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교학

解題 해제 - 신라 불교사상사

수선님 2023. 4. 9. 13:09

解題 해제

신라 불교사상사

1. 신라 불교사상의 확립

2. 유식사상

3. 원효 사상

4. 화엄사상

5. 계율사상

1. 신라 불교사상의 확립

무열왕이 즉위하여 ‘중대’(654~780년)가 시작되면서 7세기 중반의 신라

왕실은 지방제도 정비와 중앙제도 개편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인 관료체제를 유지해갔다. 이들 체제를 운영하는 이념으로 유교가 영향력

을 확대해가고 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왕의 이름도 불교식 왕명에

서 시호로 바뀌었다. 중대 왕실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사회구조의

재편성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불교계의 제도적인 개편

으로 성전사원(成典寺院)이 승정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채

상식, 1984) 이러한 정치적, 제도적 변화와 유학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어가

는 사상계의 동향에 상응하여 삼국의 불교를 종합하고 중국불교의 신경향

을 이해하여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사상을 담아낼 새로운 불교사상 체계를

확립하고 기층민들에게까지 널리 불교를 이해 전파시키는 것이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통일기 신라 일반민들은 의식의 성장에 따라

보살사상에 입각한 보살계와 불성론 수용으로 인간의 본질적 평등성을 주

장하는 인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업설과 윤회사상이 현실의 신분 차

별을 완고하게 지지하고 있었지만 불교 교리의 이해에 따른 평등관의 수용

은 새로운 의식의 변화였다.(김영미, 1998)

중국의 남북조불교는 부처가 깨달은 연기의 정수가 중도이며 공이라는

논리를 체계화한 중관(中觀)계통의 사상과 삼라만상을 인식작용과 인식

의 대상인 현상세계와의 관계로 파악하는 유식(唯識)계통의 사상 연구가

심화되었으며, 모든 중생이 여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사

상도 연구 경향의 한 축을 이루었다. 6세기 말에 통일왕조 수(隋)가 개창되

자 남북조불교의 성과를 종합한 위에서 이론적인 교학과 실천적인 관행을

체계화한 지의(智顗)의 천태종(天台宗)이 일어나 종파불교의 장을 열었다.

618년 당(唐)나라의 개창 이후에는 현장(玄奘)에 의한 신유식의 소개를 바

탕으로 법상종(法相宗)이 형성되었고, 법상종에 대한 대응으로 남북조의

유식사상을 계승하여 법장(法藏)은 화엄종(華嚴宗)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동향은 신라불교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기 신라불교의 중심을 이루었던 유식 교학의 기반 위에 고구려나 백

제에서 발달한 삼론학이나 열반학이 수용됨으로써 통일기 신라불교는 불

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고, 신유식과 화엄과 같은 중국의 신불교

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원측과 원효와 의상 등의 활동을 중심으로 신

라 불교 교학은 독자적인 꽃을 피우며 크게 발전하였고, 특히 유식과 화엄

이 그 주축을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국가와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성장하

였던 국가불교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이 시기에 성장하던 기층민의 신앙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어 미타신앙과 관음신앙 등

이 성행하였다.

삼국시기부터 교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유식사상은 신유식이 신라에 전

해지면서 여러 학승들의 왕성한 연구가 이어져 통일신라 교학의 가장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유식사상은 미륵과 미타 및 지장신앙을 배경으로 법상

종을 열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삼국시대에 수용된 화엄은 통일신라시대에

의상이 화엄종을 개설하여 신라 교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신라불교 초기부

터 저변에 기반을 가져왔던 밀교적 면모는 통일기를 지나면서 국가적 활동

을 통해 기반을 쌓았고, 8세기에 중국 신밀교의 정립과 나란히 밀교 조사

로서 널리 활동한 현초나 혜초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정병삼,

2005)

2. 유식사상

유식(唯識)사상은 마음과 마음 작용을 모든 인식과 존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의 인식작

용[識]에 달려 있으며, 그 인식하는 마음의 주체가 알라야식[阿賴耶識=眞

如]이라고 한다. 이 인식작용의 대상이 되는 경계가 현상[相]이라고 보아,

모든 존재의 성질과 모습을 탐구한다. 이런 교학 전통이 법상종(法相宗)을

형성하였다. 유식에서는 모든 존재를 이루어내는 인식 주체인 제8 근본식

알라야식을 설정하고, 6식의 밑바탕에 있는 자기를 중심으로 헤아리는 자

아의식인 제7 마나식[末那識=心識]과, 눈[眼]・귀[耳]・코[鼻]・혀[舌]・몸

[身]의 기본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를 직접 접촉하면서 판별하는 5식

(前五識)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의식 작용인 제6 의식(意識)을 배치한 8식

설을 세웠다. 현장 이전에는 지론(地論)에서는 알라야식을 순수청정한 진

식(眞識)으로 보기도 하고, 청정하지 않고 생멸하는 망식(妄識)으로 보기

도 하였으며, 섭론(攝論)에서는 알라야식을 진과 망이 함께 있다 하여 다시

순수청정한 제9 아말라식[阿摩羅識]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현장이 체계화

한 신유식에서는 마음의 근저에서 모든 행위를 발생하게 하는 근원적인 존

재인 알라야식을 중심으로 8식설을 주장하였다.

신라 유식사상은 원광(圓光)과 자장(慈藏) 등에 의해 『섭대승론』의 연구

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원광은 중국에 가서 섭론의 연구에 열중하여 뛰

어난 해석을 발휘하였다. 이들을 통해 신라에 소개된 섭론 교학은 7세기에

들어 유식에 통합되어 신라 교학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며 여러 학승들에게

전수되었다. 그래서 저술을 남긴 통일신라 승려 대부분이 유식에 관계된

저술을 남기고 있을 만큼 교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통일신라 유식의 흐름은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활동하였던 원측(圓測,

613~696)에게서 비롯된다. 왕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유명

한 승려들에게서 대승과 소승을 고루 배운 원측은 특히 당시 성행하던 유

식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6개 국어에 뛰어난 재능

을 가져 경전 번역에도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원측은 학설에서 다양한 견

해를 추구하였고, 장안 남쪽의 종남산 운제사에서 8년 동안 수행하기도 하

였다. 원측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당 태종은 그를 서명사에서 지내게 하였

고, 이곳에서 23종 108권에 이르는 많은 저술을 이루어냈다. 신라에서 여러

차례 돌아와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의 사

상은 서명학파(西明學派)라는 뚜렷한 흐름을 이루기도 했고, 신라에 전해

져 신라 유식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다.

