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언어적으로 체계화하는 일과 친숙하지 않다. 도가 초월적이거나 초과적이거나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언어로 담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가 관계와 변화 속에 있음을 드러내 주는 범주인 도에는 언어적 재단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면으로 기술하는 언어 행위에 익숙한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을 신념화하여 그 속에 함몰해 있는 수준 낮은 지식인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중간 단계의 지식인은 긴가민가하고, 자신의 깊은 지식으로 자신의 성숙까지 이루어 내어 넓은 포용성을 갖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은 그 진리의 빛을 바로 알아차리고 삶에서 운용하거나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
제39장에서는 하늘이나 땅이 도라는 원칙을 근거로 해서만 맑고 청명해질 수 있지만, 도가 반대되는 두 대립면의 꼬임으로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원칙임을 안다면 청명함 한쪽만 유지하려 하거나 안정한쪽만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을 했다. 그래서 고귀한 자리에 있는 통치자는 자신의 고귀함이 비천함을 뿌리로 하고 있음을 체득해야만 한다. 그런 원리를 그 다음 장인 제40장에서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이 도의 운동 경향이다”(反者道之動)와 “유약한
것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로 총결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언어로 담기 어려운 도를 언어로 담아서 서로 교환할 때 빚어지는 풍경을 세 단계 지식인의 각각 다른 반응을 가지고 묘사하였다. 이 세계의 진상에 대해서 각각 다른 수준으로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런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진상과, 그것을 체득한 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진리[道]를 체현해 주고 있는 사태의 다양한 모습이자 그것을 체득한 덕성들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道德經 第41章]
上士聞道 勤而行之(상사문도 근이행지)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하지만,
中士聞道 若存若亡(중사문도 약존약망)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下士聞道 大笑之(하사문도 대소지)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
不笑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그런 부류가 비웃지 않는다면 오히려 도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고건언유지 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밝은 길은 어둑한듯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며,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고, 가장 훌륭한 덕은 계곡과 같으며, 정말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정말 넓은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고, 정말 참된 것은 변질된 듯하다. 纇(실마디 뢰), 偸(훔칠 투), 渝(변할 투)
- 공자가 대립면들 사이를 특정한 의미나 내용을 중심으로 갈라놓는 것과 달리, 노자는 대립면들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그 흐릿한 경계마저도 없애 버린다. 이것은 본질적 내용으로 직분과 직분 사이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는 작업을 기초로 하는 유가와 달리, 모든 존재물들이나 가치들에 본질이 있음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반대편 것과의 관계나 반대편을 향한 운동으로 읽어내는 노자의 세계관이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밝은 길이 밝은 길로 있지 못하고 어둑한 곳으로 의미가 바로 전이된다. 정말 깨끗한 것도 정말 깨끗한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바로 더러운 것과의 관계 속으로 해체되어 버린다. 정말 참된 것은 그 순수성을 지키는 것으로 정당화되지 못하고, 변질이라는 전혀 반대의 상황으로 스며들어 버린다.
大方無隅 大器免成 大音希聲 大象無形(대방무우 대기면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고, 정말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으며, 정말 큰 음은 소리가 없고, 정말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 大器免成: 진정으로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모양으로 결정되는 완성의 단계가 없다는 뜻이다.
道隱無名 夫唯道 善始且善成(도은무명 부유도 선시차선성)
도는 감추어져서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만이, 잘 시작하고, 잘 끝낼 수 있다.
- 도는 자연의 운행원칙이다. 전체 조화가 유지되는 관계망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작시킬 수 있고, 또 자연스럽게 종결 지워 줄 수도 있다. 도를 체득한 사람도 반대되는 두 대립면을 모두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시작하거나 마침에 있어 전혀 흠을 남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상사上士이다. 이 장은 상사로 시작해서 상사의 경지로 끝을 내고 있다.
이 세계는 유/무, 음/양, 장/단 등의 대립면들이 반대편으로 향하는 경향을 매개로 서로 꼬여서 존재한다. 세계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혹은 그 원칙을 나타내는 범주가 바로 도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가치나 사물에는 상대되는 짝이 있지만, 상대되는 이 짝 들이 꼬여서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원칙, 즉 도만큼은 짝을 가질 수 없다.(獨立不改:제25장) 그것만큼은 하
나, 즉 일一이다. 그런데 이 일一은 순수한 단일성으로서의 일一이 아니라, 두 대립면이 잡종처럼 섞여 있는 일一이다. 새끼줄처럼 꼬여 있는 일一인 것이다. 그래서 ‘도생일道生一’은 도가 모자母子 관계에서처럼 일一을 발생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도가 일一이라는 관념 속에서 산다, 도가 일一이라는 관념을 이룬다는 뜻이다.
