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덕德, 즉 인도人道의 근거와 도道의 존재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큰 덕의 모습이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孔德之容 惟道是從).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 방식이나 통치 원칙(덕德)은 자연의 존재 형식과 운행 방식(도道)을 모델로 해야 한다는 노자의 생각이 들어 있다.
홀황 하거나 황홀한 도의 운행 과정 속에서 그것이 상象으로 드러나고, 또 그런 운행 과정 속에서 구체적인 사물들이 존재한다. 유명幽冥한 상태로 있는 도의 운행은 허구나 관념이 아니라 실지의 정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실지의 정황이 얼마나 참되던지 전혀 어그러짐이 없이 아주 미덥게 원칙을 가지고 운행한다.
이것은 성인에 의해 확립되고 전승되는 전통을 기준으로 하는 공자와는 다른 방식이다.
[道德經 第21章]
孔德之容 惟道是從
큰 덕의 모습이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라는 것은 정말로 황하고도 홀하다.
- 황이나 흘은 모두 미묘하고 흐릿하여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를 묘사하는 말들이지만, 황은 너무 밝아서 흐릿해진 상태이고 홀은 어둠 속에서 흐릿해진 상태이다.
- 도는 배타적 본질을 가지고 실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없는 것이고, 그것이 세계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칙으로 모든 것의 존재와 운동에 관여하는 기능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있다는 것이다. 없다는 차원에서 보면 홀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보면 황하다는 것이다.
惚兮恍兮 其中有象
흘하고 황하구나! 그 안에 형상이 있다.
- 기중其中은 어떤 특정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홀황 하거나 황홀한 도의 운행 과
정 속에서 그것이 상象으로 드러나고, 또 그런 운행 과정 속에서 구체적인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恍兮惚兮 其中有物
황하고 홀하구나! 그 안에 사물이 있다
窈兮冥兮 其中有精
요하고 명하구나! 그 안에 실정이 있다,
- 요窈는 유幽와 같은 의미이다. 즉 그윽하다, 심원하다, 혹은 유현幽玄한 상태를 묘사한다. 명冥도 역시 아득하다든가 어둑하다는 뜻인데, 특히 아득하여 이것인지 저것인지 분명하게 구분이 안 되는 상태이다. 요명窈冥 즉 유명幽冥한 상태로 존재하는 도 안에 정精이 있다고 한다.
其精甚眞 其中有信
그 실정은 매우 참되어서, 그 안에 미더움이 있다
- 장자 대종사편에는 “도라는 것은 참된 실정을 가지고 있고 또 미더움이 있다(道者, 有情有信)”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정情은 도가 허구적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참된 존재라는 뜻을 나타내고, 신信은 도가 흐트러짐 없이 규율 속에서 운행하여 미더움을 준다는 뜻을 나타낸다.
- 그래서 이 대목은 ‘유명幽冥한 상태로 있는 도의 운행은 허구나 관념이 아니라 실지의 정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실지의 정황이 얼마나 참되던지 전혀 어그러짐이 없이 아주 미덥게 원칙을 가지고 운행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自古及今 其名不去
예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떠나지 않으니,
以閱衆甫
그것을 통해 시작을 보는구나.
- 보甫는 부父의 의미이고 시始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중보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 내지는 시작인데, 만물 발생적인 어떤 시원이라고 이해하면 안 되며, 만물은 어떻게 생기는가 만물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만물의 운동 모습은 어떠한가 하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모두 걸려 있는 어떤 궁극적 상태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바로 도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억지로 붙인 그 이름(道 혹은 大)이 항구불변하게 있고 또 모든 만물의 발생과 변화에 관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통해서, 만물은 어떻게 생기는가 만물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만물의 운동 모습은 어떠한가 등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
나는 무엇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는 상태를 알겠는가?
以此
이것에 의해서이다.
- 이것은 앞에서 말한 전체 내용, 즉 “도지위물道之爲物”부터 “기명불거 其名不去”까지이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시이是以를 매개로 해서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제2장의 항恒이나 이곳의 일一은 모두 도道와 같은 의미이다. “성인은 일一을 가지고 천하를 통치하는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노자가 인간사의 일을 처리하는 모델로 자연의 존재 형식이나 운동 원칙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도를 만사의 근거로 삼아 통치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일관된 주장으로서 바로 앞장인 제21장의 “큰 덕의 모습이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孔德之容 惟道是從)”와도 일맥상통한다.
