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노자 도덕경 해설 61~70

수선님 2023. 3. 26. 13:03

암컷[牝]은 자신을 낮추고 넓은 포용력을 가진 특성 때문에 물[水]과 함께 『도덕경』의 핵심 상징어이다. 따라서 앞부분에서 물[下流]과 암컷을 직접 비유하여 큰 주제로 삼은 다음에, 세상사에서 암컷이 고요함[靜]이라는 구체적 특징으로 수컷[牡]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 따뜻한 모성의 품으로 새끼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은 실제적 효과를 거두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큰 나라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천하의 영도적인 위치에서 작은 나라들을 취하고 인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지만, 논의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즉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되면 작은 나라는 그 작은 나라에 맞는 효과로써 큰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자신을 낮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라는 것인데, 이는 물론 도의 운행 원칙이기도 하다.

암컷은 조용한 성품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는데, 겸하하는 이런 덕성이 대국이나 소국에게 모두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준다. 물론 크고 작건 간에 모든 나라는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여기서 조용함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는 암컷은 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암컷의 모습은 바로 도의 모습이고, 이것이 결국 도를 실천해서 얻게 되는 효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도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변형된 설명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道德經 第61章]

大國者下流也 天下之牝 天下之交也(대국자하류야 천하지빈 천하지교야)

큰 나라는 낮은 곳으로 흘러 천하를 품는 암컷이 되고, 천하가 교차하며 모여드는 곳이 된다.

牝常以靜勝牡 爲其靜也 故宜爲下(빈상이정승모 위기정야 고의위하)

암컷은 항상 정적인 성질로 수컷을 이기는데, 그 정적인 성질을 발휘해서 반드시 자신을 낮추게 되기 때문이다.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고대국이하소국 즉취소국)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자신을 낮추어 작은 나라를 대하면, 작은 나라를 취하게 되고

小國以下大國 則取於大國(소국이하대국 즉취어대국)

작은 나라가 자신을 낮추어 큰 나라를 대하면, 큰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 겸하하는 덕성을 바탕으로 대국은 소국을 취할 수 있고, 소국은 대국을 이길 수는 없지만 대국의 용인을 얻어 내어 훨씬 더 많은 것을 취할 수 있게 된다.

故或下以取 或下而取(고혹하이취 혹하이취)

그러므로 어떤 경우는 낮춤으로써 취하게 되고, 어떤 경우는 낮추어서 많은 것을 얻는다.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대국불과욕겸축인 소국불과욕입사인)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백성들을 영도하려 할뿐이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들어가 그 사람들을 섬기려고 할 뿐인데,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부량자각득기소욕 대자의위하)

무릇 양쪽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제61 장에서는 도의 고요하고 낮은 데로 처하는 성질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이 장에는 그와 달리 대립된 가치의 양면을 모두 함께 아우르는 포용력을 가진 모습으로서의 도를 실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더군다나, 제61장의 시작을 도를 상징하는 물의 활동 가운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모습 즉 하류下流를 가지고 시작하였다면, 제62장에서는 그 긴밀한 서술 관계를 고려할 때, 도의 포용성을 물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모습[注]을 가지고 묘사하였다. 노자는 이 주[注] 자를 써서 만물이 모두 이 도道로 모여들어 자신들의 일을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가 전체 세계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리로서 그 성격상 배제되는 무엇을 남기지 않고 항상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도를 통해서만이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죄도 면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모두 도를 귀하게 여긴 것이다.

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인위적 문화 체계(예를 들어 전통 등)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그런 세계 속에서는 그 기준을 중심으로 죄는 죄이고 선은 선이며 불선은 불선으로 서로 배제하기 때문에 대립되는 양편이 모두 동시에 구제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도는 대립되는 양편을 모두 아우르고 었다. 이런 점 때문에 도가 세상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道德經 第62章]

道者 萬物之注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도자 만물지주 선인지보 불선인지소보)

도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모여들어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좋은 사람들에게는 보배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보전해야만 할 것이다.

