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해 앉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왼쪽은 동쪽이고 오른쪽은 서쪽이 된다. 동쪽은 태양이 뜨는 방향이고, 서쪽은 태양이 지는 자리이다. 그래서 동쪽은 양의 방향이 되고, 서쪽은 음의 방향이 된다. 이런 이유로 생기발랄하고 무엇을 살리는 것을 주로 하는 평상시에는 왼쪽[陽,東]을 위주로 하고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일을 할 때는 오른쪽[陰,西]을 위주로 한다. 평상시에 군주는 왼쪽을 숭상 하다가 전쟁을 할 때는 오른쪽을 숭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쟁은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은 장군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낮은 장군을 왼쪽에 배치하는 것도 흉사로 인식되는 전쟁은 상례에 따라 오른쪽이 주된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쟁에 승리하였더라도, 전쟁 자체는 부득이 하여 어쩔 수 없이 행하는 흉사이다. 흉사 중에서도 흉사이다. 사람이 대량으로 살상되기 때문이다. 이런 흉사에서 승리하였다고 그것을 기뻐한다면 마음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겠는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은 세상을 차지할 수 없을 뿐더러 세상을 차지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천하를 관장하는 사람은 전쟁에 승리하고도 다른 방도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발생했던 전쟁을 상례에 따라 마무리하는 것이다.
[道德經 第31章]
夫兵者 不祥之器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부병자 불상지기 물혹오지 고유도자불처)
무릇 병기란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어서, 어떤 것이나 모두 그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자는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군자거즉귀좌 용병즉귀우)
군자는 평상시에는 왼쪽을 높이고, 전쟁을 할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병자 불상지기 비군자지기 부득이이용지 염담위상)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어서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그것을 쓰는데, 초연하고 담담함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다. 恬(편안할 염)淡(맑을 담): 욕심이 없고 담백함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승이불미 이미지자 시락살인)
승리하고도 그것을 이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만일 그것을 이름답게 여긴다면, 살인을 좋아하는 꼴이 된다.
夫樂殺人者 則不可得志於天下矣(부락살인자 즉불가득지어천하의)
살인을 좋아하고서야 천하에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吉事尙左 凶事尙右(길사상좌 흉사상우)
길사에는 왼쪽을 높은 자리로 하고 흉사에는 오른쪽을 높은 자리로 한다.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편장군거좌 상장군거우 언이상례처지)
편장군이 왼쪽에 자리 잡고, 상장군이 오른쪽에 자리 잡는 것은 상례에 따라 자리를 잡는다는 말이다.
殺人之衆 以哀悲泣之(살인지중 이애비읍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비통한 마음으로 읍하는 것이다.
戰勝 以喪禮處之(전승 이상례처지)
전쟁에 이겼으면 상례를 갖춰 마무리한다.
도가 이름이 없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내용을 의미로 갖는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개념화나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름[名]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 즉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본질을 담아내는 개념화 작용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름은 세계의 어떤 부분을 어떤 내용(의미, 본질) 안에 가두고 정지시키며 구분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세계는 모든 것이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항시 변화 과정 속에 있다. 일정한 본질을 내용으로 해서 가둘 수도 없고 한 순간 정지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런 원칙을 나타내 주고 있는 도를 이름으로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되는 대립항들이 서로 꼬여서 되어 있는 자연의 운행 원칙은 유약하며 여성적이고 은밀하게 작용한다. 도를 대상화시켜서 볼 때, 우리는 흔히들 그것이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는데, 도를 초월적인 것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너무 크고 너무 높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미약하고 너무 낮게 있어서이다. 도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도는 태양처럼 밝거나 산처럼 고원
하거나 불처럼 강렬하지 않다. 물처럼 유약하며 달처럼 은미하고 계곡처럼 낮고도 낮다.
[道德經 第32章]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질박하고 비록 미약하지만, 이 세상 아무 것도 그것을 신하로 부릴 수 없다.
