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1. 운기성원 - 경전 읽고 참선 하는 것이 출가자의 ‘제일’

수선님 2023. 4. 16. 12:51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1. 운기성원

경전 읽고 참선 하는 것이 출가자의 ‘제일’

 

 

조선후기 강맥을 계승한 석전(石顚)스님의 제자 운기성원(雲起性元,1898~1982)스님은 내.외전을 고루 갖추었다. 운기스님의 수행과 삶을 전강제자 혜남스님(영축총림 통도사 전계사)의 회고와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에 있는 운기스님 비문을 통해 정리했다.

 


경전 읽고 참선 하는 것이 출가자의 ‘제일’
석전 박한영 스님 강맥 계승 한 전법제자
다정하고 남 배려하는 마음 구비한 수행자

 

○…운기스님이 노년에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에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 날씨 좋은날, 타종교를 선교하는 사람이 대흥사를 찾았다. 스님들이 주석하는 도량까지 선교하려고 온 그들의 행동은 비상식적인 처사였다. 하지만 염치(廉恥)를 모르는 타종교인은 산책하고 있는 운기스님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아주 미남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이곳에 계시나요.”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운기스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뉘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건너왔다.


“하나님을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보통의 경우 화를 내거나 야단을 쳐서 돌려 보낼 텐데 스님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요”라며 말을 풍濱�. 상대는 “그럼요, 하나님을 믿으셔야 구원 받습니다”라고 한술 더 떴다. 운기스님은 “그래요. 우리 절에도 하나님이 계신데 한번 보시겠어요”라며, 그 사람을 안내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천불전(千佛殿)이었다. 법당 문을 연 스님이 불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그렇게 좋다는 하나님이 우리는 한분도 아니고, 1000분이나 계시지요.” 그제야 스님의 말을 알아들은 타종교인은 부끄러운 듯 발길을 돌리고 사라졌다.

<사진> 석전스님의 강맥을 계승한 운기스님. 사진제공=혜남스님

○…“중이 차나 마시고 그러는 것이 무슨 큰 자랑이냐. 차라는 것은 목이 마를 때 목이나 축이면 되는 것이지.” 차를 마시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 운기스님은 혀를 끌끌 차며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사찰에는 다도(茶道) 문화가 확산됐는데,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멋을 내며’ 차를 마시는 일이 늘었다. 운기스님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머쓱해진 제자들을 앉혀놓고 스님은 조용하지만 엄중하게 경책했다. “멋을 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출가했으면 부처님 경전을 열심히 읽고, 참선 열심히 하는 것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조선후기 대강맥을 계승했지만, 운기스님은 언제나 교(敎)와 선(禪)을 일치한 수행을 강조했다. 참선수행을 병행할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스님은 “항상 참선을 닦고, 교(敎)를 생각하라”고 했다. 선교일치(禪敎一致)가 운기스님이 공부 지침이었으며, 당신의 삶이었다. “공부해라. 비구승이 되거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남을 대할 때 화를 내거나 야단치는 법이 거의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화를 낼 일이라도, 스님은 개인적으로 불러 조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니, 그라면 안 된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거라.”


야단맞는 상대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때문에 운기스님에게 이처럼 ‘따끔하게 경책’을 받은 제자나 불자들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다. 회초리로 매를 대는 것 보다, 더 큰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스님은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중고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청소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한 학교도 변변한 교실이 없을 정도로 황폐했다. 몸도 마음도, 학교도 성치 않았던 시절이다. 환갑을 앞둔 적지 않은 나이에 교장이 된 스님은 손수 운동장에 떨어진 병조각이나 휴지를 주웠다. 교사들에게 지시하거나 학생들을 시켜도 될 일이지만 운기스님은 당신이 직접 쓰레기를 치웠다.

