佛陀의 중도 입장을 직접적으로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자.


영혼(命)이 곧 육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주장의 의미는 똑같은 것인데, 갖가지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영혼이 육신이라면 거기에는 梵行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 해도 梵行은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들 二邊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中道로 향할지니 이른바 生을 연하여 老死가 있고 이와 같이 하여 無明을 연하여 行이 있는 것이다.


목숨과 몸 다시 말해 영혼과 육체의 一 異에 관한 문제는, 自我가 常住하는가 斷滅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常見에서 주장하는 自我는 영혼과 같은 정신적 존재이고, 斷見에서 주장하는 自我는 물질의 집합체인 육신이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이 다르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영혼과 육신이 동일하다고 한다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生死에서의 해탈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결국 梵行을 수행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한편 영혼과 육신이 달라서 육신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혼은 수행에 관계없이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梵行이란 무의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영혼과 육신의 一 異 문제는 앞서 살핀 斷 常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無我의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邪見이다. 이에 관하여 佛陀는 十二緣起의 이치로써, 一異中道說을 설하여 邪見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마) 自作他作中道說


모든 종교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苦의 生起와 더불어 苦의 解脫에 있다. 그러므로 苦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苦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生起하는가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自作他作中道說은 이같은 苦의 生起에 관한 외도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佛陀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雜阿含經]의 '阿支羅經'에 의하면, 阿支羅迦葉(Acela kassapa)이 부처님께 '苦는 自作인가, 他作인가, 自他作인가 혹은 非自非他의 無因作인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苦의 自 他 自他 無因에 관한 문제를, 당시 인도 사상계의 입장으로 이해하는 내용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네 가지 견해는 각각 우파니샤드, 숙명론, 자이나교, 유물론의 주장이다. 우파니샤드의 경우 자기 동일성을 지닌 상주 불멸하는 아트만은, 행위의 주체임과 동시에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자이다. 苦는 불멸의 自我( tman)가 짓고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自作이란 우파니샤드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숙명론의 입장에서 보면, 苦는 숙명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他作은 숙명론의 입장이다. 한편 자이나교에서는 命我(J va)가 행위는 하지만, 苦는 業(karma)이라는 물질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한다. 業이 침투하는 측면에서 보면 苦는 自作이지만, 苦가 생기는 측면에서 보면 他作이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自他作을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을 물질적 요소의 우연한 결합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苦의 生起도 우연한 것일 뿐 윤리적 행위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無因作은 유물론자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佛陀는 이와 같은 분분한 외도들의 견해에 대하여 한결같이 無記로 답변하신다. 그렇다면 "苦는 없는가?"라고 다시 묻자, 佛陀는 "그러나 없지는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阿支羅迦葉은 苦를 자기에게 설해 주실 것을 청하게 되고, 如來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신다.


만일 느낌을 곧 스스로 받는 것이라면 나는 응당히 苦가 自作이라 설하고, 만일 他의 느낌을 他가 받는 것이라면 이는 他作이라 할 것이며, 만일 느낌을 자기도 받고 다른 이도 받아서 다시 괴로움을 주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것은 自他作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自와 他를 인연하지 아니하고, 원인 없이 苦가 생긴다고도 나는 설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극단을 떠나 그 中道를 말하나니, 여래는 설법하기를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무명을 연하여 行이 있고 내지 커다란 苦의 무더기가 集起하며, 무명이 멸하면 行이 멸하고… 내지 커다란 苦의 무더기가 멸한다'는 것이다.


佛陀가 외도들의 邪見을 破棄하고 연기법으로써 中道를 밝힌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苦를 보는 시각이 外道들과 상이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즉 외도들은 苦를 '어떤 존재'가 만든 것으로 보고 있는데, 佛陀는 '어떤 상황'에서 생겨나고 '어떤 상황'에서 소멸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苦의 해탈은 苦의 作者 문제가 아니라, 苦의 생기 과정이 문제시된다.


이와 같은 苦의 생기와 소멸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十二緣起說이다. 세간의 生老病死하는 유전문에서 苦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이에 無明을 滅하여 본래 生死 없는 본연의 자유로운 삶의 회복(涅槃寂靜樂)이 가능함을 示唆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苦의 自作 他作에 대한 불타의 근본 입장은, 苦의 생기 소멸의 과정을 밝혀주는 十二緣起의 중도 이치로 一切의 邪見을 파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阿含經]에 나타난 中道說이 十二緣起說을 통하여 사상적으로 체계화된 것임을 살펴보았다. 佛陀가 처음 보리수 아래서 十二緣起를 順 逆으로 관찰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그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中道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無我說을 바탕으로 성립된 十二緣起法은 불교의 中道 思想을 가장 종합적으로 정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곧 극단적인 모든 邪見을 떠난 中道思想은 緣起法을 통하여 비로소 바르게 이해될 수 있으며, 진정한 空 思想의 이해도 일체를 부정하면서 일체를 긍정하는 緣起法의 '中道'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곧 [阿含經]에 나타난 無記 緣起 中道는 각각 別離한 것이 아니라 相卽한 것으로,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 현실적인 敎說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中道 思想을 체계화한 十二緣起說은 원시경전에 설해진 최상의 法門으로, '中道의 妙'를 종합한 불교의 最勝한 理論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緣起法의 中道說은 역사적으로 볼 때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부파 불교 시대에는 십이연기설을 '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함으로써, 단순히 윤회 전생하는 業感緣起說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것은 연기법의 眞意를 심히 축소시킨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불타의 교설과는 달리 실재론적 사고에서 출발한 有部의 오류를 크게 척파하고(破邪), 석존의 근본 뜻으로 돌아가고자(顯正)한 이가 바로 龍樹 菩薩이다. 이제 佛陀의 眞意를 잘 계승하고 있는 [中論]의 空 思想이 緣起法의 中道 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보기에 앞서, 小乘 有部에서 주장하는 緣起說을 一考하고 나서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다.

 


Ⅲ. 俱舍論에 나타난 小乘有部의 緣起說


佛滅 後 기원전 3-1세기경 불교 교단이 여러 部派로 분열되면서, 각 학파에서는 阿含經典에 대한 연구 논의가 활발하게 되었다. 'abhidharma(對法)'란 원래 'dharma(법)에 대한 학습 연구'의 의미로써, 小乘 部派 時代 학승들의 연구를 지적 체계로 정리한 여러 論述書 및 敎義 解說書들을 가리킨다. 이들 학파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친 說一切有部에서는 많은 論書를 남기고 있는데, 현재까지 불교 교학 연구에 필독서로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世親(vasubandhu)의 [俱舍論(Abhidharmako abh ya)]이다.


이 책은 說一切有部의 學說을 기초로 해서 諸部派의 견해를 수용 비판하여 佛敎思想을 조직 체계화시킨 것으로, 아비달마 교학서의 전형적인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大乘의 논서 역시 대부분 有部의 敎學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俱舍論]은 널리 大 小乘의 학승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 중 龍樹의 [中論]은 有部의 견해를 破斥하고 불타의 근본 정신을 구현하고자 저술되었기 때문에, [俱舍論]의 緣起說을 살펴보는 것은 [中論]의 思想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十二緣起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俱舍論]에서는 당시의 해석으로 刹那頃의 행동에 十二支가 俱有한다는 刹那緣起說, 십이지가 間斷함이 없이 계속하여 일어난다는 連縛緣起說, 십이지가 각 각 五蘊을 갖추고 있으며 십이지 소유의 오온이 懸遠相續하여 無始無終한다는 遠續緣起說과 分位緣起說 등 四種의 차별된 해석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有部에서는 四種緣起 가운데 十二支가 각각 五蘊을 갖추고 그 五蘊이 三世의 分位에 나뉘어 실재한다는 分位緣起를 주장하고 있다.


곧 존재의 분석에 뛰어났던 說一切有部는 연기설을 시간적 生起의 관계로 보고, 三世에 걸친 인과 관계로 파악하여 '三世兩重因果說'로 체계를 세웠다. 이것은 有部 뿐만 아니라 南方 上座部 그리고 法相宗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승교단의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十二緣起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해석으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삼세양중인과설은 중생이 三界에 輪廻하는 과정을 배대하여, 소위 '胎內 外五位說' 및 '四有說'과 결합된 '胎生學的緣起說'을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은 有部의 해석은 十二支의 각 支는 각각 뒤의 支에 대하여 因이 되며, 뒤의 支는 앞의 支에 대하여 果가 됨을 암시하는 것으로 因果決定義를 내용으로 한다. 이는 一切 存在를 실재론적 범주인 五位七十五法으로 세분화하여, 法의 나타남과 작용은 순간적인 현재뿐이나 法의 自性은 三世에 걸쳐 존재한다는 實在論的 解釋이다. 다시 말해서 有部는 法이라는 實體를 상정하여, 그 실체가 因果 關係를 이루어 生起한다는 緣起說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를 전개하는데 있어 먼저 十二緣起의 일반적인 槪要를 고찰하고 나서, 三世兩重因果說과 胎生學的緣起說을 살펴보겠다.

 


1. 十二緣起의 개요


緣起의 道理에 의해서, 인간 존재의 본연의 모습을 法의 입장으로 밝힌 것이 '十二緣起說'이다. 십이연기는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등의 十二支分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十二支緣起說' 또는 줄여서 '十二緣起說'이라고 부른다.