세계가 대립면들 사이의 묘한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모르고,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强梁者)은 종말이 좋지 않다. 이런 태도로 통치하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정복당하거나 실권하여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많은 말들이 통치자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道德經 第42章]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도는 일을 내고, 일은 이를 살리며, 이는 삼을 기르고, 삼은 만물을 이룬다.
- 일은 대립되는 두 면이 꼬여 있는 새끼줄 같은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가닥으로 꼬여 있는 일 안에는 이미 이가 들어 있다. 그런데 대립되는 두 면은 각각 따로 존재하고 따로 살림을 차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 즉 일로 표현되는 원칙의 지배를 받고 산다, 각각의 둘은 일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의미와 존재성을 부여받고 산다.
- 대립되는 두 면의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삼은 음과 양 두 기가 조화를 이뤄 빚어낸 ‘어떤 것’이다. 장長과 단短이라는 두[二] 대립면이 만나 ‘길이’[三]를 만들어 내고[生], 음音과 성聲의 두[二] 대립면이 조화를 이뤄 ‘음성’[三]을 이룬다. [生]
- 이런 여러 ‘삼’들이 합쳐진 것이 바로 만물이다. 달리 말하면, 여러 ‘삼’들을 합해 놓은 것을 만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형식으로 있는 존재 상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만물은 음을 진 채 양을 품고 있는데, 두 기가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 것이다.
- 만물이 존재하는 형식이라는 것은 음/양이라는 두 대립면이 서로 충돌하여[沖氣] 어떤 균형 상태[和]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 일이라는 관념이 나오고 삼이라는 조화체가 나오며, 그 조화체들의 집합인 만물이 있게 된다.
- 대립되는 양편을 포함하는 도를 본받아서 하는 최고의 덕성들은 모두 그 반면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반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인지소오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위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특히 고孤와 과寡 그리고 불곡不穀이지만, 오히려 왕은 그것들로 자신의 호칭을 삼는다.
- 일반인들은 모두 부모가 없거나 짝이 없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데, 왕은 오히려 그런 비천한 상태를 가지고 자신의 호칭을 삼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고귀한 것은 비천한 것을 뿌리로 하고 있음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고물혹손지이익 혹익지이손)
그러므로 만물은 떨어내려 해도 오히려 더해지는 경우가 있고, 더하려 해도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人之所敎 我亦敎之(인지소교 아역교지)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나 역시도 가르친다.
- 나와 다른 내용을 가지고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나는 오히려 그들의 내용을 가르치기도 한다. 유학자들의 이론 체계가 노자의 그것과 극명하게 다르다 할지라도, 노자는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 범위 안으로 끌고 들어와 그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세계가 대립면들 사이의 묘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개방적 태도이다. 항상 자신을 반대편을 향해 열어 놓은 개방성을 볼 수 있다. 경박한 불자는 기독교도들을 비방하교 광신적 기독교도는 불자들을 배척하지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사이에는 상대방을 용인하는 고고한 관용이 흐르고 있다.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강양자부득기사 오장이위교부)
굳세고 강한 자는 좋게 죽을 수 없다. 나는 이런 이치를 가르침의 지침으로 삼는다.
- 세계가 대립면들 사이의 묘한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치를 모르고,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强梁者)은 종말이 좋지 않다. 이런 태도로 통치하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정복당하거나 실권하여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노자에게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 능력올 가진 것은 도이고 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은 부드럽다.(弱者道之用)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도를 상정하는 것으로는 대표적으로 물이 있다. 물은 도의 성질과 능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 노자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물은 낮고 더러운 곳으로 흐르고, 억지로 길을 내지 않으며, 일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곳에 골고루 퍼진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생육케 해 주고, 한 방울 한 방울을 부단히 떨어뜨려 돌이나 쇠붙이도 뚫어 버리며, 홍수가 나면 거대한 산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버리거나 허물어버린다.
세상에서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도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다는 말과 같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굳센 것을 이긴다고 하는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데, 자연의 이치 즉 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통찰이다.