<사진> 운기스님(왼쪽)이 해남 대흥사에서 전강제자 혜남스님과 함께 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당신이 직접 쓴 운기스님 비문에 “밝은 영지(靈知)는 꿈속에서도 흐림이 없어 밤에 꿈에서 오히려 문제를 더 잘 푼다”고 행장을 기록해 놓았다. 소년시절부터 책보는 것을 즐겨했던 운기스님은 내외전을 고루 익힌 후 해박한 지식과 밝은 지혜를 구족했다고 한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에도 공부하는 즐거움에 빠져 간혹 동무들이 심하게 장난을 쳐도 미소만 지을 뿐 대응하지 않았다. “글을 하나라도 더 읽어야 하는데, 벗들의 장난에 신경 쓸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운기스님은 석전 박한영스님의 강맥을 계승했다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주위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운기스님이었지만, 석전스님의 강맥을 계승했다는 점은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해남 대흥사 진불암에 머물 당시 연배가 비슷한 구참 수좌가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맞절을 하지 않아 “강사가 조실이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자신을 내세운다기 보다 그만큼 전강 스승인 석전스님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노년에 정읍 내장사로 주석처를 옮긴 석전스님을 운기스님은 사제 운성스님과 함께 정성스럽게 간병했다. 운성스님은 생전에 “우리(석전) 스님은 대원강원을 폐하면서 정병모스님의 뜻을 받아 노후를 내장사에서 지내기로 하셨다”면서 “그곳에서 스님의 일상은 예나 다름없이 맑고 건강했다”고 회고한바 있다. 운기스님은 석전스님의 입적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석전스님은 1948년 2월29일(음력) 해우소에 다녀온 뒤 마루에 오른 후 40분 만에 원적했다. 이때 운기스님이 임종을 지켰는데 아무 말씀 없이 잠들 듯 고요히 적멸에 들었다고 한다.

<사진> 운기스님이 주석했던 고창 선운사 전경.
<사진> 고창 선운사에 있는 운기스님의 부도.

■ 행장 ■

 

내·외전 두루 익혀 백양사 강주 등 역임

 

1898년 12월 26일 전북 고창군 해리면 광승리에서 부친 배두섭(裵斗涉) 선생과 모친 밀양 박씨(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세속 이름은 배화수(裵華洙)이다.


1915년 고창 선운사에서 경암선사(炅庵禪師)를 은사로 득도했다. 사서삼경과 <주역> <춘추> 등 외전(外典)을 두루 익혔으며, 1924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선문염송(禪門拈頌)> 등 내전(內典)도 서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깊이 공부했다. 당시 대원암에 개설된 조선불교전문강원(朝鮮佛敎專門講院)에는 석전(石顚)스님이 강주로 있으면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운기스님이 강원을 수료한 것은 1925년으로 세수 27세였다.


1934년부터 고창 선운사 주지를 지냈으며, 1936년에는 장성 백양사 강원의 강주(講主)가 되어 후학 양성에 나섰다. 1936년 백양사에서 석전스님을 법사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받은 스님은, 이듬해인 1937년 석전스님에게 전강(傳講)했다. 석전스님은 조선후기 화엄종주(華嚴宗主)인 설파(雪坡)ㆍ백파(白坡)ㆍ설유(雪乳) 스님의 강맥을 계승한 선지식이다.

<사진> 고창 선운사에 있는 운기스님의 비. 미당 서정주가 ‘찬’을 썼다.

운기스님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김제 금산중고등학교장으로 인재를 양성했으며, 1958년에는 다시 선운사 주지를 맡았다. 스님은 한때 정읍 호남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0년에는 동국역경위원으로 위촉되어 경전 번역에 주력했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해남 대흥사와 제11교구본사 불국사에서 강주로 제자를 양성한 운기스님은 1982년 12월29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84세, 법납 68세였다.


운기스님의 강맥은 1977년 전강 받은 혜남(慧南, 영축총림 통도사 전계사, 전 중앙승가대 교수)스님을 비롯해 재선(在禪) 응각(應覺) 도형(道亨) 철웅(鐵雄) 도일(道一)스님이 잇고 있다. 운기스님의 상좌로는 기산(基山) 정산(定山) 재정(在正) 혜산(慧山) 계진(戒眞) 재진(在進) 대오(大悟) 대우(大愚) 계원(戒元) 범여(梵如)스님이 있다.


운기스님 부도와 미당 서정주가 지은 ‘운기당 성원 대강백 비문’은 고창 선운사에 모셔져 있다.

 

통도사.선운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12호/ 2009년 3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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