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노자 도덕경 해설 51~60

수선님 2023. 3. 19. 12:59

도는 우주 만물의 존재 형식에 관한 범주이고, 덕은 그런 도가 구체적인 만물이나 세상사에서 작용을 하는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리가 만물에 구체화되고 내재된 성질이다. 그러므로 도는 낳는다 하고 덕은 기른다고 하는 것이다. 만물이나 기물은 도와 덕이 작용한 한 결과로서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어 드러나고 또 완성된다.

모든 만물은 도와 덕의 이런 작용을 매개로 비로소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완성되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그것들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도와 덕을 존귀하게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람들이 삶의 양식으로 응용해야 할 도와 덕의 특성이 드러난다. 즉 이련 존귀한 작용을 하면서도 그것들은 절대로 만물 위에 자신들의 의지를 개입시키는 통치를 하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연스레 되어 가는 자연의 원리에 맡겨 둘 뿐이다.

 

[道德經 第51章]

道生之 德畜之(도생지 덕축지)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物形之 器成之(물형지 기성지)

만물이 모양을 갖추고, 기물은 이루어진다.

- 기器는 보통의 기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박산즉위기樸散則爲器: 제28장), 제도나 법령 등의 추상적인 도구들도 포함된다.(천하신기天下神器: 제29장, 국지이기國之利器: 제36장)

是以萬物尊道而貴德(시이만물존도이귀덕)

그래서 만물은 도를 높게 대하고 덕을 고귀하게 대한다.

道之尊 德之貴(도지존 덕지귀)

도는 높고 덕은 고귀하지만,

夫莫之命而常自然(부막지명이상자연)

만물에 군림을 하지 않고 향상 저절로 되어 가게 놔둔다.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고도생지 덕축지 장지육지 정지독지 양지복지)

그러므로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기르고 양육하며, 안정시키고 성숙시키며, 돌보고 덮어 준다.

生而弗有 爲而弗恃 長而弗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불재 시위현덕)

무엇을 낳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을 길러 주고도 그것을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고 한다.

 

다시 세계의 진상을 지키는 데로 돌아갈(復守其母) 것을 주장하고, 그 방법으로 세계와 통하는 구멍과 문을 모두 막고 폐쇄해 버리고(塞閉兌門), 명으로 귀결할 것(復歸其明)을 제기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효과는, 죽을 때까지 힘들지 않으며(終身不勤), 자신에게 어떠한 재앙도 남지 않는다(無遺身殃)는 것이며, 습상襲常은 그 방법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道德經 第52章]

天下有始 以爲天下母(천하유시 이위천하모)

이 세계에는 시작이 있는데, 그것이 이 세계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한다.

- 시始와 모母에는 선후 관계가 없다. 모母나 시始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모습이란 어떤 근원이나 실체 혹은 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세계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존재 형식, 즉 진상을 가리킨다.

旣得其母 以知其子(기득기모 이지기자)

만일 이 세계의 진상에 대한 통찰을 얻으면, 그것을 통해 현상 세계를 알 수 있다.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기지기자 복수기모 몰신불태)

현상 세계를 알고 나서, 다시 세계의 진상을 지키는 데로 돌아간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 세계의 진상[母性]에 대한 통찰 내지는 정확한 체득을 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구체적인 세계를 알 수 있다. 만일 구체적인 세계를 알고 이해했으면 그 구체적인 인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다시 그 구체적인 인식을 세계 존재의 진상과 관련시켜 체득하고 거기서 세계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만이 죽을 때까지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세계의 진상인 모母와 관련해서는 득得이나 수守라는 동사를 쓰고,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현상계를 가리키는 자子와 관련해서는 지知라는 동사를 쓰고 있다. 득得이나 수守는 구분을 배제한 종합적인 사고이자 직관이다. 반면, 지知는 구분을 기초로 하는 앎의 행위이다.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새기태 폐기문 종신불근)

세계와 통하는 구멍과 문을 모두 막고 폐쇄해 버리면, 죽을 때까지 힘들지 않을 것이다.

- 태兌는 구멍(입)을 상정한다.(兌爲口: 『주역周易·설괘說卦) 즉 감각 기관들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은 제한적이다. 눈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수 있고, 코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맡고 싶은 냄새만을 맡을 수 있다. 입이 하는 말은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일정한 의미만 담고 또 전달한다. 문門도 주관이 외계와 관계하는 제한된 통로를 의미한다.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는 이 전체 세계에 대하여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의 의욕이나 자신에게 이미 있는 체계를 가지고 일정한 통로를 형성하여 관계한다면 왜곡과 제한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세계와 통하는 구멍을 활짝 열고 복잡한 일거리를 늘린다면, 죽을 때까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 이 왜곡과 제한성은 인간을 갈등 속에 처하게 하며 그것은 일생 동안 인간을 괴롭힐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고 또 역사가 그렇지 않은가? 세계와 관계하는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통로를 폐쇄한다는 것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하는 다른 형식을 얘기하는 것이다.