‘무위無爲’와 ‘무불위無不爲’가 밀접한 연관 관계 속에 있듯이 ‘곡曲’과 ‘전全’도 밀접한 연관 관계 속에 있다. 노자 사상 안에서는 이들은 각각 층차層差를 달리하는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같은 충차에서 상호 의존한다는 의미가 깊이 개입되어있다.
왕枉, 와窪, 폐幣는 모두 자신을 낮추는 모습 즉 ‘곡曲’이고, 직直, 영盈, 신新은 자신을 낮추어서 얻어지는 그 반대편의 좋은 결과들 즉 ‘전全’이다.
부자견不自見, 부자시不自是, 부자벌不自伐, 부자긍不自矜은 모두 ‘곡曲’에 해당하고, 명明, 창彰, 유공有功, 장長은 모두 ‘전全’에 해당한다.
[道德經 第22章]
曲則全 枉則直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휘면 펴지게 된다.
- 즉則은 원인과 결과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것과 뒤의 것이 서로 다른 양태이지만 상호 의존 관계에 있거나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내며, 반대편의 결과를 야기하는 가치나 반대편을 향해 움직이는 변화를 보여 준다.
- 곡曲은 나무가 구불텅구불텅하여 자나 컴퍼스를 갖다 대지 못할 지경인 모습을 말한다. 대개 부정적인 모습인데, 노지는 반면으로 나아가는 사고를 하고 있다. 즉 구불텅구불텅한 것은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곡曲과 전全이 곡은 곡으로, 전은 전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 있음을 드러내려 한다.
窪則盈 幣則新
패이면 꽉 차게 되고, 낡으면 새로워진다.
少則得 多則惑
줄이면 얻게 되고, 늘리면 미혹된다.
- 줄인다(少)는 것은 욕망을 줄이거나 자신을 낮추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하면 무엇인가를 얻게(得) 되는데, 바로 장구長久함이다. 통치의 장구함 내지는 국가의 장구함 혹은 통치자의 권위의 장구함을 말한 것이다.
- 늘린다(多)는 것은 무엇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는 것 혹은 많이 쌓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미혹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是以聖人執一爲天下式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성인은 일一을 가지고서, 천하의 통치 방식으로 삼는다.
不自見 故明
자신의 관점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인식에 도달하고,
- ‘곡즉전曲則全’의 일반 원리를 응용한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부자견不自見, 부자시不自是, 부자벌不自伐, 부자긍不自矜은 모두 ‘곡曲’에 해당하고, 명明, 창彰, 유공有功, 장長은 모두 ‘전全’에 해당한다.
不自是 故彰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니 오히려 빛나게 되며,
不自伐 故有功
자기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공이 있게 되고,
不自矜 故長
자기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지도자가 된다.
- 노자가 보기에 이 세계의 어떤 것도 자신의 순수한 본질을 가지고 그것을 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관계와 변화 속에 해체되어 있다. 세상 속에서 이런 원리를 모델로 삶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전체 자연계 안에서 해체해 버린다. 그런데 이런 해체가 단순히 미학적이나 낭만적 해체가 아니라, 노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거대한 효과 즉 명明, 창彰 유공有功 장長 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
- 해체된 자아는 어떤 특정한 이론 체계나 가치관을 고집하지 않고, 특정한 ‘내용’으로 목적을 설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편과 저편을 가르지 않게 되고 그래서 결국 다투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옛날부터 내려오는 ‘곡즉전’이리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 ‘곡즉전曲則全’은 노자의 창견이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말(古之所謂)이다. 즉 옛날에 있던 어떤 문화적 코드를 모델로 해서 자신의 철학을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노자는 하나라 문화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 따라서 ‘곡즉전曲則全’이라는 말은 그냥 헛된 말이 아니라, 정말로 실재적 가치가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誠全而歸之
정말로 모든 일들이 죄다 거기로 귀결된다.
- 지之는 ‘곡즉전曲則全’을 가리킨다. 정말로 온전한 것은 그 “곡즉전曲則全”의 원리로 귀결된다는 뜻으로서, 모든 온전한 상태 즉 가장 좋은 결과들은 모두 그 ‘곡즉전曲則全’의 원리에 의해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희언希言’은 “언어 체계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즉 자연 내지는 자연스러움 혹은 자연의 모습인 “스스로 그러함’은 어떤 내용으로 확정하고 한계 지우는 언어 체계로 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자가 보기에 인간이 모델로 해야 할 자연의 모습은 모두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있거나 반대편으로 향하는 운동 과정 속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의미로 정지 내지는 고정시키는 언어 체계에는 담겨질 수가 없다.
