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

詩選集 시선집

수선님 2023. 5. 28. 13:26

詩選集 시선집

凡例 일러두기

1. 이 책은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한국불교 전통사상의 선양・유통을 위하여 기획한 한국전통사상총서 제9권 [시선집편]이다.

2.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한 제반 사항은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의 번역 지침에 따랐다.

3. 번역의 저본은 『한국불교전서』로 하였으며, 독립된 문집에 실린 작품을 대상으로 선취하였다. 선취의 기준은 수행의 삶과 경지를 잘 담았으면서도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위주로 하였다. 시기별로는 삼국시대에는 독립된 문집 형태의 출간이 없어 고려시대로부터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집이 포함되었다. 불교시가 고려후기와 조선초기에 집중적으로 발달한 점을 고려하여, 이 시기 작품을 중점적으로 선취하였다. 다만, 조선 후기의 전개 양상도 소개할 필요가 있어 이 시기의 중요한 문집을 골라 선취하였다.

4. 작품의 번역은 최대한 친밀한 일상어를 살리되 영역 작업을 염두에 두어 가능하면 평이하면서 직역에 가깝게 하였다.

5. 원문의 표점은 쉼표(,) 마침표(.) 느낌표(!) 물음표(?) 큰 따옴표(“ ”) 작은따옴표(‘ ’) 홑낫표(「 」) 등을 사용하였다. 경전이나 저술은 『 』, 품이나 소제목 등은 「 」를 사용하였다.

6. 한자음을 그대로 살릴 경우에는 ( ), 한자를 번역할 경우에는 [ ]를 사용하였다.

解題 해제

1. 한국 역대 고승 문학의 자료와『정선 시선집』의 작업원칙

2. 우리나라에서 불가한시가 발달한 배경과 계기

3. 우리나라 불가한시의 성격

4. 우리나라의 역대 불가 문집

1. 한국 역대 고승 문학의 자료와『정선 시선집』의 작업 원칙

삼국시대에 불교가 도입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시가가 창작되어 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상황은 자료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한시와 향가가 가장 중요한 시가 형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시 창작이 아직 일반화되기 이전이라 한시 작품은 숫자가 많지 않다. 향가의 경우에도 불교의 사유가 깊이 배어든 매우 수준 높은 작품

들이 있지만, 현전하는 작품의 숫자가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초기에는 향가가 계속 지어졌고, 후기로 오면 선불교가 흥성하면서 수행의 경지와 체험을 한시로 표현하는 방식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은 매우 수준 높은 선시를 풍부하게 창작하였다. 우리말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가사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가사는 현존하는 자료로 볼 때, 나옹혜근이 최초로 창작한 장르이며, 조선조의 가장 중요한 문학 장르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기존의 한시 이외에도 경기체가라는 양식이 초기에 잠시 유행하였고, 중기 이후로는 가사 문학이 매우 흥성하였다. 가사문학은 한자를 모르는 대중들을 포교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회심가」와 같은 작품은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지금도 불리고 있다. 조선조의 중요한 시가 장르인 시조의 경우, 의외로 불교와의 관련은 매우 약하다. 짧

고 간명한 정형성이 불교와 친연성을 가질 만한데도 불구하고 거의 무관하게 발달하였다.

조선조에는 고려 후기 못지 않게 불가한시(佛家漢詩)가 번성하였다. 왠만한 승려는 문집을 하나쯤 남기는 것이 관례가 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고려조와는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고려후기의 불가 한시가 선수행의 경지를 나타내는 데 충실했다면, 조선조의 불가한시는 다양한 생활 감정을 토로하는 내용도 많이 담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의 발로는 조선조의 사회상과 불교계의 위상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가 한시의 작품은 대부분 문집의 형태로 남아 있다. 현전하는 불가문집은 모두 101종이다. 이것은 조선조가 일제에 병합되는 1910년까지를 시간적 범위로 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한시집이 나왔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한문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던 조선조까지만으로 시기를 한정하고자 한다.

신라·고려·조선 전 시기를 두고 보았을 때, 고려후기에는 선시문학이 가장 발달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고, 조선조에는 문학적 측면이 더 강화되면서 다양한 생활과 감정이 표출되었다. 특히, 유교가 득세하고 불교를 핍박하면서 불가의 지성들이 유가의 지성들과 약자의 처지에서 교류해야 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다 보니, 불가 고유의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의미가 깊은 표현의 전통을 벗어나서 유가의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표현으로 경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문학성이 증대되고, 한편으로는 불가 고유의 색채를 벗어나는 두 경향이 병존했던 셈이다. 이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은 수행의 경지와 문학적 표현을 동시에 잘 살려내었던 승려였다.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과 조선 전기의 휴정의 작품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작품을 선취하였다. 특히 휴정의 작품은 수행과 문학성이 잘 조화된 작품들이 많아 특별히 비중을 많이 두었다. 하지만, 한국 불가 한시의 전체적인 양상을 알 수 있도록 조선 말기의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승려인 경허성우의 작품까지 두루 포함하여 번역하였다. 번역문을 작성할 때 주석은 가능한 적게 하였다. 주석이 너무 번쇄하면 개념적, 논리적 이해는 자세하고 정확하게 될 수는 있으나 시의 맛을 오히려 위축시킬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주석을 하는 경우에도 최대한 간명하고 쉽게 하였다.

이 작업은 기본적으로 영역 작업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참작하여 애매모호한 표현이나 난해한 표현을 줄이고 쉬운 일상어를 살리면서 뜻이 분명하도록 번역하였다. 시적 언어에서는 약간의 애매성이 시적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작용이 있지만, 여기서는 뜻의 명료성에 좀더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표현이 다소 설명적인 부분도 있다. 몹시 아쉬운 대목이지만 불가피하다.

2. 우리나라에서 불가한시가 발달한 배경과 계기

13세기 초에 혜심(慧諶)을 필두로 해서 우리나라에 선시의 세계가 열렸다. 그 이후 고려말기에 선문학의 꽃을 활짝 피우고 그 여세는 조선조 전시기를 두고 계속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나라의 선시전통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을까?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전 6세기 초에 선불교가 발달하였고, 이와 함께 선시도 왕성한 발달을 보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초에 선불교가 들어온 반면, 선시는 13세기나 되어서야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선시가 왕성하게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를 8세기 정도로 본다면, 선사상이 들어온 것은 중국과 2세기의 차이가 나는 반면 선시는 5세기나 차이가 난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중국의 선시가 나타나기 시작한 구체적인 근거는 육조(六祖) 혜능(慧能,638~713)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혜능이 오조(五祖) 홍인(弘忍)에게서 배울 때 자신의 깨달은 체험을 시로 써서 벽에 붙임으로써 인가를 받은 일이 있다. 그에 앞서서 홍인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신수(神秀)도 시를 써서 붙였으나 갓 입문한 혜능보다 경지가 떨어졌기 때문에 의발(衣鉢)이 혜능에게로 갔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이 당시만 해도 수행의 체험을 시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이 상당히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의 선시문학은 영가대사(永嘉大師)의 「증도가(證道歌)」나 동산(洞山)의「보경삼매가(寶鏡三昧歌)」등으로 발달해 갔다.「증도가」와 같은 글은 모두 1,858자 267구로 되어 있어서 한 구가 대개 7언이고 간혹 6언도 섞여 있다. 이들 구는 용운(用韻)이 매우 정교하고 대구(對句)도 아주 절묘하게 살려서 선의 이치를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대단히

가치 있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당나라에 최고조로 발달하고 가문별로 다양한 선풍(禪風)을 형성하였던 선의 대가들은 그들의 독특한 가풍을 언어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여 숱한 선문학을 쏟아놓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백미가『벽암록(碧巖錄)』이다.『벽암록』은 처음 설두중현(雪竇重顯)이 1,700공안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00가지를 뽑아 거기에 송고(頌古)를 붙이고 다시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 등을 덧붙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선의 고전일 뿐만 아니라 선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당나라나 송나라 때는 일반 문인 가운데 불교에 깊은 조예를 가져서 높은 수준의 선문학을 다양하게 개척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이가 당(唐)나라의 왕유(王維)와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이다. 특히 당나라 때는 거의 모든 지식인이 다 불교적 소양을 가졌다고 할 만큼 불교 내지는 선이 일세를 풍미하였고, 따라서 일반 문인의 작품에도 선의 세계가 깊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다.

승속(僧俗) 할 것 없이 불교가 크게 유행하고 시가도 최고조로 발달하던 시기이다 보니 승려 가운데도 시짓기에 아주 능한, 거의 시인이 주업이다시피 한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승려작가는 교연(皎然), 관휴(貫休), 영철(靈澈), 제기(齊己) 등이다. 이 중에서도 교연이 가장 출중하였다. 교연은 시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시식(詩式)』,『시의(詩議)』,『시평

(詩評)』등 시비평서까지 내었으며,『시식』은 후대에 시비평서의 가장 중요한 고전이 될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상은 8세기 초에 이미 유입되었으나 선시라고 할만한 작품은 상당 기간 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모두 교학과 관련되어 있으며, 형식도 문학적으로 세련되지 못하였다. 그 예를 살펴보면, 원효의「미타증성가(彌陀證性歌)」와『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말미의 게송(偈頌), 사복(蛇福)이 모친 장례 때 지은 게송, 의상(義湘)의「법성게(法性偈)」정도가 있다. 이들은 교리를 위주로 나타내는 글이어서 문학성이 부족하고, 사복의 모친 장례 때 원효가 지은 작품은 서정적이긴 하나 단 두 구로 이루어져 시로서의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사(楚辭)나 고시(古詩)의 풍을 지니고 있어서 한시의 원시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한시로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던 시기였다. 한시보다는 향가에서 불교사상을 더욱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였으나, 전하는 작품 수가 아주 적다.