見小曰明 守柔曰强(견소왈명 수유왈강)

아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것을 명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잘 지키는 것을 강이라 한다.

- 작은 것을 본다(견소見小)는 것은, 단순히 미세한 어떤 것을 보는 능력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나, 그 존재 의미나 사물들 사이의 관계 등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의 배후나, 그 근저의 존재 형식처럼 쉽게 보여 지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능력을 말한다. 성현영은 소小의 의미를 “지극히 묘한 이치”(至妙之理)라고 하였다.

- 여기서 동사를 사용할 때 시視가 아니라 견見을 사용했는데, 시視는 의지가 개입되어 주관으로부터 출발하는 행위이지만 견見은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목적으로 설정하고 내달리는 그런 인식 행위가 아니다. 모든 감관의 개별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자연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거나 그 의미를 포착하는 방식이다.

- 진정으로 강한 것은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드러움은 이 자연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 또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용기광 복귀기명 무유신앙)是爲襲常(시위습상)

그 지혜의 빛을 사용하되, 명으로 귀결되면, 자신에게 어떠한 재앙도 남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습상이라는 것이다.

- 노자의 철학에서는 광光과 명明이 대비되고, 또 지知와 명明이 대비된다.

- 외부를 아는 것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아는 것, 자연의 전체적인 이치를 아는 것,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 제한되지 않는 앎 등을 명明이라는 용어로 나타내고 있다.

- 광光은 어떤 개별 대상을 배타적으로 비추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빛이다. 이것은 구분하고 드러내며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춰야 할 것이다.

 

- 그래서 습상襲常은 날카롭게 빛나는 빛光을 감추는 모습이 된다. 날카롭게 빛나는 빛을 사용하되, 그것을 명明의 품 안으로 돌려놓으면 그것은 이미 경지에 이른 완숙한 모습이 될 것이므로 어떤 재앙이나 허물도 닥치지 않게 될 터이다.

 

자연의 대도를 현실적인 삶과 통치에 운용하려는 노자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으며, 대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사특邪慝한 길로 들어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도를 운용하는 대신에 다른 방식의 통치를 하다가 부패한 길로 들어서 버리는 통치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조정이나 국가가 이렇게 부패하고 재정이 바닥났는데도, 통치자는 여전히 좋은 음식과 날카로운 칼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니, 이것이 도둑의 우두머리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하는 비판이다.

 

[道德經 第53章]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사아개연유지 행어대도)

나에게 조그마한 지혜나마 허락된다면, 대도를 걷도록 하겠다.

唯施是畏(유시시외)

오직 나쁜 길로 들까봐 두려울 따름이다.

大道甚夷 而民好徑(대도심이 이민호경)

대도는 매우 평이한데, 사람들은 비탈길을 좋아하는구나.

- 경徑은 곧게 난 지름길을 가리킨다. 하상공은 이 글자(하상공본에는 경俓으로 되어 있음)를 ‘사특하니 옳지 않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 노자 자신의 철학 체계는 이면적이고, 비언어적이며, 여성적이고, 어머니적이며, 달의 느낌이고, 곡선적이다. 그래서 ‘곧게 난 지름길’을 위험한 길로 묘사한 것은 당연하다.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조심제 전심무 창심허)

조정은 심하게 썩었고, 전답은 극히 황폐하며, 창고는 텅텅 비었다.

服文綵 帶利劍 厭飮食 財貨有餘(복문채 대리검 염음식 재화유여)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차며, 좋은 음식에도 물리고, 재화는 남아돈다.

是謂道夸 非道也哉!(시위도과 비도야재)

 

바로 도둑의 수괴 같은 꼴이구나, 대도가 아니로다!

 

노자 철학의 핵심은 장구長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위적 체계에 집중하는 방식으로는 나라나 개인의 장구함을 유지할 수 없고, 자연의 운행 원리인 도를 실행해야 그 장구함을 유지할 수 있다. 통치자가 나라를 튼튼히 하고 또 그것을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 나라에 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도를 적용시켜 제대로 통치하면 그 통치자는 실각하거나 버림받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그 나라는 종묘사직을 유지하고 자손만대로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유가에서는, 통치자가 도덕성을 회복하여 덕치를 실행하면 인근 사방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그 백성들은 그 성군이 통치하는 나라의 노동력과 군사력이 증가하는 효과를 준다. 그래서 덕치가 부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덕치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에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나’를 수양하고, 그 다음에 수양된 ‘내’가 그 수양된 내용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그런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허를 평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즉 내가 나 자신 안에서 가정을 거쳐 국가 그리고 천하에까지 확장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유가이다.

