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강경 오가해 “無得無說分”을 공부하며 든 짧은 생각.
운허기념사업회 언해불전연구소에서 금강경 공부를 대충이나마 두 차례 했다. 처음에는 언해불전 금강경오가해를 읽었고, 두 번째는 싼쓰끄리뜨어 원전(물론 어떤 것이 정본인지 정립되어 있지 않기는 하다)과 구마라즙, 현장 역본 등 세 가지를 대조하며 읽었다.
불교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외도인이지만 기독교 성서, 바가바드 기타, 老莊, 주역, 대학, 중용 등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불교를 포함해 이 다양한 가르침들이 사실은 하나의 이치를 저마다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다른 말로 변주를 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가해에 나오는 ‘강북에선 탱자가 강남에선 귤이로되 봄이 오니 모두가 다 한가지 꽃이라’는 야부의 노래가 바로 그 뜻 아닌가.
금강경은 대략 AD 150년에서 200년 사이 인도에서 성립되었고, 구마라즙은 중국 남북조 400년경, 현장은 당나라 660년경에 싼쓰끄리뜨어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를 주석한 부대사가 500년대, 혜능이 600년대, 규봉 종밀이 800년대, 야부 도천이 1100년대 분들이고, 이들 주석을 다시 해설한 함허 득통이 1300년대 후반 조선 사람이다.
본래 번역과 해석은 시대정신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붓다가 가르치신 진리의 말씀도 부파불교, 반야부, 중관, 유식, 화엄, 선의 다양한 관점으로 재해석되고 그 내용을 더해 갔다.
반야부 계통의 금강경도, 붓다의 가르침을 언어, 문자로 자세히 해설하다가 ‘法有’의 相에 빠진 부파불교를 긍정적으로 극복하고자 나온 경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不取於相, 어떤 상도 취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일관한다.
구마라즙과 오가해, 함허 역시 금강경을 번역, 해석하면서 금강경 이후 나타난 불교사상들을 반영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금강경 오가해 언해를 싼쓰끄리뜨어 원문과 대조해 읽으면서 구마라즙의 번역과 오가해의 禪的 해석들이 금강경의 본 뜻을 이해하는 걸 오히려 어렵게 만들 소지도 있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구마라즙은 금강경을 번역하면서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천재적인 솜씨로 과감한 축약을 통해 그 핵심을 멋진 한문체로 잘 살려냈다는 찬사를 받는다. 오가해의 禪的 해석들도 마찬가지다. 禪的 해석들은 구차스런 말 보다는 번뜩이는 詩的, 역설적 통찰을 통해 단박에 이해에 도달시키려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근기가 떨어지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구마라즙의 천재성과 禪的 역설이 오히려 금강경의 이해를 더 어렵게 하거나 오히려 오해를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금강경은 그 가르침의 내용 자체가 어떤 상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언어와 논리라는 수단을 사용해 이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경을 번역하고, 주석하고, 이해하는 기본 조건은 언어와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하에서는 이번에 금강경 “無得無說分”에 대한 구마라즙의 번역과 오가해 주석을 싼쓰끄리뜨어 원전을 함께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 번역과 주석들이 언어와 논리를 통한 금강경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나름 생각했던 부분들을 간략히 돌아보고자 한다.
2. 구마라집 역본과 우리 말 번역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須菩提 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而有差別
여래가 깨달음을 얻었는가(得). 여래에 의해 설해진(所說) 법이 있는가.
여래에 의해 설해진(所說) 뜻(義)을 이해하기로는 깨달음이라 이름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가 가히 설하신(可說)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에 의해 설해진(所說) 법은 모두 취할 수도(不可取) 설할(不可說) 수도 법도 법도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3. 구마라즙 번역에 따른 ‘여래가 설한 법이 없는’ 이유
구마라즙 번역에 따르면 수보리는 여래가 (깨달아) 설한 법이 없(다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설한 법이 없는 이유는 설해진 법이 취할 수도 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설한 법이 없는 이유는 성현들이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4.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해진 법이 취할 수도 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1) 구마라즙 번역에 따르면, 수보리는 여래가 (깨닫고) 설한 법은 없다(無有定法 如來可說)고 하면서 그 이유(何以故)는 설해진 법(如來所說法)은 설할 수가 없기(不可說) 때문이라고 한다.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해진 법은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핏 들으면 궤변처럼 들린다. 아니면 역설을 통한 秘義의 설파이니까 이걸 이해할 수 없는 우리 같은 중생들은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여야 할까? 구마라즙 번역에 따르더라도 ‘설한 법’의 ‘설한’에 방점을 두지 말고 ‘법’에 방점을 두어‘법은 취할 수도 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읽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된다.
