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견부주(二見不住) 신막추심(愼莫追尋) :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찾으려고 하거나 쫓지를 말라.
신심명은 주로 분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견부주 역시 두 가지로 보는 분별의 견해에 머무르지 말고, 신막추심 즉, 두 가지의 견해인 분별을 쫓아가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헛갈리는 것은 크고 작은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지 말라는 것일까? 또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두 가지 중에 상대적으로 더 예쁘고 좋으며, 더 예쁘지 않거나 좋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것 또는 더 예쁘고 좋은 것을 취하려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 작거나 더 예쁘지 않거나, 더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싫어하거나 취하지 않으려 하거나, 버리려 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견부주
신막추심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추심하지 말라.
간택, 증액, 순역, 위순, 취사, 유공, 지동, 근경, 적조, 진망 등 이 모두 두가지 견해입니다.
다시 말해, 있다·없다, 옿다·그르다, 너다·나다 하는 분별심이 이견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찾아 지니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는 연유.”
좋은 것을 취하려 함에/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은 시간문제,/ 이는 고락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니,/ 무조건 고락의 분별심을 방하착하라.
이견부주,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신막추심,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신심명의 구절을 자세히 분석하다 보면, 주로 분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견부주 역시 두 가지로 보는 분별의 견해에 머무르지 말고, 신막추심 즉, 두 가지의 견해인 분별을 쫓아가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것은 크고 작은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지 말라는 것일까? 또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구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두 가지 물건을 놓고 비교한다면 분명 상대적으로 더 크고 작은 것이 있을 것이다. 이를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두 가지 중에 상대적으로 더 예쁘고 좋으며, 더 예쁘지 않거나 좋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것 또는 더 예쁘고 좋은 것을 취하려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 작거나 더 예쁘지 않거나, 더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싫어하거나 취하지 않으려 하거나, 버리려 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취함으로써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되기 위한 것이므로, 이는 인과의 과보에 걸려서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마음이 똑같이 생기기 때문이니, 이러한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분별심이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것을 집착하면 그 과보로 인하여 나쁜 것이 생겨나고, 나쁜 것을 버리려 하는 마음에 집착하면, 나쁜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서 기분이 나빠지고 괴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더 좋은 일, 더 좋은 물건,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것들을 차지하려 애를 쓴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더 좋은 것을 차지하는 만큼 더 나쁜 과보가 생겨서 언젠가는 차지한 만큼의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으니, 다만 시간문제인 것인데, 즉, 시절인연에 따라 인과의 과보가 금새 올 수도 있고, 다음 시간 또는 내생에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고락 인과의 업 중에 낙의 과보가 생길 때가 되었다는 것이고, 나쁜 일이 생기면, 고락의 인과 중에 고의 과보가 생길 때가 되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만약 나쁜 꼴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다면, 내가 좋은 꼴을 보려고 하는 집착심 때문에 생긴 과보이고, 좋은 꼴을 본다는 것은, 나쁜 꼴을 보지 않으려는 집착심 때문에 생긴 과보로 보면 되는 것이나, 좋은 꼴을 본 과보로 인해 나쁜 꼴을 또 보게 되는 인과의 업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둘의 견해를 굳이 쫓아가지 말라는 것이 이번 구절의 뜻이 되겠다.
게송 14 “견유몰유 종공배공”에서 공을 추구하다 보면 공에 배신당하고, 유를 추구하다 보면 유에 빠진다고 하여 한 쪽에 치우치면 반드시 그 치우친 대가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크고 작은, 좋고 나쁜, 옳고 그른, 두 가지 견해를 가질 수는 있으나, 어느 쪽이든 취하려 하거나 버리려 하는 집착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더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분별심을 놓으라는 말이다.
