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총서 고승비문 총설
1,700여년의 한국불교에는 불타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여 중생의 등불이 되고, 정법전승(正法傳承)의 주체로서 교단을 지도해 온 수많은 고승(高僧)들의 행장(行狀)이 돌에 새겨져 곳곳의 산문(山門)에 전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성사(聖史)요 문화사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이들 탑비석(塔碑石)에는 불교사의 중심에서 활동한 고승들의 위적(偉蹟)은 물론 시대를 압축하는 의미있는 문화유산(文化遺産)이 더불어 아름답고 견고하게 아로새겨져 전한다.1)
1) 이지관,『한국고승비문총집』조선조・근현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자서 (自序).
불교의 역사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교학(敎學)의 연찬과 유통의 주체인 승가(僧伽)의 활약, 대내외적인 국가와의 교섭사, 그리고 문화사전반에 걸친 폭넓은 상호영향 등 종합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교단의 핵심주체인 승가구성원들을 이해하기 위한 승사(僧史) 연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오랫동안 고승전(高僧傳)과 같은 특별한 양식으로 결집되어 전승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비명碑銘」의 형식으로 전승된 동아시아에서의 승전(僧傳) 기록은 법맥상승(法脈相承)이라는 선종(禪宗)의 각별한 의도와 전통 그리고 기록장르에서 독특한 가치를 지닌 금석문화(金石文化)와 연계되어 교단사(敎團史)를 포함한 문화사전반에 걸쳐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고승의 생애를 담아 전하는 비석은 일차기록자료로서의 의의를 갖는 동시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종합조형물로서의 예술적 의미도 포함한다. 대부분 입적(入寂) 시점에서 얼마 멀지 않은 당대에 건립되는 탑비석(塔碑石)은 옥외(屋外)에 설치되어 대중(大衆)에게 공개된다. 여타의 전적류(典籍類)와는 달리 비문은 매우 개방적이고 공적인 유산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사(文士)가 글을 짓고, 그 시대를 풍미한 서가(書家)가 글씨를 쓰며, 그 시절을 이끄는 예술가에 의해 조각되는 등 복수의 장르들이 참여하여 조성되는 탑과 비석이야말로 당대의 문화수준과 교단의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왕사(王師)나 국사(國師)를 지낸 고승탑비의 경우, 각계각층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건립 주체가 되어 진행된다. 왕실의 지원은 물론 유력한 단월(檀越)들의 동참으로 마련된 재원(財源)이 토대가 되고, 임금의 전교로 선발되는 당대 문사와 서가들의 참여는 물론 조형(造型), 각자(刻字)등 당대 최고의 공예예술과 건축기술이 총동원된다. 이 인연 위에 신명(身命)을 다하여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온 고승들의 행장이 새겨지게 된다. 이렇듯 일천 여 년간 꾸준히 찬술・제작된 고승비문은 한국불교사는 물론 지성사(知性史)와 문화사(文化史)를 아울러 조감(鳥瞰)하는 주요한 자료가 되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교계의 역사적 의미를 추적할 수 있는 전기적(傳記的) 일차자료라는 점이다. 비문은 본래 주인공의 덕화(德化)를 찬미하기 위해 작성된다. 출가동기와 승계의 획득, 구도행각, 법계전승, 그리고 문도인연 등 주인공인 1인의 상세한 행적(行蹟)뿐만 아니라, 교단내적으로는 사자(師資)나 교유관계 등은 물론 사원의 기능과 조직운영 및 승정체계 등 당대불교계의 동태를 파악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편 국가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고승들의 행적인 경우 당대 불교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대한 면모도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외에도 공적인 장에서 활동한 고승들의 비문이 갖는 중층(重層)의 서사(敍事) 구조상, 의미 있는 많은 정보들이 함축되어 전한다.
그동안 이러한 고승비문류를 포함한 비문자료들이 수집되었는데, 조선후기의『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비롯하여『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등이 간행되었다.