緣起라는 말은 '緣하여(prt t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 da)' 라는 뜻인데, 각 支分은 앞의 支分을 緣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蘊으로 결합해 있다. 無明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緣起하게 되는 과정을 流轉門이라 부르고, 무명의 滅에서 생사의 괴로움을 滅하게 되는 과정을 還滅門이라고 부른다.
人生苦의 현실을 표현해 주는 '老死' 괴로움의 근거를 추구하면 '生'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즉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生을 緣하여 老死가 있다' 라고 한 것이다. 또한 生의 조건으로 '有'가 있는데, 有(bhava)란 윤회하는 생존이다. 자기가 윤회로 유전하는 것이 태어남의 緣이 된다. 따라서 '有를 연하여 生이 있다'는 것이다. 有가 윤회적 생존이라는 점에서 보면, 十二緣起說에는 윤회의 사고 방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윤회의 생존은 有이지만, 이는 다시 '取'라는 조건으로 해서 있는 것이다. 取는 '取著한다' 또는 '執著한다'는 뜻으로써, 생존에 집착하는 것이 생존을 존속시키는 조건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取를 緣하여 有가 있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인간의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생기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愛'가 있다. 愛는 '渴愛'의 의미로써, 다른 말로 말하면 모든 번뇌의 근저에 있는 '欲求'이고, 따라서 그 밑바닥에는 미혹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불만족이 늘 깔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愛의 활동하는 조건으로 '受'가 있으며, 受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통 '감각' 및 '느낌'으로 번역된다. 受의 종류에 三受가 있으며, 苦受 樂受 不苦不樂受가 그것이다. 이러한 受는 '觸'을 연하여 일어난다.


'觸'이란 인식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이 접촉하는 것이며, 이는 곧 根(감관), 境(객관), 識(주관)의 三者가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각을 촉발시키는 심적인 힘이다.


다음으로 觸이 일어나는 조건으로 '六入'이 있다. 이것은 달리 '六處'라고도 하는데, 眼 耳 鼻 舌 身 意의 여섯 가지 인식의 영역을 뜻한다. 이를 主 客으로 나누면, 앞 장 십이처설에서 밝혔듯이 六內入處와 六外入處의 十二處가 된다. 이러한 인식의 영역인 六入은 무엇을 緣하여 일어나는가? 六入의 因은 '名色'인데, 쉽게 말해서 마음과 몸을 말한다. 즉 '名'은 오온 가운데 受 想 行 識의 四無色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한마디로 하면 心法 곧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色'은 四大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대상을 일컫는 것으로, 중생에 있어서는 몸이라 하지만 더 나아가 물질과 외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六入은 몸과 마음의 名色을 緣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이어서 名色이 존재할 수 있는 因은 '識'인데, 이는 '了別' 또는 '識別'이라 하는 인식작용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등의 六識이 있다. 만일 이와 같이 인식 작용을 하는 識이 없다면, 몸과 마음은 통일되지 못하고 결국 心身은 死滅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識에 의해 생명체로서 心身이 통일되며, 識의 인식을 통해서 세계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식과 인식 내용의 관계를 설명하는 '識'을 緣하여 名色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逆으로 識의 활동은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識을 緣하여 名色이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名色을 緣하여 識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곧 識과 名色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 하지만 識은 보다 능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名色보다 좀 더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근원의 인식이 성립하는 조건을 계속 추구해 보면, 그것은 '行'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다. 識은 인식된 내용 즉 경험계를 구성하고 있는데, 그 識은 개인적으로 형성된 思惟로 이루워진다. 곧 色을 착색하는 형성력을 '行'이라 하며, 이를 일반적으로 '業'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과거의 업이 識을 착색하고 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識은 주관성을 띄고 개성 있는 판단과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보통 오온 가운데의 '行'은 심리적인 형성력 특히 '의지'를 말하는데, 이는 行의 용법 중 가장 협의적인 의미라 하겠다. 그리고 三法印 가운데 諸行無常의 '行'은 전세계를 형성해 가는 힘으로써, 行의 용법 중 가장 광의적인 의미이다.


이제 다음으로 行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추구해 가면, 그것은 바로 '無明'에서 因由한 것임을 알게 된다. '無明'이란 올바른 지혜를 뜻하는 '明'에 상대적인 개념으로써, 一切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阿含經]에는 無明을 '苦의 근본 원인과 集起, 消滅 및 滅에 이르는 방법(道)을 모르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一切 諸法의 '無我'임을 모르고 取著하는 것으로, 無明 자체에는 능동성이 없지만 중생은 無明을 통해 일체를 본다. 그런데 가령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이미 꿈은 사라지듯이, 無明이 無明인 줄을 알면 無明은 이미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해서 行은 無明으로 인해 생겨나지만, 無明이 멸함으로써 行도 멸하고 나머지 모든 인생의 유전하는 생사苦도 따라 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十二緣起說은 인간의 죽음의 고통은, 진리(眞如實相)에 대한 자신의 無知에서 緣起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동시에 그것을 滅盡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道聖諦'이며 구체적으로 '八正道行'이다. 따라서 十二緣起說은 불교의 여러 교리 내용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우리 인생의 流轉하는 윤회의 고통과 해탈의 이치를 근본적으로 설한 초기 경전의 심오한 형태의 법문이라 하겠다.

 


2. 三世兩重因果說과 胎生學的緣起說


三世兩重因果說이란 十二支 가운데 無明(惑)과 行(業)을 과거의 二因으로 보고, 識, 名色, 六入, 觸, 受를 현재의 五果(苦)로 보고, 愛, 取(惑), 有(業)를 미래의 三因으로 보아서 生과 老死를 미래의 二果(苦)로 보는 견해이다. 과거세와 현재세, 현재세와 미래세의 二重 因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三世兩重'의 因果說이라 한다.


따라서 십이연기설은 우리가 三世에 걸쳐서 生死한다고 느끼는 착각된 인식이, 근본적으로 無明에서 비롯된 妄念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三世에 걸쳐 윤회하는 중생들의 생사가, 惑과 業을 因으로 苦를 果로 하여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십이연기설은 業 思想과 결합한 三世 因果의 의미로 業感緣起說을 전개하게 되었다. 世親의 [俱舍論] 가운데 '分別世品'에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게송이 나온다.


속세의 번뇌를 無明이라 하고 숙세의 업을 行이라 하네.
識은 바로 結生蘊이고 六處가 생기기 전의 단계가 名色이며
이윽고 眼根 등의 諸根이 생겨나면서 根 境 識의 三事가 화합하기 이전 단계가 六處이네.
이미 三事가 화합하였으나 三受가 각기 차별됨을 알지 못함을 觸이라 하고
三受의 차별상을 알되  愛가 일어나지 아니함을 受라하며,
 愛가 일어났으나 아직 추구하지 않은 단계를 愛라 하네.
여러 좋은 경계를 얻기 위해 추구하는 단계를 取라 하고,
取가 (모이고 모여서) 능히 조작함에 필연코 果業이 있게 되니 이를 有라하며,
마침내 (이 업력으로 말미암아) 당래의 有를 生이라 하고 미래에 받는 것이 老死이네.


[俱舍論]에서 설명하는 分位的 解釋은, 십이연기의 識을 結生識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識을 結生識으로 보면, 그 識은 현재의 生이 되고 그 이전의 無明과 行은 과거로 취급되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뒤의 生과 老死는 미래의 生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無明과 愛는 번뇌로 생각되므로 현재에 배속되는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에서 愛 이하가 미래의 生에 대한 현재의 因이 된다. 여기에 十二支를 識의 托胎에 의한 생장 과정으로 인식하는 胎生學的 緣起 解釋이 이루어졌다. 즉 識을 중심으로 하여 중생이 생명을 바꿀 때 母胎에 의탁함으로써 名色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中阿含經]에 설하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 가지(三事)가 모이어 비로소 어머니 태에 들어간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하고 어머니가 가득한 정을 참고 견디면 향기로운 음기(香陰)가 이르나니, 이 세 가지가 서로 모이어 비로소 어머니에게 탁태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홉 달이나 열 달 동안 태내에 가지고 있다가, 이윽고 큰 두려움 속에서 출산한다. 그리고 그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혈액으로 기르는데, 이 혈액이란 거룩한 법에서는 어머니 젖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어린아이가 생장하여 諸根이 발육하게 되면, 밥이나 보릿가루를 먹게 되고 소유(蘇油)를 몸에 바른다. 그는 눈으로 빛깔을 보아서는 좋은 색은 즐겨하나 나쁜 색은 미워하여, 身念住에 머무르지 못하고 집착된 마음에 따라 행동하므로 心解脫과 慧解脫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 게 생긴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법을 다 없애지 못한 채, 이와 같이 해서 귀 코 혀 몸과 뜻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이와 같이 좋고 싫음에 따라 受를 느끼는데, 혹은 즐거워하고 혹은 괴로워하며 혹은 괴로워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그 느낌을 즐겨 구하고 집착해서 받아들여 受를 즐기며, 그것에 정복됨으로 말미암아 환희의 정이 일어난다. 이 受에서 일어나는 환희가 取이며, 取를 연하여 有가 있고, 有를 연하여 生이 있으며, 生을 연하여 老 死 憂 悲 苦惱가 생긴다. 이리하여 이처럼 커다란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托胎의 때를 출발점으로 하여 無明을 배대하고,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行 識 名色 六入 觸의 五支를 배대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기에 이르러 受를 느끼는 것은 오욕을 추구하는 心作用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결과로 取가 있게 되고, 取에 의하여 나머지 生 老死의 괴로움이 集起 된다고 한다. 따라서 無明과 行을 과거에 배당하고, 識을 托胎 時의 의식으로, 名色과 六入을 태내에서의 심신 발육의 과정으로, 觸을 노는데 여념이 없는 童子期로, 受 愛 取를 현세에서의 새로운 번뇌와 業의 積聚位로, 有를 미래의 운명이 정해지는 죽는 순간으로, 生 老死를 미래의 一生으로 배대하여 해석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三世兩重因果說에 윤회 과정을 적용시켜서, 胎內 外五位說과 四有說을 결합하여 만든 '胎生學的 緣起說'이다. 즉 胎生學的 緣起說에서는 識이 윤회하는 존재로 상정되어 있다. 그 '존재(識)'가 모태에 들어가 성장하여, 六根을 갖추고 인생의 流轉門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十二緣起에서 보여주는 還滅門을 여기에 적용시킬 때, 이는 곧 죽음의 문이 되고 말 것이다. 불타께서 無明을 멸하고 行과 識을 멸하여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라는 말씀은, 우리 胎生의 識을 멸하고 六入을 멸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을 끊어서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죽음의 상태로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無明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생각하여 취착함이 없이 바르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有部의 이와 같은 해석은 緣起說의 근본 취지를 크게 왜곡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水野弘元 氏의 견해를 인용해 보겠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가 낮은 자를 위해 어려운 연기설을 이해하기 쉽도록 한 것이므로, 비유적으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해졌던 것이어서 이러한 설명은 고작 한 번 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識을 結生識으로 설한 것은 절대로 없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설해진 것을 緣起說의 유일한 해석이라 간주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識을 結生識이라 보는 俗說이 채용되게 되자, 명색 육처 촉 수 등도 結生識에 이끌려 계속 일어나는 생리 심리적인 작용이라 하고, 여기에 胎生學的인 緣起說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경전에서는 명색 육처 등을 태내의 태아 상태 등이라 설명한 대문은 전혀 없다. 이것은 아비다르마 시대의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만 [中阿含經]의 受胎에 의한 緣起說의 설명은, 名色을 존재하게 하는 장소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리고 이것을 "지혜가 낮은 자를 위하여 어려운 연기설의 이해를 쉽게 하도록, 비유적으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Ⅳ. 中論의 緣起說과 空思想 관계


