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혜국스님의 신·심·명 강설

수선님 2024. 2. 10. 14:28

1. 신심명은

“성철 스님은 신심명을 중도총론이라 설하셨지요”

신심명(信心銘)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선종의 제3대 조사(祖師)인 승찬(僧璨, ?~606년) 선사께서 지은 선어록입니다. 1000년도 훌쩍 넘은 그 시절, 이처럼 아름다운 글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지구라는 별에 오셔서 평생을 가르치신 내용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평생을 길에서 사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중생을 위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 불교인재원이 2009년 9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봉행한 ‘혜국 스님의 신심명 대강좌’.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중도연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명쾌하게 설하셨는지

지금까지도 경이롭고 놀랄일

신심명 중도 가장 잘 설명해

그 가르침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중도 즉, 중도연기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신심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중도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어떻게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으셨는지 놀랍다. 중도에 대해 신심명 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다.”

성철 스님은 신심명을 한마디로 ‘중도총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신심명은 그 자체로 귀한 어록입니다. 신심명은 넉자씩 해서 146구절에 불과합니다. 여덟 자씩 해서 73구절밖에 안됩니다. 물론 누락되었다는 한 구절까지 더하면 74구절이겠지요. 그런데 이 짧은 글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모든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내용을 제가 모두 말씀드린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設)이고요, 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정성을 다하여 승찬 선사와 신심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절에 처음 들어온 때가 반세기 전 일입니다. 그 당시 절에서 글을 배울 때는 어떤 경전이든지 먼저 소리를 내어 수없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그냥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귀로도 듣고, 입으로도 보고, 눈으로도 듣고 이렇게 해서 전체 글을 내 뼛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으로 ‘신심명’ 내용을 같이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 호리유차(豪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하나니 / 욕득현전(欲得現前) 이어든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니 / 불식현지(不識玄旨)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이로다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뿐이니 /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 터럭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지나니 /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 어긋나고 따름이 서로 다투게 됨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되나니 /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수고로이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여섯구절을 읽었습니다.

신심명 본론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서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젊은시절 해인사에서 연비할 때 가장 원했던 일이 몇 생을 다시 태어나도 오직 스님의 길을 가겠다는 발원이었습니다. 신심명이나 육조단경과 같은 진리의 가르침에서 벗어남이 없는 길, 깨달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스님의 길을 가겠노라고 간절히 발원했습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 길을 갈 것이니 부처님께서 지켜봐주시라는 서원이었습니다. 이발원을 증명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연비를 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본 철학이나 습득한 지식이 얼마되지 않지만, 내가 배운 지식은 모두 우리 생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보면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라는 감정이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누가 생각을 일으키는지 참나를 모르기 때문에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내 자신의 습관을 익혀놓고 그 습관에 중독되어 업이 되면 그 업이 나를 끌고 다니게 됩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주인과 종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하여 스님의 길을 가겠다고 발원을 했던 겁니다. 그러한 생각은 바로 금강경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사구게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세계, 내 감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계가 모두 부처의 자리에서 나오고 있다는데, 과연 부처란 어떤 경지인지 그게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눈 과 귀, 코 와 입, 그리고 몸과 의식 이라는 6근(六根)과 그 대상인 6진(六塵), 그 사이 분별식인 6식(六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6근이 주관이라면 6진은 객관입니다. 6근과 6진이 만나면 6식이라는 이 세계가 생기는데 이를 18계(十八界)라고 합니다. 이러한 18계, 즉 이 세계가 창조되는 제법무아의 원리, 그게 바로 부처라는 겁니다. 그 내용이 금강경에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한겁니다. 모든 형상 속에서 형상 없는 본질을 보면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나라는 독립된 존재가 없고 모두가 연기 공성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고민 끝에 부처님 초기경전인 아함경을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가르침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여기서도 연기법을 모르는 거예요. 연기법이란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네가 있고 네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봅시다. 이것 안에 이것저것이 서로 나뉘어 있고, 이것이라는 생각 안으로 들어가 보면 팔만사천 번뇌가 이것저것으로 서로 나뉘어 이것이라고 할 게 따로 없는 겁니다. 이것 안에 이것과 저것이 수천만으로, 수십조로 나누어지니까 이해가 안가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연기법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인가하는 막막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부처님 경전을 배우려면 좋으나 싫으나 그냥 쭉 읽어야 했습니다. 당시 학인들은 강의를 듣기 전에 일단 외워야 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신심명을 배우고 싶거들랑 자다가 일어나서도 그냥 경구가 나올 정도로 일단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금강경 사구게(金剛經四句偈)도 모른 채로, 원각경을 보게 되었지요.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무한한 허공이 나의 깨달음에 나타난 것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또 모르겠어요. 다시 열반경으로 가봤더니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 爲樂)’이라고 나옵니다. 풀이하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음이 없나니 일체가 생멸법이라 나고 죽는 법이니 생멸 그 자체가 사라지면 영원한 열반락이라는 의미인데 이것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반면에 그때까지 제가 배운 학문은 지동설 아니면 천동설이었습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천동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난 다음에 갈릴레이란 학자가 이를 다시 주장하니, 지금은 지동설을 모두 진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지동설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동설도 아니고 천동설도 아닙니다. 전체 전(全)자 전동설(全動設)입니다. 우주전체가 유기적으로 돌아간다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모두 다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일체가 다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여러분들과 나는 동그란 축구공 같은데 앉아서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그런 와중에서도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고, 우리는 축구공 같은 동그란 곳에 거꾸로 매달려 천야만야(千耶萬耶)한 허공 속을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구는 우리를 태우고 태양계를 돌고 태양계는 은하계를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지동설이니 천동설이니 매우 국한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불교야말로, 제행무상이야 말로 절에서만 배울게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든 학문에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동설을 배워야 앞으로 우주과학이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도 생각일 뿐 변해가는 존재원리 근본자리로 돌아가면 “영원한 평화”라는 중도연기는 여전히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법화경을 보니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이라 즉,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가 눈으로 봐서 그렇지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대로가 부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모두가 진리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더 모르겠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화엄경(華嚴經)을 봤습니다. 거기에는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일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 만큼 일체 우주만물이 마음의 그림자일 뿐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 이런 뜻인데, 이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결국 신심명에서 강조하는 중도 연기를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 즉 마음의 눈을 떠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들이 전체적으로 정리해보면 중도법이며 연기법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어느 가르침하나 중도연기 아닌 게 없더군요. 그 가운데서 연기 중도를 명료하게 정리해 주신 내용이 신심명에 잘 압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을 중도총론 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좀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신심명으로 중도연기를 배워 봅시다. 이렇게 서론을 말씀드리고 신심명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혜국 스님은

1948년 제주 출생으로, 1962년 해인사로 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70년 22세에 ‘성불’(成佛)을 발원하며 오른손 손가락 3개를 연비했다.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 동안 생식 및 장좌불와를 하며 매서운 정진에 몰입했다. 경봉, 성철, 구산 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하면서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94년 제주 남국선원 무문관을 개원하고 2004년 빈터만 남은 충주 폐사지에 석종사를 창건했다. 현재 석종사 금봉선원장으로 주석하면서 수행납자와 재가수행자들을 정진의 길로 이끌고 있다.


2. 지극한 도(道)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

▲ 중국 안휘성 천주산에 있는 삼조사. 이곳에 있는 삼조동굴은 삼조 승찬 스님이 신심명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嬚揀擇)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 신심명 첫 구절이며 신심명 대의가 다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 만큼 지극한 도에 대해서 가능한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요. 그런데 지극한 도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려니 부득이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극한 도에 대한 정견(正見)이 없이는 신심명을 배워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부질없는 설명을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글이란 말을 다 표현할 수가 없지만 말은 글이 아니면 뒷사람에게 전할 수가 없고 말로서는 뜻을 다 전할 수가 없지만 뜻은 말이 아니면 드러내지 못한다는 고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자란 데로 한번 풀어 나가겠습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지극한 물입니다. 물고기와 물은 분리될 수 없으니까요. 물고기와 물은 한 몸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눈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허공으로 보인답니다. 우리가 배우려는 지극한 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우리도 도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도에는 안과 밖이 없습니다.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안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본래의 ‘나’입니다. 그래서 3조 승찬 스님께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도에서는 물과 허공이 다르지 않을뿐더러 일체가 ‘원융무애’합니다. 3조 승찬 스님은 지극한 도가 삶이 되었기에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극한 도는 사람 사람마다 온전히 갖추어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스승들은 사족을 부치고 설명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하는 일이 중생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아예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허물을 안고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도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직접 체험해서 자기 삶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지극한 도는 도에 대해서 체험한 만큼 즉 믿는 만큼 보입니다. 요즈음 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겁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正見(정견) 즉, 바른 믿음입니다.

본래 부처임을 바로 믿는 겁니다. 모자라서 보태거나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원만 구족함을 바로 보는 ‘正見’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육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 전 저는 아주 귀여운 애기 때 ‘돌’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추를 다 내어놓은 채로 찍은 애기 사진인데 엄청 귀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바로 내 어릴 때 사진이라는 겁니다.

말로 표현하려고 하니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구분없어

분별하는 상대성 양변을

모두 초월해 원융무애한

이치를 지극한 도라 이름

저는 13세에 출가했기 때문에 어릴 적 사진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회갑 다 지나서 보는 돌 사진이 누군지 알 수가 없겠지요. 본인이 본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여기에 돌 사진과 10대, 20대, 30대, 환갑 지난 사진을 펴놓고 보면 어느 사진이 ‘나’입니까? 다 내 사진이라지만 모두 다 내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으니까요. 마치 얼음으로 정성 드려 잘 조각해 놓은 조각상을 햇볕에 내놓으면 살살 녹아가는 모습과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육신으로서의 나는 변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변해가는 모습에 무슨 고정된 실체가 있겠습니까? 계속 쉼 없이 변해가는 것은 내 모습만이 아닙니다. 일체 삼라만상 모두가 변해가는 과정으로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바로 보는 것, 이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변해 나가는 원인과 결과 즉, 연기법을 분명히 바로 보고 바로 행하는 것을 ‘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리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며 ‘유혐간택’이라고 할 때 간택할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두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니 지극한 도는 간택함을 꺼린다는 깊은 뜻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간적으로 살펴봐도 또한 그렇습니다. 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내 입장에서는 남쪽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 뒤에 계신분이 볼 때는 북쪽에 앉아 있는 게 분명하거든요,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것 일뿐 내가 없으면 동서남북 또한 없습니다. 서울 조계사에서 볼 때는 제가 살고 있는 충주 석종사가 남쪽에 있지만 부산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는 남쪽이 맞고 부산에서는 북쪽이 맞습니다. 양쪽 다 맞다는 것은 양쪽 다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신심명에서는 이와 같은 모순을 뛰어 넘어 맞다, 안 맞다, 너다, 나다 하는 상대성 양변을 모두 초월하여 ‘원융무애’한 이치를 지극한 도라고 이름 하신 겁니다. 중도(中道)를 말하는 겁니다. 결국 지극한 도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증애심인 양변을 초월해야 합니다. 양변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뛰어넘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양변이 없어지면 가운데라는 개념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한국에 있는 집이나 북한에 있는 집이나 집을 허물어 버리면 꼭 같은 허공이 됩니다. 남이니 북이니 자체가 없고 한국이니 북한이니 하는 이름도 없어집니다. 문제는 동서남북이니, 너니, 나니 하는 모든 이름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부쳐놓은 이름일 뿐이지 저들이 정해달라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냥 한 허공일 뿐입니다. 그렇게 된 삶을 중도의 삶이라고 하고 지극한 도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간택할 실체가 없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본인이 착각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인간의 심리는 매우 심각합니다.

누구든지 집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여 30평 아파트로 갈 때는 얼마나 좋아 보이고 행복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경쟁자인 동창생이 50평 아파트를 사서 이사 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자기 30평 아파트는 형편없이 작아보이게 되고 불평이 시작되는 겁니다. 행복해하던 분명 그 아파트이건만 한 생각 일으킴으로 인해 형편없는 아파트가 되어버린 겁니다. 결국 한 생각 일으키는 그 마음 따라 이세상은 창조 되고 멸하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 생각이 나오는 자리, 사랑과 미움이 둘이 아닌 그 자리를 바로 보면 바로 ‘통연명백’인 것입니다.

우리 본질 즉 본마음 연기 공성으로서의 참 나에는 미워하고 사랑하고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고 하셨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증애심만 놓아버리면 통연명백하니라 하셨거든요. 그러나 증애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꿈꾸고 있는 사람은 일단 꿈속의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니까요.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것 가지고는, 생각으로는 되지만 삶으로는 되지는 못합니다. 증애심이 끊긴 원융한 공간, ‘나’라는 벽이 없다는 사실을 실참실구하여 직접 체험해야만 합니다. 통연명백이라고 생각으로 아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 통연명백이 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기억하는 것이고 수행은 직접 체험하여 자기 삶이 되는 겁니다. 익히고 습득하는 기술을 체험하는 게 아니고 비우고 비워서, 쉬고 또 쉬는 고요의 체험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요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을 말합니다. 성성적적은 나의 본래 고향이며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성성적적은 연습해서 새로 만드는 게 아니고 완벽한 본래 자기 모습이니까요.

제가 외국스님들하고 송광사에서 같이 참선을 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7개국 스님들이 같이 모여 살 때인데 어느 나라 스님인가 내가 있는 수선사 선방에 와서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스님은 부처님을 만난 일이 있느냐고요. 그럼요, 매일 만납니다. 그러면 내일도 만날 겁니까? 예, 물론이지요. 그러면 내일 부처님을 만나거든 왜 우리 앞에는 나타나지 않느냐고 물어봐주십시오. 예, 그러지요. 꼭 물어봐 달라고 강조하면서 나가는 그 스님 뒤를 쳐다 보면서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늘 같이 살고 있는 건데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뒷날 찾아와서 물어 봤냐기에 물어 봤다고 그랬지요. 그런 뒤 스님들 사이에서 하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네들 찾아가려고 통화했더니 자네들은 24시간 하루 종일 통화중이라서 통화가 안 되더랍디다. 그랬더니 외국 스님들이 상당부분 정말 그렇다고 긍정하는 거예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꽤 많은 시간을 번뇌와 망상, 온갖 잡생각 하느라고 자신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고요라는 본모습 자기 자신을 지키는 시간이 많지 못합니다. 이런 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되고 일생이 되는 겁니다. 내 한평생이라는 삶을 냉철하게 돌아보면 내 감정에 휘둘려 다니느라 보낸 인생이지 내가 누구인지 참나는 오늘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자신을 잘 지켜 주인으로서 보낸 시간은 얼마 안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주인이 주인 노릇한 시간을 고요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지켜야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단막증애하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는 그대로 바닷물이니까요.

저는 젊은 시절 한창 공부할 때 파도 자체를 없애려고 많은 갈등과 시간 낭비를 했습니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한다는 얘기요, 인생을 낭비한 죄는 죄 중에서도 큰 죄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 안다는 사실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내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늙어 버렸다는 현실이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입니까. 이 말은 옛부터 내려오는 고인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증애심이라고 표현한 이 말속에는 이 세상 모든 상대성과 모든 갈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너다, 나다 모든 시비를 다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함축된 언어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증애심입니다.


3. 막존순역(莫存順逆)

“항상 마음 들여다보라, 생각에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 혜국 스님은 틈틈이 불자들과 함께 중국순례를 했다. 혜국 스님이 중국 청정계율의 상징인 계단사에서 불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증애심만 없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다”하시고 바로 뒤를 이어서“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벌어진다고 못을 박아 놓습니다.

뭇 중생들이 생각하기를 “아! 도가 쉽구나. 우리가 이미 도안에 있고 그 도는 완벽하게 갖추어 있으니 언제라도 보게 되겠지.”, 이런 당치않은 생각을 할까봐 염려하는 노파심이 역력히 보입니다. 벌써 말에 떨어진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스승들만이 갖는 대자비심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도를 바로 보려거든 “막존순역(莫存順逆)하라. 순역심(順逆心)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순역심이란 거슬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따라주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말함인데 일체 세상사 순역심 아닌 게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순역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제발 생각에 놀아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몰록 무심삼매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바로 한 생각 차이가 천지현격(天地懸隔)이 되는 도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양변을 초월한 도리인 중도(中道)를 바로 봐야 합니다.

순역심은 따라주는 것을

좋아하는 중생들의 마음

세상사 순역심 아닌게 없어

생각 따라 모두가 천지현격

양변 초월한 중도 통찰해야

인류, 중도 삶 깨닫는다면

현재 인구 70배 공존 가능

경쟁 집착해 에너지 고갈

자연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는 그 빛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춥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는 물론 동식물이나 곤충들에게도 똑같이 비춥니다. 완전평등이지요.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하는 순역심이 전혀 없습니다. 양변이 없으니 그냥 중도입니다. 태양빛만이 아니라 공기도 큰사람이라고 더 주고 작은 사람이라고 적게 주는 법이 없습니다. 꼭 같이 준다는 생각 자체도 없습니다. 그냥 조건 없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어찌 너니 나니 거슬림이니 따름이니 하는 순역심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본질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려면 무심경계를 맛봐야 합니다. 그 길은 곧 일념이 되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화두 참선할 때 화두란 바로 그러한 도리 즉, 중도를 보여준 말길이 끊어진 세계입니다. 심행처멸(心行處滅)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중도를 여실하게 보여주신 마음의 언어입니다. 조사 스님들이 중도연기를 직접 깨달으시고 그 세계를 역력하게 보여주신 귀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이시니 가섭 스님이 파안대소하신 소식,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해주신 소식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간화선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가 있고 티베트에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살아있듯이 우리나라에 화두참선법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간화선을 직접 참구할 수 있다는 게 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화두가 마음의 언어라고 하여 그런 언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심(無心)의 언어로 보여주신 게 화두입니다.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닛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니라”, 잣나무든지 소나무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뜰 앞에 잣나무라는 말을 가지고 보여준 그 깊은 뜻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숙제처럼 준 것이 아니고 그냥 마음을 보여주신 건데 마음눈이 열리지 않으니 보지 못하는 겁니다. 누가 듣는지, 듣는 참 나를 모르니까요. 순역심이 끊어진 화두참선에 인생한번 투자해 보십시오. 정말 한번 크게 죽어볼만한 일입니다. 그게 곧 영원히 사는 길이니까요.

이렇듯 태양도 물도 공기도 대지도 온자연이 일체 모든 생명에게 평등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평등 그 자체죠. 자연이 우리를 대하듯이 우리들 스스로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진리는 하나라는 이름도 넘어선 원융무애(圓融無礙)이니까요. 어떠한 상대를 만나든 간에 싸워야할 경쟁자로 보지 말고 같이 공존해야 할 존재, 꼭 내 곁에 있어야 할 필요한 인연으로 보도록 하십시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순역심을 벗어난 상태, 거슬림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맞는 따름까지 지나가는 그림자로 받아들여서 결국 공성이라는 믿음을 세워 보십시오. 이렇게 양변에 걸림없는 존재원리를 바로 보는 것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하고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좋다, 나쁘다에서 나쁘다는 거슬림만이 아니라 좋다는 따름까지 초월하여 중간이라는 세계마저 없어진 거죠. 원융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에 ‘대자유’라 부득이 이름하기를 중도라고 한 겁니다. 본래 존재원리입니다.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새로 꾸미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본래 모습이건만 우리가 그 지극한 도에서 너무 멀리 나와서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바로 보라고 네가 바로 부처라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평생 설하신 겁니다. 3조 승찬 스님은 신심명에서 그러한 본래모습, 지극한 도가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일체 순역심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만약 인류역사가 이러한 상생의 원리에 눈을 뜨기만 한다면 즉, 중도의 삶을 깨달아서 서로 공존의 원리로 살아간다면 지금 현재 지구자원을 가지고 지금 인구의 70배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를 싸워야할 적으로 보기 때문에 경쟁하고 투쟁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여 지구자원이 이렇게 모자란다는 겁니다. 전 세계에서 군비경쟁에 들어가는 그 엄청난 돈을 농업이나 학문, 수행문화에 투자한다면 지금보다 70배가 아니라 그 이상도 상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중도라는 지극한 도가 얼마나 소중한 보배인가를, 그래서 세계의 석학 ‘토인비’는 이러한 원리를 불교경전에서 알고 나서 얼마나 마음에 느낀바가 컸으면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한 석학의 눈으로 볼 때 20세기의 가장 큰일이 2차 세계대전도 아니고 달나라에 인간이 발을 디딘 일도 아니고 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일이랍니다. 부처님께서 중도선언을 하신 중도원리가 ‘토인비’라는 석학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신심명에서는 중도상생의 원리가 이렇게 여여(如如)하고 진실이 그런데도 그렇게 삶이 안 되는 원인을 순역심에 이어 “위순상쟁(違順相爭)이 시위심병(是爲心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네 탓이다 내 탓이다, 싸우는 병폐가 너무나 크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병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필요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습니까, 이러한 중도원리를 감정표현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사 스님들의 언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석두 스님께서 조용히 앉아 참선하고 있는 약산 스님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응, 그러면 그냥 한가하게 앉아 있다는 얘기로구먼. 스님 앉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옛 스승들의 언어가 이렇게 통연명백합니다.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중도를 이 보다 잘 보여주기가 어렵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석두 스님의 게송입니다.

“언제나 함께 살아도 이름도 알지 못했는데 자유자재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일천성인도 오히려 알지 못했는데 어찌 범부들이 쉬이 밝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천성인도 알지 못합니다”는 의미는 안다, 모른다 하는 순역심이 아닙니다. 모를 뿐인‘청정’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원인이 신심명에서 걱정하는 바와 같이 순역심으로, 위순상쟁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우주자연이 모든 생명을 완전히 평등하게 받들고 있건만 인간들의 불평불만은 끊어질 줄을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욕망, 그 욕망에서 온 조그만 손님이 온통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계에서는 욕망이 단연코 왕이거든요. 욕망은 성성적적 지극한 도에 가장 약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누구나 지극한 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요한 마음의 바다에 위순상쟁이라는 감정,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에 그만 파도가 일어납니다. 위순상쟁하여 시위심병이라, 나와 남을 가르는 갈등이 파도를 일으키는 겁니다. 이때를 당하여 파도를 싫어하는 순역심이 더 큰 파도를 일으키게 합니다. 왜냐면 파도라는 욕망은 없애려고 할수록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바로 바람이거든요. 바람이 거세지면 파도도 거칠 수밖에요, 그럴수록 더 파도를 없애려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번뇌망상으로 바로 보리(부처)라는 진리를 세상에서 배워보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바로 바닷물이다. 파도를 없게 하려거든 파도를 없애려고 파도와 싸우지 말고 바람을 잠재우면 파도란 실체는 없다. 번뇌 망상이라는 파도는 바닷물이라는 부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와 같은 진리,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는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금생에 만났다는 것, 이건 정말 행운입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보여주신 중도의 가르침 말입니다. 이런 법 만나기 그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연기법에 의지해서 파도라는 순역심과 싸우지 말고 순역심의 본질, 파도의 본질을 바로 보십시오. 어디서 파도가 일어났는가를 자세히 지켜보십시오. 파도가 바닷물에서 바람에 의해 잠깐 변형된 바닷물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보여질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보십시오. 바람이 자고 나면 파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바람만 없으면 파도는 더 이상 파도일 수가 없습니다. 위순상쟁이 시위심병이니, 옳다 그르다 하는 갈등의 바람, 너다 나다 하는 거슬림과 따름의 바람, 이 바람이 다 그림자요 환영임을 알기에 부처님께서는 공(空)이라고 하신 겁니다. 있던 파도가 없어져서 공(空)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든지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단점이 단점일수만은 없게 됩니다. 죄업도 영원한 죄업일 수가 없습니다.


4. 태허공(太虛空)

“진리 역력하건만 취하고 버림에 가려 보지 못할 뿐”

▲ 중국 3대 계단 중 하나인 마안산 계태사 대웅전. 연계향림이라 써 붙인 현판은 청나라 강희제의 친필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하야 무흠무여(無欠無餘)어늘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부여(所以不如)라, 둥글기가 태허공(太虛空)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리는 마음 때문에 여여(如如)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허공은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취하고 버림만 없으면 대자유라 이름하여 태허공이라고 한 겁니다. 둥글다고 하면 우리는 평면에 그려진 원을 생각합니다.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는 원은 존재원리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취하고 버림에 익어 있어서 그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그러나 평면의 원은 둥글지 않습니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움직여 원도 되고 네모꼴도 됩니다. 아무리 둥글다 해도 세밀한 현미경으로 보면 굴곡이 있습니다. 왜냐, 모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양이란 완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변해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모양이든지 모양으로 그린 것은 생각의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이미 신심명에서 말하는 원은 아닙니다. 일체모양은 생각의 파장이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지극한 도가 완전한 원입니다. 그 원은 모양이 없으나 처처에 나타납니다. 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일체 걸림이 없고 원융무애합니다. 이러한 대자유를 원동태허(圓同太虛)라고 하셨습니다.