- 선인善人이나 불선인不善人이나 모두 도의 도움과 의지를 벗어날 수 없다. 선인은 도를 보배로 간직하여 점점 더 선으로 나아가고, 불선인은 도에 의지하여 자신의 불선을 개선해야 한다. 선을 유지하는 것도, 불선을 개선하는 것도 모두 도에 의지해서야 가능하다.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미언가이시 존행가이가인 인지불선 하기지유)

번지르르한 말이라도 장사는 잘 할 수 있고, 권위적인 행동도 사람에게 영향은 줄 수 있으니,

사람들에게 있는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어찌 그것을 버리는 일이 있겠는가?

- 미언美言은 아름다운 말이 아니다. 별로 신용도 없이 듣기 좋게 하는 번지르르한 말일 뿐이다. 이런 번지르르한 말은 또 전혀 쓸모없고 해악만 끼치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는 데에는 잘 이용된다. 존행尊行은 권위로 가득 찬 행실이다. 내적인 중후함으로 갖춘 권위가 아니라, 외적인 제도로 높은 자리에 올려 진 존엄이다. 노자는 “높은 사람을 받들고 똑똑한 사람을 존경”(귀귀존현貴貴尊賢: 『맹자孟子·만장하萬章下』)하는 것이 강조되는 제도를 반대한다. 여기서 존행은 노자가 반대하는 제도 속에서의 존행이다. 그런데 이런 존행이 인간의 자연성을 보호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직접적인 효과를 낸다.

- 미언이나 존행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는 좋지 않은 일이나 혹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버리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도나 그 도를 체득한 성인은 “정말로 사람을 잘 구제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이 없다.”(제27장) 이에 따라서 선인도 버려지지 않고, 불선인도 버려지지 않는다. 또한 좋은 것도 버려지지 않고, 좋지 않은 것도 버려지지 않는다.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壁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고립천자 치삼공 수유공벽이선사마 불여좌진차도)

그러므로 천자를 세우고 삼공(태사太師·태전太傳·태보太保)을 설치하는데, 비록 큰 옥을 앞세우고 수레를 뒤따르게 하는 헌상의 예를 올린다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이런 도를 바치는 것만은 못하다.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邪? 故爲天下貴

(고지소이귀차도자하 불왈이구득 유죄이면야? 고위천하귀)

 

옛날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구하는 모든 것이 그것을 통해 얻어지고, 죄도 그것을 통해서 면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된다,

 

대大/소小, 다多/소少 등과 같은 대립면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보통 대大와 다多를 추구하는데, 두 대립면 사이의 관계는 서로 반대편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 대립면끼리 서로 맞물려 있다. 그래서 작고 적으며 미세한 것에서부터 주의를 기울여야 그 대립면으로 이해되는 크고 대단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도를 체득한 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매우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런데 이런 신중한 태도는 아주 미세한 일이 아주 큰일과 서로 맞물려 있다는 이 세계의 원칙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성인의 형상은 제15장에서도 비슷하게 서술되어 있다. “조심조심 하는구나! 마치 살얼음 낀 겨울 내를 건너는 듯이 한다. 신중하구나! 사방을 경계하는 듯이 한다. 진중하구나! 마치 손님과 같다.”

 

[道德經 第63章]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무위의 방식을 행하며, 일거리를 없애는 태도로 일을 하고, 정해진 맛이 없는 것을 참맛으로 안다.

-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거나 모든 구속을 거부하며 멋대로 하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되 인위나 유위적 방식이 아닌 무위의 방식을 따라 하자는 것이다. 일을 할 때도 특정한 목적이나 의지 혹은 체계가 개입된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 맛에 관해서도 구분되고 규정된 맛을 맛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다섯 가지로 구분된 맛과 같이 특정한 체계의 맛을 맛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의 구분이 없는 맛을 진정한 맛으로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나올 대립 관계(대大/소小, 다多/소少, 난難/이易)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 대립면들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열려 있고 서로 맞물려 있음을 논하기 위한 기본 형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大小多少 報怨以德(대소다소 보원이덕)

작은 것을 크게 보고, 적은 것을 많게 보며,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

- 도를 체득한 성인은 큰 것을 크게 보고, 작은 것을 작게 보며, 많은 것을 많게 보고, 적은 것을 적게 보거나, 원한을 그저 원한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큰 것, 많고 적은

것 그리고 원한과 덕이 서로 상대적 관계 속에서 서로 상대편을 향해 열려 있고 맞물려 있음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것 속에서 커지는 가능성을 보고, 적은 것이 많아지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다. 따라서 작은 것은 큰 것의 기초가 되고 적은 것은 많은 것의 기초가 된다.

