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승비문

10.군위인각사보각국존정조탑비문(軍威4)麟角寺普覺國尊靜照塔碑

수선님 2023. 10. 8. 14:45

군위인각사1)보각2)국존정조3)탑비문

軍威4)麟角寺普覺國尊靜照塔碑文

1) 인각사(麟角寺):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古老面) 화수동(華水洞)에 자리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7「의흥현」‘불우’에 따르면, 화

산(華山) 동구(洞口)에 층암절벽이 있는데, 옛날 기린(麒麟)이 뿔을 그 절벽에

걸고 있었다 하여 인각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은 643년

(선덕여왕 12) 원효(元曉)가 창건하였고, 1287년(충렬왕13) 보각국존(普覺國尊)

이 중창하였다.

2) 보각(普覺):충렬왕이 추증(追贈)한 시호(諡號)이다.

3) 정조(靜照):충렬왕이 추증(追贈)한 탑호(塔號)이다.

4) [總覽]에는 義興이고, [全文]에는 軍威이니, 의흥(義興)은 옛 이름이고, 군위(軍

威)는 1914년 일제(日帝) 때 개칭한 것이다.

있는 곳: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수동 인각사

세운 때:고려 충렬왕 21년 (1295)

所 在:慶尙北道 軍5)威郡 古老面 華水洞 麟角寺

年 代:高麗 忠烈王 21年 (1295)

5) [全文]에는 軍字 앞에 通字가 있으니, 이는 삭제하여야 한다.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 [제액]

普覺國師碑銘6) [題額7)]

6) 普以下銘까지 6字는 [全文]에는 있으나, [朝鮮佛敎通史](以下 通史라 한다)와 [總

覽]에는 탈락됨.

7) [全文]에는 있으나, [通史]와 [總覽]에는 탈락됨.

고려국(高麗國) 화산8) 조계종9) 인각사(麟角寺) 가지산10)하 보각국존비

명(普覺國尊碑銘)과 아울러 서(序)

高麗國,11) 華山, 曹溪宗, 麟角寺, 迦智山下, 普覺國尊碑銘,

幷序.

8) 화산(華山):경상북도 군위에서 동쪽 약 12㎞ 지점에 있는 산 이름.

9) 조계종(曹溪宗):조계종이란 육조(六祖) 혜능대사가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

林寺)에서 종풍(宗風)을 진작하였으므로, 이후 선종(禪宗)의 대명사로 일컬어졌

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선종을 지칭함이었으나, 현재에는 통불교(通佛

敎)전통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宗団)의 이름이다.

10) 가지산(迦智山):도의국사(道義國師)인 명적(明寂)은 북한군(北漢郡:서울) 출신

으로, 784년에 입당구법(入唐求法)하고, 37년만인 821년에 귀국하여 설악산 진

전사(陳田寺)에서 약 40년간 주석하였다. 기연(機緣)이 맞지 않아 마침내 제자

염거(廉居)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하였다. 이후 염거는 다시 보조체징(普照體澄)

에게 전법(傳法)하였다. 법을 전해 받은 체징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有治

面) 봉덕리(鳳德里) 가지산으로 가서 보림사를 창건하고, 비로소 도의(道義)의

종풍(宗風)을 진작하였다. 청도 운문사와 의흥 인각사 등이 모두 가지산파(迦智

山派)에 속했던 사찰이었다.

11) [通史]와 [總覽]에는 國과 華字 사이에 義興이란 二字가 있으나 [全文]에는 탈

락됨.

원(元)나라 세조(世祖)로부터 조열대부12)와 한림13)직학사14)의 직(職)을

받았고,15) 본조(本朝)로부터 정헌대부16) 밀직사17) 좌승지18) 국학19) 대사성20)

문한21) 시강22) 학사23) 충사관24) 수찬관25) 지제고26) 지판도사27) 사세자28)

우유선29) 대부30) 사자금어대31) 등직을 역임한 신(臣) 민지32)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 죽허(竹虛)는 교칙(敎勅)에 의하여 왕희지(王羲之)

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宣授朝列大33)夫, 選34)授翰林直學士, 正憲35)大36)夫, 密直司, 左

承旨, 國學, 大37)司成, 文翰, 侍講, 學士, 充史舘, 修撰官, 知

制誥, 知版圖司, 事世子, 右諭善, 大夫, 賜紫金魚袋, 臣, 閔

漬, 奉勅, 撰.

12) 조열대부(朝列大夫):고려 때의 품계(品階). 문산계(文散階)로 1369년에 종4품하

로 두었다.

13)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고려 때 한림원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 정원(定員)은

2명이었다.

14) 직학(直學):고려 때의 관직. 문종(文宗) 때 처음으로 국자감(國子監)에 둔 종9품

관으로서 정원은 2명이었다.

15) 선수(宣授):임금의 명(命;宣)에 의하여 관직이나 법계(法階)·시호(諡號)·포상

(襃賞) 등을 준다는 말이나, 여기서는 원나라 세조를 지칭함이니, 충선왕이 세자

때 그를 따라 원에 가서 세조로부터 조열대부 한림직학사란 벼슬을 받은 것을

지칭한다.

16) 정헌대부(正憲大夫):정2품의 문무관 품계로 종친(宗親)에 대한 의빈(儀賓)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17) 밀직사(密直司):고려 때 왕명(王命)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등

을 맡아 보던 관청. 991년에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이 1095년에 추밀원(樞密院)

으로 바뀌었다가 원 간섭기인 1275년에 밀직사로 바뀌었다. 전기에 중추원에서

맡던 의례와 궁중서무 대신 군기지정(軍機之政)을 관장하여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양부(兩府)라 불렸다.

18) 좌승지(左承旨):밀직사에 두었던 관리. 사(使, 종2품), 부사(副使, 종2품), 지신사

(知申使, 정3품) 좌우승지(정3품) 각 1人을 두었다.

19) 국학(國學):국가의 교육기관. 김춘추(金春秋)가 당의 국학에 나아가 석전(釋奠)

을 보고 돌아와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석전의 예가 있음을 알았다 하고,

682년 6월 서울에 최초의 국학을 세웠다. 747년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으며, 그 명칭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였다. 교재(敎材)

는 주로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春秋』·『좌씨

전左氏傳』·『문선文選』·『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을 가르쳤다.

20) 대사성(大司成):성균관(成均館)의 최고관으로, 유학(儒學)에 관한 일을 담당하

였다. 학생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만큼 겸직은 원칙적으로 금하였으나, 대제학

(大提學)이 겸직하는 일이 많았다.

21) 문한(文翰):문한서(文翰署)의 준말. 고려 때 왕의 명령을 글로 기초하던 관청.

원래 태조대에는 사(詞)와 명(命)을 제찬(製撰)하던 곳으로, 태봉(泰封)의 뒤를

이어 원봉성(元鳳省)을 두었다가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개칭(改稱)하였다.

현종 때에 한림원(翰林院)이라 불러오다가 원의 지배를 받게 된 후, 원의 강요

에 의하여 1275년에 문한서로 그 이름을 고쳤으며, 1298년 사림원(詞林院)으로,

1308년에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등으로 개칭하였다.

22) 시강(侍講):시강관(侍講官)의 준말.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직책을 가

진 정4품의 벼슬이다. 『대전회통大典會通』 참조.

23) 학사(學士):고려 때의 관직. 제관전(諸館殿)에 속하여 있었으며, 문신 중에 뛰

어난 학자로 뽑혀서 왕에게 시종(侍從)하였던 자를 지칭한다.

24) 충사관(充史舘):고려 때의 관청. 초기에 설치된 것으로 왕의 언행·정치(政治)·

백관(百官)의 행적(行蹟) 등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감

수국사(監修國史)는 시중(侍中)이, 수국사(修國史)와 동수국사(同修國史)는 2품

관이, 수찬관(修撰官)은 한림원의 3품관이하가 각각 겸임(兼任)하였다.

25) 수찬관(修撰官):고려 때 사관(史館)의 관직. 한림원의 3품 이하가 겸직토록 했

다. 『고려사』 참조.

26) 지제고(知制誥):고려 때의 관직.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의 글을 지어 바치

던 일을 맡아 보았다. 한림원·보문각(寶文閣)의 관원이 이를 겸직했을 경우에

는 내지제고(內知制誥), 다른 관청의 관원이 이를 겸직했을 경우에는 외지제고

(外知制誥)라 하였다. 「광자대사비문廣慈大師碑文」 주3)지제고知制誥 [고려편

1] p.289, 「원융국사비문順興浮石寺圓融國師碑文」 주7)지제고知制誥 [고려편2]

pp.272~273 등 참조.

27) 판도사(版圖司):호조(戶曹)와 같은 말이니, 고려(高麗) 때 육조(六曹)의 하나.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의 정무(政務)를 맡아 보던 중앙 관청. 1275

년에 판도사로 고치고 상서(尙書)를 판사(判事), 시랑(侍郞)을 총랑(摠郞), 낭중

(郎中)을 정랑(正郞), 원외랑(員外郞)을 좌랑(佐郞)이라 하였다.

28) 사세자(事世子):세자에게 글과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29) 우유선(右諭善):유선(諭善)이라고도 하니,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주재관

(主宰官)으로 당하3에서 종2품에 이르는 관원 중에서 등용하였다. 정원은 좌유

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에 각 1명씩이다. 『대전회통大典會通』.

30) 대부(大夫):관품(官品)의 하나. 주(周)나라 때 천자(天子)나 제후(諸侯)의 신하들

을 경(卿)·대부(大夫)·사(士) 등의 3등급으로 나눈 것의 하나였는데, 진(秦)·한

(漢) 이래에도 어사대부(御史大夫)·광록대부(光祿大夫)·대중대부(大中大夫) 등

여러 명칭을 썼으나, 주대에 와서는 달리 관직이 아니라 관품의 명칭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처음으로 이런 중국의 제도(制度)를 모방하여 대부의 명칭이

쓰이게 되었다. 995년 문무관계(文武官階)를 나눌 때, 문산계(文散階)의 종2품에

서 종5품하까지는 ○○대부(○○大夫), 그 아래는 ○○랑(○○郞)이라 하였다.

31) 자금어대(紫金魚袋):「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文」 주8)

비어대緋魚袋 [신라편] p.217;「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眞鏡大師寶月凌空塔

碑文」 주4)자금어대紫金魚袋 [신라편] p.347;「적연국사자광탑비문寂然國師慈

光塔碑文」 주8)금어대金魚袋 [고려편2] p.193;「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文」 주

8)자금어대紫金魚袋 [고려편2] p.273 등 참조.

32) 민지(閔漬):1248~1326. 고려 문신. 자는 상정(祥正) 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

(默軒). 시호는 문인(文仁). 본관은 여흥(驪興). 영모(令謨)의 5대손. 원종 때 문

과(文科)에 장원. 충렬왕 때 전중부(殿中夫)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고, 1290

년 11월 충선왕(忠宣王)이 세자 때 그를 따라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가신(鄭可

臣)과 함께 종행(從行)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왕실로부터 한림직학사 조열대부

의 벼슬을 받았다. 1285년 원이 앞서 두 번이나 실패한 일본정벌을 다시 결행하

려고 1279년 고려에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을 만들게 하자 좌부승선(左副

承宣)으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동정(東征)의 불필요를 건의(建議)하여 전

함건조를 중지케 했다. 집현전(集賢殿) 대학사(大學士) 첨광정원사(僉光政院事)

가 되고, 충선왕 초에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1321년

에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정가신(鄭可臣:

?~1298)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권부(權溥)와 중수하여 『세대편년

절요世代編年節要』를 만들고, 또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편찬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저서는 『묵헌문집默軒文集』이 있다. 『고려사』권107「열전

列傳」20.

33) [總覽]에는 大.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34) [總覽]에는 選. [全文]의 遙는 選의 오자임.

35) [總覽] [全文]에 모두 獻이나, 이는 憲이어야 한다.

36) [總覽]에는 大.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37) [總覽]에는 大.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대저 맑은 거울과 탁금38)이 원래 이물(二物)이 아니요, 혼파39)와 담수40)

가 그 근원에서는 똑같은 물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같지만, 지말(枝末)에

있어 다른 것은 닦고 닦지 않음과, 요동(搖動)하고 요동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제불(諸佛)과 중생(衆生)의 불성(佛性)도 또한 거울과 물의 경우

와 같아서, 다만 미(迷)하고 오(悟)한 차별일 뿐이니, 누가 감히 우치하고

슬기로움이 따로히 종자(種子)가 있다고41)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

실에 있어서는 지우42)인 중생으로써 대각43)인 세존(世尊)과 비교하면 소

44)보다 더 현한 차이가 있지만, 한 생각을 돌이켜 전미개오(轉迷開悟)

하면 곧 본각(本覺)인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가섭(迦葉)이 미소45)

함으로부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西天)에서 중국으로 온 이후, 법

등(法燈)과 법등이 상속(相續)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러 온 것은, 모두 이러

함에 의한 것이다. 스승이 그의 마음을 전함에, 제자는 그 골수(骨髓)를 얻

음이다.46)

夫淸鏡濁金, 元非二物. 渾波湛水, 同出一源. 其本同而末異

者, 在乎磨與47)不磨, 動與不動耳.48) 諸佛衆生, 性亦如是, 但以

迷悟爲別, 孰云, 愚智有種. 以至愚望大覺, 勢絶霄壤, 及乎一

迴機, 便同本覺. 自迦葉微笑, 達磨西來, 燈燈相續, 直49)至于

今者, 皆以此也. 傳其心, 得其髓.

38) 탁금(濁金):정출(精出)되지 않고 아직 광석(鑛石) 중에 섞여 있는 금. 아직 정련

(精練)되지 아니한 혼금(渾金) 또는 금박(金璞).

39) 혼파(渾波):혼수(渾水)·탁수(濁水)·혼혼(渾渾) 등과 같은 뜻이니, 파문(波文)

이 겹겹이 연결되어 물 속이 보이지 않는 상태.

40) 담수(湛水):고요하고 맑은 물.

41) 우지유종(愚智有種):‘우둔하고 지혜로움이 불성(佛性)의 미오(迷悟)에 따라 차

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그 종자(種子)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42) 지우(至愚):지극히 어리석은 자이니, 중생(衆生)을 지칭함이다.

43) 대각(大覺):크게 깨치신 분이니, 부처님을 가리킴이다.

44) 소양(霄壤):하늘과 땅. 전(轉)하여 천지(天地)가 현격(懸隔)한 만큼 큰 차이가

있음을 비유(譬喩)한 말. 장양호(張養浩), 「得子强也詩書以答之」에 “緬思霄壤間

實與逆旅均”이라 하다.

45) 가섭미소(迦葉微笑):가섭파안미소(迦葉破顔微笑)의 준말이니, 염화미소(拈花微

笑)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영추산 법상(法床)에 앉아 설법하기 직전,

야마천왕(夜摩天王)이 신심(信心)을 일으켜 천화일지(天花一枝)를 바쳤다. 부처

님은 이를 받아 대중들에게 높이 들어 보였다. 이때 백만(百萬)의 청법대중 중

에 아무도 이 뜻을 알지 못하여 쳐다만 보고 있을 때, 오직 두타제일(頭陀第一)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이 빙그레 웃었다[破顔微笑]. 세존(世尊)께서 가섭에게 이

르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는데, 이제 이를

너에게 전해 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최초로 불타(佛陀)의 법통(法統)을 가

섭이 전해 받은 것이다. 「진감국사대공영탑비문眞鑒國師大空靈塔碑文」 주35)

밀전가섭密傳迦葉 본서 p.87 참조.

46) 득기수(得其髓):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전(傳)해 받을 때, 피부(皮)와 살결(肉)

과 뼈(骨)를 지나 가장 깊은 골수(骨髓)까지를 얻어 받았다는 말. 달마대사(達

磨大師)가 소림굴(小林窟)에서 9년간 면벽(面壁)하고, 수제자(首弟子)를 선택

하여 전법하고 천축(天竺)으로 돌아가고자 문인들을 모아놓고 각기 터득한 바

의 경지(境地)를 술회(述懷)하라고 했다. 이때 맨 먼저 도부(道副)가, ‘不執文字

不離文字 以爲道用’ 한데, 달마왈, ‘汝得吾皮’라 하였고, 다음 총지비구니(摠持

比丘尼)가 왈, ‘我今所解 如慶喜見阿閦佛國 一見 不再見’ 하니, 왈, ‘汝得吾肉’이

라 하였으며, 이어 도육(道育)이 왈, ‘以我見處 無一法可得’이니다 한데, 왈, ‘汝

得吾骨’이라 하였고, 최후(最後)에 혜가(慧可)는 ‘出禮三拜 依位而立’이어늘 왈,

‘汝得吾髓’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12(대정장51,

p.299a23) 참조.

47) [總覽]과 [通史]에는 與. [全文]은 与. 与는 與의 略字이다.

48) [通史]와 [全文]에는 耳이나, [總覽]에는 탈락됨.

49) [總覽]은 결락이나 [通史]와 [全文]에는 直임.

이로부터 혜일(慧日)을 우연50)에서 회전(廻轉)하여 그 신광51)을 상역52)

비추게 한 분은 오직 우리 보각국존(普覺國尊)뿐이라 할 것이다. 국존의

휘는 견명(見明)이요, 자는 회연(晦然)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

꾸었다. 속성은 김씨(金氏)요, 경주(慶州) 장산53)군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

는 언필54)이니, 벼슬은 하지 않고 교사(敎師)로써만 일생을 살았으므로,55)

죽은 후에 좌복야56)직을 추증(追贈)받았고,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낙랑57)

군부인으로 봉(封)하였다.

迴慧日於虞淵, 曜神光於桑域者, 惟我國尊有焉. 國尊, 諱見

明, 字晦然, 後易名一然. 俗姓金氏, 慶州章山郡人也, 考諱彦

弼,58) 不仕以師故, 贈左僕射, 妣李氏, 封樂浪郡夫人.

50) 우연(虞淵):옛 사람들이 태양(太陽)이 빠지는 곳이라고 상상하던 장소. 해가 지

는 곳. 전하여 사양(斜陽) 또는 황혼(黃昏)이란 뜻이다. 『삼보구사三輔舊事』에

“日出暘谷 浴於咸池 至於虞淵卽暮”라 하다.

51) 신광(神光):불광(佛光)이란 뜻이니, 부처님의 광명(光明)은 신변불측(神變不測)

하므로 신광이라 한다. 「찬아미타불게贊阿彌陀佛偈」에 “神光離相不可名 故佛

名號無稱光”이라 하다.

52) 상역(桑域):상재(桑梓)와 같은 말. 곧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은 곳을 가리킴이

니, 고향(故鄕)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국존의 고국(故國)인 우리나라를 지칭

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담장 주변에 상과 재를 심어서 자손(子孫)에게 물려

주어 자신(自身)이 죽은 후, 생계(生計)의 자본(資本)이 되게 하였다. 부모(父母)

가 죽은 뒤, 자손(子孫)들이 이를 보면 부모의 유물(遺物)이란 생각으로 검소(儉

素)해질 뿐만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효심이 더욱 돈독하여진다 여겨, 전하여

경로(敬老)의 뜻으로도 쓰였으며, 후한(後漢) 이후부터는 향리(鄕里) 곧 고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객총서野客叢書』, “詩意謂桑梓人賴其用 猶不敢殘毁 寓

恭敬之意 而況父子相與 非直桑梓而已 非謂桑梓爲鄕里也 然自東漢以來 乃以桑

梓爲鄕里用矣”.

53) 장산(章山):경산(慶山)의 옛 이름. 『신증동국여지승람』권27 「경산현慶山縣」‘건

치연혁建置沿革’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 압량(押梁)이던 것을 장산(獐山)으

로 개칭(改稱)하였고, 고려 초에 이르러 장산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54) 언필(彦弼):일연(一然)의 부명(父名)이니, 다른 자료에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55) 불사이사(不仕以師):벼슬살이에는 종사하지 아니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敎師)를 천직(天職)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56) 복야(僕射):음(音)으로는 복야. 관명(官名)이니 좌우복야(左右僕射)가 있는데,

상서성의 정2품(正二品) 벼슬로 상서령(尙書令) 다음이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선발하여 이 자리에 임용하기도 했고, 항상 왕의 좌우에 있었으므로 경호실장

과 같은 소임이었으나, 당송이후(唐宋以後)에는 재상(宰相)의 직(職)으로써 천

자(天子)를 보좌하여 국정(國政)을 의논하는 주재자(主宰者)였다. 「진철대사보

월승공탑비문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文」 주4)복야僕射 [고려편1] p.19 참조.

57) 낙랑(樂浪):평양(平壤)의 옛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51 「평양부平壤

府」‘군명郡名’ 참조.

58) [通史]와 [全文]에는 弼. [總覽]의 鼎은 弼의 오자임.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태양이 방안에 들어와 그 빛이 복부(腹部)에 비

추기를 사흘 밤을 계속하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태화(泰和) 병인년59)

6월 신유일에 탄생하였다. 날 적부터 준매(俊邁)하여 의표(儀表)가 단정하

고, 풍준60)한 몸매에 입은 방구61)이며, 걸음은 우행62)이고, 살핌은 호시63)

같았다.

初母夢, 日輪入屋, 光射于腹者, 凡三夜, 因而有娠, 泰和丙寅,

六月辛酉, 誕焉. 生而俊邁, 儀表端嚴, 豊準方口, 牛行虎視.

59) 태화병인(泰和丙寅):금(金)의 장종(章宗) 연호이니, 고려 제21대 희종(熙宗) 2

년(1206).

60) 풍준(豊準):얼굴이 야위지 않고, 풍미(豐美)하며 이(耳)·목(目)·구(口)·비(鼻)

등의 균형이 잘 잡힌 표준형(標準型)이라는 뜻 또는 몸매나 체중이나 신장(身

長)이 모두 균형이 잘 잡혀 풍대(豊大)하고 표준적(標準的)이라는 말이다.

61) 방구(方口):입이 반월(半月)인 궁형(弓型)이 아니고, 방정(方正)하고 단정하다

는 말이니, 항상 입을 꼭 다물고 필요한 말 이외는 하지 않는 묵언형(默言型)이

라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에는 “方口美髮”이라

하였고, 『당서唐書』「누사덕전婁師德傳」(字는 宗仁, 시호는 貞, 『당서』권108 참조)

에는 “師德長八尺 方口博唇 深沉有度量”이라 하다.

62) 우행(牛行):걸음걸이를 마치 소와 같이 뚜벅뚜벅 둔중(鈍重)하게 걷는다는 말이

니, 여우나 토끼처럼 경망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무게 있게 걸어간다는 뜻이다.

63) 호시(虎視):호시탐탐(虎視耽耽)의 준말. 호랑이가 예리한 눈으로 사방(四方)을

살피는 뜻이다. 전하여 웅지(雄志)를 품고 주의깊게 세간을 살핀다는 뜻이다.

『후한서』「장홍臧洪」에 “今王室將危 賊臣虎視”라 하다.

어릴 적부터 세진(世塵)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나이 즉 연보64)가 9살

때 해양65) 무량사66)로 가서 취학(就學)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총명67)

함이 비길 자가 없었다. 유시(有時)에는 밤이 새도록68) 마치 말뚝처럼 위

69)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小有出塵志, 年70)甫九歲, 往依海陽無量寺, 始就學而聰警絶

倫. 有時, 危坐盡夕, 人異之.

64) 연보(年甫):나이, 연령, 연세 등의 뜻.

65) 해양(海陽):고려 성종(成宗 981~997)대, 광주(光州)를 해양으로 개칭했었다.

66) 무량사(無量寺):전라남도 광주시 무등산(無等山)에 있었던 절.

67) 총경(聰警):총명기경(聰明機警)의 준말. 총찰(聰察), 총민(聰敏), 총명(聰明)과

같은 뜻으로, 총명함이 뛰어나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는 말. 똑똑하

고 민첩하다는 뜻. 『남사南史』「강천전江蒨傳」에 “幼聰警 讀書過口便誦”이라

하다.

68) 진석(盡夕):밤을 꼬박 새우다, 철야(徹夜), 밤새도록 등의 뜻이다.