- 도가 이름이 없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내용을 의미로 갖는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개념화나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 ‘박’은 도의 또 다른 표현이자, 도라는 자연의 원칙을 체득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도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이자 자연의 존재 형식이다. 모든 인위적 조작 이전의 것이며 제한과 가공이 가해지기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기 전의 상태라는 의미를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하여 노자는 ‘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 도는 비록 미약하게 작용하지만, 사실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와 모든 가치를 관장하고 있는 진짜 강한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도를 대상화하여 부릴 수 없다. 오히려 도의 지배를 받으며 도의 운행원칙 위에 잠시 떠 있는 것이 세계의 모습이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통치자가 그것을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스스로 모여들어 복종할 것이다.
- 통치자가 이런 원칙, 즉 도가 함축하는 의미를 잘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그의 백성이 된다.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천지상합 이강감로 민막지령이자균)
하늘과 땅이 만나 단 이슬을 내리듯이, 백성들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안정된다.
- 마치 거대한 자연 안에서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만나 아주 자연스럽게 단 이슬을 내리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인위적으로 정해진 명령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의 존재 원칙을 적용하면 백성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안정된다.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 所以不殆(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지지 소이불태)
제한을 하고 나서야 이름이 있게 된다. 이름이 이미 있게 된 바에야 또한 한계를 알아야 한다. 한계를 아는 것이 위태롭게 되지 않는 까닭이다.
- 제制는 ‘제도’를 가리킨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제도를 만들고, 명분을 만들어 직책을 나눈다. 명名은 ‘구분’, ‘명분’, ‘직책’ 그리고 ‘개념’ 등의 의미와 함께 쓰인다. 이 세상은 관계와 변화 속에 있기 때문에, 개념[名]으로 고정하거나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 제도를 운용할 필요 때문에 ‘명’을 사용하게 된다. 이 ‘명’에 대해서 노자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공자는 다분히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 어쩔 수 없이 명분에 맞게 직책이 이미 정해졌으면 그 직책의 범위 안에서 어디까지는 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할 수 없다는 것 또는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 한계를 잘 지켜야 한다. 그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잘 지키면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여기서 노자는 공자식의 정명正名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몫만큼의 케이크에 만족하고, 또 자기 몫만큼의 케이크만을 먹는 소박한 정신을 말하고 있다. 자기 몫의 케이크를 확보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몫의 케이크를 확보하려 한다는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기 몫의 케이크를 무한정한 크기로 키우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인간은 자기의 능력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알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 인간의 순수한 자연성을 파괴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욕망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또 이 욕망은 대개 인위적 조작에 의해 형성된 어떤 가치 체계의 지배와 인도를 받으면서 분출된다. 말해야 할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 무슨 주장을 한다든지, 나서야 할 입장에 있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나서는 일 등은 모두 자기의 한계를 망각한, 위험을 부르는 일들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거나 부여 받은 권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자신이 처한 위치를 망각하거나 넘어서는 행위를 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할 위치가 아닌데 특정한 명분에 기대서나, 아니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한 연유로 함부로 하다가 대개는 단명으로 끝난다.
바로 앞 제32장에서도 “한계를 아는 것이 위태롭게 되지 않는 까닭이다”(知止 所以不始)라고 한 바 있다.
얼른 보면 구체적인 효과를 바로 보여 주는 것 같은 지인知人-승인勝人-강행强行의 방식보다는, 조금 유약해 보이거나 소극적인 것 같지만 자지自知-자승自勝-지족知足의 방식이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위대한 효과를 담보해 준다는 것이다.
[道德經 第33章]
知人者智 自知者明(지인자지 자지자명)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 ‘지인’이란 일정한 체계를 근거로 하여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가리키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똑똑하다 내지는 지혜롭다고 한다.
