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민스님의 금강경오가해 강의(42)■
금강경오가해43(법보신문)
대승정종분9
보시바라밀 실천하고 진상에 계합하라
=== 고전 맛보기 ===
孟子 告子 上 牛山
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 伐之 可以爲美乎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蘖之生焉 牛羊 又從而牧之
是以 若彼濯濯也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ᆞ보충설명>
산은 나무가 있어서 푸르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익 때문에
나무들을 베어서 민둥산을 만들면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산은
부지런히 밤기운을 받고
이슬을 머금어 다시 생기를 발하려 합니다.
그런데 소나 염소가
새로 돋아난 싹들을 다시 뜯어 먹는다면
산은 다시 헐벗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도 산의 이치와 같습니다.
밤기운을 받아
윤기를 되찾는 선량한 성품이
낮 동안 外物과 접하면 다시 오염됩니다.
마치 밤사이에 돋아나는 새순을
소나 염소가 뜯어먹어
민둥산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ᆞ원문해석>
1.
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 伐之
可以爲美乎
우산의 나무가 일찍부터 아름다웠는데,
큰 도시의 가까이에 있어서
도끼로 베어버리니
가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2.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蘖之生焉
牛羊 又從而牧之
이 베어진 나무들이 밤사이에 되살아나고
비나 이슬에 윤택해져서
새싹이 돋아나지 않을 수 없는데,
소나 염소가 또 곧바로 싹을 뜯어 먹는다.
3.
是以 若彼濯濯也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이런 까닭으로 저렇게 벌거벗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일찍이 재목으로 쓸 나무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어찌 산의 성품이겠는가?
4.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仁義의 마음이 어찌 없겠느냐만,
그 양심을 버린 자는
또한 도끼로 나무를 자른 것과 같은 것이다.
5.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아침마다 나무를 자르는데
가히 아름답다 하겠는가?
6.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
되살아나는 맑은 기운,
좋고 나쁘고를 잘 가리는 마음이
사람과 더불어 가깝기가 쉽지 않다.
7.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곧 아침과 낮에 하는 일들이
방망이질 하여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8.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방망이로 쳐서 없애는 게 반복될수록
야기(夜氣)가 부족할 것이요,
야기가 부족한 즉
짐승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
9.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사람이 금수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일찍이 천성의 성품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의 본정(本情)이겠는가?
10.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공자가 말씀하셨다.
“마음을 잡으면 있는 듯 하고
버리면 없는 듯 하나니,
마음의 출입이 정해진 때가 없어
그 본원을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 뿐인저!”
{宗鏡}
住相布施 猶日月之有窮
不着六塵 若虛空之無際
自他俱利 福德難量
豁然運用靈通 廓爾縱橫自在
且道
還有住着處麽
妙體本來無處所 通身何更有蹤由
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해와 달이 다함 있는 것과 같고,
육진(六塵)의 경계에 물들지 않는 보시는
가없는 허공과 같도다.
자타가 함께 이로워지는 복덕이
헤아릴 수 없으니,
활연히 모든 생활에
신령스럽게 통하고 툭 트여서
어디든지 자유자재하도다.
또한 일러라.
그래도 상에 집착하겠는가, 아닌가?
묘한 본체는 본래 처소가 없으니,
한 모습인데
어찌 다시 자취를 말미암음이 있겠는가?
ᆞ보충설명1>
‘日月之有窮(해와 달이 다함이 있다)’은
아무리 해와 달이 밝을지라도
모든 어둠을 영원히 다 비추어 밝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ᆞ보충설명2>
通身은 自他의 구별이 없는 한 몸의 의미.
{說}
住相布施 徒眩人之耳目 違於無住大道
但感有漏之報 失於無邊大利
猶彼日月 但能代明而不能通乎晝夜
無住行施 身心 澹寂 內外一如 契乎無住大道
終獲無邊大利 如彼太虛 廓然無際
以之處已 推以及人 其爲福德 實爲難量
福德難量 且置 怎生 是無住底道理
豁然運用靈通 廓爾縱橫自在
且道
還有住着處麽
妙體無處所 通身沒蹤由
상에 머무르는 보시는
사람의 이목(耳目)을 현혹시킬 뿐
머무름이 없는 대도(大道)에 어긋난 것이다.
다만 유루(有漏)의 과보를 감득하여
가없는 큰 이익을 상실하기 때문에
저 해와 달이 번갈아 빛나지만
주야(晝夜)를 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머무름이 없는 보시는
몸과 마음이 맑고 고요하며
안과 밖이 한결같이 여여하여
무주의 대도에 계합하므로
마침내 가없는 큰 이익을 얻음이
마치 저 태허공이 툭 트여 끝없는 것과 같다.
이런 살림살이에 자기 자신이 처하고,
이런 살림살이를
남에게도 깨우쳐 주니
실로 그 복덕은 헤아리기 어렵다.
복덕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차치하고
어떤 것이 머무름이 없는 도리인가?
활연히 모든 생활에 신령스럽게 통함이요,
툭 트여 종횡으로 자유자재한 것이다.
또한 일러보라.
다시 머물러 집착하는 곳이 있는가?
묘한 본체는 처소가 없이 한 모습이니
자취를 말미암음이 없다.
運力檀度契眞常 福等虛空不可量
無影樹頭 花爛熳 從他採獻法中王
보시바라밀을 힘써 운용하고
진상(眞常)에 계합하니
복덕이 허공처럼 헤아릴 수 없도다.
그림자 없는 나무에 꽃이 만발하니,
그 곳의 꽃을 따서 법왕(法王)에게 공양하리.
ᆞ보충설명>
‘無影樹(그림자 없는 나무)’는
시간과 공간이 끊어져서 텅 빈
우리의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時空의 초월을 표현할 때
‘無’字를 빌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無影塔(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
無縫塔(돌을 재단해서 쌓아올린 것이 아닌 탑),
無底船(밑바닥이 없는 배),
無孔笛(구멍이 없는 피리),
無底鉢(밑바닥이 없는 발우) 등이 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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