그런데 노자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부단히 확장하여 천하에 이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단히 자신을 확장한다는 것은 필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체계에 해당되는 신념을 늘리고 키워서 세계에 펼쳐 보이려는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자의 눈에는 제3장에서 말한 바 있는 ‘똑똑한 인재’[현자賢者]가 되어 계속 승승장구하려는 모습이나 사냥터에서 ‘발광’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노자는 자신이나 집안이나 국가 그리고 천하를 더 나은 단계나 높은 곳으로 확충시키기보다는 자신이든, 집안이든, 국가든, 천하든 확 풀어헤쳐 놓고 몸은 그저 몸으로 보고, 집안은 그저 집안으로 보며 동네는 그저 동네로 보고, 나라는 그저 나라로 보며 천하는 그저 천하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각 단계가 더 높은 단계(자신은 집안으로, 집안은 동네로, 동네는 나라로, 나라는 천하로)로 나아가기 위해 희생하는 하위 단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한 집안[가家]이 그 동네[향鄕]에서 내세울 만한 특정한 무슨 꿈을 정해 놓고 모든 가족 구성원[身]을 그 꿈을 실현하려는 큰 기획에 구속시킨다면 그 가족 구성원들의 자연적 개성은 사라지고 자연적으로 집안이 가져야 할 메커니즘 또한 손상을 입어 결국 그 집안은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집안은 집안 자체가 가지는 메커니즘 안에서 이해하고, 한 국가는 그 국가 자체가 가지는 메커니즘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피취차去彼取此의 원칙에서 보듯이 어떤 단계도 “저 멀리” 설정되어 있는 무엇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고, 바로 “여기” 내지는 “그 자체”가 떠 있는 매커니즘 안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道德經 第54章]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자손이제사불철)

잘 심어진 것은 뽑히지 않고, 잘 껴안은 것은 벗겨지지 않아 자손 대대로 계속 이어진다.

- 잘 심어진 것, 혹은 잘 세워진 것, 그리고 제대로 잘 껴안은 것은 통치자가 제대로 나라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잘 심어진 것은 뽑히지 않고, 잘 껴안은 것은 벗겨지지 않아 자손 대대로 계속 이어지게 하는 원리가 함축하는 의미는 바로 ‘도’이다. 도라는 원칙에 의지해서 세우고, 껴안아야 가장 잘 심고 가장 잘 껴안은 것이다.

修之於身 其德乃眞(수지어신 기덕내진)

자신에게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진실해지고,

修之於家 其德乃餘(수지어가 기덕내여)

집안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넉넉해지며,

修之於鄕 其德乃長(수지어향 기덕내장)

동네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오래오래 보존되고,

修之於邦 其德乃豊(수지어방 기덕내풍)

나라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풍성해지며,

修之於天下 其德乃普(수지어천하 기덕내보)

천하에서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이 모두에게 골고루 펼쳐질 것이다.

- 도라고 불리는 원칙을 몸 즉 자신에 적용시키면 그 몸은 진실해지고, 그것을 집안에 적용시키면 그 집안은 넉넉해지며, 그것을 동네에 적용시키면 그 동네는 오래오래 잘 보존되고, 그것을 나라에 적용시키면 그 나라는 풍요로워질 것이고, 그것을 천하에 적용시키면 천하는 모두에게 골고루 펼쳐질 것이다.”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고이신관신 이가관가 이향관향 이국관국 이천하관천하)

그러므로 자신은 자신으로 보고, 집안은 집안으로 보며, 동네는 동네로 보고, 나라는 나라로 보며, 천하는 천하로 본다.

吾何以知天下然哉?(오하이지천하연재)

내가 어떻게 천하가 그러함을 알겠는가?

以此(이차)

 

바로 이런 방식을 가지고서이다.

 

유가의 이상적 인간형은 도덕적 경지가 우주의 영역까지 확장된 성인이다. 그리고 전통의 가치 체계를 꾸준히 학습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도 그 전통과 모순을 빚지 않고 전통과 일치를 이루는 성인이다.

그러나 도가의 이상적 인간형은 부단한 학습 과정을 통하여 특정한 체계와 일치를 이루는 성인이 아니라, 인위적 조작을 모두 벗어나 원래의 자연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인간인데, 그런 이상적 인간형을 적자赤子(갓난애)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적자는 깊고 중후한 수양의 경지를 지닌 도가적 이상 인격을 가리킨다. 갓난애는 노자가 주장하는 최상의 덕목들(무명無名, 무욕無欲, 허虛, 화和, 유약柔弱, 중中, 무위無爲, 불언不言 등)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지만, 이 장에서는 갓난애에 있는 특성 가운데 화和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

 

[道德經 第55章]

含德之厚 比於赤子(함덕지후 비어적자)

덕을 두텁게 함장하고 있는 사람은 갓난애에 비견된다.