1. 相依性의 緣起와 空性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說一切有部는 원시 경전에 나타난 緣起說을 시간적인 生起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因果論的으로 해석하였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三世兩重因果說'이고, 더욱이 三界에 윤회하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각 支分에 배대하여 胎內五位說과 四有說을 결합한 '胎生學的緣起說'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有部의 입장은 일체 존재(法)를 실재론적 범주로 인정하고, 그 실재하는 法의 인과 관계로써 生起 消滅하는 것으로 緣起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사물을 실재시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이러한 인식은 十二緣起를 결정적인 因果說로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불타의 근본 사상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이에 용수는 잘못된 有部의 연기설을 바로 잡기 위하여, 緣起는 모든 存在의 보편적 원리이며 相依相關性의 존재 형태를 띄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緣起를 사물의 상호관계성으로 파악하고, 諸法을 고정적으로 본 有部의 실재론을 비롯한 모든 邪見을 논파함으로써 諸法의 自性이 본질적으로 不可得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기관의 특징을 '相依性'이라고 요약하여 말하는데, 이는 사물의 참된 성질이 實體性을 결여(ni svabha : 無自性)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因緣所生法의 '空性'을 가리키는 것으로, 空이란 단순히 목전의 사실이나 현상적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存在 혹은 法)이 生滅하는 사실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다만 그러한 사실이나 현상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를 물으며 추구하는 올바른 관찰(智慧)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물의 '존재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곧 '一切法의 存在에 대한 올바른 파악'이라 할 수 있다. 즉 제법의 고유한 실체인 自性은 본래 있지 않으며, 相依相對的인 인연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바른 관찰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空이라는 말은 그것이 본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다른 것에 의해 生起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空은 無라는 말과 통하므로, 空이라 말할 때 흔히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언어가 오해되는 것은 언어 자체가 本體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空이란 본체를 갖지 않는 존재(無自性)라는 의미이지 존재의 無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바퀴, 축, 차체를 잠정적으로 수레라고 하듯이, 空性이라는 표현도 假名에 지나지 않는다. 수레라는 말속에 수레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릇되는 것처럼, 空이라 말할 때 空의 본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여러 조건이 因緣하여 만들어진 수레가 없지 않은 것과 같이, 空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도 안된다.


즉 사물의 存在(有)와 非存在(無)를 모두 초월한 '空'의 의미가 진정한 '緣起'의 의미이며, 또한 불타께서 설하신 희론 적멸한 '中道'의 뜻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中論 卷四, <觀四諦品>의 주석을 살펴보면,


衆因緣으로 생긴 법을 내가 空이라 말하는 것은, 衆緣이 구족히 화합해서 物(존재)이 생기며 따라서 物은 衆因緣의 소속이므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空이라 한다. 하지만 空도 다시 空이라 하나니, 이는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假名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有 無의 二邊을 떠난 것이기에 中道라고 이름한다. 이 法(衆緣으로 생겨난 存在)은 실체가 없으므로 '있다(有)'라고 말할 수 없으며, 空도 존재하지 않기에 '없다(無)'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龍樹에 의하여, 비로소 연기법이 主 客 대립의 허망분별의 입장에서 벗어난 '空'의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緣起의 전형을 佛陀에게서 채용하였지만, 龍樹는 '相依性'의 개념을 확장하여 一切 存在의 보편적 원리인 '空'으로 적용시켰다. 또한 동시에 불타 교설의 핵심인 중도 사상을 바르게 지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佛陀께서 설한 십이인연은 엄밀한 의미에서 '相依性'의 개념으로 이해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견해가 있다. 즉 '無明을 연하여 行이 있고 行을 연하여 識이 있으며…云云…' 하는 것은 일정한 순서를 지니고 있어, 相互的이라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上田義文 氏의 말을 잠깐 소개하겠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 라는 의미는 서로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相依의 관계가 아니다. 쉽게 말해서 무엇인가 근본 하는 선행 조건이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저것에 연하여 있음과 동시에 저것이 이것에 연하여 있다' 라는 '相依'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불타께서 설한 십이연기의 無明이 따로 선행하여 존재하는 개념이 아님을 認知한다면, 佛陀의 說에 미진함이 있다기 보다 차라리 龍樹에 이르러 佛陀의 진의가 제대로 파악되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無明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명이 맨 처음 제시된 것은 無明이라는 존재로부터 다른 支가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 身 口 意의 작용을 통해 삶의 왜곡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즉 연기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을 無明이라 하며, 다만 우리가 진여불성을 깨닫지 못해서 無明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眞如佛性이란 三法印의 諸行無常印과 諸法無我印을 바탕으로 하는 涅槃寂靜印으로써, '본래 一法도 머무름이 없는' 청정한 眞空 妙有의 실상이며, [華嚴經]에서는 '如' '法性' '理' '實際'로 표현되어 있는 般若의 理法이다. 따라서 [起信論]에서는 無明의 정의에 대하여 '不達一法界 忽然念起 名爲無明' 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이는 原始佛敎에서 본래 '無我'임을 모르고 欲을 내어 緣起한다는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空의 실상에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한 上田義文 氏의 견해는 순차적인 해석으로만 十二緣起를 이해하려 했던 일반적인 사고에 비해 매우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고찰해 볼 때, 龍樹에 의하여 佛陀의 眞意가 드러나게 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이 보다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 相依相待하는 관계에서는 '어느 한쪽이 있을 때' 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에 관한 적절한 예로 [中論]의 <觀燃可燃品>에서는 '땔감이 있을 때에 불이 있다' 라고 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다. 만일 '땔감이 있다' 라는 것이 '불이 있다' 라는 것에 우선한다면, '땔감이 있다' 라는 것이 '불이 있다' 라는 것보다 앞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땔감은 불에 연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불은 땔감에 연하여 존재하고 땔감도 불에 연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것일 뿐, 불이 '있을' 때에 땔감이 있고 또 땔감이 '있을' 때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듭 반복하여 설명하자면, 불에 연하여 땔감이 있으며 땔감에 연하여 불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相依性'의 의미는 燃과 可燃의 관계 곧 불과 땔감의 관계로 표현되어 있지만, 能燃과 所燃의 兩者에 대한 실체성을 否定(無自性)함으로써 能 所가 본래 不一不異의 관계에 있음을 示唆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 양상이며, 緣起하는 諸法의 實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용수가 파악하고 있는 緣起의 주요한 특질, 곧 존재의 속성이라 할 수 있는 '相依性'의 개념은, 사물의 본질이 實體가 없는 '空性'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2. 相依性에 대한 오해와 空의 바른 인식


이러한 相依性의 緣起는 단순히 모든 것이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와 다를 뿐만 아니라, 보통의 因果라는 것과도 분명히 구별된다. 즉 서로의 關係性 속에 존재하는 인과관계란 주관과 객관의 분별 속에 이루어지는데, 진정한 緣起의 의미는 主 客 대립의 분별 자체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相依性의 기본적인 개념과 관련된 이러한 오해의 소지는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쉬운 예로 相依의 개념을 '상대적'인 개념과 혼동하는 경우이다. 즉 제법의 존재 형태가 고유한 自性이 없이 서로 相互因待하는 조건에서 성립한다는 '相依性'의 의미는, 어떠한 사물(一法)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相依性의 '空性'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관계로 인식하여, 가령 길고 짧음의 관계라든가 좋고 나쁜 것, 검고 누르고, 너와 나 등의 차별적인 諸現象의 상대성으로 인식한다면, 이는 緣起의 본래 趣旨와는 십만팔천리나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서 그런 상대성 속에 내재된 '空思想'의 意味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한, 주관과 객관의 분별을 떠난 '中道'의 實相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相依性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를 극복하고 내면의 空性을 바르게 인식하게 될 때, 진정한 緣起의 理法에 도달할 수 있다. 즉 緣起의 理法이란 모든 有 無등의 상대적인 邊見을 떠난 '中道'의 不二思想이며, 불교의 가장 最勝한 妙이다.


