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49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 50.“내 법어는 여러분 기도에 비하면 사족에 불과하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이라도 해 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같은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성철 인터뷰) 사람들..

성철스님 2023.07.16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 ~ 45.“쓸모없어야 도를 이룬다” 딸의 법명을 불필이라 짓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 『“성철은 천제굴을 찾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이때부터 성철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 한국 불교사에 ‘삼천배’란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승려란 결국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 부처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철은 삼천배를 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시오. 나는 해줄 게 없습니다.”』 성철은 1952년 창원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이어받은 성주사 대중이 성철을 모셔왔다. 성주사는 불모산(佛母山)에 있다. 불모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을 지칭한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를 싣고 온 왕비가 아들 7명을 입산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해서..

성철스님 2023.07.09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6. 불멸의 결사, 4종정 7총무원장이 나오다 ~ 40. 성철은 몽둥이로 말했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6. 불멸의 결사, 4종정 7총무원장이 나오다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 봉암사는 희양산 흰 바위만큼이나 높이 솟았다. 봉암사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퍼져나갔다. 선승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부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절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선방에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봉암사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본보기였고 기준이었다. 객들은 그들의 수행정진에 자신을 빗대보기도 했..

성철스님 2023.07.02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1. 깨달음 후 수행은 닦음이 아니다, 대자유 속 펼침이다 ~ 35. 봉암사의 전설, 그곳의 시간은 따로 흘렀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1. 깨달음 후 수행은 닦음이 아니다, 대자유 속 펼침이다 『“성철이 7년 동안 제방에서 머물고 있었음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보임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절인연이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성철이 봉암사로 간 까닭은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하여 지혜와 자비를 전파하려 했음일 것이다.”』 성철은 깨친 후에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송광사, 수덕사, 간월암, 법주사, 도리사, 대승사, 통도사 등 제방에서 안거를 했다. 1940년 오도송을 외친 이후 7년 동안 안거를 거르지 않았다. 이를 오후보임(悟後保任)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돈오돈수, 즉 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 대해탈경..

성철스님 2023.06.25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6. 비구니 묘엄이 탄생하다 ~ 30. 일어나 봉암사를 바라보았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6. 비구니 묘엄이 탄생하다 『"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1945년 늦봄, 14세 소녀가 대승사 산문을 넘어왔다. 청담의 둘째 딸 인순이었다. 인순은 ‘인간 사냥’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일제는 조선 부녀자들을 색출해서 일본군위안부로 끌고 갔다. 조선이라는 이름만 남았지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의병조차 사라졌다. 둘러봐도 불러봐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슬픈 산하..

성철스님 2023.06.18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1. 간월암에는 성철의 달이 떠올랐다 ~ 25. 쌍련선원의 두 연꽃, 성철과 청담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1. 간월암에는 성철의 달이 떠올랐다 『"만공의 뱃길을 따라서 성철은 1942년 봄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크게 가두는 일이었다.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경허가 천장암에 숨어든 것처럼 외딴 섬에 자신을 부렸다."』 성철은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내포지역 산사를 둘러봤다. 가야산, 상왕산, 연암산을 두루 찾아갔다. 특히 자신이 출가한 가야산이 충청도에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야산(678m)은 서산시 해미· 운산면, 예산군 덕산· 봉산면, 홍성군 갈산면, 당진군 면천면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이곳 가야산이야말로 일찍이 100개가 넘는 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신라에 남산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가야산이 있었던 것이다. 실로 부처님..

성철스님 2023.06.11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6.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20. 회갑잔치 날 아버지가 울었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6.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철은 계속 무자 화두를 들었다. 성철은 말이 줄어들었다. 눈빛은 형형했고, 특히 좌복 위에서 새벽을 맞았다. 다른 선승들은 홀로 깨어있는 성철이 무섭게 느껴졌다."』 1940년 2월,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이다. 겉으로는 권장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성은 목숨처럼 귀한 것이었다. 조상이 물려주었으니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따라서 성을 바꾸라는 것은 피를 속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백성들은 성과 이름을 고쳐야 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입학과 취직도 할 수 없고, 관청에도 출입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광수는 자신의..

성철스님 2023.06.04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1. “아무리 둘러봐도 중이 없구나, 너만은 스님이라 부를만하다.” ~ 15. 어머니를 업고 금강산을 구경하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1. “아무리 둘러봐도 중이 없구나, 너만은 스님이라 부를만하다.” "성철은 용성 스님의 손상좌였다. 용성은 성철이 정진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흡사 할아버지가 손자의 글공부를 지켜보듯 했다. 용성이 보기에 성철은 큰 그릇이었다. 제대로 배워 제대로 간다면 크게 깨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성철이 선방에 앉아있으면 그대로 그득했고, 그 뒤태만 봐도 안심이 되었다." 성철은 1936년 스승 동산 스님을 따라 부산 금정산 범어사로 옮겨갔다. 의상대사가 문무왕(678년) 때 창건했다고 알려진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이었다. 금정산과 범어사라 부르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 ‘동래현 북쪽 20리 쯤에 명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 차 있..

성철스님 2023.05.28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 “그러고도 당신들이 중이랄 수 있습니까” ~ 10. “중이 못되면 급히 죽을 사주랍니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 “그러고도 당신들이 중이랄 수 있습니까” 『"스물세 살 청년은 대원사의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대원사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의 절이었다. 작정하고 공부하러 들어간 그해 가을의 대원사 광경을 성철은 훗날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마당에는 속가의 옷들이 빨랫줄에 늘어져 있었고, 바람이 풍경을 울릴 때면 기저귀나 여자 속옷이 나부꼈다. 승려들이 왜경에게 술을 따르고 함께 고기를 뜯었다. 중들의 얼굴이 대원사계곡에 떨어진 단풍보다 붉었다."』 영주는 불교를 더 알고 싶었다. ‘문자가 없는 경’의 세계를 체험하고 싶었다. 아예 절집에 머물며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었다. 영주는 대원사를 자주 찾았다. 몸이 약해서 어릴 때부터 들렀던 절이었다. 영주가 요양(療養)이..

성철스님 2023.05.21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 저 언덕 너머로 ~ 5. 선승의 노래가 가슴을 쳤다 “아아 이런 공부가 있었구나”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 저 언덕 너머로 가야산 호령하던 호랑이, 스스로 낸 길 따라 영원의 세계에 들다 노승이 언덕을 건너가고 있었다. 해인사의 아침은 맑고 고요했다. 새소리만 퇴설당 작은 마당에 떨어졌다. 성철은 제자 원택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몸은 무척 가벼웠다. 제자는 스승의 작은 숨소리에 제 숨소리를 포갰다. 아침공양을 마친 스님 몇이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질은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며 연기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오늘 ‘가야산 호랑이’가 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몰랐다. 성철이 백련암에 올라 포효하면 가야산이 울었다. 그 일렁임과 그 울음은 어디로 스며들 것인가. 불생불멸이지만 빈 하늘은 쓸쓸했다. 비질을 멈추고 퇴설당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막 생겨난 햇살이..

성철스님 202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