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노자 도덕경 해설 71~81

수선님 2023. 4. 2. 12:23

아는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최상의 덕이다. (지부지상知不知上)

성인은 왜 알면서도 잘 모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가?

아는 사람이 잘 모르겠다고 할 때의 부지不知는 단순히 모른 척 한다거나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분의 기능을 하는 지적체계 안에다 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이 아는 내용을 굳건한 체계적 형태로 만들어 이데올로기화하지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런데 진정한 앎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내용을 체계화하거나 이념화해서 결국 다른 체계와 분명한 선을 그으려 하게 되는데, 노자는 이것을 아주 잘못된 것 즉 병이라고 한다. 성인은 그와 같은 지적 활동이 아주 잘못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道德經 第71章]

知不知 上(지부지 상)

아는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최상의 덕이다.

不知知 病(부지지 병)

잘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안다고 하는데, 이것은 병이다.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성인불병 이기병병 시이불병)

성인은 이런 병을 앓지 않는데,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을 아끼지만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통치의 최고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의 위엄이나 억압 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단지 통치자의 존재만 희미하게 느낄 뿐이다(제17장 참조). 이런 단계에서 참된 권위가 비로소 형성된다. 백성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계에까지 올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억지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괴롭히면 백성들은 통치지를 무서워하고 결국 싫증내게 되어 통치는 허물어져 버린다.

백성들이 그 통치에 염증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통치자들이 자신을 낮추거나 물러서서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방식의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과 의지를 드러내고 자신의 그런 관점과 의지대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 통치자는 자신을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위로 우뚝 세워 자신을 고귀한 위치로 올려놓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도를 체득한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는 노자의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다.

 

[道德經 第72章]

民不畏威 則大威至

(민불외위 즉대위지)

백성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진실로 큰 위엄이 설 것이다.

無狎其所居 無厭其所生

(무압기소거 무염기소생)

그들의 거처를 핍박하지 말 것이며, 그들의 삶을 힘들게 하지 말라.

夫唯不厭 是以不厭

(부유불염 시이불염)

힘들게 하지 않으면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是以聖人自知不自見 自愛不自貴 故去彼取此

(시이성인자지불자견 자애불자귀 고거피취차)

이런 이치로 성인은 자신을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을 아끼지만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자애自愛는 노자가 말하는 삼보三寶 가운데 자慈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자신을 아끼는 것은 저 멀리 설정되어 있는 무슨 체계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자체가 목적이며 기준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속한다.

 

- 자귀自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귀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것은 당시 문화 체계와 같은 저쪽의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저것’에 속한다.

 

자연은 견강하고 앞으로 나서며 체계화하고 세밀히 구분하는 것 등을 싫어한다. 노자는 자연이 싫어하는 이런 것들을 부정적으로 대한다. 그러나 자연이 왜 이런 것을 싫어하는지 그 까닭을 알기는 어렵다. 자연 현상의 운행 원칙을 보고 거피취차去彼取此 함으로써 체득한 것일 뿐이다.

주역의 원리나 노자의 철학 체계는, 자명한 제1원리 혹은 제 I명제를 토대로 하여 거기서부터 의심할 수 없는 단계적 연역 추론을 거쳐 성립된 이론이 아니고, 자연의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장구한 역사적 변화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성립된 것들이다.

 

[道德經 第73章]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과감하게 하는 용기가 있으면 죽고, 과감하게 하지 않는 용기가 있으면 산다.

此兩者或利或害

(차량자혹리혹해)

이 두가지에서 어떤 것은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롭다.

天之所惡 孰知其故?

(천지소오 숙지기고)

자연이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 누가 그 이유를 알겠는가?

是以聖人猶難之

(시이성인유난지)

그래서 성인은 오히려 망설인다.

- 성인의 명철함을 가지고도 용감하게 나서지 못하는데, 허물며 성인의 명철함도 없으면서 과감하게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天之道

(천지도)

천도는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부쟁이선승 불언이선응 불소이자래 천연이선모

천망회회 소이불실)

다투지 않고도 잘 이기고, 개념화하지 않고도 잘 반응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여유 있게 잘 도모한다. 자연의 망은 넓고도 넓다. 듬성듬성하지만 빠뜨리는 것은 없다.