[道德經 第43章]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견강한 것을 부린다. 馳騁(달릴치, 달릴빙: 말을 타고 달리는 것)
- 지유至柔, 무유無有, 불언不言은 모두 무위無爲의 다양한 형태들이다.
無有入無間(무유입무간)
형태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으로도 들어간다.
- 유有는 실루엣[徼]이 있는 것, 즉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과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구멍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구체적인 사물들 사이에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와 다른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세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吾是以知無爲之有益(오시이지무위지유익)
나는 이런 이치로 무위가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안다.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
불언으로 하는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가 있고, 무위가 얼마나 유익한지, 세상에 아는 이가 거의 없구나.
38장에서 거피취차에 대한 것 말하였다.
취차取此: 후厚·실實 충忠·신信 복腹·골骨 복腹 자지自知·자애自愛(취해야 할 것)
거피去彼: 박薄·화華 예禮 심心·지志 목目 자견自見·자귀自貴(버려야 할 것)
이장에서도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취차取此: 신身 신身 망亡 지지知止 지족知足(취해야 할 것)
거피去彼: 명名 화貨 득得 심애甚愛 다장多藏(버려야 할 것)
신身은 그냥 우리 몸이자, 우리 몸에 직접 붙어 있는 이치들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며 도의 각인이다. 가공되고 조작된 가치 이전의 생명력이다. 명名은 바로 가공이다. 특정 목적이나 이상을 위하여 조작되고 고정화된 이념 체계이다. 화貨는 재화인데, 그것은 특정 가치 체계에 의해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고 사람들은 귀한 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래서 제3장에서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들이 도적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족함을 알고 모르고는 계몽의 차원에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세계관과 밀접히 관련된다.
세상을 변화와 관계(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대편에 두거나 자신의 존재성올 양보하면서 가지는 관계)로 파악하는 세계관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추구해야 할 이상이 설정될 수 없고, 통일을 지향하지 않으며, 규범의 칼날이 무디고, 힘과 속도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런 세계관 안에서는 족함이나 멈춤 등이 훨씬 더 용이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나 가치에는 그것을 그것이게 해 주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에서는 통일성 안에 있는 독자성과 배타성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그 본질이 확충된 이상이나 이념이 누구나 합치해야 할 당위로 자리 잡고, 누구나 빠르고 정확하게 거기에 접근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누구도 다녀와 보지 못한 그 이상은 모든 구성원들의 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멈추지 않고 마냥 다가가야 한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는 만족을 알면 바로 낙오자가 되기 쉽다.
따라서 지족知足이나 지지知止 등과 같은 문제는 단순한 계몽 차원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세계관의 핵심에 닿아 있는 문제 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현대 세계의 모순을 딛고 나타난 소소한 문제들을 계몽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항상 그렇고 그런 문제가 끊이질 않는 것은 그런 소소한 문제들의 뿌리에 바로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道德經 第44章]
名與身孰親(명여신숙친)?
명성과 몸, 어느 것이 가까운가?
身與貨孰多(신여화숙다)?
몸과 재화, 어느 것이 소중한가?
- 다多는 여기서 ‘중시한다’[重]는 뜻이다.(다多, 중야重也: 『설문說文』)
得與亡孰病(득여망숙병)?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
- 얻는다는 것은 밖에 있는 가치나 재화들을 나에게로 끌어당겨 얻는 것이다. 잃는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들어와 나에게 쌓여 있던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이 구절들은 바로 명성과 재화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재고하게 하는 말이다. 명성이나 재화를 얻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놓아 버리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다.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이런 까닭에 애착이 심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쌓아 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장구할 수 있다.
38장에서 거피취차에 대한 것 말하였다.
취차取此: 후厚·실實 충忠·신信 복腹·골骨 복腹 자지自知·자애自愛(취해야 할 것)
거피去彼: 박薄·화華 예禮 심心·지志 목目 자견自見·자귀自貴(버려야 할 것)
이장에서도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취차取此: 신身 신身 망亡 지지知止 지족知足(취해야 할 것)
거피去彼: 명名 화貨 득得 심애甚愛 다장多藏(버려야 할 것)
신身은 그냥 우리 몸이자, 우리 몸에 직접 붙어 있는 이치들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며 도의 각인이다. 가공되고 조작된 가치 이전의 생명력이다. 명名은 바로 가공이다. 특정 목적이나 이상을 위하여 조작되고 고정화된 이념 체계이다. 화貨는 재화인데, 그것은 특정 가치 체계에 의해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으로 나뉘고 사람들은 귀한 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래서 제3장에서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들이 도적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족함을 알고 모르고는 계몽의 차원에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세계관과 밀접히 관련된다.