고려조에 들어와서 주목할 인물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이다. 의천은 시와 산문을 합쳐서 상당한 분량의 문집까지 남길 정도로 왕성한 창작을 하였다.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의천은 한문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다. 문장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던 의천은 불교의 사상과 수행을 시로 표현하기를 즐긴 최초의 승려문학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시에 그다지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닌 듯하며, 작품내용은 선적인 것은 별로 없고 대개 교학적이거나 서정적인 것이다. 의천의 제자에 탄연(坦然)이나 혜소(惠素)와 같은 승려시인이 있어서 세간에 이름이 높았다고 하나 작품이 많이 전하지 않고, 또 선의 세계를 시에 깊이 개입시킨 흔적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선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는 지눌(知訥, 1158~1210)의 제자인 혜심(慧諶, 1178~1234)으로부터이다. 지눌도 선시를 많이 지었을 법하지만 자료적 근거가 없어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혜심 이후에는 천인·천책·충지·경한·보우(普愚) 등 일련의 대작가들이 속출하여 선시문학의 황금기를 연출하게 되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선시를 짓는 풍습이 계속되었다.

고려조에 일반 지식인으로서 선시를 지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이자현(李資玄)과 이규보(李奎報)가 있다. 여말에 이색(李穡)과 같은 인물도 불교에 조예가 깊고 승려와 교유도 많았다고 하나 불교에 아첨한다는 비방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전반적으로 당나라와는 달리 일반지식인들이 그렇게 심하게 불교에 경도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불론이 등장하면서 당대(唐代)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상황을 형성하였다.

그러면, 각각의 나라에서 선시가 일정한 시기에 발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위승사(魏承思)는 당(唐)나라때 선시(禪詩)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1)

1) 魏承思,『中國佛敎文化論稿』,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91, pp.221~4.

첫째, 불경 중의 게송(偈頌)을 선시(禪詩)의 직접적인 연원으로 볼 수 있다. 불경 중의 게송은 원래 일정한 운율과 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역되면서 시적 요소가 온전히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중국의 선종이 일어나면서 선사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 경지를 전달하고자 시게(詩偈)를 많이 짓게 되는데, 이것이 선시의 맹아가 되었다. 예컨대, 혜능(惠能)의 유명한 ‘시법게(示法偈)’를 들 수 있다.

둘째, 중국에는『시경(詩經)』과『초사(楚辭)』, 한위(漢魏) 시대의 고시(古詩) 이래로 시가(詩歌) 전통을 가졌던 것이 선시(禪詩)의 중요한 연원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위진(魏晋) 시기의 ‘현언시(玄言詩)’와 선시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다. 현언시는 현학사상을 기조로 한 것이지만 불교와의 유사성이 있는데다, 차차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선시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사영운(謝靈運)의 산수시와 같은데는 이미 선적인 요소가 상당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왕유(王維)와 같은 전문적인 시인뿐만 아니라, 한산자(寒山子)와 같은 시승(詩僧)들도 그 이전의 시가전통을 충분히 습득한 바탕 위에서 선시를 지었음이 확인된다.

셋째, 당대(唐代)는 중국시가의 황금기이면서 동시에 중국불교의 전성시대였던 점이 왕성한 선시 창작을 촉진시켰다. 당대는 말할 것도 없이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 등 기라성같은 대가들이 별같이 많이 나와서 중국 시가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울러 중국불교가 선·교 할 것 없이 최고조로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종은 눈부실 정도로 발달하여 선종의 틀이 이 시기에 거의 이루어지고, 후대에 거듭 일컬어지는 대선사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출현하였다. 따라서 세속의 지식인들도 불교, 특히 선불교를 깊이 공부하였고, 승려들도 세속의 시인들과 덩달아 시를 즐겨 지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첫째 불경에 송을 붙이는 전통이 있었다는 점과, 둘째 중국에 오랜 시가의 전통이 있었다는 점과, 셋째 당대에 선불교와 시가가 동시에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는 점이다. 두 가지는 전통적인 요소로, 나머지 한 가지는 당대의 요소로 본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완벽하지는 않겠으나 중국선시 발달의 계기를 상당한 정도 밝혀 준다고 보고, 이를 우리나라에 대입시켜 대비해 보자.

첫째, 불경에 송을 붙이는 전통은 일찍부터 들어온 불교를 통해 익숙한 방식이었다. 창작은 많지 않았으나 불경을 보면서 이러한 방식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본 원효의 「미타증성가(彌陀證性歌)」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말미의 게송(偈頌), 의상(義湘)의「법성게(法性偈)」, 그리고 균여(均如)가 대중포교를 위해 지었다는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같은 작품도 이러한 유형의 일종으로 보아야겠다. 따라서 경전의 끝에 송을 붙이거나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여 시가로 표현하는 방식은 많이 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꾸준한 창작의 경험도 축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 시가의 전통은 어떠한가? 우리말 시가는 긴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한시의 전통은 중국에 비해 매우 빈약하였다. 선시가 한시라는 양식을 주로 취하는 점을 고려하면 질적·양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신라시대에는 최치원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오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들이 나와서 무리를 이루고 맥을 형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 초에도 상황이 비슷하였으며, 고려중기에 가까워지면서 차차 한시 인구가 확산되어 나갔다.

신라시대에는 한시창작이 일반화되지 못한 이유를 과거제도에서 찾을 수도 있다. 과거는 곧 관리등용절차이고, 지식인의 형성은 관리양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과거제라고 할 만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에서 공부한 것은『좌전(左傳)』,『예기(禮記)』등 유가경전이 대부분이고 『시경(詩經)』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문학서로서는 다만『문선(文選)』이 있었으나 창작이 아니고 해석 위주의 공부였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시를 공부하는 영역이 아주 적었을 뿐만 아니라 창작에는 더욱 힘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고려 광종 때부터 실시한 과거에서는 시(詩), 부(賦), 책(策), 론(論) 등을 짓는 제술업(製述業)이 경전해석을 시험하는 명경업(明經業)과 독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중시됨으로써 지식인들에게 시를 짓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자 일상적인 일로 바뀌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서 작시(作詩)를 시험 본 이후에도 한시의 향유층이 광범하게 형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으므로 한시문학의 활성화는 좀더 기다려야 했다. 그 전에도 훌륭한 승려들이 많았으나 11세기 말경에 와서야 의천과 같이 시를 즐겨 쓰는 승려가 나타난 것도 이러한 맥락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한시의 형태만으로 볼 때는 우리나라에 한문 자체는 일찍부터 유입되었다고 하더라도 한시 향유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서, 선사상이 들어왔을 때 아직 우리나라에는 자신의 생각과 체험을 한시로 표현하는 방식에 아직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선시의 발달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중국에 선종이 생겨났을 당시에 이미 뿌리 깊고 다양하고 풍부한 한시작시의 전통을 갖추고 있었던 중국의 상황과는 차이가 많다.

셋째, 선사상과 시가활동의 정도는 어떠하였는가? 선사상은 신라 말에 이미 들어왔으나 일세를 풍미할 만큼 세도가 크지는 못하였다. 선이 크게 일어나 주류를 이룰 정도가 된 것은 고려 지눌 이후의 일이다. 지눌 이후에 야 선종이 왕성하게 성장해 나갔다는 점 이외에, 또 한 가지 선시문학이 발달된 계기를 지눌 이후 선종의 사상적 성향과도 연관시켜 볼 필요가 있다.

지눌과 그의 제자 혜심은 간화선(看話禪)을 정립하였다. 선에서 언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또 동시에 ‘불리문자(不離文字)’라 하여 언어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간화선에서는 언어를 대단히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하여 남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탐구하여 언어를 넘어선 세계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이것이 언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선시를 통해 언어의 적극적인 활용을 꾀했던 사상적·역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한편 시가활동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비조라고 하는 최치원 이후 꾸준한 전통이 있어 왔으나 많은 작가가 나타나 백가쟁명식으로 활발하게 발달하였던 것은 고려중기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한시 향유인구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한시문화가 활성화된 시점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복잡한 사항이지만, 비평의 출현이 그 활성화를 판단하는 중요한 한 준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비평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인로(李仁老)의『파한집(破閑集)』이 나오면서부터 우리나라 한시문학이 본궤도에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선시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눌 이후 간화선을 위주로 한 선종이 사상계를 주도하고 한시문화도 활성화된 지눌 이후에야 선시가 제대로 나올 수 있었다.

3. 우리나라 불가한시의 성격

1) 선시와 생활시

불가한시는 다른 한시와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제재의 측면에서 볼 때, 당연히 불교적 진리를 담는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면 불가한시는 진리만을 표현하는가? 아니다. 진리 외에도 삶을 표현한다. 그 삶은 진리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가한시는 진리와 삶이라는 두 가지 제재를 축으로 이루어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진리와 삶이라는 제재가 나타나는 양상은 다음 세 가지의 경우이다.

① 진리만 나타나는 경우

② 삶만 나타나는 경우

③ 진리와 삶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

이러한 제재의 영역을 가진 불가한시에서 우리가 찾을 가치는 무엇인가? 그 가치를 찾는 데 결정적인 어려움은 진리 자체가 ‘불립문자’, ‘언어도단’의 세계라는 데 있다. 특히 선(禪)의 진리를 말한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시적 표현을 통해 우회적으로 말해 놓은 것을 풀고 설명해 버리면 진리와 이미 멀어지기 때문에 ‘지해(知解)’로써 접근하는 분석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불교, 특히 선의 진리를 표현한 시는 깨달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범부는 선시를 아예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방기해 놓을 것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범부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선시를 즐겨 읽고 감상하며, 찬탄을 금치 못한다. 범부에게도 선시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범부는 선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론은 선불교의 독특한 언어관에 기인한다. 시란 것이 언어로 이루어진 것인데, 선은 언어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선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러면 왜 불립문자라는 말을 쓰는가? 그것은 선의 세계를 지칭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기의에 정확히 일치하는 기표가 없다는 뜻이다. 불교 내지 선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일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며, 심지어는 기표를 적대시하기까지 한다.

세속의 일반범부는 기의의 세계는 영원히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며, 자신이 아는 것은 기표의 세계일 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은 이미지만으로 이 세상을 인식할 뿐, 이 세상 그 자체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음흉한 욕망과 편협한 고집에 의해 이 세상을 왜곡시켜 자기 마음대로 이미지를 구성하여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이미지를 ‘상(相)’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면서 상(相)이 곧이 세상과 동일하다고 하는 오해를 버리는 것으로부터 불교수행은 시작되고, 그 상(相)과는 일치하지 않는 존재계의 실상을 체득하는 것으로 수행이 완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기표의 불완전성 자체는 해소할 수 없으나 기표와 기의의 괴리는 극복될 수 있다. 존재의 실상을 안다는 것이 곧 기의를 터득한다는 말이고, 이를 달리 말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된다.

