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승비문

09.순천송광사불일보조국사비문(順天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文)

수선님 2023. 9. 29. 14:03

09.순천송광사불일보조국사비문*

順天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文

✽ 이 비문은 지눌(知訥)이 1210년(희종6) 3월 27일 세수 53세를 일기로 입적(入

寂)함에 따라 사법제자(嗣法弟子)인 혜심(慧諶) 등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갖

추어 임금께 주문(奏聞)하였다. 희종 임금은 학사장사랑(學士將仕郞) 예부상

서(禮部尙書) 김군수(金君綏)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는 한편, 문림랑(文林

郞) 유신(柳伸)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여 입적 다음해인 1211년 12월에 비

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입비총감독(立碑總監督)은 내시창락궁록사(內侍昌樂宮

錄事) 김진(金振)이며, 각자(刻字)는 전전(殿前)인 보창(寶昌)이 맡았다. 이와 같

이 세워진 비가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귀부(龜趺)만 남고 모두 파괴되었다.

이에 1678년(숙종 4) 다시 비를 세우게 된다. 성총(性聰:1631~1700)이 김군수

가 지은 비문(碑文)에 약간의 필삭(筆削)을 가한 산거약간본(刪去若干本)을 대

본으로 하여, 비음(碑陰)은 묘현(妙玄)스님이 짓고, 최치옹(崔致翁)이 쓰고, 이

우(李俁:1637~1693)가 전액(篆額)을 썼다. 수초(守初:1590~1668)・처능(處能:

1617~1680) 등의 도움을 받아 설명(雪明)의 총감독으로 이시석(李時碩)・유일

(唯一) 등이 새겨서[刻字]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본편에서는 [通史]에 실려 있

는 김군수의 원비문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하고, 필요에 따라 [總覽]과 비교하여

교감하였다.

있는 곳: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

세운 때:고려 강종 2년 계유(1213)

所 在:全羅南道 順川市 松光面 新坪里 松廣寺

年 代:高麗 康宗 2年 癸酉(1213)

승평부(昇平府)1)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불일보조2)국사(國師)

비명과 아울러 서문.

昇平府, 曹溪山, 松廣寺, 佛日普照國師, 碑銘, 幷序.

1) 승평부(昇平府):전라남도 순천시의 옛 이름.

2) 불일보조(佛日普照):1158~1210. 휘는 지눌(知訥).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 탑호(塔號)는 감로탑(甘露塔). 속성은 정씨(鄭氏). 동주(洞州:黃海道

瑞興郡) 출신.

지공주사3)부사4) 겸 권농사5)관구6) 학사7)장사랑8) 겸예부9)상서(尙書)이

며 자금어대10)를 하사받은 신 김군수11)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림랑12)이며 신호위13)장인 신 유신14)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知公州事副使, 兼勸農使管句, 學士將仕郞, 兼禮部尙書, 賜紫

金魚袋, 臣, 金君綏, 奉宣, 撰, 文林郞, 神號衛長, 臣, 柳伸, 奉宣, 書.

3) 지공주사(知公州事):공주군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임무(任務)이니, 곧 군수

(郡守)라는 뜻.

4) 부사(副使):일반적으로 사(使) 다음가던 관직. 고려 때 광흥창(廣興倉)·연경궁

(延慶宮)·영조국(營造局)·요물고(料物庫)·자섬사(資贍司)·자운방(紫雲坊)·

잡작국(雜作局)·제용사(濟用司)·염직국(染織局)·태상부(太常府)·풍저창(豊儲

倉) 등에 소속된 관직. 품계(品階)는 5~6품(品)의 사이였다. 지공주사부사(知公

州事副使)란 공주부군수라는 말이다.

5) 권농사(勸農使):고려 때 지방에 파견하던 임시 관직. 이들은 지방의 특산물을

받아서 개경(開京)에 있는 대관(大官)들에게 보내어 벼슬이 잘 올라갔으므로,

권농사가 되려는 사람이 많았으며, 또한 이들의 폐해가 매우 심하기도 했다. 또

권농사는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의창(義倉)의 쌀과 소금을 나누어 난민을 구

하거나, 곡식을 나누어서 경작하게 하도록 하는 일도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권농관(勸農官)으로 개칭되었다.

6) 관구(管句):관구(管勾)와 같은 말이니, 구(勾)는 구(句)와 같은 자(字)이다. 관직

의 이름. 곧 관리구계(管理勾稽)의 준말로써, 주어진 공무(公務)를 맡아 주관(主

管)하여 처리한다는 뜻.

7) 학사(學士):고려 때의 관직. 제관전(諸館殿)에 속해 있었으며, 문신(文臣) 중에

서 뛰어난 학자(學者)들이 뽑혀 왕을 시종(侍從)하는 일을 하였다.

8) 장사랑(將仕郞):고려 때의 문산계(文散階). 문종(文宗:1046~1083)의 관계 개혁

때 제정된 것으로 품계는 종9품하 였다.

9) 예부(禮部):고려 때의 관청. 제향(祭享)·조회(朝會)·학교(學校)·교빙(交聘)·

과거(科擧)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관원(官員)으로는 상서(尙書), 시랑(侍

郞), 낭중(郎中), 원외랑(員外郞) 등을 두었다. 1356년에 의조(儀曹)로 개칭, 1389

년에 예조(禮曹)로 개칭하였다.

10) 자금어대(紫金魚袋):「대각국사비문大覺國師碑文」 주17)자금어대紫金魚袋 본

서 p.430 참조.

11) 김군수(金君綏):고려의 문신(文臣). 호는 설당(雪堂). 본관은 경주(慶州). 부식

(富軾 1075~1151)의 손자. 돈중(敦中 ?~1170)의 아들. 글도 잘했고, 죽화(竹畵)를

잘 쳤다.

12) 문림랑(文林郞):고려 때의 문산계(文散階). 문종 때 29품계 중 종9품상을 문림

랑으로 정했다. 1298년에는 9품을 통사랑(通仕郞)으로 개칭했다.

13) 신호위(神號衛):신호위(神虎衛)라고도한다. 고려 때 국방을 담당한 육위(六衛)

중의 하나. 보승(保勝)의 오령(五領;1領의 正規軍은 千名)과 정용(精勇)의 이령

(二領)으로 조직, 상장군(上將軍;正3品) 1인, 대장군(大將軍;從3品) 1인, 장군(將

軍;正4品) 7인, 중랑장(中郞將;正5品) 14인, 낭장(郎將;正6品) 35인, 별장(別將;

正7品) 35인, 산원(散員;正8品) 35인, 위(尉;正9品) 140인, 대정(隊正;從9品) 280

인 등이 배속되었다.

14) 유신(柳伸):?~1104. 고려 문신. 서예가. 초명(初名)은 인(仁). 특히 행서(行

書)·초서(草書)를 잘 써서 신라의 김생(金生:711~791)·고려의 탄연(坦然:

1070~1159)·최우(崔瑀:?~1249)에 이어 넷째가는 명필로 꼽혔다.

선나학15)의 근원은 가섭존자16)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인도의 제28

조인 달마대사가 이어받아 와서 진단17)을 교화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자

들은 전하는 바 없이(不傳)으로써 전(傳)하였으며, 이를 닦는 사람들은 닦

음이 없는 것(無修)으로써 닦아 엽엽(葉葉)이 상승(相承)하며 등등(燈燈)

이 함께 비추었으니, 참으로 어찌 그리 기이(奇異)한 것인가!18) 부처님께

서 열반하신지 더욱 오래되어 불법(佛法)도 따라서 해이하여져서 학자들

이 말로 베푼 것(陳言)19)만을 고수하여 밀지(密旨)를 망각할 뿐 아니라, 근

본(根本)은 버리고 지말(枝末)을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觀察)하여 깨달아 들어가는(悟入) 길이 막히고20) 문자로 희론(戱論)

하는 발단(發端)이 봉기(鋒起)함으로써 정법안장(正法眼藏)은 거의 땅에

떨어졌다.

禪那之學源, 出於迦葉波. 達磨得之, 來化震旦. 傳之者, 以不

傳而傳. 修之者, 以無修而修, 葉葉相承, 燈燈幷耀, 一何奇也.

曁乎去聖彌遠, 法隨而弛, 學者, 守陳言, 迷密旨, 棄本而逐末.

於是乎, 觀察悟入之路茅塞, 文字戱論之端鋒起, 而正法眼藏,

幾墜乎地.

15) 선나지학(禪那之學):선학(禪學)이라는 뜻.

16) 가섭파(迦葉波): Kāśyapa, Kassapa. 일반적으로 가섭(迦葉)이라 약칭함. 부

처님으로부터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받은 수제자(首弟子)이며, 인도에서

의 28조 중 제1조. 음광(飮光)이라 번역됨.

17) 진단(震旦):인도에 있어 고대(古代) 중국(中國)을 일컫는 말(Chinistan). 진단(眞

丹)·진단(震丹)·진단(振旦) 등으로도 칭함. 진(震)은 팔괘(八卦) 중 동방에 해당

함. 해가 돋는 쪽에 있다 하여 서축(西竺)인 인도에서 동토(東土) 곧 중국을 가리

키는 말.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한 것도 이 진단에서 유래(由來)된 것이다. 또는

진(震)은 진(秦)의 음(音)이 전(轉)한 것이라고도 한다.

18) 일하기야(一何奇也):‘참으로 어찌 그리 기이(奇異)한가.’라는 뜻이다.