이렇게 수집된 수려한 문장과 촬약(撮略)한 내용의 한문으로 된 금석문은 역사연구의 일차자료로서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상, 역사, 교리, 철학, 민속, 문학, 서예, 미술 등 그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가치들이 어우러진 종합의 문학임에도, 미술과 실측분야 등은 그런대로 연구되어 왔으나, 번역과 사상연구에 있어서의 전체적인 조감(鳥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쯔라기 마쯔기(葛城末治)의『조선금석고朝鮮金石考』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라 할 수 있었던 1990년, 필자는 원력사업을 위해 개원한 가산불교문화연구원(伽山佛敎文化硏究院)에 ‘한국불교금석문(韓國佛敎金石文)’이라는 강설마당을 개설하였고, 10여년간 고승(高僧)들의 비문을 모아 구절을 띄고 체재를 정비한 후, 원문을 교감(校勘)・역주(譯註)하여, 한국불교금석교감역주총서(韓國佛敎金石文校勘譯註叢書)인『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통권 6책을 연속 간행하게 되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고승비문은 모두 역주하였고, 조선시대의 비문은 일부 작업하였다.2) 그 결과 신라시대의 고승비문 11편, 고려시대의 고승비문과 묘지명 83편, 조선시대의 고승비문 23편 등 모두 117기의 고승비문에 대한 상세한 역주작업을 마쳤으며, 아울러 종합적으로 다루지 못한 수많은 조선시대 고승들의 비문은 제방의 자료들을 조사하고 수집・채록・정리하
여『한국고승비문총집韓國高僧碑文總集』조선조・근현대편으로 묶어 2000년에 간행하였다.3) 이 총집에는 332편의 고승비문이 수록되었으며, 이중에 1910년 이전에 입적한 전통시대 고승들의 비문이 207편에 이른다.
2) 이지관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신라편, 고려편 1・2・3・4, 조선편 1, 가산불교문 화연구원,
1993・1994・1995・1996・1997・1998.
3) 이지관,『한국고승비문총집』조선조・근현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비가 건립되어 비문을 남기게 된 스님들의 위상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신라시대에 비가 세워진 고승들의 위상을 명확히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교단내외의 지도자급 고승들임에 틀림없다. 고려시대의 경우는 국사(國師), 국존(國尊) 또는 왕사(王師)등 이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던 고승의 경우 거의 모두 비문이 제작 건립되었다. 반면에 고려 중기에는 국사는 아니지만 대중에게 영향력이 컸던 스님들의 비석이 집중 건립되거나, 묘지명(墓誌銘)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스님들의 위상이나 건립주체들의 공력(功力)에 따라 기념물에도 차이가 있게 된다. 특히 신라나 고려시대의 경우 대부분은 고승이 입적하면 재가・출가의 제자들이 국왕에게 시호(諡號)를 주청하고, 이에 왕이 조칙을 내려 시호(諡號)와 탑호(塔號)를 하사하며, 근신(近臣)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는 것이 상례였다.4) 불교가 국가적 지도 이념이었던 고려시대와 달리 교세가 크게 제약받았던 조선시대에는 입적 후 출가문도들이 행장(行狀)의 초를 만들고 이를 인연 있는 문사에게 청탁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문도와 단월들이 중심이 되어 비를 건립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후세 문도들의 정성과 단월들의 원력에 따라 탑비의 규모나 형태, 비문의 분량 등에 있어서 각별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당대 권세가였던 재가자와 역동적인 문도들로 구성된 건립주체들이 왕실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가며 건립하였던 고려시대 국사급 고승들의 비석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조선조 불교계도 문도들의 정성과 힘을 다한 결과 200여 편이 넘는 고승들의 행장을 남기게 되었다.
4) 정병삼,「고려 고승 비문 역주의 과제와 방향」『고려시대연구』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p.12.
한국전통사상총서의 총론격인 본서에서는 신라시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한국불교의 상징적인 고승들의 비문 12편을 선정・게재하였다. 신라시대의 「장흥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문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文」 「하동쌍계사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河東雙溪寺眞鑑國師大空靈塔碑文」 「남포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藍浦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과, 고려시대의「충주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문忠州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文」,「여주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문驪州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文」, 「해미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문海美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文」, 「원주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문原州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文」, 「개성영통사대각국사비문開城靈通寺大覺國師碑文」, 「순천송광사불
일보조국사비문順天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文」, 「군위인각사보각국존정조탑비문軍威麟角寺普覺國尊靜照塔碑文」, 「양주태고사원증국사탑비문楊州太古寺圓證國師塔碑文」과, 조선시대의 「회양표훈사백화암청허당휴정대사비문淮陽表訓寺白華庵淸虛堂休靜大師碑文」의 12편이다.
비문들의 형식은 공통적으로 운문(韻文)의 명(銘)을 중심으로 삼고, 이에 대한 산문(散文)형식의 서문(序文)으로 실제생애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비문의 표제(標題)는 ‘○○대사비명병서(○○大師碑銘幷序)’ 곧 명(銘)과 그에 대한 서(序)로 구성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서문(序文)이 끝남과 동시에 ‘명운(銘云)’ 혹은 ‘사왈(詞曰)’로 시작되는 명문(銘文)은 산문인 서의 내용을 다시 운문인 중송(重頌)으로 읊은 것이다. 이면(裏面) 즉 「음기陰記」에는 건립주체들인 문도질(門徒秩)과 단월질 등 동참한 대중 명단이 새겨진다.