그러므로 [中論]에서 언급하는 相依相待的인 연기법이란 存在의 진실한 모습(眞實相)이며, 이는 다름 아닌 '空性'을 가리킨다. 세간의 '有(存在)'는 연기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는 獨存的 固定的인 의미의 自體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 [中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因緣으로 부터 생겨나지 않는 存在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 존재는 空 아닌 것이 없다
一切法 곧 모든 존재의 본성은 無自性의 '空'을 바탕으로, 서로 因待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바꾸어 말해서 一切諸法이 空한 까닭은 '因緣和合生'인 연고이다. 일반적으로 諸法이 '空'하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相依的 인연 관계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중생의 눈에는 실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根本이 실체가 없는 '無自性'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金剛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如來는 一切法이 모두 다 佛法이라고 설한다. 수보리여, 말하는 바 一切法이란 곧 一切法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一切法이라 하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法)는 근본적으로 空하다. 따라서 어떤 存在든 본질적으로 볼 때 存在한다고 볼 수가 없다(卽非一切法).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一切法이 성립하고 또 존립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是故名一切法). 곧 緣起에 의해 생겨난 一切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空하며, 空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一切法의 성립이 가능하고, 그러므로 一切法 자체가 '空'인 것이다. 그래서 如來는 이를 '一切法이 곧 佛法'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만일 諸法의 空性이 근원하지 않는다면(모든 法이 각기 자기의 고유한 실체적인 自性을 지니고 있다면), 어떤 사물도 生할 수 없고 滅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제법이 自性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인연 관계에 의해 존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實存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中論]의 <觀四諦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空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一切法이 성립한다. 만일 空의 바탕이 없다면 어떤 存在도 성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諸法의 皆空한 진리가 근본하지 않는다면(諸法의 自性이 있다면), 전 인류를 포함한 우주 삼라만상의 生起와 消滅이 전부 부정된다. 뿐만 아니라 自性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罪와 福의 果報도 인정될 수 없고, 더욱이 一切의 束縛으로 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런 까닭에 [中論]에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만일 一切가 空하지 않다면, 生과 滅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四聖諦의 진리도 성립되지 못한다.


즉 연기의 이치인 空性이 성립되지 않으면, 生 住 異 滅의 모든 변화와 苦 集 滅 道 해탈의 길마저 기본적으로 부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法寶가 없는데 佛寶나 僧寶가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자연히 三寶의 개념마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龍樹는 연기의 相依性, 곧 空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그대가 일체법의 연기인 空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곧 세속의 모든 존재를 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觀四諦品>의 끝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經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緣起를 보는 자는 佛을 보고 苦 集 滅 道를 본다.


이상으로 고찰한 相依相關性의 연기는 곧 '空性'의 문제로, 法과 法의 관계,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해답을 주고 있다. 즉 人間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바꿔 말하면 만물의 根源에 관계하는 것으로 '나와 우주의 관계' 곧 '主觀과 客觀의 관계'로 置換된다. 이에 대한 답변은 '만물의 근원이 나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는 不二思想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이른바 空 思想의 意味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般若波羅蜜을 근거로 할 때만이, 主 客을 나누며 너와 나를 분별하는 一切의 邪見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속에서 진정한 同體大悲와 六波羅蜜의 실천이 완성될 수 있으며, 自利卽利他며 利他卽自利인 참다운 廻向 思想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3. 空의 대승적 전개


앞서 살핀 相依相關的인 緣起의 空性은 비단 [般若經]을 위시로 한 龍樹의 [中論]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大乘佛敎의 사상적 발전에 중요한 근본이 된다. 인도에서는 [中論]을 중심으로 한 中觀學派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龍樹의 [中論]과 [十二門論], 그리고 提婆의 [百論]을 所依로 하는 三論宗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본 장에서는 전체적인 大乘的 敎學의 발전에서 空 思想의 전개를 잠깐 살펴보겠다.


義湘은 華嚴一乘法界圖에서, 만물의 근원이 본래 다르지 않음을 한 마디로 '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하였다. 또한 主客 對立이 완전히 소멸된 眞如法性의 평등함을 '깨달은 지혜와 경계가 다르지 않네(證智所知非餘境)'라고 표현하여, 證智(主)와 所知(客)가 서로 다른 경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청정일미(淸淨一味)의 法性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진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諸法緣起의 '空性'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즉 '不守自性隨緣成'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無自性의 空 思想을 바탕으로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 성립될 수 있으며, 또한 一切皆空한 實相에는 본질적으로 시간 및 공간의 한정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못한다. 따라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공간 부정)이며,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시간 부정)이라 하여 時 空을 초월함을 밝히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華嚴의 四法界가 相卽相入한 '法界緣起'의 이치도 空 思想을 근원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華嚴經]의 유명한 四句偈인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의 게송이 의미하는 뜻은, 空을 근간으로 하는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반야경의 諸經典 가운데 가장 널리 독송되는 [般若心經]의 '色卽是空'과 '空卽是色'은 대표적인 空의 논리로, 그런 까닭에 一卽多 多卽一의 논리가 성립된다. [金剛經]에는 본래 청정한 空의 실상에 妄心으로 분별 짓는 소견(相)으로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어디에도 머무름(取著: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相) 없이 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곧 '應生無所住心'이라 하고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하며, '이른바 佛法이라고 집착할 때 이미 佛法이 아니라' 고 단호하게 척결하고 있다. 그래서 四句偈에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존재하는 일체는 모두 허망하여, 만일 일체 제법이 존재하지 않음(非相)을 알게 되면 곧 如來를 보리라.


이어서 '모든 相을 떠나 있음을 諸佛 (離一切諸相 卽名諸佛)'이라 하며, '如來란 어디서부터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기 때문에 如來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空 思想은 우주와 개체의 관계에서 보편적인 인생과 세계의 원리를 제시해 줄뿐만 아니라, 人生苦의 근본(因)을 직관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밝혀 준다. 즉 실체하는 존재로 여기는 허망한 관념의 破棄와 함께, 諸法皆空의 진여실상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大乘觀行法'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金剛經]에서는 '모든 인연으로 생긴 존재(有爲法)는 꿈과 같고 幻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고 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一切의 法(存在)은 중생이 볼 때 실존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 뿐, 그 근원은 相依性의 關係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實體가 없다. 實體가 없기 때문에 '無自性'이라 하며, '空'이라 한다.


이러한 이치를 바탕으로 해서 일체중생과 우주만유가 동일한 근원이며, 聖 凡이 等一하여 平等一味의 法性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煩惱卽菩提'며 '生死卽涅槃'의 논리가 가능하고, 또한 여기에서 진실한 和合과 調和가 이루어지며, 어디에도 걸림 없는 無碍自在한 자유로운 삶이 실현된다.


相依性의 연기법이 의미하는 空思想은, 이와 같이 法性이 圓融하여 平等無碍한 一乘法의 도리를 근본으로 한다. 즉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法華經]에는 '觀一切法空如實相 不顚倒不動不退不轉 如虛空無所有性 一切語言道斷 不生不出不起 無名無相 實無所有 無量無邊 無 無障' 이라고 설하여 空이 곧 實相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다만 전도된 소견 때문에, 因緣에 의해 法이 生起하는 것(但以因緣 有從顚倒生)이라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涅槃經]의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내용은, 三法印의 思想에 입각하여 전개된 空 思想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佛性 思想으로 대표되는 후기의 如來藏 思想도, 필연적으로 空 思想을 토대로 대승적인 입지를 확고하게 완성시킨 것이다. 따라서 [法華經] 및 [華嚴經]의 一乘思想, 곧 諸法實相論 역시 空 思想을 바탕으로 해서 적극적으로 전개한 大乘의 發展임을 알 수 있다.


以上으로 [中論]에 나타난 緣起法의 주요한 특질이라 할 수 있는 '相依相關性'의 내용이 空 思想을 근원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이는 후기 大乘佛敎의 思想的 發展에 빼놓을 수 없는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함께 살펴보았다.

 


Ⅴ. 中論에 나타난 緣起의 중도 체계


龍樹는 緣起의 체계적인 논리로 諸法의 보편적인 존재 형태, 다시 말해 相依相關性의 空 思想을 밝혀서, 自性이 인정되는 한 결코 緣起가 성립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다. [中論]의 <觀因緣品>과 <觀去來品>에서는 有部에서 주장하는 因 緣 果를 모두 논파하고, <觀四諦品>에서는 제법의 실상이 無自性의 '空'일 때 비로소 일체 세간법이 성립됨을 논술하고 있다. 따라서 緣起의 도리가 空에서 성립함을 밝혀서, 緣起의 바른 理致에 무지한 일체의 邪見에 대하여 비판하며, 또한 <觀邪見品>이나 <觀苦品> <觀法品> 및 <觀如來品> <觀涅槃品>등에서도 緣起의 실상에 無知하여 생겨난 모든 邊見들을 논파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여러 형이상학적 難問에 無記로 답변하시고, 邪見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으로 十二緣起의 '中道'를 설하셨던 佛陀의 진의가, 龍樹에 의하여 진정하게 구현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中論]에는 二邊을 떠난 緣起의 中道 理法으로, 有部를 비롯한 불교 내외의 모든 邪見을 논파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시간적이거나 동시적인 인과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는 단절된 것도 아니고(不斷), 원인이 결과에까지 반드시 이어지는 것도 아니라는(不常) 중도적 인과 관계인 '緣起說'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도적 의미를 가장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觀因緣品>의 第一偈인 '歸敬偈'이다.


여기에 나타난 '八不中道說'은 연기의 의미에 무지하여 발생한 斷見이나 常見 및 有 無의 모든 분별적 사유를 부정함으로써, 제법의 실상 곧 緣起의 道理를 '中道 思想'으로 밝히고 있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龍樹는 스스로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기 위해 [中論]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잘못된 견해(邊見)를 논파하여 불타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이러한 [中論]의 중심 사상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곧 '緣起' 를 중심 사상으로 주장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中道' 를 주장한다. 이에 吉藏은 중도 가운데 '二諦'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칼루파하나는 '형이상학에 대한 논파' 를 [中論]의 주목적이라고 한다. 이 밖에 '논리적 필연성' 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상대성' 이라고 하는 등 다양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十二緣起를 설하신 불타의 진의가 中道의 이치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한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즉 空이 因緣會而生의 연기법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는 것처럼, 緣起法 또한 그 이치가 無我 無我所의 空 思想을 바탕으로 성립하여 그 실상은 중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空의 바탕이 相依相待의 緣起에 의거하지만 緣起 또한 제법의 無自性 곧 空性에서 기인하고, 결국 緣起와 空의 진정한 이해는 有 無의 개념을 떠난 '中道'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中道의 이치에서 원시교리상 체계적으로 설한 것이 十二緣起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용수의 [中論]에서 설하는 緣起는 곧 空性이며, 구체적으로는 中道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緣起=空=中道'의 소박한 등식이 성립되며, 이것이 불타께서 설하신 十二緣起法의 근본 사상이다. 사실 [中論]의 중심 입장을 '緣起'라고 하든 '中道'라고 하든 또는 '空'이라고 하든지, 그 내용을 이해하는 차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緣起'나 '空'의 내용이 모두 '中道'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서, 그 중심 사상을 '中道'로 정리할 수 있겠다.