신심명은 한구절 한구절이 그대로 우주의 대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의 대진리, 즉 지극한 도는 원융하여 마치 끝이 없는 태허공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완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우리 앞에 역력하게 나타나 있건만 안타깝게도 취하고 버리는 마음에 가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억울할 일 아닙니까? 취하고 버림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더니 “아! 중도를 바로 봐야겠구나”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벌써 취하는데 속고 있는 겁니다. 또 순역심만 놓아버리면 된다고 하니 순역심을 버려야 한다는 병에 빠지는 겁니다. 그만큼 취하고 버리는 이분법적 생각에 푹 익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몰록 무심하기가 그 정도로 설었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 까닭으로 신심명에서 말씀하시는 낙처는 취하거나 버리는 그 생각 자체가 공한 줄을 바로 보라는 겁니다. 그 길은 몰록 무심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심(無心)하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살아 왔습니다. 무심하면 마치 고목처럼 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죽은 사람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러나 무심을 한번만이라도 체험해본 사람은 무심이란 완전한 평화, 영원한 자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너니 나니 시비분별에서 벗어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무심입니다.

여기에 큼직한 물통을 하나 가져다 놓고 물을 가득 채웁시다. 찌꺼기가 잔뜩 들어있는 흙탕물을요. 그런 뒤 흙탕물을 계속 휘저으면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혼탁한 흙탕물 밖에요. 이때에 휘젓는 일을 중지하고 그냥 지켜보십시오. 흙탕물이 가라앉은 만큼 찌꺼기가 보입니다. 우리 몸뚱이라는 그릇 속에도 온갖 번뇌 망상이 가득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된 만큼 내안에 번뇌 망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흔히 생각하기를 기도나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이런 망상이 없었는데 왜 기도나 수행을 시작하면 이런 망상이 들어오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생각 역시 취하고 버리는데 속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물통 속에 있는 찌꺼기가 보이지 없는 게 보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몸통이라는 통속에도 망상이라는 찌꺼기가 안에 있었던 게 보이지 없던 것이 수행할 때만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순역심 놓으면 된다하니

순역심 버려야 한다는

병에 빠지는 게 중생심

취하거나 버리는 생각

자체가 공한 줄 알아야

몰록 無心하라는 의미

번뇌 망상이란 내가 만든 내안에 있는 업입니다. 밖에는 그 어디에도 망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가라앉은 만큼 찌꺼기가 보여야 당연한 겁니다. 내안에 있는 망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어떤 망상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겁니다. 도적을 알아야 잡듯이 내안에 어떤 도적이 있는지 알아야 해결방법도 찾을 것 아닙니까? 망상이 일어나거든 얼른 망상인줄 알아차리십시오. 그와 동시에 그냥 받아 드리면 됩니다. 그 말은 부디 망상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번뇌 망상이란 본질이 공성이니까요. 그냥 화두만 참구 하십시오. 이게 바로 망상이라는 도적을 잡는 방법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실답게 참구해보면 스스로 이 말이 진실로 귀한 가르침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번뇌 망상이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억지로 떠맡긴 것도 아니고 밖에서 들어온 남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찍어놓은 환영의 사진이요, 내가 걸어온 내 발자국입니다. 내 잠재의식에 내가 저장해 놓은 내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지 그 누구도 대신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망상을 내가 책임진다는 말은 내 중생 내가 제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망상은 관심을 주지 말고 마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하면 저절로 없어집니다. 물통을 휘젓지 말고 가만히 놓아두면 물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는 것처럼요. 그러면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때를 당하여 상당수의 수행자들이 물속에 달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 달이구나”하는 순간 흙탕물이 흐려지면서 달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보이면 취하고 안보이면 버리고 양유취사(良由取捨)하야 소이불여(所以不如)인겁니다. 여기에서 제대로 노력하는 수행자라면 물 통속에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노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릇자체를 깨어버립니다. 본래 모습인 공성(空性)을 깨닫는 거죠. 그 순간 천강유수 천강월(千江有水 千江月)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물 통속에 있는 달을 취하거나 버릴 일이 없어지게 되는 거죠. 그릇이 있는 상태에서 그릇이 깨어져 버린 겁니다. 그렇다고 깨달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원동태허(圓同太虛) 가 된 겁니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 무흠무여(無欠無餘)인 게지요. 무심삼매인겁니다. 그래서 3조(祖) 승찬 스님께서는 취하고 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막수유연(莫遂有緣)하고 물주공인(勿住空忍)하라고 노파심을 이어갑니다. 있는 인연도 따르지 말고 공함에도 머물지 말라, 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고 열반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인연이란 모든 세간 법을 말합니다. 인간관계는 물론이요, 산하대지 모양 있는 모든 인연들입니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세계도 또한 인연법에 의해서 변해나가는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겁니다. 부처하면 우리는 바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ㅂ 아래 ㅜ’, ‘ㅊ 옆에 ㅓ’가 모여서 인연이 되어 부처라는 단어가 나왔을 뿐입니다. ㅂ에도 ㅊ에도 ㅜ에도 ㅓ에도 그 어디에도 부처라는 주체성이 없습니다. 아무런 자체 성품이 없는데 모인 인연에 의해서 부처님이라는 인연성을 보여주게 되거든요. 이 세계를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도 합니다. 글자를 그렇게 배열하면 부처님이라고 하자는 인간의 약속, 부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처님하면 바로 취하게 되고 마구니, 악마하면 버리려고 합니다. 이런 병폐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세간 법에도 따르지 말고 출세간법에도 머물지 말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취하지도 않고 버림도 없는 공인(空忍), 즉 공함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 이런 스승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직접 체험하여 확실하게 깨닫고 나서 자유자재한 도인이 아니면 이렇게 가르쳐 주시기가 어렵습니다. 생사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열반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 이런 가르침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록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중국의 선사들만 그러신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 스승들도 한 결 같이 그렇게 보여주시고 그렇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양광명이 아무리 우리 앞을 비추고 있어도 등을 돌리고 있으면 윤회 속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밤 우리나라는 캄캄했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도 태양은 밝게 비추고 있었거든요. 태양은 그 시간에 어디로 숨은 일도 없고 빛을 줄인 일도 없이 환한 대낮인데 캄캄하게 어두운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지구가 태양에 등을 돌렸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마음, 광명도 등을 돌렸느냐, 아니 돌렸느냐의 차이일 뿐 밝음 자체는 털끝만큼도 변한 일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세간법과 출세간법, 생사와 열반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태양에는 어두움이란 없듯이 생사가 본래 없다는 신심명 가르침은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보배입니다. 그 뒤를 이어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고 나옵니다.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저절로 사라져 다하리라는 말입니다. 이 한 가지가 문제입니다. 지극한 도라고 하기도 하고 중도라고 해도 좋지만 신심명에서 말하는 한 가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인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자리 양변을 초월한 중도, 무엇이라고 해도 그 한 가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디 요원한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극히 가까운 내 마음, 내가 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바로 잡게 해달라고 기도를 시작했답니다. 몇 년을 열성적으로 기도를 했는데도 이 세상을 바로 잡기는커녕 자기가족하나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그래서 부디 내 가족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달라고 기도가 바뀌었답니다. 다시 몇 년간 열심히 했습니다. 그사이 이 사람이 너무 지쳐버리고 몸은 늙어가고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이제 모든 욕심 다 내려놓고 제발 내 마음 하나만이라도 길들이게 해달라고 기도 방법을 바꾸게 된 겁니다. 그때에야 산신령이 앞에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야, 이 사람아. 내 마음 하나만 마음대로 잘 다루면 가족뿐 아니라 이세상도 모두 뜻대로 되는데 자네는 기도를 거꾸로 했네. 뒤집어진 일이 없는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기도나 각자 자기 갈 길이 있는 가족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기도를 했으니 애당초부터 이루어져선 안 되는 기도였네. 자네가 만약 처음부터 내 마음하나 바로 닦겠다고 기도했으면 충분히 성취할 수 있었는데 이제 너무 늦었네.”

늦게 철이 들어서, 철들자 늙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 사실이 그렇습니다. 일종평회(一種平懷)가 안 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 될 수가 없는 거죠.


5. 무심으로 들어가는 방법

“망상과 싸우게 되는 까닭은 고요함을 취하고자 하기 때문”

▲ 중국 계태사에 처음으로 계단을 세운 법균 스님의 사리탑.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고 하니 그 한 가지라는 게 뭔가 있는 걸로 압니다. 특별히 깨달은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거죠.

망상이 일어나든 말든

말려들지 말라는 의미

망상은 그림자에 불과

그냥 한발 한발 대지

위를 걷듯이 정진해야

대지 위 걸으면서도

흙이 검다, 붉다하며

끝없이 분별한다면

결코 나아갈 수 없어

그만큼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중도(中道)라고 누누이 말을 하는데도 몰록 무심(無心)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취하고 버리는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지동귀지(止動歸止)하면 지갱미동(止更彌動)하나니”라고 짚어주고 있습니다.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 이런 말씀은 정말 애써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아! 그렇구나”하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모으게 됩니다. 잠을 안 자려고 악을 쓰면 쓸수록 잠은 더 쏟아지고 고요하려고 망상을 내리 누르면 누를수록 망상은 더 혼란스러웠던 경계에 많이 울어 봤으니까요. 물론 신심명에서는 이런 지엽적인 얘기가 아니라 근본적인 존재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산란한 마음을 없애고 고요함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그 바람이 망상 하나를 더 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든 말든 말려들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망상은 그림자이니까요. 한발 한발 내딛고 대지(大地) 위를 걷듯 하라는 의미입니다.

분명히 대지 위를 걸어가지만 걷기만 할 뿐 아닙니까? 만약 그냥 걸어가지 않고 이 흙이 검다, 붉다, 모래가 많다, 적다 이렇게 따지면서 걸어가는 이는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게 당연하죠. 화두 참선도 이와 같습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놓아둔 채 그냥 화두에만 집중해야 됩니다. 그렇지 못하고 망상과 싸우게 되는 까닭은 고요함을 취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에 돌아가려고 하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전도몽상(轉到夢想)이라고 했거든요, 내 몸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면서 가족이나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몸 하나도 그렇지 않습니까? 늙지 않기를 아무리 원해도 결국은 늙고, 아프지 말라고 해도 결국은 아프고, 죽지 말라고 애원해도 결국 죽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몸이라고 하는 내 자신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찌 남이 내 마음대로 되겠느냐,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그 생각을 바꾸라고 하신 겁니다. 내가 환경에 적응해야지 환경이 나를 맞춰 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분명 불가능한 일인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 썩었다며 바꿔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썩은 일이 없다, 썩은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이다, 이 마음만 바로 쓰면 세상은 항상 그대로 여여(如如)하다, 그래서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란 양변을 초월하여 가운데도 없어진 ‘원융무애’(圓融無礙)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져 다한다는 말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래서 “자성청정불(自性淸淨佛)이니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이르신 겁니다. 하늘이 맑다고 하면, 더럽혀졌던 하늘이 맑아진 게 아니고 본래 존재원리가 맑음 자체거든요. 그러니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해도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마음을 잘 닦아 나가겠다고 발원하면 그 기도는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치로 보나 사물로 보나 존재원리가 이렇게도 분명하건만 삶이 그렇지 못하니 그게 답답한 일입니다. 그 원인이 업(業)에 끌려 다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인이 주인노릇 못하고 도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그림자에 속는데 습관이 되어 버린 겁니다. 꿈속에서 불을 만나면 뜨겁다고 소리를 지르고 물을 만나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꿈속 일이 사실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기실 꿈속에서 꾸는 꿈만 꿈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사는 길, 이 모든 것이 꿈입니다. 다만 꿈인 줄 모를 뿐이지요. 하루 종일 누가 말하는지, 내가 나를 모르는 꿈보다 더한 꿈이 어디 있겠습니까? 억울한 남의 말 한마디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가슴에 상처로 부여잡고 있는 어리석은 꿈도 그렇고,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사로잡혀 아파하고 있는 꿈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상처는 내가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상처가 되지 그냥 놓아 버리면 상처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란 내 마음에 붙들고 있는 기억일 뿐이요, 미래란 내가 상상하는 상상의 세계일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심명에서는 “유체양변(唯滯兩邊)이라 영지일종(寧知一種)인가”라고 하셨으니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겠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고요함마저 버리고 움직이는 대로 자연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 생각 또한 양변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다 버리고 자성청정을 바로 보라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일종불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니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경문(自警文)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인공아 내말좀 들어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문(空門)에서 대도(大道)를 깨달았거늘 너는 어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않는단 말이냐.”

이렇게 걱정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공문, 즉 허공성에는 아무리 똥물을 끼얹어도 더럽혀지질 않고 허공에다가 먹물을 끼얹어도 허공은 물들지 않습니다. 빈 그릇 즉 허공성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비워버리면 어떤 죄업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그 마음하나 비우지 못하는 것을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한다고 염려하시는 겁니다. 내가 남의 손을 잡아주거나 남이 내손을 잡아주려고 할 때 내손이 비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비어있지 않으면 양쪽 다 잃을 수밖에요. 마음하나 비우는 일, 그 일은 몰록 무심(無心)을 체득하는 일입니다.

무심이란 시비분별을 떠나 실상을 바로 보는 일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쉬우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비울게 없거든요. 너니 나니 모든 시비분별을 떠나서 중도, 즉 실상을 바로 보는 일이지 비울게 따로 있어서 비우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없음으로 해서 도(道)가 되는 것이지 나라는 벽, 즉 계란 안에서는 아무리해도 계란입니다. 계란이 깨어져야 병아리라는 생명이 됩니다. 계란이 깨어지려면 어미닭 체온과 계란이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합니다. 어미닭이라는 부처가 계란이라는 중생을 품어서 어미닭과 계란이라는 양변이 허물어지는 찰라, 바로 줄탁동시(啐啄同時)가 됩니다. 어미닭이 알을 얼마나 치열하게 품었으면 조사어록에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하라는 인용이 그렇게 많이 나오겠습니까?

우리도 업이라는 환영의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어보고 나서야 화두의 고마움을 진실로 알게 됩니다. 흔히들 화두를 가지고 옛날 화두가지고 안 된다는 분도 계시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화두에 진실로 일념참구해보면 모양 없는 공성이란 옛날과 지금이 없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공성이나 지금의 연기공성이 전혀 다르지 않거든요.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물 컵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하나 가득 들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더 이상 넣을 수가 없고 다른 용도로 쓸 수도 없습니다. 이때 몰록 물을 쏟아 버리면 물 컵은 빈 컵, 빈 그릇, 허공성이 됩니다. 이렇게 빈 상태의 허공성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빈 상태였습니다. 허공성은 누가 새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새로 고쳐진 상태도 아닌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도 본래 빈 상태, 무심상태, 허공성입니다. 다만 온갖 번뇌 망상이 가득 차 허공성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뿐입니다. 번뇌 망상 집착만 놓아버리면 본래 모습이 열반적정이요, 지극한 도(道)입니다. 새로 만들거나 고치는 일이라면 실패할 수도 있고 잘못될 확률도 있지만 본래 완성되어 있는 본래 자리라 누구나 평등한 자리입니다. 너다, 나다 분리되기 이전 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확연히 깨달으신 뒤 하신 말씀이 “일체 유정무정이 모두 불성 그 자체로구나. 부처 아닌 자가 본래 없구나”라고 하신 겁니다. 제가 출가 입산한지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지금도 새벽 두시가 넘어가면 새벽예불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세세생생(世世生生) 출가 수행자의 길을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하루하루 삶이 부처님 은혜 갚는 삶이 되도록 정말 애써보겠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고마움의 절이 저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 은혜가 마음 깊이 맺힐 때가 온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유체양변(唯滯兩邊)이라 영지일종(寧知一種)인가 하시고선 뒤이어 일종부통(一種不通)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이니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원인이 부처님께서는 오직 인(因)을 중요시 합니다. 인을 중요시 한다는 말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 한다는 말이죠. 반대로 중생들은 과(果)를 중요시 합니다. 과를 중요시한다는 얘기는 오직 열매만을 찾는다는 얘기죠. 씨앗을 중요시하는 부처님께서는 씨앗만 심어놓으면 언제든 열매를 맺게 마련인데 씨앗은 심지 않고 열매만 찾는 중생에게는 어느 하세월 가더라도 열매는 나타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이라는 씨앗 심는 일만 하시다 보니 심어놓은 씨앗에는 싹이 나고 항상 열매가 맺기 마련입니다. 중생들은 씨앗은 심지 않고 열매만 찾으려 하니 씨앗 심지 않은 열매가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수행정진도 그렇습니다. 깨닫겠다는 열매만 찾다 보니 자칫 깨닫겠다는 욕심이 앞서게 되고 그게 오래가면 병이 되기도 합니다.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어 오직 삶 자체를 수행과 연결시켜 씨앗을 심어 나가면 훨씬 더 나은 결과가 올텐데’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두에 대한 믿음이 투철하면 화두를 참구할 뿐 다른 것을 구하는 마음이 줄어들게 되고 씨앗 심는 참구가 더 간절하게 됩니다. 그 간절한 의심과 욕심이 개입된 의심의 차이는 천지현격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는다고 하신 겁니다.


6. 절언절려(絶言絶慮)

“말 끊어지고 생각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 계단사의 계단. 중국의 기라성 같은 스님들은 이곳에서 계를 받고 중국 불교를 이끌었다.

“견유몰유(遣有沒有)요, 종공배공(從空背空)이라”하는 대목으로 들어갑니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하는 말씀입니다.

있음의 세계 즉, 세상 삶이 어렵다고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나겠다는 그 마음이 더큰 문제가 되고 공적함을 추구하면 구하는 그 마음이 이미 공을 그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이 육신이 있는 한 결코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내 몸이 곧 세상이라면 어디로 벗어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세상을 벗어나려는 목적이 내 몸 하나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그건 벗어나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 몸에 대한 집착입니다. 공(空)함의 대자유 마저 이 몸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업(業)의 작용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고 있는 거지요. 다만 자기 자신이 속는 줄을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있음을 버리려고 할수록 오히려 있음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는 겁니다. 더구나 공(空)이란 이 몸을 떠나서는 알도리가 없습니다. 이 몸이 세상이라면 세상법 떠나서 공을 알려면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법 떠나서 공을 찾는다면 이미 양변에 떨어진 거죠. 그래서 상(相) 속에서 상을 떠나야 되고 공(空) 속에서 공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사 귀찮다고 안보고 살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보기 싫은 꼴 안 보려고 눈감고 살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보기 싫다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고 싶은 대상입니까? 보고 싶은 꼴 안보고 시각장애로서 살지 않으려면 오만 꼴 다보고 살아야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보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느 선까지를 봐야할지, 어느 것을 안 봐야할지 하루 종일 그것을 분별하느라 아무 일도 못할 겁니다. 있음의 세계란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림자인데 어떻게 환영의 그림자를 실체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있음을 버리려면 오히려 있음에 빠진다”고 하신 겁니다. 반대로 공(空) 함을 따르면 모양도 빛깔도 없는 공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공(空)을 좋아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공을 등지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공(空)이란 공을 추구하는 그 생각이 끊어진 상태, 시비분별 끊어진 곳, 내가 없어진 자리입니다. 내가 없어진다면 죽거나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이 몸이 바로 이 자리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고 양변을 벗어나 완전한 행복,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에 드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나 아닌 존재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니 따라야 할 공(空)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대자유인 겁니다. 그래서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소중한 가르침입니까?

다음은 “다언다려(多言多慮)하면 전불상응(轉不相應)”이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하게 된다. 이런 뜻이죠. 말로서는 감정의 전달밖에 안됩니다. 고요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는 결코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의 세계는커녕 말로는 음식맛 하나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된장맛 하나, 김치맛 하나도 말로 설명하려면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된장을 먹어본 사람이야 말이 필요 없겠지만 평생 된장 구경을 못해본 외국인에게 된장맛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은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된장을 직접 먹어보게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방울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길은 바다에 떨어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게 생각의 표현이거든요, 생각이라는 게 어디서 만들어지는 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생각을 일으키는지 생각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생각 몹시 억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렸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몹시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가 손을 대거나 접촉한 일이 없이 한 생각 일으킴에 따라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미소가 나오기도 하는걸 보면 생각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한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 걸 모른다면 꼭두각시나 허깨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생각이 존재한다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몸 어디에도 ‘고정된 생각 저장고’는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생각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할 때 거기에서의 모든 상(相)은 모양 있는 모양만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는 생각도 꼭 같은 상(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모양이 변하듯이 생각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생각이야말로 변하는 과정이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끝없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합니다. 바다에서 물거품이 수없이 일어나고 멸해도 바닷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연기공성(緣起空性)이니까요.

된장맛, 먹어 본 사람이야

말로 설명할 필요없겠지만

평생 된장구경 못한 외국인

말로 된장맛 설명할수 없어

천마디 말보다 좋은 방법은

직접 된장을 맛보게 하는것

언어도단이요 심행처멸이라

한방울 물 마르지 않는 길은

바다에 떨어지는 것이 유일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절언절려(絶言絶慮)하면 무처불통(無處不通)이라”, “그러한 말의 세계가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이 끊어지기를 바라거나 생각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동안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요원한 얘기입니다. 말이 끊어졌다는 얘기는 생각자체가 무념이 되었다는 얘기지 끊어질 생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는 “무념위종(無念爲宗)하고 무상위체(無相爲體)하고 무주위본(無住爲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념(無念)이란 유(有)니, 무(無)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일체 상대되는 두 모양이 일체 진로를 영원히 떠난 자리입니다. 바로 진여(眞如) 정념(正念)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거듭 밝히기를 없다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이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의 씀이니라, 진여의 자성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듣고 보고 느끼고 알지만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물질과 모양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 라고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말길이 끊어진 길, 생각이 끊어진 길을 무념위종이라고 하고 그길로 직접 행하는 길이 화두참구 즉, 화두참선입니다.

고봉 스님께서는 “오직 본참공안 화두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에 간절하게 참구하라. 궁구하고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화두를 타파하여 벗어나면 바야흐로 성불한지 이미 오래임을 알 것이다. 이 한 도리는 기왕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생사를 요달 하고 죽음의 벗어남에 이렇게 역력하게 시험하신 묘방 중에 묘방이다. 오직 귀한 것은 실답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 뿐이니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깨닫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 태고 스님은 “사람의 마음이란 지극히 미묘하여 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얻을 수가 없으며 침묵으로도 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일만 오직 화두 참구에만 마음을 두어 어둡지 않기만 하면 반드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대장부의 평생 사업이다”라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은 “귀근득지(歸根得旨)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나니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마음을 따르면 바로 깨달음이요, 망상번뇌를 따르면 자연 근본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이런 말씀이겠죠.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돌아갈 자리가 있는 게 아닙니다. 가고 오는 시간도 없거니와 공간도 또한 없습니다. 본래 없는 마음인데 없는 마음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공을 깨닫는 길입니다. 근본에서 보면 육상원융(六相圓融)이거든요.

여기에서 육상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총(總), 별(別), 동(同), 이(異), 성(成), 괴(壞) 이 여섯 가지를 육상이라고 합니다. 현수 스님의 ‘오교장’에 보면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법당 한 채를 지으려면, 즉 한옥집 한 채를 지으려면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기와 모든 재료가 모여서 이뤄지게 됩니다. 그 재료가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볼 때는 기둥이요, 대들보라고 하지만 각자 법당이라는 자리에 모여 인연이 되어 법당이라는 한 채의 집이 세워지게 되면 그냥 법당일 뿐입니다. 전체적인 총(總)으로 볼 때는 기둥도 아니요, 대들보도 아니요, 그냥 법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기둥 하나만 없어도 법당은 허물어 져서 법당이라는 총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기둥하나에 대들보도 들어있고 기와도 들어있고 서까래도 들어있고 법당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합니다. 즉 육상원융이라는 세계가 이뤄집니다. 대들보도 그렇고 지붕도 그렇고 모두가 별이면서 총이고 총이면서 별인 겁니다. 법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자연 너나 할 것 없이 존재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무진연기(無盡緣起)가 펼쳐지는 겁니다. 총과 별이 하나요, 동과 이가 하나요, 성과 괴가 하나입니다. 물론 하나도 이름뿐인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공(空)에는 육상(六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명도잠 스님이 법안문익 선사를 참방하자 스승이 묻기를 “자네는 무슨 공부를 하다 왔는가”하고 물으니 제자가 “예, 화엄경을 배우다가 왔습니다”하니, “그렇다면 육상이 화엄경 어느 품에 있는가?”라고 재차 묻자 “예, 십지품에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육상원융이라 세간과 출세간 모두가 육상이 갖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이 그 말을 듣고 하시는 말씀이 “응, 그런데 공에는 육상이 없지”하자 영명도잠 스님이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스승이 다시 자비를 베풉니다.

“자네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양구, 즉 침묵했을 텐데….”

이렇게 일러주는데도 제자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가 다시 묻기를 “스승님, 상(相)이 없는 공(空)에 육상(六相)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하니 말이 끝나자마자 스승은 “공(空)이지” 이렇게 끊어 줍니다. 여기에서 제자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생각을 따르면 종취(宗趣)를 잃는다고 이렇게 하신 겁니다.