-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말도 원한과 덕 사이의 상호 관계를 통찰한 다음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다. 여기서 덕은 단순히 인의와 같은 특정한 내용의 덕성이라기보다는 도가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모습이다. 그러므로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의 정확한 의미는 비록 원한이라도 그것을 자연의 원리 위에다 올려놓고 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한의 대립면을 가지고 원한을 다루게 되는데, 이것은 제49장에 나오는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착하게 대한다”라는 구절과 맥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도난어기이 위대어기세)

어려운 일을 하려는 자는 그 쉬운 일부터 하고, 큰일을 하는 자는 그 작은 일부터 한다.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세상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부터 일어난다.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시이성인종불위대 고능성기대)

이런 이치로 성인은 끝끝내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큰일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부경낙필과신 다이필다난)

대개 쉽게 하는 승낙에는 믿음이 부족하고, 사태를 너무 쉽게 보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시이성인유난지 고종무난의)

 

이런 이치로 성인은 오히려 모든 일을 어렵게 대한다. 그래서 종내 어려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장은 그 의미를 따져 볼 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후반부는 “위자패지 爲者敗之”에서 시작된다. 전반부의 중심 의미는 “아직 기미가 없을 때 무엇을 하거나, 혼란이 형성되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고, 후반부의 중심 의미는 ‘무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道德經 第64章]

其安易持 其未兆易謀(기안이지 기미조이모)

안정되어 있을 때 유지하기가 쉽고, 아직 무슨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도모하기가 쉽다.

其脆易泮 其微易散(기취이반 기미이산)

취약할 때 나누기가 쉽고, 미세할 때 흐트러뜨리기가 쉽다.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위지어미유 치지어미란)

그래서 무슨 사태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타당하게 처리하고, 혼란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잘 다스려야 한다.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합포지목 생어호말 구층지대 기어루토 천리지행 시어족하)

몇 아름이나 되는 나무라도 작은 싹으로부터 자라나고, 아주 높은 건물이라도 삼태기 하나 분량의 흙으로 시작되며, 천리나 가는 먼 길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된다.

爲者敗之 執者失之(위자패지 집자실지)

의도를 가지고 유위적으로 무슨 일올 하는 자는 결국 그것을 망치게 되고, 꽉 잡고 집착하는 자는 결국그것을 잃게 된다.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시이성인무위고무패 무집고무실)

그래서 성인은 무위를 행하기 때문에 망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잃지 않는다.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민지종사 상어기성이패지)

보통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거의 완성 단계에서 실패한다,

愼終如始 則無敗事(신종여시 즉무패사)

처음 시작할 때처럼 신중하게 끝을 맺으면 일을 망치는 법이 없을 것이다.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시이성인욕불욕 불귀난득지화 학불학 복중인지소과)

그래서 성인은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 태도를 배워, 대중들의 잘못을 구제한다.

- 욕欲은 어떤 한계 속에서 특정한 방향을 향하여 행사된다. 학學은 역사와 경험으로 검증된 어떤 내용이 전통으로 확립된 것을 모방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자연은 이런 방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반대편의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의욕을 품지 않는 태도로 의욕을 행사하며, 학습이라는 방식과는 다르게 배움을 행한다는 뜻이다.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이보만물지자연 이불감위)

 

이렇게 함으로써 만물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도와주지, 함부로 자신의 의도를 개입시키는 유위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현덕은 “무엇을 낳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

을 길러주고도 그것을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제51장)” 이런 것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원한 지혜이다. 지智를 근간으로 하는 통치가 오히려 해가 되고, 지를 포기한 통치가 오히려 나라의 복이 된다는 것도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른 심원한 지혜이다. 그래서 대개는 보통 사물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현덕을 따르면 결국 우주 자연의 대원리와 합치하여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현덕은 도가 구체적인 현실 에서 적용되는 모습이다.