원측은 중국에서 구유식에서 신유식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활동하였다.

원측은 처음에 신라 유식의 근간이었던 진제 계통의 섭론에서 기반을 닦았

으나 현장이 신유식을 소개하자 이를 수용하여 선양하였다. 그러나 원측의

유식사상은 현장을 계승한 규기(窺基)가 정립한 중국 법상종과는 다른 관

점을 보였다.

원측은 독특하고 일관된 틀로써 불교를 이해하고, 일관된 도리에 입각

해서 여러 견해를 취사선택하였다. 대립되는 두 견해가 있을 때 원측은 때

로는 어느 한 쪽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쪽 모두 취하기도 하며 때로는

제삼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원측이 불교를 이해하는 일관된 틀이란

모든 교설을 방편(方便)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론이란 목적에 이르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이 불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론 자체의 논리적 체

계성이나 적합성보다는 그 쓰임에 주목해서 보는 시각이다. 쓰임에 주목해

서 불교의 여러 견해를 대하게 되면 각각의 견해들이 제기되는 맥락과 상

황 또는 현실 적용에서의 유효성 등을 두루 주목할 수 있다.(정영근, 1998)

원측이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핵심으로 삼은 도리는 중도(中

道)이다. 원시불교 이래 중도는 불교사상의 기준으로서 모든 불교사상가

들이 이를 주목하였다. 중관불교의 공(空)사상은 논서를 통해 사상을 심화

시킨 부파(部派)불교와 대승의 유식불교를 유(有)에 치우친 것으로 규정하

고 허무주의를 무(無)에 치우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중도임을 자

부하였다. 그런데 유식불교에서는 부파불교와 중관불교를 유와 공에 치우

친 것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관점이 중도라고 하였다. 원측은 이에 대해 중

관과 유식 모두를 중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도는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며 집착을 떠나면 곧 깨달음에 이르게 된

다. 원측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중생의 집착을 제거하여 중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유를 전개한 원측은 유식학

자로서는 독특한 관점을 가졌고, 그의 유식사상은 집착과 편견을 제거하고

중도를 밝히는 모든 불교사상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원측은 모든 교의가 각각 한 뜻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

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식이 주장하는 유(소승)·공(반야)·비유비공(해

심밀, 법화)의 삼시(三時)교판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교리 내용은 중

생의 병에 따라 다르고 경의 성질에 따라 그리고 교설의 시기에 따라 달라

질 뿐이라고 하였다. 원측은 어느 하나의 입장을 배타적으로 고집하거나

두 입장을 단순히 조합하지 않고, 전체적인 안목에서 각각의 준거와 장점

을 밝혀 모두를 불교 속에 포용하였다. 이러한 원측의 인식은 유식학설뿐

만 아니라 대승과 소승의 여러 교설을 폭넓게 포용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

려는 일승적인 인식체계였다.

현상계의 분석에 중점을 두는 유식에서 인간에 관점을 돌려 수행에 차별

을 두어 구분한 것이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로서, 그 초점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인 일천제(一闡提)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있다. 신

유식에서는 이를 철저히 준수하여 특유의 종지로 삼았다. 이에 대해 원측

은 일체중생에게 모두 평등하게 여래가 될 가능성[如來藏]이 있으므로, 오

성 모두 불성이 있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천제도 무량한 공덕

을 갖춘 불보살의 위력을 만나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정영근, 2002) 또

한 일정한 단계에 오른 보살의 수행에 집중하는 신유식과는 달리 원측은

범부의 수행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그들의 구제를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였다.

여러 교설을 폭넓게 인정하는 원측의 포용적인 사상 경향을 잇는 제자들

은 당의 법상종과는 다른 별도의 서명학파를 이루었다.(고익진, 1989) 승장

(勝莊)·도증(道證)·도륜(道倫) 등이 여기에 속하지만, 중국에서 활동한 신

라 유식 승려 중에는 현장이 인도 경전을 번역하는 데 참여한 신방(神昉)

이나 현장에게 배운 순경(順璟)과 같이 중국 유식학의 발전에 참여한 사람

도 있다. 승장은 저명한 번역가인 의정과 보리유지의 번역장에 참가한 범

어 전문가로, 원측의 입적 후에 종남산 풍덕사에 사리탑을 세워 원측에 대

한 숭모 풍조를 조성하였다. 692년에 신라에 귀국하여 왕에게 천문도를 바

친 도증의 사상은『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에 집약되어 대현에게 계

승됨으로써 신라 법상종 성립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주로

활동한 도륜은 18종 57권의 다양한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그

중 당대 유식사상을 집대성한『유가론기(瑜伽論記)』20권(705년)의 방대한

저술에서 당과 신라 유식학승들의 여러 학설을 망라하였는데, 그 견해가

규기의 중국 법상종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방면에 걸친 저서를 남긴 원효(元曉)는『판비량론(判比量論)』등 유식

학의 저술도 상당수 남겼다. 그의 저술에는『유가론』이나『섭대승론』을 비

롯한 13종에 이르는 유식과 인명에 관한 경론을 인용하고 있어, 새로운 사

상인 유식학을 크게 활용하여 그의 사상체계를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후에 고려 법상종에서 대현과 함께 해동 조사로 추앙되었으며, 불

교 논리학인 인명(因明)을 인식논리학으로 전환시킨 진나(陳那)보살의 화

신으로 일컬어졌다.

