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신심명7/원동태허 무흠무여/ 지극한 도는 텅 빈 허공과 원만하게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수선님 2023. 2. 12. 13:39

07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 : 지극한 도는 텅 빈 허공과 원만하게 같아서(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모자람도 없고(無欠, 모자랄 흠), 남음도 없다(無餘).

허공은 형체가 없어 완전히 통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걸림이 없고 수용하는 데 한계가 없음에 비유된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므로 걸림이 있을 수 없고, 어떠한 사유에서도 수용 못할 이유가 없다.

이 내용은 우주 법계에 불성 충만함을 표현한 말이고, 근심 걱정이 없고, 항상 하는 일에 만족하고 평화로운 극락세계이고, 좀 더 나아가 이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된 열반를 표현한 말이다.

이 지구상에 아무리 많은 중생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함에 모자람이 있을 수 없고, 태허가 아무리 넓고 깊다고 하여도 내 마음을 덮고 남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이 아무리 넓고 깊어도 태허는 그를 싸고 남음이 없는 법이니 마음과 태허는 일여하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사에서는 우리들의 착각으로 가려내고 택하는 간택, 미워하고 좋아하는 증애, 따르고 거역하는 순역,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고자 하는 위순이 있다. 이는 우리들의 업식에 의한 착각이니, 이 업식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에 부족함이나 남음이 없게 되니 늘 근심 걱정이 없는 세계가 열린다.

이 극락세계가 우리들이 소망하는 세계인데, 우리는 이 세계에 들기 위해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들의 업식을 소멸하고자 발심하고 정진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원동태허

무흠무여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저 태허공과 같습니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습니다.

그대로 지금 이미 완전무결합니다.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줄 알고,

싫은 일이 있으면 싫은 줄 압니다.

이렇듯 완벽한데 뭐가 부족합니까.

그래서 마음을 조용하게 한다, 붙들어 맨다,

눌러 내린다, 망상을 제거한다는 등의

말들은 모두 헛소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는 무수한 헛소리로 산적해 있습니다.

 

“어제는 도깨비에 홀려 밤새 허우적거렸으니 ...”

 

본래는 얻음도 잃음도 없으니, 억지로 얻음으로 쉽게 잃게 되는 것. 본래는 걸릴 것이 없는 자유였으나, 스스로 남기려 하니 항상 모자라다.

 

원동태허,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무흠무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태허라는 의미는 주로 크게 비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나, 비어 있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는 의미의 뜻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너무나 걸림이 없음으로 이를 원융이라 표현한다. 둥글고 화하며 밝다는 의미인데, 걸림이 없으니 부딪치지 않아서 화하고, 어둡지 않아 뚜렷이 잘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더하고 뺄 것이 없고,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는 것이니, 물론, 깨달은 마음 상태에서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마음이 이러할 진데, 우리가 생각하고 감정을 일으키며 시비 분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달밤에 체조하듯, 도깨비에 홀려 밤새 허우적대듯, 꿈속이 마치 현실인양 생사고락 하며, 홀로 울고불고 땀을 흘리는 경우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수 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인간의 삶이라지만, 무엇을 얻고 무엇이 남았으며, 생사고락에서 벗어난 이가 과연 몇이나 된단 말인가.

 

그러니 본래 걸릴 것도 없었고 남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었으니 다만, 나 홀로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 나고 죽는 모양의 인과를 스스로 만들어 짓고 스스로 사라지게 하며, 인과의 허상에서 이고 지고 고락 분별로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허상의 인과를 거듭하며 시비 분별하는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데, 이러한 허상의 마음을 깨치고 보면 원동태허 무흠무여가 그대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하여, 삶에 있어서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이 계속적으로 악순환하며 고락 인과를 만들어 내니, 즉, 온갖 일들과 갖은 대상들을 대할 때마다 인과에 의한 고락의 감정으로 마음을 복잡하게 하니, 결국 고락 분별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되어야지” 하는 분별심 때문에, 만약 마음먹은 대로 이렇게 되지 않으면 화가 나면서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데, 이럴 때는 “이렇게 되어야지” 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나, 설사 “이렇게 되어야지” 하는 바람을 가진다 하더라도, 만약 뜻대로 이렇게 되지 않았을 때는, 얼른 인과의 과보라 생각하여 화를 내거나 불편한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얻고 때로는 잃게 되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거늘, 무엇을 얻었을 때 즐거운 마음의 인과로 인하여 괴로운 마음의 과보가 반드시 생겨나게 되는데, 이 때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깊이 살펴 깨달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화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잘되었을 때 흡족하고 기쁜 마음을 가졌던 때의 과보라는 것을 얼른 깨달아, 화내거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무흠무여 즉, 본래 얻을 것이나 잃을 것도 없고, 남음이나 모자람이 없는 것인 대도, 억지로 얻으려 한 과보로 인해 당연히 잃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고, 억지로 남기려 하는 과보로 인해 당연히 모자라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득실이나 흠여에 마음이 끄달려 스스로 인과의 업을 지어서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면, 반드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의 힘으로 이를 이겨 나가야 할 것이다.