- 세계에 대하여 정의나 개념화된 언어 체계를 가지지 않고도 잘 반응한다는 말이다. 유가에서는 개념을 분명히 정의하고[正名], 그렇게 잘 정비된 개념들끼리의 조직으로 형성된 내용을 전통으로 형성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사용한다.

- 노자가 공자와 다른 형태의 문명관을 가지게 된 것은 공자처럼 인위적 전통을 기준으로 할 때에 그 기준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계층이 형성되고 또 그 기준으로부터 배제되는 부류가 필연적으로 형성되어, 계층 간이나 또는 그 기준에 부합되는 부류와 배제되는 부류 사이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배제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자연을 모델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자연무위’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되듯이 자연의 운행 원칙을 모델로 한 문명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연의 운행 원칙은 자연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빠뜨림이 없이 모두 자신의 품 안에 담고 있다.

 

자연을 모델로 한 문명 체계는 법률이나 인위적 예학禮學 체계처럼 조밀하지 않고 듬성듬성하다. 그러나 자연의 운행 원칙을 모델로 하여 듬성듬성한 것이 오히려 모두 다 끌어안을 수 있는 특징으로 작용한다.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죽인다고 겁을 주어도 백성들은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운 것이 되도록 하면, 즉 삶이 죽음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상황을 개선시키면, 죽인다고 하는 말이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잡아서 죽인다는데,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운행 원칙은 죽일 것은 죽이고 살릴 것은 살리는 데에 전혀 어그러짐이 없이 작용한다. 자연의 이런 모습처럼 나무의 수명과 원리를 훤히 알고 있는 목수는 그 나무의 조건에 맞추어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무리가 발생하지 않아 손을 다칠 일이 없다. 그런데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나무를 다루다가는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하여 향상 손에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 이는 강직하고 포악한 통치자가 자연의 원리보다는 자신의 이념 체계에 더 매달려서 백성들을 가벼이 대하는 것을 비판하고, 그 결과로 통치자 자신에게 닥쳐올 징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나 경고가 단순히 계몽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에 대한 저 깊은 통찰과 연관되어 있다. 즉 세계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반대편을 향해 개방하면서 관계와 변화 속에 있음을 통찰하지 못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앞세우며 자신을 고귀한 위치로 끌어올리려고 하게 된다, 그러면 또 여기서부터 필연적으로 폭정과 억압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道德經 第74章]

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민불외사 나하이사구지)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찌 죽인다는 것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若使民常畏死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 孰敢?

(약사민상외사이위기자 오득집이살지 숙감)

만약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면 이상한 짓을 하는 자를 내가 잡아서 죽인다고 할 때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는가?

常有司殺者殺

(상유사살자살)

항상 죽이는 일을 관장하는 자가 있어서 죽이는데

- 온 천하에는 죽이는 일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자가 있다. 그건 바로 자연이다.

夫代司殺者殺 是謂代大匠斲(부대사살자살 시위대대장착)

죽이는 일을 관장하는 자를 대신하여 죽이는 것은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베는 것과 같은 말이다.

- 통치자가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끌고 가면서 따라오지 않은 사람들을 감히 죽이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분수를 넘어선 일이다. 마치 목수를 제쳐놓고 목수 대신에 나무를 베는 사람과 같다.

夫代大匠斲者 希有不傷其手矣(부대대장착자 희유불상기수의)

 

대저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베는 자는 그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상충 계급에서 화려하고 고귀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 재물을 충당하는 과정 속에서 백성들은 자연히 착취당하고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통치자에게 염증을 느끼면, 살아 있는 지금보다 죽은 다음의 세계가 더 낫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볍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포자기하는 상태로 그냥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불사하고 통치자에게 덤비고, 갈아치우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이 가진 재화는 일정한데, 위에서 많이 거두어 가면 백성들이 굶는 것은 당연하다. 위에서 백성들에게 많이 거두어 가는 것도 사실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유위有爲의 통치를 한 결과이다. 유위의 통치는 법률을 치밀하게 하고 통치 이념을 확고하게 해서 백성들을 거기로 통일시키는 방식의 통치를 말하는데, 이런 유위의 통치는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지속적인 곤란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제58장에서 “그 정치가 빈틈이 없으면 그 백