7. 전도(顚倒) 된 생각

“참됨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

▲ 조주 스님의 사리탑이 봉안되어 있는 백림선사.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脚前空)이라.”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사실 진리에서는 잠깐과 영원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봤다는 얘기는 “눈을 뜨면 즉, 마음의 눈을 뜨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이라고 하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잠깐은 매우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은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 생각놀음에 속고 있는 겁니다. 길다, 짧다고 하는 그 생각마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파도 저절로 사라지니

파도 없애려 하지말고

바람만 잠재우면 그만

바닷물서 파도 일어나듯

공에서 모든생각 일어나

공은 불평등 자체 없어

꿈에서 깨어난 그 상태

생각서 벗어난 그 상태

바로 공(空)이라 일컬어

수유반조(須臾返照)란 생각의 속임수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그러니 전공(前空)보다 뛰어남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여기에서 전공(前空)이라 함은 목전공(目前空)을 말함인데 눈앞에 모든 것이 공했다 아니다 하는 분별이 남아있는 공입니다. 내 자신이 공했다면 전공(前空)이니 후공(後空)이니 말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공(空)이 있다는 것은 이미 양변에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상대성에 속은 거지요. 그래서 삼조 스님은 잠깐 동안 바로 비추는 일이 자성(自性)을 바로 깨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돈오(頓悟)라고 하신 겁니다. 홀연히 자성(自性)을 보는 데는 시간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그냥 몰록이라고 하셨을 뿐 법(法)자체에는 돈오(頓悟)니 점수(漸修)니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만큼 자성을 돌이켜 보는 일이 수승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겠지요.

“전공전변(前空轉變)은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 “앞의 공(空)함이 전변(轉變)함은 모두 망견(妄見) 때문이니”라고 이어집니다. 사실 망견 아닌 게 없을 만큼 우리는 망견에 많이 속고 있습니다. 망견이란 허망 되게 본다는 말로서 잘못 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코끼리는 무게가 무겁다고 생각하고 토끼나 또는 강아지 무게는 가볍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망견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영, 모양에서 볼 때는 코끼리는 무겁고 강아지는 가볍다고 생각되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볼 때 생명의 무게는 꼭 같습니다. 그러한 면이 불교의 심오함이고 참으로 훌륭함입니다.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의 수행자로 수행할 때 매에게 쫓긴 비둘기가 부처님을 찾아 날아 들어옵니다. 부처님은 두말 안하고 비둘기를 숨겨줍니다. 뒤따라 날아온 매가 “그 비둘기는 내가 먹어야할 양식이다. 그 비둘기를 나에게 돌려주라”고 하니 부처님께서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를 믿고 살려달라고 나를 찾아온 비둘기를 잡아먹으라고 내줄 수가 있느냐? 나는 못하겠다.”

그러니 매가 “그럼 비둘기 생명만 소중하고 내생명은 소중하지 않느냐?”고 하니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비둘기 무게만큼 내 허벅지 살을 끊어주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이 우리가 들을 땐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직 중생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시는 그러한 보살들은 능히 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단 비둘기 무게만큼 달라.”

그렇게 해서 허벅지살을 비둘기만큼 끊어서 저울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비둘기 보다 훨씬 더 많이 올려놨는데도 비둘기 쪽이 무거운 겁니다. 나중에는 끊어놓을 수 있는 모든 살을 끊어놔도 비둘기가 더 무겁게 나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부처님 전신인 그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저울에 올리니까 그때서야 비둘기와 그 수행자가 평행을 이루는 겁니다. 그 말은 비둘기 생명의 무게나 사람의 생명 무게나 코끼리 생명의 무게나 꼭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에서 볼 때는 모든 시비 분별은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는 데서 생기는 일이 됩니다. 망견(妄見)이란 결국 그 평등(平等)한 마음, 청정(淸淨)한 마음을 버려두고 번뇌 망상하자는 대로 감정의 노예노릇 한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마음 깨닫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그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그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망견(妄見)이라는 그림자는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없는 것이거든요.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그 마음을 바다라고 한다면 망견(妄見) 즉 파도는 번뇌(煩惱) 망상(妄想)입니다. 그런데 그 파도는 본래 없는 것이거든요. 바람 때문에 마치 파도라는 실제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망견에 속은 거지요. 그러나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란 바람에 의해서 바닷물이 변형된 모습이지 파도란 세계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냥 그대로 공이거든요. 실상을 바로 보면 그냥 고해 속에서 바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번뇌(煩惱) 즉 보리(菩提)라, 보리와 번뇌를 같이 보는 겁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모양도 빛깔도 없는 이 마음을 어찌 찾는단 말입니까? 마음을 찾는다는 말은,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은, 모양 없는 그 마음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마음을 깨닫는 길입니다. 마음을 바로 쓴다는 말은 그냥 감정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잘 쓰는 그런 말이 아니라 무념위종(無念爲宗)이요, 무상위체(無相爲體)요, 무주위본(無住爲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밉다고 미워하는 그 마음을 역력하게 아는 각성(覺性)이나 사랑스럽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는 각성(覺性)이나 그 역력한 마음에는 사랑과 미움이, 둘이 없습니다. 진공(眞空)에 둘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림자인 마음을 실체로 잘못 생각하고 미워하는 그림자를 따라가고 사랑한다는 그림자를 따라가는 고로 바로 생멸(生滅)이라, 윤회(輪廻)가 시작되는 겁니다.

2002년도 행복지수조사에서 보면 가난하기로 유명한 방글라데시가 1위를 했다고 합니다. 2011년에는 히말라야 밑에 조그마한 부탄이라는 나라가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글라데시를 도와주어야한다고 구호품을 보낸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참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들은 행복하고 세상이 살만하다고 참으로 환희에 차서 사는데 그런 이들에게 도와주고 있다는 우리는 불행하고 세상이 힘들어서 자살률이 점점 높아가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참 알 수 없는 일이거든요. 행복한 사람에게 불행한 사람이 도움을 받아야 그게 정상일텐데 세상이 힘들어 자살까지 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들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걸까,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전부 망견에서 생기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황벽 스님 같은 분은 그러한 망견(妄見)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정말 한번 죽을힘을 다하여 수행을 하라. 찬 기운이 뼛속까지 사무친 뒤에라야 매화 향기가 코끝을 찌르리라. 이러한 황벽 스님의 가르침은 현재 우리들에게 가장 새겨들어야 할 말씀 중 하나입니다.

파도가 바닷물에서 일어나듯이 모든 생각은 공(空)에서 일어납니다. 공(空)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상태,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상태를 공(空)이라고 이름 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그 길이 곧 불교요, 인류를 구하는 길입니다. 너와 나, 인간과 우주가 둘이 아닌 사실을 깨닫고 서로 상생(相生)의 길로 간다면 지금 지구상의 자원을 가지고 지금 인구의 70배가 먹고도 남는답니다.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투쟁의 길로 가기 때문에 지금 현재 인구가 쓰기도 모자라 굶주리는 나라가 많다는 사실을 볼 때 평등(平等)의 공(空), 실상(實相)의 공(空)을 체득하는 길이 참으로 인류를 구하는 길임을 깊이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이라”,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이 얼마나 향기 나는 공(空)의 언어입니까? 파도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바람만 잠재워라. 파도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이런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복이 어찌 작은 복이겠습니까? 스승들이 당신 생명을 다 바치고 애쓰고 애쓴 수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대자비로 하신 말씀이니까요. 참됨을 구한다는 것은 참됨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참으로 참됨은 연기공성(緣起空性)이요, 중도(中道)라 참됨이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참됨이라고 하신 것이거든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눈(目)을 찾아 나섰다고 합시다. 눈(目)으로 눈(目)을 볼 수가 없어서 눈이 없다고 눈을 찾아 달라고 오만데 찾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섰다고 합시다. 이 사람 이마에 눈이 그냥 있거든요. 이 사람이 눈을 찾았다고 좋아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잃어버렸던 눈이라면 찾았다고 하겠지만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찾았다는 말이 성립될 수가 없거든요.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으니 뒤늦게나마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거든요. 그래서 참됨이 아니라 이름이 참됨이라 하신 겁니다. ‘금강경’에서도 반야바라밀이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구하는 마음 즉, 욕망이 앞서는 한은 참됨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망령(妄靈)된 견해(見解)만 쉬라고 하신 겁니다. 잃어버린 일이 없는 눈을 찾으려는 그 마음을 쉬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안에 완벽하게 갖추어진 그 세계를, 그래서 임제 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祖師)를 구하면 조사(祖師)를 잃게 되고 도(道)를 구하면 도(道)를 잃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한 임제 스님의 말씀도 말에 떨어져버리면 부처도 구하지 말아야하고 조사도 구하지 말아야 하고 도(道) 역시 구할게 없다는 말로 잘못 듣게 됩니다. 이렇게 들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전도(顚倒) 된 생각으로 들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부처니 조사니 도라는 말이 흔적까지도 초월해서 양변을 떠난 중도연기(中道緣起)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고구정녕(苦口丁寧) 가르치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됨을 구하려고 마음을 일으킬게 아니라 오직 일어나는 모든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고 하신 겁니다.


8. 이견부주(二見不住)

“잠깐과 영원은 같은 말…시비 일으키면 본마음 잃어”

▲ 당나라때 40여년 동안 선풍을 진작시킨 조주 대선사의 사리탑.

“이견부주(二見不住)하야 신막추심(愼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見解)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라는 말은 두 견해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란 마치 장벽이 없는 허공과 같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하셨거든요. 확연하여 성스러움이니 성스럽지 못함이니 하는 경계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의 낙처(落處)는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벌써 한 생각 일으켜서 감정을 따라다니느라 확연한 그 마음을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참마음 따로 있고 번뇌 망상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마음, 그 마음의 고요를 바로보지 못하고 뭔가 구하는 마음,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번뇌 망상인 까닭에 그 구하는 마음만 몰록 쉬어 버리고 욕망을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 본마음의 고요란 따로 상(相)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 즉 모양도 빛깔도 없는 그야말로 우리 목전(目前)에 보고 듣는 그 자리거든요. 보고 듣는 자리라고 하면 보는 자리 듣는 세계가 따로 있는 걸로 압니다. 전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를 부득이 글로 표현하려면 이런 허물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옛 스승들은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망(妄)에도 머물지 않고 진(眞)에도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 곳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런 때에 크게 용(用)을 일으키면 이 모두가 진(眞) 아님이 없으니 이를 내놓고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한다면 이렇게 보는 자는 모두가 알음알이에 속는 일이다.”

이 은혜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본다거나 듣는다거나 보지 않는다거나 듣지 않는다거나 다 같은 자리입니다. 말하는 이와 말 듣는 이가 둘이 아닌 자리이거든요. 어쨌든 간에 그 자리는 두 견해가 있을 까닭이 없으니 머물래야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 없으면 둘이라는

세계는 있을 수 없어

내가 있을 때 너라는

상대 존재할 수 있어

내가 없는 상황에서

너라는 존재도 없어

대개 세상 사람들은

내가 없어도 너라는

상대 있는 걸로 착각

내 마음이 불행하면

모든것 불행하게 보여

내 마음이 행복하면

모든것 행복하게 보여

그러하기에 우리는

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해선 안돼

저에게는 무지개 잡으려고 쫓아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되는데, 뒷산에 오색무지개가 너무 곱게 떴기에 만져보려고 쫓아갔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걸로 보고 부지런히 쫓아갔는데 아무리 뛰어가도 그만큼 떨어져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무지개를 잡을 수가 있는 겁니까?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삼조 스님께서 신심명에서 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이 참으로 귀한 가르침입니다.

“재유시비(纔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이니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으리라는 의미입니다. 잠깐과 영원은 같은 말입니다. 잠깐이든 아니든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한 세계가 창조된 겁니다. 한 생각 밉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온몸 전체, 팔만사천 세포가 미운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생각의 위력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생각 억울했던 생각을 하면 바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반대로 한 생각 행복했던 기억을 일으키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가 내 몸을 움직이거나 만진 일도 없이 오직 한 생각이 우리에게 미소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생각이 우리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죠. 나아가서 한 생각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한 생각이 곧 생사(生死)라는 말입니다.

번뇌, 망상 즉 생각은 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에 멸(滅)함이 있고 생(生)함이 있을 수 있지만 본래 청정한 마음은 상대가 아니라 조건이나 원인이 없기 때문에 생(生)이니 멸(滅)이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생사(生死) 또한 마찬가지가 되죠.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계가 쉼 없이 변해나가는 무상(無相)한 세계라면 그것이 생긴 원인, 그 원인 역시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생멸의 세계에서 벗어난 본래 청정은 생한바가 없기 때문에 멸하는 일도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은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가 없으면 둘이라는 세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을 때 너라는 상대가 있지 내가 없는데 너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없어도 너라는 상대가 있는 걸로 착각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입니다.

여기에 나뭇단을 서로 기대어 세워 놨을 때 두 나뭇단이 기대어 있을 때는 서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쪽이든지 한쪽을 치워버리면 서로 맞대고 서있던 나뭇단도 둘 다 쓰러지게 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음으로 해서 이것도 없다는 인연법은 그래서 진리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모든 시비는 실상(實相)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속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느니”라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가 곧 둘이요, 둘이 하나인 까닭에 하나마저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옳은 게 없어지면 그른 것도 자연히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른 것만 없애고 옳은 것으로만 채우려니 그게 어려울 수밖에요. 우주존재 원리가 그게 아니거든요. 낮과 밤이 반반인 게 존재원리인데 낮으로만 채우겠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매사에 그런 유혹에 빠지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의 허물이 없느니라. 한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삼조 스님께서는 한마음이 나지 않는 도리를 확연히 깨달으셨기에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만 한마음이 나지 않는 무념(無念)을 위해서 정말 애써본 사람은 그 말씀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일체의 생각이 끊어진, 생각일어나기 이전을 깨달은 자리, 바로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아예 생각이 없는 자리라고 이해를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목석같은 자리는 결코 아닙니다. 생각 속에서 생각에 끄달리지 않기에 보면 볼뿐, 들으면 들을 뿐, 그것 뿐입니다. 슬플 때도 그대로, 기쁠 때도 그대로, 방황할 때도 그대로, 살아서도 그대로, 죽어서도 그대로 사뭇 이것 뿐입니다. 그러니 한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허물될 일이 있을 까닭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근본인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그림자인 허물만 다스리려니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되는 겁니다.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허물이 없다는 것은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화두일념(話頭一念) 즉 무념위종(無念爲宗)이 된 겁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나 아닌 존재가 없다는 얘기죠. 모든 상대가 끊어진 겁니다. 내가 따로 존재할 때 나니, 너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법이 생겨나는데 내가 없어졌으니 그런 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라는 세계도 또한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부처니, 예수니, 극락이니, 천당이니 그러한 모든 명사는 인간이 이름을 만들어 붙였지 본래 있었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세상이니 저 세상이니 생각 아닌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생각에서 이뤄진 그림자이니까요. 그래서 화엄(華嚴)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묘한 화가와 같아서 온갖 오온(五蘊)을 그려 내누나. 일체의 세계 어느 법이든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게 없다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부처라는 얘기는 내가 그냥 도(道) 속에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바로 지금 여기 그 도(道)에 어긋나지만 말라, 그것을 화두일념(話頭一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팔십 평생을 바로 도(道)에 어긋나지 말라, 즉 마음 수행하는 일 그 일을 최우선으로 가르쳤습니다. 일대사 인연을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감정이 일어나는 근본원리 즉 마음 깨닫는 법을 위해서 한평생 사신 겁니다. 나고 죽고, 죽고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이 생각 일어났다 멸하는 것이라면 그 생각 일어나는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행하고 화가 나면 모든 것은 불행하게 보이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보이지만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어났다 멸하는 하나의 꿈속일이지 결코 실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법(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근본이요, 사람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해를 따라다니는 즉 그림자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한평생 가르침을 보면 오직 우리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지 당신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해태심에 속지 말고 죽으나 사나 부지런히 정진할 밖에요.


9. 주관도 객관도 공(空)

“내가 옳다는 흑백논리 인류문명에 끼친 해악 너무도 커”

옳다는 생각없는 것이 진참회

내 입장에서는 내가 옳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반대일 뿐

옳고 그름 논리로 인간세상은

너무도 많은 전쟁 되풀이 했고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중

전쟁으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나도 많아 안타까울 뿐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내 입장에선 남쪽에 있지만

그 사람 입장에선 북쪽일 뿐

남쪽도 옳고 북쪽도 옳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다울 뿐

▲ 조주 스님의 사리탑 앞에서 기도 정진하고 있는 혜국 스님.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하야,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니”

“주관(主觀)은 객관(客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라고 이어집니다. 글쎄요? 어디까지가 주관이고 어디까지가 객관입니까? 주관이란 말도 객관이란 말도 결국은 인간들의 생각에서 나온 얘기이거든요. 주관이라고 하는 내가 나 혼자 주관이 되는 게 아니고 객관인 공기와 허공, 대지와 태양열에너지 모든 우주 자연이 하나가 되어서 ‘나’라는 주관이 성립되지 ‘나’라는 주관이 따로 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주관 안에 객관이 있고 객관 안에 주관이 있습니다. 주관, 객관 모두가 공(空) 아닙니까? 주관도, 객관도 그렇지만 어두움과 밝음, 크다 작다, 너다 나다 모든 시비분별이 다 그렇습니다. 어두움이란 밝음이 있다가 밝음이 사라진 상태이지 어두움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밝음 또한 어두움이 왔다가 어두움이 사라진 상태일 뿐이지 밝음이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즉 어두움과 밝음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질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방이 캄캄하여 어두움에 쌓여 있을 때 전등불 하나만 켜면 어두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어두움이 옆방으로 피신 간 것도 아니고 어디로 숨은 것도 아니거든요. 어두움 자체가 없는 겁니다. 어두움이라고 말하는 그 어두움은 밝음이 없는 상태일 뿐입니다.

어두움이 우리가 말하는 죄업(罪業)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들 죄업이란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마음광명을 밝히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두움이란 밝음이 없는 상태일 뿐 어두움이 따로 없듯이 우리 죄(罪)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죄라는 세계가 아예 없다는 말로 듣는데 그것 또한 잘못 듣는 얘기가 됩니다. 죄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방황하면 죄업이요, 마음이 공(空)한 줄을 깨달아서 바로 보면 죄업 또한 본질이 공한 겁니다. 파도의 본질이 바닷물이듯 그와 꼭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서 지은 죄는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생각에서 살아간다면 나 자신이 당당해지겠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좋아서 일으킨 생각인 만큼 그 그림자 즉 어두움에 매(昧)하지 않아야 된다는 얘기죠. 그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태양을 향해서 밝은 광명으로 걸어가든지 태양을 등지고 어둠을 향해서 걸어가든지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욕지양단(欲知兩段)인댄 원시일공(元是一空)이라,“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라는 의미로 원시일공(元是一空)을 바로보라는 가르침입니다. 주관도 공 위에 있고 객관도 공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 얘기를 좀 더 해보면 사람은 대지(大地)에 의지해 살고 있고 대지는 허공(虛空)을 의지해서 돌아가고 허공은 우주의 대진리 즉, 도(道)에 의해서 존재하고 그 도는 생멸(生滅)이 끊어진 무분별(無分別)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대지에 의지해 산다는 말은 대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지구는 대지를 의지해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되어 천야만야한 허공을 돌고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제 멋대로 돌고 있다면 우리는 벌써 다른 별자리와 충돌하여 박살이 났을 겁니다. 그 많고 많은 별들이 각자의 길을 돌고 있는데 그 사실을 도(道)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괴테의 시를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구르는 듯해도 사실은 하나로 얽혀있다네 / 우주의 힘이 황금 종을 만들어 이들을 떠안고 있다네 / 하늘향기 은은히 퍼져 나가니 그 품에 지구가 휘감기누나 / 모든 것이 향기를 쫓아 조화로이 시공을 채우누나 / 휘몰아치는 생명의 회오리 속에서 나도 파도도 다 함께 춤춘다 / 삶과 죽음이 있건만 영원의 바다는 쉼 없이 출렁이누나 / 변화하고 진동하는 저 힘이 바로 내생명의 원천 / 오늘도 먼동이 트는 아침에 거룩한 생명의 옷을 짜노라”

저는 젊어서 이 시(詩)를 읽으면서 “인간은 지구를, 지구는 허공을, 허공은 도에 의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돌아가는 그러한 세계를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도 표현할 수가 있구나”하면서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은 “일공동양(一空同兩)하야 제함만상(劑含萬象)이라”, “하나의 공(空)은 양단(兩段)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모두 다 포함하며…”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입니다. 공(空)했다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알거나 아니면 텅 빈 허무한 걸로 아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알았다면 그건 단멸(段滅) 공(空)에 빠진 것이지요. 주관도 객관도 양단 모두 공이라고 하신 말씀은 양단을 부정하는 말씀에서 하신 말씀이고 긍정하는 쪽에서 얘기하자면 공(空)이 바로 양단(兩段)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우리는 흑백논리에 익숙해져서 그렇습니다. 이거냐 저거냐, 옳다 그르다 그러한 흑백논리에 익숙해져서 그러한 말이 바로 들리지 않는 겁니다. 이거 아니면 저것이라야 한다는 흑백논리가 인류문명에 끼친 해악을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면서 저것이 될 수 있고 저것이면서 이것이 되는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세계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도 그런 문제의식조차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저 사람이 내 입장에서는 남쪽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북쪽에 앉아있는 게 맞거든요. 남쪽도 옳지만 북쪽도 꼭 같이 옳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욕지양단(欲知兩段)인댄 원시일공(元是一空)”이라고 하시고, 바로 이어서 “일공동양(一空同兩)하야 제함만상(齊含萬象)”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참회(懺悔)란 내가 옳다는 고집, 내가 옳다는 생각을 일체 다 놓아버린 상태입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자리가 진참회(眞懺悔) 인겁니다.

그렇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옳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옳고 그름의 논리로 인간 세상은 너무 많은 전쟁이 있어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싸움으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도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둘을 버리고 하나가 된다면 그 하나는 그대로 둘이라는 겁니다. 참 묘하죠. 하나의 공(空)의 양단(兩段) 즉, 둘과 하나이기에 그대로 평화인겁니다. 그러한 까닭에 제함만상이라, 일체 세상만사 삼라만상이 하나의 공 가운데 건립되었다는 가르침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미 까마득한 그 옛날 이런 말씀이 현대의 장이론을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심명에서 말하는 ‘일공동양하야’하는 공은 일체 모든 세상을 포함한 공이면서 불공이라 세상 삼라만상 공 아닌 게 없다는 소리입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그 어느 것 하나 공성연기(空性緣起) 아닌 게 없음이라 그대로 중도(中道)인 겁니다. 그러면서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라는 차별이 일어나서 일체 우주를 다 포함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철 큰스님은 옛 조사의 예를 들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신 겁니다. 여기서 산은 산이요 하면 산을 생각한다든지 물은 물이라 하면 물을 생각한다면 그건 벌써 어긋난 일이요, 중도연기(中道緣起)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신심명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불견정추(不見精麤)어니 영유편당(寧有偏黨)가”,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고요에는 미운마음도, 원망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일체 시비분별(是非分別)이 끊어진 일공(一空)입니다. 그 하나의 공(空)에 무슨 개념이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의 공이 양단과 하나인데 세밀하고 거친 것이 다르지 않거든요. 따라서 공이 곧 공이 아니요 공 아님이 곧 공이라, 그대로가 원융무애로서 자유자재 대해탈인데 세밀함이니 거칠음이니 어디에 기울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편당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글을 보면서 어디 먼 세상 얘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 우리 자신이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바로 내 마음의 고향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우린 누구나 스스로 부처라는 그 사실입니다. 부처란 모자란 것을 어디 가서 꾸어오는 일도 아니요,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일도 아니요, 우리들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진 무한능력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평생 그러한 무한능력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큰 무한능력이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지 몰라도 우리는 너무나 조그만 욕망에 붙들려서 그 욕망 심부름하느라고 한 평생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무서움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견정추(不見精麤)어니 영유편당(寧有偏黨)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10. 여우같은 의심

“일체중생 완벽한 부처인데도 항상 의심하는 망상에 빠져”

▲ 조주 스님의 향훈이 남아있는 백림선사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중국인들.

“대도(大道)는 체관(體寬)하야 무이무난(無易無難)이어늘, 큰 도(道)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이 말씀은 대도(大道) 즉 큰 도(道)는 본체가 너무나 넓고 넓어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넓고 넓다고 하니 넓은 공간이 있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없다는 말이요, 공(空)이라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온 얘기입니다만 대도는 우리들 각자 내 자신의 참모습입니다.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 바로 내 모습이니까요. 그러나 육신(肉身)의 눈인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아닙니다. 모양 있는 육안(肉眼)으로는 모양 있는 세계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세계는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이니만큼 마음 따라 변하니까요.