고민은 기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표를 전연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뭘 전달하기는 해야겠는데 말로 하자니 틀려지고, 말을 안하자니 아무런 전달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그 방법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선문답식 초논리적 표현

② 고도의 상징 또는 비유적 표현

③ 평정(平靜)한 심경(心境)으로 바라보는 대상의 묘사

불가한시는 선시가 전부인가? 의외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선과 시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불가한시의 가장 특징적이고 중심적인 것이 선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불가한시에는 선시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있다. 진리와 삶이 결합된 형태뿐만 아니라 진리와는 관계 없는, 삶만을 나타낸 시도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한 인물의 실례를 통해 승려의 작품세계가 어떤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기로 하겠다. 고려후기의 승려 충지(冲止)의 시세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2)

2) 다음 글에 상론되어 있다. 졸고,「원감국사 충지의 시세계」,『한국불교문학의 연구』, 민족사, 1997, pp.368~408.

법(法)의 시 수도시(修道詩) : 수행의 경험과 깨달음을 나타낸 시

시법시(示法詩) : 진리를 보여주는 시

낙(樂)의 시 자연시(自然詩) : 자연의 풍경을 읊은 시

자락시(自樂詩) : 자연 속의 즐거움을 읊은 시

찬미시(讚美詩) : 타인의 덕을 찬미한 시

고(苦)의 시 사회시(社會詩) : 사회의 현실을 묘사한 시

인정시(人情詩) : 다른 사람과의 정을 읊은 시

생활시(生活詩) : 일상 생활을 나타낸 시

위의 분류는 충지라는 한 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분류체계이다. 여기서 선시 내지는 진리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수도시, 시법시, 자연시, 자락시에 주로 포함되어 있다.

자연시나 자락시의 경우, 그 성격의 파악에 상당한 애로가 수반된다. 그것이 자연을 빌려 수행의 경지나 도의 오묘한 경지를 나타낸 것인지, 그저 자연을 묘사한 것인지 불분명한 수가 많다. 작가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을 뿐인데, 해석자가 온갖 철학적·종교적 의미를 다 갖다붙여서 심오한 작품으로 둔갑시킬 우려가 있다. 진리와 삶이 결합한 형태인지, 진리와는 무관한 삶의 영역일 뿐인 형태인지 모호한 것이 난점이다.3)

3) 이런 유의 작품은 그 이중성·애매성·모호성(ambiguity)으로 인하여 문학성이 증대한다고도 볼 수 있다.

불가한시에는 수행체험이나 사상 그 자체를 표현한 시도 많지만, 그것을 삶의 현장 속에 적용시킨 작품들도 많다. 충지 시의 경우 인정시나 사회시와 같은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깊은 인간애라든가, 대중의 삶에 대한 걱정을 나타낸 시들은 사상과 수행이 원숙되어 삶 속에 우러나오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 선시라고 하는 작품군과는 성격을 매우 달리한다.

다음 시를 보자. 이것은 청허당이 산을 유람하다 가을의 정경을 보고서 그 감회를 읊은 작품이다.

千山木落後 산마다 나뭇잎 떨어져 버리고

四海月明時 온 세상에 달 밝은 때

蒼蒼天一色 푸르고 푸르러 하늘은 한 색이니

安得辨華夷4) 어찌 중화니 오랑캐니 구분할 수 있으리

4) 休靜,「探密峯」,『淸虛堂集』권2.

이 시는 언뜻 보아서는 전형적인 자연시처럼 보인다. 산이 나오고 나무와 낙엽이 나오고 달이 나오고 하늘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여느 자연시와는 천양지차이다. 제1, 2구는 그냥 자연을 읊은 듯하다. 불교에서 달은 진여(眞如) 내지는 자성(自性)을 상징하는 수가 많으므로 그냥 달이 아니라 진리의 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3구로 가면 전환이 일어난다. 달이 워낙 밝으니 밤이라도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 그런데 그 하늘은 푸르기만 할 뿐 아니라 온 하늘이 차별 없이 한 빛이다. 불교에서 모든 차별현상을 극복하고 만유의 평등성을 말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에 속한다. 그런데 이것이 보편원리로서만 제시되지 않고 당시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로 적용되고 있는 데에 이 시의 특출함이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는 중국의 하늘이나 우리의 하늘이나 푸르기는 한가지인데 어찌해서 화이(華夷)의 차별이 있는가 하고 묻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단순히 화이의 차별만을 문제삼았다고 할 수는 없다. 화이의 차별이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나라 안에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져서 그것이 곧 귀천과 그에 따른 온갖 차별을 낳고 있는 현실과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특히, 불교를 배격하고 승려를 천시하는 차별 구조에 대한 거부감을 포함한다.

불가한시는 항상 수행이 완성된 경지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수행과정에서 겪는 번민과 고뇌, 의욕 등을 나타낼 수도 있으며, 불교적 가치관을 현실 속에 펴지 못할 때 얻는 고뇌를 말할 수도 있다.

다음 시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죽도(竹島)에 머물 때 한 늙은 유생에게 피력한 자신의 심경이다.

西州受命任家裔 서주(西州)에 명을 받은 임씨(任氏) 가문의 후예로

庭戶堆零苟不容 집안이 영락하여 잠시 몸 둘 곳도 없었네.

無賴生成逃聖世 의지해 살 데가 없어서 세상을 피하여

有懷愚拙臥雲松 어리석음과 못남을 품고서 구름과 소나무에 누웠네.

山河去住七斤衲 산과 강을 오가는 데는 일곱 근(斤) 장삼이요

宇宙安危三尺筇 우주의 안위(安危)에는 세 척의 지팡이라.

是我空門本分事 이것이 우리 불가의 본분인데

有何魔障走西東5) 무슨 마귀의 장애가 있어서 동서로 달리는가.

5) 「在竹島有一儒老譏山僧不得停息以拙謝之」,『四溟堂大師集』, 권7.

제4행까지에서는 출가한 과정을 말하였다. 이에 의하면 사명대사는 집안이 영락하여 의지해 살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출가한 모양이다. 수행하는 승려는 다만 일곱 근 장삼과 세 척 지팡이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도를 닦아 우주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본분으로 하는데, 수행은 하지 않고 전투하느라, 성을 쌓느라, 외교를 하느라 동으로 서

로 내달리니 이것은 틀림없이 마귀가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불만스러워하고 있다. 즉, 유정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불가 승려로서의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스스로 절감하고 있음을 이 시에서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불가한시는 단지 선의 경지만을 나타낸 것이 모두가 아니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나며, 현실의 삶 속에서 수행자로서 느끼는 여러 문제의식과 번민도 함께 나타나서 불가한시가 초현실적·초시대적인 이상의 세계만을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현실과 시대에 대한 심도 깊은 의식의 표현을 함께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교리나 수행의 경지 그 자체를 시로 형상화하는 일도 소중하겠지만, 그 수행의 경지를 일상의 구체성 속에서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선시라고 하는 범주보다 불가한시의 범주는 훨씬 넓고 크다. 그리고 불가한시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여지는 오히려 후자에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수행과 실천이라는 구조가 갖는 성격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가한시를 불교 내적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사 전개에서의 위상과 구실을 파악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우리나라 불가한시의 전개 양상

(1)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신라를 제외하고는 별로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 신라에서는 불가한시가 양적으로 많이 지어지지 않았으며, 사상적인 경향성도 뚜렷하지 않다. 선사상보다는 교학사상이 문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앞에서 본 의상, 원효, 태현, 사복의 게송류가 있으며, 삼국시대의 특기할 만한 서정적 불가한시는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삽입시이다.

『왕오천축국전』은 여행기의 성격을 띠지만 천축 각국의 인문지리학적인 개관을 위주로 서술이 되어 여행기치고는 문학성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중간중간 삽입된 시에서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이 고도로 발휘되어 나타나며, 5수의 삽입시 자체로써 여행의 전체 노정과 그 심정의 변화를 예민한 감도로 반영하고 있어 『왕오천축국전』은 이 5수의

삽입시에 힘입어 기행문학으로서의 향기와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게송류는 대체로 진리를 나타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혜초에 의해 그런 단조로움이 크게 탈피될 수 있었다. 원효나 사복에 의해 지어진 작품 같은 경우는 참으로 진솔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향기가 깊이 배어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양이 많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다.

(2) 고려시대

나말 여초에 선종이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선시가 지어졌다는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선시의 전성시대를 한창 구가해 왔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 점에 대한 고찰이 앞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문학적 수준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나 고려조 불가한시는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활짝 열렸다. 의천은『대각국사문집』을 통해 수많은 시와 산문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의천은 선과 교를 절충했다는 천태사상의 대가로서 많은 시를 남기고 있으나, 연구가 미진하여 그 시세계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의천 이후에도 계응(戒應), 혜소(惠素), 탄연(坦然) 등의 승려시인이 이름을 떨쳤으나 작품이 많이 남아 전하지를 않으며, 우리나라의 불가한시는 고려후기 선종의 흥성과 함께 그 절정을 이루었다. 고려후기 선종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하여 정립되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위세를 떨쳤다. 지눌의 작품이 상당수 있었다고 예측되나 전하지 않고, 그의 제자인 혜심 이후 충지, 경한, 보우, 혜근 등이 선시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이들은 선사상과 수행에 지극히 충실한 모습을 보이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선시의 최고 경지를 활달히 전개하였다. 이 중 다소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작가가 충지이다. 충지는 충실한 선승으로서뿐만 아니라, 주위의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정을 보이는 모습이나, 원 지배하의 백성의 고통을 절절히 읊는 등의 인간애 내지는 사회의식의 일단을 보여 주기도 하고, 국사(國師)까지 지낸 덕망 높은 승려답지 않게 추위나 더위, 가난 등에 고통스러워하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까지도 거침없이 시화(詩化)하는 독특한 시세계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고려후기에는 선종 이외에 천태종도 함께 흥성했다. 천태종 승려로서 천인(天因)과 천책(天頙)이 유명하며, 무기(無寄)는『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이라는 대장편 서사시를 남겨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서사시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서술한 내용으로 스스로 상세한 주까지 덧붙인 점이 특색이며, 당시 수행 풍토에 대한 비판의 내용까지 담고 있어서

흥미롭다.