특히 나말려초 고승비문 행장(行狀)들은 일정한 유형을 보인다(표1). 유덕(有德)하고 훌륭한 가계(家系)에서 신이(神異)한 출생담을 인연하여 태어나며, 남다른 생장(生長)과정을 거쳐 발심(發心)하게 되며, 선지식을 찾아 불문(佛門)에 출가한다. 수승한 법연(法緣)을 이어 수행하다 깨달음을 얻고, 대중들에게 폭넓은 교화를 행하다가 입적하니, 그를 기리는 이들이 많았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중국에 유학하여 법맥을 전승해 온 고승의 경우 입당구법(入唐求法)의 여정이 추가된다.
산문형식의 서문(序文)이 시작되는 행장 도입부 전반부에는 주인공의 사상적 특징에 근거한 종지(宗旨)나 불교에 대한 일반적 개요를 서술하게 되는데, 선사(禪師)의 경우는 선지(禪旨)를 촬약하게 서술한 후 행장서술에 들어간다. 비문찬술의 인연담은 건립경위들과 함께 서문 후반부에 대개 쓰여지지만, 간혹 도입부에서 밝히기도 한다.
본서에서 선정하여 개제한 비문의 주인공인 고승 12인은 신라시대 선종 도입기의 대표적인 선사들과 고려초기의 선교(禪敎)에 아울러 출중하고 교단 안팎에서 중심역할을 하던 고승들, 고려중후기에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고 교단을 이끌었던 고승들과 조선후기 불교계의 태두로 꼽히는 고승등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고승들이다.
본서에 수록된 12편 비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01) 「장흥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문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文」
■제원┃ 신라 헌강왕 10년(884) 건립, ▶보물 제158호, ▶크기:총 높이 3.46m, ▶소재지: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 ▶찬자(撰者):김영(金穎), ▶서자:김원(金薳)의 해서(解書), 김언경(金彦卿)의 행서(行書), ▶각자:현창(賢暢).
장흥 보림사에 보조선사창성탑과 나란히 건립된 보조선사 체징(體澄)의 비이다. 귀부(龜部)와 이수(螭首) 그리고 이수에 제액(題額)을 제대로 갖춘 전형적인 비석형태를 보여준다. 현재도 많은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만큼 비면 상태가 양호하다. 보조선사는 웅진 출신의 김씨로 804년(애장왕 5)에 태어나 권(勸)법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24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설악산 억성사에서 염거(廉居)화상에게서 수학하여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 837년 중국에 유학하여 840년에 귀국한 후 교화활동을 펴다가 858년에는 무주 황학난야(黃壑蘭若)에 주석하였으며, 국왕의 청으로 가지산사(迦智山寺, 입적 후 寶林寺로 사액)로 옮겨 수행하였다. 858년에는 김수종과 헌안왕 등의 시주로 보림사에 철조비로자나불을 조성 봉안하였으며, 880년(헌강왕 6)에
77세로 입적하였다. 선종 구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창조(開倉祖)로 추앙되었으며, 특히 법맥이 보조선사 → 염거 → 도의(道義)로 거슬러 올라가 남종선(南宗禪)을 처음으로 도입한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위상에 따라 선문종가(禪門宗家)로까지 추앙받았다. 비문에서도 보조선사를 우리나라 선종의 제3조로 기술하였다. 입적한 지 4년만인 884년(헌강왕 10)에 건립된 비는 이 시기 선배 스님들보다 건립 연대가 빠르다. 비문을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 두 사람이 나누어 쓴 것이 특징으로, 한 비면에 다른 글씨체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가지산문의 개창과 조종(祖宗) 계승의식 그리고 신라 하대 선종의 형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02)「하동쌍계사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河東雙溪寺眞鑑國師大空靈塔碑文」
■제원┃ 신라 진성왕 원년(887년) 건립, ▶국보 제47호, ▶크기:총 높이 3.63m, 비신 높이 2.13m, 너비 1.03m, ▶소재지: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찬자:최치원(崔致遠), ▶서자:최치원(崔致遠) 해서, ▶각자:환영(奐榮).
