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7. 나란다 사원 ②

수선님 2023. 8. 13. 13:12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7. 나란다 사원 ②

학인스님 흔적 전하듯 僧房 침대엔 온기돌아

<나란다 사원의 대탑>

2002년 3월30일 유적지에 도착해 본 나란다 사원은 과연 ‘거대’했다. 인도 대륙 각처에 산재한 불교유적들을 답사하고 도착한 터라, ‘나란다의 거대함’이 더욱 실감(實感)됐다. 파괴된 높이가 30m인 탑, 여기저기 흩어진 많은 부도들, 두꺼운 벽을 가진 수많은 승방들. 하루 종일 봐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남아있는 유적만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盛)의 극(極)을 달린 7·8세기엔 정말 대단한 사원이었을 거란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파괴됐어도 대단한 규모


나란다 사원은 사실 ‘인도승원(僧院) 발전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된 ‘사원 발달’의 ‘완성형’을 나란다 사원은 보여준다. 초기불교 시절 출가자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재가자들의 보시로 음식 등 ‘모든 것’을 해결했다. 부처님 생활이 이러했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우기(雨期)였다. 삼 개월 간의 우기엔 유행(流行)하기 힘들었다. 우기 땐 한 곳을 정해 머무는 안거(安居)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례화됐다.


당시 비구들은 각기 연고 있는, 근처의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 일정한 장소를 정하고 한 두 명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오두막을 지었다. 이런 장소를 ‘아바사’(住處로 한역), 오두막을 ‘비하라’(住居의 뜻)라 하는데 우기가 끝나면 오두막을 허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도시에선 사정이 달랐다. 왕족이나 장자들이 승단에 원림(園林)을 기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비구들은 기증받은 원림(상가라마라 한다)에 오두막을 짓고 머물렀다. 원림만 기증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항구적 건물’마저 기진하는 경우가 생겼다. 안거가 끝나 비구들이 떠난 후에도 기증자는 사람을 고용해 건물을 관리했다. 다음 우기엔 비구들이 다시 그 건물에 머무는 형태로 발전했다.


원림과 건물을 기증하는 재가가자 전반적으로 늘어나자, 우기 때만 안거하던 형태도 ‘상시 안거’로 바뀌어갔다. 비구들의 생활기조도 ‘유행’에서 ‘정주’(定住)로 점차 변했다. 결국 스님들은 승원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학자들에 의하면 대략 기원전 4세기 이전, 승원에서의 공동생활 형태가 자리 잡았다. 승가의 정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공주’(共住)를 위한 승원이 각처에 세워졌고, 시설 역시 정비됐다. 우기에 임시로 머물기 위한 오두막을 뜻했던 ‘비하라’도 자연스레 ‘승원’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모됐다.


대탑, 과거 영광 보여줘


발달된 비하라의 기본은 둥근 모양의 정원을 중심으로, 3·4면에 작게 구획된 간소한 승방(僧房)이 늘어선 형태였다. 점차 승방이 승방군(僧房群)으로 변하고, 여기에 집회장·주방·변소·우물·창고 등 제반 설비가 곁들여졌다. 발굴된 나란다 사원 유적은 이런 승원 발전의 정점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준다. 온전했다면 얼마나 ‘거대’했겠는가.


유적지를 돌며 파괴되기 이전의 나란다 사원 모습을 상상했다. 어떤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까. 나란다 사원에서 10년간 공부한 당나라 의정스님(635~713)이 지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하 구법고승전)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절의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지붕은 성(城)과 같이 네 모서리 처마가 직선이다. 건물 둘레는 긴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방들은 모두 벽돌로 되었으며, 대들보 위에 판자를 가로로 깔았다. 서까래를 쓰지 않고 벽돌을 평행으로 놓아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했다. 절은 모두 일직선으로 돼 마음대로 돌아 자기 방으로 갈 수 있다. 승방의 뒷벽은 바깥으로 면해 있고, 각 방의 넓이는 사방 1장이다. 방의 뒷면에 창이 설치됐으며, 창문은 처마와 접하고 있다. 방의 입구는 제법 높으며, 열린 상태로 문이 달려 있어 출입이 자유롭다. 모든 방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는 형태며, 발(簾)을 걸지 못하게 했다.”


당나라 언종스님과 혜립스님(615~676)이 쓴, 현장스님(?~664) 전기인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도 나란다 사원의 규모를 알려주는 설명이 있다.

 

“모든 승방은 4층으로 돼 있으며, 중각(重閣)의 용마루나 대들보는 용무늬로 장식됐다. 두공과 기둥은 붉게 단청됐으며, 큰 기둥과 난간엔 갖가지 조각이 새겨져있다. 옥으로 된 초석에도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하다. 지붕의 기와는 빛을 받아 번쩍이고 서까래는 색실로 연결해 놓았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도 소개


〈구법고승전〉에 나오는 묘사는 나란다 사원 현장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직사각형의 한 승방(僧房) 지역에 들어가면 중앙에 공터가 있고, 공터를 중심으로 3·4면에 작은 승방들이 줄지어 있다. 중앙의 공터에서 스승이 학인들에게 경전 내용을 강의하면, 학인들은 토론하거나 자신들이 이해한 경전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했을 것이다. 작은 승방 앞에 서 승방 내부를 바라보니, 벽돌로 쌓아 만든 침대가 있다. 침대 위에는 작은 감실이 있는데, 아마도 거기에 부처님을 모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란다 사원의 승원>

승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없었다. 따가운 인도의 햇살이 직선으로 얼굴에 내리 꽂혔다. 뜨거움을 참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정말 파랬다. 침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 옛날 이 방에 기거했던 학인은 누구였을까. 그는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을까. 혹 신라에서 온 구법승은 아니었을까. 쓰다듬는 손길에 마치 그 옛날 이곳에 살았던 학인의 숨결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있는 감실에 손을 넣어 벽면과 바닥을 만졌다. 먼지만 묻어왔지만, 천년 전 이곳에 봉안됐던 부처님이 그대로 계신 것 같았다. 눈을 들어 다시 보니 부처님은 아니 계시고, 학인의 자취 역시 없다.