(2) 하지만 ‘가르쳐진 법은 설해질 수 없다’라고 하여 desitha(가르쳐진)와abhilapyah(說해진)를 구별하는 것이 이해하기에 더 낫다.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해진 법은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구마라즙 번역을 읽은 독자는 언어와 논리를 통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원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논리적이다.
구마라집은 싼쓰끄리뜨어 원문의 desitha(가르쳐진)와 abhilapyah(說해진)를 모두 ‘說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앞 명제가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뒷 문장은 앞 명제와는 별도의 새로운 개념이 들어있어야 제대로 된 이유 설명이 된다. ‘나는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아침에 밥을 안 먹었기 때문이다’가 논리적이다. 그런데 구마라즙은 ‘나는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라고 읽힐 소지가 있게 번역한다. 구마라즙은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해진 법은 설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여,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앞 문장을 그대로 동어반복하고 있다.
싼쓰끄리뜨어 원문에는 앞 명제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뒷 문장에 서로 다른 개념이 들어있다.
“nasti dharmo desitha. tatkasya hetoh, dharmodesitho agrahya anabhilapya”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desitha) 법은 없다. 그 이유는 가르쳐진 법은 잡힐 수도 없고(agrahya) 설해질 수도 없기(anabhilapya) 때문이다.’
(구마라즙은 如來可說, 如來所說法이라 하여 능동과 수동을 섞어 쓰는 데 싼쓰끄리뜨어 원문은 붓다의 어법대로 모두 수동으로 되어 있다.)
‘설해진 법은 설해질 수 없다’고 무슨 선문답처럼 번역하지 말고 원문 desitha의 본 뜻을 살려 ‘가르쳐진 법은 설해질 수 없다’로 번역했더라면 독자들이 헷갈리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3) ‘법은 취할 수도 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 원문의 grahya는 ‘grabbed, seized’, ‘움켜쥐어진, 잡힌’이란 의미이고 abhilapya는 ‘설해진’이란 뜻이다.
우리 주관이 객관세계를 파악하고(grahya), 설명할(abhilapya) 때에는 개념과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여래가 가르친 바 그 어떤 상도 취하지 말라는 무위의 가르침은 개념이나 언어를 넘어선다. 개념이나 언어는 우리를 변게소집遍計所執으로 이끌어 가니, 이 법은 개념이나 언어로 파악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구마라즙이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 법은 개념이나 언어로 잡혀질 수도 없고 설해질 수도 없다’는 식으로 단어를 골라 번역했더라면 이렇게 헷갈려 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4) 금강경 싼쓰끄리뜨어 원문은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 법이란 게 없(다고 하)는 이유는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 법은 (개념이나 언어로) 파악되거나 설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뜻 아닐까? 원문은 번역과는 달리 논리적이다.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해진 법은 취할 수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구마라즙 번역이 어리석은 내게는 좀 아쉬운 이유다.
5. 설한 법이 없는 이유는 성현들이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1) 구마라즙은 ‘여래가 (깨닫고)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所以者何) 성현들이(一切賢聖) 무위법으로(皆以無爲法) 차별이 있기(而有差別) 때문’이라고 번역했다.
여래가 설한 법이 없는 이유는 성현들이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곱씹어 보아도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2) 그래서인지 이런 구마라즙을 텍스트로 한 우리말 번역도 제각각이다.
‘여래가 (깨닫고)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들 번역했다,
‘모든 성인과 현인은 추호도 거짓 없는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진탁 옮김 감산의 금강경 풀이 49쪽)
‘일체 현성이 다 함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으니이다.’(금강반야바라밀 오가해설의 언해)
‘모든 현인, 성인들이 모두 무위의 법으로 도를 닦지만 거기에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옹스님, 금강경오가해설의 역강 259쪽)
‘일체 성현들은 모두가 조작이 없고 꾸밈이 없는 무위법으로써 온갖 차별을 꾸며서 펼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비 스님 금강경 강의 75쪽)
‘일체의 성현들은 모두 함이 없는 법으로 이루어져 범인들과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오이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 385쪽)
‘작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법의 무위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차별된 성현이 생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진 스님, 돌아가라 그대들의 저 빛나는 일상으로, 141, 142쪽)
‘모든 현명한 성인들은 다 무위법으로써 다른 성인(‘사람’들의 오기로 보인다)들과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여운 김광하 금강경 67쪽)
(3) 구마라즙이 ‘皆以無爲法 而有差別’이라 한 부분에 대한 번역은 이처럼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성현들이 무위의 법을 스스로 닦고 남에게 가르쳤지만, 그 방식과 방편은 저마다에 맞는 다양한 유형의 차이가 있다’는 식의 번역이다. 주로 구마라즙의 ‘而有差別’ 부분을 강조하는 해석으로 금강경오가해의 주석자들을 비롯해 이 주석을 관습적으로 따라온 스님들이 이런 해석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본 감산, 야옹, 무비 스님의 번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 다른 번역은 ‘모든 성현들은 무위법을 통해 비로소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앞의 도올 김용옥, 범진 스님, 김광하의 번역이 그러하다.