하동 쌍계사에 건립된 진감선사 혜소(慧昭)의 비로서, 진감선사탑은 거리가 조금 떨어진 인근에 세워져 있다. 귀부에 이수를 갖추었으며 남아 있는 비면의 글씨는 선명하게 보존되었으나 일부분 훼손되었고 크게 세 부분으로 파손되어 철제틀로 보호받고 있다. 진감선사는 금마 출신의 최씨로 774년(혜공왕 10)에 태어나 젊어서는 생선장사를 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804년에 중국에 유학하여 신감대사(神鑑大師)에게 인가를 받고 810년에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도의를 만나 함께 수도하다가 종남산으로 옮겨 수행한 후 830년에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長栢寺)에서 교화하다가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겨 교화를 펼쳤다. 838년에 민애왕이 혜소라는 호를 내리고 다시 옥천사(玉泉寺, 입적 후 ‘쌍계사’ 제액을 내림)를 창건하여 주석하였다. 850년(문성왕 12)에 77세로 입적하였다. 진감선사는 선사(禪師)로서의 가풍외에도 범패(梵唄)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진감선사가 활동한 쌍계사는 구산선문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신라말에 희양산문의 긍양(兢讓)이 자신이 혜소의 증손제자(曾孫弟子)라 칭하여 산문의 법맥을 계승하였음을 표방하였다. 최치원이 짓고 구양순체의 수려한 문체로 직접 쓴 유일한 비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03)「남포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藍浦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
■제원┃ 신라 진성여왕 4년(890) 이후 건립, ▶국보 제8호, ▶크기:총높이 4.55m 비신높이 2.51m 폭 1.48m, ▶소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지, ▶찬자:최치원(崔致遠), ▶서자:최인연(崔仁渷) 해서, ▶각자 미상.
보령 성주사터에 있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비로서, 낭혜화상탑은 남아 있지 않다. 귀부와 이수를 갖춘 거대한 비인데 비문에 담긴 내용이 5,120자에 달하여 역대 비문 중 가장 긴 편에 속하는 거비(巨碑)이다. 일부 마모된 글자를 제외하고는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낭혜화상은 김씨로 무열왕(武烈王)의 8대손이다. 특히 부친이 진골에서 6두품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음을 비문에 전하고 있어 신분제 상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800년(애장왕 1)에 출생하여 13세에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여 법성(法性)선사에게 수학한 후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우다 821년 경(헌덕왕 13) 중국에 유학하여 불광사 여만(如滿)에게 도를 묻고 마곡보철(麻谷寶徹)을 만나 인가를 받았다.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여 847년 경에 성주사를 짓고 교화하였다. 경문왕이 871년에 궁궐로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고 상주 심묘사(深妙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성주사에 주석하며 헌강왕의 명으로 다시 궁궐로 나와 법석(法席)을 폈다. 888년(진성여왕 2)에 89세로 입적하였고, 입적한 지 2년만에 비를 세웠다. 비문은 최치원이 지었는데 비문 중에 고려 왕의 피휘(避諱) 글자가 보여 어떤 연유에서인지 고려에 들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서는 낭혜화상의 비가 성주사비 이외에 헌강왕이 지은 심묘사(深妙寺)비도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04)「충주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문 忠州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文」
■제원┃ 고려 태조 26년(943) 건립, ▶보물 제17호, ▶크기:총높이 3.22m 너비 1.50m 두께 31cm, ▶소재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 ▶찬자:최언위(崔彦 ), ▶서자:구족달(仇足達) 해서, ▶각자:승(僧)광예(光乂)・장초(壯超)・행총(幸聰)・행초(行超).
충주 정토사 터에 있는 법경대사 현휘(玄暉)의 비이다. 원래 비의 자리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 인근으로 옮겨졌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는데 비면에 총탄 자국이 많이 나있어 글자가 손상되었다. 법경대사는 879년(헌강왕 5)에 남원에서 이씨로 태어나 영각산사의 심광(深光)대사에게 출가한 후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선수행을 하다 906년에 당에 건너가 구봉도건(九峰道虔)의 법을 받고 제방(諸方)을 유력한 후 924년에 귀국하였다. 태조에 의해 국사 대우를 받고 정토사에서 교화 활동을 폈으며, 이 지역 호족인 유권열(劉權說)의 귀의를 받기도 하였다. 941년(태조 24)에 63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2년만에 세웠고 「음기」은 944년에 썼다. 법경대사는 선교(禪敎)를 아우르는 사상적 경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고려초 불교사상사에 있어
서 중요하다.「음기」에는 도속(道俗)의 많은 사람들이 수록되어 있어 고려초기의 지방통치체제와 승관(僧官)과 삼강전(三綱典) 등 사직(寺職)의 연구자료로서도 활용된다.
