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산스크리트어 Karma)을 짓지 말라>
① 업(業)이란 무엇일까.
불교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은 모호한 불교용어를 익히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과학과 달리 종교용어란 딱 잘라서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업이란 말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으나 무엇을 두고 업이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업(業)’이란 인도 힌두교와 불교에서 사용되는 카르마(karma)라는 어휘를 한역한 것으로, ‘행위(行爲)’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해위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 ‘의도된 행위(cetana)’ 를 뜻한다.
초기경전 증지부(增支部, Anguttara Nikaya)에 부처님께서 업에 대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하고서 업을 짓나니 몸과 말과 뜻으로써”라고 말씀하신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이 업을 정의하는 인용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의도적인 해위란 일상에서는 마음먹고 하는 해위란 말이다.
의도해서 몸으로 행위하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모두가 업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래서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이라 한다.
그런데 말로는 그냥 추상적으로 ‘의도한 행위(cetana)’라고 간단히 말하지만 ‘의도(意圖)’라는 말 속에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심리적인 성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내는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 삼업의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농사짓는 행위는 농업이라 하고, 장사하는 행위는 상업이라 하며,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하는 행위는 직업이라 부른다. 이 역시 모두 의도적인 행위이므로 업에 속한다. 나아가서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통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리고 좋은 행위, 나쁜 행위, 모두가 다 업(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업’이라고 할 때에 보통 죄를 지은 것(죄업)을 먼저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위를 크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있어서, 이것을 선업(kusala-karma)과 불선업(akusala-karma, 악업)이라 하는데, 업이란 선업과 악업, 즉 좋고 나쁜 행위를 다 포함한다.
그런데 ‘의도된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어떤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가 소위 말하는 업보(業報=과보)이다. 좋은 의도의 행위는 좋은 결과(善果)를 낳을 것이고, 나쁘게 의도된 행위는 나쁜 결과(惡果)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업이란 ‘의도된 행위’이지만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으므로, 결국 업이란 “어떤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는 의도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업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과보/果報)가 나타날 때, 그 결과의 원인이 된 행위라 할 수 있다.
헌데 어떤 행위이든 결과가 없는 행위가 있을까. 행위엔 반드시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는 선⋅악이라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예컨대, 배가 고파 밥을 먹는 행위, 졸려서 잠을 자는 행위, 들길을 산책하면서 들꽃을 감상하는 행위와 같은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이런 행위를 무기(無記)라 한다. 선과 악에는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따르지만, 무기에 있어서는 과보가 따르지 않는다. 말하자면 무기(無記)의 행위에 따른 무기업(無記業)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 어떤 행위든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했지만, 무기업에는 과보가 따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과보가 없는 행위도 있는 셈이다.
이상에서 대체로 짐작할 수 있듯이 업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현상이 다 포함돼 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은 과거 행위(업)의 결과(과보)로써 생기는 것이고, 또한 현재의 행위가 미래 행위(과보)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크게 보면, 과거의 업이란 자기가 저지른 행위만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 조상의 행위까지를 의미하며, 미래의 업 역시 자기가 저지른 행위가 자기의 앞날에 일어날 과보를 넘어 후손들에게 일어날 과보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조상의 업(선행과 악행)이 후손들에게 과보로써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완용(李完用)의 후손들처럼 조상의 악업에 따른 업보를 뒤집어쓰고 안절부절 못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업은 광범위하게 작용하므로 업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가 없는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다 보니 선업과 악업의 개념을 편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남이 외도를 하면 불륜이지만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식이다. 즉, 남이 하는 외도는 악업이지만 자기가 한 외도는 ― 웃으면서 만나 웃으면서 헤어진 ― 선업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따위이다. 하지만 윤리에 어긋나는 악업을 저지르면 그 과오는 반드시 미래 행위(과보)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다.
그런데 통상 “업을 짓지 말거라.”라고 하는 말을 흔히 쓴다. 이때의 업은 악업을 의미한다. 그러니 ‘업을 짓지 말거라’ 하는 말은 악업을 짓지 말라는 말이다.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괴로운 업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② 업보(業報), 업장(業藏), 업식(業識), 업력(業力)
불교는 출세간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일 뿐만이 아니라, 세간적으로도 올바른 삶을 살도록 중생들을 인도하는 가르침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교설을 초기불교에서 찾을 때, 우리는 업설(業說)을 만나게 된다.
업(karma)은 원래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부터 통용되던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업이란 행동 혹은 행위를 의미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까지도 의미했다. 즉, 업의 과보인 업보(業報)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세분해서 말하면, 업(業)은 원인, 보(報)는 결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업과 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통일성(同一性)을 띠게 된다. 업이 선(善)이면, 보도 선(善)이고, 업이 악이면 보도 악인 것이다. 즉, 선인선과(善因善果) ‧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말이 그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른바 자업자득(自業自得) 역시 인과율이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업은 모두 저장된다. 악업이나 선업이나 모두 저장된다는 말이다. 즉, 유힉학에서 말하는 제8식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이 저장돼 있는 것을 업장(業藏)이라 하는데, 그 업장에 저장된 것이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나타나서 또 그와 같은 일을 행하게 유도를 한다.