오가해 규봉의 주석 부분에 “魏譯云 一切聖人 皆以無爲法得名 論云 聖人但依 眞如清淨得名”라고 나오듯이 ‘위나라 보리유지나 반야경론은 ‘성현들이 무위법이나 진여청정으로 이름을 얻었다(得名)’고 하여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구마라즙이 ‘而有差別’이라 번역하고 이런 번역에서 비롯되어 오가해는 금강경에 ‘차별’과 ‘방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추가했다.
구마라즙은 ‘여래가 설한 법이 없다고 한 이유는 성현들이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우선 이 번역은 앞에서 살핀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해진 법이 취할 수도 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번역과 마찬가지로, 논리로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현들이 무위법을 닦았으나 저마다 差別이 있다는 것이 과연 如來所說法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한편 오가해와 함허의 해설 모두 구마라즙의 이러한 번역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무위라는 한 맛이 聲聞에게는 四聖諦로 緣覺에게는 因緣法으로 菩薩에게는 六波羅蜜이라 이름한다’ (함허)
‘무위란 분별이 없다는 것으로 三乘의 현인들이 깨달은 것이 모두 무위인 까닭에 공통적으로 무위라 하지만 여기에는 차별이 있다’ (규봉)
‘삼승의 근기와 본성이 그 해득한 것이 같지 않고 그 견해의 얕고 깊은 차이가 있는 까닭에 차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무위란 無住, 無相을 말한다.’ (육조)
‘사람과 법 모두를 집착이라고 부르나 깨달으면 둘 다 무위가 된다. 보살은 능히 함께 밝히나 성문은 한쪽 잘못만 벗어난다. (부대사)
야부의 송은 앞서 본 바와 같다.
‘말해보라, 무위의 법에 어찌하여 차별이 있는가? 만고의 파란 못에 어린 空界의 달을 두, 세 번 건져 올려 보아야 응당 알게 될 것이다.’ (종경)
무비 스님은 이런 오가해의 주석을 토대로 앞서 본 대로‘일체 성현들은 모두가 조작이 없고 꾸밈이 없는 무위법으로써 온갖 차별을 꾸며서 펼쳐 보였기 때문입니다’라고 구마라즙의 번역을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떤 상도 취하지 말라고 하고 있을 뿐 이런 不取於相을 닦고 실천한 성현들이 그 근기와 본성에 따라 다 차별이 있다는 이야기는 다른 그 어느 곳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구마라즙이 싼쓰끄리뜨어 원문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 그 후대의 선사들이 이 번역을 선적 상상력으로 해석함으로써 금강경에는 없는 개념들이 금강경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5) 싼쓰끄리뜨어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nasti dahrmo yastathagatena desitah...tatkasya hetoh asamskrtaprabhavita hyaryapudgalah”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 법은 없다,.. 그 이유는 존경할 만한 이(hyaryapudgalah)들은 무위로 드러나기(asamskrtaprabhavita) 때문입니다.’
‘asamskrtaprabhavita’는 ‘인연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꾸며지지 않은’을 뜻하는‘asamskrta’라는 단어와 높이 드러난’을 뜻하는 ‘prabhavita’가 합친 단어다. 그래서 현장은 이를 ‘無爲之所顯’, ‘무위로 드러났다’고 번역했고, 보리유지는 ‘皆以無爲法得名’, ‘무위법으로 이름을 얻었다’고 번역했다.
그런데 구마라즙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드러났다거나 성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정도의 단어를 ‘而有差別’이라고 번역했고, 여기에 선적 상상력이 더해짐으로써 금강경에는 없는, 무위가 삼승이나 사성제, 인연법, 육도바라밀 등으로 다양하게 차별하여 전개되었다는 사상으로까지 비약한 게 아닌가 싶다.
구마라즙이나 오가해가 설하는 바가 다 맞는 말씀이지만 금강경은 어디까지나 불취어상을 설하는, 금강경이다.
(6) 금강경 원문은 ‘우리가 현성이라 부르는 이들은 개념이나 언어로 조작되거나 상이 취해지지 않음으로써 즉 무위로써 비로소 현성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아도 여래에 의해 깨달아진, 가르쳐진 법은 없다 할 것입니다.’ 정도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6. 나가며
언해불전연구소는 금강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들을 한문 번역본과 여러 주석, 이에 대한 언해본 그리고 싼스끄리뜨어 원문까지를 두루 살펴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기왕의 번역이나 해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넘어서서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는 새로운 우리말 경전 번역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에 더해 언해본에 나오는 아름다운 우리 말투를 현대적으로 되살려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글 김형태 변호사 & <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격월간지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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