제2장의 불언지교不言之敎와도 같은 의미이다.
인간이 설정한 의미 체계나 가치의 체계 혹은 제도와 같이 언어화되어 있는 것들이 얼마나 유
한한 범위에 한정되어 있겠는가? 이 유한한 범위를 벗어나, 도를 모델로 하여 도를 실현하려고 하는 자는 도의 범위와 같아지고, 덕을 실현하려고 하는 자는 덕의 내용과 같아진다. 반면에 도가 상실된 모습의 일이나 행위 즉 유한한 가치체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고 추종하면 자신의 모습도 그런 유한성의 범위 안에 갇히거나 그런 모습과 같아진다.
[道德經 第23章]
希言自然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다.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그러므로 광풍은 아침 한나절을 불지 못하고 폭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孰爲此者? 天地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 자연이다,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천지, 자연도 그렇게 오래 지속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임에랴!
- ‘광풍’과 ‘폭우’는 일정한 의미 체계를 운용하여 일정한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모습을 상정하고 있다. 어떤 가치 체계가 선善으로 상정되면 누구나 그 선을 향하여 질풍노도와 같이 다가가고, 그 선을 향하지 않는 것은 모두 금지 혹은 배제되어야 하며, 그 선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면 모두 낙오자가 된다. 그런데 천지, 자연이 하는 ‘광풍’이나 ‘폭우’도 하루를 넘기지 못할 정도인데, 인간이 설정한 의미 체계나 가치의 체계 혹은 제도와 같이 언어화되어 있는 것들은 얼마나 유한한 범위에 한정되어 있겠느냐 하는 말이다.
故從事於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도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덕의 실현에 종사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며, 도를 상실한 일에 열중하는 자는 그 상실된 것과 같아진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도와 같아진 자는 도 역시 즐거이 그를 취하고,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덕과 같아진 자는 덕 역시 즐거이 그를 취하며,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그 상실된 것과 같아진 자는 그 상실된 일이 즐거이 그를 취한다.
도를 체득한 자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 즉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자견自見“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 자시自是“자신을 옳다고 히는 것,”, 자벌自伐“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자긍自矜“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모두 설거지통에 버려질 음식 찌꺼기이거나, 몸에 난 종기, 혹은 할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 행위와 같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원칙과 너무나 거리가 먼 행위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존재 원칙 속에서는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 확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모든 것의 존재 근거가 다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유한한 체계를 가지고 그것을 옳다고 고집하거나, 배타적으로 확보된 자신을 내세우는 것과 같은 행위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道德經 第24章]
企者不立 跨者不行(기자불립 과자불행)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오래 걷지 못한다. 跨(넘을 과)
-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향해 자신의 욕망을 발휘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도 무엇인가를 향해 서둘러 다가가는 모습이다. 그 욕망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체계가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도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욕망 체계는 자연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므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오래 걷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자견자불명 자족자불창 자벌자무공 자긍자불장)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신이 옳다고 하는 사람은 빛나지 못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공을 차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못한다.
其在道也 曰餘食贅行(기재도야 왈여식췌행)
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 贅(혹 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만물은 이런 것들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자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의 ‘도道’는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말해 주는 범위다. 즉 세계는 자연에 원래 있는 반대편으로 향하는 운동 경향을 매개로 대립항들이 꼬여서 존재한다. 이것이 세계의 존재 형식이며 원칙이다. 이것을 억지로 ‘도道’라는 글자를 가지고 나타낼 뿐이다. 그래서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도’는 실체도 아니고 본체도 아니며 근원도 아니다. 그렇지만 세계는 가장 기본적인 이 원칙[道]의 지배를 받아 존재하며, 이 원칙은 무궁무진한 범위와 능력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 구체적인 모습으로 갖추어진[形]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象] 내지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도가 반영하는 것은 이 전체 세계의 자연성이다. 즉 아무런 외부적 힘이 관여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성질, 스스로 그러한 모습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道德經 第25章]
有物混成 先天地生(유물혼성 선천지생)
어떤 것이 혼돈스러운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천지보다 앞서 살고 있다.