05)「여주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문驪州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文」
■제원┃ 고려 광종 26년(975) 건립, ▶보물 제6호, ▶크기:높이 2.79m 너비 1.60m 두께 33cm, 글자크기 2.1cm, ▶원소재지: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현소재지:국립중앙박물관, ▶찬자:김정언(金廷彦), ▶서자:장단열(張端說) 해서, ▶각자:이정순(李貞順).
여주 고달사 터에 있던 원종대사 찬유(璨幽)의 비이다. 거대한 형태에 수려한 조각의 귀부와 이수는 원터에 남아 있고, 비신은 8조각으로 파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파손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글자의 판독이 가능하다. 원종대사탑은 원비 자리에서 약간 떨어진 고달사터에 남아있다. 원종대사는 하남 출신의 김씨로 869년(경문왕 9)에 태어나 삼랑사의
융제(融諦)선사에게 배우고, 융제의 권유로 혜목산의 심희(審希)에게 수학하였다. 22세에 구족계를 받고 스승을 따라 광주 송계선원에서 수행하였으며, 892년에 당에 건너가 투자대동(投子大同)의 법을 잇고 제방을 구도행각하다 921년에 귀국하였다. 태조를 만나 법연(法緣)을 맺고 혜목산에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혜종과 정종으로부터도 귀의를 받았으며, 광종 때 국사로 책봉되어 활동하다 958년(광종 9)에 90세로 입적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17년 뒤에 비가 건립되었으며, 2년 뒤인 977년(경종 2)에「음기」를 기록하였다. 원종대사는 광종대를 중심으로한 고려초 불교사의 전개에 중심이 되는 고승이다.「음기」에 고달원이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3대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중시되었음을 기록한 내용은 고려초 불교교단 이해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강전과 탑비 건립에 관련된 직책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도 중요한 내용이다.
06)「해미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문海美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文」
■제원┃ 고려 경종 3년(978) 건립, ▶보물 제106호, ▶크기:총높이 4.25m 비신높이 2.40m 폭 1.16m 두께 29cm, 글자 크기 1.5cm, ▶소재지: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찬자:김정언(金廷彦), ▶서자:한윤(韓允) 해서, ▶각자:김승렴(金承廉).
서산 보원사 터에 있는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비로서, 법인국사탑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귀부와 이수를 잘 갖추고 승탑과도 짝을 이루어 서 있어 탑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법인국사는 900년(효공왕 4)에 태어나 장의사의 신엄(信嚴)에게 화엄을 배운 화엄종 고승이다.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921년에 태조가 시행한 승과를 주관하였고, 기도하여 광종을 낳게 하여 깊은 법연을 맺었다. 구룡산사에서 화엄을 강설하였고, 942년에 재해를 물리치고자 반야경을 강설하였다. 혜종은 스님을 스승으로 추대하였으며, 광종은 귀법사를 창건하여 주지하게 하고 말년에 국사로 책봉하였다. 법인국사는 보원사에 돌아가 975년(광종 26)에 76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국사 입적후 3년 뒤인 978년(경종 3)에 세웠다. 고려초에 선종 위주에서 교종의 활동이 증대되는 불교계의 변화상을 화엄종을 중심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제(碑題)에 삼중대사를 적어 넣는 등 승과시행이후 법계를 중시하던 당시 양상을 볼 수 있다.
07)「원주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문原州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文」
■제원┃ 고려 선종 2년(1085) 건립, ▶국보 제59호, ▶크기:총높이 4.55m 비신높이 2.95m 너비 1.40m 글자크기 2.1cm,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 ▶찬자:정유산(鄭惟産), ▶서자:안민후(安民厚) 해서, ▶각자:이영보(李英輔)・장자춘(張子春).