하여, 어떤 일이건 본래 잘되고 잘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저 인연에 의해 흘러갈 뿐이다. 다만, 두 가지 싫고 좋은 견해에 집착하여 좋은 쪽 만을 취하려 하니, 좋지 않은 다른 한쪽의 인과가 생겨서 안 좋은 과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항상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일이든, 어떤 현상이든, 어떤 인연이든, 어떤 사건 사태이든, 고락의 감정을 놓고 또 놓고, 인연의 흐름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서, 말 한마디, 생각하는 순간, 행동 행동마다, 일어나는 고락의 감정을 방하착하고 방하착해야 한다. 이것도 안 되면 기도하라, 그리고 참선하라, 그것도 안 되면, 보시하고 정진하라.
이견부주二見不住
- 잠깐과 영원은 같은 말…시비 일으키면 본마음 잃어
“이견부주二見不住어던 신막추심愼莫追尋하라. 재유시비纔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하리라. 양쪽 견해에 머물지도 말고 찾으려고도 하지 말지니, 조그만 시비라도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심을 잃으리라.”
“이견부주二見不住어던 신막추심愼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見解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라는 말은 두 견해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란 마치 장벽이 없는 허공과 같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하셨거든요. 확연하여 성스러움이니 성스럽지 못함이니 하는 경계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의 낙처落處는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벌써 한 생각 일으켜서 감정을 따라다니느라 확연한 그 마음을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참마음 따로 있고 번뇌 망상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마음, 그 마음의 고요를 바로보지 못하고 뭔가 구하는 마음,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번뇌 망상인 까닭에 그 구하는 마음만 몰록 쉬어 버리고 욕망을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 본마음의 고요란 따로 상相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 즉 모양도 빛깔도 없는 그야말로 우리 목전目前에 보고 듣는 그 자리거든요. 보고 듣는 자리라고 하면 보는 자리 듣는 세계가 따로 있는 걸로 압니다. 전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를 부득이 글로 표현하려면 이런 허물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옛 스승들은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망妄에도 머물지 않고 진眞에도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 곳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런 때에 크게 용用을 일으키면 이 모두가 진眞 아님이 없으니 이를 내놓고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한다면 이렇게 보는 자는 모두가 알음알이에 속는 일이다.”
이 은혜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본다거나 듣는다거나 보지 않는다거나 듣지 않는다거나 다 같은 자리입니다. 말하는 이와 말 듣는 이가 둘이 아닌 자리이거든요. 어쨌든 간에 그 자리는 두 견해가 있을 까닭이 없으니 머물래야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저에게는 무지개 잡으려고 쫓아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되는데, 뒷산에 오색무지개가 너무 곱게 떴기에 만져보려고 쫓아갔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걸로 보고 부지런히 쫓아갔는데 아무리 뛰어가도 그만큼 떨어져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무지개를 잡을 수가 있는 겁니까?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삼조 스님께서 <신심명>에서 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이 참으로 귀한 가르침입니다.
“재유시비纔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이니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으리라는 의미입니다. 잠깐과 영원은 같은 말입니다. 잠깐이든 아니든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한 세계가 창조된 겁니다. 한 생각 밉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온몸 전체, 팔만사천 세포가 미운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생각의 위력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생각 억울했던 생각을 하면 바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반대로 한 생각 행복했던 기억을 일으키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가 내 몸을 움직이거나 만진 일도 없이 오직 한 생각이 우리에게 미소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생각이 우리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죠. 나아가서 한 생각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한 생각이 곧 생사生死라는 말입니다.
번뇌, 망상 즉 생각은 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에 멸滅함이 있고 생生함이 있을 수 있지만 본래 청정한 마음은 상대가 아니라 조건이나 원인이 없기 때문에 생生이니 멸滅이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생사生死 또한 마찬가지가 되죠.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계가 쉼 없이 변해나가는 무상無相한 세계라면 그것이 생긴 원인, 그 원인 역시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생멸의 세계에서 벗어난 본래 청정은 생한바가 없기 때문에 멸하는 일도 없다는 겁니다.
“이유일유二由一有하니 일역막수一亦莫守하라.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마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이 없도다.”