세상을 변화와 관계(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대편에 두거나 자신의 존재성올 양보하면서 가지는 관계)로 파악하는 세계관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추구해야 할 이상이 설정될 수 없고, 통일을 지향하지 않으며, 규범의 칼날이 무디고, 힘과 속도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런 세계관 안에서는 족함이나 멈춤 등이 훨씬 더 용이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나 가치에는 그것을 그것이게 해 주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에서는 통일성 안에 있는 독자성과 배타성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그 본질이 확충된 이상이나 이념이 누구나 합치해야 할 당위로 자리 잡고, 누구나 빠르고 정확하게 거기에 접근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누구도 다녀와 보지 못한 그 이상은 모든 구성원들의 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멈추지 않고 마냥 다가가야 한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는 만족을 알면 바로 낙오자가 되기 쉽다.
따라서 지족知足이나 지지知止 등과 같은 문제는 단순한 계몽 차원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세계관의 핵심에 닿아 있는 문제 들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현대 세계의 모순을 딛고 나타난 소소한 문제들을 계몽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항상 그렇고 그런 문제가 끊이질 않는 것은 그런 소소한 문제들의 뿌리에 바로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道德經 第44章]
名與身孰親(명여신숙친)?
명성과 몸, 어느 것이 가까운가?
身與貨孰多(신여화숙다)?
몸과 재화, 어느 것이 소중한가?
- 다多는 여기서 ‘중시한다’[重]는 뜻이다.(다多, 중야重也: 『설문說文』)
得與亡孰病(득여망숙병)?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인가?
- 얻는다는 것은 밖에 있는 가치나 재화들을 나에게로 끌어당겨 얻는 것이다. 잃는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들어와 나에게 쌓여 있던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이 구절들은 바로 명성과 재화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재고하게 하는 말이다. 명성이나 재화를 얻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놓아 버리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다.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이런 까닭에 애착이 심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쌓아 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장구할 수 있다.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 만족이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모두 상대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진정한 만족은 자신의 입장에 합당한 어떤 단계에서 족함을 알고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제33장에서 족함을 아는 사람을 진정한 부자라고 한 것이다.
노자에게는 지지知止나 지족知足이 모두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모두 일정 단계에서 분수를 알고 멈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제44장에서는 지족知足과 지지知止를 병치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칠 줄 모르는 욕망만을 쫓아 앞뒤 보지도 않고 내달으는 불쌍한 중생들이 새겨들어야할 말이다.
조操와 열熱‘은 한寒을 이기지만, 정靜은 한寒을 이기는 조操와 열熱을 이김으로써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최후의 승리자 청정淸靜이 바로 천하의 가장 올바른 모습, 혹은 최고의 기준이 된다. 청淸은 정靜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적인 모습이다.(탁이정지서청濁以靜
之徐淸: 제15장)
정靜은 『도덕경』 안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청정淸靜은 무위無爲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靜을 통해서 천하는 최고의 통치 단계인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저절로 안정되는” 단계에 들어설 수 있다.
[道德經 第45章]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대성약결 기용불폐 대영약충 기용불궁)
아주 잘 이뤄진 것은 결함이 있는 듯하지만, 그 작용은 어그러지지 않고, 아주 크게 채워진 것은 빈 듯하지만, 그 작용은 끝나지 않는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아주 똑바른 것은 굽은 듯하고, 아주 훌륭한 기교는 서툰 듯하며, 아주 훌륭한 논변은 어눌한 듯하다.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조승한 정승열 청정위천하정)
움직임은 한기를 이기고, 고요함은 열기를 이기니,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른 것이다.
[道德經 第46章]
天下有道 卻走馬以糞 天下無道 戎馬生於郊(천하유도 각주마이분 천하무도 융마생어교)
세상에 도가 실현되어 있으면, 전쟁에 쓰이던 말로 농사를 짓고, 세상에 도가 실현되어 있지 않으면, 말들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는다.