19) 진언(陳言):오래된 낡은 말, 새로운 말이 아니고 묵은 말, 뜻을 반조(返照)하지

아니하고 말로만 널어 놓는 것이니, 여기서는 경전(經典)의 언어에만 국집한다

는 것이다.

20) 모색(茅塞):때가 우거져 황무지가 되어 길을 막듯이, 사람의 마음이 사욕(私慾)

때문에 가리워짐을 말함.

이러한 때에 한 스님이 있어, 홀로 부위(浮僞)한 세속을 등지고 바르고

참된 종(宗)을 흠모하였으니, 언전(言詮)을 연마하여21) 진리에로 나아가

는 데에서 시작하여 선정(禪定)을 닦아 지혜를 발명(發明)하는 것으로 마

치고, 이러한 경지를 체득한 다음에는 이타(利他)인 법시(法施)에 전력하

는 한편, 침체된 선풍(禪風)을 다시 진작(振作)하여 어두워진 조월(祖月)

을 거듭 밝게 하였다. 만일 그러한 자 있다면 참으로 가섭(迦葉)의 적손(嫡

孫)이며 또한 달마(達磨)의 종자(宗子)로서 잘 이어받고 훌륭하게 조술(祖

述)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우리 스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於此, 有人焉, 獨能背浮僞之俗, 慕正眞之宗, 始於尋詮而詣

理, 終於修定以發慧, 旣得乎己兼施諸人, 使禪風寢而復振, 祖

月晦而更明. 若然者, 可不謂迦葉之嫡孫, 達磨之宗子, 善繼善

述者乎, 繄我國師是已.

21) 심전(尋詮):말의 뜻을 탐구함이니, 능전교체(能詮敎體)인 경전의 문자(文字)를

탐구하여 진리의 내면세계(內面世界)로 나아간다는 뜻.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22)의 동주23) 출신이다. 자호(自號)

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

遇)이니 국학24) 학정25)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26)

부인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百藥)이 무효였다.27) 그리하

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師諱知訥, 京西洞州[今瑞興郡]人也. 嘗自號爲牧牛子, 俗姓鄭

氏. 考光遇, 國學學正, 妣趙氏, 開興郡夫人. 生而多病, 醫理

不效. 考迺禱佛, 誓以出家疾尋逾.

22) 경서(京西):개성의 서쪽이란 뜻이니,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을 지칭함.

23) 동주(洞州):황해도 서흥(瑞興).

24) 국학(國學):①신라시대에 비롯된 교육 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

監)이라 하였으며 고려후기에는 성균관(成均館)이라 하였다. ②자기 나라의 전

통적인 경학(經學)·사학(史學)·어문학(語文學)·불교학(佛敎學)·고고학(考古

學)·지지(地志)·풍속(風俗) 등을 연구하는 학문.

25) 학정(學正):고려 때 국자감(國子監)의 정9품 관직. 정원(定員)은 2명으로 문종

때 설치되었다.

26) 개흥군(開興郡):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온정면(배천)의 옛 이름.

27) 의리(醫理):의사의 치료 또는 의료행위라는 뜻.

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28)인 종휘선사29)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

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

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

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30)

年甫八歲, 投曹溪雲孫宗暉禪師, 祝髮受具戒, 學無常師, 唯道

之從. 志操超邁, 軒軒如也.

29) 종휘선사(宗暉禪師):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은사스님이나, 전기는 미상이다.

30) 헌헌(軒軒):헌헌하거(軒軒霞擧)의 준말. 노을 속에서 천붕(天棚)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모양. 곧 자득(自得)하며 자적(自適)함이 군중(群衆)에서 빼

어난 모습. 『세설신어世說新語』「용지容止」에 “諸公每朝 朝堂猶暗 惟會稽王 來

軒軒如朝霞擧”라 하다.

25살 때인31) 대정 22년32)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

다.33)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34) 청원

35)에 이르러 주석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육조단경六祖

壇經』36)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삼과(第三科)에 이르러 “진여자성

(眞如自性)이 기념(起念)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의 성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

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 크게 기꺼워하였으니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

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

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

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37)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二十五, 以大定二十二年壬寅, 擧僧選中之. 未幾南遊, 抵昌平

淸源寺, 住錫焉. 偶一日, 於學寮, 開六祖壇經, 至曰 “眞如自

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像, 而眞性常自在.” 乃驚喜,

得未曾有. 起繞佛殿, 頌而思之, 意自得也. 自是, 心厭名利,

每欲棲遁林壑, 艱恬以求其道, 造次必於是.

31) 이십오(二十五):지눌(知訥)이 25살 때란 말이니, 지눌의 출생 연대는 1158년으

로 25세 때는 곧 1182년. 고려 명종 12년에 해당된다.

32) 대정이십이년(大定二十二年):대정은 금(金)나라 세종 연호이고, 대정 22년은

고려 제19대 명종 12년(1182)에 해당된다.

33) 거승선중지(擧僧選中之):거국적(擧國的)으로 승가(僧伽)에게 보게 하는 대선고

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는 말. 전국의 스님들이 개성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서 보는 대선고시에 합격하였다는 뜻이다.

34) 창평(昌平):①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동남쪽 90리 지점에 위치하다 ②전라남

도 담양군 창평면이다. 그러나 청원사(淸源寺)가 경기도 양성(陽城 현재의 安城

郡)에 있었던 절이므로, 안성 지방에 있던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나 그 위치는

확실치 않다.

35) 청원사(淸源寺):청원사(靑原寺)이니 사적은 미상하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

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0 「양성현陽城縣」‘불우佛宇’에 따르면 청원사는 천덕

산(天德山)에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 천덕산은 양성현(陽城縣) 서쪽 2리, 진위현

(振威縣)의 동쪽 5리 지점에 위치한 양성의 진산(鎭山)이라 하였다.

36) 육조단경운운(六祖壇經云云):지눌(知訥)이 1185년 승선(僧選)에 급제한 다음

창평(昌平) 청원사에 주석하면서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삼과(第三科) 중에 “…… 善知識 無者 無何事

念者 念何物 無者 無二相 無諸塵勞之心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卽是念之體 念卽

是眞如之用 眞如自性 起念 非眼耳鼻舌 能念眞如自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

色聲 當時卽壞 善知識 眞如自性 起念 六根 雖有見聞覺知 不染萬境 而眞性常自

在故 經云 能善分別諸法相 於第一義而不動”이란 句節에 이르러 미증유(未曾有)

의 경지(境地)를 얻었다.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문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文」

주42)보조국사사대감선사普照國師師大鑑禪師 [고려편4] p.500;『육조단경』「정

혜일체定慧一體」‘제삼과第三科’(대정장48, p.353a~b) 등 참조.

37) 조차(造次):조차전패(造次顚沛)의 준말. ①창졸간 ②별안간 ③눈 깜짝할 사이

④발을 헛딛고 아차 넘어지는 사이에라는 뜻. 『논어論語』「이인里仁」에 “君子 無

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라 하다.

대정 25년38) 을사년에 이르러 하가산39) 보문사40)로 옮겨 주석하던 중, 대

장경(大藏經)을 열람하다가, 이장자(李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

論』41)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

내고,42) 깊이 숨어 있는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43)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

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44) 이에 따라 전해(前解)가 점점 밝아져45) 항상 마

음을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46)들의 미몽(迷蒙)을 인도

하여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47) 노력하였다. 그 때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득재48)라는 선로(禪老)가 팔공산49) 거조사50)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자고 간절히 초청하므로, 드디어 그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널리

여러 종파의 세상 명리를 포기한 고사(高士)들을 맞아들여 힘써51) 습정균

52)를 닦도록 간청하여 밤낮으로53) 게을리하지 않음이54) 여러 해였다.55)

越大定二十五秊乙巳, 遊下柯山, 寓普門寺, 因讀大藏, 得李長

者華嚴論, 重發信心, 搜抉而索隱, 嚌嚅而味情.56) 前解轉明,

迺潛心圓頓觀門, 亦欲導末學之迷, 爲之去釘拔楔. 適有舊識

禪老得才者, 住公山居祖寺, 邀請懇至, 遂往居焉. 廣延諸宗,

抛名高士輩, 刻意勸請, 習定均慧, 夙夜無斁者, 累稔矣.

38) 대정이십오년(大定二十五年):대정은 금(金)나라 세종대의 연호. 25년은 고려

명종 15년(1185).

39) 하가산(下柯山):하가산(下駕山) 또는 학가산(鶴駕山)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

여지승람』권24 「예천군醴泉郡」‘산천山川’에 하가산은 예천읍 동쪽 31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40) 보문사(普門寺):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普門面) 수계리(首溪里) 학가산에 자

리하고 있는 절. 677년(문무왕 17)에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고, 1184년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중창하였으며, 조선조 태종 7년 정해(1407)에 교종(敎

宗)에 예속되었고, 1926년에 최성환(崔成煥) 주지가 중수하였다.