순경은 특히 인명에 뛰어난 이였다. 순경은 현장에게 신유식을 수학한

현장의 제자로서, 유식의 논증 방법을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전하였다. 순

경이 666년경에 현장의 인명 사상을 전해 듣고 그와는 다른 자신의 견해를

사신편에 중국에 보냈더니, 현장은 이미 죽고 그 제자인 규기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순경은 대승과 소승을 두루 배우고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두타행을 실천하였으며 신라에 돌아온 뒤에는 기

원사에 주석하였다. 순경은 또한 『화엄경』의 ‘초발심에 곧 성불한다’는 구

절을 믿지 않고 비방하다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경흥(憬興)은 문무왕의 유언으로 신문왕대에 국로(國老)로 봉해지고 삼

랑사에서 활동한 백제 출신의 인물이다. 경흥은 유식을 비롯하여 여러 부

문에 걸쳐 40여 종의 주석서를 남겨 원효·대현과 함께 신라 3대 저술가로

꼽힌다. 이중에서 유식에 관한 저술은 17종으로 그 중심을 이루지만 저술

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사상은 알 수 없다.

의적(義寂)은 유식 관계 4종의 저술을 비롯하여 정토·반야·법화·열

반·계율 등 25종의 주석서를 저술하여 유식승의 왕성한 저술활동을 계승

하였으며, 의상과 만나 교리를 토론하는 등 화엄종과 교류를 갖기도 하였

다. 현장에게 수학한 의적은 유식의 우월성 강조에 비판적이었으며 융합적

인 태도로 대승경전의 동등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중국의 규기는 물론 원

측과도 다른 독자적인 경향으로서, 원효나 대현의 사상 경향과 통하는 것

이었다. 금산사에서 활동했던 의적의 유식 사상은 이후 진표의 법상종 활

동에 영향을 주었다.

대현(大賢)은 법상종 조사인 유가조사로서 추앙된 유식의 대가였다. 그

는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주석하며 미륵과 미타상을 함께 받드는 신앙을

전개하였으며, 일체의 논과 종을 편력하였다고 기록될 만큼 불교학의 전

분야를 두루 수학하였다. 그는 모두 50여 종의 저술을 남겼는데, 화엄의 원

융한 이치를 탐구하고 법화·열반·반야 등의 대승 경전과 여래장·중관 경

전에 주석하였으며, 유가계의 계율학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정토 관계 저

술도 많다. 20종이나 되는 유식 관계 저술은 초기유식으로부터 중국 법상

종의 정통이 된 호법의 유식과 인명 등 현장의 신역 논서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들이다.

대현은 유식은 원측-도증의 견해를 계승하고 화엄은 법장과 원효를 계

승하여, 유식과 중관에 대해 각기 그 진리성을 인정하는 공정한 입장에서

학설을 비판하고 계승하여 종합하였다. 대현은 중심 저술인 『성유식론학

기』에서 당대 학계의 논쟁점을 포괄하여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 가

운데 공과 유의 쟁론에 대해 공과 유는 언어상으로는 다투지만 그 근본 취

지는 동일한 것으로서, 논쟁의 의도는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

는 데 있다고 하는 화쟁의 입장을 보였다. 대현의 유식 학설은 법상종 정통

의 규기의 학설을 토대로 그와 다른 경향을 보인 원측의 학설을 포용하여

종합 회통한 것으로서, 여기에 대현의 사상적 특색이 있다. 그러나 그 중심

입장은 유식 중도를 근본 종지로 보는 신유식사상이었다.(김남윤, 1995) 대

현의 사상은 신라 불교학의 성과를 종합하여 유식중도설의 입장에서 각 교

설의 의미를 밝혀 성상(性相)의 대립을 지양하고 신유식사상을 받아들여

당대의 불교를 종합 정리한 것이었다.

중대 초기 이래 유식학승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대현의 사상과

신앙이 중심이 되어 경덕왕대에 법상종(法相宗)이 형성되었다. 법상종은

유식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계율 연구를 비롯한 광범위한 사상 연구를 수행

하여 신라 불교사상 연구를 주도하였다. 대현은 미륵신앙을 실천하여 이끄

는 법상종의 조사가 되었다. 대현이 선도한 법상종은 경덕왕대에 왕경을 중

심으로 학파적인 교단을 형성하여 미륵과 미타신앙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보다 약간 늦게 진표(眞表, 718~? 또는 734~?)가 주도하는 또 하나의

법상종 계통이 있었다. 완산주 출신의 진표는 금산사로 출가하여 당의 선

도에 배워온 숭제(또는 순제)에게 배우고 자신의 몸을 던지는 치열한 수행

인 망신참(亡身懺)을 실천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계법을 받았음을

표방하였다. 진표는 또한 점찰법(占察法)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과

보를 점치고 그 결과에 따라 참회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진표는 지

옥 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비원의 보살인 지장신앙과 미륵상생 신앙을 실

천하였다. 이와 같이 진표가 선도한 법상종은 점찰법과 참회를 내세운 실

천적인 교단으로서, 일반민을 대상으로 미륵과 지장신앙을 내세우며 전개

되었다. 이 흐름은 속리산의 영심(永深)과 헌덕왕의 왕자 심지(心地)로 이

어지고, 석충(釋忠)을 통해 고려 태조에게 연결되는 등 문도들에 의해 지속

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렇게 속리산·강릉·금강산 등지의 신라 변방 지역

에 실천 신앙 중심의 교화를 전개한 진표 계통의 법상종은 기층민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김남윤, 1984)

이처럼 법상종은 유식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계율 연구를 비롯한 광범위

한 사상 연구를 수행하여 신라 사상 연구를 주도하는 한편 미륵과 미타 및

지장신앙을 실천하면서 화엄종과 대비되는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3. 원효 사상

원효(元曉, 617~686)는 신라 교학 연구의 기반 위에서『기신론』의 학설

을 중심으로 당대의 사상적 과제이던 중관과 유식을 회통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파의식을 극복하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당대의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는 방대한 사상 체계를 이루어낸 것으

로써, 통일기의 신라불교를 근원적인 입장에서 종합 정리하는 불교 이해의

기준을 확립한 것이었다.

원효의 이름이나 그의 집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는 사실은 그가 불

교를 처음 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효는 10대 중반에 불문에 출가하

여 일정한 스승을 정해 배우거나 한곳에 머무름이 없이 여러 스승을 찾아

다니며 다양한 교학을 섭렵하였다. 원효가 교류를 가졌던 인물들은 모두

교단불교가 아닌 마을에서 일반민과 어울리거나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

던 이들이었다.