이 저장된 업이 어떤 계기로 움직여 다시 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을 업식(業識)이라 한다. 예컨대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도박행위가 업으로 업장에 저장돼 있어서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도박 생각이 나서 힘들게 하는데, 도박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업식이다.
이 업식은 조금만 긴장을 풀면 작용을 한다. 특히 악업일수록 업식이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 악업은 업력(業力, karma-vega)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박이나, 마약, 담배, 술 같은 것을 끊기가 힘든 것이다. 결국 업은 버릇을 만드는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업은 엄청난 가속도를 가진 그런 존재이다. 사실 업력(業力)이라 할 때 그 힘을 뜻하는 ‘vega’는 속력을 뜻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든 ‘힘’이란 것은 엄청난 가속력을 가진 것이니까, 그래서 업이란 좀처럼 방향을 바꿀 수가 없는 그런 성향과 가속도를 가져 탁류처럼 용틀임 치며 흘러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업력이 강한 악업일수록 수정하기가 힘들다. 마약이나 도박, 술, 담배를 끊기가 힘든 것도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한번 불륜의 수렁에 빠지면 업력의 가속력 때문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정리하기가 힘들어져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온갖 물욕, 애욕, 성욕, 식욕, 명예욕, 성취욕 등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엄청난 탐욕과 갈애의 에너지, 그리고 그런 탐욕과 갈애를 통한 엄청난 자극의 에너지, 즉 분노, 증오, 저주, 파괴, 질투, 폭력, 전쟁 등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혐오의 에너지, 이런 것이 바로 업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힘(업력)이다. 악업일수록 더 큰 업력을 가진다.
이와 같이 강력한 힘과 가속력을 가진 업은 그에 따른 심각한 결과를 수반하게 되고, 그 업보가 다시 행위가 돼 또다시 업이 되고 업력이 돼서 다른 업보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이 선업선과(善業善果)와 악업악과(惡業惡果)로 귀결된다. 이러한 업력과 그 결과를 꿰뚫어 볼 안목과 지혜를 키우는 것이 곧 수행이다.
③ 업장(業障) 소멸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치닫기만 하는 업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업을 순화시키는 업력도 있다. 즉, 자비, 인내, 관용, 평온, 평화, 고요, 침착, 반성, 참회, 지각 등의 성향이 그것이다. 이러함을 통해서 나쁜 업력을 가라앉히므로 그래도 우리사회, 그리고 개개인들의 삶이 유지되고 발전돼온 것이다.
그리하여 선한 업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평화로운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선한 업력을 통해 ‘나’라는 존재는 ‘나’만의 좋은 인격, 습관, 성향, 개성을 쌓게 된다. 그것이 어릴 때는 가정교육으로, 좀 커서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불자가 돼서 수행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 귀의해 수행을 많이 해서 올바른 인격이 형성되면 선한 업력이 생겨 악업에 따른 업장(業障)이 저절로 소멸된다.
사람들이 절을 찾고, 부처님께 귀의하며, 참선 수행을 하는 것도 결국 선업을 쌓아 악업에 따른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악업을 쌓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인 갈등은 끊일 날이 없는 지옥과 같은 사회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선업만 쌓아간다면 거기가 바로 천당이고 극락이 될 것이다.
④ 업설(業說)의 모순
그런데 문제는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즐겁고 풍요롭게 사는 사람이 있고, 선행을 하면서도 가난에 쪼들려 부자유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인자해서 살생을 하지 않았는데도 요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생을 일삼고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순을 어떤 업 이론으로 해석해야 할까?
이러한 모순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현재의 선이나 악이 금시에 결과로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그 때문에 얼른 보기에 모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업인과 업과는 자기에 국한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조상이 저질은 업의 결과에서 오는 업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중생은 반드시 과거에 지은 본인의 업만에 의해 고락을 받는 것이 아니고, 조상에 의한 업인(業因)도 있어서 이런저런 모순이 생길 수도 있다. 이완용의 후손들이 고생을 하는 것은 본인의 업보가 아니라 조상의 업보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의 사회체제 안에 그런 모순을 유발하는 결함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정부패가 만연해 정의사회가 구현되지 못한 썩은 사회일수록 이런 악인선과(惡因善果)⋅선인악과(善因惡果)라는 모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개인적인 선업만 쌓을 것이 아니라 사회모순을 극복하는 노력, 즉 현실사회의 개선과 나아가서 사회정의의 실현, 불국토 건설이라는 미래지향의 이상사회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업 사상을 제시한 부처님의 본래 뜻도 숙명론적인 과거의 업 사상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업 사상을 추구하는 것에 있었다.