 

[道德經 第65章]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고지선위도자 비이명민 장이우지)

옛날에 도를 잘 실천하는 사람은 백성들을 명민하도록 하지 않고 우직하도록 한다.

- 명明은 노자가 말하는 인식의 최고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화된 체계에 재빠르고 기교가 넘치게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우愚는 노자가 계속 우리에게 간직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이다. 제20장에서 노자는 우인愚人의 마음을 어둑하고 어눌함으로 묘사하였다. 다시 말하면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어리숙한 모습이다. 이것도 물론 도의 모습을 그대로 체화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노자의 이해 방식에 따를 때, 이 세계는 관계와 변화 속에 있어서 본질을 중심으로 경계가 분명하고도 예리하게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계를 분명하고도 자세히 잘 나누어 보는 것 제20장에서는 소소昭昭와 찰찰察察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장의 개념으로 말하면 명민明民이다. 반대로 혼혼昏昏과 민민悶悶은 이장의 우지愚之와 유비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명민明民 ☞ 소소昭昭·찰찰察察 ↔ 혼혼昏昏·민민悶悶 ☜ 우민愚民

民之難治 以其智多(민지난치 이기지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까닭이 백성들의 지혜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지혜가 많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고이지치국 국지적 불이지치국 국지복)

그러므로 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에 해가되고, 지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에 복이 된다.

- 통치자가 부정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감독을 정밀하게 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그 정밀한 감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명민해져서 통치하기 어려워진다.

知此兩者亦稽式(지차량자역계식)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한 기준이다.

- 두 가지는 “지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에 해가 되고, 지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에 복이 된다”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내용을 가부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법칙으로 간직한다는 것이다.

- 계稽는 ‘법’으로 해석된다. 계식稽式은 바로 법식이다. 법칙이자 기준이며 전범典範이다.

常知稽式 是謂玄德 玄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상지계식 시위현덕 현덕심의원의 여물반의 연후내지대순)

 

언제나 이 기준을 알고 있는 것을 현덕이라 한다. 현덕은 심원하다. 사물들과는 반대되지만 그런 후에 아주 크게 순리롭다.

 

정치를 바꾸는 것은 표심이다. 표심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는 바뀌지 않는다. 자기를 진정으로 낮추고 국민을 높이는 그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도록 표심이 바로서야 한다. 쓰레기 들을 보내면 쓰레기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요즘 정치인 들을 보면, 선거 때만 되면 무릎 꿇고 절하고 하다가 당선만 되면 기고만장하여 군림만 하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일인데,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를 않는다. 이런 가식적인 몸 낮추기에 표를 주는 표심이 바뀌어야 그런 정치인 들이 정치판에 발을 못붙일텐데...

계곡 물은 산속에서 흐르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보다 훨씬 높다. 강이나 바다는 이런 계곡 물보다 훨씬 낮아서 계곡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든다. 즉 강과 바다가 자신을 낮춤으로써 온갖 계곡 물의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련 자연의 원리를 근거로 해서 성인도 자신을 낮추는 태

도로 백성들을 통치한다. 자신을 낮추는 말이란 군주 자신이 스스로를 고孤 과寡 혹은 불곡不穀(제39장 참조) 등으로 낮추어 부르는 것을 말한다.

경쟁이나 다툼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앞세우려는 의지들끼리 충돌하여 생기는 현상이다. 자연의 운행 원칙을 모델로 하여 자신을 아예 전체 맥락 속으로 해체해 버리고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낮추어 버리기 때문에 성인에게는 경쟁이나 갈등 자체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道德經 第66章]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 이기선하지)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 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잘 낮추기 때문이다.

故能爲百谷王(고능위백곡왕)

그러므로 온갖 계곡 물의 왕이 될 수 있다.