龍樹는 이러한 中道 思想을 십이연기로써 밝히신 佛陀에게서 근본을 삼고, '八不中道'와 '二諦中道'로 정리하고 있다. 즉 一切 邪見을 파기한 연기의 실상(中道)을 不生不滅 不斷不常 不一不異 및 不來不去의 '八不'로써 논증하고 있으며, '二諦'를 緣起의 原理로 파악하여 中道의 理致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八不' 뿐 아니라 '二諦'도 역시 緣起法에 의해 中道說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이나다는 緣起를 세속제와 제일의제를 연결하는 '橋梁的인 개념(Bridge concept)'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 二諦의 배경도 緣起에서 이루어지며, 용수는 空 思想을 연기의 실질적 내용인 '中道'에 두고 이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요약컨대 '中道'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空'이란 한낱 偏空 또는 惡取空에 불과하며, 마찬가지로 '中道'를 근본 내용으로 하지 않은 '緣起'란 諸法의 실재론을 주장하던 有部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龍樹가 연기법의 중도사상으로 정리하고 있는 '八不中道'와 '二諦中道'의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八不中道의 연기 실상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보면 此有故로 彼有며 此起故로 彼起인 相依相對性에서 존재하고, 어떠한 一法도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곧 일체제법은 연기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無實體이며 空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空'의 의미는 연기의 世俗諦에서 연기적으로 現見하는 것이므로 非無이며, 연기의 실상인 第一義諦에서 볼 때는 본래 非有이다. 그러므로 非有非無의 空은 다름 아닌 中道思想이며, 이것이 緣起法의 이치이다. 이와 같은 중도의 이치를 緣起로 설하여, 일체의 상대적인 取著을 破함으로써 戱論이 적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自說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모든 邪見을 破棄하기 위하여, 龍樹는 어떤 상대적인 견해도 고집하지 않는 '二邊을 떠난 中道'로써 緣起의 본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것이 바로 '八不說'의 주요한 목적이다. 다시 말해 [中論]의 八不說은 근본 불교의 緣起 無我 中道를 계승하고, 大乘 般若 空觀에 입각하여 諸戱論을 떠난 '中道 實相'을 밝히고 있다. 즉 대표적인 邊見이라 할 수 있는 生滅 斷常 去來 一異의 四對를 부정함으로써, 中道의 이치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生하지 아니하고 滅하지도 아니하며, 항상하지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도 아니고, 또한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 인연을 말씀하시어 모든 희론을 훌륭히 滅하시니, 내가 머리 조아려 부처님 곧 모든 설법자 중 제일이신 분께 예배하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緣起의 근본 실상은 八不로써 자명하게 밝혀진다.
둘째, 緣起法은 모든 희론을 止滅시키는 中道의 원리이다.
셋째, 따라서 緣起로써 제법실상의 中道를 밝히신 부처님께 귀의한다.


月稱은 이것을 '八不의 特殊相에 의해 한정지어진 緣起'로 규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무엇보다 이 八不에 의해 연기의 실상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生起說의 견해가 주로 生 滅 常 斷 一 異 去 來의 존재로 여기는데서 생기므로, 이러한 일체의 生起說을 부정하기 위해 八不를 시설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靑目(Pingala)의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물음이라 : 제법은 무량한데 어떤 이유로 단지 八事로써 일체법을 모두 논파하겠는가?
답이라 : 法이 무량하지만 간략하게 八事로써 총괄하여 一切法을 파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龍樹는 일체의 인식 유형의 모순을 부정함에 있어서, 八種의 범주로 총괄하였다. 허구의 否定은 곧 진실을 논증하는 의미로써 '귀류법적' 논리 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중관학파에서는 이를 '破邪顯正'이라 한다. 여기에서 논파의 대상은 實我實法의 邪見을 가지고 있던 외도는 물론이고, 我空의 이치는 인정하나 三世實有와 法體恒有를 주장한 有部의 實在論도 이에 속한다. 또한 我法兩空을 주장하지만 도리어 惡取空에 떨어진 성실종 및 그와 같은 일부 대승가들이다.


이러한 八不의 설명은 [中論]의 거의 전편에서 거론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 <觀因緣品>과 <觀去來品>은 가장 중요한 '八不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八不說을 살펴보겠다.

 


⑴ <觀因緣品>의 전개


八不의 이치를 설하고 있는 <觀因緣品>에서는, 우선 生을 부정함으로써 나머지도 모두 성립되지 못함을 논증하고 있다. 즉 自生 他生 共生 無因生의 四不生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와 같이 生을 부정하여 본래 '無生'임을 밝히게 되면 곧 '滅도 없음'을 입증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不生不滅의 '中道思想'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法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다. 즉 法은 그 자신의 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원인만으로 法이 생겨날 수도 없다. 自生과 他生이 모두 부인된다면, 그 둘을 합한 共生(自他生)도 부정된다. 또한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하게 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法은 自 他 共(自他) 無因의 어떤 因由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法의 自性이 있다면, 法은 인연에 따라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自性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法의 自性은 인연 관계 속에서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인연 중에 他性을 인정해서 그 他性으로 부터 생겨난다는 것은 더욱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有部에서 주장하는 因果의 개념과 함께 因中有果 無果와 緣中有果 無果를 동시에 논파하고 있는데, 용수는 因果를 撥無因果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定性實有의 因果를 부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因緣 次第緣 緣緣 增上緣의 四緣에 대한 否定도 단순히 四緣說을 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四緣에 대한 실재론적 집착(取)을 씻어주기 위해 논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귀류적인 논법으로 生과 滅을 부정하여 곧 '不生不滅'의 이치를 드러내게 되면, 나머지 斷常 一異 去來의 상대적인 邊見도 止滅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六不를 첨가한 이유는, 중생들의 이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靑目은 주석하고 있다. 즉 '不生不滅의 이치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不常不斷은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까닭이며,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不生不滅의 이치를 성립시킨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제법이 만약 實有하다면 이는 無가 아니라 有이지만, 먼저 있다가 없어지면 斷이라 하고 또 먼저부터 있는 것이라면 常이라 한다. 하지만 제법의 實有性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斷 常의 개념도 성립되지 못한다. 따라서 제법의 實有性이 배제된 결과인 不常不斷은 不生不滅의 취지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靑目은 이어서 [中論]의 八不偈를 '곡식'의 例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 앞에 있는 곡식은 싹에서 생겨나고 싹은 씨가 자란 것이다. 그런데 그 씨는 또 그 이전의 곡식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리하여 곡식→싹→씨→곡식→싹→씨…로 끝없이 소급해 가면 결국 無窮하여 그 시초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곡식이 만일 어디서부터 생겨난다고 하면, 거기가 바로 시초가 되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不生). 다음에 지금의 곡식은 이전의 곡식이 있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곡식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일 없어졌다면, 지금의 곡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不滅). 그러나 이처럼 이전의 곡식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곡식이 싹이 되었을 때, 이미 그 씨는 變壞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관계로 살펴보면 언제까지나 상주하는 것은 아니며, 보다 엄밀하게 말해 한 찰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不常). 그렇지만 斷絶되는 것도 아니다. 일상적으로 씨에서 싹이 나오고 싹에서 곡식이 열리는데, 만일 단절된다고 하면 이러한 상속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不斷). 그렇다면 단절이 없다고 해서 만물이 하나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곡식은 싹과 같지 않고, 싹은 곡식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不一). 반면에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다. 만일 다르다면 어떻게 곡식의 싹이나 줄기를 다른 나무들의 싹이나 줄기들과 구분할 수 있겠는가? 곧 아카시아나 보리에는 각기 그것들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不異). 그러면 그것들이 다른 어디에선가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마치 새가 날아와서 나무에 둥지를 틀 듯이, 씨에서 생겨난 싹이 어느 다른 곳에서 와서 싹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不來). 또한 그것들은 마치 뱀이 구멍에서 나오는 것처럼, 엉뚱한 딴 것이 되어 나간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일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 나간다면, 싹이 씨앗에서 자라는 것도 싹이 씨앗과 전혀 다른 성질로 나가는 것이 보여야 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不去).


이와 같이 八不는 넓게는 八種의 상대적인 邪見에 집착함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간략히 하면 不生不滅의 二不로 되고, 또한 앞에서 四不生의 경우처럼 生의 부정 속에 滅을 포함하여 나머지를 모두 대표하기도 한다. <觀因緣品>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因緣을 논파함으로써 不生不滅을 드러내고 있다. 즉 生의 개념이 自 他 共 無因의 어느 경우로도 성립되지 않고(四不生), 또 因緣 次第緣 所緣緣 增上緣 등의 四緣에서도 生의 요인을 찾을 수 없으며, 因(緣) 果의 어느 쪽에서도 生成 작용의 주체적 요인이 존재하지 않음을 밝혀서 '緣起 無自性 空'의 眞理를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실체적인 존재로서의 自性을 인정하는 경우에는, 緣起가 성립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⑵ <觀去來品>의 전개


<觀去來品>에서는 法의 '不來不去'의 입장을 밝혀서, 八不의 中道思想을 역설하고 있다. <觀因緣品>에서와 마찬가지로 '去'의 개념에 '來'를 포함시켜서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去'가 이루어지지 않음과 동시에 '來'도 성립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去來의 개념은 사물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오고 또 현재로 부터 과거로 간다는 의미로써, 본질적으로 사물이 생겨나고 없어짐을 뜻하는 '生滅'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中論] 전체를 일관하는 '근본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有部가 주장하는 法의 自性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自性을 갖고 있는 法의 실체적인 변화의 원리는 '因緣'이지만, 그 형식적인 변화의 양상은 '去來'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因緣'과 '去來'를 논파함은, 有部의 법에 대한 모든 관념을 파기함과 아울러 八不偈의 '中道思想'을 밝히는 根幹이 될 것이다.


