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개성영통사대각국사비문1)
開城靈通寺2)大覺國師碑文
1) 이 비문은 [苑]과 [總覽]에는 결락이 너무 많아 [全文]을 저본으로 하고, 조명기
(趙明基) 저(著),『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에 실려 있는 비문을 [碑文]으로 표
기하였다.『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外集)권12에도 비문이 실려 있다.
2) 영통사(靈通寺):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오관산(五冠山) 밑에 위치.『범우
고梵宇攷』에 의하면 개성군 영북면(嶺北面) 현화리(玄花里) 영통사는 동서로는
약 150칸, 남북으로는 약 80칸이나 되는 대규모 사찰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려
제10대 정종(靖宗) 2년(1036) 5월 14일 왕실에서는 왕자(王子)가 4인 이상이면
한 왕자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영통사·숭법사(崇法寺)·보원사(普願寺)·동화
사(桐華寺) 등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경과 율을 시험보았다. 영통사에는 오
층석탑(五層石塔) 1기와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 및 당간석주(幢竿石柱)가 남아
있다.『대각국사문집』(외집)권12와 조명기 저,『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등에
비문(碑文)이 실려 있다
있는 곳3):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영통사 터
세운 때4):고려 인종 3년 을사 (1125)
所 在:京畿道 開豊郡 嶺南面 玄化里 靈通寺址
年 代:高麗 仁宗 3年 (1125)
3) 소재(所在):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오관산(五冠山) 영통사 터에 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는 “靈通寺 大覺國師碑 在長湍 五冠山 工部侍郞 吳
彦候 書 平章事 金富軾文”이라 하였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2「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불우佛宇’에는 “靈通寺 在五冠山下 洞府深邃 山
勢周遭 流水縵廻 樹林蓊鬱 其西樓勝槪 爲松都第一 寺有金富軾 所撰 義天塔銘
又有高麗文宗眞及洪自藩像”이라 하였다.
4) 연대(年代):대각국사(大覺國師)의 비(碑)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오관
산 영통사와 경북 칠곡군 북삼면 숭조리 남숭산(南崇山) 선봉사(仙鳳寺)에 있
다. 오관산비(五冠山碑)에는 ‘대화엄영통사(大華嚴靈通寺)’라 하고, 남숭산비(南
崇山碑)에서는 ‘해동천태시조(海東天台始祖)’라 제명(題名)하였다. 영통사는 의
천(義天)이 입적한 후 25년(1125)에 세웠고, 선봉사비는 사후(死後) 31년(1132)
만에 세워졌는데, 먼저 영통사비를 건립하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선봉사비가 세
워진 셈이다. 미루어 보건대 영통사 비명은 대각국사가 화엄종(華嚴宗)에 있을
때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워졌고, 선봉사비는 함께 입송구법(入宋求法)하여 천
태종(天台宗)을 전래(傳來)한 문인들과 화엄종에서 천태종으로 따라간 제자들
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증시(贈諡)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제액]
고려국(高麗國) 오관산5) 대화엄(大華嚴) 영통사(靈通寺) 증시(贈諡) 대
각국사비명6)과 아울러 서문(序文).
贈諡大覺國師, 碑銘. [題額]
高麗國, 五冠山, 大華嚴靈通寺, 贈諡大覺國師, 碑銘, 竝序.
5) 오관산(五冠山):전국(全國) 명산(名山) 중의 하나이니, 동(東)에는 치악산(雉岳
山)으로 원주(原州)에 있고, 남(南)에는 계룡산(鷄龍山)으로 공주(公州)에 있으
며, 죽령산(竹嶺山)은 단양(丹陽)에 있고, 우불산(亏佛山)은 울산(蔚山)에 있으
며, 주흘산(主屹山)은 문경(聞慶)에 있고,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으
며, 중앙(中央)에는 목멱산(木覓山), 서(西)의 오관산은 장단(長湍)에 있고, 우이
산(牛耳山)은 해주(海州)에 있으며, 북(北)의 감악산(紺岳山)은 적성(積城)에 있
고, 의관산(義館山)은 회양(淮陽)에 있다.
6) 비의 보존상태:하반부가 파손되었고, 비신(碑身)의 높이는 9자 6치 5푼, 넓이는
자 2치, 51행인데, 1행에 약 80여 자(字)이다. 뒷면 음기에는 사적기(寺蹟記)를
새겼는데, 15행으로써 1행에 40~60여 자(字)이고, 중간에는 문도(門徒)와 직명
(職名)이 새겨져 있다.
금자광록대부7) 검교8)태위(太尉)9) 사도10) 중서시랑과 중서문하11)평장
사 판상서예부사12) 수국사(修國史) 상주국13) 신 김부식14)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조산랑15) 상서(尙書)공부시랑16)이며 자금어대17)를 하사 받은 신 오언
후18)는 칙선(勅宣)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金紫光祿大夫, 檢校太尉, 守19)司徒,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
章事, 判尙書禮部事, 修國史, 上柱20)國, 臣, 金富21)軾,22) 奉宣,
撰.
朝散郞, 尙書, 工部侍郞, 賜紫金23)魚24)袋,25) 臣,26) 吳27)彦28)侯,29)
奉30)宣31)書,32) 竝篆額.33)
7)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 문산계(文散階)의 관계(官階) 중 하나 종3
품(從三品)으로 문종 때 제정. 1275년(충렬왕1)부터 이 칭호가 없어졌다가 1356
년(공민왕5)에 환원되어 종3품상으로 되었으며, 1362년(공민왕11)에 폐지되고,
1369년(공민왕18)에 정2품상(正二品上)으로 정하였다. 「원종대사혜진탑비문元
宗大師惠眞塔碑文」 주4)광록대부光祿大夫 본서 p.238 참조.
8) 검교(檢校):고려에서 조선까지의 정원(定員) 이상으로 벼슬 자리를 임시로 늘리
거나, 공사(公事)를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갖게 할 경우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이던
말. 예컨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검교정승(檢校政丞)과 같은 경우이다.
「대경대사현기탑비문大鏡大師玄機塔碑文」 주2)검교檢校 [고려편1] p.69 등 참조.
9) 태위(太尉):고려시대의 관직. 정1품. 삼사(三師;太師, 太傅, 太保)와 함께 최고
명예직이었던 삼공(三公;太尉, 司徒, 司空)의 하나.
10) 사도(司徒):중국 주(周)나라 때 6경(卿)의 하나, 예교(禮敎)로써 국민을 개도하
는 직책을 맡은 관직. 한대(漢代)에는 승상(丞相)을 대사도(大司徒)라 개칭(改
稱)하였다. 고려 삼공(三公)의 하나임.
11)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고려 때의 관직. 문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
下侍郞平章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하평장사, 중서평장사를 각
1인씩 두었으나 실제로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
事)와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운영되는 경우
가 많았다.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구분되지 않고 중서문하성으로서 운
영되었고, 평장사 또한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평장사는
중서성과 문하성의 구별을 초월하여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으로서 함께 국사
를 논의하였다.
12)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고려 때의 관직. 상서성에 육부를 두고 그 책임자
로 육부상서(尙書:정3품)를 두었으나,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들이 6부의 판
사를 겸하게 되어 수상은 이부, 아상(亞相)은 병부 등 서열대로 6부 상서의 위에
서 직무를 감독, 지휘하도록 하였다. 김부식은 중서시랑으로서 판예부사를 겸
직한 것이다. 상서는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조(工曹) 등 6부
에 두었던 정3품(正三品) 관직으로서 이 상서(尙書) 위에 종1품(從一品)인 판사
(判事)의 관직이 있어 재신(宰臣)이 겸임하고 있었으나, 실무를 맡는 것은 아니
고, 다만 횡적(橫的)인 연락과 감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서가 실제 일을 맡
아보는 장관(長官)이었다.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문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文」
주3)상서尙書 [고려편1] p.19;「대경대사현기탑비문」 주3)상서尙書 [고려편
1] p.69;「선각대사편광탑비문先覺大師遍光塔碑文」 주2)상서尙書 [고려편1]
p.271;「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文」 주4)상서尙書 [고려편2] p.272;「지광국
사현묘탑비문智光國師玄妙塔碑文」 주9)판상서判尙書 [고려편2] p.359;「원융
국사비문」 주5)예부禮部 [고려편2] p.272 등 참조.
13) 상주국(上柱國):고려의 훈계(勳階). 문종 때 훈계를 정하여 상주국은 정2품으
로 하였으나 충렬왕 이후에 폐지되었다. 「적연국사자광탑비문寂然國師慈光塔
碑文」 주7)주국柱國 [고려편2] p.193;「혜소국사탑비문慧炤國師塔碑文」 주6)주
국柱國 [고려편2] p.307 등 참조.
14) 김부식(金富軾):1075~1151. 고려의 문신. 자(字)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
川),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경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근(覲)의 셋째
아들. 장자(長子)는 부필(富弼). 차자(次子)는 부일(富佾). 삼자(三子)는 부식, 사
자(四子)는 부의(富儀)이다. 4형제가 모두 당시 이름난 학자이나, 그 중 김부식
이 더욱 유명하였다.
15) 조산랑(朝散郞):고려 때 문관의 품계. 문산계로 문종 때에 둔 종5품하로 1308년
에 폐지하고, 1365년 종4품하로 올렸다가 1362년에 폐지, 1369년 종4품상으로
하였다.『고려사』권77 참조.
16) 공부시랑(工部侍郞):육조(六曹) 중 공조(工曹)의 차관. ①신라의 관직. ②고려
의 관직. 국초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나, 문종 때의 관제를 보면 품계는 정4품(正
四品)으로서 상서이부(尙書吏部), 상서호부, 상서병부, 상서형부, 상서예부, 상서
공부의 6부에 각각 1명씩 두었는데, 각 부의 장관인 상서(尙書)의 다음가는 벼
슬이었다. 말기에는 총랑(摠郞), 의랑(議郞) 등으로 개칭.
17) 자금어대(紫金魚袋):자색(紫色) 금어대이니, 당나라 관리들은 관품(官品)의 고
하(高下)에 따라 관복의 색깔과 허리에 차고 다니던 어대의 종류가 달랐다. 3품
이상은 자색과 금어대, 4~5품은 비색(緋色)과 은어대(銀魚袋), 6~7품은 청색(靑
色)과 동어대(銅魚袋). 8품 이하는 황색(黃色)의 관복을 입고 철어대(鐵魚袋)를
찼다. 「보조선사창성탑비문普照禪師彰聖塔碑文」 주6)비어대緋魚袋 본서 p.56;
「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眞鑑國師大空靈塔碑文」 주3)도통순관승무랑어사내공
봉사자금어대都統巡官承務郞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 본서 p.81;「원랑선사대보
선광탑비문圓郞禪師大寶禪光塔碑文」 주8)사비어대賜緋魚袋 [신라편] p.217;
「법경대사자등탑비문法鏡大師慈燈塔碑文」 주15)비은어대緋銀魚袋 본서 p.189
등 참조.
18) 오언후(吳彦侯):[苑]과 [總覽]에는 결락되었고, [全文]에는 오언수(吳彦修), [拓
本]에는 오언후(吳彦侯),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는 오언오(吳彦俉), 『대동금
석서』에는 오언후(吳彦候),『한국금석총목록韓國金石總目錄』에도 후(候)로 각
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나, 오언수의 전기가 다른 자료에 보이지 않아 어느 자
(字)가 옳은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苑]권5 「영통사대각국사비문靈通寺大覺國
師碑文」말(末) 유희해(劉喜海)의 「주註」에 “右碑 在朝鮮 京畿道 開城府 五冠山
金富軾撰 吳彦侯 書竝篆額”이라고 한 것에 의하면 오언후가 옳을 듯하다.
19) [苑][碑文]은 결락이나 [總覽]에는 守임. [總覽]의 守는 잘못 들어간 듯 하다.
20)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柱임.
21)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富임.
22)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軾임.
23) [苑]은 결락이나 [總覽] [全文] [碑文]에는 金임.
24) [苑]은 결락이나 [總覽] [全文] [碑文]에는 魚임.
25) [苑]은 결락이나 [總覽] [全文] [碑文]에는 袋임.
26) [苑]은 결락이나 [總覽] [全文] [碑文]에는 臣임.
27)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吳임.
28) [苑] [總覽] [碑文]은 모두 결락이나 [全文]에는 彦임.
29) [苑] [總覽] [碑文]은 모두 결락이나 [全文]에는 修임.
30) [苑] [總覽] [碑文]은 모두 탈락이나 [全文]에는 奉임.
31) [苑] [總覽] [碑文]은 모두 탈락이나 [全文]에는 宣임.
32) [苑] [總覽] [碑文]은 모두 탈락이나 [全文]에는 書임.
33) [碑文]에는 書字 아래에 幷篆額이란 3字가 있으나, [苑] [總覽] [全文]에는 탈락됨.
인종(仁宗) 임금께서32) 왕위를 이은 지 4년째인 을사년34) 가을 7월 경오일
(庚午日)에 대각국사 문인인 도승통(都僧統) 징엄35) 등이 국사의 행장(行狀)
을 임금께 올려 고하기를 “우리 선사(先師)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36) 아직 비명이 저술되지 않아서 항상 그의 위대하신 덕업(德業)
이 마멸된 바가 되어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오니, 오직
임금께서는 이 일을 통찰하시어,37) 신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38) 미래(未來)
에 구원(久遠)토록 전시(傳示)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건의하였다.
上, 嗣位之四年乙巳, 秋七月庚午, 大覺國師門人, 都僧統, 澄
儼等, 具師之行事, 以聞曰, “吾先師, 卽世久矣, 而碑銘未著,
常懼其德業, 有所磨滅而不記, 惟上哀憐39)40)之, 使之裒41)撰以
示久遠.”
34) 상사위지사년을사(上嗣位之四年乙巳):상은 고려 제17대 인종(재위 1122~1146)
을 지칭함이니, 곧 인종 임금이 보위(寶位)에 오른지 4년째라는 뜻. 을사(1125
년)는 인종 3년이지만, 고려 시기에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했기 때문
에 인종이 즉위한 지는 4년째가 된다.
35) 징엄(澄儼):정종(靖宗) 2년(1036) 5월 14일 앞으로 왕자(王子)가 4인 이상일 경
우에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한 왕자는 출가(出家)하여 복전(福田)이 되
기를 허락하였다. 이러한 제도가 생겨남에 따라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인 후
(煦:대각국사)와 숙종(肅宗)의 넷째 왕자인 징엄(澄儼:원명국사) 등이 연이어
출가하였다. 징엄(澄儼:1090~1141)은 숙종의 넷째 왕자(「고원명국사묘지故圓明
國師墓誌」에는 넷째 왕자, 『고려사』에는 셋째 왕자로 표기하고 있다). 8세(1098) 때
숙종의 명에 의하여 흥왕사 대각국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불일사(佛日
寺)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 1105년 복세승통(福世僧統)이 되고, 인종 때 오
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다. 시호는 원명국사(圓明國師)임.
36) 즉세구의(卽世久矣):세상을 떠난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뜻.
37) 상애련지(上哀憐之):상은 인종을 지칭함. 즉 상께서 이를 애민히 여기시어 탑
비(塔碑)세울 것을 허락하여 달라는 뜻. 임금께 상소하는 것을 말함.
38) 사지부찬(使之裒撰):부찬이란 부집, 부회, 부철(裒綴) 등의 뜻이니, 편찬이란 말
과 같다.
39)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哀憐임.
40) [苑] [總覽]에는 憐과 可의 兩字 사이에 26字가 탈락됨.
41) [苑] [總覽]은 결락이나, [碑文]에는 裒이고, [全文]에는 裒이니, 裒는 모을 부자 임.
즉 부찬(裒撰)이란 부집(裒輯)과 같은 말임.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슬프도다. 국사는 나에게 종조부(從祖父)가 되
신다.42) 유업(遺業)으로 남기신 공적의 여열43)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는 사
람이 없으니, 그를 어찌 덮어 두고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44)” 하시고,
드디어 신 부식(富軾)에게 행장을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그대가 비명을
지으라”고 하시므로 신이 사양하다 못하여 물러나와 서술하되, 신이 보는
바로는 국사는 성인(聖人)의 도에 있어서 천성적(天性的)으로 갖추어 태어
날 뿐 아니라, 날 때부터 이미 아는 ‘생이지지자’였다.45) 무엇으로써 그러한
줄 아느냐하면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었고 분잡하고 화려한 세속적
(世俗的) 영광에 대해서는 마음에 조금도 유혹함이 없었기 때문이다.46)
上曰, “嗚呼, 師於余爲從祖, 而遺功餘烈, 炳然可觀, 其可盖
而不章乎.” 遂授臣富軾以行狀曰, “汝其銘之.” 臣讓不獲命,
退而叙曰, 以臣觀之, 師於聖人之道, 可謂性得而生知者也. 何
以知其然哉,47) 自48)少49)知50)學51)不爲52)53)紛華盛麗之所移.
42) 사어여위종조(師於余爲從祖):고려 제17대 인종은 예종(睿宗)의 장자(長子)이
고, 예종은 숙종(肅宗)의 장자이며, 숙종은 문종(文宗)의 제3자이므로 의천(義
天)은 인종의 종조부(從祖父:할아버지와 형제간임)가 된다.
43) 유공여열병연가관(遺功餘烈炳然可觀):공적을 남긴 것이 너무나 위대하고 작렬
(灼烈)하다는 뜻.
44) 기가개이불장호(其可盖而不章乎):‘그 위대하신 업적을 덮어 두고 나타내지 않
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 장(章)은 명(明) 또는 표(表)의 뜻.
45) 성득이생지자(性得而生知者):대각국사는 성인(聖人)의 도(道)에 대하여 천성적
(天性的)으로 갖추고 태어났을 뿐 아니라, ‘날 때부터 이미 아는’ 선천적인 자질
(資質)을 말한다.
46) 불위분화성려지소이(不爲紛華盛麗之所移):분잡하고 화려한 세속적(世俗的) 영
화에는 마음에 움직임이 없었다는 말.
4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哉임.
48)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自임.
49)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少임.
50)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知임.
51)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學임.
52)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爲임.
53) [苑] [總覽]에는 爲와 賢인 兩字 사이에 28자가 탈락됨.
출가함에 미쳐서 도덕은 쇠퇴하고 학문은 황폐(荒廢)한 때를 당하여,
국사만이 능히 시대적인 세태(世態)와 배치되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독
보적인 개혁자(改革者)로써, 옛 성현(聖賢)의 자취를 따라 조술(祖述)하였
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7세의 단명(短命)이었으나, 그의 세운 바 업적(業
蹟)은 이와 같이 위대하였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스스로의 정성(精
誠)으로 발명(發明)한 자’라 하였으니, 그와 같은 부류라고 하겠다.
及其出家, 當道衰學廢之時, 獨能背馳於時態, 追古聖賢而祖
述之. 不幸短命, 而其所樹立如此. 子思有言, ‘自誠而明者’,
其是類乎.
국사의 휘는 석후(釋煦)이고,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자는 의천(義天)
이었으나, 그 후 이름이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휘(諱)와 같다하여 이름
대신 자(字)를 대행하였다.54) 국사는 우리 태조대왕의 4세손이며,55) 또한
문종 임금의 넷째 아들이다.56) 어머니는 인예태후57) 이씨니, 어느 날 밤 꿈
에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58) 을미년59) 9월 28일에
이르러 궁중에서 탄생하였다.59) 그 때 향기가 궁 안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
라지지 아니하였다. 국사는 어릴 때부터 영특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서 글을 읽고 문장을 풀이하며 작문함에 있어서,60) 그 정민(精敏)함이 숙
세(宿世)에 이미 익힌 것과 같았다. 국사의 다섯 형제가 모두 현명하였으
나,61) 국사가 더욱 걸연(傑然)하고 봉영(鋒穎)이 빼어났다.
師諱釋煦, 俗姓王氏, 字義天, 後以名犯哲宗諱, 以字行. 我太
祖大王四世62)孫,63) 而64)65)文宗王第四子也. 母仁睿太后李氏,
夜夢, 若有龍入懷, 而有身焉. 至乙未秋九月二十八日生, 於宮
中. 時有香氣, 郁然久而後歇. 師少超悟, 讀書屬辭精敏若宿
習. 兄弟皆有賢行, 而師傑然出鋒穎.
54) 명범철종휘(名犯哲宗諱):대각국사의 이름이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휘(諱)인
후(煦)를 피하며, 이름(名) 후(煦) 대신 자(字)인 의천(義天)을 사용하였다는 말.
철종은 송의 제7대 임금. 자는 빈육(賓育). 신종(神宗)의 여섯째 아들. 묘호(廟
號)는 철종. 재위(在位:1085~1100) 15년. 즉위할 때 어렸으므로 태황태후(太皇
太后) 고씨(高氏)가 청정(聽政)하였다. 『송사宋史』권17 참조.
55) 태조대왕사세손(太祖大王四世孫):대각국사는 고려 태조의 사세손이 된다는
말. 고려 제2대 혜종(惠宗)은 태조(太祖)의 장자(長子). 제3대 정종(定宗)은 태조
의 제2자, 제4대 광종(光宗)은 태조의 제3자, 제5대 경종(景宗)은 광종의 장자,
제6대 성종(成宗)은 태조의 손자(孫子), 제7대 목종(穆宗)은 경종(景宗)의 자, 제
8대 현종(顯宗)은 안종(安宗;태조의 제8자)의 자, 제9대 덕종(德宗)은 현종의 장
자, 제10대 정종(靖宗)은 현종의 제2子, 제11대 문종(文宗)은 현종의 제3자이다.