- ‘자지’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외부로 향한 시선으로 타인을 아는 것은 단순히 지혜롭다 하고, 내부로 향한 시선으로 자신을 아는 것을 명철하다고 하였다. 우리가 밖에 있는 타인까지 가는 데에는 일정한 거리를 지나야 하는데, 이 일정한 거리 사이에 우리의 시선이 통과해야 하는 문화 체계 내지는 전통의 기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그런 ‘구멍’을 통해서만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도달하는 길에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걸러 주는 그물망을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 ‘자지’는 바로 인위적 체계가 덧씌워지기 전의 자신의 모습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승인자유력 자승자강)
타인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데 불과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
知足者富 强行者有志(지족자부 강행자유지)
족함을 이는 자가 진정한 부자이며, 억지로 행하는 자는 특정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도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만물 존재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원칙으로 기능하면서도 자신은 어떤 본질을 함장하고 있는 실존채로서 있지 않음을 말하면서, 인간의 삶이나 통치 행위에서도 이것을 모델로 하여 앞에서 주도적으로 주재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자신에게 이미 있는 진정한 위대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道德經 第34章]
大道氾兮 其可左右(대도범혜 기가좌우)
대도는 넓어서 왼쪽이나 오른쪽이 모두 가능하고,
萬物恃之以生而不辭 功成不名有(만물시지이생이불사 공성불명유)
만물이 모두 그것에 의지하여 살고 있지만 귀찮아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이름을 갖지 않는다.
- 모든 만물이 그것을 근거로 생겨나거나 살지만, 도는 모든 만물이 자신을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포용성이 있기 때문에 도는 그런 큰 기능을 하면서도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명성을 구축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보이는 명名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명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그가 이룬 공功을 특정한 어떤 내용으로 정의 내리거나 개념화할 수 없다는 뜻이 더욱 깊이 들어 있다. 도를 개념화할 수 없다는 뜻이다.
衣養萬物 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의양만물 이불위주 상무욕 가명어소)
만물을 양육하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고 항상 무욕하다. 그래서 작다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 (왕필) 만물은 모두 도를 통해 생겨나는데, 이미 생겨난 후에는 무엇을 통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항상 무욕할 때, 만물이 모두 제 자리를 잡기 때문에, 마치 도가 사물에게 이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다는 이름을 불이는 것이다.
萬物歸焉 而不爲主 可名於大(만물귀언 이불위주 가명어대)
만물이 모두 그곳으로 귀속되어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크다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 (왕필) 만물은 모두 도에 귀결되어 생겨나는데,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작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크다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이기종불자위대 고능성기대)
절대 스스로를 크게 만들려고 하지 않기에, 그래서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도의 모습에 대한 설명이다.
대상大象은 도의 모습이자 자연의 운행 모습이다. 그것을 모델로 사용하여 하는 통치나 그것을 모델로 하여 건설한 문명은 아주 위대한 효과를 안겨 준다. 자연의 운행 모습을 한마디로 축약해서 하는 말이 바로 ‘무위無爲’이다. 따라서 이 구절(집대상執大象 천하왕天下往)은 노자 철학의 정수를 드러내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또 다른 표현이다.
도는 맛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아무리 써도 다해지지 않는 것이다.
도는 이 세계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칙을 가리키는 범주이기 때문에 관계와 변화의 맥락 안에 있다. 그래서 특정한 의미나 특정한 맛 혹은 특정한 소리로 고정될 수가 없다. 일반적인 각도에서 이것은 특정한 맛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무미無味일 수밖에 없다.
도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특정한 범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천도무친”인 것이다.
[道德經 第35章]
執大象 天下往(집대상 천하왕)
도의 위대한 원리를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 모두가 그리로 돌아간다.
往而不害 安平太(왕이불해 안평태)
그리로 돌아가서는 서로 해를 입히지 않으니, 태평한 세상이구나.
- 자연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모습을 모델로 하고 있는 공간으로 돌아가 있는 백성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을 유발하지 않게 되기에 바로 태평해진다.