성들은 교활해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빈틈없는 정치란 바로 유위의 정치를 말함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교활해졌다는 말에는 그런 정치를 가지고는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道德經 第75章]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민지기 이기상식세지다 시이기)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굶주린다.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민지난치 이기상지유위 시이난치)

백성들을 다스리기 힘든 것은 위에서 유위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렵다.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민지경사 이기상구생지후 시이경사)

백성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위에서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부유무이생위자 시현어귀생)

대저 잘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삶을 고귀하게 하려는 것보다 낫다.

 

-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이 없는 백성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급급한 통치자들을 결국 물리칠 수 있다는 당시의 역사적 경험이나 예언도 담겨 있다.

 

자연의 이치를 삶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의 운행은 부드럽고 유약하며 은미하다. 그런데 특정한 문화 체계를 전통으로 확립하고 거기에 모든 백성들을 통일시키려 하는 통치 방식은 강하고 뻣뻣하게 운용될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는 법가가 그러할 것이다. 강대한 것은 대부분의 인위적 문화 체계이고, 부드러운 것은 자연의 운행 방식이다. 그러므로 통치나 개인의 수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운행 원칙인 ‘도’를 모델로 해야 한다. 우리의 몸도 어린 시절에는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뻣뻣해진다. 세계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더 관용적일 수 있고,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용감하고 신념이 강해진다.

 

[道德經 第76章]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지만 죽으면 뻣뻣해진다.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만물초목지생야유취 기사야고고)

만물 초목도 살아 있으면 유연하지만 죽으면 딱딱해진다.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고견강자사지도 유약자생지도)

그러므로 뻣뻣한 것은 죽어 있는 무리이고 부드러운 것은 살아 있는 무리이다.

是以兵强則滅 木强則折

(시이병강즉멸 목강즉절)

이런 이치로 보면 군대도 견강하면 패하고 나무도 강하면 부러진다.

强大處下 柔弱處上

(강대처하 유약처상)

 

강대한 것은 하위에 처하고 유약한 것이 상위에 처한다.

 

성인은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聖人 爲而弗有 功成而弗居 성인 위이불유 공성이불거)

통치자의 착취를 말하고 있다. 제75장에서 통치자들이 호화롭게 잘 살려고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고, 이에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지경까지 이르는 일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그것이 이 장에서는 부족한 백성들로부터 착취하여 여유 있는 통치 계층을 봉양하는 일로 묘사되었다.

이런 부정적인 경향은 쉽게 개선될 수가 없고, 오직 자연의 운행 원칙인 도를 체득한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도를 체득한 성인만이 자연이 하는 것처럼 남는 곳에서 덜어 와 부족한 곳을 채워 줄 수 있다.

성인은 이런 이치를 체득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유에다가 여유를 다시 더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남는 곳에서 덜어 와 부족한 곳을 채워 주는 자연의 이치를 어기고 스스로 불균형을 초래하는 일을 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공에 대해서도 똑같다. 공을 이루고 그 공에 거하면 자신의 여유가 더욱 증가하게 되어 천도를 어기고 인도를 따르는 형국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자기에게 있는 우월한 점을 드러내 보이거나 그것을 기초로 명예나 재물 혹은 권리를 축적해 가지 않는 태도이다.

 

[道德經 第77章]

天之道 其猶張弓與!

(천지도 기유장궁여)

자연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 같구나!

高者抑之 下者擧之

(고자억지 하자거지)

높으면 눌러주고 낮으면 들어준다.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유여자손지 부족자보지)

남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 준다.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천지도 손유여이보부족)

자연의 도는 남은 것을 덜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데,

人之道 則不然

(인지도 즉불연)

인간의 도는 그렇지 않다.