69) 위좌(危坐):정좌(正坐), 궤좌(跪坐)와 같은 뜻. 똑바로 앉음. 단정(端正)히 앉음.

위(危)는 고(高) 또는 정(正)의 뜻으로, 자세(姿勢)를 높고 바르게 하는 것이다.

70) [通史]와 [全文]에는 年. [總覽]의 家는 年의 오자임.

흥정 기묘년71)에 진전사72)의 대웅73)장로를 은사로 하여 득도(得度)한 다

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방74)으로 다니면서 참선하여 명

성이 점점 높아져서75) 당시 사람들이76) 추대하여 구산77) 중 사선78)의 수장

으로 삼았다.

興定己卯, 就陳田長老大雄, 剃度受具. 於是, 遊歷禪肆, 聲價

藉甚, 時輩, 推爲九山四選之首.

71) 흥정기묘(興定己卯):흥정은 금나라 선종(宣宗) 연호. 기묘(己卯)는 흥정 3년이

니, 고려 고종(高宗) 6년(1219).

72) 진전(陳田):강원도 양양군(지금은 속초시) 설악산(雪嶽山)에 있던 절 이름인 듯

하다.

73) 대웅(大雄):진전장로(陳田長老)의 법명(法名)이니, 다른 자료에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74) 선사(禪肆):선방(禪房) 또는 선원(禪院)이란 뜻이다.

75) 자심(藉甚):이름이나 소문이 매우 높다는 말. 덕망(德望)이 심히 높아 많은 사

람들의 입에 자자(藉藉)하다는 뜻.

76) 시배(時輩):그 당시 사람들. 그 때 일연(一然)스님의 이름을 들었거나, 존경하

던 사람들.

77) 구산(九山):신라 말 선문(禪門)의 구산.

78) 사선(四選):일반적으로는 고려시대 법계(法階)에 있어서 선종(禪宗)에는 대덕

(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의 순이고, 교종(敎宗)에서는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

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수좌(首座)→ 승통(僧統)의 순이었다. 본

비(本碑) 음기(陰記)의 문도질(門徒秩)에는 입선(入選) → 대덕(大德) → 대사(大

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

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연 당시의 법계순으로 본다면, 사선 법계를 입선(入

選)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 이

유인 즉 국존(國尊)의 비문에 의하면, 1219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두

루 제방(諸方)의 선사(禪肆)를 유력(遊歷)하고, 점점 덕망이 높아짐에 따라, 당

시 스님들이 일연을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모두 사선법계(四選法階)의 수위

(首位)로 존경하였던 것이다. 살펴 보건대 1227년(丁亥)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하니, 이 상상과가 곧 중대사의 법계이며,

그 후 1237년 여름 영천(永川) 포산(包山) 묘문암(妙門庵)에 있을 때, 삼중대사

의 법계를 받았으므로, 1227년 상상과에 합격하기 이전(以前)의 4단계(段階), 즉

사선법계는 곧 중대사 이전인 입선(入選)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대사

(大師)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해년79)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

80)에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81) 보당암82)에 주석하면서 마음에 간절히 선

관(禪觀)을 닦았다.

丁亥冬, 赴選佛場, 登上上科. 厥後, 寄錫于包山寶幢庵, 心存

禪觀.

79) 정해(丁亥):고려 고종 14년(1227).

80) 상상과(上上科):법계 고시(考試) 수험생 중에 최상(最上)의 점수로 합격하였다

는 말이다.

81) 포산(包山):포산(苞山)이라고도 한다. 일명(一名) 비슬산(琵瑟山). 경상북도(慶

尙北道) 달성군(達城郡)과 청도군(淸道郡) 사이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

승람』권27「현풍현玄風縣」;『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상권「보당암寶幢庵」

등 참조.

82) 보당암(寶幢庵):경상북도 달성군(玄風) 포산에 있었던 절. 신라 때 관기(觀機)

와 도성(道成)이 포산에 은거(隱居)하여 수도(修道)하였다. 『한국사찰전서』상권

「현풍도성사적玄風道成寺蹟」 참조.

병신년 가을83)에 병란84)이 있어 스님께서 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곧 문

수(文殊)의 오자주85)를 염(念)하면서 감응(感應)을 기약하였더니, 홀연히

벽간(壁間)으로부터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이르시기를 “무주난야(無

住蘭若)에 주석하라”고86) 계시하였다.

丙申秋, 有兵亂, 師欲避地, 因念文殊五字87)呪, 以期感應, 忽

於壁間, 文殊現身曰, “無住居.”88)

83) 병신추(丙申秋):고려 고종 23년(1236)이니, 국보 [고려팔만대장경판]을 조조

(彫造)하기 시작하던 해이다.

84) 병란(兵亂):고종 18년인 1231년 8월에 몽고(蒙古)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

이 내침(來侵)하여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귀주(龜州)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1232년 6월에는 마침내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였고, 이어 1235년 7월에는

몽고 원수인 당고(唐古)의 선봉(先鋒)으로 안변(安邊), 용강(龍岡), 함종(咸從),

삼등(三登) 등지를 함락, 1236년에는 몽고병(蒙古兵)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 서

북계(西北界)의 제성(諸城)에 분둔(分屯)하다가 황주(黃州), 신주(信州), 안주(安

州)를 거쳐 남하(南下)하여 남경(南京), 평택(平澤), 아주(牙州) 등지에 주둔(駐

屯)한 난(亂)을 지칭함이다.

85)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금강정경유가문수사리보살법金剛頂經瑜伽文殊師利

菩薩法」에 ‘아라파사나(阿囉跛捨那)’ 오자(五字)로 구성된 밀주. 오자문수(五字

文殊) 또는 오계문수(五髻文殊)라고도 한다. 오자주(五字呪)는 다음과 같다. 아

(阿: a)란 깨달음을 추구(追求)한다는 뜻. 라(囉: ra)란 개개인인(個個人

人)이 모두 평등(平等)하게 구유(具有)하고 있다는 뜻. 파(跛: pa)란 진실여

여(眞實如如)한 불성(佛性)을 말함. 사(捨: ca)란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법

(法)을 수행한다는 뜻. 나(那: na)란 만법(萬法)은 모두 연기(緣起)에 의하여

성립(成立)된다는 뜻이다. 불공(不空) 번역,『만수실리동자보살오자유가법曼殊

室利童子菩薩五字瑜伽法』(대정장20, p.723b) 참조.

86) 무주거(無住居):포산(包山) 묘문암(妙門庵) 북쪽에 있는 무주난야(無住蘭若)에

서 주석하라고 계시하였다는 뜻이다. 무주암(無住庵)은 경상북도 현풍(달성군)

포산(琵瑟山)에 있었던 암자이다.

87) [總覽] [全文]에는 字이나, [通史]에는 탈락됨.

88) [通史]와 [總覽]에는 居. [全文]의 北은 居의 오자임.

그 다음해 여름89) 다시 이 포산(包山) 묘문암90)에 거주(居住)하였으니,

암자 북쪽에 난야(蘭若)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무주(無住)이므로, 곧 전

일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기별(記莂)함을 깨닫게 되었다.91) 이 암자(庵子)

에 주석하면서 항상 생계(生界)가 불감(不減)하고, 불계(佛界)가 불증92)

라는 부처님 말씀을 참구(參究)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활연대오(豁然大

悟)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금일에야 비로소 삼계가 환몽(幻夢)임을

알고 보니, 진대지(盡大地)가 섬호(纖豪)만치도 장애(障礙)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明年夏, 復居是山妙門庵, 庵之北, 有蘭若, 曰無住, 師乃悟前

記, 住是庵時, 常以生界不減, 佛界不增之語, 叅究之, 忽93)

一日, 豁然有悟, 謂人曰, “吾今日, 乃知三界如幻夢, 見大94)地無

纖毫95)礙.”

89) 명년하(明年夏):고려 고종 24년(1237).

90) 묘문암(妙門庵):경상북도 현풍(달성군) 포산(琵瑟山)에 있었던 절이다.

91) 전기(前記):1236년 가을 보당암(寶幢庵)에 있을 때, 문수의 오자주(五字呪)를

외우면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이 나타나 계시(啓示:記莂)하였던 감응(感應)

을 가리킴.

92) 생계불감불계불증(生界不減佛界不增):생불일여(生佛一如) 또는 생불불이(生佛

不二)라고도 한다. 생이란 미혹한 중생(衆生)이고, 불이란 깨달은 불타(佛陀)이

며, 일여(一如)란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서,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이 동일(同

一)하며, 혼미하고 깨달음이 둘이 아니란 말이다. 곧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뜻이다. 중생(衆生)이 일여하므로 법계(法界)

의 중생이 모두 성불(成佛)하더라도, 중생 세계가 감소(減少)되지 않을 뿐아니

라 불세계(佛世界)도 또한 증대(增大)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생불이계(生

佛二界)가 함께 무량무변(無量無邊)하기 때문이다. 중생세계가 무변하므로 중

생이 성불하여도 중생의 수가 줄지 아니하고, 따라서 불세계가 광대무변(廣大

無邊)한 탓으로 중생이 깨달아 불세계에 들어가더라도 불세계가 증대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예컨대 『보적경寶積經』에 “文殊舍利 答善住意天子 天子當知 一切

諸法 悉無住處 而言住者 是謂如來 爲諸衆生 作如是說 所以者何 如佛所說 如來

住彼如如法中 一切衆生 亦復如是 住於如如 初不移動 衆生如卽如來如 如來如卽

衆生如 衆生如來無二無別”이라 하였고, (대정장11 p.589b~c) 『부증불감경不增不

減經』에는 “……是故 舍利弗 不離衆生界有法身 衆生界卽法身 法身卽衆生界 舍

利弗 此二法者 義一名異”라 하였으며,(대정장16 p.467b) 『화엄경華嚴經』권10「야

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서는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心如工畵師 畵

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대정장9, p.465c)이라

한 등의 뜻이다.

93) [總覽] [全文]에는 忽이나, [通史]에는 탈락됨.

94) [通史]와 [總覽]에는 大.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95) [通史]와 [總覽]에는 毫. [全文]의 豪는 毫의 오자임.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비수96)받았으며, 병오년97)에는 이

어 선사(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기유년98)에 정상국(鄭相國)인 안99)이 남

해(南海)에 있는 사제100)를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101) 정림사(定林社)라 이

름하고, 스님을 청(請)하여 주지로 추대하였으며, 기미년102)에 이르러서는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是年批授三重大師, 丙午103)加禪師. 己酉鄭相國晏, 捨南海私

第, 爲社, 曰定林, 請師主之, 己未加大104)禪師.

96) 비수(批授):비준(批準)·비답(批答)·비령(批令) 등과 같은 뜻. 비는 왕에게 표주

(表奏)한 건의서(建議書)에 대하여 왕이 그 표주의 말미(末尾)에 기록한 칙답(勅

答)을 지칭한 것이다. 곧 임금의 허가를 받아 삼중대사의 법계를 주었다는 말.

97) 병오(丙午):고려 고종 33년(1246).

98) 기유(己酉):고려 고종 36년(1249).

99) 정상국안(鄭相國晏):당시 상국(相國;宰相)이었던 정안(鄭晏:?~1251)이니, 문

신. 초명(初名)은 분(奮). 자는 화경(和卿). 본관은 하동(河東). 숙첨(叔瞻)의 아

들. 최우(崔瑀)의 생질. 하동 출신. 음양(陰陽)·산술(算術)·의약(醫藥)·음율(音

律) 등에 정통했으며, 진양수령(晋陽首領), 국자좨주(國子祭酒), 동지공거(同知

貢擧) 등을 역임했다. 최우의 전권(專權)이 날로 심해지자 화가 두려워 남해(南

海)로 은퇴, 불교를 독신하여 사재(私財)를 희사, 당시 간행(刊行)되고 있던 대장

경(大藏經)의 일부(一部)를 맡아 간행하기도 하였다.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은

뒤, 술자리에서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비방함으로 인하여 백령도(白

翎島)로 유배(流配)되어 살해당했다.

100) 사제(私第):사가(私家) 또는 사택(私宅).

101) 위사(爲社):사(社)는 사(寺)와 같은 뜻이니, 정안이 사가를 희사하여 절로 만들

고 정림사(定林社)라 이름하였다.

102) 기미(己未):고려 고종 46년(1259).

103) [總覽] [全文]에는 午. [通史]의 辰은 午의 오자임.

104) [通史]와 [總覽]에는 大.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중통 신유년105)에 왕명을 받들어 개경(開京)으로 가서 선월사106)에 주석

하면서 개당107)하고 목우화상108) 지눌(知訥)의 법통을 요사109)하였다.

中統辛酉, 承詔赴京, 住禪月社開堂, 遙110)嗣牧牛和尙.

105) 중통신유(中統辛酉):중통은 원의 세조 연호. 신유(辛酉)는 세조 2년이며, 고려

원종(元宗) 2년(1261).

106) 선월사(禪月社):『한국사찰전서』하권에도 이 비문을 그대로 이재(移載)하였을

뿐, 다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107) 개당(開堂):처음으로 주지나 조실(祖室)이 되어, 그 절에 진산(晉山)하여 처음

으로 여는 법회(法會).

108) 목우화상(牧牛和尙):1158~1210. 보조국사 지눌을 지칭함.

109) 요사(遙嗣):요사란 동시대(同時代)에 선후배(先後輩)가 되어 스승과 제자가 마

주 대하여 거양(擧揚)하고 면전수수(面前授受)함이 아니고, 자기 당시에는 법

(法)을 받을 만한 명안종사(明眼宗師)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멀리 소급하여

모(某)스님을 법사(法師)로 자정(自定)하고 법을 이어받는 것이니, 원사(遠嗣)라

고도 한다. 중통신유(中統辛酉)는 1261년이고, 목우화상(牧牛和尙) 지눌은 1210

년에 입적하였으니, 입적 후 51년이 지났으므로 요사라 한다.

110) [全文]에는 遙. [通史] [總覽]의 逄는 遙의 오자임

지원 원년111) 가을에 이르러 여러 차례 남환(南還)을 요청받고, 오어사112)

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인홍사113) 주지 만회114)가 일연

에게 주석(主席)을 넘겨 주었는데, 학려(學侶)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至至元元115)年秋, 累請南還, 寓居116)吾魚社.117) 未幾, 仁弘社

主, 萬恢, 讓師主席, 學侶118)雲臻.

111) 지원원년(至元元年):지원은 원나라 세조의 연호이고, 지원원년은 고려 원종 5

년(1264).

112) 오어사(吾魚社):오어사(吾魚寺)이니,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면(烏川面) 항사동

(恒沙洞) 운제산(雲梯山)에 있는 절이니, 신라 때 혜공(惠空)이 창건하였다. 본비

문 주489)오어사吾魚社 p.617 참조.

113) 인홍사(仁弘社):인흥사(仁興寺)의 전신(前身)이니, 경상북도 성주군 비슬산에

있었던 절. 본래는 인홍사(仁弘寺)였는데, 뒤에 인흥사(仁興寺)로 바뀌었다. 이

절은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었던 곳이다. 최근에 발견된 인흥사간(仁興寺

刊) 『삼국유사』「역대연표歷代年表」에 따르면 1261년(원종2) 원종의 명(命)으로

일연이 강화도(江華島) 선월사(禪月寺)로 갔다가, 그 후 오어사를 거쳐 비슬산

(琵瑟山) 인홍사주지(仁弘寺住持)로 있을 때 집필(執筆)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의 행정구역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730번지 일대로서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세거지(世居地)로 건물(建物) 모두가 문화재(文化財)로 지정

되어 있는데, 본체는 수봉정사(壽峯精舍)란 편액이 붙어 있고, 전면(前面) 수천

평(數千坪)의 밭은 모두 대추나무등 과원(菓園)으로 꽉 차 있으며, 한 복판에는

파손(破損)된 자그마한 석탑(石塔)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28 「성주목星州牧」‘불우’에 의하면, “仁興寺 在琵瑟山北 高麗恭愍王題額 李崇仁

詩에 ‘興仁寺在苞山麓 我昔曾遊伴雪螢 檀越有時來禮佛 闍梨淸晝坐談經 立庭一

塔亭亭白 夾道長松箇箇靑 最憶黃金天上筆 祗今光熖射華星’”이라 하다.

114) 만회(萬恢):인홍사의 주지였으나, 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115) [全文]에는 元字 한 글자가 탈락됨.

116) [全文]에는 居字가 탈락됨.

117) [總覽] [全文]에는 社이고, [通史]에는 寺이니, 社가 옳으나 뜻으로는 相通한다.

118) [總覽] [全文]에는 侶이고, [通史]에는 儷이니, 뜻으로는 相通하나 侶가 옳다.

무진년119) 여름 왕명에 의하여 이름이 높은 선사와 강사 등 1백 명을 초

청하여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120)를 운해사121)에 개설하고,

스님을 청하여 주맹122)으로 모시고, 낮에는 금문123)을 독송하고, 밤에는 종

124)를 담론(談論)하였다.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스님께서 모두

해박하게 부석(剖釋)하였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연하여 핵심적인

뜻이 귀에 속속 들어와서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戊辰夏, 有朝旨, 集禪敎名德一百員, 設大藏落成會於雲海寺,

請師125)主盟, 晝讀金文, 夜談宗趣. 諸家所疑, 師皆剖釋如流,

精義入神, 故無不敬服.

119) 무진(戊辰):고려 원종 9년(1268).

120)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고려대장경판(再彫版)은 1236년 각판(刻板)을 시작하

여 1251년 9월에 조조불사(彫造佛事)를 마쳤으나, 당시 시국상황이 복잡하여 곧

바로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지 못하고, 17년이나 지난 후 1268년에 이르러 비

로소 ‘대장경판 조조불사 회향법회(大藏經板彫造佛事回向法會)’를 가졌던 것이다.

121) 운해사(雲海寺):다른 자료에서도 사적(寺蹟)이 보이지 않으나, 선교(禪敎)의 명

덕(名德) 일백명(一百名)을 한 곳에 초청하여 대장경판 조조불사의 회향법회를

가졌으니, 사찰의 규모도 크려니와 그 위치(位置)도 왕성(王城)과 멀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개성 부근에 있었던 절로 추정해 본다.

122) 주맹(主盟):맹주(盟主)라고도 하는데, 법회를 주도하는 법주(法主) 또는 증명법

사(證明法師)이다.

123) 금문(金文):①금구소설문(金口所說文)이니 불경(佛經) ②금니(金泥)로 쓴 문자

(文字)이니 왕의 조서(詔書) ③금석문(金石文)이니 금석(金石)에 새겨진 문자(文

字) 등이다. 여기서는 자마금신(紫磨金身)인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문자화

(文字化)한 것이니, 경전을 지칭한다. 주독금문(晝讀金文)이란 주간에는 독경 즉

경(經)을 강설하거나 읽는다는 말이다. 교종(敎宗)을 선양함.

124) 종취(宗趣):①경전(經典) 속에 담고 있는 진리(眞理) ②선종(禪宗)의 종취(宗

趣)인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즉 내면세계(內面世界)인 진여(眞

如)이다. 선지(禪旨)를 논함.

125) [總覽]에는 師字가 탈락됨.

스님께서 인홍사(仁弘社)에 주석한 지 11년 만에 이 절이 창건한 지 이미

오래되어 전당(殿堂)이 퇴락할 뿐아니라, 또 추애126) 즉 지반이 내려 앉고,

너무 비좁아서 중수하거나 신건하여127) 회곽128)하게 확장하고는 조정(朝

廷)에 주청하여 인홍사를 고쳐 인흥사(仁興寺)라 이름하고, 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을 하사받았다.129) 또 포산(包山)의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130)

를 중수하여 불일사131)로 개칭하였다.

師住仁弘十一年, 是社創搆旣遠, 殿宇皆頹圮, 又且湫隘, 師並

重新, 恢廓之, 仍奏于朝, 改號仁興, 宸書題額以賜之. 又於包

山東麓, 重葺涌泉寺, 爲佛日社.

126) 추애(湫隘):건물의 지반(地盤)이 가라앉고, 또한 습기(濕氣)가 많은 늪 지대(地

帶)라는 뜻. 추(湫)는 하(下), 애(隘)는 소(小)의 뜻.

127) 중신(重新):중건(重建)과 신건(新建)이라는 뜻이다.

128) 회곽(恢廓):건물을 확장하여 우뚝하다는 뜻.

129) 신서제액이사지(宸書題額以賜之):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인 인흥사(仁興寺)라

써서 하사(下賜)하였다는 말. 『신증동국여지승람』권28 「성주목」‘불우’에는 공민

왕(恭愍王)이 제액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연대상(年代上)으로 맞지 않으므

로 충렬왕(忠烈王)의 오식(誤植)으로 보인다.

130) 용천사(涌泉寺):『신증동국여지승람』권26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불우’에 “용

천사는 재비슬산(在琵瑟山)”이라 하였으니, 아래 각주의 불일사 전신이다. 涌과

湧은 같은 字이다.

131) 불일사(佛日社):포산 동쪽 기슭에 있던 퇴락한 용천사(湧泉寺 또는 涌泉寺)를

중수한 다음, 불일사로 개칭(改稱)하였는데, 경상북도 밀양군 비슬산에 있었던

절이다.

충렬왕이 즉조(卽祚)한 지 4년132) 정축에는 임금이 운문사133) 주지(住持)

로 추대하여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께

서는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져 다음과 같은 찬시(讚詩)를 지

어 보냈다.

上, 卽祚四年丁丑, 詔住雲門寺, 大闡玄風. 上, 日深傾注, 以

詩寄云.

132) 상즉조사년(上卽祚四年):상은 고려 제25대 충렬왕을 지칭함이고, 즉조사년은

충렬왕 즉위 4년이니, 1277년이다.

133) 운문사(雲門寺):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절이다.

밀전(密傳)함에 어찌 구의134)를 필요로 하랴?

금지135)서 서로 만남 기이할 뿐일세.

연공136)도 왕청(王請) 받아 궐내로 갔거늘

스님은 어찌 백운137)만 그리십니까?

密傳何必更摳衣,

金地逢招138)亦是奇.

欲乞璉公邀闕下,

師何長戀白雲枝.

135) 금지(金地):사원을 지칭함이니, 급고독 장자(給孤獨長子)가 기원정사(祇洹精

捨)를 건립코자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소유인 임원(林園)을 구입할 때, 금을 땅

에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덮었던 데에서 온 말이다.

136) 연공(璉公):1009~1090. 송나라 때 운문종(雲門宗) 스님. 이름은 회련(懷璉). 자

는 기지(器之). 호는 대각선사(大覺禪師). 속성은 진씨(陳氏). 어머니가 사주(泗

州)의 승가상(僧伽像:觀音菩薩)에 기도하여 출생하였으므로 어릴 때의 이름으

로 사주라고 했다. 명주(明州:浙江省) 육왕산(育王山)에 주석하였으며, 장주(漳

州) 출신. 늑담회징(泐潭懷澄)의 제자. 황우(皇祐) 2년(1050) 1월 인종의 부름을

받아 경사(京師)의 시방정인선원(十方淨因禪院)에 주석하던 중, 그 해 2월 19일

인종이 화성전(化成殿)으로 초청하여 불교의 대의(大義)를 듣고 크게 기뻐하

여 대각선사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속전등록續傳燈錄』권5(대정장51, p.494b17)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권18「대각연선사장大覺璉禪師狀」(卍속장137, p.514a),

및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권27「대각회련선사大覺懷璉禪師」(卍속장132,

p.646c) 등 참조.

137) 백운지(白雲枝):흰 구름이 깊은 산중의 나뭇가지에 덮여 있는 모양.

138) [總覽] [全文]에는 招. [通史]의 抬는 招의 오자임.

신사년139) 여름 왕이 동정140)으로 인하여 동도141)로 행차하여 스님께 부

142)하기를 청하였으니, 주중(駐中)에서 법문을 듣고, 크게 존경심(尊敬

心)을 일으켜 불일사에서 결사하게 된 그 결사문143)에 제압144)하여 불일사

에 보관토록 하였다.