- 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생生’자는 ‘발생시키다’ 혹은 ‘낳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다,’ ‘살고 있다’ 내지는 ‘생육한다’는 등의 의미이다.
- ‘혼성混成’은 혼박渾樸 혹은 혼돈의 상태, 혹은 카오스의 의미가 아니다. 노자 철학에서 도는 이 세계가 반대되는 두 대립항들이 서로의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꼬여 있음을 말하는 범주이다. 따라서 도는 이 세계의 순수 단일성이나 일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서로 관계 속에 잡종처럼 얽혀 있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혼성이다.
寂兮寥兮 獨立不改(적혜요혜 독립불개)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모양도 없어라, 홀로 서 있으며 달라지지 않는다.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운행하면서도 어그러지지 않으니, 이 세상의 어미가 될 수 있다.
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오부지기명 강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르는데, 억지로 글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고 말할 뿐이다.
- 도를 어떤 일정한 내용으로 개념화하거나 정의하여 가둘 수 없지만 거기에 어떤 호칭은 붙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세계의 존재 형식을 특정한 내용으로 개념화하거나 정의 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을 지칭할 수 있는 명칭만 억지로 갖다 붙인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는 어떤 특정한 내용으로 한정된 의미의 전달 체계가 아니라 단순히 세계의 존재 형식을 나타내는 기호로만 쓰인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노자는 도를 억지로라도 개념화하는 작업을 피하지는 않는다. 해서는 안 되지만 또 안 할 수도 없는 개념화를 ‘크다’는 것으로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도는 이 우주의 존재 형식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크다고 한 것이다.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대왈서 서왈원 원왈반)
큰 것은 가게 되고, 가면 멀어지며, 멀어지면 되돌아온다.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은 크고, 땅은 크고, 왕도 또한 크다.
- ‘그러므로’[故]는 시이是以의 대용이다. 즉 앞에서 우주의 존재 형식과 그 기능을 말한 후에 고故를 매개로 인간사의 일로 내려오고 있다. 전체 자연이나 그 전체 자연이 존재하는 원칙[道]도 크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하늘[天]이나 땅[地]도 이 원칙을 본받아 ‘운행’[逝], ‘극점을 향한 운동’[遠], ‘되돌아 감’[反]과 같은 기능을 하므로 ‘크다.’
- 왕은 나라 안에서 천도를 실현한다. 그 천도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의 운행을 모델로 하는 것이다. 자연은 ‘크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듯이 극점까지 발현한 후 되돌아오는 운동과정 속에 있다. 이 운동과정과 원칙을 모델로 해서 통치를 하는 왕의 위치 또한 크다고 한 것이다.
國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이 세상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이 그 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한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가 지향하는 가치는 어느 한쪽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즉 경솔함보다는 중후함, 조급함보다는 안정됨, 추함보다는 아름다움, 악보다는 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 강함보다는 부드러움, 굳셈보다는 약함, 채움보다는 비움, 불보다는 물 등이다. 노자는 이 세계가 대립항들 끼리의 상호 꼬임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반反이라는 운동경향을 매개로 대립항들이 서로 꼬여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도라는 글자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런 원칙 아래에 존재하는 세계나 이런 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의 태도는 노자가 분명히 지향하는, 어느 한편의 모습 즉 낮고 부드러우며 여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높음↔낮음 불↔물 남성성↔여성성 강함↔약함 곧음↔구부림 앞↔뒤 위↔아래 ⇒ 도道 (낮춤, 불과 같음, 여성적임, 유약함, 구부림, 뒤로 물러남, 아래에 처함)
여기서도 노자는 중후함이 경솔함의 근본이 되고, 안정된 것이 조급함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일반 원칙을 제시한다. 그런 후에 그것을 모델로 하여 통치자는 어떠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런 원칙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통치지는 무기와 양식을 싣고 자신을 따르는 무거운 수레[치중輜重] 곁을 떠나지 않는다. 즉 무슨 일을 하든지 중후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려함이 그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는 조용한 곳에서 초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중후함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道德經 第26章]
重爲輕根 靜爲躁君(중위경근 정위조군)
중후한 것이 경솔한 것의 근본이 되고, 안정된 것은 조급한 것의 우두머리가 된다.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시이성인종일행 불리치중)
이런 이치를 본받아, 군자는 하루 종일 다니면서도, 무거운 것을 싣고 있는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雖有榮觀 燕處超然(수유영관 연처초연)
비록 화려한 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조용한 곳에서 초연해 한다.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어찌 큰나라의 군주로서 자기 맘대로 천하를 경솔하게 다루겠는가?