損不足以奉有餘

(손부족이봉유여)

부족한 데서 덜어내어 여유 있는 쪽을 봉양한다.

孰能有餘以奉天下

(숙능유여이봉천하)

누가 남는 것을 가지고 천하를 봉양할 수 있겠는가

唯有道者

(유유도자)

오직 도를 체득한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是以聖人爲而弗有 功成而弗居 其不欲見賢(시이성인위이불유 공성이불거 기불욕견현)

 

이련 이치로 성인은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나은 점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언약반正言若反, 정면으로 하는 옳은 말인데 그 반대처럼 들린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는 중심 모티브로 물을 사용한다. 물은 모든 것을 윤택하게 해 주면서도 낮고 겸손하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마치 도의 운행 모습과 같다.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이 물의 유연함을 이겨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이러한 이치 즉 유연하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 이치를 통치자들은 가볍게 다루면 안 된다. 즉 그 이치를 소중하고도 무게 있게 받아들여 실천해야한다.

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는” 이치를 쉽게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얼른 실천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치가 눈앞에 서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치를 체득하여 세상에서 허물로 이해되는 것을 오히려 자신이 감당하고, 세상에서 좋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오히려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면, 능히 종묘사직을 책임지는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장자·천하』에 나오는 “천하의 허물을 다 받아들인다.(曰受天下之垢)”는 노자의 말에 대해서 곽상이 주해를 하면서 구垢를 여성성[雌], 더러움[辱], 물러섬[後], 낮아짐[下] 둥으로 해석하였다. 즉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싫어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런 것들을 모두 도의 모습 내지는 도를 체득한 성인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허물’이나 ‘상서롭지 못한 것’ 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지만, 도를 체득한 성인은 오히려 기꺼이 자신의 행위 내용으로 포함시키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곡曲, 왕枉. 와窪, 폐弊, 소少, 유柔, 약弱, 천賤, 손損, 색嗇, 자雌, 검儉, 후後, 하下, 고孤 과寡, 불곡不穀 등이다.

그런데 이런 ‘허물’과 ‘상서롭지 못한 것’들이 오히려 큰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노자는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노자의 주장은 ‘도’에 합치하는 진리의 언설이지만 세속인들에게는 전혀 반대의 말처럼 들린다. 이것이 정언약반正言若反의 의미이다.

노자의 정언약반은 공자의 정명正名과 바로 반대되는 표현법이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 사이를 특정한 의미나 내용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노자에게는 대립면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다. 언어의 사용 습관, 문장의 구성 및 문법 체계는 사용자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공자의 정명과 노자의 정언약반을 비교해 보면, 둘 사이의 세계관의 차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공자에게는 반대되는 두 개념이 각자의 의미 안에서 자족적으로 존재하면서 대립되어 있지만, 노자에게는 반대되는 두 개념이 각자의 위치를 이탈하여 반대편으로 스며들어가 있다.

 

[道德經 第78章]

天下莫柔弱於水 而功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천하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막지능승 이기무이역지)

세상에서는 물이 가장 유약하지만, 공력이 아무리 굳세고 강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겨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런 이치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弱之勝强 柔之勝剛

(약지승강 유지승강)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天下莫不知 莫能行

(천하막불지 막능행)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행하지를 못하는구나.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之不祥 是謂天下王

(시이성인운 수국지구 시위사직주 수국지불상 시위천하왕)

이런 까닭에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허물을 받아들이니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니 천하의 왕이라 하는 것이다.

正言若反(정언약반)

 

정면으로 하는 옳은 말인데 그 반대처럼 들린다.

 

자연의 이치는 편애함이 없으나,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天道無親 常與善人천도무친 상여선인)

무친無親은 유가의 친친親親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노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가 토대로서 보장되는 사회의 건설을 희망하였고, 노자는 이 세계가 특별한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나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명백하게 상반된 두 입장이 형성되었다. 노자가 보기에는 천지자연이 무엇을 특별히 더 친하게 여기는 구석이 없기 때문에 장구하게 유지되듯이, 성인은 이런 무친한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항상 선인을 도와주게 되고 선인과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정언약반식의 언설이다. 무친하면 착한 사람이 그만한 보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노자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 무친해야만 선인이 자신이 한 선행에 걸맞은 보답을 받게 된다는 것이 노자의 더 깊은 뜻일 것이다. 친소의 감정이 개입되어 사철司徹(행적을 따짐)의 지경이 되면, 선과 악은 혼동될 수밖에 없다.