蜂蠆虺蛇弗螫 攫鳥猛獸弗搏(봉채훼사불석 확조맹수불박)

벌이나 전갈이나 독사도 그를 물지 않고, 사나운 새나 맹수도 그룹 덮치지 않는다.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會而朘怒 精之至也(골약근유이악고 미지빈모지회이최노 정지지야)

뼈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워도 쥐기는 잘하며, 남녀 사이의 교합을 알지 못해도 고추가 발기하는 것은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 갓난애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데, 물론 이 구절은 자연의 정기를 잘 보존하고 있고 또 자연의 원리인 조화의 상태를 잘 지키고 있는 체도자體道者를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 어린애들은 뼈와 근육은 약하고 부드러워도 쥐는 힘은 매우 강하여 자신의 몸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남녀 사이의 교합에 관해서 아직 모르는데도 고추가 발기하는 것은 몸에 있는 자연성의 정기가 아주 충분하기 때문이다.

- 아무리 건장한 성인이라도 외부로 향하는 의지나 욕망이 강하여 정기가 고갈되면 갓난애만도 못하다.

- 도를 체득하는 수양을 한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의 순환이 조화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내재된 정기가 충분히 회복되거나 간직되어 원래의 자연력을 발휘할 수 있다.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종일호이불사 화지지야)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가 지극한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 훈련이 안된 어른들은 조금만 오래 울거나 조금만 오래 노래를 불러도 바로 목이 쉬는데 갓난애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조화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애에게 후유증이 없이 하루 종일 우는 능력이 있는 것은 자연이 부여한 조화라는 특성 때문이다.

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화왈상 지상왈명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조화가 바로 불변하는 원리이고, 불변하는 원리를 아는 것이 명철함이다. 생을 이롭게 하려고 덧붙이는 것을 괴이하다 하고, 마음이 기를 부리는 것을 굳세다고 한다.

- 조화는 자연의 원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조회는 두 대립면들(유有/무無, 장長/단短, 자雌/웅雄, 남男/녀女, 음陰/양陽 등)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말한다. 이 조화가 바로 우주의 불변하는 원리라는 것이 화왈상和曰常의 의미이다.

- 익생益生은 제50장의 “지나치게 삶을 좋게 하려는 것”이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인

생은 생과 사의 조화인데, 지나치게 삶만을 위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조화를 해치는 것으로, 결국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 지나친 보양이나 지나치게 혈기왕성함을 추구하는 것 등도 포함된다. 그래서 장자는 “자연에 순응해야지 익생益生해서는 안 된다”(장자 덕충부德充符)고 말하였다. 모두 같은 맥락이다.

- 기는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기는 자체에 있는 자연성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마음은 우리의 의지나 욕망이 담겨 있는 곳이다. 마음이 기를 부린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의 흐름이 자연성에 의지하지 못하고 의지나 욕망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이다.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물장즉로 위지불도 불도조이)

 

사물은 기세등등하면 바로 늙어 가는데, 그것은 도를 따르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를 따르지 않으면 일찍 끝나 버린다.

 

자신의 모습을 빛나고 고귀하게 우뚝 세우지 않는 도의 모습이자, 도의 그런 특성을 모방한 성인의 행위 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덕편德篇의 초입부인 제39장의 내용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는 도의 모습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존재를 할양하며, 한쪽으로 경도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세계가 관계와 변화 속에 있다는 자연의 존재 형식[道]을 모델로 하여, 자신을 우뚝 세우지 않고 반대편과의 관계 속으로 해소시킨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주위의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고 같아지는 효과를 거두는데, 이런 상태를 현묘하게 같아진다(현동玄同)라는 개념으로 부른다.

자신을 특정한 본질로 꽉 채워서 다른 것들과 극명하게 구분시키거나 자신을 어떤 특정한 체계를 수행하는 존재로 한정하지 않고, 반대편 것들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을 스며들게 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도’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어떤 특정한 본질이나 체계를 근거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에는 친숙하게 대하고 어떤 것에는 소원하게 대해야 한다는 구분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이로운지 아니면 해로운지는 특정한 기준 아래서만 결정될 수 있다. 따라서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을 해소시켜 버리는 사람에게는 대립적으로 구분된 개념들(친親/소疏, 이利/해害, 그리고 귀貴/천賤)은 아무런 의미를 행사하지 못한다. 이처럼 대립적으로 구분된 가치들 가운데 어느 한쪽을 분명히 견지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을 차지한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법이다.

 

[道德經 第56章]

知者弗言 言者弗知(지자불언 언자불지)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한 자는 알지 못한다.