樂與餌 過客止(악여이 과객지)
듣기 좋은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이라도 멈추게 하지만,
道之出言 淡乎其無味(도지출언 담호기무미)
도는 언어로 표현해 봐도 심심하니 아무런 맛도 없다.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부족기)
그것은 보려 해도 보여질 수가 없고, 그것은 들으려 해도 들릴 수가 없으며, 그것은 사용해도 다해질 수가 없다.
- ‘용用’과 대구를 이루는 언言이나 시視 그리고 청聽은 의지를 가지고 특정한 방향이나 특정한 범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用’도 특정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도는 관계와 변화 속에 있기 때문에 특정한 모습이나 내용으로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즉 일정한 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기旣’도 “다하다”는 의미를 나타내지만, 그것이 특정한 범위나 특정한 용도로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도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특정한 범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천도무친”인 것이다.
이장은 세계의 존재 형식이나 우주의 운행 원리를 참고로 하여 삶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유/무, 장/단 등과 같은 두 계열 사이의 관계와 반대편을 향한 운동 경향으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는 기본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삶의 영역에서 운용하려 하고 있다. 우주의 존재 형식이 원래[固] 그러하고 사물들의 성질이 본래[固] 그러하다는 것이다. 제22장의 “곡즉전曲則全”이 우주의 운행 원리[道]를 설명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우주의 원리를 근거로 하는 이런 지혜를 ‘미명微明’이라 부르고 있다. 미微는 幽와 같은 글자이다. 감춰져 있음, 잠복해 있음을 나타낸다. 징조라고 할 수도 있다. 흡歙에는 장張이 감추어져 있다. ‘흡’이 겉으로 드러나[明] 있으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장’이라는 성질이 잠복[微]해 있다. 똑같이 ‘장’이 밝게 혹은 현실적으로 드러나[明] 있다면 거기에 ‘흡’이라는 성질이 아주 유미한 상태의 징조로 잠복해있다는 것이다. ‘흡’이 ‘흡’으로만 있지 않고, 마찬가지로 ‘장’도 ‘장’으로만 있지 않다. 이런 원리를 체득하고 그것을 삶의 영역에서 운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바로 ‘미명’이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존재 형식과 인식의 원리 그리고 삶의 방식이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노자의 핵심 의도는 자연의 원리[道]를 삶에서 운용하는 것인데, 도가 작용하는 모습은 매우 유약하다. 자연은 살아 있는 자연이다. 유약은 또 살아 있는 것들의 모습이다. 도를 상징하고 있는 대표적 자연물 가운데 하나는 물이다. 물은 자연물 가운데서 가장 유약한 것이다. 미명의 인식을 체득한 사람은 부드럽고도 유연하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내용의 체계를 앞장 세워서 모든 백성들을 거기에 통합하려는 문명은 강하고 굳건하다. 그러나 노자가 보기에 이런 문명은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갈등 요소를 함장하고 있다. 이런 문명에서는 이상으로 설정된 체계로 통합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문명에서는 강하고 굳건하며 남성적인 것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유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노자의 이 말은 자연의 원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노자 자신이 기획하는 부드러움과 모성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문명이 공자나 법가식의 남성적인 문명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자신감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道德經 第36章]
將欲歙之 必固張之(장욕흡지 필고장지)
장차 접고 싶으면, 먼저 펴 주어야한다.
將欲弱之 必固强之(장욕약지 필고강지)
장차 약화시키고 싶으면, 먼저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將欲廢之 必固興之(장욕폐지 필고흥지)
장차 폐지하고 싶으면, 먼저 잘 되게 해 주어야 한다.
將欲奪之 必固與之(장욕탈지 필고여지)
장차 뺏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한다.