⑤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은 중생의 세계는 업력(業力)에 의해 생겨난다는 세계관이다. 우리들은 스스로가 뜻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동작과 말로 업력을 일으킨다. 때문에 그 업력에 의한 잠재세력은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결과를 불러온다. 이러한 업에 의한 인과론(因果論)은 연기론(緣起論)의 다른 표현이 된다. 업에 관련된 연기설을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이라고 한다.
부파불교 시대 설일체유부에서 중시된 것이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이다.
여기에서 ‘업감(業感)‘이라고 하는 말은 업(業)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펼쳐지고 서로 간의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자기가 지은 업의 세력에 의해서 삼계가 생사윤회 한다는 업감연기설(業減緣起說)이 제기됐는데, 후에 대승불교 화엄사상에 받아들여진 연기설이다. 업감연기론은 만유가 인(因)과 연(緣)의 원리에 의해 나고, 이루어지고, 발전한다는 원리로 그 연기의 주체가 업(業)이라고 하는 학설이다.
불교는 우주만유의 생성을 연기론으로 설명한다. 기독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들은 우주의 근원으로서 조물주 혹은 창조주를 내세우지만 불교는 무신론이다. 만물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원인은 만물 밖에 있는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만물 자체 안에서 행해지는 인과법칙의 원리에 의해 생성되고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 입장이다. 그 인과(因果)의 이치를 인연(因緣)이라 하고, 인연에 의해 생기 발전한다고 하는 것이 연기설이다.
그리고 업감연기론이란 만유(萬有)가 인연의 원리에 의해 서로 인(因:근본원인)과 연(緣:보조원인)이 돼 생겨나고 이루어지고 발전한다는 것으로, 그 연기의 주체가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만유는 모두 자기가 짓는 업이라는 세력이 주체가 돼, 그것을 인으로 하고 다른 연을 만나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벌이는 일체의 행위가 하나의 세력[업]으로 잠재했다가 그 자체를 인으로 삼고 다른 연과 결합해 온갖 현상을 낳는다는 것이 업감연기론이다.
“이 세상엔 어찌해 일찍 죽는 자가 있고, 오래 사는 자가 있는가. 병 많은 자가 있고, 병 없는 자가 있는가. 용모가 추하게 생긴 자가 있고, 잘 생긴 자가 있는가. 가난하게 사는 자가 있고, 풍요롭게 사는 자가 있는가. 어리석은 자가 있고, 지혜로운 자가 있는가.”
모든 유정(有情)은 각자의 업이 있어 그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 묶여 살고, 업이 모든 유정들을 분별해 우열이 있게 한다. 즉, 이 우주 안의 유정은 모두 그 유정들이 지은 업력에 의해 자기 자신과 각자의 환경을 만들어간다.
결국 업감연기설이란 초기불교에서 삶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인과(因果)의 원리를 좀 더 확대 해석해서 인과의 원리를 중심으로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연기성을 밝히는 내용으로서 업보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업보(業報)란 선악의 행업으로 말미암은 과보(果報)를 말한다. 착한 일을 하면 선업이 쌓이고 나쁜 일을 저지르면 악업이 쌓이게 된다. 선업을 쌓든지 악업을 쌓든지 다 자신이 지은 업(業) 대로 받는 것이 업보(業報)이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나왔다.
⑥ 도업(道業)
그런데 업의 종류에는 악업(惡業)과 선업(善業) 외에 도업(道業)이 있다. 악업은 자기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선업은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도 하고 여러 가지를 베푸는 선업일지라도 자기라는 상(我相), 남이라는 상(人相), 그런 상을 못 떠나면 그때는 선업에 머무는 것일 뿐. 참다운 성불의 도업(道業)은 못 된다. 따라서 업에는 악업과 선업이 있고, ‘나’라는 상과 ‘너’라는 상을 떠나서 참다운 해탈에 이르는 도업이 있으므로, 불교인은 도업을 지어야 한다. 선업을 짓는 것은 악업보다는 낫지만, 상(相)에 매여 있으면 해탈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연말에 불우이웃돕기를 할 때도 자기 회사 이름이나 가지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는 성금은 단순한 선업일 뿐, 도업은 아니란 말이다. 보시를 하되 무주상보시(無住相報施)라야 도업이 된다.
따라서 도업을 이루어 해탈하는 것이 불도수행의 목표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불교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자각[苦]과 진단[集]과 치유[滅]와 처방[道]을 동시에 가르쳐준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존재에 대한 불안정으로 표현되는 고통의 역사임을 간파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이미 확인된다. 업설(業說)에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삶의 고통이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고, 선업을 쌓는 일 역시 스스로 하는 노력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업설의 핵심은 자업자득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기노력으로 극복하고 해결하라는 것이 결론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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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업(業, 산스크리트어 Karma)을 짓지 말라>|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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