고려조의 불가한시는 선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면서 최고도의 불교문학을 꽃피웠으며, 불교라는 요소를 빼고서도 한시의 높은 수준을 달성하여 일반 문인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의 수준을 이루었다. 이들 작품은 진리의 세계를 중점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진리와 삶이 어우러진 조화의 세계를 나타낸 것도 많다. 삶 그 자체만을 그린 작품은 상대적으로 열세이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정치권에 의한 인위적인 선교 양종으로의 통합을 겪으면서 내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내적으로는 이 통합정책에 의해 자율적이고 다양한 종파별 발전이 봉쇄되어 선 또는 교라는 구도로 단순화되어버린 데다가, 외적으로는 주자학의 강력한 이념적 독재에 의해 교세가 크게 위축될 위기에 처하여 전 불교계가 생존 자체에 허덕이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 내

실 있는 발전을 기하기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나타낸 이가 함허득통(涵虛得通) 화상이다. 득통은 배불론에 대한 이론적 반론을 제시하면서 문학을 통해서도 자신의 이념과 고민을 두루두루 표출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선과 정토사상을 적절히 융합시키면서 새로운 시대여건 속의 생존전략을 위해 무척 고심하였고, 그러한 고심을 문학을 통해서도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경기체가라는 새로

운 형식의 문학을 과감히 동원한 것도 그러한 고민의 깊이를 반영해 주는 부분이다.

그 이후 보우(普雨)에 의해 불교부흥이 도모되고, 보우의 노력에 힘입어 휴정이나 유정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와 불교와 시대를 함께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것이 불가한시의 새로운 면모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보우(普雨)-휴정-유정에 걸치는 불교부흥의 노력은 성공했다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휴정·유정당과는 다른 노선을 택한 부휴선수(浮休善修)나 소요태능(逍遙太能) 등은 대외적으로 불교의 위상이나 세력을 개선시키려 하기보다는 내적으로 충실한 수행을 통해 불교의 내실을 기하고자 하여 그러한 기풍을 통해 조선조 불교는 배불의 역풍 속에서도 착실히 그 수준을 유지해 나갔다. 서산이나 사명당 역시 탁월한 수행의 경지를 겸비하고 있었기에 그에 힘입어 임란 이후의 조선불교는 배불정책과 축성동원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수행하는 가풍을 소리없이 키워나갔다.

문학의 측면으로 볼 때 조선초기의 배불론에 대한 저항과 고뇌, 또 한편으로는 수행의 경지를 확보하려는 이중의 노력이 시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중기 이후로는 수행의 경지를 지키려는 노력과 득세한 유가와 의 교섭 속에서 유가의 인정을 받고 유가풍의 한시에 경도되는 부류가 확대되어 나가는 경향이 맞물리면서 불가의 한시도 복잡한 양태를 나타낸다. 조선 전 시기를 통하여 사상적인 저술보다는 문학적인 저술이 우세한 경향을 보여 조선조 불교문학은 고려후기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풍부한 전성시기를 맞이하였다. 교단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생생한 생명력이 문학으로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조에는 80여 종에 이르는 문집이 남아 전한다. 이러한 왕성한 문학활동은 조선이 멸망하고 난 이후에도 지속되어 지금까지도 불가한시는 계속 이어지고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전통을 형성하였다.

조선조의 불교는 사상적 저술이 위축되고, 상대적으로 문학을 통한 표현이 확대되었다. 그래서 높은 경지에 이른 승려는 누구나 문집을 하나쯤 남기는 것이 통례가 될 정도가 되었다. 조선조의 불가한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단의 주된 표현수단이 문집의 형태이며, 문집에서도 시가 중시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조 불교의 사상적 표현은 시가 그 대변인 역할을 했다는 말이 된다. 거꾸로 말하면, 한시는 조선조 불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심적인 자료가 된다는 말이다.

한시를 통해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고, 그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그들의 고민을 토로해 내었던 것이다. 사상 내지는 수행의 경지에 있어서는 고려 후기와 비교해서 뒤떨어지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문학에 내포된 수행의 경지가 높을수록 문학성도 높다고만 할 수는 없고, 오히려 수행의 경지와는 별도로 삶의 진실이 깊이 있게 배어 있는 작품이 문학성과의 연관성이 더 긴밀하다고 본다면, 조선조 불가한문학은 고려조의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4. 우리나라의 역대 불가문집

1) 한국 불가문집 일람

번호 문집이름 법명 생몰연대 현전여부

1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의천(義天) 1055~1101 ○

2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혜심(慧諶) 1178~1234 ○

3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혜심(慧諶) 1178~1234 ○

4 만덕산백련사제2대정명국사후집 천인(天因) 1205~1248 ○

(萬德山白蓮社第二代靜明國師後集)

5 만덕산백련사제4대진정국사호산록 천책(天頙) 13세기 초 ○

(萬德山白蓮社第四代眞靜國師湖山錄)

6 해동조계제6세원감국사가송 충지(冲止) 1226~1292 ○

(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歌頌)