是謂微明(시위미명)
이것을 미명이라고 한다.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不可以示人(어불가탈어연 국지리기불가이시인)
고기는 물을 떠나면 안 되고,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들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 물고기는 연못 속에 에 푹 잠겨 감추어져 있으면서 좋은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깊이 잠겨 있어야 할 물고기룰 밖으로 꺼내 보이거나 스스로 연못을 떠나 밝은 곳으로 나와 버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연못은 나라를 상징하고, 물고기는 ‘이기利器’를 상징한다. 국가의 ‘이기’는 나라 안에 푹 잠겨서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시행되어야 제대로 기능을 하지,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면 나라는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 ‘이기利器’는 정면으로 기능하는 도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규, 규정, 명령, 형벌 등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언어 체계로 명문화되어 있으면서 금방 한계에 도달하여 궁색해진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가지고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하거나 인도하면 안 된다.
오늘의 37장까지가 도덕경의 절반인 도경 부분이다. 38장부터는 덕경으로 불리는 부분의 시작이다.
무위라는 관념은 ‘무친,’ ‘불인,’ ‘불언,’ ‘무명,’ ‘불욕’ 등과 근친 관계로 둘러싸여 있다. 이 무위는 그것이 낭만적 행위이거나 미학적 행위여서 정당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무불위라는 지대한 효과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정당하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닐 뿐더러 멋대로 한다는 뜻도 아니다. 거기에는 우주 원리를 체득한 후에, 그것을 삶의 영역에서 실천한다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도의 운행 모습은 바로 무위이다. 그래서 통치자가 그 원리를 모델로 하여 통치한다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된다. 일정한 문화적 내용이나 체계를 정점으로 하고 거기에 백성들을 모두 집중시키려 하는 유가나 법가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유가는 백성들을 전통에 일치시키려 하고, 법가는 백성들을 법이라는 체계 안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이런 두 가지 교화는 인위적 조작에 불과하다. 교화의 초점을 특정한 내용에다 맞추지 말고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교화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교화하려 하는 생각이나 욕망 내지는 특정한 의욕이 생겨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은 특정한 문명 체계를 이미 견지하겠다는 뜻의 표현이다. 또한 만일 이렇게 된다면 노자는 아무런 이름이 없는 통나무와 같은 순박함으로 그것을 억누르겠다는 뜻이다. 특정한 이름이 붙기 이전의 통나무 같은 성질로 그것을 억누른다면 거기에는 욕망이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안정되거나 올바르게 된다.
[道德經 第37章]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 도는 항상 무위하는 형식으로 운동하지만, 모든 것을 다 이뤄 내는 무한한 결과를 보장한다. 체계나 의지 혹은 욕망이라는 그물망을 통하여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위’라면, 그런 그물망을 최대로 약화시키거나 무화시켜서 하는 행위가 바로 무위이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통치자가 만일 그 이치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교화하려 하거나 의욕이 일어나면 나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순박함으로 그것을 억누를 것이다.
無名之樸 夫亦將無欲(무명지박 부역장무욕)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순박함에서는 또한 욕망도 없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불욕이정 천하장자정)
욕망하지 않은 채 고요하게 있으면 이 세상은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오늘부터 도덕경의 후반부 「덕경」 부분이다. 전반부인 「도경」은 주로 세계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칙에 대한 것이고, 「덕경」에서는 그것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운용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노자는 여기서 도道와 덕德과 인仁과 의義 그리고 예禮 사이의 질적 차이를 분명히 언급하였다. 인·의·예는 노자가 제시하는 문명보다 한 차원 낮은 문명의 주요 기둥들이다.
노자는 현실에서 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도에 합치하는 영역을 상덕으로, 그 도에서 벗어난 영역을 하덕으로 부르고 있다. 바로 인·의·예는 하덕의 범위에 속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무위이무이위無爲而無以爲’한 것으로 묘사되는 상덕을 설명한 후에, 하덕에 속하는 인·의·예에 대하여 설명을 이어간다.