그 다음은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가 없으면 둘이라는 세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을 때 너라는 상대가 있지 내가 없는데 너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없어도 너라는 상대가 있는 걸로 착각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입니다.(8)
여기에 나뭇단을 서로 기대어 세워 놨을 때 두 나뭇단이 기대어 있을 때는 서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쪽이든지 한쪽을 치워버리면 서로 맞대고 서있던 나뭇단도 둘 다 쓰러지게 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음으로 해서 이것도 없다는 인연법은 그래서 진리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모든 시비는 실상實相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속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느니”라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가 곧 둘이요, 둘이 하나인 까닭에 하나마저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옳은 게 없어지면 그른 것도 자연히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른 것만 없애고 옳은 것으로만 채우려니 그게 어려울 수밖에요. 우주존재 원리가 그게 아니거든요. 낮과 밤이 반반인 게 존재원리인데 낮으로만 채우겠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매사에 그런 유혹에 빠지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의 허물이 없느니라. 한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삼조 스님께서는 한마음이 나지 않는 도리를 확연히 깨달으셨기에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만 한마음이 나지 않는 무념無念을 위해서 정말 애써본 사람은 그 말씀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일체의 생각이 끊어진, 생각일어나기 이전을 깨달은 자리, 바로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아예 생각이 없는 자리라고 이해를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목석같은 자리는 결코 아닙니다.
생각 속에서 생각에 끄달리지 않기에 보면 볼뿐, 들으면 들을 뿐, 그것 뿐입니다. 슬플 때도 그대로, 기쁠 때도 그대로, 방황할 때도 그대로, 살아서도 그대로, 죽어서도 그대로 사뭇 이것 뿐입니다. 그러니 한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허물될 일이 있을 까닭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근본인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그림자인 허물만 다스리려니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되는 겁니다.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허물이 없다는 것은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화두일념話頭一念 즉 무념위종無念爲宗이 된 겁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나 아닌 존재가 없다는 얘기죠. 모든 상대가 끊어진 겁니다. 내가 따로 존재할 때 나니, 너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법이 생겨나는데 내가 없어졌으니 그런 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라는 세계도 또한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부처니, 예수니, 극락이니, 천당이니 그러한 모든 명사는 인간이 이름을 만들어 붙였지 본래 있었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세상이니 저 세상이니 생각 아닌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생각에서 이뤄진 그림자이니까요.
그래서 화엄華嚴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묘한 화가와 같아서 온갖 오온五蘊을 그려 내누나. 일체의 세계 어느 법이든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게 없다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부처라는 얘기는 내가 그냥 도道 속에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바로 지금 여기 그 도道에 어긋나지만 말라, 그것을 화두일념話頭一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팔십 평생을 바로 도道에 어긋나지 말라, 즉 마음 수행하는 일 그 일을 최우선으로 가르쳤습니다. 일대사 인연을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감정이 일어나는 근본원리 즉 마음 깨닫는 법을 위해서 한평생 사신 겁니다. 나고 죽고, 죽고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이 생각 일어났다 멸하는 것이라면 그 생각 일어나는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행하고 화가 나면 모든 것은 불행하게 보이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보이지만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어났다 멸하는 하나의 꿈속일이지 결코 실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법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근본이요, 사람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해를 따라다니는 즉 그림자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한평생 가르침을 보면 오직 우리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지 당신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해태심에 속지 말고 죽으나 사나 부지런히 정진할 밖에요.
<주8> 거짓도 처음부터 거짓이 아니라 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뿐 아니라 참도 놓아버려야 합니다. 또 부처가 있는 한은 언제든지 중생이 없을 수가 없으니 부처고 중생이고 다 내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마저도 지키지 마라” 하였습니다. 내 생각 하나가 일어나기 때문에 모두가 다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옳네, 그르네, 좋네, 나쁘네, 밉네, 곱네, 밝으네, 어둡네 이 모든 것이 마음 하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 한 생각만 나지 않으면 만법이 따라 일어나지 않아서 허물 될 것이 없습니다. 허물 때문에 부득이 법을 말하는 것인데 허물이 없으면 무슨 법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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