7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경한(景閑) 1299~1375 ○

8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보우(普愚) 1301~1382 ○

9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혜근(惠勤) 1320~1376 ○

10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혜근(惠勤) 1320~1376 ○

11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기화(己和) 1376~1433 ○

12 벽송당야로송(碧松堂埜老頌) 지엄(智儼) 1464~1534 ○

13 허응당집(虛應堂集) 보우(普雨) 1515~1565 ○

14 나암잡저(懶庵雜著) 보우(普雨) 1515~1565 ○

15 청허당집(淸虛堂集) 휴정(休靜) 1520~1604 ○

16 정관집(靜觀集) 일선(一禪) 1533~1608 ○

17 영허집(映虛集) 해일(海日) 1541~1609 ○

18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선수(善修) 1543~1615 ○

19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유정(惟政) 1544~1610 ○

20 제월당대사집(霽月堂大師集) 경헌(敬軒) 1544~1633 ○

21 청매집(靑梅集) 인오(印悟) 1548~1623 ○

22 기암집(奇岩集) 법견(法堅) 선조대(宣祖代) ○

23 운곡집(雲谷集) 충휘(冲徽) ? ~1613 ○

24 소요당집(逍遙堂集) 태능(太能) 1562~1649 ○

25 중관대사유고(中觀大師遺稿) 해안(海眼) 1567~ ? ○

26 영월대사문집(詠月大師文集) 청학(淸學) 1570~1654 ○

27 편양당집(鞭羊堂集) 언기(彦機) 1581~1644 ○

28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 수초(守初) 1590~1668 ○

29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명조(明照) 1593~1661 ○

30 백곡집(白谷集) 처능(處能) ? ~1680 ○

31 침굉집(枕肱集) 현변(懸辯) 1616~1684 ○

32 월봉집(月峰集) 책헌(策憲) 1624~ ? ○

33 한계집(寒溪集) 현일(玄一) 1630~1716 ○

34 백암집(栢庵集) 성총(性聰) 1631~1700 ○

35 동계집(東溪集) 경일(敬一) 1636~1695 ○

36 애련집(愛蓮集) 신현(信玄) 17C 말(?) ×

37 월저당대사집(月渚堂大師集) 도안(道安) 1638~1715 ○

38 풍계집(楓溪集) 명찰(明察) 1640~1708 ○

39 백우수필(百愚隨筆) 명안(明眼) 1646~1710 ○

40 설암잡저(雪岩雜著) 추붕(秋鵬) 1651~1706 ○

41 설암난고(雪岩亂藁) 추붕(秋鵬) 1651~1706 ○

42 무용집(無用集) 수연(秀演) 1651~1719 ○

43 환성시집(喚醒詩集) 지안(志安) 1664~1729 ○

44 무경집(無竟集) 자수(子秀) 1664~1737 ○

45 무경실중어록(無竟室中語錄) 자수(子秀) 1664~1737 ○

46 회동집(會同集) ? 18C 초(?) ×

47 영해대사시집초(影海大師詩集抄) 약탄(若坦) 1668~1754 ○

48 두륜당집(頭輪堂集) 청성(淸性) 18C 초 ×

49 허정집(虛靜集) 법종(法宗) 1670~1733 ○

50 남악집(南岳集) 태우(泰宇) ? ~1732 ○

51 송계대선사문집(松桂大禪師文集) 나식(懶湜) 1684~1765 ○

52 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 새봉(璽封) 1687~1767 ○

53 천경집(天鏡集) 해원(海源) 1691~1770 ○

54 월파집(月波集) 태율(兌律) 1695~ ? ○

55 용담집(龍潭集) 조관(慥冠) 1700~1762 ○

56 풍악당집(楓岳堂集) 보인(普印) 1701~1769 ×

57 호은집(好隱集) 유기(有璣) 1707~1785 ○

58 무하선사시고(無瑕禪師詩稿) ? 18C(?) ×

59 설담집(雪潭集) 자우(自優) 1709~1770 ○

60 야운대선사문집(野雲大禪師文集) 시성(時聖) 1710~1776 ○

61 오암집(鰲岩集) 의민(毅旻) 1710~1792 ○

62 용암당유고(龍岩堂遺稿) 체조(體照) 1713~1779 ○

63 대원대사문집(大圓大師文集) ? 1714~ ? ○

64 묵암집(默庵集) 최눌(最訥) 1717~1774 ○

65 추파집(秋波集) 홍유(泓宥) 1718~1774 ○

66 월성집(月城集) 비은(費隱) ? ~1778 ○

67 괄허집(括虛集) 취여(取如) 1720~1789 ○

68 진허집(振虛集) 팔관(捌關) ? ~1782 ○

69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 유일(有一) 1720~1799 ○

70 몽암대사문집(蒙庵大師文集) ? 18C 말(?) ○

71 충허대사유집(冲虛大師遺集) 지책(旨冊) 1721~1785 ○

72 운담임간록(雲潭林間錄) 정일(鼎馹) 1741~1804 ×

73 경암집(鏡岩集) 응윤(應允) 1743~1804 ○

74 인악집(仁岳集) 의첨(義沾) 1746~1796 ○

75 삼봉집(三峰集) 지탁(知濯) 1750~1839 ○

76 징월대사시집(澄月大師詩集) 정훈(正訓) 1751~1823 ○

77 백파집(白坡集) 긍선(亘璇) 1767~1852 ×

78 아암집(兒庵集) 혜장(惠藏) 1772~1811 ○

79 해붕집(海鵬集) 전령(展翎) ? ~1826 ○

80 남명시집(南溟詩集) 전령(展翎) ? ~1826 ×

81 응운공여유망록(應雲空如遺忘錄) 공여(空如) 19C 초 ○

82 가산고(伽山藁) 계오(戒悟) 1773~1849 ○

83 화곡집(花谷集) 계천(誡天) 19C 초 ×

84 초엄유고(草广遺稿) 복초(復初) 헌종·철종 년간 ○

85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 의순(意恂) 1786~1866 ○

86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의순(意恂) 1786~1866 ○

87 철선소초(鐵船小艸) 혜즙(惠楫) 1791~1858 ○

88 역산집(櫟山集) 선영(善影) 1792~1880 ○

89 함홍당집(涵弘堂集) 치능(致能) 1805~1878 ○

90 범해선사시집(梵海禪師詩集) 각안(覺岸) 1820~1896 ○

91 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 각안(覺岸) 1820~1896 ○

92 우담임하록(優曇林下錄) 홍기(洪基) 1822~1881 ○

93 설두시집(雪竇詩集) 유경(有烱) 1824~1889 ×

94 산지록(山志錄) 심여(心如) 1828~1875 ○

95 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 혜견(慧堅) 1830~1908 ○

96 극암집(克庵集) 사성(師誠) 1836~1910 ○

97 농묵집(聾默集) 법린(法璘) 1843~1902 ○

98 경허집(鏡虛集) 성우(惺牛) 1849~1912 ○

99 혼원집(混元集) 세환(世煥) 1853~1889 ○

100 의룡집(義龍集) ? 19C 말 ○

101 초당집(草堂集) ? ? ○

2) 한국 불가문집 간명 해제

위의 목록에 따라 간단한 해제를 붙인다. 이번 선집에 포함된 작가의 경우 작가에 대한 생애를 좀더 자세하게 다룬다.

1.『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은 의천(義天, 1055~1101)의 문집이다. 의천은 고려 11대 왕 문종의 아들로, 11살 때 왕사(王師) 난원(爛圓)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1084년 중국 송(宋)나라로 들어가 계성사(啓聖寺)에서 유성법사(有誠法師)로부터 화엄·천태 양종의 깊은 뜻을 깨우친 뒤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였다. 1086년 귀국하여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송·요·일본 등에서 수집해 온 불경·유서(儒書) 등 4,700여 권을 교정·간행했다.

고려의 불교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면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시호이다.

『대각국사문집』은 23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는 별도로『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이 있으나 크게는『대각국사문집』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 둘은 모두 빠진 부분이 많아 전모를 다 알 수 없다.『대각국사문집』권1부터 권16까지는 문(文)으로, 여러 양식의 글이 있다. 그리고 권17부터 끝까지는 시(詩)이다.『대각국사외집』의 권1부터 권9까지는 문이고, 권10·11은 시이며, 권12와 권13은 대각국사의 비명이다.

2.『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은 혜심(慧諶, 1178~1234)의 어록이다. 설법류(說法類)가 위주이다. 혜심의 시호가 진각국사(眞覺國師)이다. 혜심은 원래 12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유학자였으나 출가를 하여 지눌(知訥)의 제자가 되어 선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공안을 집대성한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여 간화선의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3.『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도 혜심의 문집이다. 무의자(無衣子)는 혜심의 호이다.『무의자시집』은 이름에는 시집이라고 했지만 문도 함께 들어있다.『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이 법어 중심으로 되었다면, 이 책은 시문을 엮은 것이다.

4.『만덕산백련사제2대정명국사후집(萬德山白蓮社第二代靜明國師後集)』은 천인(天因, 1205~1248)의 문집이다. 제목으로 보아 전집(前集)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후집(後集)은「미타찬게(彌陀贊偈)」와「법화수품찬게(法華隨品贊偈)」두 작품만으로 되어 있다.

5.『만덕산백련사제4대진정국사호산록(萬德山白蓮社第四代眞靜國師湖山錄)』은 천책(天頙, 13세기 초)의 문집이다. 상하 2권으로 되었으며, 상권에는 시(詩), 하권에는 문(文)이 있다.

천책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인생 무상을 느끼고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連寺)로 출가하여 스승 원묘국사(圓妙國師)의 가르침을 이어 천태종을 크게 일으켰고, 세속의 당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대거 배출되었다. 시호는 진정국사(眞靜國師)이다.

6.『해동조계제6세원감국사가송(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歌頌)』은 충지(冲止, 1226~1292)의 문집이다. 충지는 처음에는 유학을 공부하여 17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28세까지 관직 생활을 하다가 원오국사(圓悟國師) 천영(天英) 아래로 출가하였다. 선수행을 주로 하고 지위를 갖기를 극도로 꺼렸으나, 1266년 김해 감로사(甘露寺)의 주지가 되었고, 1286년에는 고려 후기

선종의 중심적인 조직이었던 수선사(修禪社) 제6세를 맡게 되었다.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는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불교계를 이끌었으며, 고난에 찬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었다. 시호는 원감국사(圓鑑國師)이다.

7.『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은 경한(景閑, 1299~1375)의 문집이다.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며, 상권에는 법어(法語)가, 하권에는 법어(法語)·시(詩)·문(文) 등이 혼재해 있다.

경한은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 없이 수행하다가 중국 원나라로 들어가 임제종의 석옥(石屋) 화상으로부터 심법(心法)을 전해 받고 귀국하였다.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간화선을 넘어서고자 하였으며, 선과 교를 아우르고자 하였다. 호를 백운(白雲)이라 하였으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책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8.『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은 보우(普愚, 1301~1382)의 문집이다.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며, 법어와 게송, 문 등이 실려 있다.

보우는 13세에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에게 출가하였으며, 46세 때에 중국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臨濟宗)의 제18세 석옥(石屋) 화상의 법을 받아 귀국했다. 왕사(王師)로 있으면서 불교계를 이끌었으며, 고려 말기 선풍을 일으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그 가르침은 현재 한국의 조계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는 태고(太古)이다.

9.『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은 혜근(惠勤, 1320~1376)의 어록이다. 시문(詩文)은 없고 전부 법어류(法語類)만으로 되어 있다.

혜근은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인생의 무상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了然) 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1348년 중국 원나라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시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10년 만에 귀국하여 주로 회암사(檜巖寺)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다. 호는 나옹(懶翁)이며, 고려 말기 선풍을 일으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0.『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은 혜근(惠勤)의 문집이다. 가(歌)와 송(頌)으로 구분되어 있다.

11.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은 기화(己和, 1376~1433)의 문집이다. 문(文) 29편, 가찬류(歌讚類) 11편, 시(詩) 8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文)’이라고 한 것은 기(記)나 서(書) 등의 산문이 아니고 대부분 법어류(法語類)이다.

기화는 호(號)를 득통(得通)이라 하였으며, 당호(堂號)6)를 함허당(涵虛堂)이라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의 유생으로 활동하다가 21세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였다. 회암사(檜巖寺) 무학(無學) 대사에게서 법을 배웠다. 여말선초의 왕조교체기를 살면서 조선의 유교 이념에 바탕한 불교배척론에 대한 이론적 반론을 활발하게 제창하였다.

6) 당호(堂號) : 거처의 건물에 붙이는 이름. 그 건물의 이름으로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12.『벽송당야로송(碧松堂埜老頌)』은 지엄(智儼, 1464~1534)의 문집이다. 서발문(序跋文) 등도 없이 단지 18편의 게송(偈頌)만 실린 극히 짤막한 문집이다.

13.『허응당집(虛應堂集)』은 보우(普雨, 1515~1565)의 문집이다. 상하권모두 시(詩)로만 되어 있다.

보우는 1530년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으로 출가하여 그 인근 사찰 등에서 6년간 수행을 하고 하산을 하니 사찰이 파괴되고 승려가 투옥되는 등 불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여 일단 다시 입산하였다. 그 뒤 1548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불교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300여 개의 사찰을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로 만들었으며,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여 승려로서의 자격을 인정하는 제도를 정립하고, 과거에 승과(僧科)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등 제도적 차원에서 불교의 교세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호는 나암(懶庵)이며, 당호는 허응당(虛應堂)이다.

15.『청허당집(淸虛堂集)』은 휴정(休靜, 1520~1604)의 문집이다. 휴정의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이다. 『청허당집』은 최초에는 1612년 상좌(上佐) 종봉(鍾峰)에 의해 편집·간행되었으며, 후대에 여러 곳에서 여러 번에 걸쳐 재간행되었다. 체재가 비교적 정연한 묘향사본(4권2책)의 경우, 시와 문(文) 그리고 불교이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詩)는

600수 정도 된다.

휴정은 고향이 평안남도 안주(安州)였는데, 8세에 모친을 잃고 10세에는 부친마저 잃은 후 안주 목사(牧使) 이사증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 15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낙방의 아픔을 안고 남쪽으로 지리산까지 내려와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그 뒤 도솔산·금강산 등의 여러 사찰을 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1549년에 승과에 급제하였고, 대선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수행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도움을 요청하므로 전국의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으나, 본인은 나이가 들어 주로 묘향산에 머물러 있었다. 전쟁이 끝난 몇 년 후 묘향산에서 열반에 들었다.

휴정은 선(禪)의 심법(心法)이라고 하는 초월적 세계의 진리에 바탕해 있으면서도 신비주의나 염세주의로 흐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소외되었던 도가사상이나 우리의 민간신앙과 깊은 관련을 가진 풍수지리사상 등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졌으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는 신비적인 예언같은 것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하고, 경륜과 식견에 의한 통찰과 분석을 중시하는 지성적 면모를 보였다. 성리학에 기반한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평등한 세계를 지향하는 선구적 세계관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양세력의 무자비한 침략행위에 대해 민생의 안정과 생명의 보호를 위해 몸소 나서 활약하였다.

휴정은 선과 교를 두루 공부하였고, 그 둘을 회통하려 하였으나 중심은 선에 두었다. 그리하여 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교를 아우르는 조선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였고, 제자가 천 명에 달하여 조선 불교의 큰 바탕이 되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제자는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 정관일선(靜觀一

禪), 현빈인영(玄賓印英), 완당원준(阮堂圓俊), 중관해안(中觀海眼), 청매인오(靑梅印悟), 기암법견(寄巖法堅), 제월경헌(霽月敬軒), 기허영규(騎虛靈圭), 뇌묵처영(雷默處英) 등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유정, 언기, 태능, 일선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 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16.『정관집(靜觀集)』은 일선(一禪, 1533~1608)의 문집이다. 일선의 호가정관(靜觀)이며, 휴정의 심법(心法)을 이어받았다. 문집의 체재는 시편(詩篇)과 잡저편(雜著篇)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1책이다.