- 지知는 구분하는 앎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안다’라는 뜻이다. 진정한 앎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언어화하지 않는다. 언어화한다는 말은 명제화 혹은 체계화한다는 뜻이다. 왜 정의 내리거나 체계화하면 안 되는가? 그것은 자연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모든 앎의 행위를 정의 내리고 체계를 세우며 개념화하는 작업으로 귀결시키는 사람은 진정한 앎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의 대상인 세계는 관계와 변화 속에 있는데, 언어적 체계화는 본질을 드러내고 정지된 상태로 지속시키는 활동이므로, 세계의 진상과 언어적 체계는 서로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

(새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폐쇄하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구분을 해소하며, 그 빛을 조화시키고, 그 세속에 같아진다.

- 날카로움[銳짧]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구분되는[分] 경계를 아주 분명하고도 극명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대상을 찰나적으로 드러내거나 포착하는 능력을 또 예리하다고 한다. 자신의 밀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자신의 순도를 강화하면 할수록, 다른 것들과의 질적인 차이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 날카로움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 그런데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반대편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으면서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밀도를 높이고 자신의 순도를 강화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따라서 자연의 이런 존재 형식을 모방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순도를 강화하거나 다른 것들과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

- 광光은 어떤 개별 대상을 배타적으로 비추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빛이다. 하나의 세계로 한정되는 또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 바로 이 빛[光]이다. 그러나 도는 이렇지 않다. 이 세계에 어떤 것도 본질을 가지고 배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도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그런 식의 빛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으로 해소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 빛을 조화롭게 한다는 말이 뜻하는 의미이다. 이렇듯 자신만의 빛[光]을 포기하고 다른 빛들과의 관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이 또 속세 속으로 들어가, 속인들과의 차별이 드러나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이 바로 동기진同其塵의 의미이다. 진塵은 더러운 때나 티끌을 가리킨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속세이다.

是謂玄同(시위현동)

이것을 현동이라고 한다.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고불가득이친 불가득이소 불가득이리 불가득이해 불가득이귀 불가득이천)

그러므로 친할 수도 없고, 소원할 수도 없으며, 이로울 수도 없고, 해로울 수도 없으며, 귀할 수도 없고, 천할 수도 없다.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

 

그러므로 천하에서 귀하게 된다.

 

자신의 모습을 빛나고 고귀하게 우뚝 세우지 않는 도의 모습이자, 도의 그런 특성을 모방한 성인의 행위 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덕편德篇의 초입부인 제39장의 내용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는 도의 모습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존재를 할양하며, 한쪽으로 경도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세계가 관계와 변화 속에 있다는 자연의 존재 형식[道]을 모델로 하여, 자신을 우뚝 세우지 않고 반대편과의 관계 속으로 해소시킨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주위의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고 같아지는 효과를 거두는데, 이런 상태를 현묘하게 같아진다(현동玄同)라는 개념으로 부른다.

자신을 특정한 본질로 꽉 채워서 다른 것들과 극명하게 구분시키거나 자신을 어떤 특정한 체계를 수행하는 존재로 한정하지 않고, 반대편 것들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을 스며들게 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도’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어떤 특정한 본질이나 체계를 근거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에는 친숙하게 대하고 어떤 것에는 소원하게 대해야 한다는 구분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이로운지 아니면 해로운지는 특정한 기준 아래서만 결정될 수 있다. 따라서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으로 자신을 해소시켜 버리는 사람에게는 대립적으로 구분된 개념들(친親/소疏, 이利/해害, 그리고 귀貴/천賤)은 아무런 의미를 행사하지 못한다. 이처럼 대립적으로 구분된 가치들 가운데 어느 한쪽을 분명히 견지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것이 세상을 차지한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법이다.

각장 원문의 해석은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기본으로 하고 일부 다른 참조할만한 해석이 있을 경우 추가한다.

 

노자의 정치를 하는 방법이 와 닿는다. 2천5백여년전에 노자가 설파했던 정치를 잘하는 방법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선 반대로 가고 있다. 국개위원들이 날마다 생각 없이 덕지덕지 붙여놓은 복잡한 각종 제도, 법령들은 국민을 옥죄고 있고, 국민들을 모두 죄인을 만들어 놓는다. 경제관련 제도는 어떤가? 국민들을 부유하게 만들기는커녕 일부 특권층만 살찌우게 한다.(삐딱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엄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국회는 국민들에게 채워진 족쇄를 푸는 방향으로 개혁해야하고,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법령, 제도를 정비해 주어야 한다.

무위자화無爲自化, 호정자정好靜自正, 무사자부無事自富, 무욕자박無欲自樸, 위정자 들은 무위, 호정, 무사, 무욕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국민들은 자화, 자정, 자부, 자박하게 되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이장에서는 ‘유위有爲’의 방식으로 통치를 한 결과 생겨난 폐해들을 나열하고, ‘무위無爲’의 방식을 채택하여 얻어진 좋은 결과들을 논하고 있다. 유위를 행하지 말고 무위를 행하라. 그러면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여러 구체적인 상태들이다.