원주 법천사 터에 있는 지광국사 해린(海鱗)의 비로서, 우수한 솜씨로 조각한 귀부와 이수마저 갖추고 잘 보존되어 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방형(方形)에 휘장을 드리운 특유의 형태로서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 곁에 이건되어 있다. 지광국사는 원주 출신의 원씨로 984년(성종 3)에 태어나 법천사의 관웅(寬雄)에게 배우다 해안사의 준광(俊光)에게 출가하여 수학하였다. 16세에 구족계를 받고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의 법계를 받았다. 1013년에 대사가 되고 약 10년 후에 중대사, 1031년 경에는 삼중대사를 받았다. 궁궐에서『법화경』을 강설하였으며 이자연의 아들 소현(韶顯)을 제자로 두었다. 1054년에 문종이 현화사(玄化寺)에 주석하게 하였으며 1056년에 왕사, 1058년에 국사로 연이어 책봉하였다. 1070년(문종 24)에 87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입적 후 15년이 지난 1085년(선종 2)에 세웠다. 지광국사는 법상종(法相宗)의 고승으로 고려 교종교단의 활동을 대표하는 고승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왕사로 책봉할 때의 과정과 승계가 올라갈 때마다 가사를 하사받고 법호를 받았던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불교교단운영의 실태를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음기」에는 문도를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 선후사이몰세자(先後師而沒世者)로 구분하여 1400인에 이르는 대중질을 새겨넣은 것이 특징이다.
08)「개성영통사대각국사비문開城靈通寺大覺國師碑文」
■제원┃ 고려 인종 3년(1125) 건립, ▶크기:총높이 4.32m 비신높이 2.92m 너비 1.58m 두께 18.2cm, 글자크기 1.8cm, ▶소재지: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 영통사지, ▶찬자:김부식(金富軾), ▶서자:오언후(吳彦侯) 해서, ▶각자:미상.
북한 지역인 개성 영통사 터에 있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로서 비전면 하반부가 손상되기는 하였으나 귀부에 이수 대신 가첨석의 상부가 잘 남아 있다. 대각국사는 1055년(문종 9)에 문종의 제4자로 태어나 11세에 영통사에서 화엄종의 경덕국사(景德國師) 문하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화엄을 비롯하여 대소승경전과 외전을 익혔다. 1067년에 승통이 되고, 1085년에 송에 가서 14개월 동안 50여 명의 고승들을 만나고 4천여권의 전적을 수집하여 돌아왔다. 흥왕사에서 교장(敎藏)을 간행하고 홍원사, 해인사, 흥왕사 등에서 활동하였다. 1097년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립하고『원종문류圓宗文類』를 편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101년(숙종 6)에 47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곧바로 윤관(尹瓘)이 쓴 비가 세워졌는
데, 이 영통사비는 입적 24년이 지나 문도들의 의견 차이로 화엄종(華嚴宗) 문도들에 의해 새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7년 후에는 천태종(天台宗) 문도들에 의해 선봉사비가 건립되었고, 입적 후 만든 묘지명도 있어 세 종류의 기록이 남아 있다. 묘지와 비, 그리고 비의 건립 주체에 따라 내용이 어떻게 다른 지를 비견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음기」에는 탑을 세우는 과정에 동참한 인물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문도들을 본래 대각국사의 스승인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던 대중과 대각국사의 제자를 구분하여 실었다.
09)「순천송광사불일보조국사비문順天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文」
■제원┃ 고려 강종 2년(1213) 건립, ▶조선 숙종 4년(1678) 중건, ▶크기:전체 높이 3.94m 비신높이 2.53m 너비 1.0m, ▶소재지: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 ▶찬자:김군수(金君綏), ▶서자:유신(柳伸) 해서, ▶각자:보창(寶昌).
순천 송광사에 있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비로서, 비는 본 절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부도전에 있고 보조국사탑은 송광사 경내에 있다. 보조국사는 동주(황해도 瑞興) 출신의 정씨로 1158년(의종 12)에 태어나 조계종의 종휘(宗徽)선사에게 출가하여 수학하다 25세에 승과에 급제하였다.『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깨침을 얻었고,『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고 이치를 알았으며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고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동료들과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수행을 선도하고 상무주암을 거쳐 1200년에 송광산 길상사(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바꿈)로 옮겨 수백명의 입사자(入仕者)를 지도하며 정진하다가 1210년(희종 6)에 53세로 입적하였다. 입적한지 3년 후 1213년(강종 2)에 비가 세워졌으나 조선시대에 임란으로 비가 무너져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원 비문을 다시 새겨 1678년(숙종 4)에 중건하였다. 이에따라 현재의 비는 전면과 후면 전반에 걸쳐 원 비문을 다시 쓰고, 후면에는 중건 배경과 건립 참여자들을 수록하였다. 보조국사는 고려 후기 결사불교(結社佛敎)를 선도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 관점에서 선사상을 집대성한 최고의 사상가였다. 이 비문은 보조국사의 수행과정을 차례로 잘 묘사하였고 사상적 핵심도 산문으로 요약 제시하여 요점과 세밀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또한 비의 손상과 재건 사정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10)「군위인각사보각국존정조탑비문軍威麟角寺普覺國尊靜照塔碑文」
■제원┃ 고려 충렬왕 21년(1295) 건립, ▶보물 제428호, ▶크기:비신높이 1.80m 폭 1.01m 두께 15cm 추정, 글자크기 1.8cm, ▶소재지: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 ▶찬자:민지(閔漬), ▶서자:왕희지체를 죽허(竹虛)가 집(集)했다. 행서, ▶각자:미상.