이즈음에 현장이 새로 번역 소개한 신유식은 신라에서도 지대한 관심사

가 되었다. 그래서 원효는 후배인 의상과 함께 이를 배우고자 고구려를 통

해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당시의 첨예한 삼국관계 때문에 실패하였다.

대신에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보덕(普德)에게서 열반경 강의를 들음으로써

보다 진전된 불교 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원효는 10년 후 다시 중국 유학

을 시도하여 해로를 택해 중국으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도중에 머무르게 된

고분 속에서 ‘온 세상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요, 모든 이치는 모

두 인식으로 말미암은 것일 뿐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깨달음을 얻었

다는 설화를 남긴 채, 중국에 건너간 의상과 달리 유학을 포기하였다.

원효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저술하였

다.『금강삼매경』은 뇌종양에 걸린 왕비를 구하기 위해서 용궁에서 얻어와

대안(大安)이 경전을 순서대로 맞추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리고 원효는

무열왕의 따님인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교단에서 나와 교화에 진력하였다.

원효는 교화 못지않게 많은 저술 작업을 통한 사상체계의 확립에 힘을 기

울였다. 원효가 남긴 많은 저술은 반야·유식과 법화·화엄·열반·계율·정

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원효가 가장 애써 이룬

저작은『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금강삼매경론』이다. 원효는 당

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공유의 집착과 편견의 적극적인 극복을 위해 각

각 다른 견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들 다른 견해 사이의 적극적

인 회통을 위하여,『기신론소』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이론과『금강삼매경

론』의 일미관행(一味觀行)의 실천원리로 정립하였다.(고익진, 1989)

원효의『판비량론』(671년)은 논리학의 차원에서 중관과 유식의 논리가

같음을 논증하는 것으로서, 공유의 화쟁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준거였다.

이러한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여러 경론의 차이점을 화회(和會)시키는『십

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저술하여 구체적인 분파의식의 극복 이론을 전

개하였다.

사회 기층에까지 불교를 전파한 원효의 정토신앙은 치밀한 교리적 바탕

위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원효는 미타 경전에 대한 여러 주석을 통해서 모

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

하고, 그러나 중생들은 자신의 마음의 본질적인 평등성을 믿지 못하기 때

문에 그 의심과 집착을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서 제거해야 함을 강

조하였다.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발심(發心)과 아미타불의 이

름을 부르는 칭명 염불을 강조한 원효의 정토관은 일심에 의거한 것이었으

며,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해 서방 극락에 왕생하여 성불할 것을 강조한 대

중 지향의 것이었다.

원효는 소승계를 범망계에 포섭 융회한『범망경보살계본사기』와, 범망

계와 유가계를 종합 융화시킨『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어 형식주의적인

소승 계율을 지양하고 정신주의적인 보살계(菩薩戒)를 강조하였다. 원효

가 제시한 대승보살계 사상은 출가와 재가를 조화하는 범망계(梵網戒)였

다. 원효는 계의 판단기준을 결과가 아닌 동기에 둠으로써 명리와 탐욕과

교만에 빠진 신라 불교계를 비판하고, 중생 구제를 위해서라면 계를 범해

도 죄가 아니라 복이 된다는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수행자 개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원효의 저술은 의천의『신편제종교장총록』등에 의해 모두 90종에 가까

운 200여 권의 방대한 분량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23종만이 전해진

다. 원효의 많은 저술에 인용된 전거는 유식 계통의 경론들이 중요한 기반

을 이룬다. 이것은 다른 경론과 대조하며 나타나는 차이를 조화하는 데 주

력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원효는 여러 저술에서 중관과 유식의 편견에 빠진 교리를 비판하였다.

『기신론별기』에서 원효는 “중관은 모든 집착을 깨뜨리고 깨뜨린 것 또한

깨뜨려서, 깨뜨리는 것과 깨뜨려지는 것을 다시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는

보내기만 하고 두루하지 못하는 논”이고, 이에 비해 “유식은 깊고 얕은 것

을 두루 세워 법문을 판별하여, 스스로 세운 법을 모두 버리지 않으므로 이

는 주기만 하고 빼앗지 못하는 논”이라고 비판하였다. 다른 저술에서도 이

와 같은 비판은 자주 나타난다. 학도들은 이런 편견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

을 닦고 행동을 깨끗이 하며 바른 지해를 체득해야 하므로 유와 무를 다 버

리고 어디에도 의거함이 없는 실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중관이나 유식과는 달리 『기신론』의 의미는 높

이 평가하였다. 이는 “지혜롭고도 어질며 깊고도 넓어, 세우지 않음이 없으

면서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면서 다시 인정한다. 다시 인정

한다는 것은 저 가는 것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것이 다하여 빼앗음을 밝힌 것이다. 이것을 일러 모든 논의

근본이요, 뭇 쟁론을 평정하는 주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과 긍정을 각각 특징으로 하는 중관과 유식이 서로 대립관계에 있다

해도, 중생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원효는 『기신론』이 이와 같은 중생

의 마음이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하여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의

사상으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원효 사상의 핵심은 일심이다.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기초하고 있고,

마음이 모든 존재의 근거라고 원효는 파악한다. 모든 현상세계는 일심을 떠

나서 생각할 수 없고 일심의 견지에서 포괄되고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일

심은 본성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형상이 있다거나 없다는 모든 상대적인 차

별을 떠나서 존재한다. 따라서 일심에서 보면 모든 것은 근원적인 점에서

평등하고 차별이 없다.(허남진, 2005) 기신론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여 하나는 마음의 있는 그대로의 본래적인 모습[心眞如]이

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움직이고 변화하는 측면[心生滅]이라고 한다. 두 문

은 서로 떨어져 분리된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서로 융통하는 관계에 있

는 완전한 전체이기 때문에 진여문은 진여문대로, 생멸문은 생멸문대로 일

체법을 포섭하는 전체이다. 진여문은 변하지 않고[不變], 참되고 가치있는

[眞] 등의 특징을 지니고, 생멸문은 연에 따라 달라지고[隨緣], 거짓되고 가

치없는[俗] 등의 특징을 지닌다. 이렇게 다른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지만, 각각 모든 것을 포섭하는 한마음을 이루기 때문에 또한 둘이 아

니다. 두 문은 일심의 경지에서 화합하고 통한다. 진여와 생멸의 근저에 일

심이 있기 때문에 일심에서 보면 진여가 생멸이고 생멸이 진여이다.