부처를 새로이 찾고자 한다면

계속 구하는 마음 따르게 되니

욕망이 되어 더욱 더디게 돼

번뇌·망상 버리면 바로 ‘大道’

세월호 참사 참으로 안타까워

GNP 2만달러 넘는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참담할 뿐

배려와 양보하는 마음과 문화

돈 버느라 빼앗긴 것은 아닌지

경제력만 크고 정신문화 후퇴

우리 모두 부처라 확신했다면

이와같은 참사 결코 없었을것

사실 우리가 쓰는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정말 얼마 안 됩니다. 총알을 맞고 사람이 죽는데 총알이 눈에 보인다면 총알 맞아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명히 총알이 날아오고 있는데도 총알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총알을 맞습니다. 또 온 들판에 피는 들꽃이 분명히 피어나고 있지만 피어나는 그 속도가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총알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볼 수가 없고 들꽃이 피는 모습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볼 수가 없듯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얼마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주법계의 본체에 비하면 우리 육안으로, 눈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축구장만한 운동장 안에서 점하나 보는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점하나 정도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다 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 집착하고 내가 보는 게 옳다고 고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에서는 육안만이 아니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등 다섯 가지 눈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불안(佛眼)으로 볼 것 같으면 쉽다, 어렵다는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욕망의 눈이 육안(肉眼)이라면 그 욕망이 없어진 상태를 천안(天眼)이라고 합니다. 천안(天眼)에서만 보더라도 모든 생명은, 하나의 하늘이라는 한 지붕 아래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의 대지(大地)라는 한 방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대지(大地)나 하늘입장에서 보면 하늘을 나는 새도, 뒷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도, 벌이나 나비도 인간과 꼭 같은 생명이요, 한 건물에 사는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대도(大道)는 하늘이 감싸지 못하고 대지(大地)가 싣지 못합니다. 하물며 거기에 잘났다 못났다가 어디 있으며 네 종교, 내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쉽다 어렵다는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과 악마가 손잡고 춤을 춘다고 하는 겁니다. 이 다섯 가지 눈도 개별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이 열린 만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얼마만큼 열려 있느냐, 바로 그 차이입니다. 깨달음의 세계가 곧 불안(佛眼)인데 불안(佛眼)의 세계가 곧 대도(大道)인 겁니다. 그러한 대도(大道)에서 보면 그 본체에는 벽이나 간격이 없기 때문에 쉽다, 어렵다는 이분법(二分法)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도(大道)는 본체가 넓고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 다음이 “소견호의(小見狐疑)하여 전급전지(轉急轉遲)로다,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 지도다”로, 좁은 견해란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자기 자신이 속고 있다는 얘기죠. 생각의 세계라는 것이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마치 내 생각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나를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생각자체가 고정불변하게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변해가는 그림자요, 환영입니다. 그 그림자를 실상으로 잘못 알다보니 좁은 소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소견에서는 나와 남이라는 벽이 생기고 벽을 사이에 두고 그 안에 들어가면 내 것이라고 좋아하고 밖에 있는 것은 모두가 남이 되다보니 이번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째서 GNP(국민총생산) 2만 달러가 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건지 참담할 뿐입니다. GNP 2만 달러를 이루느라고 우리가 마음 닦는 시간도 다 뺏기고 남을 배려하는 시간도 다 뺏기고 양보하는 마음과 정신문화를 위해서 써야할 시간도 오로지 2만 달러를 버는데 다 빼앗긴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국민 일인당 2만 달러를 벌면서 얻은 것도 참 많겠지만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해 볼 때입니다. 지금이라도 경제력 2만 달러이면 정신문화지수도 2만 달러가 되도록 노력할 때 경제력 2만 달러가 우리 재산이 될 수 있지 경제력만 2만 달러이고 정신문화는 몇 천 달러밖에 안된다면 그 경제력이 우리 삶에 행복을 안겨주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모든 중생이 다 부처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 사실이 바로 여우같은 의심입니다. 모든 중생의 본질이 완벽한 부처임을 믿지 못하고 무언가 밖에서 구하는 마음이 있을수록 서두르게 되고 그럴수록 더 더디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부처임을 믿고 하는 수행은 따로 부처를 구하지 않고 번뇌, 망상만 철저히 내려놓아 버리면 바로 대도(大道)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부처를 새로이 찾고자 한다면 계속 구하는 마음을 따르게 되니 구하는 마음이 욕망이 되어 더디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께서는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곧 태어남이요, 한 생각 사그라지는 것이 죽음이라,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진대 생각 일어나고 없어짐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나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나 근본이 꼭 같다는 가르침을 번번이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으로 돌아가서 보면 즐겁고 괴로움이 둘이 아니지만 감정이 일어난 다음 그 그림자를 따르다 보면 즐거운 생각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괴로운 생각에는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겁다, 괴롭다 나누어지기 이전 근본 자리를 바로 보라는 얘기입니다. 생각을 따르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을 바로 깨달아야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보입니다. 여우와 같은 그런 의심의 세계, 자기 스스로 자기를 믿지 못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집지실도(執之失度)라 필입사로(必入邪路)요, 집착하면 법도(法道)를 잃게 되고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감이라”,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나만 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집착을 만듭니다. 설사 내 생각에 백번 내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이 둘이 아닌 법(法)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이 될 뿐이요, 집착이 될 뿐입니다. 집착이 얼마나 우리자신을 흐리게 만드는지 예를 들어 봅시다.

충주 석종사에는 스님과 재가수행자 사중식구들을 합쳐서 130~150여명의 대중들이 살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이 산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석종사 도량만이 아니라 어느 도량을 가든지 그 도량에는 개미나 곤충, 다람쥐, 박새와 온갖 새들 천만생명 내지 몇억 생명도 더되는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산과 땅에다가 경계를 그어놓고 여기서 저기까지는 우리 땅이요, 저산은 누구네 땅이니 이렇게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우리보다 몇 백 년, 몇 천 년 전부터 자기네 터전이라고 집을 짓고 살아오는 개미와 지렁이 온갖 생명이 조상 대대로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 입장에서 볼 때는 사람들이라는 게 1년에 몇 번 왔다가는 정도 즉 월세 사는 ‘놈들’이 주인이라고 행세하는 걸 보면 약간 이상한 놈이라고 할 겁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연이나 모든 생명들을 같이 생각하는 게 아니고 인간들끼리만 경쟁을 하고 투쟁을 하고 네꺼니 내꺼니 그렇게 집착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비디오를 한편 본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더군요. 외계에 있는 우주인이 이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부단히 노력하다가 결론 내리기를 이 지구를 살리는 길은 오직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을 멸망시켜야만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인간보다 수천만배 수억배 되는 그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요. 이건 정말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입니다.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 인냥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 그 길을 찾지 못하면 법도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법도를 잃게 되면 지구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지구를 잃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심지어 이 지구를 살리려면 사람이 없어져야 된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가히 충격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니 집착의 길은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 우리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하면 삿된 모든 것을 없애두고 바름을 나타내야 되는 걸로 아는데 파사가 현정이요, 현정이면 파사입니다. 삿된 것이 삿된 마음만 놔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바름이죠. 삿된 것과 바른 것 둘이 있어서 하나를 없애두고 하나를 새로 세우는 그런 길이 아니거든요. 고로 집착이면 바로 삿됨이요, 집착을 놔버리면 바로 바른 길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감정을 일으켜서 집착을 하게 되니 법도를 잃게 될밖에 없는 겁니다. 생각에 얽매이면 집착이요, 생각에서 자유로우면 법도입니다. 그래서 법도(法道)가 없는 자리, 그 자리가 삿된 자리지 바른길 따로 있고 삿된 길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청원 선사께서 이르시기를 “타고 있는 것이 나귀 인줄 아나 나귀에서 내릴 줄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삿됨이니 바름이니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아서 임운등등(任運騰騰)하기를 발원합니다.


11. 생각의 감옥

“눈앞 현실도 생각이 만든 환영…집착하면 벗어나지 못해”

▲ 수처작주의 도량 임제사 대웅전.

“방지자연(放之自然)이니 체무거주(體無去住)라,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자연(自然)이라고 이름 지은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만이 아니고 일체 이름 있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생각으로 포장한 명사(名詞)일뿐입니다. 나무 한그루만 보더라도 참나무니, 소나무니 자신들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나무들이 인간들에게 작명을 부탁한 일도 없이 사람들 임의대로 그렇게 이름 지어 놓은 것입니다. 나무 입장에서는 소나무나 참나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나무만이 아닙니다. 부처니, 중생(衆生)이니, 공(空)이니, 중도(中道)니 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겁니다. 조사 스님들의 자비가 이와 같고 이와 같습니다. 오직 법을 소중히 아는 스승만이 해줄 수 있는 가르침인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고마움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생각의 세계로 도(道)를 끌어내리는 바람에 표현이 과격하다느니, 거칠다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리(眞理)는 일체 이름이 끊긴 자리니까요. 이름 즉, 명상(名相)을 끊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명상을 끊어주기 위해 큰 자비에서 나온 조사 스님 의 말씀이거든요. 수행하는 이들이 자기생각에 속지 말고 도(道)를 향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도에 도달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걷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서 도를 자기 생각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하다고 생각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 스스로 이름 붙여 놓고 그 이름에 얽매여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생각의 감옥 아닌 게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업(業)을 만들었는데 업이 오히려 주인이 되어 나를 끌고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내 생각에 내가 속는 것이지요. 요즘 학생들이 가상의 세계인 게임에 중독되어간다고 모두들 걱정하고 있는데 게임만 가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현실도 생각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는 걸 얼마나 믿을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볼 때 생각의 세계를 환영이라고, 가상의 세계라고 깨우쳐 주신 부처님이나 스승들을 생각하노라면 옛말이 생각납니다.

중생이란 내가 부처인데도

진리 알지 못하면서 이 몸

‘나’라고 생각하는 잘못

내 감정 마음대로 안돼서

억울한데도 당연하게 여겨

그래서 ‘중생’이라고 불러

중생에게 생각의 세계를

환영이라 일러준 스승들

정말 외롭고 안타까웠을 것

“십년 앞을 내다보면 십년동안 외로울 수밖에 없고, 백년 앞을 내다보면 백년동안 홀로 일수밖에 없다.”

스승들은 참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듭 사족을 붙이자면 자연(自然)이란 자연이라고 하는 내가 없는 자리, 이름이 붙기 이전 소식입니다. 그러니 자연이란 생명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만큼은 결코 모자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니까요. 먹고 사는데 모자란 이유는 인간들의 욕망 때문에 모자라게 되는 겁니다. 이 이치를 알면 참 좋을텐데요, 일체를 놓아버리고 일체 명상(名相)이 끊어지니 자연 그대로 대도(大道)인 겁니다. 여여(如如)한 대도를 허공성(虛空性)으로 비교하자면 허공성은 오거나 가거나 머무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도를 가거나 미국을 가거나 그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이지 허공이 간일이 없듯이 머무름이 있어야 가는 게 있고 가는 게 있어야 머무름이 있지 가고 오는 게 없으면 머무름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기차를 타고 갈 때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유리창 너머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것 같거든요.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인 겁니다. 그러니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고 하신 삼조 승찬 스님의 신심명은 참으로 우주의 본체를 보여주신 소식이요, 사람들이 언젠가는 깨달아야 할 자연의 본체입니다. 결코 모자람이 없는 자연의 본체를 깨달을 때 서로 상생의 길이 되고 평화의 길이라는 것을 알 때가 와야 할 텐데요.

다음은 “임성합도(任性合道)하야 소요절뇌(逍遙絶惱)”하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조사 스님 말씀에 “천야만야(千耶萬耶)한 허공 중에 매달려서 두 손을 놓아버리지 않고 어찌 임성합도(任性合道)를 얘기하려는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거든요. 성품(性品)이 하는대로 노닐어도 전혀 도(道)에서 벗어남이 없을 때 바로 성품이 도(道)요, 도(道)가 곧 성품이니 합(合)하고 말고 할 게 없습니다.

“일체 집착심이 멸하고 생각이 끊어지면 자성(自性)이 독로(獨露)라.”

그대로 도(道)와 하나입니다. 번뇌 망상이 모두 사라지니 소요(逍遙) 그대로요, 도(道) 그대로인겁니다. 하기야 그대로 번뇌가 끊어진 곳이라고 해도 이미 그르친 겁니다. 이미 입을 열면 그르쳤다는 말도 추상적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소요(逍遙)라고 하면 벌써 소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짚을 이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이 글을 쓰는 것이고 듣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허공이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합(合)한다는 말이 맞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허공은 잠잘 때도 늘 같이 있고 걸을 때도 같이 있으며 행주좌와(行住坐臥), 그 어느 때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태 아닙니까. 도(道) 역시 늘 같이 있는 허공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허공과 하나 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 생각, 내 감정에 끄달려서 울고웃고 감정에 끄달려 다니거든요. 그러니 허공은 완전 평등에서 온 삼라만상을 떠안고 있건만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불안 속에 힘들어 하고 불평등을 만들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본마음으로 살아가면 완전한 평화요, 일체가 구족되어 모자람이 없는 삶입니다. 일어나는 감정대로 살아가면 생멸무상법(生滅無常法)이라 항상 모자란 삶이니 일어나는 감정대로 사느냐, 주인공 자연본체로 사느냐는 오로지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할 몫입니다.

“계념(繫念)하면 괴진(乖眞)하야 혼침(昏沈)이 불호(不好)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사실 혼침 아닌 것은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깨닫지 못한 상태 성성적적이 아니면 모두가 혼침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수행을 잘 관찰해보면 혼침 아니면 산란(散亂)이거든요. 그러나 참 진리에는 어긋남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각에 얽매인 그자체가 어긋난 것 뿐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간사한지 지난 겨울 한참 추울 때는 여름을 그리워하다가 벌써 금년 초여름 날씨가 좀 덥다 싶으니 이제 겨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게 그때그때 자기감정과 자기욕망에 따라 움직이는데 우리는 그 간사한 생각을 따라가느라 ‘참자기’를 늘 배신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인데 내감정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게 정말 억울한 일인데도 우리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이름을 하는 겁니다.

중생이란 내가 부처임을 모르고 이 몸을 ‘나’라고 잘못 생각하는 상태를 말함입니다. 이 몸이란 어머니 태안에서 10개월 동안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원소를 빌려다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빌려온 기간만큼 사용하다가 빌려온 기간이 끝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이 사대(四大)가 보고 듣고 걸어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허공이 보고 듣고 하는 게 아닐진대 과연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연기공성(緣起空性) 제법무아(諸法無我)인 ‘참나’를 바로 보면 부처요, 미(迷)하면 중생입니다. 그래서 허응 보우 선사는 선 과거에서 “본래 청정한데 운하홀생산하대지(云何忽生山河大地)냐?”라는 문제를 제시했던 겁니다.

“본래 성성적적한 주인공, 본래 부처인데 왜 죄가 생겼느냐? 우주는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

그러한 과거 시험문제를 전국에 방을 붙인 겁니다. 시험문제를 몰래 내는 게 아니라 온 전국에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와서 대답을 했으나 불합격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산 대사가 늦게 도착합니다. 꼭 같은 문제를 거량하되 “본래 청정한데 운하홀생산하대지냐?”하니 바로 답하기를“본래 청정고니다”고 합니다. 참으로 멋있는 답이거든요. 그래서 선과거에 급제를 하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안 붙이겠습니다.

혼침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해인사 선방에서 성철 큰스님 모시고 참선을 할 때 새벽 3시가 되면 성철 큰스님이 가끔 경책을 나옵니다. 경책이라고 하는 것은 참선할 때 앉아서 조는 사람을 때려서 깨우는 것을 경책이라고 합니다. 그 경책하는 모습을 보면 선지식 따라, 스승 따라 다 다릅니다. 구산 방장 스님 같은 분은 주장자로 때로는 큼직한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도 하고 성철 스님 같은 어른은 물푸레나무 회초리를 3개 정도 들고 와서 그 3개를 한손에 들고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갈깁니다. 한번 맞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지만 감정이 상할대로 상하게 됩니다. 그러니 화두 드는데는 집중하지 못하고 성철 스님이 들어오는가 안 들어오는가 그 발자국소리 듣느라고 거기에 온통 신경을 쓰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록 졸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산란이라 혼침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화두일념이 안되고 성철 큰스님께 두들겨 맞지 않을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혼침과 산란은 같은 말이라는 얘기입니다. 번뇌, 망상이 위로 오르면 산란이라고 하고 밑으로 가라앉으면 혼침이라고 하니 성성적적 본래 내 자신을 놓친 세계를 모두 다 혼침이라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본래 주인공과 하나가 돼서 사는 게 아니라 생각에 얽매여서 맞지 않으려고, 아니면 잘한다는 말 들으려고 생각에 얽매이니 이미 본체에서 빗나간 겁니다. 참됨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요, 혼침에 속고 있음이라, 그러니 혼침이 좋지 않을 수밖에요. 본래의 참됨에는 어긋나고 어긋나지 않음이 없지만 생각에 얽매였기 때문에 어긋난 것이거든요. 한 생각 일어나면 바로 혼침인 것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12. 친한 것과 성긴 것

“오직 자기 자신만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 임제사 초입에 서있는 청탑. 탑 속에는 임제 스님의 사리와 가사, 발우가 모셔져 있다.

“불호노신(不好勞神)커든 하용소친(何用疎親)가”, 정신을 괴롭힘이 좋지 않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것인가, 친하고 멀리함이 있어서 정신을 괴롭힌다는 이 말은 평등성인 우리 본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동안 자기 스스로 정신을 괴롭힙니다. 거의 혹사시키는 정도입니다. 몸은 피곤하면 쉬어주기도 하고 아프면 치료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정신은 몸이 쉬는 휴식시간에도 계속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런데 정신은 다른 사람이 괴롭힐 수가 없는 겁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괴롭힐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정신을 괴롭히고 괴롭히지 않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고 순전히 내 탓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가슴에 부여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다시 생각하고 반복하면서 정신을 괴롭히는데 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렸을 적 한반도를 지나간 ‘사라호’라는 태풍이나 몇 년 전 ‘매미’라는 큰 태풍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입힌 피해는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태풍을 상대로, 태풍을 부여잡고 소송을 하거나 다투느라고 정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은 지나간 태풍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마음에 붙들고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생각에서 내려놓았다는 말이지요.

생각에서 놓아 버리면 정신을 괴롭힐 일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어서 정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얘기는 내 자신이 과거를 붙들고 있으면서 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상처나 분노는 모두가 내 자신이 붙들고 놓지 못하는 내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사를 붙들고 환영과 싸우고 있는 것이지요. 한번 지나가 버린 강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이미 지나간 일은, 사실은 현재에 없는 일인데 우리가 환영에 속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나 대지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친하고 성긴 게 없습니다. 텅빈 상태로 좋다, 나쁘다는 분별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허공은 믿음 그 자체라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무심(無心) 상태이니 이렇게 믿는 게 참 신뢰요, 참 믿음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된다면 친하고 성김만 없는 게 아니라 정신을 괴롭힐 생각 자체가 없어진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보배를 보여주는 길이요, 언제 깨달아도 깨달아야 할 내 본래 고향소식입니다.

그 다음으로 “욕취일승(慾趣一乘)이어든 물오육진(勿惡六塵)하라”, 일승(一乘)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 정신을 괴롭히는 원인은 육진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일승과 육진은 경계가 없습니다.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육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 태어날 때 눈과 귀, 코와 입, 몸과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 육근(六根)을 구비하고 나옵니다. 이 가운데 몸에는 팔, 다리 육체적인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겠지요. 이 여섯 가지를 육근이라고 하고 육근에서 작용이 일어나면 눈(眼)은 색(色) 즉 경계를 보고, 귀(耳)는 소리를 듣고, 코(鼻)는 향기를 맡고, 입(舌)은 맛을 보며, 몸(身)은 촉감을 느끼고, 의식(意)은 온갖 생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주관인 육근이 만나는 객관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여섯가지 상대를 육진(六塵)이라고 합니다. 사족을 붙여 설명하자면 육근이란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과 귀, 코와 입, 몸까지 다섯 가지와 내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의식(意識)으로서, 이 여섯 가지 주관을 육근(六根)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즉 다섯 가지 오근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 경계로 받아들이고 내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의식은 온갖 삼라만상이라는 현상계 즉 일체 세상법으로 받아들여서 판단하고 정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판단하는 의식이 사실 있는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가 축적해 놓은 경험 즉 업(業)에 의해서 판단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판단이 자기 중심적으로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과 귀, 코와 입, 몸 다섯가지 오근(五根)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내부의 식(識)인 의근(意根)은 과거의 습관화된 잠재의식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가 익힌 습관 즉 업(業)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근(六根)이란 업(業)의 그림자요, 육진(六塵)이란 육근(六根)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주관인 눈(眼)이 객관인 색(色)을 만나면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일으킵니다. 또는 ‘저산에 핀 들국화가 흰색이다, 보라색이다’라고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귀(耳)로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할 때 그냥 듣기만 한다면 귀는 이근(耳根)이요, 소리는 성진(聲塵)인데 거기에서 이 음악소리는 클래식이다, 이 소리는 판소리다, 아니면 흥타령이다 하고 분별하는 식(識)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분별이 내 잠재의식에 익힌 습관에 따라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식을 만들고 나아가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따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이러한 육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을 합해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세계가 이 십팔계 안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몸을 자동차라고 한다면 자동차가 달리는 것도, ‘빵빵’하며 소리를 내는 것도, 자동차를 정차해서 세우는 것도 모두 운전수가 하는 것이다, 운전수가 모든 걸 움직이니 운전수는 일승(一乘)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차는 육근(六根) 육진(六塵)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이미 알음알이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운전수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어야 속도를 내고 달리는 자동차가 되는데 이때는 자동차와 운전수가 둘이 아닙니다. 운전수와 자동차가 하나로 되어 속력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말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설근(舌根)인데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근(耳根)이라고 하니, 이름만 다를 뿐 육근(六根)의 체(體)는 같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심명에서는 이 모든 말과 생각에서 이름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를 보여주시려고 이렇게 고구정녕(苦口丁寧)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오직 일승(一乘)의 세계를 깨닫게 하려고요.

“육진불오(六塵不惡)하면 환동정각(還同正覺)이라”,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음이라 하는 이 말은 육진이 정각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귀(耳)라는 근(根)으로 누가 엄청나게 모함하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아니면 눈(眼)이라는 근(根)으로 남이 토해놓은 오물이 내 옷을 더럽혔다고 해도 내 본질(本質), 내 근본(根本) 마음에는 모함당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력하게 보고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바로 모든 육진은 육진이 아니라 깨달음의 작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육진은 본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러한 이치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합니다.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천번만번 일어났다 꺼졌다 하더라도 바닷물 자체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일이 본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물거품 자체가 바닷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생(生)하고 멸(滅)하는 사실 자체가 그림자임을 깨닫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볼 때 내안에서 육근, 육진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인 좋다, 싫다, 밉다, 곱다, 너다, 나다 하는 모든 분별은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육진불오(六塵不惡)를 우리 삶에서 살펴보면 내 단점, 내 못된 성질이라는 물거품을 어떻게 다스려나가야 하는가 길이 보이게 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단점이나 모자라다고 느끼는 그 생각을 자신의 본질이라는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보고 연기공성(緣起空性)을 깨달으면 그 길이 곧 길 없는 길입니다. 길 없는 길이란 말길이 끊어진 길입니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길, 대자유의 길입니다. 그러나 대자유니, 생각의 한계니 말의 흔적이 있으면 이미 길 없는 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스승들은 말길을 끊어주고 마음길이 멸(滅)하게 하기 위하여 길 없는 길을 할(喝)과 방(棒)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본 마음에서 보면 나의 모든 단점과 못된 성질까지도 모두 내 마음 본질에서 일어나는 파장일 뿐이요, 습관 일뿐입니다. 자기단점이라는 물거품은 싫어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바닷물을 휘저으면 물거품이 더 일어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자기단점을 사랑하도록 해보십시오.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이 성질이 나를 있도록 만들어준 소중한 나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나를 유지시켜 왔기에, 있는 그대로인 오늘의 나를 고맙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뒤 내 못된 성질이 일어나는 근본을 자세히 관(觀)해 보십시오. 바로 내 못된 성질이 내 본마음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이치를 바로 보면 제법무아(諸法無我) 연기공성(緣起空性)인 참 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본시 산에 사는 사람이라 산중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5월에 솔바람 팔고 싶으나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여기서 산이 과연 어떤 산인가, 산중이야기가 어떠한 이야기인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고 5월에 솔바람 팔고 싶으나 모든 중생들이 믿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는 스승들의 대자대비를 느낄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 느낌이 발심(發心)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3. 지자무위(智者無爲)

“직관할 것 같으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지자무위(智者無爲)어늘 우인자박(愚人自縛)이로다,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가 없는 대자유의 삶을 사는데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를 생사윤회에 구속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무위(無爲)의 삶을 사는 사람이면 지혜로운 이, 바로 부처이고 스스로 구속당하며 살면 어리석은 이, 즉 중생이라는 말이니까요. 바로 보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없다는 겁니다. 즉 지자(智者)와 우인(愚人)의 차이는 한 생각 차이라는 것이지요. 당나라와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650여년의 세월을 대표하는 팔대문장가 중 한사람이라는 천재 소동파의 이야기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 없는

대자유의 삶을 살아가고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를

윤회에 구속하면서 살아

당송시대 문장가 소동파

옥천사 승호 큰스님께

“나는 칭(秤)가요”하며 소개

스님들 실력 얼마나 되나

저울질하러 다닌다는 의미

이에 승호 큰스님 하신 말씀이

“억”하고 할을 하면서

“이 할은 몇근인가” 물으니

소동파 큰가르침에 발심

소동파는 워낙 박학다식하여 20세 약관의 나이에 고급관료시험에 급제했다고 합니다. 네 지방의 감독으로 황제의 특사가 되었으니 그 도도함이 대단했겠지요. 가는 곳마다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토론하기를 좋아했는데 어쩌면 자기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하기 위함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소동파 자신이 화엄경(華嚴經) 80권을 다 외우다시피 기억하는 천재라서 “화엄경 몇품 몇째 줄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요?”하면서 주로 외우고 기억하는 문제에 대해 묻기를 즐겼답니다. 어느 날 옥천사 승호 스님을 찾아가 객승의 안내도 받지 않고 바로 승호 스님 앞에 나타나니 승호 스님이 “누구신지요?”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동파가 대답하기를 “나 칭(秤)가요” 저울칭(秤) 자, 스님들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저울질하러 다닌다는 뜻이지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호 스님이 “억”하고 할(喝)을 하면서 “이 할(喝)이 몇 근이나 되는가?”하니 여기에서 콱 막히게 됩니다.