56) 문종왕제사자(文宗王第四子):문종의 장자는 순종(順宗). 2자는 선종(宣宗). 3자
는 숙종. 4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57) 인예태후(仁睿太后):이자연(李子淵)의 딸. 문종의 비(妃), 대각국사의 어머니.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 주11)인예태후仁睿太后 [고려편3] p.110 참조.
58) 유신언(有身焉):몸을 받음이니, 임신하게 되었다는 뜻.
59) 을미(乙未):고려 문종 9년(1055).
60) 독서촉사(讀書屬辭):글을 읽고 그 문장을 연결하여 유창하게 풀이하는 것. 촉
(屬)은 연(連)의 뜻.
61) 형제개유현행(兄弟皆有賢行):대각국사의 형제가 모두 총명하고 현명하였다는
뜻.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모두 5형제이니, 다음과 같다. 장자는 순종(順
宗) → 2자는 선종(宣宗) → 3자는 숙종(肅宗) → 4자는 의천(義天) → 6자는 도
생승통 정(道生僧統 ) → 12자는 부여후(扶餘侯), 名은 (宣宗의 이복동생).
62)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世임.
63)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孫임.
64)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而임.
65) [苑] [總覽]에는 而와 至字사이에 25字가 탈락됨.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
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수도(出家修道)할 뜻을 가
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66) 임금이
말하되, “좋다”고 윤허(允許)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仁睿太后)가 이 말
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
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67) 어찌할 수 없었다.68)
上一日, 謂諸子曰,“孰69)能70)爲71)僧72)73)作福田, 爲利益乎.” 師
起曰, “臣有出世志, 惟上所使”, 上曰, “善.” 母后以前夢貴徵,
竊惜之而業己, 受君命, 叵如之何.
66) 유상소사(惟上所使):오직 임금(上)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겠다는 뜻.
67) 절석지이업기수군명(竊惜之而業己受君命):의천이 부왕(父王)의 뜻에 따라 출
가(出家)하겠다는 말을 들은 인예태후(仁睿太后)는 그윽히 생각하되, 학업을 마
친 다음 임금의 명(命)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하고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
68) 파여지하(叵如之何):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 즉 불가항력(不可抗力)이란 뜻.
69)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孰임.
70)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能임.
71)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爲임.
72)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僧임.
73) [苑] [總覽]에는 僧과 前字 사이에 25字가 탈락됨.
을사년 5월74) 14일 경덕국사75)를 내전(內殿)으로 초정하여 은사(恩師)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再拜)하고는 경덕국
사를 따라 영통사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76)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이미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징
관법사(澄觀法師)의『화엄경소華嚴經疏』77)를 전해주는 것을 받았다.
이 때 부터 국사의 혜해(慧解)가 날마다 증진하였다.
乙巳五月十四日, 徵景德國師於內殿, 剃髮. 上再拜之, 許隨師
出, 居靈通寺. 冬十月, 就佛日78)寺79)戒壇80)受具, 時81)春82)秋83)84)
十一歲. 而學問不息. 己能成人, 嘗夢人傳澄觀法師書, 自是,
慧解日進.
74) 을사오월(乙巳五月):고려 문종 19년(1065).
75) 경덕국사(景德國師):999~1066. 속성은 김씨. 휘는 난원(爛圓). 시호는 경덕. 현
종의 장인인 김은부(金殷傅 ?~1017)의 둘째 아들. 대각국사의 은사(恩師)스님.
「경덕국사묘지명景德國師墓誌銘」 주6)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편2] p.338 참조.
76) 불일사(佛日寺):경기도 장단군 서면 경릉리에 위치. 광종 2년(951)에 선비(先
妃)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하였다. 문종 11년(1057) 4월 10일 왕이 불
일사에 가서 반승(飯僧)하였다. 『고려사』 참조.
77) 징관법사서(澄觀法師書):[全文]의 등(燈)은 징(澄)의 오자이다. 청량국사(淸凉
國師)인 징관법사(澄觀法師:738~839)이니, 중국 당나라 때 스님. 화엄종 제4조.
자는 대휴(大休). 속성은 하후씨(夏侯氏). 9대 왕조에 걸쳐 6제(六帝:代宗, 德宗,
順宗, 穆宗, 敬宗, 文宗)의 국사(國師)였으며, 키는 9자 4치. 세수 102세를 살았다.
서(書)는 청량국사가 지은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칭한다.
7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日임.
79) [苑] [總覽] [全文]에는 寺. [總覽]의 告는 寺의 오자임.
80)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壇임.
81)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時임.
82)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春임.
83)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秋임.
84) [苑] [總覽]에는 秋와 至字 사이에 27字가 탈락됨.
나이 장년에 이르러서부터85) 더욱 스스로 근고정진(勤苦精進)하여 밤낮
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굴굴86)하여 많은 책을 열람하고 힘써 기억하였
다. 그러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덕이 높은 이가 있으면 지체없이 찾
아가서 문학(問學)하였다. 현수교관87)으로부터 돈점(頓漸)과 대소승88)의
경율론(經律論)에88) 따른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음이 없었
다. 그리고 여력(餘力)으로 외학(外學)에 대해서도 견문이 연박89)하여 중
니90)와 노담91)의 서적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집록(集錄), 모든 사기에까
지 미쳤다.92) 또한 일찍부터 그 청화93)함을 완미(玩味)하여 그 근저(根柢)
를 찾아 냈으므로 의론(議論)이 종횡(縱橫)으로 치빙(馳騁)하고 곤곤94)하
여 그 끝이 없었다. 비록 노사와 숙덕(宿德)이더라도 모두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자인하였다. 칭송하는 그 명성이 온 천하에 널리 들려서, 당시
사람들이 국사를 일컬어 불법문중(佛法門中)에 최고의 종장(宗匠)이라고
하였다.95)
至年甫96)壯, 益自勤苦, 早夜矻矻, 務博覽强記. 而無常師, 道
之所存, 則從而學之. 自賢首敎觀, 及頓漸大小乘經律論章
疏, 無不探索. 又餘力外學, 見97)聞98)淵博,99) 自100)仲101)尼102)老103)
聃104)105)之書, 子史集錄, 百家之說, 亦嘗玩其菁華, 而尋其根
柢, 故議論縱橫馳騁, 滾滾106)無津涯. 雖老師宿德, 皆自以爲不
及. 聲名流聞, 時謂法門有宗匠矣.
85) 지년보장(至年甫壯):나이 장년(壯年)에 이르러서라는 뜻. 장년은 장정(壯丁)이
며, 일생에 가장 씩씩한 나이. 30~40대를 가리킴.
86) 굴굴(矻矻):①부지런히 노력하는 모양 ②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태도. 矻
은 수고로울 굴字.
87) 현수교관(賢首敎觀):현수법장(賢首法藏:643~712)의 교관. 그의『오교장五敎
章』에서 팔만장경을 구분하되, 오교(五敎)로 교판(敎判)하였으니, 그 5교는 다
음과 같다. ①소승교(小乘敎) ②대승시교(大乘始敎) ③대승종교(大乘終敎) ④돈
교(頓敎) ⑤원교(圓敎)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권4「의천승통義天僧統」(대정장
49, p.876)에 “從晋水淨源問賢首宗承”이라 하였다.
88) 돈점대소(頓漸大小):돈교, 점교(漸敎), 대승교, 소승교란 뜻이니, ①돈교란 청중
을 고려하지 않고 최상승의 진리를 일시(一時)에 돈설한 내용이니,『화엄경』을
지칭한다. ②점교란 청중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소승, 중승, 대승 등을 점차적
으로 설하여 마침내 일승묘법(一乘妙法)을 설파한 교이니, 『법화경法華經』을 가
리킨다. ③소승교(小乘敎)란 다만 아공(我空)만 설하고 법공(法空)은 밝히지 못
했다. 오직 육식(六識)과 삼독(三毒)에 의하여 설한 내용이므로 법원(法源)을 극
설(極說)하지 못한 내용. ④대승교(大乘敎)란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설하여 구
경(究竟)의 목적을 성불에 두고 있는 교리이다.
89) 연박(淵博):연박이란 깊고 넓다는 말이니, 견문지식(見聞知識)의 해박함을 가
리킨다.『위서魏書』「이충전李沖傳」에 “器懷淵博 經道明遠”이라 하였다.
90) 중니(仲尼):공자(孔子)의 자(字).
91) 노담(老聃):노자를 가리킨다.
92) 자사(子史):자(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뜻하고, 사(史)는 역대의 사기(史
記)를 말한다.
93) 청화(菁華):물건의 아름다운 부분. 순수한 곳. 안연지(顔延之),「도징사뢰서陶徵
士誄序」에 “至使菁華隱沒 芳流歇絶 不其惜乎”라 하였다.
94) 곤곤(滾滾):[苑][總覽][碑文]에는 袞袞. [全文]에는 洿洿. 袞袞과 洿洿 모두 滾
滾의 오자이다. 곤곤(滾滾)이란 펑펑 솟아나오는 물이 세찬 모양이다. 두보(杜
甫), 「등고시登高詩」,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95) 시위법문유종장의(時謂法門有宗匠矣):당시 사람들이 대각국사를 일컬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최고의 종장(宗匠)’이라고 존경하였다는 말.
96) [碑文]에는 甫와 壯字 사이에 進字가 더 있으나, 필요 없는 듯함.
97) [苑] [總覽]에는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見으로 나타나 있음.
98) [苑] [全文]에는 聞, [總覽]에는 門. 門은 聞의 오자임.
99) [苑]에는 결락, [總覽]에는 源이며 [碑文]에는 博이고, [全文]에는 橫이니, 이는
[碑文]의 博字가 옳음.
100)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自임.
101)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仲임.
102)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尼임.
103)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老임.
104) [苑] [總覽]은 결락이나 [全文] [碑文]에는 聃임.
105) [苑] [總覽]에는 聃과 騁字의 사이에 27字가 탈락됨.
106) [苑] [總覽] [碑文]에는 袞袞. [全文]에는 洿洿는 滾滾의 오자임.
정미년 7월107)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포창하고 우세승통(祐世僧統)
이란 승직(僧職)을 하사하였다. 국사는 일찍부터 송나라에 가서 불교를
문학(問學)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중,108) 진수(晉水)의 정원법사109)가 혜행
(慧行)을 겸비(兼備)한 뛰어난 학자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국사
는 박가110)에 의탁하여 편지를 보내 예를 갖추었다. 원공(源公)이 편지를
받아 보고 국사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 알고는 곧 답장을 써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이로 말미암아 국사는 가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丁未七月乙酉, 敎書, 褒爲祐世僧統. 師嘗有111)志, 如宋問道,
聞112)晋水淨源法師, 以慧行爲學者. 師託舶買, 致書以修禮. 源
公知師非常人, 卽復書相招. 由是欲往滋甚.
107) 정미칠월(丁未七月):정미년은 고려 문종 21년(1067).
108) 사상유지여송문도(師嘗有志如宋問道):스님은 일찍부터 송나라에 가서 불교를
묻고 배우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
109) 진수정원법사(晉水淨源法師):조송[朝宋;北宋] 때 항주(杭州) 남산(南山) 혜은
사(慧恩寺)의 스님. 이름은 정원(淨源). 속성은 진강양씨(晉江楊氏), 스님의 선대
(先代)가 진수(晉水)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진수법사(晉水法師)라 칭하기
도 한다.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은 후,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화엄경』은 오대
산(五臺山)의 승천(承遷)에게,『화엄합론華嚴合論』은 횡해(橫海)의 명담(明覃)
에게서 수학하였다. 다시 남방(南方)으로 돌아와 능엄(楞嚴). 원각(圓覺). 기신
(起信)을 장수법사(長水法師) 자선(子璿)으로부터 배웠다. 사방에서 그를 석학
(碩學)으로 추존하여 의룡(義龍)이라 칭송하였다. 1086년 11월 세수 78세를 일
기로 입적하였다.『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권4「항주남산혜인사법사杭州南山慧
因寺法師」(대정장49, p.877a).
110) 박가(舶賈):외국(外國)으로부터 입항(入港)한 상인(商人).『당서唐書』「종실宗
室」‘회양왕전淮陽王傳’에 “敬宗侈宮室 舶賈獻池香亭材”라 하였다.
11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有임.
112) [苑] [總覽]에는 聞과 甚字 사이에 38字가 탈락됨.
선종(宣宗)이 왕위에 오른지 2년째 되던 해인113) 송나라 원풍(元豊) 7
년 114)정월 궁내에 들어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하고자 출국을 허락하여 달
라고 정성껏 간청하였다. 문종이 군신들을 모아 의논하였으나, 왕자의 신
분으로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락을 받지 못한 국사께서는 어전(御
前)에서 더불어 군신(群臣)들에게 말하되, “성현(聖賢)들은 신명(身命)을
망각하고 불도(佛道)를 흠모하였으니, 현장법사(玄奘法師)는 서역(西域)
에 갔고, 의상조사(義想祖師)는 중국에 들어가 구법(求法)하였거늘 어찌
편안하게만 지내고 스승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출가한 본의가 아닙니다”라면서 고하는 말이 간절하여 말하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至宣王, 在位第二年, 是宋元豊七年春正月, 入內誠請. 上, 會
群臣議, 皆以爲不可. 師於上前, 與群臣言,115) “聖賢, 忘軀慕
道, 如玄奘往西域, 義想入中國, 苟安安而不務求師. 非所以出
家本意.” 其言懇切, 繼之以泣.
113) 선왕재위제이년(宣王在位第二年):고려 선종(宣宗)이 왕위에 오른지 2년째라는
뜻이니, 즉위년 칭원으로 헤아려 1084년을 가리킴.
114) 원풍칠년(元豊七年):원풍은 송(宋) 신종(神宗)의 연호. 원풍 7년은 고려 선종 1
년(1084).
115) [苑] [總覽]에는 言과 意字 사이에 43字가 탈락됨.
문종은 크게 감동하여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군신들의 결의는 확고
하여 불허방침(不許方針)으로 끝났다. 다음해116) 4월 경오일(庚午日) 밤 왕
과 태후에게 올리는 편지를 남겨놓고, 제자 수개(壽介)를 거느리고117) 미
복118)으로 정주119)에 이르러 마침 상객선(商客船)의 출발함을 만났다. 문종
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관료와 제자인 낙진(樂眞), 혜선(慧宣), 도
린(道隣) 등을 보내어 수종(隨從)케 하였다.
上感激意許之, 而群臣議確, 依違而罷. 至明年四月庚午, 夜留
書上王, 及太后, 率弟子壽介, 微服, 至貞州, 寓商客舩發.120)上
聞之, 驚差遣官僚與弟子, 樂眞, 慧宣, 道隣, 從之.
116) 지명년(至明年):그 다음해에 이르렀다는 뜻이니, 1085년을 말함.
117) 솔제자수개(率弟子壽介):공식적인 허가를 얻지 못하고 제자인 수개(壽介)를 데
리고 임의(任意)로 입송구법(入宋求法)의 길을 떠났다는 뜻. 이 때에 스님을 따
라간 제자로는 낙진(樂眞;원경왕사), 혜선(慧宣), 도린(道隣), 수개, 양변(良辯)
등 많은 제자들이 시종(侍從)하였다.
118) 미복(微服):일반 사람들이 입는 옷. 의천이 태자의 신분으로 공식적인 유학이
아니고, 개인적인 평상인으로서 가게 되었으므로 미복이라고 함.
119) 정주(貞州):경기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豊德里)의 옛 이름. 옛 정주는 승천부
고지에 있으니, 지금 승천포 고성 북 2리에 있었다.
120) [苑] [總覽]에는 發과 以字 사이에 45字가 탈락됨.
5월 갑오(甲午)에 대송 판교진121)에 이르렀다. 이 때 밀주122)지사(知事)
인 조봉랑123) 범악124)이 영접하여 여행 중의 노고(路苦)를 위로하고, 철종
에 표주(表奏)를 올려125) 국사가 송나라에 온 뜻을 구진(具陳)하였다. 황
제126)가 주객원외랑127)인 소주정128)에게 명하여 안내토록 하였다.
五月甲午, 至大宋板橋鎭. 知密州朝奉郞, 范鍔, 迎勞卽附表,
具陳所以來朝之意. 皇帝命主客員外郞, 蘇注廷導之.
121) 판교진(板橋鎭):지명(地名)이니, 하남성(河南省) 개봉부(開封府) 서쪽에 위치.
122) 밀주(密州):주명(州名)이니, 산동성(山東省) 제성현(諸城縣). 본래 교주(膠州)였
는데 개황(開皇) 5년(585)에 밀주로 고쳤다.
123) 조봉랑(朝奉郞):중국의 관직이름. 간관(諫官)의 하나. 사간(司諫)의 다른 이름.
『문헌통文獻通』「송원풍기록宋元豊寄祿」에 “左右司諫爲朝奉郞 左右正言爲承
議郞”이라 하였다.
124) 범악(范鍔):범악(范諤)이라고도 쓴다. 송대의 사람. 하도락서(河圖洛書)를 허견
(許堅)에게 전수하였고, 견은 이를 이개(李漑)에게 교수(敎授)하였으며, 개는 진
박(陳搏)에게 일러 주었다.
125) 영노즉부표(迎勞卽附表):조봉랑(朝奉郞)인 범악이 스님을 영접하여 멀리서 온
로고(勞苦)를 위로하고, 즉시 송의 철종(哲宗)에게 보고하는 표장(表狀)을 올렸
다는 말이다.
126) 황제(皇帝):송의 철종황제이니, 1085년에서 1100년까지 재위. 송의 제7대 임금.
신종(神宗)의 여섯째 아들. 휘(諱)는 후(煦). 자(字)는 빈육(賓育). 묘호(廟號)는
철종. 본비문 주54)명범철종휘名犯哲宗諱 p.435 참조.
127)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이 제도는 전국(戰國) 때 시작하였다. 한대(漢代)에는
상서(尙書)에 객조(客曹)를 두어 외국(外國)의 이적(夷狄)들을 관장하였다. 그 후
남주객(南主客)과 북주객(北主客)의 이조(二曹)를 설치하였다가 진(晉)나라 때는
좌우남북(左右南北)의 사주객(四主客)을 두었다. 당송에 이르러서는 주객낭중외
랑(主客郞中外郞)을 두어 예부(禮部)에 예속시키고, 주로 이왕(二王;前職과 現職
王)의 뒷바라지와 제번(諸蕃;諸侯)의 조공(朝貢)과 접대(接待) 등의 일을 맡았다.
128) 소주정(蘇注廷):전기 미상
7월 경사129)의 계성사130)에 들어갔다. 중서사인131) 범백록132)이 주관하여
수일 후 부름을 받아 수공전133)에서 철종을 배알하고 객례(客禮)로써 기다
려 아름다운 의류, 요, 이불134) 등 몇 가지의 총품(寵品)을 받았다. 다음날
표장(表狀)을 올려 수업(受業)할 스승을 소개해 줄 것을 건의하였더니, 황
제(皇帝)는 특조(特詔)를 내려 주선해 주도록 하였다. 드디어 화엄종의 유
성법사135)를 친견하게 되었다.
秋七月, 入京師啓聖寺. 以中書舍人, 范百祿, 爲主, 數日136)見
垂拱殿137)待以客禮, 寵數渥縟. 明日表乞, 承師受業, 優詔從
之. 遂見華嚴有誠法師.
129) 경사(京師):중국 북송의 태조(960~975)가 도읍한 변경(卞京)이니, 현재의 하남
성(河南省) 개봉(開封)이 그 곳인데, 북송은 여기에 도읍하여 9대 166년간을 누
렸다.
130) 계성사(啓聖寺):위치와 사적 미상이다.
131) 중서사인(中書舍人):위(魏)나라 때 설치한 관직의 이름. 조고(詔誥)와 제칙(制
勅)을 맡은 벼슬. 중서성(中書省)에 예속되었다가 처음에는 통사(通事), 통사사
인(通事舍人), 또는 사인통사(舍人通事) 등으로도 일컫다가 뒤에 중서사인으로
개칭.
132) 범백록(范百祿):자는 자공(子功).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진사(進士)가 되었
고, 재식(才識)이 뛰어나 과거(科擧)에 급제, 철종을 위해 사정(邪正)을 분별하
는 20여조목(餘條目)을 올렸다.
133) 수공전(垂拱殿):철종의 궁중에 있었던 궁전의 이름.
134) 악욕(渥縟):아름다운 물건. 철종 임금이 주는 선물. 즉 의류, 요, 이불 따위.
135) 유성법사(有誠法師):중국 송나라 때 스님. 화엄종 스님이며, 대각국사가 만나
불교 교리를 문답하였던 스님.
136) [苑] [總覽] [全文]에는 없으나, [碑文]에는 日과 見字 사이에 召字가 더 있음.
137) [苑] [總覽]에는 殿과 高字 사이에 42字가 탈락됨.
이보다 앞서 황제(皇帝)께서 우세승통(祐世僧統)이 송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양가(兩街)에 명하여 미리 고재석학(高才碩學)을 선발하여 사범(師
範)에 감당하도록 하였으므로 양가에서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추천하였
다. 승통이 그 곳에 이르러 법사의 하풍138)에 구의139)하고, 제자의 예를 행
하려 했다. 그러나 유성법사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받아들였다.
先此, 皇帝, 聞僧統之來, 詔兩街預選高才碩學, 堪爲師範者,
兩街推薦誠師. 至是, 僧統摳衣下風, 欲行弟子之禮. 誠師 三
辭而後受之.