원효 사상의 또다른 특징은 화쟁(和諍)이다. 화쟁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원효는 각각의 견해가 갖는 의미에 대

해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인정될 수 있지만 그것은 제한적이

다. 그보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 견해가 갖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올바

르게 인식시켜줌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도록 한다. 원

효의 화쟁은 각각의 견해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설득력 있게 내려주고, 자

신의 견해가 지닌 한계와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게 함으로써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기신론』의 해석에서 조직된 원효의 여래장사상은『금강삼매경론』에서

그 실천 이론을 전개한다. 원효는『금강삼매경』의 주제를 일미관행으로 보

았다. 그리고 그 실천적인 관행이 의거하는 이론적인 원리를 일심 이문 삼

대설과 일치시킨 것이『금강삼매경론』이다. 일체의 법은 오로지 일심이며

일체의 중생은 하나의 본각이다. 원효는 한마음을 중심으로 융통무애한 화

합을 이룰 수 있다는 『기신론소』에서 일심이문삼대설을 중관과 유식을 회

통할 수 있는 이론 체계로 정립하고,『금강삼매경론』에서 일미관행의 실천

원리로써 사상 체계를 종합하였다.(남동신, 1994)

당시 새롭게 대두하던 화엄사상에 대해서도 원효는 저술을 남겼다. 내

용이 전해지지 않는 『화엄경소』의 서문에서 밝힌 원효의 화엄관은 보법(普

法)사상이다. “걸림이 없는 법계법문이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매우

급하지도 않고 유장하지도 않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

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며 전체도 아니다. 크지 않으므로 아주 조그만 극미

가 되어도 남음이 없고, 작지 않으므로 무한히 큰 대허가 되어도 남음이 있

다. 매우 급하지 않으므로 능히 삼세겁을 머금고, 유장하지 않으므로 몸을

들어 일찰나에 들어간다.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해 있지도 않으므로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이요 일체의 법이 하나의 법이다. 이러한 걸림 없는 법이 법

계법문의 묘술이니, 모든 보살이 들어갈 바요 삼세제불이 나올 바이다.”

보법이란 일체법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 드나들 수 있음을 말한다. 일

체법이 하나의 티끌과 일체 세계의 대소(大小)관계, 한없이 긴 시간인 삼세

겁과 순간인 일찰나의 촉사(促奢)관계, 그리고 움직임과 정지함, 하나와 많

음의 관계의 모든 범주에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화엄경』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원효는 하나와 일체가 서로 걸림 없이 통하는 것을 보법이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심에 근거하여 일체행을 성립시켰다.

원효가 보법의 원리를 자세히 밝힌『화엄경소』의 비유는『기신론소』의

종체문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원효의 일심사상은『기신론소』에 의해 철학

적 토대가 구축되어『금강삼매경론』에 의해 실천성을 부여받았으며, 최종

적으로『화엄경소』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는 원효가 기신론 철학을 화엄경

의 보법과 동일한 경지의 것으로 파악하였음을 말해준다.

원효의 사교판(四敎判) 역시 그의 사상 체계를 잘 드러내준다. 불교의 가

르침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가르침의 바른 의도를 밝

히려는 것이 교판이다. 원효는 사교(四敎)를 먼저 삼승(三乘)과 일승(一乘)

으로 나누고, 삼승은 다시 법공의 유무를 기준으로 별교(別敎)와 통교(通

敎)로 나누며, 일승은 보법을 기준으로 분교(分敎)와 만교(滿敎)로 나누었

다. 삼승별교에는 소승, 삼승통교에는 『반야경』과 『해심밀경』을 배당하여

대승 교학의 양대 조류인 중관과 유식이 나란히 위치하도록 하였다. 일승

분교에는 대승보살계를 설하는『범망경』과『영락경』을 배당하고, 정점인

일승만교에는『화엄경』을 배당하였다. 중관과 유식의 병렬 배당은 공유의

화쟁을 위한 원효의 의도를 구현하는 것이며, 그 위에 대승계율을 배치한

것은 실천적인 특성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다.(남동신, 1988) 사교판은 공

유를 화쟁하는 교리와 실천적인 계율을 거쳐 원융무애한 화엄사상을 증득

하는 데로 나아가는 원효 교학의 체계를 잘 보여준다.

4. 화엄사상

화엄(華嚴)은『화엄경』이 최고 진리를 설한 것이라고 보아 종래의 여러

사상을 종합하여 화엄이 최고의 원만한 가르침[圓敎]임을 강조한다. 화엄

의 교리적 특징은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지어

있다는 연기(緣起)설에 있다. 그 연기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고[相卽相

入] 서로서로 거듭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重重無盡] 것으로서, 어떠한 일

에도 걸림이 없는 세계가 법계(法界)이다.

통일신라 화엄사상을 주도한 것은 의상(義相, 625~702)이었다. 스무살

전후해서 황복사에 출가하여 당시 신라에 소개되었던 섭론·지론 등의 교

학 탐구에 열중하던 의상은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고자 선

배인 원효와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실패하고, 두 번째로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에 건너갔다.