41) 이장자화엄론(李長者華嚴論):이장자는 이통현장자(李通玄長者)이니 조백대사

(棗栢大士)라 한다. 당나라 개원년간(開元年間, 713~741)의 거사(居士)로서 당조

(唐朝)의 왕족(王族)이라 하나, 어느 왕손(王孫)인지는 확실치 않다. 신장(身長)

은 7척여(尺餘)이고 눈썹이 눈을 덮었고 허리에는 띠를 띠지 않았으며, 발에는

신을 신지 아니하였다. 고금(古今)의 일에 해박(該博)하고, 유석(儒釋)에 두루

정통하였다. 719년(개원 7)에 『신화엄경新華嚴經』 80권을 가지고 부우현(部盂

縣) 서남쪽 대현촌(大賢村)의 고산노가(高山奴家)에 이르러 편방(偏房)에서 『합

론合論』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간 문밖을 나오지 않았으므로 고산노와 이웃

사람들이 괴이불측(怪而不測)하였다. 매일(每日) 대추(棗) 10과(顆)와 백엽병(栢

葉餠) 1매(枚)만을 먹고, 다른 것은 일절(一切) 먹지 아니하였다. 그 후 다시 남

곡(南谷) 마가(馬家)의 고불당(古佛堂) 곁으로 옮겨 작은 토옥(土屋)을 지으니,

고씨(高氏)가 대추와 백엽병(栢葉餠)을 계속 공양하였다. 일찍이 그 논(論)과 경

(經)을 가지고 한씨(韓氏)의 장원(莊園)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곧 관개촌(冠蓋

村)이었다. 중로(中路)에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는데, 통현(通玄)이 그를 보고 호

랑이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등에 짊어진 경론(經論)을 호랑이의 등에 싣고 토감

(土龕) 속으로 들어가니, 그 호랑이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또한 그곳에 머물

렀으나 먹을 만한 샘이 없었다. 갑자기 폭우가 내려 노송(老松)이 뽑히더니 백

여척(百餘尺) 쯤 되는 연못이 생겼다. 그 깊이가 약 한 길 남짓 되었는데, 그 물

맛이 향기가 있고 감미(甘味)로워 지금까지도 그를 장자천(長者泉)이라 부르고

있다. 『합론』을 짓는 동안 방(房)에 지촉(脂燭)이 오재(五載)밖에 없었으나, 지묵

(紙墨)에 이르기까지 한씨가 계속 송정(送呈)하다가 『합론』이 완성된 뒤에야 없

어졌다. 40권이었다. 730년(개원 18) 3월 28일 9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송고

승전宋高僧傳』권22「법원전말法圓傳末」(대정장50, p.853c~p.854a) 참조.

42) 수결(搜抉):오묘한 교리를 찾아서 뽑아낸다는 뜻.

43) 색은(索隱):경의 숨은 이치를 찾아냈다는 뜻.

44) 제유(嚌嚅):嚌는 맛볼 제字, 嚅는 많은 말 유字이니, 곧 제가(諸家)들이 남겨 놓

은 제설(諸說)을 두루 연마하여(嚌) 그 뜻에 정통(精通)하였다는 뜻.

45) 전해전명(前解轉明):지해(知解)가 전증(前增)하여 점점 밝아졌다라는 말.

46) 말학(末學):초학(初學)·신학(新學)·후학(後學) 등의 뜻.

47) 거정발설(去釘拔楔):미혹한 중생들이 깊이 가상(假相)인 현상(現相)에 집착하

는 바 고정(固定)된 집념(釘)을 제거하고, 오욕(五欲)에 얽혀 있는 애착(愛着,

楔:쐐기)을 뽑아준다라는 말.

48) 득재(得才):지눌(知訥)보다 연장(年長)인 지눌과 친한 선객(禪客)이었으나, 전

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49) 공산(公山):대구 팔공산(八公山).

50) 거조사(居祖寺):거조암(居祖庵)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 738년(효성왕 2) 원감조사가 창건. 은해사(銀海寺)

거조암 영산전(靈山殿)은 국보 제14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2 「영천군

永川郡」‘불우佛宇’에도 거조사·은해성(銀海城)·원명사(圓明寺)·안흥사(安興

寺)·상원사(上元寺) 등은 모두 팔공산에 있다고 전한다.

51) 각의(刻意):①간절한 뜻 ②고심(苦心)함 ③애씀.

52) 습정균혜(習定均慧):선정(禪定)을 닦되 지혜(智慧)와 균등하게 닦는다는 뜻이

니, 정혜쌍수(定慧雙修) 또는 정혜등지(定慧等持)와 같은 말.

53) 숙야(夙夜):①밤낮 ②주야간의 24시간.

54) 무두(無斁):①게을리함이 없다 ②중단(中斷)함이 없다 ③패(敗)하지 않는다 ④

계속한다 등의 뜻이다. 斁는 패할 두字.

55) 누임(累稔):여러 해 동안. 다년간(多年間). 오랫동안. 稔은 해 임字.

56) [總覽]에는 精. [通史]의 情은 精의 오자임.

승안 3년57) 무오년 봄에 몇 사람의 선려(禪侶)와 함께 삼의(三衣) 일발

(一鉢)만 갖고 지리산(智異山)을 찾아가 상무주암58)에 은거(隱居)하였으

니,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천하에 제일이며 참으로 선객(禪客)이 거

주할 만한 곳이었다. 스님은 여기서 모든 외연(外緣)을 물리치고 오로지

내관(內觀)에만 전념하였다. 갈고 닦아 예리한 지혜를 발하며, 깊이 깊이

잠심(潛心)하여 궁극의 근원(根源)까지 궁구하였다. 그 동안 득법(得法)할

때마다 나타났던 몇가지의 서상(瑞相)에 대하여는, 말이 너무 번다(繁多)

하여 비에는 싣지 않는다.

至承安三年戊午春, 與禪侶數子一鉢, 尋智異山, 隱居上無住

庵, 境致幽寂, 甲天下, 眞安禪之住所也. 於是, 屛黜外緣, 專

精內觀. 磨淬發銳, 沿尋窮源. 時有得法瑞相數事, 語繁不載.

57) 승안삼년(承安三年):승안은 금(金) 장종(章宗)의 연호. [通史]에는 承安二年.

[總覽]에는 承安三年. 무오(戊午)년은 승안2년이 아니고 승안3년이므로 [總覽]

이 옳다. 승안3년 무오는 1198년으로 고려 신종(神宗) 1년에 해당한다.

58) 상무주암(上無住庵):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에 있는 절. 영원사

에 소속된 산내(山內) 암자(庵子)이니, 합천 해인사의 말사(末寺)이다.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되 “내가 보문사(普門寺)에서 지낸 이후 10여년

이 경과하였다. 비록 뜻을 얻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

어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항상 꺼림직 하였다. 지리산 상무주암

(上無住庵)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는 여가에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의

어록59)을 보다가 ‘…… 선불재정처(禪不在靜處)하며 역부재(亦不在) 요처

(鬧處)하고 부재일용응연처(不在日用應緣處)하며 부재사량분별처(不在思

量分別處)니라. 연(然)이나 제일의 부득사각정처(不得捨却靜處)와 요처와

일용응연처와 사량분별처하고 참(參)하여야만 홀연히 눈이 열려서 바야

흐로 이것이 바로 옥리사60)임을 알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에 이르러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하며, 원수와 멀리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혜해(慧解)가 점

차로 높아져서 대중(大衆)들의 종앙(宗仰)하는 바가 되었다.

師嘗言, “予自普門已來, 十餘年矣. 雖得意勤修, 無虛廢時,

情見未忘, 有物碍膺, 如讐同所, 至居智異. 得大慧普覺禪師語

錄云, ‘禪不在靜處, 亦不在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

別處, 然, 第一不得捨却靜處, 處, 日用應緣處, 思量分別處參,

忽然眼開, 方知是屋裏事.’ 予於此契會, 自然不礙膺, 讐不同

所, 當下安樂耳. 由是, 慧解增高, 衆所宗仰.

59)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대혜보각(1088~1163)은 중국 송나라 때

의 종고(宗杲) 스님. 보조국사 지눌이 창평 청원사(淸源寺)에 있다가 1185년 예

천 하가산 보문사를 거쳐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진하다가 1198년 몇 명의 도반

(道伴)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가서 참선하는 여가에 『대혜

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열람하다가 “…… 禪不在靜處 不在閙處 不

在思量分別處 不在日用應緣處 然 第一 不得捨却靜處 閙處 日用應緣處 思量分

別處 參 忽然眼開 都是自家屋裏事 今時士大夫 學道 多是半進半退 於世事上 不

如意則 火急要參禪 忽然世事遂意 則便罷參 爲無決定信故也 禪乃般若之異名

梵語般若 此云智慧 當人 若無決定信 又無智慧 欲出生死 無有是處”(대정장47,

pp.893c~894a)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60) 옥리사(屋裏事):자가옥리(自家屋裏)의 준말. 가리사(家裏事)라고도 한다. 상대

어는 도중사(道中事)이다. 자기자신(自己自身). 자기본분(自己本分). 자기본구

(自己本具)의 불성(佛性)이란 뜻. 또는 자신의 본분가옥(本分家屋)의 안. 옥리노

야(屋裏老爺), 옥리보신불(屋裏報身佛), 옥리주인공(屋裏主人公) 등의 말도 있다.

어떤 스님이 본정선사(本淨禪師)에게 묻기를 “여기후견기특언어여하(汝己後見

奇特言語如何)”하니, 정왈(淨曰), “무일념심애(無一念心愛)”라 하니 사왈(師曰),

“시여옥리사(是汝屋裏事)”라 하다.