‘무위,’ ‘호정,’ ‘무사’ 그리고 ‘무욕’은 자연의 운행모습[道]이자 그것을 모델로 통치하는 성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위적 문명 체계가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수행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

화되고, 저절로 올바로 되며, 저절로 부유해지고, 저절로 순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들은 계몽을 통해서 쉽게 실천될 것들이 아니다.

유가나 서양 근대의 본질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이런 방식을 사회 전체적으로 아무리 시행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며, 노자와 같은 해체적 세계관을 가질 때에만 이러한 방식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이런 통치 방식은 세계관의 귀결이지 계몽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道德經 第57章]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이정치국 이기용병 이무사취천하)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사를 움직이며, 무사함으로 천하를 차지한다.

吾何以知其然哉(오하이지기연재)

내가 무엇을 근거로 그러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以此(이차)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서이다.

天下多忌諱 而民彌叛(천하다기휘 이민미반)

세상에 금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들은 점점 등을 돌리고,

- 금기는 백성들을 답답하고 짜증나게 할 수밖에 없다. 많은 금기는 결국 백성들의 자율적 행위를 속박하여 백성들을 가난에 빠뜨릴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멋대로 생산해 내는 집권자에게 등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 더 직접적이다.

民多利器 國家滋昏(민다리기 국가자혼)

백성들에게 향하는 날카로운 도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점점 혼란해지며,

- 이기利器는 제36장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형벌, 규정, 법률 등과 같이 바로 정면으로 기능하는 도구들이다. 이런 규정이나 형벌 및 법률 등은 아주 예리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그것을 이기利器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인위적 조작이 심하게 백성들을 지배하면 할수록 나라는 혼란스러워진다.

人多智 奇物滋起 法物滋彰 盜賊多有(인다지 기물자기 법물자창 도적다유)

사람들에게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상한 것이 점점 많아지고, 좋은 것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도적은 더욱 많아진다.

- 지知나 지智는 노자에게는 명明과 대비되는 낮은 수준의 인식 활동이다. 즉 구분하고 분별하는 외부 지향적인 인식 활동인 것이다. 이런 인식 활동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능력만 키워주지 자연성이 담겨 있는 내면으로 중후하게 침잠하는 성숙이나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통찰을 주지 못한다. 이런 인식 활동은 언제나 자신의 인식을 언어화하려 하고 기교로 전이시키려고 한다. 백성들에게 지혜가 많아지면 교묘한 재주[伎巧]가 생기고, 교묘한 재주가 생기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 법물은 그 사회에서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것으로서 그 당시 가치를 판단하는 근거로 기능하는 물건을 말한다. 현대의 다이아몬드나 주식 혹은 황금 등이다. 귀하고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물건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번성해져 결국 도적이 많이 생기게 된다.

故聖人云(고성인운)

그러므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我無爲而民自化(아무위이민자화)

내가 무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되고,

我好靜而民自正(아호정이민자정)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올바르게 되며,

我無事而民自富(아무사이민자부)

내가 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我無欲而民自樸(아무욕이민자박)

 

내가 무욕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질박해진다.

 

이 세상이 특정한 내용으로 확고하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특정한 내용들로 꽉 채워진 배타적 존재들로 되어 있을 뿐이라고 오해하고 미혹되고 있다.

성인은 이런 미혹에서 벗어나 이 세계가 대립면들 끼리의 관계와 변화 속에 있음을 명철하게 인식하고, 하나의 가치를 고집하거나 자신에게 있는 능력으로 자신을 우뚝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관용과 조화의 미덕을 지니고 세상 속으로 스며든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방정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기준으로 방정한 사람들과 방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방정하지 않은 사람을 배척하기가 쉽다. 또 예리한 사람은 그 예리함으로 다론 사람의 약점이나 허점을 빠르고 정확히 지적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정직하고 솔직한 것도 미덕이기는 하지만, 주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말하고 멋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의 빛으로 다른 사람을 눈부시게 하여 굴복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 속에 있는 대립면들 끼리의 관계와 변화를 체득한 성인은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항상 그 대립면의 견제 속에서 사용한다. 그래서 방정하고 예리하며 솔직하고 빛이 나더라도, 구분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멋대로 하거나, 눈부시게 하는 경우가 없다.

 

[道德經 第58章]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기정민민 기민순순 기정찰찰 기민결결) 그 정치가 어눌하면 그 백성들은 순박해지고, 그 정치가 빈틈이 없으면 그 백성들은 교활해진다.