138) 하풍(下風):상대방의 도덕을 지극히 높인다는 뜻으로 자신을 낮추어 그의 덕풍
(德風)밑에 있다는 뜻으로 일컫는 말.
139) 구의(摳衣):옷 뒷자락을 약간 끌어 올리는 것이니, 옷깃을 여미며, 공손을 표하
는 것. 「법경대사자등탑비문」 주183)구의摳衣 본서 p.216;「법경대사보조혜광
탑비문」 주79)구의지례摳衣之禮 [고려편1] p.224;「징효대사보인탑비문」 주44)
구의지례摳衣之禮 [고려편1] p.245;「통진대사보운탑비문」 주109)구의摳衣 [고
려편1] p.358 등 참조.
이에 국사께서 법사에게 여쭙되, “모갑(某甲)은 해외(海外)의 비속(鄙俗)
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도를 구하였으나, 아직 얻은 바가 없으니,
원하옵건대 법사께서는 자민히 여기시어 저의 미혹한 무명의 구름을 흩어
주소서”라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고불(古佛)들은 고심(刳心)하여 법
을 구하되 내지 일문(一文)과 일구(一句)를 구함에 있어서도 전륜성왕(轉
輪聖王)의 자리까지 기꺼히 던져 버렸는데, 지금 상인140)이 능히 실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한다.”면서 감탄하였다. 법사가 말하되, “일승
법(一乘法)에 뜻을 같이하며 함께 만행(萬行)을 닦아 화장세계(華藏世界)
에 유희(遊戱)하려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했다. 이 때 승통이 일승의 법
문을 청문(請問)하였다.141) 법사가 찬탄하여 말하기를, “승통은 말의 뜻이
아름답고 간절하여142)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중관143)의 법을 잘 질문하니,
법왕144)의 진자(眞子)가 아니면 의상(義想)의 후신(後身)이다”라고 하였
다. 다시 조지(朝旨)를 받들어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145)과 함께 경
사(京師)를 나와 변수146)를 따라 회사147)에 이르렀고 침심148)하여 여항149)에
있는 대중상부사150)를 찾아가서 정원법사151)를 친견하고 전일 유성법사152)
를 만난 때와 같이 예를 올렸더니 원공(源公)이 엄연(儼然)히 앉았다.
乃進曰, “某153)甲, 海外之154)鄙人也, 虛襟求道之日, 又未有所
得, 願師慈憫, 開我迷雲.” 答, “古佛刳心而爲法, 至有求一文
一句, 而捨轉輪王位, 今上人能行之, 可謂難矣.” “願同志一
乘, 同修萬行, 以遊華藏海者, 吾之願也.” 於是, 僧統請問云
云. 師155)嘆曰, “辭旨婉切, 善啓重關, 非法王156)157)之眞子, 卽
義想之後158)身.” 復承朝旨, 與主客員外郞楊傑, 出京師, 沿汴
達淮泗, 浸尋以至159)餘杭, 詣大中祥符寺, 謁源公, 如見誠公之
禮, 源公, 儼然而坐.
140) 상인(上人):대각국사를 지칭.
141) 승통청문(僧統請問):승통은 대각국사 의천을 가리킨다.
142) 완절(婉切):아름답고 간절하다는 뜻.
143) 중관(重關):겹겹으로 된 문. 즉 진리의 관문을 가리킨다. 현관(玄關)과 같은 말.
144) 법왕(法王):부처님을 지칭.
145) 양걸(楊傑):「대각국사묘지명」 주27)양걸楊傑 [고려편3] p.111 참조.
146) 변수(汴水):변하(汴河)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황하(黃河)와 회수(淮水)를 연결
하는 운하(運河). 수나라 양제(煬帝) 때 개통하였다. 낙양(洛陽)과 개봉(開封)의
중간 지점인 허음(河陰)에서 황하로부터 갈라져 남동쪽으로 향하면서 개봉・상
구(商邱) 등을 거쳐 회수와 합류한다.
147) 회사(淮泗):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지칭함이니, 회수란 강의 이름(川名)인
데, 그 근원은 하남성(河南省) 남부의 동백산(桐柏山)에서 동쪽으로 흘러 안휘
성(安徽省) 북부를 지나 강소성(江小省)을 나와 대운하(大運河)와 합류한다. 그
리고 사수란 사하(泗河)라고도 하니 노변현(魯卞縣) 북산으로부터 흐르기 시작
하였다.
148) 침심(浸尋):차례차례로 나아가는 것, 점점 계속적으로 찾아다니는 것. 침심(浸
潯), 침염(浸染), 침심(侵尋) 등과 같은 뜻. 『사기』「봉선서封禪書」에 “天子始巡郡
縣 浸於泰山矣”라 하였다.
149) 여항(餘杭):①현명(縣名)이니, 절강성(浙江省) 부양현(富陽縣)의 북쪽 지방 ②
산명(山名)이니, 여항산(餘杭山). 여기서는 현명을 뜻함.
150)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위치와 사적 미상.
151) 원공(源公):진수(晉水)의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지칭함. 본비문 주109)진수정
원법사晉水淨源法師 p.441 참조.
152) 성공(誠公):유성법사(有誠法師)를 말함이니, 본비문 주135)유성법사有誠法師
p.444 참조.
153) [全文]에는 某와 甲字 사이에 之가 더 있으니, 이는 삭제되어야 함.
154) [苑] [總覽]에는 之와 能字 사이에 46字가 탈락됨.
155) [苑] [總覽] [碑文]에는 없으나, [全文]에만 師가 더 있음.
156) [苑] [全文] [碑文]에는 王. [總覽]의 當은 王의 오자임.
157) [苑] [總覽]에는 王과 公字 사이에 43字가 탈락됨.
158) [苑] [總覽]은 결락이고 [全文]에는 後. [碑文]의 前은 後의 오자임.
159) [苑] [總覽]은 결락이고 [碑文]의 於와 [全文]의 至이니, 뜻으로는 모두 무방하
나, [全文]의 至가 나은 듯함.
승통160)이 그의 앞에 나아가 여쭙되, “모갑이 스님의 도덕을 앙모(仰慕)
하여 하루를 1년으로 여기고 일체 험난함을 꺼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제쳐놓고 찾아왔사오니,161) 원하옵건대 금구(金口)의 옥음162)을 개시(開示)
하여 마침내 깨닫도록 지도하여 주시옵소서”라 하였다. 원공(源公)이 이
르기를, “옛날 혜사대사163)가 한번 지의스님164)을 친견하고 곧 영산회상(靈
山會上)에서 함께 지냈던 구면임을 알았으니,165) 지금 승통이 찾아옴도 어
찌 숙연(夙緣)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슬행166)하는 예의를 차릴 것 없이 듣
고자함을 청문(請問)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정성이 도응(道應)에 투
합(投合)한 것이167) 마치 개자(芥子)가 바늘 끝에 닿는 것과 같았다.168) 묻
는 대로 걸림없이 척척 대답하여 그 용용169)을 다하였다.
僧統進曰, “某甲, 仰慕道誼, 以日爲歲, 不憚險難,170) 百舍來171)
謁, 願開金口玉音, 以來覺悟.” 源公曰,172) “昔慧思, 一見智顗,
卽知靈山之舊, 今僧統之來, 焉知非夙緣耶, 不須膝行爲禮, 請
講以所聞.” 於是, 誠投道應, 如芥就鍼. 有問有答, 盡其舂容.
160) 승통(僧統):대각국사를 지칭.
161) 백사래알(百舍來謁):백 가지 천 가지 모든 일을 제쳐놓고 정원(淨源)스님을 찾
아와서 친견하였다는 말. 사(舍)는 사(捨)의 뜻.
162) 금구옥음(金口玉音):금구에서 나온 옥 같은 말씀이란 뜻이니, 부처님의 말씀을
가리킴.
163) 혜사(慧思):515~577. 천태종 제2조. 혜문(慧文)의 제자, 15세때 출가(出家) 하였
으며, 『법화경』만을 전공하고 혜문(慧文)의 가르침을 받아 일심으로 정진하여
드디어 법화삼매를 얻었다.
164) 지의(智顗):538~597. 천태종 제3조. 개종조(開宗祖)라 하나 실은 1조(祖)가 혜
문. 2조는 혜사. 3조가 지의이다.
165) 일견지의즉지영산지구(一見智顗卽知靈山之舊):혜사스님이 지의를 처음 보는
순간, 곧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만났던 구면(舊面)과 같이 느꼈다는 말. 『불조
통기佛祖統紀』「혜사전慧思傳」(대정장49, p.180c27)에 “曰 昔日靈山同聽法華 宿
緣所追今復來”라 하였다.
166) 슬행(膝行):슬보(膝步)와 같은 말. 무릎을 땅에 대고 걷는 것. 심히 두려워함을
형용하는 뜻. 『장자莊子』「재유在宥」에 “廣成子 南首而卝 皇帝順下風 膝行而進”
이라 하였다.
167) 성투도응(誠投道應):스승인 정원(淨源)과 제자인 의천(義天)과의 정성이 서로 투
합(投合)하여 도가 상응(相應)하였다는 뜻이니, 감응도교(感應道交)와 같은 말.
168) 여개취침(如芥就鍼):침개상투(針芥相投)와 같은 말. 바늘을 땅에 꽂아 놓고 천
상(天上)에서 개자를 던져 그 바늘끝에 적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이는
중생이 부처님의 출세시(出世時)를 만나기가 매우 어려움에 비유한 것. 「남본열
반순타품南本涅槃純陀品」(대정장12, p.372c8)에 “芥子投針鋒 佛出難於是”라 하
였다.
169) 용용(舂容):종 소리가 울리는 모양. 대종(大鐘)을 치는 것. 학인 물음을 기다려
거침없이 대답하는 것이 마치 종이 침을 기다려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는 듯.
『예기』「학기學記」에 “善待問者如撞鐘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 待
其從容 然後盡其聲 不善答問者反此 此皆進學之道也”라 하고, 그 「소疏」에 “言
鐘之爲體 必待其擊 每一舂而爲一容 然後盡其聲 言善答者 亦待其問 然後一答”
이라 하였다.
170) [苑] [總覽] [碑文]에는 艱이고, [全文]에는 難이니, 험간(險艱)은 고행, 즉 실천하
기 어렵다는 뜻이고, 험난(險難)은 험로(險路), 즉 찾아다니는 길이 어렵다는 뜻
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양자(兩字) 함께 무방함.
171) [苑] [總覽] [全文]에는 來. [碑文]의 求는 來의 오자임.
172) [苑] [總覽]에는 曰과 就字 사이에 43字가 탈락되었음.
원공(源公)이 지주(知州)인 포종맹173)의 초청으로 남산(南山) 혜인원(慧
因院)에 입원(入院)하여 주역본(周譯本) 『화엄경華嚴經』174)을 개강(開講)
하게 되었다. 승통이 돈을 희사하여 큰 재(齋)를 베풀었는데 많은 학도(學
徒)들이 모여 들었다. 원공이 전에 거주하던 세곳에 각각 현수(賢首)의 교
장(敎藏)과 아울러 현수조사(賢首祖師)의 등상을 안치하고, 이를 다시 마
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양걸175)이 그 뜻을 알고 포종맹지주
(蒲宗孟知州)와 모든 관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경영하였다. 승통도 많은
은을 희사하고 교장 7,500여권을 안치하였다. 귀국한 후 또 금서(金書) 대
경(大經) 삼역본(三譯本) 180권을 보내어 성수(聖壽)를 빌었다.176) 혜인원
이 본래는 선원(禪院)이었으나, 강원(講院)으로 고치고 조세(租稅)를 특면
하였으니, 이는 본국(本國) 조정(朝廷)에서 국사를 위해서 경비를 뒷받침하
였기 때문이다. 그 때 고려의 선종이 송의 철종에게 상표(上表)하여 국사를
귀국하도록 청하였다. 드디어 철종이 조칙(詔勅)으로 승통을 경사로 오게
하였는데 원공과 함께 오는 선상(船上)에서도 강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源公, 因知州蒲公宗孟之請, 入南山慧因院, 開講周譯經. 僧
統, 施錢營齋, 以延學177)178)徒甚衆. 源公, 於前所居三179)處, 各
置賢首敎藏, 竝祖師像, 至此, 又欲辦焉而未能. 楊公, 知其
意, 與知州及諸僚, 力營之. 僧統, 亦捨銀置敎藏七千五百餘
卷. 及180)還國, 又以金書大經三本歸之, 以祝聖壽. 慧因, 本禪
院, 改爲講院, 特免租稅, 朝廷, 爲僧統故也. 會國王, 上表乞
令歸國. 遂詔趣赴京, 請源公同舟, 講學不輟.
173) 포종맹(蒲宗孟):송나라 때 신정(新井) 출신. 자는 전정(傳正). 휘는 종맹(宗孟).
황우년간(皇祐年間)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벼슬은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
르렀다. 성격이 사치하고 급하므로, 소식(蘇軾)이 편지를 보내 자비하여 검소하
라고 권유하였다. 『송사宋史』권328 참조.
174) 주역경(周譯經):삼역(三譯) 『화엄경華嚴經』 중 대주(大周) 측천무후(則天武后)
증성원년(證聖元年 695)에 번역한 80권 『화엄경』을 지칭함이니, 이를 『당화엄경
唐華嚴經』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418년 양주(楊州) 사사공사(謝司空寺)에서 불
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가 번역한 60권본을 『진화엄경晉華嚴經』
이라 하고, 796년 계빈국 삼장 반야다라(般若多羅 Prajñātara)가 번역한 40권
『화엄경』이 있다. 이지관,『한국불교소의경전연구韓國佛敎所依經典硏究』 p.285
참조.
175) 양공(楊公):양걸(楊傑)을 지칭한다.
176) 우이금서대경삼본귀지(又以金書大經三本歸之):또 금(金)으로 쓴 『화엄경』(大
經) 삼본(三本)을 송으로 보내주었다는 말. 『석씨계고략』권4(대정장49, p.877a)에
따르면 “以金書華嚴三譯本 一百八十卷 自高麗遣使遺師 建大閣安奉之 故俗呼慧
因 爲高麗寺”라 하였다.
17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學임.
178) [苑] [總覽]에는 學과 敎字 사이에 50字가 탈락됨.
179) [苑] [總覽]에는 결락이고 [碑文]에는 三이고, [全文]에는 之이니, 다음 문구인
‘各置賢首敎藏’이란 各字에 의하여 三字가 옳다고 봄.
180) [苑] [全文] [碑文]에는 及字가 있으나, [總覽]은 탈락됨.
원우 원년181)후 2월 13일 입경(入京)하여 황제를 재견(再見)하고 5일 동
안 머무른 다음, 조정에서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182) 수주183) 진여사184)
에 이르러『능엄경楞嚴經』소주185)인 장수자선선사(長水子璿禪師)의 탑정
(塔亭)이 경비(傾圮)한 것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여 희사금(喜捨金)을
사승(寺僧)에게 주어 보수토록 하였다.186) 양공(楊公)이 말하기를, “선공187)
이 오늘에야 비로소 지음188)을 만났다”고 하였다. 오흥189)의 장형190)이 그
사실을 기록하되, “승통은 참으로 독후(篤厚)한 호학군자(好學君子)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以元祐元年, 後二月十三日, 入京再見, 淹五日, 朝辭, 至秀州
眞如寺, 見楞嚴疏主, 塔亭傾圮, 慨然歎之, 以金屬寺僧修葺.
楊公曰, “璿公, 今日始遇知191)音.” 吳興章衡, 記其事云, “僧
統, 可謂篤厚好學君子矣.”
181) 원우원년(元祐元年):원우는 송 철종(哲宗)의 연호. 고려 선종 3년(1086).
182) 조사(朝辭):조정에서 철종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다는 말.
183) 수주(秀州):주(州)의 이름. 오대(五代) 때 오월(吳越)에 두었던 주명(州名). 송대
에 와서 폐하였는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가흥현(嘉興縣) 지역.
184) 진여사(眞如寺):강서성(江西省)의 운거산(雲居山)에 있던 절. 별명(別名)은 비
백사(飛白寺). 음창사(音昌寺)라고도 한다. 당의 원화년중(元和年中 806~820)에
건립(建立)하였고, 송의 상부년중(祥符年中 1008~1016)에 진여선원(眞如禪院)이
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운거도응(雲居道膺)이 개창한 절.
185) 능엄소주(楞嚴疏主):장수자선(長水子璿) 선사가 천성(天聖) 8년(1030)에『능엄
경소의楞嚴經疏義』20권을 저술하였기에 능엄경의 소주(疏主)라고 일컫는다.
186) 이금속사승수즙(以金屬寺僧修葺):대각국사가 장수스님의 탑정(塔亭)이 퇴락한
것을 보고 그 절 스님에게 돈을 주어 보수토록 하였다는 말.
187) 선공(璿公):장수자선스님. 화엄종. 수주 출신. 수주홍민(秀州洪敏)에게 『능엄
경』을 배웠고, 낭낭혜각(瑯瑯慧覺)을 뵙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깨달았다. 『불
조통기佛祖統紀』권20(대정장49, p.293c)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권18(대
정장49, p.663a).
188) 지음(知音):소리를 잘 알아듣는다는 뜻.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즉 도반
(道伴)을 일컫는 말.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를 잘 켜던 백아(伯牙)와 백아의 거문
고 소리를 잘 이해하던 친구 종자기(鐘子期)의 고사에서 나왔다.『열자烈子』「탕
문湯問」에 “伯牙善鼓琴 鍾子期善聽 伯牙鼓琴志在登高山 鍾子期曰 善哉 莪莪兮
若泰山 志在流水 鍾子期曰 善哉 洋洋兮如江河 伯牙所念 鍾子期必得之”라고 하
였으니, 즉 이심전심으로 의기가 상투함을 뜻한다.
189) 오흥(吳興):군(郡)의 이름. 삼국시대 오(吳)의 지명. 현재의 절강성 오흥현(吳
興縣).
190) 장형(章衡):송나라 때 포성(浦城) 출신. 자는 자평(子平). 가우년간(嘉祐年間
1056~1063)에 진사제일(進士第一)에 급제. 관직은 집현학사(集賢學士)와 지영
주(知潁州) 등을 역임하였고, 요(遼)에 사신으로 가서 공적을 남겼으며, 저서는
『편년통재編年通載』가 있다.『송사』권347 참조.
191) [苑] [總覽]에는 知와 千字 사이에 51字가 탈락됨.
그 해 4월에 다시 혜인원에 갔더니 원공이 도를 전하여 마치고 정좌(正
坐)하여 분향하고 이르기를, “원컨대 승통은 귀국하여 광작불사(廣作佛事)
하되, 한 등불을 전하므로부터 백천등(百千燈)으로 하여금 상속하여 무궁
(無窮)토록 하라”하고, 드디어 경서(經書)와 향로와 불자192)를 전해 주므로
써 표신(表信)을 삼았으니, 이는 특히 승통뿐만 아니라 원공에게도 도움
이 되어 도가 더욱 증진되었다. 원공의 이름이 더욱 높아진 까닭은 승통
이 더욱 발양(發揚)한 셈이 된다. 원법사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
와 천태산193)에 이르러 정광불롱194)에 올라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영
정(影幀) 앞에서 직접 동국(東國)에 천태종지(天台宗旨)를 전포(傳布)하려
는 발원문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을 세웠다.195) 이 사실을 양걸
이 기록하고196) 중립(中立)스님이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197)
夏四月, 復入慧因院, 源公, 傳道訖, 正坐焚香云, “願僧統歸,
廣作佛事, 傳一燈, 使百千燈, 相續而無窮.” 遂授經書爐拂,
以爲信, 非特僧統資源公, 而道益進. 源公名198)所以益高, 以
僧統揚之也. 禮199)200)辭源公, 行至天台, 登定光佛隴, 觀智者
塔,201) 親筆願文, 禮於塔前. 誓傳敎于東土, 楊公志之, 沙門中
立, 立石.
192) 노불(爐拂):향로(香爐)와 불자(拂子)를 뜻함.
193) 천태(天台):산(山)이름. 중국 절강성 태주(台州) 천태현(天台縣)에 위치. 괄창
(括蒼), 안탕(雁蕩), 사명(四明), 금화(金華) 등 제산(諸山)과 연접(連接)해 있
다. 한나라 때 유신(劉晨)과 원조(阮肇)가 이 산에서 약을 캐다가 두 여자를 만
나 함께 반년(半年)을 함께 지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십세(十世)를 경과
하였다는 전설이 얽힌 영산(靈山). 수나라 때,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顗
538~597)가 이 산에서 법화사상에 의하여 일종(一宗)을 세웠으니, 곧 천태종(天
台宗)이다.
194) 정광불롱(定光佛隴):정광초수(定光招手)라고도 하니, 천태산 불롱에 한 선사가
있어 그 이름이 정광이었다. 천태 지자대사가 일찍이 몽중(夢中)에 정광이 손을
들어 자기를 부르는 꿈을 꾸었다. 불(佛)이란 선종(禪宗)에서 오도(悟道)한 사람
을 부르는 통칭이다. 일설에는 정광불(錠光佛)로 보는 학자도 있다. 『조정사원
祖庭事苑』권5에 “智者顗禪師 年十五時 禮佛像 怳然如夢 見大山臨海際 峰頂有
僧 招手接入伽藍 汝當居此 汝當修終此 天台佛隴 有定光禪師 先居此峰 謂弟子
曰 不久 當有善知識 領徒至此 俄爾智者至 光曰 還憶疇昔擧手招引時否”라 하였
다. 『속장경續藏經』제113권66장 p.1032 좌면하(左面下) 참조.