5년 경신61)에 송광산(松廣山) 길상사62)로 옮겨서 11년간 대중을 지도하

되, 혹은 담도(談道), 혹은 수선(修禪), 안거(安居), 두타(頭陀) 등을 함에

있어 한결같이 율장(律藏)에 의거하였다. 사방(四方)으로부터 스님과 신

도들이 스님의 고매한 명성(名聲)을 듣고 찾아와 수많은 대중이 운집하였

다. 심지어 명예와 벼슬과 처자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63) 함께

오기도 하고 입사(入社) 수도(修道)하겠다는 왕공(王公)·사서(士庶)들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스님은 수도에만 자임(自任)할 뿐, 사람들이 칭찬하거

나 비방하는 것에는 전혀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또한 자비와 인

욕으로 후배를 제접(提接)하였다. 비록 대중 중에 무례(無禮)하게 뜻을 거

역하는 자라도 오히려 능히 자비로 섭호(攝護)하고 항상 정(情)으로 통솔

하되,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귀여워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五年庚申, 移居松廣山吉祥寺, 領徒作法, 十有一年, 或談道,

或修禪, 安居頭陀, 一依佛律. 四方緇白, 聞風輻湊, 蔚爲盛集.

至有捨名爵捐妻子, 毁服壞形, 命侶而偕來者, 王公士庶, 投名

入社, 亦數百人. 師以道自任, 不以人之譽非, 動其心性. 且慈

忍善接後流. 雖或悖謬迕意, 猶能憫念攝護, 情不理止, 若慈母

之於嬌子然.

61) 오년경신(五年庚申):승안(承安) 5년이니 1200년.

62) 길상사(吉祥寺):순천 송광사의 옛이름.

63) 훼복괴형(毁服壞形):속복(俗服)을 벗어 버리고 삭발하여, 일상 형상을 무너뜨

리는 것이니,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뜻.

그리고 대중에게 송지(誦持)하기를 권함에는 항상『금강경金剛經』으로

써 법을 삼도록 하고, 교의(敎義)를 연설함에는『육조단경六祖壇經』을 강

설하며, 통현장자(通玄長者)의『화엄론華嚴論』으로써 주장을 펴고, 『대혜

어록大慧語錄』으로써 함께 우익(羽翼)을 삼았다. 삼종문(三種門)을 열었

는데, 성적등지문,64) 원돈신해문,65) 경절문66)이니, 이 3문에 따라 수행하며

신입(信入)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선학(禪學)의 왕성함은 근고(近古)

에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其勸人誦持, 常以金剛經立法, 演義則意必六祖壇經, 申以華

嚴李論, 大慧語錄, 相羽翼. 開門有三種, 曰惺寂等持門, 曰圓

頓信解門, 曰徑67)截門, 依而修行, 信入者多焉. 禪學之盛, 近

古莫比.

64)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성성(惺惺)하고 고요함(寂寂)을 함께 하는 문이니, 『금

강경』 사상에 의하여 세운 문이다.

65)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통현장자(通玄長者)의 『화엄론』의 종지(宗旨)에 따라

세운 문이다.

66) 경절문(徑截門):차제(次第)를 거침이 없이 단밖에 이르는 문이니, 『대혜어록大

慧語錄』의 간화선(看話禪)의 취지(趣旨)에 의하여 세워진 문이다.

67) [總覽] [通史] 모두 經이나, 이는 徑의 오자임.

스님은 또한 위의(威儀)가 엄숙하여 소의 걸음에 범의 눈길이었으며,

연거68)할 때에도 태도가 근엄하여 몸가짐이 해이함이 없었고, 대중이 운

력할 때에도 빠지는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항상 솔선수범하였다. 억보산69)

의 백운정사(白雲精舍), 적취암,70) 서석산71)의 규봉난야,72) 조월암73) 등은

모두 스님께서 창건하고 왕래하면서 정진하던 곳이다. 희종 임금께서 동

궁에 있을 때부터74) 스님의 명성을 듣고 흠모해 오다가, 보위(寶位)에 오

른 후75) 왕명으로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고치

76) 어필(御筆)로 편액을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만수가사(滿

繡袈裟) 한 벌을 하사하여 존경을 표하였으니, 스님을 광호(光護)하는 돈

독한 정성은 다른 어떤 왕과도 견줄 데 없었다.

師又善攝威儀, 牛行虎視, 燕居謹飭, 無惰容止, 至於執勞任

力, 恒在衆先. 億寶山之白雲精舍, 積翠庵, 瑞石山之圭峯蘭

若, 祖月庵, 皆師之所作, 而往來修禪者也. 上自潛邸, 素重其

名, 及卽位, 命號改爲曹溪山修禪社, 御親書題榜. 旣又就錫滿

繡袈裟一領, 以褒異之, 篤敬光護之誠, 他無等夷.

68) 연거(燕居):고요한 곳에서 참선하는 것이니, 안거(安居) 또는 연좌(燕坐)라고도

한다.

69) 억보산(億寶山):억불산(億佛山)이라고도 하니, 전라남도 장흥읍(長興邑) 동쪽 7

리 지점에 있는 산.

70) 적취암(積翠庵):소재지와 사적(寺蹟)은 미상함.

71) 서석산(瑞石山):일명 무등산(無等山)이니 전라남도 화순읍 북쪽 15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72) 규봉난야(圭峯蘭若):규봉사(圭峰寺)라고도 함. 서석산(瑞石山) 중턱에 은신대

(隱身臺)가 있는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대위에 앉아 정진하다가 절을 짓고

규봉사라 이름하였다. 그 후 폐사가 되었던 것을 지눌이 중창하고 규봉난야라

이름하였다. 권극화(權克和)[조선 文臣. 자는 庸夫. 호는 習齋. 1411년에 生員이

되고, 1414년에는 謁聖文科에 급제하다]의 「중건기重建記」에 따르면 “光之鎭山

曰無等 一名瑞石 其勢雄盤 非諸山所可擬 山之東 有菴曰圭峰 傍有瑞石簇立 有

仰者 俯者 臥者 起者 成叢者 獨立者 高可數百尺 四面如削玉然 其曰瑞石圭峰”이

라 하다.

73) 조월암(祖月庵):위치와 사적(寺蹟)은 미상함.

74) 상자잠저(上自潛邸):희종임금께서 잠저(潛邸;동궁)에 있을 때부터라는 말이

니, 왕위(王位)에 오르기 이전이란 말.

75) 급즉위(及卽位):고려 제21대 희종이 즉위하던 해란 말이니, 희종이 즉위한 해

는 1205년이다.

76) 명호개위조계산수선사(命號改爲曹溪山修禪社):희종임금의 명(命)으로 송광산

정혜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개칭하였다는 말.

처음으로 스님이 남유(南遊)하면서 수행의 길에 오르고자 할 때, 동학

도반(同學道伴)과 함께 약속하되, “나는 지금부터 깊은 곳에 숨어 향사77)

를 맺고 전적으로 정혜(定慧)를 닦고자 하니,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합니

까?”라 하니, 대중이 말하기를 “지금은 말법(末法)이므로 그렇게 할 시기

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깊은 한

숨을 내쉬면서 이르기를 “시기는 변천(變遷)하지만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교법(敎法)이 흥왕하거나 쇠퇴한다고 보는 것은 삼승(三乘)

인 권학(權學)의 견해(見解)일 뿐이어늘, 지자(智者)가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중들은 모두 복종(服從)하면서 “옳은 말씀입니다.

뒷날 함께 결사(結社)를 맺으면 반드시 정혜결사(定慧結社)라 이름합시

다”라고 하였다. 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를 세우고 곧「권

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78)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

이다. 그 후 송광사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

로 사용하였다.79)

初師之來南遊也, 與同學諸子, 約曰, “吾欲逃名, 結香社, 以

定慧爲事, 於子等何如.” 曰, “末法恐非其時.” 師乃慨然長歎

曰, “時却可遷, 心性不變, 敎法興衰, 乃三乘權學之見耳, 智

者應如是乎.” 衆皆服曰, “然, 他日結同社, 必號定慧.” 及在

居祖寺, 果立定慧社, 仍述勸修定慧結社文, 償初志也. 移社松

廣, 亦循其名.

77) 향사(香社):수선사와 같은 뜻.

78)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보조국사 지눌이 33살 때인 1190년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맺고, 이를 위해 저술하여 유포하였던 「수행동맹문修

行同盟文」이다. 무려 9,490자(字)나 되는 방대한 양인데, 그 내용은 정(定)과 혜

(慧)를 균등(均等)하게 닦아야하는 연유를 자세히 논(論)하고 있다. 정혜사(定

慧社)가 1200년 거조사에서 송광산 길상사로 옮길 때 이미 이 결사문(結社文)이

각판(刻板) 유통(流通)되었다. 따라서 이는 지눌의 최초 저술일 뿐아니라 동시

에 그의 사상적(思想的) 근저(根底)를 이루는 작품(作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권4, pp.698~707 참조.

79) 이사송광역순기명(移社松廣亦循其名):팔공산 거조사 정혜사에서 지은 「권수정

혜결사문」을 순천 송광산 수선사로 옮겨서도 수선결사문(修禪結社文)이라 하지

않고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이라 칭한 것은 1200년(承安 5)에 지눌이 송광산으

로 이석(移錫)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왕명에 따라 수선사로 개칭하게 된 때에 이

미 이 결사문이 각판(刻板)되어 유포되었으므로 부득이 옛 이름인 정혜결사문

그대로 사용하였다라는 뜻.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이 있으므로80)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定慧)에 뜻을 두었던 것

이 이와 같았다.

後以隣寺, 有同稱者, 因受朝旨易焉, 所謂修禪社也, 名雖異而

義則同也, 師之志, 在定慧如此.

80) 인사유동칭자(隣寺有同稱者):지눌 이전의 송광산 길상사를 지눌 스님이 정혜(定

慧)로 이름하고자 하였으나, 그 근처(近處)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었으므로 혼돈

을 막기 위해 희종의 명으로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라 개칭(改稱)하였다는 말.