- 민민[悶悶]은 경계가 없이 모호한 모습이다. 규정을 아주 많이 줄이고 통치자의 존재도 의식되지 않아서 통치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어눌하게 보이는 통치를 말한다. 관용적이고 중후한 심정으로 백성들을 대하는 통치로서, 바로 무위의 통치이다.

- 찰찰[察察]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자세히 살피고 따져서 하는 통치이다. 백성들은 그 규정이 얼마나 자세하고 세밀한지 그 감독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통치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데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는 방법만을 터득해서 교

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로 유위의 통치이다.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 숙지기극)

화로구나! 거기에는 복이 기대어져 있다. 복이로구나! 거기에는 화가 잠복해 있다. 누가 그 궁극을 알겠는가?

- 화인가 하고 보면 그것이 복을 가져오고, 복인가 하고 좋아하다 보면 그것이 또 화가 된다. 이 세상에 누가 어느 것이 불변하는 절대의 화고, 어느 것이 불변하는 절대의 복인 줄을 알겠는가? 대립면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이 세계가 조직되어 있으니, 결국 그런 것은 없다.

其無正(기무정)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正復爲奇 善復爲妖(정복위기 선복위요)

바르게 되어 있는 것은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좋은 것은 다시 요상한 것이 되니,

人之迷 其日固久!(인지미 기일고구)

사람이 미혹된 채 보낸 날이 아주 오래되었구나!

- 이 세상이라는 것이 특정한 내용으로 확고하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특정한 내용들로 꽉 채워진 배타적 존재들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화는 화고, 복은 복이며, 선은 선이고, 기이함은 기이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오해이며 미혹된 생각들인데, 이런 미혹이 이미 오래 지속되고 있음을 한탄한다.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시이성인방이불할 렴이불귀 직이불사 광이불요)

 

그래서 성인은 방정하되 가르지 않고, 예리하되 찌르지 않으며, 솔직하되 멋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 劌(상처 입힐 귀), 肆(방자할 사)

 

이 장은 제38장부터 지금까지의 논의를 중간 결산하는 형식이다. 덕을 쌓는 가장 기초 단계부터, 덕을 지속적으로 쌓아 가면서 커지는 모습, 그리고 장생구시長生久視할 수 있다는 최종결과까지를 단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道德經 第59章]

治人事天莫若嗇(치인사천막약색)

백성들을 다스리고 자신을 닦는 데는 아끼는 것이 제일이다.

- 노자철학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춘추전국시대의 큰 흐름인 천명관(天命觀)을 철저하게 극복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천명天命을 자연으로 과감히 대체하였다. 따라서 천天은 의지를 가진 하늘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인 것”이고, 사事는 “일삼는다” 즉 “기른다” 내지는 “수양한다”로 이해해야 한다. 즉 사천事天은 수신修身이나 치신治身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색嗇(아낄 색) 자의 해석에는 옛날부터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그 해석들을 정리해 보면 ‘사랑한다’[愛]와 ‘절약한다’[儉]는 두 갈래의 의미로 압축된다. 즉, 색 안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아끼는 마음[愛] 없이 아낄[儉]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절약한다는 의미의 아낀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물자의 절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에 집착해 자신의 마음과 정기를 그쪽으로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세계의 존재 형식을 모델로 하는 절제된 상태이고, 바로 지금까지 여러 장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자애롭고 절제된 눈빛으로 자신이나 타인을 대하는 것이 덕을 쌓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夫唯嗇 是以早服(부유색 시이조복)

오로지 아낀다. 이로써 일찍이 따른다.

- 덕을 쌓고 종국에는 나라를 차지해서 장구하게 유지하는 것은 도를 따름으로써, 즉 도에 복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일들이다. 그래서 복服이라는 용어로 드러내는 뜻은 색嗇을 도에 복종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도에 대한 복종은 색嗇 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출발한다는 것이다.

 

노자가 자신의 사상을 펴던 시기의 학술이 갖는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천명관(天命觀)을 극복하고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풀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天은 의지를 가지고 인간이나 자연물 전체를 지배하고,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복종하는 법을 습득해 나가던 관계에서, 인간이 천을 의심하기 시작하다가, 춘추전국시대에는 결국 인격적이고 주재적인 천을 포기하게 된다. 이때 일어난 다양한 사상들이 바로 제자백가이다.