195) 서전교우동토(誓傳敎于東土):대각국사가 정광불롱의 지의의 탑전에서 천태교
리(天台敎理)를 동토에 전하여 홍포(弘布)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는 말이다.
196) 양공지지(楊公志之):대각국사가 정광불롱에서 몽중에 수기(授記)를 받은 사실
을 기록하였다는 뜻. 지(志)는 지(誌)와 통한다.
197) 사문중립입석(沙門中立立石):사문중에 중립(中立)이라는 스님이 양공이 기록
한 사실을 돌에 새겨 기념비(紀念碑)를 세웠다는 뜻이다.
198) [苑] [總覽] [碑文]에는 없으나, [全文]에만 之字가 더 있음.
19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禮字가 있음.
200) [苑] [總覽]에는 禮와 凡字 사이에 50字가 탈락됨.
201) [苑] [總覽] [全文]에는 없으나, [碑文]에는 者와 親字 사이에 塔字가 더 있음.
밀주(密州)에서 출발하여 개봉을 거쳐 오월(吳越)로 왕래하는 동안에
무려 14개월이 걸렸다. 이르는 곳마다 명산(名山)과 승경(勝境), 그리고
모든 성적(聖跡)이 있는 곳에는 참배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친
견하여 법요(法要)를 청문(請問)한 고승(高僧)이 50여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정원법사(淨源法師)와 같이 있었던 시간은 59일이나 되었다. [결
락] 혜림202)과 선연203)이고, 계율(戒律)에 대하여 자문한 스님은 택기(擇基)
와 원조204)스님이며, 범학(梵學)은 인도로부터 중국에 와서 흥국사(興國
寺)에 있던 서천삼장(西天三藏)인 천길상205)과 소덕206)이었으니, 이들은 모
두 탁연(卓然)하여 존경할만한 스님들이므로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장점
을 길러 일가를 이룩한 선(禪)과 강(講)의 종사로써207) 각기 대중을 거느리
고 있었다. [결락]
始自密至208)京, 以及吳越, 往來, 凡十有四月. 所至名山勝境,
諸有聖跡, 無不瞻禮. 所遇高僧, 五十餘人, 亦皆咨問法要. 若
源公, 雅所望, 以爲五209)210)十. [五十字缺], 慧林, 善淵, 戒律則
擇基元照, 梵學則天吉祥, 紹德, 此皆卓然可尙故, 資其所長
者, 己及將歸, 禪講宗師, 各率徒衆, [四八字缺].
202) 혜림(慧林):전기 미상.
203) 선연(善淵):전기 미상.
204) 원조(元照):? ~1116. 항주(杭州) 영지사(靈芝寺) 스님. 휘는 원조. 자는 담연(湛
然). 시호는 대지(大智). 동장(東藏)의 혜감선사(慧鑑禪師)에게 계율(戒律)을 배
웠고, 그 후 신오선사(神悟禪師)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들었으며, 광자사
혜재(慧才)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남산(南山) 율종(律宗)을 깊이 연
구하면서 생전(生前)에는 율범(律範)을 넓히고, 사후(死後)에는 극락세계에 왕
생하려고 염불업(念佛業)을 닦았다. 1116년 9월 1일 세수 69세를 일기로 입적하
였다. 『불조통기』권26;『석씨계고략』권3 참조.
205) 천길상(天吉祥):인도에서 중국에 온 삼장법사(三藏法師)이나 전기 미상. 본비
문 주367)시라박저尸羅嚩底 p.477 참조.
206) 소덕(紹德):전기 미상.
207) 선강종사(禪講宗師):선지(禪旨)와 강설(講說)에 뛰어난 그 당시 송나라의 종
사(宗師)들.
208) [苑] [總覽]은 결락, [碑文]에는 至. [全文]의 室은 至의 오자임.
209) [苑] [總覽]은 결락, [全文] [碑文]에는 五로 나타나 있음.
210) [苑] [總覽]에는 五와 慧字 사이에 50字가 탈락됨.
승통은 삼장과 모든 학문을 두루 겸비하였으니, 참으로 이는 중법대보
살(重法大菩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통은 시학(始學)이 아니었으니,
자기의 소견(所見)과 모든 스님들과의 서로 시론(試論)해 보려고 송나라
에 온 것이라고 모든 스님들이 입을 모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승통에게 준
시211)에 “우세승통(祐世僧統)과 같은 스님이 또 누구이겠는가”라고 하였
다.212) [결락]
學之悉備, 此眞重法大菩薩者也. 然非是始學, 欲以己所得, 與
諸師相試故來耳. 故其所贈詩, ‘有孰若祐世師.’ [五十九字缺].
211) 기소증시(其所贈詩):대각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하려할 때, 그곳 대덕(大德)
스님들이 의천에게 준 송별시(送別詩)에란 뜻.
212) 유약우세사(有若祐世師):‘그 누가 복국우세승통(福國祐世僧統:義天)만한
스님 이 있겠느냐’라는 말.
삼한213)의 왕자214)가 서쪽으로 와서 법을 구하니 “마치 습착치215)와 미천
석도안(彌天釋道安)이 서로215) 대적함과 같아서 당시의 현인들로부터 추존
(推尊)하는 바가 되었다”라고 한 것이 이와 같은 유이다. 5월 20일 본국의
조하사216)가 돌아오는 편을 따라 배를 타고 29일 [결락] 임금을 비롯하여
좌우신하가217)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송의 황제218)가 기증한 금사(金
絲)로 짠 비단과 국왕태후219)가 기송(寄送)한 재보(財寶)가 수만량에 달한
거금이었다.220) 이 모두를 사원도량(寺院道場)과 법문을 청해 들었던 여러
스님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무소(無少) [결락]
三韓王子西求法, “鑿齒彌天兩勍221)敵, 其爲時賢222)推尊.” 類
皆然也. 夏五月二十日, 遂本國朝賀回使, 放洋二十九日,
[四十八字缺], 上及左右, 無不感動. 皇帝所贈金繒223), 國王太
后, 寄送財寶, 以巨萬計. 擧施諸道場, 及所聞法諸師, 無少
[五十一字缺].
213) 삼한(三韓):진한, 변한, 마한. 즉 해동(海東)을 뜻하나, 여기서는 고려를 지칭.
214) 왕자(王子):대각국사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뜻.
215) 착치미천(鑿齒彌天):습착치(習鑿齒)와 미천(彌天)이니, 진(晉)나라 때 양양(襄
陽)출신, 자는 언위(彦威). 박학다문하여 당시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였다. 자만
(自慢)에 가득찬 습착치가 도안(道安)스님의 고명(高名)을 듣고 편지를 보내 친
교하고자 하였다. 그 후 도안이 육혼산(陸渾山)으로부터 단계사(檀溪寺)에 왔다
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 때 습착치는 자칭 “나는 사
해(四海)의 습착치라 하오(사해에 자기의 이름이 가득하다는 뜻)”라 하자 초면(初
面)에 무례하다고 느낀 도안은 서슴치 않고 “나는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이
다(나는 하늘에까지 이름이 꽉 찼다는 뜻)”라고 한 수를 더떠서 응수했다. 이 때부
터 서로 친해진 두 사람이 어느 날 함께 길을 가게 되었는데, 도안은 앞서고 습
착치는 뒤를 따르게 되었다. 습착치가 조롱하는 듯으로 “箕而簸之하니 糟糠이
先去로다”하니, 도안이 즉시 응대하기를 “淘而汰之하니 沙石이 後來”라고 하여
그를 굴복시킨데서 온 말. 『고승전』권5「석도안전釋道安傳」(대정장50, p.352c);
「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 주88)미천彌天 본서 p.95;「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
주57)미천彌天 [신라편] p.222 등 참조.
216) 조하(朝賀):① 조정에 제신(諸臣)들이 모여 왕에게 인사하는 것. ② 중국에 가
서 공물(貢物)을 바치고 황제에게 하례(賀禮)하는 것. 옛날에는 10월 초하룻 날
에 하다가 후대에 와서는 정월 초하루에 세배, 즉 하례로 행하였다. 여기서는 후
자(後者)에 해당함.
217) 상급좌우(上及左右):고려의 선종(宣宗)과 각급 대신들.
218) 황제(皇帝):송의 철종황제.
219) 국왕태후(國王太后):송 철종의 조모(祖母)인 태황태후(太皇太后) 고씨(高氏)를
지칭함. 태황태후는 황제의 조모(祖母)를 뜻함.
220) 거만계(巨萬計):수만량이란 뜻. 또는 거금(巨金)이라는 말.
221) [苑] [總覽] [碑文]은 勍, [全文]은 勅. 勍이 옳음.
222) [苑] [總覽] [碑文]에는 없으나, [全文]에만 所字가 더 있음.
223) [苑] [總覽] [碑文]에는 繒. [全文]의 繪는 繒의 오자임.
국사는 탄생한 이후 일찍부터 그 기본이 이미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
았다. 여러 해를 지나면서 국가가 항상 큰 스님을 구하였으나, 그러한 인
물을 얻지 못하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 교리를 선양하여 묘리(妙理)를 터
득하고 신비(神秘)를 궁진(窮盡)하여 학인이 바다처럼 모여들었으니 아직
까지 이와 같이 왕성(旺盛)한 회상(會上)이 없었다. 임금과 군신들이 [결
락] 태불강고(怠不講故)로 관저(官褚)와 사저224)를 모두 털어서 재차에 걸
쳐 중국, 거란(契丹), 일본 등지로부터 경서를 구입하였다.
師誕年, 肇基旣成. 多歷年, 國家每議其主, 而難其人, 至是宣
演敎理, 盡妙窮神, 學者海會, 得未曾有. 上及群臣, [四十八字
缺], 怠不講故, 官 225)私禇,226) 亡散幾盡, 遂重購求書於227)
中國, 以及契丹日本.
224) 관등사저(官幐私楮):등(滕)은 등(幐)의 오자이고, 저(楮)는 저(禇)의 오자이다.
관등(官幐)은 관청의 주머니이니, 국가의 공금(公金)을 말하고, 사저는 개인의
재산을 말한다. 즉, 나라돈과 개인주머니를 모두 털어서 중국, 거란, 일본으로부
터 재차(再次) 장경을 구입하였다는 말.
225) [苑] [總覽]에는 幐. [碑文]의 勝과 [全文]의 滕은 幐의 오자임.
226) [苑] [總覽]에는 禇. [全文] [碑文]의 楮는 禇의 오자임.
227) [苑] [總覽] [全文]에는 於이나, [碑文]에는 于로 나타나 있으나, 뜻으로는 무방함.
또 신미년228) 봄 남방으로 다니면서 수색(搜索)하여 얻은 책이 무려 4,000
권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먼지로 얼룩져서 글자가 희미하거나, 좀이 먹어229)
백공천창(百孔千瘡)일 뿐 아니라230) 책장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단괴되
어231) 어그러진 것들이다. 이를 모두 수합하여 궤중(軌中)에 담아가지고232)
개성으로 돌아와서 흥왕사233)에 교장사234)를 설치하고 탁월한 학자들(名流)
을 소집하여 유결(謬缺)부분을 교정 보완하고, 그를 모두 연참235)하여 몇 년
만에 문적(文籍)이 크게 갖추어졌으므로 학자들이 기꺼이 의지하였다.
又於辛未春, 南遊搜索, 所得書, 無慮四千卷, 皆塵236)237)昏蟫
斷, 238)編簡壞239)舛. 俱收竝240)拾, 包匭以歸, 請置敎藏司於興王
寺, 召名流, 校241)定謬缺, 使上之鉛槧, 不幾稔閒, 文籍大備,
學者忻賴.
228) 신미(辛未):고려 선종 8년(1091).
229) 담단( 斷):담단이란 책이 좀이 먹어 끊어지거나 헤어진 것을 일컫음.
230) 편간(編簡):서적, 책, 도서 등의 뜻. 한유(韓愈),「상병부이시랑서上兵部李侍郞
書」에 “自唐虞己來 編簡新存”이라 하였다.
231) 괴천(壞舛):책이 파괴되어 책장이 앞 뒤로 뒤 바뀐 것. 『당서』「육귀몽전陸龜蒙
傳」에 “借人書 篇帙壞舛”이라 하였다.
232) 포궤(包匭):보자기에 싸서 상자 속에 넣는 것. 포장한 상자. 포는 끈으로 묶거나
보자기에 싸는 것. 궤는 갑(匣)이니, 얽어매어 포장하는 것. 『서경書經』「우공禹
貢」에 “包匭菁茅 厥篚玄纁璣組”라 하였다.
233) 흥왕사(興王寺):경기도 개성시 덕적산 남쪽에 있던 절. 문종 10년(1056)에 창건
하여 12년 동안에 걸쳐 무려 2천 8백간이나 되는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234) 교장사(敎藏司):장경도감(藏經都監). 또는 대장도감(大藏都監)과 같은 직책이
니, 장경을 판각(板刻)하여 간행함을 맡은 부서.
235) 연참(鉛槧):문자(文字)를 도말(塗抹, 먹)하는데 사용하는 분말(粉抹)과 문자를
쓰는 판(板). 전하여 문필(文筆)을 말함. 강총(江總),「황태자태학강비皇太子太學
講碑」, “靡不飾以鉛槧 彫以緗素 此文敎之脩也”.
23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 모두 塵임.
237) [苑] [總覽]에는 塵과 忻字 사이에 46字가 탈락되었음
238)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蟫. [全文]의 蟬은 蟫의 오자임.
239)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壞. [全文]의 壤은 壞의 오자임.
240)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益이고, [全文]에는 竝이니, 뜻으로는 서로 무
방함.
241)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에는 校. [碑文]의 刊는 校의 오자임
갑술년242) 2월 초에 홍원사243)로 옮겼으나, 그의 교학진작은 옛과 같았
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244)이 병세가 위독하여지므로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부터 대가람을 창건하여 사액을 홍원
사로 하기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를 성취하지 못
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내가 죽고 차자인 운(運:宣宗)이 왕위를 계승
하거든 나의 소원을 잊지 말고 승통도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이 불사를
회향(回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순종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국사는 눈
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다. 그 후 홍원사가 낙성(落成)됨에 국사
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甲戌春二月初, 入洪圓寺, 其敎學如故. 居興王初, 順王寢痾,
召師言, “寡人, 嘗願作大伽藍, 額號洪圓, 今病篤,245)246) 想247)
不自濟, 若嗣君不相忘, 師其同心, 以終吾願.” 師涕泣曰, “臣,
敢盡心力, 死生不易.” 至於旣成, 乃命住持焉.
242) 갑술(甲戌):고려 제13대 선종 11년(1094).
243) 홍원사(洪圓寺):경기도 개성에 있던 절. 문종 2년(1048)에 창건.
244) 순왕(順王):고려 제12대 순종이니, 문종의 장자이며 의천의 친형.
245) [苑] [全文] [碑文]에는 篤이고, [總覽]에는 결락 표시로 나타나 있음.
246) [苑] [總覽]에는 篤과 海字 사이에 45字가 탈락됨.
247)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殆이고, [全文]에는 想이니, 뜻으로는 모두 무
방함.
40세 때인 1094년 5월 복잡한 개경(開京)을 벗어나 해인사로 퇴거하여
계산(溪山)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호연한 기백으로 지내면서 여기서 이
세상을 마치려는 ‘종언지지(終焉之志)’를 가졌다. 조카인 헌종248)이 두 차
례에 걸쳐 개성으로 되돌아 오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夏五月, 退居海印寺, 溪山自適. 浩然有終焉之志. 獻王再徵,
不能致.
248) 헌왕(獻王):고려 제14대 헌종이니, 선종의 원자(元子).
을해년 10월 8일 셋째 형인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도 수차례에 걸쳐 친
서를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또 교
서를 보내 이르기를, “스님께서 왕도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불곡249)의 마
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오직 고산(高山)의 경행(景行)과 오
매(寤寐)의 증상(增想)일 뿐 아니라 척령250) 재원251)과 같이 의리를 존중하
는 것이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과인이 직접 가서 뵙지
는 못하고 여러 번 성청(誠請)하여 고적(高跡)에 불의252)하였으나 일찍부
터 과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성인들은 비이비혜253)하고 시속(時俗)
과 더불어 권서254)가 무애(無礙)하였으니, 바라건대 한 번 와서 나의 뜻에
부합(副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국사는 이 교서를 보
고 번연히 이르기를, “정중한 예를 갖추어 후사(厚辭)함에는 그 의리를 거
역할 수 없다”하고, 곧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興王寺)에 주
석하면서 교학진흥(敎學振興)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乙亥冬十月, 八日, 肅祖卽位, 數遣近臣, 齋書迎之, 固255)辭. 又
敎曰, “不穀之望, 師可謂切矣. 非高山景行, 寤寐增想, 而
在原, 義重匪他. 雖不能往, 屢以誠請, 拂衣高跡, 曾不我顧. 古
之達者, 非夷非惠, 與時卷舒, 冀或一來, 副我意焉.” 師飜然曰,
“備禮厚辭, 義不可拒.” 乃赴都, 復居興王寺, 敎學256)257)如初.
249) 불곡(不穀):일종의 자칭 대명사. 스스로를 겸손하게 말하는 것, 불선(不善)의
뜻. 곡은 선(善)의 뜻. ①제후(諸侯)의 자칭(自稱). 『좌전』「희공僖公」4에 “齊侯曰
豈不穀是爲”라 하고, 그 「주注」에 “孤寡不穀諸侯謙稱也”라 하였으며, 『노자』39
장에는 “貴以賤爲本 高必以下爲基 是以 侯王自謂孤寡不穀”이라 하였다. ②왕이
스스로 낮추어 일컫는 말. 불곡은 불록(不祿)의 뜻.
250) 척령(鶺鴒):[全文]의 겹합(鵊鴿)은 척령(鶺鴒)의 오자이다. 척령이란 할미새이
니, 모양은 제비와 비슷하고 회색 빛을 띠고 있는데, 복부(腹部)는 희고 목 부분
에는 검은 반점이 있는 작은 새. 척령(脊令), 서령( 鴒), 서거( ) 등으로도 적
는다. 이 새는 날아가면서 우는 소리가 서로 상응(相應)하여 친압(親押)하므로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다.
251) 척령재원(鶺鴒在原):척령재원(脊令在原)이라고도 함. 형제가 서로 위급함을 구
제하여 주는 것에 비유한 말. 『시경詩經』, “脊令 邕鳥渠也 飛則鳴 行則搖 不能自
舍耳 言兄弟之相救於急難”이라 하고, 그 전(箋)에 “邕鳥渠水鳥 而今在原 朱其常
處則飛則鳴 求其類 天性也 猶兄弟之於急難”라 하였다.
252) 불의(拂衣):①옷 소매를 떨치는 것. ②어떤 결심을 굳히고 태연히 일어나는 모
양. 또는 은둔자를 찾아가 의지하는 것.
253) 비이비혜(非夷非惠):백이(伯夷)와 같이 결벽(潔癖)함도 없으며, 유하혜(柳下惠)
와 같은 관용(寬容)도 않고 중용(中庸)의 도(道)를 지키는 것. 법언(法言),『연건
淵騫』에 “不夷不惠 司否之間也”라 하였고,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상’에 “孟
子曰 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라 하였다.
254) 권서(卷舒):말았다 폈다하는 것. 굴신(屈伸)과 같은 뜻. 즉 재덕(才德)을 감추었
다 나타냈다하는 것이니,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는 말. 강엄(江淹),『잡체雜體』
「사복사혼유현시謝僕射混遊賢詩」에 “卷舒雖萬緖 動復歸有靜”이라 하였다.
255) [苑] [總覽]에는 固와 不字 사이에 44字가 탈락됨
25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學임.
257) [苑] [總覽]에는 學과 一字 사이에 46字가 탈락됨.
정축년 5월258) 국청사259)주지에 취임하여 최초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설하였으나, 이 종파(宗派)가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중
간에 폐멸(廢滅)되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스스로 전당260)에 가서 도를
문학하고 천태불롱(天台佛隴)에서 천태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
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맹서를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261) 인예태후
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기꺼워하여 이 절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숙종
이 즉위하여 이 창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낙성하였다.262) 국사는 이 때
에 천태교문(天台敎文)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그 교리를 연구하여 모
두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이 원명(圓明)하고
언어와 묵언(默言)이 자재하여 경서만 믿고 고수하려는 집유(執有)의 생
각을 발진(拔盡)하고 악견(惡見)으로 공(空)을 취하는 집착을 파(破)하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였다.263) 그리하여 일시에 학자가 국사의 성애(聖涯)
를 첨앙하여 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찾아오는 스님이
1,000명이나 되었다.264) 왕성한 지라!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하는 자들이 국
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세(百世)에 불천(不遷)하는 종지(宗旨)라 하였으
니 어찌 신행(信行)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丁丑夏五月, 住持國淸寺, 初講天台敎, 是敎, 舊巳東漸, 而中
廢. 師自問道於錢塘, 立盟於佛隴, 思有以振起之, 未曾一日忘
於心.265) 仁睿太后, 聞而悅之, 經始此寺, 肅祖繼之, 以畢厥功.
師於此之時, 依文而顯理, 究理而盡心. 止觀圓266)明, 語默自
在, 拔盡信書之守, 破惡取空之執, 一時學者, 瞻望聖涯, 捨舊
而自來, 幾一千人267). 盛矣哉, 世之議台宗者謂268)師, ‘百世不
遷之宗, 渠不信哉.’
25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學임.
257) [苑] [總覽]에는 學과 一字 사이에 46字가 탈락됨.