우선 第一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三時에 걸쳐, 어디에도 '去'의 작용이 있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미 지나간 것(已去)에는 감(去)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에도 감이 없으며, 또한 과거와 미래를 떠난 현재에도 감은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거와 미래를 떠나서 현재가 홀로 존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현재에도 감(去)은 성립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현재 가고 있는 순간에 '감(去)'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면, 이에 대한 답변으로 龍樹는 '간다(去)'라는 사실에는 去時 去法 去者의 三槪念이 함축되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만일 去時에 去가 있다면, 감(去)을 떠나서 去時가 따로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去時와 去法을 둘(二)로 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이다. 또 去法은 去者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곧 흐르는 물을 떠나서 따로 흘러가는 주체를 구할 수가 없는 것처럼, 去法을 떠나서 去者를 얻지 못하며 이와 동시에 去者를 여의고 따로 去法을 구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간다(去)'라는 개념은 去時 去法 去者 어느 편에서도 不可得이다.


그런데 '去'를 부정함으로써 '출발(發)'과 '머무름(住)'의 개념은 인정하는 것인가? 출발(發)은 정지 상태로부터 활동 상태로 옮기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실상 이 '發'은 動과 靜 어느 쪽에도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이미 간 것에도 發은 없으며,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發을 구할 수 없고, 去時에도 구할 수 없다. 이처럼 '去'와 '發'이 부정되는데 어디에서 '머무름(住)'을 구할 수 있겠는가.


以上으로 '去'를 부정하여 '不去不來'를 논증한 것은, 諸法이 실재하여 가고 온다는 有部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그 진실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곧 '不去'의 논리를 통해 過 現 未의 三世 時間에 대한 분별심에서 벗어나고, 去者와 去用의 관계에서 能作 所作의 차별심을 초월한 不一不異의 중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不生不滅'과 '不去不來'의 논증을 통하여, 歸敬偈의 서두에 나와 있는 '八不偈'는 相依性 즉 相依相待(Anyony pek )의 연기 실상인 空性에 대한 中道思想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生滅 斷常 一異 去來 등 八種의 극단적인 편견에 대한 諸戱論을 비판 부정하는 논리를 통하여, 中道의 절대 진리를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즉 緣起란 상대적인 邊見을 부정하는 '八不'의 형태로 밝혀지며, 그 實相은 모든 戱論을 떠난 '中道'를 내용으로 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2. 二諦中道의 연기 원리


⑴ 世俗諦와 第一義諦


어떤 사물일지라도 相互依存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사물 그 자체로서 고정불변의 실체성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고정 불변의 自體性이 없음은 바로 空이요, 만물이 상호 의존하는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은 바로 緣起하는 것이다. 이처럼 용수는 연기란 모든 존재(法)가 실체로서 生起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緣起의 본질을 찾고 있다. 따라서 용수의 空 思想은 불타의 緣起說을 근저로 하여 전개된 것으로, 緣起의 본질인 中道 理致를 깊이 규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中道思想을 내포한 空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만일 모든 것이 空하다면 生도 없고 滅도 없게 된다. 따라서 四聖諦도 없게 되며 모든 修行과 果報 자체가 부정된다. 결국 一切의 世俗法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한다. 이처럼 <觀四諦品>에는 實有論者들이 일체제법을 '空'이며 '無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론이 된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는 지금 진실로 空性과 空의 因緣 그리고 空義를 능히 알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부질없이) 論爭하는 것이다.


따라서 外道의 無自性空에 대한 논란은 空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空의 진실한 의미(空義)를 알기 위해서는 二諦의 區別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즉 여기에서 無自性空에 대한 論難은 세속 진리와 최고 진리의 二諦로 전환되어 논파되고 있다.


제불께서는 二諦에 의거해 중생을 위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는 世俗諦로써이고, 다른 하나는 第一義諦로써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空 思想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강조하면서, 일반적인 귀류적 논증의 태도와는 달리 明示的이고 적극적인 논증의 태도로 二諦說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불타의 가르침은 두 가지 즉 世俗諦(세간적인 진리)와 第一義諦(궁극적인 진리)로 구분할 수 있으며, 따라서 二諦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심오한 佛法의 진리를 알 수 없다고 경고한다.


二諦 思想, 곧 세속적 일상의 진리(世俗諦)와 궁극적인 진리(勝義諦)로 나누어서 진리를 論하는 사상은 原始 佛敎나 우파니샤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체계적으로 나타난 것은 中觀哲學에서 이다. 中觀哲學에서 佛陀의 二諦 思想을 체계적으로 성립시키고, 그것을 불교의 敎義를 종합하는 데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우선 世俗諦와 第一義諦(勝義諦)의 어원을 살펴서 그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자.


世俗이라고 번역되는 말에는 'vyavah ra'와 'sa v iti'의 두 용어가 있으며, 이와 함께 '假名, 施設'등으로 번역되는 'praj apti'의 말도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의미 가운데 먼저 'vyavah ra'의 뜻은 어원적으로 볼 때 '言說'을 가리킨다. 또한 모니엘의 梵英辭典에 의하면, 세간적 生活, 일상의 실천이나 관습 등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이는 '言說' 및 '言詮'이라는 뜻이며, sa v iti 역시 '개념적인 言詮' '언어적 표현' 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지만 원래 sa v iti의 어원은 '가리다' 라는 의미인데, P li語의 sammuti(名稱, 言語, 言說)가 梵語化 되면서 본래 의미를 되찾은 것으로 이해된다. 또 최고 진실은 言語와 思惟를 초월한 것이므로, 인간의 言語가 오히려 不可得의 진리를 '가리고 방해한다'고 하는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보아도 타당하겠다. 따라서 世俗諦를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sa v iti'는 覆障의 義로서, 愚痴하여 '최승한 眞理를 덮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sa v iti'와 함께 世俗諦를 나타내는 중요한 말로써, 'praj apti'는 '施設' '假設' '假名' '假立' 등으로 漢譯된다. 그런데 이 말 역시 '명칭의 假說'이나 '언어의 假說'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世俗諦(loka-sa v iti-satya)란 세속의 言說로써, 無明으로 덮여 있는 현실 世間의 관습이나 진리를 의미한다.


第一義諦(param rtha-satya)는 眞諦 또는 勝義諦라고도 하며, 절대적인 能所不二의 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상대적인 분별을 부정하는 空性으로, 일체의 知覺(世俗言說)을 초월하고 戱論이 적멸한 궁극적인 最寂靜 眞理를 가리킨다. '勝義'라는 말은 勝(parama)과 義(artha)의 복합 명사로서, 'parama'는 最勝 最上(uttama) 혹은 最勝한 無分別智라고 하며, 'artha'는 알아야만 하는 것, 了解되어야 하는 것(pratip dya)이라고 한다. 즉 'parama(勝)'는 最勝한 출세간의 無分別智이며, 'artha(義)'는 無分別智에 의해 了解되는 경계이다. 그러므로 第一義諦는 無分別智가 작용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中論]에는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스스로 알고 다른 것에 따르지 않으며, 적멸하여 戱論이 없으며, 다름이 없고 분별이 없는 것, 이를 實相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第一義諦는 출세간의 無分別智가 작용하는 절대적인 경지로써,'스스로 알고 다른 것에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는 상대적인 分別에 의해 아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증득되고 체험되는 경계임을 뜻한다. 靑目의 주석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世俗諦라 함은 온갖 법성이 空하지만 세간 사람은 전도된 까닭에 허망한 법을 일으키므로, 世間에서는 이것이 진실이다. 여러 성현들은 실로 전도된 성품을 아는 까닭에 온갖 法이 모두 공허하여 나지 않는 것(無生)임을 아나니, 聖人에게는 이것이 진실이며 이를 第一義諦라 한다.


以上 살펴 본 바와 같이 第一義諦는 聖者 입장에서의 진실이고, 世俗諦는 凡夫 입장에서의 진실이다. 세속제는 世人의 입장에서 보면 허위가 아니고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勝義의 입장에서 보면 허위이고 顚倒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外道는 이러한 관계를 모르고 '一切는 空'이라는 말을 단순히 無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世俗諦와 第一義諦는 '現象界'와 '本體界' 또는 '有'와 '空'을 의미하는 것으로, 世俗諦는 凡俗의 입장에서 진실이므로 有이며 第一義諦는 聖者의 입장에서 진실이므로 空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二諦가 지니는 敎義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世俗諦와 第一義諦는 대립된 관계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世俗諦는 不可言의 진리인 第一義諦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 되고, 第一義諦는 世俗諦를 緣하여 표현되어진다. 이와 같이 二諦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서로 相依相卽하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즉 제일의제는 不可言의 空性으로서, 世俗諦의 방편을 매개로 하여 설해지는 實智이다. 이로써 세속제는 第一義諦가 허무가 아님을 보이는 원리이며 징표가 된다. 이에 [中論]에는 세속의 진리에 의하지 않고는 第一義諦를 얻을 수 없다고 설한다.


이와 같은 眞俗二諦의 相依相卽한 관련성은 緣起의 原理에 의한 중도 체계를 보여 준다. 즉 二諦說의 배경도 緣起에서 이로워지며, 이처럼 世俗諦와 第一義諦의 유기적인 관련성은 緣起의 중도 이치를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第一義諦로 말하면 일체는 空이며 無我지만, 因果의 상관 관계 속에서 諸法이 발생하는 有와 無의 현상적 측면에서 보면 世俗諦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어떻게 眞俗二諦가 서로 相卽한 관계에서 緣起의 中道 思想을 나타내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⑵ 二諦相卽의 중도 체계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진리는 표현되는 한에 있어서는 世俗諦로 표현될 수밖에 없으므로, 궁극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世俗諦가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세속제는 捨離되어야만 하는 것이지만, 궁극의 경지인 涅槃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世間의 言說은 그것이 비록 假立的이고 分別이 전제된 것이지만, 實相에 도달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수단인 것이다.