일선은 처음에는 법화사상에 심취하여『법화경』을 수없이 독송하고 책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의 일에 힘썼으나, 나중에 휴정을 만나면서 선사상을 터득하여 휴정의 4대 문파의 하나를 이루었다. 임진왜란에 승려가 출전하는 모습을 보며 승려로서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깊이 고민하였다.

17.『영허집(映虛集)』은 해일(海日, 1541~1609)의 문집이다. 해일의 호는 영허(映虛), 당호(堂號)는 보응당(普應堂)으로, 휴정의 법을 이었다.『영허집』은 1635년에 간행되었으나, 간행처는 알 수 없다.

18.『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은 선수(善修, 1543~1615)의 문집이다. 선수의 호는 부휴(浮休)이며, 휴정과 마찬가지로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었다.『부휴당대사집』은 5권1책으로, 권1부터 권4까지는 모두 시이고 권5는 문이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20세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되었고, 그뒤 부용(芙蓉)의 밑에서 수도하여 마음의 요체를 얻었다. 그 뒤 덕유산, 가야산, 속리산, 금강산 등의 이름있는 사찰에서 더욱 수행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동안 읽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출전하지 안고 덕유산의 작은 암자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적을 만났으나 왜적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뒤 가야산·덕유산·조계산 등으로 다니다가 지리산 칠불암에서 열반에 들었다. 문하에는 700여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벽암(碧巖), 뇌정(雷靜), 대가(待價), 송계(松溪), 환적(幻寂), 포허(抱虛), 고한(孤閑) 등이 조선 중기의 불교계 11파 중 7파를 형성하였다. 선수는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루면서 전통적인 격외선(格外禪)을 계승하였다.

19.『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은 유정(惟政, 1544~1610)의 문집이다.『사명당대사집』은 7권1책으로, 1612년 초간본(初刊本)이 나왔으나 인멸되고, 연대가 불확실한 중간본(重刊本)이 현전한다. 본문의 체재는 매우 정연하게 짜여 있다. 권1은 사(辭)와 고시(古詩), 권2는 5언율시, 권3은 7언율시, 권4는 5언절구와 7언절구, 권5는 선게(禪偈), 권6은 잡문(雜文), 권7은 일본에 사신 갔을 때 쓴 잡체시(雜體詩)이다.

유정은 호가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었으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다. 7세를 전후하여『사략(史略)』을 배우고 13세때『맹자(孟子)』를 배웠다. 1558년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당시의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노자(老子)』,『장자(莊子)』,『열자(列子)』와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禪) 공부를 하였다. 이듬해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았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

을 닦아,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90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요청과 휴정의 권유에 의하여 왜병의 퇴치에 나서게 되어 수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왜병과의 강화 회담에 대표로 나서서 외교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

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3천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오는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 뒤로는 병을 얻어 가야산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결가부좌를 한 채로 입적하였다.

유정은 승려로서 출전하는 데 대한 회한이 많았으며, 늘 수행자의 위치로 돌아가고픈 소망을 시를 통해 토로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의 상소를 통해 국가의 경제정책, 국방정책 등 국력을 기르고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여러 정책에 대한 제안을 하는 등 사회적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승려라는 신분으로 인하여 이러한 제안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말았다.

20.『제월당대사집(霽月堂大師集)』은 경헌(敬軒, 1544~1633)의 문집이다. 경헌의 호는 제월(霽月), 자호(自號)는 허한거사(虛閑居士)로, 원철(圓哲),현운(玄雲)에게서 경전을 배우고 휴정에게서 심법(心法)을 얻었다.『제월당대사집』은 2권1책으로, 고려후기 선어록(禪語錄)의 형태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고 있다.

21.『청매집(靑梅集)』은 인오(印悟, 1548~1623)의 문집이다 인오는 호가 청매(靑梅)이며, 휴정의 법을 이어받았다.『청매집』은 2권1책으로, 권상(卷上)에는 옛날 조사(祖師)들의 고사(故事)에 대한 송(頌)이 실렸고, 권하(卷下)에는 시와 문이 있다.

22.『기암집(奇岩集)』은 법견(法堅)(선조대, 정확한 생몰연도는 미상)의 문집이다. 법견의 호는 기암(奇岩)이며, 휴정의 제자이다.『기암집』은 3권1책으로, 권1은 시, 권2와 권3은 문이다.

23.『운곡집(雲谷集)』은 충휘(冲徽, ?~1613)의 문집이다. 충휘의 호는 운곡(雲谷)이며, 정관일선(靜觀一禪)의 법을 이었다. 본문 모두가 시이다.

24.『소요당집(逍遙堂集)』은 태능(太能, 1562~1649)의 문집이다. 태능의 호는 소요(逍遙)이며, 부휴선수(浮休善修)로부터 경(經)을 배우고 휴정에게서 선(禪)을 배웠다. 『소요당집』은 1권1책으로, 본문은 모두 시이고, 끝에 단 1편의 기(記)가 있다.

뛰어난 제자로는 현변(懸辯), 계우(繼愚), 경열(敬悅), 학눌(學訥), 처우(處愚), 천해(天海), 극린(克璘), 광해(廣海)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소요파(逍遙派)로 불리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25.『중관대사유고(中觀大師遺稿)』는 해안(海眼, 1567~?)의 문집이다. 해안의 호는 중관(中觀)이며, 휴정의 법을 이어 일파(一派)를 이루었고,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에게서도 배운 적이 있다.『중관대사유고』는 전반부에는 다양한 형식의 시를 두루 갖추었고, 후반부에는 문이 실렸다.

26.『영월대사문집(詠月大師文集)』은 청학(淸學, 1570~1654)의 문집이다. 청학의 호는 영월(詠月)이며, 휴정의 법을 이었다.『영월대사문집』은 1권1책으로, 권의 구분이 없고 구성도 정연하지 않다. 첫 부분에는 시가, 중간에는 문이, 끝에 가서는 다시 부(賦), 시(詩) 등이 실렸다.

27.『편양당집(鞭羊堂集)』은 언기(彦機, 1581~1644)의 문집이다. 언기의 호는 편양(鞭羊)이며, 휴정의 법을 마지막으로 전수받았으면서도 이후 최대의 문벌을 형성하였다.『편양당집』은 3권1책으로, 1647년 간본(刊本)이전한다. 권1에는 5언절구, 5언율시, 7언절구, 7언율시 등의 시가, 권2와 권3에는 문이 실렸다.

언기는 11세에 출가하여 휴정(休靜)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계(戒)를 받고 금강산에 머물면서 교학(敎學)을 익히는 한편, 참선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묘향산 서산대사의 밑에서 선 공부를 하여 서산대사의 법(法)을 이어 받았다. 그 뒤 어느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남쪽으로 편력하면서 고승들을 찾아 깨달음을 점검받았다. 금강산 천덕사(天德寺), 구룡산 대승 사(大乘寺), 묘향산 천수암(天授庵) 등에 머무를 때에는 선과 교를 함께 가르쳐 그 명성을 떨쳤다.

언기는 호를 ‘양을 기르다’는 뜻으로 한 것처럼 중생의 교화를 위해 산속에 머무르지 않고 시정으로 자주 나왔다. 물장수나 숯장수를 하면서 수행을 하고 한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숱한 일화를 남겼다.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는데, 의심(義諶), 석민(釋敏), 홍변(弘辮), 계진(契眞), 의천(義天), 혜상(惠常), 천신(天信) 등의 제자가 두드러졌다.

28.『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은 수초(守初, 1590~1668)의 문집이다. 수초의 호는 취미(翠微)이며, 부휴의 제자 벽암각성(碧岩覺性)에게서 법을 받았다. 서울에서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를 하고자 하였으나 형이 허락하지 않자 몰래 설악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1606년 지리산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인 부휴(浮休)로부터 계(戒)를 받았는데, 부휴는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을 알고 제자 각성(覺性)에게 특별히 지도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여러 고승들을 찾아가서 지도를 받고 서울로 올라가 이름있는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유학에 관한 지식을 넓혔다.

1629년 각성의 법(法)을 이어받고 옥천(玉川) 영축사(靈鷲寺)에 주석하면서 많은 제자를 지도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성총(性聰), 해활(海闊), 민기(敏機) 등이 있다.

29.『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은 명조(明照, 1593~1661)의 문집이다. 명조의 호는 허백(虛白)이며, 유정(惟政), 현빈(玄賓), 완허(玩虛) 등에게서 배우고, 유정의 제자인 송월응상(松月應祥)의 법맥을 이었다.

30.『백곡집(白谷集)』은 처능(處能, ?~1680)의 문집이다.『백곡집』은 1683년 간본(刊本) 등 여러 이본(異本)이 있고, 제목도『대각등계백곡집(大覺登階白谷集)』,『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 등 일정치 않다.

처능은 호가 백곡(白谷)이며, 12세에 의현(義賢)에게 글을 배우다가 불경을 읽고 그 깊은 이치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고, 15세에 승려가 된 뒤 다시 신익성(申翊聖)으로부터 유가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서, 시문집등을 공부하였다. 그 뒤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의 각성(覺性)을 찾아가 23년 동안 불경과 참선을 익혀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속리산, 청룡산(靑龍山), 성주산(聖住山), 계룡산(鷄龍山) 등지에서 법회(法會)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은 대둔사(大芚寺)의 안심암(安心庵)이었다. 현종의 척불정책(斥佛政策)에 대하여 전국 승려를 대표하여「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불교의 가치를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31.『침굉집(枕肱集)』은 현변(懸辯, 1616~1684)의 문집이다. 현변의 호는 침굉(枕肱)이며, 소요태능(逍遙太能)의 법을 이었다.『침굉집』은 2권1책으로, 끝부분에는「귀산곡(歸山曲)」,「태평곡(太平曲)」,「청학동가(靑鶴洞歌)」등의 한글 가사(歌辭)가 있어서, 흔히 한문학으로만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문집에 비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32.『월봉집(月峰集)』은 책헌(策憲, 1624~?)의 문집이다. 책헌의 호가 월봉(月峰) 혹은 소연자(昭然子)이며, 취암(翠岩), 각성(覺性), 의심(義諶) 등에게서 배웠다.『월봉집』은 3권1책으로, 권1은 문, 권2는 시이다.