 

[道德經 第79章]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화대원 필유여원 안가이위선)

큰 원망을 해소한다 해도 반드시 남는 원망이 있으리니, 어찌 선이 될 수 있겠는가?

- 감정에 깊은 손상을 당하여 품게 되는 것이 원망인데, 인간에게 한번 생겨난 원망은 비록 그것이 화해되고 해소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소멸되지 못하고 원망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원망을 해소하거나 화해시키려는 노력의 결과가 선으로 귀결되지는 못한다.

是以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

(시이성인집좌계 이불책어인)

그래서 성인은 채무자 같은 태도를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

- 좌계는 채무자의 위치이다. 이것은 垢이며 불상不祥일 뿐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물의

형상을 응용한 또 하나의 메타포인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추다가 채무자의 형상으로까지 이끌려 간다. 채무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책망하거나 독촉하지 않는다.

有德司契 無德司徹

(유덕사계 무덕사철)

덕이 있는 사람은 계약서를 따지고, 덕이 없는 사람은 행적을 따진다.

- 사司는 주관한다는 뜻이다. 사계司契는 계약서 내지는 원칙을 주관한다는 의미이자 계약서대로 혹은 규정대로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담담히 계약서만 지키지 주관적 의지 내지는 친소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유덕한 사람은 담담히 무심한 태도로 그 사태를 그 사태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덕한 사람은 거기에 친소의 감정이라든지 선입견 혹은 기존의 가치관을 개입시켜서 그 사태를 자신의 주관으로 끌어들여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다.

天道無親 常與善人(천도무친 상여선인)

 

자연의 이치는 편애함이 없으나,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노자는 자신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구체화되어 운용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규모가 작아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의 고대 역사는 “작고[小] 많은[多] 나라”에서 “크고[大] 적은I少] 나라”로 국가의 형태가 이행하는 과정이었다.

크고 적은 나라를 최초로 이루어 낸 사람이 진시황이었고, 크고 적은 나라라는 이상을 완성하는 과정이 바로 한漢나라로의 ‘통일’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아직 “작고 많은 나라”의 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을 척결하지 못한 채 “크고 적은 나라”로 이행하는 과정을 너무 서두르다가, “작고 많은 나라”의 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의 저항을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 단명에 그쳤다.

진나라의 멸망부터 한고조 유방의 건국을 거쳐 한무제까지의 시기는 이 “작고 많은 나라”를 지향하는 세력과 “크고 적은 나라”의 형태를 지향하는 세력 간의 충돌 조정 기간으로 볼 수 있다. “크고 적은 나라”란 바로 중앙집권 체제로서 ‘군현제郡縣制’로 표현된다. “작고 많은 나라”란 분봉제이며 지방분권 내지는 지방자치의 체제이다.

한고조 유방은 진시황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안정된 통일을 이룰 목적으로, 두 체계를 공존시키는 ‘군국제’(郡國制 : 여기서 군郡은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인 군현제를, 국國은 지방분권적 봉건 체제를 지향하는 제후국을 말한다.)란 체제를 실시함으로써 잠시 조정해 둔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 방향은 여전히 “크고 적은 나라” 즉 중앙집권적 통일로 향해 있었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완성한 때가 한무제漢武帝 때이다.

이 두 세력에 이데올로기룹 제공하던 대표적인 두 철학자로 동중서董仲舒와 회남자淮南子가 있었다.