是以欲上民 必以言下之(시이욕상민 필이언하지)

이러하기 때문에 백성들 위에 서고 싶으면 반드시 자신을 낮추는 말을 써야 하고,

欲先民 必以身後之(욕선민 필이신후지)

백성들 앞에 서고 싶으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 해야 한다.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시이성인처상이민불중 처전이민불해)

이로써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들이 거추장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是以天下樂推而不厭(시이천하락추이불염)

그래서 온 천하가 즐겁게 밀어주고 싫증을 내지 않는다.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이기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이렇게 하여 그는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다.

 

자애롭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고, 검약하기 때문에 넓어질 수 있으며, 감히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온 세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자애로움을 버리고서 용기를 내거나, 검약함을 버리고서 넓히려 하고, 뒤로 불러서는 덕성을 버리고서 이끌려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길이 될 것이로다.

앞에서부터 계속 도를 체득한 자가 도의 형상을 본떠서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를 체현하는 성인으로서의 나(노자)를 위대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계속 낮추고 뒤로 물러서기 때문에 그렇게 분명하게 위대한 형상으로 드러날 수가 없다.

 

[道德經 第67章]

天下皆謂我大 大而不肖(천하개위아대 대이불초)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대하다고 하는데,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 초肖는 “닮다”, “비슷하다”, “그렇게 보인다” 내지는 “본받을 만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불초不肖는 “그대로 본뜬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내지는 “본받을 만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모두들 나를 위대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夫唯不肖 故能大(부유불초 고능대)

오직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능히 위대해질 수 있다.

若肖 久矣其細也夫(약초 구의기세야부)

만약 그렇게 보였다면 오래 전에 이미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我有三寶 持而保之(아유삼보 지이보지)

나는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잘 지키고 보존한다.

- 삼보三寶는 노자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행동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서나 이 세 가지 지침을 지킨다는 뜻에서 그가 보물로 간직하는 것이다.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약함이며 셋째는 감히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慧는 자애로움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따뜻한 눈빛으로 본다는 것이다. 사물이나 사람을 따뜻한 눈빛으로 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하고 신뢰감이 없는 사람에게도 신뢰로 대할 수 있다.

- 검약은 아낀다는 것이다. 제59장에서 말한 색嗇과 같은 내용이다.

- 그리고 “감히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앞장서서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는 통치자에게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세상에 개입시키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대한 자연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장구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거대한 효과들을 거두기 때문이다.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爲成器長

(자고능용 검고능광 불감위천하선 고능위성기장)

자애롭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고, 검약하기 때문에 넓어질 수 있으며, 감히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온 세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 『도덕경』 안에서 기器만 가지고는 천하를 나타낼 수 없다. 『도덕경』 안에서 기器는 어떤 때는 부정적으로 다뤄질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자연성이 인위적 재단으로 조작된 결과물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감히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서지 않는”(不敢爲天下先) 것과 같은 고도의 덕성을 통해서 얻게 된 결과치고는 너무 미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당연히 여기서 성기成器는 천하를 의미한다. 성成은 대大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금사자차용 사검차광 사후차선 사의)

지금 자애로움을 버리고서 용기를 내거나, 검약함을 버리고서 넓히려 하고, 뒤로 불러서는 덕성을 버리고서 이끌려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길이 될 것이로다.

夫慈以戰則勝 以守則固(부자이전즉승 이수즉고)

무릇 자애로움을 가지고 싸우면 이기고, 자애로움을 가지고 지키면 견고하다.

- 자애로움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특별히 용맹스럽기도 하지만, 그 자애로움을 향하여 적군의 백성들이 존경심을 보이고 찾아들기 때문에 당연히 승리를 차지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자애로움을 바탕으로 방비하면 똑같은 이유로 방비가 아주 견고해진다.

天將救之 以慈衛之(천장구지 이자위지)

 

하늘이 장차 누군가를 구하려 한다면, 자애로움으로 그를 지켜줄 것이다.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낮춘다(善用人者爲之下).