33.『한계집(寒溪集)』은 현일(玄一, 1630~1716)의 문집이다. 벽암(碧岩)의 법을 이었으며, 서문에서는 벽암의 문하에 삼교(三敎)에 능통한 이는 백곡(白谷)과 한계(寒溪)뿐이라고 하였다.『한계집』은 1권1책으로 문은 전혀 없다.

34.『백암집(栢庵集)』은 성총(性聰, 1631~1700)의 문집이다. 성총의 호는 백암(栢庵)이며, 취미수초(翠微守初)의 법을 이었다.『백암집』은 2권1책으로, 권상에는 시가, 권하에는 문이 있는데, 시는 종류의 구분이 없이 편집되었다.

35.『동계집(東溪集)』은 경일(敬一, 1636~1695)의 문집이다. 경일의 호는 동계(東溪)이다. 벽암(碧岩)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사대부들과의 교유가 많았다.

36.『애련집(愛蓮集)』은 신현(信玄, 생몰년대 미상)의 문집으로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애련집서(愛蓮集序)」가『백암집(栢庵集)』에 실려 있어서 저자가 성총(性聰)과 비슷한 시대의 인물이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서문에 의하면 이 문집에는 5·7언 58수가 수록되었다고 한다.

37.『월저당대사집(月渚堂大師集)』은 도안(道安, 1638~1715)의 문집이다. 도안의 호는 월저(月渚)이며, 화엄학(華嚴學)에 밝았고, 편양언기(鞭羊彦機)의 법을 이었다.

38.『풍계집(楓溪集)』은 명찰(明察, 1640~1708)의 문집이다. 명찰의 호는 풍계(楓溪)이며, 풍담의심(楓潭義諶)의 법을 이었다.

39.『백우수필(百愚隨筆)』은 명안(明眼, 1646~1710)의 문집이다. 명안은 자(字)가 백우(百愚), 호는 석실(石室) 또는 설암(雪喦)이며, 청매인오(靑梅印悟)의 법손(法孫)인 무영단헌(無影亶憲)의 법을 이었다.『백우수필』에는 ‘수필(隨筆)’이란 독특한 명칭이 쓰였는데, 이것은 지금 쓰이는 ‘수필’이란 용어와는 성격이 다르다. 여기에는「발원사(發願詞)」,「염불가(念佛歌)」,「사교행위도(四敎行位圖)」와 시(詩) 6편, 기(記) 4편, 제문(祭文) 4편의 아주 적은 양의 글이 실렸다.

40·41.『설암잡저(雪岩雜著)』와『설암난고(雪岩亂藁)』는 추붕(秋鵬,1651~1706)의 문집이다. 추붕은 호가 설암(雪岩)이며, 월저도안(月渚道安)의 법을 받았다.『설암잡저』는 3권3책으로, 체재의 특징은 시와 문의 구분이 없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설암난고』는 2권1책으로, 권1·2가 다 시이다.

42.『무용집(無用集)』은 수연(秀演, 1651~1719)의 문집이다. 수연의 호는 무용(無用)이며, 백암성총(栢庵性聰)의 제자이다.

43.『환성시집(喚醒詩集)』은 지안(志安, 1664~1729)의 문집이다. 지안은 호가 환성(喚醒)이며, 월담설재(月潭雪霽)의 법을 받았다.『환성시집』은 1권1책으로, 내용은 제목 그대로 모두가 시이다.

44·45.『무경집(無竟集)』과『무경실중어록(無竟室中語錄)』은 자수(子秀,1664~1737)의 문집이다. 자수는 호가 무경(無竟)이며, 추계유문(秋溪有文)한테 법을 얻었다.

46.『회동집(會同集)』은 1권1책으로, 회동(會同)스님이 썼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저자가 다만 자수(子秀)와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라는 정도 밖에 알 수가 없다.『무경집(無竟集)』에「회동집서(會同集序)」가 있다.

47.『영해대사시집초(影海大師詩集抄)』는 약탄(若坦, 1668~1754)의 문집이다. 약탄의 호는 영해(影海)이며, 무용수연(無用秀演)에게서 배웠다.『영해대사시집초』는 1권1책인데, 발문(跋文)에 의하면, 원래 약탄의 문집이 3권이었으나 시집 1권만 전하는 것을 다시 뽑아서 간행한다고 했다.

48.『두륜당집(頭輪堂集)』은 청성(淸性, 18세기 초)의 문집이다. 청성은 무용수연(無用秀演)의 제자로, 영해약탄(影海若坦)과 동문(同門)이다.『동사열전(東師列傳)』에『두륜당집』 1권이 있다고 하였고,『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에는「두륜당시집서(頭輪堂詩集序)」가 실려 있으나 문집 자체는 전하지 않는다.

49.『허정집(虛靜集)』은 법종(法宗, 1670~1733)의 문집이다. 법종의 호는 허정(虛靜)이며, 설암추붕(雪岩秋鵬)의 법을 이었다.

50.『남악집(南岳集)』은 태우(泰宇, ?~1732)의 문집이다. 태우의 호는 남악(南岳)이며, 설암추부(雪岩秋鵬)의 법을 이었다.『남악집』은 1권1책으로, 내용은 대부분 시이며 약간의 문이 있다.

51.『송계대선사문집(松桂大禪師文集)』은 나식(懶湜, 1684~1765)의 문집이다. 나식의 호는 송계(松桂) 또는 회암(檜岩)이며, 환성(喚醒)의 적손(嫡孫)인 대암(大庵) 화상(和尙)의 법을 받았다.

52.『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은 새봉(璽封, 1687~1767)의 문집이다. 새봉의 호는 상월(霜月)이며, 설암추붕(雪岩秋鵬)의 법을 이었다.『상월대사시집』은 1권1책으로, 1780년경 간행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문집 명칭처럼 모두가 시이다.

53.『천경집(天鏡集)』은 해원(海源, 1691~1770)의 문집이다. 해원의 자(字)는 천경(天鏡), 호는 함월(涵月)이며, 환성지안(喚醒志安)의 법을 이었다.

54.『월파집(月波集)』은 태율(兌律, 1695~?)의 문집이다. 태율의 호는 월파(月波)이다. 자신이 쓴 「월파평생행적(月波平生行蹟)」에서는 환몽굉활(幻夢宏濶)·호암금하(虎岩錦霞) 등 여러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했다.『월파집』은 1권1책으로, 내용은 거의 다가 시이다.

55.『용담집(龍潭集)』은 조관(慥冠, 1700~1762)의 문집이다. 조관은 호가 용담(龍潭)이다. 상월새봉(霜月璽封)의 제자이다.

56.『풍악당집(楓岳堂集)』은 보인(普印, 1701~1769)의 문집이다. 보인의 호가 풍악(楓岳)이며, 호암체정(虎岩體靜)의 법을 이었다.『풍악당집』은『고선책보(古鮮冊譜)』에 서명이 들어 있으나, 현전 여부는 불명이다.

57.『호은집(好隱集)』은 유기(有璣, 1707~1785)의 문집이다. 유기는 호가 호은(好隱) 또는 해봉(海峰)이며 낙암(洛岩)의 법을 이었다.

58.『무하선사시고(無瑕禪師詩稿)』는 무하(無瑕)의 문집이다. 무하는 부용영관(芙蓉靈觀)의 5세 법손(法孫)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이 문집은 전하지 않고, 다만 그 서문만이『호은집(好隱集)』에 실려 있다.

59.『설담집(雪潭集)』은 자우(自優, 1709~1770)의 문집이다. 자우는 호가 설담(雪潭)이며, 모은지훈(暮隱智薰)의 법을 이었다.

60.『야운대선사문집(野雲大禪師文集)』은 시성(時聖, 1710~1776)의 문집이다. 시성은 호가 야운(野雲)이며, 영월응진(影月應眞)의 법을 이었다.

61.『오암집(鰲岩集)』은 의민(毅旻, 1710~1792)의 문집이다. 의민의 호가 오암(鰲岩)이며, 계영(桂影)의 법을 이었다.

62.『용암당유고(龍岩堂遺稿)』는 체조(體照, 1713~1779)의 문집이다. 체조는 호가 용암(龍岩)이며, 일암(日菴)의 법을 이었다.『용암당유고』는 1권1책으로, 내용은 대부분이 시이다.

63.『대원대사문집(大圓大師文集)』은 대원(大圓, 1714~?)의 문집이다. 대원은 호이며, 법명은 미상이다. 일암(日菴)의 제자로 추정된다.『대원대사문집』은 1권1책으로, 105수의 시와 10편의 문이 있다.

64.『묵암집(默庵集)』은 최눌(最訥, 1717~1774)의 문집이다. 최눌의 호가 묵암(默庵)이며, 풍암세찰(楓岩世察)의 법을 이었다.

65.『추파집(秋波集)』은 홍유(泓宥, 1718~1774)의 문집이다. 홍유는 한암 성안(寒岩性眼)의 법을 이었다.

66.『월성집(月城集)』은 비은(費隱, ?~1778)의 문집이다. 비은의 호는 월성(月城)이며, 누구의 법을 이었는지는 미상이다.

67.『괄허집(括虛集)』은 취여(取如, 1720~1789)의 문집이다. 취여는 호가 괄허(括虛)이며, 환응담숙(喚應曇淑)의 법을 이었다.

68.『진허집(振虛集)』은 팔관(捌關, ?~1782)의 문집이다. 팔관의 호는 진허(振虛)이며,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다.

69.『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은 유일(有一, 1720~1799)의 문집이다. 유일은 호가 연담(蓮潭)이며, 호암체정(虎岩體淨) 등 여러 스승에게서 배웠다.

70.『몽암대사문집(蒙庵大師文集)』은 호를 몽암(蒙庵)이라 하고 법명은 알 수 없는 스님의 문집이다. 문집의 내용으로 보아 유기(有璣)나 유일(有一)과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71.『충허대사유집(冲虛大師遺集)』은 지책(旨冊, 1721~1785)의 문집이다. 지책은 호가 충허(冲虛)이며, 쌍운금화(雙運錦華)의 법을 이었다.