辛巳夏, 因東征, 駕幸東都, 詔師赴行在, 及至145)䟽146)請陞座,

倍生崇敬, 因取師佛日結社文, 題押入社.

139) 신사(辛巳):고려 충렬왕 7년(1281).

140) 동정(東征):1277년 12월 원나라에서 홍다구(洪茶丘)를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

로 하고, 1279년에는 원이 고려에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을 만들도록 요청

하였으며, 1280년 8월 왕이 원으로 가서 정일본방략(征日本方略)을 조진(條陳)

하였고, 마침내 그 해 11월에는 조인규(趙仁規) 등을 원에 보내어 동정준비(東征

準備)의 완료(完了)를 보고했다. 1281년(辛巳) 3월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 등

이 합포(合浦;昌原)로 향발(向發)하였고, 따라서 4월에는 충렬왕도 합포로 행행

(幸行)하였다. 5월에는 흔도(忻都)·홍다구 및 김방경 등이 해군(舟師)을 거느리

고 일본을 정벌(征伐)하다가 8월에 동정군(東征軍)들은 패배하고 합포로 귀환

하였는데, 당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여명(十萬餘名)이나 되었다.

141) 동도(東都):고려시대 경주(慶州)를 지칭했던 말이다.

142) 부행재(赴行在):동행(同行)이란 뜻.

143)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일연이 불일사에서 결사할 때의 「결사취지문結社趣

旨文」이다.

144) 제압(題押):왕이 ‘불일결사’란 제액을 쓰고 압인(押印:署名 捺印)하였다는 말

이다.

145) [總覽]은 결락이나 [通史]와 [全文]에는 至임.

146) [通史]에는 路, [全文]에는 䟽, [總覽]에는 탈락됨.

다음해 가을147) 근시 장작윤148) 김군149)을 보내서 조서(詔書)를 보내고150)

궐하(闕下)에서 맞이하여 대전(大殿)에서 선법문(禪法門)을 청해 들었으

니, 용안(龍顔)에 기꺼움이 가득하였다. 이어 왕명으로 유사151)에게 시켜

광명사152)내에 원관153)을 짓게 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입원(入院)케 한 날

밤중에, 어떤 사람이 방장실(方丈室) 밖에154) 서서 이르기를 “저 왔습니다.”

라고 세 번이나 하므로, 문을 열고155) 살펴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156)

울 12월에는 충렬왕이 수레를 타고 친히 스님을 방문하여 법문을 들었

다.157)

明年秋, 遣近侍將作尹金頵, 賚詔迎至闕下, 請於大殿說158)

禪,159) 喜溢龍顔. 勅有司舘于廣明寺, 入院日夜半, 有人, 立方

丈外曰, “善來者三”, 視之無有也, 冬十二月, 乘輿親訪,160) 咨

問法要.

147) 명년추(明年秋):1282년 가을.

148) 근시장(近侍將):궁중에서 왕의 곁에서 시위(侍衛)하는 경호원.

149) 김군(金頵):김군은 이 때는 장작윤이었으나 입비(立碑) 당시에는 상장군(上將

軍)이었다. 김군은 1281년(충렬왕 7)에 안동부사직(安東府使職)에 있었다. 『고려

사』권29「세가世家」29 등 참조.

150) 뇌조(賚詔):임금이 조서(詔書)를 주어 스님을 영접하여 대궐(大闕)로 모셨다는

말. 賚는 줄 뢰字. 사야(賜也).

151) 유사(有司):해당 관청의 담당관. 관리(官吏). 말단 공무원.

152) 광명사(廣明寺):경기도 개성 연경궁(延慶宮) 북쪽 송악산(松嶽山) 기슭에 있었

던 절로서, 고려 태조가 구택(舊宅)을 희사(喜捨)하여 절을 만든 것이다. 예컨대

원효(元曉)는 본가(本家)를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열었고, 자장(慈藏)의

사가위원녕사(捨家爲元寧寺), 명랑(明朗)의 사가위금광사(捨家爲金光寺), 정안

(鄭晏)의 사가위정림사(捨家爲定林寺) 등 모두 사가(捨家)를 희사하여 절이 된

경우다.

153) 관(舘):별관(別館)이라는 뜻이니, 광명사 내에 별관을 마련하여 스님을 모셨다

는 말이다.

154) 방장외(方丈外):방장실(方丈室;祖室 또는 拈花室) 문밖에라는 뜻이다.

155) 선래자삼(善來者三):‘왔습니다’라고 세 번 아뢰는 말. ①부처님 당시에는 출가

(出家)하여 스님이 되고자 하는 행자(行者)가 정사(精舍)로 찾아오면, 부처님께

서나 또는 스님이 ‘잘 왔느냐. 비구여!善來比丘’ 하고, 곧 삭발하여 가사를 입혀

주어 스님이 되게 하였으니, 이를 ‘선래비구계법’이라 한다. ②스승이 그의 제자

의 환영을 일컫는 말. ③객(客)스님이 문전(門前)에 와서 ‘객 문안(問安) 드립니

다’라면서 세 번 거듭 아뢴다는 말이니, 여기서는 ③의 뜻이다.

156) 시지무유야(視之無有也):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는 말

이다.

157) 승여친방(乘輿親訪):충렬왕이 수레를 타고 친히 스님을 방문하여 법문을 들었

다는 말이다.

158) [總覽] [全文]에는 說이나, [通史]에는 탈락됨

159) [總覽] [全文]에는 禪이나, [通史]에는 탈락됨

160) [總覽] [全文]에는 訪. [通史]의 望은 訪의 오자임.

다음해 봄161) 임금께서 군신들에게 이르기를162) “나의 선왕들은 모두

석문(釋門) 중에 덕이 높은 스님은 왕사(王師)로 모시고, 또 더 큰 스님은

국사(國師)로 추대하였거늘, 부덕만이163) 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

찌 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운문화상164)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모

든 국민이 함께 숭앙(崇仰)하거늘, 어찌 과인이 스님의 자택(慈澤)을 크게

입었음이랴! 마땅히 모든 국민들과 함께 존숭하리라.” 하였다.

明年春, 上謂羣臣曰, “我先王, 皆得釋門德大者, 爲王師, 德

又大者, 爲國師, 在否德, 獨無可乎, 今雲門和尙, 道尊德盛,

人所共仰, 豈宜寡人, 獨蒙慈澤, 當与一國共之.”

161) 명년춘(明年春):충렬왕 9년(1283) 봄.

162) 상위군신(上謂羣臣):상은 고려 제25대 충렬왕을 지칭한다.

163) 재부덕(在否德):부덕은 과인(寡人) 또는 우(愚)와 같은 뜻이니, 왕이 자신을 겸

칭(謙稱)하는 말이다. 곧 부덕 즉 ‘나의 입장에 있어서만(나만이) 그렇게 함이 없

다면 가(可)하다 할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164) 운문화상(雲門和尙):일연스님을 지칭하는 말이니, 충렬왕 4년(1278) 왕명(王

命)으로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본비문 중 ‘상

즉조사년 조주운문사上卽祚四年詔住雲門寺’ 참고.

그리하여 우승지165)인 염승익166)을 보내서 윤지167)를 받들어 청하여 합

168)존사의 예를 행하려 하였으나, 스님은 표장(表狀)을 올려 굳게 사양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사신을 보내서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간청하여 마

침내 허락을 받고, 상장군169) 나유170) 등을 보내어 책봉하여 국존171)으로

삼고, 호를 원경충조172)라 하였다.

於是, 遣右承旨廉承益, 奉綸旨, 請行闔國尊師之禮, 師, 上表

固讓, 上復遣使, 牢請至三, 仍命上將軍羅裕等, 冊爲國尊, 號

圓徑冲照, 冊訖.

165) 우승지(右承旨):밀직사(密直司)에 사(使), 부사(副使), 지신사(知申事) 그리고

좌승지(左承旨)와 우승지를 두었다. 밀직사는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166) 염승익(廉承益):?~1302. 고려 문신. 초명은 유직(惟直). 본관은 서원(瑞原). 시

호는 충정(忠靖). 악질(惡疾)을 불공(佛供)으로 고친 후부터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祈禱)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의 충

신이 되었다. 1278년 박항(朴恒) 등과 함께 필도치(必闍赤)가 되었고, 1281년 승

지률학조교(承旨律學助敎)로서 권세를 부렸다. 큰 저택을 지어 거기에 대장사

경소(大藏寫經所)로 삼았다. 『고려사』권29, 30, 31, 32, 33, 104, 105, 106, 107, 123,

130 등 참조.

167) 윤지(綸旨):왕의 명령. 조칙(詔勅).

168) 합국(闔國):거국(擧國)·전국(全國)과 같은 뜻이니, 온 나라 또는 온 국민이라는

말. 闔은 모두 합字 또는 하늘문 합字이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합이라 하고, 죽

위(竹葦)로 제작(製作)한 문을 선(扇)이라 한다. 『예기』「월령月令」에 “用木闔, 用

竹葦曰扇”이라 하다. “行闔國尊師之禮”란 온 국민이 함께 뜻을 모아 일연스님을

국존(國尊)으로 모시는 예식(禮式)을 행한다는 말이다.

169) 상장군(上將軍):신라 때는 대장군(大將軍)의 다음이며, 하장군(下將軍)의 위였

다. 고려 때의 무관직. 정3품으로 각 군영(軍營)의 으뜸가는 벼슬이며, 이군(二

軍)·육위(六衛)에 1명씩 두었다. 공민왕(1351~1374) 때 상호군(上護軍)으로 개

칭하였다.

170) 나유(羅裕):?~1292. 고려 충렬왕 때의 무장(武將). 나주(羅州) 출신. 득황(得璜)

의 아들. 원수(元帥) 김방경(1212~1300)을 따라 삼별초(三別抄:夜別抄·左別抄

右別抄)를 진도(珍島)에서 진압하여 공(功)을 세웠다. 김방경이 탐라(耽羅)를 정

벌할 때 대장군으로 종군(從軍), 원나라 장군 홀돈(忽敦)을 따라 일본을 치고 돌

아와 응양대호군(鷹揚大護軍)이 된 후, 합포(合浦)에 주둔하였다가 예(禮)에 밝

다 하여 1287년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0년에 합단(哈丹;

元나라의 叛賊)이 동북 변경(邊境)을 침범하자 여러 번 이겨서 지밀직사사(知密

直司事)에 오르고 원나라로부터 회원대장군직(懷遠大將軍職)을 받았다. 1292년

6월에 죽었는데, 전기는 『고려사』권104「列傳」17에 실려 있다.

171) 국존(國尊):합국존사(闔國尊師)의 준말. 국사(國師)와 같은 격이나, 당시 원나

라에서도 국사라고 하는 칭호를 피하여 국존이라 하게 되었다.

172) 원경충조(圓徑冲照):이는 일연의 국존호(國尊號)인데, 경자(徑字)가 『삼국유

사』권1 첫머리에는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冲照大禪師一然 撰”이

라 하여, 원경(圓鏡) 즉 경(徑)자 아닌 경(鏡) 자를 쓰고 있다. 이는 가차음(假借

音)으로서 자의(字義)는 다르나, 음동(音同)이므로 통용(通用)한 것이다. 예컨대

「고달원원종대사비高達院元宗大師碑」에 광종(光宗)이 하사한 탑명(塔名) ‘혜진

惠眞’을 ‘혜진慧眞’으로, 또 『고려사』「지리지」에도 신라의 ‘양주良州’를 ‘양주梁

州’로 기록한 등이다.

4월173) 신묘일에 대내174)로 맞이하고, 왕이 몸소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를 행한 다음, 국사를 고쳐 국존(國尊)이라 하게 된 것은,

대조(大朝:元)의 제도인 국사란 칭호를 피하기 위해서이다.175) 스님은 평

소에 경연176)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노모(老母)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구산177)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비는 그 사의(辭意)가 심히 간절하여, 임금

께서 거듭 그 뜻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윤허하시고, 근시178)

좌랑179) 황수명180)에 명해서 귀산(歸山)을 호행(護行)하여 영친181)토록 하

였으니, 조야(朝野)가 모두 출가자(出家者)로써 희유(希有)한 효심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다음해에182) 노모께서 96세로 별세하였다.

四月辛卯, 迎入大內, 躬率百僚, 行摳衣禮, 改國師爲國尊者,

爲避大朝國師之號也. 師, 素不樂京輦, 又以母老, 乞還舊山,

辭意甚切, 上重違其志, 而允之, 命近侍佐郞, 黃守命, 護行,

下山寧親, 朝野嘆其希有. 明年母卒, 年九十六.

173) 사월(四月):1283년 4월이다.

174) 대내(大內):대궐(大闕) 내(內)이니, 궁중(宮中)이라는 뜻이다.

175) 위피대조국사지호야(爲避大朝國師之號也):충렬왕의 본뜻은 국사(國師)로 책봉

하려 하였으나, 국존(國尊)으로 칭하게 된 것은, 당시 원나라에서 사용한 국사란

칭호를 피(避)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상현은 「인각사보각국사비

음기 재고」(『韓國學報』62, 1991)의 주1)에서 “원의 간섭으로 인해 국사를 국존으

로 칭하게 되었다”라 하였고, 갈성말치(葛城末治)의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에

서는 국사를 고쳐 국존으로 한 것은, 원의 국사호칭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다.

176) 경연(京輦):경사(京師)와 같은 말. ①경은 대(大), 사는 중(衆). 곧 대중(大衆)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궁성(宮城)이 있는 곳이다. ②경은 다(多),

련(輦)은 연곡(輦轂)의 뜻이니, 사방(四方)으로부터 많은 수레가 폭주하여 모여

든다는 뜻이다.

177) 구산(舊山):옛날에 주석하던 곳으로, 노모(老母)가 있는 포산 불일사(雲門寺 부

근에 위치)를 지칭함.

178) 근시(近侍):①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 승지(承旨)·사관(史官). ②근시위(近

侍衛)의 준말이니, 화아지(火兒赤)의 고친 말인데, 홀지(忽只) 또는 홀치(忽赤)

라고도 함. 고제(古制) 위사(衛士)를 일컫는 몽고(蒙古) 말. 고려 충렬왕이 태자

로서 원나라에 가 있을 때, 뚜루화[禿魯花]가 되었던 사람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그 후 충렬왕이 즉위하여 번(番)을 짜서 숙위(宿衛)케 하였다.

179) 좌랑(佐郞):고려 육부(六部)를 충렬왕 1년(1275)에 고친 사사(四司;典理司·軍

簿司·版圖司·典法司), 공민왕 11년(1362)에 고친 육사(六司;典理司·軍簿司·版

圖司·典法司·禮儀司·典工司), 공양왕 1년(1389)에 고친 육조(六曹)의 정5품 벼

슬이다.

180) 황수명(黃守命):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181) 영친(寧親):귀성(歸省)과 같은 말. 곧 부모(父母)와 멀리 떨어진 객지(客地)에

있는 자식(子息)이 귀향(歸鄕)하여 부모를 찾아 뵙고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보

여 부모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린다는 뜻이다. 『법언法言』「효지서孝

至序」에 “孝莫大於寧親”이라 하다.

182) 명년(明年):고려 제25대 충렬왕 10년(1284)이니, 일연이 입적하기 5년전에 해

당한다.

그 해에 바로 조정에서는 인각사로써 스님의 하안지지183)로 삼고, 근시

김용검184)에게 명하여 절을 수즙185)케 하고, 또 토지 백여경186)을 헌납하여

상주187)를 갖추도록 하였다. 스님께서 이 절에서 구산문(九山門)의 도회

(都會)를 개설하니, 총림의 성황(盛況)이 근고(近古)에 비길데 없었다.

是年朝廷, 以麟角寺, 爲下安之地,188) 勅近侍金龍劒,189) 修葺

之, 又納土田百餘頃, 以賁常住. 師入麟角, 再闢九山門都會,

叢林之盛, 近古未曾有也.

183) 하안지지(下安之地):임종지지(臨終之地)와 같은 말로서, 말년(末年) 조용한 곳

에 걸망과 석장(錫杖)을 내려놓고 편안히 지내다가 입적할 곳으로 삼겠다는 뜻

이다.

184) 김용검(金龍劒):고려의 낭장(郎將). 1291년 합단의 입구(入寇)로 병화에 지친

백성의 원성이 심할 때, 경상·전라·충청도 소복별감(蘇復別監)이 되어 관리의

선악(善惡)을 안문(按問)했다. 『고려사』권30 참조.

185) 수즙(修葺):인각사를 중수케 하였다는 말.

186) 경(頃):토지(土地)의 면적을 측량하는 단위(單位). 결(結)과 같은 면적(面積). 사

마척법(司馬尺法)에 따르면 육척(尺)이 일보(步), 백보가 일무(畝), 백무가 일경

(頃;結)이라 하였고, 주대(周代)에는 오궁(弓)이 일결, 사주(肘)가 일궁(弓), 일

궁팔촌(一弓八寸)이 일주(一肘)라 하였는데, 현재에는 팔척을 일궁이라 한다.

『지도론智度論』에는 이척이 일주, 사주가 일척, 삼백척이 일리(里)라 하였다.

「왕형공시王荊公詩」에 “와점관오궁(臥占寬五弓)”이라 하였으니, 오궁은 사방

(四方) 약(約) 오, 육척 정도인 듯하다. 그러나 일본(日本)에서는 육척으로 보았

으나, 현재에는 오척을 일궁이라 하고 있다.

187) 상주(常住):사종승물(四種僧物) 또는 사종상주물(四種常住物)의 준말. 사찰(寺

刹) 운영(運營)에 필요한 물건(物件)이니, 여기에 4가지 상주물이 있다. ①상주

상주물(常住常住物)이니, 사중(寺中)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공동의 물건과 건물

(建物), 기물(器物), 불상(佛像), 화과(華果), 수림(樹林), 전원(田園) 등 ②시방상

주물(十方常住物)이니, 날마다 대중이 수용(受用)하는 공양구(供養具) 등이니,

이는 시방승가(十方僧伽)에 공속(共屬)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③현전상주물(現

前常住物)이니, 각기 대중이 가지고 있는 사유물(私有物) ④시방현전상주물(十

方現前常住物)이니, 사망(死亡)한 스님의 유물(遺物)인 안경, 바리때, 법기(法器)

등 경미(輕微)한 물건들이니, 이는 시방승(十方僧)에게 분여(分與)하는 물건(物

件)이기 때문이다. 도선(道宣)의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鈔』 참조.

188) [總覽] [全文]에는 地이고, [通史]에는 寺이니, 뜻으로는 무방하나, [總覽]의 地가

옳다.

189) [總覽]에는 劍. [通史]에는 儉. [全文]에는 釼이니 儉과 釼은 모두 劒의 오자이

며 劍은 劒의 同字이다.

기축년190) 6월 병(病)이 일어났고, 7월 7일에 이르러 손수 대내(大內)에

올릴 편지를 쓰고,191) 또 시자(侍者)를 시켜 편지를 써서 상국(相國)인 염

승익192)에게 보내어 장왕193)을 알리도록 하고는, 모든 선로(禪老)들과 더불

어 날이 저물도록194) 문답하였다. 이날 밤 한척이나 되는195) 큰 별이 방장

실 후원에196) 떨어지는 징후가 있었다. 다음 날 을유일 새벽 일찍이 일어

나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대중에 이르기를, 내가 오늘 떠나려 하는데, 혹

시 중일197)이 아닌지? 하고 물었다. 시자가 대답하되 중일은 아닙니다. 그

러면 좋다 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법고198)를 치게 하고 스님께서는 선법

199) 앞에 이르러 선상(禪床)에 걸터 앉아 인보200)를 봉함하여 장선별감201)

인 김성고202)에 명하여 다시 거듭 봉필(封畢)하고, 천사203)가 오거든 노승204)

의 말후사205)를 알리라 하였다.

越己丑六月, 示疾, 至七月七日, 手寫上大206)內書, 又命侍者作

書, 寄相國廉公, 告以長往, 因與諸禪老, 問答移晷. 是夜, 有

長星, 大尺圍, 隕于方丈後. 翌日乙酉晨起, 盥浴而坐, 謂衆曰,

“今日, 吾當行矣, 不是重日207)耶.” 云208)“不是.” 曰, “然則可

矣.” 令僧撾法皷, 師至善209)法堂前, 踞禪床, 封印寶, 命掌選

別監金成固, 重封畢, 謂曰, 適値天使來, 見老僧末210)後事.

190) 기축(己丑):고려 제25대 충렬왕 15년(1289).

191) 대내서(大內書):궁내(宮內)의 임금께 마지막으로 바치는 하직인사편지 곧 사세

서(辭世書)이다.

192) 상국염공(相國廉公):상국인 염승익(廉承益)을 지칭함이니, 본비문 주166)염승

익廉承益 p.569 참조.

193) 장왕(長往):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영원(永遠)히 떠나간다는 말이다.

194) 이귀(移晷):이경(移景), 이일(移日), 이영(移影) 등과 같은 말. 또는 많은 시간이

경과하였다는 뜻. 시간이 흘러 이미 해 그림자가 서산(西山)에 걸렸다는 말로써,

하루가 지났다는 뜻이다.

195) 대척위(大尺圍):별의 크기가 한 자의 둘레 만큼이나 되었다는 말이니, 직경(直

徑)이 일척 정도라는 뜻이다.

196) 방장후(方丈後):방장실(方丈室:祖室) 뒤쪽이라는 말.

197) 중일(重日):①교단(敎團)의 사대명절(四大明節)·삼장(三長)·육재일(六齋日)·

관음재일(觀音齋日)·지장재일(地藏齋日) 등은 불교에서 중요한 일진(日辰)으로

여기는 날이다. 이런 날 입적하면 대중들의 기도와 공불(供佛)에 지장을 주므로

이를 죄송하게 여겨 이와 같이 중요(重要)한 날을 피하여 입적하려는 뜻이다.

②음양가(陰陽家)에서 기피하는 흉일(凶日)이니, 음력 기해일(己亥日)은 흉사

(凶事)에 적용되며, 또한 재앙(災殃)이 닥쳐온다고 하여 사람들이 싫어하는 날

이다.『태정관식太政官式』에 “御本命日及朔日復日 亦不申凶事”라 하다. 『역림문

답曆林問答』하「석복일釋復日」에 “木與木 火與火 土與土 金與金 水與水 相重 故

名復日也”라 하다.

198) 법고(法鼓):①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법고(法鼓)라 하며 ②설법하는 것을 법

고를 울린다고 한다. 이는 교법(敎法)이 널리 세간(世間)에 퍼지는 것을 북소리

가 널리 울려 퍼지는데 비유한 것. ③사찰의 사물(四物) 중의 하나인 북을 지칭

함이니, 홍고(洪鼓)라고도 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서품序品」(대정장9,

p.3c)‘제일第一’에 “……爾時 文殊師利 語彌勒菩薩摩訶薩及諸大士 善男子等 如

我惟忖 今佛世尊 欲說大法 雨大法雨 吹大法螺 擊大法鼓 演大法義 諸善男子 我

於過去諸佛 曾見此瑞 放斯光己 卽說大法 是故當知 今佛現光 亦復如是 欲令衆

生 咸得聞知一切世間 難信之法 故現斯瑞”라 하다. 여기서는 ③의 뜻이다.

199) 선법당(善法堂):여기서는 스님의 열반이전 인연처이다. 선법당을 상고해 보면 도

리천(忉利天)의 중앙(中央)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있는 곳이다. 수미산정(須彌

山頂)에 위치한 도리천에는 한 복판에 선법당천(禪法堂天)이 있고, 거기에 제석

천왕이 거(居)하며, 이를 중심으로 사방(四方)에 팔천(八天)씩이 있어 모두 32천

(天)이다. 여기에 선법당천을 합하면 33천(三十三天)이 된다. 그러므로 도리(忉

利)는 33천(三十三天)이라 번역된다. 『열반경涅槃經』권12(대정장12, p.439a)에

“是善法堂 忉利諸天 常集其中 論人天事 於是天主 釋提桓因 知頂生王已來 在外

卽出迎逆 見己 執手昇善法堂 分座而坐”라 하다.

