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0.월초거연 - 참선과 경전 교육을 기본으로 삼으라

수선님 2023. 4. 9. 12:54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0.월초거연

참선과 경전 교육을 기본으로 삼으라

 

 

망국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 황실은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가피를 입기 위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월초거연(月初巨淵 , 1858~1934) 스님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구하고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동국대 전신인 명진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월초스님의 수행일화와 행장을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에 있는 비문과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불교> 등을 통해 조명했다.

 


“참선과 경전 교육을 기본으로 삼으라” 
  동국대학교 전신 ‘명진학교’ 설립
  승려교육ㆍ인재불사에 적극 나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중심에 있던 월초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내방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당신을 드러내는 일을 즐기지 않았던 월초스님은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이 특이했다. 누군가 방문하여 “큰스님을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신지요”라고 인사 하면, 스님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내방객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는 안녕하오. (나를) 다 보았지요. 이제는 그만 가보시오.” ‘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해서 맞이했고, 보여줄 만큼 보여줬으니 이제는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사진> 월초거연 스님 진영.

○…월초스님의 속가 집안에는 궁궐에 ‘홍상궁’이 있었는데, 고종황제 등 황실의 신임이 돈독했다고 한다. 당시 황태자가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마땅하게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였지만 효험을 얻지 못했다. 고민 끝에 고종 황제는 “불보살께 기도를 해 달라”고 월초스님에게 부탁했다. 스님은 청도 운문사 사리굴에서 정성을 다해 100일 기도를 올렸고, 그 결과인지 황태자의 병세에 차도가 생겼다. 병마를 물리치고 병석(病席)에서 일어난 황태자를 보고, 고종 황제가 기뻐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고종황제는 월초스님을 각별히 대했다고 한다.


○…1900년.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탈로 조선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남한산성팔도도총섭으로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던 월초스님은 ‘나라를 지키는 절’을 세우기로 발원했다. 삼각산 정인사를 중건하면서 사명(寺名)을 수국사(守國寺)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수국사의 중건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됐다. 단순히 사찰 하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민관(民官)이 혼연일체가 된 대작불사였다. 당시 황실에서 약 25만 냥, 영의정 심순택 등 조정 관료 59명과 상궁 13명 등이 약 1만9000 냥을 흔쾌히 내놓았다.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조선백성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는 일이 잦았다. 월초스님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날 흔히 순사라 불리는 일경(日警) 한명이 봉선사를 찾아왔다. 위세를 부리는 일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월초스님이 일갈(一喝)했다. “에험~, 그대의 우두머리인 총독이 내 수양아들인데, 그대는 이같은 사실을 알기는 하는가.” 머쓱해진 일경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얼마뒤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귀에 그같은 이야기가 들어갔고, 총독은 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소문을 전해들은 조선 백성들은 스님이 지나가면 “저분이 총독 아부지여, 그리고 미나미는 저분의 ‘아들놈’이여”라며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총독부의 위세에 굴하지 않았던 월초스님의 호연지기를 감탄했던 것이다.


○…월초스님은 1906년 조선불교연구회를 창립해 조선불자들이 인재불사에 동참하도록 했다. 당시 <불교>에 실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치 39년(병오)에 조선불교연구회를 원흥사내에 창립하고 다시 명진학교를 연구회 내에 치(置)케 하야 국내 청년승려 교육에 효시를 작(作)하고, 선시(先是)에 자상으로 관리서에 명하야 동대문외 창신동에 원흥사를 창건하고 동서관리 권중석으로 규칙 36조를 정하야 국내 사원에 영포하고 불교 사업을 착착 진행케 하다가 본년에 지(至)하야 불상은 전일 봉안하였든 각사로 선송하고 현주승의 퇴거를 명하여 원흥사는 혁파하라는 칠교가 나리였다. 이에 대하여 예하께서 동지 이보담씨와 협의하고 당시 경무사 박승조에게 교섭하여 내급 학무에 운동을 개시하고 원정을 드려 상소한 결과 다시 관내로부터 무료 기부의 은전을 입게 되는 동시 전기(前記) 연구회와 명진학교를 설립하고 경향 각사(各寺)에 청년을 모집하여 신교육을 장려하며 익년 정미에 회무의 전책임을 이회광씨에게 인계하고……”

 

○…명진학교를 설립한 월초스님은 홍법강원(弘法講院)을 개설하도록 유촉하는 등 교학(敎學)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첨선수행도 중요하게 여겼다. 이같은 사실은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불교> 제67호에 실린 ‘봉선사의 선회계속(禪會繼續)’이란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 대본산 양주군 봉선사는 원래 교종수찰(首刹)로서 강회(講會)를 이어왔으나, 만근(몇 해 전부터 현재까지) 이래로 유지의 곤란을 감(感)하야 차(此)를 중지하고 작년 동기부터 선회를 임시 설립하였는데, 금년 속회(續會)에도 홍월초 예하(猊下)의 공양미 부담과 신윤영(申允泳) 주지의 특별보호로 일반 선중(禪衆)은 안심 제시(기운을 내어 떨쳐 일어남)한다더라.”