대안 2년81) 봄 2월에 국사께서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82) 수순83) 동안

법회를 열었다. 이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세상에 있으면

서 설법할 시기가84)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중은 각각 정진에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후85) 3월 20일에 발병(發病)하여 8일만에 입적하였으니,

스님은 가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목

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侍者)가 스님이 임종할 것을 알아차리고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종용(從

容)히 대답하였다. 야애86)에 이르러 방장실(方丈室)로 들어갔는데 문답이

처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새벽에 이르러 물으시기를 “오늘이 며칠인가?”

하므로 대답하되 “3월 27일입니다”라 하였다. 스님께서 법복을 입고 세수

와 양치질을 한 다음, “이 눈은 조사의 눈이 아니고, 이 코도 조사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입이 아니고,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

준 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법고(法鼓)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 육

환장87)을 짚고 선법당(善法堂)으로 걸어 올라가서 축향88)하고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하는 것이89) 평상시와 같았다.

大安二年春二月, 因薦母, 設法筵數旬. 時謂社衆曰, “吾住世

語法不久, 宜各努力.” 俄, 三月二十日示疾, 凡八日而終, 預

知也. 前一夕, 就浴室沐浴, 侍者請偈, 因設問, 師從容答話.

夜艾, 迺入方丈, 問答如初. 將曉, 問, “今是何日.” 曰, “三月

二十七日也.” 師具法服盥漱云, “這個眼不是祖眼, 這個鼻不

是祖鼻, 這個口不是孃生口, 這個舌不是孃生舌.” 令擊法鼓集

衆, 策六環錫杖, 步至善法堂, 祝香昇座如常儀.

81) 대안이년(大安二年):대안은 금(金)나라 영제대(永濟代)의 연호. 2년은 고려 제

21대 희종 6년(1210).

82) 천모(薦母):보조국사 지눌의 생모(生母)인 조씨부인(趙氏夫人)의 천도제를 지

냈다라는 뜻.

83) 수순(數旬):수십일(數十日)이라는 뜻.

84) 주세어법(住世語法):세상에 있으면서 중생들에게 불법(佛法)을 일러준다는 말.

85) 아(俄):①갑자기 ②얼마 후의 뜻.

86) 야애(夜艾):艾는 쑥 애字이니, 어둡다는 뜻으로 야애는 초야(初夜)를 지나 밤이

깊어진 때라는 말.

87) 육환석장(六環錫杖):우리나라에서는 육환장이라 하고, 극기라(隙棄羅

khakkhara)라 음역하고, 성장(聲杖)·지장(智杖)이라 번역한다. 스님들이 짚는 지

팡이. 상부(上部)는 주석, 중부(中部)는 나무, 하부(下部)는 뿔 또는 상 등을 사용

하여 만든다. 탑 모양에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상징한 6개의 고리를 양쪽에 달

아 행각(行脚)할 때 소리를 내게 하니, 이는 짐승과 벌레 따위를 일깨우는 것. 또

는 탁발·걸식 등으로 남의 집에 들어갈 때 자기가 온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하여 흔들기도 하는 스님들의 지팡이.

88) 축향(祝香):향을 피우고 예배하는 것.

89) 승좌(昇座):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하는 것.

육환장을 떨치고 전날 밤 방장실 중에서 문답한 어구(語句)를 그대로

들고 이르되, “선법의 영험(靈驗)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오늘 이 자

리에서 대중에게 설파(說破)코자 한다. 대중들은 매(昧)하지 아니한 일착

90)를 질문하라. 노한(老漢)도 또한 매하지 아니한 일착자로 대답하리라”

하고, 좌우를 돌아보고 손으로 육환장을 만지면서 이르기를 “산승의 명근

(命根)이 모든 사람들의 손에 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 일임한다”라 하고,

육환장을 횡으로 잡고 거꾸로 끌었다.91) “근골(筋骨)이 있는 자는 앞에 나

오라” 하고 문득 발을 뻗어 법상(法床)에 걸터앉아 묻는대로 대답하되, 말

소리가 또렷또렷하고 그 뜻도 자상하며92) 언변(言辯)이 조금도 걸림이 없

었으니, 구족(具足)한 사실은 임종기(臨終記)의 내용과 같다.93)

迺振錫, 擧前夕方丈中, 問答語句因緣云, “禪法靈驗, 不可思

議. 今日來到這裏, 欲爲大衆說破去也, 爾等不昧一着子問來.

老漢亦不昧一着子答去.” 顧視左右, 以手摩之, 曰, “山僧命

根, 盡在諸人手裏, 一任諸人.” 橫拖倒曳. “有筋骨底出來.” 便

伸足踞于床, 隨問而答, 言諦義詳, 言辯無礙, 具如臨終記.

90) 일착자(一着子):바둑의 돌을 한 수 둔다는 뜻이나, 전(轉)하여 선사(禪師)가 제

자에게 향상(向上)의 일구(一句)를 들어보이는 것. 본분(本分) 또는 청정본연(淸

淨本然)한 자성(自性)을 현시하는 것.

91) 횡타도예(橫拖倒曳):육환장을 잡고 횡(橫)으로 끌어 당겼다가 다시 거꾸로 끌

어 당겼다는 뜻.

92) 언체의상(言諦義詳):질문에 답하는 말소리가 또렷 또렷하며 그 뜻 또한 자상하

였다는 뜻.

93) 임종기(臨終記):보조국사 지눌의 임종 전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 책.

마지막으로 어떤 스님이 묻기를 “옛날 유마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

에서 시질(示疾)한 것과, 오늘 조계산에서 목우자(牧牛子)가 작병(作病)한

것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너희들은 같은지 다른지를

배워라” 하고,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몇 번 내리치고 말하되 “천가지 만가

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 하고, 주장자를 잡고 법상에 걸터앉아 부동

자세로 고요히 입적하였다. [스님은 고려 의종 12년 무인년(1158)에 태어났으

니, 즉 송의 고종 소흥 28년이며, 금의 해능왕 정륭2년이다]

最後有僧問, “昔日毘耶, 淨名示疾, 今日曹溪牧牛作病, 未審,

是同是別.” 師云, “爾學同別來.” 迺拈拄杖數下云, “千種萬

般, 摠在這裏.” 因執杖, 踞床不動, 泊然而逝. [師生於高麗毅宗

十二年戊寅, 卽宋高宗紹興二十八年, 金海陵王正隆二年]

문도들이 향등(香燈)을 베풀고 7일간 공양을 올렸다. 얼굴 빛은 생시와

같았으며, 수발(鬚髮)은 계속 자랐다. 다비(茶毘) 후 유골을 수습하니 오색

(五色)이 찬란하였다.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는데 큰 것이 30과이고, 적은

것은 무수하였으므로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사리부도(舍利浮屠)를 세웠

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면서 시호를 불일

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

랍은 36하였다. 저술로는「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상당록上堂錄」·「법

어法語」·「가송歌頌」 각(各) 1권이니, 종지(宗旨)를 밝게 발양(發揚)한 내

용들이므로 모두 가히 읽을 만한 책들이다.

門徒設香燈, 供養七日. 顔色如生, 鬚髮漸長. 茶毘拾遺骨, 骨

皆五色. 得舍利大者三十粒, 其小者無數, 浮屠于社之北麓.

上, 聞之慟, 諡曰, 佛日普照國師, 塔曰甘露. 閱世五十三齡.

受臘三十有六年. 生平所著, 如結社文, 上堂錄, 法語, 歌頌,

各一卷, 發指宗旨, 咸有可觀.

혹자는 말하기를 “스님께서 돌아가시니, 더욱 크게 돋보인다”라고 하였

다. 스님은 능히 목숨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어94) 적멸세계(寂滅世界)에 우

유하고95) 자재(自在)하시니, 이는 반드시 몰량대인(沒量大人)이라 하지 아

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지도(至道)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위대(偉大)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니 노자(老子)는 학식보다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96) 장자(莊子)는 살아감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97) 옛날 도를 닦은 사람들은 모

두 일반 사람과 같이 평범함을 보였다. 그들이 어찌 스스로 궤이98)하며 기

위(奇偉)한 자취를 자랑하여 남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하였겠는가? 세존(世

尊)을 법중왕(法中王)이라 존칭하며, 신통작용(神通作用)으로 유희자재(遊

戱自在)하지만 마지막으로 구시나가라 쌍림(雙林)에서 입적하실 무렵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제 등이 매우 아프니 곧 열반에 들 것이다”라 하시고,

드디어 오른쪽 허리를 땅에 붙이고 발을 포갠 다음 입적하였다. 또 당나라

등은봉선사(鄧隱峯禪師)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열반하였는데,99) 비구

니(比丘尼)가 된 누이동생이 와서 원망하기를 “노형100)은 평생 동안 법률

(法律)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사람들을 현혹한다”라면서 혀를 찼다.

或曰, “死可大故也.” 師能委命乘化, 優遊自肆, 是其中, 必有

大過人者也. 然, 語之至道則未也. 何以言之, 蓋老子貴知101)我

者102)希, 莊周欲行, 不崖異. 古之爲道者, 與人同耳. 其肯自爲

詭異奇偉之迹, 以取人知耶. 至如世尊, 號法中王, 神通作用,

遊戱自在, 及其雙林宴寂, 則曰, “吾今背痛, 將入涅槃.” 遂

右脇103)累足而化. 又唐隱峯禪師, 倒立而化, 妹有爲尼, 咄曰,

“老兄平生, 不循法律, 死便熒惑於人.”