200) 인보(印寶):충렬왕으로부터 받은 국존이라는 직인(職印)이니, 마지막으로 입

적하기 전 왕에게 반납(返納)하기 위해 봉함(封緘)하였다는 말이다.

201) 장선별감(掌選別監):선별(選別)을 맡은 별감이니, 궁중에 도착하는 우편물이나

기타(其他) 물품(物品)을 받아 왕에게 올려야 할 것을 선별하는 벼슬.

202) 김성고(金成固):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203) 천사(天使):천자의 사신(使臣), 황제(皇帝)의 사자(使者), 칙사(勅使) 등의 뜻이

니, 임금이 보낸 사신을 말한다.

204) 노승(老僧):일연스님 자칭(自稱).

205) 말후사(末後事):말기(末期) 또는 납월(臘月) 삼십일(三十日) 등과 같은 뜻이니,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을 지칭한 것이다.

206) [通史]와 [總覽]에는 大이고,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207) [通史]와 [總覽]에는 日이고, [全文]의 曰은 日의 오자임.

208) [總覽]은 결락이나 [通史]와 [全文]에는 云임.

209) [總覽] [全文]에는 善. [通史]의 差는 善의 오자임.

210) [通史]와 [總覽]에는 末. [全文]의 未는 末의 오자임.

어떤 스님이 국존의 앞에 나타나 묻기를 “석존(釋尊)께서는 학림211)에서

열반에 드셨고, 화상(和尙)은 인령212)에서 입적하시니, 그 상거(相去)213)

얼마나 되는지214) 알 수 없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주장자를 잡고 한 번 내

리치고 이르되,215) “상거가 얼마냐?”고 반문하였다. 나아가 이르되 “그렇다

면 금(今)과 고(古)가 마땅히 변천함이 없어 분명하게 목전(目前)에 있나

이다.” 하니, 스님께서 또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분명히 목전에 있다.”라고 하였다. 나아가 이르되, “뿔을 세 개 가진 기린

이 바다에 들어가고, 공여216)에 달린 조각달이 물속에서 나오다.” 하니, 스

님께서 이르되 “훗날 다시 돌아오면 상인(上人)과 더불어 거듭 한 바탕 놀

자.”고 하였다.

有僧出問, “釋尊示滅於鶴林, 和尙歸眞於麟嶺, 未審, 相去多

少.” 師拈柱杖, 卓一下云, “相去多少.” 進云, “伊麽則, 今古

應無墜,217) 分明在目前.” 師又卓一下云, “分明在目前.” 進云,

“三角麒麟入海中, 空餘片月波心出.” 師云, “他日歸來, 且与

上人, 重弄一場.”

211) 학림(鶴林):인도 구시나갈(拘尸那竭 Kuśinagara) 성이니, 부처님께서 이곳 시

뢰나벌저(尸賴拏伐底) 하반(河畔)의 사라림(沙羅林)에서 열반하셨는데, 이 숲의

나무가 학색(鶴色)처럼 하얗게 변하였으므로 학림 또는 학수(鶴樹)라고 한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 주105)쌍림雙林 [신라편] p.360, 주130)학수鶴樹

[신라편] p.363;「원종대사혜진탑비문」 주229)학수鶴樹 본서 p.271 등 참조.

212) 인령(麟嶺):인각사를 지칭함이다.

213) 상거(相去):차이를 말한다.

214) 상거다소(相去多少):①서로와의 거리(距里)가 얼마나 되느냐? ②석존이 학림

에서 멸도(滅度;열반)하신 것과, 일연화상이 인각사에서 입적함이 그 차이(差

異)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묻는 말.

215) 탁일하(卓一下):주장자(柱杖子)를 높이 들어 한 번 법상(法床)을 내리친다는 말

이다.

216) 공여(空餘):공중(空中)과 같은 뜻.

217) [總覽] [全文]에는 墜이고 [通史]에는 墮이니, 뜻으로는 같으나 [總覽]의 墜가 옳

은 듯하다.

또 어떤 스님이 묻기를, “화상께서 백년후에 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다만 일상생활 이것 뿐이라.”고218) 하였다. 나아가

이르되 “군왕과 더불어 일개(一箇) 무봉탑219)을 조성하더라도 무방(無妨)

하겠습니다.” 하니,219) 스님께서 이르기를 “어느 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가?”220)

하였다. 나아가 이르되, “법을 묻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시길 “이 일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 더 이상 묻지 말라.” 하였다.

又有僧問, “和尙百年後, 所須何物.” 師云, “只這箇.” 進云,

“重與君王造箇無221)縫222)塔樣, 又且何妨.” 師云, “甚麽處去

來.” 進云, “也須問過.” 師云, “知是般事便休.”

218) 지저개(只這箇):다만 현실 그대로일 뿐, 특별히 따로 구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總覽]에는 只遮箇. [通史]에는 只遮個. [全文]에는 只這箇. 모두 상통한다.

219) 무봉탑(無縫塔):일반적으로 탑(塔)을 건립(建立)함에는 목(木)·석(石)·벽돌

(塼材) 등으로 봉합(縫合)과 층급(層級)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꿰맨 자욱이 없

는 한 덩어리의 탑(塔)을 무봉탑(無縫塔)이라 한다. 세상(世上)에서는 이를 난탑

(卵塔)이라고 한다. 전(轉)하여 작위(作爲)없는 무위(無爲)의 공덕을 말한다. 무

봉탑의 연유(緣由)는 남양혜충국사(南陽慧忠國師)와 당(唐)의 대종(代宗)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5「서경광택사남양혜충국사西

京光宅寺南陽慧忠國師」(대정장51, p.245a)에 “師以化緣 將畢 涅槃時至 乃辭代宗

代宗曰 師滅度後 弟子 將何所記 師曰 告檀越 造取一所無縫塔 曰 就師請取塔樣

師良久曰 會麽 曰 不會 師曰 貧道去後 有侍者應眞 却知此事”라 하다.

220) 심마처(甚麽處):어느 곳. 어디로의 뜻.

221) [全文]에는 無이나, [通史]와 [總覽]에는 탈락됨.

222) [全文]에는 縫이나, [通史]와 [總覽]에는 탈락됨.

또 어떤 스님이 화상에게 묻기를 “스님은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마치

세상에 없는 것과 같으며, 몸을 보되 또한 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더 오래

도록 세상에 살아 계시면서, 대법륜(大法輪)을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

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이 세상에 있거나, 저 제상에 있거나, 가는

곳마다 불사(佛事)를 하고 있느니라.” 하였다.

又有僧問, “和尙, 在世如無世, 視身如無身, 何妨住世, 轉大

法輪.” 師云, “隨處作佛事.”

이와 같이 문답이 끝난 다음, 스님께서 모든 선덕(禪德)에게 이르시되,

“날마다 공부하는 경지(境地)를 보고하라. 가려운 통양저223)[有念]와 가렵

지 않은 불통양저(不痛痒底)[無念]가 모호224)하여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

고는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이 곧 통저(痛底)라.” 하

고, 또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은 불통저(不痛底)라.” 하며, 세 번째

내리치고는 “이것은 통저냐? 불통저냐? 시험삼아 자세히 살펴보라.”225)

고는,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가서 조그마한 선상(禪床)에 앉아서

담소함이 평소와 같았다. 잠시 후226) 손으로 금강인227)을 맺고 조용히 입적

하시니, 오색 광명이 방장실 뒤쪽에서 일어났는데, 곧기가 당간228)과 같고,

그 단엄하고 욱욱(煜煜)함은 불꽃과 같으며, 화염상(火炎上)에는 백운(白

雲)이 일산(日傘)과 같이 덮인 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떠나갔다. 때는

가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問答罷, 師云, 諸禪德, “日日報之, 痛痒底,229) 不痛痒底, 模糊

未辨.” 乃拈拄杖, 卓一下云, “這箇是痛底.” 又卓一下云, “這

箇是不痛底.” 又卓一下云, “這箇是痛底,230) 是不痛底, 試辨

看.” 便下座, 歸方丈, 又坐小禪床, 言笑自若. 俄頃, 手結金

剛231)印, 泊然示滅, 有五色光, 起方丈後, 直如幢, 其端煜煜如

炎火, 上有白雲如蓋, 指天而去. 時秋暑方熾.

223) 통양저(痛痒底):아프거나 가려움. 주편사(週徧事)가 신변(身邊)에 미치는 영향.

『경덕전등록』권17「담주용복산화상潭州龍伏山和尙」(대정장51, p.343a)에 “……

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你得恁麽不識痛痒”이라 하다.

224) 모호(模糊):애매모호(曖昧模糊)의 준말. ①분명하지 아니한 모양 ②흐리터분하

여 뚜렷하지 아니한 모양.

225) 시변간(試辨看):시험삼아 살펴 보아라. 또는 아무렇게나 자의(自意)대로 생각

해 보라는 명령사(命令詞)이다.

226) 아경(俄頃):잠깐 동안. 잠시의 뜻.

227) 금강인(金剛印):금강권인(金剛拳印)의 준말. 왼손이 오른손의 인지(人指)를 잡

고 가슴에 닿게 하는 수인(手印)이니,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취(取)하는 결

인(結印)이다.

228) 당(幢):범어(梵語)에 태박야(駄縛若 Dhvaja) 또는 계도(計都 Ketu)이며, 당

간(幢竿)·찰간(刹竿)·간주(竿柱) 등으로 번역된다. 국기게양대와 같은 높은 장

대 끝에 용두(龍頭)의 모양을 만들고 깃발을 달아 드리운 것. 불(佛)·보살(菩薩)

의 위신과 공덕(功德)을 표시한 장엄구(莊嚴具). 불전(佛殿)이나 불상 앞에 세우

며, 혹은 중생을 지휘하고, 마군(魔軍)을 굴복시키는 표지이며, 또는 사찰마다

종파(宗派)의 표시로도 세워졌다.

229) [通史]와 [全文]에는 底. [總覽]의 之는 底의 오자임.

230) [總覽]에는 底와 是字 사이에 ‘又卓一下云這箇’란 七字가 있으나, [通史]와 [全

文]에는 탈락됨.

231) [通史]와 [總覽]에는 剛. [全文]의 은 剛의 오자임

얼굴 모양은 생전과 같이 선백(鮮白)하고 지체(支體)는 윤택하며, 굴

신(屈伸) 작용은 생시와 같이 유연하였다. 원근으로부터 참관(參觀)하러

찾아온 사람이 운집하여 마치 담장처럼 주변을 가득 채웠다.232) 정해일

에 사유233)하고 영골234)을 수습하여 선실(禪室) 중에 안치하고, 문인이 유

장(遺狀)과 인보(印寶)를 가지고235) 역마를 타고 화급히 임금께 주문하였

다.236) 부음을 접한 임금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판관후서사237)를 보내

어 척연238)하게 식종(飾終)의 예식239)을 거행토록 하고, 또 안렴사240)에 명

하여 장례를 감호(監護)케 하고는,241) 이어 제조(制詔)를 내려 시호를 보각

(普覺), 탑호를 정조(靜照)라 하였다.

顔貌鮮白, 支體瑩澤, 屈伸如生. 遠近觀者如堵. 丁亥闍維, 拾

靈骨, 置于禪室中, 門人, 賫遺狀印寶, 乘傳以聞. 上, 震悼, 遣

判觀候署事令242)倜, 展飾終之禮, 又命按廉使, 監護喪事, 仍降

制諡曰, 普覺, 塔曰靜照.

232) 관자여도(觀者如堵):스님의 신비스러운 열반(涅槃)의 모습을 친견(親見)하고

자, 원근(遠近)에서 모여든 사람이 마치 담장처럼 주변을 가득히 둘러쌌다는 말

이다.

233) 사유(闍維): Jhāpita. 다비(茶毗)라고도 함.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화장(火葬)

을 지칭함이다.

234) 영골(靈骨):①사리(舍利) ②유골(遺骨).

235) 유장인보(遺狀印寶):임금께 올리는 사세서(辭世書)와 국존의 직인(職印)이다.

본비문 주191)대내서大內書 p.573;주200)인보印寶 p.574 참조.

236) 승전이문(乘傳以聞):부고를 빨리 전하기 위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왕(王)에게

주문(奏聞)하였다는 말. 『한서漢書』「고제기高帝記」에 “乘傳詣雒陽”이라 하고,

如淳傳에 “曰 四馬高足 爲置傳 四馬中足 爲馳傳 四馬下足 爲乘傳 一馬二馬 爲

軺傳 急者 乘一乘傳”이라 하다.

237) 관후서(觀候署):서운관(書雲觀)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천문(天文)·역수(曆

數)·측후(測候)·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국초에는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司局으)로 분치(分置). 1023년에 태복감(太卜監)을 사천대(司天臺)로

고치고, 1116년에 사천감(司天監)으로 다시 개칭. 1275년에 관후서로 불렀다가

다시 사천감으로 하였다. 1308년 태사국을 병합하여 서운관으로 개칭했다. 1356

년에 다시 사천감으로 복구. 이때 태사국은 분립. 1362년에 태사국을 병합하여

서운관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사』권28, 79 참조.

238) 척(倜):척연(倜然)의 준말. 스님의 장례식을 높이 들어 엄숙하고 화려하게 거행

(擧行)한다는 말이다.

239) 식종지례(飾終之禮):사자(死者)의 최후를 장식하는 것이니, 장례식의 장엄을

뜻함이다. 「정진대사원오탑비문靜眞大師圓悟塔碑文」 주374)식종지례飾終之禮

[고려편1] p.424;「진관선사오공탑비문眞觀禪師悟空塔碑文」 [고려편2] p.150 주

209)식종飾終 등 참조.

240) 안렴사(按廉使):고려 때의 지방 장관. 초기에는 절도사(節度使)가 있었는데,

1012년에 이를 없애고 안렴사를 두었으며, 1064년 도부서(都部署)로 개칭. 1113

년에는 다시 안찰로 환원했다. 1276년 안찰사를 안렴사로 고치고, 1298년 경

상·전라·충청의 삼도(三道)는 지역이 넓어서 일이 많으므로 이곳에 안렴부사

(按廉副使)를 두고, 동계(東界)의 안렴사를 없애고 교주(交州)의 안렴사가 겸하

게 했다. 1389년에 안렴사의 관등이 낮으므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고

치고, 대신이 겸하였다. 1390년에는 각도(各道)에 관찰사(觀察使)·경력사(經歷

使)를 두었는데, 1392년에 관찰사를 폐지하고 다시 안렴사를 두었다. 『고려사』

참조.

241) 감호상사(監護喪事):장사지내는 행사를 감독하는 호상(護喪)을 말함이다.

242) [總覽]은 결락이나 [通史]와 [全文]에는 令임.

10월 신유일에 탑을 인각사의 동쪽 산등성이에 세웠는데, 세수는 84이

고, 법랍은 71세였다. 스님은 사람 됨됨이가 말할 때에는 농담하는 일이 없

고, 천성(天性)은 가식(假飾)하는 일이 없다.243) 항상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

고, 많은 대중과 같이 있으나, 마치 홀로 있는 것과 같이 조용하였다.244)

존의 위치에 있으나, 항상 자신을 낮추었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으로

부터 수학(受學)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통달(通達)하였다.

十月辛酉, 塔于寺之東崗, 享年八十四, 臘七十一. 師爲人, 言

無戱謔, 性無緣飾. 以眞情遇物, 處衆若獨. 居尊若卑, 於學,

不由師訓, 自然通曉.

243) 성무연식(性無緣飾):성품은 인위적(人爲的)으로 꾸미거나 사치함이 없고, 탈속

(脫俗)·소박(素朴)·천진(天眞)하다는 말이다.

244) 처중약독(處衆若獨):많은 대중(大衆)과 함께 있으나, 마치 홀로 있는 것과 같이

항상 조용하고 과묵(寡默)하다는 말이다.

이미 도를 깨닫고는 온실245)하고 자유자재하여 무애변재(無礙辯才)를

갖추어 고인들의 기연어구246)가 반근247)과 착절248)처럼 얽히고 설키며,

와선249)과 파험250)같이 복잡한 부분을 해박하게 결척251)하여 막힌

부분을 소통케 하므로서 마치 거울처럼 훤히 보게 하여252) 주시니, 그 회회언253)

하며 유인유여254)한 솜씨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참선하는 여가(餘

暇)에는 다시 장경을 열람하여 제가(諸家)의 장소(章䟽)를 연구하고, 곁으

로 유서(儒書)를 섭렵하는 한편, 백가제서(百家諸書)를 겸수(兼修)하여 곳

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연마한 묘용(妙用)이 종횡무애(縱橫無礙)

하였다. 무려 50년 동안 닦은 법도(法道)가 고매하여 있는 곳마다 서로 다

투어 경모255)하였다.

旣入道穩實而縱之, 以無礙辯, 至古人之機緣語句, 盤根錯節,

渦256)旋257)波258)險處, 抉259)剔䟽260)鑿.261), 恢恢焉, 游刃有262)餘.263)

又於禪悅之餘, 再閱藏經, 窮究諸家章䟽, 旁涉儒書, 兼貫百

家, 而隨方利物, 妙用縱橫. 凡五十年間, 爲法道稱首, 隨所住

處, 皆爭景慕.

245) 온실(穩實):①틀림없다. ②믿을 수 있다. ③확실(確實)하다. ④온화(穩和)한 진

면목(眞面目) ⑤무애자재(無礙自在)하여 마음 내키는대로 경계(境界)를 따라가

도 항상 마음이 편안하다는 뜻.

246) 기연어구(機緣語句):종사(宗師)와 학인(學人)이 문답한 법어(法語) 곧 조사어록

(祖師語錄). 기연(機緣)이란 스승과 제자가 법연(法緣)에 투합하여 서로 만나는

계기.

247) 반근(盤根):고목(古木)의 뿌리가 이리저리 사방(四方)으로 얽히고 설켜서 복잡

하다는 뜻이니, 사건(事件)이나 문장(文章)이 번잡하여 해결(解結)하기 어려운

것에 비유한 말이다. 『문심조룡文心彫龍』「총술總術」에 “夫不截盤根 無以驗利

器 不剖文奧 無以辯通才”라 하다.

248) 착절(錯節):나무의 가지와 넝쿨끼리 교착(交錯)하여 마치 얽힌 실타래와 가시

밭처럼 얽히고 복잡하여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에 비유한 뜻이다. 『후한서』

「우후虞詡」에 “詡謂朝歌長 笑曰 不遇盤根錯節 何以別利器乎”라 하다.

249) 와선(渦旋):선와(旋渦)·반와(盤渦)·회선(回旋)·와반(渦盤) 등과 같은 뜻. 소

용돌이 치며 흘러가는 물결 가운데라는 말. 전하여 복잡한 사건(事件)이나 문장

(文章)을 가리킴. 『유환기문游宦紀聞』「칠七」에 “大洋海中 有渦旋處 龍在其下 湧

出其涎”이라 하다.

250) 파험(波險):험한 파도. 굽이쳐 흐르는 폭류로 물결이 심히 위험(危險)한 곳. 전

하여 복잡하게 꼬인 사건이나 매우 해석(解釋)하기 어려운 문장을 지칭함.

251) 결척(抉剔):척결(剔抉)과 같은 뜻. 얽히고 설킨 부분(部分)을 갈아내고 발라내

어 핵심(核心)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들어낸다는 말이다. 소식(蘇軾),「기유효숙

시寄劉孝叔詩」에 “爾來手實降新書 抉剔根株窮脉縷”라 하였고, 한유(韓愈),「진

학해進學解」에는 “爬羅剔抉 刮垢磨光”이라 하다.

252) 소감(䟽鑒):막힌 부분을 소통(疏通)하여 마치 거울처럼 훤히 보게 한다는 말.

명석(明晳)하다는 뜻.

253) 회회언(恢恢焉):광대(廣大)한 모양. 넓고 커서 모든 것을 포용(包容)하는 모양.

『노자』73장에 “天綱恢恢 疏而不失”이라 하다.

254) 유인유여(游刃有餘):유인유여지(游刃有餘地)의 준말. 백정이 도도(屠刀)를 사

용함에 있어 소를 잡아 고기를 베어낼 때, 정육(精肉)과 뼈와의 사이에는 밀착

(密着)된 부위(部位)에 간격이 있는데, 백정은 자유(自由)롭게 칼을 사용(使用)

하되 칼날이 뼈에 닫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하여 어려운 사건을 처리(處理)함에

있어 종용(從容)하여 여유(餘裕)가 있는 것에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양생주

養生主」에 “庖丁爲文惠君解牛 …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 入有間 恢恢乎 其於游刃 必有餘地矣 是以

十九年而刀刃 若新發於硎”이라 하다.

255) 경모(景慕):경앙(景仰) 또는 앙모(仰慕)와 같은 뜻. 크게 사모하는 것. 크게 존

경한다는 말.

256) [總覽]은 결락, [全文]에는 渦. [通史]의 渴은 渦의 오자임.

257) [總覽]은 결락, [全文]에는 旋. [通史]의 施는 旋의 오자임.

258) [全文]에는 波. [通史] [總覽]의 陂는 波의 오자임.

259) [全文] [總覽]에는 抉. [通史]의 扶는 抉의 오자임.

260) [通史] [全文] [總覽]의 䟽는 疏의 同字임.

261) [通史]와 [總覽]에는 鑿. [全文]의 鑒은 鑿의 오자임.

262) [總覽] [全文]에는 有이나, [通史]에는 탈락됨.

263) [總覽] [全文]에는 餘이나, [通史]에는 탈락됨

그리하여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스님의 당하264)를 참방하지 못한 것

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비록 저마다 괴걸265)이라 자부(自負)하던 자라도,

다만 265)스님의 유방여윤266) 곧 법문을 들으면, 모두 심취(心醉)하여 망연자

267)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님을 봉양하는 지극한 효심(孝心)은 목

주(睦州) 진존숙268)의 가풍을 흠모한 것이다.269) 자호(自號)를 목암(睦庵)

이라 하였고, 나이 모기270)에 이르러서도 총명은 조금도 쇠퇴하지 아니하

여,271) 학인을 가르침에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으니, 지덕(至德)과

진자(眞慈)를 갖춘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이와 같으랴!

唯以未叅堂下, 爲耻, 雖魁傑自負者, 但受遺芳餘潤, 則莫不心

醉而自失焉. 養母純孝, 慕睦州陳尊宿之風. 自號睦庵, 年及耄

期, 聰明不小衰, 敎人不倦, 非至德眞慈, 孰能如是乎.

264) 당하(堂下):좌하(座下)·귀하(貴下)·각하(閣下) 등과 같이 상대를 지극히 높혀

서 일컫는 존칭사(尊稱辭)이다.

265) 괴걸(魁傑):괴웅(魁雄)·괴위(瑰偉) 등과 같은 뜻. ①헌걸 찬 영웅 ②위대한 인

물(人物) ③영걸(英傑)하고 절수(絶秀)한 사람이다.「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

文」 주86)괴위魁偉, 주87)걸절傑絶 [고려편2] p.279;「지광국사현묘탑비문智光

國師玄妙塔碑文」주37)괴웅魁雄 [고려편2] p.361 등 참조.

266) 유방여윤(遺芳餘潤):일연스님이 남긴 빛나는 여윤 곧 법문(法門)을 가리키는

말이다.

267) 자실(自失):망연자실(茫然自失)의 준말. 깜짝 놀라 정신을 잃어 어리둥절하는

모양. 또는 깜짝 놀라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탄복하는 말이다.