258) 정축하오월(丁丑夏五月):고려 숙종 2년(1097).
259) 국청사(國淸寺):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국청동에 있던 절. 선종 6년
(1089)에 왕태후(王太后)가 창건하였다.
260) 전당(錢塘):전당(錢唐)으로도 적음. 현(縣)의 이름. 진(秦)나라 때 두었는데, 당
나라 때 이르러 국호(國號)를 피하기 위해 토(土)를 첨가하여 당(塘)으로 개칭하
였다. 지금의 절강성 항현(杭縣) 지역.
261) 사유이진기지(思有以振起之):대각국사가 지자탑(智者塔) 앞에서 해동(海東)에
천태교를 다시 떨침이 있기를 서원[思]하였다는 뜻.
262) 숙조계지(肅祖繼之):숙조(肅祖)가 공사(工事)를 계속하였다는 말. 숙조는 고려
제15대 숙종(1095~1105 재위).
263) 파악취공지집(破惡取空之執):악견(惡見, 邪見)으로 공을 취한 국집을 파한다는
뜻이니, 단견(斷見)을 여의게 하는 것을 말함.
264) 사구이자래(捨舊而自來):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새것으로 찾아 온다는 말이다.
이전에 의지(依支)하였던 화엄종을 버리고, 새로운 종지(宗旨)인 천태종(天台
宗)으로 돌아 온다는 뜻.
265) [苑]은 결락, [總覽] [碑文]에는 心. [全文]의 悟는 心의 오자임.
266)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圓. [全文]의 圍는 圓의 오자임.
267)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人. [全文]의 之는 人의 오자임.
268)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謂이고, [全文]에는 爲이니, 이는 [全文]의 爲가
오자임.
무인 4월269) 경인(庚寅)에 숙종 임금이 다섯째270) 왕자에게 명하여271) 국
사를 시봉(侍奉)토록 하고 손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도승통인
징엄(澄儼)이 바로 이 스님이다. 신사년 2월272)에 숙종 임금이 홍원사273)에
구조당(九祖堂)을 낙성하므로써273) 국사를 청하여 중수(重修)하고 영정(影
幀)을 봉안하였는데, 전대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의 조보(祖譜)는 여러 갈
래를 보여주고 있으나, 이제 여기서는 마명,274) → 용수,275) → 천친,276) →
불타,277) → 광통,278) → 제심,279) → 운화,280) → 현수,281) → 청량282) 등으로
구조(九祖)를 삼았으니, 이것은 국사가 배정(配定)한 바이다.
戊寅夏四月庚寅, 上命第五子, 侍之, 師手落其髮, 今都僧統
是也. 辛巳春二月,283) 上, 以洪圓寺九祖堂成, 請師重284)修而
落之, 前世爲祖譜不一, 今以馬鳴, 龍樹, 天親, 佛陀, 光統, 帝
心, 雲華, 賢首, 淸凉, 爲九祖, 師所定也.
269) 무인하사월(戊寅夏四月):고려 숙종 3년(1098).
270) 제5자(第五子):숙종의 다섯째 아들. 이름은 징엄(澄儼). 8살 때인 1098년에 삼
촌인 대각국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뒤에 승통이 되었고, 입적한 후 원명
국사(圓明國師)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본비문 주35)징엄澄儼 p.432 참조.
271) 상명(上命):상은 숙종 임금을 지칭.
272) 신사춘이월(辛巳春二月):고려 숙종 5년(1101) 2월.
273) 홍원사(洪圓寺):경기도 개성에 있던 절. 문종 2년(1048)에 시작되었으나, 순종
의 유촉에 의하여 대각국사가 주선하여 낙성을 보게 하고, 왕명에 의하여 주지
(住持)가 되었다.
274) 마명(馬鳴): Aśvaghosa. 1~2세기 마명보살을 지칭.
275) 용수(龍樹): Nāgārjuna. 2~3세기 용수보살을 가리킴.
276) 천친(天親): Vasubandhu. 4세기 세친(世親)이라고도 하니, 무착보살의 속제
(俗弟). 천친보살을 지칭.
277) 불타(佛陀): Budhabhadara. 359~429.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각현(覺賢)이
라 번역.『양고승전』권2(대정장50, p.334b).
278) 광통(光統):북제(北齊)때 업성(鄴城) 대각사(大覺寺)의 혜광율사(慧光律師), 지
론(地論)의 대가(大家)이다. 업성(鄴城)에 들어가 국통(國統)의 자리에 추대되었
으므로 광통율사(光統律師)라고도 한다.『당고승전』권21(대정장50, p.607b).
279) 제심(帝心):두순(杜順:557~640). 중국 화엄종의 초조(初祖). 속성은 두씨(杜氏).
이름은 법순(法順). 당나라 태종이 지성으로 귀의하여(640) 제심존자(帝心尊者)
라는 호를 주었다. 정관(貞觀) 14년 11월 15일 입적하였다.『불조통기』권29「법
사두순전法師杜順傳」(대정장49, p.292c).
280) 운화(雲華):600~668.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속성은 조씨(趙氏). 이름은 지엄(智
儼). 호는 운화. 천수(天水) 출신. 두순의 제자.
281) 현수(賢首):643~712. 중국 화엄종의 제3조. 그의 조상은 강거국(康居國) 사람.
이름은 법장(法藏). 자는 현수(賢首). 실차난타, 의정(義淨), 복예(復禮) 등과 함
께 신화엄경(新華嚴經) 등을 번역하다.『송고승전』권5「석법장전釋法藏傳」(대정
장권50, p.732a).
282) 청량(淸凉):738~839.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자는 대휴(大休). 명은 징관(澄觀).
호는 청량. 속성은 하후씨(夏侯氏). 키가 9자 4치, 9조(朝)에 걸쳐 7제(帝)의 국사
(國師)가 되었다. 『송고승전』권5「석징관전釋澄觀傳」(대정장50, p.737a).
283) [苑] [總覽]에는 月과 師字 사이에 46字가 탈락됨.
284)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에는 重. [碑文]의 熏은 重의 오자임.
8월에 이르러 병을 만나 궤상(几床)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 관심(觀心)
을 하고 때로는 지경(持經)도 하였으니, 피로하다고 하여 스스로를 멈추
어 쉬지 않았다. 문인들이 불사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285)를 시켜 법체(法
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286) 명의(名醫)와 처방(處方)을 보내어 보의
(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287) 모든 사찰(寺刹)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
복을288) 위한 기도를 하게 하였다.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289)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
해 달라”고 하였다
秋八月, 遘疾隱几而坐, 或觀心, 或持經, 不以疲憊自止. 門人
請修佛事, 曰“事佛久矣.” 上, 遣中使, 問體290)名醫處方, 俵
寶衣名, 令於諸寺, 爲之請福疾革. 親來慰問曰, “恐有不可諱,
願聞其所欲言者.”
285) 중사(中使):국내의 일로 왕명을 전달하는 사신.
286) 문체(問體):체도(體度)를 묻는 것이니, 문병함을 뜻함.
287) 표보의명(俵寶衣名):보의(寶衣)의 이름을 표(俵)한다는 말이니, 스님의 병세를
널리 알린다는 뜻. 보의는 스님들이 입는 옷을 가리킨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
昧海經』(대정장15, p.681a2), “各脫寶衣”.
288) 질극(疾革):병이 위급하다는 뜻. 革은 병급할 극字. 극(亟)과 통한다. 『예기』「단
궁檀弓」‘상’에 “夫子之疾革矣”라 하였다.
289) 불가휘(不可諱):죽음을 뜻하니, 죽음이란 모든 사람들이 기피(忌避)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불휘지변(不諱之變)이라고도 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주기周
紀」‘현왕팔년顯王八年’에 “公叔病 如有不可諱 將奈社稷何”라 하고, 그 「주」에
“不可諱 謂死也 俗語有之 人不諱死”라 하였다.
290) [苑] [總覽]에는 體와 其字 사이에 45字가 탈락됨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
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
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하
고, 10월 5일 임진(壬辰)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
랍은 36세였다.
曰, “所願重興正道, 而病奪其志, 伏望, 至誠外護, 以副如
來遺敎, 則死且不杇.” 冬十月, 五日, 壬辰, 右脇而化, 享年,
四十七, 僧臘, 三十六.
이에 앞서 어느 날 보당291)이 땅에서 무너지면서 꺾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
묘(癸卯)에 다비(茶毘)하여 유골(遺骨)을 수습(收拾)하고, 11월 4일 신유
(辛酉)에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진방292)에 안조(安厝)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是前或夢,293) 寶幢崩推于地. 上聞之慟, 命有司贈賻, 有加冊爲
國師, 諡曰大覺, 十六日癸卯, 茶毘收遺骨, 以十一月四日辛
酉, 安厝294)於五冠山, 靈通寺之震方, 從本敎也.
291) 보당(寶幢):당(幢)이란 범어로 타박약(馱縛若 dhvaja) 또는 계도(計都 ketu)
에 해당하며,높이 간주(竿柱)를 세우고 가지각색의 실과 비단으로 장엄한 것. 중
생을 휘도(麾導)하고 마구니들을 제압(制壓)하는 표시로 불전(佛前)에 세운다.
혹은 당상(幢上)에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두되, 이를 여원인(與願印)이라 이름
하여 보생여래(寶生如來)나 지장보살의 삼매야형(三昧耶形)으로 나타냄.
292) 진방(震方):팔방(八方)에서 동방(東方)에 해당함. 『주역周易』에 의하면 건(乾
☰)은 서북방(西北方)에, 태(兌☱)는 서방(西方), 리(離☲)는 남방(南方), 진(震☳)
은 동방(東方), 손(巽☴)은 동남(東南), 감(坎☵)은 북방(北方), 간(艮☶)은 동북
(東北), 곤(坤☷)은 서남방(西南方)에 각각 배치한다.
293) [苑] [總覽]에는 夢과 於字 사이에 45字가 탈락됨.
294)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厝. [全文]의 備는 厝의 오자임. 厝은 둘 조字이
니, 棺을 가매장소(假埋葬所)에 안치하는 것을 말함.
불법이 양(梁)나라 대통 원년295) 정미(丁未)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
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원효와 의상이 중흥하였으니, 이 두 스님은 십
지(十地)인 성종성296)이며 대종사(大宗師)이다. 말광297)으로 비추는 바이
며, 여파298)로 가피(加被)하는 바이나 모두가 담암299)에서 벗어나와 그 고
명(高明)한 위치에 이르렀다.300) 부처님과의 상거(相距)가 점점 멀어짐에
미쳐서는 불법도 따라서 해이(解弛)하여졌다. 세상에서 이르는 바 명사란
마음은 명예를 쫓아 분주하고,301) 지혜는 이권에 눈이 어두워졌으며,302) 학
문은 부천(浮淺)함만 더하고, 많은 서적을 섭렵하나 문구만 책열303)하여
치아간(齒牙間)에 끼워놓고,304) 노노305)하게 횡설수설하며 스스로 좋아하
며 착각에 빠져있다.
佛法, 以梁大通元年丁未, 肇入新羅後. 一百餘年, 義想元曉
作, 是二師者, 以聖種306)性, 爲大宗師. 末光所燭, 餘波所加,
皆得以出其黮闇, 而造其高明. 及去聖云遠, 法隨而弛. 世所謂
名士者, 心蕩乎名, 智昏乎利, 學益浮淺, 涉獵典籍, 磔烈文句,
置之齒牙閒, 呶呶以自好.
295) 대통원년(大通元年):양(梁)의 무제대(武帝代)의 연호. 신라 법흥왕 14년(527).
296) 성종성(聖種性):보살의 십지(十地)를 지칭함.
297) 말광(末光):①광명이 흘러 마지막의 광명, 즉 말대(末代)의 광명(光明) ②미물
(微物)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혜택(惠澤). 『사기』「소상국세가찬蕭相國世家贊」에
“及漢興 依日月之末光”이라 하였다.
298) 여파(餘波):①나머지의 물결. 말류(末流)란 뜻. ②유풍(遺風)이니, 오랜 세월을
지난 후의 명망(名望) 또는 그의 영향을 말함.
299) 담암(黮闇):어두컴컴한 상태. 매우 희미하여 짐작도 할수 없는 모양. 『장자莊
子』「제물론齊物論」에 “我與若 不能相知也 則人固受其黮闇”이라 하였다.
300) 조기고명(造其高明):그의 도덕이 높고 밝은 경지에까지 나아갔다는 뜻.
301) 심탕호명(心蕩乎名):마음은 명예를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한다는 말.
302) 지혼호리(智昏乎利):지혜는 이권에 눈이 어두워졌다는 뜻.
303) 책열(磔裂):磔은 찢을 책字. 온전하지 못한 것. 양웅(楊雄),「장양부長楊賦」에
“分办單于 磔裂屬國”이라 하였다.
304) 치지치아간(置之齒牙間):보고 들은 말들을 치아간에 담아 놓고 이야기거리를
삼는다는 뜻.『사기』「숙손통전叔孫通傳」에 “此特群盜鼠竊拘盜耳 何足置之齒牙
間”이라 하였다.
305) 노노(呶呶):쓸데없는 말을 횡설수설하여 그칠 줄 모르는 태도. 유종원(柳宗元),
「답위중입론사도서答韋中立論師道書」에 “漸不喜閙豈可使呶呶者 早暮咈吾耳
騷吾心”이라 하였다.
306) [苑] [總覽]에는 種과 乎字 사이에 46字가 결락되었음.
후학(後學)들이 오류(誤謬)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견(邪見)으로만 치닫
고 반성(反省)하지 못하고 있다. 국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습속(習俗)의
폐몽(蔽蒙)과 도덕(道德)의 울체(鬱滯)함을 개탄하고 감정이 격발하여 크
게 분발하며 전력을 다해서 도를 밝히고 폐단을 구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국사는 잘못된 전학(典學)을 모조리 물리치고 307)
묘온(妙蘊), 즉 묘법을 개시하며 유복(幽覆)한 것들을 부발(剖發)하고 유
타308)한 자를 부기하였다. 그리고 뇌정(雷霆)으로써 진동하고 우로(雨露)
로써 널리 뿌리는 중간에 비록 심복(心服)하여 기꺼이 따르는 자가 있는
반면, 많은 사견자(邪見者)들이 정견자(正見者)를 질투하여 훼방(毁謗)하
는 소리가 비등하였으니, 이를 도로써 자처하여 염연히 마음에 조금도 동
요함이 없었다. 학자들이 흡연309)히 모여들어 고질적인 사견의 병이 정견
으로 돌아갔으며,310) 점차로 벽견(僻見)과 망집(妄執)한 자들이 얼굴을 고
치고 생각을 바꾸어 근본적인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찍이 선가(禪
家)에서 이른바 전제311)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는 상상근지자(上上根智者)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하사(下士)일 경우
에는 구이(口耳)의 학으로써312) 일법만 터득하면 스스로 만족히 여기고 있
다. 그리하여 선종(禪宗)에서는 삼장(三藏) 십이분교313)를 추구314) 또는
조박315)이라고 천칭(賤稱)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족하다고 관찰하는 자가
또한 어찌 오견(誤見)이 아니겠는가.
後來者, 承誤襲謬, 往而不返. 師於是, 疾習俗之蔽蒙也316), 道
德之鬱滯也, 激昻奮勵, 以明道求弊, 爲己任. 黜其典學, 示之
妙蘊, 剖發幽317)覆, 扶起窳318)惰.319) 雷霆而震動之, 雨露以溥
灌之閒, 雖有心服, 而悅隨者, 而群邪嫉正, 謗毁沸騰, 以道自
處, 恬不動心. 終而翕然, 寢變於正, 異時, 僻見妄執者, 革面
遷慮, 務爲根本之學. 亦嘗言曰, 禪家所謂, 不藉筌蹄, 以心傳
心, 則上上根智者也. 脫或下士, 以口耳之學, 認得一法. 自
以320)爲足, 指, 三藏十二分敎, 芻狗也, 糟粕也, 又烏足觀者,
不亦誤乎.
307) 출기전학(黜其典學):승오습류(承誤襲謬)한 자들이 주장한 전적(典籍)과 소견
(所見)을 모조리 배척하였다는 말.
308) 유타(窳惰):유타란 해이하며 나태하다는 말. 窳는 게으를 유字. 『상자商子』「간
령墾令」에 “農無得糴 則窳惰之農勉疾”이라 하였다.
309) 흡연(翕然):한 곳으로 모아 드는 모양. 뜻이 하나가 되어 화합하는 것.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天下翕然 大安殷富”라 하였다.
310) 침변어정(寢變於正):고질적인 사견(邪見)의 병이 마침내 정견(正見)으로 변하
였다는 말.
311) 전제(筌蹄):원래 물고기를 잡는 통발과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일컫는데,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의 비유다. 여기에서는 언어, 문화를 가리키니, 이들은
진리 그 자체(自體)가 아니고 다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 이라는 뜻.
「적인선사조윤청정탑비문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文」 주33)전제筌蹄 [신라편]
p.84 참조.
312) 구이지학(口耳之學):입으로 설(說)하고 귀로 청법하는 학문이니, 교학(敎學)을
지칭.
313) 십이분교(十二分敎):팔만대장경을 12가지로 그 내용을 구분한 것. 십이부경
(十二部經) 또는 십이분경(十二分經)이라고도 함.
314) 추구(芻狗):추구(蒭狗)라고도 한다. 추초(芻草:소먹이 풀, 꼴추)와 개. 일설(一
說)에는 풀을 묶어 만든 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데 제사가 끝나면 버리기 때
문에 용처가 있으면 사용하고 쓸 데가 없으면 버리는 것에 비유하는 것. 『노자』5
에 “天地不仁 以萬物 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 爲芻狗”라 하였다.
315) 조박(糟粕):술 지게미 또는 깨묵 따위. 필요가 없는 천한 물건을 뜻함.
316) [苑] [總覽]에는 也와 閒字 사이에 46字가 결락되었음.
317)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에는 幽. [碑文]의 延은 幽의 오자임.
318)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에는 窳. [碑文]의 翕은 窳의 오자임.
319)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 [碑文]의 情은 惰의 오자임.
320)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以. [全文]의 次는 以의 오자임.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 과『기신론(起信論)』등을 배우도록 권하였
으며, 또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도하며 부모를 극진히 봉양(奉養)하여 게
을리하지 아니하고, 돌아가신즉 정성을 다하여 천도공덕을 짓되, 내지 스
스로 팔을 태우며 부모가 돌아가신 기일(忌日)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
다. 또 감식(鑒識)이 통연(洞然)하여 선행(善行) 닦기를 게을리하지 아니
하였다. 항상 진신321)을 띤 선생과 더불어 마주앉아 응대(應對)하되, 그 언
론(言論)이 성인(聖人)의 도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또 그 문사(文辭)가
평범하고 담담하나 깊은 뜻이 있으므로 사대부들이 그의 도풍(道風)을 받
아 피미322)하고 점점 인위적인 조탁323)함은 싫어하고 아정(雅正)한 데로 나
아갔다. 심지어 속이324)와 호신325)은 문학으로써 스스로 업을 삼지 아니하
였으며, 환도326)와 이술(異術)은 마치 원수와 같아서 한번 그 모양을 보거
나 그의 말을 들으면 송연하여 스스로 승복(承服)하지 아니함이 없었으
니, 서로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였다. 그 후 예고327)께서 국사의 화
상(畵像)을 보고328) 배회(徘徊)하면서 감모(感慕)하여 친히 200자나 되는
영찬(影讚)을 지었다.329)
乃勸學楞伽, 起信等經論, 又天性至孝, 善父母不怠, 及其亡
則, 窮330)思畢情以營功德, 至自燒臂, 後値諱日, 亦如之又.331)
鑑識洞然, 樂善不倦. 每與縉紳先生, 燕見應對, 其言論, 不出
聖人之道. 又其文辭, 平澹而有味, 故士大夫, 承風而披靡, 稍
厭彫琢, 而趣雅正焉. 至於俗吏, 虎臣, 不以文學自業, 及它332)
道異術, 相背如333)334)仇讐者, 一見其貌, 聞其言則, 莫不竦然自
服, 恨相値之晩. 後睿考, 覩畵像, 徘徊感慕, 親製讚詞二百字.
321) 진신(縉紳):예장(禮裝)할 때 홀(笏)을 큰 띠에 꽂는 것. 전(轉)하여 관직과 신분
이 높은 사람. 또는 선비나 사대부.
322) 피미(披靡):초목이 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모양. 즉 사대부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언복(偃伏)한다는 뜻. 사마상여(司馬相如),「상림부上林賦」에 “應風披靡 吐
芳揚烈”이라 하였다.
323) 조탁(彫琢):옥돌을 다듬는 것. 전(轉)하여 자구(字句)나 행동을 다듬고 꾸미는 것.
324) 속이(俗夷):문신(文臣)을 지칭.
325) 호신(虎臣):좌우(左右)에서 호위하는 신하, 즉 무신(武臣)을 가리킴.
326) 환도(宦道):관도(官途)라고도 함. ①관리들이 차례대로 승급하는 길 ② 관직의
길이나 관직에 봉사하는 것.
327) 예고(睿考):고려 제16대 예종(1105~1122)을 지칭함.
328) 도화상(覩畵像):‘예종이 대각국사의 영상(影像)을 보고’라는 말.