만일 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다. 第一義諦를 얻지 못하면 涅槃을 얻을 수 없다.


즉 世俗諦의 언어 표현이 없으면 절대적인 최고의 勝義諦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를 깨닫지 못하고는 진정한 涅槃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世俗諦라는 의미에는 두 가지 차원의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곡되어 잘못된 집착의 견해인 世俗諦와, 제일의제를 깨닫게 해주는 방편으로의 世俗諦이다. 그리하여 世俗諦는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涅槃에 이르는 과정으로 사용되는 적극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世俗諦가 인정되는 것은 第一義諦와의 관계 때문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思考의 형태인 논리나 상식 관습 및 言說의 중요성은 이러한 世俗諦의 양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第一義諦 역시 그 자체가 바로 열반의 중득은 아니다. 왜냐하면 제일의제에 대한 了解를 통해서만이 涅槃이 실현된다 하기 때문이다. 즉 涅槃의 증득은 言說에 의해 표현되는 第一義諦를 한 차원 넘어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第一義諦도 世俗諦와 같이 하나의 방편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言說로 지시되어 있는 第一義諦는 세속적인 진리를 담고 있음과 동시에 涅槃의 증득이 담보되어 있는 것으로, 부정되어야 할 세속성과 추구되어야 할 진실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의미는 용수의 [廻諍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체법을 空이라고 부정하는 한, 空이라고 부정되는 일체법도 空이라고 부정하는 언어도 모두 空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들 言說(世俗諦)을 허용하지 않고서는 '一切法이 空'이라고 하는 설법을 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개념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 不可言의 勝義空(第一義諦)도 空이라는 세속의 言說에 의하지 않으면 증득할 수가 없는 것으로, 空도 또한 방편이 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勝義의 인식은 세속의 인식을 부정해서 본래 空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인식 내에서 본래 空을 직관한다고 할 수 있다. 용수의 空觀은 세속을 부정하여 空인 第一義의 진실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을 부정하지 않고 세속 내에서 第一義의 空을 절대 부정적으로 직관하고 行證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中論]에서 설하는 제일의제는 卽世俗的이면서, 세속의 空性에 철저한 실천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第一義諦는 초월적인 不可言空性이지만, 연기의 도리에 의해서 성립하는 세속제의 勝義 의미를 지니며 卽世俗的인 긍정적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中觀學派의 勝義空이 세속의 有를 없다고 하는 상대적인 부정의 원리가 아니라, 有의 본래 空한 모습(如如相)을 바로 알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勝義의 空性은 세속제와 제일의제 二諦의 도리를 성립시켜 주는 것으로, 非有非無의 中道 思想인 것이다. 곧 세속적인 緣起의 세계는 모든 사유와 언설을 초월한 第一義諦의 空을 바탕으로 하는 無相의 相으로써, 이는 幻 夢 影 등과 같은 것이기에 '假設'이라고 한다. 따라서 緣起의 세계는 第一義諦(不可言空性)를 근본으로 하기에 有見을 떠나고, 또한 第一義諦를 전달하는 긍정적인 世間의 施設이기 때문에 無見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第一義諦와 世俗諦의 관계는 不一不異의 중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二諦는 中道의 妙用이고, 中道는 二諦의 體' 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觀四諦品>의 제 18게송을 살펴보면,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 나는 이를 無라고 말한다. 또 이는 假名이며 동시에 中道의 이치이다.
緣起를 우리는 空性이라고 설한다. 그것(空)은 假施設이며, 그것은 곧 中道이다.


(ya prat tyasamutp da s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緣起는 無(空)이지만 假名으로써 有인 '中道'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空性은 최고의 진리로서 緣起이지만, 그것은 因緣에 의한 假名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실로 그 空性 자체는 '中道'라는 것이다. 즉 緣起는 空性이며, 이 空性은 緣起의 다른 假名에 불과한 것으로 실은 中道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二諦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하면 第一義諦의 空은 有인 世俗을 없다고 하는 상대적인 부정이 아니라, 世俗有의 實相에 대한 왜곡이 지양될 때 나타나는 眞如相을 非有非無의 中道 眞實相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世俗諦 이외의 또 다른 이론 체계로서의 第一義諦가 아니라, 세속제로 표현된 현실의 여러 측면에서 染汚相을 여읜 본래 청정한 空性을 가리키는 것이다. 龍樹에 의하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현상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 사이에 差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사물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적 진리에 의거해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空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며, 이러한 空의 인식은 世俗諦와 第一義諦가 相卽한 中道의 意味를 示唆하고 있다. 이와 같은 二諦의 입장에서, 緣起와 空思想의 관련에 대하여 스트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절대적 관점(第一義諦)에서 보면 緣起는 空의 체득이고, 세속적인 견해에서 보면 空은 緣起에 대한 최고의 언어적 표현이다.


이처럼 世俗諦와 第一義諦의 관계는 철저한 부정이 곧 긍정인 相依相卽한 관계로써, 이를 '二諦相卽의 中道'라고 한다. 二諦의 相卽은 경험적인 세속의 有의 입장과 초월적인 勝義 空性의 相卽이므로, 이른바 非有非無이며 不一不異한 中道 思想이다. 여기에서 世俗諦와 第一義諦가 다르지 않다는 의미는 각기 세계를 나타내는 방식이 같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표현 방식 속에 드러난 세계의 實相이 同一하다는 의미이다.


第一義諦와 世俗諦의 不一不異한 중도 의미를 <觀涅槃品>의 第 19偈에는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열반은 세간(生死)과 하등의 구별이 없다. 세간도 열반과 하등의 차별이 없다.
이러한 논리는 바로 二諦相卽의 중도 체계 위에서 가능한 것으로, '生死卽涅槃'이며 '眞空卽妙有'의 이치이다. 따라서 二諦說의 의미는 緣起의 원리에 의해 본체계(理)와 현상계(事)가 相卽相入한 中道 思想이다. 緣起의 진정한 이해도 이와 같은 中道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中論]에서 전개하는 空思想 역시 바로 이러한 緣起의 중도 체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生 滅, 斷 常 등의 모든 戱論이 적멸한 '八不說'과 聖 凡이 等一하고 生死와 涅槃이 둘이 아닌 '二諦說'의 中道論은 불타 緣起說의 본질적 의미인 中道 思想을 체계적으로 논리 구현하고 있다.


以上으로 二諦說의 中道 思想에 대한 의미를 마치며, 후에 중국 불교에서 三論宗과 天台宗의 교학적 발달에 미친 二諦說의 영향과 그 전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結 語


석존은 오랜 刻苦의 구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과 삶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다. 이는 본래 청정한 진리에 미혹한 無明의 상태에서, 欲을 일으켜 취착함으로써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근원적인 人生苦의 실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중생의 어두운 마음(無明)으로 분별하고 計度하여 허구적으로 조작한 관념의 세계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世間(loka)'이라는 말은 '世界'나 혹은 '一切'라는 말과 동의어로써, 無我說의 '我'도 여기에 포함된다. 곧 자아와 세계, 一切의 世間은 無明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緣起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實在性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妄念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實體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無明에서 연기한 一切는 無明의 滅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으로, 그 속성이 고유한 自性이 없는 無實體한 '空'이다.


이와 같이 인연의 集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인연의 滅로 사라지는 제법의 實相은, 원시불교에 있어서 無我說을 바탕으로 한 '緣起法'으로 밝혀진다. 이와 같은 불타의 緣起說에 사상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용수의 [中論]은, 종래로 내려오던 小乘의 연기론에 대항해 佛說의 진정한 緣起法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즉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보면 此有故로 彼有며 此起故로 彼起인 相依相待性에서 존재하고,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본래 空이다. 따라서 空과 緣起는 동의어로써, 空은 곧 연기며 연기는 곧 空이다. 다시 말해 인생 및 세계의 제현상은 부정적으로는 空이고 긍정적으로는 緣起이다. 이와 같이 空은 제법의 自性을 부정하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일체 제법의 緣起 제현상을 긍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본성이 空이기 때문에 緣起의 도리가 성립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中道思想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中道란 緣起 無我 空이 가지는 실천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空은 일체 부정을 의미하는 동시에 일체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정을 매개로 한 논리를 통하여 부정과 긍정의 대립을 초월한 中道에 다름 아니다. 즉 空이라는 것은 단지 中道의 假名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空思想과 中道論은 [阿含經]의 諸法無我 諸行無常 등의 思想에 토대를 둔 緣起法을 계승하여 성립된 것으로, 이론적인 체계와 발전은 般若經의 제경전을 통하여 확립되었다. 이를 용수는 [中論]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緣起 無我 中道의 阿含敎說을 [般若經]에서 설하는 空의 논리로 불교의 중심 사상인 中道論을 대승적으로 전개하였다. 따라서 緣起法에 의한 空思想과 中道論의 전개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小乘과 大乘의 인식 차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연기법의 본질인 空 思想은, 나와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 체계를 변화시켰다. 즉 小乘은 유위제법의 실재론에 머물고 있어서 일체 중생과 만물의 근원을 二元的인 관계로밖에 인식할 수 없었고, 따라서 緣起의 근원적인 원리를 밝혀내지 못하므로 一切萬法에 두루한 一乘法의 實相을 드러내지 못하였던 것은 차라리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반면에 大乘은 만물의 근원이 나와 더불어 본래 다르지 않은 空 思想을 바탕으로, 聖 凡이 等一하고 主 客이 無二한 一乘 法界의 중도 이치를 示顯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용수는 阿含의 緣起說에서 佛陀의 근본 정신을 계승하여, 般若經의 空 思想으로 大乘의 본질을 천명하고 大乘 佛敎의 철학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렇지만 [中論]에서 설하는 緣起와 中道의 의미가 [阿含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다. [阿含經]과 [中論]의 입장을 緣起, 空, 中道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비교해 살펴보겠다.