소동파 스스로 저울이라고 했으니 그랬겠지요. 소동파는 여기에서 참으로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실감하고 발심(發心)했던 겁니다. 그 후 흥룡사 상총선사를 찾아가 “스님, 저는 제방 여러 고승들을 찾아뵙고 법을 청해들었는데도 아직도 제가 누구인지 참 나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며 법을 청합니다. 상총선사가 “왜 유정설법(有情設法)만 들으려고 하십니까? 무정설법(無情設法)을 들어야지요”라고 설하십니다.

여기에서 유정설법과 무정설법의 차이는 쉽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득이 말로 설명하자면 유정설법은 남의 소리요 즉, 소리가 있는 소리요 무정설법은 자기소리라 소리가 없는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즉 무언(無言)의 설법입니다. 소동파는 일찍이 소리가 있는 법문(法門)만 들어봤습니다. 소리 없는 법문을 들어야 한다는 그 말 자체에 콱 막혔던 것입니다. 그길로 소리 없는 설법, 무정설법이 과연 어떤 세계일까, ‘이 뭐꼬?’하는 의문이 극점(極點)에 이를 때까지 그냥 말(馬)이 가는대로 나를 잊은채 오직 그 한 생각에 몰두했던 겁니다. 어떻게 갔는지도 잊은 채 폭포 앞에 도달 했던가 봅니다.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확연히 깨닫고 게송을 읊기를 “계곡 물소리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요, 산색(山色) 또한 그대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이 밤에 본 팔만사천 이 법문을 뒷날 후인에게 어찌 전할 수 있을까”하며 눈이 열렸던 겁니다. 스스로 자박(自縛)에 얽힌 중생이 한 생각 차이로 무위(無爲)의 지혜인이 된 겁니다. 속박을 벗고 나니 무위(無爲)인 겁니다. 지자(智者)와 우자(愚者)는 동일한 사람, 바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을 깨달았느냐, 미(迷)했느냐의 차이일 뿐 지자와 우자는 같은 한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음은 “법무이법(法無異法)이어늘 망자애착(妄自愛着)하야”라는 내용입니다. 법(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위와 자박이 둘이 아니니 법에 다른 법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여기에 대해 조사 스님은 일갈(一喝)하시기를 “이미 다른 법이 없거늘 애착이 어디 있겠느냐? 어찌 스스로 망령되이 애착이라고 하느냐. 조사(祖師)의 깊은 뜻을 간파하지 못하면 모두 알음알이일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들이 계셔서 이렇게 바로잡아 주셨다는 게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이라는 걸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법(法)에는 일체 다른 법이 없다면 망령됨이니, 애착이니 하는 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입을 열면 그르친다고 하신 겁니다. 이 말이 참으로 중생을 살리는 말씀이지요. 허공(虛空)에 다시 무엇이든지 있다면 이미 허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허공’하면 벌써 앞산과 내가 서있는 이곳까지 그사이 빈 공간을 허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허공은 나는 물론 앞산이나 뒷산이나 모양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공(空)이라는 겁니다. 있는 모양이 없어져서 공(空)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모양 있는 그대로 공(空)이라는 겁니다. 집을 비유로 들자면 기둥과 주춧돌, 서까래와 대들보와 기와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모여졌을 때 집이라고 합니다. 기둥 따로 기와 따로 서까래, 대들보 각각 따로 따로 있으면 집이라는 세계는 없습니다. 다만 인연이 모여 있는 동안 인연에 의해서 집이라고 하는 이름이 생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연기공성(緣起空性)이지요. ‘모양이 분명하게 눈앞에 있는데 왜 공(空)이냐’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초승달이란 그림자에 가려진 둥근달이기에 없는 초승달을 있다고 보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리학에서도 입자가 곧 파장이요, 파장이 곧 입자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는데요, 불교에서는 그러한 사실까지도 견해가 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공(空)이라고 하면 이미 공(空)이 아니라는 겁니다. 관찰하는 주관(主觀)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결코 공(空)을 깨닫는 길이 아닙니다. 주관인 나와 객관(客觀)인 사물을 따로 보는 안목으로 공(空)을 증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공(空)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환영(幻影)인 망상(妄想)으로 인해 스스로 애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꿈속에서 본 금덩어리를 사실로 생각하고 그 금덩어리를 애착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얘기가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입니다.

예부터 달은 둥그런 보름달 하나뿐인데 초승달이니 반달이니 따로 있는 것이라고 속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달이란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서 초승달도 되고 반달도 되고 그런 것이지 본래 둥그런 달하나 뿐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自然)이 나를 봐야지 내가 자연을 보는 동안은 망자애착(妄自愛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나라고 하는 생각 즉 일체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무심(無心)이 되면 우주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이 보는바 없이 나를 보게 되는데 그러면 바로 법무이법(法無異法)이 됩니다. 그러나 보는 내가 있는 동안은 법무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심용심(將心用心)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눈(眼)을 가지고 눈(眼)을 보려고 하니 이 어찌 어리석지 않느냐”, 이런 말입니다. 눈(眼)으로 눈(眼)을 볼 수가 없는 일인데 눈(眼)을 찾아다니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의미입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찾는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옛스승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참으로 우습고도 우습구나”라고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인데 부처인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 내가 부처구나”하는 순간 이미 중생심(衆生心)이 되어버리니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 한평생 마음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던 일이 일찍이 없습니다. 잠 속에서 잠인 줄 모르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만약 잠을 자다가 “내가 자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잠에서 깬 상태입니다. 잠속에서는 잠인 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게 없는 마음에서 벌써 한 생각 일으킨 마음 즉, 망상(妄想)이 일어난 겁니다. 자고 있다는 한 생각이 일어났다면 이미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눈(眼)을 가지고 눈(眼)을 보지 못한다고 하니까 눈(眼)을 찾을게 없다, 눈을 찾으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찾겠다는 생각만이 아니라 일체 생각이 끊어져야 하니까요.

만약 눈(眼)을 감았다고 합시다.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눈(眼)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눈(眼)을 떴느냐 못 떴느냐의 차이입니다. 반드시 눈(眼)을 떠야 하거든요. 눈(眼)을 뜨기 위해서 수행, 정진하느라고 노력하지 않는 스승이 없습니다. 부처를 구하는 것도, 참선(參禪)을 하여 마음을 깨닫는 것도,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크게 그르쳤다는 것이 백번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지 않는 일이 찰나(刹那)인들 있겠습니까?

눈을 뜨지 않고는 바로 보기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그릇됨이다”하는 말에만 속지 말고 과연 내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지 않으려면 마음의 눈(眼)을 반드시 떠야 한다는 원력(願力)을 세워야 합니다. 그 마음이 본래 공(空)하다는 청정(淸淨)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크게 그릇됐다는 그 말 자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애쓰고 애써볼 일입니다.


14. 몽환공화(夢幻空華)

“꿈속 허깨비는 현실속 망상 일어나고 지는 것과 같다”

▲ 소림사 대웅전, 달마 대사의 수행도량답게 부처님을 보좌하고 있는 달마 대사의 모습이 이채롭다.

“미생적란(迷生寂亂)이요 오무호오(悟無好惡)이니라”, “미혹(迷惑)하면 어지러움과 고요함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라고 하셨습니다.

미(迷)했다는 말은 깨달음에 미(迷)했다는 말입니다. 미(迷)한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겁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캄캄할 수밖에 없고 눈을 뜨면 환하게 마련입니다. 눈만 뜨면 어두움 즉, 미(迷)함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양변(兩邊)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迷)함만 없는 게 아니라 깨달음도 없을 때 바른 깨달음이니까요. 어두움이니 밝음이니 분별하는 ‘놈’은 누구며 이렇게 아는 이는 누구냐는 얘기입니다. 이 몸이 분별하는 게 아니요, 그렇다고 허공이 보고 듣는 게 아닌데 역력하게 보고 듣고 하지 않습니까? 고요하다, 어지럽다고 느끼는 그 자리나 좋다, 나쁘다고 느끼는 자리나 같은 자리 즉, 그 이름이 자리이거든요. 어지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그 생각이 남아 있는 동안은 분명한 깨달음을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생각에 놀아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참선(參禪) 문(門)에서는 좋다, 나쁘다, 미혹했다, 깨달았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본래 주인자리를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 하고 이것을 줄여서 “이뭣꼬?” 이렇게 참구(參究)합니다. “부모님 몸에서 나기 이전 참나는 누구인가?”하고 참구하는건데 여기서도 자칫 속기가 쉬습니다. 왜냐하면 ‘참나’라고 하면 나라고 하는 실체가 따로 있는 걸로 알기 때문입니다. 조사 스님들께서 ‘참나’라고 하는 나는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의 나, 제법무아(諸法無我)로서의 나인데 다시 말해서 있는 내가 아니고 없는 나를 말함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듣는 이들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멸(生滅)이 없는 도리, 제법무아(諸法無我) 연기공성(緣起空性) 인데 뭔가 있다는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빠지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는 있다 아니면 없다 둘 중에 하나라야만 되는 걸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양변(兩邊)에 떨어져서 사는 삶에 익숙해진 거죠. 그런 까닭에 옳다, 그르다 하는 흑백논리에 빠져드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중도연기(中道緣起)인데 연기공성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공(空)은 설명할수록 그르치게 됩니다.

부처님 세계가 100% 광명이면

지옥세계는 100% ‘암흑’ 의미

불교에서 보는 극락과 지옥은

이것이다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지옥이 광명세계 될 수도 있고

극락이 지옥세계 될 수도 있어

인간세계는 광명 50% 암흑 50%

광명세계 향해 부지런히 수행해

광명 기운이 70%로 올라간다면

암흑은 30%로 줄어드니 ‘극락’

공(空)이란 체험이 중요합니다. 부디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체이변(一切二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이로다”,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라는 의미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꿈이냐, 꿈이 아니냐”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꿈이라고 하면 밤에 잘 때 꾸는 꿈만 꿈이 아닙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감정에 끄달려 다니는 일, 이것 또한 꿈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인 견해에 빠져 살다보니 새해니 묵은 해니 나누게 되고 너니 나니 분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예불 모실 때 반야심경을 독송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생(生)하는 일도 없고 멸(滅)하는 일도 없다는 겁니다.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오온(五蘊)이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바다로 가봅시다. 바구니를 바닷물 속에 집어넣으면 내 바구니든지 다른 사람 바구니든지 꼭 같은 바닷물이 가득 들어옵니다. 이 때 각자 자기 바구니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생(生) 즉, 태어난 게 맞습니다. 그리고 각자 바구니를 들어 올리면 바닷물이 흔적도 없이 빠져 나갑니다. 멸(滅)이 맞거든요. 바구니 가득 들어왔던 바닷물이 없어졌으니 죽음이 맞는 것 같지만 바닷물 입장에서 보면 생(生)한 일도 없고 멸(滅)한 일도 없습니다. 대나무 바구니에 물이 가득 들어왔다고 할 때도 들어온 일이 없이 바닷물은 그 자리 그대로였고 빠져 나갔다고 할 때 역시 그대로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 몸이라는 바구니에 영혼이 들어왔느니 나갔느니 하는 일이 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태어났다느니, 죽었다느니 모두가 꿈속에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달리기 경주를 할때 보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선수를 일등이라고 합니다. 우리 입장이 아니고 대지(大地)의 입장에서 보면 일등과 꼴등은 따로 없습니다. 지구위에 있는 존재 자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왼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오른손에 옮겨 들었다고 해서 내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달라지는 게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토끼가 충분히 일등할 수가 있었는데 한잠 자는 바람에 거북이한테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만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대지(大地) 즉, 지구입장에서 보면 일등이던 꼴등이던 운동에너지가 있었을 뿐 달라진 게 없습니다. 만일 운동에너지 활동량에서 판단한다면 아마도 토끼의 운동량보다 거북이의 운동량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당연히 뒤에 들어왔다고 해도 일등이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양변(兩邊)을 떠난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보면 일등이니 꼴등이니 자체가 없습니다. 거북이 에너지나 토끼의 에너지나 같은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너니 나니 분별하기 이전 이름까지 끊어진 중도연기(中道緣起)에서 볼것 같으면 삶이란 그냥 그대로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상대적인 견해란 깨어있는 현재가 되지못하고 생각에 끌려 다니는 짐작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몽환공화(夢幻空華)로 하로파착(何勞把捉)가”,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라고 이어집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고 하는 사구게(四句偈)가 바로 이 의미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란 모양있는 세계만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세계는 모두 유위법입니다. 우리 생각이라는 게 잠깐도 쉬지 않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이 생각으로 금방 좋았다가 금방 우울해졌다가 쉼 없이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속에 본 헛꽃이나 생각 일어나고 없어지는 허깨비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무엇을 보았던지 잠에서 깨고 나면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꿈속 일까지, 꿈에 얽매어 사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꿈을 꾸었답니다. 동네 아는 삼촌이 있어서 “삼촌, 제가 어제 저녁 돼지꿈을 꾸었는데요”하니 “어 자네 오늘 잘 얻어먹겠는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배를 곯으며 살 때라 어디에서 잘 얻어먹을까 했는데 웬걸 동네 어른이 크게 성공한 분이 있어서 회갑잔치를 하느라고 온 동네 사람들이 실컷 먹도록 잔치를 차렸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아! 돼지꿈만 꾸면 매일 이렇게 잘 얻어먹겠구나” 싶어서 오늘 저녁도 꼭 돼지꿈을 꿔야지 했는데 돼지꿈을 못 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헛일 삼아서 “삼촌, 오늘 또 돼지꿈을 꾸었는데요”하니 “어 오늘은 좋은 옷 얻어 입겠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집에 왔는데 회갑잔치한 집에서 시골동네라서 크지 않기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옷을 한 벌씩 돌렸다는 겁니다.

“와 꾸지도 않은 돼지꿈이 딱딱 맞는구나! 이제부터는 맨날 돼지꿈만 꿨다고 해야지.”

그래서 그날 저녁에도 돼지꿈을 안 꿨는데 삼촌한데 가서 “오늘도 또 돼지꿈을 꿨어요” 하니 “어, 오늘 되게 두드려 맞겠는데”라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오는데 회갑잔치 집에서 술을 잔뜩 먹고 나오는 건달이 있거든요. 그래 “어이쿠, 정말 저 사람한테 맞을라나 보다”하며 얼른 골목길로 숨었는데 그걸 보고 그 건달이 쫓아오더니 그 건달이 “야, 이놈아. 왜 나를 보고 피해?”하면서 신나게 두들겨 패는 겁니다. 실컷 맞고 나서 다시 삼촌을 찾아갔습니다.

“삼촌! 사실은 첫날 저녁만 돼지꿈을 꿨지 뒷날하고 또 뒷날은 꾸지도 않은 꿈이 왜 그렇게 꼭꼭 맞아요?”하니 삼촌이 하는 말이 “응, 그거 별거 아니야. 돼지가 처음 꿀꿀대면 배가 고파서 그러는가 하고 먹을 것을 주고, 그거 얻어먹는 꿈이여. 또 꿀꿀대면 자리가 질어서 그렇구나하고 볏짚을 넣어주니, 그거 옷 얻어 입는 꿈이야. 그래도 꿀꿀대면 들고 패야지 별수 있는가”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바로 이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 생각의 환영에 속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계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게 됩니다. 부처님 세계 즉, 해탈(解脫)의 세계, 지옥(地獄)세계, 인간(人間)세계 이렇게 셋으로요. 부처님세계가 100% 광명(光明)세계라면 지옥은 100% 암흑세계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보는 극락과 지옥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의 암흑세계가 극락의 광명세계로 될 수도 있고 광명세계인 극락이 암흑세계인 지옥세계로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세계는 광명 50%, 암흑 50%인데 광명을 향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면 광명기운이 70%로 올라간다면 암흑은 30%로 줄어드니 바로 극락이 되는 것이요, 반대로 게으르고 나태하여 흑색기운인 암흑기운이 90%로 올라가면 광명기운은 10%로 줄어들게 되니 결국 극락도 지옥이 된다는 겁니다. 마음 따라 변하니 몽환(夢幻)과 공화(空華)인 겁니다. 몽환과 공화이니 꿈속에서 꿈을 잡는 거와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부디 몽환, 공화에서 벗어나 보십시다. 크게 용맹 정진(勇猛精進)해 볼 일입니다.


15.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

“온갖 만물에 무심하면 주위 모든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랴”

▲ 소림사 입설정 앞에서 혜국 스님이 눈보라 속에서 자신의 팔을 베어 받치며 달마 스님에게 법을 구했던 혜가 스님 이야기를 불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득실시비(得失是非)를 일시방각(一時放却)하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무소의 소가 사자소리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니

나무로 된 사람이 꽃이나

새를 보는 것과 같음이라

목인은 본래 무정물이니

새들이 어찌 두려워하랴

마음이 항상 이와 같다면

보리도를 이루지 못할까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온갖 법은 늘 한결같아

우리가 얻었다고 좋아할 때도 잃었다고 슬퍼할 때도 우리 코를 통해서 들어오는 공기는 그대로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산하대지도 그대로 그 모습입니다. 조금만 더 큰 안목(眼目)으로 보면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는 그 말은 왼쪽 손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오른쪽 손에 옮겨 잡은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얻었다고 하는 사람도 잃었다고 하는 사람도 저승으로 돌아갈 때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구슬치기해서 따면 좋아서 까불어 대고 잃으면 시무룩해서 집에 돌아와서도 울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니 구슬 그거 땄다고 해봐야 주머니만 무거웠지 아무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오늘날 얻었다고 좋아하고 잃었다고 싫어하는 것도 우주 자연의 진리에서 보면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는 것이 모두 환영(幻影)이니, 그 생각을 놓아버리라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 중에 영웅입니다. 그러나 일본 쪽에서 보면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그런 훌륭한 분이 안계셨다면 우리나라 조선 역사는 훨씬 빈약했을 겁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흔히 쓰는 다수결의 원칙에서 볼 것 같으면 일본 인구는 1억2700만명이고 우리나라는 7000만명이니 그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옳다는 것도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면 옳다고 하고 손해가 나면 그르다고 하니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체 모든 생각, 번뇌, 망상을 몰록 놓아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옛 수행자들은 놓아버리라 하면 놓아버리기 위한 실천을 합니다. 처절하게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놓아버리라고 했지”하고 이론으로만 알게 됩니다. 아니면 노트에 적어 놓거나 컴퓨터에 입력시켜서 환영의 세계를 만듭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첫째도 둘째도 “행(行)하고 행(行)하라. 행(行)하라”고 고구정녕(苦口丁寧) 당부하셨던 겁니다. 놓아버리는 길, 그 길이 바로 덜어내고 덜어내는 길이며 쉬고 또 쉬는 길입니다. 그러면 일념(一念)이 되고 나아가 무념(無念)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무념(無念)이 일시(一時)에 놓아버리는 소식입니다. 그나저나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이라 하셔놓고 이제 놓아버리라고 하시니 이 무슨 소식인가 삼조 승찬 스승님의 발아래 큰절을 올릴 수밖에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이냐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다음 “안약불수(眼若不睡)하면 제몽자제(諸夢自除)요, 눈에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이 저절로 없어지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으면서 꿈을 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꿈, 성내고 미워하는 꿈, 오해하고 질투하는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의 꿈은 누구나 눈뜨고 꾸는 꿈입니다. 한평생 우리가 짊어지고 다니는 이 삼독(三毒)의 꿈은 언제 벗어도 벗어야할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전에 기도하면서 복달라고 빌고 기도 성취해 달라고 빕니다. 기도하면서 비는 그 정신력이 모여지는 만큼 물론 성취가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이 소중함은 그릇을 채우는 가르침이 아니라 비우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그릇만 비워버리면 빈 그릇이 되고 빈 그릇은 허공(虛空)이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허공은 빅뱅이니 빅뱅 이후니 하는 말이 나오기 이전의 허공입니다. 그 허공은 온 우주를 먹여 살리고 온 우주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비울 때만 가능합니다. 탐진치 삼독심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내려놓으면 내 마음의 그릇은 그만큼 비우게 되고 비워놓은 만큼 청정(淸靜)인 공(空)이 됩니다. 그러면 청정성인 공(空)에는 졸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졸음 즉,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지면 꿈은 저절로 없어질 수밖에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졸음에 대해서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해인사에서 겨울 용맹정진(勇猛精進) 때 일입니다. 성철 큰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해인사 퇴설당에서 한겨울 21일간 용맹정진을 할 때입니다. 용맹정진이란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는 하루 24시간 계속 앉아서 참선하는 일입니다. 물론 한 시간에 한 번씩 큰방에서 전 대중이 포행(布行)을 하지요. 그런데 2, 3일도 지나기 전에 얼마나 잠이 쏟아지는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잠이 얼마나 무서운 업(業)인지 절절이 느꼈습니다. 그러하기에 잠속에서 화두(話頭)가 되느냐하는 오매일여(寤寐一如)는 그냥 나온 말이 결코 아닙니다. 가야산 해인사 도량에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한 스님이 한참 참선 정진하다가 살짝 일어나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쌓인 눈밭 속에서 슬그머니 드러눕는 겁니다. 그러더니 눈을 손으로 계속 가슴위로 쓸어 올립니다. 눈이 이불인줄 알고 그러는 것이지요. 물론 성철 큰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만큼 잠이란 고약한 마장입니다. 영하 20도 차가운 눈밭에서 눈을 이불이라고 뒤집어쓰면 그게 제정신이냐고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분은 수행 중 잠과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체험해 보지 못한 분입니다. 졸음을 이겨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더 나아가 탐진치 삼독의 잠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경허 스님께서 경책하시기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독한 술에 혼혼불각(喧喧不覺) 잠이 드니 꾸짖어도 아니 듣고 타일러도 아니 듣는다”고 한탄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니 이 탐진치 삼독심에서 그리고, 삼독이라는 잠에서 참으로 발심(發心)을 하고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심약불이(心若不異)하면 만법일여(萬法一如)니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하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마음에 차별만 없으면 온갖 법(法)이 한결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그 자리는 온 법계(法界)가 ‘나’ 아님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 아님이 없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다름이며 차별이 돼 버립니다. 거울 자체에는 아무 모양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모양이든지 그냥 비추는 대로 나타나기만 합니다. 온갖 법(法)이란 마음거울에 비친 그림자 일진데 마음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같은 파도소리라도 청마 유치환 선생님 시인의 귀에는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꿈쩍 않는데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하는 시가 나오게 되고 연인들끼리 해변을 거닐 때는 그러한 소리가 알파파가 되어 밀어의 속삭임이 되지만 귀한 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이 들을 때는 통곡의 소리가 되어 오장육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차별이 없습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나다, 너다 하는 분별(分別)이 둘이 아닌 세계를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이론적으로 백번 알아봐도 중도(中道)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신심명’을 바로 보려면 첫째 발심(發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심명’은 발심의 언어이며 깨달은 이의 환희에서 나오는 순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말기에 열심히 축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나라 양반들이 하는 말입니다.

“에~구, 저런저런 일은 하인들이나 시켜서 하지 직접 한다고 저렇게 촐랑 대냐고.”

그랬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는 평생 축구라는 운동을 해볼 수가 없듯이 발심(發心)이 안 된 이는 ‘신심명’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는 게 그와 꼭 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것은 제법공상(諸法空相)을 깨달았다는 얘기요, 그러면 차별(差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법(法)이 일여(一如)할 밖에 없는 겁니다.