94) 위명승화(委命乘化):목숨을 던져 버리고 죽음(化)을 맞이한다라는 뜻.

95) 자사(自肆):자자(自恣)와 같은 뜻이니, 생사(生死)에 대하여 자유(自由)·자재

(自在)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또는 구애됨이 없다는 말.

96) 노자귀지아자희(老子貴知我者希):노자는 학식(學識)보다 지아(知我)를 귀중(貴

中)하게 여겼다는 뜻이니, 『노자』56장에 “知者不言 言者不知”라 하였으니, 진실

하게 사물(事物)을 아는[知] 자는 심중(心中)에 깊이 감추어 둘 뿐 말하지 않는다

는 뜻이다. 그리고 『노자』81장에는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

不博 博者不知”라 하였는데, 참되게 아는 자는 잡다(雜多)한 지식(知識)은 가지

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아자희(知我者希)란 『노자』에 “知我者希則我者貴”라 하

였으니, 아(我)가 본시 희이(希夷)한 줄 알면 곧 아가 귀하다는 말. 『노자도덕경』

14장에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

混而爲一”이라 하였다. 불교에서 이르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

滅)’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도(道)란 형체가 없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

리지 않으므로 『금강경』「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제25’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

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 하고, 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는 그의 『설의

說誼』에서 “無聲曰希 無色曰夷”라 하였다.

97) 장주욕행불애이(莊周欲行不崖異):장주(莊周:莊子)는 살아감[行]에 있어 애이

(崖異)치 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말. 애이란 까다롭고 괴벽한 성격으로서 고독

(孤獨)하게 살고 세상(世上) 사람들과 더불어 교류(交流)하지 않는다는 뜻. 또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괴리되어 화합(和合)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이니, 이에 반

하여 “欲行不崖異”란 살아감에 있어 애이 곧 편협하지 않고 양극(兩極;崖)이나

유별(有別)함이 없는 것을 말하니, 항상 심평기화(心平氣和)하여 원만하고 너그

럽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장자』「천지天地」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저 도

(道)란 만물(萬物)을 덮어주고[天] 실어주나니[地] 한없이 크도다. 군자는 마땅

히 마음을 닦지 않으면 안되나니, 다시 말하면 무위(無爲)이면서 작위(作爲)하

는 것을 하늘(天)이라 하고, 무위(無爲)이면서 말하는 것을 덕(德)이라 하며, 사

람을 사랑하고 물(物;他)를 이롭게 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며, 같지 않는 차별

현상(差別現相;不同)을 무차별(無差別;同)로 보는 것을 대(大)라 하며, 행(行)

함에 다르지도 않고 또한 자취도 보이지 않음을 관용(寬容)이라 하고, 천차만별

(千差萬別)의 같지 않음을 부(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천덕(天德)을 지키는

것을 강기(剛紀)라 하며, 천덕이 이루어지는 것을 입(立)이라 하고, 도를 따라 순

리(順理)로움을 완비(完備)라 하며, 물질(物質)로 인하여 심지(心志)가 좌절(挫

折;유혹)되지 않으면 완전(完全)한 인격자인 것이다. 군자(君子)가 이 열 가지의

이치를 밝히면 자신의 빛을 도광(韜光)하여 마음이 크고 깊어 모든 것을 포용하

여 만물에 은혜를 베풀되, 마치 패연(沛然)히 쏟아 붓는 소낙비와 같다. 夫子曰

夫道 覆載萬物者也 洋洋乎 大哉 君子 不可以不刳心焉 無爲爲之之謂天 無爲言

之之謂德 愛人利物之謂仁 不同同之之謂大 行不崖異之謂寬 有萬不同之謂富 故

執德之謂紀 德成之謂立 循於道之謂備 不以物挫志之謂完 君子 明於此十者則韜

乎其事心之大也 沛乎其爲萬物逝也”라 하다.

98) 궤이(詭異):괴이(乖異)·괴이(怪異) 등과 같은 뜻. 괴이하거나 이상하다는 뜻.

보편적이 아니고 비상(非常)하다는 말.

99) 당은봉선사도립이화(唐隱峯禪師倒立而化):당나라 때 등은봉선사(鄧隱峯禪師)

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하였다는 말. 등은봉스님은 중국 복건현(福建

縣) 소무(邵武) 출신. 속성이 등씨(鄧氏)이므로 세인(世人)들이 등은봉이라 일컬

었다. 처음 마조도일(馬祖道一)의 회하(會下)에 있었으나 밀지(密旨)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석두처(石頭處)를 찾아갔으나 기연(機緣)이 계합(契合)하지 않았

다. 그 후 다시 마조를 참방(參訪)하여 그의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다. 어

느 날 스님이 토거(土車)를 끌고 가던 중 마조가 노상(路上)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스님께서 발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마조는 ‘이미 편 것은

거둘 수 없다(已展不收)’라면서 거절했다. 따라서 스님 역시 나도 또한 ‘이미 나

아간 것은 물러날 수 없다(已進不退)’라면서 수레를 밀고 지나갔고, 마조는 다리

에 부상을 입었다. 이때 마조는 곧 사원(寺院)으로 돌아가 도끼를 들고 나와 “나

의 다리에 상처를 입힌 놈은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스님은 곧 마조의

앞에 나아가 자신의 목을 도끼 밑에 들이댔다. 이를 본 마조 또한 도끼를 던져

버렸다. 이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금강굴(金剛窟) 앞에서 입적코자 하여

대중에게 묻기를 “종래(從來) 제방(諸方)에서 입적한 스님들 중에 누워서 갔거

나 앉아서 죽은 스님은 내가 많이 보고 들었지만 서서 죽은 스님이 있었느냐?”

하니, 대중이 대답하되 “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倒立) 죽은

스님도 있었느냐?” 하니, 대중이 대답하되 “아직 있었다는 사실(事實)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곧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입

적하였으나, 정정연(亭亭然)하여 옷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지지 아니하였다. 법

구를 매고 다비장(茶毗場)으로 갔으나 흘연부동(屹然不動)하였다. 이때 비구니

가 된 누이동생이 이를 보고 시체를 눕히면서 원망하기를 “노형(老兄;오빠)은

생전(生前)에도 법률(法律)을 지키지 않더니, 죽어서까지 사람을 현혹한다”면

서 손으로 시체를 슬쩍 미니까 분연(憤然)히 쓰러졌다고 전한다. 『경덕전등록景

德傳燈錄』권8「오대산은봉선사장五臺山隱峯禪師狀」(대정장50, p.259b)·『송고승

전』권21(대정장50, p.847a)·『조당집祖堂集』권15 등 참조.

100) 노형(老兄):오빠를 말한다.

101) [通史]에는 知와 我 사이에 如가 있으나 [總覽]에는 없다. 문맥으로 보아 [通史]

의 如는 삭제하여야 한다.

102) [總覽]에는 者자가 있으나, [通史]에서는 탈락되었다. 『노자』 원문에 의하면

[總覽]이 옳다.

103) [總覽]의 脥과 [通史]의 膝은 모두 脇의 오자임.

이제 스님께서는 생전에 개당(開堂)하여 많은 법문을 보여주었거늘, 죽

는 날에까지 다시 법고를 쳐서 대중을 운집하고 법상에 올라 설법한 다음,

법상에 걸터앉아 입적하였으니, 이것이 도에서 본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

는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대저 도의 작용은 방소(方所)

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행함이 같지 않으므로, “천하(天下)에 일

리(一理)뿐이지만 백려(百慮)의 차별이 있고, 지방에서 출발하는 길은 다

르지만 서울에 도착함은 같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또 역대로 선문(禪門)의 많은 조사들이 임종할

때 법을 부촉(付囑)함에 있어 반드시 신이(神異)를 나타내었으니, 승사104)

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과거 많은 스님들 중에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上堂

說法)하고 입적한 스님으로 흥선사105)의 유관106)은 상당(上堂)하여 임종게

[遺偈]를 설하고106) 편안히 앉아 입멸하였고, 수산성념선사107)는 임종게를 남

긴 다음 온종일 상당하여 설법하고 편안히 앉아 장왕(長往)하였으며, 서

108)의 지단선사109)는 삭발 목욕하고 법상에 올라 앉아 대중들에게 하직

하고 편안히 앉아 천화(遷化)하였고, 대령110)의 은미선사111)는 상당하여 임

종게를 설한 다음 탈화(脫化)한 사실들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방할

수 있겠는가?

今師之開堂, 示衆已多矣, 死之日, 而迺, 復更鳴鼓集衆, 升座

說法, 踞床告滅, 其於道不爲疣贅乎. 答不然. 夫道之用無方.

而人之行不同, 故曰, “天下一致而百慮, 殊途而同歸.” 若所云

者, 知其一, 未知其二也. 且歷代禪門諸祖, 臨終囑法, 必顯神

異, 僧史載之詳矣. 至於後之諸師, 升堂說法而就化, 若興善寺

之惟寬, 上堂說偈安坐而化, 若首山省念, 遺偈, 剋日上堂說

法, 安坐長往, 若瑞峯之志端, 剃髮澡身, 升堂辭衆, 安坐而化,

若大寧之隱微, 上堂說偈而化, 皆可譏耶.

104) 승사(僧史):고승전(高僧傳) 및 기타 사전(史傳)을 말함.