329) 친제찬사이백자(親制讚詞二百字):국사의 족하(足下)이고 숙종의 태자인 예종
이 국사의 영정(影幀)에 참배하고 배회(排徊)하면서 감모(感慕)하여 사언률(四
言律) 사십팔구(四十八句) 192자(字)로된 영찬(影讚)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化身返本 遺敎流東 間生覺智 弘闡宗風 義想始祖 元曉同時 今繼芳躅 其惟國師
割愛王宮 專精佛道 幼學生知 上乘超悟 壯慕先哲 遠遊中華 輕涉滄海 歷參作家
賢首智者 因明律鈔 求索諸宗 密傳衆妙 星霜換律 甁錫登途 天子送勞 國人迎蘇
慧炬重明 願輪載轄 大心丈夫 弘法菩薩 機鋒不露 徵應難藏 身生玉粒 口出火光
法堂動搖 神物來護 衆皆讚揚 師不廻顧 遼皇施信 倭國寄經 人天蒙福 遐迹歸誠
圓宗類聚 釋宛詞編 後生模範 歷代流傳 繪事雖工 靈臺莫狀 略記聲熏 但伸鑽仰”.
『대각국사문집』(外集)1권「본국예왕어제진찬本國睿王御製眞讚」;『한국불교전
서』권4, p.567c3 참조.
330) [苑] [總覽]에는 窮과 之字 사이에 결락, 44字가 탈락됨.
331)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又. [全文]의 持는 又의 오자임.
332) [全文]에는 他, [總覽]에는 它, 它는 他의 古字. [苑] [全文]의 宦은 它의 오자임.
333)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 [碑文]에는 如임.
334) [苑] [總覽]에는 如와 適字 사이에 40字가 탈락됨.
국사가 송나라에 갔을 때, 사수가335)에 있는 승가대사탑336)에 예배를 드
릴 적에는 등불과 같은 광명이 나타났고, 천축사337)에서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함에는 혁혁(赫赫)한 흰 광명이 방광(放光)하였다. 또 해인사(海印
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할 때는338) 당우(堂宇)가 홀연히 진
동하여 경기(警起)하는 상서(祥瑞)가 나타났었고, 예고(睿考)께서 아직 동
궁에 있을 때339) 병에 걸렸다. 국사를 청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독송
케 하였으니, 을야340)에 이르러 광명이 입으로부터 흘러나와 방 안을 훤히
비추었다. 고승전341)에 이른 바 신이감통(神異感通)이란 것이 어찌 이러한
것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또 국태민안을 위하여 흥복사342)를 창건하는 일
을 잊지 아니하였으며, 혹은 국가의 전로(前路)가 영원히 새로워지기를
기고하였으니,343) 이곳은 백군(百郡)이 출입교차하는 요충지대이기도 하
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국태민안을 위한 기도처(祈禱處)인 관(舘)과 원344)
이 있었으나, 괴망(壞亡)하였다면서 문인들에게 지시하여 지남관(指南館)
과 겸제원(兼濟院)을 중창복구(重創復舊)하였다. 예고께서 많은 토지를 이
절에 헌납하였으니,345) 이는 오로지 국사의 공로(功勞)에 속한다. 태후(太
后)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흥왕사 안에 따로 일원(一院)을 개창(開創)
하려는 것이니, 국사가 이일(異日)에 행도(行道)하는 장소로 삼으라.”고 하
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와서 터를 잡고346) 그 후 건축을 마치고는 액
호(額號)를 천복원(薦福院)이라 하였다. 기타 부속공사와 기물, 불상, 경문
등은 일일이 모두 기록할 수 없다.
師適宋時, 泗上禮僧伽塔, 上有光明如燈火, 天竺寺禮觀音, 放
素光赫赫然. 又在海印寺講經, 堂宇忽動, 有驚起者, 睿考, 在
東宮,347) 被疾, 請348)師爲讀金剛般若經, 至乙夜, 光自口出, 燭
於戶牖.348) 傳所謂神異感通者, 豈是歟. 又不忘興349)福, 或告永新
前路, 是百郡之所出入. 舊有館院而壞亡, 卽指授門人, 作新
之. 名館曰, 指南院, 曰兼濟, 至睿考, 錫以土田, 始師之幼.350)
太351)后謂言, “吾願於興王寺內, 別開一院, 爲若異日行道之
所.” 伻352)來卜地, 至後營搆, 號之薦福, 其他所成佛像經文, 亦
不能盡書.
335) 사상(泗上):사수(泗水)의 상류(上流)이나, 여기서는 사주(泗州)라는 지명으로
강소성(江蘇省) 숙천현(宿遷縣)의 동남 지방. 지금은 안휘성(安徽省) 사현(泗縣)
에 속함.
336) 승가탑(僧伽塔):사주탑(泗州塔)이라고도 함. 이 탑 밑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
身)을 안장(安藏)하고 그 위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짓고 다시 승가상(僧伽像)을
봉안하였다. 이 승가대사(僧伽大師)를 사주화상(泗州和尙)이라고도 일컫는다.
당나라 중종(中宗:684~709) 때 서역(西域)에서 온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가 곧
승가대사이다. 사주 임회현(臨淮縣)에 절을 짓고 주석하였으므로 사주화상이라
고 부르게 되었다. 『신승전神僧傳』권7(대정장50, p.99b21), “僧伽大師 西域人 俗
姓何氏 唐龍朔初(661~663) 遊中國 隸名於楚州龍興寺 後於泗州臨淮縣之地 建伽
藍 掘得古香積寺名記 竝金像一軀 上有普照王佛字 中宗聞名 遣使迎入內道域 居
薦福寺 常獨處一室 頂上有一穴 以絮塞之 夜卽去絮 香從穴出 非常芬馥 嘗濯足
人取其水飮之 痼疾皆愈 景龍四年(710) 端座而終 中宗問萬回(萬廻라고도 함)”.
『전등록傳燈錄』(대정장50, p.992a)에 “姓張 一日 往返萬里(故因號萬里) 曰 僧伽是
何人 曰 觀音化身也” 이라 하였다.
337) 천축사(天竺寺):중국 절강성 항현(杭縣)에 삼사(三寺)가 있었는데, 한곳은 비래
봉(飛來峰)의 남쪽에 있는 하천축사(下天竺寺), 또 한곳은 계류봉(稽留峰)의 북
쪽에 있는 중천축사(中天竺寺), 다음 한곳은 북고봉(北高峰)의 기슭에 있는 상
천축사(上天竺寺)라 한다. 여기의 천축사는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세음
보살상에 예배하였다는 것에 상천축사로 추측된다. 『절강통지浙江通志』에 따
르면 “도익(道翌)이란 스님이 이곳에 암자를 맺고 수도하던 중, 산중에서 기이
하게 생긴 나무를 얻어 그를 깎아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였다. 건우년간(乾祐年間
948~950)에는 숭훈(崇勳)이란 스님이 낙양(洛陽)으로부터 고불사리(古佛舍利)
를 모시고 와서 정중(頂中)에 봉안하였다. 그후로는 더욱 영험이 있어 기도할
때마다 종종 방광(放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38) 재해인사강경(在海印寺講經):대각국사가 해인사에 주석한 시기는 1094년에 와
서 1096년 또는 1097년에 떠나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본다면 약 3~4년간으로
생각된다.
339) 예고재동(睿考在東):예종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라는 말.
340) 을야(乙夜):오후(午後) 10시이고, 오야(五夜)의 하나. 갑시(甲時)는 오전 8시, 을
시(乙時)는 오후 10시, 병시(丙時)는 오후 12시, 정시(丁時)는 오전 2시. 무시(戊時)
는 오전 4시이다. 이를 오야라고 한다. 을야람(乙夜覽)이란 말이 있는데, 천자가
을야경(乙夜頃 오후 10시) 정무(政務)를 마치고, 취침전에 책을 보는 것을 말함.
341) 고승전(高僧傳):찬녕(贊寧)이 지은 『송고승전』을 가리킨다.
342) 흥복(興福):①나라가 부흥하고 국민이 복되게 하려는 염원 ②나라가 태평하
기 위해 예종 6년(1111)에 흥복사(興福寺)를 창건하였다는 뜻. 흥복사는 경기도
개성에 있던 절. 여기서는 ①흥복(興福)을 기원하며 ②흥복사를 창건한 것을
가리킴.
343) 고영신전로(告永新前路):국가가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는 전로(前路)에 있어 새
운 개혁을 추진하며, 또한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기도를 봉행하는 곳.
344) 관원(館院):관(館)과 원(院)이니,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는 장소. 또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
345) 예고석이토전(睿考錫以土田):예종이 관원(館院)에 토지(土地)를 하사하였다는
말. 錫은 줄 석字.
346) 팽래복지(伻來卜地):인예태후(仁睿太后)가 흥왕사 안에 별원(別院)을 두고자
사람을 의천에게 보내어 오게 하여 터를 정하였다는 말.
347) [苑] [總覽]에는 宮과 新字 사이에 41字가 탈락됨.
348)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에는 請. [碑文]의 詣는 請의 오자임.
349)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興. [全文]의 與는 興의 오자임.
350) [總覽] [全文] [碑文] 에는 幼. [苑]의 功은 幼의 오자인 듯함.
351) [苑] [總覽]에는 太와 亦字 사이에 42字가 탈락됨.
352)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伻. [全文]의 伴은 伻의 오자임.
국사는 이미 일국의 존친(尊親)이 되었으므로353) 큰 정사가 있을 때마
다, 관밀354)히 자문하였으므로, 임금과 더불어 나라의 대사를 논의하는 경
우가 심히 많았다.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끼친 음덕(陰德)이 많았으나, 또
한 후세 사람들은 일일이 다 알지 못하고 있다. 국사께서 입언(立言)함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역대의 화엄종인(華嚴宗人)이 남긴 군언
(群言)이 한만355)한 가운데서 그 정요만을 촬약(撮略)하여 종류별(種類別)
로 분류해서 『원종문류圓宗文類』356)라 이름하였다. 고금의 문장 중에 교
(敎)에 도움이 될만한 부분을 회통(會通)하여 『석원사림釋苑詞林』
357)을 만들다가 애석하게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입적한 후, 문인들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편집상에 있어 산거(刪去)하고 취입(取入)하는 과정에서
마땅함을 놓친 부분이 많았다. 문인들이 소집(所集)한 국사의 시문, 잔편
(殘編), 단고(斷藁) 등은 거의 주차358)가 없이 엮어 20권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솔이(率爾)하게 낙필(落筆)한 것이므로 후세에 끼칠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므로 생전에 그 글 중에 필사(筆寫)한 책과 각판(刻板)한
판목(板木), 그리고 모든 원고를 소각(燒却)해 버렸다.
師旣爲一國尊親, 有大政事, 必款密諮決故, 所與上, 論列國
家事甚多. 而有陰德於人民, 亦厚世莫得而盡知. 師欲359)360)立
言以垂不腐, 而志莫之遂. 嘗以群言汗漫, 撮其精要, 類別部
分, 名曰圓宗文類. 又欲會古今文章, 有補於敎, 以爲釋苑詞
林, 而未及參定. 至後乃成故, 去取失當. 門人集所著, 詩文殘
編, 斷藁存者, 無幾紬次, 爲二十卷, 此皆率爾落筆, 非將361)362)
以貽後也, 故於生前有以其文寫而刻之者, 取其板焚之.
353) 일국존친(一國尊親):대각국사는 나라의 높은 왕족(王族)이라는 뜻.
354) 관밀(款密):정성스럽고 은밀(隱密)하게라는 뜻.
355) 한만(汗漫):멀고 넓어 광막한 모양. 호한(浩澣)과 같은 뜻. 『금사金史』「고여려
전高汝礪傳」에 “比應詔言事者 不啻千數 俱不達各司利害 汗漫陳設 莫能詳盡”라
하였다.
356) 원종문류(圓宗文類):22권 화엄종에 속하는 문헌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역
대 화엄종 저술을 모아 놓은 책. 현존하는 것은 제1권, 제14권, 제22권 등 3권 뿐
이다.
357)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이니, 고금(古今)의 문장들 중에 교리에 도움될 만한
것을 모아 놓은 것. 이는 대각국사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재는 제191권부터 제195권까지 5권을 합한 1책(冊) 만이 남
아 있을 뿐이다.
358) 주차(紬次):권질(卷帙) 또는 순서, 차례 등의 뜻.
359)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 [碑文]에는 欲임.
360) [苑] [總覽]에는 欲과 於字 사이에 40字가 탈락됨.
36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以임.
362) [苑] [總覽]에는 以와 疎字 사이에 37字가 탈락되어 있음.
당시 북요(北遼)의 천우황제363)가 국사의 이름을 듣고 대장경(大藏經)과
제종(諸宗)의 소초(疏鈔) 6,900여권을 보내왔으며, 그 밖에도 문서, 약물,
금백(金帛) 등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연경364)에 있는 운서법사365)와
고창국366)의 시라박저,367) 아사리(阿闍梨) 등도 모두 국사를 지극히 존경하
여 책서(策書)와 법복(法服)을 보내어 문안하였으며, 요나라에서 온 사신
들도 모두 친견하기를 희망하여 토산물368)로써 선사하고 적수369)로써 예배
하면서, “우리나라 사신들이370) 요에 들어오면 그때 반드시 국사의 안부를
묻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최후에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문서를 구하는
목록(目錄) 중에 대각국사의 비명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국사의 이름이
사방(四方)으로 나타나 이국(異國)에서까지 존경하는 바가 되었다.
當時北遼天祐帝, 聞其名, 送大藏及諸宗䟽抄六千371)九百餘卷,
其餘文書, 藥物金帛, 至不可勝計. 燕京法師雲諝, 高昌國阿闍
梨, 尸羅嚩372)底, 亦皆尊嚮, 以策書法服爲問, 遼人來使373)者,
皆請見以土物, 藉374)手以拜, “吾使入遼則必問師之安否.” 最
後日本人, 求文書於我, 其目有大覺國師碑誌, 其名顯四方, 爲
異國所尊.
363) 천우제(天祐帝):[碑文]에는 우(佑)이나, 이는 오자인 듯하다. 연표(年表)에 의하
면 요의 천조제(天祚帝 1101~1125)가 아닌가 한다.
364) 연경(燕京):현재의 북경(北京)을 말함.
365) 운서(雲諝):전기 미상.
366) 고창국(高昌國):한의 제후국(諸侯國). 차사전국(車師前國;西域이니, 『서역전西
域傳』에 이르되 ‘超에다 都護府를 두고, 龜玆國과 連接’이라 하였다)이니, 서역삼십
육국중(西域三十六國中)의 하나. 일명 고사(姑師)인데, 지금은 신강성(新彊省)
토로번현(吐魯番縣)의 일대(一帶). 여기에는 차사전국과 차사후국(車師後國)이
있다.
367) 시라박저(尸羅嚩底):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으나 『대각국사문집』
(外集) 권8(한불전4, p.581c)에 국사에게 보내온 서한 이수(二首)의 편지가 있는
데, 그 제목(題目)에 ‘高昌國 幻釋 尸羅嚩底書二首’라 하였으니, 시라박저(尸羅
嚩底)는 환석(幻釋)으로 변역되는 듯하다.
368) 토물(土物):토산품(土産品).
369) 자수(藉手):손을 펴는 것. 『서언고사書言故事』「신체설류身體說類」, “特物惠人
曰 藉手”.
370) 오사(吾使):우리나라, 즉 고려의 사신(使臣)이란 말
371) [苑] [總覽] [碑文]에는 千. [全文]의 百은 千의 오자임.
372) [苑] [總覽] [碑文]에는 嚩, [全文]에는 탈락되어 있음.
373) [苑] [總覽]에는 使와 碑字 사이에 39字가 탈락됨.
374)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藉. [全文]의 籍은 藉의 오자임.
또 이와 같은 일도 있었다. 국사가 어느 때 신의 선형(先兄)인 석현담375)
을 불러 함께 학문을 논하며 서로 절친한 교분(交分)이 마치 종자기(鍾子
期)와 백아(伯牙)의 사이와 같았다.376) 이로 말미암아 신이 단 한 번 국사
를 배알(拜謁)한 적이 있었는데, 용색(容色)이 수청377)하여 마치 청천백일
(靑天白日)을 보는 것과 같아서 같이 앉아 이야기하는 것이 국사를 욕(辱)
되게 하였다. 낮에서부터 밤이 다할 때까지378)『주역』과『노자』, 『장자』
등에 대하여 일, 이의 대의를 시문(試問)하므로 신이 우연히 능히 대답하게
되었다. 후일 자주 칭찬하기를, “담사(湛師)의 동생도 재사(才士)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379) 국사께서 입적하였다.
又如此, 師嘗召臣, 先兄釋玄湛, 與之遊, 甚歡相知之分, 非380)
啻期牙. 臣, 由是, 得以一謁, 容色睟淸, 若覩靑天381)白日, 辱
賜之坐語. 自晝窮夜, 試問易老莊, 一二大義, 臣偶能言之. 他
日數稱之曰, “湛師弟, 亦才士也.” 居無何 師入滅.
375) 석현담(釋玄湛):김부식(金富軾)의 친형(親兄)인데, 출가하여 법명(法名)을 현담
(玄湛)이라 하였다. 김부식은 김근(金覲)의 셋째 아들. 장자는 부필(富弼), 차자
는 부일(富佾). 삼자는 부식. 사자는 부의(富儀)이다. 부식의 선형(先兄)이 출가
하여 그 법명이 현담이라 하였으니, 사료(思料)컨대 장자 부필은 가문상속상(家
門相續上) 아닐 것이고, 차형(次兄)인 부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376) 비시기아(非啻期牙):대각국사와 김부식의 친형(親兄)인 석현담(釋玄湛)과의
교분(交分)은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와의 지음(知音)에 비할 바 아니라는
말. 본비문 주188)지음知音 p.451 참조.
377) 수청(睟淸):얼굴 빛이 윤택하며 맑다는 말.
378) 자주궁야(自晝窮夜):낮에서부터 밤이 다할 때까지라는 뜻이다.
379) 거무하(居無何):‘얼마되지 않아서 그 후’, ‘곧 이어서’라는 뜻.
380) [苑] [總覽] [碑文]에는 啻, [全文]에는 탈락되어 있음.
381) [苑] [總覽]에는 天과 無字 사이에 39字가 탈락되어 있음.
슬프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등용되므로 가사(假使) 죽는
한이 있어도 가히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포발382)하여 발에 흙이 묻
지 앉도록 도우며,383) 또한 흔연(欣然)한 마음으로 흠모(欽慕)함이어든, 하
물며 문자로써 이름을 비석의 끝에 걸게된 것이384) 어찌 영광스러움이 아
니겠는가! 그러나 학술은 완고하며 비루하고 말 솜씨는 삽눌(澁訥)하여
능히 국사의 깊은 덕에 잠겨있는 큰 광명을 개발하여 내예385)들에게 제대
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한탄하는 바이다. 이상의 홍대(弘大)
한 업적(業跡)을 찬송(讚頌)으로 명(銘)하여 읊노라.
噫, 士爲知己者用, 假令死而可作. 雖布髮而籍足, 亦所欣慕
焉, 況以文字, 掛名於碑石之下, 豈不爲榮386)幸也哉. 而學術固
陋,387)388) 辭語澁389)訥,390) 不能發幽德之潛光, 以示391)來裔. 是所
恨焉, 其銘曰.
382) 포발(布髮):석가세존의 전생사(前生事)로서 연등불(燃燈佛)의 행차에 머리를
풀어 지나가게 한 고사(古事). 「법인국사보승탑비문法印國師寶乘塔碑文」 주
331)포발지영布髮之迎 본서 p.334;대정장3, p.47c 등 참조.
383) 자족(藉足):머리카락으로 진흙이 발에 묻지 않도록 발 밑 땅 바닥에 깔았다는 말.
384) 괘명어비석지하(掛名於碑石之下):비문을 지은 자인 김부식 자신의 이름이 비
석의 끝에 기록된다는 뜻.
385) 내예(來裔):후래(後來), 후배, 후손 등의 뜻.
386) [苑] [總覽] [全文]에는 榮. [碑文]의 樂은 榮의 오자임.
387) [總覽]은 결락이나 [苑] [碑文]에는 陋. [全文]의 隨는 陋의 오자임.
388) [苑] [總覽]에는 隨와 義字 사이에 23字가 탈락되어 있음.
389) [總覽]은 결락, [苑]의 과 [全文] [碑文]의 澁은 같은 글자임.
390) [總覽]은 결락, [苑] [碑文]의 吶과 [全文]의 訥은 같은 글자임.
391) [苑] [總覽]에는 결락, [碑文]에는 示. [全文]의 宗은 示의 오자임.
신라의 의상조사 중국에 유학하여,392)
화엄을 연구하고 그 원음(圓音) 전해왔네.
불교를 회통(會通)하신 원효는 독학이나,393)
유치(幽致)를 궁진(窮盡)하고 심묘(深妙)를 극달(極達)하다.
義想西學,
傳394)佛圓音.
元曉獨見,
窮395)幽極深.
392) 의상서학(義想西學):의상(625~702)스님은 650년 당나라에 가서 지엄(智儼)스
님 회상(會上)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고, 670년에 귀국하였다. 입당유학(入唐遊
學)을 서학(西學)이라 하였다.
393) 원효독견(元曉獨見):원효는 해외(海外)에 가서 유학하지 않고, 국내에서 혼자
연구하였으므로 독견(獨見)이라 한 것.
394) [苑] [總覽] [碑文]에는 傳. [全文]의 侮는 傳의 오자임.
395) [苑] [總覽] [碑文]에는 窮. [全文]의 或은 窮의 오자임.
국내서 연구하든 국외에 유학했든,
일승(一乘)을 향한 마음 홀연히 하나였네.