옛날에 어느 노보살님 두 분이 기도하다가 시비가 생겼답니다. 한분은 관세음보살 기도할 때 ‘관셈보살’이 맞다고 하고 한분은 ‘관센보살’이 맞다고 서로 우긴 겁니다. 한 보살님이 먼저 노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관셈보살이 맞죠?”여쭈니 스님이 하는 말이 “응, 관셈보살이 맞지”합니다. 또 한 보살이 찾아가서 묻습니다. “관센보살이 맞죠?”하고 여쭈니 스님이 다시 “응, 관센보살이 맞지” 합니다. 둘이 싸우다가 둘이 함께 노스님을 찾아갑니다. 노스님 하시는 말씀이 “관셈보살경에 보면 관셈보살이 맞고 관센보살경에 보면 관센보살이 맞다”고 하십니다. 글자만 따진다면 두 분 다 틀렸지만 정성을 우러나오게 하는데 는 두 분 다 맞는 말이거든요. 더 나아가 바다가 받아들이지 않는 강물이 어디 있으며 허공이 감싸지 않는 물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바다에 흘러들어간 강물은 이름이 없어집니다. 낙동강이든지 섬진강이든지 인도의 갠지스강이든지 모든 이름이 없어지고 바다라는 이름으로 통일됩니다. ‘신심명’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온갖 법이 한결 같으니라”고 하신 겁니다.

방거사는 이러한 세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만 온갖 만물(萬物)에 무심(無心)하면 내 주위에 모든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랴. 무소의 소가 사자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나무로 된 사람이 꽃이나 새를 보는 것과 같음이라. 목인(木人)은 본래 무정물(無情物)이라 꽃과 새들이 어찌 목인을 두려워하랴. 마음이 항상 이와 같다면 어찌 보리도(菩提道)를 이루지 못할까보냐.”

이렇게 표현한 세계가 바로 그러한 세계입니다. 부디 만법일여(萬法一如)의 소식을 향해서 부지런히 노력해 봅시다.


16. 한결같음이란

마음만 진실하면 사람과 부처 모두 진실하다

▲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입구. 중국 후한 명제 때 서역에서 스님들이 불상ㆍ경전을 흰 말에 싣고 중국에 도착하자 황제의 명으로 건립됐다.

“일여체현(一如體玄)하여 올이망연(兀爾忘緣)이라.”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玄妙)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여(一如) 즉 ‘한결같음’이란 ‘신심명’ 처음 시작할 때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할 때 그 간택심이 끊어진 자리를 말함입니다. 그러니 현묘하고 현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체만법이 “한결 같다” 함은 근본자리 즉 말길이 끊어진 자리를 표현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도(道)라고도 하고 여여(如如)라고도 하며 다른 종교에서는 신(神)이라고도 하고 참선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불성(佛性)이니, 마음(心)이니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결국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자리를 그냥 이름 지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거든요. 이런 말을 듣고 “아~ 석가모니 부처님도 정말 몰랐을까?”하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라고해도 중생들은 뭐든지 생각을 따라가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저 드넓은 허공을 누가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이 있으며 누가 저 허공을 물려받은 사람이 있는가를. 그런데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 일체 모든 것이 허공을 의지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도(道) 또한 그렇습니다. 전해 줄 수도 없고 전해 받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전해주고 전해 받았거든요. 그 말은 눈을 뜨고 보니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본체가 참으로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고 하신 겁니다. 참으로 현묘합니다. 한 생각 밉다는 생각을 내는 찰나 미운 감정이 일어나고 한 생각 고맙다는 생각을 내는 순간 바로 고마운 감정이 일어나니까요. 찰나 간에 천리만리 다녀오고 별별 묘용이 다 일어나니 어찌 현묘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러한 신통묘용이 일어나는 근본자리를 놓치고 한 생각 일어난 다음 그 환영을 보느라고 신통묘용인줄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일체만법 한결같음’은

말길 끊긴 바로 그 자리

청정하고 진실한 마음고향

결코 떠나본일 없으니

만약 꿈에서 깨고 나면

돌아감 없이 돌아가게 돼

인이 곧 과요 과가 곧 인이니

인과가 동시임을 깨달아야

그래서 원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부처 그대로가 사람이어서 사람과 부처가 차이가 없어야 비로소 도(道)라고 했으니 이는 참으로 진실한 말이다. 마음만 진실하면 즉, 일여(一如)가 되면 사람과 부처가 모두 진실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조사들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르쳐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이 마음은 오랜 세월 전부터 청정무구(淸淨無垢)하고 애당초 집착이 없으며 고요하고 고요하되 역력하게 비추면서 응연하여 마침내 주관과 객관이 없어서 완전하다고 이렇게 일여(一如)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자성(自性)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내 본래 면목을 배신하고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고 가엾은 지견을 일으켜서 모든 존재에 표류하게 되니 이것을 윤회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항상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쓰고 있으면서 단 한순간도 어두운 적이 없었으나 육근육진(六根六塵)에 부질없이 속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몰록 발심만 한다면 그대로 죄업의 때가 낀 누더기를 벗어 버리고 적나라하게 반드시 깨치게 된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구정녕 일러주셨던 겁니다.

다음은 “만법제관(萬法齊觀)에 귀복자연(歸復自然)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이게 말로 표현하려니까 돌아간다, 돌아온다, 현전하다, 현전하지 아니하다 하지만 일체만법은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나니 돌아갈게 없이 본자리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꿈속에서 천리만리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오는 꿈을 꾸고 깨어났는데 꿈을 깨고 보니 자기가 자던 그 방이거든요. 꿈속에서는 식은땀이 흐를 만큼 고생을 하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일어나보니 꿈속에서 있었던 환영입니다. 한 발자국도 나가본 일이 없으니 돌아왔다는 말 자체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표현하기를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하신 겁니다. 정말 자연스럽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나의 본래 청정한 마음고향을 떠나본 일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헤맸을 뿐 꿈만 깨고 나면 돌아감 없이 돌아갔기에 자연스럽다고 표현했지만 그냥 자연(自然) 그 자체인 것이지요. 일체만법 전체가 내 마음 나타난 작용이라는 걸 알면 세계관과 인간관이 확연히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돌아갈게 없이 본래 내 고향, 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처님 은혜가 막중하다는 사실을 절절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 자연스럽다는 말까지도 돌아간다는 말까지도 군더더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법이 본래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나의 모습이요 나의 그림자이거든요. 내 자신이 꿈만 깨면 만법은 본래 현전한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난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 마음은 일찍이 단 한순간도 우리를 버린 일이 없다, 그리고 떠난 일도 없다, 다만 내가 내 마음을 버렸을 뿐이다, 그래서 원망하고 미워하며 어리석은 탐진치 삼독(三毒)의 꿈을 꾸면서 그 꿈을 진짜로 알고 웃고 우느라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생사라고 이름 하는 윤회나 시간과 공간만 하더라도 보는 이에 따라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이에게는 시간이란 없는 겁니다. 본인이 지나가고 있는 거니까요. 아침이니 점심이니 저녁이니 하고 사람들은 분별을 하는데 태양에는 항상 그 광명 그대로이지 아침, 저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망상에서만 과거가 있을 뿐이지 일찍이 과거를 직접 만나본 이는 없습니다. 어떻게 흘러가버린 강물을 만나겠습니까? 영원한 현재라지만 현재란 과거와 미래가 있을 때만 현재일 뿐이지 과거와 미래가 없으면 현재 또한 없습니다. 아침이니 점심이니 하는 시간은 지구가 지나간 거리 즉, 시간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지나간 것이지 나란 곧 지구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태양은 그 자리 그대로 아침저녁이 본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법이 그대로 현전함에 돌아감 없이 돌아감이라 그냥 자연일 밖에요.

그다음은 “민기소이(泯其所以)하야 불가방비(不可方比)라, 그러한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천번만번 방황해도 방황이 아니요, 돌아와도 돌아온 게 아니라는 그 소이 즉, 그렇게 되는 그 이유를 깨달을 것 같으면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으며 그 무엇에 비유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조사 스님들은 말씀하시기를 허공세계는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도리는 애초부터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변하든 말든 할 텐데 모양도 빛깔도 없기에 그 밝음은 취할 수가 없고 ‘취모검’과 같이 당당해서 뉘라서 당하겠느냐”, 이렇게 표현을 하셨거든요. 이러한 모든 표현들이 추상적인 얘기도 아니고 현학적인 얘기도 아니고 마음에 눈을 뜬 분이 본 그대로 말씀을 하신 일이기 때문에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인 겁니다. 도무지 말로서는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여여(如如)하여 허공성이니 어찌 허공을 비교하겠느냐 이런 얘기죠. 그래서 “까닭을 없이하면”하는 이 말씀을 잘 아셔야 합니다. 즉, 환영에 속지만 않으면 말길이 끊어진 여여(如如)라는 말씀을요. 그래서 스승들은 말씀하시기를 허망한 속박을 벗어나고 생사(生死)의 소굴에서 해탈하려면 “첫째로 발심(發心)이 투철해야 한다. 그리고 영원토록 물러나지 않겠다는 신심(信心)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21세기는 정신문화가 깨어나야 하는 시대입니다. 나를 예외로 하고 남이 바로 서기를 바라는 교육은 평생 가도 누구하나 달라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남은 어떠한 길을 가든지 나 하나만이라도 바로 살아야 한다는 자기 확신이 서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이 우주 자연을 위해서 투쟁(鬪爭)의 마음을 버리고 상생(相生)의 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각자,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평화가 올수밖에 없습니다. 이웃나라가 잘돼야 우리나라가 잘되고 이웃이 잘돼야 내가 하는 일이 잘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요즈음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신심명’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행(行)으로 옮겨야 합니다. 가족 중에 어느 한분이 중병이 들어 입원하게 되면 온가족이 같이 힘들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인연법은 연기법(緣起法)이니까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남이 잘되어야 곧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행복해야 내 가족이 행복한 그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까닭이 없어지면 견줄 일도 없고 비할 바도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오늘 하루 사는 삶에 분명히 인과(因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과라는 것이 내 삶이 내가 걸을 때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분명하게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인과(因果)를 반드시 믿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인(因)이 곧 과(果)요, 과(果)가 곧 인(因)이라는 인과(因果) 동시(同時)를 깨달아야 합니다.


17. 번뇌망상

“진흙 있어야 연꽃도 피어나듯 번뇌망상 있기에 수행도 가능”

▲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전경.

“지동무동(止動無動)이요 동지무지(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침과 움직임, 밝음과 어두움, 옳고 그름,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상대성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심명’에서 말하는 이러한 세계는 양변(兩邊)을 부정하면서 긍정하여 원융무애(圓融無礙)하게 보고 있습니다. 바로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을 강의하실 때 많이 강조하신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면서 그침은 쌍조(雙照)를 보이는 것이고 움직임이 없고 그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쌍차(雙遮)로 막아 ‘없애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비추면서 고요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이 중도법계의 이치이니 우주의 대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번뇌 망상은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할 일

번뇌망상 사랑해보는

법도 한 가지 방법

‘사랑한다’는 의미는

둘이 아님을 아는 것

‘번뇌=보리’확신해야

번뇌 망상은 투쟁하면

할수록 강해지기 마련

번뇌 망상과 싸우지 말고

그냥 화두만 참구하면 돼

그 뿐만이 아니라 정(定)과 혜(慧)도 그렇습니다. 정혜동시(定慧同時)거든요.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미 본래 의미를 그르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캄캄한 방에 전등불을 켜면 등불을 켜는 동작과 밝음은 동시(同時)입니다. 등불을 켜는 행위가 있고난 뒤에 밝음이 오는 게 아니고 등을 켜는 행위자체가 밝음과 하나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는 행위와 밝음은 둘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종소리 또한 그렇습니다. 종을 치는 행위와 소리는 동시입니다. 종을 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소리가 나는 게 아니고 종치는 행위 자체가 소리와 둘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정(定)과 동(動), 움직임과 그침 모두가 그렇습니다. 움직인다는 말은 그침이 있었기에 움직임이니 그침에 즉한 움직임입니다. 고로 냉철하게 보면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침이란 움직임이 없다면 그침이 홀로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그침이 없기에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원융자재(圓融自在)합니다. 고로 서로 상대가 아니기에 상대법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세계를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신 겁니다.

상대법이란 둘 가운데 하나가 없으면 상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벽에다가 기다란 선을 그어놓고 누구든지 이선에 손을 대지 말고 짧게 해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어느 누구도 표시된 선에 손을 대지 않고 짧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절절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한 현자가 아무 말 없이 그어놓은 선 밑에 훨씬 더 기다란 선을 하나 그려놓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본래 있던 선은 짧아졌겠지요. 모든 게 이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없는데 네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크다 작다 역시 또한 그렇습니다. 비교할 수 있는 작은 게 있어야 큰 게 있을 수 있듯이 상대가 끊어지면 둘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우리들의 망념에서 나온 생각이지 결코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꿈꾸는 사람이 잠꼬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알음알이’에 속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 말하는 둘이니 하나니 하는 말은 이름뿐입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도 우리들 생각이요, 둘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에서 붙여놓은 이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신심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은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가르침 즉, 상대가 끊어진 도리는 생각이 끊어진 세계, 모양이 사라진 도리라는 것이지요. 하나니 둘이니 하는 모양 즉 크다, 작다하는 세계가 본래 없는 평등의 세계를 보여주신 겁니다. 우리는 큰 아파트, 작은 아파트, 큰 자동차, 작은 자동차라고 분별하지만 큰 자동차 안에 허공이나 작은 자동차 안에 허공이나 그냥 한 허공(虛空)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 나눌 수 있는 그런 허공이 아니겠지요. 말길이 끊어진 고요의 세계를 말로 표현하려니 자칫 오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 오해를 선문(禪門)에서는 ‘알음알이’라고 합니다. 스승들은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을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설명해주기 위해 진실 아닌 세계를 거짓으로 보여주신 일은 없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오직 진리를 깨닫게 하고자 ‘올인’할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다, 나다 하는 일체 개념들은 우리들 생각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꿈꾸는 사람의 꿈과 같다면 꿈꿀 때만 있는 것이지 꿈을 깨고 나면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승들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둘이라고 하면 이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니 꿈만 깨고 나면 둘이라는 세계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까 둘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허공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허공을 하나, 둘 셀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다음 구절에선 “구경궁극(究竟窮極)하야 부존궤칙(不存軌則)이니”하고 이어집니다.

“구경(究竟)의 궁극(窮極)은 정해진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라는 내용입니다. 내내 같은 내용인데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중도(中道)를 깨달으면 중도라고 할 그것마저도 초월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은 분상에는 중도라고 할 그 무엇도 없다는 말입니다. 구경이요 궁극이라, 일체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마음 길이 멸한 자리라서 어떤 이름이나 모양이 붙을 수 없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달마대사의 ‘모를 뿐’이라는 대답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다가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니 달마대사는“모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릅니다”하는 대답은 안다, 모른다의 모른다는 대답이 아닙니다. 참으로 진리를 그대로 보여준 너무나도 당연한 도(道)의 세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안다는 것도 내 생각에 속는 것이요, 모른다는 것도 내 생각에 속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대답은 안다느니 모른다느니 하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대자유를 보여준 큰 사건입니다. 다만 생각 속에 갇혀 사는 이들에게는 모른다는 말이 정말 모른다는 답으로 잘못 듣게 됩니다. “달마대사가 모르고 있구나”하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살아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일정한 법칙도 없는 것이 바로 궁극입니다. 그러니 대자유가 되는 것이지요. 참새 다리는 짧으면 짧은 대로 그냥 좋고 학의 다리는 길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양을 떠나서 보면 그대로 완전한 평등이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학의 다리와 참새 다리는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데는 그냥 에너지 작용일 뿐 크다 작다 하는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큰 것은 큰대로 좋고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좋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그냥 평등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생각의 놀음에 빠져서 차별상에 속고 비교하는데 속고 살아가고 있는지, 평생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남에게 속거나 사기를 당하면 소송을 해서라도 기필코 바로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스스로에게 속는 일, 평생 속는 일인지 그 자체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우리에게 강조하신 말씀 중 하나가 “바로 보라. 나는 누구인가?”, 연기공성을 바로 보라고 한평생 팔만사천법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 중심축이 바로 보는 법(法), 중도법문(中道法門)입니다. 그 중도(中道)의 내용을 가장 잘 함축시켜서 표현하고 보여준 내용이 바로 이 ‘신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에 대한 바른 안목이 없으면 ‘신심명’은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런 바른 안목이란 어떤 것인가, 부지런히 수행하여 직접 고요의 체험을 해보셔야만 합니다. 죽 끓듯이 일어나던 번뇌, 망상이 그대로 고요가 되어버린 텅빈 고요의 체험을 해보시면 번뇌, 망상 자체가 공(空)한 자리라는 걸 바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번뇌, 망상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번뇌, 망상은 투쟁할수록 힘이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번뇌, 망상은 번뇌, 망상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고 성내는 기운은 성내려는 기운을 양식으로 살아가고 잠은 잠을 자려는 기운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 망상과 싸울게 아니라 그냥 화두만 참구하십시오. 번뇌, 망상이란 남이 나에게 떠맡긴 것도 아니고 아니면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걸어온 내 발자국이며 내가 좋아서 내 잠재의식에 녹음해 놓은 나의 소중한 내 인생입니다. 번뇌 망상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번뇌 망상을 사랑해보는 법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둘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번뇌가 보리임을 믿고 번뇌 망상이 있기에 수행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은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본분사(本分事)에서 보면 부질없는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구경의 궁극은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이러한 가르침이 참으로 귀한 가르침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깊이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허공성인 까닭이며 항시 부동(不動)인 까닭이며 여래장 가운데는 생멸이 없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18. 계심평등(契心平等)

“망상에 끌려 다니는 건 도둑놈을 주인으로 받드는 격”

▲ 중국 최초의 사찰인 낙양 백마사 법당 앞에서 향을 사르며 기도를 하고 있는 중국 불자.

“계심평등(契心平等)하야 소작구식(所作俱息)이로다, 마음에 평등한데 계합(契合)하면 짓고 짓는 바가 모두 다 쉬리라.”

그렇습니다. 불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할 수 있지만 본래 평등한 것을 다시 평등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시 앉으라고 억지를 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요. 그러하기에 선가(禪家)에서는 마음 닦아서 도를 깨닫는다는 것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미 완전한 부처인데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이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만들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본래 평등한 것을 다시

평등하게 할 수는 없어

완전한 부처인데도 다시

부처되기 위해 수행하는건

머리 하나 더 만들려는 것

문둥병 앓는 승찬 스님

“저는 무슨 업으로 인해

죄 받고 있나요” 여쭈니

스승 혜가 스님 말씀이

“죄 어디 있나 가져오게”

그렇기 때문에 선(禪)에서는 “바로 쉬어라”, “몰록 쉬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깊이 새겨봐야 합니다. 이미 부처이니 마음도 닦지 말고 마구 살아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기 천억원 상당의 금이 묻혀있는 금광이 있는데 그만한 금이 묻혀 있다는 걸 확실히 믿는 사람은 그냥 파 들어가기만 합니다. 결코 한눈을 팔거나 다른 곳에 눈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천억원 상당의 금이 묻혀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으니 그렇겠지요.

마찬가지로 내가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번뇌 망상만 몰록 내려놓으면 됩니다. 마치 거울에 묻은 때만 깨끗이 닦으면 거울은 항상 비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본래 거울이 아니고 돌을 닦거나 나무를 닦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러한 노력은 거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에 번뇌 망상만 몰록 쉬어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번뇌 망상을 닦아낸다는 말도 잘 들어야할 말입니다. 닦아서 부처되는 게 아니라는 말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분명하게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이런 말씀을 하신 스승들의 큰 은혜를 알 수 있을 때가 올 겁니다. 그러나 망념이 본래 공(空)한 것을 깨닫고 단박에 쉰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이론적으로만 부처라고 알고 망상에 끌려 다닌다면 도둑놈을 주인으로 모시는 격이 되고 맙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망념을 내지 말라”는 그 말은 일어난 망념에 끌려 다니지 말고 그 망념을 없애려고도 하지 말고 주인이 주인노릇만 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든든한 주인이 방안에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그 방에 도둑질하러 들어가는 허름한 도둑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결코 궤변이 아닙니다. 꿈을 깨고 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사실로 알고 따라하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번뇌 망상이 한낱 꿈인걸 알고 나면 꿈속 일을 꿈을 깨고 나서도 따라다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꿈을 깨고 나서 꿈이 환영임을 알고 나면 좋은 꿈도 꿈이요, 나쁜 꿈도 꿈인 줄 알고 일체 꿈에 속지 않으면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꿈꾸는 이와 꿈이 둘다 꿈인줄 확연히 깨달으면 짓고 짓는 바가 다함께 쉬게 됩니다. 그 말은 주관과 객관, 능과 소 즉, 짓고 짓는 바가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호의정진(狐疑淨盡)하면 정신조직(正信調直)이라,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곧은 믿음이 바르게 되나니.”

여우같은 의심이란 내가 부처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라는 믿음이 완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확실해지면 부처님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불자들 가운데에서도 내가 부처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밖으로 구하는 이가 많습니다. 내가 완전하다면 밖으로 구할게 아니라 그 완전함을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물론 이 말도 ‘삼십방’을 맞을 소리입니다. 완전한데 무엇을 놓치고 안 놓칠게 따로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참으로 이것은 본인이 참구(參究)해봐야 알 일이고 본인이 본인 마음을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말로서는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해도 감정의 세계 즉, 상(相)의 세계일뿐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 순수, 절대 순수인 공(空)의 세계는 말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우같은 의심 즉, 생각이 끊어진 세계, 고요를 보려면 고요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고요에는 번뇌 망상이니 생각이니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남아 있다면 고요가 아니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번뇌 망상이 본래 공(空)한데 무슨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그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부디 본래 공(空)을 깨달아 한번 자유인이 되어 봅시다. 본래 공(空)임을 깨달으면 여우같은 의심이 본 마음과 둘이 아닌 한자리이니 곧 맑음이요, 고요 그 자체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번 제대로 하고 나면 곧은 믿음이 바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곧은 믿음이란 두 번 다시 흔들림 없는 믿음이요, 내가 부처임을 철저히 믿는 마음이니 바른 믿음이요, 곧은 믿음이라고 이름하게 되는 겁니다.

“일체불류(一切不留)하야 무가기억(無可記憶)이로다,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깨달음이란 살아있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허공성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머물려 해도 머물 수가 없습니다. 무주위본(無住爲本)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허공이 머무는 바는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허공에 무엇이든지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모양이 있는 상법(相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마음이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일체 머물지 아니하면 기억할게 있을 수 없겠지요. 왜냐하면 나의 본래 모습 즉, 고요란 눈에 끌려 다니는 일도 없고 귀에 끌려 다니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를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옛 스승들은 이런 일을 한마디로 일러주셨습니다.

마조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연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수행을 열심히 하던 한 수행자가 마조라고 하는 큰 스승을 찾아갑니다.

예를 갖추고 여쭙기를 “일체 생각을 여읜 우주의 대진리 즉, 4구(四句) 백비(百非)를 떠나서 우주의 대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니 마조 스님이 대답하기를 “나 오늘 피곤해서 못하겠네. 저 지장 스님을 찾아가서 물어보게”라고 하십니다.

학인은 바로 지장 스님을 찾아갑니다. 서당 지장 스님께 그대로 다시 여쭈니 “왜 마조 스승님께 묻지를 않고 여기로 왔는가?”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 마조 큰스님께 여쭈니 스님께 여쭈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지장 스님은 “나 오늘 머리가 아파서 답해 줄 수가 없네. 회해 스님께 가서 여쭈어 보게”라고 이르십니다. 학인은 다시 백장 회해 스님을 찾아갑니다. 똑 같이 다시 여쭈니 회해 스님께서 답하시기를 “나 그거 모르겠네”라고 하십니다. 모르겠다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학인은 다시 마조 스님을 찾아가니 마조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서당 지장의 머리는 희고 백장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렇듯 옛 스승들은 설명이나 방편(方便)보다는 바로 진리를 보여주셨던 겁니다.

서당 지장 스님이나 백장 회해 스님은 모두 마조 스님의 제자로서 대단한 선지식이었습니다. 서당 지장 스님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수받아 오신 도의 국사의 스승이고 백장 회해 스님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정하여 선원 풍토를 안정시킨 분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그냥 현학적인 말을 쓰기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학인들을 골려주려고 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참으로 귀하고 귀한 말임을 알 때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하는 세계가 바로 우리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오가해(五家解)에서 “수지왕사(誰知王舍) 일륜월(一輪月) 만고광명(萬古光明) 장불멸(長不滅)”이라고 하셨으니, “그 누가 알리요. 왕궁에 떠있는 영원한 저 달을, 만고에 광명이요,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나도 없고 남도 없을 때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대나무 그림자 댓돌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어나지 않고 밝은 달 물속을 투과해도 물결하나 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심명’의 첫 구절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하신 말씀이 골수였다면 오늘 배우는 “일체불류(一切不留)하야 무가기억(無可記憶)이요, 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로다”는 그에 못지않은 알맹이입니다.

기억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일단 기억한다는 말은 내 마음 속에 사진이 찍혀있다는 얘기이고 그 말은 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얘기 즉, 텅빈 허공성이 안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기억, 어머니라는 기억이 모두 일회용입니다. 전생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르는 것을 생각해보면 왜 일회용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바로 허명자조(虛明自照)이기 때문입니다. 머무르는 바가 있는 기억은 일체 모두 일회용입니다. 만약 머무르는 바가 없는 청정공이 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영원합니다.