당나라에 들어간 의상은 그동안 신라에서 익혔던 지론을 더욱 연마하였

다. 그리고 나서 장안 남방의 종남산에서 당대의 교학을 집대성하여 새로

이 화엄을 정립해가던 지엄의 문하에 나아가 화엄을 배웠다. 의상은 지엄

화엄의 정수를 체득하고 이를 체계화한『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668년)

를 저술하였다. 그는 화엄일승(華嚴一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핵심을 언

어의 절제 하에 210자의 법계도시로 엮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법계

도인(法界圖印)을 만들어 그 내용을『일승법계도』로 정리함으로써 화엄일

승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그 형식도 구불구불 돌아가는 반시(盤詩)

형태의 법계도에 핵심을 집약시켜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상징적인 효과를

의도하고, 최신 기술이던 목판 인쇄에 다라니를 강조하여 담아냈다. 다라

니는 모든 법을 갖춘 상징이면서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신라에서 화엄사상을 펴나갈 전법도량을 물색하

면서 시대적 과제를 깊이 통찰하였다. 이 시기 원효는 유식과 중관을 화회

하여 새로운 철학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대중 교화를 통해 민중을 정토신

앙으로 포용하고 있었다. 의상은 이즈음에 낙산(洛山) 관음의 전승 설화를

남겼다. 동해변 낙산 굴 안에 관음 진신이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정진한 끝에 관음 진신을 친견하였다는 것이다. 674년에 황복사에서 화엄

을 강의하기도 하였던 의상은 676년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

근본도량을 이루었다. 신라가 당군을 격파하여 통일 전쟁을 마무리지은

시점이다.

통일 이후 신라 사회는 새롭게 확보한 국토와 국민을 새로운 토대에서

하나로 이끌어갈 화합과 안정이 절실하였다.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도성

을 새롭게 쌓고자 하였다. 이에 의상은 왕의 정치가 바르기만 하면 풀로 언

덕을 만들어 경계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강력하게 축성 중지를 건의하고 관철시켰다. 의상은 또한 청정한 수

도자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의상은 비구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지

물인 승복 세 가지와 발우 하나 곧 삼의일발(三衣一鉢) 이외에는 다른 아무

런 소유물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국왕이 토지와 노비를 주고자 하였을 때

도 불법은 평등하여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이루어간다며 거절하였다.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종단을 이끌었는데 그 이념은 화엄사상

의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신분에 따라 구분되는

골품제 사회였다. 의상은 화엄종단 내에서 모든 문도들에게 평등한 종단

운영을 실현하고자 하여 진정과 지통과 같은 기층민 출신 제자들을 포용하

고, 그들의 활동을 한껏 보장함으로써 분명한 성과를 이루었다. 의상 화엄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일(一)과 다(多)의 상입상즉(相入相卽)으로 설명되

는 법계연기는 평등과 조화의 논리로서 의상의 화엄교단에서 신분적 제약

을 뛰어넘어 실천되었다.(정병삼, 1998)

의상 화엄사상의 정수인『일승법계도』는 화엄 법계연기설의 핵심으로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말하는 상입상즉의 연기법이 핵심을 이룬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一中多] 전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多中一], 하나가 곧 전

체요[一卽多] 전체가 곧 하나[多卽一]라는 것이 그것이다. 의상은 이를 동

전 열 개를 세는 수십전(數十錢)의 비유로 풀이하였다. 그리고 법계연기의

범주를 하나와 전체의 상입상즉, 조그만 티끌과 광대한 시방세계, 한 순간

과 무한한 시간, 처음 마음을 내는 것[初發心]과 궁극의 깨달음, 그리고 생

사와 열반으로 이루어진 다라니 이용(理用)·사(事)·세시(世時)·위(位)의

4가지로 구성하였다. 의상은 이를 자리행(自利行)으로 보고, 여기에 이타

행(利他行)과 수행(修行)을 추가하여 강한 실천적 성격의 사상 체계를 제

시하였다.

의상이 중(中)과 즉(卽)의 이론으로 파악한 법계연기론은 다양한 현상세

계와 동일한 이치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하나와 전체가 같은 자

격으로 서로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할 수 있다

는 법계연기의 논리는 개체간의 절대 평등을 의미한다. 상입상즉의 연기설

은 전체 구성원의 평등과 조화를 의미하는 이론이었다.

의상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과 깨달은 부처처럼 전혀 다른 두

입장을 융합한 상태의 중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두 입장으로 대표되는 모

든 상대법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그대로 중도임을 말한다. 의상이 말

하는 중도는 양변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융합으로서의 중도도 인정한다.

양변과 중도의 구도를 통해 중생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대로 성불할 수 있

다는 본래성불을 말하는 것이다.

의상의『법계도』에서 중시하는 법성의 원융은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드

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인 해인삼매에서만 체득

되는 경지로서 이것이 성기(性起)이다.(전해주, 1993) 이 깨달음의 경지 즉

드러난 존재 그 자체로부터 일체 사물이 유출되어 나오는 것이 연기이다.

지엄은 법계연기의 순정한 면이 성기임을 말하였다. 연기와 성기는 포괄

개념이다. 『일승법계도』 자체에는 성기라는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의상의 견해를 담고 있다고 평가되는 『화엄경문답』에는 성기에 관한 많은

해설이 나온다. 성기를 강조하여 포괄하는 법계연기설이 의상이 전개한 연

기관의 특색이다.

의상은 십현설 등에서 지엄의 학설을 계승하였으나, 수십전설과 육상설

을 연기설의 중요한 교의로 정착시키는 독자적인 관점을 보였다. 그는 또

일반 화엄학과는 달리 이의 차별을 인정하는 견해 위에서 이이상즉설(理理

相卽說)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중도사상을 바탕으로 한 의상의 화엄사상은 실천행을 중시하였고 이는

사상과 문도 형성으로 이룩한 화엄종단에서 신앙으로 실천되었다. 화엄경

에 토대를 둔 구도적인 관음신앙과, 시방정토를 본체로 삼는 아미타불이 이

땅에서 중생을 정토로 이끈다는 미타신앙을 실천한 의상의 화엄교단은, 통

일기 신라사회가 지향하던 사회 안정을 선도하는 것이었다.(정병삼, 1998)

의상의 원융한 화엄사상을 일심에 의하여 우주의 만상을 통섭하려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한 중압집권적 통치체제를 뒷

받침하기에 적당하다고 보기도 한다.(김두진, 1995) 국민들과 국왕을 다(多)

와 일(一)의 관계로 보고 화엄의 원융사상이 국민들을 국왕 중심으로 통합

시키는 이념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승법계도』에서의 일

은 하나와 전체의 상입상즉한 관계 속에서의 일이지 어떤 절대적 개별체가

아니며, 우주의 일체만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동시에 그 하나 역시 일체만상

에로 융합되므로 오히려 조화와 평등이 강조되는 이론으로 해석된다. 중국

법장의 화엄사상이 당의 절대주의 체제 이념이었다는 관점에서 시작된 왕

권 이념설은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당위성

을 가질 수 없다.(남동신, 1996) 의상 외에 원효나 명효·표원 그리고 의상의

제자들이 일과 다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종교의 본질적 이념 구현에 충실

하고자 했지 화엄사상을 현실적, 정치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없다.