 


승방군(僧房群) 유적에서 서쪽으로 나오니 〈구법고승전〉에 묘사된 그 스투파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대한 스투파가 보였다. 〈구법고승전〉에 나오는, 스투파에 관한 설명은 이렇다. “절의 서면 대원(大院) 밖에는 큰 스투파가 줄지어 있는데, 그 수는 100을 넘는다. 성스러운 유적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그것을 일일이 기술할 수 없을 정도다. 금과 보배로 빛나게 장식한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이다.”


큰 스투파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이 1861년 발견할 당시의 사진이 스투파 앞에 게시돼 있다. 사진을 지나 스투파 감실에 안치된 불상들을 보러갔다. 안타깝게도 관리인이 불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작은 스투파들을 돌아 큰 스투파에 올라가려 하니, 역시 관리인이 막았다. “유적 보호차원”이라니 달리 할 말도 없었다. 큰 스투파 옆을 지나 승원(僧院)유적과 다른 유적들을 일일이 살피는데, 햇살이 엄청 따갑게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어느 새 12시. 오전 9시30분에 들어와 관람하는 새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른 것이다.


‘고고학적 복원’만 진행 중


유적지를 빠져나오다 나란다 사원이 ‘황폐해진 이유’를 생각했다. 나란다 사원도 ‘흥망성쇠’를 외면할 수야 없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건물이든 사람이든 흥하면 교만해지고, ‘자신을 받쳐주는 주변’을 잊는 법. 나란다 사원에서의 불교학 발달도 이런 측면이 많았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불교가 ‘학문화’되면 될 수록 수행·포교라는 종교 본연의 임무를 잊고 ‘사변적 논리’에만 빠져들게 되고, ‘사변적 논리’는 불교를 더욱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학문화 된 불교’는 - 넓은 바다를 잃어버리고 어항 속에서만 노는 물고기처럼 - 결국 중생들과 유리된 채 ‘논리’ 속에서만 전통을 이어가게 마련. 이러한 때 학문 연구를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사원·인재·재가자)가 없어지면, 학문의 실체적 대상인 불교마저 사라지고 만다.


나란다 사원의 역사가 그랬다고 개인적으론 판단한다. 7·8세기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나란다 사원은 주변의 중생들을 잊은 채, 안락한 사원 속에서 점차 ‘사변과 논리’에 매몰돼 갔다. 그러다 1200년 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고르왕조(이슬람)의 장군 무하마드가 북 인도에 침공했을 때, 나란다 사원은 6개월 동안 불타면서 철저하게 파괴됐다. 스러진 나란다 사원은 ‘인도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이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주변’에 포교하고, ‘주변’을 챙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불자가 없는데 어떻게 불교가 일어나고, 나란다 사원이 복원될 수 있겠는가.


1916년부터 체계적 발굴


수백 년 간 흙 속에 묻혀있던 나란다 사원을 되살린 사람은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1861년 첫 확인)이었지 ‘불교도’들이 아니었다. 1916년부터 본격화 된 사원 ‘유적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사라진 나란다 불교’는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종교적’으로 나란다는 여전히 파괴된 상태로 있는 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원을 빠져나온 뒤에도 내내 가슴이 아팠다.

 


*** 唐 현장스님과 나란다 사원 ***


5년간 ‘유가론’ 등 배워


당나라 현장스님(?~664)은 장안을 떠난 지 3년 되던 해인 631년경 나란다 사원에 도착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의하면, 나란다 사원 최고 스승 계현법사 “현장스님이 인도에 도착하기 3년 전 갑자기 몸이 너무 아파 자살하려 했으나, 문수보살·관음보살·미륵보살 등이 꿈에 나타나 3년 뒤 지나국(중국)에서 한 스님이 오는데, 그에게 대법(大法)을 전하라 해 기다라고 있었다”며 현장스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풀밭에서 본 대탑>

현장스님은 이후 계현법사를 스승으로 나란다 사원에서 5년간 수학했다. 5년 동안 현장스님은 〈유가론〉을 세 번, 〈순정리론〉을 한 번, 〈현양론〉·〈대법론〉을 각각 한 번, 〈인명론〉·〈성명론〉·〈집량론〉 등의 논은 각각 두 번, 〈중론〉·〈백론〉은 세 번씩 청강했다. 〈구사론〉·〈바사론〉·〈육족아비담론〉 등은 일찍이 가습미라(지금의 인도 캐시미르 주) 등에서 배웠기에 나란다에서는 의문점들만 질문했다. 산스크리트어 등 여러 언어들까지 모두 배운 뒤 현장스님은 다른 곳으로 갔다고 〈삼장전〉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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