그래서 상덕을 실현하려면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기 전에 우리에게 있었던 중후함과 그 참된 상태를 가까이 해야지, 인위적 조작으로 얄팍하게 재단된 체계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으로 설정되어 저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그런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기 전에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진 이것을 취해야 한다(去彼取此). 제3장에서는 배와 뼈로 우리에게 원래 있는 중후함과 참됨을 은유하고, 마음과 의지로 그 얄팍한 상태를 은유하였고, 제 12장에서는 전자를 배로, 후자를 눈으로 비유하였다.
취차取此(취해야 할 것): 후厚·실實 충忠·신信 복腹·골骨 복腹 자지自知·자애自愛
거피去彼(버려야 할 것): 박薄·화華 예禮 심心·지志 목目 자견自見·자귀自貴
공자를 위시한 儒家나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식의 근대 철학은 우리의 저 앞이나 혹은 우리 위에다 우리가 가야 할 이상으로 어떤 체계를 설정해 놓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추종하게 한다. 그래서 저 멀리 설정되어 있는 체계와 이상에 다가갈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는 학學과 습習이 강조되며, 우리의 본성도 저쪽彼을 향하여 확충해야할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노자는 인위적으로 조직된 그런 이상은 우리에게 권력으로 행사될 뿐, 우리에게 전면적인 성과를 약속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본성도 저 멀리 매달려 있는 이상이나 체계를 향해 나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있는 본성을 향하여 이쪽此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道德經 第38章]
上德不德 是以有德(상덕부덕 시이유덕)
가장 훌륭한 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 ‘상덕上德’은 가장 훌륭한 덕이며, 도가 구체화된 모습이다. 그러므로 ‘상덕’은 도의 운행 모습을 그대로 체화한 것이다,
- ‘부덕不德’의 덕을 특정한 의미로 개념화하거나 정의 내려서 형식화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오히려 진정한 덕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下德不失德 是以無德(하덕부실덕 시이무덕)
수준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덕이 없게 된다.
- 수준 낮은 덕[下德] 즉 인仁 • 의義 • 예禮는 특정한 의미로 규정되어 그것을 확고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며, 그래서 오히려 덕을 잃게 된다.
上德無爲而無以爲(상덕무위이무이위)
가장 훌륭한 덕은 무위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
- 가장 훌륭한 덕은 도의 존재 형식을 체화하여 도의 모습처럼 무위한다. 무위한다는 것은 특정한 체계의 인도를 받거나 목적 혹은 욕망 등을 근거로 하지 않는 행위이다.
上仁爲之而無以爲(상인위지이무이위)
가장 훌륭한 인은 그것을 행하되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
- 인은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로서 인위적으로 배양된 덕목이 아니다. 인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는 무슨 문화적 체계나 목적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親親] 같은 것이다.
인이 훌륭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천도의 영역[天道無親]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유위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그물망을 거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으로 발현된다는 의미에서 “무이위無以爲”이다.
上義爲之而有以爲(상의위지이유이위)
가장 훌륭한 의는 그것을 행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한다.
- 의는 유위의 영역에 있는 덕목이다. 그것은 또한 예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의는 인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고안된 장치이다. 의는 바로 인의 보장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의위有以爲”이다.
上禮爲之而莫之應(상례위지이막지응) 則攘臂而扔之(즉양비이잉지)
가장 훌흉한 예는 그것을 행하되 따라오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끌어당긴다.
- 예는 구체적인 행위 규칙이다. 예는 인의 실현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질서 원칙이기 때문에, 현대의 법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그래서 그 예를 문란하게 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외부적으로 강제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 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 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 失義而後禮(실의이후례)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며, 인을 잃은 후에 의이고, 의를 잃은 후에야 예이다.
夫禮者(부례자) 忠信之薄(충신지박) 而亂之首(이란지수)
대저 예라는 것은 진실하고도 신실한 마음이 얄팍해진 결과이며 혼란의 원인이다.