輕則失本 躁則失君(경즉실본 조즉실군)
경솔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군주의 도리를 잃게 된다.
노자가 보기에 진정으로 잘된 것 혹은 참된 것은, 배제하는 무엇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 즉 본질주의 방식에 따르면 무슨 가치 판단을 하거나 행위를 할 때는 향상 어떤 기준이나 확정된 의미가 있어야 한다. 노자와 같은 시대에 노자와 다른 패러다임의 문명을 주장하던 공자에 따르면, 우리의 바람직한 행위는 성인이 건립하고 성인의 말씀을 타고 전승된 전통에 맞추어 하는 것이다. 이 전통은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되어 전통은 결국 전통에 부합하는 부류와 부합하지 못하는 부류로 구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또 전통에 부합하더라도 부합 정도에 따라 차등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그런 세계관 안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것이 진정으로 참된 것이라면 이런 배제와 억압 기능을 수반하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반대편의 것을 자신의 스승과 거울로 삼을 줄 모르면 아무리 큰 지혜를 발휘해도 혼란에 직면하게 되고, 반대편의 것을 자신의 스승이나 거울로 삼을 줄 안다면 버려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람을 모두 구제하는 경지가 될 것이다. 하나의 가치 체계를 운용하더라도 ‘흠’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노자는 아주 심오한 이치[要妙]로 말하고 있다.
[道德經 第27章]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행무철적 선행무하적 선수불용주책 선폐무관건이불가개 선결무승약이불가해)
정말로 잘 가는 것에는 궤적이 없고, 정말로 잘된 말은 흠을 남기지 않으며, 정말로 셈을 잘 히는 자는 주판을 쓰지 않고, 정말로 잘 닫힌 것은 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 수가 없으며, 정말로 잘 묶인 것은 노끈을 쓰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 진정으로 참된 행위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고정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궤도의 영역과 비궤도의 영역을 아우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정해진 궤도를 달리려 매달리고, 또 그 궤도를 달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억압하여 왔는가? 또 그 궤도에서 앞서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전전긍긍해 왔던가? 길을 잘 다니는 사람은 이미 형성된 길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길이 아닌 곳도 자유롭게 왕래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길도 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 어떤 주장이나 이론 체계가 진정으로 참된 것이라면 흠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주장이나 이론을 진정으로 잘 적용하는 사람은 어떤 기존의 이론 체계나 주장에 의해 인도되거나, 그것을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으로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 셈을 할 때 주판을 사용하는 것이나, 문을 잠글 때 빗장을 쓰는 것이나, 무엇을 묶을 때 노끈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어떤 하나의 일정한 기준이나 체계에 의해 인도되어 고정되는 모습을 의미한다. ‘주판’이나 ‘빗장’이나 ‘노끈’은 모두 일정한 범위에 한정된 가치 체계이며 의미 체계이다. 이는 유한성을 상정한다. 이런 유한한 체계는 향상 그 체계가 담아 내지 못하는 부분을 남기게 되며 결국 담아진 부분과 담아 내지 못한 부분 사이에 갈등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노자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세계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일정한 이론 체계에 함몰되어 있지 않은 자만이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래서 다론 사람은 도저히 “열수 없는” 효과와 다른 사람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성과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是以聖人常善求人 故無棄人(시이성인상선구인 고무기인)
이런 이치를 본받아 성인은 정말로 사람을 잘 구제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常善救物 故無棄物(상선구물 고무기물)
정말로 사물을 잘 구제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사물이 없다.
是謂襲明(시위습명)
이것이 바로 습명襲明이다.
- 성인은 합리성으로 치장된 이론 체계[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배제와 억압의 논리를 구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일정한 가치 체계를 적용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대신 전체 자연의 운행 원리를 모델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체 자연의 원리를 모델로 하는 것을 노자는 습명襲明, 즉 명明을 잇는다고 표현하였다. 명이란 어떤 하나의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인식 능력이 아니라 세계의 전체 면목을 파악하는 인식 능력이다.
故善人者 不善人之師(고선인자 불선인지사)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不善人者 善人之資(불선인자 선인지자)
좋지 않은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불귀기사 불애기자 수지대미)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是謂要妙(시위요묘)
이것이 바로 요묘要妙이다.