 

태허공太虛空

 

- 진리 역력하건만 취하고 버림에 가려 보지 못할 뿐

 

“원동태허圓同太虛하야 무흠무여無欠無餘어늘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부여所以不如라. 둥글기가 태허공太虛空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리는 마음 때문에 여여如如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허공은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취하고 버림만 없으면 대자유라 이름하여 태허공이라고 한 겁니다. 둥글다고 하면 우리는 평면에 그려진 원을 생각합니다.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는 원은 존재원리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취하고 버림에 익어 있어서 그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그러나 평면의 원은 둥글지 않습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움직여 원도 되고 네모꼴도 됩니다. 아무리 둥글다 해도 세밀한 현미경으로 보면 굴곡이 있습니다. 왜냐, 모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양이란 완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변해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모양이든지 모양으로 그린 것은 생각의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신심명>에서 말하는 원은 아닙니다. 일체모양은 생각의 파장이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지극한 도가 완전한 원입니다. 그 원은 모양이 없으나 처처에 나타납니다. 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일체 걸림이 없고 원융무애합니다. 이러한 대자유를 원동태허圓同太虛라고 하셨습니다.

 

<신심명>은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대로 우주의 대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의 대진리, 즉 지극한 도는 원융하여 마치 끝이 없는 태허공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완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우리 앞에 역력하게 나타나 있건만 안타깝게도 취하고 버리는 마음에 가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억울할 일 아닙니까? 취하고 버림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더니 “아! 중도를 바로 봐야겠구나”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벌써 취하는데 속고 있는 겁니다. 또 순역심만 놓아버리면 된다고 하니 순역심을 버려야 한다는 병에 빠지는 겁니다. 그만큼 취하고 버리는 이분법적 생각에 푹 익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몰록 무심하기가 그 정도로 설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 까닭으로 <신심명>에서 말씀하시는 낙처落處는 취하거나 버리는 그 생각 자체가 공空한 줄을 바로 보라는 겁니다. 그 길은 몰록 무심無心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심하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살아 왔습니다. 무심하면 마치 고목처럼 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죽은 사람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러나 무심을 한번만이라도 체험해본 사람은 무심이란 완전한 평화, 영원한 자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너니 나니 시비분별에서 벗어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무심입니다. 여기에 큼직한 물통을 하나 가져다 놓고 물을 가득 채웁시다. 찌꺼기가 잔뜩 들어있는 흙탕물을요. 그런 뒤 흙탕물을 계속 휘저으면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혼탁한 흙탕물 밖에요. 이때에 휘젓는 일을 중지하고 그냥 지켜보십시오. 흙탕물이 가라앉은 만큼 찌꺼기가 보입니다. 우리 몸뚱이라는 그릇 속에도 온갖 번뇌 망상이 가득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된 만큼 내안에 번뇌 망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흔히 생각하기를 기도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이런 망상이 없었는데 왜 기도나 수행을 시작하면 이런 망상이 들어오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생각 역시 취하고 버리는데 속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물통 속에 있는 찌꺼기가 보이지 없는 게 보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몸통이라는 통속에도 망상이라는 찌꺼기가 안에 있었던 게 보이지 없던 것이 수행할 때만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번뇌 망상이란 내가 만든 내 안에 있는 업業입니다. 밖에는 그 어디에도 망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가라앉은 만큼 찌꺼기가 보여야 당연한 겁니다. 내 안에 있는 망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떤 망상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겁니다. 도적을 알아야 잡듯이 내 안에 어떤 도적이 있는지 알아야 해결방법도 찾을 것 아닙니까? 망상이 일어나거든 얼른 망상인줄 알아차리십시오. 그와 동시에 그냥 받아 드리면 됩니다. 그 말은 부디 망상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번뇌 망상이란 본질이 공성이니까요. 그냥 화두만 참구 하십시오. 이게 바로 망상이라는 도적을 잡는 방법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실답게 참구해보면 스스로 이 말이 진실로 귀한 가르침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번뇌 망상이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억지로 떠맡긴 것도 아니고 밖에서 들어온 남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찍어놓은 환영幻影의 사진이요, 내가 걸어온 내 발자국입니다. 내 잠재의식에 내가 저장해 놓은 내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지 그 누구도 대신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망상을 내가 책임진다는 말은 내 중생 내가 제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망상은 관심을 주지 말고 마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하면 저절로 없어집니다. 물통을 휘젓지 말고 가만히 놓아두면 물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는 것처럼요. 그러면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때를 당하여 상당수의 수행자들이 물속에 달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 달이구나”하는 순간 흙탕물이 흐려지면서 달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보이면 취하고 안보이면 버리고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불여所以不如인겁니다. 여기에서 제대로 노력하는 수행자라면 물 통속에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노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릇자체를 깨어버립니다. 본래 모습인 공성空性을 깨닫는 거죠. 그 순간 천강유수千江有水 천강월千江月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물 통속에 있는 달을 취하거나 버릴 일이 없어지게 되는 거죠. 그릇이 있는 상태에서 그릇이 깨어져 버린 겁니다. 그렇다고 깨달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원동태허圓同太虛가 된 겁니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 무흠무여無欠無餘인 게지요. 무심삼매인겁니다.