- 예는 행위 규칙이다. 인간이 걸어가도록 정해 놓은 길이다. 규칙이나 길을 정해 놓은 이유는, 규칙을 정해 놓지 않고는 이미 참된 상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위적 조작으로 형성된 체계의 훈도를 받기 이전에 가지고 있는 후덕한 정서가 가장 좋은 것이며, 인위적 조작의 극치인 예는 이런 진실하고도 신실한 삶이 왜곡된 결과로 생긴 것이다. 『예기』에서조차도 예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근본은 바로 충忠과 신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忠信 禮之本也 義理 禮之文也) 문文을 특징으로 하는 주례周禮는 실질적으로 문화 근본으로서의 충과 신을 파괴하게 되고, 오히려 그것이 사회 분쟁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가 “진실하고도 신실한 마음이 얄팍해진 결과이며 혼란의 원인이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효라는 예는 효라는 관념이 아직 필요 없을 때 우리에게 있었던 진정성 즉 충과 신이 얄팍해진 결과로 나온 것일 뿐이다.
- 예의 목적은, 그 예를 부단히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을 진정성으로 인도하려는 것이지만, 일단, 예禮가 정해지면 사람의 관심은 그 형식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옮겨 간다. 인간은 형식화되고 진정성은 뒤로 밀려난다. 결국 그 예의 체계에 편입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으로 나뉘고, 그렇게 계층이 나뉜 것이 결국은 갈등의 단초로 기능하게 된다.
前識者(전식자) 道之華(도지화) 而愚之始(이우지시)
앞서 있는 인식 체계는 도가 꾸며진 것이자 어리석음의 단초이다.
- ‘전식前識’은 이미 정해져서 우리 앞에 있는 인식 체계로서, 대상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자고 사회적으로 이미 합의되어 우리 앞에 정해져 있는 문화 체계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해진 체계는 자연성으로 부여된 원래 모습이나 진정성이 유지되고 있는 도의 상태가 아니라, 그런 도의 상태가 재단되고 꾸며진 모습이다. ‘전식’의 대표적 예例가 바로 인仁이고 의義이며 예禮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와 대상 사이에서 장막이나 그물망으로 작용하니,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세계와 관계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바보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是以大丈夫處其厚(시이대장부처기후) 不居其薄(불거기박)
이렇기 때문에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 상덕을 실현하려는 꿈을 가진 대장부라면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기 전에 우리에게 있었던 중후함과 그 참된 상태를 가까이 해야지, 인위적 조작으로 얄팍하게 재단된 체계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處其實(처기실) 不居其華(불거기화)
그 참된 모습에 처하지 그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으로 설정되어 저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그런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기 전에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진 이것을 취해야 한다.
이 세계는 모두 도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바로 도를 가리킨다. 존재의 영역이나 삶의 영역이나 인간의 이성에 포착되지 않은 영역까지 모두가 도를 근본으로 해서 있다. 여기서 ‘하나’로 나타내지는 도는 순수한 단일성의 근원이 아니라, 대립되는 두 면이 묘하게 공존하는 형식을 의미한다, 새끼줄 같은 ‘하나’이다. 이 세계가 대립면 끼리의 관계로 되어 있고 또 대립면을 향해 향상 움직이고 있는데, 어느 단계가 참 좋다고 해서 그 대렵면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것에만 머무를까봐 경계한다. 하나의 내용, 하나의 모습으로 고착화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귀함은 비천함을 뿌리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그러므로 통치자가 고孤, 과寡 그리고 불곡不穀 등 자신을 미천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꾸는 둥의 노력으로 명예를 지키려한다면 전체 명예를 잃게 될 것이다. 옥 모양은 화려하고 희귀해서 사람들이 귀한 것으로 봐주고, 돌 모양은 평범해서 사람들이 천하게 본다. 옥처럼 드러내지 말고, 돌처럼 소박하게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라.