노자는 이전의 문화나 철학을 반성하거나 계승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는데, 하夏나라의 문명을 모델로 하였다. 하나라 문화는 모계 사회 전통으로서 여성적 모티브(계곡, 여성의 성기, 모성 등)가 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불과 검은색, 소박함 등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노자 철학의 중심 모티브 들이다. 하나라 문화,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던 노자는 은나라나 주나라의 문화는 알아야 할 대상으로, 하나라 문화는 지켜야 할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노자는 자신이 부정적인 시선을 주었던 은나라나 주나라 식의 문화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대상으로, 하나라의 특정을 가진 문화는 지켜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켜야 할’ 대상으로 해서 얻어지는 효과는 이 세상에서 계곡[谿]이나 모범[式] 그리고 골[谷]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 준다.
즉 자신을 비우고 낮춤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나 사물들이 스스로 흘러 들어오게 되는 무한한 역량을 가진 통치자이게 된다. 이러한 효과들을 획득한 사람이나 사회는 훌륭한 덕으로부터 멀어지지도 않고 그런 덕을 흐트러뜨리지도 않으며 충족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성성을 유지하고 흑색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특성을 지키며 욕됨을 지키면 최상의 덕을 발현하게 된다. 그런 상태는 결국 갓난애와 같고, 일정한 기준이나 한도가 없는 것과 같고. 바로 자연성이 그대로 유지된 통나무와 같다. ‘갓난애’, ‘무극’, 그리고 ‘통나무’는 자연의 또 다른 표현이자 ‘도’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모습이다.
[道德經 第28章]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그 남성성을 알고 그 여성성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
천하의 계곡이 되면 언제나 덕이 떠나질 않아, 갓난아기의 단계로 되돌아간다.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
그 백색을 알고 그 흑색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된다.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천하의 모범이 되면 언제나 덕이 어긋나질 않아, 한계가 없는 곳으로 되돌아간다.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지기영 수기욕 위천하곡)
그 영광스러움을 알고 욕됨을 지키면, 천하의 골이 된다.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위천하곡 상덕내족 복귀어박)
천하의 골이 되면 언제나 덕이 곧 족하게 되어, 질박한 통나무로 되돌아간다.
樸散則爲器(박산즉위기)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된다.
- 구체적인 그릇은 통나무가 흩어져서 된 것들이다. 즉 원래 자연성에 제한을 가하고 조각을 내어야 그릇이나 제도가 된다.
聖人用之 則爲官長(성인용지 즉위관장)
성인은 그 통나무의 이치를 써서, 통치자 노릇을 한다.
- 성인은 어떤 제한된 모습으로 형성된 가치 체계를 기준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모델로 사용하면서[用之 즉 用樸] 사회 기관의 수장 노릇을 한다.
故大制不割(고대제불할)
그러므로 큰 통치는 가르지 않는다.
- 하나의 가치 체계를 기준으로 해서 부합하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가르고, 또 어떤 기준을 적용해서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를 구분하거나, 선인과 불선인을 구분해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쪽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지 않는다.
만일 이 세상이 ‘앞서는 것,’ ‘따뜻한 온기로 감싸 주는 것,’ ‘강한 것’ 그리고 ‘솟아나는 것’만 있다면 세상은 이런 것들끼리 형성한 ‘의미’를 근거로 그 ‘의미’를 확장할 수 있는 방향을 정한 다음 그 방향을 향해서만 나가면 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뒤따르는 것,’ ‘찬 기운을 내뿜는 것,’ ‘유약한 것’ 그리고 ‘무너지는 것’이 함께 있다. 즉 이 세상은 반대되는 대립항들이 서로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편 만을 담을 수 있는 체계나, 한편으로 향해 있는 방향, 하나의 의미로 인도되는 유위적 행위를 개입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극단’적이거나 ‘사치’하거나 ‘지나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극단’이나 ‘사치’ 혹은 ‘지나친’ 행위는 어떤 일정한 의미 체계를 과도하게 밀고 나간 상태에서 나온 말이다. 성인은 반대편의 것들이 잡종처럼 얽혀 있는 자연의 존재 형식을 체득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법칙으로 삼는다.
[道德經 第29章]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데, 나는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볼 뿐이다.
-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영웅들이 일정한 내용으로 꽉 채워진 가치체계를 근거로 해서 거기에 합당한 방향에 따라 의욕적인 행위를 하지만, 이는 모두 실패한다.