105) 흥선사(興善寺):중국 서안부(西安府:陝西省) 함령현(咸寧縣)의 남쪽에 위치한

절.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도읍을 옮기고 창건하였을 때에는 준선사(遵善寺)

라 칭하다가 얼마 후 대흥선사(大興善寺)라 개칭하였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흥

선사로 부르게 되었다. 마조도일의 제자인 유관(惟寬) 등이 주석하던 절이다. 그

리하여 마조의 선풍(禪風)은 흥선사의 유관과 장경사(章敬寺)의 회휘(懷暉)에

의해서 장안(長安)에 널리 진작(振作)되었다.『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권180.

106) 유관(惟寬):755~817. 남악하(南岳下) 구주(衢州;浙江省) 신안(信安) 출신. 속성

은 축씨(祝氏). 13살 때 출가하여 율장(律藏)과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배운 후,

마조대적(馬祖大寂)을 참방하여 선법(禪法)을 받았다. 원화(元和) 12년(817) 2월

그믐날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을 마치고 입적(入寂)하니 세수는 63세, 법랍은 39

하였다. 파릉(灞陵)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고, 당의 헌종(憲宗)이 시호를 대철선

사(大徹禪師), 탑호를 원화정진지탑(元和正眞之塔)이라고 하사하였다. 『송고승

전』권10·『경덕전등록』권7·『전당문全唐文』권678「서경흥선사전법당비명병서

西京興善寺傳法堂碑銘竝序」 등 참조.

107) 수산성념(首山省念):926~993. 임제종(臨濟宗) 풍혈연소(風穴延沼)의 제자. 내

주(萊州;山東省 掖縣) 출신. 속성은 적씨(狄氏). 순화(淳化) 4년 12월 4일 상당(上

堂)하여 설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중에 하직하고 “白銀世界金色身 情與非情

共一眞 明暗盡時俱不照 日輪午後見全身”이라는 임종게를 설하여 마치고 편안

히 앉아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 함께 조용히 입적하니 세수는 68세였다. 『경덕

전등록』권13(대정장51, p.304a).

108) 서봉(瑞峯):중국 복주(福州;福建省) 임양산(林陽山) 서봉원(瑞峰院)이니, 사적

(寺蹟)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09) 지단(志端):892~969. 설봉하(雪峰下)의 문인(門人). 복주(福州) 출신. 속성은 유

씨(兪氏). 복주 남간사(南澗寺)에 가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24살 때 안국사

(安國寺) 홍도명진대사(弘玐明眞大師)로부터 법을 이어받고 제자가 되었다. 서

봉원에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969년(개보 2) 1월 25일 자시(子

時)에 삭발 목욕하고 대중을 모아 하직하고 박연(泊然)히 입적하였다. 『경덕전

등록』권22(대정장51, p.381b~c).

110) 대령(大寧):대령원(大寧院;江西省)이니 위치와 사적이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

지 않는다.

111) 은미(隱微):886~961. 청원하(靑原下)의 문인. 예장(豫章) 신감(新淦;江西省) 출

신. 속성은 양씨(楊氏). 7살 때 홍주(洪州) 석두원(石頭院) 도견선사(道堅禪師)를

은사로 스님이 되었다. 20살 적에 개원사(開元寺) 지칭율사(智稱律師)로부터 구

족계(具足戒)를 받았고, 나산(羅山)의 법보대사(法寶大師) 도한(道閑)의 법을 이

어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십선도량(十善道場)·용광선원(龍光禪院) 등을 거

쳐 961년(건륭 2) 강남(江南)의 이씨(李氏)의 청(請)을 받아 홍주 강서성(江西省)

의 대령정사(大寧精舍)로 옮겨 주석하다가, 그 해 10월 27일 삭발 목욕하고 법상

(法床)에 올라 대중(大衆)에게 마지막의 하직을 하고 편안히 앉아 세수 76세, 법

랍 56하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송의 태조가 시호를 현적선사(玄寂禪師;一說覺

寂), 탑호를 상적(常寂)이라 추증하였다. 『경덕전등록』권23(대정장51, p.392a);

『조당집』권12 등 참조.

슬프다! 상계112)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의심은 많고 신심(信心)은

적어서, 선각자(先覺者)들이 자비(慈悲)의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써 개

시(開示)하거나 지도하여도 흠모(欽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비록

성도(聖道)로 나아가고자 하더라도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님의 마음

을 짐작해 보건대 이것 역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일단임을 알 수 있다.

嗟乎, 像季之人, 多疑而少信, 非有先覺之士, 以善巧方便, 開

示勸導, 生欽慕心, 雖欲發趣聖道, 斯亦難矣. 觀師之心, 亦接

機利物之一端也.

112) 상계(像季):상법(像法)과 말법시대(末法時代)란 뜻. 불법(佛法) 유통의 시대적

구분으로, 정법(正法)·상법·계법(季法, 末法)시대로 구분하는데, 불멸(佛滅)로

부터 1천년까지를 정법시대(正法時代), 1천년에서부터 2천년까지를 상법시대(像

法時代), 2천년부터 1만 2천년까지를 계법 곧 말법시대라고 하는 데에서 온 말.

스님께서 입적하신 이듬 해에113) 사법제자인114) 혜심115) 등이 스님의 행

장을 갖추어 임금께 올리고, “원하옵건대 스님의 행적을 후세에 길이 전

시할 수 있도록 입비(立碑)를 윤허해 주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 주청을 받아들여 윤허하시고,116) 소신 군수(君綏)에게 비문을 지으라

고 명하였다. 그러나 신이 유교(儒敎)를 수학하였으나 유학에도 변변치

못한데 하물며 불심(佛心)과 조인117)인 방외(方外)의 논리118)에 있어서랴?

그러나 강박한 명명119)을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소문120)한 천식(淺

識)을 모두120) 동원하여 감히 스님의 성미121)를 비면에 나타내려고 한다.

명하여 이르기를,

師歿之明年, 嗣法沙門惠諶等, 具師之行狀以聞, “願賜所以示

後世者.” 上曰, “兪.” 乃命小臣文其碑. 臣, 業儒而未至者也,

而況於佛心祖印, 方外之談乎. 但迫明命, 無由以辭. 玆扣竭於

謏聞, 敢形容於盛美. 其銘曰,

113) 사몰지명년(師歿之明年):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한 다음 해란 말이니, 1211년임.

114) 사법사문(嗣法沙門):보조국사의 법을 이은 스님이니,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

(慧諶 1178~1234)을 지칭함.

115) 혜심(惠諶):혜심(慧諶)이라고도 함. 무의자(無衣子). 자는 영을(永乙). 속성은

최씨(崔氏). 전남 화순(和順) 출신.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며 송광사 16국사(國

師) 중 제2세임.

116) 상왈유(上曰兪):고려의 희종 임금이 1211년 입비주청(立碑奏請)을 받고 윤허

(允許)하였다라는 뜻. 兪는 ‘그렇게 하라’고 승낙할 유자임.

117) 불심조인(佛心祖印):불심(佛心)은 교종(敎宗), 조인(祖印)은 선종(禪宗)을 가

리킴.

118) 방외지담(方外之談):유교에서 자신의 규모(方) 밖에 있는 논리(論理)를 말함이

니, 불교와 도교 등을 일컫는 말.

119) 명명(明命):임금이 김군수(金君綏)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내린 명령(命令)이다.

120) 소문(謏聞):소문(小聞) 또는 과문(寡聞)과 같은 뜻이니, 자신의 짧고 옅은 식견

(識見)을 모두 동원(扣竭)하였다는 말. 소(謏)는 소(小)이고 문(聞)은 성문(聲聞)

의 뜻이다.

121) 성미(盛美):보조국사의 왕성하고 아름다운 업적(業跡)이란 말이니, 감히 자신

의 얕은 식견으로 스님이 쌓은 성미의 도덕(道德)을 비문에 형용(形容)하였다는

뜻이다.

손을 들어 아이에게 달을 가리키지만,122)

달은 본시 손가락 끝에 있지 않는 것을.

언어로써 고구정녕(苦口叮嚀) 알려주려 하여도,

오묘한 그 진리는 언어 속에 없는 것을.

指以標123)月兮,

月不在指.

言以說法兮,

法不在言.

122) 표월(摽月):표(標)는 표(表)이니, 경문(經文)을 달을 가리켜 표시(表示)하는 손

가락에 비유하여 표월(標月) 또는 이정표(里程標)라고 한다. 『대방광원각수다

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청정혜보살장淸淨慧菩薩章」(대정장17,

p.917a)에 “…… 譬如有人 自斷其首 首已斷故 無能斷者 則以礙心 自滅諸礙 礙已

斷滅 無滅礙者 修多羅敎 如標月指 若復見月 了知所標 畢竟非月 一切如來 種種

言說 開示菩薩 亦復如是 此名菩薩 已入地者 隨順覺性”이라 하다.

123) [總覽]에는 標. [通史]의 摽는 標의 오자임.

사십구년124) 설법하신 팔만대장경이여!125)

중생들의 근기 따라 팔만문(八萬門)이 열렸네!

맹팔랑(孟八郞)이 망치 들고 조관(祖關)을 분쇄하고,126)

오직 하나뿐인 최후관문(最後關門) 통과하였다.

三乘諸部兮,

隨機差別.

徑截直入兮,

唯有一門.

124) 삼승(三乘):소승(小乘, 四聖諦)·중승(中乘, 十二因緣)·대승(大乘, 六波羅密) 등

을 가리킴.