[道德經 第39章]
昔之得一者(석지득일자)
옛날부터 하나를 얻어서 된 것들이 었다.
天得一以淸(천득일이청) 地得一以寧(지득일이녕) 神得一以靈(신득일이령) 谷得一以盈(곡득일이영) 萬物得一以生(만물득일이생) 侯王得一以爲天下正(후왕득일이위천하정)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안정되며,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험하고, 계곡은 하나를 얻어서 채워지며,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살고, 통치지는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올바르게 한다.
其致之(기치지)
경계하는 의미로 그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天無已淸 將恐裂(천무이청 장공렬) 地無已寧 將恐發(지무이녕 장공발) 神無已靈 將恐歇(신무이령 장공헐) 谷無已盈 將恐竭(곡무이영 장공갈) 萬物無已生 將恐滅(만물무이생 장공멸) 侯王無已貴高 將恐蹶(후왕무이귀고 장공궐)
하늘이 끊임없이 청명하기만 하려고 하면 장차 무너져 내릴 것이고, 땅이 끊임없이 안정을 유지하려고만 하면 장차 쪼개질 것이며, 신이 끊임없이 영험하려고만 하면 장차 사라지게 될 것이고, 계곡이 끊임없이 꽉 채우려고만 들면 장차 말라 버릴 것이며, 만물이 끊임없이 살려고만 하면 장차 소멸하게 될 것이고, 통치자가 끊임없이 고귀하고 높게만 행세하려 들면 장차 실각하게 될 것이다.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고귀이천위본 고이하위기)
그러므로 고귀함은 비천함을 뿌리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是以侯王自謂孤寡不穀(시이후왕자위고과불곡)
이 때문에 통치지는 스스로를 고, 과 그리고 불곡 동으로 낮춰 부르는 것이다.
此非以賤爲本邪? 非乎?(차비이천위본사비호)
이것이 비천함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렇지 않은가?
故致數譽無譽(고치수예무예)
그러므로 몇 가지 명예를 지키려 하다가는 명예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불욕록록여옥 락락여석)
옥처럼 고귀해지려고 하지 말고 돌처럼 소박하라.
노자철학의 일반적 이해는 도道(무형無形,무성無聲,무명無名)→무無→유有→만萬, 또는
도道(무형無形,무성無聲,무명無名)=무無→유有→만萬物, 와 같이 수직 단계적으로 하강하는 것인데, 이런 수직 하강적인 발생론 도식은 회남자나 왕필의 철학도식은 되겠지만 노자의 도식은 아니다.
노자에게는 유와 무가 같은 차원에서 얽히고설키어 공존하는 형식이 바로 도이다.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유와 무는 존재적으로 선후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차에서 공존한다. 이것은 노자가 자연을 대상으로 사고한 결과 도출해 낸 노자 철학의 핵심 구조이다.
노자의 도식: 유有 ↔ 무無 ▶▶ 도道
[道德經 第40章]
反者 道之動(반자도지동)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이 도의 운동 경향이고
弱者 道之用(약자도지용)
유약한 것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天下萬物生於有(천하만물생어유)
만물은 유에서 살고
- 생生자를 ‘발생시키다’ 혹은 ‘낳다’로 해석하면 바로 모순이 도출된다. 즉 천하의 만물 자체가 유인데 어떻게 유에서 천하만물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노자 철학에서 유는 눈에 보이는 만물을 통칭하는 범주이자, 구체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 모든 것을 표시하는 범주이다. 이 구절도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有 名萬物之母:제1장)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 세계의 만물은 유라는 범주의 테두리 안에서 산다.” 즉 “유라는 범주의 테두리 안에 있다.”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有生於無(유생어무)
유는 무에서 산다.
- 유는 무라는 범주에다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면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는 무 때문에 유가 되니, 유는 무에 기대어 산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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