집중과 통일을 지향하는 유가의 철학을 주장하는 동중서가 한무제에게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은 국가 체제와 철학 체계가 상호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노자는 집중과 통일 그리고 확장보다는 분산과 해체 속의 자율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도가의 철학은 통일 국면이 와해되어 나라가 여럿으로 쪼개져 있을 때 등장하였다가 통일을 이룬 후 안정기에 접어들면 그 자리를 유가에게 양보하곤 하였다. 진시황 이후 한무제까지의 분열 국면, 후한의 분열기부터 위진까지, 수당 이전의 남북조 등을 보면 국가가 작고 많은 나라로 쪼개져 있을 때 노자를 위시한 도가가 전면에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는 거대 국가 지향이었다. 더 크고 더 통일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통치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표준화, 통일성, 단일성, 일관성 등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다양성, 차이성, 공존, 상대성 등이 부각되고 있다.

노자는 인위적 문화 체계의 확대 전수나 일정한 내용으로 형성된 전통의 확립을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자는 그런 것들이 인간의 본래성과 자율성 내지는 진정한 평화를 오히려 해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저 멀리 설정되어 있는 이상을 향해 가지 말고 지금 가까이 접촉되는 자연적 직접성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거피취차’의 태도이다.

 

[道德經 第80章]

小國寡民

(소국과민)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룰 적게 하라.

使有什伯人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사유십백인지기이불용 사민중사이불원사)

많은 도구가 있더라도 쓸 일이 없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생각하여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 십백인지기는 사람의 열배 내지는 백 배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를 말한다. 무기까지도 포함해서 사람을 대신해서 사람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가리킨다. 그런 도구들은 모두 자신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가지고 있는 가치나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 봉사한다. 즉 외부로 향한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인 것이다.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들을 적게 유지하는 국가 체제에서는 굳이 밖으로 향한 욕망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런 도구들은 쓸 필요가 없게 된다.

- 죽음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일이자 가장 큰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설정된 이상으로부터 부과되는 억압에 습관이 되어 본래의 자연성을 하찮게 여기고, 인위적 가치에 훨씬 큰 비중을 두게 되어 버린다. 노자는 우리에게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 가치와 기준에 매몰되어 무엇이 진정한 가치이고 무엇이 진정하지 않은 가치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부로 향한 욕망에 이끌려 멀리 멀리로만 나아가지 말라고 한다.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수유주여 무소승지 수유갑병 무소진지)

배와 수레가 있더라도 탈 일이 없고, 군대가 있더라도 펼칠 일이 없다.

使人復結繩而用之

(사인부결승이용지)

백성들로 하여금 결승 문자를 회복하여 쓰게 한다.

- 결승結繩 문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자 가운데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진시황이 통일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문자의 통일인데, 이는 사상의 통일과 바로 연결된다. 문자의 통일이란 단순히 하나의 언어로 통일한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문자의 개념을 통일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결승은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의 약속으로서, 거기에는 개념의 통일보다는 그 지역적인 차이, 결승자의 정서가 훨씬 짙게 배어 있다. 통일 국가로 나아가려는 당시의 흐름 속에서 노자는 많은 모순을 발견하고 결승이라는 것을 매개로 그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통일 국가의 건설은 필연적으로 사상의 통일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하나의 단일한 사상으로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락기속)

그 음식을 맛있어하고, 그 옷을 곱다고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해 하고, 그 풍속에 기꺼워한다.

-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노자의 주장이 들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의 문명관(특히 서구적 문명관)으로 우열을 가늠하는 데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다른 것들끼리의 공존보다는 선/악, 진/위, 지배/피지배의 구도로 세계는 흘러 왔다. 우리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단일한 가치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강자의 지배와 공격은 악으로 다뤄질 수 없고, 오히려 선의 행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이 구절은 ‘거피취차’의 또 다른 응용이다.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린국상망 계견지성상문 민지로사 불상왕래)

 

옆 나라끼리 서로 바라다 보이고, 개 짖는 소리나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의 마지막 장의 전반부이다.

요즘에는 대개의 앎이 진/위의 구분에 한정되어 있어서, 앎이 행복이나 성숙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많이 아는 것이 더 많은 행복을 주지 못하고, 지식이 많은 것과 인간적 성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 버렸다. 고전의 학문 방식과 경구에 주의를 기울여 앎과 성숙이 깊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자의 정명正名이 단순히 언어나 인식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정치론으로까지 확대되었고, 노장의 지智나 변辯도 단순히 앎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인성이나 정치론 및 인간의 성숙의 모습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道德經 第81章 前]

信言不美 美言不信

(신언불미 미언불신)

미더운 말은 번지르르 하지 않고, 번지르르 한 말은 미덥지 않다.