의상의 활동은 화엄교단을 열어 문도들에게 지속적으로 화엄교학과 정

토신앙의 실천을 이어나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의상은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부석사와 태백산 소백산 등지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화엄사상을

강의하여 신라 화엄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제자들은 의상의 강의를

묶어『추동기』나『도신장』과 같은 책으로 엮기도 하였고, 그동안 법장의 저

작으로 알려져 왔던『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도 그중의 하나로 추측되고

있다.

의상의 대표적인 제자들이 십대제자로 불리는 오진·지통·표훈·진정·

진장·도융·양원·상원·능인·범체·도신인데, 이들의 활동 시기는 일부

뒤섞여 있다. 표훈(表訓)은 의상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교의 해석을 전개하

기도 하였는데, 경덕왕대에 주로 활동했던 연대를 고려하여 의상의 손제자

로 보기도 한다. 진정(眞定)은 기층민 출신으로 문하의 사상을 주도하던 제

자이다. 지통(智通, 655~?)은 노비로서 어려서 낭지에게 출가하였다가 의

상의 문하로 옮겨서 화엄을 깨치고 관행을 닦던 수행인으로 스승의 강의

를 기록한 『추동기(錐洞記)』(또는 요의문답) 2권을 지었다. 도신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道身章)』(또는 일승문답) 2권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의상과 지엄이나 제자들의 문답과 학설들이 실려 있다. 상원은 의상 문하

의 강의에서 많은 문답을 남겼고 양원은 법계도에 주석을 남겼다. 다시 이

들에 이어 신림(神琳)과 법융(法融) 등이 의상의 화엄 전통을 널리 계승하

여 왕성한 흐름을 이루었다.(김상현, 1991)

의상과 그를 계승하는 문도들은 당시 불교계에서 크게 중시되던 『기신

론』을 중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이를 깎아내리는 경향도 있었다. 이

는 『기신론』의 교설이 의상계의 근본사상인 구체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봄

으로써 자기화하는 무주(無住)의 강조나 오척신(五尺身) 곧 이 몸 그대로

의 성불론 주장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의상계에서는 오직 화엄경만을 특화

하여 연구하였다.

의상의 직계제자들이 신라 화엄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들과는 사상 내

용을 달리 하는 흐름도 다양하게 파악된다. 우선 의상을 계승한 주류와 그

렇지 않은 부류가 있다. 의상계 내에서도 부석사계와 표훈계, 해인사계로

나누기도 한다. 비주류는 원효와 법장의 융합에 따른 화엄과 기신의 융합

인 원효계, 오대산·지리산·천관산 등 다른 화엄 경향을 보였던 계통, 또는

황룡사계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밖에 법장의 제자인 승전(勝詮)은 690년대에 당에서 귀국하면서 법장

이 의상에게 보내는 서신과 법장의 화엄사상을 집약한 화엄경 해석서인

『탐현기』 등의 저술을 가져왔다. 심상(審祥, ?~742) 역시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의상을 계승하는 화엄종단에 의해 큰 사찰이 곳

곳에 건립되어[傳敎十刹] 화엄의 성세를 보여준다. 부석사·화엄사·해인

사·범어사·옥천사·비마라사·미리사·보광사·보원사·갑사·화산사·국

신사·청담사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사상 경향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해인사에서는 의상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활동 경향을 보였다. 현준

과 결언은 884년에 중국 화엄종을 정립한 지엄을 추모하는 보은결사를 조

직하였고, 886년에는 헌강왕의 명복을 비는 화엄경결사를 조직하였다. 결

언은 861년에 경문왕의 초청으로 곡사에서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강의를

하였으며, 중국 화엄종의 완성자 법장의 저술로서 화엄사상의 핵심 저술인

『교분기』를 강의하였다. 895년에 해인사는 당시 성행하던 지방 세력의 침

입을 받아 승군을 조직하여 사원을 보호하였다. 최치원(崔致遠)도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며 법장의 덕을 기리는 일을 주도하였다.

화엄사를 대찰로 경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기(緣起)는 754년에 현존하는

『화엄경』 사경(寫經)을 주도했는데,『개종결의』·『화엄경요결』·『진류환원

락도』와 함께 『기신론』 관계 저술을 남겨 원효 계통의 사상과 연관된 면모를

보였다. 화엄사에서는 이밖에도 정행·정현·영관 등이 활동하였다.

황룡사에서는 법해와 지해 등의 화엄 승려가 활동하였다. 8세기 중반에

보림사를 창건한 원표는 천관보살 신앙을 지녔던 화엄행자였으며, 787년

에 승관직인 소년서성을 지낸 범여는 『화엄경요결』 6권을 지었고, 범수는

799년에 징관의『화엄경소』를 강의하였다.

의상의 화엄과 다른 화엄 저술들도 한 부류를 이룬다. 8세기 중반에 활동한

황룡사의 표원(表員)은 화엄사상의 중요 과제에 대한 제 학설을 집대성하여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訣問答)』을 편찬하였다. 표원은 화엄경의

구조와 설한 시기 등의 문제, 화엄교설의 중심사상인 육상·수십전유·연기·

탐현·보법 등의 문제, 대승보살의 수행도 문제 등을 18분야로 묶어 설명하였

다. 표원은 법계연기의 근원을 밝히고 각종 법계와 역대 교판을 두루 이해하

였는데, 신라화엄학의 주류인 의상의 사상을 위주로 하지 않고 법장의 사상

을 토대로 하면서 원효와 혜원·안름 등의 학설을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 표

원은 의상계가 아닌 원효계 화엄학승이었으며, 이처럼 원효와 법장의 사상을

융합한 형태가 표원에서 견등으로 계승되었다.(고익진, 1989)

명효(明皛)는『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을 저술하였는데 형식상 의상의

「법계도인」과 같은 상징적 형상을 취하고 있으나 기신론과 상통하는 해석

을 보였다. 명효는 의상사상의 계승자가 아니라 화엄과 기신을 동일한 경

계로 보았던 원효 계통에 속하는 이로 추정된다. 「법계도인」과 『해인삼매

론』은 둘 다 상징적인 도인 형태를 사용하여 성불을 지향한 것은 동일하지

만, 내용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다.