심향(心香)을 훈수(熏修)하고 법우(法雨)로 윤택하며,
학인(學人)은 책을 지고 숲처럼 찾아오네.
或出或處,
脗396)然同心.
香薰霧潤,
學者林林.
396) [苑] [總覽] [碑文]에는 脗. [全文]의 沕은 脗의 오자임.
불교도 세상따라 쇠퇴를 거듭하고,
일월(日月)은 쉬지 않고 허공(虛空)을 지나는데.
사견(邪見)은 광자(狂者)처럼 동(東)으로 달아나고,
무지한 망견자는 북으로 치닫는다.
道397)與世喪,398)399)
日薄月偸.
有狂東400)走,
無知北遊.
39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道.
398)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 [碑文]에는 喪임.
399) [苑] [總覽]에는 喪과 不字 사이에 24字가 탈락됨.
400)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에는 東. [碑文]의 束은 東의 오자임.
미(迷)한 자 우매하여 회복(回復) 길 찾지 않고,
방일(放逸)한 그 마음은 찾을 줄 모르는데.401)
사심(邪心)이 치성(熾盛)하니 정법(正法)은 멸망하고,
막힘도 본래없고 흐름도 아니로다.
迷不知復,
放不知求.
邪熾正滅,
不塞不流.
401) 방불지구(放不知求):방일(放逸)한 자는 도를 구할 줄 알지 못한다는 말.
그 마음 매각(昧却)하면 마침내 방황하고,
왕자로 태어나니402) 그 인물 특이하네.403)
고귀한 부귀영화 아랑곳 전혀 없고,
불법을 배우려고 고명한 스승 찾다.
否終則傾,
異人挺生.
不留富貴,
而404)趣高明.
402) 이인(異人):특이한 사람. 위대한 사람.
403) 정생(挺生):①출생하는 것 ②걸출한 사람.
404) [總覽]은 결락, [全文] [碑文]에는 而. [苑]의 天은 而의 오자임
서송(西宋)을 멀다 않고 비밀리 떠나가서,405)
창파(滄波)에 몸을 실고 송국(宋國)에 건너갔네.406)
곳곳에 찾아가서 지식(知識)을 친견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각종을 묻고 닦다.407)
誰謂宋遠,
木408)道乃行.
索焉而獲,
爲焉而成.409)410)
405) 수위송원(誰謂宋遠):누가 송나라를 멀다 말하는가. 즉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위법망구(爲法忘軀)하였다는 뜻이다.
406) 목도(木道):목은 수(水)의 오자이다. 수도(水道)란 ①물이 흐르는 길 ②개천과
같은 것 ③배가 통하는 길 ④바다. 수로(水路)를 지칭.
407) 색언이획(索焉而獲):찾아서 얻는다는 말.
408) [苑] [總覽] [全文]에는 木. [碑文]의 水는 木의 오자임.
409) [總覽]은 결락이나 [苑] [碑文] [全文]에는 成.
410) [苑] [總覽]에는 成과 不字 사이에 24字가 탈락됨.
이변(理邊)을 통달하니 현상계(現象界) 따로 없고,
사변(事邊)을 터득하니 본체(本體)가 현상(現象)일세.
견해(見解)가 자재하니 이사(理事)가 둘 아니며,
호한(浩瀚)한 그 진리는 말로서 알 수 없네.
理無不盡,
事無不融.
遊觀自在,
浩不可窮.
세계를 총섭(總攝)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일모(一毛)에 집어 넣어 시방(十方)이 따로 없네.411)
당체(當體)서 한걸음도 떠나지 아니하고,
시방을 주행(周行)하되 걸림이 전혀 없네.
攝諸刹海,
於一毛中.
不動一步,
周行虛空.
411) 섭제찰해어일모중(攝諸刹海於一毛中):시방(十方)의 모든 국토를 똘똘 뭉쳐 일
모중에 집어 넣는다는 뜻이니,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과 같은 말.
화엄(華嚴)의 깊은 진리(眞理) 횡류(橫流)로 탕탕하니,412)
국사가 그 진리를 혼자서 지녔도다.
근본은 하나지만 지말(枝末)은 백파(百派)일세,
이 법이 동점(東漸)하여 동국(東國)에 유입(流入)했네.
橫流湯湯,413)
獨爲之防.
道414)其百派,415)
東至于洋.
412) 탕탕(湯湯):물이 콸콸 흐르는 모양. 파도가 구비치는 모양. 『시경』「대아大雅」‘강
한江漢’, “江漢湯湯 武夫洸洸”이라 하였다. “浩浩湯湯 橫無際涯”라는 뜻도 있다.
413) [苑] [總覽] [碑文]에는 湯湯. [全文]의 浪浪은 湯湯의 오자임.
414) [苑] [總覽]에는 결락, [全文] [碑文]에는 道임.
415)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派임.
처음엔 한 사람도 믿는 이 있지 않아,
소귀에 경 읽듯이 은은416)히 불신하나,
정녕(叮嚀)히 타이르니 마침내 돌아와서,
결국엔 갈고 닦아 큰 광명 발하였다.417)
始則不信,
狺狺衆狂,
終隨而革,418)419)
磨淬發光.
416) 은은(狺狺):개가 짖는 소리. 개가 짖는 모양. 개가 짖는 소리 은字이다. 『초사楚
辭』「구변九辯」에 “猛犬狺狺而迎吠兮”라 하였고, 「집주集注」에 은은 “犬爭吠聲”
이라 하였다.
417) 마쉬(磨淬):①불무간에서 낫을 담구어서 두들겨 단련할 때, 수시로 적시는 물
을 담는 그릇임. ②갈고 닦는다는 말.
41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 [碑文]에는 革임.
419) [苑] [總覽]에는 革과 幾字 사이에 24字가 탈락됨.
뛰어난 현인이며 훌륭한 철인이요,
그 인품 존귀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일세.
누구나 찾아가서 진리를 문학하고,
국가의 중대사는 언제나 자문했네.420)
惟君之哲,
其尊其師.
問道之要,
謀事之疑.
420) 모사지의(謀事之疑):국가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국가의 존친(尊親)의
위치에 있으므로 반드시 대각국사를 비밀리 찾아와서 자문을 받았다는 말. 비
문 중에 “師旣爲一國尊親 有大政事 必款密諮決”이란 부분을 명(銘)한 것.
그윽히 도와주고 비밀리 협찬하며,421)
타고난 그 바탕은 지극히 청아하다.422)
표연(飄然)히 이 세상을 떠나려 하시므로,423)
미혹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울면서 만류하다.424)
陰毘密贊,
幾格淸夷.
飄然遠擧,
則挽留之.
421) 음비밀찬(陰毘密贊):국가의 중대한 일에 대한 자문이 있을 때는 남들이 모르게
돕고 비밀히 조언한다는 뜻.
422) 기격(幾格):타고난 본 바탕. 선천적인 본성.
423) 표연원거(飄然遠擧):표연히 멀리 떠난다는 말이니, 열반에 들어감을 지칭.
424) 만류지(挽留之):오래토록 이 세상에 계시면서, 미혹한 중생을 제도해 달라고
만류하였다는 뜻이다.
불법(佛法)의 그 진리는 깊고도 광대(廣大)하여,
그 높음 하늘같고 넓기는 땅과 같네.
진리의 그 당체(當體)는 찾을 길 아득하여,
말로도 알 수 없고 글로도 볼 수 없네.
其道之大,
如天如地.
淵源之深,
固不敢425)議.
425) [苑] [總覽] [碑文]에는 敢. [全文]의 聽은 敢의 오자임
당체가 수연(隨緣)하여 공(空)에서 성사했고,426)
나타난 현상계(現象界)는 무심(無心)한 토저(土苴)일 뿐.427)
묘함은 피부(皮膚) 같고 윤택은 구름 같아,
그 혜택 두루하여 만방에 가득하네.
其出於時,
土苴而己.428)
如膚429)寸雲,
澤彌萬里.
426) 기출어시(其出於時):스님께선 때가 아닌 때에는 절대로 말하지 않고, 반드시
시(時)와 기(機)에 맞추어 법을 일러주나 이는 스님의 가진 법력 중에 가장 작은
일부분이란 말.
427) 토자(土苴):토(土)는 와력(瓦礫;돌자갈), 자(苴 두엄풀 자字;和糞草土)는 초괴
(草蒯;두엄풀) 분초(糞草), 토개(土芥). 일설에는 무심한 모양. 『장자』「양왕讓王」
에 “道之眞以治身 其緖餘以爲國家 其土苴以治天下”라 하였고, 원호문(元好問)
의 「신재부新齋賦」에는 “孰糟粕之弗醇 孰土苴弗眞”이라 하였다. 즉 도로변 풀
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말함.
428) [苑] [總覽]에는 己와 上字 사이에 24字가 탈락됨.
429) [總覽]은 결락, [碑文]에는 膚. [苑] [全文]의 는 膚의 오자인 듯함
망조(罔措)한 제자들은 수비(樹碑)를 간청했고,430)
머리를 조아려서 소원(所願)을 피억(披臆)하니,
비명을 세우려고 비문을 쓰게 하여,
위대한 그 업적을 영원히 선양하다.431)
厥徒叩闕,
稽首敷臆,
冀書之碑,
以揚宏則.
430) 고혼(叩閽):궁궐에 가서 스스로 원죄(寃罪)를 호소하는 것. 현관(玄關:진리)의
문을 두들기는 것. 선지식(善知識)을 방문하여 법문을 청하는 일을 일컫는다.
431) 홍칙(宏則):홍칙이라 음독(音讀)하니, 크고 넓은 도덕을 가리킨다. 「대각국사묘
실급비명안립사적기大覺國師墓室及碑銘安立事跡記」.
상(上)께서 주청(奏請)받고 기꺼히 윤계하여,
국학을 찾던 중에 신에게 명하므로,
임금께 배알(拜謁)하고 사서(辭書)를 올리어서,
필력(筆力)이 부족타고 망극(罔極)을 개진(開陳)하다.
上曰其然,
乃命臣軾,
臣拜獻辭,
貽432)厥罔極.
432) [苑] [總覽] [全文]의 貽와 [碑文]의 詒는 같은 글자임.
【陰記】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묘실433)과 비명 건립에 대한 사적기(事蹟記)
[박호 지음]
大覺國師墓室, 及碑銘安立, 事跡記.[朴浩撰]
433) 묘실(墓室):분묘(墳墓)란 뜻이니, 대각국사가 입적한 후, 화장을 하고 나서 유
골을 수습하여 분묘를 둔 것은 왕손(王孫)이라 하여 능(陵) 대신 매장하여 묘분
과 제당을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국사의 묘실(墓室)은 영통사 동북쪽에 있는데, 태사령434) 최자호435)와 춘
관436)정 전간437)이 숙종438)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터를 점복(占卜)하고, 원
외랑439) 박호440)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묘지명441)을 찬술하였다.
삼중대사(三重大師)인 보자(普滋), 익현(翼玄)과 중대사(重大師)인 융개(融介), 섬
현(暹顯), 낭기(朗機), 도(都) [결락] 등 300인이 작업하고,442) 귀법사443)의
중대사(重大師)인 묘열(妙悅), 충현(忠現) 등 500인이 대석(大石)을 운반하
여444) 돌을 깎아 묘(墓)를 덮었으니 모두 삼중대사(三重大師)였다. 익현(翼
玄)은 감독하였다.445) 그로부터 얼마를 지난 후446) 제당(祭堂) 삼간(三間)
을 묘의 남쪽 영통사에 건축하였는데, 중대사(重大師)인 득엄(得嚴)과 법
선(法善) 등 50인이 작업하였다. 또 영통사 스님 450명도 함께 역사(役事)
하였다. [결락] 항식(恒式)을 삼았다. 또 묘하(墓下)에 묘지기가 있을 집을
짓고447) 백정448) 4명을 불러 살게 하고는 의식(衣食)을 공급해 주면서 묘를
수호(守護)토록 하였다.
國師墓室, 在靈通寺東北隅, 太史令, 崔資顥, 春官正全幹,
奉肅廟聖旨, 卜定其地, 員外郞, 朴浩, 奉449)宣, 述450)墓記.451)
三452)重普滋, 翼玄, 重大師, 融介, 暹顯, 朗機, 都, [以下缺],
三百人, 作之, 歸法寺重大師, 妙悅, 忠現等 五百人, 輸大石,
覆其墓, 皆三重. 翼玄, 督視之. 旣而, 營祭堂三間于墓南, 靈
通寺重大師, 得453)嚴, 法454)455)善等, 五十人, 作之. 又役靈通寺
僧, 四百五十人, [以下缺], 恒式. 又造家墓下, 引456)白丁四人,
居之, 給衣食, 使守墓.
434) 태사령(太史令):태사국(太史局)의 영(令)이니, 천문(天文), 역수(曆數), 측후(測
候), 각루(刻漏) 등을 맡은 관청.
435) 최자호(崔資顥):숙종 6년(1101) 9월 추관정(秋官正)의 관직에 있으면서 왕의 명
을 받아 남경(南京)의 지세(地勢)를 보게 했다. 『고려사』권11 참조.
436) 춘관(春官):예조(禮曹)의 다른 이름. 반면에 추관(秋官)은 형조(刑曹)를 가리
킨다.
437) 전간(全幹):전기 미상.
438) 숙묘(肅廟):고려 제15대 숙종 임금을 지칭.
439) 원외랑(員外郞):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의 준말이니, 본비문 주127)주객원외
랑主客員外郞 p.443 참조.
440) 박호(朴浩):숙종 5년(1100) 10월에 박호를 요(遼)에 보내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고려사』권11;「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 주7)박호朴
浩 [고려편3] p.109 참조.
441) 묘지(墓誌):장례식을 거행할 때 돌이나 전석(塼石)에 망자(亡者)의 전기를 간략
하게 적어 묘속에 넣어 두는 기록.
442) 삼백인작지(三百人作之):묘실(墓室)을 건축하는데 소요인원이 300명이나 되었
다는 말.
443) 귀법사(歸法寺):개성시 탄현문(炭峴門) 밖 송악산에 있던 절. 고려 광종 14년
(963)에 균여(均如)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대성대왕(大成大王, 광종)이 균여를 위
해 창건하였다.
444) 수대석(輸大石):묘지에 사용되는 대석(大石)을 운반하였다는 말.
445) 독시지(督視之):공사 현장을 감독하며 보살핀다는 말.
446) 기이(旣而):얼마 후 조금 지난 뒤
447) 조가묘하(造家墓下):묘지기가 살 집을 묘하에 지었다는 말.
448) 백정(白丁):무위무관(無位無官)의 평민(平民). 백민(白民)이라고도 한다.
44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奉임.
450)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述임.
451) [苑] [全文]에는 誌, [總覽]에는 記임.
452) [苑] [總覽]에는 三과 三字 사이에 15字 탈락됨.
453) [苑] [全文]의 得과 [總覽]의 佛은 어느 字가 옳은지 미상임.
454)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法임.
455) [苑] [總覽]에는 法과 恒字 사이에 18字가 탈락됨.
45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引임.
임오년 5월457)에 지주사458)인 윤관459)이 성지(聖旨)를 받들어 국사의 비
(碑)를 영통사에 세우도록 허락을 받았다. 갑신년460)에 이르러 숙종이 경
선원461)을 건축하기 시작하고, 태사령(太史令)인 최자호(崔資顥)와 춘관
정(春官正) 전간(全幹)에게 명하여 터를 잡았다. [결락] 보자(普滋)[영녕
원462)주], 삼중익현(三重翼玄)[중각원463)주], 중대사덕자(重大師德滋)[향해
원464)주], 중대사진개(重大師眞介)[기방465)주] 등이 역사를 도맡아 관리하
며 감독하였다.466) 중대사득묘(重大師得妙)[비라방467)주]는 식량을 주관하
였고,468) 중대사승류(重大師勝流)[진관사469)]는 목재(木材)를 주선하였으며,
중대사융개(重大師融介)[천태원470)]는 석재(石材)를 담당하였고, 단현(鍛
賢)은 집사(執事)를 맡았으며, 품(稟) [결락] 정굉(定宏) 등은 조수(助手)였
고, 역승(役僧) 25명은 흥왕사의 중대사였다.
壬午五月日, 知奏事尹瓘, 奉聖旨, 許立國師碑靈通寺, 至471)
甲472)申473)年,474) 經始敬先院,475) 宣命大史令崔資顥, 春官正全
幹, 卜地, [以下缺],475) 普滋[永寧476) 院主], 三重翼玄[重閣院主], 重
大師德滋[香海院主], 重大師眞介[崎477)房主]等, 都管勾役事,重
大師得妙[毘478)羅479)房主], 主穀,480) 重大師勝流[眞481)觀482)寺], 主
材,483) 重大師融介[天台院主], 石主鍛, 賢善, 爲執事, 稟, [以下
缺], 定宏等, 助手役僧, 二十五人, 興王寺, 重大師.
457) 임오오월(壬午五月):고려 숙종 7년이니, 대각국사의 입적 다음 해인 1102년.
458) 지주사(知奏事):고려 때 중추원(中樞院)의 정3품(正三品) 벼슬. 문종 때 제정.
정원은 1명.
459) 윤관(尹瓘):?~1111.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 여러 관직을 두루 역
임하고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
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가 되었다가 수태보문하시중
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올랐다.
460) 갑신년(甲申年):숙종 9년(1104)
461) 경선원(敬先院):숙종이 선왕(先王)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영통사에 한 법당을
짓고 선경원(先敬院)이라 이름하였다.
462) 영녕원(永寧院):영통사에 있는 일원(一院)인 듯함.
463) 중각원(重閣院):영통사에 있는 일원인데 2층 건물인 듯함.
464) 향해원(香海院):영통사에 있는 일원인 듯함.
465) 기방(岐房):영통사에 있는 일원인데, 마치 아자방(亞字房)과 같이 Y字처럼 생
긴 듯함.
466) 도관구역사(都管勾役事):역사(役事)를 도맡아 관리 감독하는 소임이니, 현재의
도감(都監)과 같다.
467) 비라방(毘羅房):영통사에 있는 일원인 듯하다.
468) 주곡(主穀):묘지 축조를 하는 동안 대중의 양식을 주관하는 소임.
469) 진관사(眞觀寺):경기도 개성군 용수산(龍首山) 기슭에 있던 절이니, 목종 2년
(999) 태후(太后)의 원찰(願刹)로 창건하였다.
470) 천태원(天台院):영통사에 있던 일원인 듯함.
47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至임.
47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甲임.
473)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申임.
474)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年임.
475) [總覽]에는 院과 普字 사이에 15字가 탈락됨.
47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寧임.
47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崎임.
47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毘임.
47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房임.
480)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穀임.
48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眞임.
48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觀임
483) [總覽]에는 材와 定字 사이에 15字가 탈락됨.
석종(碩從)은 석공(石工)의 수장(首長)이며, 대사(大師)인 유영(有英),
신묘(神妙), 진헌(眞憲), 덕보(德甫) 등은 조수이고, 역승 25명과, 성(成)과
찬(贊), 김(金) 등 3인484)은 불무간에서 도구(道具) 단련(鍛鍊)을 맡았다.485)
그리하여484)485) 계사년486) 11월 일에 경선원(敬先院)이 낙성되었다.487) 청석(靑
石)은 몰돈산488)에서 채벌(採伐)하였고, 삼중인 익(翼) [결락] 단사489)와 석
공(石工)을 겸하였으며, 중대사인 석종은 역사를 조역(助役)하였다. 귀법
사(歸法寺)의 스님 35명이 이미 채벌한 청석을 하산(下山)하였으니, 이 35
명과 흥왕사 천복원490)의 백정(白丁) 40명, 그리고 소 33두를 동원하여 석
재를 제위보491)로 운반하였다. 귀법사 주지이며 수좌(首座)인 응선(應先)
이 대중 5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조역하였다. [결락]
碩從492)与493)石工, 首大師, 有英, 神妙, 眞憲, 德甫等, 助手, 役
僧二十五人, 成贊加金三494)人, 作鍛也. 至癸巳495)496)年, 十一月
日, 敬先院成. 伐靑石于沒頓山, 三重, 翼, [以下缺], 兼鍛事,
與石工, 重大師, 碩從助之役. 歸法寺僧, 三十五人, 旣伐石下
山, 此497)三十五人, 及興王寺, 薦福院,498) 白丁四十人, 竝用牛
三499)十三500)首, 輸石501)到濟危寶. 歸法寺主, 首座應先, 領衆
五百餘人, 出助, [以下缺].
484) 성찬가김삼인(成贊加金三人):성찬(成贊)과 가(加)와 김(金) 등의 3인인 듯함.
485) 석주단(石主鍛):돌을 다듬는데 필요한 불무, 숯불 등의 뒷바라지를 주관하는
소임.
486) 계사(癸巳):예종 8년(1113).
487) 경선원성(敬先院成):숙종 9년(1104)에 시작하여 9년만인 예종 8년(1113)에 낙
성(落成)하였다.
488) 몰돈산(沒頓山):위치 미상이다. 혹시 무등산이 아닌가 함.
489) 단사(鍛事):석공의 도구를 벼르는 야공(冶工).
490) 천복원(薦福院):예종의 태후(太后)가 흥왕사내(興王寺內)에 한 별원(別院)을 짓
고, 대각국사에게 수도하도록 부탁하였다.
491) 제위보(濟危寶):이재민을 구제하는 계(稧)이니, 불교의 민생복지 단체. 보(寶)
는 계이니, 점찰보(占察寶), 대비보(大悲寶), 천복원, 자비원(慈悲院) 따위가 모
두 민생구제를 위한 기구 공간이다.