- 노자는 충忠과 신信을 긍정하고 강조한다. 신信은 인위적 조작이 닿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 인위적 가치를 향하거나 거기에 편입되기 이전에 인간에게 있는 참된 모습을 말한다. 즉 꾸며지기 이전의 상태이다.

- 미언美言 즉 번지르르한 말은 치장된 말이다. 치장되었단 말은 거기에 이미 인위적 조작과 의지 내지는 의도 및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은 번지르르할 수밖에 없다.

善者不辯 辯者不善

(선자불변 변자불선)

선량한 사람은 따지지 않고, 따지는 사람은 선량하지 않다.

- 제33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회남자(지지소부지智之所不知 변불능해야辯不能解也)도 변辯과 지智를 대구로 배치하고 있다. 이런 대구들도 모두 특정한 기준이나 체계로 갈무리하는 지적 능력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장자는 「제물론」에서 변을 구분이나 다툼 또는 경쟁의 의미와 같은 테두리에서 사용하고 있다.

노자도 이미 변을 단순히 인식의 범위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인성에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다. 즉 꼬치고치 따지면서 이기려 드는 사람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知者不博 博者不知

(지자불박 박자불지)

아는 자는 넓지 않고, 넓은 자는 알지 못한다.

- 노자는 외적 대상을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구분하여 아는 능력을 지智라고 부르고, 대체로 그런 인식 방식을 부정한다. 노자가 주장하는 인식 방식은 명明이라는 범주에 잘 드러나 있다.

- 노자가 인정하는 앎은 주체가 가지고 있는 체계를 통해서 외부 대상에 대한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본래적으로 있는 본질적 의미를 체득해내는 것이다. 이런 인식 능력을 노자는 명明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박식하다는 것은 외부 대상에 대한 지식이 넓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런 앎에 별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박식하다는 것은 이미 시선이 외부로 열려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박식하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그 사람의 인식의 태도가 ‘명’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천도天道를 진리의 영역으로, 인도人道를 진리가 손상된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인도는 천도를 근거로 하거나 천도를 추종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지도人之道는 무엇을 하더라도 천지도天之道와 달리 이이불해利而不害나 성인부적聖人不積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道德經 第81章 後]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성인불적 기이위인 기유유 기이여인 기유다)

성인은 쌓아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모두 베푸는데 자기가 오히려 더 갖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모두 줘 버리는데 자기 것은 오히려 더 많아진다.

- 도를 실천하는 성인이 무엇도 자신을 위해 쌓아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뒤서면 결국 앞서게 되고, 낮추면 결국 고귀해진다는 식으로 노자가 말하는 일관된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또 다론 표현 방식인 것이다.

天之道 利而不害 人之道 爲而弗爭

(천지도 이이불해 인지도 위이불쟁)

자연의 도는 이롭게 해 주면서 해를 끼치지 않고, 인간의 도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 부정사 불弗 자에는 종종 목적격 대명사가 감추어져 있다. 그렇다면 위이불쟁爲而弗爭은 위이부쟁지爲而不爭之와 같은 의미가 된다. 지之라는 대명사는 바로 앞에서 말한 “자연의 도는 이롭게 해 주면서 해를 끼치지 않는다.”(天之道 利而不害)를 가리키거나 혹은 “성인은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모두 베푸는데 자기가 오히려 더 갖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모두 줘 버리는데 자기 것은 오히려 더 많아진다.”(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를 가리킬 것이다.

 

- 쟁爭은 단순히 다투거나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려하다’ 내지는 ‘따지다’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 따라서 인지도人之道는 무엇을 하더라도 천지도天之道와 달리 이이불해利而不害나 성인부적聖人不積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출처] 노자 도덕경 해설 71~81|작성자 도로아미타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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