군위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 일연(一然)의 비로서, 인각사 인근 산중에 있었으나 하부의 극히 일부만 남아 현재 인각사 경내에 옮겨 보존되고 있다. 보각국사는 경산 출신의 김씨로 1206년(희종 2)에 태어나 무량사(無量寺)에서 수학하고 1219년에 진전사(陳田寺) 대웅(大雄)에게 출가하여 1227년 승과에 급제하였다. 포산 보당암에서 수행하다 몽고 침공을 맞아 오랫동안 무주암 등의 포산에서 지냈다. 1249년에 남해 정림사 주지가 되고 1259년에 왕명으로 개경 선월사에 주석하였으며 오어사, 인홍사를 거쳐 1277년에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었다. 1283년에 국존(國尊)에 책봉되고 포산에 물러나 노모를 봉양하기도 하였다. 1284년에 인각사에 주석하다 1289년(충렬왕 15)에 84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입적한 지 6년만인 1295년(충렬왕 21)에 세웠다.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남아 있는 부분이 아주 적으나, 시점을 달리하는 20여 종의 탁본이 남아 있어 비 전체를 거의 복원할 수 있었다.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과 선문답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 특이하다.「음기」는 문인 산립(山立)이 지었는데 국사의 특별한 행적 몇 가지를 기록하고 문도들을 스님들과 재가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여기에 열거한 승계 가운데 대선(大選), 입선(入選), 참학(參學) 등 본래 고려 승계에는 없는 내용들이 주목되는 자료이며, 십 여인의 재상과 추신(樞臣)을 비롯한 40여 인의 재가신도 명단은 당시 불교계와 사회 관계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의미있는 자료이다.
11)「양주태고사원증국사탑비문楊州太古寺圓證國師塔碑文」
■제원┃ 고려 우왕 11년(1385) 건립, ▶보물 제611호, ▶크기:총높이 3.42m 비신높이 2.27m 너비 1.07m 글자크기 2.7cm, ▶소재지: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태고사, ▶찬자:이색(李穡), ▶서자:권주(權鑄) 해서, ▶각자:미상.
북한산 태고사에 있는 원증국사 태고보우(太古普愚)의 비로서, 귀부에 운문(雲紋)과 연화문(蓮花紋)의 이수를 갖춘 모습으로 원증국사탑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부가 마모되었으나 나머지 비면은 글씨를 대체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원증국사는 홍주 출신의 홍씨로 1301년(충렬왕 27)에 태어나 회암사 광지(廣智)선사에게 출가하여, 만법귀일(萬法歸一) 조주무자(趙州無字) 등의 화두를 참구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1341년에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며『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짓고 1346년에 원에 유학하여 임제의 18대손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었다. 1348년에 귀국하여 소설산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였고, 1356년에 개성 봉은사 법회를 주관하여 왕사에 책봉되고 원융부를 중심으로 구산(九山) 통합 운동을 펼쳤다. 신돈에 의해 속리산에 금고당하기도 하였으나 신돈 실각 후 다시 왕의 존숭을 받았고, 1381년에 국사에 책봉되었으며 1382년(우왕 8)에 82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입적 3년 후인 1385년(우왕 11년)에 세웠다. 원증국사의 기념물은 태고사 외에도 가은 양산사와 양평 사나사에 석종, 미원 소설암에 석탑이 세워졌는데, 사나사에 있는 비문은 내용이 매우 소략하여 이 태고사비와 비교가 된다.「음기」에는 문도를 승계에 따라 열거하고 고관 중심의 재가신도가 수록되었다. 고려 말기에 교단의 중심을 이루었던 원증국사의 활동은 물론 신돈등 당시 교단과 권력과의 관계를 추이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2)「회양표훈사백화암청허당휴정대사비문淮陽表訓寺白華庵淸虛堂休靜大師碑文」
■제원┃ 조선 1632년(인조10년) 건립, ▶크기:전체높이 5.41m 비신높이 2.76m 너비 1.05m 두께 43cm, ▶소재지:강원도 금강면 내강리 연래동 백화암, ▶찬자:이정구(李廷龜), ▶서자:신익성(申翊聖) 해서, ▶각자:미상.