72.『운담임간록(雲潭林間錄)』은 정일(鼎馹, 1741~1804)의 문집이다. 정일은 호가 운담(雲潭)이며, 설담자우(雪潭自優)의 법을 이었다.『운담임간록』은 현전 여부가 불확실하다.

73.『경암집(鏡岩集)』은 응윤(應允, 1743~1804)의 문집이다. 응윤은 처음엔 법명을 관식(慣拭)이라 했고, 호는 경암(鏡岩)이며, 추파홍유(秋波泓宥)와 환암(喚菴) 화상(和尙)에게서 배웠다.

74.『인악집(仁岳集)』은 의첨(義沾, 1746~1796)의 문집이다. 의첨은 호가 인악(仁岳)으로, 서악(西岳)·벽봉(碧峰) 등 여러 스승에게서 배웠고, 설파상언(雪坡尙彦)의 법맥을 이었다.

75.『삼봉집(三峰集)』은 지탁(知濯, 1750~1839)의 문집이다. 지탁은 호가 화악(華嶽) 또는 삼봉(三峰)이며, 한암(漢岩)의 법을 이었다. 내용은 처음에는 여러 명승지와 사찰을 유력하며 보고 느낀 점을 산문과 시로 엮은 글이 있고, 다음에는 시, 후반부에는 문이 있다.

76.『징월대사시집(澄月大師詩集)』은 정훈(正訓, 1751~1823)의 문집이다. 정훈은 호가 징월(澄月)이며, 설파농암(雪坡聾岩)의 법을 이었다.

77.『백파집(白坡集)』은 긍선(亙璇, 1767~1852)의 문집이다. 긍선은 호가 백파(白坡)이며, 설봉선사(雪峰禪師)의 법맥을 이었다. 문집 4권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78.『아암집(兒庵集)』은 혜장(惠藏, 1772~1811)의 문집이다. 혜장은 자호(自號)가 아암(兒庵)이며, 정암즉원(晶嵒卽圓)의 법을 이었다.

79.『해붕집(海鵬集)』은 전령(展翎, ?~1826)의 문집이다. 전령은 호는 해붕(海鵬)이며, 묵암최눌(默庵最訥)의 법을 이었다.

80.『남명시집(南溟詩集)』은 전령(展翎)의 문집이다. 문집 자체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남명시집서(南溟詩集序)」만이 나식(懶湜)의『송계대선사문집(松溪大禪師文集)』에 실려 있다.

81.『응운공여유망록(應雲空如遺忘錄)』은 공여(空如)의 문집이다. 공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1842년에 쓴 글이 있고, 김조순(金祖淳,1765~1831)과 교유하였던 점으로 보아 19세기 전기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응운공여유망록』은 1권1책의 필사본으로 문 89편이 실려 있다.

82.『가산고(伽山藁)』는 계오(戒悟, 1773~1849)의 문집이다. 계오는 호가 월하(月荷)이며, 지봉(智峰) 화상(和尙)의 법을 이었다.『가산고』는『월하집(月荷集)』이라고도 하며, 4권1책이다.

83.『화곡집(花谷集)』은 계천(誡天)의 문집이다. 계천은 계오(戒悟)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으며, 호를 화곡(花谷)이라 한 듯하다. 문집은 전하지 않고,『가산고(伽山藁)』에「화곡집서(花谷集序)」가 있다.

84.『초엄유고(草广遺稿)』는 복초(復初, 헌종·철종조)의 문집이다. 복초의 호가 초엄(草广)이며, 생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문집의 서문에 ‘헌종과 철종조의 인물’임을 밝혀놓았을 뿐이다.

85·86. 의순(意恂, 1786~1866)의 문집으로 필사본(筆寫本)인『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그리고 목판본(木板本)인『초의시고(艸衣詩稿)』가 있다. 그런데『초의시고』는『일지암시고』의 전부와『일지암문집』의 일부를 싣고 있다.『일지암시고』에는 창작 연대별로 시가 들어 있다.

의순은 1786년 4월 5일 전라북도 무안(務安)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 있는 벽봉화상(碧峰和尙) 민성(敏性)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출가하기까지 어떤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19세 때 떠오르는 달을 보다가 홀연히 마음 속이 뚫렸다. 그 이후 두루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삼장(三藏)에 달통하였다. 완호윤우(玩虎倫佑)의 법맥을 잇고, 금담(金潭)에게서 선을 전수받았다.

불가에서 불법을 충실히 익힌 의순은 20대 중반에 들면서 유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학의 학습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의순은 위대한 시인이자 학자였던 다산과 만나면서 인생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의순은 다산을 만나면서 유학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시도 배웠다. 훗날 의순이 유불을 함께 통달한 대가로서, 그리고 시의 달인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 데에는 다산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다산에게서 유학과 시를 익힌 의순은 유불을 겸한 지식인으로서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30세 때 이루어진 여러 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순은 30세에 멀리 금강산에 유람하고 서울로 들어가 권돈인(權敦仁), 홍현주(洪顯周),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윤치영(尹致英) 등을 만났다.

40세 이후로는 매우 조용하고 안정적인 과정으로 들어갔다. 대둔사(大芚寺, 지금의 대흥사) 근처에 일지암(一枝庵)을 지어 홀로 지관(止觀)에 힘쓰며 나머지 40년간을 이곳에서만 보냈다. 그 동안『다신전(茶神傳)』이나『동다송(東茶頌)』과 같은 차 관련 저술을 하기도 하고,『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같은 선이론서(禪理論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의순은 19세기 초반의 조선 사회에 유교와 불교의 이념적 소통을 주도하였으며, 선과 예술의 소통에도 함께 주력하였다. 이러한 문화소통행위는 이념의 경직성을 탈피하고 이념과 이념 사이의 대립과 분리를 극복하여 종합성과 다양성을 함께 확보하여 문화적 힘과 활력을 얻고자 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문화소통운동에 앞장선 일군의 지성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 김정희, 신위 등이었으며, 이들과 두루 깊이 교유하여 그 소통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의순이었다. 의순은 유교와 불교를 소통시키고 선과 예술을 소통시킴으로써 문화적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심오한 철학과 수행의 세계를 널리 펴고 유교와 불교, 기타 다양한 이념과 가치를 회통시키고 종합시켜 경직된 문화적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87.『철선소초(鐵船小艸)』는 혜즙(惠楫, 1791~1858)의 문집이다. 혜즙은 호가 철선(鐵船)이며, 수룡(袖龍)의 법을 받았다.『철선소초』는 1권1책으로,1875년에 서문이 쓰여진 필사본이 전한다.

88.『역산집(櫟山集)』은 선영(善影, 1792~1880)의 문집이다. 선영은 호가 영허(映虛) 또는 역산(櫟山)이며, 인봉덕준(仁峰德俊)의 심법(心法)을 이었다.

89.『함홍당집(涵弘堂集)』은 치능(致能, 1805~1878)의 문집이다. 치능은 당호(堂號)가 함홍당(涵弘堂)이며, 송암의탄(松庵義坦)의 법을 이었다.

90·91.『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는 각안(覺岸, 1820~1896)의 문집이다. 각안은 호가 범해(梵海)이며, 호의여오(縞衣如悟)의 법을 이었다.『범해선사유고』는『문집(文集)』과『시집(詩集)』 각 1책으로 분리되어 있다.

92.『우담임하록(優曇林下錄)』은 홍기(洪基, 1822~1881)의 문집이다. 홍기는 호가 우담(優曇)이며, 연월(蓮月) 선사(禪師)의 법을 이었다. 내용은 모두 문이다.

93.『설두시집(雪竇詩集)』은 유경(有烱, 1824~1889)의 문집이다. 유경은 호가 설두(雪竇)이며, 백암도원(白岩道圓)의 법을 이었다.『설두시집』은『동사열전(東師列傳)』의「설두강백전(雪竇講伯傳)」에 언급되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94.『산지록(山志錄)』은 심여(心如, 1828~1875)의 문집이다. 1권1책이며, 시 6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95.『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은 혜견(慧堅, 1830~1908)의 문집이다. 혜견은 호가 용악(龍岳)이다.『용악당사고집』은 1권1책으로, 시 224편과 문15편이 실려 있다.

96.『극암집(克庵集)』은 사성(師誠, 1836~1910)의 문집이다. 사성은 호가 극암(克庵)이며, 하은(霞隱)의 법을 이었다.『극암집』은 3권1책으로, 간기는 없으나 1911년 이후에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편집은 저자의 생존시에 이루어졌다.

97.『농묵집(聾默集)』은 법린(法璘, 1843~1902)의 문집이다. 법린은 호가 화담(華曇)이며, 당호(堂號)가 농묵(聾默)이다.『농묵집』은 1권1책으로, 시55편과 문 4편이 있다.

98.『경허집(鏡虛集)』은 성우(惺牛, 1849~1912)의 문집이다. 성우의 호는 경허(鏡虛)이며, 용암(龍岩)의 법을 이었다.

성우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 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1862년 여름부터 마을의 선비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과 기초적인 불교경론(佛敎經論)을 익혔다.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 강백(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여러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1년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다. 그러다가 돌림병이 유행하고 있던 마을을 지나면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에 용맹정진을 하여 석 달 만에 깨우침을 얻었다. 이후 술도 마시고 여자도 가까이 하는 등 기행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과 같은 탁월한 제자를 길러 근대 한국 불교가 크게 일어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말년에는 환속을 하여 서당의 훈장이 되어 글을 가르치다가 입적하는 등 특이한 면모를 보였다.

99.『혼원집(混元集)』은 세환(世煥, 1853~1889)의 문집이다. 세환은 호가 혼원(混元)이며, 극암사성(克庵師誠)의 법을 이었다.『혼원집』은 2권1책으로, 시는 없고 17편의 문만 있다.

100.『의룡집(義龍集)』은 저자를 알 수 없다. 1895년에 쓴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의 인물로 추정되며, 범어사와 관련된 글이 많다.

101.『초당집(草堂集)』의 저자에 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이 문집에는 저자에 관한 사항이 전혀 나와 있지 않으며, 시는 없고 문만 16편 있다. ■

 

 

 

 

[출처] 詩選集 시선집|작성자 실론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