49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從임.
493) [苑] [全文]에는 爲, [總覽]에는 与로, 与는 與의 略字임.
494)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三임.
495) [苑] [全文]에는 巳, [總覽]에는 丑임.
496) [總覽]에는 巳와 兼字 사이에 19字 탈락됨.
49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此임.
498)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院임.
499) [苑] [全文]에는 三임.
500) [苑] [全文]에는 三, [總覽]에는 二임.
501) [總覽]에는 石과 彌字 사이에 26字가 탈락됨.
이 비의 좌측(左側)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다. 귀법사 대중은 모두 돌
아갔다. 다음 날 영통사 대중 500여명이 경선원(敬先院) 동각(東閣)인 보
광원(普光院) 전중(田中)에 있는 돌을 전외(田外)로 운반하였다. 석공은
중대사인 석종이고, 석장(石匠)은 해(侅) [결락] 마음으로 용려(勇勵)를 수
집(收集)하였다. 17일 동안 구형(龜形)을 조각하여 경선원의 동각에 안치
하였다. 8년을 지난 이후 신묘년502)에 이르러 성주503)하되, “대각국사의 비
가 영통사 서북쪽 근맥(根脈)에 있는데 지세가 불편하니 마땅히 다른 곳
으로” [결락] 원충(元忠) 춘관정(春官正)인 전간(全幹)이 영통사에 와서 문
도인 명공(名公)과 더불어 터를 잡아 식당(食堂)을 지었으니, 남랑외(南廊
外)의 평지가 바로 이 지대이다.
此碑之左方, 彌勒堂, 遣歸法寺衆, 還之. 翌日, 以靈通寺衆
五百餘人, 輸置敬先院東閣,504) 普光院田中, 有石, 半入于地.
石工, 重大師505)碩從, 石匠, 侅, [以下缺], 心收集勇勵也. 一七
日閒,505) 問506)斲作龜形, 安置敬先院東閣. 踰八歲, 至辛卯年, 省
奏, “大覺國師碑在寺, 西北根脈, 於勢不507)便宜, 更.” [以下
缺], 元忠, 春官正全幹, 到寺, 與門徒名公, 卜擇, 得食堂, 南
廊外平地, 卽今此地是也.
502) 신묘년(辛卯年):예종 6년(1111).
503) 성주(省奏):왕에게 건의서를 올리는 것.
504) [苑] [全文]에는 閣, [總覽]에는 閤임.
505) [總覽]에는 師와 心字 사이에 5字가 탈락되었다.
506) [苑] [全文]에는 없고, [總覽]에만 있으니, 이는 삭제되어야 함.
507) [總覽]에는 不과 元字 사이에 5字가 탈락됨.
명년508) 2월에 이 흥왕사 대중 1,670명이 [결락] 혜선(慧宣)[靈通寺 善炤
院과 興王寺 正覺院主]과 흥복사(興福寺) 주지며 승통인 익현(翼玄)[靈通寺
重覺院과 興王寺 無相院主]과 숭선사509)[주지 수좌] 몽영(夢英)과 단향사510)
주지 [결락] 와 흥왕사 중대사인 세현(世賢), 신현(神現), 석종(碩從), 현한
(玄漢) 등과 그리고 영통사 중대사인 점혜(占惠), 홍혜(洪惠), 지일(志一),
유충(惟沖), 석진(碩珍), 홍현(弘賢), 낭충(朗沖), 선선(善鮮), 진헌(眞憲),
덕보(德甫), 위개(爲介), 묘현(妙賢), 행조(幸照), 현람(賢覽) [결락] 화사(畵
師) 박근(朴瑾)은 비석의 사방곽연(四方廓緣)에 문양(紋樣)을 그리고,511)
석장은 교위512)인 임단513)이 새겨서 12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중대사인 세
현(世賢), 석종(碩從), 신종(申從), 신현(申現) 등은 공사를 지도하였다. 영
통사 대중 450명 [결락] 문인 사자사514) 주지. 오(悟) [결락]
明年二月, 此興王寺衆, 一千六百七十人,515) [以下缺], 慧宣[靈
通寺善炤院興王寺正覺院主], 福興寺住持, 僧統翼玄[靈通寺重閣
院興王寺無相], 崇善寺[住持首座], 夢英, 檀516)香寺住持, [以下
缺], 興王寺重大師, 世賢, 神現, 碩從, 玄漢, 靈通寺重大師,
占惠, 洪惠, 志一, 性沖, 碩珍, 弘現, 朗沖, 善解, 眞憲, 德甫,
爲介, 妙賢, 幸照, 賢覽,517)[以下缺], 朴瑾, 畵其緣, 石匠, 校尉
林旦, 刻之 等刻字 畵士, 至十二月, 二十日, 畢工. 重大師, 世
賢, 碩從, 申從,指事. 以靈通寺衆, 518)四百五十519)人,520)521)[以下
缺], 門人, 師子寺, 住522)持, 悟523)[以下缺]
508) 명년이월(明年二月):예종 7년(1112).
509) 숭선사(崇善寺):경기도 개성에 있었는데, 광종 5년(954)에 숭선사를 창건하여
선비(先妃)의 명복을 추도하였다. 『고려사』권2 참조.
510) 단향사(檀香寺):개성에 있었는 듯하나 위치는 미상.
511) 화기연(畵其緣):묘석(墓石)의 사방변단(四方邊端)에 장엄으로 새길 그림을 그
렸다는 말. 예컨대 당초문(唐草文) 같은 것. 반야사(般若寺) 「원경왕사비元景王
師碑」([고려편3] 화보 pp.3~6 참조)에도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512) 교위(校尉):무산계(武散階)에 정6품상은 요무장군(耀武將軍), 하는 요무부위(耀
武副尉). 종6품상은 진위교위(振威校尉), 하는 진무부위(振武副尉). 정7품상은
치과교위(致果校尉), 하는 치과부위(致果副尉). 종7품상은 익위교위(翊威校尉),
하는 익휘부위(翊麾副尉). 정8품상은 선절교위(宣折校尉), 하는 선절부위(宣折副
尉). 종8품상은 어모교위(禦侮校尉), 하는 어모부위(禦侮副尉). 정9품상은 인용
교위(仁勇校尉), 하는 인용부위(仁勇副尉). 종9품상은 배융교위(部戎校尉), 하는
배융부위(部戎副尉)임. 「혜소국사탑비문慧炤國師塔碑文」 주321)배융교위陪戎
校尉 [고려편2] p.334;「지광국사현묘탑비문」 주415)배융교위陪戎校尉 [고려편
2] p394 등 참조.
513) 임단(林旦):전기 미상.
514) 사자사(師子寺):사자갑사(獅子岬寺)라고도 하니, 경기도 개성 남쪽 사자산에
있던 절.
515)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人임.
51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檀임.
517) [苑] [全文]에는 覽, [總覽]에는 탈락됨.
518) [苑]에는 탈락, [總覽]은 결락이며, [全文]에는 衆임.
519) [苑] [總覽]에는 탈락, [全文]에는 十임.
520) [苑] [總覽]에는 탈락, [全文]에는 人임.
521) [苑] [總覽]에는 ‘朴瓘畵緣 校尉林旦刻之’라 10字가 있으나, 이는 삭제하여야 함.
52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住임.
523)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悟임.
【음기곽외陰記廓外】
대각국사 문도의 직명(職名)과 개좌(開坐), 그리고 비음(碑陰)은 좌와
같다.
문인 견불사524) 주지 사문(沙門) 혜소525)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
大覺國師門徒, 職名, 開坐, 碑陰, 如左.
門人, 見佛寺住持, 沙門, 慧526)素, 奉宣, 書.
524) 견불사(見佛寺):운허(耘虛), 『불교사전佛敎辭典』에는 서호(西湖)의 견불사라
하였으나 견불사가 여러 곳에 있어서 어느 절인지 확실치 않다.
525) 혜소(慧素):대각국사의 제자. 내외(內外)의 모든 경전에 정통. 특히 시와 글씨
에 조예가 깊었다. 대각국사가 입적한 뒤에 『행록行錄』10권을 엮었다. 서호의
견불사에 있을 때에는 방장실(方丈室)에 아무것도 없고, 다만 돗자리 같이 생긴
청석(靑石) 한 장을 두고 때때로 글씨를 썼다. 김부식이 벼슬을 그만 둔 뒤에 자
주 찾아와서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왕이 그 이름을 듣고 내도량(內道場)으로
청하여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백금(白金)을 많이 보냈다. 스님이 서호의 시를
짓고 부식이 이에 화운(和韻)하니, 듣는 이가 모두 화답하여 1천여 편이 되었다
한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음기(陰記)를 썼다. 『파한집破閑集』 참조.
526)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慧임
승통(僧統)
창원(昶元)[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受學)하였던 스님이며, 홍호사527) 제1대 주지(住持)였다], 칭도(稱道)[본
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기(理琦)[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으로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다], 사소(俟韶), 홍천(弘闡), 낙진528)[본래는 경덕국사529)
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시종(侍從)하였으며, 예종
때 왕사에 책봉되었다], 기영(器英), 청서(聽諝), 선혜(宣慧). [이하 결락]
僧統530)
昶元[本是景德門人 師少時所咨 稟者 爲弘護寺 第一531)代主], 稱道
[本景德門人], 理琦[本景德門人師少時所承受532)者], 俟韶, 弘533)闡,
樂眞[本是景德門人 從534)師入宋求法至睿考時 封爲王師],
535) 器英, 聽諝, 宣慧, [以下缺].
527) 홍호사(弘護寺):경기도 개성 동쪽 영수산(靈秀山)에 있던 절.
528) 낙진(樂眞):반야사(般若寺) 원경왕사(元景王師)의 이름. 자는 자정(子正). 대각
국사가 입송구법할 때 따라 갔던 제자 중 한 사람. 그의 행적비(行蹟碑)가 해인
사(海印寺)에 있다.
529) 경덕(景德):대각국사의 은사(恩師). 속성은 김씨. 휘는 난원(爛圓). 김은부(金殷
傅)의 아들. 시호는 경덕국사(景德國師). 1066년 10월 8일 세수 68세를 일기로 입
적하였음.
530) [苑] [總覽]에는 統. [全文]의 就는 統의 오자임.
531)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一임.
532)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受임.
533) [苑] [總覽]에는 결락이나, [全文]에는 弘임.
534) 從이하 ‘師入宋求法至睿考封爲王師’ 12字가 있음
535) [總覽]에는 器와 以字의 사이에 6字가 탈락됨.
수좌(首座)
학연(學淵), 인윤(仁允), 상영(爽英), 영선(靈善), 남효(南曉), 영헌(靈憲),
창지(昶之), 융서(融諝), 현심(顯深), [이하 결락] 강명(講明), 숙견(宿堅), 고
선(古先), 충세(充世), 신오(神悟), 보자(普滋), [이하 결락] 승조(承照), 몽영
(夢英), 유엄(惟儼), 언충(彦沖), 영법(靈法), 상지(相智), 현웅(顯雄), 처상
(處常), 도린(道隣)[스승을 시봉하여 입송한자], 대진(代眞), 칙유(則由), 승
관(承冠), 현준(賢濬), 혜온(慧溫).
首座.
學淵, 仁允, 爽英, 靈善, 南曉, 靈憲, 昶之, 融諝, 顯深, [以下
缺] 講明, 宿堅,536) 古先, 充世, 神悟, 普滋, [以下缺] 承照, 夢
英, 惟儼, 彦沖, 靈法, 相智, 顯雄, 處常, 道隣537)[從師入宋者],
代眞,538) 則由, 承冠, 賢濬, 慧溫.
536) [總覽]에는 堅과 承字의 사이에 8字가 탈락됨.
537) [苑] [全文]에는 隣. [總覽]의 憐은 隣의 오자임.
538) [總覽]에는 眞과 令字의 사이에 8字가 탈락됨.
삼중대사(三重大師)
영현(令玄), 선기(善機), 간영(幹英), 교영(敎英), 영천(英闡), 광자(廣慈)
[이상은 본래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방고(芳古), 홍열(洪悅), 도진(道眞),
선엄(善嚴), 수개(壽介)[국사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시종(侍從)하였던
제자이다], 응선(應宣), 성준(成俊), [결락] 원련(圓璉), 신이(神珥), 이숭(利
崇), 유간(裕幹), 연현(挻賢), 영인(靈印), 청혜(淸慧), 계부(戒膚), 유청(惟
淸), 창균(昶均), 정현(正玄), 담주(曇柱), 덕칭(德稱), 자수(資守), 혜시(慧
示). [이하 결락]
三重大師.
令玄, 善機, 幹英, 敎英,英闡, 廣慈[己上本景德門人], 芳古, 洪
悅, 道眞, 善嚴, 壽539)540)介[從師入宋者], 應宣, 成俊, [以下缺] 圓
璉, 神珥,541) 利崇, 裕幹, 挺賢, 靈印, 淸慧, 戒膺,542) 惟淸, 昶
均, 正玄,543) 曇柱, 德稱, 資守, 慧示. [以下缺]
539)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壽임.
540) [總覽]에는 壽와 以字 사이에 7字가 탈락됨.
541) [苑] [總覽]의 景과 [全文]의 珥는 어느 字가 옳은지 미상임.
542) [苑] [總覽]에는 膺. [全文]의 膚는 膺의 오자임.
543) [總覽]에는 玄과 以字 사이에 8字가 탈락됨.
중대사(重大師)
응주(應周), 향현(向玄), 응수(應守), 총지(聰智), 소여(紹餘), 교침(敎琛),
고충(古沖), 명서(明諝), 계풍(戒豊), 계명(繼明), 조진(照眞), 순명(順明),
수명(守明), 재종(在宗), 종해(從海), [이하 결락] [이상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
인이었다], 상기(上機), 일자(日滋), 선기(先器), 강진(講眞), 응성(應成), 준
신(俊神), 점숭(占崇), 양□(亮□), 유철(惟哲), 성서(成諝), 지명(志明), 영
관(英冠), 법연(法緣), 응충(應沖), 서자(諝資), 융현(融現), 수남(守南), 현
서(玄諝), 응청(應淸), 수천(壽千), 적지(迪之), 의자(義滋), 연영(挻英), 처
영(處英), 의지(義持), 진서(珍諝), 인현(仁賢), 성유(成裕), 행□(幸□), [이
하 결락] 혜충(慧沖), 치수(緇秀), 득기(得機), 염진(念眞), 묘자(妙慈), 영치
(靈致), 혜고(慧高), 홍기(洪機), 유오(猶吾), 현(玄), [이하 결락] 파(派), [이
하 결락] 경성(經成), 양변(良辯)[국사가 입송구법할 때 시종하였던 제자], 혜
방(慧芳), [이하 결락] 유정(裕貞), 주관(周冠), 광현(廣賢), 성영(性英), 서
정(諝貞), 법상(法常), 법창(法暢), 숭서(崇諝), 순웅(順雄), 유순(惟順), 융
개(融介), 섬현(暹現), 법오(法悟), 개□(介□), [이하 결락] 경유(景猷), 성
련(成璉), 승유(勝流), 석운(釋雲), 인준(因俊), 도운(道雲), 진감(珍鑑), 복
원(復元), 유승(惟勝), 원량(元亮), 종감(宗鑑), 칭현(稱現), [이하 결락] 혜소
(慧素), 혜겸(慧謙), 관선(觀宣), 혜당(慧幢), 혜관(慧觀), 혜묘(慧妙), 혜남
(慧南), 혜오(慧悟), 준린(俊隣), 언각(彦覺), 법□(法□), 성조(性照), 해경
(海瓊), [이하 결락] 혜엄(慧嚴), 명개(明介), 변진(辯眞), 주민(周敏), 주윤
(周潤), 교진(敎珍), 정소(定韶), 성관(性觀), 회원(懷遠), 혜진(慧瑧), 소근
(笑瑾), 영□(英□), 계현(繼玄), [이하 결락] 혜인(慧仁), 선련(善連), 정진
(正眞), 성진(性眞), 계웅(戒雄), 웅조(雄照), 계호(戒瑚), 혜경(慧敬), 혜량
(慧良), 혜약(慧約), 계여(戒如), 도종(道宗), 상선(尙先), 성신(成信), 예관
(銳觀), 현오(玄悟), 영기(穎機), 혜심(慧深), 경순(景純), 숭묘(崇妙), 증현
(證玄), 석전(釋銓).
重大師.
應周, 向玄, 應守, 聰智, 紹餘, 敎琛, 占544)沖,545) 明諝, 戒豊,
繼明, 照眞, 順明, 守明,546) 在宗, 從海, [以下缺][已上本景德門
人], 上機, 日滋, 先器, 講眞, 應成, 俊神, 占崇,亮547)□,548)549) 惟
哲, 成諝, 志明, 英冠, 法緣, 應冲, 諝資, 融現, 守南玄諝,應
淸, 壽千, 迪之, 義滋, 挺英,550) 處英, 義持, 珍諝, 仁賢, 成裕,
幸□, [以下缺] 慧沖, 緇秀, 得機, 念眞, 妙慈, 靈致, 慧高, 洪
機, 猶吾551)玄, [以下缺] 派, 經成, 良辯[從師入宋者], 慧芳, [以
下缺] 裕貞, 周冠, 廣賢, 性英, 諝貞, 法常, 法暢, 崇諝, 順雄,
惟552)順, 融介, 暹現, 法悟, 介□, [以下缺] 景553)猷, 潤諝, 成璉,
勝流, 釋雲, 因俊, 道雲, 珍554)鑑, 復元, 惟勝,555) 元亮, 宗鑑, 稱
現, [以下缺] 慧素, 慧謙, 觀宣, 慧幢, 慧觀, 慧妙, 慧南, 慧悟,
俊隣, 彦覺,556) 法□, 性照, 海瓊, [以下缺] 慧嚴, 明介, 辯眞,
周敏, 周潤, 敎珍, 定韶, 性觀, 懷遠, 慧臻,557) 笑瑾, 英□, 繼
玄, [以下缺] 慧仁, 善連, 正眞, 性眞, 戒雄, 雄照, 戒瑚, 慧敬,
慧良, 慧約,558) 戒如, [以下缺] 道宗, 尙先, 成信, 銳觀, 玄悟,
穎機, 慧深, 景純, 崇妙, 證玄,559) 釋詮. [以下缺]
544) [苑] [總覽]에는 占. [全文]의 古는 占의 오자임.
545) [苑] [總覽]의 沖과 [全文]의 冲은 같은 글자임.
546) [總覽]에는 明과 以字 사이에 10字가 탈락됨.
547) [總覽]은 결락이나 [苑] [全文]에는 亮임.
548) [苑] [總覽] [全文] 등에 모두 결락으로 표시되었음.
549) [總覽]에는 口와 諝字 사이에 12字가 탈락됨.
550) [總覽]에는 英과 以字 사이에 12字가 탈락됨.
551) [總覽]에는 吾와 裕字 사이에 10字가 탈락됨.
552) [總覽]에는 惟와 以字 사이에 9字가 탈락됨.
553) [苑] [全文]에는 景, [總覽]에는 是임.
554) [苑] [總覽]의 眞과 [全文]의 珍은 뜻으로는 무방하나, [全文]의 珍이 나을 듯함.
555) [總覽]에는 勝과 以字 사이에 6字가 탈락됨.
556) [總覽]에는 覺과 以字 사이에 6字가 탈락됨.
557) [總覽]에는 臻과 以字 사이에 6字가 탈락됨.
558) [總覽]에는 約과 以字 사이에 2字가 탈락됨.
559) [總覽]에는 玄과 以字 사이에 2字가 탈락됨.
대사(大師)
사준(思俊), 창영(唱英), 이영(利英), 담영(湛靈), 연성(挻成), 경융(慶融),
청련(淸璉), 혜선(慧先), 종철(宗哲), 의굉(義宏), 자강(自强), 혜□(慧□),
이선(利宣), 혜천(慧千), 교원(敎元), 조상(照常), [이하 결락]
大師.
思俊, 唱英, 利英, 湛靈, 挺成, 慶融, 淸璉, 慧先, 宗哲, 義
宏,560) 自强, 慧□, 利宣, 慧千, 敎元, 照常, [以下缺]
[總覽]에는 宏과 利字 사이에 4字가 탈락됨.
560) [總覽]에는 宏과 利字 사이에 4字가 탈락됨.
대덕(大德)
자녕(自寧), 혜준(慧俊), 혜균(慧均), 성여(性如), 관규(冠規), 인영(仁永),
유백(惟白), 혜선(慧善), 정단(正端), 지원(志圓), 점상(占常), 법규(法規),
[이하 결락]
大德.
自寧, 慧俊, 慧均, 性如, 冠規, 仁永, 惟白, 慧善, 正端, 志
圓,561) 占常, 法規, [以下缺]
561) [總覽]에는 圓과 以字 사이에 4字가 탈락됨.
이상의 문도명단(門徒名單)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시행(施行)한 것
이다.
右, 奉聖旨, 施行.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9척6촌5분(九尺六寸五分), 폭(幅)은 5척2촌(五尺二寸), 표면(表
面)과 이면(裏面)의 글자 간격은 6분(六分), 이면 곽내(郭內)의 글자 간격은 8분(八分), 모두
해서(楷書)이다. 제액(題額)의 글자 간격은 3촌(三寸)이며 전서(篆書)이다.]
[揭載]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上, pp.362~385.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305~316.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中世 上, pp.574~587.
조명기(趙明基) 저(著),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
[출처] 08.개성영통사대각국사비문( 開城靈通寺)大覺國師碑文)|작성자 실론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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