 

[道德經 第68章]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弗與 善用人者爲之下

(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선용인자위지하)

장수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용으로 넘쳐 나지 않고, 전쟁을 잘 수행하는 자는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으며, 적을 잘 이기는 자는 적에 맞서 싸우지 않고,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낮춘다.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之極

(시위부쟁지덕 시위용인지력 시위배천지극)

 

이것이 싸우지 않는 덕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사람을 부리는 힘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천도에 부합하는 궁극적인 방침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감한 주체가 되기보다는 객체가 되며,

과감한 일촌一寸의 전진보다는 일척一尺을 후퇴한다.(용병술)

비슷한 힘의 군대가 서로 겨룰 때는 자애로운 자가 이긴다.

“나는 과감한 주체가 되기보다는 객체가 되며, 과감한 일촌一寸의 전진보다는 일척一尺을 후퇴한다.”는 구절은 노자가 『도덕경』을 쓰기 이전부터 익숙하게 듣고 있던 용병술에 관한 격언인데, 노자는 이것을 자기 사상을 전개하는 디딤돌로 활용하고 있다. 전쟁에 관한 것까지 포함해서 노자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도의 형식을 모방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으며 지신만의 강한 의지로 상황을 선도하지 않는 것이다.

제67장에서는 자애로움을 가장 근본으로 하여 자신을 낮추고, 과단성 있는 모습으로 세상을 선도하지 않아야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68장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굳이 대적하지 않아야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낮추고 선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어떤 사태 속에서 주동적이거나 주체적인 자세를 가지고 주인의 형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객체적인 자세를 가지고 손님의 형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제34장에서(不爲主) 주제로 다루었고, 제15장에서는 도를 체득한 성인이 손님처럼 조심스럽고 진중한 태도로 세상사에 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 제15장이나 제34장에서 말한 행위 방식이나 태도는 당연히 도 그 자체의 운행 모습과 일치한다.

이 장에서는 이것을 전쟁의 국면에서 응용하고 있다. 전쟁을 할 때도 먼저 선제공격을 한다든지 주도적으로 덤비는 것보다는 적군의 움직임에 대응하면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道德經 第69章]

用兵有言

(용병유언)

용병술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吾不敢爲主而爲客 不敢進寸而退尺

(오불감위주이위객 불감진촌이퇴척)

“나는 과감한 주체가 되기보다는 객체가 되며, 과감한 일촌一寸의 전진보다는 일척一尺을 후퇴한다.”

是謂行無行 攘無臂 執無兵 扔無敵

(시위행무행 양무비 집무병 잉무적)

이것은 진용을 갖춰 싸우려고 하나 펼쳐진 진용이 없고, 팔을 걷어 불이고 겨루려 하나 부딪칠 팔뚝이 없고, 무장을 하고 싸우려 하나 물리칠 병사가 없으니, 끌고 와서 대적하려 해도 적으로 상대할 만한 대상이 아예 없는 꼴이다.

- 행行은 행진行陣. 혹은 행군行軍의 의미이다. 진용을 펼치거나 군대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진용을 펼쳐서 전투를 벌이려고 하지만, 상대방이 워낙 낮추고 뒤로 물러서며 과감하게 치고 나오지 않는데다가 자애로움까지 갖춰서 결국은 적대시할 진용 자체가 펼쳐지지 않은 꼴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부딪쳐 보려고 하지만 위의 경우와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이 반응하기 때문에 결국은 맞서 부딪칠 팔뚝이 없는 꼴이다. 무장을 하고 전투를 벌이려고 해도 이것은 마치 대적할 병사가 없는 꼴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다 군대를 움직이고 팔을 걷어붙이며 강력하게 무장을 하여도 아예 그것을 써먹을 수가 없다는 말과 같다. 누구를 끌고 와서 대적시켜도 아예 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상대는 이미 낮고 물러서 있으며 자애롭다.

禍莫大於無敵 無敵幾喪吾寶

(화막대어무적 경적기상오보)

화는 적이 없는 것만큼 큰 것이 없다. 적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보배가 거의 없어진 것이다.