 

“막축유연莫逐有緣하고 물주공인勿住空忍하라.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 인연을 쫓지도 말고 적멸에도 빠지지 말라. 한 가지 그대로만 지니면 헛것은 스스로 다하리라.”

 

그래서 3조祖 승찬 스님께서는 취하고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막축유연莫逐有緣하고 물주공인勿住空忍하라고 노파심을 이어갑니다. 있는 인연도 따르지 말고 공함에도 머물지 말라, 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고 열반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인연이란 모든 세간법을 말합니다. 인간관계는 물론이요, 산하대지 모양 있는 모든 인연들입니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세계도 또한 인연법에 의해서 변해나가는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겁니다. 부처하면 우리는 바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ㅂ 아래 ㅜ’, ‘ㅊ 옆에 ㅓ’가 모여서 인연이 되어 부처라는 단어가 나왔을 뿐입니다. ㅂ에도 ㅊ에도 ㅜ에도 ㅓ에도 그 어디에도 부처라는 주체성이 없습니다. 아무런 자체 성품이 없는데 모인 인연에 의해서 부처님이라는 인연성을 보여주게 되거든요. 이 세계를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도 합니다. 글자를 그렇게 배열하면 부처님이라고 하자는 인간의 약속, 부호일 뿐입니다.(5)

 

그런데도 우리는 부처님하면 바로 취하게 되고 마구니, 악마하면 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병폐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세간 법에도 따르지 말고 출세간법에도 머물지 말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취하지도 않고 버림도 없는 공인空忍, 즉 공함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 이런 스승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직접 체험하여 확실하게 깨닫고 나서 자유자재한 도인이 아니면 이렇게 가르쳐 주시기가 어렵습니다. 생사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열반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록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중국의 선사들만 그러신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 스승들도 한 결 같이 그렇게 보여주시고 그렇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양광명이 아무리 우리 앞을 비추고 있어도 등을 돌리고 있으면 윤회 속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밤 우리나라는 캄캄했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도 태양은 밝게 비추고 있었거든요. 태양은 그 시간에 어디로 숨은 일도 없고 빛을 줄인 일도 없이 환한 대낮인데 캄캄하게 어두운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지구가 태양에 등을 돌렸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마음, 광명도 등을 돌렸느냐, 아니 돌렸느냐의 차이일 뿐 밝음 자체는 털끝만큼도 변한 일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세간법과 출세간법, 생사와 열반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태양에는 어두움이란 없듯이 생사가 본래 없다는 <신심명> 가르침은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보배입니다.

 

그 뒤를 이어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고 나옵니다.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저절로 사라져 다하리라는 말입니다. 이 한 가지가 문제입니다. 지극한 도라고 하기도 하고 중도라고 해도 좋지만 <신심명>에서 말하는 한 가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인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자리 양변을 초월한 중도, 무엇이라고 해도 그 한 가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디 요원한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극히 가까운 내 마음, 내가 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바로 잡게 해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답니다. 몇 년을 열성적으로 기도를 했는데도 이 세상을 바로 잡기는커녕 자기 가족하나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그래서 부디 내 가족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달라고 기도가 바뀌었답니다. 다시 몇 년간 열심히 했습니다. 그사이 이 사람이 너무 지쳐버리고 몸은 늙어가고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이제 모든 욕심 다 내려놓고 제발 내 마음 하나만이라도 길들이게 해달라고 기도 방법을 바꾸게 된 겁니다.

 

그때에야 산신령이 앞에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야, 이 사람아. 내 마음 하나만 마음대로 잘 다루면 가족뿐 아니라 이세상도 모두 뜻대로 되는데 자네는 기도를 거꾸로 했네. 뒤집어진 일이 없는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기도나 각자 자기 갈 길이 있는 가족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기도를 했으니 애당초부터 이루어져선 안 되는 기도였네. 자네가 만약 처음부터 내 마음하나 바로 닦겠다고 기도했으면 충분히 성취할 수 있었는데 이제 너무 늦었네.”

늦게 철이 들어서, 철들자 늙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 사실이 그렇습니다. 일종평회一種平懷가 안 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 될 수가 없는 거죠.

 

 

 

<주5> 모든 경계를 반연絆緣하여 인연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인연을 쫓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연을 쫓아가지 않으면 고요해지니 이것을 적멸이라 합니다. 이 고요함을 내 집으로 생각하고 안주해도 안 되고, 내가 설령 부처가 되었다 해도 부처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라는 것도 망상이므로 망상이 없으면 부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멸에도 머물지 말고 한 가지 그대로만 지니면 헛것은 스스로 다 사라진다 했습니다. 꾸미고 조작하려 들지 말고 거짓없이 그대로 지니면 되는 것이니,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경계가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