- 천하에 도가 실현되지 않아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빈번한 전쟁에 말들이 부족하므로 임신한 말까지 전쟁에 참여하여 전선에서 새끼를 낳게 된다.
罪莫厚於甚欲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죄막후어심욕 화막대어불지족 구막대어욕득)
죄로는 지나친 욕심이 가장 크고, 화로는 족함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크며, 허물로는 얻어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가장 크다.
- 부지족不知足이나 욕득欲得은 자신이 자리할 곳을 잃는 자(실기소자失其所者)이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는(거피취차去彼取此) 원칙에 비추어 보면 “버려야 할 저것”(거피去彼)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故知足之足 常足矣(고지족지족 상족의)
그러므로 만족을 앎으로써 얻어지는 만족 때문에 항상 만족스럽다.
- 족함을 알아야 한다. 만족이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모두 상대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진정한 만족은 자신의 입장에 합당한 어떤 단계에서 족함을 알고 멈추는 것이다.
노자가 자신의 철학 체계를 건립하는 기초 자료는 모두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다. 그 자연의 원리가 직접적으로 담겨 있는 자기 자체이다. 저 멀리 설정되어 있는 인위적 문화 체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세상과 관계할 때 인위적으로 설정된 체계를 매개로 해서 관계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이 장에서 호戶는 집의 문짝 혹은 출입구이고, 유牖는 창문이다. 사람은 이 출입구를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고, 이 창문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 출입문과 창문은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그래서 출입구와 창문은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그물을 상징하게 된다.
노자는 이 그물을 통과하는 절차 없이 세상과 관계하려고 한다. 그것이 허虛이며 무위無爲인 것이다. 그런데 주관과 객관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그물을 믿고 그것을 통과하여 멀리 나아가면 멀리 나아갈수록 세계의 참된 모습과는 점점 멀어져 진정한 인식의 폭이 그만큼 줄어든다.
그래서 이런 이치를 체득한 성인은 그런 원리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직접 해 보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대상에 대해서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무엇을 이룬다는 것이다.
[道德經 第47章]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불출호 지천하 불규유 견천도)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闚(엿볼 규)牖(들창 유)
其出彌遠 其知彌少
(기출미원 기지미소)
나간 것이 점점 멀어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든다.
是以聖人弗行而知 弗見而明 弗爲而成
(시이성인불행이지 불견이명 불위이성)
이런 이치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도를 행하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유가의 ‘학’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다. 도가의 지침서인 『도덕경』이 도道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것은 도가 철학 안에서 ‘도’가 그만큼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 놓인 그물을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켜서 결국 그것을 무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 놓인 그물을 무시하고, 그것에 의지함이 없이 세계와 관계하는 것이 바로 무위이다. 따라서 여기서 덜어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교육이나 관습 그리고 욕망 등의 인도를 받아 소지하게 되어, 세계와 관계하는 과정에서 통로로 사용하는, 일정한 체계를 약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존재 형식이나 그 운행 원리 위에 떠 있는, 이미 완전한 진실성과 참됨을 갖추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런데 인간은 인위적 조작으로 형성된 체계의 억압과 인도 속에서 자연성을 잃어간다. 그래서 우리에게 본래 있던 자연성을 손상시키면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인위적 조작들을 하나하나 제거해서 그 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최고의 상태는 인위적 조작이 아직 닿기 이전의 갓난애[적자赤子, 영아嬰兒] 상태인 것이다.
일[사事]은 욕망과 의지의 결정체이고, 욕망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의 질주이다. 따라서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무사無事]은 특정한 의지나 욕망을 갖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위’이다.
[道德經 第48章]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구나.
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은 일이 없다.
取天下 常以無事
(취천하 상이무사)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일거리를 없애기 때문이다.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그래서 일거리를 만들면 천하를 차지할 수가 없다.
성인이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자연의 원리 안에서 완전히 해체한 채, 아무런 의지나 아무런 체계를 견지하지 않은 채 통치에 임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허虛의 상태이며 무욕無欲이자 무명無名이고 무사無事이다. 결국은 무위無爲의 모습이 된다.
성인에게는 신뢰의 여부 혹은 선善·불선不善을 구별하는 기준이 이미 없다. 자신에게 특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선·불선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선하게 대하고, 신信·불신不信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가지고 대한다. 이렇게 하면 결국 이 세상에 선의 덕이 실현되고 신뢰의 덕이 실현된다.