견등(見登)은 화엄사상의 성불의를 밝힌『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

佛妙義)』와『기신론동이약집(起信論同異略集)』을 저술하였다. 견등은 법장

의 저술을 집중적으로 인용하며, 삼승 유가교의 경계와는 판연히 다른 화

엄의 성불의를 해석하며 원효와 법장의 사상을 융합 수용하였다.

후삼국 시기에 해인사에는 두 계통의 화엄학풍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

는 희랑(希朗)으로 왕건을 지지하였고, 다른 하나는 관혜(觀惠)로 견훤을

지지하였다. 희랑은 의상계 화엄학의 정통을 주도하던 태백산 부석사 학풍

을 계승하여 북악이라 불렸고, 관혜는 지리산 화엄사 학풍을 계승하여 남

악으로 불렸다. 각기 독자적인 활동을 보이던 이들 두 학풍은 고려 초에 북

악 출신의 균여(均如)에 의해 통합되었다.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은 의상계 화엄사상이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전승되던 사실을 알려주며,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

을 제공해준다. 고려 중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 총수록은 2차에 걸

쳐 편집되었다. 1차적으로 신라말의 대기(大記)와 법기(法記)와 진기(眞記)

의 주석서를 모으고, 다시 이에 부수적인 보충 자료를 추가하여 2차 편집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구성이 되었다. 균여는 초기 화엄의 완성자인 지엄

과 의상과 법장의 저술에 대한 방대한 해석서를 짓고 선학들의 의기에 나

타난 교의를 재정립하였다. 나말의 선종 수용기를 지나면서 선종의 비판에

위축된 화엄사상의 재정립에 역점을 둔 균여의 화엄사상은 총수록 등에 나

타나는 신라 화엄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김상현, 1991)

5. 계율사상

계율이란 수행자 개인이 선행을 하겠다는 자율적 의지인 계(戒)와 교단

통제를 위한 승가 규범인 타율적 율(律)을 합쳐 말한 것이다. 불도를 배우

는 이가 반드시 닦아야 할 삼학(三學), 곧 잘못된 것을 그치고 잘못되지 않

게 하는 계율[戒], 산란한 마음을 막고 안정을 얻는 선정[定], 진리를 깨닫

기 위해 이치를 관하는 것[慧] 중의 하나인 계율은 초기불교 이래 크게 중

시되어 승려와 불교도들의 일상생활과 밀착되어 변화해왔다. 신라에서는

삼국 시기에 사분율(四分律)에 대한 저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자장

을 비롯한 율사들은 불교 수용 이후 교단 체제 형성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

었던 계율을 중심으로 신라 불교 교단을 이끌었다. 중대 신라에 들어서면

계율에 대한 관심이 원효를 계기로 사분율 위주에서 범망계(梵網戒) 중심

으로 바뀌고, 계율 연구도 율사들이 아니라 유식학승들이 주도하였다.(최

원식, 1999)

원효는『범망경』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를 통해 보살계(菩薩戒)를 신라

사회에 수용 정착시켰다.『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원효는 특정 경론에 의거하지 않고『범망경』을 주석하여, 이미 유행하던

소승계와 새로이 수용된 범망계와의 관계를 해명하였다. 그리고 『보살계

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에서는 범망계를 중심으로 현장에 의해 새

롭게 주목받은 유가계와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원효는 중죄의 규정을 완화

하고 계를 범하게 된 동기를 중시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면서 수행자 개개

인의 내면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원효는 중생의 이익을 위

한 자비살생은 도리어 복을 짓는 것이라고 하여 이타행과 중생제도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무애행과 중생 제도

활동과 연관을 갖는 새로운 포괄적 계율관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승장은『범망경술기(梵網經述記)』를 지어 유가계

를 기준으로 범망계를 포섭하려는 의도를 보여 원효와는 다르게 이해하였

다. 의적의 『보살계본소(菩薩戒本疏)』와 대현의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

記)』 역시 승장과 같이 유가계의 입장에서 유가계를 바탕으로 범망계를 주

석하였다. 그러나 유가계에 범망계를 포섭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모

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본 것 등은 승장과 다르다. 의적은 재가신자들

에게 관심을 갖고 이들의 위상을 높게 평가하였는데, 이는 통일 이후 증가

한 서민 신자들의 성장을 반영한다. 동시에 의적은 노비와 주인은 지위가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신분의 구별을 엄격히 하기도 하여 신라 신분제 사회

의 한계를 반영한 면도 보인다. 대현은 현실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지만,

왕권 수용을 인정하고 효은을 강조하였다.

계율의 구체적인 해석에서 원효를 비롯한 계율 논사들은 중생에게 큰 이

익을 가져오게 하는 자비살생은 오히려 복을 짓는 일이라는 살생관을 보

였으며,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지 말라는 자찬훼타계의 경우에도 드러난

결과보다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중시하여 평가하였다. 보살계 이외에도 원

효나 도륜·경흥·혜경 등은 사분율 관계의 저술을 남겼다.

이처럼 신라에서 크게 중시된 보살계 사상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으로 지배자의 전횡을 삼가하게 하고 선정을

유도하는 일면도 가질 수 있었고, 평등사상을 통하여 서민들에게 정신적 위

안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살계를 설하는 『범망경』은 효행을 강

조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을 역설하고 있으므로 이의 유행은 유

교와 불교간의 갈등을 완화해주는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평가된다.(최원식,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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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解題 해제 - 신라 불교사상사|작성자 실론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