<사진> 남양주 봉선사에 있는 월초스님 추모비. 운허스님이 찬을 했다.

○…강원 학인 뿐 아니라 납자 등 대중 외호에 최선을 다했던 월초스님의 각별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봉선사에 선중(禪衆,참선하는 대중) 20여명이 아무 장해 없이 공부를 회향 했는데 선량공급(禪糧供給)은 사중(寺中)에서 백미 40두(斗), 월초스님이 백미 80두(斗)를 했다고 한다. 사중 전체에서 보시한 것 보다, 월초스님이 내 놓은 것이 곱절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스님은 19년간 주지를 재임하며 받은 보시금(봉급)을 모두 내놓아 사회사업에 쓰도록 했다.


○…월초스님 문도(門徒)인 운허스님은 비문에서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상은 사대(四大)가 풍만하고, 위의가 장중하여 대인의 풍이 있고 …… 승규(僧規)를 정(整)하매 엄연하여 지도자의 품격을 갖추었으며, 공(公)을 먼저하고 사(私)를 뒤에하여 일생을 불교 발전과 후진의 도야(陶冶)에 노력하였으니, 근세에 드물게 보는 석덕(碩德, 덕이 높은 스님)이었다.”

 

 

■ 행장 ■

 

남ㆍ북한 도총섭 역임
조선불교연구회 ‘창립’

 

조선 철종 9년(1858년) 6월12일 한성 니동(泥洞, 지금의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부친 홍병옥(洪秉玉) 선생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홍중섭(洪重燮).


15세 되던 해에 경기도 양주군(지금의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 봉인사 부도암(浮圖庵)에서 환옹환진(幻翁喚眞) 스님에게 득도하고 법을 이었다. 이로써 백파긍선(白坡亘璇)의 법증손(法曾孫)이 됐다.


출가 사문이 된 후 15년간 교학을 연찬하고 선원에서 정진했다. 1892년(35세)에 구한국(舊韓國) 예조(禮曺)의 지령(指令, 지휘명령)으로 남한산성팔도도총섭(南漢山城八道都總攝)에 취임했다.

 

<사진> 수국사에 주석하던 무렵의 월초스님.

1900년에는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지금의 서울 은평구)에 수국사(守國寺)를 창건하고, 8만2645㎡(2만5000여평)의 토지를 사찰 정재로 만들었다. 1902년 서울 흥인지문(동대문) 밖에 새로 설립한 원흥사(元興寺) 내산섭리(內山攝理)가 됐다. 1905년 2월 궁내부(宮內府) 지령에 따라 양산 통도사 원장, 같은해 3월 장예원(掌禮院) 지령에 따라 법주사 원장을 겸임했다. 궁내부 지령에 따라 봉선사 교종판사(敎宗判事)에 취임한 것은 1905년 10월 이었다. 1906년 군부(軍部) 지령으로 북한산성국내십삼도도총섭(北漢山城國內十三道都總攝) 소임을 맡았다. 한일 강제 병합후 봉선사 주지를 다섯 차례 맡았는데, 취임 시기는 1913년 4월, 1916년 5월, 1919년 6월, 1922년 10월, 1926년 4월이었다.


1905년 원흥사 관리서(管理署)가 폐지됨에 따라 봉원사 이보담(李寶潭)스님과 함께 조선불교연구회를 창립하고 원흥사에 본부를, 지방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조선불교연구회는 일본의 각종단 승려들이 조선에 들어와 기반을 넓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불교의 유신책(維新策)을 연구했다.


1906년에는 불교연구회가 주도하여 명진학교(明進學校,지금의 동국대)를 창립하고 청년승려들에게 ‘신풍조에 순응하는 새 지식’을 가르쳤으며, 각 지역에도 학교를 세웠다. 월초스님은 교장 소임을 맡아, 사찰 정재는 물론 개인 재산까지 흔쾌히 내놓아 명진학교가 명실상부한 민족교육도량이 되도록 했다.


50세 이전에는 수국사에 주석했으며, 1922년에는 양주 회암사 대웅전과 3화상(지공.나옹.무학) 영각(影閣)을 새로 짓고, 1926년에는 봉선사 대웅전을 중수(重修)하고, 삼성각을 새로 지었다. 73세에 봉선사 주지를 사퇴하고 애월재(月齋)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 1934년 토지 등 전재산을 봉선사에 헌납하고, “선강교육(禪講敎育)을 기본으로 삼으라”는 유촉을 남긴채 원적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납 63세. 운허(耘虛)스님이 찬한 월초스님 비는 1973년 봉선사에 세워졌다.

 

봉선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08호/ 2009년 3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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