이 가운데서도 노자는 아주 철저하게 과거의 천명관(天命觀)과 단절하고 자연의 존재형식인 도를 가지고 천명天命의 지위를 대체하게 된다. 노자는 이 앞에서 줄곧 동일한 인문주의 테두리 안에서 본질주의적이고 언어 체계적인 사상을 비판하였다면, 이 장에서는 인간의 사고범위를 벗어난 존재에 의탁하는 방식의 통치 즉 천명관(天命觀)에 의존하는 문명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도를 근거로 통치하면 지금까지 큰 영향을 끼쳐왔던 귀신이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모두 도로 귀결되어 자연이 부여한 중후한 덕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장은 제58장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작은 생선을 굽듯이 아끼는 통치를 한다는 것은 도를 근거로 하는 통치인데, 이는 무위의 통치이다. 무위의 통치를 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저절로 순박한 덕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법률이나 규정을 엄격하게 하지 않고 “어눌하게 하는 것”이며, 일정한 체계로 통일시키려하기보다는 자연성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관용하는 통치이다. 유가나 법가의 통치는 통치자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규정을 세밀하게 적용한다. 찰찰察察한 통치를 해서 백성들은 결국 교활하게 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다언多言이나 찰찰察察 등은 백성들을 아끼지[嗇]않고 너무 조이거나 귀찮게 하는 통치이다. 이것은 작은 생선을 구을 때 가지는 조심스런 태도가 아니다.

 

[道德經 第60章]

治大國 若烹小鮮(치대국 약팽소선)

큰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한다. 烹(삶을 팽)

-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한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한다는 뜻인데, 백성들을 아낀다[嗇]는 것이다.

以道莅天下 其鬼不神(이도리천하 기귀불신)

도에 근거하여 천하를 통치하면, 귀신이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莅(다다를 리)

- 작은 생선을 굽듯이 조심스럽게 하는 통치라면 반드시 도를 근거로 해야 한다. 자연의 존재 형식이자 운행 원칙인 도를 근거로 해야지, 인간의 사고 능력을 벗어난 존재에 의탁해서는 안 된다.

非其鬼不神 其神不傷人(비기귀불신 기신불상인)

귀신이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도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

- 귀신이 위에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귀신은 인간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나아가야 할 곳과 나아가지 말아야 할 곳 등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정해 놓고 인간을 억압하고 또 귀찮게 한다. 귀신의 이런 군림은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하는 조심스럽고 아끼는 태도가 아니다.

非其神不傷人 聖人亦不傷人(비기신불상인 성인역불상인)

신이 사람올 해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인 역시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

夫兩不相傷 故德交歸焉(부량불상상 고덕교귀언)

무릇 이 둘이 해치지 못하는 까닭에 덕이 모두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 이런 점에서는 성인도 똑같다. 그런데 자연의 도를 체득하고 그 원칙을 통치의 근거로 사용하면 귀신이 더 이상 인간 위에서 군림하는 위치를 차지할 수 없고, 성인도 도를 근거로 하는 통치를 하면 자신의 의지대로 백성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早服謂之重積德(조복위지중적덕)

일찍이 따른다는 것은 끝없이 덕을 쌓음을 말한다.

重積德則無不克(중적덕즉무불극)

끝없이 덕을 쌓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無不克則莫知其極(무불극즉막지기극)

하지 못할 일이 없으면 그 한계를 알 수 없다.

- 하지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은 그 한계가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런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라면 당연히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무한한 능력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느 한쪽 편에 기울거나 어느 한쪽을 자신의 입장으로 분명히 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莫知其極可以有國(막지기극가이유국)

그 한계를 알 수 없으면, 나라를 차지할 수 있고,

有國之母可以長久(유국지모가이장구)

나라를 지키는 도를 가지고 있으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시위심근고저 장생구시지도)

 

이것이 바로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하며, 장구하게 유지하는 이치이다.

 

암컷[牝]은 자신을 낮추고 넓은 포용력을 가진 특성 때문에 물[水]과 함께 『도덕경』의 핵심 상징어이다. 따라서 앞부분에서 물[下流]과 암컷을 직접 비유하여 큰 주제로 삼은 다음에, 세상사에서 암컷이 고요함[靜]이라는 구체적 특징으로 수컷[牡]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 따뜻한 모성의 품으로 새끼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은 실제적 효과를 거두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큰 나라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천하의 영도적인 위치에서 작은 나라들을 취하고 인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지만, 논의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즉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되면 작은 나라는 그 작은 나라에 맞는 효과로써 큰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제는 자신을 낮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라는 것인데, 이는 물론 도의 운행 원칙이기도 하다.

암컷은 조용한 성품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는데, 겸하하는 이런 덕성이 대국이나 소국에게 모두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준다. 물론 크고 작건 간에 모든 나라는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모든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여기서 조용함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되는 암컷은 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암컷의 모습은 바로 도의 모습이고, 이것이 결국 도를 실천해서 얻게 되는 효과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도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변형된 설명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출처] 노자 도덕경 해설 51~60|작성자 도로아미타불아멘

'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 도덕경 해설 71~81  (0) 2023.04.02
노자 도덕경 해설 61~70  (1) 2023.03.26
노자 도덕경 해설 41~50  (2) 2023.03.12
노자 도덕경 해설 31~40  (2) 2023.03.05
노자 도덕경 해설 21-30  (0) 202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