268) 진존숙(陳尊宿):황벽희운(黃檗希運:?~855년경)의 제자. 휘는 도명(道明) 또는

도종(道蹤). 호는 목주(睦州). 속성은 진씨(陳氏). 강남(江南) 출신. 목주(睦州:

浙江省) 용흥사(龍興寺)의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백여명(百餘名)의 대중을 모

아놓고 문풍(門風)을 진작(振作)하였으므로 세인(世人)들이 진존숙이라 일컬

었다. 항상 자신(自身)을 감추어 방(房) 안에서 포혜(蒲鞋:짚신)를 삼아 노모

(老母)를 봉양(奉養)하는 등 효심(孝心)이 지극하였다.『경덕전등록』권12「진존

숙陳尊宿」에서는 항상 짚신을 삼아 비밀(秘密)히 노상(路上)에 두어 행인(行

人)들에게 보시(布施)했다라고 하였으니, 진포혜(陳蒲鞋)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운문문언선사(雲門文偃禪師:864~949)가 찾아와서 고문(扣門)하거늘

존숙이 묻되 누구냐고 하니, ‘문언(文偃)입니다’라 한데, 존숙이 ‘진시알력찬(秦

時軋轢鑽)’이라고 평가한 말은 매우 유명하다. 건부연중(乾符年中:874~879)에

세수(世壽) 98, 법랍 7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조당집』19;『경덕전등록』12;

『석씨계고략』3 등 참조.

269) 목주진존숙지풍(睦州陳尊宿之風):일연스님이 효심이 지극하여 목주의 진존

숙이 지극한 효심으로 노모를 봉양(奉養)한 것을 흠모(欽慕)하여라는 뜻이다.

일연선사가 말년 인각사 근처에 노모를 모시고 있다가 돌아가매 그 부근에 장

사 지냈는데, 모묘(母墓)와 탑비(塔碑)와 인각사가 삼각(三角)의 위치에 있다.

그 묘의 위치는 인각사에서 북쪽 약5리 지점, 화북삼리(華北三里)에서 약10리

즈음에 가천꼴(加川谷) 또는 능꼴(陵谷)이라고도 하는 골짜기 중봉정두(中峰

頂頭)에 위치하고 있다. 전좌우삼면(前左右三面)에 자연석 축석이 둘러져 있

다. 부근(附近) 주민(住民)의 전설(傳說)에 따르면, 섯달 그믐날이면 스님의 탑

비(塔碑)와 어머니의 묘(墓)에서 서로 방광(放光)하여 상조(相照)하였다고 전

한다.

270) 모기(耄期):노년기(老年期)이니, 모(耄)는 구십세왈모(九十歲曰耄)라 한다. 그

리고 육십세왈기(六十歲曰耆), 칠십세왈도(七十歲曰 ), 팔십세왈질(八十歲曰

耋)이라 함.

271) 총명불소쇠(聰明不小衰):90노령(老齡)에 이르렀으나, 총명(귀와 눈)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는 말

처음 용검(龍 )이 인각사를 중수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도중272) 마산

역리(馬山驛吏)의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천사(天使)가

담무갈보살273)의 주처(住處)를 보수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과연 지나갔으니, 스님의 덕행이 이미 사람들을 이롭

게 한 것으로 관(觀)하건대, 김용검(金龍 )의 꿈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겠

도다. 그 나머지 이적과 기몽(奇夢)이 매우 많으나, 어괴274)하다고 여길까

염려되어 이들은 모두 생략하는 바이다.

初龍 之來也, 馬山驛吏, 夢人曰, “明日當有天使, 修曇無竭

菩薩住處275)行過此.” 明日果至, 以師之行, 己利人觀之, 是夢

豈虛也哉. 其餘異跡奇夢頗多, 恐涉語恠, 故略之.

272) 초용검지래(初龍劍之來):1283년 충렬왕이 일연선사(一然禪師)를 국존으로 책

봉(冊封)하고 인각사를 하안지지(下安之地)로 삼게 한 다음, 근시(近侍)인 김용

검(金龍劍)을 인각사로 보내어 사원을 중수(重修)케 하던 때를 지칭함이다. [總

覽]에는 劍. [通史]에는 劒. [全文]에는 釼. 釼은 劔의 오자이고, 劍과 劒은 劔과

同字이다.

273)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담마울가타(曇摩鬱伽陀 Dharmodgata)라 음역. 법성

(法盛)·법용(法勇)·법기(法起)라 번역. 보살의 이름. 중향성(衆香城)의 왕으로

써 항상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密多經』을 설(說)하니, 상제보살(常啼菩薩;薩

陀波崙菩薩 Sadāprarudita-Bodhisattva)이 와서 반야경 법문(法門)을 들었다고 한

다. 『양고승전梁高僧傳』권3「석담무갈釋曇無竭」(대정장50, p.338b) 참조.

274) 어괴(語怪):이상(以上)의 이적(異跡)과 기몽(奇夢)들이 모두 괴이(怪異)한 말이

라 하여 미신(迷信)으로 취급(取扱)될까 염려되어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75) [通史]와 [總覽]에는 없으나, [全文]에는 住와 行字 사이에 處가 더 있다.

저서는『어록語錄』2권276)·『게송잡저偈頌雜著』3권277)이 있고, 그 편수

한 바로는『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2권278)·『조파도祖派圖』2권279)·『대

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280)·『제승법수諸乘法數』7권281)·『조정사원祖庭事

菀』30권282)·『선문념송사원禪門拈頌事菀』30권283) 등 백여 권이 세상에 유

행하고 있다.283) 문인 운문사 주지 대선사(大禪師) 청분284)이 스님의 행장을

엮어 임금께 주문하였다.285) 행장을 전해 받은 임금께서 저로 하여금 비문

을 지으라고 명하시었으나,286) 신은 학식이 황천하여287) 스님의 지극한 도

덕을288) 제대로 드날릴 수 없어 미정 미정 미루어 수년이 지났지만,289)

도의 간청이 계속될 뿐아니라, 왕명 또한 끝까지 거역하기 어려워서290)

득이하여 삼가 비문을 짓고 송명(頌銘)하여 가로되,

師之所著, 有語291)錄二卷,292) 偈頌雜著三卷, 其所編修, 有重

編曺洞五位二卷, 祖派293)圖二卷, 大藏須知錄三卷, 諸乘法數

七卷, 祖庭事菀三十卷, 禪門拈頌事菀三十卷等, 百餘卷, 行

于世. 門人, 雲門寺住持大禪師淸玢,294) 狀師之行, 聞于上. 上,

令臣撰辭, 臣, 學識荒淺, 不足以光揚至德, 故過延數年, 請旣

不已, 命亦難忤, 謹爲之序而銘之, 曰,

276) 어록이권(語錄二卷):일실(逸失)되고 없음.

277) 게송잡저삼권(偈頌雜著三卷):일실되고 없음.

278) 중편조동오위이권(重編曺洞五位二卷):회연보(晦然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

五位』. 현존(現存)함. 선종(禪宗)의 오종(五宗) 중 조동종(曹洞宗)의 오위설(五位

說)에 대하여 일연이 주(註)를 보완(補完)해서 엮은 책이다. 조동오위설이란 동

산양개(洞山良介 807~869)가 제창(提唱)한 오위편정(五位偏正;正中偏·偏中正·

正中來·偏中至·兼中到)설에 조산본적(曹山本寂)이 주를 가(加)하여 선양(宣揚)

하므로서 조동종의 중심사상이 된 것이니, 편(偏)은 신(臣)이고, 정(正)은 군(君)

에 배대하고 있다. 한불전6, pp.216b~244b 참조.

279) 조파도이권(祖派圖二卷):일실되고 없음.

280) 대장수지록삼권(大藏須知錄三卷):일실되고 없음.

281) 제승법수칠권(諸乘法數七卷):일실되고 없음.

282) 조정사원삼십권(祖庭事菀三十卷):일실되고 없음.

283) 선문염송사원삼십권(禪門拈頌事菀三十卷):일실되고 없음.

284) 청분(淸玢):당시 운문사(雲門寺)의 주지(住持)며 일연의 문인(門人)이었으나,

전기는 미상하다. 『동문선東文選』제4 p.285(1975) 「자씨산형원사보감국사비문

慈氏山瑩源寺寶鑑國師碑文」(木版本 118권 제20장 左面) 참조. 자씨산은 밀양읍

(密陽邑) 동쪽 약 6㎞지점.

285) 장사지행(狀師之行):일연스님의 행장(行狀)을 수집 기록하여라는 뜻이다.

286) 상령찬사(上令撰辭):충렬왕이 민지(閔漬)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명

하였다는 뜻이다.

287) 학식황천(學識荒淺):민지 자신은 학식이 황당하고 천박하다는 뜻이다. 이덕유,

「진유주기성공비문進幽州紀聖功碑文」에 “臣學藝荒淺 久病衰殘”이라 하다.

288) 지덕(至德):일연스님의 지극히 고매(高邁)한 덕망(德望)을 지칭함이다.

289) 과연수년(過延數年):왕으로부터 비문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수년(數年)이 경과

하였다는 말이니, 스님의 입적은 1289년이고, 입비(立碑)는 1295년이므로 적후

(寂後) 6년만에 비를 세운 셈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명을 받고 3·4년이 지난 후

에 비문을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90) 명역난오(命亦難忤):왕의 명을 또한 거역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291) [通史] [全文]에는 語. [總覽]의 話는 語의 오자임.

292) [通史]에는 卷과 偈字 사이에 偈頌雜著三卷 其所編修 有重編曺洞五位二卷 등

19字가 脫落되었다.

293) [全文]에는 派字가 있으나, [通史]와 [總覽]에는 탈락됨.

294) [全文]에는 玢. [通史] [總覽]의 珍은 玢의 오자임.

서천에서 깃발을 높이 세우고,295)

대천세계(大千世界) 두루한 광장설이여!296)

제법(諸法) 중에 으뜸인 심인법이여,297)

이심전심(以心傳心) 비밀(秘密)히 단전298)하였네!

勝幡西振,

舌覆大千.

唯是法印,299)

密付單傳.

295) 승번(勝幡):①수승(殊勝)한 깃발 ②뛰어난 주창(主唱) ③월등한 사상(思想) 등

의 뜻이니, 불교의 남상(濫觴)을 지칭함.

296) 설복대천(舌覆大千):‘출광장설상(出廣長舌相) 변복삼천대천세계(徧覆三千大千

世界)’의 준말. 부처님께서 광장설(廣長舌)로써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어서 설

법하셨다는 말. 곧 불타(佛陀)의 진실불허(眞實不虛)한 진리(眞理)의 말씀이 3천

대천세계의 곳곳에 유포(流布)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인도의 옛 풍속에 어른이

나, 높은 사람에게 고(告)할 때, 마치 선서(宣誓)와 같이 자신이 하는 말이 사실

(事實) 그대로라는 뜻으로 혀를 내밀어 윗 입술을 덮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출

광장설상 변복삼천대천세계란 내가 하는 말은 모두가 진실여여(眞實如如)한 말

임을 보여준 것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대정장12, p.347b)에 “……舍利弗 如我

今者 讚歎阿彌陀佛 不可思議功德 東方亦有阿閦鞞佛 須彌相佛 大須彌佛 須彌光

佛 妙音佛 如是等 恒河沙數諸佛 各於其國 出廣長舌相 徧覆三千大千世界 說誠

實言 汝等衆生 當信是稱讚不可思議功德 一切諸佛所護念經”이라 하다.

297) 유시법인(唯是法印):팔만대장경밖에 오직 이심전심(以心傳心)한 정법안장(正

法眼藏)의 법인(法印)만이라는 뜻. 법통(法統)·법맥(法脈).

298) 단전(單傳):단(單)은 단독(單獨), 전(傳)은 상전(相傳)이니, 제1조 가섭존자로부

터 계속 겸전(兼傳)하다가 제24조인 사자존자(師子尊者) 때 이르러 계빈국(罽賓

國 Kaśmīra) 왕의 횡난(橫難)을 만난 후부터, 종래(從來)에 선(禪)과 경율(經

律)을 함께 겸전하던 것을 선장(禪藏)은 남천축(南天竺)에, 경율(經律)은 북천축

(北天竺)으로 각각 분리(分離) 전수(傳授)하였다. 이후 조조(祖祖)가 전법할 때,

정법안장(正法眼藏)으로 선법(禪法)만 단전(單傳)하게 되었다. 계빈국왕난(罽賓

國王難)이란 사자존자가 계빈국에 있을 때(景帝 永安 2년;259) 마목다(摩目多)

와 도락차(都落遮)라는 두 사람이 환법(幻法;신통)을 배우다가 공모(共謀)하여

승가(僧伽)의 복색(服色)으로 가장하여 왕을 암살하려고 왕궁에 잠입하였다가

거사를 성공하지 못하고 붙잡혔다. 이때 왕이 “내가 삼보(三寶)를 독신하고 있

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대노(大怒)하여 국내의 모든 사원은 하나도 남김

없이 철거하고, 석승(釋僧)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하고, 자신(自身)은 칼을 들고

당시 교단의 대표(代表)인 사자존자(師子尊者)를 찾아가서 “오온(五蘊)이 공

(空)한 경지(境地)를 얻었느냐?”하니, “이미 얻은지 오래입니다.”하였더니, “그

렇다면 생사(生死)를 초월하였느냐?”, “이미 초월하였습니다.” “이미 생사를 초

월하였다면 스님의 목을 나에게 줄 수 있느냐?”하였다. 존자 이르기를 몸이 내

가 아니거늘, 어찌 목을 내어놓는데 인석(悋惜)하겠습니까? 하는 순간, 왕이 칼

로 스님의 목을 쳤다. 이때 스님의 목에서 흰 젖(白乳)이 수척(數尺)이나 솟아 오

르고, 왕의 오른 팔도 동시에 땅에 떨어졌으며, 따라서 왕도 마침내 7일 후에 죽

었다. 이 일을 계빈국왕난이라 한다.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권5「사자비

구전師子比丘傳」(대정장49, p.516b) 참조.

299) [通史]와 [全文]에는 印이고, [總覽]에는 輪이니, [全文]의 印이 옳은 듯하다.

축건300)엔 이십팔수 별과 같으며,301)

중하302)엔 오조303)까지 전하였으니,

시간은 전후이나 사람은 같아,

법등의 그 광명은 상접하였다.

竺乾列宿,

中夏五葉,

世隔人同,304)

光光相接.

300) 축건(竺乾):천축(天竺)과 같은 말. 인도의 옛 이름. 중국의 곡적(曲籍)에 보이는

최고의 기록으로는 『사기』「대완전大宛傳」에는 신독(身毒), 다음 『한서』「서역西

域」상에는 읍독(揖毒), 그리고 『후한서』「서역」에는 천축이라 하였고, 그 밖에 신

독(申毒)·신도(信度)·신두(辛頭)·신두(身豆)·진정(眞定)·희도(呬度)·수두(豎

豆)·건독(乾篤)·천독(天毒)·천독(天督)·천두(天豆)·천정(天定)·인토(印土)

등의 칭호가 있다.

301) 열수(列宿):이십팔수(二十八宿)를 지칭함. 옛날 천문학(天文學)에서 하늘을 사

궁(四宮;東·西·南·北)과 사신(四神:靑龍·白虎·朱雀·玄武)으로 나누고, 다시

각궁마다 일곱 성수(星宿)로 나눈 것의 일컬음. 곧 동방에는 각(角)·원(元)·저

(氐)·방(房)·심(心)·미(尾)·기(箕) 등 칠성수(七星宿)이고, 서방에는 규(奎)·

루(婁)·위(胃)·묘(昴)·필(畢)·자(觜)·참(參) 등 칠성수이며, 남방에는 정

(井)·귀(鬼)·류(柳)·성(星)·장(張)·익(翼)·진(軫) 등 칠성수이고, 북방에는 두

(斗)·우(牛)·여(女)·허(虛)·위(危)·실(室)·벽(璧) 등 칠성수이다.

302) 중하(中夏):당나라 곧 중국을 지칭함.

303) 오엽(五葉):한 송이의 꽃 밑에 다섯 잎사귀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곧 오대

(五代)란 뜻이니,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를 일화(一花)

로 보고, 이조 혜가(慧可), 삼조 승찬(僧璨), 사조 도신(道信), 오조 홍인(弘忍), 육

조 혜능(慧能) 등을 오엽이라 한다. 달마의 전법게(傳法偈)에 “吾本來玆土 傳法

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이라 하였고(『경덕전등록』권3;대정장51, p.219c),

『경덕전등록』「양억서楊億序」(대정장51, p.196b)에 “雙林入滅 獨顧於飮光 屈㫬相

傳 首從於達磨 不立文字 直指心源 不踐階梯 徑登佛地 逮五葉而始盛 今千燈而

益繁 達寶所者 蓋多 轉法輪者非一 蓋大雄付囑之旨 正眼流通之道 敎外別行 不

可思議者也”라 하다.

304) [通史]에는 仝이고, [全文]에는 同이며, [總覽]에는 이니, 仝과 同은 같은 字이

고, [總覽]의 는 同의 오자임.

육조의 가풍이신 조계일파가,305)

동쪽나라 부상306)에 유입한 이후,

혁혁한 지일307) 성천에 떠오르니,

우리 스님 그 광명 융창시켰네!

曹溪一派,

東浸308)扶桑,

孕生智日,

我師克昌.

305) 조계일파(曹溪一派):육조 혜능의 선종을 말함.

306) 부상(扶桑):해가 뜨는 장소에 있으므로 동쪽을 가리킴이니, 곧 동국(東國)

즉 신라를 지칭함. 「신행선사비문信行禪師碑文」 주39)부상扶桑 [신라편]

pp.64~65;「통진대사보운탑비문」 주114)부상扶桑 [고려편1] p.359;「원종대사

혜진탑비문」 주16)부상扶桑 [고려편2] p.29 등 참조.

307) 지일(智日):불교 또는 선종을 지칭함이니, 지혜(智慧)의 광명(光明)이란 뜻.

308) [總覽] [全文]에는 浸이고, [通史]의 侵은 浸의 오자임

불타께서 열반한 말법세상에,

각박(刻薄)한 세상인심 흉악만 하니,

덕 높으신 지인309)이 있지 않으면,

불쌍한 중생들 의지할 곳 없다.310)

去聖逾遠,

世道交喪,

不有至人,

羣生安仰.

309) 지인(至人):노장가(老莊家)에서 도를 닦아 지극(至極)의 경지(境地)에 도달한

사람. 전하여 불교에서 도를 닦아 견성오도(見性悟道)한 사람을 지칭함. 『장자』

「소요유逍遙游」에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이라 하였고, 『경덕전등록』권3

「보리달마菩提達磨」(대정장51, p.219b)에 “達磨 後魏 孝明 太和 十年(正光 元年이

어야 함. 520) 十一月 二十三日 寓止于嵩山少林寺 面壁而坐 終日默然 人莫之測

謂之壁觀婆羅門 時有僧神光者 曠達之士也 久居伊洛 博覽群書 善談玄理 每歎曰

孔老之敎 禮術風規 莊易之書 未盡妙理 近聞 達磨大士 住止少林 至人不遙 當造

玄境 乃往彼晨夕參承 師常端坐面牆 莫聞誨勵 光自惟曰 昔人求道 敲骨取髓 刺

血濟饑 布髮掩泥 投崖飼虎 古尙若此 我今何人 其年十二月 九日 夜天大雨雪 光

堅立不動 遲明 積雪過膝 師憫而問曰 汝久立雪中 當求何事 光悲淚曰云云”이라

하다.

310) 안앙(安仰):누구를 의지할 수 있으랴? 의지할 자 누구이겠는가?라고 허탈한 심

정을 표현.

국존께서 세상에 출현한 것은,

서원(誓願)코 모든 중생 구함이었네!

학문은 깊고 깊어 백가(百家)에 정통(精通),

만차(萬差)의 방편(方便)으로 제도(濟渡)했도다.

惟師之出,

本爲利他.

學窮內外,

機應萬差.

남김없이 섭렵(涉獵)한 제자 백가의,

현묘(玄妙)한 그 진리(眞理)를 탐구하여서,

반근착절(盤根錯節) 그 의심(疑心) 풀어주시니,

밝은 거울 비추듯 명석(明晳)하도다.

曉了諸家,

搜玄索妙,

剖釋衆疑,

如鏡斯照.

선림311)에선 그 조령(祖令) 호소(虎嘯)와 같고,

교해312)에는 그 변재(辯才) 용음(龍吟)과 같네!

갑자기 일어나는 구름과 같이,313)

학인(學人)들은 침침314)히 모여들도다.

禪林虎嘯,

敎海龍吟.

颷315)起雲合,

學侶316)駸駸.

311) 선림(禪林):선종을 지칭함.

312) 교해(敎海):교종을 가리킴.

313) 표기운합(颷起雲合):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일어나 허공을 가득히 채우듯,

이와 같이 학인(學人)이 운집(雲集)하였다는 말.

314) 침침(駸駸):말이 질주(疾走)하는 모양, 말발굽 소리가 뚜벅뚜벅하는 형용, 점점

간단없이 모여드는 모양. 駸은 말몰아달릴 침字.

315) [全文] [總覽]의 颷과 [通史]의 는 뜻으로는 같다.

316) [全文] [總覽]의 侶와 [通史]의 儷는 뜻으로는 相通하나, [總覽]의 侶가 옳은 듯하다.

고해(苦海) 중생 모두를 구제하시니,317)

빛나는 그 공덕은 영원하리라.318)

오십년간319)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아,

국존으로 불교 위상 크게 높였네!

拔320)陷拯淪,

玄功盖代.

五十年間,

被人推戴.

317) 발함증륜(拔陷拯淪):함정(육지)에 떨어진 사람을 끌어 올리고, 물(바다)에 빠진

이를 건짐.

318) 개대(盖代):위대한 공적(功績)을 찬양하는 소리가 일대(一代)를 덮었다는 말.

온 나라에 칭송하는 소리가 가득하다는 뜻.

319) 오십년간(五十年間):1236년 포산(包山) 보당암(寶幢庵)에서 몽고의 난을 물리

치기 위해, 문수오자진언(文殊五字眞言) 기도를 하다가 감응을 입은 후, 중대사

(重大師)의 법계를 품수(稟受)한 때로부터 1289년 입적(入寂)할 때까지의 53년

간을 지칭함이다.

320) [通史]와 [總覽]에는 拔이고, [全文]의 抜은 拔의 오자임

임금께서 정성껏 법을 청하니,

백성들도 모두가 뜻이 같도다.

여러 차례 청하여 국존이 되니,

높고 높은321) 그 도덕 국중에 제일.

上將請益,

思共元元.

冊爲國尊,

尊中又尊.

321) 원원(元元):원원본본(元元本本)의 준말. 원원이란 백성(百姓), 여서(黎庶) 등의

뜻. 사공원원(思共元元)은 임금의 생각과 모든 백성들이 스님을 존경하는 뜻을

모아서라는 말.

개발한 귀한 보물322) 높이 쳐들고,

자항(慈航)으로 고해 중생 건지시도다.

방황하는 궁자(窮子) 고향을 찾게 하니,323)

미(迷)한 길 어찌 다시 걸어 가리요!

寶藏當街,

慈航當渡.

窮子始歸,

迷津爭赴.

322) 보장(寶藏):귀중한 보물을 쌓아 놓은 고장(庫藏)이니, 부처님의 묘법장(妙法藏)

으로 능히 중생(衆生)의 고액(苦厄)을 구제하는 것에 비유한 말. 『법화경』제2권

「신해품信解品」(대정장9, p.17b)에 “……是時 窮子 聞父此言 卽大歡喜 得未曾有

而作是念 我本無心 有所希求 今此寶藏 自然而至”라 하였고, 『무량수경無量壽

經』(대정장12, p.269c)에는 “……法藏比丘 棄國捐王 絶去財色 自行六婆羅密 敎人

令行 無央無數劫 積功累德 隨其生處 在意所欲 無量寶藏 自然發應 敎化安立無

數衆生 住於無上 正眞之道”라 하다.