첫째로 '緣起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거론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阿含經]에서는 緣起를 가리킴에 구체적으로 十二緣起說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中論]에서는 十二緣起를 결정적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緣起라는 의미가 보편적인 존재의 원리로 확장되어 쓰여지고 있다. 또한 [阿含經]에서 제시된 十二緣起는 단원 Ⅳ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繼起的 발생으로 해석될 소지를 안고 있지만, [中論]에 보이는 緣起의 의미는 相依相待性의 緣起 본연의 趣旨가 명료하게 부각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小乘 有部에서 그릇 해석했던 점이고 또 일반적으로 오인되기 쉬운 부분인데, 이에 佛陀의 眞意를 올바르게 계승한 龍樹의 위대한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空思想의 발달'을 들 수 있다. [中論]의 空思想이 원시경전의 緣起, 無我敎說에 대한 이론적 체계임은 이미 거론한 바와 같다. 하지만 직접 [阿含經]을 살펴보면 '空'이란 용어는 단원 Ⅰ에서 살펴본 대로 無常, 無我, 苦 등의 용어와 함께 부수적으로 쓰여 있을 뿐 거의 희박한 상태이다. 결국 [阿含經]에 쓰인 '諸法皆空'의 의미는 無我의 理論에 의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에 있어서 [般若經]은 無我說에 입각한 一切法 不可得의 의미를 '空'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런데 반야경에는 논리적 근거 아래 명백하게 空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中論]에서는 이를 諸法의 緣起說에 그 근거를 두고 空의 論理를 전개하여, [般若經]의 空思想에 체계적인 인식을 수립하였다. 이처럼 용수는 [阿含經]의 緣起敎說을 바탕으로 [般若經]의 空思想을 논리적으로 정비함으로써, 小乘 아비달마의 그릇된 인식을 破棄하고 佛陀의 근본 정신을 체계적으로 회복하였던 것이다.


다음 셋째로 '중도 체계의 論理性'을 들 수 있다. [阿含經]에 나타난 中道說은 苦樂, 有無, 斷常, 一異 및 自作他作中道說로 정리되며, 이는 실천적인 입장과 철학적 입장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적 입장의 苦樂中道說이 제시하고 있는 八正道의 正見이 시사하는 바는, 곧 모든 철학적 입장의 中道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실천적 중도설과 철학적 중도설은 거의 동시적인 개념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中道說은 無記에서 파악되는 의미와 十二緣起說의 集과 滅에 의해 二邊을 여윈 中道 思想으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中論]에서 보이는 中道 思想은, 소위 '八不說'과 '二諦說'로 논리적인 체계를 세워 전개하고 있다. 즉 八不說은 生滅, 斷常, 一異, 去來의 대표적인 邊見을 논파함으로써 연기의 실상인 中道를 밝히고, 二諦說은 世俗諦와 第一義諦가 서로 相卽한 不一不異의 연기 원리로써 中道 理致를 논설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체계 속에 펼쳐지는 龍樹의 독특한 논법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阿含과 中論을 비교하는 점에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이상으로 간략히 비교한 바에 따라 龍樹는 원시 불전에서 설하는 緣起說, 곧 存在의 진실한 모습(如如相)을 緣起 空 二諦의 中道로써 체계적으로 정립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不一不異의 中道思想은 緣起 空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이른바 中道를 근본하지 않은 緣起와 空의 이해는 그야말로 허무론이나 偏空 및 소승적 決定因果論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中論]에서 설하는 緣起法에 의한 空思想은 십이연기설의 中道說을 근본으로 성립되었으며, 이는 諸法의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相卽하는 非有非無의 中道 思想이다. 龍樹는 [阿含經]에서 十二緣起로 밝혀진 중도설을, [般若經]의 空思想으로써 '八不中道'와 '二諦中道'의 논리로 중도 체계를 정립하였다. 즉 緣起 空의 본질이 中道 思想에 입각함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말하면, 緣起法에 의한 無我說을 계승한 龍樹의 空 思想은 고정적인 사물의 인식 태도를 벗어나 일체 상대적인 邊見을 초월한 '中道'의 理致를 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參 考 文 獻


1. 經 論


中阿含經 60卷, 大正藏 卷 1
長阿含經 22卷, 大正藏 卷 1
雜阿含經 50卷, 大正藏 卷 2
增壹阿含經 51卷, 大正藏 卷 2
金剛般若波羅密經, 鳩摩羅什 譯, 大正藏 卷 8
妙法蓮華經 7卷, 鳩摩羅什 譯, 大正藏 卷 9
阿毘達磨俱舍論, 世親 造, 玄奬 譯, 大正藏 卷 29
中論 4卷, 龍樹菩薩 造, 梵志靑目 釋, 鳩摩羅什 譯, 大正藏 卷 30
般若燈論釋 15卷, 波羅頗蜜多羅 譯, 大正藏 卷 30
大乘中觀釋論, 安慧菩薩 造, 大正藏 卷 30
中觀論疏, 吉藏 撰, 大正藏 卷 42
大乘玄論, 吉藏 撰, 大正藏 卷 45
三論玄義, 吉藏 撰, 大正藏 卷 45
二諦義, 吉藏 撰, 大正藏 卷 45
華嚴一乘法界圖, 大正藏 卷 45


2. 一般著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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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裕鎭, 中觀哲學의 二諦說 硏究, 哲學論究(서울대) 9집
金鎭煥(哲印), 中의 思想에 對한 辨證法的 考察, 東國思想 7집
류동호, 中論의 因果論, 東國思想 16집
 

 

ABSTRACT


A Study on Sunyata and Middle Path depended on The Law of Paticcasamuppada
Concentrating around Chinese gamas & Madhyamaka- stra


Park, Kye Hee
Department of Buddhist Studie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N g rjuna made a brilliant achievement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with his Madhyamaka- stra which gave a philosophical basis and a religious depth to Buddhism. It is a widely known fact that N g rjuna generated the Madhy na Buddhism of India and exerted a profound influence on its development.


He interpreted the Pa iccasamupp da of Buddha in chinese gamas as S nyata.


The kernel of his thought is no doubt the theory : "Nothing can claim it's absolute existence or independence whether it belongs to perception or to perceived object."


According to N g rjuna, Pa iccasamupp da and S nyata are same meaning. And both of them have their origin in Middle Path Doctrine.


The thought of Emptiness that represented by Pa iccasamupp da means not only denial of what all beings exist and have their svah va(自性), but also affirmation of what all beings exist through origination and extinction in the law of Pa iccasamupp da.


That is to say, Pa iccasamupp da can realize on the basis of S nyata.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Pa iccasamupp da) indicates a system confirm‎‍ing the non-substantiality of the individual self and the external object.


So all beings generated by cause and effect can arise through Nihsvah va(無自性).


It clearly explains all the development in the universe or the universe itself, by showing the interrelationship and interaction of the cause and effect originated in S nyata.


In the course of considering the relation between S nyata and Pa iccasamupp da, we are lead to the Middle Path Doctrine. What is called, all beings don't exist because the origin of them is s nya, but on the other hand all beings exist. Why? Because they are in existence phenomenally by Pa iccasamupp da. That is the real meaning on Middle Path.


In chapter Ⅰ, most of all I examined S nyata of the Primitive Sutra in chinese gamas translated from sanskrit into chinese.


Then in chapter Ⅱ, I investigated that Anattan theory in chinese gamas is formed in the Middle Path Doctrine. Especially the Middle Path Doctrine of the Primitive Surta is sought in the theories of Twelvefold Dependent Origination(十二緣起) and the Buddha's Silence (avy kata : 無記). This enabled me to certain that the thought of S nyata in the Madhyamaka- stra was derived from the Doctrine of Nonexistence of Ego in the Primitive Buddhism.


Therefore N g rjuna's theory of S nyata originated from the Primitive Sutra and established through the Mahayana Sutra.


So in chapter Ⅲ, I examined the relation between Pa iccasamupp da and S nyata in the Madhyamaka- stra.


Then in chapter Ⅳ, I researched on the theory of 'The Middle Path of Eight Negation(八不中道)' and 'The Middle Path of Two Truth(二諦中道)' which is based on 'Pa iccasamupp da is nothing but S nyata(緣起卽空)' in the Madhyamaka- stra.


Madhyamaka- stra of N g rjuna speaks of the truth in terms of the Middle Path of not being born, not being mortal, not being discontinued, not being continued, not being united, not being different, not being gone and not being come.


And it says in the Madhyamaka- stra that "If one does not depend upon the secular faith, then one can not obtain the ultimate truth. If the ultimate truth is not gained, then one can not reach Nirv a."


When the two true ideas are looked through the secular view, there is no identity between the ultimate truth and the secular truth. Bu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two when the two true ideas are looked through the ultimate truth.


It's a world that trenscends all the possibilities of mistakes of subjective and objective cognition. It also trenscends all the range of thoughts. As it were, it says the truth of Middle Path between existence and nonexistence.


We can say that the real meaning of the doctrine of Nonexistence of Ego in gamas was organized and developed into the doctrine of Middle Path of 'Eight Negation' and 'Two Truth' through S nyata's logic in the Madhyamaka- stra.



[동국대 碩 士 學 位 論 文]

 

 

 

 

 

 

 

 

 

[朴 癸 姬] ■ 연기법에 의한 공사상과 중도론 연구 - 아함과 중론을 중심으로

緣起法에 의한 空思想과 中道論 硏究 -阿含과 中論을 中心으로- 朴 癸 姬 (惠 照) ▒ 目 次 ▒ 緖 言 1. 硏究의 動機와 目的 2. 硏究의 범위 Ⅰ. 阿含 緣起(無我)의 특질 1. 三科說에 나타난 無我 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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