[道德經 第49章]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성인은 향상 자신의 마음을 갖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다.
善者 吾善之 不善者 吾亦善之
(선자 오선지 불선자 오역선지)
착한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착하게 대한다.
德善
(덕선)
그러면 세상의 덕이 선해진다.
信者 吾信之 不信者 吾亦信之
(신자 오신지 불신자 오역신지)
미더운 사람에게 믿음으로 대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에게도 믿음으로 대한다.
德信
(덕신)
그러면 세상의 덕이 신뢰로 가득 찬다.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성인재천하흡흡언 위천하혼기심 백성개주기이목 성인개해지)
성인은 세상에 있으면서,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이고,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흐릿하게 한다. 그러면 백성들은 그들의 눈과 귀를 그쪽으로 돌리니, 성인은 모두 그들을 어린애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
- 흡흡歙歙 : 거두어들이다
- 혼渾은 ‘섞이다,’ ‘혼탁하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분명한 의지나 입장을 갖지 않은 채 흐릿하니 세상에 섞여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성인의 이런 태도는 자신의 의지나 입장을 견지하지 않은 채(불언不言, 불인不仁, 무친無親, 무위無爲등) 자연의 운행을 담당하는 도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의 눈과 귀는 모두 성인에게로 돌아와 순수 자연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가 합쳐져 있다. 즉 죽음으로 들어서는 길과,
코뿔소, 호랑이 그리고 적군으로부터도 해를 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게 되는 길을 대비시키고 있다.
인간 전체의 삼분의 일은 생기가 발랄한 자연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고,
삼분의 일은 거의 죽어 가는 상태에 처해 있으며,
나머지 삼분의 일은 구체적인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일이란 것이 모두 죽음의 길을 향해 점점 나아가는 형국이다.
생生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세속의 의미대로 계속 잘 살아가는 방법만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죽음으로 들어서게 되는 이유는 생생生生 때문이고,
사는 길로 들어서는 이유는 “죽음에 이르는 여지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에 이르는 여지”란 바로 코뿔소가 뿔을 박고, 호랑이가 발톱을 쓰며, 적군이 칼을 꽂을 곳이나 그럴 일일텐데, 그것을 아예 없애 버렸다는 것은 생생生生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道德經 第50章]
出生入死
(출생입사)
사는 길을 떠나 죽는 길로 들어서는구나.
生之徒 十有三 死之徒 十有三
(생지도 십유삼 사지도 십유삼)
삶의 부류가 열에 셋이고, 죽음의 부류가 열에 셋이다.
而民生生 動皆之死地之十有三
(이민생생 동개지사지지 십유삼)
그런데 사람들은 사는 일에만 더욱 열중하지만, 하는 일마다 모두 죽는 길로 가는 것이 또 열에 셋이구나.
- 생생生生에서 뒤에 나오는 생生은 목적어로, 앞에 나오는 생生은 동사로 해석해서, “생을 (계속) 살리는 것” 즉 계속해서 삶의 길로만 나아가려는 욕망이다.
夫何故
(부하고)
왜 그런가?
以其生生
(이기생생)
지나치게 삶을 좋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蓋聞善攝生者 陵行不避兕虎 入軍不被甲兵
(개문선섭생자 능행불피시호 입군불피갑병)
듣자하니 삶을 잘 기른 사람들은 험한 산길을 가면서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군대에 가더라도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는다.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시무소투기각 호무소조기조 병무소용기인)
코뿔소는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발톱을 쓸 곳이 없으며, 적군은 칼을 겨눌 곳이 없다.
夫何故
(부하고)
왜 그런가?
以其無死地
(이기무사지)
죽음에 이르는 여지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왕필의 해석]
도롱뇽과 지렁이는 연못도 얕다고 그 바닥에다 구멍을 뚫어 들어가고, 매나 새매는 산도 낮다고 그 꼭대기에다 둥지를 트니, 화살이라도 미치지 못하고 그물이라도 잡지를 못한다. (태어난 자연 상태를 따라) 죽음의 여지가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어쩌다가 미끼에 유혹되어 살 여지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니 어찌 지나치게 삶을 도모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물이 무엇을 추구하더라도 근본을 떠나지 않고, 욕망 때문에 그 참됨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비록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해를 입지 않고, 길을 가더라도 침범올 당하지 않는다. 갓난아이의 상태를 본받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은 아주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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