323) 궁자시귀(窮子始歸):까닭없이 가출(家出)한 못난 아들이 50년 동안의 거지 생

활을 마치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니, 『법화경』의 일곱가지 비유(七

喩) 중의 하나이다. 삼계육도(三界六途)로 윤회하는 중생들은 공덕(功德)의 법

재(法財)가 궁핍(窮乏)하므로 집을 나간 궁자(窮子)에 비유하였다. 『법화경』제

2권「신해품」(대장경9, pp.16~17)에 따르면 어떤 큰 부자집 아들이 어릴 때 까닭

없이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 50년 동안 타국(他國)으로 돌아다니면서

거지 생활을 하였다. 정처(定處)없이 돌아다니다가 본인도 모르는 생가(生家)

의 근처(近處)에까지 오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을 맞아 들이려

하였으나, 근기(根機)가 매우 하열(下劣)한지라, 아버지의 저택(邸宅)을 왕궁(王

宮)인 줄로 알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왕으로 오인(誤認)하여 겁을

집어 먹고 다시 달아났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방편(方便)을 동원하여 거지로 변

장(變裝)한 종으로 하여금 동사섭(同事攝)하게 하여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게 한

후, 그 많은 재산(財産)과 가업(家業)을 그에게 양도(讓渡)해 주었다는 내용이

다. 중생(衆生)들의 근기가 순숙(純熟)해지면 부처님께서 그에게 정법안장(正法

眼藏)의 심인보고(心印寶庫)를 전해주는 것에 비유한 고사이다.

고요한 한 밤중 방장실 뒤쪽에,

떨어진 별의 크기 한 자나 되고,

웅장(雄壯)한 큰 법당(法堂)이 무너지시니,

오고 감에 자유(自由)한 스님의 경지!

長星忽墜,324)

法棟已摧,

去來由己,

其去何催.

324) [通史]와 [總覽]에는 墜이고, [全文]에는 墮이니, 뜻으로는 같으나, [總覽]의 墜가

옳은 듯하다.

진공이란 그 공(空)은 공이 아니고,

묘유(妙有)라는 그 유(有)는 유가 아닐새.

자취와 명상(名相) 모두 없어지고야,

영원(永遠)한 열반상(涅槃床)에 오를 수 있네!

眞空不空,

妙有非有.

絶跡離名,

然後可久.

박촉(迫促)하신 왕명은 갈수록 지엄(至嚴),

신하된 입장에서 피할 길 없어,

마지 못해 귀모필325) 손에 잡고서,

무형(無形)의 몰자비문326) 쓰게 되었다.

上命旣迫,

臣無以辭,

把龜毛筆,

書沒字碑.

325) 귀모필(龜毛筆):거북털로 만들어진 붓이나, 거북의 털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지필(紙筆)로 이루어진 비문이 아니고 곧 묘음(妙音)에서 유출(流出)된 선자(善

字)라는 말. 예컨대 「청법게請法偈」에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

放大光明”이란 말과 같음.

326) 몰자비(沒字碑):글자가 없이 이루어진 비문으로서 지필로 쓴 것이 아닌 스님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묘사한 것이니, 일연의 심인(心印)을 지칭하는 말이다.

괴겁(壞劫)의 맹화327)가 대천계(大千界)를 태워,

산하대지(山河大地) 모두가 소진(燒盡)하여도,

위대(偉大)한 이 비석(碑石)만 홀로 남아서,

이 비문(碑文)도 영원(永遠)히 남아지어다.

劫火洞燒,328)

山河皆燼,

此碑獨存,

斯文不磷.

327) 겁화(劫火):불교의 우주관(宇宙觀)은 성(成)·주(住)·괴(壞)·공(空)의 4단계를

한번씩 거치며 반복(返復)된다고 하니, 곧 생성기(生成期:20小劫 동안) 유지기

(維持期:20소겁 동안) 파괴기(破壞期:20소겁 동안) 공무기(空無期:20소겁 동안)

등이다. 세계가 파괴되기 시작하여 완전히 파괴되는 괴겁기간(壞劫期間)이 20

소겁 동안인데, 1소겁이 1천 6백 80만년이므로 20소겁은 3억 3천 6백만인 셈이

다. 괴겁(壞劫) 때 욕계(欲界) 및 초선천(初禪天) 이하는 화재(火災)로 파괴되고,

이선천(二禪天)은 수재(水災)로, 삼선천(三禪天)은 풍재(風災)로 각각 파괴하므

로, 사선천(四禪天) 이상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욕

계(欲界)에 속하므로 화재로 파괴되기 때문에 겁화(劫火)라고 한다. 「광자대사

비문廣慈大師碑文」 주149)겁화분신劫火焚薪 [고려편1] p.304;이지관,『능엄경

약해楞嚴經略解』상권p.344「세계기시世界起始」(1994) 등 참조.

328) [通史]에는 燒. [總覽] [全文]의 曉는 燒의 오자임.

원정 원년329) 을미(乙未) 8월 일에 문인 사문(沙門) 죽허330)가 왕명을 받

들어 진331)의 우군332)이었던 왕희지333)의 글씨를 집자(集字)하고, 문인 내

원당334) 겸 주지 통오(通奧) 진정대선사335) 청분은 비석을 세우다.

元貞元年, 乙未八月日, 門人, 沙門竹虛, 奉勅, 集晋右將軍,

王羲之書, 門人, 內願堂兼住持, 通奧眞靜大336)禪師, 淸337)

玢,338) 立石.

329) 원정원년(元貞元年):원정은 원나라 성종(成宗) 연호. 원년은 고려 충렬왕 21년

(1295).

330) 죽허(竹虛):일연의 문인이나,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본

비(本碑)의 음기(陰記) 문도열중(門徒列中) 참사질(參事秩)에 담겨 있다.

331) 진(晉):진나라라 함은 진·동진(東晉)·서진(西晉) 등이 있다. ①진은 (266~316

년까지 4代 52년간) 주(周)와 동성(同姓)인 성왕(成王)이 제(弟)인 숙우(叔虞)를

진수(晉水)의 변지(邊地)며 요(堯)의 고허(故虛) 즉 당(唐)에 봉(封)하여 건국(建

國)한 나라로서, 그 후 아들 섭부(燮父) 때 진으로 옮기고 진국(晉國)이라 하였

다. ②서진(西晉)은 사마염(司馬炎)이 위(魏)의 선(禪)을 받아 세운 나라. 처음에

는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가 민제(愍帝) 때 장안(長安)으로 이도(移都)하였던

4주(主) 52년 만에 전조(前趙)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③(317~418년까지 11代 103

년간) 동진(東晉)은 사마의(司馬懿)의 증손(曾孫)인 예(睿)가 서진을 계승하여

세운 나라. 건강(建康)에 도읍한 후 11대(代) 103년만에 한(漢)의 유요(劉曜)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④(936~946년까지 2代 11년간) 후진(後晉)은 석경당(石敬瑭)

이 후당(後唐)을 멸하고 세운 나라. 낙양에 도읍하여 2제(帝) 11년에 후한에 의

하여 멸망하였다. 여기에서는 ③동진을 가리킨다.

332) 우군(右軍):천자(天子)가 거느리는 삼군(三軍) 중의 우군을 말함. 또는 우익(右

翼)의 군대. 진나라 때, 왕희지(王羲之:307~365)가 우군장군(右軍將軍)이었으므

로 왕희지를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부른다.

333) 왕희지(王羲之):중국 진나라 때의 서성(書聖;名筆). 자는 일소(逸少). 이름은 희

지.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역임하였고, 회계내사(會稽內史)가 되었다.

334) 내원당(內願堂):왕이 성외(城外) 근처(近處)에 외원당(外願堂)을 정(定)하고, 중

요한 때에만 가끔 행행(幸行)하였고, 궁내(宮內)에는 내원당 곧 법당을 설치하

여 내원당주(內願堂主)인 분수승(焚修僧)을 두어, 항상 왕과 국가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하였다.

335) 통오진정대선사청분(通奧眞靜大禪師淸 ):이자현(李資賢)이 지은 조계종자씨

산영원사보감국사비명(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師碑銘)에 따르면, 휘는 혼구

(混丘), 자는 구을(丘乙), 구명(舊名)은 청분(淸玢), 속성은 김씨(金氏). 1250년(고

종 37) 7월 27일 충청북도 제원군 청풍면(淸風面, 堤川郡)에서 탄생. 보각국존 일

연의 법을 계승하였고, 1322년(至治 2년, 충숙왕 9) 10월 30일 세수 73, 법랍 63세

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동문선東文選』권118;『조선불교통사』하편p.364 「보감

국사비명寶鑑國師碑銘」 참조.

336) [通史]와 [總覽]에는 大. [全文]의 太는 大의 오자임.

337) [全文] [總覽]에는 淸. [通史]의 法은 淸의 오자임.

338) [通史] [全文] [總覽] 등에 모두 珍이나, 이는 玢의 오자임.

【보각국존비음기普覺國尊碑陰記】339)

[이지관의 「교감수정보완본」([고려편4] pp.204~217)을 [底本]으로 하여 번역하고, 문도질(門

徒秩)은 [復元本]을 대교하여 수정보완하였음]340)

339) 보각국사비음기(普覺國師碑陰記)에 대하여:이 비의 주인공(主人公)이 위대할

뿐 아니라, 비문 또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어서 그간 무려 700여

년 동안 국내외(國內外)에 있어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특히 음기 또한 거의 파

손되어 산일(散逸)한 잔재(殘在)만 남아 그간 문장판독(文章判讀)과 기문복원

(記文復元)에 심혈(心血)을 기울여 왔으나, 완전무결한 정본을 회복하기에는 많

은 어려움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代表的)인 복원작업자로는 ①박영돈씨(朴

永弴氏)가 약 20여년 동안 나라 안팎으로 두루 망라하여 수집한 것을 1·2·3호

에 걸쳐 발표하였으니, 채상식(蔡尙植)교수가 구하여 보내준 일본 천리대(天理

大) 박물관장 금서룡(今西龍) 소장의 정덕(正德 1506~1522) 완본(完本)의 미공개

(未公開) 탁본(托本), 고대(高大) 소장 탁본 2부, 여승구사장 소장본 1부, 전보삼

(全寶三) 소장 탁본 2부 등 6부의 탁본을 수집 연구하였다. ②김상현교수는 상게

론(上揭論)에서 월정사(月精寺) 김혜월사(金慧月師)가 1836년경 인각사에서 작

업한 필사본(筆寫本),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 소재(所載) 탁본(199字), 한국학중

앙연구원본(韓國學中央硏究院本), 박영돈본 1·2號(949字), 규장각본(碑銘 232字

와 陰記 700字), 영남대동빈문고본(嶺南大東濱文庫本;碑文 212字, 陰記 442字, 合

654字), 황수영본(黃壽永本;碑文 233字, 陰記 740字, 合 973字), 국사편찬위원회본

(國史編纂委員會本;陰記 295字), 고대도서관화산문고본(高大圖書館華山文庫本;

碑帖文 396字 中 60餘字는 碑正文이다), 전보삼본(全寶三)本 1·2號(1,339字 中 碑正

文이 271字, 陰記가 1,068字이다) 등을 연구소개하였다. ③2004년에는 국립문화재

연구소 주관으로 ‘인각사보각국사비재현’사업이 수행되었고, 정병삼(鄭炳三)교

수가 중심이 된 연구팀에 의하여, 비문의 복원본이 다시 정리되고 비석 또한 새

로이 건립되었다.

340)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한 ‘인각사보각국사비재현사업’으로 정병삼

(鄭炳三)교수가 중심이 되어 복원한 자료이다. 이하 [復元本]이라 한다.

보경사주지(寶鏡寺住持) 통오진정대선사(通奧眞靜大禪師) 산립(山立)341)

이 짓고,

寶鏡寺住持, 通奧眞靜大禪師, 山立, 述.

341) 산립(山立)과 청분(淸玢):산립은 보경사 주지를 역임하였지만, 다른 자료에서

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청분은 본비문말(本碑文末) 입석기(立石記)에

문인(門人) ‘내원당겸주지(內願堂兼住持) 통오진정대선사(通奧眞靜大禪師) 청분

(淸玢)’이라 하였고, 산립도 음기(陰記) 술제(述題)에 ‘보경사주지(寶鏡寺住持)

통오진정대선사 산립 술(述)’이라 하였다. 양처(兩處)에 “통오진정”이란 4자가

같다는 점을 들어 청분과 산립을 동명동인(同名同人)이냐? 아니면 동명이인(同

名異人)이냐?라는 양론(兩論)이 있다. 그 양론이란 ①‘위피대조국사지호야爲避

大朝國師之號也’를 인용한 김상현 논문에서는 보각비문 말(末)에 ‘雲門寺住持

大禪師 淸玢 狀師之行 聞于上 上令撰辭’라 한 것과 비문 말(末) 입석기(立石記)

에 ‘門人 內願堂兼住持 通奧眞靜大禪師 淸玢 立石’이라 한 문장 그리고 이제현

(李齊賢)이 지은 「영원사보감국사비문瑩源寺寶鑑國師碑文」에 근거하며, 일연

이 은사인 무위사(無爲寺) 천경선사(天鏡禪師)를 떠나 보각국사의 문하에서 수

학하고 사석개당(嗣席開堂)하였다는 등을 들어 청분이 일연의 제자임이 분명하

고, 산립은 그가 지은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의 음기(陰記)에서 인연(因緣)이

어긋나 스님의 문도열(門徒列)에 끼지 못한 것을 항상 한탄(恨歎)하였다는 점을

들어 일연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②이에 반하여 종래(從來)의 일

부 학자들은 ‘내원당겸주지 통오진정대선사 청분’이라는 입석기(立石記)와 음

기(陰記) 술제(述題)에 ‘보경사주지 통오진정대선사 산립 술(述)’이라한 양처(兩

處)에 근거하여 “통오진정”이란 4자가 같다 하여 청분과 산립은 동명동인(同名

同人)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통오진정’이란 4자로 본다면 동인(同人)으로 볼

수도 있으나, “山立 以因緣差奪 未獲詣門徒之列 常以爲恨”이란 18자로 살펴보

면, 곧 인연이 닿지 아니하여 문도(門徒)의 행렬(行列)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항

상 한탄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일연의 제자인 청분과 동인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필자의 견해도 김상현 교수의 주장과 같다. 다시 말하면 비문을 세운

연대(年代)는 1295년이고, 일연의 입멸이 1289년이므로 음기를 찬술한 때는 “先

師入滅 忽忽六七年”이라 하였으니, 입멸 후 6·7년이 되는 1295년이나, 1296년

에 해당한다. 이렇게 본다면 1295년에 비(碑)를 세우고, 다음해인 1296년에 음

기를 찬술한 셈이므로, 청분과 산립이 같은 시대의 인물임은 틀림이 없다. 두 사

람이 함께 “통오진정”이란 법칭(法稱)이 같다고 하여 동인이라고는 고집할 수

만은 없다. 뿐만 아니라 산립은 스스로 ‘인연이 어긋나 일연의 문도열에 참여하

지 못한 것을 항상 한탄’하였지만, 스님의 비음기(碑陰記)를 지으라는 불후(不

朽)의 승연(勝緣)이 될 부탁을 받았고, 이 인연을 이어 ‘당래(當來)에 스님께 반

부(攀附)할 인연이 맺어지기를 희망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산립

은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청분과 동일인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천자342)가 즉위한 원년 을미 초여름 4월 초에, 인각장로343)가 나를 찾

아와 부탁하기를, 선사344)께서 열반하신 지 홀연히 이미 6·7년이 지났습

니다.345) 그러나 국조의 은례(恩禮)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서346) 중신347)에게

명하여 일연 선사의 비문을 지어 완염348)에 새겨 본원349)에 세우고, 또한

칙조(勅詔)하여 문도들이 체대350)로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향사(香祀)를

받들게 하는 것으로 식종(飾終)의 예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스님의 공도

(公徒)를 비의 음면(陰面)에 열거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낙송(絡誦)과

부묵351)이 원래로 그 유서(由緖)가 있음을 알게 하려 하오니, 이 일은 오직

스님만이352) 오배353)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하면서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나는 이를 “좋다”하고354) 받아들였다.355)

新天子, 卽祚元年, 乙未夏, 四月初, 麟角長老, 遇356)余曰,

“先357)師入滅, 忽忽六七年矣. 國朝恩禮, 不渝, 命重臣撰碑, 勒

諸琬琰, 樹于本院, 仍勅門徒, 替358)代相承, 以奉香祀, 飾359)終

之禮, 畢360)矣. 列公徒于碑之陰, 使後世, 知絡誦361)副墨, 元有

由緖, 子能爲吾輩, 記之乎.” 余頷362)之曰, “善.”

342) 신천자즉조원년(新天子卽祚元年):신천자(新天子)는 원나라 제2대 황제

(1294~130 재위) 성종(成宗)을 지칭한다. 성종이 황제로 즉위한 것은 1294년이

나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의해 성종 즉위원년은 1295년이 된다.

343) 인각장로(麟角長老):일연의 문인으로 입비(立碑)의 일을 주관하였으나, 전기는

다른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344) 선사(先師):보각국사 일연을 지칭함.

345) 홀홀육칠년(忽忽六七年):보각국사가 입적한지 홀연히 이미 6·7년이 지났다는

말이니, 국사의 입적 연대가 1289년이므로 그로부터 6·7년이라면 1295년이나

1296년에 해당된다.

346) 불투(不渝):임금은 비록 바뀌었으나, 스님을 존경하는 은례(恩禮)는 조금도 변

함이 없다는 말.

347) 중신(重臣):중진(重鎭)의 신하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민지(閔漬)를 지칭함.

348) 완염(琬琰):①완규(琬圭)와 염규(琰圭)이니, 아름다운 옥(玉)의 이름 ②완과 염

은 걸왕(桀王)이 사랑했던 두 여자의 이름이었으나, 여기서는 돌로 된 비석(碑

石)을 가리킴이다.

349) 본원(本院):본사(本寺)란 뜻이니, 인각사를 지칭함.

350) 체대(替代):교대(交代)·대대(代代)·역대(歷代)·대체(代替) 등의 뜻. 곧 대대로

스님의 문도로써 주지로 임명하여 향사(香祀)를 받들도록 왕이 명하였다는 말

이다.

351) 낙송부묵(絡誦副墨):[全文]에는 낙제부묵(絡諸副墨)으로 되었는데, 낙제는 낙

송(絡誦)의 오자이다. 즉 낙송은 암송(暗誦)이고, 부묵은 문자(글)란 뜻이다. 『장

자』「대종사大宗師」에 “그대는 어디서 이 송(誦)을 얻었는가? 부묵(副墨)의 자에

게 즉 글에서 해득하고, 그 다음 낙송의 손(孫) 즉 말로 연구하고, 그 다음 첨명

(瞻明)에게 즉 눈으로 도의 근원을 바로 보고, 그 다음 섭허(聶許)에게 즉 이해하

고, 그 다음 수역(需役)에게 즉 실천으로 맛을 얻고, 그 다음 어구(於謳)에게 즉

시(詩)와 노래로 나타내고, 그 다음 현명(玄冥)에게 즉 심경(心境)이 적막(寂寞)

하여 자취없이 현묘(玄妙)하여 즉 측량(測量)할 수 없는 상태에 들고, 그 다음 참

요(參寥)에게 즉 심경에 텅 빈 경험(經驗)을 가지고, 다음 의시(疑始)에게 즉 시

작(始作)인가 의아(疑訝)하는 심경에 도달하니, 이것은 도(道)에 이르러 우주(宇

宙) 본체(本體)와 합(合)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境地)이다. 南伯葵曰 子獨惡乎聞

之 曰聞諸副墨之子. 副墨之子 聞諸洛誦之孫 洛誦之孫 聞之瞻明 瞻明 聞之聶許

聶許 聞之需役 需役 聞之於謳 於謳 聞之玄冥 玄冥 聞之參寥 參寥 聞之疑始” 라

하고, 그 「주註」에 “呂吉甫曰 洛誦 謂綿洛貫穿而誦之 又云 臨本謂之副墨 背文謂

之洛誦 反復讀之也”라 하였다. 낙(絡)은 낙(洛)이라고도 한다.

352) 자능(子能):자능이란 자(子)는 부자(夫子),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과 같이 상

대를 존칭(尊稱)하는 말이니, 선생(先生)이란 뜻이나, 여기서는 비문(碑文)을 청

(請)하는 인각장로(麟角長老)가 산립을 지칭하는 말.

353) 오배(吾輩):보각국사 일연의 문도들을 지칭함이다.

354) 함지(頷之):점두함지(點頭頷之)의 준말. 함수(頷首)와 같은 뜻. 머리를 끄덕여

허락하는 뜻을 보이는 것. 頷은 머리 끄덕거릴 함字.

355) 선(善):‘좋습니다’라면서 허락하는 것.

356) [復元本]에는 過이나, 뜻으로는 상통함.

357) 선사입멸(先師入滅)이란 선자(先字) 앞에 [朴永弴本](以下 [朴氏本]이라 한다)에

는 “新天子 卽祚元年 乙未夏 四月初 麟角長老 過余曰”이란 20字가 더 있다.

358) [朴氏本]에는 替. [全文]의 潛은 替의 오자임.

359) [朴氏本]에는 飾. [全文]의 餙는 飾의 오자임.

360) 矣와 陰字 사이에 [朴氏本]에는 있으나, [全文]에는 “列公徒于碑之”란 6字가

없다.

361) [朴氏本]에는 誦. [全文]의 詣는 誦의 오자임.

362) [全文]에는 頷이고, [朴氏本]에는 領이니, 뜻으로는 상통하나, [全文]의 頷이

옳다

국존께서 살아 계실 때, 산립(山立)은 인연(因緣)이 차탈363)하여 스님

의 문도열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항상 회한하였는데, 다행히 불후(不朽)

의 부촉364)을 받았으니, 또한 당래에 반부365)할 인연이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라,366) 어찌 감히 하명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삼가 계

367)하여 배수368)하고 이르되, 화상(和尙)의 문풍(門風)이 광대(廣大)하여

모든 것을 갖추어 어떠한 말과 생각으로도 사의(思議)할 수 없다. 그러므

로 일언이폐지369)하고 나라가 존경하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추앙한다라

고 함이 가할 것이다. 그러나 존경하고 추앙하는 그 인유를 살펴보면, 마

치 바구미가 해혜370)의 냄새를 인하지 않고는 모여드는 자가 없는 것과 같

다.371) 그 중요한 원인은 스님께서 상구보제인 실천 수행의 도덕이 고매하

여372) 생사거래(生死去來)가 마치 몽환(夢幻)과 같음을 증득한 후, 하화 중

생인 지·비·행·원373)으로 감득한 결과인 것이다.

國尊在世時, 山立, 以因緣差奪, 未獲詣門徒之列, 常以爲恨,

幸託不朽之囑, 庶亦結374)當來攀附之,375) 敢376)不承命, 謹稽首

拜手, 再拜而言曰, 和尙門風, 廣大悉備, 不可得而思議也. 則

止曰,377)一國378)尊之, 衆人師之, 可也, 然, 尊之焉, 師之焉, 未

必不由醢醯而蚋聚. 要其所自379)來, 但履踐篤實, 一去來覺380)

夢等, 彼已, 智悲行願, 喜有所381)感而致之耳.

363) 차탈(差奪):조건 또는 인연(因緣)이 어긋나서 희망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

였다는 말. 또는 기회를 잃었다는 뜻.

364) 불후지촉(不朽之囑):영원히 남아 있는 일의 부탁을 받았다는 말이니, 비문을

비석(碑石)에 새겨두면 영원(永遠)히 썩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365) 반부(攀附):반연하여 의부(依附)하려는 것. ①높은 나무나 험한 절벽에 오르는

사람이 손으로 붙잡고, 발로 디디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정신을 집중하여 올라가

는 것. ②힘이나 도덕이 높은 사람을 만나 의지하는 것. ③어떤 흠모(欽慕)하는

사람을 의지하여 뒤쫓아가는 것. ④정신적 의지처 곧 신앙(信仰)의 대상을 가리

킴이다. 『안씨가훈顔氏家訓』「모현慕賢」에 “安可不攀附景仰之乎”라 하다.

366) 서불(庶不):불자(不字)는 문맥(文脈)으로 보아 역자(亦字)인 듯하다. 서(庶)는

바란다. 희망하다 등의 뜻이다.

367) 계수(稽首):계상(稽顙)·돈수(頓首) 등과 같은 뜻이니, 이마를 땅에 대어 하

는 절. 중국에서 가장 정중한 절. 계수배(稽首拜)·계상배(稽顙拜)·돈수배(頓首

拜)라고도 한다. 「혜초국사탑비문慧超國師塔碑文」 주304)계상稽顙 [고려편2]

p.332 참조.