- 무적無敵이라는 것은 자기가 너무 강해서 대적할 상대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자애롭지도 못하고 물러설 줄도 몰라서 대적할 상대 자체를 잃어버린 꼴이다. 자기에게 적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아주 강력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보배 즉 삼보三寶를 거의 잃어버려서 자초한 결과이다. 삼보를 지키면 최후의 승리자가 되고, 삼보를 잃어버린 사람은 적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질[無敵] 정도로 수준이 낮아져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故抗兵相加 哀者勝矣

(고항병상가 애자승의)

 

그러므로 비슷한 힘의 군대가 서로 겨룰 때는 자애로운 자가 이긴다.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은 세상世上에 알려지지 않으려한다.

공맹이나 노장이 한결 같이 하는 얘기중 하나.

요즘 세상과는 참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요즘 어질고 덕있는 사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같다.

어떻게든 자신을 세상에 알려 부와 명성만을 쫓아가려하는 소인배들만 넘쳐나고 있으니...

세상도 막장에 가까워졌나 보다.

노자는 자신의 이론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서운해 하고 있다. 다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는 단순히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무엇보다도 통치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채택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들어 있을 것이다. 노자도 그랬고, 공자도 그랬듯이, 당시의 사상가들은 주로 다양한 제후국들에게 통치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희망하였지만, 그들이 생존해 있을 때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노자의 이론은 노자 자신의 말대로 사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고 실천하기도 어렵지 않지만, 당시 주周나라의 예禮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선 이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자가 비록 ‘자연’과 역사에 있는 변화 원칙을 일목요연하게 읽어 내고 그것들을 근거로 일관되게 이론을 전개하였지만, 자신의 존재를 대립면을 향해 포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관계나 변화성은 당시의 문명 체계와는 이미 크게 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자의 언설을 근거나 일관성이 없는 황당한 말로 치부해 버렸던가보다.

노자나 장자에 대한 현대의 이해도 노자가 한탄하던 당시의 이해와 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익숙한 체계와 다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거나 근

거를 밝히기 어려운 신비한 얘기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안에 자신을 지배하던 체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반성적 입장에서 노자나 장자를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조금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노자의 이론은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건립된 것이지, 상대편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양식들이 근거나 방향성 없이 그냥 쌓여진 ‘무더기’가 아니다. 노자의 체계는 제l장부터 제81장까지 거의 흐트러짐이 없이 자신만의 체계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신의 말 즉 주장에는 종지가 있고 실천 방안에는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종지란 바로 비본질적 혹은 해체적 세계관이고, 그 근거란 바로 자연의 운행 원칙이다.

 

[道德經 第70章]

吾言甚易知 甚易行

(오언심이지 심이행)

내 말은 이해하기도 아주 쉽고, 행하기도 아주 쉬운데,

天下莫能知 莫能行

(천하막능지 막능행)

세상에서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구나.

言有宗 事有君

(언유종 사유군)

말에는 종지가 있고, 실천 방안에는 근거가 있음에도,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부유무지 시이불아지)

그러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知我者希 則我者貴

(지아자희 즉아자귀)

나를 이해하는 자도 드물고 나를 따르는 자도 보기 힘들다.

是以聖人被褐懷玉

(시이성인피갈회옥)

그래서 도를 체득한 사람은 갈포를 걸친 채 옥을 품고 있는 것이다.

- 피갈회옥被褐懷玉 : 겉에는 거친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옥을 지녔다는 뜻으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세상世上에 알려지지 않으려 함을 이르는 말

-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화를 내거나 자신을 억지로 드러내지 않고, 그런 보통 사람들 속에 섞여 그들과 공존한다[被褐]. 다만 자신만의 높고 숭고한 이론을 자신만의 내면속에 담아 놓은 채 묵묵히 실천할 뿐이다[懷玉].

 

[왕필주석] 갈포를 걸쳤다는 것은 그 속세와 함께 한다는 뜻이고, 옥을 품고 있다는 것은 그 참됨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언을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가 속세에 있지만 보통 사람들과 달라 보이지 않고 옥을 품고 있지만 전혀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고귀하다.(被褐者, 同其塵, 懷玉者, 寶其眞也. 聖人之所以難知, 以其同塵而不殊, 懷玉而不투, 故難知而爲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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