天下神器 不可爲也(천하신기 불가위야)
천하는 신령스런 기물이어서, 의지가 개입된 행위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천하는 일정한 내용을 근거로 나누어지는 배타적 구조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본질’을 확장할 요량으로 정해진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이 천하에 대해서 일정한 의지나 의욕 혹은 체계를 덧씌우는 방식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또 그렇게 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爲者敗之 執者失之(위자패지 집자실지)
강한 의지로 하려는 자는 그것을 망칠 것이고,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 그런데도 누군가가 이런 유위적 행위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천하를 망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하나의 체계나 의미를 근거로 천하를 꽉 잡으려고 한다면 그는 결국 천하를 잃게 될 것이다.
故物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培或隳(고물혹행혹수 혹허혹취 혹강혹리 혹배혹휴)
원래 세상의 사물에는 앞서는 것이 있는가하면 뒤따르는 것이 있고, 따뜻한 온기로 감싸 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찬 기운을 내뿜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강하지만 또 어떤 것은 유약하다. 솟아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것도 있다. 羸(파리할 리),隳(무너뜨릴 휴)
是以聖人 去甚 去奢 去泰(시이성인 거심 거사 거태)
이 때문에 성인은 극단적으로 하거나, 사치하거나, 지나치게 하지를 않는다.
노자 시대(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사상적 조건이 모두 달라지는 전면적인 변화이며, 전혀 다른 시대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혼란의 시대였다.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이에 대응한 합종연횡, 부국강병이 각국의 목표였고 지향점이었다.
이런 시대에 노자는 “잘하여 성과를 내었으면 이내 멈추고, 감히 견강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즉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단계에서 겸손해져야지, 극한으로 끝까지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성과가 있고난 후에 ‘뽐내고,’ ‘으스대며,’ ‘교만하게 군다,’면 이것이 바로 ‘그치지’[已] 못하고 ‘끝까지 밀어불이는 것’[强]이다.
여기서 견강한 태도[强]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한다든지, 완벽한 항복을 받아내려고 한다든지 하는 태도들이다. 이 안에는 바닥을 보고야 말겠다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극단적인 사고가 숨겨져 있다.
전쟁이란 어쩔 수 없을 때 하는 것이므로 소기의 목적만(어떨 때는 최소한의 성과만) 달성되면 바로 그쳐야 한다고 노자는 주장한다.
여기서 노자는 ‘군사적 강제’를 예로 들었지만, 모든 ‘기존의 것들’로부터 강제된 억압 그리고 모든 ‘힘 있는 자들’로부터 오는 억압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잘 배워 둔 체계’ 게다가 ‘옳다고 믿는 것들’로부터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道德經 第30章]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이도좌인주자 불이병강천하)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자는 군사적 힘으로 천하를 강제하지 않는다.
其事好還(기사호환)
그런 일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師之所處 荊棘生焉(사지소처 형극생언)
장수가 호령하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나고,
大軍之後 必有凶年(대군지후 필유흉년)
대군이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强(선자과이이 불감이취강)
잘하여 성과를 내었으면 이내 멈추고, 감히 견강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과이물긍 과이물벌 과이물교)
성과를 이루고도 뽐내지 않고, 으스대지 않으며, 교만하게 굴지 않는다.
果而不得 已居 是謂果而勿强(과이부득 이거 시위과이물강)
성과를 이루고서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어도 거기서 멈추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과를 내었으면 견강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物壯則老 是謂不道(물장즉노 시위부도)
무엇이나 강장하면 늙어진다. 이것이 바로 도답지 않다고 하는 말이다.
- 사물은 모두 가장 왕성한 단계로 발전한 후에는 늙어 간다. 사람도 장년 다음에는 바로 노년이 되고, 꽃도 가장 아름다운 단계에서 바로 시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장년의 힘을 계속 시행한다든지, 가장 화려한 단계를 지속시키려 한다든지 왕성함만 자랑하려 한다면 오히려 추해질 뿐이다. 이는 도, 즉 자연의 존재 형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不道早已(부도조이)
도답지 않으면 일찍 끝나 버린다.
- 자연의 존재 형식과 다론 방식으로 한다면 모두 일찍 끝나 버린다. 자연의 존재 형식 즉 도 자체가 장구한 것이듯이 자연의 존재 형식을 모델로 삼아 행하는 통치나 자연의 존재 형식을 모델로 한 문화는 장구하게 유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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