368) 배수(拜手):배수(拜首)와 같은 뜻. 머리를 손 있는 데까지 숙여서 하는 절.

369) 칙지왈(則止曰):사의(思議)할 수 없는 스님의 위대(偉大)한 문풍(門風)은 일언

이폐지(一言以廢之)하고라는 말.

370) 해혜(醢醯):젓갈이나 식혜에 파리나 개미떼가 모여든다는 말이니, 학덕이나 도

덕이 높으면 사방(四方)으로부터 학인(學人)이 모여든다는 비유이다.

371) 예취(蚋聚):젓갈이나 노린내 나는 고기가 있으면 개미나 바구미 등이 모여든다

는 말이니, 덕망(德望)이 높으면 부르지 아니하여도 많은 사람이 찾아드는 것에

비유하는 뜻이다.

372) 이천(履踐):①실천수행 ②솔선수범 ③언행일치(言行一致) 등의 뜻임.

373) 지비행원(智悲行願):대지(大智)·대비(大悲)·대행(大行)·대원(大願) 등 대심

(大心)보살의 대도(大道)이다. 대지는 대지문수(大智文殊), 대비는 대비관음(大

悲觀音), 대행은 대행보현(大行普賢), 대원은 대원지장보살(大願地藏菩薩)을 지

칭함이니, 이것이 불교의 상징이다.

374) [全文]에는 結이고, [朴氏本]에는 佶이니, 어느 字가 옳은지 확실히 判斷할 수

없으나, 結字가 나은 듯하다.

375) 之와 稽字 사이에 [朴氏本]에는 “不承命謹”이란 4字가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376) [復元本]에는 因이다.

377) [朴氏本]에는 曰. [全文]의 日은 曰의 오자인 듯함.

378) [朴氏本]에는 日과 國字 사이에 一字가 있으나, [全文]에는 탈락됨.

379) [復元本]에는 所自 2字가 삭제됨.

380) [復元本]에는 同字임.

381) [全文]에는 所이고 [朴氏本]에는 聯이니, [全文]의 所가 옳은 듯하다.

국존의 행장을 살펴보니 그가 임종할 때, 대중을 모아 놓고 유언을 남기

고 눈을 감았다.382) 기도 다 끊어지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후,383) 선원 정스

384)이 어찌할 바를 몰라 실성385)하여 울부짖으면서 황망 중에 입탑할 장

386)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387) 이미 입적하시었으니, 후회막급이라면서

대중과 함께 탄식하였다. 이때 스님께서 적정 삼매388)로부터 조용히 깨어

나, 대중을 돌아보고 이르되, “여기서 동남쪽으로 약 4·5리(2㎞) 쯤 지나서

임록(林麓)이 있는데, 지형의 기복(起伏)이 청룡과 백호 등이 제대로 짜이

고 안은한 곳이 있는데,389) 마치 고총(高塚)과 같다. 이곳은 길상지인 명당

이니,390) 탑을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라고 하고는,391) 다시 처음과 같이

눈을 감았다.392) 제자들이 곁에 가서 흔들어 보니 이미 서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생각되어393) 비문에는 생

략하였다.

今案行狀, 於其終也, 辭衆斂目, 氣絶已久, 今禪源頂公, 失聲

曰, 立塔之所,394) 未暇諮禀, 悔將何及, 衆辭皆同. 師從寂定中,

安詳而起,395) 顧謂衆曰, “此去東南, 行四五許里, 有林麓, 起伏

隱處,396) 若古塚, 是眞吉祥之地, 可安置也.” 復斂目如初. 撼之

已逝矣, 事涉怪397)異, 碑文略之.

382) 감목(歛目):눈을 감다. 눈을 감추다. 歛은 斂과 같은 字이다. 혜홍(惠洪)의 석대

야좌시(石臺夜坐時)에 “歛目舊遊眞可數 蓋棺前車尙難知”라 하다.

383) 기절이구(氣絶已久):기가 끊어진지 이미 오래되다. 죽은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384) 선원정공(禪源頂公):선원사(禪源寺)의 정(頂)스님으로 일연스님의 문도인 듯

하다,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385) 실성(失聲):①미친 듯이 놀라는 모양. ②다시 만날 수 없는 중요한 기회를 놓쳐

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도.

386) 입탑지소(立塔之所):탑(塔)과 비(碑)를 세울 장소.

387) 미가자품(未暇諮禀):황망 중에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는 말.

388) 적정중(寂定中):입적 상태(狀態)의 선정(禪定) 중이라는 말.

389) 기복은(起伏隱):높고 낮으며, 안은(安隱)한 것이 마치 옛 무덤의 터와 같다는 말.

390) 길상지지(吉祥之地):①좋은 터 ②명당(明堂).

391) 가안치야(可安置也):탑비를 안치(安置)하기에 가장 좋은 터라는 말이다.

392) 복감목여초(復歛目如初):다시 눈을 감으니, 처음 입적한 때와 같았다.

393) 사섭괴이(事涉怪異):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탑(塔) 세울 장소를 일러주었다는

사실(事實)이 너무 괴이한 것 같아서라는 말.

394) [全文]에는 所이고 [朴氏本]에는 聯이니, [全文]의 所가 옳은 듯하다.

395) [朴氏本]에는 起와 五字 사이에 “顧謂衆曰此去東南行四”라는 10字가 더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396) [復元本]에는 處字가 삭제됨.

397) [復元本]에는 恠이다.

옛날 광복 선이라는 스님398)이 있었는데, 입적하여 다비(茶毗)를 하기

위해 영구(靈柩)를 화장 섶나무인 시붕상399)에 놓고 거화(擧火)를 하려는

순간, 곽을 뚫고 다시 일어나 유나(維那)에게 당부하되, 남행자(藍行者)로

하여금 남겨 둔 쌀과 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당부

하였다. 이와 같은 신비와 이적을 어찌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다비를

마치고 장차 입탑(入塔)하려는 때, 운흥사 인공400)이 암자에 있을 적에 마

침 꿈에 일연스님이 찾아옴을 보고,401) 맞아들여 묻기를, “다비를 하려는

순간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무슨 도리입니까?” 스님이 대답하되, “죽지 아

니한 이치이니라.” 또 묻되402) “그렇다면403)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는 것입

니까?” 대답하되, “그러하느니라.” 또 묻되, “그러시다면404) 명일에 탑을 세

우는데, 스님께서 다시 들어가시렵니까?” “다시 들어갈 것이니라.” “그러시

다면 탑이 문득 스님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기록하지 않는다. 또 묻기를 “그렇다면 꿈과 생시가 같은 동열405)인 것입

니까?” 대답하되 “같은 것이라.” 하였다. 운흥사 인공이 꿈을 깨어나, 이상

하게 여겨 말하되, “다비한 다음 다시 탑을 세움(出沒)에 곧 탑 속으로 들

어간 것이 마치 청풍(淸風)이 소요하게 거래(去來)하고, 백운(白雲)이 자

재히 출몰하는 것과 같으니, 그 어찌 지인(至人)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하고, 곧 찬사를 지어 스님을 추경하였다.

昔有廣福禪者, 臨茶毗於柴棚406)上, 復起, 囑維那, 藍行者, 米

錢. 史傳稱,407) 又何疑也, 又茶毗, 將入塔, 今雲興印公, 住

庵時, 適夢師至迎勞問所曰, “茶毗而復起, 此理如何.” 師

云, “不死故.” 進云, “恁408)麽則, 火不能燒.” 師云, “如409)是如

是.” 又問, “明日立塔, 未審, 師還入也無.” 師云 “入.” 進云,

“與410)麽則, 塔却活和尙也.” 答411)語412)不413)414)記. 又問, □□□

□“覺415)夢同列”, 答416)云 “同.” 雲興印公,417) 覺而異418)之曰,

“茶毘還立419)塔, 卽420)入, 淸風去來, 白雲出沒, 其惟至人乎,421)

乃422)作423)424)讚以追敬之.

398) 광복선자(廣福禪者):광복스님이나, 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399) 시붕(柴棚):다비(茶毗)를 하기 위해 화장목(柴)을 쌓아놓은 화장대(火葬臺). 붕

은 시렁이니, 화장대 밑에 공기가 잘 통하도록 장대(長臺)를 걸쳐놓은 긴 나무.

오늘날에는 나무 대신 굵은 철근을 사용(使用)하고 있다.

400) 운흥인공(雲興印公):운흥사(雲興寺)의 인(印)스님이니, 전기는 다른 자료에서

도 보이지 않는다.

401) 적몽사지(適夢師至):때 마침 꿈에 스님께서 내방(來訪)함을 보았다는 말. 스님

은 일연스님을 지칭함.

402) 진운(進云):①높은 이에게 질문할 때, 본위치(本位置)에서 약간 앞으로 나아가

서라는 말. ②고(告)하여 이르되 ③나외여 이르되 등의 뜻임.

403) 임마칙(恁麽則):여마(與麽)·이마(伊摩)·즘마(怎麽)·임마(任麽)·이몰(異沒)

등과 같은 뜻. 이렇다면, 그렇다면, 그와 같이, 이와 같이, 이렇게, 저렇게, 지금

화제(話題)에 올라 있는 사물의 상태를 들어 근칭(近稱)하는 지시사(指示詞). 예

컨대 임마시(恁麽時)·임마물(恁麽物)·임마인(恁麽人) 따위. 『경덕전등록』권5

「남악회양南嶽懷讓」에 “慧能問 什麽處來 曰 崇山來 祖曰 什麽物 恁麽來 曰 說似

一物 卽不中”이니다라 하다.

404) 여마(與麽):임마(恁麽)와 같은 뜻.

405) 교몽동렬(覺夢同列):동렬은 같다는 뜻이니, 몽과 교(생시)가 둘이 아니고, 동렬

즉 같다는 말이다.

406) [朴氏本]에는 棚과 又字 사이에 “上復起 囑維那 藍行者 米錢 史傳稱又何疑也”라

는 18字가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407) [復元本]에는 稱之임.

408) [全文]에는 怎이고, [朴氏本]에는 恁이니, 怎麽나 恁麽(그렇다면)가 뜻은 같으나,

恁이 옳은 듯하다.

409) [朴氏本]에는 如와 入字 사이에 “是如是 又問明日 立塔 未審 師還無 師云”이라

는 16字가 더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410) [全文]에는 與이고, [朴氏本]에는 恁이니, 與麽나 恁麽가 뜻은 같으나, 恁이 옳은

듯하다.

411) [朴氏本]에는 答. [全文]의 塔은 答의 오자임.

412) [全文]은 결락이나 [朴氏本]에는 語임.

413) [全文]은 결락이나 [朴氏本]에는 不임.

414) [朴氏本]에는 不와 夢字 사이에 “記又問”이라는 三字가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415) [復元本]에는 □□□□覺 5字가 삭제됨.

416) [全文]에는 塔이고, [朴氏本]에는 答이니, [全文]의 塔은 答의 오자임.

417) [復元本]에는 印公 2字임.

418) [朴氏本]에는 異와 塔字 사이에 “之曰茶毗還立”이라는 6字가 있으나, [全文]에

는 없다.

419) [復元本]에는 起立 2字임.

420) [全文]에는 中이고, [朴氏本]에는 卽이니, [全文]의 中은 卽의 오자임.

421) [全文]은 결락이나 [朴氏本]에는 乎임.

422) [全文]은 결락이나 [朴氏本]에는 乃임.

423) [全文]은 결락이나 [朴氏本]에는 作임.

424) [朴氏本]에는 作과 是字 사이에 “讚以追斅之 又山立 伏覩機緣 頗異尋常 以爲凡

夫地上 必不能至是 他是何等位中人耶 常自懷疑曰 夢至古刹 常時 設寶蓮花座

師坐於其上 似若休息頃之 下座 徐步庭際 山立 與仁興麟公 隨之 仁興謂余曰 你

看我和尙 已證聖果故”라는 92字가 더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또 산립(山立)이 일연(一然)이 학인(學人)을 제접(提接)한 기연425)이 자

못 기이한 점을 보고, 범부의 위치에서는 도저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낼 수

없으니, 그는 55위 중 어느 위치에 이르렀는가 하고, 항상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한 고찰(古刹)에 이르니, 당시 그

절에 보련화좌(寶蓮花座)를 베풀고 스님께서 그 위에 앉아 있다가 잠시

후 하좌(下座)하여 늦은 걸음으로 주변을 지제426)하므로, 산립이 인흥사

(仁興寺)의 선린(禪麟)스님427)과 함께 뒤를 따랐다. 이때 인흥이 나에게 이

르기를, “스님은 우리스님의 행적을 보십시오. 이미 성과428)를 증득한 까닭

에, 맨발로 칼을 밟고 지나가도 발바닥이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

하였다.429) 산립(山立)이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여지고, 전에 가졌던 모든 의심이 마치 얼음 녹듯 풀렸다.

又山立, 伏覩機緣, 頗異尋常, 以爲凡夫地上, 必不能至是,430)

他是何等位中人耶, 常自懷疑. 一日, 夢至古刹, 當時,431) 設寶

蓮花座, 師坐於432)其上, 似若休息頃之, 下座, 徐步遲433)際, 山

立, 與仁興麟公, 隨之. 仁興, 謂434)余曰, “你看我和尙, 已證聖

果故, 跣435)足436)不穿.” 山立, 心敬437)之, 前疑氷438)釋.

425) 기연(機緣):기는 조령(祖令)을 제시(提示)하는 종사(宗師). 연은 스승을 반연하

여 찾아온 제자이니, 스승과 제자가 만나서 묻고 답하는 것. 본비문 주246)기연

어구機緣語句 p.581 참조.

426) 지제(遲際):뜰·정원(庭園)·주변. 거닌다. 산책한다.

427) 인흥인공(仁興麟公):인흥사(仁興寺)에 있었던 선린(禪麟)스님이니, 일연의 제

자이나, 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인흥사는 본비문 주113)인홍사

仁弘社 p.562 참조.

428) 성과(聖果):①도를 깨달았다. ②오십오위(五十五位) 중 십지(十地)의 제1법운

지(第一法雲地) 이상에 올랐다는 말. ③아라과(阿羅果)를 증득하였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①의 뜻임.

429) 선족(跣足):맨발. 『오대사五代史』「사절死節」‘왕언장전王彦章傳’에 “能跣足履

棘 行百步”라 하다.

430) [復元本]에는 是知 2字임.

431) [復元本]에는 陽임.

432) [復元本]에는 於字가 삭제됨.

433) [復元本]에는 庭字임.

434) [復元本]에는 謂字가 삭제됨.

435) [朴氏本]에는 跣. [全文]의 是는 跣의 오자임.

436) [朴氏本]에는 足. [全文]의 之는 足의 오자임.

437) [朴氏本]에는 敬. [全文]의 敎는 敬의 오자임.

438) [朴氏本]에는 冰. [全文]의 似는 冰의 오자임.

이상과 같은 몇 가지의 일화와 최후 입적할 때의 인연439)에 의거하건대,

비록 부자(夫子)의 원장(垣牆)이 높아 몇 길이나 되더라도,440) 그 집안의

상황을 거의 엿볼 수 있다는 말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한

번 왔다 가는 것이 마치 꿈꾸고 깨어남(夢覺)과 같다’고 하였다.

據此數段, 最後因緣, 雖曰, 夫子之牆,441) 數仞, 亦可442)窺其髣

髴矣. 所以云, ‘一去來同覺夢’.

439) 최후인연(最後因緣):마지막 입적할 대의 인연이니, 예컨대 눈을 감고 입적하였

다가, 다시 깨어나 탑비(塔碑) 세울 장소를 지정해 준 것과, 다비(茶毗)할 때 거

화(擧火)하기 직전 시붕상(柴棚上)에서 절로 가는 유나(維那)에게 쌀과 돈을 부

탁한 것과, 화장 후 영골(靈骨)을 입탑(入塔)할 때 청풍(淸風)이 불고 백운(白雲)

이 나는 등과 같은 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440) 부자지장수인(夫子之牆數仞):부자(공자)의 담장이 높아 몇 길이나 된다는 말.

곧 일연선사의 도덕은 높고 또한 넓어 범부(凡夫)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는 뜻.

『논어』「자장子張」에 “叔孫武叔 語大夫於朝曰 子貢 賢於仲尼 子服景伯 以告子

貢 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竅見室家之好 夫子之牆 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 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라 하다.

441) [復元本]에는 墻字임..

442) [朴氏本]에는 司와 神字 사이에 “窺基 髣髴矣 所以 云一去來 覺夢 智悲行願 喜

有所感 而致之耳”라는 25字가 더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또한 신장이 부병443)이라 자칭하고 스님을 맞이하여 호위(護衛)하고, 산

령(山靈)이 신도에게 현몽하여 스님에게 식량을 보내도록 한 것과, 화장

할 때 시붕상(柴棚上)에 앉아 있으니, 화염(火焰)이 반대쪽으로 불었고, 임

종(臨終)할 때 오색 광명의 줄기가 금당444)과 같이 솟았다가 스러진 등등

이러한 영종(靈蹤)과 이서(異瑞)는 모두 성인의 분상(分上)에는 쓸데없는

말변사(末邊事)에 속하는 것이므로,445) 이들은 모두 구인(具引)하지 아니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위의 수단인연(數段因緣)은 모두 세상 사람을 현혹

시키는 일이라고 부정하였다. 어떤 때는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혼요

한 꿈속의 일이라 하고, 혹은 불자(拂子)를 흔들고, 방(棒)과 할(喝)을 하

면서는 ‘그렇지 않다. 혼요한 일상이다.’라 하였다. 스님은 보통 50일간 꿈

에 있다가 한 번씩 깨어난다고 하여446) 교시(覺時)로써 허(虛)를 삼고, 몽

시(夢時)를 실(實)이라 하였은 즉 스님의 입장에서는 이 교시와 몽시가 뒤

바뀐 허와 실도 또한 가히 정한 바가 없다.

神人, 稱符兵而迎衛,447) 山靈, 告檀越而輸粮, 端坐而火燄, 逆

吹, 臨去而金幢, 倒地, 如斯靈蹤異瑞, 皆聖448)末邊事, 此不具

引. 或曰, 如上數事, 是皆昏擾夢,449) 想感450)或拂棒喝之曰, 不

然, 或451)昏擾平界,452) 常夢五十日, 一覺, 以覺時爲虛, 夢時爲

實則, 此覺夢虛實, 亦未可定.

443) 부병(府兵):조정(朝廷)에 부속된 병력.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 유사시에는

종군(從軍)하고, 무사한 때에는 여러 주(州)에 분산하여 경작하며, 그 중에서 선

발하여 수도(首都)의 위병(衛兵)으로 번을 들게 하던 군사.

444) 금당(金幢):쇠로 만들어 세운 당간(幢竿)이니, 본비문 주228)당幢 p.578 참조.

445) 개성말변사(皆聖末邊事):이상(以上)에 열거한 영종(靈蹤)과 이서(異瑞)들은 성

인(聖人)의 분상에 있어서는 모두 쓸데없는 말변사(末邊事라)는 뜻. 다시 말하면

신통이나 기적들은 보편적인 진리(眞理)가 못된다는 말이다. 진묵조사(震默祖

師)가 나한들의 논간을 당하여 힐책하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天台山上五百

鬼 乞飯取食幾百年 神通變化吾不及 大道應問老比丘”하라 하였다.

446) 상몽오십일일교(常夢五十日一覺):한 번 꿈을 꾸면 50일이 지나서야 깨어난다

는 말.

447) [朴氏本]에는 衛. [全文]의 德은 衛의 오자임.

448) [朴氏本]에는 聖. [全文]의 空은 聖의 오자임.

449) “是皆昏拂界”라고 하였던 것을 [復元本]에 의해 “是皆昏擾夢”으로 교체함.

450) [復元本]에 想感 2字가 있으나 뜻으로는 모호함.

451) [復元本]에 의해 或以下 12字를 추가하였음.

452) [朴氏本]에는 과 界字 사이에 “或拂棒喝之曰 不然 或 拂□□□□□”이라는

16字가 더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또 우리 국존께서는 삼세(三世)가 환몽(幻夢)과 같은 경지를 증득(證

得)하여 출생과 입사(出生入死)에 항상 몽환불사(夢幻佛事)를 시행하였으

니,453) 이 또한 스님께서 자비로 몽환중생(夢幻衆生)을 교화한 것이니, 어

찌 감히 그에 대하여 회의하고 그 사이에서 의심하겠는가. 이러한 스님의

분상에 있어, 국존의 도덕의 고매함을 애모(愛慕)하여 흑백454)인 많은 승

속들이 귀부455)하는 것이니, 하지 못하도록 아무리 구책456)하더라도 능히

막을 수가 없다. 항상 스님을 따르고 친부(親附)하여 피부(皮膚)를 얻거나,

골수(骨髓)를 얻었으며,457) 종지(宗旨)의 천양(闡揚)을 도운 모든 스님과458)

외호의 일을 맡은 재가 제자,459) 그리고 스님의 법유460)를 받은 경사461)

대부 등을 모두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又我國尊, 親證三世如幻夢, 出生入死, 常行夢幻佛事, 此亦,

師之慈化462)夢幻衆生也, 有能至是, 何等懷疑,463) 何致疑於其

間乎.462)463) 斯皆黑白, 所以, 愛慕歸附, 如有驅策, 而不能以己者

也.464) 其常隨親附, 得皮465)得髓, 副法諸德, 執事弟子, 幷受法

乳, 卿士大夫, 具列如後.466)

453) 상행몽환불사(常行夢幻佛事):모든 법이 환몽과 같은 이치를 깨달은 이는 성시

(醒時)나 몽시(夢時)를 가리지 않고, 항상 몽환불사를 행한다는 말. 허응당(虛應

堂) 나암(懶菴)이 지은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

如幻賓主夢中問答」이 있다. 한불전7, p.595c 참조.

454) 흑백(黑白):흑은 먹물 옷(緇衣)을 뜻함이니, 스님을 지칭함이고, 백은 백의(白

衣)를 입은 사람을 말함이니, 신도(信徒)를 가리킴이다.

455) 귀부(歸附):귀의(歸依)와 같은 말. 의지하고 따른다는 뜻.

456) 구책(驅策):①사람을 사역(使役)하는 채찍 ②채찍질을 당하여 몰림 ③마치 우

마와 같이 구사(驅使)당하는 것.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억제하는 것.

457) 득피득수(得皮得髓):진리를 깨달은 깊이의 척도(尺度)를 말함이니, 본비문 주

46)득기수得其髓 p.552 참조.

458) 부법제덕(副法諸德):①아직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지는 못하였으나, 스님

의 회상운영(會上運營)을 도우면서 수학(受學)하는 자. ②소임자(所任者).

459) 집사제자(執事弟子):스님의 재가제자(在家弟子)로서 절 일을 맡아보며 외호(外

護)하는 우바새와 우바이. 정인(淨人)과 같은 신도인데 청신사(淸信士)와 청신

녀(淸信女).

460) 법유(法乳):법의 젖. 정법(正法)의 자양으로써 제자의 법신(法身)을 장양(長養)

함이 마치 어머니의 젖으로 유아(幼兒)를 양육(養育)함에 비유한 것. 『열반경』

에 “飮我法乳 長養法身”이라 하다.

461) 경사대부(卿士大夫):경대부사(卿大夫士)라고도 하니, 경과 대부와 사 등의 관직.

462) [朴氏本]에는 化와 何字 사이에 16字의 결락 표시가 나타나 있으나, [全文]에는

없다.

463) [復元本]을 참고하여 下段 其常 이전의 8字를 옮겨왔음.

464) [復元本]을 참고하여 也字以下 ‘或拂棒喝之曰不然或昏擾平’ 12字를 앞의 擾夢

以下로 옮겼음.

465) [朴氏本]에는 皮. [全文]의 故는 皮의 오자임.