여기에서는 일회용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회용으로 태어나서 영원성이라는 ‘신심명’을 배운다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신심명’을 지은 삼조(三祖) 승찬 스님께서 문둥병이라는 통한의 기억 때문에 이조 혜가 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저는 무슨 업(業) 즉, 무슨 기억 때문에 이런 극심한 죄를 받아야 합니까”하고 눈물로서 여쭈니 일체 머무르는 바가 없는 이조 혜가 스님은 “그 죄가 어디 있는가? 가져와 보게”하고 되묻습니다. 이 한마디에 “일체불류(一切不留)라 무가기억(無可記憶)”을 깨달은 겁니다.


19. 감정의 노예

“한 생각 일어난 다음 감정 좇고 있다면 그것이 노예의 삶”

▲ 중국 용문석굴의 봉선사 대불. 당나라 측천무후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

참으로 소중한 말입니다. 텅 비면 밝게 마련이고 밝으면 스스로 비추고 있게 마련입니다. 밝음과 비춤은 둘이 아닙니다. 텅 비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텅 비고 밝다는 말은 번뇌망상 즉, 미운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 그러한 잡스러운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요, 바로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나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나의 본래 마음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는 “이 세상이 모두 무상하고 모두가 환영”이라고 하시면서 마지막 법화경에 와서는 “일체 모든 법(法)이 적멸(寂滅) 아닌 게 없다 즉, 진리(眞理) 아닌 게 없다. 수행자들이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면 내 자신이 확연한 부처임을 보게 된다”고 이르셨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알음알이로 따져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모든 것은 도(道)에 의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번뇌방상이 몰록 소멸해도

특별한 세상 나타나지 않아

바로 그곳이 지혜광명 자리

스스로 밝게 비추고 있는 것

본래 비고 밝은 자리라는 건

스스로 항상 비추고 있기에

따로 마음 쓸 일 전혀 없어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이제는 한바탕 쉬고 볼일

꽃 한 송이를 예로 들어봅시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씨앗이 싹이 되어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러려면 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라나려면 물과 공기, 햇볕 온 우주가 다 함께 모여야 합니다. 즉 한 송이 꽃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꽃 한 송이만이 아니라 나무 한그루, 벼나 보리 모든 식물도 또한 이와 꼭 같습니다. 새나 곤충 모든 생명 또한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서 생겼기에 인연이 흩어지면 꽃은 떨어지고 죽어갑니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가 모여 인연이 되면 태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죽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인연법 자체는 영원합니다. 이치가 이러하기에 연기법(緣起法)을 보는 자는 바로 부처를 본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하여 나는 물론이요, 온갖 우주만유가 연기공성(緣起空性)임을 깨달은 자리가 바로 비고 밝은 자리입니다. 번뇌 망상이 몰록 소멸하고 보면 특별한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자리가 지혜 광명이라 스스로 비추는 겁니다. 따라서 본래 비고 밝은 자리요, 밝으면 스스로 비추나니 따로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몰록 한바탕 쉬고 볼일입니다. 중생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죄(罪), 그 죄라는 두려움이 본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본래 성불(成佛) 도리(道理)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밤이라도 태양광명이 환한 광명을 그대로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두움은 어두움이 아니고 나를 감싸고 있는 밝음의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분명하면 허명자조(虛明自照)라는 이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비사량처(非思量處)라 식정난측(識情難測)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로는 측량키가 어렵도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감정이 일어나야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감정으로는 순수 공(空)의 세계, 그러한 세계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이 끊어진 자리는 허명자조(虛明自照)인데 어찌 의식이나 망정으로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문제를 갖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만약 죽음이 300년, 500년 동안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죽을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엄청나게 기다릴 겁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생각 헤아리기에 따라서 달라지듯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세계 또한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을 따로 보는 세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으나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허명자조의 세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의문에 대하여 이런 질문이 있었나 봅니다.

“부처님이시여,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 즉, 이 몸이 모두 공(空)하다면 누가 도(道)를 닦습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수행자들이여, 배고픈 이가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없어져도 밥을 먹은 이는 배가 부르는 이치와 같고 햇빛이 시간에 의해서 아침이 점심이 되고 점심이 저녁이 되어 순간순간 사라지지만 나무와 풀과 온갖 꽃을 길러 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씨앗을 심을 때는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법(法)의 이치에 따라 싹이 나고 열매 맺는 이치와 같이 공(空)인 가운데 도(道) 닦는 것도 이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며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려운 세계가 어디 멀리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바로 생각을 일으키는 그 자리요, 의식이나 망정을 낼 줄 아는 허명자조의 자리, 바로 그 자리입니다. 다만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뿌리를 바로 보고 몰록 무념(無念)이 되면 내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 주인이 되는 것이요, 생각 일어난 다음 감정을 따라가면 생각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의식과 망정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인간 한평생 살아가면서 생각이라는 감정, 그 감정의 노예 노릇하느라고 보내버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 노릇한 시간은 얼마 안 되고 감정이라는 업(業)의 종노릇한다고 낭비한 인생을 생각하면 비사량처(非思量處)요 식정난측(識情難測)이라는 말이 실감 날것입니다. 결국 내가 내 생각의 주인이 되었느냐, 생각의 노예로서 살고 있느냐 그 차이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닌 바로 그 놈이 말을 하고 말을 듣는데 역력한 것입니다. 역력한 본래의 내가 잠시도 나를 떠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역력한 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연기공성이요, 형단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역력히 보고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일어났거나 생각이 일어났다면 이미 역력이 아니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역력함이란 고요하고 맑아서 더 이상 더러움이 없다는 말이요, 고요 그 자체를 말하는 거니까요.

“진여법계(眞如法界)엔 무타무자(無他無自)라, 깨친 진여법계는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이라.”

드넓은 허공, 가없는 허공에는 너의 허공, 내 허공이 따로 없습니다. 새들도, 노루도, 다람쥐도, 나무도, 꽃들도 모두 허공에 의지해서 사는 만큼 같은 고향, 같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와 남이 없는 자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대나무 소쿠리를 하나씩 들고 바다로 가 봅시다. 소쿠리를 바다에 담그면 동그란 소쿠리는 동그란 모양의 바닷물이 들어오지요. 네모난 모양은 네모난 물이 들어옵니다. 동그랗고 네모난 게 너다, 나다 하는 건데 동그란 모양은 동그란 것이 맞다하고 네모난 모양은 네모가 맞다하고 고집하는데 이것이 바로 너다, 나다 하며 고집부리는 생각과 같은 겁니다. 각자 자기 그릇에서 볼 때는 동그랗다고 하고 네모라고 하지만 바닷물에서는 모양이 본래 없으니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이라고 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닷물 입장에서는 그냥 바닷물이거든요. 모양 있는 바다도 그렇거늘 하물며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진여법계에 어찌 나와 남이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모양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알음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진여법계란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야말로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진리 그 당처라는 의미입니다. 모양이 없다하면 벌써 빗나간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이름에도 속지 않는 자리를 화두참선(話頭參禪) 간화선(看話禪) 할 때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화두일념(話頭一念)이면 그대로 허공성(虛空性)입니다. 허공성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는 그 하나라는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무타무자(無他無自)가 되어 원융무애(圓融無碍)인 겁니다. 그러한 대자유가 바로 진여법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천하보배가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완전하게 갖춰져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요, 실로 살맛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대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49년간 부처님은 길에서 사셨고 그 법(法)을 깨달은 스승들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겁니다. 이러한 법의 등불이 3000년을 두고 꺼지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희유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적적본고향(寂寂本故鄕)이요 성성시아가(惺惺是我家)라, 현전고불로(現前古佛路)인댄 불매시하물(不昧是何物)이냐”, “고요하고 고요한 이 마음 본래 나의 고향이요, 항상 깨어있는 삶이 바로 내 집이라. 과거 옛적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

이 어떠한 물건인가? 각자가 자기의 등불,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자기의 등불을 한번 돌아봅시다. 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을 찾아 인생을 바친 수행자가 스승을 찾아가 여쭙습니다.

“무엇이 최고 진실의 경지입니까?”

스승이 답하기를 “만약 그것이 경지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최고의 진실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 이르십니다. 이 답이야말로 바로 그 등불입니다. 수행자가 다시 묻기를 “밤낮없이 하루 종일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라고 여쭈니 스승은 “걸음, 걸음 진실을 밟으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분명 합니까. 이러한 답이 바로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등불만 분명하게 밝히면 진여법계(眞如法界)라, 무타(無他)요 무자(無自)입니다.


20. 유심인과(唯心因果)

“인과와 하나된 사람이 깨달은 사람, 항상 자신의 삶 책임져”

▲ 중국 낙양 용문석굴 맞은편에 위치한 향산사. 중국 당나라 시대 3대 시인인 백거이가 이곳에서 불교에 귀의해 향산거사로 칭하며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요급상응(要急相應)하면 유언불이(唯言不二)로다,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재빨리 상응한다”는 말은 몰록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바로 본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버려두고 번뇌 망상이라는 도둑을 따라 다니느라 그 얼마나 많은 세월, 생사윤회를 하였습니까? 생사윤회의 길을 선택하는 길도 나요,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는 대자유의 길을 선택하는 것도 바로 나입니다. 그러한 나를 운전하는 이가 어느 쪽으로 운전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 말은 오늘 이 시간 나는 어떤 생각이 나를 이끌고 다니고 있느냐, 아니면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의 참나를 깨달아 내가 내 생각을 끌고 다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둘이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오직 한 생각 차이이니 재빨리 상응하고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체를 만든다는

유심인과를 깨달은 이는

늘 지혜로운 삶 실천해

마음에 강한 생각 낸다면

게으름과 모자람, 부정함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어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주인이라는 믿음 보다

중요한 가치 존재하지 않아

여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손오공하고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 셋이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겨우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栢操)하고 사난방견장부심(事難方見丈夫心)”이라고 일이 어려워지면 업(業)이 발현하게 됩니다. 무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손오공은 섬을 빠져나가려고 온 섬을 헤매고 돌아다니고 저팔계는 계속 먹을 것만 찾아다니며 먹을 궁리만 하고 사오정은 피곤하다며 계속 잠만 자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업(業)대로 행동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손오공이 용케도 요술램프를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서 노인 한분이 나오더니 각자에게 소원 한가지씩만 들어줄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빨리 소원을 말하라 했겠지요. 손오공은 얼른 집에 보내달라고 해서‘펑’하는 소리와 함께 집에 가게 되었고 저팔계는 먹을 것이 풍족한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참 자고 있던 사오정이었습니다. 노인이 사오정을 깨워 “너의 소원이 뭐냐?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하니 사오정 하는 말이 “어! 손오공하고 저팔계 이놈들이 다 어디 갔지? 이놈들 빨리 불러줘”라고 했답니다. 어눌한 사오정의 이 한마디 소원 때문에 손오공과 저팔계는 어렵게 이룬 소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무인도로 오게 됐다는 뜻이지요. 어눌한 사오정 같은 인연을 만나면 이거야 말로 죽을 쑤는 격입니다.

그러나 허명자조(虛明自照)만 되면 다시 불러드릴 수가 없습니다. 헐떡거리는 마음이 손오공을 움직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저팔계를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누구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빨리 상응하고자 하거든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 할뿐이라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면 업(業)이 나를 움직일 수 있지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그러한 세계에서는 결코 나를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불이개동(不二皆同)하야 무불포용(無不包容)하니,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삶과 죽음, 나와 남 지금까지 누누이 둘이 아니라고 얘기했습니다. 금(金)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든, 반지를 만들었든 이름만 다를 뿐 모두가 금(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걸이나 반지라는 이름을 붙여 달리 부릅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 목걸이나 반지의 본질은 금(金)이라는 것을 믿고 알듯이 진리의 세계도 깨닫고 보면 모두가 한마음이니 포용하지 않을 게 없다는 겁니다. 유마경에 보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이 오갑니다.

결국 보살들이 유마거사에게 불이법(不二法)에 대해서 물으니 유마는 오직 한마디 말없이 묵언만 하였으니 이때 문수보살이 찬탄하여 가로되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갔다”고 이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실로 미세망상까지도 설 자리가 없는 우레 소리 같다하여 그 말없는 침묵을 일묵여뢰(一默如雷)라고 합니다. 본래 공(空)한 자리에 어찌 조사범부가 따로 있으며 깊고 넓은 바닷물에서 강 이름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내가 어떤 길을 가느냐, 그것일 뿐 아닙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서 번뇌 망상 따라가면 인생 내리막길이요, 내리막길은 여러 갈래 길이요, 올라가는 길은 오직 상봉 하나일 뿐 둘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선가(禪家)에서는 내려가는 놈도 그놈이요, 올라가는 놈도 그놈이라 내려간 바도 없고 올라간 바도 없으니 둘이 아닌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포용하지 않음이 없을 수밖에 없겠지요. 허공이 포용하지 않는 게 없듯이 단 한번뿐인 기회, 오직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만 존재하는 인생,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 말은 남의 모함이나 내 앞에 이겨내기 힘든 역경이나 그런 것들 모두 다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똥물이든 빗물이든 그냥 조건 없이 받아들이면 바다가 되는 것처럼요. 과연 이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나의 인생점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80·90점 넘으면 자동 극락이요, 30·40점 안되면 바로 지옥입니다. 50·60점 짜리가 바로 인간에 태어나는 건데 45점짜리, 바로 이게 문제가 됩니다. 지옥으로 보내려니 점수가 조금 남고 인간으로 태어나려니 점수가 조금 모자라니까요.

결국 염라대왕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 점수 가지고는 정해진 세집 밖에는 태어날 곳이 없다고요. 첫째 집을 살펴보니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는 집이요, 둘째는 거지집이요, 마지막 셋째 집은 부모도 훌륭하고 부잣집인데 본인이 평생 가지가지 병(病) 속에 사는 그러한 집인 겁니다. 자기 점수가 그것뿐이라 다른 집에는 태어날 점수가 안 되니 할 수 없이 셋째 집에 태어나게 됩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평생 병(病)에 시달리며 살게 됐지요. 그 누가 억지로 병(病)을 갖다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시방지자(十方智者)가 개입차종(皆入此宗)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宗趣)로 들어옴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이란 도(道)와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는 연기공성(緣起空性)을 깨달은 이들이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인과(因果)와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과(因果)란 내가 내 삶을 책임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가 마음이 만든다는 유심인과(唯心因果)를 깨달은 이들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즉 자신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걸 믿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인과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인과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동시인과(同時因果)입니다. 내가 만원을 주고 물건을 사면 바로 만원짜리 물건을 돌려받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는 인과 관계입니다. 그래서 동시인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어나는 인과는 모양이 있는 상법(相法)에서만 일어나는 인과입니다. 이시인과(異時因果)나 그리고 강약인과(强弱因果), 유심인과(唯心因果)에서 보면 동시인과는 한계가 있는 인과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사과나무를 심었는데도 그날 사과 열매가 열리는 게 아니라 지(地),수(水),화(火),풍(風) 네 가지 인연에 의해서 싹이 트고 나무로 자라 꽃이 피고 사과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과는 5~6년 있다가 열립니다. 이시인과지요. 물론 시간과 공간이 없는 유심인과의 세계에서 보면 바로 씨앗을 심을 때 사과는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죠. 인과동시(因果同時)라고 합니다. 그 다음 강약인과라고 하는 것은 인과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인 법칙이 아니고 마음의 법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한 생각, 강한 생각을 내면 내 게으름도 내 모자람도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강인한 마음이 아니라 되면 되고 말면 말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는 평생을 고쳐도 자기 단점하나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한 자기 성질을 고치고 못 고치고는 내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쓰느냐 약하게 쓰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10년 동안 나무를 했는데 매일 한 짐씩 나무를 해서 쌓아놓으면 십년 걸려서 쌓은 나무가 강한 불길이 오면 한순간에 타서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강약인과의 이치입니다. 중생으로 살아가는 모든 죄업이라는 것도 본래 내가 부처임을 확연히 믿고 정견(正見)을 세우고 강인한 실천행을 하면 죄업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한순간에 천년, 만년의 죄업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강약인과의 이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심인과인데 유심인과는 오직 유(唯)자 마음 심(心)자 모든 것은 마음이다, 처음이니 나중이니 지금 일어나지 않고 다음에 일어난다느니, 강하다느니 약하다느니 등 전체가 마음이 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고로 일어나는 자리도 마음이요, 멸하는 자리도 마음이요, 강하다고 하는 자리도 마음이요, 약하다는 자리도 마음이니 일체 마음일 뿐입니다. 바로 유심인과(唯心因果)입니다. 일체가 마음의 그림자였으니 결국 이 마음을 깨닫는 길이 ‘신심명’ 가르침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오는 겁니다. 반드시 노력하고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뜨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騰騰任運) 태평가를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1. 분별의 실체

“생각 일어나기 이전, 만년이든 일겁이든 다를 바 없으니”

▲ 중국 천수(天水)의 맥적산 석굴 13호굴에 나툰 삼존불. 1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은 자비롭고 인자한 상호가 미려하기 그지없다.

“종비촉연(宗非促延)이니 일념만년(一念萬年)이요, 종취(宗趣)란 시간을 초월한 자리이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공간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될 수 없는 말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공간이라고 하는 것

텅빈 허공엔 틈 없어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분별의 말은 우리가

속고 있다는 의미일 뿐

한 생각에 삼천대천세계

모두 존재한다는게 진리

태양광명 그 자체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광명일뿐입니다. 태양광명 그 자체를 보지 않고 그림자인 지구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에 그 그림자가 시간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근본 종취에서는 광명이나 어두움 둘 다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물며 생(生)과 사(死)를 하나로 보는 것도 허망한 생각이라 했으니 그러한 투철하고도 투철한 조사안목에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영원에는 찰나와 영겁이 같은 말이요, 무변허공(無邊虛空)에는 이곳과 저 너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참된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이 환영(幻影)임을 알고 오히려 그 환(幻)을 관(觀)하는 법으로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환영을 환영인줄 아는 자가 드러나게 됩니다. 환영인줄 아는 자는 환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좀 더 나아가서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되면 그 환영인줄 아는 그 사람도 또한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당시 그 환영이 소멸하게 되는 겁니다. 성적등지(惺寂等持) 지관등지(止觀等持)인 것이지요. 이것은 교리에서 보는 점수(漸修)의 입장이고 간화선에서는 바로 돈오무념(頓悟無念)입니다. 여기에선 환(幻)과 환(幻) 아님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환영(幻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곧 무념(無念)이요, 무심(無心)이 되는 겁니다. 생각 자체가 끊어지고 생각 이전의 세계, 즉 모양도 빛깔도 없는 텅빈 진여(眞如)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무심(無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취, 즉 근본진리는 시간을 초월한 자리이니 한 생각이 만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 생각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생각 일어나기 이전 자리에서 보면 만년이든 일겁이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취에서 보면 너니 나니 하는 투쟁이 있을 수가 없고 좋다, 나쁘다 분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누구에게나 똑 같이 갖추어 있다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신심을 내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일체 유정무정이 모두 그러한 완전한 진리, 누구나 모두 부처라는 본래 성불도리가 인류의 보배임을 알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 다음은 “무재부재(無在不在)하야 시방목전(十方目前)이로다, 공간 또한 없음이라 시방세계가 바로 눈앞이로다”라고 이어집니다.

시간만 없는 게 아니라 공간(空間)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은 공간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말인데 우리가 타성에 젖어 그냥 공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텅빈 허공에 틈이나 사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분별의 말은 우리가 속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한 생각에 삼천대천 세계가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일념삼천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념삼천이란 한 생각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불, 보살 등 열 가지 세계, 즉 십계(十界)가 다 들어 있다는 천태선사의 법화사상입니다. 지옥중생에게도 인간의 성품이 있을 수 있고 인간에게도 짐승과 같은 축생의 기운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하나하나의 세계, 즉 한 세계마다 십여시(十如是)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십여시란 여시상(相), 여시성(性), 여시체(體), 여시력(力), 여시작(作), 여시인(因), 여시연(緣), 여시과(果), 여시보(報), 여시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계 안에 각각 다시 십계가 갖추어 있으니 백이요, 그 백계 속에서 각각 십여시를 갖추고 있으니 천이 되는 겁니다. 그 천계가 삼세간(三世間)인 오음세간(五蘊世間)과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을 다 갖추고 있으니 이 셋을 곱하면 삼천이 되니 일념삼천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천은 숫자의 개념이 아니고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 예로 십여시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모양이 있습니다.

즉 여시상(相)이 갖추어져 있고 그 모양을 가진 사람은 각자 자기 성질인 여시성(性), 즉 성질이 있게 마련입니다. 상(相)과 성(性)이 합쳐지면 체(體)가 생겨 여시체(體)가 되고 몸체가 있으면 그에 따른 힘이 생기기에 여시력(力)이요, 힘은 작용을 일으켜서 여시작(作)이 되고 작용은 인연을 만들고 인은 연을 만나 인연이 되고 과보가 따르니 여시과(果), 여시보(報)가 이루어집니다. 이 모두가 처음과 끝이 모두 구경의 한자리가 되기 때문에 여시본말구경등이 되어 한 세계마다 십여시를 모두 갖추게 됩니다.

결국 여시(如是)하는 ‘여’(如)라는 글자 하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여시는 무재부재(無在不在)하야 시방목전(十方目前)인 겁니다. 시간이니 공간이니 나누어지기 이전이기에 영겁이고 일념이니 시방세계가 그냥 눈앞이 되는 겁니다. 그러한 세계가 너무나 광활하고 가없는 추상적 세계처럼 느껴지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조그마한 세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묘법의 세계가 각자 우리 마음에서 활발발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시방목전의 삶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구절은 “비고지금(非古之今)이니 삼세일념(三世一念)이로다, 예와 지금이 아니니 삼세가 다만 일념이로다”입니다.

이 구절은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을 있는 것으로 보면 옛날 옛적 과거가 있고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시간 자체가 없을 때에는 예와 지금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삼세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들 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이 구절에서 시간개념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볼까 합니다. 하루살이는 하루가 일생이요, 매미는 여름 한철이 한평생이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원주민들은 모든 시간을 신(神)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불자들이 볼 때 부처님과 같이 일어나고 함께 자고 있으니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이 원주민들을 개종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일요일 교회에 나오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니 일하지 말고 교회에 와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인디언들이 하는 말이 “왜 일요일만 신(神)을 모시느냐? 당신네 신은 얼마나 바쁘기에 일요일에 한번만 모시느냐?”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원주민들 스스로 생각하는 신은 일하는 그 속에 항상 존재하고 밥을 먹을 때도 항상하기 때문에 날마다 신을 같이 모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원주민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부처란 즉 진리란 우리가 걸어 다니고 앉고 눕고 자는 이 모든 삶 속에서 항상 그 부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 어디서나 신과 같이 있는 시간이란 말이지요. 다만 그 신에 대한 개념이 다를 뿐 진리는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란 바로 내 마음입니다. 고마움의 마음입니다. 최근 페루 쿠스코 서북방에 있는 ‘우르밤바’에서 하루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선 아주 특이한 풍습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지붕 위에 흙으로 구운 조그마한 황소 두 마리를 마주보게 한 형상을 용마루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지요. 집집마다 똑같이 그런 형상이 있기에 이상하다 싶어 현지 전문가에게 물었습니다. 한집, 두집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집의 지붕에 조그마한 황소를 마주보게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이유인즉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 페루를 침략해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든 뒤 황소도 같이 들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원주민들이 그 황소를 이용하여 일을 해보니 사람들보다 몇 배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소의 고기까지 인간들이 먹을 수 있게 되니 고마운 마음이 간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은 고마움의 신이기 때문에 황소를 신으로 생각하고 지붕 위 용마루 중앙에 모셔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찾아가서 “여보시오. 왜 십자가를 모시지 않고 황소를 모셨느냐?”고 하니 페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 우리들의 신(神)은 고마움이요, 고마움이 극에 이르는 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의 십자가가 그렇게 도움을 주고 고맙다면 십자가도 모시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소 사이에 십자가를 같이 모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마주보는 황소사이에는 조그마한 십자가도 세운 것이지요.

페루 사람들이 생각한 신은 고마움의 신입니다. 그 일심에는 너의 신, 나의 신이 따로 없습니다. 네 종교, 내 종교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하기에 “일체(一切) 유정무정(有情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하신 겁니다. 신이란 즉 부처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마움의 대상, 언제 어느 날 그 어디에서든지 나와 함께하는 내면의 청정입니다.

그러니 과거와 지금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지금 한 생각인 것이지요. “그 한 생각 일으킬 줄 아는 참나, 참나는 누구인가?”, 한 생각 일으킬 줄 아는 그 자리는 내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내 밖에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 법계가 오직 이것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신이라고 하든, 부처라고 하든, 마음이라고 하든 그건 이름일뿐 이름 붙을 수 없는 참으로 청정한 진공묘유입니다.

일체가 연기공성(緣起空性)입니다. 이러한 천하보배, 우리는 그것일 뿐입니다. 부디 진리를 깨닫는 길로 부지런히 한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22. 무엇이 크고 작은가

“우주에서 보면 지구도 점에 불과…크다 작다는 분별망상”

▲ 중국 둔황의 막고굴 입구. 막고굴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불교가 둔황에서 꽃피운 세계적인 불교문화유산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하야 망절경계(忘絶境界)하고,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가 모두 끊어진다.”