금강산 백화암에 있는 청허대사의 비로서 귀부와 변형된 이수를 갖추었고, 비신이 정방형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청허대사 휴정(休靜)은 안주 출신의 완산(完山) 최씨로 1520년(중종 15)에 태어나 지리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전을 탐구하다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21세에 숭인(崇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하여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를 지내다가 금강산에 은거하여 수행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四溟)대사 등 제자들과 함께 승군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 등의 활약을 보였으나, 전쟁이 끝나자 승직을 버리고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 등을 왕래하며 수행하다가 묘향산에서 1604년(선조 37)에 85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입적한 지 26년만인 1630년에 세웠으나 2년 후인 1632
년에 다시 세운 비가 현재 남아 있다. 청허대사의 탑은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도 세워졌고, 이후에도 여러 개가 더 세워졌으니 1647년에 대흥사비, 1742년에 밀양 표충사비, 1791년에 대흥사 표충사비 등이다. 청허대사는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사상을 정립하고 많은 문도를 양성하여 조선후기 불교의 태두로 평가되는 고승이다. 신라나 고려시대에 국가적 추
앙을 받던 고승들의 탑비 규모와 비교되는 간략한 생애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건립되었다.
【부록】에 실은 3편의 비문은『한국고승비문총집』조선조・근현대편에 실린 비문 332편 중에서 1910년 이전을 경계로 생존했던 비구니스님들의 부도비명(浮屠碑銘) 3편이다. 고승의 반열에 든 스님들은 아니지만 전통시대 일천년간에 제작・전승된 고승비문 300여 편 중 유독 남아 전하는 비구니 비문이다. 현재 한국불교계의 비구니승가 위상은 여타의 불교권, 특히 비
구니승가가 단절된 남방불교권 등에 비교해 유수하게 현전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한국불교의 전통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전통사상총서의 편찬취지 등을 고려하여 이에 부록으로 싣는다.
01)「고성신계사비구니낙암당사신비문高城神溪寺比丘尼洛庵堂思信碑文」
1767년 건립된 사신비구니(思信比丘尼)의 부도비문이다. 경성사람으로 서울 미타암으로 출가하여 법찬비구니를 은사로 득도하였고, 금강산 신계사로 옮겨 수행하다 1765년 열반하였기에, 부도는 금강산 신계사에 있다. 비명은 매우 간략하고 찬자 또한 알수 없지만, 은사(恩師)・도제(徒弟) 등의 법명을 전하고 있어, 독립된 비구니승가의 법계전승이 잘 되고 있었던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02)「영변보현사비구니정유여대사비문寧邊普賢寺比丘尼定有女大師碑文」
1717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782년 입적한 정유대사(定有大師)의 비명이다. 조선조 채제공(蔡濟恭)이 비문을 써『번암집樊巖集』에 실려있고, 묘향산 보현사 칠성암에 건립되어 많이 알려졌다. 평양출신으로 재가에 있으면서 기도정진하다가 60세에 늦게 장단 화장사(華藏寺)로 출가하였다. 출가 6년 후 입적한 정유대사의 비는 묘향산 보현사에 세워졌다. 채제공의 불교에 대한 상념(想念)을 엿볼 수 있다
03)「정읍내장사비구니세만공덕기념비문井邑內藏寺比丘尼世萬功德記念碑文」
한강이남에 드물게 전하는 전통시대 비구니 비문이다. 세만(世萬)비구니 스님의 내장사・영은암 중창불사의 공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찬자 또한 근대고승인 석전정호(石顚鼎鎬)스님이다. 그의 문집인『석전문초石顚文鈔』에 남아있으며, 기념비도 내장사 비림(碑林)에 남아 전한다. 찬자는 육조혜능스님의 남종선풍(南宗禪風) 선양도량인 보림사(寶林寺) 중창의 원력을 다한 중국의 무진장비구니(無盡藏比丘尼)의 일화를 옮겨와 세만스님의 공덕을 찬하고 있다.
위 3편의 비구니비명은 일찍이 내면의 수행을 정갈히 하여 출가하고, 비구니승가의 독립된 도제전통에 귀속되어, 불사에 조력하는 등의 수행상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지만, 출생지, 출가사찰, 득도시 은사(恩師)와 수계법사(授戒法師), 출가 후 수행처와 제자, 열반을 맞은 마지막 인연처 등 비구니수행자들의 각기 차별한 행적을 통해 당대 비구니승가의 면면을 여러모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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