466) [朴氏本]에는 如와 大字 사이에 後字가 있으나, [全文]에는 탈락됨

대선사

영각사의 굉훈,

보경사의 신가,

가지사467)의 혜림,

마곡사의 수예,

법흥사468)의 한운,

인흥사469)의 선린,

가지사의 월장,

운흥사470)의 동우,

주륵사471)의 영이,

용암사472)의 연여,

화장사473)의 육장,

무위사474)의 수정,

보제사475)의 법류,

해룡사476)의 경분,

천룡사477)의 곡지,

인각사의 청분(立碑를 주선 감독한 스님),

성주사478)의 혜여.

大禪師

靈覺寺 宏訓,

寶鏡寺 神可,

迦智寺 慧林,

麻谷社 守倪,

法興寺 旱479)雲,

仁興社 禪麟,

迦智寺 月藏,

雲興社 洞愚,

朱勒寺 永怡,

龍巖寺 淵如,

花藏社 六藏,

無爲寺 守精,

普濟寺 法流,

海龍寺 勁芬,

天龍社 谷之,

麟角寺 淸玢,

聖住寺 惠如.

467) 가지사(迦智寺):전라북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에 위치한 보림사의 옛 이름.

468) 법흥사(法興寺):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신세동(新世洞)에 있던 절.

469) 인흥사(仁興社):경상북도 성주군 비슬산(琵瑟山)에 있던 인홍사(仁弘寺)의 전

신(前身).

470) 운흥사(雲興社):운흥사가 여러 곳에 있어 어느 운흥사인지는 알 수 없다.

471) 주륵사(朱勒寺):경상북도 선산군 냉산(冷山;善山邑에서 동쪽으로 약 6㎞ 지점)

서쪽에 있었던 절이니, 고려 때 안진(安震 ?~1360. 호는 常軒)이 지은 혜각대사

(慧覺大師)의 비가 있다.

472) 용암사(龍巖寺):용암사가 여러 곳에 있어서 어느 용암사인지 알 수 없다.

473) 화장사(花藏社):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화장리(花藏里)에 있었던 절.

474) 무위사(無爲寺):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月下里) 월출산(月出山)에 있

는 절.

475) 보제사(普濟寺):경기도 개성시 한천동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사찰.

476) 해룡사(海龍寺):경기도 포천군 해룡면(海龍面) 해룡감지(海龍鑑池) 곁에 있었

던 절인 듯하다.

477) 천룡사(天龍社):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 북쪽 약 3㎞ 지점에 있던 절.

478) 성주사(聖住寺):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에 있었던 절.

479) [朴氏本]에는 旱이니, [全文]의 早는 旱의 오자임.

선사

견암사480)의 각령,

도원사481)의 자일,

조암사482)의 지순,

등억사483)의 대인,

묘덕사484)의 선연,

재악사485)의 선염,

월성사486)의 입기,

향산사487)의 천이,

용화사488)의 여환,

오어사489)의 계잠,

도봉사490)의 수침,

중령사491)의 충오,

사자원의 지우

심산사의 충연,

경암사492)의 수연,

형암사493)의 자인,

청원사494)의 인응,

형원사의 신구,

보문사495)의 회희,

거조사496)의 천고,

인각사의 정생,

지론사497)의 현안,

운주사의 청원,

불일사498)의 영숙.

禪師

見巖社 覺靈,

桃源社 慈一,

祖嵓社 之純,

登億寺 大因,

妙德寺 禪演

載岳社 禪燄,

月星寺 立其,

香山寺 天怡,

龍華寺 呂桓,499)

吾魚社 戒岑,

道峯寺 守琛,

中嶺寺 冲悟,

師子院 志于,

深山寺 冲淵,

瓊嵓寺 守淵,

兄巖寺 慈忍,

淸源寺 仁應,

瑩原寺 信丘,

普門社 灰喜,

居祖社 天杲,

麟角寺 定生,

智論寺 玄安,

雲住寺 淸遠,

佛日社 英淑.

480) 견암사(見巖社):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구룡산(九龍山) 현암사(懸巖

寺)로 추측, 확실히 알 수 없다.

481) 도원사(桃源社):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82) 조암사(祖嵓社):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83) 등억사(登億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84) 묘덕사(妙德寺):평양시에 있었던 절. 『고려사』권53 참조.

485) 재악사(載岳社):알 수 없다. 혹시 밀양군 단장면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

寺)가 아닌가 한다.

486) 월성사(月星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87) 향산사(香山寺):평안남도 자주현(慈州縣:慈山郡)에 있었던 절이다. 『고려사』권

100「박제검전朴齊儉傳」에 조위총(趙位寵)이 패(敗)하고, 그의 잔당(殘黨)이 여

러 주(州)의 산곡(山谷)에 산거(散居)하여 시종(始終) 겁략(劫掠)을 자행하매 크

게 민환(民患)이 되어 자(慈)·숙(肅) 이주(二州)를 불태우고, 묘덕(妙德)과 향산

(香山) 등 제사(諸寺)를 파괴하므로 왕이 병사(兵士)를 보내어 토벌하였으나 불

리(不利)하였다.

488) 용화사(龍華寺):용화가 여러 곳에 있으므로 어느 곳의 용화사인지 알 수 없다.

489) 오어사(吾魚社):경상북도 영일군 오천면 항사리(恒沙里) 운제산(雲梯山)에 있

는 절. 오어사라고 이름하게 된 까닭은 신라 때 원효(元曉;『삼국유사』에는 惠宿

이라 하다)와 혜공(惠空) 두 스님이 함께 이 절 앞에 있는 호수(湖水) 중에 놀고

있는 고기(魚蝦)를 잡아먹고 함께 수중(水中)에 뒤를 보았는데, 신비하게도 그

배설물 중 일부는 산 고기가 되어 물속에서 활발(活潑)히 놀았다. 이를 본 두 스

님은 물속에 살아 있는 고기를 가리키면서 서로 주장하기를 “여시오어(汝屎吾

魚)” 곧 너가 눈 것은 똥이고, 내가 눈 것은 고기라고 주장한 데에서 기인(起因)

되었다. 『삼국유사』권4「이혜동진二惠同塵」(대정장49, p.1004b);『신증동국여지

승람』권23 「영일현迎日縣」‘불우’;『한국사찰전서』하권 p.851a 등 참조.

490) 도봉사(道峯寺):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죽정리(竹亭里)에 있었던 절

인데, 지금도 그 유지에는 석탑(石塔) 2좌가 있다.

491) 중령사(中嶺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92) 경암사(瓊嵓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93) 형암사(兄巖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94) 청원사(淸源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95) 보문사(普門社):보문사가 여러 곳에 있으므로 어느 보문사인지 알 수 없다.

496) 거조사(居祖社):거조암(居祖庵)과 같은 절이니,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신원

동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로써, 738년(효성왕 2)에 원종(元旵)이 창건. 영산전

(靈山殿)은 국보 14호인데,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봉안하고 있다. 갖춘 국보

명칭은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이다.

497) 지론사(智論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498) 불일사(佛日社):경상북도 밀양군 비슬산에 있던 용천사(湧泉寺)인데, 고려 원종

(1259~1274) 때 보각국존 일연이 왕명을 받아 중수하고 불일사로 개칭하였다.

499) [全文]에는 坦이고, [朴氏本]에는 桓이니, 어느 字가 옳은지 알 수 없다.

수좌

홍화사500)의 선인,

법연사501)의 인서.

首座

弘化寺 宣印,

法緣寺 印西.

500) 홍화사(弘化寺):경기도 장단군 소남면 홍화사이니, 고려의 승왕(僧王)이 창건.

일설에는 968년(광종 19)에 광종이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501) 법연사(法緣寺):어디에 있었던 절인지 알 수 없다

산림502)

원응, 심분, 선랑, 천박,

시수, 지회, 행이, 가월,

선련, 대미, 문일, 송지,

조남, 인조, 열여, 계숭,

운기, 지인, 자신, 선식,

형기, 심찬, 육환, 신한,

몽현, 원희, 환운, 선홍,

조한, 굉지, 홍령, 유이,

가항, 죽허, 태의, 신일,

천굉, 일비, 영인, 마가.

山林

元應, 心賁, 禪朗,503) 天朴,

時守, 知恢, 行伊, 可月,

禪璉, 大迷,504) 聞一, 松智,

祖南, 仁照, 悅如, 戒崇,

雲505)其, 志因, 孜信, 旋息,

瑩其, 心贊, 肉幻, 神閑,

夢玄, 元希, 幻雲, 宣弘,

祖閑, 宏智, 弘令, 由已,

可恒, 竹虛, 兌宜, 神日,

天宏, 日卑, 英印, 摩506)訶.

502) 산림(山林):불교의 4대 명절 또는 화엄산림(華嚴山林)·법화산림(法華山林) 등

과 같은 대규모의 법요행사를 지칭함. 이와 같이 중요한 행사를 거행할 때, 편성

된 소임명단(所任名單). 전하여 사찰의 운영(山林)을 맡은 종무직원(宗務職員)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503) [朴氏本]에는 朗이니, [全文]의 郞은 朗의 오자임.

504) [全文]에는 逸이고, [朴氏本]에는 迷이니, [朴氏本]의 迷가 옳은 듯하다.

505) [全文]에는 雲이고, [朴氏本]에는 雪이다.

506) [全文]에는 摩이고, [朴氏本]에는 麽이니, 梵語의 音寫이므로 兩字 모두 무방하다.

삼중507)

심문, 지자, 유장, 신영,

서거, 경이, 효총, 가천,

대휴, 성현, 담지, 자송,

태인, 자려, 인정, 찬영,

양지, 몽유, 월주, 대진,

종자, 조선.

三重

心聞, 智慈, 由壯, 神英,

西去, 景伊, 曉聰, 可千,

大休, 性賢, 湛之, 自松,

太印, 自侶, 仁正, 贊508)英,

良之, 夢由, 月珠, 大眞,

宗資, 祖宣.

507) 삼중(三重):삼중대사(三重大師)의 준말.

508) [全文]에는 贊이고, [朴氏本]에는 替이니, [朴氏本]의 替가 오자인 듯하다.

대선

현지, 덕수, 신령, 도한,

홍눌, 조운, 중계, 탄홍,

녹지, 성이, 지환, 조송,

일환.

大選

玄智, 德守, 信令, 道閑,

弘訥, 祖云, 中契, 坦弘,

鹿之, 性邇, 智桓, 祖松,

日桓.

입선509)

홍민, 가관, 가열, 가안,

굉우, 법상, 지영, 조순,

영월, 신재, 영세, 각생,

지현, 승원.

入選

弘敏, 可觀, 可悅, 可安,

宏右, 法常, 知永, 祖詢,

令月, 信在, 令世, 覺生,

智玄, 昇遠.

509) 입선(入選):고려 때, 승과(僧科)의 등급 중 초급 승과이니, 최초로 응시하는 고

시과목(考試科目)이다.

참학

일회, 죽지, 지온, 가홍,

성회, 인소, 익현, 백여,

신찬, 각현, 수눌, 영규,

인환, 한세, 효대, 회정,

선평, 명계, 도연, 영인,

신여, 현조, 인원, 학산,

지안, 원선, 법기, 중세,

혜견, 진안.

參學

日廻, 竹之, 志溫, 可弘,

性廻, 印昭, 益玄, 白如,

神贊, 覺510)玄, 守訥, 令䂓,

仁渙, 閑世, 孝大, 廻正,

善平, 明戒, 道淵, 令印,

信如, 玄照, 仁元, 學山,

志安, 遠宣, 法奇, 中世,

惠見, 眞眼.

510) [朴氏本]에는 覺이니, [底本]의 夢은 覺의 오자임.

일품

문하시랑 판한림원사 이장용,511)

첨의중찬 상장군 홍자번,512)

첨의중찬 판전리사 원부,513)

첨의중찬 상장군 송송례.514)

一品.

門下侍郞 判翰林院事 李藏用,

僉議中贊 上將軍 洪子藩,

僉議中贊 判典理司 元傅,

僉議中贊 上將軍 宋松禮.

511) 이장용(李藏用):1201~1272. 고려 문신. 초명은 인기(仁祺). 자는 현보(顯甫). 본

관은 인천(仁川). 시호는 문진(文眞). 경전(經典)도 깊이 연구하여 불심(佛心)이

돈독하였다. 저서(著書)는 『선가종고도禪家宗泒圖』를 지었고, 『화엄추동기華嚴

錐洞記』도 윤색하였다. 「진각국사원소탑비문眞覺國師圓炤塔碑文」 주189)이장

용李壯用 [고려편4] pp.159;『고려사』권102「열전」15 참조.

512) 홍자번(洪子藩):1237~1306. 고려 문신(文臣). 자는 운지(雲之). 본관은 남양(南

陽). 시호는 충정(忠正). 충청(忠淸)·경상(慶尙)·전라도(全羅道)의 안찰사(按

察使), 호부시랑(戶部侍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 좌복야(左

僕射), 참지광정원사(參知光政院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려사』권105

「열전」권18 참조.

513) 원부(元傅):?~1287. 고려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시호는 문순(文純). 충렬왕

초에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가 되었다.

514) 송송례(宋松禮):?~1289. 고려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시호는 정렬(貞烈). 『고

려사』.

이품

첨의찬성사 수문전515) 대학사516) 임익,

첨의찬성사 수문전 대학사 상장군 정가신,517)

문하시랑평장사 보문각 대학사 김구,518)

첨의찬성사 집현전 대학사 박항,519)

대광 첨의찬성사 상장군 염승익,520)

첨의시랑 찬성사 김련,521)

참지정사 상장군 이응소,

참지정사522) 상장군 박송비,523)

지첨의사524) 대학사 상장군 김주정,525)

지첨의사 보문서 대학사 장일,

지첨의사 보문서 대학사 주열,

지밀직사 좌상시 상장군 최유엄,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박지량,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나유,526)

부지밀직사 감찰대부 민훤,527)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김군,528)

부지밀직사 상장군 이덕손.529)

二品

僉議贊成事 修文殿 大學士 任翊,

僉議贊成事 修文殿 大學士 上將軍 鄭可臣,

門下侍郞平章事 寶文閣 大學士 金坵,

僉議贊成事 集賢殿 大學士 朴恒,

大匡 僉議贊成事 上將軍 廉承益,

僉議侍郞贊成事 金璉,

參知政事 上將軍 李應韶,

參知政事 上將軍 朴松庇,

知僉議事 大學士 上將軍 金周鼎,

知僉議事 寶文署 大學士 張鎰,

知僉議事 寶文署 大學士 朱悅,

知密直事 左常侍 上將軍 崔有渰,

副知密直司事 上將軍 朴之亮,

副知密直司事 上將軍 羅裕,

副知密直事 監察大夫 閔萱,

副知密直司事 上將軍 金頵,

副知密直事 上將軍 李德孫.

515) 수문전(修文殿):문덕전(文德殿)을 고친 이름. 고려 학자들이 왕에게 강의하던

곳. 국초에 설치. 1136년에 수문전으로 개칭. 1308년에는 우문관(右文館)으로 고

치고, 1356년에 다시 수문전으로 고쳤다. 『고려사』「백관지百官志」.

516) 대학사(大學士):대학박사(大學博士)의 준말. 고려 성종 때 국자감(國子監)을 설

치하고 두었던 관직.

517) 정가신(鄭可臣):?~1289. 초명은 흥(興). 자는 헌지(獻之). 본관은 나주(羅州). 시

호는 문정(文靖). 『고려사』권105「열전」권18 참조.

518) 김구(金坵):1211~1278. 고려 학자.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

포(止浦). 본관은 부령(富寧). 1274년에 참문학사(參文學士) 판판도사사(判版圖

司事)가 되었다. 저서는 『지포집止浦集』『북정록北征錄』이 있다. 『고려사』권106

「열전列傳」권19 참조.

519) 박항(朴恒):1227~1281. 고려 문신.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시조. 초명은 동보(東

甫). 자는 혁지(革之). 시호는 문의(文懿). 『고려사』.

520) 염승익(廉承益):본비문 주166)염승익廉承益 p.569;『고려사』권124「염승익전廉

承益傳」 등 참조.

521) 김련(金璉):1255년(고종 42) 12월에 신희(辛喜)와 함께 시어사(侍御史)가 되었

다. 『고려사』권24.

522) 참지정사(參知政事):고려 때 중서문하(中書門下)의 종2품 벼슬. 뒤에 첨의평리

(僉議評理)로 개칭하였다.

523) 박송비(朴松庇):?~1278. 고려 때 장군. 덕원(경북 寧海)의 향리(鄕吏)에서 출발

하여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고려사』권24.

524) 첨의사(僉議事):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의 준말. 고려 때 첨의부(僉議府)에 좌

우첨의찬중찬(左右僉議贊中贊)·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첨의찬성사

(僉議贊成事)·첨의참리(僉議參理)·참문학사(參文學士)·지첨의부사(知僉議府

事) 등이 있었다.

525) 김주정(金周鼎):1216년 김군수(金君綏)·이종규(李宗揆)·송안국(宋安國) 등 11

명과 함께 찰방사(察訪使)로써 민생(民生)과 이도(吏道)를 살피기 위하여 각도

(各道)에 분견(分遣)하였으나,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소임을 정밀히 수행하지

못하여 좌천, 그 후 시어사(侍御史)·분대록사(分臺錄)事·형부낭중(刑部郎中)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사』권104「열전」권17 참조.

526) 나유(羅裕):본비문 주170)나유羅裕 p.569;『고려사』권104「나유(익희)전羅裕(益

禧)傳」 참조.

527) 민훤(閔萱):?~1310. 시호는 양경(良敬).

528) 김군(金頵):본비문 주149)장작윤김군將作尹金頵 p.567 참조.

529) 이덕손(李德孫):?~1301. 고려의 폐신(嬖臣). 본관은 합천(陜川). 시호는 장숙

(莊淑).

삼품530)

판비서 보문서531) 학사 공문백,532)

상장군 오예,533)

상장군 정수기,534)

상장군 이영주,535)

보문각 학사 김지,536)537)

국자좨주538) 지제고 최령,539)

위위윤540) 최자혁,541)

비서윤 지제고 오한경,

사재윤 유거.

三品

判秘書寶文署學士 貢文伯,

上將軍 吳睿,

上將軍 鄭守棋,

上將軍 李英柱,

寶文覺學士 金砥,

國子祭酒 知制誥 崔寧,

衛尉尹 崔資奕,

秘書尹 知制誥 吳漢卿,

司宰尹 柳琚.

530) 삼품(三品):삼품에는 정(正)3품과 종(從)3품이 있는데, 정3에는 정3품상(上)과

하(下)가 있고, 종3품에도 종3품상과 하가 있다. ①정3품은 고려 때의 품계의 하

나. 문산계(文散階)로 문종 때에 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1275년의 중봉

(中奉), 1298년의 정의대부(正議大夫), 1308년의 (상)정순대부(正順大夫)·(하)봉

순대부(奉順大夫), 1356년의 (상)정의대부(正議大夫)·(하)통의대부(通議大夫),

1362년에 (상)정순대부(正順大夫)·(하)봉순대부(奉順大夫) 등이고, 무산계(武散

階)로는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등이다. 『고려사』. ②종3품은 고려 때의 문무관

(文武官). 문종 때 제정한 문산계의 광록대부(光祿大夫), 1298년에 고친 통의대

부(通議大夫), 1308년에 고친 (상)중정대부(中正大夫)·(하)중현대부(中顯大夫),

1356년에 (상)대중대부(大中大夫)·(하)중대부(中大夫), 1362년에 (상)중정대부

(中正大夫)·(하)중현대부(中顯大夫), 1369년에 (상)대중대부(大中大夫)·(하)중정

대부(中正大夫) 등이고, 무산계로는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등이다. 『고려사』.

531) 보문서(寶文署):보문각(寶文閣)이라고도 함. 고려 때 경연(經筵)과 장서(藏書)

를 맡은 관청.

532) 공문백(貢文伯):다른 자료에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533) 오예(吳睿):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534) 정수기(鄭守棋):1316년(충숙왕 3)에 향인(鄕人)이었고, 1329년(충숙왕 16) 중군

만호(中軍萬戶)가 되었고, 그 후 방수만호(防守萬戶)가 되었다. 『고려사』권29,

30, 57, 82, 104 등 참조.

535) 이영주(李英柱):고려 폐신. 응공(應公)의 아들. 1300년 정조사(正朝使)로 원나

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536) 김지(金砥):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537) [全文]에는 賜字가 있으나, [朴氏本]에는 없으니, 이는 賜字가 있는 [全文]이 옳다.

538) 국자좨주(國子祭酒):고려 때의 교육기관. 태조 때에는 경학(京學)이라 하다가,

성종(981~997) 때 국자감(國子監)으로 개편하고, 많은 부서(部署)를 두었다. 문

종(1046~1083) 때 이르러 국자감에 제거(提擧)·동제거(同提擧) 각 1명, 판사(判

事) 1명, 좨주(祭酒)-종3품 등 많은 직원을 두었었다.

539) 최령(崔寧):1259년(고종 46) 4월 왕이 불예(不豫)하므로 중외(中外)의 이죄(二

罪) 이하의 죄수(罪囚)를 사면하고, 또 최령(崔寧)과 허홍(許洪)을 보내어 바다

를 따라 생어(生魚)를 놓아 주었다. 『고려사』권24「세가世家」권24 참조.

540) 위위윤(衛尉尹):고려 때 의장(儀仗)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 태조 때에는

내군(內軍)이라 칭하다가, 960년 장위부(掌衛府)라 하고, 다시 사위시(司衛寺)라

하였다가 995년에 위위시(衛尉寺)로 개칭하였다. 문종(1046~1083) 때 관원(官

員)을 확정하여 판사-정3품·경(卿)-종3품·소경(少卿)-종4품 각1명, 승(丞)-종

6품에 2명, 주부(注簿)-종7품에 2명,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에 6명, 기관(記

官) 등을 두었으며, 1298년 판사(判事)를 폐지, 윤(尹)을 두어 으뜸 벼슬로 하다

가 1308년 이부(吏部)에 병합시켰다. 1331년에 독립하여 관원을 정비, 판사·영

(令)-종3품·소윤(少尹)-종4품·승·주부-종7품 등을 두었으나, 그 후 영과 소

윤은 경과 소경으로 대치. 여러차례 반복하다가 1389년 위위시(衛尉寺)를 중방

(重房)에 통합시켰다. 『고려사』.

541) 최자혁(崔資奕):다른 자료에서도 전기가 보이지 않는다.

사품542)

금오위장군 박,

전리총랑 김원구,

근시중랑장 김용검,

낭장 최유,

좌랑 이세기,

지후 윤혁,

박사 김원상,

한림 김,

조봉랑 김태.

四品

金吾衛將軍 朴,

典理摠郞 金元具,

近侍中郞將 金龍劒,

郎將 崔有,

佐郞 李世祺,

祗候 尹奕,

搏士 金元祥,

翰林 金,

朝奉郞 金台.

542) 사품(四品):고려 때의 품계의 하나. 이 사품에는 정4품상(上)과 하(下), 종4품상

과 하가 있다. 문종(1046~1083) 때에 둔 문산계의 (상)정의대부(正義大夫)·(하)

통의대부(通議大夫), 1298년의 대중대부(大中大夫), 1308년의 봉상대부(奉常大

夫), 1356년의 중산대부(中散大夫), 1362년의 봉상대부, 1369년의 (상)중산대

부·(하)중의대부(中議大夫)와 무산계(武散階)의 (상)중무장군(中武將軍)·(하)

장무장군(將武將軍) 등이다.『고려사』.

원정 원년543) 을미 8월 일에 쓰다.

元貞元年, 乙未八月日, 書字.

543) 원정원년(元貞元年):1295년이니, 본비문 주328)원정원년元貞元年 참조.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6척(六尺), 폭(幅)은 3척5촌(三尺五寸), 글자의 간격은 6분(六分)

이며, 행서(行書)이다. 진(晉) 왕희지의 글씨를 집각(集刻)하였다.]

[揭載]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467~473.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中世 下, pp.1067~1077.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下, pp.358~364.

『역대고승비문歷代高僧碑文』 高麗篇 4, pp.204~217.(李智冠 校勘 修正補完本)

정병삼 外,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 ‘인각사보각국사비재현’사업 복원본』