상대적인 것이 사라지면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방이니 큰 방이니 하는 차이가 나는 것은 순전히 벽하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벽 하나만 허물면 큰방이다, 작은 방이다 하는 이름 자체가 없게 됩니다. 벽이란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잠깐 동안 설치해 놓은 가설물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때 ‘벽’이란 우리들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벽’이란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환영(幻影)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든 설명이 경계(境界)를 인정하고 경계에 속을 때만 성립되는 ‘알음알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이 끊어지면 경계가 사라지고 경계가 없어지면 이런 설명이 모두 군더더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큰방이니 작은방이니 하는 차이

순전히 벽으로 분할했기 때문

벽 하나 허물면 차이도 사라져

그런 관점에서 볼때 ‘벽’이란

생각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

진리와 이치 이러하기 때문에

몰록 자신의 생각만 비운다면

크다 작다는 일체 경계도 없어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런 말을 ‘사족’이라고 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뱀의 발을 그려 넣어서 그르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 몰록 비워 버리면 크다, 작다하는 분별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 속에서 생각을 떠난 세계는 모양 안에서 모양을 떠나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에 양변(兩邊)을 초월하게 되고 중도(中道)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있기에 부처도 있고 신(神)이 있게 되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고 신(神)도 없게 됩니다. 내가 신이 필요하다면 신은 내가 필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신은 받들어야 하는 내가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왜냐하면 신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 지을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살아있는 부처가 되고 살아있는 신이 되는 겁니다. 활발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거듭 사족을 붙이자면 나니, 너니 구별하는 벽이 있을 때 크다, 작다, 안이다, 밖이다 하는 이름도 생겨납니다. 벽을 허물어 버리고 텅빈 허공에서 어떻게 크다, 작다고 할 것이며 안과 밖을 구분하겠습니까? 결국 망절경계(忘絶境界)란 벽을 허물어 버린 본래 벽이 없는 상태인 겁니다. 그 벽을 쌓는 것도 나요, 벽을 허무는 것도 나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있는 벽을 허물어서 없애는 게 아니고 본래 벽이 없다는 한 소식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벽속에서 벽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벽은 벽대로 두고 안도 인정하고 밖도 인정하고 하나가 되어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리가 바로 망절경계(忘絶境界)인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불교에서는 선(禪)이라고 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란 임제 스님 말씀인데,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자리가 모두 부처가 되어 진리 아닌 게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참으로 귀하고 귀한 말씀이 아닌가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지심(至心)으로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내가 본래 주인이라는 의미로, 항상 새겨야 할 진언입니다. 그럼에도 범부는 본래 주인임을 망각하고 번뇌 망상을 따라 다니느라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업(業)이 되어 그 업(業)이 끊임없이 생사윤회하고 있는 겁니다. 업(業)은 태양광명 속에, 태양에 등을 돌린 어두움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한 생각 뒤로 하면 어두움이고 한 생각 앞으로 돌리면 그대로 광명인 것이지요. 실상이 이렇게도 분명하건만 주인이면서 주인노릇 못 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극대동소(極大同小)하야 불견변표(不見邊表)라, 극대동소(極大同小)하야 극대동소(極大同小)와는 다른 말입니다만 사람들이 큰 것을 구하는 동안은 큰 것은 없습니다. 큰 것은 한정 없이 늘어가니까요.”

끝없이 큰 것, 큰 것 이후 더 큰 것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큰 것을 구하는 그 마음을 쉴 때만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극히 크다는 것은 생각이 끊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다는 말은 끝과 겉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크다, 작다 분별하는 것은 우리들이 한 생각 일으키는 생멸심(生滅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또한 단멸상(斷滅相)이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은행나무가 환영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또한 크다, 작다 하는 분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행나무가 자라나는 것도 연기법(緣起法)이니까요. 환영인줄 아는 자(者)와 하나가 되어서 돌아가는 연기공성(緣起空性)도 깨닫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단멸상(斷滅相)에 빠지는 어리석음이 되는 겁니다. 은행나무라는 상(相)을 보면서 상(相)과 상(相) 아님이 둘이 아닌 사실을 바로 볼때만이 불견변표(不見邊表) 즉, 끝과 겉이 없다는 소식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若見諸相) 비상 즉견여래(非相 卽見如來)”라고 한 겁니다. 인도나 중국, 미국을 가보면 넓은 땅이 무척이나 부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땅 덩어리는 너무 좁다고 하고 인도나 중국, 미국은 넓다고 하지만 달나라에서 찍어 보낸 사진이나 아니면 저 너머 우주에서 보면 넓다느니 좁다느니 하는 그 모든 나라들을 합쳐봐야 콩알보다도 더 작은 한 점에 불과합니다. 수십 개가 달린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크다, 작다 하지만 그 뿌리는 같은 한그루 사과나무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큰 소리가 나오는 소리기관이나 작은 소리가 나오는 기관이나 같은 한 구멍이니 크다, 작다 하는 분별에 너무 많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먹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늙었다거나 젊었다거나 하는 것은 겉모습일 뿐 젊음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나 늙은 몸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나 어차피 같은 사람입니다. 7~80세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젊은 생각을 할 수 있고 4~50세 젊은이도 7~80세 노인의 생각일 수 있듯이 나이 자체에는 늙고 젊음이 없으니 끝과 겉이 없을 수밖에요. 그래서 학능나 스님께서는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그 자리가 바로 그윽하나니 그 흐름에 따라 근원을 깨달으면 기쁨도 슬픔도 사라지는구나”라고 일러주신 겁니다.

그 다음은“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니 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고 이어집니다.

“스승이 죽비를 손에 들고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죽비라고 하면 착(着)이요, 죽비 아니라고 하면 등진다”고 이르셨습니다. 스승들은 이와 같이 항상 근본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각이 남아있는 한 생사윤회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물론 목석같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더욱 더 아닙니다.

여기 질 좋은 담배가 한 갑 놓여 있다고 합시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그 담배를 보는 순간 바로 담배에 대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어느 나라 담배인지 그 맛은 어떤지, 더 나아가서 한 개비를 꺼내 피워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담배를 당초 피우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눈앞에 있는 사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결국 한 생각 일으키는 원인은 그 동안 익혀온 습관인 업(業)입니다. 이와 같이 모양 속에서 모양을 떠날 때 있다와 없다는 둘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담배라는 모양이 있든지 없든지, 그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있다, 없다 하는 현상계(現想界)를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있을 때 있다, 없다 라는 세계가 존재 할 수 있지 만약 판단하는 내가 없으면 크다, 작다, 있다, 없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을에 피어있는 쑥부쟁이, 들국화 한 송이에도 우주가 다 깃들어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에도 꼭 같은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현상계를 보고 내 생각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있고 없음이 생기고 반대로 내가 현상계를 따르면 크고 작음이 없이 평등합니다. 겨울이 왔을 때 겨울이란 계절에게 춥지 말라고 하면서 나에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라고 한다면 추위가 존재하게 되고 내가 겨울에 맞추어 옷을 껴입고 난방을 하면 추위는 없어지게 됩니다. 내가 계절을 따르면 바로 여여(如如)요, 계절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면 거슬림이 됩니다.

유마거사가 어렸을 적 경(經)을 볼 때 “조그만 방에 삼천대천세계를 옮겨 놓았다”는 글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신통력이라는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신통력이 아니요, 실상(實相) 그대로요, 있는 그대로인데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 때문에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좀 다른 비유이기는 하지만 CD 한장에 수백 수천의 장서(長書)가 들어가고 손톱만한 칩 하나에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가는 이치를 생각해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요점은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는 세계, 망절경계(忘絶境界) 즉 생각이 끊어진 세계를 직접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간화선 즉 화두참선을 할 때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느냐 움직여 다닐 때 일여(一如)가 되느냐, 다시 말해서 현상계(現象界)와 하나가 되느냐”하는 문제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갖고 점검했던 겁니다. 꿈속에서 화두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점검하는 방법이 몽중일여(夢中一如)이며 깊은 잠속에서 화두가 여일하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오매일여(寤寐一如)입니다. 이렇게 하는 공부점검은 그야말로 수행과 삶이 하나가 되었느냐를 점검해 보는 것인데 더 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선방에 앉아서 열심히 참선하는 것은 일상생활 즉 현상계와 하나가 되기 위함입니다. 동정일여가 되기 위함입니다. 물론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가면 동정일여니 몽중일여니 하는 것을 거치지 않고도 현상계 속에서 현상계를 초월하는 도리를 깨닫고 현상계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고 하신 겁니다.


23. 있다·없다란 생각

“인간과 자연은 하나, 환경오염의 원인은 인간의 정신오염”

▲ 둔황입구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혜국 스님과 한국의 불자들.

“약불여차(若不如此)인덴 불필수수(不必須守)니라, 만약 이 같지 않는다면 지켜선 안되느니라.”

만약 우주나 자연에게도

있다·없다·좋다·싫다 등

분별 망상이 있었다면

인간은 지구에서 추방됐을 것

부처님 가르침도 이와같아

마음이라는 불성이 없다면

번뇌가 나올 수가 없으며

번뇌가 없다면 불성도 없어

이 구절에서 지킬 게 있다면 “머물러 있다”는 말인데 머물 수 있다면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지키고 지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킬 수 있거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독립성이 있다면 이미 도(道)가 아니고 모양이 있는 상법이니까요. 가없는 허공을 나누어서 지키거나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킬게 있다면 위에서 말하는 “이와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있고 없음이 둘 아닌 법이 아니면 결코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양이 없는 허공에는 의지함이 없이 의지하기에 의지할 수 있지만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양 있는 세계는 의지할 수도 없거니와 지킬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있지만 법에는 옛과 지금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있고 없음이 둘이 아니요 예와 지금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준한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있다, 없다의 생각이 끊어지고 색과 공도 다했으니 대낮에 도둑이 장물을 가져다 바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철두철미한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런 글 쓰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받는 것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신심명’ 첫 구절에 나오는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하는 구절에 지금까지 일 년 동안 썼던 내용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바로 깨달으면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거나 직접 그 자리에서 참구수행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다못해 이런 글이라도 읽는 대가를 치르던지 법문을 듣는 상법을 통해서야 겨우 마음을 내고 발심을 하게 됩니다.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니”할 때 지도와 유혐간택은 둘이 아닙니다. 간택이 없으면 그냥 지극한 도라고, 스승들마다 그렇게 간절하고도 지극하게 보여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엄청난 가르침까지도 알음알이 지식으로 저장시킵니다. 그러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장된 업식을 다시 비워야 하는 대가를요. 중생들은 대가없는 진리의 고마움을 너무 모릅니다.

기실 공기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공기 없이는 어느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공기의 고마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공기 자체는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나 고마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꼭 같이 마실 수 있게 합니다. 고맙다 아니다 즉, 있다 없다가 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의 고마움이요 대자비인 겁니다.

이러한 대자비는 육안이라는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상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대자비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대가를 치러야 받는 걸로 착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인이 대가를 치르니 대가를 바랄 수밖에 없겠지요. 이것이 중생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계 즉, 모양 있는 상법의 한계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니까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나 귀를 통해서 상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그에 따른 감동이나 감정이 일어나거든요. 그 감동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눈이나 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허공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 법문에 “사대(四大)로 된 이 몸이 법문을 듣는 게 아니요, 허공 또한 보고 듣는 게 아니다. 법문을 청하고 역력하게 법문을 들을 줄 아는 놈이 과연 누구인가”라고 하셨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땅을 짚고 일어서는 도리입니다.

다음은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라고 이어집니다.

이 몸이 법문을 듣는 게 아니라면 이 몸을 떠나서 들으면 가능하겠습니까? 그 또한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체가 하나라고 하신 가르침이 대자비인 겁니다. 왜냐하면 ‘道’(도)란 편법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것, 그 자체이니까요.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은 보는 자와 보이는 사물에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거리가 전혀 없다면 본다는 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려고 하는 생각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듯이 거리가 없는 세계는 있다 없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곧 일체라고 하신 말씀이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왼발과 오른발이 하나가 되어야만 걸음을 걸을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 육안으로 볼 때는 왼발 다르고 오른발 다르지만 발을 움직이는 에너지 입장에서는 왼발이나 오른발이나 모두 같은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 에너지는 어느 누구 개인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대지에서 나오는 음식이나 과일 또는 공기와 물이 우리 몸에 모여서 생겨나는 만큼 우주 자연과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에너지에 어찌 이쪽이다 저쪽이다 경계가 있을 수 있으며 네 것과 내 것이 있겠습니까? 분명히 우주 자연의 에너지이건만 사람들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부터 동양에서는 그러한 에너지를 ‘기’(氣)라고 하여 모든 것을 전체로 아울러서 보려고 했고 서양에서는 따로따로 분리해서 세분화의 길을 걸어온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세분화해서 분석하다보니 어느 한 부분에서는 통하는데 전체에서 보면 막히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이 총체적인 어려움 속에서 힘겨워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1세기에 가장 큰 문제라고 하는 환경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따로따로 분리하는 안목에서 보면 환경오염이라는 환경이 따로 존재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는 입장에서는 환경과 인간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정신오염이 없다면 환경오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신오염이 먼저 해결되어야 환경오염 문제도 해결 될 텐데 정신오염을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그림자인 환경오염을 따로 해결하려니 더욱 어렵게 됩니다. 반면 선사 스님들은 애당초 전체와 부분을 둘로 보지 않았습니다. 양변을 모두 포용하고 양변을 초월하는 직관의 세계 즉 중도의 길을 보여주시려고 했을 뿐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소식일 뿐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그르쳤다고, 바로 보여주셨거든요. 그러니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일밖에 없는 겁니다.

“단능여시(但能如是)하면 하려불필(何慮不畢)이라,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엇을 걱정하랴.”

여기에서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이라는 이 소식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설명을 해도 설명할수록 본질과는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길이 끊어진 소식이요 마음 길이 멸한 자리이니까요. 그래서 신심명 첫 구절에서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고 하신 겁니다. 다만 몰록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만 놓으면 바로 “이와 같이”라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미움은 ‘증애심’만이 아니라 모든 시비분별이나 일체의 ‘사량’을 말함입니다. 그래서 선어록에서는 “만약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말이나 모든 생각에 일체 속지 말아야 한다. 오직 화두를 참구하되 생각생각 끊어지지 않게 정진하라. 행주좌와 그 어느 때나 항상 눈앞에 역력하게 부여잡고 놓지말라. 금강과 같은 발원과 태산 같은 의지로 한 생각이 만년에 이어지도록 하라”고 경책하고 있습니다. 도란 즉, 진리란 사랑하고 미워함 그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이니 미움이니 하는 말은 나와 남을 분별하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낸 단어일 뿐입니다. 우주자연은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보리를 심으면 그냥 보리가 납니다. 만약 우주 자연에 사랑과 미움이 있다면 아마도 인간들은 벌써 추방당했을 겁니다. 진리에는 선과 악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진리가 그러하니 절에서 아침저녁 울리는 범종소리도 사랑하는 이나 미워하는 이나 꼭 같이 울립니다. 종소리에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종과 종소리 또한 둘이 아닙니다. 종이 없으면 종소리 또한 없으니 종에 이미 종소리가 같이 있으니까요. 종은 종소리에 걸리지 않고 종소리는 종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 없으면 종소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종소리 없는 종은 종이 아닙니다.

학문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음이라는 불성이 없이 번뇌가 나올 수가 없고 번뇌가 없으면 불성의 작용 또한 없습니다.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둘 아니면서 또한 둘이 됩니다. 이러한 연고로 번뇌와 보리도 서로 걸리지 않습니다. 종소리가 종에서 나오듯이 번뇌도 보리에서 나옵니다. 꼭 같은 불성이건만 깨달으면 보리요 미하면 번뇌인 겁니다. 결국 깨달음으로 가는 것도 나요 미한 쪽으로 가는 것도 나입니다. 그런데 번뇌 따라 내려가는 길은 쉽게 생각됩니다. 익힌 습관을 따라가는 길이니까요. 그러나 습관 즉, 업을 고쳐나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처럼 어렵게 느껴집니다. 물론 올라가는 길, 정진이 익은 사람은 올라가는 길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되겠지요. 무르익으면 무엇이든 쉽게 느껴지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깨어있으면 보리요 잠들어 있으면 번뇌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둘 다 꿈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은 없는 것이니까요. 이미 꿈이 없다면 꿈속 얘기가 나오겠습니까? 그러한 까닭에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엇을 걱정하겠느냐고 하신 겁니다.


24. 언어도단(言語道斷) [끝]

“일체 삼라만상은 생각의 그림자요 인간이 만든 언어일 뿐”

▲ 둔황 막고굴 입구에서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과 순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라.”

道란 말로 설명하면 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임제 할’ 나온 것

부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대로 있었고 깨달은 후에도

억만년 후에도 그대로 존재”

두손 모아 합장하고 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선 믿는 마음 즉,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神)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나(我)와 신을 둘로 보는 믿음입니다. 믿는 마음을 내는 나(我)가 있고 믿어야하는 신(神)이 따로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이라고 하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봅시다. 신만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이름은 인간이 지어낸 말이며 만들어낸 단어일 뿐입니다.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이거든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이나 두려운 마음에서 의지할 곳을 찾아 고뇌하다가 사람들 자신이 신이라는 세계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에 반해서 ‘신심명’에서 말하는 신심은 나와 신이 둘이 아닌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닌 믿음이란 생각을 일으킬 줄 아는 자와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세계 즉, 전체로서의 믿음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하나요, 바닷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 역시 둘이 아님을 설명하기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둘이 아닌 세계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일체의 삼라만상이 모두 생각의 그림자니까요. 그렇다고 눈앞에 있던 산이 갑자기 없어졌다거나 눈에 보이던 사물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있고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있었는데 둘이 아님을 깨닫고 보니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나와 사물간의 거리가 없어지고 나니 전체로서의 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좋은 산이니 나쁜 산이니 하는 분별이 없어집니다. 직관이 되는 것이지요.

‘직관’이란 좋다 나쁘다는 생각 없이 그냥 볼 뿐입니다. 이러한 직관을 아인슈타인 박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거룩한 선물이라고 했더군요. 그러나 우리들 육안 즉, 육신의 눈으로는 볼 때는 볼 뿐, 들을 때는 들을 뿐인 직관이 되지 못하고 ‘좋다, 나쁘다’의 감정에 따라 색깔을 입히고 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내 생각이 덧씌워진 내 생각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믿는다는 생각이 남아있는 믿음은 둘이 아닌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는다는 생각의 틈새가 전혀 없이 믿음 그 자체가 돼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무념 무심 즉,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100%면 깨달음도 100%라는 겁니다. 영원한 자유, 영원한 현재인 겁니다. 대상이 없는 ‘空(공)’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물 하나하나가 나의 상대성이요, 걸림돌이었는데 나 하나 없음을 깨닫고 나니 우주전체가 그냥 존재 자체인 겁니다. 본래가 그러했으니까요. 결국 ‘신심명’ 전체가 이 한 소식 보여준 겁니다.

구절구절이 본래 부처인 우리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지만 오늘 이 신심명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다시 몇 구절만 살펴볼까 합니다.

신심명 첫 구절인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하는 구절이나 중간에“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는 구절 그리고, 오늘 마지막 구절인“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하는 구절은 볼수록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 가르침입니다.“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하는 대목에서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 ‘좋다, 나쁘다, 너다, 나다’하는 간택심만 몰록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나니 너니’하는 분별심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지극한 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게 진실이지만 간택심이 있는 한 지극한 도를 보기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생각이니 간택심이니, 모두가 꿈속 일이란 걸 알고 꿈에서 몰록 깨어나던지 아니면 간택심이 끊긴 무심(無心)을 위하여 피나는 정진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모든 업식이 오직 모를 뿐인 의정독로(疑精獨露)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화두참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화두 참선법 즉, 간화선이야말로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참으로 묘한 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두란 허명자조(虛明自照)이니까요. 왜냐하면 ‘덕산방’이니 ‘임제할’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거든요. 위로는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하나가 된 ‘허명자조’에서 나오는 대자비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임제할’이라고 하는 ‘할’이 나오기까지 임제 스님께서 걸어오신 공부 길을 갖고 그 할이 얼마나 대단한 할인가를 이론적으로 나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제 스님이 젊은 시절 황벽 스님의 문하에서 지낼 때라고 합니다. 임제 스님으로서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정진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조실이신 황벽 스님의 문하에 찾아 들어온지도 2년이 넘어가고 3년이 넘어가니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그 답답함이 온몸에 넘쳐났던 겁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 당시 수좌이신 목주 스님이 한 마디 하십니다.

“이 보게 젊은 수행자 그렇게 답답하고 목이 타 들어가면 조실 스님께 찾아가서 여쭈어 보게나.”

임제 스님이 “스님, 저는 도대체 무엇을 물어야할지 조차 모르겠습니다”하니 “이 사람아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어보게”라고 답합니다. 결국 임제 스님은 조실 스님을 찾아뵙고 그대로 묻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30방을 내리치는 겁니다. 한 마디도 못하고 30방을 맞고 나오니 목주 스님이 조실 스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하고 다시 묻습니다.

“아무 말씀 안하시고 30방을 때리셨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목주 스님이 “이 사람아 조실 스님께서 한 평생 도를 위하여 사신 어르신인데 그냥 때렸겠나. 다시 한 번 가보게”라고 이르십니다. 목주 스님의 격려에 임제 스님은 다시 조실 스님을 찾아 갔는데 또 다시 30방을 맞고 나온 겁니다.

이렇게 찾아 가기를 세 번, 세 번에 걸쳐 세 번 모두 30방을 맞고 나왔으니 임제 스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정말이지 죽고 싶었을 겁니다. 옛날 어른들은 스승을 믿는 마음이 요즘 사람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렇게 맞고도 생각하기를 “조실 스님께서는 오로지 우리 수행자들을 위해서 사시는 어른인데 이렇게 방을 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우둔해서 저러한 큰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하고 생각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뒤 떠날 준비를 합니다.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와서 기필코 이 은혜를 갚겠다고 길을 나섭니다. 도(道)를 위해서 이 한 목숨 온전히 바치지 않고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목주 스님이 임제 스님의 생각을 알아차려 그래도 조실 스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한다고 일러줍니다.

임제 스님은 또 그대로 따릅니다.

조실 스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자, 조실 스님께서 “어디로 가려는가”하고 묻습니다.

“예, 조실 스님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응, 저 고한에 있는 대우 스님을 찾아가 보게나.”

임제 스님은 그 길로 대우 스님을 찾아갑니다.

대우 스님의 첫 마디가 “어디서 왔는가” 하니, 임제 스님은“예, 황벽 스님 문하에 있다가 왔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이“그래 황벽 스님은 법을 어떻게 쓰는가?”라고 재차 묻습니다. 그러자“예, 법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고 3차례 참방하여 3차례나 30방을 맞았습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이에 대우 스님 하시는 말씀이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황벽 스님이 그렇게나 자비로운 법을 쓴다는 말인가”라고 찬탄하십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한마디 말씀에 크게 깨닫게 됩니다.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로심력(不勞心力)”의 도리를 깨달아 홀연히 소리하기를 “아이쿠 황벽의 불법도 몇 푼어치 안 되는 구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심불이(信心不二)입니다. 여기에서 대우 스님과의 거량이 끝나자 대우 스님 말씀이 “자네는 황벽 스님 법에 의해서 깨쳤네. 어서 돌아가게”라고 이르니 임제 스님은 다시 황벽 스님의 회상으로 돌아와서 그 법을 이으신 겁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이렇게 밖에 쓰지 못하기는 하지만 이 안에 숨겨진 임제 스님의 위법망구(爲法忘軀)나 황벽 스님과 대우 스님께서 사람을 위하는 활발발한 그 마음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은 이렇게 해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 되는 겁니다. 생각이 끊긴 자리에서, 그렇게 된다면 허명자조(虛明自照)는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됩니다. 텅 비면 밝음이요, 밝음이면 스스로 비춤이니 결국 말로 설명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겁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야 비거래금(非去來今)이로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로다”라는 의미입니다.

임제 스님이나 스승들이 스승될 때까지 걸어오신 길, 그 길이 다하고 나니 바로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겁니다. 그래서 임제의 할이 나온 겁니다. 할이란 즉, 진리란 말이 나오기 이전의 소식입니다. 불이신심(不二信心)인 것이지요. 그 사실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법, 다시 말해서 진리란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대로 있었고 내가 깨닫고 나서도, 성불하고 나서도 그대로요 억만년 후에도 그대로라고. 이 얼마나 고구정녕하신 말씀입니까? 그러니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 겁니다. 영원한 현재라면 현재가 영원한 걸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거가 없어지고, 미래도 없어지고 나니 현재도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냥 존재 자체이기에 부득이 영원한 현재라고 ‘이름’하는 겁니다.

영원한 현재가 있을 까닭이 없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겁니다.

이제 일년간 써왔던 ‘신심명’을 끝냅니다. 도(道)란 말로 설명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인데 지난 일년간 허물이 많은 줄 압니다. 생각생각에 보리심 이어지기를 발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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