125) 제부(諸部):십이부경(十二部經)·십이분경(十二分經)·십이분교(十二分敎) 등.

부처님의 일대(一代) 교설(敎說).

126) 경절(徑截):경절문(徑截門)의 줄임말이니, 선종(禪宗)의 참선문을 지칭함.

영산회상(靈山會上) 설법 때 천파화(天波花)를 거시하니,127)

백만대중(百萬大衆) 운집 중에 가섭(迦葉)만 미소(微笑)하다.

달마대사(達磨大師) 소림굴(少林窟)에 앉아 면벽(面壁)할 적에,128)

영특한 혜가대사(慧可大師) 팔을 베어 바쳤도다.129)

牟尼示花兮,

迦葉破顔.

達摩面壁兮,

慧可斷臂.

127) 모니시화(牟尼示花):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기에 앞

서 천파화(天波花)를 들어 보였으나, 백만(百萬) 대중(大衆) 중에 이 뜻을 알아

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이 빙그레 웃었

던 것이다. 이를 일러 염화미소(拈花微笑) 또는 파안미소(破顔微笑)라고 한다.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의 하나이다.

128) 달마면벽(達摩面壁):달마대사가 숭산(崇山)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간 벽을 향

해 앉아 참선하였던 것을 지칭한다. 달마대사가 520년(一說에는 527년) 중국에

와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 대화하였으나, 기연(機緣)이 맞지 아니하여 다시

그 해 11월 23일(北魏 孝明帝 正光 1년) 모든 것을 단념하고 숭산 소림굴로 들어

가 면벽(面壁)하고 앉아 종일토록 묵연(默然)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은 벽관파

라문(壁觀婆羅門)이라 칭하였다. 『경덕전등록』권3「보리달마장菩提達磨狀」(대

정장51, p.219a~b).

129) 혜가단비(慧可斷臂):달마대사가 소림굴에 있을 때 신광(神光:혜가)이 세속(世

俗)에서 공로(孔老)의 학(學)과 장역(莊易)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하였으

나 이 모두가 묘리(妙理)에 미진(未盡)하였음을 알고 있던 중, 소림굴로 찾아가

달마에게 지도(指導)를 구하였으나 면벽한 달마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신광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 사람은 구도(求道)함에 있어 고골취수(敲骨取髓), 자혈

제기(刺血濟饑), 포발엄니(布髮掩泥), 투애사호(投崖飼虎) 등으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난들 어찌 그렇게 않을 수 있으랴!” 하고, 520년 12월 9일 밤 뜰

앞에 서 있는데 눈이 내려 무릎에까지 쌓였다. 이를 불쌍히 여긴 달마는 돌아보

면서 “너는 오래도록 설중(雪中)에 서서 무엇을 구하기 위함인가?” 하니, 신광

이 이도(利刀)로서 스스로 왼쪽 팔을 잘라 스님 앞에 바쳤다. 달마는 이를 보고

법기(法器)로 여겨 혜가(慧可)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신광이 말하기를 “제불

법인(諸佛法印)을 가득문호(可得聞乎)니까?” 하니, 사왈(師曰), “제불법인(諸佛

法印)은 비종인득(匪從人得)이니라.” 광왈(光曰), “아심미녕(我心未寧)하오니 걸

사여안(乞師與安)하소서.” 사왈, “장심래(將心來)하라. 여여안(與汝安)하리라.”

광왈, “멱심료불가득(覓心了不可得)이니다.” 사왈, “ 아여여안심경(我與汝安心

竟)이라.”하다. 『경덕전등록』권3(대정장51, p.219b).

열반(涅槃) 묘심(妙心) 나의 법등(法燈) 너에게 전하노니,

유(有)도 무(無)도 일(一)도 이(二)도 아닌 그 마음이여!

일법(一法)과 다법(多法)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들이,

천차(千差)요 만별(萬別)이나 그 모양은 둘 아닐세.

心傳心兮,

不二.

法與130) 法兮,

齊致.

130) [通史]에는 與. [總覽]의 興은 與의 오자임.

청풍불(淸風拂) 명월조(明月照)에 무한한 그 풍경(風景)을,

모든 중생 수용해도 무진(無盡)한 보고(寶庫)일세.

과거 현재 미래 세상 위인이 나타나서,

위법망구(爲法忘軀) 고해정진 혜명(慧命)을 이었도다.

眞風兮,

未殄.

何代兮,

乏人.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세계 우유(優游)하니,

마치 농중(籠中)에 갇힌 새가 벗어남과 같네!

거울같이 맑고 밝은 스님의 정신세계,

청정무구(淸淨無垢) 티가 없이 법계(法界)에 두루하네!

師之身兮,

鶴出籠.

師之心兮,

鏡無塵.

경상북도 예천군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통현장자(通玄長者) 화엄론(華嚴論)을 자세히 열람하다.131)

전라남도 순천군의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에서,

법문을 마치시고 법상(法床)에서 입적하다.132)

柯山兮,

啓途.

松社兮,

蛻駕.

131) 가산혜계도(柯山兮啓途):1185년(대정25)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首溪

里) 하가산(下柯山;鶴駕山)에 있으면서,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화엄론華嚴論』

을 보다가 크게 깨닫고, 전해전명(前解轉明)하고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마음을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의 미망(迷妄)을 깨우쳐 주고자 한 것이 곧 계도(啓

途)인 것이다.

132) 송사혜세가(松社兮蛻駕):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산 수선사에서 세가(蛻駕) 즉 입

적하였다라는 뜻. 세가(蛻駕)는 탈각(脫殼)과 같은 말.

일생동안 갈고 닦아 맑고 깊은 선정수(禪定水),

모든 번뇌 사라지고 담적(湛寂)한 해인삼매(海印三昧).

혁혁한 지혜 광명 그 횃불을 높이 드니,

그 광명(光明) 시방세계(十方世界) 골고루 비추시도다.133)

定水淡兮,

湛無波.

慧炬光兮,

光不夜.

133) 광불야(光不夜):빛이 계속 발하여 불야성(不夜城)과 같아 어두운 때가 없다

는 말.

달마(達磨)가 동토(東土)를 찾아온 뜻을 물음 대해,134)

조주(趙州)는 그 물음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네.

연꽃처럼 맑고 밝아 향기로운 그 법력,135)

걸림없는 사변재(四辯才)로 진종(眞宗)을 연설하다.

庭柏兮,

答祖意.

池蓮兮,

演眞宗.

134) 정백(庭柏):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의 줄임말. 조주(趙州) 종심선사(從諗禪師)

가 한 스님으로부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西天)에서 동토(東土)로 온 뜻

을 물음에 대답한 말이다. 『무문관無門關』37화(話)(대정장48, p.297c)에 “趙州因

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 庭前栢樹子”라 하다.

135) 지연혜(池蓮兮):보조국사의 고매한 도덕이 마치 연못의 연꽃처럼 맑고 향기롭

다는 말.

사방(四方)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치백(緇白) 중에는,

수백명 왕공사서(王公士庶) 수선사(修禪社)에 입사(入社)했네!

현하(懸河)같은 변재(辯才)로써 종지(宗旨)를 천양하니,

일음(一音)으로 용용136)한 그 모습 부루나(富樓那) 같네!

四衆繞兮,

雜沓.

一音暢兮,

舂舂容.137)

136) 용용(舂容):침착하고 조용한 모양.

137) [總覽] [通史] 모두 春은 舂의 오자임.

나고 죽는 인생살이 자세히 살펴보니,

유여몽환포영(猶如夢幻泡影)이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일세.

진(眞)과 망(妄)이 어찌 다르랴! 망이 곧 진이니,

손등과 손바닥이 둘이 아닌 것과 같네!

觀死生兮,

如幻.

豈眞妄兮,

殊科.

슬프도다! 법상(法床)에서 석장(錫杖)을 떨치시니,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두가 하나로다.

훈훈한 봄바람은 버들가지 위에 불고,138)

쏟아지는 소낙비는 배꽃을 강타(强打)하다.

噫, 師之振錫兮,

萬139)像都融.

風吹柳絮兮,

雨打梨花.

138) 유서(柳絮):버들강아지.

139) [總覽]에는 萬. [通史]의 邁는 萬의 오자임.

대금(大金) 대안 3년140) 신미 12월 일에 전전141) 보창142)은 비문을 새기고,

대금 숭경 2년143) 계유 4월 일에 내시144) 창락궁145)녹사146) 신 김진147)

왕명을 받들어 비석을 세우다.

大金, 大安三年, 辛未十二月日, 殿前, 寶昌, 刊,

大金, 崇慶二年, 癸酉四月日, 內侍, 昌樂宮錄事, 臣, 金振,

奉宣, 立石.

140) 대안삼년(大安三年):대안은 금(金)나라 영제대의 연호. 3년은 고려 제21대 희

종 7년(1211).

141) 전전(殿前):어전(御前)에서 일하는 벼슬인 듯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142) 보창(寶昌):보조국사의 비문을 각자(刻字)한 스님이나,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

도 보이지 않는다.

143) 숭경이년(崇慶二年):숭경은 금나라 영제대의 연호. 2년은 고려 제22대 강종 2

년(1213).

144) 내시(內侍):고려 때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의 일을 맡아 보던 관원(官員).

145) 창락궁(昌樂宮):강종대(康宗代)에 궁중에 있는 궁명(宮名).

146) 녹사(錄事):창락궁(昌樂宮)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행사(行事)를 기록하는

직책.

147) 김진(金振):전기가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揭載]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下, pp.949~953.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下, pp.337~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